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국민국가의 계보 - 990~1992년 프리즘 총서 27
찰스 틸리 지음, 지봉근 옮김 / 그린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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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세계사에서의 도시와 국가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국민국가national states─중앙집권화되고 차별화된 자치 가능한 구조를 방편으로 다양한 인접 지역과 도시를 통치하는 국가─는 매우 드물게 나타났다. 대부분의 국가는 국민국가가 아니라 제국이나 도시국가 또는 다른 어떤 형태였다. 유감스럽지만 국민국가라 해도 반드시 국민들이 강한 언어적·종교적·상징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민족국가nation-state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웨덴과 아일랜드 같은 국가가 현재 이러한 이상형에 근접하지만 극소수의 유럽 국민국가만 민족국가로 보기에 적합하다. 영국, 독일, 프랑스는─기본적으로 국민국가이긴 하지만─분명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호전적인 민족성을 보이는 에스토니아, 아르메니아, 그 밖의 다른 지역과 한 묶음인 소비에트연방은 매일 고통스러운 차이를 경험했다." "지배자들 간에 서로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상호 권리를 인정했던 명목상의 독립국가들이 거의 전 세계를 점유했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19)


"유럽에서 국민국가가 태동하고 국가적 군비 확장과 유럽의 긴 헤게모니 장악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들─990년 한참 이후에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지역에서 번창했던 느슨하게 결합된 지역적 제국들─이 유럽에서 득세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학자들이 의문을 갖는 경우는 별로 없다." "명확히 한정된 어느 정도 독립한 국가들로 분할되는 과정과 밀집하고 불균등한 네트워크의 동시 발생은 결과적으로 유럽을 다른 세계들과 구별시켰다. 도시와 국가의 변화하는 지형학 이면에는 (도시를 선호하는) 자본과 (특히 국가 안에서 확고해지는) 강제의 역학이 작동했다." "그리하여 핵심적인 이중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990년 이후 유럽에서 득세했던 국가의 종류와 관련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는 거대한 변형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유럽의 국가들이 결국 국민국가의 다양한 변형들로 통합했는가? 왜 변화의 방향이 그렇듯 유사한데 경로는 다양한가?〉라는 문제이다."(22-3)


# 기존 이론들

1. 국가주의적 분석 : 정치적 변화를 경제적 변화의 부분적 독립 과정으로 보며 특정 국가의 내부적 사건들의 결과로 제시한다.

2. 지정학적 분석 : 국제 체제 내에 '국가 제조 기술자'가 있으며, 국가 구성은 국가 관계에 대한 현재 채제에 강하게 조응한다.

3. 생산양식 분석 : 봉건주의, 자본주의 또는 다른 생산 조직의 논리가 국가 영토 내에서 작동하면서 국가와 그 변화를 추동한다.

4. 세계 체제 분석 : 국가 간의 관계를 경제 구조에서 도출하지만, 개별 국가의 구조를 세계 경제 내 위상의 결과로 간주한다.


"자본을 축적하고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도시들이 만들어졌다. 이 책의 분석에서 도시는 확실히 중요한데, 이는 자본가들이 선호하는 장소이자 그들의 이권을 위한 조직적 동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각 가정의 생존 문제는 고용, 투자, 재분배 또는 다른 강한 연계를 통한 자본의 존재에 의존하는 바, 인구 분배는 자본 분배를 따라갔다(그러나 때때로 자본은 싼 노동력을 쫓아가며, 둘은 상호적 관계이다). 교역, 창고 저장, 은행, 생산은 모두 서로 밀접하게 의존하는데, 서로 인접함으로써 모두 이득을 얻는다. 농업 생산력에 의한 한계 내에서도 그러한 인접함은 조밀하고 차별화된 인구 구성을 촉진시키는데, 그들은 외부, 즉 도시에 이어지는 연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 성장의 혁신은 집중과 축적 사이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 축적이 전반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집중화가 상대적으로 저조한 곳은 훨씬 작은 규모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자본 집중만이 단일하게 부각된 곳은 도시 인구가 중심지 주변에 응집한다."(43-4)


"유럽의 국가들은 실제로 핵심적 활동과 조직의 분야에서 상당히 달랐다. 세 가지 상이한 국가 양식은 990년 이후 중요한 분절의 시기에 유럽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확산하였다. 그 세가지는 조공을 받는 제국들, 도시국가와 도시연합 같은 주권 분할 체제, 국민국가이다. 첫째는 대규모 군대와 차출 기구를 건설했으나 지역 행정의 대부분은 지방 실세들에게 남겨 주었고 그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했다. 주권 분할 체제에서는 연정과 협의 기구들이 전쟁과 차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국가적 규모에서 지속적인 국가 장치가 부상하는 일은 드물었다. 국민국가는 군사 조직, 차출 조직, 행정 조직, 심지어 유통 및 생산 조직조차도 상대적으로 조직적이고 중앙집권화한 구조 내에 통합한다. 이 세 가지 형식 모두의 오랜 생존과 공존은 유럽의 국가 구성이 단일하고 단선적이라는 통념, 또는 국민국가가 본질적으로 우월한 정부 형태라는─실제 점차 우월해지기는 한다─통념에 반하는 내용이다."(49)


"축적은 유럽의 경제사에서 보다 큰 장기적 차이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심 고리는 단순하다. 장기적인 면에서 면에서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전쟁과 전쟁 준비가 유럽 국가들의 주요 구성 요소를 생산해 냈다. 전쟁에 패한 국가들은 보편적으로 수축되고 흔히 그 존재를 마감했다. 국가의 크기와 상관없이, 가장 큰 강제 수단들을 소유한 국가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효율성(투입량 대비 산출량)은 유효성(총산출량)에 이어 두 번째 순서였다. 경쟁, 기술적 변화, 가장 큰 교전 상대국의 규모가 상호작용하며, 전쟁과 강제 수단의 창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광대한 확장을 이루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수록 점점 더 소수의 지배자들만이 자신들이 소유한 정규 자산으로 군사적 수단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지배자들이 단기적 차용과 장기적 조세로 바꾸었다. 두 활동 모두 기존의 자본 집중이 이루어진 곳으로 더 쉽게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곳에서 통치 구조의 변화를 만들어 냈다."(61-2)


2장 유럽의 도시와 국가


"990년,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가장자리에 살았던 대략 3000만 명의 사람들은 역사와 공동의 운명으로 연결된 단일한 집합적 인간들로 자신들을 생각하리라는 어떤 설득력 있는 이유도 없었다." "황제, 왕, 왕자, 공작, 칼리프, 술탄, 그리고 다른 강력한 통치자들은 정복자, 조공 수취인, 임대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영역 내 사람들을 지속적이고 치밀하게 통제하는 국가의 수장은 아니었다. 나아가 그들의 관할권 내에는 경쟁자들과 표면상의 신하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명목상 주권자들의 이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병私兵들이 대륙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다. 유럽 어느 곳에도 중앙집권화된 국민국가 비슷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뻗어서 형성된 원 안에서 수명이 짧은 국가의 주권은 더욱 심하게 분열되어 수백 개의 공국, 주교 관할 지역, 도시국가, 그리고 수도의 작은 배후지에서 중첩된 통제를 가하는 권력체로 분열되었다."(78-80)


"1490년, 유럽의 주변 지역에는 실질적인 영토를 지배하는 지배자들이 자리했다. 오스만제국뿐 아니라 헝가리, 폴란드, 리투아니아, 모스크바대공국, 튜튼기사단의 땅, 스칸디나비아 동맹,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나폴리가 그런 곳들이다. 그러한 권력은 대체로 임대료와 공물에 근거해 유지되었고, 자신의 지역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의 거물들을 통해 지배하였다." "보다 큰 국가들의 부서진 원형 내부에서 유럽은 극도로 주권이 분할된 땅으로 남아 있었다." "유럽의 8000만 인구는 500개의 국가, 국가 지망 세력, 작은 주, 유사 국가 조직들로 분할되어 있었다. 다시 5세기가 지난 1990년, 유럽인들은 통합 작업을 훨씬 더 강화하였다. 현재 6억 명이 유럽 대륙 주위에 살고 있다." "비록 1490년에 존재했던 정치적 독립체들 대부분보다는 크지만, 룩셈부르크와 안도라 같은 소국들은 진기한 것이 되었다. 계산법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유럽 전체는 단지 25~28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82-4)


"유럽의 도시들은 상업과 산업의 우선성에 의해 느슨한 위계를 형성했는데, 거의 모든 시기에 소수의 도시 클러스터들이 나머지 도시들을 확실하게 지배했다." "상업적 농업은 전반적으로 상인, 대규모 자영농, 작은 영지의 영주들을 번창하게 했지만, 대영주가 농촌 환경에서 민중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약화시켰다." "성장하는 도시들은 커다란 이주민 흐름을 생성시켰다. 즉, 행상·상인·하인·장인들이 해마다 계절마다 도시와 시골 사이를 자주 오갔던 것이다." "도시와 농촌 간의 강한 교역의 존재는 지배자들에게 관세와 소비세를 통해 수익을 얻을 기회를 제공했다." "과세의 기회, 영주의 권력, 군대의 공급은 국가가 형성되는 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식량 공급, 이주, 교역, 통신, 취업 기회를 통해 큰 도시 클러스터들은 주변 지역의 사회적 삶에 그 표시를 각인시켰고, 따라서 국가권력을 그 지역까지 확장하려는 지배자들의 전략에 영향을 주었다. 도시 성장의 시기에 이러한 효과들은 더 강화되었다."(92-5)


"강제의 지형도와 자본의 지형도 사이에 오랜 기간 지속되는 불일치는 이들을 둘러싸고 조직된 사회적 관계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진화하도록 했다. 990년부터 현재까지 유럽 전체적으로 자본과 강제에 대한 국가 통제의 변천은 두 개의 평행선 원호를 따라왔다. 먼저 '가산제'의 시대에 유럽의 왕조들은 보통 필요한 자본을 직접 통제 아래 있는 토지와 주민들로부터 공물과 임대료로 차출하였다. 그들이 요구할 수 있는 금액은 통상 엄격한 계약상의 제한 금액 내에 있었다. '중개'의 시대(특히 1400년~1700년 즈음)에 왕조들은 대출, 수익 사업 관리, 세금 취합을 공식적으로 독립적인 자본가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면 '국유화'의 시대가 왔는데, 대부분의 주권자들이 재정적 장치들을 국가 구조에 직접 병합시켰고, 독립적인 계약자들이 관여하는 것을 급격하게 축소시켰다. 근세기 '전문화'의 시대에는 군사 조직에서 재정을 더 확실하게 분리하였고, 고정자본 감독에 대한 국가 관여를 증가시켰다."(101)


"강제의 측면에서도 비슷한 진화가 이루어졌다. 가산제의 시대에 왕조들은 하인, 신하, 왕에게 인력 봉사를 해야 했던 민병대로부터 군대를 모집했다. 그러나 이 또한 계약상의 제한 내에 국한되었다. 중개의 시대(특히 1400년~1700년까지)에 왕들은 상당한 행동의 자유를 유지했던 하청업자들로부터 공급받은 용병들에게 점점 더 의존했다. 다음으로 국유화의 시대에 주권자들은 육군과 해군을 국가의 행정 구조에 직접 흡수했는데, 점차 외국 용병들을 돌려보내고 대부분의 병력을 국가 자체의 시민들로부터 고용하거나 징병했다. 19세기 중반 전문화의 단계에서 유럽 국가들은 대규모 민간 행정가들의 후원으로 시민 군대 체제를 통일하였고, 전쟁 이외의 강제적 사용에 특화하기 위해 경찰력을 분리시켰다. 19세기에 이르면,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군대와 재정 메커니즘을 내재화하였다. 강제와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이는 다양하고 폭넓은 규율·보상·분배·보호 활동과 병행되었다."(101-2)


3장 전쟁이 국가를 만든 방식, 그리고 그 반대의 방식


"강제는 항상 상대적이다. 집중된 강제 수단을 통제하는 누구라도 이웃이 그런 수단들을 구축하게 되면 이익을 잃게 될 위험에 처한다. 1400년 이전의 유럽에서 친족 집단에 의한 대부분 국가의 통치는 그 경쟁을 가중시켰다. 번성하는 친족 집단의 성향은 확장과 점증하는 상속자 수에 비례한 영역 확보를 추구하는 바, 이것이 정복을 조장했고, 따라서 경쟁 관계를 심각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공석이 된 왕위에 대한 권세 있는 왕조의 요구 덕분에 지배자 가족들 간의 결혼은 증가하였다. 주권이 분할된 유럽 지역에서 경쟁자들은 항상 쉽게 닿을 만큼 가까운 관계였지만, 어떤 특정한 중심권이 무한히 확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동맹으로도 항상 유효하였다. 더욱이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같은 보다 큰 국가들은 현재의 주권에 대한 '내부적' 경쟁자들을 오랫동안 품어 주었는데, 그 경쟁자들은 지배에 대한 일부 권리를 주장하는 무장 집단이며 외부의 적에 대해 묵시적이거나 명시적인 연합군으로 공헌하기도 했다."(133)


"모든 국가의 특정한 전쟁 만들기 유형은 밀접하게 연관된 세 개의 요소에 따라 결정되었다. 즉, 주요 경쟁자들의 특성, 외부를 향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지배자 자신과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신하여 지배자가 수행했던 보호 활동의 논리가 그것이다." "17세기까지 줄곧, 대규모 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국내 지배를 위해 무장했고 부분적으로 자율적이던 지역 거물들에 의존한 탓에 그들이 지배자에 반대해 무기를 들 때마다 반복적으로 내전을 치러야 하는 위험에 마주쳤다. 1400년부터 1700년까지의 중대한 시기에 지배자들은 국가권력에 대한 경쟁적 청구인들을 무장해제하거나, 고립시키거나, 동참하도록 하는데 대부분의 공력을 소모했다. 지방 권역에서는 자체의 소규모 경찰 병력을 오래전에 창설하였지만, 유럽 국가들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제복을 갖추고, 급여를 받으며 관료제를 갖춘, 그리고 시민들을 통제하는 데 특화된 경찰력을 확립하였다. 덕분에 군대는 외부 정복과 국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132, 140)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유럽 국가 형성의 중대한 시기였던─유럽 대부분 지역에 배치된 군대들은 전반적으로 대영주와 군사 기획가에 의해 모집된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단순히 군대를 모집하고 이들에게 급여를 지불하는 것만을 수반한 것은 아니었다. 호전적 국가는 그만큼 보급을 해야만 했다. 17세기말 6만 명의 남성으로 된 군대와 4만 마리의 말들은 하루에 거의 100만 파운드의 곡식을 소비했다. 일부는 군사들과 함께 끌고 다녔고, 일부는 창고에 보관했으며, 군대가 위치한 곳이 어디건 대량의 곡식을 구해 주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은 막대한 비용과 조직이 필요했다. 당시의 금액과 임금으로 보면 100만 파운드의 곡식 가격은 일반 노동자 9만 명의 하루 임금과 같은 금액이었다. 군대는 음식 외에 무기, 말, 의류, 막사 또한 필요로 하며, 군대가 크면 클수록 개개인에게 보급품을 제공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리하여 물자 보급에도 관여하게 된 17세기의 용병 사업가들의 거대 사업은 더욱 커졌다."(149)


"역사적으로 대국들이 군사적 비용을 당기 수입에서 지불할 수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그 부족분을 차용이나 또 다른 방식에 의해 해결했다. 즉, 채권자를 기다리게 만들고, 공직을 팔고, 고객들로부터 대출을 강요하고, 정부의 미래 수입에 대한 청구권을 획득한 은행가들로부터 빌리는 것으로 해결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기꺼이 하고자 할 때는 대출 기관으로서, 대출 동원자로서, 그리고 관리자 또는 그 대출을 상환하는 수입의 모집인으로서도 국가에 봉사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국가 경제의 화폐화를 촉진시키기도 했다." "프랑스혁명과 함께 시작된 대중 동원 체제와 대규모 시민 군대의 시대에 국가의 순수 인구 규모는 대체적으로 전쟁 도발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자본가의 활약, 화페화, 활용 가능한 신용, 전쟁 도발의 용이함이 유럽 국가들 사이에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냈다. 이런 점들은 자본가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국가들에서 전시 체제로 재빨리 변동하는 중요한 장점을 제공해 주었다."(157-8)


"해외의 제국은 모국에서 지상전을 치렀던 범주의 국가 구조와는 다르게 건설되었다. 그럼에도 국가와 제국의 관계는 두 개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유럽 국가의 특성이 유럽 외부로 확장하는 형태가 지배적이었고, 제국의 특성이 본국 중심지의 작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와 네덜란드공화국 같은 자본 집중 국가는 주로 교역의 독점권을 향한 무자비한 추구에 몰두했으나, 군사적 정복과 식민화에는 거의 노력을 들이지 않았다. 노르웨이와 스페인 같은 강제 집중 국가는 그 에너지의 대부분을 정착, 토착(또는 수입) 노동력의 노예화, 공물의 강제 징수에 쏟았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절충형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늦게 제국주의 게임에 입장했고, 자본주의와 강제 전략을 결합하여 뛰어난 결과를 만들었다." "정복과 정착 전략은 불가피하게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육군과 해군을 필요로 했는데, 전세계에 걸친 관료들의 그물망이 태동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중앙정부에 관리를 추가해야 하는 일을 만들었다."(171-2)


4장 국가와 시민


"전쟁 만들기와 국가 만들기는 서로를 강화시켜 주며, 국가가 상당한 규모의 인접 영토 주변으로 확실하게 인정받는 경계를 구성하기 시작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구분이 안 되는 상태로 남아 있다. 둘 모두 지역 주민들로부터 자원을 차출─국가 만들기, 전쟁 만들기, 보호를 위한 수단을 국민 대중으로부터 끌어내기─하게 된다. 자원 차출 시도 때문에 국가가 보호에 관여하는 일이 늘어나는데, 이는 선택된 고객에 대한 경쟁자와 적을 저지하는 일이다. 차출과 보호가 확장하면서 국민 대중 내의 분쟁에 대한 판결 요구가 생성되었고, 여기에는 차출과 보호 자체에 대한 법적 규제가 포함되었다." "지배자들이 전쟁과 다른 강제 수단을 위해 지역 경제로부터 더욱더 많은 자원을 인출할수록, 그 경제 내의 주요 계급들은 강제와 전쟁의 영역 바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더욱 많이, 성공적으로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사한 1000년의 범위에서 강제 활동이 명백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175-6)


"산발적이건 대규모건 저항에 직면했을 때 지배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협상을 했다. 납세 저항자를 뭉개고 망설이는 납세자를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 데 '협상'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본보기의 처벌을 빈번히 사용하는 것─저항하는 이들 모두가 아니라 소수의 주모자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 모든 연체자들 대신에 가장 부유한 지역 납세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은 권력자들이 민중 다수와 타협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어떤 경우건, 협상은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을 취했다." "이런 모든 타협은 국가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청원, 국가 대 개인과 집단의 권리, 국가의 시민에 대한 의무를 창출했거나 아니면 확인했다. 그것은 또한 시민에 관한 국가의 권리도 창출했다. 우리가 지금 '시민권'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은 지배자들이 머리를 짜내고, 특별히 호전적 행위와 같은 국가 활동의 수단들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구획된 다수의 협상들로 구성된 것이 맞다."(183)


"1750년 이후 국유화와 전문화의 시대에 국가들은 거의 보편적이었던 간접 지배 체제에서 직접 지배의 새로운 체제로 이동했다. 이는 지역 공동체, 가정, 생산적 기업의 삶에 대한 중재되지 않은 개입을 의미했다." "18세기의 지배자들은 거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세를 증대시키면서, 공동체·가정·기업과 바로 타협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자율적 중재자를 모두 없앴다." "17세기 이전에 규모가 큰 유럽 국가들은 모두 강력한 중재자들을 통해 신민을 통치했는데, 중재자들은 상당히 자율권을 가졌고, 국가권력의 대리 행사를 통해 그들 자신의 이권을 챙겼다." "그러나 인력을 포함한 더 많은 자원이 전쟁에 필요해지자, 그리고 대국들의 정복 위협이 점점 더 심각해지자 훨씬 더 많은 지배자들이 오랜 중재자들을 우회하거나 억압하거나 끌어들여서 전쟁에 충당할 돈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체와 가정에 직접 손을 뻗쳤다. 따라서 국가 상비군, 국민국가, 직접 지배는 서로 인과관계라고 하겠다."(186-8)


"지배자들은 국가권력을 조작하기 위한 더욱 자의식 강한 시도 중 하나로, 직접 지배를 장치하는 과정에서 인구 구성을 동질화하고자 자주 노력했다. 지배자의 시점에서 언어·종교·이데올로기가 동질화된 인구 구성은 왕의 요구에 반대하는 공동 전선을 펼 위험을 주었다. 따라서 동질화는 분리하여 지배하는 정책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 동질성은 많은 것을 보상하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동질화된 인구 구성 내에서 일반 민중은 지배자와 동일화할 가능성이 더 커지고, 의사소통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어질 수 있고, 한 분야에서 작동했던 행정적 혁신이 다른 곳에서도 그만큼 작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통의 기원을 느꼈던 사람들은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여 통합할 가능성이 더욱 컸다. 예를 들어 1492년 그라나다 정복을 완수했던 직후에 스페인은 종교적 소수자들─특히 무슬림과 유대인─에게 개종과 이주 중에 선택할 기회를 주어서 주기적으로 동질화를 촉진시켰다."(191-2)


"직접 통치가 유럽 전역에 확산되자 유럽 보통 사람들의 복지, 문화, 일상은 그들이 거주하게 되었던 국가에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방식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내부적으로 국가는 국어, 국가 교육 체계, 국가 병역,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부여하려고 착수했다." "그러한 점에서 삶은 국가 내부에서는 균질화되었고, 국가들 사이에서는 이질화되었다. 국가적 상징은 결정화되었고, 국어는 표준화되었으며, 국가 노동시장은 조직화되었다. 전쟁 자체는 균질적인 경험이었는데, 이는 군인들이 전체 국민을 대표하였고 시민 대중은 공동의 궁핍과 책임을 감내하였기 때문이었다." "유럽 국가 구성의 후기 단계에서 '민족주의'의 표지 아래 같이 묶을 수 있는 이질적인 현상들이 산출되었다. 그 말은 정치적 독립에 대한 요구에도 그들 자체의 국가를 갖지 못한 주민들의 집단적 행동 동기를 지칭한다. 그것은 또한 유감스럽게도 다른 국가에 강한 일체감을 가진 기존 국가의 주민들의 동기를 지칭하기도 한다."(206-7)


5장 국민국가의 계통


"국가란 명확한 영토 내에서 집중화된 강제의 수단들을 통제하는 차별적 조직이고, 어떤 점에서는 같은 영토 내에서 작동하는 모든 조직들에 대해 일차적 우선순위권을 행사한다. 무장한 남성들이 국가를 만드는데, 그 수단은 주어진 영토 내에서 강제의 수단을 축적하고 집중시켜서, 그 영토 내에서 생산과 재생산을 지배하는 조직과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구별되는 조직을 창설하여, 같은 영토 내에서 다른 집중화된 강제를 압수·포섭·청산함으로써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 안에서 관할권을 실행하면서 구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인접 영토들에 같은 과정을 확산시키고, 중앙집권화되고 차별화되고 자율적인 조직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국민국가를 창안하였다." "비록 국가 창설자들이 항상 정복과 통제의 모델을 의식적으로 따르려 했지만, 그러한 활동들이 낳은 국가의 단계별 구성에 대한 계획을 세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활동은 강제적 통제의 하향식 위계를 필연적으로 창안하였다."(232-3)


"넓게 보면 유사한 방식으로,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세르비아, 브란덴부르크 국가는 호전적인 군주들과 무장한 영주들 사이의 강한 동맹, 귀족과 신흥 중산계급에 대한 통치 권력의 큰 양보, 농민에 대한 합동 착취, 한정된 범위에서 상업 자본에 기초하여 구성되었다." "왕과 귀족의 상대적 무게(전쟁이 지속 가능한 국가 구조를 만들어 낸 정도)는 매우 다양했지만, 이들 국가들은 모두 잔혹한 강제에 크게 의존하였다는 점에서 이웃한 유럽 국가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16세기에 동유럽의 곡물이 서쪽으로 엄청나게 밀려오기 시작하자, 대영주들이 기존 통제 구조에서 운송을 통해 직접 이익을 취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대영주들은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상인들을 억제했고 농업 생산자들을 강압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농노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권력 균형의 상황에서는 상업 확장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건설되지 않았고, 독립적인 자본가 계급도, 유럽의 도시국가를 닮은 국가도 만들어지지 않았다."(250-1)


"우리는 국가 구성의 주요한 선택적 형식들로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스페인의 경로를 대조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유럽 전체의 범위에서 보면 그 넷은 (네덜란드와 베네치아 같은) 자본 집중과 (러시아와 폴란드 같은) 강제 집중의 경로와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는 공통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네 경우 모두 야망을 품은 왕조들이 다양한 성공을 거치며, 16세기와 17세기에 군사력 구축을 위해 지방의 중요 신분을 대표하는 회합들을 분쇄하거나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신분 의회Estates가 복종하였고, 스페인 의회Cortes는 휘청거렸고, 영국 의회Parliament는 지배계급 권력의 방어벽으로 생존했다. 네 경우 모두 자본의 중심과 강제의 중심이 일치했던 점은─최소한 잠깐이었더라도─적시에 대규모 군사력 창설을 용이하게 했다. 그 적시란 대규모의, 고비용의, 잘 무장된 육군과 해군이 국민국가가 헤게모니와 제국을 추구하는 데 엄청난 장점을 만들어줄 수 있는 시기를 뜻한다."(280)


"왜 베네치아나 러시아는 잉글랜드가 되지 못했는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와 이탈리아는 1세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이 국민국가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전 역사가 그들 곁을 맴돌았다. 베네치아는 상업 귀족의 이익에 경도된 국가를 창설했고, 이 귀족 계급은 대규모의 영속적 군사력을 구축하려는 노력에 협조하는 것보다는 유럽 상업 체제의 틈새를 찾아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른바 전제군주에 의한 국가를 창설했지만, 이들은 농민의 노동력과 그 생산물을 국가의 목적에 맞추어 내주는 것을 보류하려는 이해관계를 가진 영주들의 협력에, 그리고 국가가 생산한 이익을 쉽게 소비해 버리는 관료 체제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각기 다른 혁명─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볼셰비키 혁명─이 베네치아와 모스크바 사람들을 서유럽의 강대한 국민국가들을 닮아 가는 새로운 국가들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 계승 국가들도 이전 정체성의 특징을 유지하고 있었다."(280-1)


"중국에 대한 스키너의 설명은 군사력의 구축과 그 조직적 결과들이 자본과 강제의 상대적 무게, 차출과 지배의 '상향식'과 '하향식' 체제, 그리고 도시와 국가의 기능에 따라 유럽의 지역과 지역 사이에 어떤 다양성을 보였는지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비록 모든 국가들이 전쟁과 전쟁 준비에 핵심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러한 공통성 너머에 그들의 지배적 활동들은 자본과 강제와 이전 역사의 네트워크 내 위치에 따라 다양했다. 나아가 유사한 활동이라 해도 언제 어디에서 발생했는가에 따라 다른 조직상의 잔여물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점차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특정 국가의 구조와 활동을 결정했다. 국제전에서 국가의 자원을 성공적으로 전환하는 장점 때문에, 유럽의 지배적인 정치체로서, 그리고 국가 구성의 모델로서 대규모 국민국가가 조공 수취 국가, 연합, 도시국가, 그리고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대체했다. 이러한 국가들이 마침내 유럽 국가 체제의 특징으로 규정되고, 전 세계로 확장하는 데 선봉에 섰다."(281)


6장 유럽의 국가 체제


"990년 무렵, 유럽 지역은 너댓 개의 상대적으로 독특한 국가 집단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동유럽의 정복 정권들이 계속 상대의 지배 영역 내부로 침략했고, 북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와, 남쪽으로는 비잔틴과, 동쪽으로는 스텝 지역의 무장 세력과 관계를 유지했다. 주로 무슬림이 지중해를 둘러쌌고 이베리아 지역 대부분을 뒤덮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 플랑드르에 이르는 상대적 도시 지역에서는 수백 개의 반半자치 세력들이 교황령과 신성로마제국의 관할권 주장 지역과 중첩되었다. 색슨의 영역이 그 지역의 북동쪽 가장자리와 닿아 있었다. 북부 쪽의 다소 분리된 영향력 작용 지역에서는 덴마크 제국이 영국 제도에 영향을 미쳤다. 부분적으로 분리된 이 국가 클러스터들은 곧 보다 강한 상호 연계를 맺는데, 그들은 지중해로부터 북쪽으로의 교역 확대, 스텝 지역에서의 유목민 군대의 끊임없는 출몰, 기독교와 무슬림의 영토 투쟁, 북쪽 해양 전사들의 광범위한 침략을 통해 연계되기 시작했다."(286-7)


"1490년으로 나아가 보면, 500년 전에 유럽인들은 이후 독특해진 두 가지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첫째는 조약, 외교관, 혼사, 그리고 광범위한 의사소통에 의해 연결된 상호 연계 국가 체제고, 둘째는 대규모의 훈련된 군사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공식적 평화협정에 의해 종료되는 전면전이었다. 유럽인들은 전쟁 종료 후, 다수의 국가들이 합의한 문서에 의해 대륙 전체에 걸쳐 국경과 주권에 대한 주요 재편성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낡은 전쟁 형식은 해적질과 강도질에, 몽골의 개입의 마지막 국면에, 발칸 지역을 가르며 일어났던 무슬림과 기독교도 사이의 불규칙한 전투에,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유럽인의 탐험 여행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국가 체제를 닮은 어떤 것이 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나아가 점차 그 참여자들은 도시국가, 연맹, 또는 제국이 아닌 국민국가─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며, 중앙집권화된─들이었다."(288-9)


"19세기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종전 합의는 국가 체제 참여자들을 계속 입장하게 했고, 그 구성원들에 대한 주요한 재편성이 계속 나타났다. 1830년 프랑스혁명 직후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분리 독립했다. 프랑스의 사보이와 니스 병합, 그리고 이탈리아왕국의 창설은 1859년 오스트리아에 맞선 프랑스와 피에몬테의 전쟁에서 야기되었다. 나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북독일연방(제국의 전신이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직접적 결과물)의 구성은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의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남동부 유럽에서 크림전쟁, 오스트리아-독일 전쟁, 그리고 여러 번의 러시아-오스만 전쟁은 매번 오스만 지배의 해체와 강력한 국제적 영향력에 의한 새로운 국민국가 구성을 촉발시켰다. 그리스,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가 그 실례였다. 더욱이 크림전쟁의 종식(1856년)은 오스만제국을 터키로 재구성했는데, 이는 유럽의 구성 방식을 어느 정도 닮은 새로운 국가였다."(297-8)


"역사가와 정치학자들은 흔히 유럽 국가 체제를 정상에 하나의 헤게모니 권력이 있거나 두 개의 경쟁 권력이 있는 단순 위계로 취급했다. 헤게모니를 다투는 전쟁에 대한 모든 이론은 국가들이 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가정 위에 구축되었다. 사실 어떤 단일한 국가도 그러한 모델에 요구되는 방식의 체제를 지배한 적은 없었다. 프랑스의 힘이 정점에 달했던 1812년, 영국과 러시아가 이에 굴복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19세기에 영국이 번창하였던 때,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은 모든 고비마다 영국과 분쟁을 벌였다. 단일한 위계 모델의 결함은 명백하고 치명적이다. 권력의 힘이 즉각 미치는 인접 지역에서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지만 근거지에서 떠날 경우 그 권력이 축소되는 것을 발견한다." "유럽 국가 체제에 대한 더 좋은 개념은 그것을 어떤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보다 더 중심에 있고 영향력이 있지만, 체제 내에서의 위치에 따라 위계는 다른, 지리학적으로 분산된 네트워크로 다루는 것이다."(305-6)


"지난 3세기 동안, 강대국들의 협약은 권력에 대한 국가적 분쟁 발생에 대한 제약을 점점 더 협소하게 만들었다. 이는 국제전의 종결 후 합의의 시행, 식민지의 조직화, 군대와 관료와 다른 국가 장치의 요소들을 표준화한 모델의 확산, 국가 체제를 돌볼 임무를 맡은 국제 조직의 창설, 국경에 대한 집합적 보장,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한 개입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협소화에 의해 국가 구성의 대안적 통로 가능성은 제한되었다. 전 세계에 걸쳐 국가 구성은 어느 정도 계획적인 국민국가─제국도 도시국가도 연방도 아닌─구성으로 통합되었는데, 이 모델은 강대국이 제안하고 보조하고 강요한 바에 따른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1500년에 지구 대지의 대략 7%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갖고 있었고, 이는 1800년 35%, 1914년 84%로 치솟았다. 이러한 자체 확장은 전 세계에 걸친 국민국가의 증식을 촉진하였다. 16세기 자본의 확장과 전쟁의 재조직화 모두 국민국가의 지배력 확대를 더 선호했던 것이다."(319-21)


7장 1992년의 군부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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