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
이영석 지음 / 아카넷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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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영제국을 보는 시각과 방법


# 영제국에 대한 (보수적) 역사서술 방법

1. 경제·군사 팽창론(전통적 견해) : 19세기 영제국의 팽창은 독점자본의 이윤극대화 운동에서 비롯했다는 홉스-레닌 식의 견해

2. 신사 자본주의론 : 대토지 소유 귀족과 젠트리들─시장경제를 이용해 임대소득을 추구하면서도, 일상적인 노동을 멀리하고 여가와 아마추어 정신을 중시하는─이 근대 영국의 부의 축적을 주도했다는 견해. 이들과 기존의 상업 자본이 결합된 금융-상업자본이 제국 팽창과 맞물려 해외 시장으로 그 힘을 집중시켰다고 본다.

3. 장식주의론(ornamentalism) : 19세기의 영제국 역시 인종주의가 만연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회적 위계를 중시한 사회였기 때문에, 토착지역의 부왕이나 제후들에게 각종 칭호를 부여하여 제국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그들의 협조를 얻는 방식으로 제국을 경영했다는 견해.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의식한 조어이다.

4. 네트워크론 : 영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는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었지만 인쇄언어 연결망, 전신망, 해저 케이블 등 19세기의 기술발전을 바탕으로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영국적인 것'에 대한 공동의 관심사를 공유했다는 견해. 말하자면 현대의 세계화는 대부분 영제국이 시행한 제도에 바탕을 두고 발전한 것이다.


"오랫동안 영국 정치인과 국민은 제국에서 영연방으로의 평화로운 이행을 강조했다." "그러나 제국 해체 이후 한 세대 이상 영국의 역사가들은 제국 팽창과 해체의 전 과정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부담과 해체의 충격이 오히려 시대 변화에 순조롭게 적응했다는 심리적 위안을 요구했던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제국사 연구는 역사가들이 이전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국을 '역사화'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문제는 이 '제국의 역사화'가 이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히려 제국 지배를 시대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자국 중심주의적 연구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영미문화의 세계적 확산과 기여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세계화 과정에서 영미문화의 확산을 중시하고, 그러한 확산이 영제국에서 영연방에 이르는 문화적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27-8)


"존 매켄지는 『선전과 제국』에서 대중매체의 발전이 영국의 공공여론을 조성하는 데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분석함으로써 문화적 현상으로서 제국주의가 20세기까지 계속 영국인들의 내면세계에 뿌리내려 왔음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지식인들은 도덕적 부담감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제국적 가치가 시대의 추세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영향을 받아 영국사 연구자들은 제국과 제국적 가치가 영국사의 지배적인 동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메켄지는 이러한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고 본다. 제국은 지식인의 담론에서 밀려났지만, 일상생활에서 소비되는 제국적 상품(차·담배·코코아·비누·설탕 등)과 대중문화 속에 깃들어 있었다. 매켄지가 보기에, 〈제국의 유산은 영국인들의 정신세계의 보호무역시장〉 안에서 계속 번창하고 증식해 온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 당시 일반 대중의 열렬한 지지야말로 〈제국적 세계관의 가치와 그에 대한 신념이 영국인의 의식 속에 침전되어 남아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32-3)


1부 19세기의 유산


1장 재정-군사국가와 신사 자본주의


"18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 체제의 맥락에서 보면,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그 체제 중심부 국가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해당한다. 명예혁명 이후 나폴레옹 몰락기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영토와 인구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영국이 마침내 우위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존 브루어에 따르면, 18세기 영국은 간헐적으로 발발하는 전쟁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기구를 발전시켜 나갔다. 사실 전쟁은 원래부터 의도되었던 것이라기보다는 해외시장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벌어졌기 때문에 주된 전장은 아메리카나 인도와 같은 해외 식민지였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과 육군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지출을 점차로 늘렸고, 이를 부담하기 위해 물품세 부과와 일련의 국채 발행이라는 수단에 의존했다. 이 시기의 국가는 일종의 효율적인 전쟁기구였다. 따라서 그 성격은 한마디로 '재정-군사국가(fiscal-military state)'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43-4)


"제국사 연구에서 주변부 이론은 경제적 해석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이전의 경제적 해석에서 19세기 전반은 제국주의 시대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제국 팽창의 휴지기였다. 그러나 주변부 이론은 이것이 공식적인 식민지 확장만을 제국주의로 간주하는 오해에서 비롯했음을 강조한다. 이 시기에 영국이 식민지를 확대하지 않은 것은 '자유무역'을 통해 제국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부 이론을 제시한 연구자들은 19세기 후반에 새롭게 신제국주의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 시기에 걸쳐 제국정책이 이어졌으며, 다만 이전에는 그 정책이 비공식적 제국(inform empire)의 형태로 표출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토착세력의 협력에 힘입어 적은 비용으로 제국을 꾸려나가는 방안이며, 이 협력관계야말로 〈제국주의를 규정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주변부 이론은 제국의 확대가 의도되고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주변부의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결과라고 본다."(55-6)


"케인과 홉킨스는 주변부 이론과 경제적 해석을 비판하면서도 두 이론이 다 같이 산업혁명의 혁명성을 전제로 삼고 있음에 주목한다. 경제적 해석이 제국주의를 산업자본의 진화단계에 연결지었다면, 주변부 이론은 산업화가 해외 지역의 확대를 촉진했다고 본다. 자유무역의 대두와 제국의 성장을 산업화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케인과 홉킨스에 따르면, 영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대 자본주의'이다. 근대 초기 이래 이 나라에서 부의 축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토지를 소유한 소수 지배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그들이 상업적 농업의 발전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지대(rent)를 소득원으로 하는 경제 범주로 성장해 왔음을 뜻한다. 물론 영국의 귀족과 신사층은 아직도 봉건적 전통의 계승자였다. 그들은 질서·권위·신분과 같은 전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17세기 말에 그들은 봉건귀족의 삶에서 벗어나 '시장의 철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57-9)


"지주 세력은 부재지주로서 농업 이윤이나 지대뿐 아니라 도시화와 경제 활성화에 따른 열매까지도 거두어들였다. 광산 개발의 이득과 도시 지역의 각종 임대소득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소득의 특징은 일상생활에서 부의 축적에 하루 내내 매진하지 않더라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수입이 보장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부를 중시하면서도 일상적인 부의 추구를 경멸했으며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각종 기예와 그 철학으로서 아마추어 정신을 귀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태도와 분위기는 귀족과 지주층을 넘어서 다른 사회세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사 자본주의란 '신사적 규범'을 유지하면서 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경제활동을 의미한다. 이 활동이야말로 영국 경제발전의 주된 동력이었다. 귀족과 지주 외부로부터 다양한 자산가들이 이 활동 무대에 스스로 등장했다. 18세기에 화폐자산을 소유한 부유층이 대거 이 대열에 끼어들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금융 및 서비스 분야의 부유층이 여기에 합류했다."(59-60)


"18세기 이래 영국 사회는 '토지와 화폐의 결합'이라는 틀을 유지해 왔다. 지주와 화폐자산가층의 동맹은 18세기에는 '낡은 부패 관행'으로, 19세기에는 값싼 정부와 자유무역주의로 변모했지만, 그 동맹은 언제나 영국의 경제발전과 해외 팽창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19세기 후반 신사적 자본가층이 외연적으로 확대되면서 그 내부의 역학관계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동맹의 균형추가 경제개혁의 주된 수혜자였던 금융세력에 기울어진 것이다. 이러한 재편성 과정에서 신사적 자본가들은 적극적인 제국주의로 나아가면서도 영국 사회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로는 '보수적 진보(conservative progress)'를 내세웠다. 케인과 홉킨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 구호는 〈전통과 특권을 보호하면서도 또한 '자유인으로 태어난 영국인'의 권리를 지지하고 물질적 향상의 전망을 제시한다.〉 요컨대 19세기 후반 영제국의 새로운 팽창은 구 런던시 서비스 부문의 급속한 성장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63-4)


2장 네트워크로서의 제국


"겉으로 보면 영제국은 두 차례에 걸쳐 급속하게 팽창했다. 우선 7년전쟁 이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던 해외 지역을 흡수한다. 다음으로, 188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에 독일, 프랑스와 경쟁적으로 아프리카 분할에 가담한다. 그사이의 시기, 즉 미국 독립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팽창의 열기가 약해졌는가. 공식적인 제국 지배 지역만 살피면 그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영제국의 실질적인 지배력과 영향력은 더 강력해졌으며 오히려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갤러거와 로빈슨이 주목한 '비공식적 제국'은 이를 가리킨다. 이 시기 비공식적 제국은 물론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세계시장 확대와 직접 연결된 것이었다." "사실 상황에 따라 비공식적 제국은 공식적 제국으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제국주의가 그 결과이다. 19세기 중엽에 주로 비공식적 제국을 추구했다고 해서 군사력을 동원한 팽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식적 제국과 비공식적 제국의 경계는 고정되지 않았다."(67-8)


"19세기 영제국 또는 영국 세계 체제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다윈에 따르면, 그것은 브리튼, 인도, 시티(the City)의 금융자본, 백인 자치령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분석에서 각지에 산재한 다른 식민지들은 위의 구성요소와 비교하면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에서 브리튼은 특히 제조업과 재정 및 석탄자원을 의미하고, 인도는 그 경계를 넘어 아덴에서 미얀마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과 해양, 즉 페르시아만, 이란, 아프가니스탄, 티베트, 말레이반도, 그리고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 등 인도양 인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략 지역이었다." "자치령의 존재야말로 영국과 유럽 다른 나라의 제국 경영을 구분짓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영국인 이민을 근간으로 형성된 백인 정착지는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남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분포해 있었다." "백인 정착지로 이주한 영국인 이민들은 대체로 개인의 자유, 독립, 평등에 기초를 둔 사회를 형성함과 동시에 영국 문화의 정체성을 이어나갔다."(69-73)


"1851년 이후 영국의 국제적 지위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좀 더 유리해졌다. 나폴레옹 전쟁기에 협조한 네덜란드에 인도네시아의 이해관계를 양보했지만, 그 대신에 지중해의 몰타, 실론, 케이프타운을 완전히 장악했고, 중남미의 해안 지역도 속령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이러한 팽창은 에스파냐·포르투갈·프랑스·네덜란드·영국 등 유럽 국가들 사이에 아메리카와 아시아 해상무역을 분할해 온 중상주의 질서의 종국을 나타내는 신호였다. 기존의 영국 지배 영역과 새로운 식민지들은 전략적으로 아메리카·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남아시아·중국·태평양 등 전 세계에 걸친 연결망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셈이었다. 19세기 전 시기에 걸쳐 영제국에 편입된 케이프타운·몰타·지브롤터·수에즈 운하·아덴·실론·싱가포르·홍콩·밴쿠버 아일랜드·포클랜드·노바 스코샤 등은 영국 해군의 세계 항로 지배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했다. 오직 영국만이 해상을 통한 전 지구적 연결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77-8)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치령과 식민지, 그리고 복잡한 정부기구를 하나로 묶는 연결망은 어떻게 강화·유지되었는가. '영국 세계 체제'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다윈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를 설명한다. 우선 신문·전신·증기선·철도·상품·정보인력 이동 등 기술진보와 변화가 제국 연결망을 강화했고, 다음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어려운 이윤·상품·서비스·문화로 구성된 '영국적 세계'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계를 보호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자의식 또한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확립된 영제국은 기본적으로 취약한 네트워크 연결망에 지나지 않았다. 상당수 식민지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영국이 무임승차한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중엽 이래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동시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영국의 우월한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외부 자극에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해 준 것이 토착 엘리트의 협조와 19세기 이래 지정학적 요인이었다."(78, 95)


"19세기 영제국의 팽창과 제국 네트워크의 출현은 영국 정부의 분명한 기획의 결과가 아니라, 당시 국제 정세와 특히 지정학적 조건과 요인에 힘입은 것이었다. 다윈은 〈수동적인 동아시아,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 그리고 강력하면서도 비호전적인 미국〉이라는 국제 상황이 영제국 세계 체제의 성립에 도움을 주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시티 금융자분의 자기 이익 추구 경향과 상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제국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수에즈 운하 자체가 이 지정학적 요인을 더 강화한 지렛대였다. 이 운하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 네트워크를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지정학적 조건이 변하면서, 그 요인은 오히려 제국 해체를 가속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20세기 미국과 러시아의 대두는 영국이 자체의 힘으로 대처할 수 있는 도전이 아니라 제국의 출현과 해체에 항상 영향을 미치는 상수였던 셈이다. 그렇더라도 제국 네트워크는 오늘날 지구화 현상의 초석이 되었다."(96-7)


3장 제국과 '대영국'에 관한 담론


"'대영국(Greater Britain)' 개념은 영국인의 세계적 확산이라는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19세기 후반 대륙을 기반으로 팽창한 강대국들의 등장에 자극받아 나타난 것이었다. 제국(empire)이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그 말이 함축한 전제적이고 군국적인 의미가 영국인의 자유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인 정착지가 영국의 일부라고 주장한 존 실리 이전에 제임스 프로드가 이미 새로운 강력한 국가들에 맞서 영국과 백인 자치령을 연결하는 〈군살이 없고 좀 더 효율적이며 응집력이 강한〉 '대영국'의 이상을 설파했다. 〈다른 나라의 인구증가, 제국적 에너지, 막강한 정치 발전을 고려할 때, 그리고 러시아, 미국 또는 독일에 속하는 광대한 영토와 우리 브리튼섬의 보잘것없는 면적을 비교할 때, 우리가 식민지를 우리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해서 영국인을 그곳까지 확산시키고 영토를 배가히자 않는다면 경쟁국 속에서 한 국가로서 우리 위치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110)


"실리는 브리튼섬과 백인 자치령을 결속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다가왔다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지금까지 영국의 자치령과 속령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비효율적인 영토였다. 19세기 철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해운활동에 근거한 영국의 이점은 위축되는 대신 준대륙 국가인 미국과 러시아가 등장했다. 그러나 증기선·전신·전기 등 새로운 기술혁신과 더불어 이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네트워크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는 기술적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말이다." "실리는 '대영국'의 구체적인 구현체로서 '제국연방(Imperial Federation)'을 언급한다. 제국연방운동을 전개한 '제국연방연맹'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을 미합중국과 같은 연방제 국가 또는 국가연합으로 통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여기에서 제국연방의 핵심 개념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이 평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식민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졌고 그만큼 일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112-5)


"19세기 중엽 영국 정부 각 부처의 행정개혁, 이른바 '글래드스턴주의'로 불리는 일련의 개혁조치가 이루어진 직후, 영국과 백인 자치령 사이에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교류와 무역이 급속하게 증가했으며, 제국의 경계 안에 있는 여러 지역은 왕실을 매개로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었다. 왕실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 모두에게 국가(또는 지역)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원래 백인 정착지는 국왕의 하사장(charter)을 받은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된 사회였다. 이민집단은 국왕에게서 위임받은 왕령지에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의식은 백인 정착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제 캐나다를 비롯한 '백인 자치령(white dominion)'은 더 이상 속령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런 구별은 백인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겨졌다. 결국, 백인 자치령의 출현은 비백인으로 구성된 속령 및 식민지의 팽창과 관련되어 자리 잡은 것이다."(119-20)


"'대영국'론이 (그 인기에 비해) 단순히 구호에 그쳤던 데에는 기술적인 문제가 영향을 미쳤다. 실리가 입론의 근거로 삼았던 기술발전이 그 자신의 예상과 달랐다. 그가 내세운 '거리의 소멸'은 한 세기 후에나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적어도 반세기 이상 해상 네트워크와 통신을 통한 연결은 대륙 국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근대 기술문명의 추세를 감지했지만, 오히려 기술적 난점이 '대영국'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지 못했다. 영국 정체성의 문제 또한 너무 단순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는 영국인, 영국식 이름 및 지명의 세계적 확산과 영국성의 확장 가능성을 연결한다. 그러나 이민자들에게 태어난 나라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한 친숙성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형성해 나간 정체성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실리는 앵글로색슨인의 확산이라는 측면만을 강조한 나머지 영국성의 확대를 통해 다양하고도 새로운 정체성을 포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129)


2부 전쟁과 불황


4장 전쟁과 동원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아공 등 자치령 국가는 광활한 국토와 비교하면 인구가 적었다. 그런데도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못지않게 성인 남성 가운데 상당수를 군 자원으로 소집해 유럽 전선에 투입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터키의 갈리폴리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8년 12월 31일 현재 캐나다군 병력 규모는 62만 8,964명이었다. 이 가운데 영국에 파견된 군 병력은 42만 2,405명에 이르렀다. 영국에서 유럽 대륙 전선에 투입된 캐나다군 규모는 40만 1,191명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또한 인구 규모에 비해 막대한 인력을 동원해 전선에 투입했다. 성인 남성 대비 참전군인의 비율은 캐나다 13퍼센트, 오스트레일리아 13퍼센트, 뉴질랜드 19~20퍼센트에 이르렀다(영국은 27퍼센트)."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백인 자치령 국가의 경우 막대한 인적 자원의 손실을 입었다. 특히 참전군인 대비 사상자 비율은 캐나다 50퍼센트, 뉴질랜드 59퍼센트, 오스트레일리아 65퍼센트에 이른다."(150-2)


"일부 사회적 갈등이 있었음에도 자치령 국가들은 전쟁 동원에 적극 협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치령 국가의 적극적인 협조를 친영국적 정서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영국과 인종적·문화적 전통을 공유한다는 인식에는 군주제, 대의제 헌정, 시민적 자유 등 그들이 공통의 선진적 정치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긍지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당대의 정치평론가 아치볼드 허드에 따르면, 당시 독일 측 정세분석가들은 자치령 국가들이 유럽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자치령 국가와 식민지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자치령 국가들이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그 제도의 요체는 시민적 자유를 토대로 하는 군주제와 대의제 헌정(representative constitution)이었다. 대의제 헌정이란 구체적으로 의회(parliament)와 책임정부(responsible government)로 구현된다. 그들은 전쟁을 자신의 제도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참전한 것이다."(153-4)


"전쟁 이전에 '대영국'론은 영국과 해외 자치령 지식인 및 정치인들 사이에 폭넓게 받아들여졌던 정치적 이상이었다. 강대국들의 국제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대영국론은 영제국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현실적인 방안으로 호소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참전과 그에 따른 막대한 희생이 제국의 원심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자치령 국가들은 이전 제국 질서의 변화를 요구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자치령은 전후에 파리강화회의나 국제연맹에도 독자적인 주권국가로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당시 영국 정부로서는 국제기구나 회의에 자치령 국가들이 참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자치령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특정한 '제국의 원리'를 고안했다. 영국왕이 〈영연방 개별 국가들을 결속하는 초석〉이라는 원리였다. 단일한 군주를 중심으로 상징적으로 맺어진 네트워크야말로 개별 국가들의 협조와 발전의 기초가 되는 셈이었다."(160)


5장 경제불황과 제국


"영국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변화된 제국의 연결망을 새롭게 강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두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1920년대 말 영국의 실무 관리와 지식인들은 미국의 대두에 따른 영국의 대응전략에 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유럽 대륙과의 공조 또는 유럽 경제권에 대한 관심사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맥락에서 제국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들 논의는 모두 자유무역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문제는 두 경제권 모두 미국에 대한 대응전략이면서도 각지 서로 다른 약점을 보여 준다는 사실이었다. 유럽 경제권의 공조를 강조하는 데에는 영국·프랑스·독일이 상호보완적인 경제 특징보다는 경쟁적인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낼 것이고, 영제국은 국제분업의 효율성을 보여 주면서도 제국 네트워크의 취약성과 미국 영향력 증대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166, 170-1)


"이 시기 국제경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현안은 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금본위제도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금본위제 채택에서 중요한 문제는 그동안 하락 추세에 있던 파운드화의 환율을 정하는 일이었다. 1파운드당 4.86달러라는 이전 수준의 환율로 되돌아갈 경우 외국 투자자들이 파운드화에 실망하고 뉴욕으로 금융 거래를 옮길 위험이 있었다. 반면, 파운드화로 이루어진 해외투자 자본의 가치를 높일 뿐 아니라 미국에 대한 전시 부채 상환도 더 유리해질 것이었다. 처칠은 뒤의 가능성을 더 중시했다. 달러에 대한 스털링화의 가치는 전전 수준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금본위제 복귀로 영국은 수출산업의 타격과 노동계급 생활수준 하락이라는 큰 대가를 치렀다." "1차 세계대전 및 그 이후의 시기에 전통적인 수출산업은 구조적 변화의 기회를 상실했다. 그에 따라 해외시장에서 이들 산업의 경쟁력은 전반적으로 약해졌다. 여기에 스털링화의 과대평가가 어느 정도 나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173, 178-9)


6장 제국 경영의 한계


"전후 영국 사회는 한동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전시경제체제에 비교적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던 노동계급이 실업과 경제침체에 따른 불만을 한꺼번에 터뜨리기 시작했다." "제국 문제와 관련지어 이 시기 격렬한 노동자 항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노동자들은 제국 네트워크를 다시 강화하려는 시도, 특히 상업제국의 활성화를 위한 노동자의 양보와 희생을 거부한 셈이었다. 물론 전후에 일반 여론은 앞으로 영국의 번영이 전쟁 이전 상업제국의 복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런던은 세계 최고의 투자처이자 교역 및 금융 중심지로서 지위를 되찾아야 했다. 금본위제 도입을 통한 파운드화 가치 안정, 수출경쟁력 회복, 수출시장 확대는 제국 운영에 긴요한 조건들이었다. 수출경쟁력 제고는 무엇보다 노동자의 임금 삭감 이외에 대안이 없었다. 전쟁기의 산업 평화에 순응했던 노동자들은 정부의 이 같은 견해에 협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사관계의 불안은 제국 경여의 미래에도 불안을 안겨주었다."(193, 198)


"전 세계에 걸친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과 영국 국내 정치 및 사회의 혼란이 겹치면서, 영국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 제국을 둘러싼 찬반 담론이 가열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 정치인과 지식인의 각성을 가져왔다. 전쟁의 참혹함과 야만성을 목격한 사람들은 산업화된 서구가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류 번영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간디와 타고르 같은 지식인들의 비판은 식민지 해방운동의 징후를 나타냈다. 영국 정치가들도 그 시대의 추세를 느끼고 있었다." "전후 영국의 정치·경제·사회적 혼란 속에서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식민지 지배가 일종의 약탈 면허이며 그나마 문명화라는 식민지 지배의 인도적 전통도 1890년대 이후 사실상 붕괴되었다는 비관론이 대두했다. 문화적·인종적 전통을 공유하는 백인 자치령 국가들조차 전후의 경제침체에 따라 영국의 이익과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견도 있었다."(199-200)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서아시아 정책 수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조지 커즌이다. 그는 인도 총독을 지냈고 전시내각에 참여했으며 1919~24년간 외무장관을 지냈다. 전후에는 서아시아 진출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그 까닭은 인도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인도 지배를 위해서는 서아시아에 다른 경쟁국이 들어서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영제국의 확장을 의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커즌이 선호한 것은 인도 지방의 토후국 모델을 적용해 서아시아 지역에 아랍인 자치국들을 세우는 방식이었다. 영국의 서아시아 진출은 전쟁기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제정러시아 붕괴 후 독일이 서부전선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자 독일 동맹국인 오스만제국을 구축하기 위해 영국군이 이 지역에 진출했다. 이는 전후에 곧바로 제국의 방어비 증가를 가져왔다. 영국은 전후에 팔레스타인·이라크·이란 등에 대한 신탁통치 주도국이 되었다."(235-6)


"동아시아에서 영국은 중국의 홍콩과 상하이를 이 지역 상업 무역 금융 중심지로 개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큰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전간기에 특히 발전한 도시는 상하이다. 19세기 후반에 조차지를 개발한 영국은 인접한 미국 조차지와 행정단위를 묶어 상하이 공공조계로 개발했다. 1920년대 상하이가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자 공업생산지가 된 것은 상하이 공공조계의 번영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반영감정의 고조, 일본의 팽창정책에 대처할 수 있는 대안은 별로 없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미국 정부는 영국 해군력 증강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서양을 둘러싼 경쟁〉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의 대두와 함께 중지되었다." "일본은 이미 쿠릴열도에서 타이완까지,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남태평양까지 진출을 노리는 해상제국이 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은 중국에서 영국의 이익,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방어까지 책임져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다."(239-42)


3부 이행, 제국에서 국가연합으로


7장 제국의 해체, 2차 세계대전에서 수에즈 위기까지


"존 다윈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의 완패는 제국의 토대로 삼았던 모든 전제가 무너진 탓이다. 그 전제는 프랑스와 연합해 유럽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영국의 선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적인 지배권을 유지하며, 이 네트워크를 활용해 전 지구적인 경제력을 행사함을 뜻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패배, 제국 네트워크의 확장에 따른 해군력의 취약점 노출, 그리고 1930년대 영국 경제의 불황 심화로 이 모든 전제가 붕괴된 것이다." "전후에 영제국은 한동안 느슨한 형태로나마 유지되었다. 에이레가 영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국가가 된 인도·파키스탄·실론이 공화국 체제를 선택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1949년 영연방 정상회의에서 인도아대륙의 신생 3개국이 잔류를 선어하고, 기존 식민지를 대부분 지배함으로써 기존의 제국적 결속력은 없다고 하더라도 영연방 체제는 형식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제국의 해체가 급속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수에즈 위기 이후의 일이다."(252, 259-60)


"1956년 11월 6일 영국이 수에즈에서 군대 철수를 결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미국과의 균열, 이든에 대한 여론의 비판, 유엔의 철수 요구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바로 그날부터 파운드화가 폭락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 세계경제에서 파운드 스털링화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기축통화였다. 파운드 스털링 통화권은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이후 여러 나라가 금 대신에 파운드화에 대한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면서 성립되었다.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영국은 제국에 속한 국가들을 적용대상으로, 스털링 통화권 국가를 단일한 환율시행 지역으로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는 파운드화의 외환 가치를 보전하고 제국 내 무역을 활성화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상당 기간 자치령 국가와 영제국 식민지들의 협조 체제가 유지되었고, 이것이 후일 새로운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288-9)


"1930년대 이래 스털링 통화권은 제국 내 무역의 활성화와 더불어 영국이 완만한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는 영국 수출품의 주된 소비시장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영국 금융자본의 주요 채무국이자 영국 금융서비스 및 해운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파운드화를 축적하지 못할 때 채무상환 이행과 지불준비금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국가의 지불유예 선언이 계속될수록 파운드화 폭락 위험이 가중될 것이다." "1949년 경제불황기에 파운드화가 다시 폭락하자 영국 정부는 결국 파운드의 가치를 30.5퍼센트 인하한다. 이 당시는 달러결핍시대였기 때문에 스털링 통화권 국가들도 대부분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에즈 위기 당시 파운드화 폭락 우려가 높아졌을 때 이전과 달리 통화권 내 국가들의 동요가 커졌다. 당시 영국 정부는 파운드화 폭락을 방치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289-90)


"수에즈 위기는 세계경제에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스털링 통화권은 런던 시티의 금융자본과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경제 영역이었다. 이 통화권은 영국 경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건전성이나 수지균형에 별반 영향을 받지 않고 관성적으로 지속되었다. 기업가와 상인과 투자자들은 이전부터 익숙한 국제무역과 환거래의 관행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영국은 미국의 여러 지원과 도움을 통해 파운드화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에즈 위기 당시 파운드화 위기는 제국 지배의 오랜 유산인 스털링 통화권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군사개입의 좌절은 그 취약성을 재확인한 사건이었다. 위기 이후 스털링 통화권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와 불안이 국제무역과 환거래에서 기존의 오랜 관행과 익숙함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293)


8장 탈식민화의 정치와 영연방


"영연방의 성격이 크게 바뀌고 그와 함께 회원국들의 결속력이 약화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당시 노동당 정부는 영연방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해럴드 윌슨은 총리직에 오르기 전부터 코먼웰스에 대해 개인적으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영제국에 대한 복고적 유토피아나 대국주의적 편견보다는 그의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비국교도 전통을 지녔으며 세계의 빈곤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는 영국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영연방을 이용하려는 정략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영연방을 통해 개발도상국과 관련된 대외정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그의 국제주의적·사회주의적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윌슨의 제안은 영국이 회원국의 농산물과 원료를 고가로 구매하고, 그 대가로 회원국은 자국의 투자계획에서 영국의 우선권을 인정하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식민부의 경제 관리들은 이러한 정책이 실제로는 영국 경제의 쇠퇴를 가속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305-7)


"그렇다면 당시 경제 실무를 맡은 관리들이 영연방 회원국 사이의 무역 증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1950년대 초만 하더라도 파운드화는 태환화폐였다. 달러부족시대에 회원국 무역의 영국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독일 및 일본의 대두와 더불어 파운드화는 약세로 돌아섰으며 영국과 회원국 간의 무역 비중도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실무 관리들은 회원국과의 무역 증대가 영국에 실익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회원국의 1차 상품을 시가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면서도 영국 수출 증대를 통해 수지균형을 꾀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관리들은 수에즈 사태 이후 영국이 재정위기에 직면했을 때 미국과 캐나다의 보증 및 지원을 통해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들은 영연방 회원국과 무역을 강화할 경우 반대급부로 역외무역, 특히 대유럽무역이 쇠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더욱이 영연방 회원국 모두는 자국의 경제발전에만 관심이 있었다."(309)


"오늘날 영연방은 주권국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일부 국가들이 가입 또는 탈퇴를 거듭하기도 하고, 이전에 영제국 지배와 관련이 없는 나라들도 새롭게 회원국으로 가입 신청을 하기도 한다." "1970년대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 시도와 영연방 사무국 체제의 등장 이후 영연방에 대한 영국 정치가들의 관심은 약화되었다. 영연방은 더 이상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국이 주도할 수 없고 또 영국의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오늘날 영국은 코먼웰스에 관례적인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영연방 사무국의 소재지가 런던이라는 사실은 이전 영제국의 유산을 상징하지만, 1980년대 이후 특히 정상회의는 주로 자치령 국가 또는 아시아, 아프리카 회원국들이 주도한다. 1971년 싱가포르 회의 이후 대부분 격년으로 지금까지 25차례 열렸다. 그 가운데 영국이 개최한 것은 4차례에 불과하다. 이는 영연방의 탈중심화와 다변화를 보여 준다."(314-5)


9장 유럽으로의 복귀


"오늘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중요한 이슈로 제기한 정당은 보수당이다. 영연방에서 유럽공동체로 방향 전환을 처음 시도한 정당도 보수당이었고 1970년대 보수당 집권기(히스 총리)에 유럽공동체 가입이 이루어졌다. 일종의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당시 가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의회 토론 과정에서 국가주권 침해 문제가 논의되었음에도 이런 점들은 의회보고서나 유럽공동체법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당시 영국 정부가 의회주권 문제에 대해서 실제로 관심이 없었는지, 또는 그 심각성이 장래에 문제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중요한 것은 유럽공동체 가입 당시에 영국 정부와 일반 여론에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이 없었다는 점이다. EEC가 유럽통합운동의 산물이고, 통합운동이 초국가적 정치체를 지향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표명해 온 점을 고려하면 의회주권의 전통을 중시해 온 영국에서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329)


4부 제국 이후


10장 제국의 기억과 영연방, 그리고 '상상의 잉글랜드'


"전후 노동력 부족에 직면한 영국은 아일랜드와 유럽 대륙 국가로부터 노동자를 모집했다. 특히 1948년 '국적법'은 아일랜드인에게 자유로운 출입국 권리 및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 시기까지 영국의 이민정책은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유럽인에게만 한정된 셈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영제국 해체가 가속되면서 새로운 영연방국 출신들이 대거 영국으로 몰려왔다. 이는 영국이 제국 지배의 경험으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폈을 뿐만 아니라 경제부흥기에 값싼 해외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당시 노동시장의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인도아대륙, 카리브해 연안국 출신 소수 인종이 다양한 연결망을 통해 영국으로 입국했다. 자유방임적인 이민정책은 이런 경제상황뿐 아니라 백인 자치령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영연방 결속을 통해 미국과 소련에 대응하려는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1968년 8월 20일, 유색인 혐오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존 파월의 연설은 결국 유색인 이민 급증이라는 사회현상이 빚어낸 사건이었다."(347-8)


"유력 정치인과 의원은 물론 언론의 논조는 대부분 파월에 비판적이었지만, 일반 시민의 여론은 파월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소위 '유혈의 강' 연설을 둘러싼 논란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파월 지지자들의 편지 쓰기이다. 몇 주에 걸쳐 파월의 자택, 의원 사무실, 언론사에 엄청난 양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사람들은 개인 상황이나 가정 조건을 넘어 일종의 정치적 힘을 나타냈다. 말하자면 편지 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공동체를 나타내고자 했다. 빌 슈워츠에 따르면, 파월에게 지지 편지를 보낸 사람들의 다수는 백인 여성이었다. 이들 편지에 나타나는 정서는 〈친숙한 세계의 붕괴를 느끼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기억에 자리 잡은 이전의 친숙했던 세계란 본토, 백인 남녀, 변경, 식민지, 백인 정착지, 백인 자치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말하자면 상상된 백인의 세계라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의 무질서를 인식하고 분노한 것이었다."(350-2)


"영제국 역사에서 식민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인종을 기억하는 것이다. 영국인들이 문명을 다른 세계에 전파했다는 의식에 기반을 두기도 한다. 오랫동안 영국인들은 이를 통해 그들의 '백인성'을 확인했다. 1950~60년대 영국인들의 일부는 분명 해외 백인 자치령 국가에서 '상상의 잉글랜드'를 찾았으며, 이들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정신세계에서 이러한 의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백인 자치령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에서 긍정적인 변화는 백인 자치령이 '백인성'을 중시하고 다른 인종에 대한 배제의 원칙을 새롭게 정립한 점과 관련된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치령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강력한 영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대영국' 이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었음에 비해, 1950~60년대 본토에서 해외로 이주한 영국인들의 집착은 오히려 쇠락하고 변질된 영국 사회를 대신해 해외에서 순수한 잉글랜드 또는 '상상의 잉글랜드'를 찾으려는 퇴행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365-6)


11장 다문화 사회의 명암


"에드워드 사이드 이래 문예비평 분야에서 축적된 탈식민이론은 기본적으로 언어 및 문화 중심주의와 관련된다. 이 경향은 인간의 삶 자체를 문화로 본다. 따라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는 단순히 정신활동의 결과물만을 뜻하는 것뿐 아니라, 그 활동 과정과 일련의 실천을 포함한다. 문예비평가들이 보기에, 문화는 주로 의미, 즉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생산과 교환에 관련된다. 의미는 언어에 의해 구성되고 언어는 재현을 통해 작동한다. 언어는 그 기호와 기의를 다른 사람들이 해독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관념과 감정을 재현하고 드러낸다." "로버트 영은 문화는 처음부터 타자, 달리 말해 인종과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문화란 닮은 것과 다른 것(차이)에 어떤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즉, 인종·종족·젠더 등 사회적으로 구성된 차이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배의 사회관계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370-2)


"탈식민담론은 외부 세계에 대한 근대 유럽인들의 인식과 지식체계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 유럽인들은 외부 세계 사람들을 항상 자기와 다르고 열등한 '타자'로 인식했으며, 이 '타자'에 대한 담론을 통해 자신을 스스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계몽운동기 이래 유럽 문화는 〈정치적·사회적·군사적·이념적·과학적으로, 또 상상력으로써 오리엔트를 관리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생산해 왔다.〉 사이드의 문제 제기는 미셸 푸코의 지식/권력모델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타자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식체계가 유럽의 식민지 지배에 중요한 기능을 행사했다는 사이드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식민지 담론은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사이드가 오리엔트 담론 형성 과정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속지학, 역사학, 여행기의 형태로 처음 형성된 식민지 담론의 원자료는 역사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369-70, 388)


"예컨대 리처드 프라이스는 남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코사 주민들에 대한 영국인의 지식체계가 어떻게 변모해 왔는가를 추적한다. 19세기 전반 이들에 대한 선교사 기록은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 준다. 남자는 긍지가 있고 여성은 온순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남성은 선교사들이 만난 종족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체격을 지녔고 여성은 생기발랄하면서도 뻔뻔하지 않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선교사들은 원주민의 생활에 대해 인간 문화의 보편성이라는 맥락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34~35년 무렵 변경지방에서 영국인 이주민과 잦은 전쟁이 일어났다. 정착민 담론이 식민성에 대한 인도주의적 담론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코사인들의 호전성, 신뢰할 수 없는 문화를 자주 언급한다. 이후 이 지역에 관한 새로운 지식체계는 식민지의 열등성을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영제국의 아프리카 정책 수립에 기초가 되었다."(388-9)


12장 브렉시트, 그 이후


"1970년대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 직후 영국의 헌정(憲政) 위기를 강조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이자 좌파 지식인 톰 네언은 브리튼이라는 모호한 영국 헌정이 잉글랜드 민족주의의 대두─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파월주의─와 함께 위기에 직면하리라고 예상했다." "네언이 보기에, 유럽통합은 브리튼섬에서 앵글로-색슨 헤게모니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 헤게모니는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섬나라 근성'과 협소성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그 토대가 잠식될 것이었다. 그는 새롭게 '잉글랜드적인 것'에 대한 열광이 퇴행적 쇼비니즘 및 EU 회의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보았다." "요컨대 브렉시트 선거 결과는 단기적인 요인 못지않게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 이후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른 잉글랜드 중심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장기 요인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네언이 예건했듯이, '잉글랜드적인 것(Englishness)'에 대한 새로운 열광과 퇴행적 민족주의의 대두가 장기적으로 영국 헌정의 해체요인으로 작용한 셈이다."(405-6)


종장 거대한 경험과 유산


"영제국 네트워크가 20세기 중엽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근대 세계에서 영국은 일종의 강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강소국이면서도 선점 효과에 따른 이점을 극대화했다. 해군과 상선대에 바탕을 둔 영국의 해양 지배력에 강력하게 도전할 만한 세력은 근대 산업문명의 초기에는 나타나기 어려웠다. 그 세력이 가시화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나, 그마저도 새롭게 등장한 여러 국민국가 사이의 역학관계와 국제정치 질서의 제약을 받았다. 유럽 대륙의 국민국가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세력균형에 집착하였고 대서양 반대쪽의 미국은 국내 개발과 발전에 치중했으며, 동아시아의 전통 국가들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거나 국제정치에 수동적으로만 영향받는 위치에 있었다. 유럽 대륙의 균형이 깨어지고 미국이 외부로 팽창하기 시작하며 동아시아 국민국가들이 새롭게 깨어나기 시작할 경우, 영제국과 그 네트워크는 충격을 받고 붕괴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416)


"영국의 정치인, 지식인, 그리고 일반 대중까지도 한동안 제국 경영이나 제국 네트워크를 외면해 왔다. 영국의 역사가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부정적 측면을 상대화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덜 사악한 제국이나 선한 제국이라는 수사가 이를 나타낸다. 제국에 거리를 두려는 사회 심리적 경향은 제국의 상실에 따른 충격에서 일찍 빠져나오려는 자기방어적 기제에 해당한다. 영국이 과거 제국 경험을 상당히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18세기 이래 영국은 제국 네트워크를 경영하면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이 이룩한 선진적인 수단과 방법, 그리고 이상을 다른 세계에 확산시켰다. 근대성의 중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산업주의, 시장주의, 대의제 정치, 책임정부제도, 재산권 보장, 시민적 자유 등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전 세계에 퍼졌다. 영제국은 어떤 점에서는 근대 세계와 표리관계를 이룬다."(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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