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 폭탄 만들기 2
리처드 로즈 지음, 문신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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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신세계의 문턱에서


"1942년 11월 초 페르미는 콤프턴의 사무실에서 그의 팀들이 실험 파일들을 건설했던 스쿼시 경기장에 파일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1.0보다 큰 k값은 1.0보다 작은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위험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콤프턴은 두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우리는 진짜 핵폭발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다.〉 콤프턴은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는 훨씬 침착하게 썼다. 〈파일 속에 있는 방사능 물질의 양은 어마어마하고 그리고 이런 장소에서 과도한 방사능 물질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는 페르미에게 제어 가능성에 대한 분석을 요구했다. 페르미는 파일에 사용할 수동식과 자동식 제어봉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계산에 의하면 저속 중성자 분열이라고 할지라도 1,000분의 수초 이내의 시간에 증식되므로 기계적인 제어 시스템이 제 위치에 찾아 들어가기 전에 열과 방사선이 위험한 수준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57-8)


"연쇄 반응이 통제될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1939년 보어의 핵분열 발견 발표 후 카네기 대학교의 지구자기학과에서 리처드 로버트 팀에 의하여 발견된 것이었다. 콤프턴의 말에 따르면 〈분열과정에서 나오는 일부 중성자들은 즉시 방출되는 것이 아니고 분열이 일어난 후 수초 뒤에 방출된다는 것이다.〉 파일의 k값이 1.0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서 가동된다면 지연중성자들을 조정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콤프턴은 제어가 가능하다는 확신이 서자 페르미에게 CP-1을 서쪽 스탠드 안에 건설하도록 허락했다." "이 때는 페르미에 의해 창안되는 과정에 있는 원자로공학에 아직 '노심의 용해(Meltdown)'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의 작은 체르노빌(Chernobyl)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미는 놀라우리만큼 유능한 엔지니어였다."(58)


"어둡고 추운 시카고의 겨울밤 중성자와 플루토늄이 증식을 기다리고 있는 파일에는 77만 1000파운드의 그라파이트, 8만 590파운드의 산화우리늄 그리고 1만 2400파운드의 우라늄 금속이 사용됐다. 자재와 건축 비용은 100만 달러가 소요됐다. 움직이는 부분은 단 하나, 제어봉뿐이었다. 만일 페르미가 동력 생산을 계획했다면 그것은 강철과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 설치되고 분열에 의해 발생된 열을 물, 헬륨 또는 비스무트를 사용하여 펌프로 뽑아내고 전기생산을 위한 터빈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CP-1은 전적으로 연쇄 반응을 증명하기 위한 물리학 실험이었다. 차폐나 냉각장치도 없고 출력은 0.5와트 정도로 통제될 것이다." "페르미는 연쇄 반응이 발생하면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가 틀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젊은 연구원 한 명이 물었다. 그는 지연 방출되는 중성자들에 의한 제동효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페르미는 〈나는 천천히 걸어나갈 것이다〉라고 대답했다."(61-2)


"12월 2일, 연쇄 반응 측정에 성공한 페르미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다음날 기술협의회에서 1.0006의 k값을 얻었다고 보고하게 될 것이다. 중성자는 세기는 2분마다 배로 증가하고 있었다. 제어하지 않은 상태로 1시간 30분만 그대로 놔둔다면 100만 kW의 에너지를 방출했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죽게 되고 녹아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왜 페르미가 파일 가동을 중단시키지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앤더슨이 말했다. 〈페르미는 너무도 침착했다. 그는 1분 또 1분 기다렸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걱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안정 제어봉을 떨어뜨리라고 명령했다.〉 이때가 오후 3시 53분이었다. 페르미는 파일을 4분 30초 동안 0.5W의 출력으로 가동시켰다. 수년에 걸친 발견과 실험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인간이 원자핵으로부터 에너지를 방출시키고 통제했다. 연쇄 반응은 이제 더 이상 헛소리가 아니다."(68)


2 / 물리학과 사막


"오펜하이머가 새로운 연구체제의 책임자가 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이 연구는 주로 실험과 공학적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인데, 오펜하이머는 이론가였다. 베테가 그의 회고록에 기록했다. 〈프로젝트 지도자급은 모두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노벨상도 받지 못했다. 또한 그로브스가 암초라고 부른 오펜하이머의 좌익 배경이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안은 육군 방첩 부대의 소관이었고 이 방첩 부대는 전 약혼자, 부인, 남동생 부부 등이 모두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며 아직도 지하활동을 할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을 확고부동하게 거절했다. 어째됐건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를 원했다." "〈한참 토의한 끝에 나는 각 위원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있으면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다. 몇 주 후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래서 오펜하이머에게 책임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78-9)


"오펜하이머는 사람을 구하러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로스앨러모스에 합류한다는 것은 많은 걱정거리를 만들었다. 그곳은 군 주둔지였다. 여행과 가족들의 이사 자유도 극히 제한됐고 ······ 기약도 없이 뉴멕시코의 황무지로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과 군의 후원 아래 생활한다는 것이 많은 과학자들과 가족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또 다른 면도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은 참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이 일을 성공적으로 빨리 완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쟁의 결과를 결정지을 수도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식과 과학기술을 이 나라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더없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이 성취된다면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마침내 이런 흥분, 헌신 그리고 애국심이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스앨러모스로 왔다.〉"(83-4)


"폭탄설계가 중요한 문제였다. 네더마이어는 구형 반사체 주위에 빙둘러 폭약을 설치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여러 곳에서 동시에 기폭시키면 폭약은 내부를 향하여 터질 것이다. 폭발에서 생기는 충격파는 구형 반사체를 모든 방향에서 압축시키고 따라서 내부의 중심부에 있는 핵물질도 압축될 것이다." "삼차원적으로 내부를 향해 압축하는 것이 '내폭'이다." "1943년, 노이만과 텔러는 지금까지 시도한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한 내폭 방법으로 플루토늄을 지구상에서 얻을 수 없는 밀도로 압축하면 임계상태 이하의 속이 차 있는 질량을 폭탄의 소재로 사용해도 구각을 압축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오펜하이머에게 통보할 수 있었다. 가벼운 원소 불순물에 의한 조숙한 폭발도 방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내폭 방식의 개발로 더 신뢰도가 높은 폭탄을 더 빨리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102-9)


3 / 완전히 다른 동물


"보어는 1939년 전국을 거대한 공장으로 변환시켜야 우라늄 235를 분리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수년 후 보어가 로스앨러모스를 방문했을 때, 에드워드 텔러는 〈이제 아시겠지요 ······. 보시는 바와 같이 ······〉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텔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보어는 〈내가 전국을 공장으로 만들지 않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지! 바로 그렇게 한 걸세!〉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기념비적인 규모는 당시 미국이 갖고 있던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 나라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얼마나 야심차게 움직였는가 하는 점을 보여 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을 위한 대군주(Overlord) 작전이 계획됐던 1943년 8월 퀘벡 회의에서 윈스턴 처칠이 루스벨트에게서 협력자의 위치를 확인 받을 때까지는, 미국은 다른 국가들, 영국마저도 원자 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로브스는 군사정책위원회에 미국이 전 세계의 우라늄 광석 공급을 완전히 통제하여야 된다는 것을 제안했다."(134-5)


"핵 반응로에서 발생하는 방사능 물질을 전쟁무기로 사용하는 방법은 아서 콤프턴이 1941년 국가 과학원(NSA) 검토위원회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금속 연구소 과학자들은 독일이 파일 개발에 있어서 미국보다 1년 또는 그 이상 앞섰다는 가정 하에 1942년 말 독일인들이 이런 무기를 개발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는 페르미의 생각을 텔러와도 상의했다. 텔러는 가장 가망성이 있는 방사능 물질은 스트론튬(Strontium)이라고 했다. 원자번호 90번인 스트론튬은 인체의 뼛속에 축적된다. 텔러는 파일의 우라늄에서 스트론튬을 분리해 내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펜하이머는 자기 생애에서 여러 번 자기는 아힘사(Ahimsa, 남에게 해를 입히거나 또는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의 인도어)를 지킨다고 고백했다. 이제 그는 (스트론튬을 이용한 방사능 오염으로) 50만 명의 인명을 대량 독살할 준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138-9)


4 / 폭로


"보어가 폭로한 폭탄의 상보성은 동시대의 어떠한 정치적인 문제보다도 훨씬 더 기본적인 것이었다. 첫 번째 폭탄이 거의 완성될 때쯤 소련에게 폭탄 개발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통보해 준다. 그러면 소련은 신뢰감이 생겨 전후 군비 통제 협상에 협력할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이 정보를 스스로 알아내게 하고, 폭탄을 전쟁 중에 사용한다면, 소련은 전후에 미국과 영국의 핵독점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면 결과는 핵무기 경쟁으로 치닫게 된다." "영국의 원자무기 계획책임자이며 재무상인 앤더슨은 보어의 의견대로 전후 국제적인 핵무기 확산 가능성을 내다 보았다. 치열한 군비경쟁에 대한 단 하나의 대안은 국제적인 합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가까운 장래에 원자무기에 대한 사실을 소련에게 알리고 국제적 통제 계획을 준비하는 노력에 소련의 협력을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처칠은 '협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메모에 여백에 〈어떤 경우에도 안 됨〉이라고 써 넣었다."(160-1)


"처칠의 외고집은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솔직한 면이 있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준비로 정신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음모자들이 등 뒤에서 기어다니는 냄새를 맡고 본능적으로 찰싹 때려 떨어뜨렸을 뿐이다." "처칠은 폭탄이 전쟁의 원리를 바꿀 것이라는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년 후 일흔 살이 되는 처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1945년 앤서니 이든에게 보낸 글에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한 이 문제는 미국과 영국이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프랑스와 소련인들이 무엇을 하든지 내버려 두어야 한다. 어떤 강국이든 이 비밀을 손에 넣으면 그것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류사회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나는 제삼자에게 알려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처칠은 언제나 비밀에 대하여 (그것을 지킬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164)


5 / 이 시대의 재앙


"공군은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에 있는 글렌 마틴 공장에서 B-29 17대를 8월부터 개조하기 시작했다. 또한 최초의 원자 폭탄을 투하할 특별팀을 훈련시켰다." "제509 비행 승무원들은 30,000피트 상공에서 지상에 그려진 작은 원을 목표로 폭격 연습을 했다. 구름이 많이 끼는 유럽에서 폭격해봤던 승무원들은 왜 자기들이 관측 폭격 훈련을 하는지 의아해 했다. 폭격 후 현장을 급히 벗어나는 이상한 비행 방법으로 미루어 보아 자기들이 운반하게 될 폭탄의 위력이 매우 큰 것이라고 짐작했다. 티베스는 아무에게도 원자 폭탄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은 채로 폭탄 투하 후 기수를 155도 돌려 급강하하며 현장을 벗어나도록 지시했다. 거대한 폭격기는 급강하하면서 속도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거듭된 훈련으로 조종사는 지상 폭발 위치로부터 10마일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은 20,000톤 TNT와 동등한 폭탄으로부터 충분히 안전한 거리이다."(226-30)


"핸퍼드에서는 화학적 분리 방법을 이용하여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었다." "반응이 끝난 우라늄은 퀸 메리 내부에 깊이가 16.5피트 되는 저수조에 반감기가 짧은 방사는 물질들이 붕괴될 때까지 보관했다. 이 물은 방사능 입자들 때문에 푸른 빛을 발했다. 우라늄 덩어리들은 차폐된 통 속에 넣어 특별히 만든 궤도차로 퀸 메리까지 운반됐다. 두 개의 방에는 원심분리기, 저장탱크, 침전기 그리고 용액 탱크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내부식성 강철로 만들었다. 우라늄 덩어리를 뜨거운 질산에 녹인 액체 용액은 압력 수증기를 이용해 빨아 들이는 장치에 의해 한 장비에서 다른 장비로 이동된다. 분리 과정에는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용해, 침전 그리고 침전물의 원심 분리 작업이다. 이 세 가지 단계가 계속하여 반복된다. 마지막에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은 지하 탱크에 저장한다. 이로써 소량의 고도로 정제된 플루토늄 질산염을 얻게 된다."(250-2)


# 퀸 메리 : 대량의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길이 800피트, 폭 65피트, 높이 80피트 크기의 재처리 공장


6 / 삼위일체


"루스벨트의 갑작스런 서거로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계승한 후, 원자 폭탄을 투하하게 될 도시를 선정하기 위한 표적 선정 위원회가 처음으로 펜타곤에 있는 로리스 노스타드의 회의실에서 열렸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대표하여 그로브스 밑에서 일하는 토머스 파렐 준장이 위원장직을 맡고 공군에서 대령과 중령 각각 한 명씩 그리고 노이만과 영국 물리학자 윌리엄 페니를 포함한 다섯 명의 과학자가 참석했다." "파렐이 기본적인 사항을 설명했다. 이 중요한 임무를 위한 B-29의 비행거리는 1,500마일 이내일 것, 지금까지 사용해 보지 않은 귀중한 폭탄을 확실히 표적에 투하하고 사진을 촬영하기 위하여 육안 폭격을 할 것, 표적은 일본의 도시 또는 산업 지역이며 7월과 8월 또는 9월에 폭격할 것, 한 개의 주목표에 두 개의 예비목표를 선정할 것, 정찰 목적의 항공기가 사전에 표적 지역의 시계를 확인할 것 등이었다."(277-8)


"표적 선정 위원회의 위원들은 원자 폭탄 개발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이 유용한 충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과학자들로 구성된 소위원회를 부속 기구로 두기로 했다." "폭발 고도에 따라 얼마나 넓은 면적이 폭풍에 의하여 파괴될 것인가가 결정된다. 너무 높은 고도에서 터진 폭탄은 공기를 밀어내는 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너무 낮은 고도에서 폭발하면 많은 에너지가 흙 구덩이를 파는 데 쓰이고 말 것이다. 높은 것보다는 낮은 것이 낫다. 계산에 따르면, 〈최적고도보다 40퍼센트 정도 낮은 고도에서 폭발하면 피해 면적은 24퍼센트 정도 줄어든다. 그러나 고도가 14퍼센트 정도 높으면 같은 피해 면적이 감소하게 된다.〉" "표적 선정 작업이 진전됐다. 위원회는 고려사항을 세 가지로 압축했다. '지름이 3마일 이상되는 도시'로 '폭풍에 의하여 파괴될 수 있으며' 그리고 '다음 8월까지 공격을 받지 않을 곳'으로 한정했다."(282-4)


"리틀보이가 작동할지 어떨지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프리슈의 실험은 우라늄의 고속 중성자에 의한 연쇄 반응 가능성을 증명했다. 대포식 폭탄은 비효율적이며 낭비가 심한 장치이다. 남은 것은 내폭 실험이다. 물리학자들은 자기들의 에너지 방출 이론을 비교 검토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다. 트리니티는 지금까지 시도된 것 중 가장 규모가 큰 물리학 실험이었다. 시험장을 선정하고 준비하는 작업은 하버드의 실험물리학자 베인브리지가 담당했다. 로스앨러모스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의 임무는 〈극도의 비밀과 심적 부담 속에서 사막 황무지에 복잡한 과학 실험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평탄하고, 외떨어지며, 날씨도 좋고, 로스앨러모스에서 다니기에도 편리하지만 연관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충분히 먼 장소가 필요했다. 여러 번의 답사여행 끝에 로스앨러모스에서 남쪽으로 210마일 떨어진 앨러모고도에서 소북쪽으로 60마일 되는 곳을 발견했다."(313-4)


"1945년 7월 16일, 폭파 시험이 성공하던 순간, 사람들은 이론물리학과 카메라가 볼 수 없었던 연민과 공포를 보았다. 래비는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동쪽에 몇 줄기의 황금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10초간은 내가 경험했던 것 중 가장 긴 10초간이었다. 갑자기 거대한 섬광이 나타났다. 내가 지금까지 본, 아니 누구라도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밝은 빛이었다. 그것은 터졌고, 그것은 갑자기 덤벼들었고, 그것은 나를 뚫고 지나갔다. 그것은 온몸으로 보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으로 보였다. 모두 약 2초 동안 계속됐다. 마침내 그것은 끝났다. 우리는 폭탄이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거대한 화구가 있었다. 그것은 점점 커지며 구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중으로 올라갔다. 노란 섬광이 주홍과 녹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위협적이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새로운 것이 방금 태어났다. 새로운 통제, 인간이 자연에 대항하여 획득해낸 새로운 이해이다."(336-7)


"앤더슨은 로켓에 매달린 컵으로 토양 샘플을 채취해 분석했다. 방사 화학적 분석으로 폭발 위력이 18.6킬로톤으로 판명됐다. 이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네 배나 되는 위력이었다." "폭풍 효과를 연구한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페니는 닷새 후 트리니티에 대하여 보고했다. 그는 이 무기가 30만 내지 40만 명이 사는 도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그는 이 숫자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트리니티 시험이 진행되고 있을 때쯤, 샌프란시스코 만에서는 리틀보이가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에 선적되고 있었다. 함장은 납통 속에 들어있는 리틀보이의 우라늄 포탄을 부관방에 보관하고 방문을 용접해 버렸다. 로스앨러모스에서 온 두 명의 육군 장교가 티니안에 도착할 때까지 열흘 동안 하루 24시간 교대로 지킬 것이다. 태평양 시간으로 8시 36분, 인디애나폴리스 호는 금문교를 통과하여 태평양으로 나아갔다."(342-3)


7 / 죽은 자의 세계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에 전달됐다. 다음 날 일본의 신문들은 선언문의 내용 중에서 무장해제된 군인들은 고향으로 돌려 보내겠다는 것과 일본인들은 노예가 되거나 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삭제하고 발표했다. 오후에 일본 수상 스즈키는 기자 회견을 했다. 〈나는 세 나라에 의한 공동선언은 카이로 선언의 재판이라고 믿고 있다. 정부로서는 어떤 중요한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것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성공적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결연히 싸워야 된다.〉 스즈키는 일본말로 선언을 '묵살'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선언을 말없이 무시해 버린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역사가들은 스즈키가 어떤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수 년 동안 논쟁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나머지 그의 발표는 '일본은 계속 싸우겠다'는 내용이었다."(362)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자, 사람들은 그것을 사용해야 할 이유를 찾아냈다. 스팀슨이 1947년에 말한, 가장 강력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가장 추구했던 것은 가능한 한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전쟁을 승리로 끝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국민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폭탄은 일본인들에게 포츠담 선언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항복하도록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소련인들에게도 알려주어, 스팀슨의 말을 빌면, '절실히 필요한 평형 장치'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에 어떤 일이 다가오는지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국회를 상대로 20억 달러의 지출을 정당화하고 그로브스와 스팀슨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폭탄은 사용되어야 했다."(366-8)


"그러나 몇 번의 폭발은 폭탄이 투하될 도시에 살고 있는 민간인들에게는 구원의 기적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좀 더 강력한 이유가 제시되어야 할 것 같다. 폭탄의 사용은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 항복하지 않기 때문에 승인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건부 평화는 괴멸됐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게 했다. 먼젓번 전쟁의 검은 그림자들이 수년 간 드리우고 있었다. 옥스퍼드의 G.E.M. 앤스콤은 1957년 해리 트루먼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팸플릿에서 〈무조건 항복의 고집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요구와 가장 잔인한 전쟁 방법의 사용 필요성 사이의 관계는 명백하다. 전쟁에서 무조건의 조건을 제안하는 것은 야만적이며 바보 같은 짓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교전 상대국 모두에게 야만적이고도 바보짓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368)


8 / 산 자의 세계


"10월 16일 오펜하이머가 소장으로 재직하던 마지막 날, 로스앨러모스의 남자와 여자들은 감사장 이외에도 각기 기념품을 한 개씩 받았다. 10센트짜리 은전 크기의 은 핀에 커다랗게 A자가 새겨져 있고 주위에 'BOMB'이라고 써넣은 메달이었다. 오펜하이머가 하원과 상원의 원자에너지 위원회에 증언하기 위하여 워싱턴으로 급히 떠나기 전에 한 신문기자가 원자 폭탄에 중요한 한계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 오펜하이머는 〈당신이 폭격을 받는 쪽에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에 한계가 있다〉고 빈정대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예언하는 능력을 시험했다. 〈더 무서운 것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예이다. 더 많이 만들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예이다. 더 굉장히 무서운 것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마도 예일 것이다.〉 타임지는 담배 파이프를 들고 있는 그의 사진과 같이 그가 언급한 이야기를 국제란에 실었다."(432-3)


"텔러는 비밀회의를 주관하기 위하여 1946년 4월 로스앨러모스에 돌아왔다. 이 회의의 목적은 그동안 슈퍼(수소 폭탄)에 관한 연구결과를 검토하고 실제 제작 및 실험이 추진된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 것인가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슈퍼 회의로부터 3개월 지난 1946년 6월 미국의 핵무기 비축량은 아홉 개의 뚱뚱이뿐이며 핵기폭기의 부족으로 이 중에서 일곱 개만 사용 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1년 후(전쟁이 끝난 때로부터는 이 년 후) 재고는 열세 개로 늘어났다. 플루토늄의 생산이 가장 큰 장애요소였다. 핸퍼드 생산 파일에서 중성자가 너무 많이 발생되어 시설이 손상됐다. 파일 하나는 더 이상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5월에 가동을 중단시켰으며 다른 하나는 총출력의 80퍼센트 선에서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련과의 갈등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시점에서 분열폭탄의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미국의 핵병기창을 떠받쳐 주는 일이 될 것이다."(440-1)


"1952년 11월 1일, 최초의 실험적인 열핵 장치(수소 폭탄) 마이크(Mike)의 폭발 실험이 행해졌다. 실험 결과는 리틀보이보다 1,000배나 더 강력한 10.4메가톤으로 판명됐다." "무게가 65톤이나 되는 마이크는 전쟁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설계자들은 열핵반응에 관한 자료를 측정하기 위하여 액체 중수와 삼중수소를 사용했다. 운반 가능한 수소 폭탄에는 리튬 이중수소 분말이 열핵반응 물질로 사용될 수 있다. 리튬은 동위원소 리튬6의 형태로 자연 리튬 중에는 7.4퍼센트 정도 함유되어 있으며 쉽게 분리할 수 있다. 분열반응에서 방출된 중성자들은 리튬6으로부터 순간적으로 삼중수소를 만들어 내고 이들은 다시 이중수소와 결합하여 헬륨 원자핵을 만든다. 이 폭탄의 실험은 1954년 봄에 실시됐으며, 15메가톤의 위력을 나타냈다. 이것이 비행기로 운반할 수 있는 최초의 수소 폭탄이었다. 소련 역시 1955년 11월 23일 항공기 투하 수폭 실험을 실시했다."(4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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