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 세계체제론과 리오리엔트를 재검토한다
에릭 밀란츠 지음, 김병순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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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의 기원을 중세 서유럽에서 찾는 관점들

1. 정통 마르크스주의

2. 브레너주의(네오-마르크스주의)

3. 근대화 이론

4. 세계-체제론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흔히 자본주의의 출현을 분석하는 이론적 관점으로 쓰였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여러 문제를 수반한다. 첫째, 이 관점은 역사의 발전 과정을 결정론적이고 '단계적'으로 본다. 이를테면 부르주아 혁명 뒤에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결국 변증법적 지양으로 끝난다. 둘째, 여기서는 사회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셋째, 유럽 중심의 용어, 예를 들어 아시아적 생산양식 같은 것을 써서 역사를 고정화한다. 넷째,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그리는 착취 구조는 특정한 분석 단위―대개의 경우 국민국가―안에서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라는 두 계급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엄혹한 계급투쟁으로서 그 틀을 짠다. 그리고 끝으로 중요한 것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시장을 생산 영역 외부에 있는 부차적 지위로 격하시키는 대신 생산수단을 '먼저 분석할 대상'으로 본다는 사실이다."(11)


브레너주의 역시 "주어진 영토 단위(국민국가) 안에서 피착취계급(농민)과 착취계급(귀족) 사이의 계급투쟁 및 생산양식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계급투쟁과 생산양식에 대한 이런 과도한 집착은 무역 유통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도시 중심의 생산보다는 특히 농업 생산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다룬다. 이러한 접근 방식의 또 다른 문제는 귀족층을 이른바 “비생산적 소비”에 빠져 “경제 외적인 강제를 통한 잉여 착취”에 몰두하는 계급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바라본다."(12-3) 브레너는 "봉건시대의 착취자를 모두 영주와 동일시함으로써 도시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브레너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설명'에서 카츠Katz 같은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교역과 도시의 중요성을 검토하지 않음으로써 도시를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로 축소시킨다."(16)


근대화 이론은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만들었다고 하는 '근대적' (즉 정신적 또는 종교적) 가치관의 등장 또는 유럽이 이후 수세기 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을 지배할 수밖에 없게 만든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탄생했다."(17) 근대화 이론은 "동업조합(길드)의 하부구조를 간과할 뿐 아니라 이따금 중세 전반을 '산업혁명 이전의 음울하고 무기력한 망각의 구렁으로 밀어 넣으면서' 자유방임주의 경제가 모든 것을 휩쓸고 가버리기만을 기다리는 시기로 단순하게 처리하고 끝맺는다."(20) 세계-체제론은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세계-경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 국제 분업과 국가 간 연결 체계를 만들어낸 정복 및 식민지 건설을 통해 지역들이 서로 합병된 것과 큰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세계-체제론은 "생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과 시장에서의 상품의 순환을 중요하게 여기는 애덤 스미스주의의 관점을 통합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등장을 설명하려고 한다."(22)


동아시아의 상황을 살펴보면, "송나라 시대에는 해운과 선박 임대 사업을 함께 하는 합작회사가 '매우 일반화된' 상황이었고 코멘다commenda(자본을 대는 상인과 해상 운송을 하는 상인이 따로 있으며 이익은 공유하는 제도)와 소키에타스 마리스societas maris(자본가와 해상 운송을 하는 상인이 공동으로 출자하는 제도)의 초기 형태도 운영되고 있었다." 송나라 시대에 "국가와 상인 단체들과의 관계는 중국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더 긴밀했다."(59) 북방의 위협에 밀려 남하한 송나라는 국가 재정을 늘리기 위해 교역을 활성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송 정부가 "교역을 중시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국가가 운하를 건설하고 그곳의 안전 운행을 보장함으로써) 상인들을 보호하고 상거래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역은 남송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 요소였기 때문에 국가는 여러 경제 활동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61-2)


"몽골의 송나라 정복이 중국이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유일한 원인일 수는 없지만 중요한 변수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서양 상인들은 "몽골의 평화 시대 덕분에 직간접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봤다." 몽골의 평화 시대 동안 "중앙아시아는 보기 드문 정치 통합의 시대가 유지되었고 그 결과 유럽의 무역상들이 물밀듯이 그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유럽의 도시 국가들은 상인 보호와 상품 거래 비용 감소라는 이득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항해술이나 화약 기술과 같은 많은 지식이 점차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전되었다." 무엇보다도 몽골이 "두 차례에 걸쳐 비잔틴 제국이 붕괴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한 번은 1240년대 셀주크 왕조의 침략을 막아낸 것이고 다른 한 번은 1402년 오스만 제국을 패퇴시킨 것이다." 몽골 지배자들은 중국을 수탈하여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들과 교환할 수 있는 엄청난 잉여"를 창출했고, 이 교역에서 발생한 많은 부분이 중국 밖으로 빠져나갔다.(66-8)


15세기 초 감행된 정화 원정은 "중화 세계의 주변에 살고 있는 '야만족'들을 조공 무역 체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나 조공무역 체제는 국부의 "심각한 유출을 초래했다. 명나라는 값어치 없는 공물을 받는 대가로 엄청난 양의 화폐를 하사해야 했다. 중국 황실이 외국인들이 공물이라거나 중국의 속국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바치는, 가치도 없는 물품을 받고 느끼는 만족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값비싼 명예였다."(70-1) 명나라와 청나라(1644-1912)에 걸쳐 "중국 상인들은 교역을 위해 해외로 나갈 수 없었다. 해외에서는 국가가 상인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규정하고 바라는 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76) 아부-루고드의 지적처럼 "중국 상인들은 유럽 상인들과 달리 국가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없"었고, 따라서 "고도로 착취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시행할 수 없었다."(79)


"또한 중국이 다른 나라들을 사회경제적으로 종속시켜 식민지로 만들고 수탈하는 전략을 치밀하게 전개하고 추구하며 실행할 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가 자원을 고갈시키고 중국을 지속적으로 거대한 파멸의 대상으로 만든 끊임없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군사 활동은 '정복보다는 방어 중심'이어야 했다. 이렇듯 중국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은 것은―대개는 변경 지역이었지만 때로는 중국 안에서도 일어났다―유럽에서는 작동하지 않은 두 가지 중요한 변수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농민 반란과 변경 주변에 사는 유목민들이 일으킨 파괴와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 정부는 시장 경제를 확고히 지원했지만, '시장 조작을 통한 부의 축적'은 억제했다. 토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이 더욱 중요했던 중국 정부의 관료들이 "시장 거래의 원칙은 지원하면서 시장의 독점 세력으로부터 구매자를 보호하려고 애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84-6)


이와 달리 "유럽에서 귀족들의 정치권력을 제한한 것은 중국의 지주 귀족들과 비교할 때 그들의 상대적 빈곤이었다. 그들이 돈을 빌리거나 금융업자에게 기대는 것은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과 달리 군사력으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주로서 현금이 필요할 때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일은 자신이 다스리는 도시나 시민들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도시국가의 정치와 경제, 사법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도시 기반의 엘리트들에게 재정적(동시에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각종 면허와 특권들을 부여함으로써 군주의 정치권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88-9) 실제로 중세 말, 인도양 무역을 지배하여 유럽 상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축적했던 카리미(이란) 상인들도 '상인 자본가' 집단을 형성했지만,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소멸했다."(93)


한편, 남아시아는 유럽 열강들이 침입하기 전에 과연 어느 정도까지 상업자본주의 체제에 근접했을까? "1250년에서 1650년까지 유럽은 대부분의 아시아 시장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지배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은 유럽 상인이 동양의 시장들을 왕래할 수 있었지만 '본토의 강력한 아시아 국가들'을 만나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행동의 자유는 극도로 제한되었다. 유럽 상인들이 이 기간에 남아시아 아대륙에서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이 제공하는 상품들을 남아시아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이 더욱 직접적으로 남아시아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고 생산량을 할당할 수 있었던 18세기 말까지 서유럽에서 남아시아로 오는 화물 가운데 적어도 80퍼센트가 은과 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문제들을 우회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점차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100-1)


남아시아 상인들의 정치적 권력은 미약했고 "귀족층의 권력은 유럽보다 훨씬 더 강했다." 남아시아에서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귀족이 경제 외적 강제를 통해 나머지 사회 계층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부를 수탈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다."(115) 유럽의 입장에서 볼 때 "남아시아의 내륙 지역은 본래부터 가용 자원이 제한되어 있고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 비자야나가르 왕조의 강력한 군사력 때문에 착취할 수 있는 주변부로 쉽게 재편하거나 통합할 수 없는 미개척지였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이익을 내려면 개별적으로 평화롭게 교역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집단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하는 것을 적절하게 조합해야 했다. 후자의 경우는 상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해상교역로에 대해서 폭력을 써서 실제로 독점 지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남아시아 상인들의 결정적인 약점은 "해외 국가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중앙 권력이 부재"했다는 것이다.(118-9)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모두 서유럽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금의 최종 종착지였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그러한 '유출'로 큰 이익을 보지는 못했다. 중국과 남아시아 국가들은 그들의 주변부 지역을 대상으로 자본주의적인 고도의 노동 착취 체제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0년-1500년 사이 남아시아 지역의 급격한 교역 증가와 분업의 심화를 자본주의 질서의 토착적 발전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비非시장적인 권력의 유무에 따른 "제약 사항들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등장과 발전을 뒷받침하는 법체계의 발전을 제약했다. 남아시아 지역은 전혀 정태적이거나 침체되어 있지 않았고 어느 모로 보나 경제적, 기술적으로 유럽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 통치 체제가 종교적 군사 엘리트층이 지배하는 전형적인 조공국가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토착 상인 계급이 생겨날 수 없었다."(137-8)


유럽의 정치경제를 남아시아와 중국과 비교했듯이 유럽의 '발흥' 또한 "13세기에 점점 유럽과 상호의존적 관계로 발전했던 북아프리카 지역(마그레브와 사하라 남부 제국들)과의 교역 관계를 살펴보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141) "지리적 근접성, 문화적 친근감, 경제적 연관성에 비춰볼 때, 후後우마이야 왕조, 파티마 왕조,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후예들(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이 아프리카의 금 덕분에 '건설되었다'는 주장을 인정한다면 아프리카의 금이 서유럽과 이집트로 유입된 것이 그들 경제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하라 사막과 모로코를 가로질러 수송된 아프리카의 금은 유럽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며 자행되던 노예무역도 중요하다. "지배층이 노예무역에서 발생하는 재정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늘 서로를 침략하는 전쟁 상태에 있었다."(144-5)


이 지역의 지배층은 "농업에 대한 과세보다 교역과 수입품의 재판매(예컨대 소금)에 대한 세금 징수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챙겼다. 농업은 기후 조건 때문에 상대적으로 잉여생산물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토지 소유는 그다지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와 서유럽 국가들에게 금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금을 공급하는 지역이 대부분 말리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는 지역이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노예를 사서 부리는 비용이 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보다 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인구밀도와 연계된 노예제 경제는 토착적인(내재적인) 기술 발전을 이룰 수 없게 했다."(146-7) 교역로를 지배하여 창출한 잉여는 "이익을 더 많이 창출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생산을 담당하는 산업에 재투자되지 않았다. 결국 잉여의 대부분은 "지배층들이 지중해와 중동 지역에서 들여오는 사치품들을 사는 데 쓰"이면서, 다시 외부로 유출되었다.(153)


지중해 지역의 이슬람 세력은 "목재 자원의 부족으로 해군력 약화라는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 10세기에 다시 일어선 비잔틴 제국에게 크레타 섬과 키프로스 섬을 빼앗기고 11세기에 코르시카 섬과 사르디니아 섬, 시칠리아 섬마저 잃으면서 이슬람의 해군력은 더욱 무력해졌다."(154)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지역에서 힘을 잃는 것과 동시에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와 유럽의 기독교 국가 사이의 무역수지도 후자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지중해 교역권 상실과 더불어 "상설 민병대나 무장한 동업조합의 부재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에 '도시국가'가 생겨날 수 없었던 한 요인이었다. 그 밖에도 유럽 상인들의 침략, 이베리아 반도 귀족들의 확장 야욕, 북아프리카 도시들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고자 애쓴 이슬람 지배자들의 행정, 도시로부터 강제로 조공을 거둬들이는 데 혈안이 된 내륙의 유목민들이 모두 이슬람에 '도시국가'가 생겨나지 못하게 한 요인들이었다."(157-9)


1350년 이후 서유럽에서 '봉건제의 부활'이 실패한 것은 "귀족들이 봉건제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막는 강력한 도시국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65) 이와 달리 "북아프리카와 수단 지역 국가들의 정치-경제 현실은 일종의 부족화部族化, 즉 '조직화된 무정부 상태'라고도 부른다. 장기적으로 국가 형성이나 자본주의적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동양적 전제정치나 절대주의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부족주의는 상대적으로 제도화된 권력의 부재와 구조적으로 취약한 국가를 암시한다. 따라서 당시 마그레브의 다양한 정치 체제는 중상주의 정책의 실현은 꿈도 꾸기 어려웠으며 더 크고 지속적인 정치 체제로 발전하여 마침내 그러한 체제를 구축한 엘리트들에게 결정적인 권력 수단이 될 '국민국가'로의 성장을 가로막는 끊임없는 난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167)


다양한 유목 세력이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역량과 자원을 소진시키는 동안 "유럽의 상인 공동체와 동업조합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도시국가 안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권력의 획득은 상인 엘리트들의 성공을 위한 필수요소였다. 그들은 국가의 하부구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중세 말 서유럽의 "상업자본주의 체제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추려내야 할 또 다른 예외적인 변수는 공동체적 정체성의 결과로 나타난 (법제적, 정치적인 의미에서 모두) 시민권이라는 개념이다. 예컨대, 독일에서는 시민을 그가 속한 도시 밖에서 재판할 수 없었고 도시 성벽 밖에 있는 감옥에 가두지 못했다. 또한 시민이 아닌 사람이 시민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도 없었다. 도시국가의 시민으로서 부르주아의 정체성은 상징적 의미에서 수세기 뒤 국민국가의 정체성으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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