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상인 - 서울,개성,인천 지역 자본가들과 한국 부르주아의 기원, 1896~1945 역비한국학연구총서 28
이승렬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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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8세기 후반 도성의 상업계에 두 가지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게 된다. 하나는 시전상인과 사상층이 경제외적인 분야 즉 조선왕조 정부·궁방·권세 있는 양반사대부의 후원을 얻기 위해 벌인 경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상품유통경제의 주도권을 둘러싼 시전상인 대 사상층의 경쟁이었다. 도고행위─시전상인과 같은 관상도고나 경강상인과 같은 사상도고─는 모두 경제 외적인 배경을 전제로 행해지는 상행위였지만, 도고상인 간의 경쟁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아래로부터의 상품화폐경제 발달을 반영하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재야 사림과 중앙관료 사이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기반이었던 사림정치의 주자학 이념이 파탄을 맞고 소수의 경화사족이 정권을 독점한 것도 도성 주변 상인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여건이었다. 세도정권은 수령-이서층으로 연결된 수령권을 매개로 재지사족의 향권을 제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 의한 농민수탈을 방조하면서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50)


"농민수탈의 방조는 세도정권이 말단 지배기구에서 복무하는 수령과 이서층에게 주는 복종의 대가였으며, 이러한 부패의 공유를 통해 세도정권은 정치적 생명을 연장해갔다." "조선의 19세기는 현물경제에 기초한 국가적 상품화폐경제와 화폐수탈에 기초한 농민적 상품화폐경제가 병존하는 시대였다." "한말의 조세수취제도 및 재정운영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개혁의 최우선 과제는 현물경제와 화폐경제가 병존하는 지금의 이중구조를 혁파하고 화폐경제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과 중간수탈이 자행될 수 있는 허점을 가진 현 징세기구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세금납화의 젼면실시와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화폐개혁, 그리고 국고은행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중앙은행의 설립이 요구되었으며, 후자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세의 부과와 징수체계를 분리하여 근대적인 징수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51-2)


"(광무정권과 도고상인층이 합작하여 금융근대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도고상인들이 은행가로 전환한 것은 한국에서 부르주아의 등장을 의미했다. 정부와 상인의 공생관계 위에서 성장한 그들은 국가권력에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대한제국의 금융근대화를 추진했던 은행가들은 대한제국 금융기구의 식민지적 재편을 주도했고, 일제강점 이후에는 조선상업은행장 및 한성은행장을 지내는 등 금융계의 주요인물이 되었다. 또 친일귀족, 일본인 고위관리와 자본가, 그리고 한인 자본가들이 함께 식민지기 '자본과 권력'의 교제를 위한 최고의 사교공간인 대정친목회, 조선실업구락부를 조직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식민지기 금융 산업의 주변에서 부르주아로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렸지만 사회를 주도할 만한 도덕적·이념적 헤게모니를 가지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의 유산인 그들은 식민지 근대, 식민지 자본주의가 전개되던 발판이기도 했다."(59)


# 조선은행 창립(1896.6), 한성은행 창립(1897.2), 대한제국 출범(1897.10), 대한천일은행 설립(1899.1)


제1부 대한제국과 상인


"조선은행의 초기 영업은 상업금융과 정부의 지원을 통해 순조로웠다. '창립주의서'에 나와 있듯이 상업금융은 '금은포면'과 같은 상품을 담보로 한 연리 12~24%의 단기대부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정부의 지원도 적지 않아 운영자금을 조성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조선은행 영업은 독립협회운동의 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창립 발기인 대부분이 독립협회 창립 발기인인 점, 독립협회운동이 고조기에 달했던 1889년까지는 정부의 조세금 취급인가를 받거나 국고금 예치 등의 특혜를 얻었지만 1889년 후반 독립협회운동의 좌절 이후에는 영업상황을 보여주는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은행장 안경수가 1898년 6월 한국을 방문한 일본 다이이치은행 두취(頭取) 시부자와 에이이치를 통하여 100만 원을 차입하여 태환지폐를 발행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8월에 망명함으로써 은행을 주도할 수 있는 인물이 없어진 점 등은 조선은행의 부침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80-2)


"1899년 10월부터 이용익을 중심으로 한 광무정권의 관료들은 차관도입을 위해 일본·미국·프랑스·러시아·벨기에 등 여러 나라와 분주하게 접촉했는데, 이 사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국제정세에서 일본의 주도권이 강화되는 추세였으나 1895년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 이후에는 조금 달라져서, 상대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기는 했지만 열강들의 세력은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는 광무정권이 독자적인 개혁과 외교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력 균형을 조금이라도 깨는 조치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제재가 돌아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열강의 간섭을 타파하려는 구체적인 시도로는 광무정권이 프랑스계 자본인 운남雲南신디케이트와 체결한 차관 계약이 있는데)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등을 통해 일본의 침략 의도를 체험한 광무정권은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103-4)


"일본공사 하야시는 각국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광무정권 내에서 이번 차관 교섭을 반대할 세력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고종을 직접 알현하는 자리에서 차관교섭이 향후 대한제국에 미칠 해악을 강조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영국, 미국, 일본 삼국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영향력이 대한제국에서 신장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이해관계였기 때문에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정부는 1902년 2월에 운남신디게이트와 맺은 차관도입 계약의 이행 거부를 선언하게 되는데, 이는 달리 말하자면 차관을 제공하는 나라의 경제적 지배를 의식해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이 제공하는 차관을 선호했던 이용익의 노선이 1902년 1월 30일에 영일동맹을 체결한 일본외상 고무라의 노선에게 패한 것이다. 열강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 외자도입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광무정권은 외자도입을 추진하는 와중에도 많은 부작용을 낳는 백동화 발행을 늘려갈 수밖에 없었다."(106)


"대한천일은행의 본점 경영진은 크게 네 가지 계통에서 충원되었다. 첫째, 민병석·이근호·최석조와 같은 황실 측근의 관료 및 재무관료, 둘째, 김기영·홍정섭 등으로 대표되는 개성상인, 셋째 조진태로 대표되는 시전상인과 경성의 대상(大商)인 김두승·백완혁, 넷째 인천 객주 출신의 김종례 등이다. 나머지 임원들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전환국 전·현직이 대한천일은행의 운영을 주도하거나 참여했다는 사실은 대한천일은행의 설립이 백동화 인플레이션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백동화 유통 확대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자금 조달원인 전환국 관료 최석조를 중심으로 하여 경성·개성·인천의 상인들로 짜여진 대한천일은행의 경영진은 국가와 상인의 협력 관계가 은행 설립의 모태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1902년에 영친왕이 은행장, 광무정권의 재정관리자인 이용익이 부행장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120-1)


제2부 일본제국주의와 은행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주의는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한 '제1차 한일협약'(1904년 8월 22일)을 맺고 재정과 외교 분야의 정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다. 1904년 10월에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타 다네타로가 부임했고 그가 맨 처음 단행한 사업은 대한제국의 화폐발행기관인 전환국의 폐쇄였다. 또한 그에 그치지 않고 메가타는 조선의 화폐와 재정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나갔다. 그동안 인플레이션을 촉발시킨 원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화폐의 침략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던 백동화는 이제 더 이상 발행되지 않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메가타 다네타로의 두 번째 사업은 다음해 1월 15일에 체결된 탁지부와 일본 다이이치은행 간의 '화폐정리 사무에 관한 계약'이었다. 이로써 다이이치은행은 한국의 화폐정리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취급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213)


"일본 정부는 1905년 3월에 칙령 제73호를 공포하여 다이이치은행에게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고, 이 은행은 한국에서 실질적인 중앙은행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다이이치은행권은 칙령 2호에 근거한 금본위제가 아니라 일본의 원화(圓貨)를 발행 준비로 하는 원화본위제 아래에서, 즉 1905년 6월 1일부터 한국의 본위화가 된 다이이치은행권은 금화·금은지금·일본은행태환권 등과 같은 정화(正貨)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산이 들어가 있었다. 식민지 화폐제도를 수립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하나의 이유였고, 식민지 경제의 모순이 일본 경제에 끼칠 위험성을 대비한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화폐정리를 위한 화폐교환 과정에서) 한상韓商들이 재산상의 피해를 입은 것은 2대1로 설정된 구화폐와 신화폐의 교환비가 및 까다로운 교환조건 탓도 있지만, 불안감으로 인해 적절한 재산운용에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214-5)


# 일본이 관여한 주요 조치

1. 대한천일은행을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1911년)

2. 한성공동창고(주) 설립 : 부동산 담보 대출을 시행하여 부동산 중심의 자산구성을 가진 한상들의 금융 경색 완화

3. 한성수형조합 설립 :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어음 발행과 유통을 활성화(신화폐와 일본통화 태환권만 결제수단으로 인정)

→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체제를 안정화시키는데 기여


"조선상업은행의 대출 동향은 식민지 경제의 흐름의 대강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민족적 구분 없이 191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증가했던 미곡 및 포목상에 대한 자금 융통은 식민지적 교역구조라 할 수 있는 미면교환무역의 확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조선회사령'을 실시하여 자유로운 자본 운동을 억제하고 한국을 일본의 식량공급 기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만들고자 했던 조선총독부의 지배정책에 은행자금이 동원되었다. 토목건축업자에 대한 대출 역시 관공서 및 군대 등의 시설을 건설하는 용도로 쓰였다는 점에서 '무단통치'로 명명되는 1910년대 지배정책의 물리적인 기반 조성에 은행 자금이 동원된 것으로 봐야 한다." "특히 1910년대 후반기에 미곡수출이 지나치게 증가하면서 국내 미가가 급등하고, 이에 따라서 수입 면직물의 가격 역시 상승하여 물가가 크게 오르는 등 인플레이션 현상이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상업은행은 계속해서 금리를 인하하면서 미면교환무역을 지원했다."(279)


제3부 식민지 조선사회와 계급


"1910년대의 한인 자본가들의 대응은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첫째, 대한천일은행·조선상업은행의 경영진에 참여했던 김기영·김진섭·홍충현처럼 금융·상업자본에서 금융자본 혹은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을 모색했거나 둘째, 한일은행의 백인기와 민대식처럼 지주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전환한 경우이다. 셋째, 경성방직의 김성수와 김연수처럼 지주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사례이고 넷째는 박승직처럼 중세적 상업자본에서 근대적 상업자본으로 성장한 사례가 있었는데 경성의 여러 포목상 중에서도 그러한 자들이 많았다. 조진태와 백완혁은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1910년대에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배경이 다른 상인이나 지주들에 비해 우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놓인 유리한 환경을 이용하여 자본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은 이유는 한말 이래로 끊임없이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자본의 운동을 도모했던 그들만의 전통이 1910년대에도 그대로 답습되었기 때문이다."(312)


"은행의 경영진이 선택한 자본축적의 길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대한제국의 몰락에 직면하여 관료와의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민간 자본가로 전환한 경우이다. 상업·산업자본가로 전환한 개성상인 김기영과 금융·산업자본가로 전환한 김진섭은 노년의 나이에도 기업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유형은 대한제국과의 유착을 통한 자본증식에 한계를 느끼면서 또 다른 권력층인 친일정치세력 및 일제와의 정치·경제적 유대관계를 통해 관변 혹은 예속적 금융자본가의 지위를 유지한 경우이다. 조진태·백완혁이 이 사례에 해당된다." "대정친목회 회원이던 조진태는 『조선일보』의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1920년 3월 5일에 『조선일보』는 '신문명 진보주의'를 사시로 내걸고 창간되었지만, 일제와 유착해 있던 조진태를 비롯한 대정친목회 인사들로는 민족주의가 고양된 1920년대 전반기의 한국 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할 수 없었다."(313-4)


"한편 전라도 대지주의 자제로서 일본유학을 다녀오고 서울에 정치적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20대 초반의 청년 김성수 주변에 엘리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919년에 김성수는 한국 방직산업의 선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경성방직을 창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한 아시아 시장에서 유럽 상품의 퇴조, 면방직제품의 수요가 풍부한 국내 시장의 여건 등은 당시 한국에서 면방직산업이 발흥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그의 인적 네트워크는 그의 선택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국가의 보호도 받지 않고 시장의 동향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지주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드물고 획기적인 일이었다. 조기준의 지적대로 김성수는 마셜이 언급한 '개척적인 기업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김성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식민지 조선 사회의 여론 형성에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동아일보』를 1920년 4월에 창간했다."(322-3)


"이러한 그의 행보는 지대나 이자 수익에 익숙해 있는 지주 혹은 자본가들과 달랐다. 그 덕택에 그는 약관의 나이 20대에 지주·교육·산업·언론자본 등 복합적 성격을 지닌 부르주아로서 식민지 조선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인사로 부상했다." "김성수는 친일적 문명개화론자, 애국계몽운동 세력, 대상인과 지주층, 그리고 일본유학 경험이 있는 청년 지식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실로 다양한 세력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으며, 그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자본주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세력의 핵으로 부상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부르주아 1세대에 속하는 시전상인 출신 장두현과 미곡상인 고윤묵이 김성수의 인적네트워크 안에 들어간 점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그의 주변에 모이게 한 것은 그가 부르주아 1세대까지 포함하는 자본가 사회의 지도적 위치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323-5)


"(1923년에 일어났던 물산장려운동은 의욕이 넘치는 산업부르주아의 정치적 능력을 대중적으로 검증하는 시험무대였다.) 『동아일보』는 조선인들이 살기 위해 당면과제인 조선사람의 생산력 발달─민족경제의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민중은 민족적 대의로 개인의 경제적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조선인이 만든 상품을 사야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논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항했던 여러 논객들 역시 그러한 논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민중지향적 계몽운동가나 산업부르주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동아일보』 모두 '개인'보다는 전체-민족을 강조하는 점에서 일치했다. 그들 모두 조선인의 경제력이 향상되면 민중의 절박한 생활현실이 개선될 수 있다는 단계론적 진화론적 자본주의 근대화론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또 비판적 견해들에 대해서는 계급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만 치부했고, 비판세력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던 점에서도 비슷했다."(334)


"물산장려운동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조선인들의 자본·기술·경제적 역량·자본주의적 단합력 부족·경제상 정치적 실권이 없는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이미 운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문제들이고, 사회주의자들의 조직력이 일반 민중의 소비패턴까지 규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산 상품의 가격 폭등과 같은 시장질서의 왜곡을 통제할 지도력을 결여한 운동주도세력에 있었다. 물산장려운동 주도세력은 민족적 명분만을 민중에게 강요하고, '우리 것을 사라'고 외쳐댈 뿐이었지 민중의 신뢰를 얻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인도의 스와데시 운동이 민중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민회의와 간디라는 정치적·도덕적 구심점이 있었지만, 이에 비해 물산장려운동에서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던 개인 혹은 단체가 없었다."(336)


"일본과 조선은 같은 동족이라는 '일선동조론'을 매개로 한 '내선일체론'은 조선인 자본가가 '민족'을 대신하여 일본·황국(皇國)을 국가로 대체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였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이란 가치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내선일체론'은 차별 받고 있는 민족을 위한 실천 이념이었다. 자본가 계급의 이데올로기인 '문화적 민족주의'는 그러한 논리를 더욱 다듬었다." "1920년대 문화운동을 대표하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의 표면에는 독립을 위해 우리 민족이 무엇을 고치고 준비할 것인가에 적극적인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망국에 이르게 한 '조선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인식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는 계기만 주어진다면 '내선일체론'을 수용할 터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황국신민'관, 그리고 민족 차별을 벗어나기 위해 청년들에게 침략전쟁에 학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행위는 아마도 그의 입장에서는 크게 모순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346-7)


"박흥식의 식민지 파시즘 수용은 개인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현준호는 호남의 대지주였고, 경성방직과 『동아일보』에 이사 및 주주로 참여했으며, 또 박흥식이 운영하는 화신무역의 대주주였다. 박흥식은 경성방직의 이사 및 주주로 참여했으며, 김연수 및 경성방직은 화신무역의 대주주였다. 한말부터 친일적 금융자본가로 조선실업구락부 창립의 주역이었던 한상룡은 김연수가 설립한 남만주방적(주)의 발기인이었고 김연수는 조선생명보험회사의 주주였으며 조선실업구락부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인 대자본가들은 서로 사업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산업부르주아가 주도하여 설립한 『동아일보』 창간사에 표방했던 자유주의·민주주의 이념이 동료 부르주아에 의해─그리고 스스로에 의해─철저하게 부정되고 있었다. 또 최초로 정치적 주체임을 자임했던 부르주아 세력은 '지배할 권리'와 '돈 벌 권리'를 맞바꾸었다."(350)


결론


"한국사에서 부르주아의 기원을 탐색할 때 피해갈 수 없는 문제는 근대로 이행할 수 있는 사회적 역동성이 과연 조선왕조 사회 내부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근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가능케 할 내적 가능성을 농업적 경로에 제한하지 않고 상업적 경로까지 확장시킨다면 한국의 근대이행에 대한 이해는 훨씬 풍부해질 수 있다. 상업적 경로를 고려한다는 것은 단지 관권의 비호를 받고 있는 독점적인 시전상인에 대항하는 자유상인을 연상시키는 경강상인 같은 사상(私商) 즉 상업부르주아의 성장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17세기 이후 상업변동에서 성장한 상인과 국가의 상호의존적 관계 그리고 그것의 사회적 대응을 시야에 넣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아래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조선왕조 사회의 내적 변화를 제한한 요인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근대화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기도 했다."(354)


"상인들의 자본과 지식은 조세제도 개혁과 화폐금융정책에 반드시 필요한 근대 금융기관 설립의 씨앗이었고, 1903년 중앙은행 창설을 주도하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대한천일은행에서 중앙은행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근대 금융기관 설립이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세·화폐제도 개혁을 위시하여 사회경제 분야의 개혁을 위해 금융근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역대 어느 조선왕보다 강한 권력을 소유하게 된 고종이 의정부 내의 반대를 물리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양반관료들의 정치 공세에도 불구하고 상민 이용익을 재상에 등용하여 광무정권의 근대화를 추진하게 한 것은 고종의 권력 기반이 안정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였다. 전제황권의 수립은 정치제도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볼 때 반동적인 현상이겠지만, 그것 또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개혁과정에서 나타나는 정부주도성에 해당되는 일이다."(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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