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계산기 - 경제학이 만드는 디스토피아
필립 로스코 지음, 홍기빈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계몽주의 학자들에게 시장은 진리의 장소, 자연의 거울이자 산업 사회 이전의 촌락이라는 억압적 사회관계에 맞서는 해방의 힘이었다. 그들에겐 무역이 제공하는 여러 자애로운 메커니즘을 거치기만 하면 자기 이익, 즉 사적인 이윤의 추구라는 것도 공적 미덕의 샘솟는 원천으로 변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제러미 벤담이 착상하고 이후 존 스튜어트 밀이 상세히 발전시킨 영국 공리주의의 프로젝트는 이러한 공적 미덕을 다시 법률로 전환시키고자 했으며, 감옥과 학교 또한 이 새로운 시장 경제의 노선에 따라 개혁하고자 했다. 이것이 19세기 말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들이라 불릴 만한 오스트리아의 <한계주의> 혁명가들, 즉 카를 멩거, 조지프 슘페터, 루트비히 폰 미제스, 그리고 가장 유명한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등이 나타날 때까지의 상황이었다. 이 오스트리아인들은 영국인 스탠리 제번스 그리고 프랑스인 레옹 발라 등과 함께 경제학을 수학적 프로젝트로 재창조했다."(51-2)


"19세기가 되면 어떤 좋은 것의 유용성을 연속의 수학적 함수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등장하게 되었고, 제번스, 멩거, 발라가 각각 독자적으로 한계 효용의 이론을 <발견>했던 것도 그때였다." 그전까지 <효용utility>이란 "단순히 <가치> 혹은 <유용성>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다음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정의를 얻었다. 첫째, 이 유용성이란 오로지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순간에만 관찰과 이해가 가능하다. 즉 어떤 사물의 유용성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욕망으로 실제로 어느 만큼의 행동을 벌이는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둘째, 그 효용이란 단일의 수리적 함수로 표현될 수 있다. 좋음의 본성을 두고 철학자들은 오래도록 입씨름을 벌여 왔지만, 이제부터 분석가들은 그런 논쟁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쓸 게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마다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제각각이니, 그 제각각의 가치 평가를 그들 각각의 행동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만 인식하면 된다는 설명이다."(52-3)


"하이에크 그리고 그의 사상을 물려받은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선택하는 방법을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들의 해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돈을 지불하게 하여 자기들이 거기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하는지를 <보여 주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화폐는 보편적인 매개물이므로 이를 통해서 이질적인 가지가지의 재화 및 서비스들에 대해 한 개인이 갖는 모든 선호 사항들에다가 단일의 서열을 매길 수 있고, 심지어 모든 개인들의 모든 선호 사항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저 기적의 장치인 시장이 자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단일의 척도인 화폐를 사용한다면 인간들의 오만가지 필요, 욕망, 욕구를 모조리 한 줄로 세울 수가 있다는 설명이었다."(59-60)


"경제라는 세계는 우리가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규칙들로 세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실로 매혹적인 질서와 명확성을 가진 세상이다. 이렇게 경제학이 그 세계를 그렇게 잘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경제라는 세계의 조직과 구조와 통치 자체가 바로 그 경제학의 규칙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제학이 조사하는 대상은 인간 세상이며, "경제학이 초점을 두는 것들은 모조리 특정한 역사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로서 무엇보다도 가격과 가치와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경제학이 내놓는 여러 묘사는 이 세상에 대한 묘사인 만큼이나 이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학, 그리고 경제학이 조사하는 세계는 상호 작용과 되먹임의 순환 고리로 강하게 묶여 있다." 경제학 또한 "전문성, 도구화 작업, 언어 등이 긴밀하게 얽히는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이 점에서는 자연 과학과 동일하다. 그런데 자연 과학과 다른 점이 있다. 경제학은 바로 자기 자신을 척도로 삼는다는 것이다."(84-6)


형이상학이 제거된 명징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현실을 파악하는 포퍼의 방법론을 받아들인 "프리드먼은 경제학이란 과학적 탐구의 엔진으로서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여러 예견을 내놓기 위해 여러 가정들을 활용하고, 이를 기초로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해 나가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포퍼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 나아가 버렸다. 프리드먼의 글을 보면 가정들이 정확하지 않아도 이것들이 반증 가능한 예견들을 내놓을 수만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니며, 나아가 여러 가정들이 이런저런 부정확성을 담고 있다면 <오히려> 그 때문에 더 큰 미덕(설명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의미)을 갖게 된다는 뜻까지 담겨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떠받치는 근저에는 또 하나의 좀 더 기본적인 가정이 있다. 이 가정이야말로 위와 같은 경제학 방법론의 모든 주장과 다른 모든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가 되는 가정이니, 그것은 바로 이 세계를 명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88-9)


경제학의 언어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한계 효용과 기회비용이라는 관점에서 선택하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가격, 효용, 가격 대비 성능 등의 언어들 자체가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문제의 성격 자체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과연 <가격>이니 <효용>이니 하는 것들이 현실과 조응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이러한 개념들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이며, 나의 정신과 육체를 매개로 현실에서 작동한다. 경제학의 규칙들과 논리가 움직이는 곳마다 이 세계는 무너지며, 그 무너진 틈은 다시 경제학의 규칙들과 논리가 메꾸어 버린다. 경제학은 우리에게 어느 테두리 내에서 의사 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도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들이 현실 세계에서 내리는 의사 결정의 테두리를 실제로 결정해 버린다."(93-4) 경제학자들이 구축한 세계상은 "<인간이 구축한 미로이자, 인간이 출구를 찾아내도록 설계된 미로>이다."(102)


"경제학의 파놉티콘을 건설하는 그다음 단계는 권력 관계를 완전히 자동적이면서도 연속적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곧 개개인들이 자신의 경제적 주관성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경제학은 개인의 내면에 이런저런 계산과 가치 평가를 형성함으로써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시도한다."(121) 일례로 노르웨이에서 어부들에게 조업량 쿼터 시스템을 도입하자, 이전까지 공유지였던 바다는 조각조각 울타리가 쳐진 개인의 재산으로 변모했다. 어부들은 "화폐로 표현되는 시장 가치를 받아들여 행동을 결정했고, 리스크를 줄이고 수익은 극대화하는 행동을 선호했다. 또한 <평범하고 진부한 프로그램들, 계산들, 기술들, 도구들, 문서들, 절차들의 복합체>를 조심스럽게 실행에 옮기는 가운데 합리적이고 도구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경제적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어부들이 영위하는 삶,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와 온 세상 또한 전혀 다른 것으로 탈바꿈했다."(127)


"계산의 공유는 거의 불가피하다. 우리가 기술적으로 발전된 사회에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남들과 계산 작업을 분배한 덕분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남들에게 계산 작업을 맡기는 양도 커질 수밖에 없고, 위임받은 이들이 계산을 대신해 줄수록 우리의 운명은 점점 더 그들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된다." 경제적 인간이 "합리적 계산을 해내는 것 역시 여러 도구들, 측량 기기들, 계산기들을 통해서 가능하다. 사회학자 미셸 칼롱의 표현처럼, 발명된 도구들은 경제적 행동을 위한 <인공 기관들(의치, 의족 등)>로 변한다. 시장 사회학에서는 이렇게 인간들과 발명 도구들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배열agencement>이라는 다른 말을 이미 사용해 오고 있다. 이는 도구들이 행위자agency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즉 이 도구들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유용한 단어다."(143-5)


마트에서 우리는 "미리 가공 처리가 끝난 사실들만을 받게 될 뿐이다. 계산대에서 나오는 영수증에는 2.78파운드를 절약했다는 가공의 숫자만 나올 뿐이며, 홈쇼핑 채널의 텔레비전 화면에는 몇 퍼센트가 더 저렴하다는 수치만이 등장한다." "계산의 인프라가 은폐된 채로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객으로 변모한다. 즉 만사 제쳐 놓고 가격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고객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판매대에 오른 제품의 "여러 성질들 가운데 오로지 가격만 보여 주면 나머지 요소들은 우리의 결정 과정에서 확실하게 쫓겨난다. 우리가 그러한 가격 차이가 과도한 노동, 과도한 경작, 착취적인 노동 조건 등에서 비롯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해도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어떤 상품이 어떤 조건에서 생산되는지는 상품의 <가격표>가 확실하게 가려 버린다. 가격만이 우리 의사 결정의 틀이 되며, 가격만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147-9)


"어떤 사람이 신용 리스크가 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신용에서 <배제>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신용이라는 희소한 자원에 대해 <더 많이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제 한 사람의 신용 점수는 "그 개인의 인격적 속성이자 계속 갈고 닦아야 할 무엇으로 여겨진다. 마치 대학 졸업장이나 빨래판 복근처럼 말이다. 신용 점수 시스템의 확산은 곧 인격적 관계에 묻어 들어 있었던 대출에서 통계적인 리스크 관리를 통한 대출로의 이동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경제학의 개념들은 여러 기술적 도구들에 새겨져 있다. 그 도구들은 미국 농촌의 가게 점원이 참조하는 채점표처럼 원시적일 수도 있고 피코 스코어의 배후에 있는 알고리즘처럼 현란하고 세련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옛날 주택 담보 대출 시장을 안정화시키는 데 기여했던 사회적 유대를 끊어 내는 일에 일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160-1)


교육을 상품화한 "윌레츠의 주장은 명쾌하다. 학생들을 소비자로 만들기만 하면 대학들도 개선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지불하도록 하면 대학들이 이 <고객들>을 끌어오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므로 자생적으로 시장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시장이라는 장치는 "교육이 가져다주는 여러 혜택 또한 똑같은 방식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학생은 스스로의 경제적 이력을 책임져야 할 개인으로서, 교육을 통해 장래에 엄청난 혜택들을 받게 된다. 따라서 그 비용을 감내해야 할 것은 학생 본인이며, 그 대신 학생은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168) 대학 교육의 상품화는 "여러 가지의 귀결을 가져온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 사회적 재화의 감소를 들 수 있다. 교육이란 그 내재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피어나기 위한 핵심 도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 개인적 출세라는 단기적 목표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177)


경제학자 로널드 코즈에 따르면 "여러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는 비용은 그 문제를 가장 적은 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는 쪽에게 부담시켜야 한다. 지출이 적을수록 '만인이' 더 큰 혜택을 보기 때문이다. 코즈의 규칙은 잘못을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나 무엇이 정의로운 선택인가 등의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비용과 편익이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분배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그렇게 해서 절약할 수 있는 총량이 얼마인가가 중요할 뿐이다."(187) "비용-편익 계산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 우리가 어떤 문제를 경제학적으로 생각하려면 무조건 모든 것에 가격을 붙여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인간의 목숨이라고 해도 말이다. 둘째, 만약 정말로 이러한 분석이 의사 결정의 도구가 되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비용이 어떤 것인지를 보고 나서도(예를 들어 180명 사망, 180명 불구, 2,100대 차량 파손) '태연하게' 그 비용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한다."(191)


"깨끗한 공기와 같이 가격이 붙어 있지 않은 것들을 꺼내 놓고서 한번 가격을 불러 보라고 묻는 것 자체가 그것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이며, 그것을 상품 즉 우리가 거래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는 행위이다. 그런 것들을 지켜 내기 위한 다양한 정책적 대응들이 있는데도 이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그런 방법론으로 얻은 가격 수치만 중시하게 되면 그러한 종류의 성격 변화가 아예 제도로 굳어진다."(225) 장기 매매 시장을 허용하고, 장기의 공정 가치를 구하는 식의 "장기 이식을 둘러싼 주장들을 보게 되면 경제학이란 단순히 현실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경제학은 수행한다. 즉 자기 스스로가 제시한 현실 세계의 묘사를 실제 세계의 무대 위에 그대로 연극으로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제학이 무엇을 분석하는가는 현실 세계에 큰 중요성을 가지는 문제가 된다."(235)


온라인 데이팅의 "여러 규칙들은 개개인들을 서로 교체할 수 있고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체 가능한 존재로 바꾸어 버린다."(276) 온라인 데이팅은 "사랑을 이해하는 독특한 경제학적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랑에 빠지는 일을 상대방의 여러 특질과 양립도에 기초하여 매력을 느끼는 모종의 적극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사이트들의 광고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통제해야지 확률이나 행운 따위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이트들에서 짝이 될 이들을 검색하는 사용자들은 자기를 포함한 개개인들을 여러 성질들이 교차하는 결절점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이 결절점들은 다른 결절점들을 보면서, 또 자기를 검색할 사용자들이 무엇을 내놓을지를 염두에 두면서 자기가 지닌 성질들 하나하나의 가치를 올리려고 노력한다."(287)


오늘날의 자기 이익이라는 개념은 "21세기식 경제 행위자의 계산적·도구적 합리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복잡한 기술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오래된 부르주아의 미덕 따위와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문제의 핵심은 "기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이루어진 무정무감의 합리성이 우리의 삶과 신체의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공간에까지 침범해 들어오는 사태이다. 나아가 이러한 자기 이익이라는 것이 순전히 개인의 수준에서만 현실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는 이미 통치governance의 사회적 장치의 일부가 되어 버렸으며, 우리 모두가 스스로 사업가로 변해 가도록 장려한다."(300) 비용-편익 분석은 "직선적이며, 투명하며, 객관적인 외양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공론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그 주장의 "배후에는 항상 따져 보아야 할 계산 과정이 버티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302)


"자연과학은 정리와 증명, 데이터와 증거들의 끝없는 증식을 추구하며 이를 중시하지만, 경제학은 오로지 희소성 조건 아래에서의 비용과 편익의 비교라는 단 하나의 보편적인 알고리즘 외에는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현실에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경제 분석의 중심을 차지하는 질문이 비용과 편익의 비교라면, 경제적 이성의 중심적 미덕은(그리고 경제학과 관련된 모든 의사 결정, 정책, 규제 등에서도) 효율성이다. 이는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언명이며 명백하게 도덕적인 성격을 띠는 주장이다. 만약 어떤 특정한 행동 노선을 취할 경우 더 적은 수단으로도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이 복잡한 우리의 삶에서 "비용만 빼고 나머지는 완전히 똑같은 행동 노선들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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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3-1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섬뜩한 대단한 책입니다.
읽고 싶은 책입니다. ^^

nana35 2018-03-15 17:14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님에게도 충만한 독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고쳐쓰기 -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괜찮은 자본주의로
세바스티안 둘리엔 외 지음, 홍기빈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고정환율제를 채택한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각국의 국내 금융 분야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부동산금융의 경우에는 금융시스템의 다른 부분들과 단절되어 국가의 긴밀한 통제를 받는 것이 예사였다. 소비자 신용은 종속적인 역할만을 수행하였고, 신용팽창은 비즈니스 부문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소비수요의 역동성이 기초가 된 것은 소득 증대였다.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 이자율에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자본시장에 기초한 금융체제를 가져왔던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조차도 주식시장이 특출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아니었다. 유럽 대륙과 일본 그리고 여러 개발도상국들에서는 은행 중심의 체제가 지배적이었으며 여기에서는 소위 '주거래 은행(house-banks)'이 기업들의 가장 중요한 외부 금융 원천으로 기능했다."(43-4) 이 시스템은 "1960년대 말부터 계속되던 위기를 겪은 후 1973년 2월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46)


1960년대 말 이후 달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미국으로부터 자본이 유출되었지만, 미 중앙은행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미국은 자국 통화의 가치 안정성을 돌볼 필요가 없었으며 그저 그 부담을 다른 나라들에 떠넘길 수 있었다. 미국은 이러한 자신들의 특권을 각별히 이용하였다." 오히려 "1971년 8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은 외국 중앙은행이 보유한 달러는 더 이상 금으로 태환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하였고 이 때문에 달러에 대한 신뢰는 더욱 더 급격히 떨어지게 됐다." 이른바 '닉슨 쇼크'는 고정환율 체제를 잠식해 들어갔다. 달러의 가치절하를 막기 위해 강력한 외환시장 개입 정책을 펼치던 여러 나라의 중앙은행들─특히 제2의 외환 보유 통화로 자리매김한 마르크화의 독일─도 미 중앙은행의 수수방관 앞에 무기력했다. 결국 "독일의 분데스방크는 1973년 2월 12일 미국 달러 매입을 계속할 수 없다고 거부했고, 이로 인해 달러의 과감한 가치절하가 벌어졌다."(46-7)


# 유럽의 화폐 통합 과정

1. 통화 뱀(currency snake) 체제 : 변동환율제가 시행된 후 1972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6개국이 상호간 환율 등락폭을 2.25%로 제한하기로 합의

2. 유럽통화체제(EMS, European Monetary System) : 통화 뱀을 계승하여 1979년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간에 고정환율제 창출

3. 유럽통화연합(EMU, European Monetary Union) 도입 : 1999년 유로화 출범


1960년대말 거의 모든 서방 산업국가에서 실업률은 역사상 최저 수준이었다. "그 결과 나타난 노동 부족 때문에 피고용자들의 시장 협상력이 강력히 지지되었고, 이것이 다시 명목임금의 상승을 떠받쳤다. 이는 한편으로는 단체협상에서 합의한 바의 임금상승 때문이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합의한 임금률 이상으로 임금을 지급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전개된 사회 개혁 운동들은 "민주적 제반 권리의 강화, 기회 균등의 확대, 노동자들의 지원, 교육체제의 변화, 소득분배의 공정함, 여성 해방 등 그 밖에도 더욱 진보적인 사회의 개념과 연결된 여러 사안들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개혁 운동들은 거의 필연적인 부산물로서 더욱 공격적인 임금정책을 낳았다."(54-5)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혁 프로그램을 임금인상과 연계하고, 인플레이션 완화를 위한 임금인상 억제에 반대한 시도들은 향후 반동을 낳는 주요인이 된다.


1973년 오일쇼크가 터졌을 때 "실업률은 여전히 낮았기에 노동자들이 물가 상승으로 인한 (실질)임금의 손실을 보상하기 위한 임금인상을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 결과 임금-물가 상승의 악순환 고리가 시작되었다. 임금이 올라가면서 기업에는 비용 압력이 가해졌고, 이는 다시 물가를 올렸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또한 이와 비슷한 효과를 낳았다. 환율 통제를 걷어내자 수많은 나라들이 자국 통화의 가치절하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외환가치 절하는 수입 가격의 상승을 낳으며, 특히 석유 가격 인상의 경우처럼 결국 물가수준 전반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실질임금은 감소하게 된다. 오일쇼크뿐 아니라 임금-물가 상승의 악순환과 외환가치 절하 같은 효과가 누적적으로 발생한 나라들은 특히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56-7) 여기에는 1976년, 통화위기에 휘말린 파운드의 가치절하로 어려움을 겪던 영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은 IMF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수많은 조건들이 붙기는 했어도 일정한 대출을 받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경제난 극복을 위해 "물가 안정화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노동조합 대표자들을 데려 오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한 뒤, (노동당의) 캘러헌은 마침내 그들에 맞서기로 결심하였다. 이른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이라고 불리는 1978년 말의 겨울이 왔고 여기에서 거대한 파업의 물결이 영국 경제 전체를 휩쓸었으며 사실상 마비 상태로 몰아가버렸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한다면 마거릿 대처가 1979년 5월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처 여사는 승리를 거둔 직후 그녀의 보수적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겼다. 이를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소들은 자유화, 규제완화, 사유화, 그리고 경제성장과 고용에서 큰 감소를 대가로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인플레이션과 노동조합을 반드시 때려잡겠다는 선전포고 등이었다."(58-9)


전후 시기만 해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세계 부동산시장은 금융체제 내에 별개의 부문을 형성하여 금융체제 내 다른 부분들과 거의 무관하거나 관계가 있더라도 엄격히 규제되었다." 그러나 시장자유주의의 세계화와 더불어 "1980년대 초 금융시장의 규제완화가 시작되면서 이런 양상은 크게 변하였다. 첫째, 새로운 대출기관들이 시장에 몰려들어 오면서 경쟁이 격화되었다. 둘째, 이자율에 제한을 두었던 나라들이 이자율 통제를 철폐하였다. 마지막으로, 부동산 대출을 위한 금융시장 자체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부동산 대출을 해준 뒤 이를 매각해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여러 결과를 초래했는데, 무엇보다도 부동산시장과 전국 금융시장, 심지어 국제 금융시장까지 서로서로 긴밀히 연계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전 세계의 투자자들이 유통시장에서 여러 부동산 대출을 매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77-8)


이제 "전체 경제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거시경제학적 접근은 낡은 모자 취급을 당하게 되었고, (효율적 자본시장과 합리적 기대 가설을 바탕으로)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미시경제학적 접근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91) 그러나, 미시적 접근은 미래를 과거로부터 통계적으로 유추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을 외면한다. 일례로, "VaR(위험감안가치, value at risk)란 위험의 척도로서, 포트폴리오가 일정한 기간 동안 손실을 볼 가능성을 얼마간의 확실성을 갖고 보여준다. 그 계산은 전적으로 과거와 관련된 데이터에 의존한다. 방법론적으로 이와 동일한 것이 금융 세계에 잘 알려져 있는 블랙-숄스 모델(Black-Scholes model)이다." 과거 데이터에 기반한 "이러한 위험관리모델들은 경기순환을 더욱 강화시키는 강한 효과를 갖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들은 자산시장에서 거품이 쌓여가는 과정을 더욱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그 거품이 폭발했을 때에는 그 뒷감당 비용 또한 증폭시키는 것이다."(99-100)


"1990년대 초부터 회계 조항들에 도입된 변화들 또한 이 효율적 시장이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미국으로부터 뻗어 나온 움직임으로서, 역사적 원가에 기초한 회계 규칙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지배적인 시장가치에 조응하는 가치 평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자산 가치가 떨어지는 기간에는 "이른바 '공정가치회계'라는 것이 자기자본의 부당한 감소로 이어지게 되며, 심지어 지급 능력의 문제와 생존의 문제까지 나올 지경이 된다. 특히 자산시장 인플레이션의 여파로 각별히 높은 배당금을 지급했던 기업들은 자기자본을 충당하는 데 써야 할 돈을 주주들의 배당금으로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듯 내줬으니, 자기자본 상태가 좋지 못하며 따라서 모종의 위기가 닥쳤을 때에 이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만약 자산들의 가격이 여러 기초여건들을 제대로 반영하는 가격이 아니라면 공정가치회계라는 것도 결국 경기순환을 더욱 증폭시키는 경향을 띠지 않을 수 없다."(100-1)


변동환율제 하에서, "외환시장은 마치 자산시장처럼 기능하여 근본적으로 그곳의 행위자들의 기대와 예측으로 결정된다."(109)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기대와 예측의 형성이란 사회적 과정으로서 역사적 상황, 특수한 제도와 해당국의 상황 등 여러 요인들과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하였다. 경제행위자들이 제아무리 기초여건들을 성공적으로 찾아낸다고 해도 미래의 환율 변화를 알아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112) 결국 변동환율제는 "불안정한 국제 자본흐름이 지배하는 혼돈의 체제이며, 국제무역과 지구적 경제가 작동하기 위한 합리적을 틀을 제공해줄 능력이 없는 체제이다. 하지만 문제는 국내에서 생산된 재화 및 서비스와 해외에서 생산된 재화 및 서비스의 상대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환율의 운동이기 때문에 이것이 경제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 있다. 재화시장, 노동시장, 자산시장 모두가 교란당하지 않을 수 없다."(115)


프리드먼에 따르면 "통화정책은 오로지 가격안정 유지만을 업무로 삼아야 하며, 고용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도록 보장하는 것은 통화정책이 아닌 노동시장의 임무다. 임금형성 메커니즘이 자유시장의 작동이 아니라 노동조합과 사용자 연합 등에 지배당하는 형태가 나타나고 노동의 수요와 공급에서 지역적 불균형 및 직종 간 불균형이 생겨나는 등 노동시장이 교란당하는 것이 실업의 원인─그렇게 나타나는 실업률이 '자연적' 실업률이다─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경제정책에 접근하면 실업과 싸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노동시장의 규제완화가 된다."(140-1) 반면, 케인스는 "노동시장의 역할과 의미를 재화시장에 대한 총수요라는 맥락 속에서 해석한다. 재화에 대한 수요야말로 생산 총량 그리고 경제 전체의 고용 및 실업을 결정하는 주된 요소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노동시장은 여러 시장들로 이루어진 위계 서열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으며 자산시장과 재화시장의 지배를 받게 된다."(145)


금융위기에 맞서 각국 정부가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하면서 쌓이는 "공공부채의 저량(stock)을 GDP에 대한 비율로 측정했을 때 이것이 아주 높다면 무수한 부정적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첫째, 공공부채 수준이 높아지면 재분배에도 부정적 결과가 나오게 된다. 예를 들어 국가가 부채에 대해 지불하는 이자소득은 소득이 높은 집단에 흘러들어가며, 반면에 이 돈의 원천이 되는 조세는 중위 혹은 하위 소득자들이 내는 돈이다. 둘째, 공공부채가 높은 수준이 되면 고금리 시기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렇게 금리가 올라가면 다시 예산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마침내 예산 자금을 더 조달하기 어려운 지경이 될 수 있다. 셋째, 국가예산이 지나치게 부채를 안게 되면 신용시장에서 아예 퇴출당할 수 있다. 이는 특히 부채가 외화로 표시되어 있을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개발이 덜 된 나라들의 경우 최근 몇십 년간 이 때문에 통화위기를 겪은 경우가 허다하다."(204)


"일반적으로 많은 나라에서 정부 부채가 크게 증가하였다. 미국에서는 총 공공부채가 1970년대 초에는 평균 45퍼센트 정도였지만 2010년에는 90퍼센트 이상이 된다(순부채는 65퍼센트 이상)." 이러한 숫자들을 볼 때 "시장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시대 동안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그토록 균형재정을 외치는 경향이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공공의 살림살이를 건전한 방식으로 운영하지 못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1970년대 이후 경험했던 경제적 불안정과 관련이 있으며, 또 경기순환을 극복하기 위한 지출을 충당할 만큼 세금을 올리는 일을 정치적으로 주저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242-3) 공적인 개입 없이는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이 불충분한 시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간 선진국 세계 대부분의 정부가 스스로의 역할을 축소한 결과, 개별 나라의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경제 자체가 실질적으로 안정성의 파괴를 겪어야 했다."(251)


교육과 사회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는 그 계획의 시간 지평이 장기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철도나 자동차 도로에 대한 투자 그리고 교육은 모두 그 혜택이 40년은 족히 지속되는 것인 바, 이렇게 긴 시간의 미래를 놓고서 어느 만큼의 투자가 어느 만큼의 편익을 낳는지를 정확히 수량화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217) "상속세가 너무 높으면 중간 크기의 기업들은 파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 기업 소유자가 죽으면 상속자들이 그 기업의 유동성 자금을 세금 납부에다가 너무 많이 써버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상속자들이 상속세를 즉각 납부할 능력이 없는 기업들의 경우 정부가 사업에 일체 참견하지 않는 무명의 동업자(sleeping partner)가 되는 것도 일책이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상속이 이루어지는 시점부터 기업 이윤의 일정한 몫을 보유하게 되지만, 상속자들은 돈이 생기게 되면 그 즉시 정부로부터 그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222)


의료 부문 역시 정부가 개입하여 적절한 규칙과 규제를 부과하고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을 펼쳐야 하는 영역 중의 하나이다. "의료보험 부문에서는 경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혜택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경쟁을 행하는 방법이 보장성의 정도를 변화시키는 식이라면, 역선택 이론에 따라서 경쟁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을 예견할 수 있다. 즉 보험 계약에서 일정한 조건에 해당하는 치료의 보장성이 갈수록 사라져 마침내 그 치료를 확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들만이 그 치료를 보장해주는 보험을 구매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그 의료보험은 아주 비싸지게 될 것이다. 더욱이 보험회사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치료비를 낮추고 운영비를 줄이거나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가장 건강한 '고객들'을 가입시키려고 경쟁을 벌일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238)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의 증가에 맞서서 모든 형태의 소득에 동등하게 누진적 소득세를 매기고 그리고 여기에 정규적인 상속세까지 배치한다면, 기업 이윤에 대한 조세는 그 중요성이 줄어든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법인세를 낮춘다고 해도 이것이 꼭 공공부문의 자금 불균형을 낳거나 사람들의 소득 및 자산 불균형이 위험할 정도로 증가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법인세를 낮추면 또한 기업 부문의 자본 기초를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되어 기업들이 부채에 의존하는 것을 줄일 수 있다. 법인 기업들에 대한 조세의 그 으뜸가는 목적은 투자를 장려하는 시스템을 조직하는 것이어야 한다."(222-3) "강력하고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정부는 튼튼한 수입을 필요로 하며, 이 수입은 오로지 광범위한 조세와 누진적 소득세 체제로 최고 구간 한계세율이 50퍼센트에 근접하거나 그를 훌쩍 넘도록 만들어야만 제대로 보장될 수 있다."(252)


"경제성장은 분배가 더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을 요구하며, 소득이 낮은 이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통하여 소비를 늘리도록 해주는 분배를 요한다. 그렇지 않고서 소비수요를 충분히 성장시키려면 일부 임금노동자들이 점점 더 많은 부채를 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과 여러 나라에서 서브프라임 위기를 겪은 이후, 명백히 막아야 할 사태임이 분명해졌다." 사람들은 일자리와 소득이 불확실해질수록 "가정경제 면에서 미래에 대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당장의 소비수요는 더 낮아진다." 또한 소득분배는 국민소득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몫에 달려 있는데, 이것은 최근 몇십 년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하락한 바 있다. 이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금융체제의 권력이 점점 커져서 더 높은 이윤 마크업을 강제할 수 있었다는 점을 반영한다. 만약 안정된 성장을 얻고자 한다면 임금이 차지하는 몫을 다시 올려야만 하며,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금융시장의 개혁을 통하여 이뤄져야 한다."(257)


"지난 몇 십 년간 금융시장 규제의 개혁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규제 당국조차 효율적 시장이라는 가설에 대한 신앙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규제는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270) 그러나 현재 우리가 처한 지구적 금융 체제는 그에 걸맞는 지구적 관리를 필요로 한다. 한 국가의 규제를 피해서 다른 나라로 이전할 수 있는 규제 차익이 가능해지면 "은행들과 여타 금융시장 행위자들은 당연히 가장 규제가 가벼운 법체제나 장소로 활동 거점을 옮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림자은행 체제'라는 것이 생겨난 이래 지난 몇십 년간 목도해온 바이다. 그림자은행 체제는 여러 나라의 내부로부터 생겨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반적으로 규제 수준이 낮은 나라로 여러 거래를 이전함으로써 생겨나기 때문이다."(272)


국제적 자본이동을 규제하지 않는다면, "고정환율제를 쓰든 변동환율제를 쓰든 시장의 힘만으로는 지구적인 경제 안정과 번영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찍이 케인스는 "원칙상으로는 고정환율이지만 국가들 간에 경상수지 불균형이 출현하게 될 경우에는 새로 조정이 가능한 환율체제를 제안한 바 있었다. 이렇게 환율은 기축통화와의 등가를 중심으로 일정한 폭으로 오르내리게 되지만 그 진폭은 가급적 적어야 한다. 국가 간 경상수지 불균형이 발생했을 때의 조정 메커니즘으로 케인스가 그렸던 것은 흑자를 본 나라에서는 경기부양 정책이, 적자를 보고 있는 나라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긴축정책이 벌어지는 모습이었다." 나아가 케인스는 "적자국과 흑자국 모두에 대칭적인 조정과정을 장려하고 강제하기 위해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들이나 흑자를 보는 나라들이나 모두 일정한 징벌적 조세를 도입할 것을 요구하였다."(295-6)


"한 나라의 국내 통화를 국제 통화로 그대로 쓸 경우 그 통화를 쓰는 나라들은 상당한 이점을 누리게 된다. 이 나라들은 자국 통화로 외국에서 차입을 해 올 수 있으며 자신들 대외무역의 큰 몫을 자국 통화로 거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들의 지폐와 주화는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며 심지어 통화가 미약한 나라에서는 그 나라 통화를 밀어내기까지 하므로, 이를 통해 상당히 높은 소위 '화페주조세(seignorage)'의 이윤을 실현할 수가 있다. 하지만 불리한 점들도 있다. 그 하나는 각국 중앙은행들과 민간의 경제행위자들이 자신들의 화폐 자산을 보유할 때 대부분 국제통화로 보유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투자는 단기 투자이며 그 결과 특히 국제적으로 중요한 준비통화 몇 가지가 함께 쓰이는 특징의 통화체제에서는 통화에서 통화로 자산을 재구조화하는 일이 벌어질 확률이 높다."(302)


"그러한 재구조화가 벌어질 때마다 그 통화를 발행한 나라는 외부에서 비롯된 경제적 혼란을 겪게 되고 그 여파로 통화 발행국만이 아니라 세계경제 전체가 부정적 효과를 입게 된다. 더욱이 국제통화를 발행하는 나라는 또한 그 통화에 대한 높은 수요 때문에 끊임없이 자본이 유입되는 결과를 보게 되며 이 때문에 지속적으로 환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이에 따라 지속적이고도 높은 경상수지 적자에 봉착하게 되며 이는 다시 국내 경제의 성장에 질곡으로 작용한다. 또 그런 나라가 적절한 통화정책을 추구해줄 것이라는 보장도 있을 수 없다." 달러 지배가 초래하는 위기를 "피하기 위한 현실성 있는 구상 하나는 IMF가 국제통화를 창출하되 이는 각국 중앙은행들 간의 거래에만 쓰이도록, 그리고 그들 간의 국제적 준비금으로만 쓰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의 이점은 "전 세계의 중앙은행들이 안정된 준비통화를 갖게 된다는 데 있다."(303-4)


# 새로운 패러다임의 경제성장을 위한 세 가지 질문

1. 우리는 어째서 이미 우리가 달성한 생산수준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경제성장을 원하는가?

- 인류의 대다수는 아직 빈곤선에 머물러 있으며, 부의 재분배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2. 환경 기반을 파괴하지 않고도 지속 성장이 가능한가?

- 장기적으로 재생불능의 투입요소를 사용하지 않는 생산과 소비는 불가피하며, 여기에 필요한 기술혁신 가능성은 낙관적이다.

3. 우리가 생산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를 실제로 찾아낼 수 있는가?

- GDP 측정 방식을 바꾼다. 즉, 소비재 중심의 재화와 서비스 측정을 친환경, 건강, 육아, 오락, 돌봄 등의 서비스 측정으로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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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
조이스 애플비 지음, 주경철.안민석 옮김 / 까치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자본은 대개 무엇인가를 생산하여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서 사용될 때에 자본이 된다. 그런 사적투자의 원칙과 전략이 지배적인 때가 되어야 비로소 '자본(capital)'에 '주의(ism)'를 붙일 수 있다." 혁신이 관습을 이기기 위해서는 "행운을 동반한 많은 요소들이 필요했다. 결의에 차 있고 단련된 개척자들은 원래의 질서로 복귀하라는 명령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뿌리를 내릴 때까지 지속적으로 혁신을 추진해야 했다. 그 과정은 작은 변화가 계속 누적되어 결국 큰 변혁을 일으키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제방에 작은 구멍이 뚫려서 그 안에 갇혀 있던 엄청난 에너지가 일단 분출되기 시작하면 다시는 그 구멍을 메울 수 없는 현상과 유사했다."(15-6) 16세기 영국에서는 초기의 사업적 성공이 지속적인 다른 혁신들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발생은 민족적 우월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발적 사건과 우연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23)


스미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란 '거래하고 교환하려는' 사람들의 보편적 성향에서 자연스럽게 출현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제발전이 그런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촉진시켰다." 19세기의 사회 혼란을 목도한 마르크스는 "그런 강제력을 새로운 계급관계의 형성에서 찾았다. 그것은 생산활동 과정에서 서로 공유하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사람들이 연합하는 것이다. 베버는 진보적인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새로운 가치, 관습, 사고방식이 어떻게 전적으로 다른 생활 리듬과 도덕적 어휘를 가지고 있었던 전근대 유럽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베버의 결론은 자본주의가 "소위 '자본주의 정신'이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라는 것이었다.(24-6) 자본주의는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투자자들의 요청에 부응하는 경제관행들에 뿌리내린 체제"로서, "단순한 경제체제가 아니라 문화체제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요인들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36)


자본주의를 만든 변화를 추적할 때, "구례의 상업관행과 산업생산의 혁신을 구분"해야 한다. "교역 루트와 파트너의 확대가 가지는 중요성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자본주의 역사에서 교역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핵심은, 그것이 자본주의 이전에도 수 세기 동안 존재했으며 또한 자본주의 없이도 꾸준히 번성했으리라는 점이다." 17세기 중반 새로운 교역로가 열렸을 때, "수천 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온 생산방식을 변화시킬 놀라운 기계들이 연달아 발명되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관한 새로운 설명이 등장하여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어온 전통적 지혜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당시 사람들이 예측했으리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43) 저자는 "신세계의 발견과 자본주의의 출현을 연결지어서 생각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통념을 깨고자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교역의 확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다른 태도와 기술들을 필요로 했다."(65)


"활자의 발명으로 인쇄비용이 하락했고, 일종의 출판시장이 형성되어 탐험의 소식들을 전 유럽에 전파했으며, 그리스의 천문관측의와 나침반은 대양항해를 뒷받침했고, 이탈리아의 복식부기는 상인들의 이윤관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런 발전들이 모두 산업화에 기여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다만 자본주의 발전에 유리한 영향을 미친 요인들이었다. 자본주의는 식량을 재배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 다른 차원의 사회적 역동성과 혁신을 필요로 했다." 그런 점에서 영국은 주변국들과 다른 길을 개척했다. "영국 정부는 철저히 귀족들을 장악했지만, 그 귀족들 가운데 상당수가 새로운 기업활동에 열광적으로 참여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귀족들이 농업개량을 후원했다는 사실이다. 농업의 발전은 얼마나 많은 노동자와 자본을 다른 경제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지를 결정했다."(66)


기근이 일상적이었던 전근대 시기까지 "곡물은 가장 높은 가격을 찾아서 자유롭게 유통되는 상품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차지농이건 자영농이건 지주이건 간에 농부가 곡물을 재배했다고 해서 그 수확물을 진짜로 소유하지는 못했다. 그는 단지 곡물이 밭에서 시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보살피는 사람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밀가루를 빻는 제분업자와 빵을 굽는 제빵업자는 정해진 방식에 따라서 마무리 공정을 진행하여 빵이라는 최종적인 결과물을 지역의 순회재판소에서 정한 가격에 판매했다."(68) 17세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대략 80퍼센트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냉혹한 통계치를 바꾸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70) 식량가격이 떨어져야 "지주나 도시 부유층이 아닌 사람들도 공산품과 수입물품을 구매할 수 있다.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기근으로부터 영구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이 필수적인 변화들이 유달리 관습에 집착하는 농촌 공동체에서 시작되어야 했다는 사실이다."(82)


"네덜란드의 일부 농민들은 매년 경작지의 3분의 1을 휴경하는 오래된 중세의 관행을 중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경작면적을 3분의 1 가량 늘렸다. 휴경지를 없애고 땅을 네 부분으로 나눈 다음 계절에 따라서 곡물, 순무, 건초, 클로버 순으로 돌려짓기를 했다. 클로버는 토양에 질소를 공급한 후 가축의 사료로 이용되었다. 성장의 선순환이 쇠퇴의 악순환을 대체했다. 몇몇 지주들과 농민들이 이런 생산성 향상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이제 역사상 최초로 기근의 경제로부터 영구적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일부 영국 농민들은 "네덜란드식 4포제(four-field rotation)를 모방한 반면, 다른 이들은 업앤드다운(up-and-down)식 경작을 받아들였다. 이 경작방법은 지력이 가장 좋은 땅에 3-4년 동안 곡물을 경작한 다음 5년간 방목지로 활용하는 식이었다. 이 기간 동안 가축의 분뇨와 질소고정 식물들이 다시 지력을 회복시켜주었다."(85-6)


농업개량과 시장 확대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연이은 풍작은 지적인 측면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변화를 덜 위협적으로 생각했고, 자연에 덜 굴종했으며, 권위에 순종하는 경향도 줄어들었다."(91) 도덕주의자들은 여전히 "공동체 경작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상호간의 도리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농업기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에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그들은 농부가 융통성 있게 목초나 곡물을 재배하고 방목지에 물을 대며 자신만의 윤작을 시행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들이 제기하는 이상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형제애를 기르는 것은 지혜와 통찰, 기율과 지성을 사용하여 자연의 부를 늘리려는 개개인의 노력에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94)


"농업개량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사실 그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었다. 역사 인구학자들은 출생과 사망의 증감과 함께 곡물가격의 등락을 재구성하던 중 영국 경제사에서 결정적인 기준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1648년에서 1650년 사이에 지독한 흉년이 발생한 다음 곡물가격이 치솟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 곡물가격이 이따금 등귀騰貴하더라도 기근이 재난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농업생산성과 더불어 구매력도 증가하여 "식량이 부족한 시기에는 다른 곳에서 식량을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네 기사 가운데 하나는 이제 영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엄격한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그후에도 잔존한 일련의 사회적 관행들 역시 서서히 쇠퇴해갔다. 기근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영국은 1819년에 마지막으로 대기근을 경험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다."(95-6)


"사회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는 주된 이유는 새로운 것은 반드시 문화적 형태로 통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현과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사람들이 혁신과 그 영향을 평가하고 그것이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찾아내며, 또 그것이 공동체의 다른 측면들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101)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죄악에 물든 존재였다. 인간의 본성을 그런 식으로 본다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을 가지고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시장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관한 새로운 진실은 스미스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이 새로운 관념들은 "이미 상당 기간 존재했으므로 스미스는 그것들을 당연시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새로운 관념들이 보편적 진실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것이다."(104)


17세기 초반, 경제활동의 중심 이데올로기는 제로섬 가정에 근거한 중상주의였다. 즉, 일국의 부는 수입보다 수출이 많을 때 생겨나며, "화폐는 그저 수동적으로 상품이동의 반대방향으로 이전될 뿐"이라는 주장이다.(110) 무역차액론을 반박하고 자유로운 기업 활동이 국내 수요를 진작시켜 국부를 창출한다는 새로운 견해는 "소비가 실제로 경제발전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정말로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엘리트들은 너무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경멸해왔기 때문에 그들이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이런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보통 사람들은 고집 세고 게으르며 조잡하다는 낡은 생각이 하층민에 대한 상류층의 사회적 통제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실제로 18세기에 이르면 노동자들로 구성된 "거대한 국내 소비자층이 영국의 상업 팽창을 가능하게 하고 또 시장에 의존하는 대단히 정교한 물질문화를 자극했다."(119-20)


"명심해야 할 것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충동적인 인물들과 달리, 새로운 영국의 소비자들은 각자의 환상을 즐기기 전에 고된 노동규율에 적응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러고 나서야 욕망에 대한 호소가 억제와 조심스러움에 대한 요구를 대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 방식으로 자본주의는 옛 사회윤리를 제압해갔다."(121) 영국인들은 시장을 "면대면 흥정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계약이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실체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18세기를 거치면서 가격, 수요, 무역정책 등에 관한 저술들이 상당히 정교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화폐, 식량, 토지는 특별한 지위를 상실하고 가격과 비율에 따라서 평준화되었다. 거래 당사자로서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믿음은 인간이 본래 불평등하다는 널리 퍼진 믿음을 교묘하게 약화시켰다. 머지않아 도덕과 고정된 신분제도의 수호자들도 교환 가능한 시장 참여자들이라는 가장 대중적인 관념을 수용해야만 했다."(129)


"17세기 후반의 정치는 유럽의 무역 패턴에 변화를 가하여 자본주의의 역사를 바꾸었다. 왕조 간의 격렬한 경쟁은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및 네덜란드, 스페인과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 및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내 영방국가(嶺邦國家 : 독일과 이탈리아가 민족국가로 성장하기 이전에 각 지역이 분할되어 독립 주권을 누리던 지방국가)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 국가들은 1689년부터 1815년까지, 총 63년 동안 8차례에 걸쳐서 다양한 조합을 이루어가며 서로 전쟁을 치렀다. 이런 적대행위들로 인한 한 가지 중요한 결과는 그 이전 두 세기 동안 상당히 증가했던 유럽 내 교역의 감소였다." 유럽 열강들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면서 "일종의 딜레마가 발생했다. 교전국가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와 신세계에서 부를 수취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수익성 있는 교역을 통제하려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보면 그것이 더 큰 호전성을 유발했던 것이다."(139-40)


자본주의의 새로운 점은 "전대미문의 규모로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야만성이었다."(140) 아메리카의 노예제 플랜테이션에 "자본을 투자한 사탕수수 경작자들은 그들의 노예와 토지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빠른 이윤 회수를 위해서 지력의 쇠퇴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설탕으로 버는 이윤은 엄청났고 플랜테이션 소유주들 또한 지독히 잔인해서 노예들은 문자 그대로 죽도록 일했다. 카리브 제도의 노동력은 10년에서 13년 주기로 교체되어야 했다."(147) 일단 노예제가 정착하면, "아프리카인을 비난할 만한 사항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들의 검은 피부는 검은 악마, 암시장, 암흑가 같은 경멸적인 심상과 표현들을 연상시킨다. 여기에는 또한 놀랄 만한 순환논리가 작동했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노예제에서 발견하는 매력적이지 않은 특징들─게으름, 무례, 아둔함, 무기력─은 다시 노예화를 정당화하는 데에 동원되었다."(152)


자본의 가혹한 착취는 유럽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세기 넘게 지속된 산업혁명기 동안, 영국에서 작업장 내 변화의 속도와 규모에 반대해서 발생한 직접행동은 400건이 넘었다. 재산의 파괴는 지주들과 제조업자들, 금융가들과 상인들의 무자비한 대응을 불러일으켰다." 1846-1848년에 발생한 아일랜드 기근사태를 보면, "수십만 명의 남녀노소가 굶주리고 있었지만, 아일랜드의 곡물은 번영하는 잉글랜드로 수출되었다. 왜냐하면 부재지주가 소유한 토지에서 생산된 식량을 경작자가 소비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은 종종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을 완화시켜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업무의 균등화, 항시적인 소음, 사고발생에 대한 끊이지 않는 두려움 등으로 인해서 육체노동을 더 힘든 고역으로 만들었다. 기계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기계 소유주들이 자신들의 투자자본을 통해서 최대의 이윤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강도 높은 노동이 일반화되었다."(173)


1789년, 미국은 13개의 반半자치주들을 모아서 단일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헌법을 도입했다. "미국의 자유주의 사회의 기반을 놓은 것이 헌법이라면 자유주의 사회의 기틀을 짠 것은 기업 중심의 자유경제였다. 헌법의 비준 이후에 새로운 경제질서가 형성되었고 영국이 지배하던 경제질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토지와 신용에 대한 제국의 지배를 제거함으로써 수천 명의 행위자가 큰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났다. 정부권력을 탈중앙화하겠다는 제퍼슨의 의지는 농촌지역에도 기회를 부여했다."(198) 공화국의 건설과 함께 "예기치 않은 속도로 확산된 민주주의는 젊은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영국으로부터 해방되고 식민지를 지배했던 계급의 정치권력이 사라지자,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제퍼슨과 그 후임자들이 규제를 풀어버린 경제 안에서 그들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었다."(203)


"미국에서 민족주의가 경제발전을 장려했다면 독일에서는 서로 다른 경제체제들을 근대화하는 작업이 민족형성의 수단이었다." 독일 지역의 "민족 만들기는 경제발전을 위한 노력에 도덕적, 낭만적 그리고 미학적인 호소력을 부여했다."(189)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단일 무역 공동체를 결성하는 와중에,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여 독일 통일을 한걸음 더 진전시켰다. 예전에는 경제가 강하거나 약하다고 표현되었지만, 영국이 생산성에 대한 기존의 기준으로부터 점점 더 빠르게 멀어지면서 경제는 선진적이거나 후진적이라고 표현되었다." 이제는 경제가 "발전 혹은 퇴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대가 팽배했다. '퇴보'는 '전통'과는 다른 느낌을 전달했다. 경제적 후진성 개념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프랑스, 영국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켰다. 역사는 곧 진보를 향한 움직임이라고 보는 직선적인 관점에 매우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 관점이 야기한 최초의 충격을 이해하기 힘들다."(193)


"자본주의하에서 저축을 새로운 사업에 대한 투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투자자들을 손실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했다. 유럽에는 제대로 동원하기만 하면 산업화에 이용할 만한 돈이 충분히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은행이 필요했다. 은행은 저축하는 사람들을 투자자로 바꾸어서 자본이 산업계로 흘러들어가도록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09) 법인이라는 법적 형식만큼 산업 금융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없다. "법인은 기업의 소유자에게 유한책임을 부과한다. 법인(法人)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상의 인간을 만들어서 세금을 내고, 회사 이름으로 고소해서 빚을 받아내고, 반대로 고소를 당할 수도 있는 주체로 내세운다. 법인은 돈을 빌릴 수 있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 일반 대중들에게 주식을 팔 수 있다." 법인은 인공적이기 때문에 "파트너십이 내포하고 있는 해체 위험성을 없애줌으로써 기업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다."(214)


"자본주의는 경제활동에 전대미문의 자유를 부여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역사는 개인의 도전 이야기로 가득하다. 과학과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은 19세기 기업가들에게 방향을 제시했으며, 그들은 새로운 과학기술을 다듬어서 자신의 상업적 가능성의 실현에 이용했다. 기업가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서 몇몇 사람들이 자신만의 거대한 경제적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철도계의 밴더빌트, 철강업계의 카네기, 석유업계의 록펠러 같은 "산업계의 리바이어던은 전제군주와도 같은 권력을 가졌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 초강력 경쟁자들이 경쟁을 감소시켰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시장 점유율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이 운영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거대해진 탓에 이제 이 기업들은 거대한 법인회사로 발전했고, 이런 형태의 기업이 20세기의 자본주의를 특징짓게 된다."(224-5)


"미국인들은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이상을 열렬히 숭배했지만 일반적으로 부의 불균형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보통 사람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제퍼슨은 "연방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부를 소유한 엘리트 집단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241) 미국에서 백인 집단의 균질성은 "소비재의 대량시장화라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현상을 가능하게 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차별화를 시도하기보다 이웃이 가진 것을 구입하기를 좋아했다. '존슨 네와 같아지기'는 차별화의 노력이 아니라 동질성의 추구였다. 사람들은 친구가 가진 것을 자신도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동질적인 중간집단에 속한다는 것은 매우 편안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대량생산에 매우 적합했다."(247) 소비재의 유혹은 필요가 아니라 욕구에 따르는 새로운 소비 패턴을 창출했고, "회사들은 소비자의 취향, 곧 어지러운 속도로 질주하는 대중의 변덕과 씨름해야 했다."(249)


"20세기 초에 미국이 눈부신 속도로 다른 모든 국가들을 앞지를 때, 미국식 대량생산과 경영조직으로 인해 거침없는 발전은 자본주의적 기업의 논리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이런 전통적인 해석은 사실을 오도한다. 미국 기업들의 합병과 재조직은 필연적이지도 않았고, 또한 더 큰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게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 환경과 사회적 가치의 산물이었다. 세 가지만 들어보도록 하자. 약한 정부, 싸고 풍부한 노동력, 표준화된 상품을 수용하는 일반 대중. 미국인들은 모양도 비슷하고 맛도 비슷한 값싼 물건들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역할에 기꺼이 만족했다. 표준화된 제품들에 대한 이런 수용성은 회사들이 대량생산 과정에서 가격절감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든 요인이었다. 이는 구매자들이 여전히 정교한 수제품들을 선호했던 유럽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반응이었다."(290-1)


"대공황 이전까지 진보는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미국 경제는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더 큰 정도로 소비자들에 의존했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다." 계절적 성격이었던 실업은 이제 영구적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감을 잃고 구매를 중단했다. 저축과 은퇴의 계획은 폐점, 퇴거, 도산으로 변모해갔다. 가족 구성원 전체가 실업상태에 놓였다. 각 민족집단별 상호부조협회의 자선 네트워크와 교회 복지사업은 한계점까지 내몰렸다.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은 경제가 불황에 접어들었을 때 개인적인 구제책에 의존해왔는데, 대공황은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303) 어디에서나 가혹하고 장기적인 고통을 안겨준 대공황은 "경제가 스스로를 교정하는 내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대공황은 "통화, 신용, 상품의 흐름을 안정시킬 (새로운) 메커니즘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306)


"전후 각국의 지도자들 앞에는 세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그 길은 각각 '지시의(indicative)' 길, '명령의(imperative)' 길, '정보제공의(informative)'의 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에서 지도자는 국가가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방향을 제시한다. 두 번째 방법에서 지도자는 명령을 한다. 세 번째 방법에서는 시장의 체계화된 언어가 구성원들의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정부 역시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대신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경제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급진적인 계획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뉴딜을 주도했던 인사들은 정치적 통제에 보다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을 거치며 그들은 이내 기업가들로 대체되었다. 소위 '연봉 1달러의 사나이(dollar-a-year man)'라고 불렸던 이 기업가들은 전시의 생산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런 성공을 통해서 그들은 대공황기에 잃어버렸던 대중들의 신뢰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318-9)


# 지시의 길 : 프랑스, 영국, 스웨덴 / 명령의 길 : 소련 / 정보제공의 길 : 미국


"서유럽 중에서도 유럽 대륙에 위치한 국가들은 코포라티즘(corporatism, 국가의 정책결정에 유력 기업이나 단체의 참가를 요하는 정치제도) 경제를 받아들였다. 정부는 재정 및 통화정책을 통해서 성장을 이끌고 나갔고, 중앙은행은 실질적으로 벤처자금을 독점했으며, 노조는 법인 이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대표권을 지켰다. 안정적인 성장은 공동의 목표였다. 이런 특징은 특히 독일에서 가장 뚜렷했다. 나치에 대한 경험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대산업가를 포함한 거의 모든 독일인들이 강력한 국가를 두려워했다."(325) '초국가 연합'이라는 구상은 1951년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ECSC) 창설, 1957년 유럽 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 탄생,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한 유럽 연합(European Union, EU) 출범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최초 12개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럽 시민권이 탄생했다."(326)


"전후 경제의 또다른 새로운 특징은 급격한 기술변화였다. 기업가들은 다음에 치고 나갈 경주마가 누가 될 것인지 끊임없이 살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엉뚱한 경주마를 찍을 위험이나 예상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실현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새로운 탄생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것을 파괴한다. 기존의 것은 대개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했고 생산 및 판매 직원들 모두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이런 파괴의 과정은 기업가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352) 노동의 미래 역시 밝지만은 않았다. "노동자들을 탈인격화하는 경제분석 용어들로 인해서 노동의 승인을 위한 투쟁은 더욱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분석에서 노동은 단지 사업의 주요 구성요소 중 하나, 즉 자본 및 토지와 한묶음일 뿐이었다. 이런 용어는 미묘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탈인격화시켰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물질요소 사이의 엄청난 차이점을 모호하게 만든 것이다."(358)


"자본주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아마도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는 점일 것이다." 급격한 변동 그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 요소가 되었으며, 자본주의는 "누가 이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기도 전에 이미 자기지속적인 체제로 굳어졌다."(368) 번영의 시대를 이끈, "전후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시너지 효과는 1973년을 기점으로 붕괴했고, 그후 가변성과 유동성의 시대가 열렸다."(412) "자본주의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자본주의자들의 행동은 반복된다. 위기가 임박했음에도 그것을 막으려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누구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가 어떤 성질을 강화시키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자신감으로 가득찬 세일즈맨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은 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방법─가능하면 쉬운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에만 몰두하면 위기와 공황, 대폭락은 불가피해진다."(452)


"(자본주의) '체제(system)'라는 단어에 함축된 의미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하나의 통합되고 조직된 체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시장에서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관행과 제도의 집합이다." 자본주의적 성장은 "혁신에 의존하는데, 혁신은 현재의 상황(status quo)을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유시장 체제는 흔히 정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를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시민들'은 '나, 개인'과 상충하는 개념이 된다. 자본주의는 성장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술적 경이를 필요로 하지만, 새로운 기술의 응용은 노동력, 원자재, 소비자, 법적 보호 그리고 평화를 확보해주는 전제조건인 사회적 안정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멋지게 양립할 수도 있지만, 종종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다투는 연인들처럼 행동한다."(4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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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특강
제프리 잉햄 지음, 홍기빈 옮김 / 삼천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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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이전에 한 나라의 부富란 "대개 자국의 군사력이라는 '눈에 보이는 손'이 가져오는 결과로 여겨졌다. 물론 나라마다 기후, 토지의 비옥도, 천연자원 같은 부존자원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이런 것들이 가져다주는 이득은 다른 지역을 정복하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경제적 권력이란 군사적 권력에서 비롯되는 결과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이 되면, 천연자원이 보잘 것 없는 네덜란드가 중상주의에 가장 충실한 에스파냐를 제치고 선두국가의 자리에 올라서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에 스미스는 국가의 부가 "상업에 기초한 경제 발전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고 주장했다." 이제 부는 "무수한 개인들이 스스로 자기 이익을 쫓아 움직이는 과정에서 그 결과물로 창출되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경제에서 부의 성장과 분배가 어떻게 벌어지는가 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두고 완전히 다른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17-8)


상업 사회의 세 가지 생산요소인 토지, 자본, 노동의 분화는 "지주, 자본가, 노동자라는 사회를 구성하는 '3대 신분'의 토대를 만들어 냈다. 3대 신분이 서로 맺고 있는 상호 의존관계의 근원은 지대, 이윤, 임금 사이에 나타나는 교환 관계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세 가지는 생산, 소득, 지출이라는 '순환적 흐름' 안에 엮여 있다. 자본으로 쓰이는 자금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지급되고, 노동자들은 받은 임금을 지출하여 생산물을 소비하며, 다시 이것이 자본가의 이윤을 낳음으로써 더 많은 자본이 생겨나게 된다."(19-20) 중상주의의 교리에 따르면 "국가의 권력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상업을 추구하기보다 귀금속 화폐를 축적해야 한다." 여기에 반대한 스미스는 "자신의 분석 체계 안에서 화폐를 2차적이고 수동적인 위치로 끌어내려 버렸다." 스미스가 보기에 "화폐란 시장 교환을 촉진하기 위한 매개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22)


스미스는 자연가격과 시장가격을 구별한다. "자연가격은 재화의 생산에 들어간 여러 비용의 합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시장가격은 특정 시점에서 나타나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나 희소성에 따라 결정된다. 이 두 가격은 단기적으로는 서로 불일치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경쟁을 벌이는 시장에서는 장기적으로 두 가격이 서로 수렴하게 되어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지대와 임금, 이윤은 부의 총량을 창출하는 데 저마다 기여한 가치와 동일한 크기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은 효율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이기도 하다."(25-6)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고 목적은 인간의 참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사용가치'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란 오로지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을 생산하여 그것으로 화폐적 이윤을 실현하는 일에만 매달리게 하는 경제체제이다."(28)


마르크스는 이윤, 지대, 임금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자연적 현상이 아닌 사회적인 범주로서, 오로지 권력과 강압에 기초한 사회적 생산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스미스가 주장한 대로 "모든 가치의 궁극적인 원천이 노동에 있다면, 자본 또한 그것을 만들어 내는 데 투하된 노동으로 구성될 것이다. 자본은 겉으로는 물질적 생산수단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그 실체는 남에게 양도되고 전유당한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이란 단지 물질적 생산요소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자본은 사실상 잉여가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잉여가치란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생산관계가 갖는 불평등성이 낳은 결과에 다름 아니다."(35-6)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화폐-상품-화폐1(M-C-M1)의 순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함으로써 다른 생산양식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확인시켜 주었다."(42)


베버는 자본주의란 "순이윤을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관료적 기업이 이끄는 산업 생산에 인간의 필요와 욕구 충족을 맡기는 경제라고 정의했다." 공동체와 가정경제에서는 경제활동이 "정서적 유대, 가족적인 의무, 전통적 사회규범과 얽혀 있기에 이윤을 추구하고 계산하는 엄격한 합리성이 교란되기 쉽다. 따라서 영리기업의 형태가 일반화되어 노동과 생산 활동을 가정경제와 공동체 내부 경제로부터 분리시킨다면, 이러한 자의적이고 실질적인 고려 사항들을 합리적 계산에서 따로 끄집어내어 분리할 수 있게 된다."(44-5) 베버는 "전통적 엘리트의 쾌락주의와는 전혀 다른 청교도들의 금욕주의는 이윤의 재투자와 기업의 확장을 부추기면서, 이런 실천이야말로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선물을 제대로 관리하고 사용하는 것은 심지어 '소명'(calling)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52)


베버가 보기에 "국가와 자본가계급 사이의 '역사적 동맹'은 아주 느슨한 것이기에 자본가계급은 국가의 내부와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작동될 수 있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는 애초부터 초국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어서 어느 한 국가나 국가 간 동맹의 통제 아래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 자본가들은 자기들 행동의 결과가 어떻든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이윤을 추구하는 데서 자유를 제한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베버는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국가가 제공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국민국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세계 제국이 들어서면 자본주의도 존속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상당히 심오하면서도 놀라운 혜안을 덧붙이고 있다. 즉 자본주의는 국가와 자본 누구도 상대편을 복속시키지 않는 글로벌 경제체제로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56)


"마르크스는 이윤 저하에 따른 자본주의 자체의 붕괴라는 파국적인 전망을 제시했지만, 이와 달리 슘페터는 '파괴적' 국면에서 나타나는 이윤 저하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종말을 의미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혁신 기업가들이 끊임없이 채산성 높은 혁신을 창조적으로 모색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64-5) 슘페터는 이 과정에서 신용화폐를 발행하는 은행 시스템의 중요성을 맨 처음 강조한 학자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은행은 다시 돈을 갚겠다는 약속 말고는 사실상 아무런 기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허공으로부터 신용화폐를 생산한다."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은 화폐자본을 무한정 팽창시키는 능력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화폐의 팽창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역동성의 근원이 되며, 동시에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공황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 논점은 슘페터의 제자 하이먼 민스키가 '금융 불안정성 가설'로 더욱 발전시키게 된다."(66-7)


케인스가 보기에 "현대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활동이 최적화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만성화되면서 이를 회복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붕괴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화폐가 '불안감'을 달래 주는 방어벽으로 쓰이게 될지, 아니면 생산에 투자되거나 소비로 지출될지가 '야수적 본능'(animal spirits), 즉 낙관과 자신감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개인의 심리적 문제가 아니다."(74-5) 자본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야기하는 "유효수요의 부족이란 완전고용을 유지할 만큼 구매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케인스는 이러한 난관은 자본이든 노동이든 개인 행위자들이 쉽사리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가 "이따금씩 정부의 '보이는 손'으로부터 신중하게 계획된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78)


모든 형태의 재산과 재화, 서비스의 가격은 "시간에 따라 변동하는데, 이는 불확실성을 낳고 다시 가격 변동에서 차액을 기대하여 벌어지는 순수한 금융적 거래, 즉 M-M1을 내포하는 투기적 시장을 만들어 낸다. 이렇듯 이중적 성격을 지닌 자본은 생산의 원천이자 투기적 금융자산이기도 하다." 각종 자산을 유가증권 형태로 거래하는 "금융자산 시장은 자본으로 하여금 이윤이 남지 않는 활동에서 빠져나와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본주의에 탄력성과 역동성을 부여하는 본질적 원천이 된다. 하지만 케인스가 경고한 것처럼, 자본이 생산이나 소비 또는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대대적으로 빠져나와 화폐의 형태로 축장될 경우엔 경제 전체가 급속히 힘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불확실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벌어지는 순수한 투기 행위는 자산 시장에 일상적으로 거품과 불안정성을 가져와 재화나 서비스 생산에 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87-8)


# 자본주의의 기초 시장들

1. 화폐와 화폐자본 시장 : 금융 자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조정되고 가격(이자)이 결정된다.

2. 노동시장 : 임금 수준이 결정된다.

3. 생산 관련 시장 : 생산재(생산수단) 시장과 최종 소비재 시장

4. 금융자산 시장 : 모든 형태의 재산 소유권은 시장에서 판매 가능한 자산asset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의 역동성(과 불안정성)을 발생시키는 화폐의 주요 기능은 무엇일까? "화폐는 어떤 나라든 자본주의 경제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을 마련해 준다. 첫째, 대규모 몰인격적 시장에서 가격 매커니즘을 통해 수요와 공급이 조정될 수 있도록 안정된 가치 척도를 제공한다. 화폐가 없는 물물교환은 교환을 양자 간의 거래로만 제한하게 만드는데, 이렇게 되면 거래되는 재화의 가치가 구체적인 거래마다 달라지게 마련이므로 교환 영역의 범위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확대될 수 없다. 둘째, 장기적인 대부 계약은 자본주의적 경제 관계의 기본 골간이거니와, 이는 가치가 안정된 화폐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대부 행위가 광범위하게 벌어져야 하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창출하기 위해서는 대부자들 사이에 자기들이 받을 이자의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102)


베버는 자본주의의 발흥에서 "국가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기념비적 동맹'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니와, 자본주의 신용화폐야말로 그 동맹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109) 자본주의의 특징은 "개인들 사이에 계약으로 맺어지는 채권-채무자 관계(예컨대 은행 대출이나 신용카드 계약)를 화폐화시키는 사회적 메커니즘이 항시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은행 시스템은 개인들의 채무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불 수단인 국가가 발행한 화폐로 바꾸어 놓는다. 국가가 발행한 화폐는 세금 납부의 의무를 완전히 청산하는 데 쓸 수 있는 화폐이다. 이렇게 사적인 부채를 공적인 화폐로 바꾸어 놓는 것은 은행 시스템과 국가의 복잡한 연계, 국가와 채권자(국채 소유자), 채무자들(납세자) 사이의 복잡한 연계를 통해서 달성된다. 그리고 이 관계들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중앙은행이다."(115)


# 자본주의 사회의 화폐 시장의 특징

1. 민간 신용과 은행 시스템의 '화폐 승수' : 청산되지 않은 채무의 존재가 화폐 공급을 가능하게 한다.

2. 신용화폐의 궁극적 기초가 되는 국가 채무 : 현실적 권력을 가진 주권 국가가 채무 이행을 약속한다.

3. 중앙은행의 중추적 역할 : 불변의 가치 척도가 존재한다는 허구를 지탱한다. 즉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고 실질 이자율을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유지한다.

4. 국가, 화폐시장, 납세자의 삼각관계 : 화폐와 생산, 즉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여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위험을 회피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러 집단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투쟁을 벌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가격은 이러한 경제적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의 결과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145) 시장의 역동성은 불평등한 행위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의 결과로서, 완전경쟁 모델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이 벌어진 이후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가상의 '완벽한' 상태"에 불과하다.(1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학파는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서 자본주의의 우위를 주장한다.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논지에 따르면, 우리는 "생산과 소비를 조직하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가질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경제생활이 복잡해지고 규모가 늘어나게 되면 이러한 인지적 문제가 더욱 날카롭게 대두되며, 여기에 조화를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시장에서 지속적인 흥정으로 얻게 되는 성찰과 적응의 조정뿐이라는 것이다."(149-50)


20세기에 들어서자 "대량 소비 시장은 수요를 좀 더 자극하려는 목적에서 질적으로나 상징적인 위신에 있어서나 더욱더 세밀하게 분화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 "베블런이 '티 내기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고 부른 지위 경쟁 과정이 오늘날에는 더욱 광범위한 '사치의 민주화'로 전환되었다. 이제 가계 지출 가운데 '필수적이지 않은' 재화들에 쓰이는 비율이 더욱더 늘어나기 시작했다."(158-9) 대중들이 사치재를 구매하는 돈이 은행 시스템에서 융통되면서, "총수요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의 지출과 부채뿐 아니라 이를 보조하는 중요한 부속물로써 개인의 '적자 금융'이 등장하게 되었다." 경쟁적인 적자 금융은 리스크가 높은 대출의 비중을 늘렸고, 이에 따라 개인 파산과 지급불능 사태도 해마다 급속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현대자본주의에서 경제 전체가 불안정성에 빠져들게 된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160-1)


기업은 자본 권력이 생산수단과 노동 통제를 직접 수행하는 장소이다. "따라서 '거래 비용' 이론과는 달리 이 관료적 기업은 시장의 대안이 되기는커녕 경제적 합리성을 달성하기 위해 보조적 기능을 수행하는 장소가 된다."(191) 코스의 정리에서 보듯이, 현대자본주의 기업의 구조적 다양성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된다. "이는 기업 간부들과 경영진이 단순히 다양한 경제 조직의 비용을 계산하여 비교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조직 형태들을 실행에 옮길 권력이 있는가가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189) 경쟁 악화에 따른 이윤율 저하와 과잉생산 그리고 일련의 디플레이션이라는 악순환을 겪은 대공황(Great Depression, 1873-1896)의 장기 침체 이후로, 현대자본주의의 대규모 주식회사들은 "내부적으로는 소유자들한테서 어느 정도 분리된 위계적 관료제의 경영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외부적으로는 과점체 또는 독점체로서 조직된 모습이 되었다."(198) 


경제와 관련한 국가의 역할을 다루는 논의에서 "신자유주의의 '공공재' 이론은 국가 활동의 수준과 범위가 경제적 비용-편익 분석으로 보면 최적의 수준으로 고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사실상 '한계효용성'에 따라 결정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가 경제에 뛰어드는 것은 그에 들어가는 비용과 거기서 얻게 되는 편익이 균형을 이루는 '한계 지점'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수많은 주장과 요구가 엇갈리며 경쟁하는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비용과 편익이 균형을 이루는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인 가정이다. 아울러 국가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비용-편익 분석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교육, 보건, 사회복지는 단지 '인적 자본'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영향뿐 아니라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의 욕망이다."(270-1)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 필연적인 함수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경제적 자유주의, 정치적 자유주의,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요소가 제각각 별개이며, 이 세 가지가 역사적으로 우연한 기회에 서로 연결되었다는 사정에 대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유럽에서 개인의 자유는 자본주의적인 소유권과 계약 자유의 기초였지만, 이는 결코 민주적인 것이 아니었다. 근대 초기 유럽에서 정치적 대표는 유산자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으며 다수의 대중은 정치적 대표권도 사유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대중민주주의를 따랐다가는 노동자들이 국가를 포획해 버리고 마르크스가 믿었던 것처럼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다." 20세기 중반에 실재했던 파시즘 체제는, "실로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라는 겉모습 말고도 다른 형태의 대중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양립할 수 있음을 암시해 준다."(280-1)


"국가와 경제라는 두 영역 사이에 자율성이 심각하게 침식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곧 자유민주주의 대신에 권위주의적 국가 또는 부정 선거가 판치는 '명목적' 민주주의가 들어설 수 있게 된다는 신호"이다.(303)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출입 금지의 '붉은 테이프'가 높은 비용을 낳는다고 끊임없이 불평하지만, 시장 교환을 규제하는 기초적인 규칙들이 없다면 자신들의 활동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든 형태의 평화적 시장 교환은 모종의 권위체(흔히 국가)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이 권위체가 폭력을 예방하고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전반적으로 모든 소유권이 명확하게 확립되고 수호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장 교환에 갖가지 위험이 따르게 된다. 시장 교환이 존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여러 가격을 확립하고 계산하는 데 필수적인 안정된 통화 시스템이지만 이는 시장이 생산할 수 없는 것이다."(181-2) 


"갖가지 자본주의적 활동에서 이윤을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기회, 바꿔 말하면 예상이 가능한 이윤은 모두 투기적 금융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 순수한 투기 활동은 상품 생산에 직접적으로는 아무것도 더해 주지 못하지만, 자본 및 금융시장에 화폐를 공급해 줌으로써 모든 자산에 유동성과 대체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다. 또 유동성과 대체 가능성은 자본주의에 탄력성을 부여하여 자본주의에 역동성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자본은 화폐로 모습을 바꿀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무엇이든 어디서든 이윤의 전망이 더 커 보이는 쪽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261)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단계로서 '금융화'가 출현하고 있다는 논의가 있지만,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본주의적 활동의 길잡이가 되는 원리가 '유동성'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서 나온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는 "모든 자산들을 줄줄이 화폐로 바꾸었다가 다시 자산으로 되돌렸다가 하는 활동을 반복"하고 있다.(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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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 세계체제론과 리오리엔트를 재검토한다
에릭 밀란츠 지음, 김병순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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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의 기원을 중세 서유럽에서 찾는 관점들

1. 정통 마르크스주의

2. 브레너주의(네오-마르크스주의)

3. 근대화 이론

4. 세계-체제론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흔히 자본주의의 출현을 분석하는 이론적 관점으로 쓰였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여러 문제를 수반한다. 첫째, 이 관점은 역사의 발전 과정을 결정론적이고 '단계적'으로 본다. 이를테면 부르주아 혁명 뒤에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결국 변증법적 지양으로 끝난다. 둘째, 여기서는 사회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셋째, 유럽 중심의 용어, 예를 들어 아시아적 생산양식 같은 것을 써서 역사를 고정화한다. 넷째,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그리는 착취 구조는 특정한 분석 단위―대개의 경우 국민국가―안에서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라는 두 계급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엄혹한 계급투쟁으로서 그 틀을 짠다. 그리고 끝으로 중요한 것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시장을 생산 영역 외부에 있는 부차적 지위로 격하시키는 대신 생산수단을 '먼저 분석할 대상'으로 본다는 사실이다."(11)


브레너주의 역시 "주어진 영토 단위(국민국가) 안에서 피착취계급(농민)과 착취계급(귀족) 사이의 계급투쟁 및 생산양식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계급투쟁과 생산양식에 대한 이런 과도한 집착은 무역 유통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도시 중심의 생산보다는 특히 농업 생산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다룬다. 이러한 접근 방식의 또 다른 문제는 귀족층을 이른바 “비생산적 소비”에 빠져 “경제 외적인 강제를 통한 잉여 착취”에 몰두하는 계급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바라본다."(12-3) 브레너는 "봉건시대의 착취자를 모두 영주와 동일시함으로써 도시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브레너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설명'에서 카츠Katz 같은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교역과 도시의 중요성을 검토하지 않음으로써 도시를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로 축소시킨다."(16)


근대화 이론은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만들었다고 하는 '근대적' (즉 정신적 또는 종교적) 가치관의 등장 또는 유럽이 이후 수세기 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을 지배할 수밖에 없게 만든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탄생했다."(17) 근대화 이론은 "동업조합(길드)의 하부구조를 간과할 뿐 아니라 이따금 중세 전반을 '산업혁명 이전의 음울하고 무기력한 망각의 구렁으로 밀어 넣으면서' 자유방임주의 경제가 모든 것을 휩쓸고 가버리기만을 기다리는 시기로 단순하게 처리하고 끝맺는다."(20) 세계-체제론은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세계-경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 국제 분업과 국가 간 연결 체계를 만들어낸 정복 및 식민지 건설을 통해 지역들이 서로 합병된 것과 큰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세계-체제론은 "생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과 시장에서의 상품의 순환을 중요하게 여기는 애덤 스미스주의의 관점을 통합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등장을 설명하려고 한다."(22)


동아시아의 상황을 살펴보면, "송나라 시대에는 해운과 선박 임대 사업을 함께 하는 합작회사가 '매우 일반화된' 상황이었고 코멘다commenda(자본을 대는 상인과 해상 운송을 하는 상인이 따로 있으며 이익은 공유하는 제도)와 소키에타스 마리스societas maris(자본가와 해상 운송을 하는 상인이 공동으로 출자하는 제도)의 초기 형태도 운영되고 있었다." 송나라 시대에 "국가와 상인 단체들과의 관계는 중국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더 긴밀했다."(59) 북방의 위협에 밀려 남하한 송나라는 국가 재정을 늘리기 위해 교역을 활성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송 정부가 "교역을 중시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국가가 운하를 건설하고 그곳의 안전 운행을 보장함으로써) 상인들을 보호하고 상거래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역은 남송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 요소였기 때문에 국가는 여러 경제 활동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61-2)


"몽골의 송나라 정복이 중국이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유일한 원인일 수는 없지만 중요한 변수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서양 상인들은 "몽골의 평화 시대 덕분에 직간접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봤다." 몽골의 평화 시대 동안 "중앙아시아는 보기 드문 정치 통합의 시대가 유지되었고 그 결과 유럽의 무역상들이 물밀듯이 그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유럽의 도시 국가들은 상인 보호와 상품 거래 비용 감소라는 이득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항해술이나 화약 기술과 같은 많은 지식이 점차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전되었다." 무엇보다도 몽골이 "두 차례에 걸쳐 비잔틴 제국이 붕괴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한 번은 1240년대 셀주크 왕조의 침략을 막아낸 것이고 다른 한 번은 1402년 오스만 제국을 패퇴시킨 것이다." 몽골 지배자들은 중국을 수탈하여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들과 교환할 수 있는 엄청난 잉여"를 창출했고, 이 교역에서 발생한 많은 부분이 중국 밖으로 빠져나갔다.(66-8)


15세기 초 감행된 정화 원정은 "중화 세계의 주변에 살고 있는 '야만족'들을 조공 무역 체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나 조공무역 체제는 국부의 "심각한 유출을 초래했다. 명나라는 값어치 없는 공물을 받는 대가로 엄청난 양의 화폐를 하사해야 했다. 중국 황실이 외국인들이 공물이라거나 중국의 속국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바치는, 가치도 없는 물품을 받고 느끼는 만족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값비싼 명예였다."(70-1) 명나라와 청나라(1644-1912)에 걸쳐 "중국 상인들은 교역을 위해 해외로 나갈 수 없었다. 해외에서는 국가가 상인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규정하고 바라는 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76) 아부-루고드의 지적처럼 "중국 상인들은 유럽 상인들과 달리 국가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없"었고, 따라서 "고도로 착취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시행할 수 없었다."(79)


"또한 중국이 다른 나라들을 사회경제적으로 종속시켜 식민지로 만들고 수탈하는 전략을 치밀하게 전개하고 추구하며 실행할 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가 자원을 고갈시키고 중국을 지속적으로 거대한 파멸의 대상으로 만든 끊임없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군사 활동은 '정복보다는 방어 중심'이어야 했다. 이렇듯 중국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은 것은―대개는 변경 지역이었지만 때로는 중국 안에서도 일어났다―유럽에서는 작동하지 않은 두 가지 중요한 변수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농민 반란과 변경 주변에 사는 유목민들이 일으킨 파괴와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 정부는 시장 경제를 확고히 지원했지만, '시장 조작을 통한 부의 축적'은 억제했다. 토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이 더욱 중요했던 중국 정부의 관료들이 "시장 거래의 원칙은 지원하면서 시장의 독점 세력으로부터 구매자를 보호하려고 애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84-6)


이와 달리 "유럽에서 귀족들의 정치권력을 제한한 것은 중국의 지주 귀족들과 비교할 때 그들의 상대적 빈곤이었다. 그들이 돈을 빌리거나 금융업자에게 기대는 것은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과 달리 군사력으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주로서 현금이 필요할 때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일은 자신이 다스리는 도시나 시민들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도시국가의 정치와 경제, 사법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도시 기반의 엘리트들에게 재정적(동시에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각종 면허와 특권들을 부여함으로써 군주의 정치권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88-9) 실제로 중세 말, 인도양 무역을 지배하여 유럽 상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축적했던 카리미(이란) 상인들도 '상인 자본가' 집단을 형성했지만,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소멸했다."(93)


한편, 남아시아는 유럽 열강들이 침입하기 전에 과연 어느 정도까지 상업자본주의 체제에 근접했을까? "1250년에서 1650년까지 유럽은 대부분의 아시아 시장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지배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은 유럽 상인이 동양의 시장들을 왕래할 수 있었지만 '본토의 강력한 아시아 국가들'을 만나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행동의 자유는 극도로 제한되었다. 유럽 상인들이 이 기간에 남아시아 아대륙에서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이 제공하는 상품들을 남아시아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이 더욱 직접적으로 남아시아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고 생산량을 할당할 수 있었던 18세기 말까지 서유럽에서 남아시아로 오는 화물 가운데 적어도 80퍼센트가 은과 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문제들을 우회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점차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100-1)


남아시아 상인들의 정치적 권력은 미약했고 "귀족층의 권력은 유럽보다 훨씬 더 강했다." 남아시아에서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귀족이 경제 외적 강제를 통해 나머지 사회 계층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부를 수탈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다."(115) 유럽의 입장에서 볼 때 "남아시아의 내륙 지역은 본래부터 가용 자원이 제한되어 있고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 비자야나가르 왕조의 강력한 군사력 때문에 착취할 수 있는 주변부로 쉽게 재편하거나 통합할 수 없는 미개척지였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이익을 내려면 개별적으로 평화롭게 교역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집단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하는 것을 적절하게 조합해야 했다. 후자의 경우는 상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해상교역로에 대해서 폭력을 써서 실제로 독점 지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남아시아 상인들의 결정적인 약점은 "해외 국가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중앙 권력이 부재"했다는 것이다.(118-9)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모두 서유럽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금의 최종 종착지였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그러한 '유출'로 큰 이익을 보지는 못했다. 중국과 남아시아 국가들은 그들의 주변부 지역을 대상으로 자본주의적인 고도의 노동 착취 체제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0년-1500년 사이 남아시아 지역의 급격한 교역 증가와 분업의 심화를 자본주의 질서의 토착적 발전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비非시장적인 권력의 유무에 따른 "제약 사항들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등장과 발전을 뒷받침하는 법체계의 발전을 제약했다. 남아시아 지역은 전혀 정태적이거나 침체되어 있지 않았고 어느 모로 보나 경제적, 기술적으로 유럽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 통치 체제가 종교적 군사 엘리트층이 지배하는 전형적인 조공국가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토착 상인 계급이 생겨날 수 없었다."(137-8)


유럽의 정치경제를 남아시아와 중국과 비교했듯이 유럽의 '발흥' 또한 "13세기에 점점 유럽과 상호의존적 관계로 발전했던 북아프리카 지역(마그레브와 사하라 남부 제국들)과의 교역 관계를 살펴보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141) "지리적 근접성, 문화적 친근감, 경제적 연관성에 비춰볼 때, 후後우마이야 왕조, 파티마 왕조,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후예들(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이 아프리카의 금 덕분에 '건설되었다'는 주장을 인정한다면 아프리카의 금이 서유럽과 이집트로 유입된 것이 그들 경제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하라 사막과 모로코를 가로질러 수송된 아프리카의 금은 유럽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며 자행되던 노예무역도 중요하다. "지배층이 노예무역에서 발생하는 재정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늘 서로를 침략하는 전쟁 상태에 있었다."(144-5)


이 지역의 지배층은 "농업에 대한 과세보다 교역과 수입품의 재판매(예컨대 소금)에 대한 세금 징수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챙겼다. 농업은 기후 조건 때문에 상대적으로 잉여생산물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토지 소유는 그다지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와 서유럽 국가들에게 금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금을 공급하는 지역이 대부분 말리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는 지역이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노예를 사서 부리는 비용이 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보다 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인구밀도와 연계된 노예제 경제는 토착적인(내재적인) 기술 발전을 이룰 수 없게 했다."(146-7) 교역로를 지배하여 창출한 잉여는 "이익을 더 많이 창출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생산을 담당하는 산업에 재투자되지 않았다. 결국 잉여의 대부분은 "지배층들이 지중해와 중동 지역에서 들여오는 사치품들을 사는 데 쓰"이면서, 다시 외부로 유출되었다.(153)


지중해 지역의 이슬람 세력은 "목재 자원의 부족으로 해군력 약화라는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 10세기에 다시 일어선 비잔틴 제국에게 크레타 섬과 키프로스 섬을 빼앗기고 11세기에 코르시카 섬과 사르디니아 섬, 시칠리아 섬마저 잃으면서 이슬람의 해군력은 더욱 무력해졌다."(154)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지역에서 힘을 잃는 것과 동시에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와 유럽의 기독교 국가 사이의 무역수지도 후자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지중해 교역권 상실과 더불어 "상설 민병대나 무장한 동업조합의 부재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에 '도시국가'가 생겨날 수 없었던 한 요인이었다. 그 밖에도 유럽 상인들의 침략, 이베리아 반도 귀족들의 확장 야욕, 북아프리카 도시들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고자 애쓴 이슬람 지배자들의 행정, 도시로부터 강제로 조공을 거둬들이는 데 혈안이 된 내륙의 유목민들이 모두 이슬람에 '도시국가'가 생겨나지 못하게 한 요인들이었다."(157-9)


1350년 이후 서유럽에서 '봉건제의 부활'이 실패한 것은 "귀족들이 봉건제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막는 강력한 도시국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65) 이와 달리 "북아프리카와 수단 지역 국가들의 정치-경제 현실은 일종의 부족화部族化, 즉 '조직화된 무정부 상태'라고도 부른다. 장기적으로 국가 형성이나 자본주의적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동양적 전제정치나 절대주의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부족주의는 상대적으로 제도화된 권력의 부재와 구조적으로 취약한 국가를 암시한다. 따라서 당시 마그레브의 다양한 정치 체제는 중상주의 정책의 실현은 꿈도 꾸기 어려웠으며 더 크고 지속적인 정치 체제로 발전하여 마침내 그러한 체제를 구축한 엘리트들에게 결정적인 권력 수단이 될 '국민국가'로의 성장을 가로막는 끊임없는 난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167)


다양한 유목 세력이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역량과 자원을 소진시키는 동안 "유럽의 상인 공동체와 동업조합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도시국가 안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권력의 획득은 상인 엘리트들의 성공을 위한 필수요소였다. 그들은 국가의 하부구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중세 말 서유럽의 "상업자본주의 체제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추려내야 할 또 다른 예외적인 변수는 공동체적 정체성의 결과로 나타난 (법제적, 정치적인 의미에서 모두) 시민권이라는 개념이다. 예컨대, 독일에서는 시민을 그가 속한 도시 밖에서 재판할 수 없었고 도시 성벽 밖에 있는 감옥에 가두지 못했다. 또한 시민이 아닌 사람이 시민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도 없었다. 도시국가의 시민으로서 부르주아의 정체성은 상징적 의미에서 수세기 뒤 국민국가의 정체성으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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