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혁명의 기록 - 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
이이화 지음 / 생각정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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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이 행동으로 나선 기록은 1892년 11월 동학교도들이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며 일어난 삼례 집회 때부터 나타난다. 교도들의 탄압을 중지하라는 소장을 낼 때 이를 들고 갈 사람이 없었다.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이때 전봉준이 선뜻 나선 것이다. 그는 전라감사에게 항의의 글을 내기도 하고 창의문倡義文(봉기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직접 써서 돌리기도 했다. 또 동학교단에서 최시형의 허락을 받아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대궐 앞에 엎드려 소문을 올리는 절차)를 올릴 직전에 다시 삼례에서 집회를 열고 전라감사에게 글을 보냈다. 이때도 전봉준이 활동을 전개했다." "여기서는 교조 신원만이 아니라 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다." "전봉준은 이 무렵부터 척양척왜를 분명하게 표방했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인지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이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는 설도 널리 퍼져 있다."(49-50)


전봉군의 주도로 농민군이 거세게 일어나자 "1894년 2월 말경 신임 군수 박원명이 고부로 들어왔다. 박원명은 농민군 지도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위로하면서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약속하고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잔치를 풍성하게 벌였다. 농민군들은 현저히 동요하는 빛을 보이며 해산을 서둘렀다." "해산의 원인은 첫째, 마을 단위의 집강으로 표현되는 토호와 부자들이 지도부에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여러모로 수탈을 당한 분풀이로 민요를 일으켰으나 지경 바깥으로 진출해 역적의 누명을 쓰는 것을 꺼려 적당하게 타협하려 들었다. 전봉준을 잡아 보내려 한 일부 무리도 이들 부류였을 것이다. 둘째, 하부 구조는 영세농과 머슴들이었고 무뢰배와 발피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전봉준은 공초에서 "동학의 무리는 적고 원민怨民(원한을 가진 백성)이 많았다"고 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분을 풀고 곡식을 나누어 받는 것 따위 재미를 보다가 토호와 부자들이 해산하려 하자 덩달아 흩어졌던 것이다."(83-4)


"전봉준은 일찍이 그의 부하들에게 "나는 신령스런 부적이 있어 몸을 보호해준다. 비록 대포 연기가 자욱한 속이나 총알이 비가 오듯 하는 속에서도 다치지 않는다. 너희들 보아라"라고 말하고는 몰래 탄환 수십 개를 소매 속에 넣어두고 친하고 믿을 만한 사람 십여 명에게 비밀히 알려준 뒤 그들로 하여금 에워싸고 총을 쏘게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포였다." "땅에 떨어진 탄환을 본 무리들은 "장군은 신령스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본 부하들은 그 부적을 다투어 붙이고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다. 또 전봉준은 어느 때 밤을 이용해 총잡이와 짜고 미리 손아귀에 총탄을 숨겼다가 총수가 헛방을 놓으면 전봉준이 총알을 재빨리 잡는 시늉을 하고 나서 손을 펴 총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이를 바라보던 농민군들은 "우리 대장만 따라다니면 어떤 양총을 맞아도 죽지 않아"라고 떠들었다. 농민군들은 대장의 신통력을 믿어 더욱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113-4)


박원명의 후임으로 온 이용태는 포악한 인물로, 민요 두목들을 붙잡는다는 핑계로 각종 행악을 부렸다. 이를 참지 못하고 재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점령한 후 세력을 늘려나갔다. 농민군은 황토재에서 승리한 뒤 정읍을 거쳐 고창·무장·영광으로 진출한 후, 마침내 전주성마저 함락했다. 그러나 전주성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전주성으로 장위영군을 이끌고 와 대포를 쏘며 포위망을 조여오던 홍계훈은 "항복 권고를 연달아 성안으로 날려보냈고 농민군은 승전의 빌미를 찾을 수 없었다. 더욱이 전봉준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머리와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5월 7일, (농민군의 시정사항을 조정에 건의하기로 하면서) 화해 약속은 성립되었다. 이는 휴전의 의미와는 다르다. 전봉준과 홍계훈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화약을 성립한 것이 아니다.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조건을 제시하다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판결선언서〉대로 화약이 아니라 합의라고 하는 것이 맞다."(121-2)


"농민군은 왜 '귀화'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화해 약속을 맺었을가? 첫째, (동학) 북접의 호응이 없었던 것이요 둘째, 외국 군대의 개입이 두려웠으며 셋째, 농민군의 내부 동요가 있었고 넷째, 양곡과 생필품의 결핍이 있었던 탓이다. 실제로 북접은 남접의 행동이 과격하다고 비난했으며 북접의 지시를 받는 호남의 동학 세력은 자기들의 고장에서 귀추를 엿보고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원세개가 보낸 청군은 전주에 와서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들은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한편 농민군은 농군이어서 농사철을 맞아 들떠 있었다. 논에 물을 대야 하는데, 볍씨를 뿌려야 하는데, 모내기 날이 다가오는데 따위를 생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농심農心이 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전주성이 완전히 포위되어 시장도 열리지 않고 물품의 조달이 단절되어 당장 밥을 굶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124-5)


"그러면 관군 측은 왜 화전 약속을 급하게 맺으려 했던가? 첫째, 조정에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서울로 들어왔으며 둘째, 일본군이 횡행하는 서울과 인천에는 수비병이 거의 없어 수도 방위가 위태했고 셋째,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의 사기가 거의 땅에 떨어진 상태였으며 넷째, 농민군의 지원군이 언제 배후를 공격해올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홍계훈 개인의 공명심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홍계훈은 적당하게 화전을 맺어 농민군에 전주성을 내준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이 승리의 장수임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홍계훈은 농민군이 전주에서 썰물 빠지듯 물러나자 엉뚱하게도 "비적을 소탕한다"고 외치면서 호기를 부렸다." "(곧이어 홍계훈도 서울로 상경하고) 농민군 지도자들은 각기 지방에 흩어져 집강소 조직을 정비했다. 이제 새 국면은 서울과 인천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새롭게 전개되고 있었다."(125-6)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봉준은 재봉기를 준비하는 장소를 삼례로 삼고 9월부터 직속부대를 이끌고 양반다리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는 집강소 활동 기간에 양곡과 무기를 확보하고 말과 나귀를 모으며 군수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재봉기를 서두르면서 여러 장령들에게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설득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군수전·군수미를 확보하기 위해 부호들에게 일종의 어음이라 할 표지標紙(액수를 쓴 종이)를 돌렸으며 집강소 활동 기간에 농민군에게서 거둔 무기를 삼례로 돌리게 했다. 또 유별나게 호남의 북접 교도들에게는 군량미와 말 먹일 꼴을 버겁게 배당해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북접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북접과 남접의 갈등이 깊어지자 최시형은) 교단의 지도자들을 불러 상의한 끝에 대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정부에서는 남·북접의 교도들을 가리지 않고 한 통속으로 보아 탄압을 가했고 교단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포교들을 풀어놓은 처지였다."(157-9)


# 최시형의 '대동원령'에 따라 북접 지도자들은 벌남기伐南旗(남접을 징벌하라는 기)를 찢어 버리고 연합전선을 구축


"10월 25일 벌어진 능치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왼쪽에서 진격해왔고 관군이 반대편에서 협공을 했다. 농민군은 중간에서 좌우를 향해 맞받아 대응했다. 전투는 한낮까지 계속되었다. 농민군은 협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구덩이 속에서 인해전술로 적을 공략하려 했다. 잎이 떨어진 나목을 차폐물로 의지해 몸을 숨기기가 마땅치 않았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효포의 들판에서 진용과 장비를 수습하고 있을 때 관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농민군은 경천점으로 후퇴했으나 관군이 다시 추격해와서 농민군들은 논산으로 물러났다. 능치의 골짜기와 효포의 길바닥과 하고개의 언덕이 시체로 쌓이고 피로 물들었다." "세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농민군은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다. 농민군은 전투에 지치고 추위를 견디다 못해 연달아 달아났다. 특히 전투 경험이 적은 북접 농민군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난 뒤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1차 공주 공방전의 대체적인 상황이다."(182-3)


"11월 9일 정오가 되기 직전, 모리오 대위는 기다리던 작전 개시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일본군은 봉우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포를 연달아 쏘아댔다. 농민군도 대응해 본격적으로 전투를 개시했다. 한꺼번에 밀려 올라가다가 대포를 쏘면 물러나고 잠시 대포 쏘기를 멈추면 밀려왔다. 제1대가 무너지면 제2대, 제3대가 꼬리를 이었다. 이날 오후까지 전진과 후퇴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농민군의 시체가 언덕과 고개 언저리에 쌓였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눈을 흥건하게 적셨다." "두 차례 전투를 벌이고 나서 점검해보니 1만여 명이던 군사가 3천여 명만 남았고 다시 두 차례 접전을 한 뒤 점검해보니 500여 명만이 남았다." "이런 형편에 놓여 있었으니 전봉준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우금재의 마지막 보루를 버리고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달아났다." "이제 공주를 포위했던 농민군은 사라졌다. 내리 4일 동안 전개된 이 전투를 2차 공주 전투라 한다."(188-9)


"전봉준이 지휘하는 주력 농민군은 원평과 태인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해산했다. 전봉준은 자신이 어릴 때 자라고 돌아다닌 원평과 태안을 최후의 격전지로 삼았다. 그런 연고로 하여 수백 명 정도 남은 농민군을 다시 수천 명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농민군으로는 한풀 꺾인 사기를 올릴 수 없었으며 일본군의 성능 좋은 신무기를 극복할 수도 없었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죄인 심문 기록)에서 이때의 정황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봉준은 금구 등지에서 다시 군사를 모았는데 그 수효는 많았으나 기율이 없어서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아주 어렵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일본군이 계속 추격해와서 그들이 맞서 싸울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어서 두 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태인 전투를 치른 뒤 대장으로서 정식으로 농민군의 해산을 침통한 심정으로 명령했다."(204)


"전봉준의 죄목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규정된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이었다. 꽤나 긴 죄명이었다. 이를 풀이해보면, 군복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대항해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죄다. 그리하여 전봉준과 같은 사형언도를 받은 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한 등 네 명은 판결이 난 날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갑오개혁 때 개정된 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종전에는 역적죄에 해당하는 사형수들은 모조리 참형을 가해 목을 잘라 관아의 문 앞에 걸어두거나 여러 사람들이 보도록 조리를 돌렸다." "개화정부는 형법을 개정해 "모든 재판과 소송은 2심으로 한다"는 조항을 두고 4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이들 다섯 명에게는 그 시행을 불과 2일 앞두고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니까 사형 선고와 사형 집행을 전격적으로 단행해 2심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속전속결로 들뜬 민심을 가라앉히려 했던 것이다."(235-6)


"전봉준이 역적으로 처형을 당하고 난 뒤 고창의 당촌을 비롯해 주변의 전씨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관군들은 전씨 마을을 덮쳐 재산을 약탈하거나 불태웠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전씨 집성촌을 폐허가 되었으며 전씨들을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실의 언덕배기에 '녹두장군'의 묘소라 전해지는 초라한 무덤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끔 제물을 차려놓고 녹두장군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1990년대에 일 벌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이 무덤을 발굴해보니 유물이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가묘假墓(빈 무덤)를 조성할 때는 고인의 머리카락이나 쓰던 물건 따위 유물을 껴묻는 경우가 있으나 전봉준의 가묘에는 껴묻은 물건조차 나오지 않았다. 전봉준의 묘소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가묘를 만들어서 추모제를 지냈던 것이다. 「파랑새」를 목 놓아 부르던 민중이 전봉준이 살던 마을의 언덕에 가묘를 조성해 모셨으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2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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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박맹수 외 지음, 한혜인 옮김 / 모시는사람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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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동학사상의 특징

1. 시천주侍天主 : 누구나 자신 안에 ‘천주’(만물의 생명의 근원)를 모실 수 있다는 만민평등 사상

2. 보국안민輔國安民 : “국가의 악정을 고쳐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민본주의적 사상

3. 후천개벽後天開闢 : 현세가 종말을 맞이하고 가까운 미래에 이상적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

4. 유무상자有無相資 :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공동체 정신


# 동학조직의 구성

1. 대도소大都所 : 2대 교주 최시형이 1893년 충청도 보은에 설치한 총본부

2. 포包(대접주) : 몇 개의 접을 묶어 만들어진 중간 조직

3. 접接(접주) : 35-70호 정도의 규모로 지역에 만들어진 기초 조직


#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1. 최초의 무장봉기 : 1894년 2월 15일 전봉준 등이 중심이 되어 고부의 악덕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항의하면서 일어난 봉기

2. 혁명을 목표로 한 봉기: 전봉준과 손화중·김개남 등의 대접주들이 뜻을 모아 전면 봉기하여 황토재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5월 10일)하고 전주마저 점령(5월 31일). 동학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청나라와 일본군이 조선 출병.

3. 전주화약(全州和約) :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농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도소(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진행하기로 합의

4. 항일투쟁 : 일본군의 경복궁점령 소식이 전해지면서 10월 이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2차 봉기. 두 차례의 우금티 전투(11월 10-12일, 12월 4-7일)에서 일본군에게 대패

5. 우금티전투 이후 : 일본군의 포위섬멸작전


후비 제19대대 3개 중대 중 일본군 서로 부대인 제2중대는 남·북접 합동 농민군의 북상을 논산평야 북부에 있는 금강 강변의 요지인 공주성에 들어가서 기다렸습니다. 11월 20일에 농민군이 북상해서 동학농민전쟁 최대의 격전이었던 공주전투가 두 차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 후비 부대는 스나이더 소총이라는 라이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이플총은 탄구를 회전시키도록 총 내부에 나선형 홈이 새겨진 총으로, 당시의 소총과는 격이 다른 사정거리와 명중률, 살상력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보병전에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 최대의 격전이 되었던 이 공주전투가 전장의 최후로 서술되어 있는 우금티전투입니다. (···)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100명 단위로 병력이 훨씬 적은 일본군에게 개개 전투에서는 압도적으로 격파당하였습니다. 죽창과 화승총을 가진 농민군과 라이플총을 가진 훈련된 근대 보병대와의 싸움은 농민군 200명을 일본군 1명이 대적할 정도로 엄청난 전력 차가 있었던 것입니다.(94-6)


# 후비병 : 현역과 예비역 다음으로 병역에 임한 27-32세 가량의 최고령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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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와 전쟁의 역사 - 전쟁의 기술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나 대우휴먼사이언스 24
박상섭 지음 / 아카넷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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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고대의 전쟁 : 금속제 무기의 도입과 정치적 결과


"역사상 전차가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던 첫 번째의 예로는 기원전 1700년경 힉소스인들에 의한 이집트 침공이 언급된다. 힉소스인들은 약 200년간 이집트를 지배했는데 이 기간 동안 이집트에 전차의 제작술과 사용법을 전파했고 힉소스인들에게서 해방된 이집트는 자신의 군대에 전차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살상용 무기로 주로 합성궁과 도끼를 사용한) 힉소스인들은 투구와 전신용 갑옷을 착용했는데 이러한 무기들을 바탕으로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에 비해 결정적인 군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나일강 상류 지역만을 지배하던 이집트 왕국은 기원전 1520년을 전후하여 힉소스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원래의 이집트 지역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했다. 이때 이집트는 전차 부대를 조직하여 사용했고 이와 함께 보병 부대도 조직했다. 이집트 병사들의 주된 무기는 도끼, 활, 곤봉, 창이었다. 특히 전차병과 궁수를 결합한 전법은 이집트에서 최초로 고안된 전투 방식이었다."(58-9)


"기원전 1500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반도(터키)에서 국가를 수립하고 있던 히타이트인들은 반복적인 가열과 담금질을 통해 단단한 철을 제작하는 제련법을 개발했다." "이에 따라 반드시 큰 나라뿐 아니라 소국들도 대규모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는 전쟁 발발 빈도의 극적 증가였다. 이런 의미에서 철기시대의 도래는 역사 속에서 관찰되는 첫 번째의 군사혁명을 가능케 했다고 평가된다." "이 점을 기반으로 메소포타미아 내 지역 국가들은 자신의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병사 징집제도, 즉 상설 징집군을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징집군 제도를 바탕으로 출현한 다수의 병사들을 훈련, 지휘하고 또한 이들의 충성을 확보할 전문 집단이 새로운 군사 조직의 핵심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이로써 군사 업무는 항시적인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 점은 철기시대에 의해 나타난 군사혁명의 또 다른 핵심적 양상의 하나로 지적된다."(64-6)


"아시리아가 한 번의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야전군의 병력 규모는 약 5만 정도였던 것으로 전문 학자들은 말한다. 이 군대는 보병군, 전차 부대 및 기마병으로 구성되었고 병사들 전부는 철제 무기로 무장했다. 병사 전부가 철제 무기로 무장했던 것도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보병이 최대 다수를 차지했지만 아시리아 군대의 중추부는 전차 부대였다. 기본 전법은 힉소스인들과의 전투에서 이집트군이 채택한 것과 거의 유사하지만 전차 제조와 관련하여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예컨대 바퀴의 테두리는 철제로 바뀌었고 처음으로 바큇살spoke이 장착되어 바퀴의 마모도 줄어들고 회전 시의 안정성도 확보되었다. 이집트의 전차는 마부와 병사 1인 등 모두 2인으로 구성되었으나 아시리아에서는 후방 방어를 담당하는 또 다른 전사가 추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7세기에 이르면 후방 방어 병사를 없애는 대신 마부와 궁수를 보호해주는 2인의 방패잡이 병사가 탑승하는 4인승으로 바뀌었다."(68-70)


"그리스식 밀집대형 전투는 인간의 본능인 공포심의 극복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 공포심의 극복은 고도의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강력한 기율과 자신이 지켜야 할 공동체 즉 폴리스에 대한 애향심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밀집대형은 단순히 전투대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방식이면서 도덕 원리의 근간이었다. 이러한 일은 당시 그리스 시민들 전부가 전사로서의 역할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사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밀집 방진대형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식 전법은 전투 참가자의 정신적·신체적 자원의 소진을 전제로 전투를 벌인다는 점에서 대단히 '우둔한' 전법이고 또한 그럼에도 어떤 결정적 결론을 얻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한계를 갖는다. 이 한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거의 30년간 지속되면서도 어떤 분명한 결론이 나지 못하면서 치러졌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79-80)


"로마식 진형은 그리스식 팔랑크스와 마찬가지로 중무장 보병을 기반으로 한다. 팔랑크스 방식이 기본적으로 방어를 염두에 두고 고안된 것인 데 비해 로마식은 공격과 수비를 유연하게 전환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팔랑크스 방식에서의 중심 무기는 창이었는데 로마 방식에서는 필룸pilum이라고 하는 창과 칼이 중심이었다. 원래 고대의 전쟁에서 칼은 창과 활을 보조하는 역할밖에 담당하지 않았으나 로마에 와서는 창과 함께 중심 공격 무기가 되었다. 밀집대형인 팔랑크스에서는 부족한 공간 때문에 칼을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로마 군단의 전법에서는 칼의 효과적 사용을 위해서 1인당 사방 6자의 공간을 필요로 했고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60~80인의 중대maniple 조직을 기본 전투 단위로 하는 새로운 바둑판식 진형이 고안되었다. (갈리아 부족이 로마를 침공한) 기원전 390년의 약탈 사태 이후 군사 개혁의 일환으로 제정된 이 새로운 전법은 로마의 공격적인 제국 건설 정책의 이루는 것이었다."(92-3)


2장 서양 중세와 군사 기술의 발전


"샤를마뉴, 즉 카를 대제(742~814)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과의 접경 지역을 정복하여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동쪽으로는 독일 전 지역과 발칸 지역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로마제국이 멸망한 지 약 3세기 만에 처음으로 서유럽 내의 단일 제국이 출현했다. 로마 교황청은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마뉴의 신성로마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봉건제에 입각하여 영주들의 군역軍役을 활용했다. 807년에 반포한 법령을 통해 제국 영역 안에서 봉토를 수여받은 모든 귀족들은 일정한 군역이 의무로 부과되었다. 카를 대제의 군대는 초기에는 보병군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지만 지속적인 정복 전쟁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로 기마병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갔다. 804년에서 811년 사이에 반포된 법령을 통해 자신의 모든 봉신들이 말을 탈 것을 의무화하고 동시에 관련된 장비들, 즉 방패·랜스·검·단검·활·전통 및 화살 보유에 관한 규정을 발표했다."(111)


"샤를마뉴가 (중)기마병 중심의 군대를 발전시켰지만 그렇다고 경기마병 또는 보병군이 경시되었던 것은 아니다. 중기마병의 효과적 전력 생산을 위해서는 경기병과 보병과의 긴밀한 작전상 협조와 상호 조정이 필수적인 일이었다. 중기마병의 역할은 전투 개시와 함께 적군의 진형陣形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일이었다. 일단 진형이 붕괴되면 그 뒤를 이어 경기병과 보병의 임무가 이어진다. 그러나 중세 후기로 가면서 중기마병의 지배적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전사·귀족의 이상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고착되었다. 이 점은 중세 사회에서 기마 귀족의 우월한 사회적 지위에 의해 더욱 보강되었다. 중세 기사 중심의 군사 조직 구조는 모체 사회구조의 축소판이었다. 보병군으로 복무한 사람들은 2급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감수해야만 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적어도 300년 넘게 지속되었다."(113)


"19세기 증기선이 출현하기 이전의 선박 동력원은 기본적으로 둘이었다. 하나는 노櫓를 젓는 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범선에서 이용되는 풍력이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범선의 경우 노동력이 최소한으로 들었기 때문에 선박 재료와 제조 기술이 확보만 되면 얼마든지 크게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람의 강약과 방향에 따라 운행에 제한을 받는, 즉 기동성이 가변적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또한 중세 말에 와선渦旋 방향타가 장착·사용될 때까지 방향 조정은 선미船尾 좌우 양측에 설치한 노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확한 방향 설정이 어려웠던 한계도 존재했다. 따라서 속도와 기민한 방향 조정에 승패를 걸었던 해상 전투에서는 범선보다는 노로 운행하던 갤리선이 기술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갤리선은 상당히 오래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투선이 아닌 경우에는 보다 경제적인 범선이 많이 이용되었다."(125-6)


3장 화기혁명과 근대의 시작


"전쟁 관련 테크놀로지의 발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또는 전기轉機를 들라고 할 때 화기 또는 화약 무기의 등장을 제치고 먼저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화기는 전쟁 자체의 성격을 바꾸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쟁의 주체인 국가 또는 정치 공동체의 역사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1500년 경부터 뚜렷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근대국가의 등장과 정착은 화약과 화기의 등장을 배경으로 한 전쟁 수행 양식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약이 처음 발견되었던 중국의 경우도 통일 제국 질서의 형성과 붕괴와 화약·화기 제작은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중국에서 화약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800년대의 일로 이때는 당나라가 붕괴되고 극심한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또한 화기가 처음 제작된 1100년대는 송나라의 멸망에서 원나라의 성립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혼란의 시기와 일치한다."(137-9)


"과거의 무기에 비해 살상력이 높은 화기의 보급으로 예상치 못한 하나의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즉 유혈적인 교전의 빈도가 줄어들고 전쟁의 진행 속도도 전반적으로 느려지게 되었다." "잘 훈련된 병사는 쉽게 소모되어서는 안 되는 자원이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투를 피하려고 했다. 대신 야전 참호나 성채 뒤에 숨어 대기하면서 보급품이 동나고 급료가 모자라 적군이 자동 소멸하기를 기다리는 경향이 당시 모든 전쟁 당사국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병사들은 전투 수단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새로이 확보된 영토나 점령한 지역 내의 민간인 인구들을 통제하고 또한 외부 공격자를 퇴치하는 등 유리한 위치를 지키는 수단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 따라서 성채가 대규모 군대의 본거지로 사용되는 양상을 미루어보면 "대포의 출현으로 중세의 성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158-9)


"성채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공격군의 규모도 대단히 커질 수밖에 없었고 공성 기간의 장기화에 따른 병참 및 재정 지원의 규모도 그에 비례하여 커졌다." "이제는 군대를 조직 및 보유할 뿐 아니라 그것을 유지·운영하는 데 필요한 재정 능력이나 관료제적 조직 능력을 가진 새로운 유형의 국가(근대국가)만이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제국의 지위를 추구하던 스페인-합스부르크 제국은 그러한 시도에 걸맞은 재정 능력 및 군사력의 뒷받침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제국의 지위를 갖추는 데 실패했다. 상위의 제국도 아니고 하위의 영주국도 아닌 근대국가만이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조직이라는 점은 이와 같은 장기간의 투쟁 끝에, 구체적으로 백년전쟁 이후 만들어진 모든 갈등을 압축해서 전개되었던 30년전쟁의 종식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사실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점은 주권sovereignty의 개념을 통해 요약되었다."(160-2)


"육상 전투와 관련된 주요 기술적 변화는 화기의 보급에서 비롯되었지만 해상 전투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선박 자체 및 그와 관련된 항해 기술에서 발견된다. 1300년을 전후하여 북서 유럽에서 주로 사용된 코그선은 지중해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때 갤리선을 바탕으로 하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독점적 해운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및 독일인들에 의해 침투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쪽의 선박과 남쪽의 선박은 서로 기술적으로 섞이게 되었는데 사각돛과 삼각돛이 서로 혼합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변화이다. 그 결과 모든 선박은 높은 기동성과 추진력을 고르게 갖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 3개의 돛을 장치한 전장범선full rigged sail이 출현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카락carrack선과 카라벨caravel선이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처음 항해했을 때 사용한 배는 한 척의 카락선(산타 마리아 호)과 두 척의 카라벨선이었다."(171-3)


"1600년 전후에 이르는 시기까지 유럽의 주요 해운국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및 네덜란드가 있었다. 이들은 무역 전쟁국이면서 동시에 군사적 경쟁국, 즉 교전국이었다. 그런데 이 교전의 당사자는 국가 즉 해군이 아니었다. 원래 해군은 국가조직의 일부로서 출발하지 않았다. 이 점은 같은 시기 독일에서의 육상 전력이 개인적 군사경영인military entrepreuner에 의해 조직·보유되고 또한 사용되었던 점과 유사한 현상이다." "즉 해군력의 상당 부분은 국가가 아닌 개인 선박 소유주/지휘관들로부터 공급되었다. 이러한 개인 선박 소유주/지휘관들에게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군사 활동을 인정하는 (적선)나포 면허장letter of marque이 발급되었는데 이 개인 소유의 전투 활동을 사략私掠, privateering 그리고 그 선박은 사략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활동했던 유명한 사략선 지휘관들은 1588년 스페인과의 해전 때 영국 해군 지휘관으로 변신하여 결국은 영국 해군의 창립자가 되었다."(175)


4장 절대주의 체제 : 무력 운영의 관료제화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로 주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근대 국가 외에 다른 모든 종류의 조직이나 개인의 폭력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주권국가 지위의 확보나 인정은 국가 간의 상호 합의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전쟁은 주권국가들 사이에만 가능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그 자체가 불법화되어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예측 가능한 것이 되었다." "30년전쟁이란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참혹상에 대한 부정적 기억을 바탕으로 유럽은 당분간 평화 시기를 누리게 되었다. 당장 눈앞에 둔 전쟁은 없었으나 새로 마련된 평화 질서가 기본적으로 어느 때라도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놓이게 됨으로써 이에 대한 대비는 각국의 필수 작업이 되었다. 각국은 내부적 제도의 정비와 경제·재정 능력의 확충 작업에 전념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학에서는 국가 건설state-making 작업 또는 중상주의mercantilism 정책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187)


"(대규모 병력을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고도의 기율을 바탕으로 하는 전투기계로 탈바꿈한 보병 병사들을 기반으로 싸우는 전투 방식은 근대의 산물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산물이었음을 서양 학자들은 특히 강조한다." "이 고도의 기율을 바탕으로 하는 체계적 훈련방식은 원래는 네덜란드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ts van Nassau에 의해 고안된 것이었다. 스페인에 대한 반란을 주도한 오라녜Orange 가문 출신으로 네덜란드 육군 전체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그는 당시 계속 개량되고 있던 화기로 무장한 상비군을 바탕으로 효율적 전력의 생산을 위한 각종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그 혁신성의 핵심은 군대를 공업 생산단위 조직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에 있다." "반복 훈련을 통해 개개인의 병사는 평균적 숙련도를 지니게 되는데 여기에 무기와 병력 규모를 표준화하면 개별 전투 단위들이 만들어내는 전투 효과를 미리 측정할 수 있었다."(193-4)


"기존의 통신장비, 도로망이나 병참조직으로는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작은 규모의 여러 단위 부대로 나누어 다른 경로를 통해 동시에 진격하는 부대의 구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단위 부대들은 자기 충족적인 항구적 전략 단위로 구상되었다. 자기 충족적이라는 말은 단일 지휘관에 의해 통솔되는 다양한 전문 부대, 즉 보병·기병·포병과 같은 전투 부대 외에 공병·의무병·통신병 같은 지원 부대들을 함께 꾸린다는 점을 지칭한다. 이러한 부대는 독자적인 전투 조직으로서 전체적인 전략 구상과 관련해서만 상급 지휘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친숙한 사단division의 출현이다." "뒤에 규모가 더 커지면서 군단corps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이 단위 부대들의 작전을 조정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총참모부general staff도 생겨나게 된다. 사단을 기초로 하는 작전을 처음 시도한 것은 7년전쟁 중인 1760년을 전후하여 독일 내에 진주한 프랑스 군대였다."(201-2)


"대포가 해상 전투의 중심 무기로 등장하면서 전투 방식도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활이나 소수의 대포 등을 사격한 후 전세가 한쪽으로 기울면 적선에 승선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기본 전법이었다. 그러나 적군의 포화를 뚫고 적선에 승선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이제는 대포로 적선을 무력화하는 방식을 우선으로 택하게 되었다. 새로운 포전砲戰 중심의 전투에서는 단위 시간 안에 될수록 많은 탄환을 적함에 명중시켜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을 살상하고 돛대나 다른 장비에 손상을 주어 적함의 기동력을 뺏는 편이 승리하게 된다. 따라서 기본 전투 방식은 많은 수의 대포를 동시에 쏘는 것인데 이를 위해 대포를 뱃전舷側에 설치했다. 전투 시에는 참가하는 함정 모두가 1열로 도열하여 나란히 배치된 대포를 적함의 뱃전을 향하도록 했다." "또한 적함의 선체에 더 큰 손상을 주기 위해 직경이 큰 탄환을 사용했다. 이에 따라 대포의 크기도 점차로 커지게 되었다."(218-9)


"최강의 해군 건설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 조달과 관련하여 첫 번째로 언급되어야 할 사항으로는 영국 왕위계승 전쟁의 와중(1694)에 창립된 영국은행을 통한 '금융혁명'이었다. 전비에 사용될 자금을 자본시장을 상대로 한 국채 발행을 통해 마련하는 이 독특한 재원 조달 방식은 선진적 금융시장과 성숙한 상업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건강한 조세체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 영국의 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인으로는 왕성한 무역 활동과 이것을 가능케 하는 식민지의 존재였다." "7년전쟁 때 소요된 영국의 군사 재정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때의 세 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때의 두 배가 되었다. 이 비용을 모두 국내 조세로 충당할 수 없게 되면서 영국은 식민지에 대한 고율의 조세 부과를 통해 새로운 재원을 찾았다. 이 새로운 재원으로 떠오른 지역이 미국이었다.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과정에서 미국 식민지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과 저항이 야기되었다."(227-8)


5장 산업혁명과 산업화


"철도가 군사용으로 잘 활용된 사례로 첫손에 꼽히는 일은 1846년 러시아의 병사 이동 작업이다. 이때 러시아는 체코의 우헤르스케 흐라디슈테에서 약 300킬로미터 떨어진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1만 4500명의 병력과 관련 장비를 철도를 이용하여 이틀에 걸쳐 이동했다. 이로써 철도의 군사적 잠재력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자체로는 군사 무기가 아닌 철도 수송은 당시까지 이루어졌던 무기 기술의 발전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전쟁 수행에 미쳤다. 이것은 철도가 전략 수립에서 고려해야 할 세 가지 핵심 요소인 힘, 시간 및 공간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동 및 배치 가능 병력의 규모가 커졌다는 점에서 힘이 증가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더 큰 규모의 병력을 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은 군사력이 관장하게 될 지리적 공간의 엄청난 확장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철도의 또 다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251-3)


"군사적 관리의 대상에는 병력의 충원과 훈련, 철도 시스템의 정비, 필요한 테크놀로지의 개발 그리고 나아가서는 동맹체제의 정비 등 한 나라의 군사적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중요한 요소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 관리는 전쟁 발발 시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견되는 전쟁을 염두에 두면서 미리 준비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쟁계획war planning'이라는 개념이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했다." "본격적 산업화 단계에 와서 전쟁 계획 노력은 대외 정책, 산업 정책, 인구 정책 등 한 국가의 국제정치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분야의 정책 조정이라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시와 평시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은 단순히 군인만의 업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일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전쟁이 사회의 중요한 업무로 올라섬에 따라 사회 조직 전반이 군사적 목적을 바탕으로 재편되는 이른바 군사지상주의가militarism가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257-8)


# 대전략grand strategy : 과거의 전략이 ‘전선의 결정적 지점에 최대의 힘을 집중하는 방안’이라는 의미였다면, 여기에 ‘전선에서 후방에 이르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배분하는 문제’가 추가된 군사 전략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군사 분야에서의 혁명적 변화는 해군과 관련해서 볼 때 육상전에 비해 한층 더 심대했다. 해군의 경우 이동 수단인 선박은 그 존립의 물리적 기반이라는 점에서 육군에 비해 더욱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육군의 경우 이동 수단이 없이도 싸움이 가능하지만 해군의 경우 선박이라는 이동 수단 없이는 해상 전투 또는 해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해군의 존립 기반인 선박 관련 기술 전부를 바꾸어 놓았다." "산업혁명으로 야기된 해군 기술의 변화는 세 개의 기본적·기술적 사항, 즉 선박의 재료, 선박의 동력원 그리고 무기라는 측면 모두에서 이루어졌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재료 면에서는 목선에서 철선으로, 동력원 면에서는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그리고 무기 면에서는 작열탄의 채택이라는 점에서 그 변화가 이루어졌다."(271-2)


# 작열탄 : 폭약을 내장한 탄환


"돛의 제거는 함포의 발전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두꺼운 적함의 철갑을 관통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함포의 크기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한 개의 무게가 60톤 또는 그 이상까지 나갔다. 이와 함께 함포의 수는 줄었고 동시에 과거와 같이 현측에 설치하지 않고 선회포자barbette로, 다시 뒤에는 회전포탑turret으로 바뀌었다. 함포의 위치가 바뀌게 된 것은 현측에 설치된 함포의 경우 한 방향으로밖에 사격할 수 없어 목표가 바뀌면 선박 자체의 방향을 틀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동력원으로서 바람이 포기됨으로써 전술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점이 생겼지만 전략적인 면에서는 무한정한 장거리 항해가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기동성 면에서 많은 손해가 따랐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별로 중요시되지 않던 (연료 재공급을 위한) 해외 해군 보급기지가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1870년대 이후 더욱 활발해진 해외 식민지 확장 노력은 이 해군 기지의 확보와도 무관하지 않았다."(277-8)


미국 해군대학의 해군 전술 교관이던 머핸은 1890년에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저술한다. "그의 논지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해군력을 바탕으로 하는 제해권의 확립 없이는 세계 지위로의 부상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해양력sea-power, 상업(무역) 및 식민지는 국가의 번영에서 불가결한 세 가지 기본 요소들인데 이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었다. 해양력은 단순히 해양을 지배하는 군사력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 교역과 운송도 포함한다." "머핸의 논지는 마치 예언가의 주장처럼 많은 신봉자들을 낳았고 공개적인 제국주의 정책의 채택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하여 열국의 해군 건설 정책을 고무했다." "독일의 해외 확장에 소극적이었던 비스마르크와 달리 해외 정책에 상당한 열의를 가졌던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머핸의 저술은 그의 의지를 정당화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288-9)


# 영국 : 전통적 외교정책인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 원칙을 포기하고 기술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드레드노트함을 건조


6장 양차 대전 : 과학 기반 군사 기술의 급속한 발전


"1차 대전을 전후하여 출현한 새로운 군사 기술로 볼 때 그 이전과는 다른 몇 가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막 진행 중인 전쟁의 긴박감 속에서 기술 개발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할 사항은 기술 개발에 전쟁의 주체인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입은 당시까지 축적된 과학의 기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지거나 개발된 테크놀로지는 과거와 같이 단순한 시행착오나 우연한 발견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 테크놀로지의 과학적 원리의 탐구와 적용을 통해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일례로 전쟁의 3대 요소인 힘, 시간, 공간의 의미를 모두 뒤바꾼 철도가 철로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 것과 달리 "내연기관 기반의 자동차는 어느 정도의 조건만 주어진다면 도로를 벗어나서도 운행할 수 있었다." 내연기관을 기반으로 한 이상적인 전력화는 탱크로 실현되었다.(293-4)


"항공기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전쟁에서의 승패는 기본적으로 전투장에서의 대결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투 현장을 넘어서 후방 지역을 공격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정치혁명 이후 전선에서의 대결을 떠받치는 힘은 사회 전체에서 나오게 되었다. 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모든 산업 능력과 경제 능력이 전쟁 노력에 투여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항공기의 출현은 그러한 능력을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화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전략폭격' 사상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전쟁에서 전방과 후방의 구분은 더는 큰 의미가 없어지고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도 사라지게 되었다." "전략폭격의 등장으로 전/후방 및 전투원/비전투원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점은 이 전략폭격의 개념을 더욱 확대시킨 현대 핵전략의 기본 전제로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 이론을 가능케 하는 기초적 사실이 되면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310-1)


"2차 대전 후 세계 정치의 구조를 과거의 정치와 근본적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양식을 바꾼 첨단 무기를 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컴퓨터 기술과 핵폭탄이 될 것이다. 컴퓨터의 등장만 해도 적군의 암호 해독이라는 필요성을 군대가 먼저 갖게 되고 그 해결책을 위해 수학자들의 지원이 요청되었지만 핵폭탄의 경우는 그것의 가능성부터 학자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핵폭탄의 개발은 군대는 물론이고 대학이나 연구소 외의 다른 어떤 사회 조직과도 무관한 순수 자연과학, 특히 엘리트급 핵물리학자들의 초국가적 연계망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시만 해도 핵의 문제는 정치나 군사와는 전혀 무관한 순전히 이론적 문제였다. 아무도 군사와의 연관성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를 완전히 초월하여 자신들만의 독자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던 물리학자들의 세계 속에서 핵물리학 학문 활동이 지속될 수 있었다."(325-6)


7장 냉전 체제와 첨단 기술 경쟁


"과거와 비교하여 핵 시대에 와서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핵무기의 효능을 무효화하는 대항 무기가 없다는 점이다. 즉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던 공격 무기와 방어 무기의 지속적 개발의 사이클이 중단된 것이다. 핵무기에 대한 결정적 방어 수단으로 제출된 것은 다른 핵무기이다. 핵무기가 다른 핵무기에 대한 유일한 방어 수단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핵무기가 갖는 엄청난 파괴력과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서의 핵 보복이 만들어내는 더 엄청난 파괴적 결과에 대한 이론적 상정에 근거한다. 따라서 핵무기의 가장 중요한 효능은 핵 공격 의지를 사전에 약화시킴으로써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즉 억지deterence에 있다. 실제 핵무기에 대한 효과적 방어 수단은 일단 먼저 이루어지는 핵 공격에 살아남은 후 여전히 남아 있는 핵무기를 바탕으로 보복할 수 있는 능력 외에는 없다." "이것이 2차 대전 후 미소 간의 핵전략의 근간으로 자리 잡은 '상호확증파괴'라는 군사적 교리의 핵심적 내용이다."(353-4)


"유도무기의 급속한 개발은 1960년대 베트남전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2차 대전 이후로 지대공 미사일surface-to-air missile, SAM은 특히 소련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했고 그 실험은 주로 베트남전에서 미군 폭격기를 상대로 이루어졌다." 베트남전에서 미군 폭격의 군사적 효과가 미미했던 "가장 큰 이유는 부정확한 폭격과 베트남의 방공망 때문이었다. 베트남전 전체를 통해 미군 항공기가 1500대 이상 격추되었는데 그 95퍼센트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공포의 위험을 피하면서 시도된 항공기 폭격의 명중률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까지 미군 폭격기의 명중률은 5~6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페이브웨이paveway라는 이름이 붙여진 레이저 유도 폭탄이 개발되어 실전에 투입되었다. 소위 스마트 폭탄이라는 일반적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이 레이저 유도 폭탄 덕분에 1972~1973년의 폭격 명중률은 48퍼센트로 급속히 개선되었다."(359-60)


"전자 무기의 군사적 이용은 2차 대전 이전에도 시도되었지만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이것은 전자부품의 소형화 덕분에 가능하게 되었다. 진공관 대신에 트랜지스터가 사용되었고 수많은 부품들은 납땜이 아니라 실리콘 칩에 인쇄된 형태로 제조되기에 이르렀다." "현대 전쟁의 기본 양상이 되고 있는 전자전의 경우도 다른 모든 종류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안과 무기가 계속적으로 연구됨으로써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낡은 것이 된다. 특히 새로운 무기에 장착되는 전자기기는 다른 무기들에 비해 보다 쉽게 탐지되거나 파괴되기 쉬운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 무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무기가 바로 "전자기파동을 이용한, EMP탄 또는 전자폭탄e-bomb이다. 수소폭탄의 실험 때 모든 전자기기의 작동이 중단 또는 교란되었던 현상을 바탕으로 연구·고안된 이 신형 무기의 위력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전자화된 현대 무기에 대한 중요한 위협이다."(363-5)


"현대의 세계적 군사 질서와 주도국의 군사 전략 틀 자체를 고려할 때 육상전과 구분되고 그로부터 독자성을 갖는 해상 전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실제 2차 대전 종식 후 과거와 같은 해전은,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었던 포클랜드 전쟁 같은 예외적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없었다. 핵폭탄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대륙 너머로 발사할 수 있게 된 현대적 상황에서 공격자와 피공격자 사이에 놓여 있는 바다와 산악 같은 지리적 장애물은 더 이상 장애물도 아니고 독자적인 군사 활동의 장으로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군력은 발사되는 화력의 포대platform가 선박이라는 점에서 그 특수성이 인정되는 군사력을 의미할 뿐이다. 그 점을 제외한다면 항공기나 대륙간탄도탄 같은 지상 발사 무기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과거 대형 전함들이 점차 퇴조하게 되고 대신 항공기를 작전 대상 지역 근처에 운반하는 항공모함이 해군의 주력이 되었다."(380-1)


"전략핵무기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의 주력함은 항공모함에서 핵 추진 잠수함 쪽으로 옮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은 잠수함발진탄도미사일SLBM 발사가 가능한 최초의 핵 추진 잠수함 조지 워싱턴 호를 1959년 12월에 취역시켰고 1960년 7월에는 이 잠수함에 적재된 최초의 SLBM 폴라리스의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이 핵 추진 탄도탄 발사용 잠수함은 미국의 2차 핵 가격력의 중심을 이루는 초기의 핵잠수함이었다." "무기를 볼 때 과거의 잠수함들은 어뢰 발사가 주된 무기였는 데 비해 핵잠수함들은 한 척당 20기가 넘는 (다탄두 발사 탄도탄을 갖춘) 트라이덴트 SLBM을 장착하고 있다. 이 트라이덴트 탄도탄은 일부가 유도guided 미사일로 교체되었고 일부 함정에는 각기 7발의 토마호크를 장착한 22문의 발사장치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첨단 무기로 볼 때 잠수함은 단순히 해군의 무기가 아니라 육·해·공 구분의 의미를 무색케 하는 초강대국의 중심적 전략무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383-4)


결론 군사 기술의 고도화와 새로운 전쟁 양상의 출현


"실제 전쟁의 맥락 속에서 어떤 특정 기술의 내재적 우월성은 큰 의미가 없다. 크레벨드 교수가 강조하듯이 중요한 것은 주어진 무기나 기술 자체의 우수성보다는 이러한 장비나 무기가 적군이 사용하는 장비와 무기의 관계 속에서 갖는 '적합도fit'이다. 베트남전을 다시 예로 든다면 미군은 상대편의 장비와 무기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가용한 모든 첨단 무기를 동원했던 반면에 북부 베트남군은 이러한 미군에 정면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미군의 첨단 무기의 효과성을 완전히 무색케 만들었다." "게릴라전은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나 그에 의해 지원을 받는 정규 정부군을 상대로 싸울 때 재래전의 방식으로는 전혀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약자가 승리를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전쟁 수행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이렇게 군사적 패배만을 피하면 되는 측과 반드시 승리를 얻어야 하는 측 사이의 전쟁은 일찍이 아롱 교수에 의해 '비대칭전쟁'이라는 이름을 얻은 바 있다."(395-7)


"재래식 전쟁의 기본 틀을 벗어난 게릴라전의 핵심적 특성은 기술적으로 우월한 적군을 상대로 우호적인 민간인 집단을 보호막으로 하면서 고도의 기동성을 바탕으로 기습 공격 위주의 임시적 전투 방식으로 맞선다는 점에 있다. 이 기습 공격이 초기 단계에서 취하는 가장 빈번한 공격 형태에는 테러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상위 전략 개념의 하위 전술로 여겨졌던 게릴라 전법이 점차로 독자적인 전략 원리로 독립되었듯이 게릴라 전술의 초기 단계의 부분으로 고안되었던 테러가 다시 게릴라 전략의 부분적·전술적 수단의 지위를 넘어서서 독립적 전략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20세기 후반부터 빈번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테러리즘의 주체는 국가 또는 그것에 비견될 만한 조직에 의한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 범죄 집단 같은 활동 양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 비대칭성을 바탕으로 테러리스트 조직은 훨씬 적은 비용으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399-401)


# ISIS : 국가화된 테러리즘(국가와 테러리즘의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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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과 일본 대학교양총서 2
조경달 지음, 최혜주 옮김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1장 일본의 군사 지배


"조선은 무엇보다도 강대한 군사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병합과 함께 한국주차군은 조선주차군으로 바뀌고, 군사령관은 총독의 통솔하에 두었다. 의병전쟁은 대략 종식되었지만, 잔병활동은 여전히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래서 주차군은 분산주의를 취해 각지에 소부대를 주둔시키고, 의병의 잔병을 뿌리째 '소탕'하려고 했다. 잔병은 평안남도나 강원도의 산간부에 숨어서 출몰하고 있었는데, 1915년경까지는 숨통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함경북도 나남에는 제19사단, 용산에는 제20사단의 사령부가 설치되어 1921년까지 배치가 완료되었다. 그 사이 1918년에 주차군은 조선군이라고 개칭되었다. 또한 경상남도 진해에는 1916년에 해군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병합 초기의 총독정치는 당시부터 무단정치로 불렸다. 그것을 가장 상징하는 것이 헌병경찰제도다." "헌병대는 군사경찰로 육·해군대신의 지휘를 받고, 그 사령관은 '내지'의 헌병대 사령관과 동격이 되었다. 그 권한은 절대적이었다."(16-7)


"식민지 조선 최대의 지주는 1908년 12월 28일에 설립된 동척(본점·경성)이었다. 한국 정부로부터 1만 7714정보의 토지를 지급받아 발족한 동척은 그 후 1913년까지 4만 7148정보의 토지를 매수했고, 1919년에는 7만 8520정보를 소유한 거대 지주가 되었다. 동척의 사업에서 금융업은 중요한 부문이었지만, 토지의 집적은 토지를 저당으로 취하는 대금업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헌병경찰은 사적인 토지매매에도 간섭해 토지의 매각을 용이하게 허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농민에게 매각 기회를 잃게 하고 도리어 농민의 곤궁화를 촉진해 대금업을 하는 동척에게 유리하게 움직였다. 국책회사 동척은 스스로가 지주경영을 실시하는 한편, 일본으로부터 농업이민을 유치하는 데도 노력을 경주했다." "당초에는 자작농·소작농·지주를 각각 모집했지만, 1914년 이후에는 자작농과 지주만 되었고, 1921년 이후에는 10정보 이상을 소유하는 지주의 육성만을 다루게 되었다."(28-9)


"총독부의 동화정책은 국적문제에서 기이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에는 마지막까지 일본국적법이 적용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준용하는 것으로 했다. 이것은 일본국적법이 적용된 타이완이나 카라후토(사할린)와는 대조적이다. 일본국적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국적이탈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고, 조선인은 제3국에의 귀화가 영원히 금지되었다. 예를 들면 귀화하는 것이 가능한 조선인이라도 이중국적인 채로 '일본신민'으로 취급되었다. 위험분자를 방임하지 않는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본래 제국헌법이 시행되지 않은 이상 조선 반도에 있는 조선인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이 있었지만, 그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 등은 친일파 조선인의 명예직이었고, 무단정치기에는 회의가 개최된 일도 없었다." "참정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인에게 연동해서 일본인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재조일본인의 큰 불만이 되었다."(34-6)


2장 3·1운동


"당초 3·1운동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3대 원칙으로 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거사 단계가 되어 학생·민중에 대한 불신과 공포에서 일원적이고 대중적으로 운동을 추진해가는 것을 그만두고 비폭력만을 표방하였다. 결행일이 2일 빨라진 것도 장의 행렬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3일에 결행하면 혼란을 피할 수 없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들은 학생을 쫓아낸 후 독립선언서도 낭독하지 않고 한용운의 인사와 만세삼창만을 거행하고 이어서 축배를 들려고 할 때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미리 당국에 자수를 신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대표가 결국 나타나지 않았던 파고다공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학생과 일반 민중만으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오후 2시가 지나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일제히 '대한독립만세'가 고창되어 태극기를 선두로 시내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시내 곳곳에서 독립연설을 거행하면서 3대로 나뉘어 시위행진을 실시했다."(55-6)


"대부분의 경우 만세시위운동은 장날에 시장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도 전통적인 민란의 작법이다. 지도자의 독립선언이나 연설 뒤,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탁주의 술기운으로 용기를 내어 참가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장시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시위운동은 헌병경찰에게 탄압받은 뒤에 무기를 빼앗아 항쟁으로 이행해갔다." "민중사적 시점에서 볼 때 민중은 민중대로 자율성을 발휘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점과 헌병의 숙사 등을 습격해도 물품은 거의 투기하거나 소각할 뿐이었고, 절도에는 이르지 않았다." "또한 시위는 민란에서 일반적으로 보인 강제적 참가의 논리를 가지고 이루어져 만세를 환호하지 않는 자는 벌을 받았다. 화톳불 행진과 산상 봉화가 왕성하게 이루어졌지만, 그것도 민란의 작법이다. 집단으로 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지방관을 욕하는 만세(山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60-1)


3장 문화정치로의 전환


"3·1운동의 결과 무단정치의 한계성이 분명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3·1운동의 흥기는 총독부가 조선 민족과 공유의 정치문화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에서 최대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총독부는 조선 민족과 공유할 수 있는 정치문화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새로이 모색된 통치책이 일시동인에 근거하는 내지연장주의를 슬로건으로 한 문화정치다. 이것은 조선 지배를 하는 데 조선인의 협력을 얻어서 간다는 정치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이른바 협력체제 구축이 필수가 되었지만 이러한 방향성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내지연장주의는 머지않아 조선을 '내지'와 같은 모습으로 바꾸어 조선인을 일본인과 완전히 같게 하여 조선을 영구 지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동화주의는 점차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조선의 민족주의에 일정한 배려를 보였지만, 조선인을 서서히 일본에 심복시켜 일본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동화하려는 것이었다."(77-8)


# 문화통치기의 주요 양상

1. 헌병경찰제도 폐지 : 보통경찰로 전환 및 증원, 조선인 순사보는 순사로 승격

2. 지방제도 개편 : 의결권 없는 각종 지방의회를 허용, 지방 유력층 가운데 협력자 물색

3. 공론사회 형성 : 언론·출판의 자유 완화로 조선어 신문·잡지 다수 간행, 각종 결사체 급증

4. 종교정책 전환 : 공인 종교(신도·불교·기독교) 외에 신흥 종교를 '종교 유사 단체'로 공인

5. 조선사 찬탈 : 총독부 주도로 〈조선사〉 편찬(민속학자 이능화와 역사학자 최남선 참여)


6. 청년회운동 : 실력양성운동 차원에서 청년회 활성화(사회주의 이념 확산의 주요 통로)

7. 민립대학 설립운동 : 총독부에서 관립대학을 추진하면서 경성제국대학관제 공포(1924.5)

8. 물산장려운동 : 알맞은 조선 산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무산계급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하여 쇠퇴

9. 회사령 철폐 : 회사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 총독부에 협조하는 합작기업 위주로 증대


"〈민족개조론〉은 지배계급에게는 '허위'와 '사욕', 일반 민중에게는 '게으름' '겁이 많고 나약함' '신의가 없음' 등의 도덕적 문제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조선 민족 재생의 길은 그 도덕적 결함을 극복해서 민족성을 전면적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광수는 그것을 위에서 아래로 교화해 계속해야 할 영속적 과업이라고 했다." "이광수의 조선민족관은 총독부의 논의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너무나 자학적이었다. 그러나 이광수는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의 자매단체로 1922년 10월에 수양동맹회를 결성해 진심으로 민족개조의 과업에 착수해갔다. 주자학에서는 학문과 덕행을 쌓은 뛰어난 인격자가 뛰어난 정치를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덕을 겸비한 인격자가 교화의 주체다. 안창호나 이광수가 의식하고 있거나 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그러한 주자학적 전통의 선상에서 민족 엘리트의 육성을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다."(95-6)


4장 민족운동의 전개


# 문화운동과 민중

1. 천도교와 기독교의 운동 : 천도교청년회에서 종합잡지 『개벽』 간행(1920.6), 기독교계는 교육 사업에 주력

2. 여성운동 :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조직(1919.3~4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1922.6)와 조선여성동우회 창립(1924.5)

3. 형평운동 : 백정의 인권 향상과 차별 철폐를 목표로 형평사 설립(1923.4)

4. 농촌계몽운동 : 천도교 주도로 조선농민사 창립(1925.10)

5. 생활개선운동 : 구관비판과 생활근대화를 촉구하는 각종 모임 창립

6. 브나로드 운동 : 학생들이 여름방학 기간에 귀향해서 벌인 문자보급운동(1931~1934)


# 사회주의운동과 민중

1. 사회주의 단체 결성 : 다양한 연구서클과 노농조직이 난립하다가 조선노동총동맹으로 합류(1924.4)

2. 두 개의 공산당 : 이루크츠크 공산당 한인지부(1918.1)와 이동휘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인사회당(상하이파, 1918.6)으로 분열

3. 조선공산당 탄생 : 코민테른의 통합 지시로 조선공산당 결성(1925.4)

4. 6·10만세운동 : 순종 장례식(1926.6.10)을 기해 제2의 3·1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동력 상실

5. 조선공산당 해체 : 당국의 끈질긴 탄압과 내부 분열로 조직이 와해되자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승인 취소(1928.11)


"조선의 사회주의는 3·1운동 이후 급속하게 청년과 지식인 사이에 퍼져갔다. 유교적 민본주의는 평등주의나 평균주의를 표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받침 접시가 되었고, 따라서 사회주의자 중에는 지주의 자제나 양반 가문 출신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유교적 민본주의에 부수하는 명사의식을 가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덕망가로 혹은 교양인으로 자격이 있는 것을 경쟁하려고 했다.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사(士)', 즉 지식인이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영웅주의가 있었고, 민중을 소리높이 부르짖으면서도 민중으로부터 유리하는 지식인의 관념적인 모습이 있었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소재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소작쟁의의 전형은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 소작쟁의라고 불리며 획기적인 사건이 된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岩泰島)의 농민운동이다."(126-7)


# 암태도 소작쟁의 : 1923년 8월 결성된 암태도소작인회가 소작료를 4할로 할 것을 요구하고 최대 지주 문재철이 이를 거부하면서 폭력충돌이 벌어졌으나 1924년 8월말 경찰의 중재 속에 소작인회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면서 화해 성립


김원봉의 요청을 받아 의열단의 선언문으로 쓴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문화정치하의 자치운동과 문화운동을 엄하게 비판한다. 동시에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안창호의 독립준비론을 비판했다. 그리고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혁명"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국가주의자였지만, 여기서는 과감하게 무정부주의자로 변하여 사(士)는 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는 정치는 민을 위해서라도 그 실천주체는 어디까지나 사(士)가 아니면 안 되지만, 신채호는 유교적 민본주의가 가진 평균주의나 평등주의의 이면을 받침 접시로 무정부주의를 수용하면서, 사(士)와 민(民)의 논리에서 그것을 역전시킨다. 그것은 조선의 유교적 민본주의가 참으로 민중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그들이 의거하려고 해도 의거할 조선 민중은 간도 지방 등에 한정적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들의 사상적 진화는 분하게도 실천의 자리를 가지지 못했다."(133-4)


5장 식민지의 근대


"성곽 도시였던 경성은 그 중앙을 동서로 지나는 청계천에 의해 크게 남북으로 나뉘어 왕조 시대에는 각각 북촌·남촌이라 불렸다. 북촌은 상류 양반이, 남촌은 하급 양반이 사는 지역이었다. 남촌은 남산 기슭에 있었고, 일본인은 여기에 있는 진고개라고 하는 배수가 나쁜 장소에 살기 시작해 서서히 개발을 추진해갔다. 총독부는 1914년에 이제까지의 행정구획인 5부 8면제를 고쳐서 주로 조선인 거주지역의 북촌에는 동제, 일본인 거주 지역인 남촌에는 정제(町制)를 펼쳤다. 거리의 발전 방법도 양극적으로 진행되어 상업시설과 극장·영화관 등의 오락시설도 일본인용과 조선인용이 각각의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일본인 거리는 남의 본정통이나 황금통이 중심이고, 조선인 거리는 북의 종로통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인프라 정비나 경관의 근대화 등은 압도적으로 남촌이 우선적으로 추진되고, 북촌에서는 상하수도 및 전기·가스 등의 보급이 늦어져 진행되지 않았다." "1925년 10월 15일에는 남산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는 조선신궁이 창건되었다."(148-150)


"경성 거리는 백화점 외에도 다방과 카페·빠·영화관 등으로 북적거렸다. 그 주요 소비자는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었다. 모던보이·모던걸은 시민공원인 창경원(구 창경궁)과 남산공원 등에서 자유연애를 즐겼다. '그/그녀'들은 일본 문화나 서구 문화의 주요 소비자였고, 일본 가요나 서양 음악에 친숙했다. 거기서는 전통적인 기생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들은 다방의 마담이나 가수·여우 등이 되었고, 자산가·지식인·예술가 등과 교제하며 근대 문화 전파의 중개자 노릇을 했다." "모던보이·모던걸은 '부르주아'의 아이들이었고, 이기주의자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지식인도 역시 모던보이·모던걸처럼 근대문화를 강하게 동경했다." "고등보통학교만 나와도 인텔리를 자처했고, 전문학교나 대학을 나오면 아주 으스대는 풍토가 일반적이었다."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도 강했는데, 일본에 유학하는 자 대부분이 사회주의자가 되었다."(154-5)


"빈곤한 민중 사이에서는 무속이나 신흥종교는 근대의학에 대체할 기능을 일관해서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총독부가 근대성의 침투를 폭력적으로 도모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민중의 하나의 응답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흥종교는 치병에 그치지 않고 구제를 말했기 때문에 민중세계에 큰 힘을 가졌다. 종말종교는 민중의 안타까운 구제원망의 반영으로 있었지만 신흥종교의 대부분은 표면적으로는 통속적인 도덕을 부르짖는 한편, 이면에서는 종말의 도래와 교조에 의한 신 왕국의 탄생을 말한다." "신도의 대부분은 무식하고 가난한 밑바닥 민중이었지만, 그중에서는 민족주의자도 있었다. 그 한편에서 친일행위도 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의 배격을 주장하는 각파 유지연맹에 자금을 원조하고 함께 할동한 적도 있었다. 종말종교는 민족주의적임과 동시에 그 구제사상은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존재의 상태도 양의적, 다의적이었다."(162-3)


6장 문화정치의 종언과 일본인


"1931년 6월 17일 취임한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은 '농공병진' 정책을 취했다. 농업에서는 미작·전작(畑作) 중시의 농업을 유지하면서, '남면북양(南棉北羊)' 정책과 '북선개척' 정책이 수행되었다. 작부 면적 50만 보, 실면 생산 6억 근을 목표로 한 '남면' 정책에서는 이전부터 있는 공동판매제를 강화하여, 염가 매상으로 농민을 고통스럽게 했다. 또한 '북양' 정책에서는 면양 10만 두를 목표로 농가에 면양 사육을 강제했다. 이들 정책은 일본의 섬유산업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었지만, 면양의 경우는 군사양모에 이바지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북선개척' 정책에서는 백두산 지역의 삼림 80만 정보의 벌채가 계획되어 이민장려의 미명 아래 화전민을 구축했다. 공업에 대해서는 슬로건만큼은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주사변을 계기로 조선의 공업화가 진전되었다. 공업화는 군수공업의 필요성과도 어울려 서서히 중공업에 비중을 옮겨가고 있지만, 그 전제조건은 192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182)


"(1935년 1월부터 시작된) 심전개발운동은 그 목표로 ①국체관념의 명징, ②경신숭조사상의 함양, ③보은·감사·자립정신의 양성을 내걸었다. 거기에는 유교와 함께 신도·불교·기독교의 공인종교의 부흥을 호소하면서, 실은 국가신도 체제에 그것들을 짜넣어 국체관념을 내면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심전개발운동은 공인종교의 부흥을 내거는 한편으로, 종말을 부르짖는 신흥종교에 대해서는 단호한 자세로 임했다." "문화정치의 특징은 총독부 비판에는 세심한 주의를 하면서도 마음의 자유는 묵인하려고 하는 점에 있었다. 그런 탓도 있어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종교 유사의 단체'로 공인되었다. 따라서 그 공인은 문화정치 도래의 중요한 표지였다." "문화정치가 언제 끝나는가에 대해서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심전개발운동의 개시야말로 문화정치 종언의 표시로 보는 것이 이 책의 입장이다. 문화정치의 시기는 말할거리가 많지만 불과 15년밖에 계속되지 않았다."(193-4)


7장 전시체제와 조선


"(중일전쟁 발발 후 가속화된) 대륙병참기지화란 '내선일체'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일만지(日滿支, 일본·만주·중국) 블록의 전제조건이었으며, 조선은 '제2의 내지'  '내지의 분신'이 되었다. (1936년 8월 5일, 조선총독에 취임한) 미나미는 동아신질서 건설의 기치와 더불어 이제까지의 '내선융화' 표어를 진척시켜 '내선일체'로 하고, 차별 없는 조선을 맹렬하게 선전했다. 여기에 조선의 상층사회와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는 갑자기 일본제국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한 기대의 고조에는 일본제국의 강대성에 새삼스럽게 압도된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기대를 팽창시킨 사람들에게는 기묘한 자존의식이 싹터간다. '내지'가 제일선의 지위에 있는 데 대해서 조선은 제이선의 지위에 있다고 하는 아(亞)제국의식이다. 이 의식은 식민지인이라는 것을 망각해 자기를 일본제국의 정식 일원으로 규정하고, '이등신민'인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끝없이 '내지신민'에 근접해가려고 한다."(210-1)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벌써 그 반달 후인 7월 22일에 정보통제와 국가 관념의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활동을 기초로 해서 중일전쟁부터 1년 후인 1938년 7월 1일, 총력전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발족시켰다. 여기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개시된다." "이 운동은 연맹조직의 정비를 통해서 황국신민화를 추진하고, 근로보국의 정신을 앙양시켜 거국일치해서 시국의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것을 과제로 하는 것이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발족에 호응해서 1940년 10월에는 국민총력운동으로 개편되어 조직명도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직역연맹하의 애국반에서는 매월 1일을 애국일로 하여 국기게양, 궁성요배, 신사참배, '국어'장려, 근로봉사,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등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214-5)


#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결정한 기본국책요강에 기초해 신체제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에 창립된 일본의 관제 국민조직


"(1939년 11월 10일, 개정조선민사령으로 공포된) 창씨개명의 의도는 혈통지상주의의 조선적인 가(家)제도를 파괴해 일본적인 이에(家) 제도를 이입하고 천황제 가족국가관에 의해 조선인을 포섭하려는 것에 있었다. 이미 시작되고 있던 지원병제나 시행예정의 징병제에 의해 조선인은 황군의 일원이 되지만, 황군은 문자 그대로 천황의 적자다. 일본어를 말하는 것은 물론 성명도 일본풍이 아니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가제도를 천황제 가족국가관에 적합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미나미 지로는 '내선결혼'도 이제까지 이상으로 열심히 선전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을 통해서 표창도 거행하고 있다." "결국 (신고를 마친) '설정 창씨'를 한 조선인은 80퍼센트 이상이 되었다. 창씨 소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폭풍과 같은 떠들썩함이었지만 20퍼센트의 조선인은 압력을 뿌리쳤다. 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고 해도 조선 호적을 폐지해 일본 호적에 편입시키려 하지 않았다."(220-1)


"당시 '내선일체'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몸도 마음도 피도 일본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철저 일체론'이고, 현영섭과 이광수가 대표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황도'를 생활원리로 하면서도 이체동심에 의해 단결하면 좋다는 입장에 선 '협화적 내선일체론'인데, 조선지식인 대부분이 이 입장에 서 있었다. 전자는 단순한 황민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인은 조선어를 망각해 일본어만을 이야기하고, 문화적으로도 일본 문화를 완전 수용해 이를 위해서는 조선인은 일본인과 혈통을 같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인 스스로에 의한 놀랄 만한 조선민족말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후자는 황민화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은 조선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 같은 다문화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조공체제론적이었고, 중화가 일본으로 대체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논의였다."(225-6)


8장 전쟁과 해방


"1941년 11월 28일에 한국독립당 주도의 임시정부에 의해 공포된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구체화되어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보지를 균등'하게 할 것을 지향했다. 토지의 전면 국유화와 평등분배, 즉 토지혁명과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가 확인됨과 동시에 보통선거권, 남녀의 권리평등, 고등교육까지의 면비(免費) 수학 등이 선언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정책이 '선민(先民)의 명명(明命)'에 그 연원이 구해져, '성조(聖祖)의 지공분수(至公分授)의 법을 따르는' 것에 의해 선언되고 있는 점이다. 거기에는 유교적 민본주의의 계승이 강하게 의식되어 그것을 진정으로 구현하려는 사상적 갈등을 한 18세기 이래의 실학의 전통이 생겨나고 있다. 본래 '대한민국'이라는 명칭도 왕조 시대부터 표방되고 있던 '민국' 이념을 계승한 것이었다. 중흥의 조라고 불린 정조는 '민국' 이념을 명확히 했고, 그 이념은 고종의 정치에도 계승되었다. 따라서 이 명칭은 '중화민국'의 단순한 차용이 아니다."(250-1)


"1945년 8월 14일 밤 여운형에게 정무총감 엔도 류우사쿠로부터의 회담 요청이 있었다. 다음 아침 6시 반경, 양자 사이에서 회담이 이루어졌다. 무조건 항복을 내용으로 하는 포츠담선언을 수탁했기 때문에 치안유지에 협력해주기 바란다는 요청이다. 여운형은 ①정치경제범의 즉시 석방, ②3개월분의 식량 확보, ③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대한 불간섭, ④학생·청년조직에의 불간섭, ⑤노무자의 국가 신건설에 대한 동원이라는 다섯 가지 조건을 붙였고, 엔도는 이를 무조건 승낙했다. 여운형은 좌파인 동시에 민중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치안유지를 부탁할 인물로 가장 알맞은 인선이었다."(261) "한편 총독부는 모든 기관에 명해 대량의 서류를 소각했다. 그리고 9월 8일 엔도 정무총감이 인천에서 하지 중장을 마중했고, 다음 9일에 항복문서의 서명이 총독부에서 제9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와의 사이에서 거행되었다. 일본의 35년에 이르는 지배가 정식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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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 지음, 최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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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조선 왕조와 일본


"일군만민 체제에서는 공론이나 직소가 중요한 언로였고, 건국 당초부터 중시되었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 정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국왕이나 관료, 사족이었고, 백성은 정치의 객체일 뿐이었지만 그 대신 백성의 이의 신청은 확고하게 인정되었다." "유교적 민본주의는 그 외에도 권농교화, 진휼부조, 평균분배 등을 그 구체적 내용으로 하였다. 그리고 유교적 민본주의의 기초에는 농본주의가 있어 순박한 농부로 살아가는 것을 통속 도덕적으로 교화하였다. 백성은 먹을 것을 생산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재난에 처했을 때에는 인정(仁政)을 받을 권리를 가졌다. 민본인 이상 백성을 나라보다도 중시하였고, 민중들의 상호 부조도 장려하였다. 부민은 빈민을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양반은 유교적 민본주의를 내면화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민중 구제는 양반의 당연한 책무였다. 이러한 민본주의의 양상은 자연스럽게 평균주의를 이상으로 만들고, 균전사상(均田思想)을 배태하였다."(25-6)


"확실히 유교적 통치 방법은 근세 일본에서도 채용되었다. 근세 일본에서는 인정(仁政)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한 공의(公儀)와의 은뢰 관계(恩賴關係), 즉 〈백성 성립〉의 논리가 있었고, 교유(敎諭)를 축으로 하는 유교적 정치 문화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다이묘를 목민관으로 파악하는 논의도 있었다. 유교적 교양을 쌓는 것은 무사(武士)의 당연한 소양이었고, 유교 교육을 근간으로 하는 번교(藩校)가 18세기 끝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근세 일본에서 〈무위(武威)〉가 막번 체제 최대의 기반이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민본주의에 의해 형성되는 목민 의식이 있었지만, 엄격한 법치 사상과 〈구원〉에 의한 인정주의가 양립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유학자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라이 하쿠세키나 구마자와 반잔 등에게서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유학자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다."(30-1)


# 유교 이데올로기는 조선에서는 통치 원리 자체였지만, 일본에서는 통치 수단의 하나에 불과했다.


"〈정한征韓〉 사상은 메이지 시기에 들어 갑자기 대두한 것이 아니다. 조선 멸시관을 전제로 하면서 18세기가 끝날 무렵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하야시 시헤이는 조선을 일관되게 일본에 복속하였던 나라로 간주하였는데, 조선을 향한 침략을 노골적으로 언명한 선구자는 사토 노부히로였다. 그는 〈만주〉를 시작으로 하여 몽고, 조선을 침공하고, 결국 중국 본토로의 침략을 몽상하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서구의 충격〉에 대항하여 대륙 팽창의 방책을 제창한 것이다. 이러한 정략은 하시모토 사나이나 요시다 쇼인이 계승하였는데, 근대 일본의 팽창주의를 생각하는 선상에서 중요한 인물은 쇼인이다. 그는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를 무력으로 평정하고, 교역에서 러시아에 잃어버린 것을 조선과 만주에서 토지로 보상받아야 한다〉라고 하여 장래 러시아에게 빼앗길 부(富)의 대체 보상으로 조선을 시작으로 한 대륙 침공을 구상하였다."(42)


"근세 일본에서는 불교나 신도(神道)도 유교와 병존하면서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고, 난학(蘭學)마저도 허용되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지켜야 할 절대적인 〈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구의 충격〉이라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지켜내야 할 무언가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국체〉였다. 〈국체〉란 미토 번사 아이자와 세이시사이가 쓴 『신론(新論)』(1825)에서 처음으로 정의를 내린 용어이다. 거기서 국체란 ① 천황의 일계(一系) 지배, ② 천황과 억조(만민)의 친밀성 ③ 억조의 자발적이고 끊임없는 봉공심(奉公心)이라고 하는 세 가지 요소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 권력으로 설명하였다. 여기에 심취한 자가 쇼인이었다. 그는 〈국체〉론적 입장에서 『맹자』를 독자적으로 해석하였고, 거기에 기초하여 조슈 번의 대유(大儒) 야마가타 다이카와 논쟁을 벌였다. 쇼인의 입장은 〈도〉와 〈국가〉를 확연하게 분리하여 〈도〉 위에 〈국가〉를 위치시키는 것이었다."(43)


"메이지 유신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1869년 1월 31일, 신정부는 쓰시마를 통하여 왕정복고 사실을 조선에 고지하였는데, 그 서계(書契, 조일 간의 외교 문서)가 일방적으로 구례(舊例)를 배척한 것이었고, 〈황(皇)〉이라든가 〈칙(勅)〉과 같은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조선 국왕을 격하하고 천황을 그 상위에 두는 것과 같은 문서였다. 조선은 이 서계의 수리를 당연히 거부하였다. 여기서 국교가 사실상 단절되었고, 근세에 곡절이 있었으나 꾸준히 구축되어 왔던 선린 관계가 단절되었다. 신정부는 조선이 이 서계를 거부할 것을 확신하면서 사절을 파견하였다. 기도 다카요시는 사절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조선이 이제까지 천황에게 조공해 오지 않았다는 점을 〈무례〉하다고 비난하면서, 조선이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신주(神州, 즉 일본)의 위엄을 펼칠 것〉을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건의하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은 애초부터 침략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44-5)


2장 조선의 개항


"(개항 과정에서) 숭문(崇文)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조선이 도리어 무위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일본 이상으로 완강히 저항했다는 점은 양국 문명 의식의 차이와 크게 관련된다." "이항로는 성현의 〈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존망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행위라 하여 유교 문명의 절대적인 수호를 준렬하게 설파하였다. 이 점은 현실의 조선 왕조가 존귀한 것은 〈도〉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실천을 포기한다면 그러한 왕조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국체〉 사상과는 전혀 달랐다. 일본에서는 〈국체〉 사상의 대두를 통해 〈국가〉가 절대화되었기 때문에 〈도〉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서구화로의 전환이 용이할 수 있었다. 서구에 대한 철저한 항전은 〈국가〉를 멸망시키는 것일 뿐이다. 서구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인식하자마자 존양론(尊攘論)이 개국론으로 급격하게 전환하였던 비밀이 여기에 있다."(59-61)


1875년 9월 20일부터 28일까지 운요호가 강화도에 출몰해 조선 관민을 도발한 사건은 "마실 물을 구하려고 초지진으로 향하던 차에 불의의 공격을 받았다는 식으로 날조되었다. 운요호의 강화도 접근은 명백하게 〈만국공법〉을 위반한 것이었는데, 마실 물의 보급이라면 〈만국공법〉에서 인정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요호는 최초부터 조선군을 도발하였고, 반격을 시도하면서 영해를 침범했다." "일본 정부는 강화도 사건을 절호의 구실로 하여 일거에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실현하려 했다. 운요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 측에 잘못을 덮어씌워 조약을 체결하려는 계산이었다." "1876년 2월 10일, 구로다 일행은 군함 6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났고, 병력이 4000명이라 했다. 페리의 사례를 모방하려 한 위압 외교였다. 다음날부터 진행된 회담에서, 조선 측의 접견대신 신헌과 부관 윤자승은 〈만국공법〉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고, 조약이 무엇인지도 몰랐다."(65-7)


# 2월 26일 조일수호조규 조인


3장 개항과 임오군란


"조선 정부는 이홍장의 중개로 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조약 교섭의 임무에 나선 이는 박규수의 제자 김윤식이었다. 그는 근대 병기의 제조 학습을 목적으로 한 유학생 38명을 인솔하는 영선사의 임무를 가지고 1881년 11월 17일 이홍장이 있는 톈진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임무였고, 보다 중요한 임무는 미국과의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이었다. 위정척사파가 우세하였던 조선에서는 조약 교섭에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톈진에는 미국 정부의 명령을 받은 해군 제독 슈펠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섭에서 가장 논란이 된 내용은 청국의 종주권을 조약문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홍장은 〈속방〉 규정을 고집하였는데, 김윤식도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청국의 〈속방〉이더라도 조선은 내정과 외교에 대해서는 〈자주〉라고 하는 의식을 이홍장과 김윤식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81)


# 슈펠트의 반대로 〈속방〉 규정 명문화 무산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은 박정양, 조준영, 엄세영, 강문형, 민종묵, 이헌영, 어윤중, 홍영식 등 12명의 조사(朝士)와 27명의 수행원, 기타 2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수행원 가운데 유길준과 유정수는 게이오기주쿠에, 윤치호는 도진샤에 유학하였다. 조선 최초의 유학생이었다. 조사시찰단은 메이지 일본이 실시하였던 이와쿠라 사절단과 성격이 유사했다. 구미로 직접 향하기에는 자금과 시간, 어느 쪽으로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손쉬운 일본을 선택했다. 조사들은 각각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와쿠라 사절단이 서구 지향을 강하게 하고 귀국한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조사들은 일본이 〈부국강병〉을 달성해 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으나, 산업화의 추진 과정에서 누적된 국채 때문에 국가재정이 파탄 났다고 보아 메이지 유신을 반드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반면, 김옥균은 일본을 모델로 한 조선의 근대화와 대국화를 꿈꾸었다.(83-4)


민비의 실각과 대원군의 재등장, 청국의 개입과 대원군의 청국 억류 등 일련의 사태를 야기한 "임오군란에 대한 일본의 여론 동향은 어떠했을까? 우선 정부의 강경한 대조선 정책에 곧바로 응하듯이 관권파 신문인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일본의 피해를 크게 부풀려서 조선에 대한 적개심을 부채질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재하는 「지지 신보」는 청국에 대한 대항을 의식하여 충분한 육해군 병력의 출병을 호소함과 동시에, 군사적 충돌을 개시할 각오로 배상금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후쿠자와는 이제까지 동양 맹주론을 주장하여 조선이나 중국을 문명적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커다란 변절의 첫걸음이었다. 이 시기, 임오군란과 관련된 니시키에(錦繪)가 매우 많이 팔렸는데, 그것들은 하나부사 공사 일행의 탈출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하여 일본 민중의 조선에 대한 적개심을 한층 더 조장하였다. 그에 따라 헌금이나 종군 청원을 제출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91)


4장 갑신정변과 조선의 중립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화파가 지향한 것은 서구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만국공법〉 체제로의 일원적 진입을 꾀하고, 종주권을 강화한 청국으로부터의 완전 이탈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국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단시일 안에 서구화를 달성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매우 좋은 모델이었다. 거기에는 〈아시아의 프랑스〉를 지향하려 한 김옥균에게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국 지향 노선도 일부 보인다." "그러나 김옥균에게는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주의적 연대 사상도 있었다." "애초부터 조선에서는 〈부국강병〉은 권력주의적 패도(覇道)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어서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존재하였다. 그것을 대신하여 주창한 것이 〈자강〉이었다. 〈자강〉이란 민본을 기초로 두고 내정과 유교적 교화의 충실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국강병〉이 패도인 데 비하여 왕도라고 할 것이다."(106-7)


"급진개화파에게는 우민관도 강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본래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것은 민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민을 정치의 주체로 둔다는 발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민평등의 사상은 개화파의 아버지인 박규수에 의하여 열렸으나, 구체적 실천의 차원이 되면 엘리트적 사(士)의 자각을 가진 개화파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갑신정변이 왜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라는 형태를 취하고, 더욱이 일본에게 전면적으로 의존하려 했는가, 그 본질은 전적으로 개화파의 우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개화파 정권의 붕괴에는 한성 민중의 공격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민중 사이에서는 국왕을 폐위한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민중은 계속해서 왕궁이나 공사관을 둘러싸고 일본인이나 개화파에게 투석이나 폭행을 가했다. 민중을 신뢰하지 않고 외국을 신뢰한 개화파 정권은 민중에 의해 타도되었다. 민중의 이반은 개화파 정권 붕괴의 결정적 요인이었다."(107-8)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시기, 일본의 자유 민권 운동은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 급진파는 계속해서 과격 사건을 일으켰고, 그것을 통제할 수 없었던 자유당은 1884년 10월에 해산했다. 갑신정변은 그러한 궁지를 타개할 한 줄기 빛이었다. 민권파의 신문은 들고 일어나 대청 강경론을 전개하여 1885년 1월 18일과 30일에는 도쿄와 오사카에서 각각 학생, 청년과 장사 등에 의한 지사 운동회와 반청 데모가 일어났다." "1885년 11월 23일 오이 겐타로나 고바야시 구스오가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오사카 사건은 자유 민권 운동이 국권론으로 크게 선회한 내부 사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사건은 구 자유당원들이 무력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민씨 정권을 타도하려 한 계획이 발각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화파에 대한 연대라고 말하였지만 사실은 침체한 자유 민권 운동의 활기를 살려내기 위해서 사건을 바깥에서 꾸민 것에 불과했다. 조선 문제를 이용하려 했을 때, 민권론을 국권론으로 쉽게 전환하였다."(109)


5장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갑오농민전쟁은 근대 조선 역사상 획기적인 민중 운동이었다.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의 정치 문화를 배경으로, 무력적으로 중개 세력을 배제하고, 일군만민의 논리에 호소하여 민중적 요구를 실현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반년도 채우지 못한 기간이었지만 민중 자치를 실행하였던 것은 조선 역사상 그때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일군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상황이 출현하는 가운데 민중은 농민군 간부의 지도를 이탈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지향하였다. 농민 전쟁의 전 과정에서 책임을 지려 했던 전봉준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바였다. 그러나 민중은 자신들이 그리던 유토피아를 자율적으로 실현하려 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개혁이 설령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국왕은 반드시 그것을 용서해 주리라는 낙관론에 취해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충군애국〉 사상과 의병 의식을 가지고 궐기했던 전봉준과, 유토피아의 실현을 서두른 민중 사이에는 분명히 의식의 괴리가 있었다."(148-9)


"갑오개혁은 갑오농민전쟁에서 나타난 농민의 제반 요구를 국정 전반에 걸친 근대적 여러 개혁을 통하여 응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 재정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실현은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급격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영세한 농업이나 상공업에 대한 개혁,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도리어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도 농민은 소농 회귀적인 토지 정책을 바라고 있었는데, 갑오개혁 정권은 지주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거기에 일절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또한 조세 금납화는 농민이 더욱 더 상품 화폐 경제에 편입되어 몰락의 길을 가속화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농민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중은 갑오개혁 정권과는 반대로 반근대적 지향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개혁이 일본의 간섭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근대화와 침략을 겹쳐 보이게 만들어 반일·반개화의 기운을 한층 고조시켰다."(152-3)


6장 대한제국의 시대


"고종은 칭제(稱帝) 상소를 받아들이면서 〈6군(천자의 군대)과 만민의 바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수사를 구사하였다. 공론 중시는 유교적 민본주의의 기본이었고, 고종은 이제까지의 유교적 정치 문화를 존중하면서 칭제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고종은 일군만민 사상이 성숙하였고, 갑오농민전쟁에서 정점에 도달하였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조 신원 운동이나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대처도 당초에는 철저히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선무공작이나 회유공작을 실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은 홍범14조의 발포 다음 날에 낸 칙령 제14호에서 〈군주가 자주를 하려고 하더라도 백성에게 의지하여야 하며, 나라가 독립하려고 하더라도 백성과 함께해야 한다. 너희 서민들은 마음을 하나로 하여 다만 나라를 사랑하고, 그 기운을 같이하여 오직 군주를 사랑하라〉라고 하여 〈충군애국〉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165)


"이리하여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었다. 그 국제가 바로 1899년 8월에 공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이다. 이것은 겨우 전체 9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문장에 불과하나, 대한제국이 〈자주독립의 제국〉이며, 그 정치는 〈만세불변의 전제 정치〉로, 황제는 〈무한의 군권〉을 갖는다고 선포하였다. 황제는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 외교권, 은사권 등 모든 권력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국제는 결코 헌법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국가의 이념이나 신민의 권리·의무, 끝으로는 관권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대한제국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을 표방하였고, 오히려 유교와 민본주의는 국가의 원리였다. 이미 신민의 생명 재산에 대한 보호에 대해서는 홍범14조와 칙령 제14호에 명기되어 있었다. 대한국국제는 단지 민본주의 이념을 당연하다는 듯이 실천하며, 한없이 자애로워야 하는 황제의 권능을 명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167)


"독립협회에 대한 조삼모사식의 대응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종은 대원군에게서 물려받은 책사적 일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매우 경솔하고 사려가 부족하였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나 정실(情實)적인 인사는 총애와 경질을 반복하였고, 때로 믿기 어려운 사건까지도 일으켰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이권을 도모한다면서 그때까지 총애하던 전 역관 김홍륙을 유배에 처하자 원한을 사 1898년 9월 11일 만수성절(황제의 탄생일)의 커피에 아편이 들어갔던 것이다. 이때 고종은 무사하였으나, 황태자 척(拓)은 그 후 평생 병약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일군만민의 정치라고 하는 것은 현명한 군주를 전제로 하는데, 그것은 부단한 인격적 도야와 신하와 변함없는 신뢰 관계를 구축한 위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그것은 단순한 독재와는 구별되는 이상주의적 군주 정치이다. 고종에게 군주라는 자리는 짐이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었고, 그 점은 노회한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와의 대치 속에서 분명해졌다."(187)


7장 러일전쟁하의 조선


"양국이 결정적 대립을 맞이한 것은 1903년에 들어서다. 러시아는 같은 해 4월 이행하기로 되어 있던 만주로부터의 제2기 철수를 실행하지 않고, 도리어 만주 지배를 강화하려 하였다. 더욱이 5월경부터 압록강 조선 측 하구에 있는 용암포의 토지를 매수하여 건물들을 건축하고, 삼림 사업을 개시하려 하였다. 러시아가 조선 전역으로의 본격적인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용암포로의 진출은 일본의 만주 진출에 대한 방어선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삼국 간섭 이후 〈와신상담〉을 구호로 삼아 온 일본에서는 관민 모두에게 개전의 열기가 비등해 있었고, 조선에 대한 군사적 지배의 달성을 열망하고 있었다." "2월 4일 어전 회의에서 개전이 결정되자, 8일 연합 함대가 뤼순 항 바깥의 러시아 함대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보다 앞선 6일, 일본은 조선의 진해만과 부산, 마산의 전신국을 군사 점령하였다. 러일전쟁도 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군사 행동이 선행되었던 것이다."(199-200)


# 한일의정서 조인(1904.2) 이후 조선의 상황

1. 군율 체제의 성립 : 군용 시설 훼손, 치안 방해 행위를 가혹하게 처벌하고 집회·결사·언론·출판 행위를 단속(식민지 무단 통치의 원형)

2. 군용지 수용 : 필요 면적의 16배 이르는 토지를 헐값에 군용지와 철도 부지로 강제 수용

3. 인부 징용 : 촌락을 연대 책임으로 묶어 철도 부설 인부를 강제 징용(식민지 총력전 체제기 강제 연행의 원형)

4. 화폐 정리 : 한국의 화폐 발행권을 강탈하고 오사카 조폐국에서 제조한 신화폐를 본위 화폐로 확정


"(각지에서 속출하는) 민란 가운데 유달리 주목되는 것은 9월 경기도 시흥에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이 민란은 군수 박우양이 일본인과 협력하여 인부의 차출과 그에 관련한 비용을 군민에게 부과한 일을 단초로 하여 발생하였다. 군민은 전통적인 민란의 규칙에 따라 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군수가 일본인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일본인 인부 7~8명을 관아로 데려왔을 무렵 군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일본인 두 명을 살해하고, 네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군수와 그의 아들까지도 살해하였다. 왕명을 받은 군수는 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란의 규칙이었다.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라고 하는 정치 문화를 전제로 하여 성립해 있는, 정부와 민중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이 규칙이 깨졌다는 것은 중대한 사태를 의미했다." "다만 동학 이단파와 같은 강력한 구심력을 가진 세력이 존재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민중의 싸움은 산발적, 한정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219-20)


8장 식민지화와 국권회복운동


"1905년 11월 18일, 보호조약의 체결로 한국에는 통감부가 설치되고 통감이 파견되었다. 한성, 평양, 부산, 인천, 목포, 군산 등의 요지나 개항장에는 이사청을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종래의 영사관 업무를 담당함과 동시에 조약 의무 이행의 명목하에 지방 시정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초대 통감으로 취임한 자는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1905년 12월 21일 임명되었고, 통감부는 한국 외부(外部)를 청사로 삼아 1906년 2월 1일 개청하였다. 통감은 천황에게 직속하였고, 한국 외교를 감리 지휘하는 권한을 가졌다. 또 황제를 내알(內謁)하여 정무의 소통을 꾀하였고, 정부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부의 중요 관직에는 보임(補任) 추천을 실시하여 한국 시정에 대하여 권고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통감은 한국 주차군을 지휘하는 권한을 가졌다." "이리하여 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내정권조차 반쯤 박탈당한 상태가 되었다."(229-30)


"의병 운동이나 국채 보상 운동이 고조되는 한편으로, 고종은 밀사 외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헤이그 밀사 활동이 1907년 6월 29일 이토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격노했다. 7월 3일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여 그 행위를 〈음험〉한 것이라고 힐책하였고,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라고 윽박질렀다. 이어서 총리대신 이완용에게도 마찬가지로 협박하며 고종의 양위를 다그쳤다. 일진회 송병준은 양위하지 않는다면 자결하든가, 천황에게 직접 사죄하든가, 아니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고종을 다그쳤다. 결국 7월 20일 양위식을 거행하였고, 황태자 척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순종(純宗)이었다." "이토는 다음 단계의 정책을 즉석에서 실행에 옮겼다.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협약으로 일본은 통감에 의한 내정 지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법령 제정과 행정 시행, 관리 임면 등은 통감의 동의가 필요하게 되었다."(242-4)


9장 한국 병합


"순종의 순행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한성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통감을 사임할 뜻을 굳힌 이토에게 1909년 4월 10일 수상 가쓰라 다로와 외상 고무라 주타로가 방문하여 한국 병합안을 제시하자, 이토는 군말 없이 병합안을 승인했다. 이토는 6월 14일 통감을 사임하였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과 「대한시설대강」을 각의에서 결정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실시하기로 했다." "명성에 신경 쓴 이토는 1908년 말 무렵부터 통감 사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었는데, 순종의 순행 실패로 일본의 조선 지배가 합의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통감 사임만이 아니라 병합도 용인하였던 것이다. 애초부터 보호국이든, 자치 식민지든, 병합 일체화든 조선이 일본의 완전 식민지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토는 지배 비용이 든다는 점과 국제적으로 무단한 행위라는 인상을 준다는 데 신경 썼던 것에 불과했다."(275-6)


"외상 고무라 주타로는 1910년 2월 「한국 병합에 관한 건」과 「대한시설대강」을 각국에 통지하였다. 그리고 동맹국인 영국에 대하여 6월 3일 관세 자주권이 없는 조선에서 관세를 당분간 현행대로 할 것을 조건으로, 병합에 대한 승인을 얻었다. 미국은 만주의 문호 개방을 호소하는 가운데 일본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었으나, 만주에서 강고한 이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러시아로부터 협력을 얻어낼 수 있다면 침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일본의 간도 진출에 일시적으로 불신을 품고 있었는데, 문호 개방을 제창하면서 실제로는 만주로의 경제적 진출을 꾀하는 미국에게 한층 더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7월 4일 제2차 러일협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미국에 대항한다는 취지에서 〈분계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특수 이익〉을 인정하여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정이었다. 이제 한국 병합은 언제라도 감행할 준비가 끝났다."(287-8)


"1910년 5월 30일 병약한 소네 아라스케를 대신하여 육군 대장이며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이 되었다. 6월 3일 각의에서 조선에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천황에 직속하는 총독이 대권으로 통치한다는 「병합 후 한국에 대한 시정 방침」을 결정하였다. 새로운 지배 기구는 통감부를 대신하여 총독부라고 불렀고,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으로 결정되었다." "데라우치가 병합의 결행에 착수한 것은 8월 16일이다. 이날 데라우치는 이완용을 관저로 불러 병합안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그 형식은 〈합의의 조약〉이어야만 한다고 했다. 보호국이라는 것은 자치 혹은 독립을 부여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병합이라는 말은 거기에 반하는 정책으로서 국제적으로 일본의 면목을 지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합〉이라는 말은 대등한 일체화의 어감을 갖는 〈합방〉이나 〈합병〉과는 달랐다. 한국 폐멸까지도 완곡하게 의미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고안한 것이었다."(288-9)


#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 조인(1910.8.22) 및 공포(8.29)


"한국병합조약의 체결은 조선 사회에 그때까지의 조약과 비교하자면 사실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또 황제 환상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생활주의로 살아가는 민중에게 선정이나마 베풀어 준다면 지배자의 변경은 감수할 수 있었다. 민중의 내셔널리즘은 오히려 다분히 시원적이었다." "병합조약과 동시에 조선귀족령을 실시하여 76명의 조선인이 귀족에 포함되었다. 한규설과 유길준을 비롯한 6명이 작위 수여를 거부했다." "순국자는 전국적으로 줄을 이었다. 양반 유생 9,811명에게는 경로금이 지급되었고, 효자 등 향촌의 모범자에게는 포상을 수여하였다. 또 대사면을 실시하여 부정을 한 지방 관료도 그 죄를 용서받았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 대해서는 미납 세금을 면제하였고, 추수에 한하여 지세를 5분의 4로 감면하였다. 더욱이 13도에는 국탕금 1700만 엔을 지출하여 진휼이나 교육 보조금 등에 충당하였다. 이렇게 성대한 대접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진수성찬과 같은 것이었다."(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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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길 2021-03-06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연구하심에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