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이론 - 일반상대성이론 100년사
페드루 G. 페레이라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서문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10년 동안 명백해졌듯이, 만일 일반상대성이론이 옳다면, 우주의 대부분은 빛을 내지 않는다. 우주는 빛을 방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사하거나 흡수하지도 않는 물질로 가득 차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관찰 증거는 압도적이다. 우주 전체의 거의 3분의 1이 마치 성난 벌떼처럼 은하들 주위에 모여 있는 비가시적이며 무거운 물질, 곧 암흑물질(dark matter)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3분의 2는 공간을 팽창시키는 기묘한 존재인 암흑 에너지(dark energy)가 차지한다. 겨우 우주의 4퍼센트만이 우리에게 익숙한 재료, 곧 원자(atom)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미미한 존재인 셈이다. 단,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옳다는 전제 아래에서 말이다. 우리가 일반상대성이론의 한계에 접근하는 중이고, 그 이론에 금기 가기 시작했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16)


1 사람이 자유낙하한다면


"물리학과 역학의 법칙들은 물체가 어떻게 운동하는지, 힘을 받으면 어떻게 가속하거나 감속하는지에 관한 규칙들이다." "관성 기준틀이란 일정한 속도로 운동하는 기준틀을 말한다. 당신이 멈추어 있는 장소에서, 이를테면 서재나 카페에서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관성 기준틀 안에 있는 것이다. 또다른 고전적인 예는 아무 진동 없이 매끄럽게 전진하는 창 없는 열차의 내부이다. 당신이 그런 열차 안에 앉아 있다면, 열차가 전진하는지 여부를 알아낼 길이 없다. 원리적으로, 한 관성 기준틀이 빠르게 운동하고 다른 관성 기준틀이 멈추어 있을 때, 두 관성 기준틀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해야 한다. 당신이 한 관성 기준틀에서 실험을 하여 어떤 물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한다면, 그 결과는 임의의 다른 관성 기준틀에서 얻은 측정 결과와 동일해야 한다. 물리학 법칙은 어느 관성 기준틀을 기준으로 삼든지 상관없이 동일하다."(23)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은 전기력과 자기력을 관련짓는 새로운 법칙을 발견했다." "가령, 막대자석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기력을 느끼고 전기력은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막대자석 옆으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사람은 자기력뿐 아니라 약간의 전기력도 느낀다. 맥스웰은 전기력과 자기력을, 관찰자의 위치나 속력과 상관없이 일정한 하나의 힘으로 통합했다. 그런데 뉴턴의 운동 법칙들과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들을 조합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세계가 정말로 양쪽 법칙들을 모두 따른다면, 한 관성 기준틀에서는 아무 힘도 느끼지 못하지만 다른 관성 기준틀에서는 힘을 느끼는 장치를 자석과 전선과 도르래 등으로 제작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 즉, 관성 기준틀들을 구별할 수 없어야 한다는 규칙이 깨진다. 따라서 뉴턴의 법칙들과 맥스웰의 법칙들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법칙들에 존재하는 이 '비대칭성(asymmetry)'을 수정하고 싶었다."(23-4)


"뉴턴이 설명한 중력은 아인슈타인의 아름답고 간결한 상대성이론의 두 전제 모두를 위반했다. 우선 뉴턴의 이론에서 중력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만일 두 물체가 갑자기 서로의 곁에 놓인다면, 두 물체 사이의 중력은 그 즉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력이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까지 이동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상대성원리에 따라서 어떤 신호, 어떤 효과도 광속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없다면, 그런 즉각적인 효과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에 못지않게 난처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역학과 전자기학을 조화시켰지만 뉴턴의 중력 법칙을 도외시했다는 사실이었다. 뉴턴의 중력은 서로 다른 관성 기준틀에서 다르게 보였다." "여러 해 뒤에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을 하면서) 새로운 중력 이론의 단초를 떠올렸다. 〈만일 사람이 자유낙하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무게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28-9)


"당신이 토끼 구멍으로 들어가 자유낙하는 앨리스라고 상상해보자. 중력을 받아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당신의 낙하속력은 일정한 비율로 증가할 것이다. 그 증가 비율, 곧 가속도는 중력의 효과와 정확히 일치할 것이고, 따라서 당신은 당신을 끌어당기거나 미는 힘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쏜살같이 공간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기분은 틀림없이 끔찍하겠지만 말이다. 이제 여러 물체들이 당신과 함께 떨어진다고 상상해보자. 책, 찻잔, 당신과 마찬가지로 겁에 질린 하얀 토끼 따위가 말이다. 그 모든 물체들도 중력의 효과와 일치하는 비율로 가속할 것이고, 따라서 함께 떨어지는 당신 주위에 둥둥 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몸무게를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 물체들은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모든 생각은 가속도 운동과 중력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우리가 상상한 자유낙하에서는 중력과 가속도 운동이 정확히 상쇄된다."(29)


"그렇게 낙하하는 사람을 상상한 1907년의 그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가속도 사이에 틀림없이 심층적인 관련성이 있으며 그 관련성이 자신의 상대성이론으로 중력을 기술하기 위한 열쇠임을 깨달았다. 만일 상대성원리를 수정하여 물리학 법칙이 서로에 대해서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이는 여러 기준틀에서뿐 아니라 가속하거나 감속하는 기준틀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되도록 만들 수 있다면, 중력이론과 전자기학과 역학을 융합할 수 있을 법했다. 비록 구체적인 방법은 몰랐지만, 아인슈타인의 이 찬란한 통찰은 상대성이론을 더 일반화하는 과정의 첫걸음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과 거기에서 도출한 귀결들에 관하여」라는 보고서에서, 중력이 있으면 광속이 달라지고 시계가 더 느리게 작동할 것임을 지적했다. 그렇게 상대성원리를 일반화하면 어쩌면 수성 궤도의 미세한 일그러짐도 설명할 수 있을 법했다."(30-1)


2 가장 값진 발견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도출되는 예측 하나는 먼 별들에서 방출된 빛이 태양처럼 크고 무거운 천체를 가까이 스쳐지나면, 그 빛의 진로가 휘어진다는 것이었다. 에딩턴은 그런 먼 별의 무리인 히아데스 성단을 연중 두 시점에 관찰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먼저 아무것도 시야를 가리지 않고 히아데스 성단에서 오는 빛을 중간에서 구부릴 천체도 없을 때 그 성단에 속한 별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태양이 히아데스 성단 앞에 놓였을 때 다시 한번 그 별들의 위치를 측정할 것이었다. 이 측정은 태양의 밝은 빛이 달에 거의 다 가려지는 개기일식 중에 실시해야 할 것이었다. 1919년 5월 29일이 되면, 히아데스 성단이 태양의 바로 뒤에 놓여 측정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치 변화가 약 1,000분의 4도, 곧 1.7초라면, 아인슈타인의 예측이 정확히 옳음이 입증될 것이었다. 이것이 에딩턴이 품은 간단명료한 목표였다."(48)


"에딩턴의 도박은 보람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하고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물리학의 예언자로 우뚝 섰다. 이때 이후 에딩턴은 새로운 상대성이론을 논할 때는 누구나 조언을 구하는 극소수의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의 견해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해석하거나 발전시킬 방향에 관한 지침으로서 누구의 견해보다 더 높은 권위를 누렸다. 또한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에딩턴의 극적인 탐사는 아인슈타인을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에딩턴의 발견은 아인슈타인의 인생을 바꾸었고, 일반상대성이론의 인기와 명성을 과학이론으로서는 누리기 힘든 수준으로, 적어도 한동안은 올려놓았다. 아인슈타인은 수백 년 동안 최고 권력자로 군림해온 뉴턴을 몰아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비록 난해하고 극소수만 이해하는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어 있었지만, 에딩턴의 검증을 멋지게 통과했다."(52)


3 옳은 수학, 형편없는 물리학


"1917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방정식들을 푸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몇 가지 전제를 채택했다. 그의 이론에서는 물질과 에너지의 분포가 시공의 행동을 결정했다. 따라서 우주 전체를 모형화하려면,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은 첫 시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논리적인 전제를 채택했는데, 그것은 물질과 에너지가 시공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전제였다." "이 전제 하에서 장방정식들은 훨씬 단순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주 기이한 결론이 나왔다. 즉, 아인슈타인의 방정식들은 그런 우주가 진화한다고 예측했다. 어느 시점에서인가, 고르게 퍼진 에너지와 물질의 조각들 모두가 조직화된 방식으로 서로에 대해서 운동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가장 큰 규모에서는 그 무엇도 멈추어 있지 않을 것이었다. 결국에는 만물이 쪼그라들면서 시공을 끌어당겨 우주 전체가 붕괴하여 사라질 것이었다."(54-5)


"우리 은하 바깥의 모습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당시의 천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도 하늘이 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우주가 수축하거나 팽창한다는 증거는 없었다. 결국 자신의 물리학적 직관과 선입견을 따르기로 한 아인슈타인은 진화하는 우주를 자신의 이론에서 배제하기 위해서 한 가지 수정을 제안했다. 그는 장방정식들에 새로운 상수항을 추가했다. '우주상수(cosmological constant)'로 불리는 그 항의 역할은 우주의 내용물 전체가 발휘하는 중력을 정확히 상쇄함으로써 우주를 안정화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온 우주에 골고루 퍼져 있다고 전제한 에너지와 물질, 곧 평범한 내용물 전체는 시공을 끌어당기는 반면, 우주상수는 시공을 밀어내 우주의 수축을 막는다. 이 밀어냄과 끌어당김이 우주를 미묘한 균형상태로 유지한다. 아인슈타인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은 정적인 상태로 말이다."(55-6)


"1922년, 「공간의 곡률에 관하여」라는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한 소련의 수학자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은 아인슈타인이 얻은 결과를 무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물질과 우주상수가 우주의 기하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하나의 수, 곧 공간의 전반적 곡률이 시간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주 속의 평범한 물질, 즉 곳곳에 흩뿌려진 별들과 은하들은 공간을 끌어당기고 수축시킬 것이었다. 만일 우주상수가 양수라면, 우주상수는 공간을 밀쳐내고 팽창시킬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두 효과가 균형을 이루어 공간이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프리드만은 이 정적인 해가 한 가지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해는 우주가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질의 영향이 우세한가 우주상수의 영향이 우세한가에 따라서 우주가 수축하거나 팽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60)


# 수학적으로 팽창하는 우주 모형을 제시한 학자들 : 드 지터 - 프리드만 - 르메트르 / 팽창하는 우주 모형을 관찰로 입증한 학자들 : 허블 & 휴메이슨


4 수축하는 별


"1939년,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지도학생 하틀랜드 스나이더와 함께 무거운 별이 일생을 마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해햐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이하고 이해하기 힘든 해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거의 25년 동안 어두운 배경에 웅크리고 있던 해였다. 오펜하이머는 충분히 크고 조밀한 별은 일생을 마치면서 수축하여 보이지 않게 될 것임을 발견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잠시 후 〈그 별은 멀리 떨어진 관찰자와의 소통을 단절하기에 이르고 오직 그 별의 중력장만 존속한다.〉 마치 빛과 에너지로 이루어진 수축하는 공 주위에 신비로운 장막이 드리워 그 공을 외부세계로부터 감추는 듯할 것이며, 시공은 휘어져 탄탄하기 그지없는 매듭을 이룰 것이었다. 아무것도, 심지어 빛도 그 장막 바깥으로 탈출할 수 없을 것이었다. 오펜하이머가 얻은 결과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에서 나온 또 하나의 수학적 괴짜였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79-80)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가 이 결과에 도달하기 거의 25년 전에 독일 천문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행성이나 별 같은 구형 질량 주위의 시공을 연구했다." "당신이 별에 접근하면,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만일 별이 작지만 충분히 무겁다면, 별은 어떤 구형 곡면에 의해서 가려져 그 곡면 너머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게 된다. 여러 해 뒤에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가 발견하게 될 장막이 바로 이 곡면이다. 이 곡면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려는 모든 것을 좌절시킨다. 무엇이든 별에 너무 접근하다가 그 구형 경계면 안으로 떨어지면 다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 경계면은 귀환불능 지점이다. 슈바르츠실트의 이상한 구면 밖으로 나가려면, 광속보다 더 빠른 속력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슈바르츠실트는 반세기도 더 지나서 '블랙홀(black hole)'로 명명될 대상을 발견한 것이었다."(81-2)


5 완전히 돌았어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들을 연구해 도출한 괴델의 해는 한 가지 기이한 특징이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모든 우주와 극적으로 달랐다. 프리드만과 르메트르의 우주에 사는 관찰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시공의 다양한 구역을 탐사할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과거를 뒤에 남기고 점점 더 늙어간다. 그 우주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명확히 구분된다. 그러나 괴델의 우주에서는 그렇지 않다. 만일 관찰자가 충분히 빠르게 움직인다면, 그는 회전하는 시공을 가로질러 원래 위치로 돌아올 수 있다. 심지어 정확하게 움직이기만 하면, 시공여행을 통해서 그 여행을 떠나기 전의 자기 자신에게로 가서 여행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괴델의 우주에서는 과거로 여행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정말로 자연을 반영한다면, 우리의 세계 경험과 크게 어긋나는 괴델의 부조리한 우주는 실재하는 물리적 가능성이다."(121-2)


6 라디오 데이스


"프리드만의 모형이나 르메트르의 모형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때 도달하는 우주의 시작은 공간 전체가 단일한 점에 무한히 집중된 순간에 해당했다. 다시 말해서 공간, 시간, 물질이 바로 그 최초 순간에 생겨났다. 호일과 그의 친구들이 보기에 이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소리였다. 훗날 호일이 말했듯이, 〈그것은 과학적으로 서술할 길이 없는 비합리적 과정이었다.〉 무에서 유가 나오는 창조를 어떤 물리학 법칙들로 서술할 수 있겠는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고, 호일이 보기에는 〈기본 전제를 빼돌려서 직접적인 관찰의 도전을 결코 받을 수 없는 곳에 놓은 명백하게 미흡한 생각〉이었다. 이들의 반발은 에딩턴이 르메트르의 〈태초의 알〉을 소스라치며 폄하했던 일을 연상시켰다." "본디와 골드는 최초 순간─또는 나중에 호일이 붙인 이름으로는 '빅뱅'─을 거의 추상적이고 미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즉, 시작은 없을 테고, 항상 (한결같은) 정상상태에 머무는 영원한 우주만 있을 터였다."(134-5)


"전파는 빛 파동과 유사하게 행동하지만, 파장이 가시광선보다 10억 배 길다. 우리 눈에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햇빛의 대부분을 이룬다)의 파장은 100만 분의 1미터 미만이다. 대조적으로 전파의 파장은 1밀리미터에서 수백 미터까지 다양하다. 칼 잰스키는 우리 은하가 대단히 많은 전파를 밤낮으로 방출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보기에 태양은 우리 은하 전체보다 훨씬 더 밝지만 그렇게 많은 전파를 방출하지 않았다. 1933년에 발표한 논문 「우주에서 기원하는 듯한 전기적 교란」에서 잰스키는 모든 전파 방해의 원인을 세계적으로 분류하고 전파가 날아오는 방향을 보여주는 지도를 제시했다. 그의 논문은 우주를 관찰하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했다. 렌즈가 장착된 거대한 망원경을 산꼭대기에 설치하는 대신에, 이 새로운 관찰은 철조망, 강철 막대기, 접시를 가지고 탁 트인 평원에서 할 수 있었다. 먼 천체의 희미한 빛을 관찰하는 대신에, 천문학자들은 우주에서 오는 전파를 포착할 수 있었다."(139-40)


"정상우주론을 살펴보던 마틴 라일에게 어두운 전파원의 개수와 밝은 전파원의 개수 사이의 비율은 우리가 사는 우주의 유형을 알려주는 좋은 단서이다. 먼 전파원에서 오는 전파는 오랫동안 이동하여 우리에게 도달하므로, 먼 전파원을 관찰할 때 우리는 과거의 우주를 관찰하는 셈이다. 만일 우리가 호일, 골드, 본디의 정상상태 우주에서 산다면, 전파원들의 밀도는 시간에 따라서 변함없이 일정할 것이다. 따라서 특정 부피 안에 있는 전파원의 총 개수는 그 부피에 정비례해야 한다. 반면에 프리드만과 르메트르가 제안한 것과 같은 진화하는 우주 모형에서는, 우주의 밀도가 지금보다 과거에 더 높다. 따라서 멀고 어두운 전파원이 가깝고 밝은 전파원보다 더 많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두운 전파원의 개수와 밝은 전파원의 개수를 세서 비교하면, 우리 우주가 빅뱅 모형에 부합하는지 아니면 정상상태 우주 모형에 부합하는지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143)


7 휠러리즘


"존 아치볼드 휠러가 유능한 제자 찰스 미스너와 함께 개발한 아이디어는 일반상대성이론에 전하(electric charge)를 추가하되, 어떤 전하도 도입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휠러가 이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서 고안한 휠러리즘은 〈전하 없는 전하(charge without charge)〉였다. 이들은 사고실험에서 여러 수학 기법을 이용하여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시공 구역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들을 '웜홀(wormhole)'이라는 관으로 연결했다. 그리고 터널과 유사한 그 웜홀로 전기장선들(electric field lines)을 꿰는 데에 성공했다. 웜홀의 한쪽 끝에서 빠져나오는 장선들은 그 끝이 마치 양전하를 띤 것처럼 음전하를 끌어당기게 만들 것이었다. 웜홀의 반대쪽 끝으로 들어가는 장선들은 그 끝이 마치 음전하를 띤 것처럼 행동하게 만들 것이었다. 요컨대 웜홀은 서로 멀리 떨어진 양전하와 음전하의 쌍처럼 행동할 텐데, 실제로 이 상황은 전하를 띤 입자들과 전혀 무관하다."(151-2)


"〈질량 없는 질량(mass without mass)〉이라는 휠러리즘도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질량을 가진 대상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설명하지만, 휠러는 아인슈타인이 얻은 결과들을 질량과 전혀 상관없이 도출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싶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빛은 질량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광선 다발을 압축하여 그 다발이 공간과 시간을 충분히 많이 휘게 만들 수 있다면, 광선 다발이 질량 덩어리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휠러는 제안했다. 그런 빛 뭉치, 즉 휠러가 '지온(geon)'으로 명명한 대상은 무게를 가질 것이고 다른 지온들을 끌어당길 것이었다. 이때 광선들은 휘어져서 도넛 모양의 코일을 이루어야 하고 또한 쉽게 해체될 수 있지만 실제 질량 없이 질량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었다. 휠러는 또다른 학생 킵 손과 함께 지온이 즉각 블안정해지지 않으면서 자연에 존재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작업에 착수했다."(152)


"그리고 당연히 양자와 일반상대성이론을 조화시키는 문제도 있었다. 이 문제는 너무나 훌륭하고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휠러로서는 해결을 시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휠러는 만일 당신이 아주 작은 규모의 시공을 관찰할 수 있다면, 기이한 효과들의 발생을 보기 시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큰 규모에서 시공은 질량을 가진 대상들(휠러가 고안한 지온과 웜홀도 포함된다)에 의해서 완만하게 휘어지기는 했어도 매끄럽게 보이겠지만, 작은 규모에서 당신은 있는 줄 몰랐던 울퉁불퉁함을 보게 될 것이었다. 정말로 성능이 좋은 현미경으로 관찰한다면, 시공이 마구 요동하는 상태임을 발견할 것이다. 실제로 양자 불확정성 때문에 시공은 아주 작은 규모에서는 부글거리는 거품더미처럼 보여야 한다. 우리가 시공의 근본적인 울퉁불퉁함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흐릿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152-3)


8 특이점


"일찍이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는 단순한 근사(approximation)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해를 구성했다. 즉, 완벽한 구형의 물질 덩어리가 쪼그라드는 상황을 전제했다. 휠러는 그것이 너무 심한 이상화(理想化)라고 보았다. 실제로 수축하는 별이 지구처럼 울퉁불퉁하다면, 수축과정이 심하게 왜곡되어 특이점이 아예 형성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저 펜로즈가 〈구형 대칭성을 깨는 불규칙성들이 시공 특이점의 발생을 막을 수 없다〉는 증명을 담은 논문을 내놓았다." "그는 임의의 시공을 대상으로 삼고 그 시공의 가장 기초적인 속성 몇 가지와 그 시공에 들어 있는 물질의 유형을 살펴봄으로써 그 시공이 어떤 일을 겪을지를, 즉 한 점으로 수축할 것인지 아니면 무한히 팽창할 것인지를 확실히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규칙들을 휠러가 〈최종상태 문제〉라고 부른 중력 붕괴 문제에 적용하여 특이점이라는 결과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179-81)


"마틴 라일은 케임브리지의 정상우주론을 무너뜨리려는 노력에서 처음에는 실패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데이터는 향상되고 있었다." "마틴 리스는 적색편이가 측정된 퀘이사 35개를 표본으로 삼고 이들을 세 무리로 분류했다. 한 무리는 낮은 적색편이를 나타냈다. 즉, 이 무리는 시간 공간적으로 지구에서 가까운 퀘이사들이었다. 둘째 무리는 중간 수준의 적색편이를 나타내는 퀘이사들이었고, 마지막 무리는 높은 적색편이를 나타내는 먼 과거의 퀘이사들이었다. 우주가 시간에 따라서 진화하지 않는다고 보는 정상우주론이 옳다면, 위의 세 무리에 대략 같은 개수의 퀘이사가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리스는 첫째 무리에 속하는 최근의 퀘이사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의 모든 퀘이사가 셋째 무리에 속했다. 그래프를 그려보니 모든 것이 명백했다. 다시 말해서, 퀘이사의 개수가 시간에 따라서 변화했고(과거에 더 많았고), 따라서 정상우주론은 옳지 않았다."(182-3)


"1968년 2월, 벨과 휴이시를 비롯한 공동 저자들은 〈맥동하는 전파원들에서 나오는 이례적인 신호가 멀라드 전파천문대에서 포착되었다〉면서, 〈그 복사[신호]는 우리 은하 내부의 국지적 천체들에서 나오는 듯하며 백색왜성이나 중성자별의 진동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차트 용지에 기록된 스파이크들이 밀도가 높은 전파원인 백색왜성이나 중성자별의 진동 혹은 맥동을 보여준다고 추측했다." "펄서(pulsar)는 중성자별의 존재를 보여주는 최초의 실질적인 증거였다. 펄서는 실은 맥동하지 않고 회전한다. 회전하기 때문에 주기적인 신호를 방출하는 것이다. 아무튼 펄서는 중력 붕괴의 과정을 완전히 규명하려면 채워넣어야 할 단계로서, 란다우가 상정하고 오펜하이머가 연구하고 휠러와 그의 제자들이 아주 꼼꼼하게 탐구한 가상의 천체였다. 펄서는 펜로즈의 불가피한 특이점이 형성되기 직전의 마지막 단계였다."(187-9)


9 통합의 슬픔


"(중력을 설명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은 (강한핵력, 약한핵력, 전자기력을 설명하는) 양자물리학과 양립할 수 없는 유일한 이론으로 남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와 양자물리학의 토대를 조화시키는 통일을 향한 첫걸음은 폴 디랙 자신이 전자를 기술하기 위해서 개발한 근본 방정식─이른바 디랙 방정식─이었다. 양자물리학 방정식들은 시스템(예컨대 수소 원자에서 양성자에 속박된 전자)의 양자상태가 시간에 따라서 어떻게 진화하는지 알려준다. 양자물리학은 공간과 시간을 아주 명확하게 구분한다. 반면에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공간과 시간을 합쳐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시공으로 만든다. 또 역학 법칙들과 빛에 관한 법칙들을 합쳐서 일관된 틀에 맞추어 넣는다. 폴 디랙은 이 틀에 양자물리학 법칙들도 맞추어 넣는 데에 성공했다. 디랙의 방정식 덕분에 양자물리학까지 포함해서 물리학 전체가 특수상대성원리에 따를 수 있게 되었다."(197-9)


"디렉이 발견한 방정식은 페르미온인 전자의 양자물리학적 행동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도 부합하게 기술한다. 구체적으로 이 방정식이 기술하는 것은 공간상의 특정 위치에 있거나 특정 속력을 가진 전자를 발견할 확률이다. 디랙은 공간을 따로 떼어내지 않았다. 대신에 디랙의 방정식은 특수상대성이론이 요구하는 대로 시공 전체에서 하나의 일관된 방식으로 정의된다. 이 방정식에는 자연세계와 기본 입자들에 관한 통찰과 정보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디랙 자신도 놀랐지만, 또한 그의 방정식은 반입자(antiparticle)의 존재를 예측했다. 반입자는 짝을 이루는 입자와 질량은 같지만 전하량이 반대이다. 전자의 반입자는 양전자(positron)라고 한다. 양전자는 다른 모든 면에서 전자와 똑같지만 음전하가 아니라 양전하를 띤다. 디랙의 방정식에 따르면, 전자와 양전자가 둘 다 자연에 존재해야 한다." "실제로 1932년에 우주선(cosmic ray)에서 양전자가 발견되었다."(200)


"1974년 2월에 열린 옥스퍼드 심포지엄에서 호킹은 양자물리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이 결합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블랙홀이 실은 검지 않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빛을 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후 40년 동안 양자중력이론을 바꾸게 될 희한한 주장이었다." "1970년대 초에 스티븐 호킹은 이미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의 소속은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과(DAMTP)였다. 데니스 시아마의 지도를 받은 호킹은 로저 펜로즈와 함께 연구하여 시간의 시초에 특이점이 존재했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1970년대 초에 그는 우주론에서 블랙홀로 관심을 돌려서 브랜던 카터, 베르너 이스라엘과 함께 블랙홀은 털이 없음을 최종적으로 증명했다. 이 증명에 따르면, 블랙홀은 자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상실한다. 그리고 질량과 회전과 전하량이 같은 블랙홀들은 모두 똑같은 모습이다."(208)


"사건지평 근처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호킹은 거기에서 기이한 것을 발견했다. 양자물리학은 진공에서 입자와 반입자의 쌍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한다. 평범한 조건에서는 입자와 반입자가 생겨나자마자 곧바로 충돌하여 소멸한다. 그러나 호킹이 발견했듯이 사건지평 근처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 즉, 반입자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가고 입자는 남는 경우가 일부 발생한다. 이 과정이 거듭되면, 반입자들은 블랙홀로 빨려들고, 블랙홀은 고에너지 입자들의 흐름을 느리지만 확실하게 방출할 것이다. 호킹은 방출되는 입자들이 광자처럼 질량이 없을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상세히 계산한 끝에, 멀리 떨어진 관찰자는 블랙홀이 흡사 희미한 별처럼 믿기 힘들 정도로 약한 빛을 내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우리의 태양을 비롯한 별들처럼 블랙홀에도 온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212)


"요컨대 호킹은 일반상대성이론이 예측하는 블랙홀이 양자물리학 때문에 빛을 방출하고 온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단히 명료한 수학적 결론이었던 이 발견에서, 호킹은 블랙홀이 방출하는 복사의 온도가 블랙홀의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계산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예컨대 질량이 태양과 같은 블랙홀은 온도가 10억 분이 1 켈빈일 것이고, 질량이 달과 같은 블랙홀의 온도는 약 6켈빈일 것이었다. 블랙홀이 빛을 냄에 따라서, 블랙홀의 질량은 조금씩 줄어든다. 이 과정은 엄청나게 느리게 진행된다. 태양 질량의 블랙홀이 질량을 모두 잃으려면(호킹의 표현으로는, 〈증발하려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훨씬 더 작은 블랙홀들은 훨씬 더 빨리 증발할 수 있다. 예컨대 질량이 약 1조 킬로그램인 (천체물리학의 기준에서는 작은) 블랙홀은 우주의 수명보다 짧은 시간 안에 증발할 것이며 마지막 10분의 1초 동안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방출할 것이다."(213)


10 중력을 보았다 


"중력파와 중력의 관계는 전자기파와 전자기력의 관계와 같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파동은 시공 자체의 잔물결일 것이다. 시공은 말하자면, 물웅덩이처럼 행동한다. 당신이 웅덩이에 돌멩이를 던지면, 잔물결이 일어나서 웅덩이의 가장자리까지 퍼져나간다. 전자기파나 물웅덩이의 잔물결과 마찬가지로, 중력파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에너지를 운반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기파와 달리, 중력파는 포착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중력파는 중력 시스템에서 그 외부로 에너지를 운반하기는 하는데, 이 운반의 효율이 아주 낮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1억 5,000만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도는데, 이 과정에서 지구는 중력파를 방출하면서 천천히 에너지를 잃고 태양에 접근한다. 그러나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아주 천천히, 대략 하루에 양성자의 지름만큼 줄어든다. 즉, 지구가 존속하는 기간 내내 지구는 태양에 겨우 1밀리미터쯤 접근할 것이다."(218)


"1974년,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조지프 테일러와 러셀 헐스는 중성자별 두 개가 아주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주위를 도는 것을 발견했다. 한쪽 중성자별은 1,000분의 몇 초마다 폭발적으로 빛을 내뿜는 펄서여서, 이 별이 고요한 짝별 주위를 도는 모습은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테일러와 헐스는 서로의 주위를 도는 이 중성자별들의 위치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하게 측정했다. 이 성취는 일반상대성이론 연구를 위한 새롭고 완벽한 실험실을 발견한 것과 같았다. 아인슈타인은 (비록 말년에 이 주장을 철회하긴 했지만) 서로의 주위를 도는 두 천체는 에너지를 주위 시공으로 방출하면서 서로에게 점점 더 접근하여 결국 충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중성자별은 서로의 주위를 돌면서 중력파를 방출하여 에너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이 천체들은 중력파의 존재를 비록 간접적이지만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였다. 측정 결과는 명확했으며 이론과 멋지게 일치했다."(228)


11 암흑 우주


"1979년에 로버트 디키와 짐 피블스는 「빅뱅 우주론─수수께끼들과 묘안들」이라는 논문에서 성공적인 빅뱅 이론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몇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우주는 빅뱅 이론에 부합하기에는 너무 균질적인 듯하다. 그 균질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이미 있었지만, 디키와 피블스는 만족스러운 설명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왜 시공의 기하학과 대조적으로 공간의 기하학은 이토록 단순한 듯할까? 공간은 전반적으로 곡률이 0이고 고등학교 수준의 유클리드 기하학 법칙들을 따르는 듯하다. 예컨대 평행선들은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법칙이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법칙은 예외 없이 참인 듯하다." "현재 우주 공간의 곡률이 거의 0인 듯하다면, 과거에 우주 공간의 곡률은 지금보다 더 0에 가까웠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가 사는 우주는 개연성이 극도로 낮은 우주이다. 과연 태초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253-4)


"겨우 1년 후, 우주론은 초기 우주의 진화에 관한 단순한 제안 하나 때문에 완전히 뒤집혔다. 그 제안의 요점은 우주의 인플레이션(cosmic inflation)이었다. 관련 아이디어는 일찍부터 불명료한 형태로 떠돌았지만, 스탠퍼드 선형가속기 센터의 박사후연구원 앨런 구스에 이르러 처음으로 우주 인플레이션의 핵심이 제시되었다. 구스는 몇몇 대통일이론─전자기력, 약한핵력, 강한핵력을 단일한 힘으로 통합하려고 애쓰는 이론─에서 여러 장들 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높은 에너지를 가지고 다른 모든 장들을 압도하는 상태에 우주가 갇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상태에서 우주는 급팽창할 것이었다. 혹은 구스의 표현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을 겪을 것이었다. 비록 구스의 원래 아이디어는 결함이 있는 것─만일 우주가 그런 상태에 갇힌다면, 그런 상태를 벗어날 길이 없다─으로 판명되었지만, 다른 연구자들이 새로운 인플레이션 방식들을 신속하게 제안했다."(255)


"인플레이션은 공간의 곡률을 거의 한순간에 0으로 만들어버린다. 당신의 손 안에 들어갈 만한 크기의 풍선을 거대한 펌프로 부풀려 거의 한순간에 지구만큼 크게 만든다고 상상해보라. 이제 당신의 눈앞에 놓인 풍선의 일부는 완전히 평평하게 보일 것이다. 또한 인플레이션은 우주를 엄청나게 균질한 상태로 만들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아주 이른 시기의 우주에서 구조의 성장이 시작될 길도 열어준다. 우주가 인플레이션을 겪는 동안, 시공 구조의 미시적 양자요동이 급격히 확대되어 거대한 규모가 되었을 것이다. 시카고 천체물리학자들이 간결하게 설명한 대로 인플레이션은 〈내부 우주와 외부 우주〉를 연결했다. 내부 우주(inner space)란 양자와 근본적인 힘들의 세계였고, 외부 우주(outer space)란 일반상대성이론이 진가를 발휘하는 장소, 곧 상식적인 의미의 우주였다. 이제 우주론의 새로운 목표는 내부 우주와 외부 우주 간의 연결 단서를 찾아내는 것이었다."(255-6)


"피블스는 은하를 나선형으로 배열된 채 중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면서 회전하는 입자들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가 모형에 회전을 부여하면 어김없이 은하가 해체되었다. 은하 중심의 별 집단이 은하의 팔들로 분산되고 결국 은하 전체가 흩어졌다. 오스트리커와 피블스는 회전하는 입자들을 보이지 않는 질량으로 이루어진 공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모형을 안정화하려고 했다. 이 질량 공─이른바 '무리(halo)'─의 중력을 추가하여 은하의 해체를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무리는 어두워서(비가시적이어서) 망원경에 포착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안정적인 모형을 구성하려면 역설적이게도 이 어두운 물질, 곧 암흑물질이 별들을 이루는 물질보다 훨씬 더 많아야 했다." "1982년, 새로운 우주 모형을 구성하기 시작하면서 피블스는 원자들과 더불어 암흑물질을 모형에 집어넣기로 결정했다. 정확히 말해서 그는 우주가 거의 온통 정체불명의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전제했다."(258)


"여러 가지 기본적인 관찰 데이터와 상충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자와 물리학자 대다수가 차가운 암흑물질 모형을 받아들였다. 그 모형은 개념적으로 단순한 데다가 인플레이션 모형과 잘 어울리고 은하들에 암흑물질이 있다는 증거에도 부합했다. CDM(Cold Dark Matter, 차가운 암흑 물질) 모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모형을 더 발전시키고 어떻게든 수정하는 방법들을 모색했다." "그러나 차가운 암흑물질 모형이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에서 가능한 해결책의 하나로 번번이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가 튀어나왔다." "우주의 조성, 나이, 기하학, 기본 요소들은 여러 해, 심지어 몇십 년 동안 불확실했다. 다양한 제안들이 예외 없이 찬반양론에 부딪혔고, 우주론에서는 과학 못지않게 미학이 중요했다. 우주론 연구자들은 각자 취향에 따라서 마음에 드는 이론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이론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우주상수이론이 승자가 된 것이었다."(260-7)


12 시공의 끝


"물리적 정보가 항상 보존된다는 것은 양자물리학 법칙들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러나 블랙홀들이 존재한다면, 블랙홀들은 복사를 방출하고 증발할 텐데, 이는 우주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 곧 뉴턴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의 기본 전제를 폐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호킹의 강연은 동료 물리학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많은 이들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무턱대고 거부했다. 만일 정보가 사라진다면, 예측력을 가진 과학으로서 물리학은 미래가 없었다. 물리학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블랙홀이 기존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부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즉, 블랙홀이 새로운 유형의 미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정보를 저장할 수 있고 수명을 마칠 때 그 정보를 다시 외부세계로 방출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 증명은 오직 양자중력이론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274-5)


"끈이론(string theory)은 1960년대 후반에, 말하자면 가내공업 수준으로 출발하여 입자가속기 실험들에서 출현하던 이색적인 새 입자들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기본 아이디어는 점과 같은 대상으로 여겨진 그 입자들을 출렁거리는 끈으로 간주하면 더 잘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끈이론에 따르면, 입자들의 질량 차이는 공간에 떠다니는 미세한 끈이 진동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이 접근법의 특별한 장점은 단 하나의 끈으로 모든 입자들을 기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끈이 더 많이 출렁거릴수록, 끈의 에너지가 높아지고 끈에 대응하는 입자의 질량이 증가한다. 이것도 일종의 통일이기는 했지만, 기존에 제안된 어떤 통일과도 전혀 달랐다. 근본적인 끈의 개념은 매혹적이지만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다. 끈이론을 이용하여 물리적 예측을 시도할 때마다 무한대 값들이 튀어나왔고, 그 값들을 양자전기역학이나 표준 모형에서처럼 재규격화할 수 없었다."(277-8)


"1984년,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머리 겔만의 보호를 받던 끈이론가 존 슈워츠가 런던에서 온 젊은 영국인 물리학자 마이클 그린과 팀을 꾸렸다. 두 사람은 끈이론이 실은 양자중력이론으로서 더 유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이들은 양자중력이론이 몇몇 조건들을 충족하고 몇몇 대칭성들을 가진다면, 10차원 우주를 기술하는 끈이론이 양자중력이론을 포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세기 막바지에 이르러 끈이론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환호도 뜨거웠지만, 끈이론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고 할 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가용한 끈이론의 버전이 너무 많은 듯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설령 한 버전을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세계와 대응할 가능성이 있는 해들이 어마어마하게─각각의 버전에 10^500개씩─ 많았다. 끈이론가들은 이 무수히 많은 가능한 우주들을 통틀어 '풍경(landscape)'이라고 불렀다. 요컨대 끈이론은 여전히 특정 사안에 대해서 유일한 예측을 내놓을 수 없었다."(278-80)


"스티븐 호킹이 블랙홀 정보 역설을 제안한 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합의된 앙자중력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중력이론을 추구하는 두 진영의 반목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기반이 존재한다. 근본적으로 새롭고 거의 공유된, 시공의 본성에 대한 견해가 등장하는 중이다. 끈이론부터 고리 양자중력이론, 더 나아가서 일반상대성이론을 양자화하려는 기타 모든 틈새의 시도들까지, 거의 모든 접근법들은 시공을 진정으로 근본적인 대상으로 보는 견해를 포기한다. 이 통찰은 호킹의 블랙홀 복사 발견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으며 블랙홀에서 정보가 소멸하고 물리학의 예측 가능성이 종말을 맺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 "만일 블랙홀의 표면에 정말로 정보가 깃들어 있다면, 그 정보는 블랙홀 복사(호킹 복사)에 실려 점차 외부로 방출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완전히 증발할 때까지 블랙홀은 애초에 삼킨 정보를 모두 방출할 것이며, 정보의 소멸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287-9)


13 화려한 추정


"1965년부터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우주론과 중력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대세와 상관없이 나름의 속도로 연구했다." "짧고 명쾌한 한 논문에서 사하로프는 시공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환상에 불과하며 실재의 복잡한 양자적 본성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공을 보고 시공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는 것은 물, 결정(結晶), 기타 복잡한 시스템을 보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당신이 본다고 생각하는 바는 실은 더 근본적인 실재를 대충 그린 그림일 뿐이다. 물의 모습은 물 분자들의 양자적 속성들과 물 분자들이 서로 느슨하게 결합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이 속성들과 결합 방식 때문에 물은 투명한 액체로서 출렁거리며 물답게 행동한다. 물론 세부사항은 다르지만, 사하로프의 전반적인 견해는 오늘날 우리가 시공을 보는 방식을 선취했다. 양자중력이론이 40여 년 동안 발전하여 도달한 지점을 사하로프는 이미 그때 내다보고 있었던 셈이다."(297)


"사하로프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연구했고, 물의 점성이나 결정의 탄성이 근본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시공의 기하학이 실은 근본적이지 않다고 추측했다. 점성이나 탄성은 실재에 관한 더 기초적인 기술(記述)에서 창발(創發)하는 속성들이다. 마찬가지로 중력은 물질의 양자적 본성에서 창발한다. 사하로프의 짧은 세 쪽짜리 논문의 놀라운 결론은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들이 그런 전제에서 자연스럽게 창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양자세계가 시공의 기하학을 자연스럽게 유발한다는 것이다. 사하로프의 중력유발이론(induced theory of gravity)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어느 정도 유사했지만, 알고 보면 더 복잡한 방정식들로 이어졌다."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사하로프의 이론 사이의 차이는 블랙홀 근처나 모든 것이 뜨겁고 조밀했던 최초의 우주에서 시공이 심하게 휠 때, 또는 휠러의 양자 거품더미가 중요해지는 미시 규모에서만 드러날 것이었다."(297-8)


14 엄청난 일이 곧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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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폭탄 만들기 2
리처드 로즈 지음, 문신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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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신세계의 문턱에서


"1942년 11월 초 페르미는 콤프턴의 사무실에서 그의 팀들이 실험 파일들을 건설했던 스쿼시 경기장에 파일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1.0보다 큰 k값은 1.0보다 작은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위험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콤프턴은 두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우리는 진짜 핵폭발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다.〉 콤프턴은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는 훨씬 침착하게 썼다. 〈파일 속에 있는 방사능 물질의 양은 어마어마하고 그리고 이런 장소에서 과도한 방사능 물질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는 페르미에게 제어 가능성에 대한 분석을 요구했다. 페르미는 파일에 사용할 수동식과 자동식 제어봉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계산에 의하면 저속 중성자 분열이라고 할지라도 1,000분의 수초 이내의 시간에 증식되므로 기계적인 제어 시스템이 제 위치에 찾아 들어가기 전에 열과 방사선이 위험한 수준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57-8)


"연쇄 반응이 통제될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1939년 보어의 핵분열 발견 발표 후 카네기 대학교의 지구자기학과에서 리처드 로버트 팀에 의하여 발견된 것이었다. 콤프턴의 말에 따르면 〈분열과정에서 나오는 일부 중성자들은 즉시 방출되는 것이 아니고 분열이 일어난 후 수초 뒤에 방출된다는 것이다.〉 파일의 k값이 1.0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서 가동된다면 지연중성자들을 조정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콤프턴은 제어가 가능하다는 확신이 서자 페르미에게 CP-1을 서쪽 스탠드 안에 건설하도록 허락했다." "이 때는 페르미에 의해 창안되는 과정에 있는 원자로공학에 아직 '노심의 용해(Meltdown)'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의 작은 체르노빌(Chernobyl)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미는 놀라우리만큼 유능한 엔지니어였다."(58)


"어둡고 추운 시카고의 겨울밤 중성자와 플루토늄이 증식을 기다리고 있는 파일에는 77만 1000파운드의 그라파이트, 8만 590파운드의 산화우리늄 그리고 1만 2400파운드의 우라늄 금속이 사용됐다. 자재와 건축 비용은 100만 달러가 소요됐다. 움직이는 부분은 단 하나, 제어봉뿐이었다. 만일 페르미가 동력 생산을 계획했다면 그것은 강철과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 설치되고 분열에 의해 발생된 열을 물, 헬륨 또는 비스무트를 사용하여 펌프로 뽑아내고 전기생산을 위한 터빈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CP-1은 전적으로 연쇄 반응을 증명하기 위한 물리학 실험이었다. 차폐나 냉각장치도 없고 출력은 0.5와트 정도로 통제될 것이다." "페르미는 연쇄 반응이 발생하면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가 틀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젊은 연구원 한 명이 물었다. 그는 지연 방출되는 중성자들에 의한 제동효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페르미는 〈나는 천천히 걸어나갈 것이다〉라고 대답했다."(61-2)


"12월 2일, 연쇄 반응 측정에 성공한 페르미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다음날 기술협의회에서 1.0006의 k값을 얻었다고 보고하게 될 것이다. 중성자는 세기는 2분마다 배로 증가하고 있었다. 제어하지 않은 상태로 1시간 30분만 그대로 놔둔다면 100만 kW의 에너지를 방출했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죽게 되고 녹아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왜 페르미가 파일 가동을 중단시키지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앤더슨이 말했다. 〈페르미는 너무도 침착했다. 그는 1분 또 1분 기다렸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걱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안정 제어봉을 떨어뜨리라고 명령했다.〉 이때가 오후 3시 53분이었다. 페르미는 파일을 4분 30초 동안 0.5W의 출력으로 가동시켰다. 수년에 걸친 발견과 실험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인간이 원자핵으로부터 에너지를 방출시키고 통제했다. 연쇄 반응은 이제 더 이상 헛소리가 아니다."(68)


2 / 물리학과 사막


"오펜하이머가 새로운 연구체제의 책임자가 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이 연구는 주로 실험과 공학적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인데, 오펜하이머는 이론가였다. 베테가 그의 회고록에 기록했다. 〈프로젝트 지도자급은 모두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노벨상도 받지 못했다. 또한 그로브스가 암초라고 부른 오펜하이머의 좌익 배경이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안은 육군 방첩 부대의 소관이었고 이 방첩 부대는 전 약혼자, 부인, 남동생 부부 등이 모두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며 아직도 지하활동을 할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을 확고부동하게 거절했다. 어째됐건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를 원했다." "〈한참 토의한 끝에 나는 각 위원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있으면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다. 몇 주 후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래서 오펜하이머에게 책임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78-9)


"오펜하이머는 사람을 구하러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로스앨러모스에 합류한다는 것은 많은 걱정거리를 만들었다. 그곳은 군 주둔지였다. 여행과 가족들의 이사 자유도 극히 제한됐고 ······ 기약도 없이 뉴멕시코의 황무지로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과 군의 후원 아래 생활한다는 것이 많은 과학자들과 가족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또 다른 면도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은 참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이 일을 성공적으로 빨리 완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쟁의 결과를 결정지을 수도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식과 과학기술을 이 나라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더없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이 성취된다면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마침내 이런 흥분, 헌신 그리고 애국심이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스앨러모스로 왔다.〉"(83-4)


"폭탄설계가 중요한 문제였다. 네더마이어는 구형 반사체 주위에 빙둘러 폭약을 설치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여러 곳에서 동시에 기폭시키면 폭약은 내부를 향하여 터질 것이다. 폭발에서 생기는 충격파는 구형 반사체를 모든 방향에서 압축시키고 따라서 내부의 중심부에 있는 핵물질도 압축될 것이다." "삼차원적으로 내부를 향해 압축하는 것이 '내폭'이다." "1943년, 노이만과 텔러는 지금까지 시도한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한 내폭 방법으로 플루토늄을 지구상에서 얻을 수 없는 밀도로 압축하면 임계상태 이하의 속이 차 있는 질량을 폭탄의 소재로 사용해도 구각을 압축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오펜하이머에게 통보할 수 있었다. 가벼운 원소 불순물에 의한 조숙한 폭발도 방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내폭 방식의 개발로 더 신뢰도가 높은 폭탄을 더 빨리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102-9)


3 / 완전히 다른 동물


"보어는 1939년 전국을 거대한 공장으로 변환시켜야 우라늄 235를 분리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수년 후 보어가 로스앨러모스를 방문했을 때, 에드워드 텔러는 〈이제 아시겠지요 ······. 보시는 바와 같이 ······〉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텔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보어는 〈내가 전국을 공장으로 만들지 않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지! 바로 그렇게 한 걸세!〉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기념비적인 규모는 당시 미국이 갖고 있던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 나라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얼마나 야심차게 움직였는가 하는 점을 보여 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을 위한 대군주(Overlord) 작전이 계획됐던 1943년 8월 퀘벡 회의에서 윈스턴 처칠이 루스벨트에게서 협력자의 위치를 확인 받을 때까지는, 미국은 다른 국가들, 영국마저도 원자 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로브스는 군사정책위원회에 미국이 전 세계의 우라늄 광석 공급을 완전히 통제하여야 된다는 것을 제안했다."(134-5)


"핵 반응로에서 발생하는 방사능 물질을 전쟁무기로 사용하는 방법은 아서 콤프턴이 1941년 국가 과학원(NSA) 검토위원회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금속 연구소 과학자들은 독일이 파일 개발에 있어서 미국보다 1년 또는 그 이상 앞섰다는 가정 하에 1942년 말 독일인들이 이런 무기를 개발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는 페르미의 생각을 텔러와도 상의했다. 텔러는 가장 가망성이 있는 방사능 물질은 스트론튬(Strontium)이라고 했다. 원자번호 90번인 스트론튬은 인체의 뼛속에 축적된다. 텔러는 파일의 우라늄에서 스트론튬을 분리해 내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펜하이머는 자기 생애에서 여러 번 자기는 아힘사(Ahimsa, 남에게 해를 입히거나 또는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의 인도어)를 지킨다고 고백했다. 이제 그는 (스트론튬을 이용한 방사능 오염으로) 50만 명의 인명을 대량 독살할 준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138-9)


4 / 폭로


"보어가 폭로한 폭탄의 상보성은 동시대의 어떠한 정치적인 문제보다도 훨씬 더 기본적인 것이었다. 첫 번째 폭탄이 거의 완성될 때쯤 소련에게 폭탄 개발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통보해 준다. 그러면 소련은 신뢰감이 생겨 전후 군비 통제 협상에 협력할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이 정보를 스스로 알아내게 하고, 폭탄을 전쟁 중에 사용한다면, 소련은 전후에 미국과 영국의 핵독점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면 결과는 핵무기 경쟁으로 치닫게 된다." "영국의 원자무기 계획책임자이며 재무상인 앤더슨은 보어의 의견대로 전후 국제적인 핵무기 확산 가능성을 내다 보았다. 치열한 군비경쟁에 대한 단 하나의 대안은 국제적인 합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가까운 장래에 원자무기에 대한 사실을 소련에게 알리고 국제적 통제 계획을 준비하는 노력에 소련의 협력을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처칠은 '협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메모에 여백에 〈어떤 경우에도 안 됨〉이라고 써 넣었다."(160-1)


"처칠의 외고집은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솔직한 면이 있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준비로 정신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음모자들이 등 뒤에서 기어다니는 냄새를 맡고 본능적으로 찰싹 때려 떨어뜨렸을 뿐이다." "처칠은 폭탄이 전쟁의 원리를 바꿀 것이라는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년 후 일흔 살이 되는 처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1945년 앤서니 이든에게 보낸 글에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한 이 문제는 미국과 영국이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프랑스와 소련인들이 무엇을 하든지 내버려 두어야 한다. 어떤 강국이든 이 비밀을 손에 넣으면 그것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류사회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나는 제삼자에게 알려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처칠은 언제나 비밀에 대하여 (그것을 지킬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164)


5 / 이 시대의 재앙


"공군은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에 있는 글렌 마틴 공장에서 B-29 17대를 8월부터 개조하기 시작했다. 또한 최초의 원자 폭탄을 투하할 특별팀을 훈련시켰다." "제509 비행 승무원들은 30,000피트 상공에서 지상에 그려진 작은 원을 목표로 폭격 연습을 했다. 구름이 많이 끼는 유럽에서 폭격해봤던 승무원들은 왜 자기들이 관측 폭격 훈련을 하는지 의아해 했다. 폭격 후 현장을 급히 벗어나는 이상한 비행 방법으로 미루어 보아 자기들이 운반하게 될 폭탄의 위력이 매우 큰 것이라고 짐작했다. 티베스는 아무에게도 원자 폭탄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은 채로 폭탄 투하 후 기수를 155도 돌려 급강하하며 현장을 벗어나도록 지시했다. 거대한 폭격기는 급강하하면서 속도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거듭된 훈련으로 조종사는 지상 폭발 위치로부터 10마일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은 20,000톤 TNT와 동등한 폭탄으로부터 충분히 안전한 거리이다."(226-30)


"핸퍼드에서는 화학적 분리 방법을 이용하여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었다." "반응이 끝난 우라늄은 퀸 메리 내부에 깊이가 16.5피트 되는 저수조에 반감기가 짧은 방사는 물질들이 붕괴될 때까지 보관했다. 이 물은 방사능 입자들 때문에 푸른 빛을 발했다. 우라늄 덩어리들은 차폐된 통 속에 넣어 특별히 만든 궤도차로 퀸 메리까지 운반됐다. 두 개의 방에는 원심분리기, 저장탱크, 침전기 그리고 용액 탱크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내부식성 강철로 만들었다. 우라늄 덩어리를 뜨거운 질산에 녹인 액체 용액은 압력 수증기를 이용해 빨아 들이는 장치에 의해 한 장비에서 다른 장비로 이동된다. 분리 과정에는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용해, 침전 그리고 침전물의 원심 분리 작업이다. 이 세 가지 단계가 계속하여 반복된다. 마지막에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은 지하 탱크에 저장한다. 이로써 소량의 고도로 정제된 플루토늄 질산염을 얻게 된다."(250-2)


# 퀸 메리 : 대량의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길이 800피트, 폭 65피트, 높이 80피트 크기의 재처리 공장


6 / 삼위일체


"루스벨트의 갑작스런 서거로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계승한 후, 원자 폭탄을 투하하게 될 도시를 선정하기 위한 표적 선정 위원회가 처음으로 펜타곤에 있는 로리스 노스타드의 회의실에서 열렸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대표하여 그로브스 밑에서 일하는 토머스 파렐 준장이 위원장직을 맡고 공군에서 대령과 중령 각각 한 명씩 그리고 노이만과 영국 물리학자 윌리엄 페니를 포함한 다섯 명의 과학자가 참석했다." "파렐이 기본적인 사항을 설명했다. 이 중요한 임무를 위한 B-29의 비행거리는 1,500마일 이내일 것, 지금까지 사용해 보지 않은 귀중한 폭탄을 확실히 표적에 투하하고 사진을 촬영하기 위하여 육안 폭격을 할 것, 표적은 일본의 도시 또는 산업 지역이며 7월과 8월 또는 9월에 폭격할 것, 한 개의 주목표에 두 개의 예비목표를 선정할 것, 정찰 목적의 항공기가 사전에 표적 지역의 시계를 확인할 것 등이었다."(277-8)


"표적 선정 위원회의 위원들은 원자 폭탄 개발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이 유용한 충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과학자들로 구성된 소위원회를 부속 기구로 두기로 했다." "폭발 고도에 따라 얼마나 넓은 면적이 폭풍에 의하여 파괴될 것인가가 결정된다. 너무 높은 고도에서 터진 폭탄은 공기를 밀어내는 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너무 낮은 고도에서 폭발하면 많은 에너지가 흙 구덩이를 파는 데 쓰이고 말 것이다. 높은 것보다는 낮은 것이 낫다. 계산에 따르면, 〈최적고도보다 40퍼센트 정도 낮은 고도에서 폭발하면 피해 면적은 24퍼센트 정도 줄어든다. 그러나 고도가 14퍼센트 정도 높으면 같은 피해 면적이 감소하게 된다.〉" "표적 선정 작업이 진전됐다. 위원회는 고려사항을 세 가지로 압축했다. '지름이 3마일 이상되는 도시'로 '폭풍에 의하여 파괴될 수 있으며' 그리고 '다음 8월까지 공격을 받지 않을 곳'으로 한정했다."(282-4)


"리틀보이가 작동할지 어떨지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프리슈의 실험은 우라늄의 고속 중성자에 의한 연쇄 반응 가능성을 증명했다. 대포식 폭탄은 비효율적이며 낭비가 심한 장치이다. 남은 것은 내폭 실험이다. 물리학자들은 자기들의 에너지 방출 이론을 비교 검토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다. 트리니티는 지금까지 시도된 것 중 가장 규모가 큰 물리학 실험이었다. 시험장을 선정하고 준비하는 작업은 하버드의 실험물리학자 베인브리지가 담당했다. 로스앨러모스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의 임무는 〈극도의 비밀과 심적 부담 속에서 사막 황무지에 복잡한 과학 실험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평탄하고, 외떨어지며, 날씨도 좋고, 로스앨러모스에서 다니기에도 편리하지만 연관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충분히 먼 장소가 필요했다. 여러 번의 답사여행 끝에 로스앨러모스에서 남쪽으로 210마일 떨어진 앨러모고도에서 소북쪽으로 60마일 되는 곳을 발견했다."(313-4)


"1945년 7월 16일, 폭파 시험이 성공하던 순간, 사람들은 이론물리학과 카메라가 볼 수 없었던 연민과 공포를 보았다. 래비는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동쪽에 몇 줄기의 황금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10초간은 내가 경험했던 것 중 가장 긴 10초간이었다. 갑자기 거대한 섬광이 나타났다. 내가 지금까지 본, 아니 누구라도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밝은 빛이었다. 그것은 터졌고, 그것은 갑자기 덤벼들었고, 그것은 나를 뚫고 지나갔다. 그것은 온몸으로 보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으로 보였다. 모두 약 2초 동안 계속됐다. 마침내 그것은 끝났다. 우리는 폭탄이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거대한 화구가 있었다. 그것은 점점 커지며 구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중으로 올라갔다. 노란 섬광이 주홍과 녹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위협적이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새로운 것이 방금 태어났다. 새로운 통제, 인간이 자연에 대항하여 획득해낸 새로운 이해이다."(336-7)


"앤더슨은 로켓에 매달린 컵으로 토양 샘플을 채취해 분석했다. 방사 화학적 분석으로 폭발 위력이 18.6킬로톤으로 판명됐다. 이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네 배나 되는 위력이었다." "폭풍 효과를 연구한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페니는 닷새 후 트리니티에 대하여 보고했다. 그는 이 무기가 30만 내지 40만 명이 사는 도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그는 이 숫자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트리니티 시험이 진행되고 있을 때쯤, 샌프란시스코 만에서는 리틀보이가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에 선적되고 있었다. 함장은 납통 속에 들어있는 리틀보이의 우라늄 포탄을 부관방에 보관하고 방문을 용접해 버렸다. 로스앨러모스에서 온 두 명의 육군 장교가 티니안에 도착할 때까지 열흘 동안 하루 24시간 교대로 지킬 것이다. 태평양 시간으로 8시 36분, 인디애나폴리스 호는 금문교를 통과하여 태평양으로 나아갔다."(342-3)


7 / 죽은 자의 세계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에 전달됐다. 다음 날 일본의 신문들은 선언문의 내용 중에서 무장해제된 군인들은 고향으로 돌려 보내겠다는 것과 일본인들은 노예가 되거나 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삭제하고 발표했다. 오후에 일본 수상 스즈키는 기자 회견을 했다. 〈나는 세 나라에 의한 공동선언은 카이로 선언의 재판이라고 믿고 있다. 정부로서는 어떤 중요한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것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성공적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결연히 싸워야 된다.〉 스즈키는 일본말로 선언을 '묵살'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선언을 말없이 무시해 버린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역사가들은 스즈키가 어떤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수 년 동안 논쟁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나머지 그의 발표는 '일본은 계속 싸우겠다'는 내용이었다."(362)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자, 사람들은 그것을 사용해야 할 이유를 찾아냈다. 스팀슨이 1947년에 말한, 가장 강력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가장 추구했던 것은 가능한 한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전쟁을 승리로 끝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국민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폭탄은 일본인들에게 포츠담 선언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항복하도록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소련인들에게도 알려주어, 스팀슨의 말을 빌면, '절실히 필요한 평형 장치'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에 어떤 일이 다가오는지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국회를 상대로 20억 달러의 지출을 정당화하고 그로브스와 스팀슨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폭탄은 사용되어야 했다."(366-8)


"그러나 몇 번의 폭발은 폭탄이 투하될 도시에 살고 있는 민간인들에게는 구원의 기적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좀 더 강력한 이유가 제시되어야 할 것 같다. 폭탄의 사용은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 항복하지 않기 때문에 승인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건부 평화는 괴멸됐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게 했다. 먼젓번 전쟁의 검은 그림자들이 수년 간 드리우고 있었다. 옥스퍼드의 G.E.M. 앤스콤은 1957년 해리 트루먼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팸플릿에서 〈무조건 항복의 고집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요구와 가장 잔인한 전쟁 방법의 사용 필요성 사이의 관계는 명백하다. 전쟁에서 무조건의 조건을 제안하는 것은 야만적이며 바보 같은 짓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교전 상대국 모두에게 야만적이고도 바보짓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368)


8 / 산 자의 세계


"10월 16일 오펜하이머가 소장으로 재직하던 마지막 날, 로스앨러모스의 남자와 여자들은 감사장 이외에도 각기 기념품을 한 개씩 받았다. 10센트짜리 은전 크기의 은 핀에 커다랗게 A자가 새겨져 있고 주위에 'BOMB'이라고 써넣은 메달이었다. 오펜하이머가 하원과 상원의 원자에너지 위원회에 증언하기 위하여 워싱턴으로 급히 떠나기 전에 한 신문기자가 원자 폭탄에 중요한 한계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 오펜하이머는 〈당신이 폭격을 받는 쪽에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에 한계가 있다〉고 빈정대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예언하는 능력을 시험했다. 〈더 무서운 것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예이다. 더 많이 만들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예이다. 더 굉장히 무서운 것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마도 예일 것이다.〉 타임지는 담배 파이프를 들고 있는 그의 사진과 같이 그가 언급한 이야기를 국제란에 실었다."(432-3)


"텔러는 비밀회의를 주관하기 위하여 1946년 4월 로스앨러모스에 돌아왔다. 이 회의의 목적은 그동안 슈퍼(수소 폭탄)에 관한 연구결과를 검토하고 실제 제작 및 실험이 추진된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 것인가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슈퍼 회의로부터 3개월 지난 1946년 6월 미국의 핵무기 비축량은 아홉 개의 뚱뚱이뿐이며 핵기폭기의 부족으로 이 중에서 일곱 개만 사용 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1년 후(전쟁이 끝난 때로부터는 이 년 후) 재고는 열세 개로 늘어났다. 플루토늄의 생산이 가장 큰 장애요소였다. 핸퍼드 생산 파일에서 중성자가 너무 많이 발생되어 시설이 손상됐다. 파일 하나는 더 이상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5월에 가동을 중단시켰으며 다른 하나는 총출력의 80퍼센트 선에서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련과의 갈등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시점에서 분열폭탄의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미국의 핵병기창을 떠받쳐 주는 일이 될 것이다."(440-1)


"1952년 11월 1일, 최초의 실험적인 열핵 장치(수소 폭탄) 마이크(Mike)의 폭발 실험이 행해졌다. 실험 결과는 리틀보이보다 1,000배나 더 강력한 10.4메가톤으로 판명됐다." "무게가 65톤이나 되는 마이크는 전쟁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설계자들은 열핵반응에 관한 자료를 측정하기 위하여 액체 중수와 삼중수소를 사용했다. 운반 가능한 수소 폭탄에는 리튬 이중수소 분말이 열핵반응 물질로 사용될 수 있다. 리튬은 동위원소 리튬6의 형태로 자연 리튬 중에는 7.4퍼센트 정도 함유되어 있으며 쉽게 분리할 수 있다. 분열반응에서 방출된 중성자들은 리튬6으로부터 순간적으로 삼중수소를 만들어 내고 이들은 다시 이중수소와 결합하여 헬륨 원자핵을 만든다. 이 폭탄의 실험은 1954년 봄에 실시됐으며, 15메가톤의 위력을 나타냈다. 이것이 비행기로 운반할 수 있는 최초의 수소 폭탄이었다. 소련 역시 1955년 11월 23일 항공기 투하 수폭 실험을 실시했다."(4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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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폭탄 만들기 1
리처드 로즈 지음, 문신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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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헛소리


"가벼운 원자핵들을 이용하여 무거운 원자핵들을 깨뜨려 버릴 수가 있다. 이것은 영국의 실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이미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이 원자핵들은 모두 강한 양전기를 띠므로 날아가는 원자핵은 충돌을 당하는 원자핵을 비껴가게 된다. 그러므로 물리학자들은 원자핵이 전기적 척력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갖도로 가속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1932년 제임스 채드윅이 발견한 중성자(Neutron)는 양전기를 가진 양자와 거의 같은 질량을 갖고 있으며 전기적으로 중성이므로 핵 주위의 전기적 장애를 통과하여 핵에 도달할 수 있는 입자이다." "중성자가 핵의 전기적 장벽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헝가리 출신의 이론 물리학자인 레오 실라르드가 최초로 알아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성자를 핵과 충돌시켜, 중성자가 공급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것은 실라르드가 처음이었다."(24-31)


2 / 원자와 빈 공간


"열역학 제2법칙은 시스템에 어떤 변화가 없이는 열이 차가운 물체로부터 뜨거운 물체로 저절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플랑크 자신이 1897년 뮌헨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논문으로 일반화했듯이 열전도 과정은 결코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완전히 가역화될 수 없다. 열역학 제2법칙은 영구기관의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외에도 플랑크의 선배 루돌프 클라우지우스가 엔트로피라고 명명한 것을 정의하기도 한다. 일을 할 때마다 에너지는 다시 유용한 형태로 수집될 수 없는 열로 소모되므로 우주는 서서히 무작위의 불규칙한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이 점증하는 혼란은 우주가 일상적인 것이지 가역적인 것이 아님을 뜻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물리학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기계적인 원자론을 설명하는) 고전 물리학의 방정식들은 우주의 전진과 후진을 동등하게 허용하고 있다."(35)


"알파 입자의 산란 실험을 하던 러더퍼드는 알파 입자가 곧바로 되돌아 튕겨져 나온다는 것은 단 한 차례의 충돌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다." "러더퍼드는 원자의 핵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전자들의 위치를 선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1911년, 맨체스터 발표에서 그는 한 점에 집중되어 있는 전하가 균일하게 구 모양의 분포를 갖는 반대 전하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계산을 하기 위하여 이상화한 것일 뿐, 반대 전하가 전자 속에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는 물리적 사실을 간과한 결과였다. 원자가 고전 물리학의 운동 법칙들, 즉 행성들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뉴턴의 법칙에 따라 작동된다면, 러더퍼드의 모델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원자는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설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수행된 물리학적 실험의 결과였다." "누군가가 고전 역학과 러더퍼드가 실험적으로 시험한 원자 사이의 모순을 해결해야 했다."(64-6)


3 / 보어의 원자


"고전 이론에 의하면 가마솥과 같이 가열된 공동 내에는 무한대의 에너지가 존재해야 한다. 고전 이론에서는 가열된 가마솥의 벽에 있는 입자들이 진동에 의하여 주파수가 무한대에 걸쳐 빛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런 경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동 속에 있는 에너지가 원자외선으로 제한 없이 바뀌는 것을 막는 것일까?" "플랑크는 진동하는 입자는 어떤 특정한 에너지에서만 복사 에너지를 방출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이 고질적인 문제를 풀었다. 복사가 허용된 에너지는 새로운 수, 〈하나의 우주 상수〉에 의하여 결정된다. 〈나는 이 수를 h라고 불렀다. 이것은 작용(에너지X시간)의 차원을 가지므로, 나는 그것을 기본 작용 양자(quantum은 라틴어 quantus의 중성명사이며 '얼마나 큰가'를 뜻한다)라고 불렀다.〉 h의 정수배(플랑크의 hX주파수 v)가 되는 유한한 에너지만이 나타날 수 있다. 우주 상수 h는 곧 플랑크 상수 불리기 시작했다."(86)


"이런 지식으로 무장한 보어는 러더퍼드의 원자 모델이 갖고 있는 불안정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러더퍼드 원자의 어려움은 안정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데 있다. 단 한 개의 전자를 갖고 있는 수소 원자라 할지라도 고전 이론에 따르면 전자는 핵의 주위를 돌며 운동 방향을 바꾸어 빛을 방출하게 되므로 에너지를 잃고 궤도의 반경이 점점 줄어들어 결국에는 핵과 충돌하게 된다. 뉴턴 역학적 관점에서 볼 때 러더퍼드 원자는 태양계의 축소형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크거나 작아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보어는 원자의 '정상 또는 불변 상태'가 존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즉 전자가 불안정하지도 않고, 빛을 복사하지도 않으며 핵과 충돌하지 않는 궤도를 갖고 있어야 된다." "보어에게 명백한 것은 그의 궤도를 도는 전자들과 스펙트럼 선들 사이의 관계였다. 보어는 핵에 묶여 있는 전자는 정상적으로 안정한 바닥 상태라고 불리는 기본 궤도를 돌고 있다고 제안했다."(87-91)


4 / 이미 파기 시작한 무덤


"표면상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제1차 세계대전의 결말은 시체의 양산이었다. 본질적으로 산업적이었던 조직의 운용은 장군들에 의하여 소모 전술로 바뀌었다. 영국인은 독일인을 죽이려 했고, 독일인은 영국인과 프랑스인을 죽이려 했으며 그리고·····. 이 전술은 이제는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해져서 정상적으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14년 이전 유럽에서는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미국 남북전쟁의 교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변해 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단 참호 진지가 구축되면 긴 무덤은 이미 파진 것이며, 전쟁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고 죽음을 만드는 일이 어떤 합리적인 반응도 압도해 버린다. 법, 조직, 생산, 이동, 과학, 기술적 천재성에 뿌리를 두고, 1,500일에 걸쳐 매일 6,000명의 주검을 생산해 낸 전쟁 기계는 영구적이고 현실적인 요소였으며 인간의 변화에 의해 약간 변경될 뿐이다."(126)


5 / 화성에서 온 방문자들


"1926년 초 교양 있는 비엔나의 이론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원자 규모의 물질은 마치 파동으로 구성된 것처럼 행동한다는 물질의 파동 이론을 발표했다. 슈뢰딩거의 이론은 간결하고 누구나 접근 가능하며 그리고 완벽하게 모순점 없이 앞뒤가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고전물리학에 동감하는 슈뢰딩거는 그의 파동역학이 원자 내부의 실체를 나타낸다고 지나친 주장을 했다. 원자의 내부에 입자가 아니라 정지한 물질파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연속적인 과정과 절대적인 결정이 가능한 고전물리학 속으로 다시 원자를 끌어들여왔다. 보어의 원자에서는 정상 상태에서 항해하는 전자들의 양자 도약에 의하여 광자가 방출된다. 대신에 슈뢰딩거는 건설적인 간섭이라고 알려진 과정에 의하여 파동들의 크기가 서로 합쳐져 빛을 방출한다고 설명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가정이 진실이기에는 너무 훌륭하다고 말했다."(156-7)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물리학에서 엄밀한 결정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만일 원자적 사건이 원래부터 불분명하고 개개의 입자에 대하여 시간과 공간에서의 완전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그들의 미래의 행동에 대한 예측은 통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였던 라플라스의 꿈은 만일 그가 어떤 순간 우주의 모든 입자들의 시간과 공간에서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면 그는 영원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꿈은 그날 밤 코펜하겐에서 해답을 얻었다. 자연은 신의 특권에 대한 비밀을 인간에게 나누어주지 않는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원자 내부의 평등화라는 구상을 좋아하면서도, 불확정성 원리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에 기초를 두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보어는 전에 슈뢰딩거에게 향했던 그의 집요함으로 이번에는 하이젠베르크를 겨냥했다."(160)


6 / 기계


"당시 러더퍼드의 선구자적인 연구 때문에 실험물리학자들에게는 원자핵물리학이 첨단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러더퍼드의 실험 방법은 본질적으로 매우 지루한 것이어서 전망 있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쉽게 뛰어들지 못했다. 간단한 계산에 의하면, 전기적으로 전기적으로 가속된 가벼운 원자들 1마이크로 암페어는 세계의 라듐 총공급량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다. 방전관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와 양자는 전기적으로 밀고 당김으로 가속시킬 수 있다. 무거운 핵의 전기적 장벽을 통과하는 데는 100만 볼트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아무도 일정 시간 동안 스파크나 과열에 의한 전기 방전 없이 한 군데에 입자를 모아둘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 못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기계적인 것이고 실험적인 것이었다. 이 문제가 작은 마을의 농가에서 라디오를 가지고 실험을 하며 성장한 미국 실험물리학자들의 젊은 세대를 매혹시켰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179)


"중성자는 양자와 질량은 거의 같으나 전하가 없으므로 핵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에 의한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또한 핵의 전기적 장벽이 진로를 막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뛰어난 투과력은 핵을 조사하는 새로운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필립 모리슨은 〈음속으로 운동하는 열중성자들은 40분의 1전자볼트 정도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수백만 전자볼트의 에너지로 수천 배나 더 빠르게 운동하는 양자보다 훨씬 쉽게 많은 물질들과 핵반응을 일으킨다〉라고 했다. 채드윅이 그의 운명적인 중성자를 발견한 2월에 로렌스의 사이클로트론은 처음으로 양자를 100만 볼트 에너지로 가속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채드윅의 중성자는 핵을 자세하게 조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한스 베테는 1932년 이전의 모든 것은 〈핵물리학의 유사 이전의 것이고 1932년부터는 핵물리학의 역사〉라고 말했다. 이 차이는 중성자의 발견이었다."(201-2)


7 / 대이동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통직에 오른 아돌프 히틀러는 얼마 있지 않아 반유대운동을 합법화시키고 독일계 유대인의 민권을 정지시켰다." "공직 회복을 위한 법률은 나치가 앞으로 발표하게 될 400여 가지의 반유대주의 법률과 명령의 전조였으며 텔러, 파울리, 프리슈 그리고 이들의 유대인 동료들의 생애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비(非)아리아 계통의 공직자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비아리안을 정의하는 명령은 4월 11일에 발표됐다. 누구든 부모나 조부모가 비아리아인 후손, 특히 유대인은 모두 아리아 계통이 아니다. 대학교는 국가기관이었으므로 교수들은 공직자에 속했다. 새로운 법률은 이미 노벨상을 받았거나 받게 될 11명을 포함하여 독일 물리학자들의 사분의 일의 지위와 생계를 박탈해 버렸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총 1,600명에 달하는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민을 떠나야 했다."(218-9)


8 / 고무적인 연구


"실라르드는 중성자가 인공적으로 방사선 붕괴를 일으킬 것이라는 이론에 근거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필요한 실험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졸리오-퀴리 부부만이 알파 입자를 이용하여 이런 실험을 했다. 실라르드는 인공 방사능 물질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연쇄 반응에 의하여 핵에너지를 방출시켜 원자탄을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원소들이 한 개의 중성자를 포획하고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중성자를 방출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원소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해 보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에는 92가지의 원소들이 있다." "그러나 실라르드는 이런 실험을 하기 위한 실험실, 헌신적인 일꾼 그리고 충분한 재정적 지원 등 모두가 결핍되어 있었다." "대신에 그 기회는 로마에 있는 엔리코 페르미와 그의 젊은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페르미는 실라르드가 갖고 있지 못한 것들을 모두 갖고 있었다."(242)


"실라르드가 '산업 목적을 위한 에너지'를 넘어서서 전쟁 무기의 가능성까지 내다보았다는 사실은 1934년 6월 28일과 7월 4일에 제출한 특허 출원서의 수정안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다. 먼젓번에는 '화학 원소의 변환'이라고 기술했던 것을 이번에는 '핵변환을 통한 전력 생산과 다른 목적을 위한 핵에너지의 방출'이란 표현을 추가했다. 그는 최초로 중성자에 의한 연쇄 반응을 제안했다. 그리고 '임계 질량'이라고 알려지게 된 연쇄 반응이 스스로 유지되는 데 필요한 반응 물질의 체적에 관한 중요한 특성들을 기술했다. 구 모양의 연쇄 반응 물질을 무거운 금속, 예를 들면 납으로 둘러싸면 임계 질량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는 또한 임계 질량이 형성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그의 출원서 4쪽에 적어놓았다. 〈만일 두께가 임계치보다 크면······ 나는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254-5)


9 / 우라늄의 파열


"핵 속에서 서로 반대로 작용하는 두 힘─강력과 전기적 척력─은 서로를 상쇄한다. 프리슈와 마이트너는 액체 방울같이 헐렁하게 결합되어 흔들흔들 출렁거리는 우라늄 원자핵이 약하긴 하지만 우라늄 원자핵을 교란시키는 데에는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저속 중성자와 충돌하는 그림을 얻게 됐다. 중성자는 우라늄 원자핵에 에너지를 전해 준다. 핵은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느 한 방향으로 길쭉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강력은 극히 짧은 거리 내에서만 작용하므로 한쪽으로 길쭉이 늘어난 핵에는 전기적 척력이 우세해지게 된다. 양쪽으로 불룩하게 된 부분은 서로 더 멀리 밀어내고, 그 사이에는 허리 부분이 생기게 된다. 양 끝쪽의 각각의 구내에서는 강력이 다시 우세해진다. 마치 표면장력이 액체 방울을 구형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동시에 전기적 척력은 두 개의 구를 더 멀리 떼어놓도록 작용한다."(307)


"마침내 허리 부분이 잘라진다. 두 개의 작은 핵, 예를 들면, 바륨과 크립톤이 나타난다. 마이트너는 두 개의 파편이 형성된다면 그들은 큰 에너지로 서로 밀어낼 것이라고 했다. 각각의 구 속에 있는 양자들의 양전하가 이 구들을 빛의 속도의 삼십분의 일의 속도로 서로 밀어낸다. 이 에너지가 약 200MeV(2억 전자볼트)가 된다고 계산했다. 1전자볼트는 전자가 1볼트의 전위차 사이에서 가속될 때 얻는 에너지이다. 2억 전자볼트는 많은 에너지는 아니지만, 한 개의 원자에서 나오는 에너지로는 매우 큰 양이다. 가장 강력한 화학 반응은 원자당 5eV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프리슈는 나중에 우라늄 원자핵이 부서질 때 나오는 에너지가 눈에 보일 수 있는 모래알이 식별할 수 있게 튀어오르게 하는 데 충분한 에너지라고 계산했다. 우라늄 1그램에는 약 2.5X10^21개의 원자가 있다. 25 뒤에 0이 20개 붙은,  2,500,000,000,000,000,000,000! 어마어마한 수이다."(307-8)


"1909년, 마이트너가 서른한 살 때, 그녀는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과학 학술 회의에서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그는 복사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관점의 발전에 대한 강연을 했다. 강의 중 아인슈타인은 질량을 에너지로 환산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193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머릿 속에 채우기 비율(packing fraction)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프리슈는 말했다. 그녀는 핵의 질량 결손에 대한 에스턴의 숫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만일 커다란 우라늄 원자핵이 두 개의 작은 원자핵으로 쪼개진다면 두 개의 작은 원자핵들의 질량의 합은 우라늄 원자핵의 질량보다 적다. 얼마나 적은가? 그녀는 쉽게 이 계산을 해낼 수 있었다. 양자 질량의 5분의 1정도가 적었다. E=MC^2을 이용하여 계산하면 양자 질량의 5분의 1을 약 200MeV이다. 이것이 에너지의 공급원이다.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308-9)


10 / 중성자를 쫓아서


"보어는 몇 가지 반응의 난해한 에너지 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토륨 232는 우라늄 235보다 가볍고, 우라늄 235는 우라늄 238보다 가볍다. 그러나 우라늄 235는 또 다른 중요한 점에서 상당히 다르다. 토륨 232가 한 개의 중성자를 흡수하면 질량 번호가 기수인 원자핵 토륨 233이 된다. 우라늄 238이 한 개의 중성자를 흡수하면 역시 질량 번호가 기수인 우라늄 239 핵이 된다. 그러나 우라늄 235가 한 개의 중성자를 흡수하면 질량 번호가 우수인 우라늄 236이 된다. 페르미가 어느 날 강의에서 설명하게 되지만, 핵의 재조정에 의한 변화는 기수의 중성자들이 우수의 중성자들로 바뀔 때 1 내지 2Me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것은 우라늄 235가 다른 두 경쟁자보다 에너지 측면에서 내재적인 유리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질량의 변화만으로도 분열에 가용한 에너지를 얻게 된다. 다른 두 원소는 그렇지 못하다."(344)


"실라르드는 중성자로 유도된 분열에서 적어도 두 개의 이차 중성자가 나온다고─즉, 연쇄 반응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고─말하면서, 〈분열연구는 계속하되, 실험 결과는 발표하지 않고 비밀로 해야 한다. 우리는 나치가 먼저 핵폭발을 일으키지 못하게 해야 된다〉라고 주장했다." "보어의 회의론은 '필요한 양의 우라늄 235를 분리해 내는 어마어마한 어려움'과 관계된 것이었다고 윌러는 기억했다." "보어는 프린스턴 모임에서 〈미국을 하나의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것은 결코 완수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보어에게 더 중요한 것은 비밀 문제였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물리학을 하나의 국제적인 공동 사회의 것으로 만드는 데 노력을 경주해 왔다. 민주주의에 언론의 자유가 필수적인 것처럼, 본질적 특권인 공개성이 과학자의 사회를 운용해 나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완전한 공개는 절대적 정직성을 요구한다."(354-5)


"해당 내용의 공개 여부를 놓고 실라르드와 페르미 사이에 논쟁이 오가던 중에, 졸리오, 할반 그리고 코왈스키가 1939년 3월 18일자 《네이처》에 하나의 논문을 발표했다." "다음 달인 4월 22일, 세 사람은 이차 중성자에 대한 두 번째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논문의 제목은 「우라늄의 핵분열에서 방출된 중성자의 수」였다. 먼저 발표된 실험을 근거로 계산한 바에 의하면 프랑스 팀은 평균 3.5개의 이차 중성자들을 발견했다. 〈연쇄 핵반응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여기에서 토의한 현상에 대한 관심은 이미 우리의 지난번 논문에서 언급됐다〉라고 썼다. 이제 그들은 충분한 양의 우라늄을 적절한 감속제 속에 넣는다면 〈연쇄 분열은 스스로 계속되어 물질이 모두 소진된 뒤에나 끝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실험 결과는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결론지었다. 우라늄이 연쇄 반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356-7)


11 / 플루토늄의 등장


"1940년 7월, 하이젠베르크와 바이츠재커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생물학과 세균연구소의 운동장에 목조실험실 건물을 지었다. 그들은 임계상태에 도달하지 않는 우라늄 연소기를 만들 생각이었다. 독일은 세계의 유일한 중수공장과 벨기에 및 벨기에령 콩고에서 확보한 수천 톤의 우라늄 광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최고의 화학공장과 유능한 물리학자들, 화학자와 엔지니어들을 갖고 있었다. 독일은 핵의 상수를 측정할 사이클로트론만 갖고 있지 못했다. 프랑스가 무너지고,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고 6월 22일 휴전이 조인되자 이 필요가 충족됐다. 독일 육군성의 핵물리학 전문가 쿠르트 디프너가 파리로 달려갔다. 페랭, 할반 그리고 코왈스키는 중수가 들어 있는 26개의 깡통을 가지고 영국으로 도망갔다. 졸리오는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이 노벨상 수상자는 가장 큰 레지스탕스 조직의 운영위원회 의장이 됐다)."(421)


"1940년 10월, 스즈키 중령은 야수다 중장에게 핵개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그의 보고서를 기본적인 문제에만 한정시켰다. 즉, 사용 가능한 우라늄 광석에 대한 보고였다. 그는 일본, 조선 그리고 버마 등지를 조사하고 충분한 우라늄광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폭탄은 가능한 것이다. 야수다는 일본의 이화학 연구소와 접촉하여 일본의 물리학 권위자 니시나 요시오와 협의했다. 니시나는 메이지시대 말기에 태어나 1940년에 50세였으며 콤프턴 효과에 대한 이론연구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보어와 같이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세계주의자이며 보통이 아닌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는 버클리에서 훈련 받은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작은 사이클로트론을 제작하고 있었다." "1941년 4월, 공식적인 명령이 떨어졌다. 제국 육군의 항공대는 원자 폭탄의 개발을 위한 연구를 승인했다."(425)


"세그레와 페르미는 원소 94에 대해 생각해 왔다. 〈우리는 원소 94가 저속 중성자에 의하여 분열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우라늄 235 대신 원자 폭탄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보통 우라늄을 사용하는 원자로를 이용하여 이 새로운 원소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핵폭탄 개발에 전적으로 새로운 전망을 가져왔다. 당시에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던 우라늄 동위원소의 분리도 필요 없게 된다.〉" "1941년에 시보그 팀이 마침내 알파 입자를 방출하는 원소 94를 분리,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들은 1942년에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제안했다. 마틴 클라프로스가 1789년 새로 발견된 원소를 우라누스(Uranus, 천왕성)와 연계시켰듯이 그리고 넵튠(Neptune, 해왕성)까지 확장시킨 맥밀런의 제안을 본따서 시보그는 원소 94를 1930년에 발견된 아홉 번째 행성 플루토(Pluto, 명왕성)를 따라 플루토늄(Plutonium)이라고 이름지었다."(433-7)


12 / 영국에서 온 소식


"한 과학자는 원자무기를 만드는 일을 돕든지 또는 돕지 않든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그의 단 한 가지 길이다. 이제 별도의 분리된 주권을 갖는 조직에 속하는 대가로 그는 자기의 정책에 관한 주장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 별도의 조직은 대통령과 그가 승인하는 단 한 사람을 통하여 공개된 주권국가인 미국에 연결될 것이다. 애국심이 선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많은 물리학자들에게는, 그들의 발언을 통하여 볼 때, 독일에 대한 두려움이 더 깊은 동기였다. 그러나 두려움보다도 더 깊은 동기는 숙명론이다. 어떤 국가든지 그것을 만들어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독일과의 경쟁만이 아니다. 루스벨트는 경쟁이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루스벨트는 새로운 파괴 무기가 개발됐을 때 가져올 영향, 즉 세계의 정치적인 조직을 바꾸어 놓을 것이 분명한 군사적 개발의 장기적인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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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혁명 - 양자물리학 100년사
만지트 쿠마르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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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거인들의 만남


"양자(quantum)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막스 플랑크였다. 1900년에 그는 빛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 복사가 다양한 크기의 에너지 덩어리로 방출되거나 흡수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플랑크는 그런 에너지 덩어리를 〈quantum〉이라고 부르고, 복수로 〈quanta〉라고 썼다. 에너지가 양자라는 아이디어는, 에너지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연속적으로 방출되거나 흡수된다는 오랜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뉴턴의 물리학이 지배하는 거시적 일상의 세계에서는 에너지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여러 크기의 방울로 교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원자와 원자보다 작은 세상은 양자의 영역이다." "결국 원자 내부에 존재하는 전자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에 따르면, 원자 속에 들어 있는 전자는 중간을 거치지 않고도 마술적으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양자화된 에너지를 방출하거나 흡수한다."(10-2)


"1920년대 초에 이르자,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근거에서 시작된 양자물리학에 확실한 기초나 논리적 구조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런 혼란과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라고 알려지게 될 용감한 새로운 이론이었다.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회전하는 작은 태양계라고 생각하던 원자 모형은 시각화할 수 없는 새로운 모형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1927년에 독일의 양자역학 신동으로 알려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자신도 그 중요성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식에 어긋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따르면, 입자의 정확한 속도를 알게 되면 그 입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게 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양자 수준에서 실재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12-3)


1장 양자


"클라우지우스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물체나 시스템을 드나드는 열의 양을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온도로 나눈 값으로 정의된다. 500도의 뜨거운 물체가 250도의 차가운 물체에 1000단위의 에너지를 빼앗기는 경우에 뜨거운 물체의 엔트로피는 -1000/500=-2만큼 줄어든다. 250도의 차가운 물체는 1000단위의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엔트로피가 +1000/250=+4만큼 늘어난다. 그래서 뜨거운 물체와 차가운 물체를 합친 시스템의 전체 엔트로피는 2엔트로피 단위(에너지/온도)만큼 늘어난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실제 변화는 엔트로피의 증가 때문에 비가역적이 된다. 그것이 바로 열이 차가운 것에서 뜨거운 것으로 자발적으로 또는 저절로 이동하는 변화를 막아주는 자연의 방법이다. 엔트로피가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과정만 가역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가역적 과정은 물리학자의 마음에서는 일어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의 엔트로피는 언제나 최댓값을 향해서 증가한다."(28)


"볼츠만 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시스템이 특별한 상태에 있을 확률을 나타내는 척도이다. 예를 들어 카드를 잘 섞으면 엔트로피가 큰 값을 가지는 무질서한 상태가 된다. 에이스에서 킹에 이르는 순서로 배열된 상자에서 꺼낸 새 카드는 엔트로피가 작은 값에 해당하는 잘 정리된 상태이다. 볼츠만에게 열역학 제2법칙은 낮은 확률과 낮은 엔트로피의 시스템이 확률이 더 큰 높은 엔트로피의 시스템으로 진화하는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제2법칙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다. 뒤섞은 카드를 다시 섞으면 정리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스템도 무질서한 상태에서 더 정돈된 상태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천문학적으로 낮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우주 나이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플랑크는 열역학 제2법칙이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볼츠만의 통계적 해석에서는 엔트로피가 거의 언제나 증가한다."(42)


"볼츠만의 기법을 응용한 플랑크는 진동자가 진동수에 비례하는 에너지의 덩어리를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경우에만 자신의 흑체 복사 분포 공식을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플랑크에 따르면, 훗날 그가 양자라고 부른 몇 개의 동일하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에너지 요소〉가 주어진 진동수로 방출되는 에너지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체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플랑크는 자신의 공식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에너지(E)를 hv 크기의 덩어리로 잘라야만 했다. 여기서 v는 진동자의 진동수이고, h는 상수이다. 예를 들어, E=hv 공식에서 진동수가 20이고, h가 2라면, 에너지의 양자는 각각 20*2=40의 크기를 갖게 된다. 이 진동수에서 가능한 총 에너지가 3,600이라면, 3600/40=90개의 양자가 그 진동수의 진동자 10개에 분포하게 된다. 플랑크는 볼츠만으로부터 이 양자들이 진동자들 사이에 분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분포를 알아내는 방법을 배웠다."(43)


# 흑체 복사 : 한 물체가 뜨거워지면 열을 내게 되는데, 이를 복사(radiation)라고 부른다. 고체에서 방출되는 복사를 조사하면 여러 가지 파장 또는 진동수를 가진 빛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물체나 그 표면에 부딪히는 복사열의 일부는 흡수하고 나머지는 반사한다. 특히 표면에 부딪히는 모든 복사를 흡수하는 경우 이런 물체를 흑체(black body)라고 부른다. 물론 흑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 즉 복사열을 방출도 한다. 19세기말에 물리학자들은 흑체에서 어떻게 여러 가지 진동수를 가진 복사가 나오며 이들은 표면의 온도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많이 연구하였고 여기서 양자론이 시작되었다.


"플랑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너무나도 훌륭하고 기대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했던 탓에 그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진동자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연속적으로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할 수 없다. 그 대신 작고 쪼갤 수 없는 E=hv를 단위로 하는 불연속적인 방법으로 에너지를 얻거나 잃을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v는 진동자의 진동수인데, 진동자가 흡수하거나 방출할 수 있는 복사가 가지고 있는 진동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거시적 규모의 진동자들이 플랑크의 원자 규모의 진동자처럼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h가 0.000000000000000000000000006626 에르그 초 또는 6.626을 1,000조의 조로 나눈 값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플랑크 공식에 따르면, 에너지의 증가나 감소에서 h보다 더 작은 간격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h의 값이 지나치게 작기 때문에 진동자나 아이들의 그네나 진동하는 추와 같은 일상의 세상에서는 양자 효과가 나타나지 않게 된다."(44-5)


"아인슈타인 본인이 〈아주 혁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상대성이 아니라 플랑크의 양자 개념을 빛과 복사(輻射)에까지 확장한 이론이었다." "빛이 파동 현상이라는 것은 반세기 이상 보편적으로 인정되어왔던 사실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생성과 변환에 대한 발견적 견해」라는 논문에서 빛이 파동이 아니라 입자형의 양자로 구성된 것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플랑크는 흑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에너지가 불연속적인 덩어리인 양자로 흡수되거나 방출된다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자기 복사 자체는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교환하는 메커니즘에 상관없이 연속적인 파동 현상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혁명적인 견해에서는 빛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 복사가 파동적인 것이 아니라 작은 조각인 광양자로 쪼개져 있다는 것이다. 그후 20년 동안 그가 제시한 광양자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51)


"1907년에 방사성 붕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토륨과 라디오토륨이라는 두 원소가 물리적으로는 다르지만 화학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든 화학적 시험에서 두 원소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화학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원소들이 계속해서 추가로 발견되었다. 당시 글래스고 대학교에 근무하던 소디는 새로운 라디오원소들과 〈완벽한 화학적 동등성〉을 공유하는 원소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가 원자량이라고 주장했다. 체중이 조금 다른 점을 빼면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쌍둥이와 같다는 것이다. 1910년에 소디는 훗날 자신이 〈동위원소(isotope)〉라고 부르게 된 화학적으로 구별할 수 없는 라디오원소들이 사실은 똑같은 원소의 서로 다른 형식일 뿐이기 때문에 주기율표에서 같은 위치를 공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 제안은 수소에서 우라늄에 이르는 원소들을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나열해놓은 주기율표로 표현되는 원소에 대한 기존의 조직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109-10)


"닐스 보어는 방사능이 원자가 아니라 핵 현상이라는 핵심적인 사실을 파악했다. 그가 한 종의 라디오원소가 알파선, 베타선, 또는 감마선을 방출하면서 다른 종으로 붕괴하는 과정을 핵 내부의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보어는 방사능이 핵에서 비롯된다면 +92의 전하를 가진 우라늄이 알파 입자를 방출하면서 우라늄-X로 변하는 과정에서 양전하 2단위를 잃어버리면서 +90의 전하를 가진 핵이 남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핵은 본래의 92개 원자적 전자 모두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곧바로 2개의 전자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중성 원자가 된다. 방사성 붕괴의 결과로 만들어진 모든 새로운 원자는 곧바로 전자를 얻거나 잃어버려서 전기적 중성을 회복하게 된다. +90의 핵 전하를 가진 우라늄-X는 토륨의 동위원소이다. 보어는 그런 원소들이 모두 〈똑같은 핵 전하를 가지고 있으면서 핵의 질량과 고유 구조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112)


"보어는, 완벽하게 적용되어왔던 뉴턴과 맥스웰의 물리학에 따르면, 전자가 핵에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안정성의 문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러더퍼드 원자를 구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소극적인 플랑크에 의해서 발견되어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게 된 양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복사와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에너지가 연속적인 양이 아니라 여러 크기의 덩어리로 흡수되거나 방출된다는 사실은 유서 깊은 '고전'물리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보어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를 믿지 않았지만, 보어가 보기에는 원자가 〈어떤 식으로든지 양자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보어는 전자가 고전물리학에서 허용되는 모든 가능한 궤도 중에서 몇 개의 선택된 〈정상 상태(stationary state)〉의 궤도만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1-2)


"보어는 고전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의 멋진 칵테일을 이용해서 자신의 원자를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기존 물리학의 교리에 어긋나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원자 내부의 전자들이 정상 상태에 해당하는 특정한 궤도만 차지할 수 있고, 전자들이 그런 궤도에 있는 동안에는 에너지를 방출할 수 없고, 원자는 가장 낮은 에너지의 〈바닥 상태〉를 포함하는 일련의 불연속적인 에너지 상태 중 하나에만 있을 수 있고, 전자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높은 에너지의 정상 상태에서 낮은 에너지의 정상 상태로 도약할 수 있고, 두 상태 사이의 에너지 차이가 에너지의 양자로 방출된다는 것이다. 그의 모형은 원자 반지름과 같은 수소 원자의 다양한 성질을 정확하게 예측했고, 선 스펙트럼의 생성에 대한 물리적 설명을 제공했다. 훗날 러더퍼드는 양자원자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고, 보어가 그것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선 스펙트럼의 신비를 해결하기까지에는 〈몇 세기가 걸렸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했다."(132-3)


"뉴턴 이전부터 시간과 공간은 고정되어 있고,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고, 우주의 끝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라고 알려져 있었다. 우주는 질량, 길이, 시간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무대였고, 모든 관찰자에게 사건들 사이의 공간적 거리와 시간 간격이 동일하게 보이는 극장이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질량, 길이, 시간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간적 거리와 시간 간격은 관찰자의 상대적 움직임에 따라서 달라진다. 지구에 남아 있는 한 쌍둥이에 비해서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여행하는 또다른 쌍둥이 우주인에게 시간은 느려지고(움직이는 시계 바늘이 느려진다), 공간은 수축되고(움직이는 물체의 길이가 줄어든다), 움직이는 물체의 질량은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특수'상대성의 이런 결과는 모두 20세기에 수행된 실험을 통해서 확인되었지만, '특수'이론에는 가속(加速)이 포함되지 않았다. '일반'상대성에는 가속이 포함되었다."(148-9)


"양자가 원자 영역의 실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로잡기 위한 도전이었던 것처럼,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인류는 공간과 시간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력에 대한 그의 일반상대성은 다른 사람들을 우주의 시작인 빅뱅으로 데려다주었다. 뉴턴의 중력이론에서는, 태양과 지구의 경우처럼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크기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량 중심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뉴턴 물리학에서 서로 접촉하지 않은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은 신비스러운 〈원격작용〉의 힘이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중력은 큰 질량의 존재 때문에 생기는 공간의 휘어짐에 의해서 나타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것은 어떤 신비스럽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끌어당기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의 거대한 질량에 의해서 공간이 휘어지기(warp)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물질은 공간을 휘어지게 만들고, 휘어진 공간은 물질에게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알려준다."(149)


"미국의 젊은 실험학자 콤프턴은 산란된 X-선의 파장이 언제나 '1차' 또는 입사 X-선보다 조금씩 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동이론에 따르면, 산란된 빛의 파장은 언제나 정확하게 같아야만 한다. 콤프턴은 파장(진동수)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2차 X-선이 표적에 쪼인 1차 X-선과 같지 않다는 뜻이라고 이해했다." "X-선이 양자로 나타난다면, X-선의 양자는 그런 충돌에 의해 산란되면서 에너지를 잃게 되고, 충돌에 의해서 전자가 튕겨져나가게 된다. X-선 양자의 에너지는 E=hv(h는 플랑크 상수, v는 진동수)로 주어지기 때문에 에너지의 손실은 진동수의 감소로 나타나고, 진동수는 파장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산란된 X-선 양자의 파장은 늘어나게 된다." "X-선이 전자에 의해 산란되면서, 파장이 늘어나는 〈콤프턴 효과〉는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공상으로 치부하던 광양자의 존재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였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광양자(light-quantum)는 광자(photon)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167-9)


2장 청년 물리학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 2월 보어에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의문은 정상 상태에 있는 전자의 궤도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라고 했다. 이미 배타원리를 찾아내는 길에 들어서서 전자 껍질이 채워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파울리는 12월에 보어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자신이 제기한 의문에 대한 답을 밝혔다. 〈우리는 원자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편견의 사슬에 묶어두지 말아야 합니다. 제 의견으로는 전자 궤도가 일상적인 역학적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가정도 그런 편견에 속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개념을 경험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이제 타협을 포기하고, 편안하고 익숙한 고전물리학의 틀 안에서 양자 개념을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그만두어야 했다. 과학은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만 하고, 오직 관찰할 수 있는 양만을 근거로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는 실증주의의 신조를 진보적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였다."(220)


"슈뢰딩거는 1926년 2월 20일에 자신의 새 이론에 파동역학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슈뢰딩거는 물리학자들에게 조금의 시각화조차 허용하지 않는 차갑고 소박한 행렬역학과는 전혀 달리 하이젠베르크의 고도로 추상적인 형식보다 19세기 물리학에 더 가까운 방법으로 양자 세계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는 편하고 안심할 수 있는 대안을 제공했다. 슈뢰딩거는 신비스러운 행렬 대신 모든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수학 도구 상자의 필수품인 미분 공식을 이용했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에서 제시되는 양자 도약과 불연속성은 원자의 내부 작동을 살펴보려는 사람들이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슈뢰딩거는 물리학자들에게 더 이상 〈직관을 억누르고, 전이 확률이나 에너지 레벨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만 이용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들이 파동역학을 열렬하게 환영하고,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242-3)


"같은 문제에 적용하면 두 이론 모두 똑같은 답을 주었다. 행렬역학과 파동역학 사이에 관계가 있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슈뢰딩거는 획기적인 첫 논문을 완성하자마자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파동 방정식과 행렬 대수를 이용함으로써 형식과 내용에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였던 두 이론은 사실 수학적으로 동등한 것이었다. 두 이론이 정확하게 똑같은 답을 주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론의 수학적 표현 방식에서 물리적 해석으로 바뀌면서, 두 이론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부터 힘을 잃어버렸다. 두 이론이 기술적으로 동등할 수 있겠지만, 수학 너머에 있는 실재(reality)의 본질은, 슈뢰딩거의 경우에는 파동과 연속적인 것이었고, 하이젠베르크의 경우에는 입자와 불연속적인 것으로 전혀 다른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이론이 실재의 진정한 본질을 담고 있다고 확신했다.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옳을 수가 없었다."(244-5)


"슈뢰딩거는 입자의 존재를 포기했지만, 보른은 입자 개념을 구해내기 위한 시도로 파동함수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물리학의 핵심 교리였던 결정론(determinism)에 도전했다." "보른은 원자와 전자의 충돌이 일어난 후에는 전자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물리학으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전자가 주어진 각도를 통해서 산란될 확률을 계산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즉, 파동함수 자체는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고, 신비스럽고 유령 같은 가능성의 영역에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전자가 원자와 충돌한 후에 산란될 수 있는 모든 각도와 같은 추상적인 가능성을 다루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보른의 확률 해석을 묵살해버렸다. 그는 전자나 알파 입자가 원자와 충돌하는 것이 〈절대적 우연〉, 즉 〈완전히 비결정론적〉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보른의 주장이 옳다면, 양자 도약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인과성은 다시 위협받게 된다."(253-5)


"어느 늦은 저녁,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떠올린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이 주어진 순간에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모두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또는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지만,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둘 중 하나를 정확하게 알아낸 것에 대해서 자연이 요구하는 대가였다. 양자적 타협의 춤에서 하나를 더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나머지 하나는 정확하지 않게 측정되거나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옳다면, 하이젠베르크는 그것이 원자 세계를 탐구하는 어떤 실험으로도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런 주장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실험이 포함된 모든 과정이 〈양자역학 법칙을 반드시 만족시켜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268-9)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은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 때문이라고 믿었다. 전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전자 보기〉에서 사용된 광자에 충돌한 전자는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산란된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인으로 파악한 것은 측정 행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교란(disturbance)이었다." "그것은 p x q가 q x p와 같지 않다는 비교환성에 감춰진 자연의 고유한 불확정이었다. 전자의 위치를 알아내는 실험에 이어서 전자의 속도(따라서 운동량)를 측정하는 실험을 하면, 두 개의 정밀한 값이 주어진다. 두 값을 함께 곱하면 그 결과는 A가 된다. 그러나 실험을 반대 순서로 수행해서 속도를 먼저 측정한 후에 이어서 위치를 측정하면 전혀 다른 결과 B가 된다. 어떤 경우이든 첫 번째 측정이 두 번째 결과에 영향을 주는 교란을 만들어낸다. 실험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교란이 없었다면 p x q는 q x p와 같아질 것이다."(271-2)


"양자 영역에서 〈위치〉는 무엇인가?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에서는 위치나 운동량을 측정하는 실험이 없으면 분명한 위치나 분명한 운동량을 가진 전자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이 〈위치를 가진 전자〉를 만들고, 운동량의 측정이 〈운동량을 가진 전자〉를 만든다. 분명한 '위치'나 분명한 '운동량'을 가진 전자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그것을 측정하는 실험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의미가 없다." "움직이는 물체는 실제로 측정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주어진 시각에 공간에서의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운동량을 가진다는 것이 고전물리학의 명백한 기본 교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전자가 동시에 '위치'와 '운동량'이 정확한 값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전자가 그런 값을 가지거나 '궤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관찰이나 측정의 영역을 넘어서는 실재의 본질에 대한 추론은 의미가 없다."(273-4)


"보어는 전자나 광선이나 물질이나 복사가 입자나 파동의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실험을 사용하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에 대해서 완고했다. 입자와 파동은 현상이 나타나도록 해주는 상보적이면서 상호 배타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실제 실험이나 가상적인 실험이거나 상관없이 두 측면이 모두 드러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보어는 양자 세계에서 현상을 관찰하는 행위에 의해서 교란이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27년 10월에 그는 논문 초고에서 더 구체적으로 〈중요한 영향이 없이는 원자 현상의 관찰이 불가능하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축약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이런 영향의 원인이 측정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측정을 수행하기 위해서 파동-입자 이중성의 어느 한 면을 선택해야만 하는 실험자에게 있다고 믿었다. 보어는, 불확정성은 그런 선택을 위해서 자연에게 치러야 할 대가라고 주장했다."(282-3)


3장 실재에 대한 거인들의 격돌


"과학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관찰하고 있는 것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자연의 수동적 관찰자라는 무언의 가정을 근거로 실험을 수행한다. 대상과 주체,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에는 면도날처럼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그런데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원자 영역에서는 그런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보어는 그것을 새로운 물리학의 '핵심'인 〈양자가설(quantum postulate)〉이라고 불렀다. 자연에서 양자의 비(非)분할성 때문에 나타나는 불연속성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서 도입한 용어였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에서는 '가능성'에서 '실재'로의 전환은 관찰의 행위 과정에서 일어난다. 관찰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본적인 양자적 실재는 없다. 아인슈타인의 입장에서는 관찰자와 독립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과학적 추구의 핵심이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사이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논쟁은 물리학의 영혼과 실재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300-1)


"아인슈타인이 여전히 보어와 코펜하겐 해석에 도전하는 동안, 이론에 의지하게 된 더 젊은 세대의 물리학자들에게는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대부분과 화학의 전부〉를 설명해준다는 폴 디랙의 평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넓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론이 현실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연장자 몇 명이 이론의 의미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원자물리학의 문제들이 차례로 해결되고 있던 1920년대 말에 이르자 관심은 원자에서 원자핵으로 옮겨갔다. 1930년대 초에는 케임브리지의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하고, 로마의 엔리코 페르미와 그의 연구팀이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킬 때 일어나는 반응을 연구하면서 핵물리학의 새로운 프론티어가 열리기 시작했다. 1932년에는 러더퍼드의 캐번디시 연구실에서 채드윅의 동료였던 존 콕크로프트와 어니스트 월턴이 최초의 입자가속기를 만들어 원자의 핵을 깨뜨리는 실험에 사용했다."(341-2)


"보어와 아인슈타인 사이에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두 사람이 모두 알고 있었다. 양자역학의 해석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실재의 위상에 대한 철학적 신념에까지 이어졌다. 그런 것이 정말로 존재할까? 보어는 양자역학이 자연에 대한 완전한 근본이론이라고 믿고, 그 위에 자신의 철학적 세계관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양자적 세상은 없다. 추상적인 양자역학적 서술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의 역할이 자연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반대로 아인슈타인은 대안적 접근을 선택했다. 그가 양자역학의 평가에 이용한 근거는 인과적이고 관찰자와 관계가 없는 실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했다."(362-3)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이론이라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물질점(物質點)이라는 기본 개념으로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것(고전역학의 양자 보정)이지만 실재 사물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표현〉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인슈타인은 고전물리학의 개념들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보어는 거시적 세계가 고전물리학과 그 개념들로 서술되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시간 낭비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전적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 상보성의 틀을 개발했다. 보어에게는 측정 도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본적인 물리적 실재는 없었고, 하이젠베르크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우리가 양자이론의 역설, 즉 고전적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 필요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고전적 개념을 지키려는 보어-하이젠베르크의 요구였고,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안정제 철학(tranquilizing philosophy)〉이라고 불렀다."(364)


4장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할까?


"1964년에는 전파 천체물리학자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우드로가 대폭발(빅뱅)의 메아리를 탐지했고, 진화생물학자 빌 해밀턴은 사회적 행동의 유전적 진화이론을 발표했고, 이론물리학자 머리 겔만이 쿼크라고 부르는 새로운 기본입자들의 존재를 예측했다. 그해에 등장한 기념비적인 과학적 돌파구는 이들 세 가지만이 아니었다.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헨리 스태프에 따르면, 〈과학에서 가장 심오한 발견〉인 벨 정리(Bell's theorem)에 대적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을 이용해서 성과를 올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그 의미와 해석에 대해서 벌였던 미묘한 논쟁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른네 살의 아일랜드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이 서로 상반되는 두 철학적 세계관을 구별해줄 수 있는 수학적 정리를 발견한 것이다."(375-6)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물리적으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없는 한 쌍의 상관된 입자 A와 B를 대상으로 하는 가상의 실험을 생각해냈다. EPR은 입자 A에 대한 측정이 물리적으로 입자 B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EPR은 두 입자 중 하나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측정 행위가 〈물리적 교란〉을 일으킨다는 보어의 역공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두 입자의 성질이 서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위치 같은 입자 A의 성질을 측정함으로써 입자를 교란시키지 않고도 B의 대응하는 성질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EPR의 목표는 입자 B가 측정되는 것과는 독립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런 사실을 서술하지 못하는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보어는 한 쌍의 입자는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하나의 시스템(界)을 구성한다고 분명하게 반박했다. 즉 어느 입자를 측정하면 다른 입자도 측정하게 된다는 것이다."(378)


# EPR 논문 : 1935년,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이 함께 작성한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라는 제목의 논문


"EPR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이용했지만, 데이비드 봄은 양자 스핀 하나만을 사용했다. 1925년에 젊은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헤오르헤 올렌베크와 사무엘 하우드슈미트가 처음 제안했던 입자의 양자 스핀은 고전물리학에서는 대응하는 개념을 찾을 수 없었다. 전자는 오직 두 개의 가능한 스핀 상태, 〈스핀-업〉과 〈스핀-다운〉의 상태를 가지고 있다. 봄이 수정한 EPR 실험에서는 스핀 0인 입자가 자발적으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두 개의 전자 A와 B가 만들어진다. A와 B가 결합한 스핀은 최초의 입자가 가졌던 스핀 0이어야 하기 때문에, 한 전자가 스핀-업이면, 다른 전자는 반드시 스핀-다운이 되어야만 한다. 두 입자 사이에 물리적 상호작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멀리 떨어질 때까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후에 스핀 검지기로 개별 전자의 양자 스핀을 정확하게 같은 시간에 측정한다. 벨은 그런 전자쌍에 대해서 수행된 동시 측정의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에 관심이 있었다."(386-7)


"보어에 따르면, 측정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전자 A와 전자 B는 모두 어떤 방향으로 미리 정해진 스핀값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관찰되기 전에는 전자들이 동시에 스핀-업과 스핀-다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유령 같은 겹침 상태에 있다." "전자 A는 그것을 결정하기 위한 측정이 A와 B로 구성된 시스템의 파동함수가 붕괴될 때까지 스핀의 x-성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붕괴가 일어나고 나면 비로소 스핀-업이나 스핀-다운이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얽힌 짝 B는 우주의 반대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방향으로 반대의 스핀을 가지고 된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은 비국소적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입자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부터 순간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없고, 그 성질은 측정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국소적 실재론'을 믿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모두 그런 실험의 결과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벨은 두 스핀 검지기의 상대적 방향을 변화시켜서 교착 상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388-9)


"실험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과학이론은 수정되거나 폐기된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그동안의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 이론과 실험 사이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벨의 동료들은 거의 대부분, 나이에 상관없이 양자역학의 정확한 해석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은 물리학이라기보다는 철학의 문제─〈바늘 끝에 몇 명의 천사가 앉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같은─라고 생각했다." "벨 정리는 그런 상황을 바꿔놓았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에서 아인슈타인이 강조하던 양자 세계가 관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물리적 효과는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 없다는 국소적 실재를 시험해볼 수 있게 되었다. 벨은 아인슈타인-보어 논쟁을 실험철학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끌어들였다. 벨의 부등식이 성립한다면,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옳은 것이 될 것이다.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보어가 승자가 될 것이다. 이제 실험실에서 아인슈타인 대 보어의 경쟁이 시작되었다."(391)


"1981년과 1982년에 아스페와 그의 동료들이 레이저와 컴퓨터를 포함한 최신 기술 혁신을 이용해서 벨의 부등식을 시험할 수 있는 정교한 실험을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나 수행했다." "벨은 1983년 아스페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몇 가지 의혹이 남아 있었다. 양자적 실재의 본질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모든 가능한 틈새를 고려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검지기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광자가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 검지기의 바양을 무작위적으로 바꾸어주었다. 결정적인 실험이 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지만, 그 이후로 몇 년에 걸친 추가적인 개선과 다른 연구로 아스페의 최초 결과가 확인되었다. 모든 가능한 틈새가 메워진 실험은 아무도 하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벨의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394-5)


"벨은 오직 두 가지 가정을 사용해서 부등식을 유도했다. 첫째는, 관찰자와 관계가 없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입자가 측정되기 전에도 스핀과 같은 확실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국소성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빛보다 빠른 영향을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저 멀리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순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아스페의 결과는 이 두 가지 가정 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벨은 국소성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은 세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관측되지 않더라도 세계가 실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90년 10월 뇌종양으로 62세에 사망한 벨은 〈양자이론은 일시적 처방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의 정리는 아인슈타인과 국소적 실재에 조종(弔鐘)을 울렸다."(394-5)


"이제 코펜하겐 해석과 양자역학이 동의어로 간주되었지만, 휴 에버렛 3세처럼 여기에 도전하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우주 바깥에서 우주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 외에는 그런 관찰자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주는 영원히 수많은 가능성의 겹침으로 남아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측정의 문제이다. 양자적 실재를 가능성의 겹침으로 서술하고, 각각의 가능성에 확률을 부여하는 슈뢰딩거 공식에는 측정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양자역학의 수학에는 관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이론은 양자 시스템의 상태가 관찰이나 측정에 의해서 가능성이 사실로 바뀌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고 불연속적으로 변하는 파동함수의 붕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에버렛의 다중세계 해석에서는 모든 가능한 양자 가능성이 수많은 평행 우주에서 현실적인 존재로 공존하기 때문에 관찰이나 측정이 파동함수를 붕괴시켜야 할 필요가 없다."(403)


"다른 해석의 등장과 양자역학의 완전성이 심각하게 의심스럽다는 지적 때문에 보어와의 오랜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불리했던 오랜 판결 역시 재검토되면서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명예를 회복했다. 영국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 경은 〈보어의 추종자들이 주장했듯이 아인슈타인이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심각하게 '틀렸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1900년 12월에는 고전물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고, 거의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스 플랑크가 우연히 양자를 만나게 되었고, 물리학자들은 아직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5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의식적인 고민〉으로도 자신이 양자를 더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의 희곡작가이며 철학자였던 고트홀트 레싱의 말을 위안 삼아 마지막까지 노력을 계속했다. 〈진실에 대한 열망은 진실에 대한 확실한 소유보다 더 소중하다.〉"(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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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를 읽다 - 레비스트로스와 인류학을 공부하는 첫걸음 유유 고전강의 13
양자오 지음, 박민호 옮김 / 유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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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하버드에서 레비스트로스를 만나다


"십자군의 동정東征에서 대항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근대사상은 끊임없이 시간과 공간에 있어 '인간'의 범위를 확대해 왔다. 공간적으로 보자면, 유럽인은 유럽 이외 지역에도 인간이 존재하며, 그 수가 유럽인을 초월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시간적으로 보자면, 고대 그리스 이전에도 인간이 존재했으며, 그 수가 한둘이 아니고 그 기간도 100~200년에 그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확장된 인류의 범위는 인류학 연구에서 새로운 문제를 촉발했다. 본래의 철학적 방법은 지나치게 서양인의 사고와 자각에 의존했고, 그리스 로마에서 기독교 전통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이 발견된' 인간은 철학의 대상에 포함시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본디 전칭全稱의 특징을 지닌 인류학 개념은 점차 전통 철학의 탐구 영역 밖에 있던 '인간 현상'을 탐구하는 것으로 전환되었고, 새로이 개척된 인간의 영역이 서양인의 관심과 해석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44)


2장 인류학의 대전환


"문명 바깥에는 '야만'이 존재한다. 주류 분과 학문은 각기 여러 인종과 문명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인류학의 연구 대상으로 '야만'과 '야만인'만을 남겨 두었다. 역사, 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은 모두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그러한 분과 학문의 기준에서 야만인은 '인간'에 포함되지 않으며 인간 연구의 범위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인류학은 특별하다. 야만인은 물론 인간이다. 야만인을 인간 연구에 포함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됨'의 최대공약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제대로 인간을 정의할 수 있다. 야만인을 배제한다면, 우리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최대 범위란 단지 '문명인'에 불과하게 된다. 심지어 그 문명인이란 특정한 몇 개의 문명에 속하는 인간으로, 진정한 인류와는 논리적 정의에서도 차이가 난다." "'황금' 또는 인류학이 밤낮없이 추구하는 '성배'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전칭적' 인식을 말한다."(47-8)


"말리노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나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 지역 사람들의 관점, 그들과 그들의 생활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인류학자는 과거의 관찰 태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참여자'여야 한다. 관찰자는 현지인의 생활을 외부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므로 객관적 혹은 주관적 편견을 갖게 된다. 반면 참여자는 참여 학습과 현지인의 생활관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그들의 삶을 그들의 입장에서 인식할 수 있다." "(참여자의) 자격을 얻은 인류학자는 늘 두 가지 초점을 가진 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인류학자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에믹emic과 에틱etic이라는 서로 다른 초점거리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 이 두 개념은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데, 각각 '내재'와 '외재' 또는 '집단 내부'와 '집단 외부'라는 의미다. 나아가 그것은 '특수성'과 '보편성' 간의 차이로 이야기될 수도 있다."(51-3)


"현대 문명, 공업화, 도시화는 전통적인 약세 문화를 지속적으로 파괴했고, 도처에서 옛 부락이 사라져 갔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학자에게 참여식 관찰을 통해 그와 같은 문화적 자료를 구출하고 지킬 것을 수시로 요구해 왔다. 그러나 결국 레비스트로스처럼 '보편적 인류 지식'이라는 과거의 몽상을 견지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시선을 돌려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렇게 쌓아 둔 표본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하려는가? 이런 표본을 정리해 인류에 관한 보편적 인식을 끄집어낼 수 없다면, 그토록 힘을 들여 그것을 수집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는가?〉 레비스트로스는 한 가지 방식을 찾아냈다. 이 방식으로 인류학자들은 다시금 인류의 공통성을 직시하게 되었다." "당시 인류학자들은 문화적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모든 보편성의 주장에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용감하고 영리하게 '구조'라는 새로운 관념을 제시해 보편성에 대한 인류학자의 관심을 확장시켰다."(69-70)


"이렇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와 시 혹은 시학 사이의 첫 번째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시학에는 항상 신비하면서도 동시에 확고한 주장이 포함되었다. 우리는 시가 시인의 독특한 개성을 분출한 것이라 여기지만, 시에서 인류가 공유하는 심층적 경험과 만나기도 한다. 시인은 다른 사람이 한번도 사용한 적 없는 어구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개별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을까? 언어 내부는 거의 무한정한 탄성彈性으로 가득 차 있지만, 늘 고정된 구조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시는 현실을 보여 주는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 그리고 이 진실은 보편적 경험, 이치, 규칙을 대단히 뚜렷하게 지시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레비스트로스가 방대한 민족지 자료를 분석하여 '구조'를 수립하려고 실행했던 바가 아니겠는가?"(70-1)


3장 슬픈 열대로 들어가다


"레비스트로스를 인류학자로 성장케 한 경험은 다른 사람들과 매우 달랐다. 말리노프스키 이래로 일찍이 영미 인류학자들이 받아들인 '통과의례'rite of passage는 원시 부락에서의 참여식 관찰이었다. 이는 인류학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학술적 성인식이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달랐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있어 은폐되고 헤아릴 수 없는 지식은 지질학,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의 교집합을 형성했다. 그는 자신을 이 교집합에 포함시켰다. 또한 인류학을 이 교집합에서 수행하려 했다." "그는 분명 현지 조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에 대한 참여식 관찰 방식의 현지 조사를 통해서만 인류학자로 변모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언어학자(야콥슨)를 알게 되고, 다른 언어학자(소쉬르)의 저작을 꼼꼼히 읽으면서 현지 조사 경험의 대응 방법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73-7)


"(언어를 랑그la langue, the language와 파롤la parole, the speaking로 구분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출현은 19세기에 갈수록 쇠퇴하던 언어학 연구를 해방시켰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 이전 언어학이 처했던 곤경이 당시 그가 느끼던 인류학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시절 언어학자들은 세계의 수많은 언어를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풍부한 자료를 집적했다. 그러나 물밀 듯 밀어닥친 언어 자료는 점차 언어학자들을 질식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언어 자료를 어떻게 정리하고 연구를 진척시켜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소쉬르는 명확한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현상인 파롤 안에서 헤매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현상이 제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언어학의 핵심으로 이끌 수 없음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언어의 구조를 정리하고 채택해 초언어적 거대 구조를 탐구하는 것, 즉 대문자적이고 궁극적인 랑그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소쉬르가 제기하는 바였다."(80-1)


4장 시처럼 모호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하나의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그것은 윌컨이 말한 '단호하고 창조적인 청년 시절의 글'과 '힘찬 문학적 실험'을 인류학과 현지 조사에 연결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와 같은 문학적 실험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소불위의 문장을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그는 글로 기록하기 어려운 특이한 현상,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서와 이치 등을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언어와 문장에 대한 깊은 신뢰,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천착, 표현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이것은 본래 시인의 태도이자 시적 추구의 태도다." "레비스트로스는 활자라는 시인의 무기와 시인의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보고자 하는 것, 경험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경험과 모험으로부터 가져와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다른 인류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89-91)


5장 개별 현상과 기본 구조 사이를 오가다


"실존주의는 existence(실존)라는 개념으로 being(존재)이라는 개념을 대체하려 했다. being이란 추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 개인, 구체적 생활, 구체적 감각 경험을 배제하고, 모든 인간과 사물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며, 집단적 존재 원칙을 관철한다. 반면 existence는 구체적 개인이 구체적 삶에서 획득하는 구체적 감각 경험을 지향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 삶의 가장 구체적인 다종다양한 선택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철학이 해석하는 being은, 그것이 아무리 논리정연할지라도 일상의 구체적 상황과 조건에서 맞닥뜨리는 인간관계, 도덕, 삶과 죽음 등과 관련한 중대한 결정을 도와줄 수 없다. 실존주의는 구체적인 존재와 용감하고 결연하게 대면하려 한다. 실존주의는 기존 철학적 문제의 경중과 완급을 뒤바꿔 개인, 개별성, 현재, 변화하는 현상 등을 인간의 본질, 전체성, 영원, 불변의 원리 따위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더욱 사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114)


"카뮈의 『이방인』은 추상적 본질적 규정에 의존하지 않은 채 느끼고 반응하는 인간을 묘사한다. 그것은 그만의 '실존'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의 실존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홀대한다. 그들은 추상적 본질에 따라 그를 바라보고 통제하며, 자신의 실존을 포기하고 추상적 본질을 흉내낼 것을 그에게 강요한다. 카뮈가 볼 때 이는 부조리하다. '개성'은 응당 '공통성'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개성의 횃불'이 가장 크게 타오르던 시기에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 사상계에 나타나 냉정하게 실존주의의 열기를 잠재웠다. 레비스트로스는 재차 공통성을 내세웠고, 구조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시선을 개인과 구체적 '실존'에서 공통적이고 체계적인 원리로 이끌었다." "구조주의의 약진은 실존주의가 일으킨 개인주의와 다원주의의 광풍을 수습했고, 사람들에게 〈인류 사회의 유희, 몽상과 망상은 개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떤 관념의 저장소에서 선택된 몇 가지 조합물〉임을 일깨웠다."(115-6)


# 구조주의의 양상

1. 영미의 구조기능주의 :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으며, 서로 연관된 이 현상들을 조직해주는 '기능'을 발견하면,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를 아울러 발견할 수 있다.

2. 프랑스의 구조주의 : 변화무쌍한 언어 배후에 모든 언어를 관통하는 몇 가지 기본 구조가 존재하듯이, 변화무쌍한 인류 사회와 문화 현상은 몇 가지 기본 구조의 파생과 변화의 결과물이다.


"구조주의로 인해 후에 포스트구조주의가 생겨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무엇인가?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절차를 뒤집어, 현상에서 구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만 현상을 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인간은 현상의 진면모에 가닿거나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구조의 개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구조의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왜곡 속에서 살아가야 할 숙명을 영원히 짊어져야 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 내부의 구조를 발굴했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언어 속의 모든 단어와 의미 사이의 관계─보다 폭넓게 말하면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 그것이 모두 언어의 구조에 의해 규제되고 결정된다는 점을 밝혔다. 우리는 구조가 발견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진리란 특정한 구조 속의 의미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특정한 구조의 견제를 받지 않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117)


6장 인류학자는 창조자다


"1955년 『슬픈 열대』가 출판되었을 때, 사르트르와 실존주의는 지성계의 최고봉을 점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했지만,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 그리고 인간이 과거에 습관적으로 의존해 왔던 바를 제거해 버렸다. 사르트르의 철학에는 고도의 비판성과 부정성이 있었고, 그 부정과 전복의 제거는 긍정과 구축과 창조를 멀리 뛰어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와 카뮈를 포함한 여타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이 오랫동안 의지해 왔던 것들을 과감히 제거해 버렸다. 받침목도, 지팡이도, 손을 짚을 난간도 모두 빼앗아 버린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제공했던 과거의 모든 외적 조건을 무정하게 깨뜨렸고, 우리는 의지할 데 없는 삶의 낭떠러지에 외로이 서서 모든 불확실성과 위험에 직면해야 했다. 그들의 분석은 훌륭하고, 그들의 표현 역시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주장은 대부분이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도전이었다."(151-3)


"사르트르 자신도 그 엄혹한 시험을 늘 통과했던 것은 아니다.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폭정이 알려진 후로도 사르트르는 계속해서 (코민테른 내 교조파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공산혁명을 신뢰하고 소련 공산당의 태도를 믿었다." "사르트르는 모든 것을 궁구한 끝에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주체성과 자유를 부여했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철학이 듣기에는 좋지만 실상 허황되다고 느끼게 되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장과 이론은 이와 같은 시대 배경에서 인간이 그토록 초조해할 필요도, 모든 것을 스스로 모색하고 결정할 필요도 없음을 알려 주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와 실존주의에 거리낌 없이 대응했다. 〈미혹되지 말자. 인간이 어디 그렇게 자유로운가. 당신의 행위는 구조의 한계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자유로운 선택이라 여기는 것은 모두 구조적 해석이 가능하다. 소란 떨지 말자. 더 이상 자신의 초조함을 세계적 진리로 확대하지 말자!〉"(153-5)


"인류학을 수학이나 음악에 비유함으로써 레비스트로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희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그는 인류학자는 수집가여선 안 된다고, 바로 창조자creator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집이라는 행위는 인류학자가 자신의 사회문화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는 과정일 뿐이다.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관찰하고 그에 관해 수집함으로써, 인류학자는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와 문화로부터 벗어나 해방되어 인류 경험의 대양大洋으로 진입한다. 그 대양은 특정 문화나 사회가 아니라, 인류학자가 모든 안락한 문화와 사회에서 벗어난 뒤 스스로 창조해 낸 '초문화적'trans-cultural 이해 지평을 말한다. 그것은 구체적 문화 현상에서 뽑아낸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규율에 의해 구성된 공간이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다양한 문화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은 구조를 발견하기 위해 부득이 거쳐야 할 노정이지, 그 자체가 인류학 연구의 목적은 아니다."(159-61)


7장 대지식


"통합적인 묘사나 정의가 그러한 구성원이나 현상을 처리하기 곤란할 때, 우리는 별 수 없이 일일이 나열하는 방식으로 분류된 집단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묘사는 집단의 유사성을 다룬다. 묘사는 언어나 문자를 통해 그 집단의 공통점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리스트가 다루는 것은 집단 안의 차이성이다." "따라서 묘사와 리스트의 관계는 '원리'와 '현상'의 관계와 닮아 있다. 원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현상을 공통된 원리의 묘사에 통합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상황에서 묘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재차 리스트로 돌아가게 된다. 첫 번째 상황은 사물의 차이가 거듭 환원될 수 없으며, 환원하려 하면 그 역할이 상실되는 경우다. 가장 좋은 사례가 바로 원소주기율표다. 100여 개에 달하는 화학 원소는 도표로 열거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원소로서 다시 분리될 수 없는 기본 물질로 제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176-7)


"또 다른 상황은 이렇다. 즉 우리는 주관상 각 구성원의 독립성을 제거하는 것에 저항하고, 의도적으로 리스트를 통해 차이가 존재함을 깨달으며, 그것을 존중하려는 태도를 지닌다. 이 상황을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상단에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군의 이름이 가득 새겨진) 베트남전 기념비이다. 이 거대한 리스트는 하나의 묘사, 하나의 거대한 분류 속에서 축소되고 상실될 뻔한 살아 숨쉬던 개체들의 개별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리스트의 특수한 의의이자 작용이다. 그것은 개체와 차이를 보존하는 동시에 두드러지게 한다. 열거식 리스트는 겉보기에 매우 가지런하고 형식상으로도 일정하다. 그러나 에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운다. 그처럼 가지런하고 일정한 형식의 외관은 일종의 가상假像이다. 그 안에는 통합적 이성에 의해 수용된 길들여지지 않은 차이들이 숨겨져 있다. 리스트는 항상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이며, 리스트에 수용되지 않은 리스트 바깥의 것을 생각하도록 자극한다."(177-8)


"비록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구호는 본질로부터의 탈피를 요청하는 듯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철학은 시종 본질론에 머물러 있었다. 사르트르의 사상은 본질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한편 이성을 분석한다. 그런데 분석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분류와 묘사를 해야 한다. 우선 문제와 분석 대상을 묘사한 연후에야 비로소 분석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석에 활용되는 그러한 묘사는 총체적 이성에서 나오는 묘사이기에, 그 자체로 이미 본질론적이다." "상대적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사상 모델은 '유비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서술한 시장처럼) 분류를 통해 '동류'同流의 현상을 한데 모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도 서로 완전히 동일할 수 없음을 수시로 관찰하고 인식하여 단지 상호 간의 유사성에 의지해 그것을 한데 모아야 한다. 즉, 묘사가 아닌 리스트를 통해 현실의 현상을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유비적이라 할 수 있다."(180-1)


8장 야생적 사고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사고가 '신석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야만인의 숙고'와 함께 '수공예 장인식 연구 방법'을 제시했다. 이 둘은 서로 표현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다. 분류와 분업에 반대하고 그 이외에 인류 지식을 조직하는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신의 이론적 필요에 따라 재료와 도구를 직접 찾거나 만드는 작업 방식을 말한다. 현대 과학 이성의 분류 원칙에 따르면, 그러한 재료나 도구는 각기 다른 분과 학문에 속해 있으며 서로 다른 연구 성격을 띤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그러한 분류를 따르지 않았고, 그 자신의 '수공예적' 필요와 유비적 원칙에 따라 여기저기서 재료와 도구를 탐색해 독특한 지적 학문적 체계를 수립했다. 그것은 복제할 수도, 어떤 부류에 포함시킬 수도 없는 거대 이론이었다. 어떤 수공예 장인이 일생을 바쳐 손수 만들어 낸 공예품처럼, 그의 이론은 현대 학술 분업 체계에 편입시킬 수 없는 독특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186-8)


"〈뇌를 먹어 머리를 좋게 한다〉거나 〈간을 먹어 간을 보양한다〉는 전통 관념은 모두 전형적인 유비적 사유에 해당한다. 동물의 뇌와 간과 사람의 뇌와 간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데 묶어 일련의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확정, 중복, 예상 가능한 인과관계만을 인정하는) 과학 이성에 비춰 볼 때 얼토당토 않은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탐구하려 했던 총체적 의미, 구조 등은 부분적으로 엄격한 인과론으로 수립될 수도 없고, 그것으로 분석하거나 증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증명할 수 없고 인과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총체적 의미와 구조의 존재 그리고 그 중요성을 부정하기를 거부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와 관계가 과학 이성의 분석이나 인과적 추론만으로 모두 설명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야만인, 신석기시대, 수공예 장인의 사유와 그것들이 세계를 보는 시각을 활용했고, 또 그것들을 수호하려 했다."(188-90)


"과학은 끊임없이 사실을 절단하는데, 많은 사실을 절단하고 분석할수록 더욱 예리해지고, 예리해질수록 더 많은 사실을 절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예리해져 많은 사실을 절단할수록 과학은 본질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반면 물고기나 벌처럼 과학의 성질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생존 조건을 파악하는 것, 즉 냄새, 깊이, 무게, 명암을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사물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야만인의 신화나 상징〉도 그러하고 〈화가, 시인, 작곡가의 작품〉 역시 그러하다. 절단의 방식이 아니라 상반된 것을 혼동함으로써 수립한 〈가장 기본적이고 유일한 지식〉이야말로 바로 〈보다 고차원적인 지식〉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특이하게도 문학예술을 문명 속에 보존된 야만의 특별한 일부라고 보았다. 야만, 야성의 비분석적 사유는 과학 이성으로 뒤덮인 환경에서도 문학이나 예술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201-2)


9장 신세계로 나아가다


"야만에 관한 설명 방식 중 하나는 그곳에는 전기도, 수도도, 장미 정원도 없고 '시詩'도 없다는 것이다. 즉 문명의 성취, 문명의 이기利器가 결여된 것이 바로 야만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와 20세기 초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이러한 대조를 뒤집었다. 야만에 있는 직관, 공포, 활력, 리듬, 자연스러움이 문명에는 전혀 없다고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묻는다. 현대 문명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야만의 요소나 특질이 정말 오로지 야만에만 있으며, 그것은 문명과 공존할 수 없는가?" "그는 야만의 요소와 특질 중 상당 부분이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고, 다만 문명에서는 배제되어 보이지 않거나 식별이 어려운 여타 형태로 변형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세대의 임무는 일상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후미진 곳을 들추거나 겹겹이 쌓인 안개 속을 헤쳐 야만과 문명 사이의 공통된 부분, 즉 전체 인류에 속한 총체적 의미와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다."(209-10)


10장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 인류학의 주요 분과

1. 고고학

2. 체질인류학 :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고대의 유해와 체질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는 분야

3. 사회인류학(문화인류학) : 특정 사회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정리, 귀납, 분석, 해석하는 분야

4. 민족지 : 특정 사회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조사, 수집, 기록하는 분야


"본디 민족학은 모든 야만 문화를 서구인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진화론의 거대 계보 내에서 평가하고 자리 매겼다. 그들에 의하면, 인류는 막 탄생한 0점 단계에서 진화를 거듭해 현대 유럽에 이르러 100점 단계에 도달했다. 이 과정은 대단히 길고 연속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이에 기초하여 민족학자들은 자연스럽게 눈앞의 부락을 평가했고, 도구, 공예, 조직, 자연신에 대한 신앙 등 각종 척도를 사용해 그들의 진화가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 탐구했다. 민족학이 민족지로 전환되면서 이러한 척도는 한쪽으로 밀려났다. 민족지는 문화의 내적 의미를 강조하며 모든 문화가 서로 다른 내적 의미 체계를 지녔음을 부각했고, 각 문화를 '진화 정도'에 따라 비교하는 태도를 배제했다. 민족지학자는 먼저 해당 문명의 내부로 최대한 진입해 그것을 상세하게 기록하고자 했고, 겉으로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 사상과 그것이 외적 행위와 맺는 관계 모두를 기술하려 했다."(235-6)


"모든 문화에는 저마다 자신의 체계에서 당연시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 당연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민족지학자나 민족지 조사와 기록 훈련을 받은 인류학자는 〈현대 생활을 인류 생활의 보편적 규범이라 여기는〉 잘못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활동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와 같은 길을 따라 더 먼 곳까지 이르렀다. 그는 모든 본성과 천성에 대한 논의는 '지식/권력'이 작동한 결과물이며, 가장 큰 권력은 진리를 구축하는 권력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볼 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을 진리로 격상시킨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을 배제하고 자신의 생활이나 습관을 진리로 드높여 차이를 제거하거나 억압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푸코처럼 극단적인 입장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당시의 많은 인류학자가 인류 행위에 대한 기존의 보편적 준칙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246-7)


11장 이원 대립: 레비스트로스 사상의 핵심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생각하기 좋은 것'good for thinking이 가장 중요하다. 그가 볼 때 특정 문화의 감각적 선호는 내재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세계 분류로부터 결정된다. 카두베오족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신체 그림은 표층적인 시각적 즐거움보다는 심층적인 세계관과 이상理想에 의해 결정된다. 신체 그림의 도안은 그들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내포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진정 'good for looking'(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good for thinking'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훗날 『신화학』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날것과 익힌 것'의 기본 대립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전한다. 특정 문화에서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있고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여기는 기준은 미각이 아니라 그 배후의 세계 분류 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음식이 사람들에게 맛있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good for eating'(먹기 좋은 것) 때문이 아니라 'good for thinking' 때문인 것이다."(258)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원적 철학 분석 체계가 레비스트로스의 가장 근원적인 문화 관찰 방법의 배경이 되었다고." "이분법 또는 이원론은 사물을 두 측면으로 나누는데, 이 두 측면이 서로 맺은 다양한 관계는 레비스트로스가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잘 운용하는 문화 해석 양식이자 그가 보기에 가장 근본적인 문화적 이미지였다. 인류 문명의 오묘함은 어떻게 그 이원성을 운용해 두 측면을 서로 협력시키거나 대립시켜 보다 고차원적인 새로운 이원 관계를 형성하는가에 있다. 즉 대립 속에 존재하는 협력, 협력 속에 존재하는 대립이 서로 나선형을 그리며 상승해 보다 높은 차원의 이원적 조합을 이루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모든 기제는 서로 층위가 다른 이원적 대상들의 운동에 포함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 이론의 핵심 역량인 동시에 치명적인 결함은 그 이분법적이고 이원로적인 개념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265-70)


12장 앞을 계승하고 뒤를 잇다


"특히 말리노프스키 이래 인류학은 객관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인류학자의 현대적 편견을 억제하려 했다. 그리고 인류학자에게 멀리 떨어진 야만 문화를 '여실히' 기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기억이 이후의 경험이 미치는 간섭을 배제할 수 없는 것처럼, 야만에 대한 기록 역시 현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아가 현대의 간섭을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도리어 그와 같은 야만 문화의 특수성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후대의) 드뷔시 음악이 일찍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쇼팽 음악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했던 것처럼, 현대 문명은 야만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야만 문화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다." "이 역시 현대적 편견인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을 통해 야만에 가치와 존엄을 부여한 정의正義다. 그것은 '시학적 정의' 혹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 할 수 있다."(295-6)


13장 먼 여행의 의의


"인류학자의 여정은 출발 전에 이미 결정된다. 대다수 인류학자는 미리 설정된 틀에 따라 탐사의 의의가 높다고 여겨지는 지역으로 떠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달랐다. 그는 여정 중에 억누를 수 없었던 감정을 진실하게 써 내려갔다. 외딴 곳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외딴 지역에 반드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지역에서 끊임없이 익숙한 현상을 발견했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며, 심지어 자신을 저주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인류학자들은 자신의 기대가 어긋난 데서 오는 실망감과 허무함을 진실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내면에 이미 인류 문화를 하나의 총체로 이해하려는 신념이 줄곧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인류 문화의 구조와 총체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그 구조와 총체적 의미를 발견하고 증명하려 한 것이지, 그들의 문화에서 상이한 면모를 발견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308-9)


"레비스트로스는 고백한다. 진정한 인류학자는 첫 번째 현지 조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후 다시 현지 조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 번은 꼭 가 봐야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한 번의 여행으로 특별한 현상에 대해 가졌던 매혹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현상의 한계와 시시함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고 인류학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했다면, 그는 앞으로 탐구해야 할 대상을 원래 살던 환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즉 그는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익숙한 환경에서도 구조를 볼 수 있는 안목과 재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다시 여정을 떠날 이유가 있겠는가? 또다시 현지 조사를 떠나는 인류학자는 여전히 기이한 현상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그 현상의 한계와 시시함을 간파하지 못한 사람이다. 반면 문화와 사회 현상의 유한성을 간파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조인류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313-4)


14장 부단히 확대되는 구조


"레비스트로스 이후 라캉의 구조주의 정신분석이 등장했다. 라캉은 레비스트로스가 언어학에서 차용해 인류 문명을 분석한 방법으로 개인 심리와 정신을 연구했다. 라캉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정신은 고정된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구조는 외부에서 온 자극을 유형화하고 정리하도록 우리를 지배한다. 또한 그러한 작용은 임의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개별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라캉은 구조언어학과 구조인류학이 고찰한 집단 현상의 기초를 더 파고들었다. 그는 인간이 언어 구조와 문명 구조를 집단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각 개인의 내부에 그러한 정신 구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 정신 구조가 그와 같이 유한한 구조 형식 속에서만 인간이 감관과 심리 정보를 다루도록 제한하기 때문에 인간과 외부 세계의 관계 양상은 무한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류는 오로지 유한한 형식하에서만 사회와 문명을 구축할 수 있다."(330)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예로 푸코의 구조주의 지식사智識史가 있다. 푸코는 구조주의의 핵심 주장을 받아들여 〈관계가 어떠한 개별 구성원이나 개별 요소보다 중요하다〉고 보았고, 이러한 원칙을 통해 지식을 재정리함으로써 기존과는 구별되는 지식사를 수립했다. 그는 분리와 구분의 방식으로 지식을 보지 않았다. 즉 그는 철학, 문학, 예술, 역사 등의 분과를 구분해 연구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지식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고, 지식의 생산에서 성립까지를 결정하는 구조의 연구에 가치를 두었다. 푸코는 이러한 연구를 '지식고고학'이라 불렀다. 그는 칸트, 헤겔, 피히테 등 철학자를 시간순으로 나열해 사상의 변화를 고찰하지 않았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적지를 발굴하듯, 하나의 층위에서 발견된 모든 사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분석을 거쳐 푸코는 서로 다른 지식 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요소가 바로 '권력'임을 밝혀냈다."(330-1)


# 그 외 : 롤랑 바르트의 문학구조주의(문학작품이란 심층적인 언어 문법과 문화 문법 간의 상호 교차의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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