백년전쟁 1337~1453 -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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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백년전쟁'이란 표현은 19세기 후반이 돼서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 표현은 100년 넘게 이어진 일련의 전쟁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1337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당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던 에드워드 3세한테서 잉글랜드가 보유하고 있던 기옌 공국을 '몰수'하면서 시작된 이 일련의 전쟁들은 1453년 잉글랜드가 결국 보르도를 상실하면서 끝났다. 대부분의 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장궁의 화력 덕분에 엄청난 군사적 우위를 누렸다(그러나 한때 무적이었던 잉글랜드 궁수들이 프랑스 대포에 의해 궤멸된 전쟁 말기의 패전들도 있다)." "물론 우수한 무기로 그토록 자주 승리를 따낸 뛰어난 잉글랜드 궁수는 칭송해야 하고, 만약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면 그들도 똑같이 나쁘게 행동했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침공했으며 그때의 기억, 즉 프랑스의 국가적 신화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기억은 이후로 두 나라 사람들의 관계를 줄곧 해쳐왔다."(11-3)


1장 전쟁의 서막 1328~1340년


"10세기 이래 새로운 농업이 발전하면서 북서유럽 농민들은 점점 더 많은 임야를 쟁기로 갈아 비옥한 토양을 개척할 수 있었다. 14세기 초까지 경작지는 매년 확대되었고, 출생률도 함께 상승했다. 프랑스만큼 이런 발전이 뚜렷하게 이루어진 곳도 없어서, 1330년대 프랑스의 인구는 2,10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는 잉글랜드 인구의 다섯 배에 해당한다. 프랑스 상인과 장인들도 증가하여 알프스 이북에 가장 아름다운 도시와 대성당을 지었다. 고딕 양식의 파리는 북유럽의 중심지가 되었고, 인구는 15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반면 중세 잉글랜드는 오늘날 노르웨이 수준의 인구 과소 지역으로, 경작지보다는 숲과 황야가 더 많았다. 이 작고 가난한 나라의 재산은 양모였다. 런던 인구는 3만 명 정도였다. 프랑스의 필리프와 달리 잉글랜드 국왕은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에드워드 3세는 항상 그의 〈의회 귀족들〉, 즉 100여 명의 봉건영주와 주교, 소두원장의 의향을 신중히 고려해야 했다."(25-6)


"그러나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결국 전쟁이 터지리라는 것은 불가피한 사실이었다. 두 나라의 중앙집권화와 제도화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와 기옌 간의 오래된 봉건 관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당시에 에드워드 3세는 1259년 이래로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국왕의 가신 자격으로 보유한 아키텐 공국(즉 기옌)을 유지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공국은 에드워드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때로 기옌의 세수는 잉글랜드의 세수보다도 컸다. 공국의 수도로 인구가 3만 명이었던 보르도는 잉글랜드와의 왕래로 번영을 구가했다. 백년전쟁에 관한 뛰어난 권위자인 케네스 파울러 박사가 쓴 대로, 〈13세기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들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쩌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불완전하게 아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주권suzerainty을 주권sovereignty으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영주 권력을 지주 권력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22, 29)


"1339년 전역이 특별히 흥미로운 이유는 프랑스의 비전투원들이 당한 참화 때문이다. 적국 정부를 약화시키기 위해 시골과 도시 모두에 최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이 중세 전쟁의 관습이었다. 잉글랜드인들은 스코틀랜드와 치른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이 고약한 관습을 얻었고, 에드워드는 1339년 원정 때 젊은 왕세자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모조리 불태우고 약탈하여 〈시골의 곡물과 가축, 여타 물품이 남김없이 파괴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병사들은 집집마다 들어가 약탈한 뒤 불을 놓았고, 작은 촌락들은 하나같이 불길에 휩싸였다. 수도원이나 교회, 구호원도 이런 재앙을 피하지 못했다. 민간인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고, 굶어 죽어가던 수천 명은 요새화된 도시로 도망쳤다. 잉글랜드 국왕은 그러한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지방에서 펼치는 '총력전'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았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이 전쟁에 지치기를 바라며 슈보시, 즉 체계적으로 적의 영역을 초토화하는 습격 전술을 최대한 활용했다."(44)


2장 크레시 전투 1340~1350년


"궁수들의 무기, 즉 유명한 잉글랜드 장궁English long-bow은 군사 전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사실 이 장궁은 잉글랜드보다는 웨일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잉글랜드인들은 12세기 궨트 전역 동안 두꺼운 교회 문을 관통해 화살을 날려 보내는 웨일스인들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 장궁에 주목했다. 에드워드 1세 이래로 모든 시골 장정들은 법에 따라 일요일마다 나무 둥치에 활쏘기 연습을 해야 했으므로 잉글랜드의 모든 마을들이 국가적인 궁수 자원 풀에 기여해온 셈이다. 1346년이 되자 장궁은 규격화되었고, 궁수들은 화살을 스물네 발씩 소지했다. 추가 보급품은 수레에 실려왔다. 장궁 궁수는 문자 그대로 하늘을 어둡게 뒤덮으며 분당 열 발이나 심지어 열두 발도 쏠 수 있었다. 사정거리는 135미터가 넘었고, 판금 갑옷을 꿰뚫을 수 있는 거리는 55미터 정도였다. 런던탑에는 활과 화살을 저장해둔 거대한 무기고가 있었다. 활대 다수가 기옌에서 수입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68-9)


"1346년 8월 26일에 펼쳐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병사들은 〈해질녘부터 축시[새벽 1~3시]까지〉 열다섯 차례 돌진했고, 돌진은 매번 빗발치는 화살 세례 속에서 아수라장으로 시작해 아수라장으로 끝났다. 프루아사르는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은 그 혼란상을, 특히 프랑스 병사들의 와해와 무질서를 묘사하기는커녕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살육은 웨일스와 콘월의 단검병들이 〈땅에 쓰러진 백작과 남작, 기사와 종자들을 가리지 않고 베고 죽이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군의 마지막 공격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전개되었다. 어둠이 깔리자 죽은 자들을 제외한 많은 기사들이 조용히 전장을 빠져나갔다. 전장에서 타던 말 한두 마리를 잃었고, 자신도 목에 화살을 맞은 필리프 국왕이 어둠 속에서 최후의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하고자 했을 때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고작 60명의 중기병뿐이었다. 라브루아 궁성으로 피신한 국왕은 다시 밤새도록 말을 달려 더 안전한 피난처가 있는 아미앵으로 갔다."(86-7)


"교황의 중재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1347년 9월 휴전에 합의했다. 필리프 국왕은 절박한 처지였다. 그의 군대가 궤멸했을 뿐 아니라 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침공에 대비하여 지체없이 세력을 재건해야 했다. 이 오만하고 도도한 남자는 그해 11월 파리에서 열린 삼부회 앞에서 몸을 낮췄다. 삼부회의 대변인은 국왕에게 〈전하께서는 나쁜 조언에 귀를 기울여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고, 국왕이 〈크레시와 칼레에서 한심하게 쫓겨났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좌절과 굴욕을 겪고 나서도 그는 잉글랜드를 침공할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는 백성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의회 두루마리 문서는 양원이 모두 국왕의 승리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과 그들이 찬성하여 왕에게 준 돈이 잘 쓰였다는 데 동의하는 안을 가결했다고 기록한다. 〈잉글랜드 왕국이 다른 어느 국왕의 치세 때도 보지 못한 정도로 바뀌고, 영예로워지고 부유해졌다.〉"(93)


3장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350~1360년


"이제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를 일종의 엘도라도로 여겼다. 잉글랜드 전체가 프랑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넘쳐났다. 심지어 병사들의 급료도 상당했다. 기마 궁수는 하루에 6실링을 받았는데 이 금액은 고국에서 숙련 장인이 받는 임금과 맞먹었고, 훌륭한 쟁기꾼이 2실링을 벌면 운이 좋을 때 보병 궁수는 하루 3실링을 받았다. 더욱이 자원한 궁수와 중기병의 고용 계약 시스템은 그들이 전리품을 한몫 차지할 수 있게 보장했다. 그러나 파울러 박사의 표현대로 〈사람들을 전쟁터로 유혹한 것은 이익의 확실성이 아니라 대박을 터뜨릴 가능성, 흔히 100분의 1도 안 되는 그 가능성이었다〉. 전쟁은 무거운 세금이 다시 부과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국왕이 적대 행위를 재개하길 희망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에드워드 3세는 이러한 열성적인 반응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는 이용 가능한 원시적인 매스미디어를 철저히 활용함으로써 자신이 놀랍도록 세련된 홍보 전문가라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107-8)


"1350년부터 1364년까지에 해당하는 백년전쟁의 다음 단계에서는 필리프의 아들인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의 아들로 결국에는 기옌에 영구적으로 자리를 잡는 흑태자가 전면에 부상한다." "1356년 9월 18일에 펼쳐진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패한 장 국왕과 그의 열 네 살 된 아들 필리프가 잉글랜드에 포로로 붙잡혔다. 영국해협 너머에서는 〈프랑스군이 패주하고 그 국왕이 포로로 잡혔다는 푸아티에 전투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모든 교회에서 장엄한 의식을 거행했고, 잉글랜드 전역에서 밤새 커다란 불을 지피며 축제를 벌였다〉." "한편 중앙정부가 붕괴한 프랑스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열 여덟 살의 병약한 젊은 도팽 샤를한테는 너무 벅찬 상황이었다. 나바르 국왕의 추종자들이 노르망디에서 들고일어났을 뿐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자유부대[계약이 만료된 용병단], 즉 루티에routier들이 성을 점령하고 노상강도 귀족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101, 125-6)


# 도팽 :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자에게 붙이던 칭호로 보통 왕세자로 번역된다


"1360년 5월 1일 샤르트르 근처의 브레티니라는 작은 마을에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일주일 만에 흑태자와 도팽은 합의에 도달했다. 장 국왕의 몸값은 금화 300만 크라운(50만 파운드)으로 삭감되었고, 영토에 대해서도 1차 런던조약 때 제시된 축소된 조건으로 결정되었다. 즉 기옌의 완전한 주권과 더불어 리무쟁, 푸아투, 앙구무아, 생통주, 루에르그, 퐁티외 외에 다른 많은 지구들 역시 완전한 주권과 함께 잉글랜드의 소유가 된 것이다. 10월 24일 브레티니조약이 칼레에서 비준되었다. 약속된 지역들이 잉글랜드 쪽에 완전히 양도되면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장은 할양 지역들에 대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에드워드는 더는 자신을 프랑스 국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양측 모두 공식적인 포기 선언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새 국가의 통치자는 잉글랜드 국왕이 아니라 보르도의 흑태자였고, 에드워드는 그에게 아키텐 공작 작위를 내렸다."(132-3)


4장 현명왕 샤를 1360~1380년


"샤를 5세는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해왔다. 그는 아버지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부과했던 가혹한 소비세─에드세aides[포도주세], 타유세taille[토지세], 가벨세[소금세]─를 계속 유지, 확대해왔고 여전히 몸값의 절반가량을 빚지고 있었지만 그의 군자금 담당 대신들은 국왕의 병사들에게 이전보다 더 정기적으로 급여를 지급할 수 있게 신경 썼다. 프랑스 국왕은 잉글랜드에 더 이상 몸값을 보내지 않았고, 그가 특별세에서 얻는 수입은 잉글랜드 의회가 에드워드 3세에게 허용한 비정기적인 전시 세입보다 열 배나 많았다. 프랑스 국왕은 군사 문제를 다루는 창의적인 칙령들을 여러 해에 걸쳐 내렸고, 마침내 상시 병력─상비군까지는 아닌─을 얻었다." "샤를의 전략은 초토전술과 게릴라 습격전을 결합한 것으로, 그는 프랑스군에 잉글랜드군과 전면전을 치르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렸다. 그는 새로운 지휘관들에 변경의 수비대장이나 루티에로서 능력을 입증한 무명의 인물들을 중용했다."(147-8)


"전반적으로 프랑스군은 승산이 있을 때도 전면전을 피했다. 총사령관 뒤게슬랭의 전술은 급습과 야간 공격, 매복, 전체적으로 적을 성가시게 하는 전술이었다. 그는 수비대 숫자가 적은 고립된 도시와 요새에 집중하여 식량 징발 부대와 짐마차 행렬을 공격하고, 연락선을 차단하고, 지속적인 기습 공격으로 적의 사기를 서서히 떨어뜨렸다. 포위전에서는 재빠른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좋은 조건과 심지어 돈을 제시했고, 약속을 지켰다. 그의 전체적인 전략은 아키텐의 프랑스인들이 들고일어나도록 부추기는 것으로, 이를 위해 말로 설득하고 뇌물로 매수하고 위협을 하는 등 여러 수법을 구사했다." "1376년 4월에는 〈잉글랜드 기사도의 꽃〉이었던 흑태자가 세상을 떠났다. 수비대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잉글랜드 병력은 충분하지 않았고, 적은 어디에나 있는 듯했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거점들도 함락되어 있었고, 심지어 건지섬마저 웨일스의 에번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침공당했다."(152-5)


"1373년 말 아키텐 공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옌마저 축소되었다. 그해에 앙주 공작은 잉글랜드 쪽 가론강 변에 있는 바자와 보르도로 통하는 요충지인 라레올마저 장악했다. 플랜태저넷가의 오랜 봉신인 알브레마저 발루아 쪽으로 넘어가,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처음 전쟁을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작아진 기옌 공국 안쪽으로 돌출부가 생겨났다. 더욱이 잉글랜드의 요새를 모두 포함해 브르타뉴 대부분도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어서 브르타뉴 공작은 잉글랜드로 피신해야 했다. 북부에서는 오직 칼레와 노르망디의 한 수비대만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1374년부터 샤를 5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다른 질환들에 통풍까지 추가되었다. 총사령관 뒤게슬랭은 기옌의 심장부를 점령할 가망성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 1374년 1월 그와 곤트는 페리괴에서 만나 아키텐 전역에서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1375년 6월 추가적인 휴전 협상이 이루어져 프랑스 전역에서 2년간 휴전하기로 합의했다."(156-7)


5장 잃어버린 평화 1380~1399년


"1380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은 둘 다 미성년자였다. 1367년 보르도에서 태어난 리처드 2세는 과대망상증의 기미가 있었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적을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깐깐하고 고압적인 사람으로 자라났다. 리처드보다 한 살 어린 샤를 6세는 과도하게 향락에 빠져 살고 정신착란과 호전적인 기질이 결합되었다는 측면에서 할아버지 장 2세를 빼닮았다." "이 시기의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만 국한되지 않은 국제분쟁이었다. 리처드 2세 재위 초반에 잉글랜드 의회는 〈프랑스, 에스파냐, 아일랜드, 아키텐, 브르타뉴와 여타 지역〉에서의 온갖 전쟁들을 걱정스럽게 언급했다─이 전쟁들은 곧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 심지어 포르투갈로까지 확대된다. 갈등은 로마와 아비뇽 간의 분열로 더욱 악화되었다. 갈등을 중재할 불편부당한 교황이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기옌과 바다에서 공격하는 쪽은 잉글랜드인들이라기보다는 프랑스인들이었고, 잉글랜드는 침공의 두려움에 떨었다."(173-4)


"1388년 11월 샤를 6세는 숙부들을 국왕 자문회의에서 쫓아내고, 아버지의 대신들(민간에 '마르무제'로 알려져 있었다)을 재등용했다. 마르무제 가운데 대단히 유능하고 냉철한 자들이 화평을 맺기로 결정했다." "1389년 5월 리처드 2세 역시 권력을 잡아 스스로 통치할 수 있었고, 그 역시 화평을 원했다." "1389년 6월 18일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절단은 칼레 근처의 투링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리처드는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393년 셰르부르는 새로 즉위한 나바르 국왕에게 되팔렸고(나바르는 그곳을 재빨리 프랑스한테 재매각했다), 브레스트는 1396년 브르타뉴에 팔렸다. 양측 모두 항구적인 합의를 보고자 했다. 샤를 국왕과 그의 귀족들은 투르크를 상대로 한 십자군 원정을 떠날 수 있게 잉글랜드와의 분쟁을 해결하고 싶어했다. 심지어 부르고뉴의 필리프도 자기 백성들이 잉글랜드와의 우호적인 통상 관계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화평에 열성적으로 호응했다."(187-8)


"리처드 2세는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인물, 즉 자신의 왕국을 잃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더 완벽하게 소유하길 원해서 결국 잃어버린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도를 넘고 말았다. 곤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볼링브루크의 헨리를 국외로 추방하고, 1398년에 곤트가 죽자 볼링브루크를 평생토록 유배시키고 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한 것이다. 이 일과, 그가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든 사면을 받기 위해 엄청난 돈을 내도록 만든 조치와 같은 공공연한 여타 부당한 처사에 잉글랜드의 대귀족들은 격분했다. 1399년 리처드가 아일랜드로 떠나 있는 동안 볼링브루크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많은 지지를 받아 국왕을 폐위시킬 수 있었다." "볼링브루크는 헨리 4세로 즉위해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다. 리처드는 몇 달 뒤 사망했는데, 스스로 곡기를 끊은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 2세의 결점이 무엇이었든 그는 진심으로 프랑스와 화평을 맺으려고 시도했고, 그의 실패는 전쟁의 재개를 의미했다."(192-3)


6장 잉글랜드의 기회 1399~1413년


"1400년의 프랑스 왕국의 표면적인 강력함은 실재라기보다는 프랑스 궁정과 프랑스 왕족들의 화려한 위용에 기인한 것으로, 실속 없는 허울에 불과했다. 왕국이 거대한 아파나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와 달리 프랑스의 공작령과 백작령들은 영토적 실체로, 때로는 여러 도道 전부가 작위와 함께 상속되면서 반半독립적인 제후령을 이루었다(잉글랜드에서 그나마 이와 비견될 만한 사례는 랭커스터 공작령이다). 아파나주를 보유한 발루아 왕가의 탐욕스러운 왕족들은 인근의 시골이 여전히 루티에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을지라도 대개 자신들의 아름다운 성에서 반쯤 국왕처럼 화려하게 사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예외적인 두 명이 있었으니,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이었다." "샤를 6세가 정신이 말짱한 시기와 갈수록 길어지는 광증의 발작 시기가 번갈아 나타나면서 정신이상에 시달리자, 두 공작은 모두 프랑스를 지배하려고 단단히 작심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중요 정책마다 대립했다."(202-3)


# 아파나주apanages :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왕자나 형제들에게 하사되는 작위와 영토


"프랑스, 특히 파리는 무장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였다. 아르마냐크파는 지도자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의 이름을 땄는데, 루이의 아들인 오를레앙의 샤를과 아르마냐크 백작의 딸이 결혼한 사이였다.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마냐크파는 왕가의 대신료들과 소수의 부유한 부르주아, 장의 영토 바깥의 대다수 귀족들과 다른 왕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에 반해 부르고뉴파는 파리의 부르주아와 학계의 지지를 받았다. 1408년 장은 사촌(오를레앙의 루이)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해─그가 폭군이었다는 것을 근거로─소르본 대학의 신학자를 기용했고, 파리로 돌아와 국왕의 사면을 받아냈다." "1413년 8월, 부르고뉴의 용맹공 장은 샤를 6세를 납치하려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파리를 아르마냐크파와 베르나르 백작의 잔혹한 가스코뉴인들에게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몇 년 동안 자신의 반半왕국에서 지냈다. 이미 프랑스가 그와 아르마냐크파에 의해 망가진 뒤였다."(204-5, 208)


7장 헨리 5세와 아쟁쿠르 전투 1413~1422년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가 펼쳐졌다. 전장의 진흙탕은 궁수들에게 유리했고, 그들은 육중한 프랑스 병사들 옆에서 가뿐하게 움직이며 갑옷의 접합 부위를 찌르거나 그들을 쓰러 넘어뜨렸다. 프랑스 중기병들 대부분은 진흙탕에 익사하거나 자기 몸 위로 쓰러진 동료들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해 죽었다." "141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화평을 주선해 교회 통합을 이루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그의 진짜 임무는 교회 분열을 치유하는 것으로, 이 일은 1417년 마르티누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는 화평 주선은 뒤로하고 헨리와 상호 원조,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부르고뉴의 장 공장은 잉글랜드 편에 서기로 결심했고, 그해 10월 헨리를 만나러 갔다. 공작은 헨리를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그가 샤를 6세를 폐위할 수 있도록 돕고, 자신은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이 될 것을 약속했다."(230-1, 234-5)


"1417년이 되자, 헨리 5세는 느리고 철저한 포위전을 통해 차근차근 지역을 손에 넣어 프랑스를 정복하고 복속할 계획이었고, 이 계획은 노르망디부터 시작될 터였다." "그 와중에 프랑스에서는 내전이 변함없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새로운 총사령관 아르마냐크 백작은 파리 바깥에서 진을 치고 있는 부르고뉴 군대 때문에 파리를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1418년 7월 29일, 헨리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루앙을 포위했다." "포위된 도시는 부르고뉴 또는 아르마냐크로부터 도움을 기대했고, 11월에는 군대가 오고 있다는 풍문이 루앙에 전해졌지만, 곧 뜬소문으로 드러났다. 파리에 민중 반란이 일어나 아르마냐크파는 축출되었고, 폭도가 총사령관을 때려죽인 뒤에 파리를 재점령한 부르고뉴파는 파리를 확실히 장악하는 데 여념이 없어 노르망디에서 벌어지는 일을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그해 말이 되었을 때 잉글랜드인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주인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236-7, 242, 245)


"헨리는 1420년 5월 20일 트루아에 도착했고, 다음 날 이미 기안되어 있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병증에 사로잡힌〉 불쌍한 샤를 6세는 헨리를 만났을 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지만 순순히 조인식을 마쳤다. 조약 내용에 따라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왕위의 계승자이자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다." "트루아조약은 프랑스 역사상 최대의 굴욕 가운데 하나로 1940년의 굴욕에 비견될 만하지만, 루아르강 이북에서는 조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헨리가 프랑스 왕관을 쓸 때까지 오래 살지 못한 것은 섬뜩한 아이러니다." "그는 이질 증상을 보였던 것 같다. 헨리는 동생 베드퍼드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부르고뉴와 동맹을 계속 유지해야 하며, 부르고뉴의 필리프 공작이 사양할 때만 프랑스 섭정의 지위를 유지하라고 말했다. 또 상황이 나빠지면 잉글랜드는 노르망디를 구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헨리 5세는 1422년 8월 31일, 불과 서른 다설 살에 숨을 거두었다."(251-2, 260)


8장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1422~1429년


"앵글로-프랑스 왕국은 잉글랜드와 완전히 분리되어 유지되었고, 소수의 고위 잉글랜드 관리들의 감독을 받는 프랑스인들이 오래된 제도에 근거해 왕국을 다스렸다. 노르망디는 트루아에서 맺은 약속과 달리 루앙에 있는 자문회의를 통해 별개의 국가로 운영되었다. 섭정이 노르망디 공국을 랭커스터가의 보루로 탈바꿈시키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바이이는 언제나 잉글랜드인이었지만 다른 관리들은 거의 현지인들이었다. 베드퍼드는 교역을 장려하고, 캉에 대학을 설립하고, 조카의 이름으로 고품질 주화를 발행하여, 잉글랜드의 지배가 현지 노르망디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베드퍼드는 플랜태저넷가의 통치를 인기 있게 만들려고 애쓰면서도 신민들이 전쟁 수행 노력에 기여하도록 강요했다." "공식적, 비공식적인 요구 사항들이 앙주와 멘, 일드프랑스에도 강요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잉글랜드인들은 점점 자금 압박에 시달렸고, 과세와 약탈은 갈수록 가혹해졌다."(270-2)


# 바이이baillis : 프랑스 북부에 파견된 국왕의 지방 행정관


"1423년 4월 베드퍼드와 부르고뉴 그리고 브르타뉴 공작은 아미앵에서 만나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서로 간에 형제애와 단합〉을 유지할 것을 맹세하고, 비록 군사적 의무 사항을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도팽의 최종 타도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암묵적으로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부르고뉴와 브르타뉴는 다소 주저하며 조약에 서명했고, 나중에 어느 한쪽이 도팽과 동맹을 맺더라도 계속 같은 편으로 남기로 약속하는 비밀조약을 맺었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사이에 제대로 된 전략적 협력은 없었다 해도 종종 전장에서는 군사적 관계가 훌륭하게 작동했다." "1424년 8월 17일 펼쳐진 베르뇌유 전투에서 잉글랜드는 도팽파를 대파했다. 베르뇌유는 제2의 아쟁쿠르로 여겨졌고, 섭정의 위신은 하늘을 찔렀다. 도팽파의 전투력은 완전히 붕괴했지만, 베드퍼드는 형의 본보기를 충실하게 따라, 앙주와 멘의 정복 완수라는 보기에는 덜 화려하지만 실속 있는 이득을 선호했고, 적의 거점을 체계적으로 축소시켜 나갔다."(274-5, 282)


"1427년 7월, 솔즈베리와 섭정은 다가오는 전역의 목표에 관해 의견이 달랐다. 솔즈베리는 루아르강으로 가는 요충지인 오를레앙의 정복을 원했다. 반면 베드퍼드는 잉글랜드가 앙주 지역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고, 기옌과 북부 영토를 연결할 수 있는 앙제르를 원했다. 솔즈베리의 의견이 관철되었지만 베드퍼드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1429년 봄이 되었지만 오를레앙의 성벽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자 도팽파는 도시의 주인인 오를레앙 공작이 잉글랜드에 포로로 있다는 구실로 오를레앙을 부르고뉴 공작에게 양도하는 영리한 외교 수단을 구사했다. 베드퍼드는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위험에 빠뜨릴까봐 걱정하면서도 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화가 난 필리프가 부르고뉴 병사들에게 포위전을 중지하고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4월 30일, 소규모 호위대를 동반한 구원군의 지도자가 검은 군마를 타고 작은 전부를 든 채 오를레앙으로 입성했다. 잔 다르크였다."(292, 296-7)


9장 오를레앙의 마녀 1429~1435년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인들이 자신들의 특권이라 간주하던 신의 지지를 주장했다. 며칠 만에 그녀의 병사들은 잉글랜드의 주요 토루를 점령하고 글러스데일을 비롯한 수비대를 죽인 뒤 투렐을 재탈환했다. 1429년 5월 8일, 90일간 지속되었던 공성전 끝에 서퍽 백작은 결국 포위를 풀었다." "몽스트렐레는 도팽파가 파테 전투 이후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인들이 그녀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모두 믿게 되었다고 알려준다. 이제 잔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파리로 진군하는 대신 자신과 함께 랭스로 가서 대관식을 치르자며 도팽을 설득했다. 1만 2,000명의 군사가 어찌어찌 모였고,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영토를 통과하여 랭스로 간 샤를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잔은 대관식 내내 하얀 깃발을 들고 그의 근처에 서 있었고, 의식이 끝난 뒤 처음으로 그를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반드시 샤를 7세라고 불러야 하는 국왕의 대관식은 도팽파의 사기를 경이로울 정도로 진작시켰다."(306-8)


"1430년 5월 24일, 콩피에뉴 바깥에서 교전이 벌어지는 동안 한 부르고뉴 병사가 잔 다르크를 말에서 끌어내렸다. 몽스트렐레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병사들이 〈마치 병사 500명을 사로잡았을 때보다 훨씬 더 흥분했으니, 이는 그들이 전쟁에서 어느 대장이나 지휘관보다 그 처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11월, 잔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넘겨졌다." "한참을 괴롭히고 속임수를 쓰고 진술을 곡해한 끝에 법학자들은 마침내 그녀를 덫에 빠뜨렸고, 1431년 5월 30일 잔은 개전의 여지가 없는 이단자라며 루앙 장터에서 워릭의 병사들 손에 화형당했다. 그녀는 바로 죽었고, 처형인은 화염 속에서 불에 탄 시신을 끄집어내서 사람들이 여자의 시신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녀는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샤를 국왕은 그녀를 전혀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잔의 처형은 별다른 파장을 낳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동레미 출신의 마법사 처녀는 짧은 생애 동안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310-1)


"전쟁은 에드워드 3세 시대보다 훨씬 더 비용이 많이 들었다. 갑옷과 무기는 갈수록 정교해졌고, 신형 대포들의 상당수는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이 되었든 포위전에 절대적 필수품이 되었다. 더욱이 수비대 유지에는 지속적인 출혈이 따랐다. 농업 불황과 해외 무역의 쇠퇴로 과세 수익이 감소했고, 줄어든 세입은 어떤 잔 다르크보다도 랭커스터 이중 왕국에 훨씬 더 큰 위협이었다." "이제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1435년 8월에 아라스에서 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루앙에서 중병을 앓고 있던 베드퍼드는 영토에 대해서는 양보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왕위에 대한 조카의 권리에 관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려고 했다. 잉글랜드 사절단은 이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신성한 사안이라는 주장을 하라고 지시받았다." "잉글랜드 대표단들은 〈샤를 국왕과 부르고뉴 공작이 갈수록 서로에게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근거 있는 의심을 했다."(320, 324-6)


10장 비보 1435~1450년


"1435년 9월 20일, 베드퍼드가 죽은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샤를 7세와 부르고뉴의 필리프는 아라스조약을 체결했다. 필리프는 샤를을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마콩과 오세르, 퐁티외와 더불어 솜강 유역의 도시들과 솜강 유역 북쪽의 왕령지를 받았다(모두 그가 이미 점령하고 있던 영토였다). 샤를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동맹을 끝내고, 자신은 필리프의 부친 암살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함과 동시에 살아남은 암살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1435년부터 1450년까지는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세력이 승산 없는 전쟁을 질질 끌었던 시기로, 그들이 부르고뉴파한테서 버림을 받고도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잉글랜드인들은 30년 동안 지배해온 노르망디와 칼레를 자신들의 나라에 통합된 일부로 간주했다. 마침내 마주한 몰락은 온 잉글랜드를 충격에 빠뜨렸고 정부를 무너뜨렸다. 왕조 간 반목은 국내 분쟁으로 탈바꿈했다."(331-4)


"1444년, 매우 연로해진 보퍼트 주교는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그의 당파가 여전히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서퍽 백작이 이끄는 정권은 부패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고, 워릭이 경멸한 서퍽 백작과 그의 탐욕스러운 동료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가차없이 돈과 토지, 상업적 특권을 갈취하고, 심지어 측근들을 동원해 법정을 겁박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퍽한테 더 나은 면도 있었다.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싸운 뒤─별다른 공훈이 없다는 게 눈에 띄는 점이다─그는 이제 잉글랜드가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랑스와 화평을 맺어야 하며, 노르망디와 기옌을 보유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것이라는 데 자문회의 다수와 의견을 같이했다." "투르 휴전협정 소식은 잉글랜드 전역에서 국수주의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인들한테는 매우 다르게─바쟁에 따르면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으로─받아들여졌다. 1419년 이후로 적대 행위가 중단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347-8)


"1449년 7월 31일 샤를 7세는 3만 명의 군사를 노르망디로 보냈다. 그들은 삼면에서 공국을 공격했다." "불시에 이루어진 노르망디 침공은 전 잉글랜드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루앙 사령관 서머싯에게 1만 파운드를 보냈을 뿐 즉각적인 증원은 없었다." "최후의 저항은 셰르부르에서 1,000명의 수비대원들을 지휘하던 토머스 가워의 몫이었다. 뷔로는 기름을 먹인 가죽으로 방수 처리한 포대를 바다 쪽 모래톱에 설치하고, 밀물이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가면 돌아와 포격을 이어갔다. 〈도시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포와 포의 집중 공격이 이어졌다〉고 몽스트렐레의 연대기를 이어간 무명 작가는 말한다. 가워는 결연하게 싸웠고, 프레장 드 코에티비 제독을 비롯해 많은 포위군이 전사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존 파스톨프 경이 새로운 군대를 모으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1450년 8월 12일 셰르부르는 항복했다. 프랑스는 채널제도를 제외하고 노르망디 전역을 재정복했다."(352, 355, 358-9)


11장 암울한 싸움 1450~1453년


"근래에 보기 드물게 평화로웠던 기옌은 1445~1449년 잉글랜드에 포도주를 어느 때보다 많이 수출했다. 우선 프랑스의 침공이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기옌은 30년이 아니라 무려 300년 동안 플랜태저넷가에 속해 있었고, 기옌 사람들은 대체로 잉글랜드인 공작과 멀리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통치에 충성했다. 하지만 샤를은 노르망디를 정복하자마자 투르에서 전략 회의를 열었고, 그해가 저물어가는 상황이었는데도 곧장 기옌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1451년 7월 말이 되자 바욘만이 플랜태저넷가를 위해 버티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8월 20일 함락되었다." "처음에 일부 가스코뉴 귀족들이 프랑스인들을 반겼지만 곧 기옌 사람들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을 싫어하게 되었다. 북부 프랑스 행정관들과 징세인들은 능률적이고 가혹하며, 옛날 방식을 멸시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452년 비밀 사절단이 런던에 도착해 서머싯 공작이 군대를 파견해준다면 보르도가 잉글랜드를 위해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했다."(366-8)


"1452년 10월 17일 톨벗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메도크에 상륙했다. 프랑스인들은 이 원정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원정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 결과 기옌에는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10월 21일 잉글랜드군이 입성했다. 그러나 프랑스에게는 당대의 테크노크라트 장 뷔로가 있었다." "1453년 7월 17일 펼쳐진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포화가 잉글랜드 병사들에게 정면으로 쏟아졌다. 활로 시작된 잉글랜드의 군사적 우위가 소형 화기에 의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9월 말이 되었을 때는 보르도만이 프랑스에 맞서고 있었다. 보르도 시민들은 허약한 서머싯 정부한테서 구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1453년 10월 19일, 기옌의 수도는 다소 낙관적으로 샤를 국왕의 자비를 믿으면서 무조건 항복했다. 샤를의 첫 행동은 장 뷔로 명장을 보르도의 종신 시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백년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68-70, 372-5)


에필로그


"비록 잉글랜드 자체는 1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얻어낸 전리품들〉로 부유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정부를 파산시켰고, 랭커스터 왕조의 위신에도 치명타를 가했다. 1453년 8월 헨리 6세는 미쳐버렸고, 6개월 뒤 요크 공작이 호국경이 되었다. 1455년 헨리가 회복되어 보퍼트 가문을 권력에 복귀시키자, 과거의 참전 군인들이 프랑스에서 터득한 전투 기술을 서로에게 구사하면서 장미전쟁으로 알려진 길고도 살인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삶의 방식으로서의 싸움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들의 측근인 중기병과 궁수들은 일자리가 절실했다." "필리프 드 코민은 15세기 말에 잉글랜드 왕가를 논하면서 〈그들의 아버지와 추종자들은 프랑스 왕국을 약탈하고 파괴하고, 오랫동안 그곳의 상당 지역을 점령했다〉고 썼다." "영국해협 너머의 다른 관찰자들은 장미전쟁이 잉글랜드 국왕과 그 백성이 프랑스에서 저지른 일에 대한 신의 심판이었다는 코민의 생각에 동의했을 것이다."(3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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