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 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박태균.정창현 지음 / 역사인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현준혁 - 해방 후 첫 정치 암살의 희생자가 되다


"해방 후 테러의 첫 희생자가 된 현준혁은 1906년 평안남도 개천군의 빈농 가정에서 출생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해 중동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학하다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해 1929년 3월에 졸업했다. 이정도 되면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할 수 있다. 경성제대는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을 위해 만든 대학이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들어가기가 아주 힘들었다. 게다가 빈농 가정 출신으로 입학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한 그는 1929년 5월 대구사범학교 교사가 되어 심리학, 영어, 한문, 교육사를 가르치다 1930년 가을부터 교내 비밀결사인 사회과학연구그룹을 지도했다." "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32년 4월 1일 제4기생으로 대구사범에 입학했다. 바로 그해 4월 교사 현준혁은 학생들과 함께 항일 동맹휴교를 주도했다."(32-3)


"현준혁 암살의 순간을 보면 매우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준비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현준혁이 타고 다니는 차, 그의 일정, 그리고 그의 동선까지 파악해놓은 것을 보면, 이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최소한 일주일 이상은 계획을 세워야 했고, 암살을 실행하는 1선과 2선의 행동대원들은 그의 얼굴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사진 자체가 귀하던 시절이었고 선명하게 인화하기도 어려운 당시 상황에서 누가 현준혁인가를 인식하고 가려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군의 만행을 방조했기 때문에 암살했다고 주장한 백근옥의 증언보다는) 오히려 러시아 문서가 기록하고 있듯이 "현준혁이 도경무사령부를 도와 민족주의자들의 치안대를 해산시키려고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일제 말 염응택이 결성한 대동단이 해방되면서 "제2독립운동으로 반공산주의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고 현준혁을 암살했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38)


"염응택은 백의사를 정식으로 출범시킨 뒤 일제 때부터 도움을 받은 신익회의 측근 조중서 등을 만나 백의사의 근간(根幹)과 활동 방향을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먼저 이북에서 북조선공산당의 책임자로 떠오른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을 암살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거사에 실패한 이들은 다시 1946년 3월 13일 자정 무렵 강양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의 집을 습격했다." "암살대원 가운데 최기성은 보안대원들과 교전 중 사망했고 이희두, 김제철 등은 체포됐다. 이성렬은 간신히 체포를 면해 3월 말 서울로 돌아왔다. 체포된 대원들 속에서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직인이 찍힌 신분증과 임시정부 내무부장 명의로 발행된 '국자(國字) 포고'(임시정부의 미군정 접수포고문)가 나왔다. 암살 시도에 김구 주석이 개입했는지의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이후 남북연석회 때까지 북측이 김구를 '살인·테러·방화의 괴수'로 지칭하며 비난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45-6)


"이영신의 추적에 따르면, 염응택은 신익희로부터 미군 정보국에 몸담고 있는 이순용을 소개받으면서 미군 정보기관과 연결됐다. 이순용은 재미교포로 미군에 입대해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CIC 소속 중사였고, 정부 수립 후 한국 정계에 들어와 이승만 정권 아래서 내무부 장관에 기용되기도 했다." "백의사의 활동은 대북 정보 공작뿐만이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깊이 개입했다. 실리 소령이 기록한 것처럼 백의사의 "주요 목적은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반정부' 정치인들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반정부' 정치인은 김구와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거나 따르지 않는 정치인을 의미했다."(48-9) "(현준혁 암살사건이) 해방 초기 정국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발생한 현준혁 암살사건은 그 후 38선 이남에서 주요 정치인들에게 닥칠 연속적인 비극을 알리는 첫 총성이자 친일파들에 의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왜곡된 현대정치사의 서막이었다."(51)


2 송진우 -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 발표와 함께 쓰러지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 종로구 원서동 고하의 집에서 열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중 여섯 발이 송진우의 안면과 심장, 복부를 관통했다. 1945년의 말미를 장식하면서 1946년 이후 민족 분열의 가장 커다란 원인이 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이 발표된 지 3일 만의 일이다."(56) "재판은 끝내 암살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단지 암살자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는 점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송진우가 미군정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당시 미군정의 여당이라고 불리던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였기 때문에, 그의 암살범들이 극형에 처해지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한국에서 보수우익 세력들을 지원하고자 했던 미군정으로서는 보수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송진우의 목소리와 그의 존재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초기 미군정의 운영에 치명적 손상을 주었다."(60-1)


# 송진우 암살사건의 의문점

1. 장덕수·여운형 암살사건 때와 달리 침묵으로 일관한 미군정

2. 경찰의 이상한 수사방식 :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직감으로 암살범들을 체포했다고 주장

3. 재판부가 가벼운 형량 선고 : 주범 한현우는 사형에서 징역 14년으로 감형


"미군정은 당시 한반도에서 좌파 세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한국민주당을 파트너로 선택했지만, 한국민주당이 친일파·지주의 정당으로 비난받으면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자 더 대중적이고 반공적인 파트너를 찾게 되었다." "여기서 선택하게 된 것이 바로 이승만과 중국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중으로부터 명망을 얻고 있었고,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따라서 이들이 국내에 들어와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인 인사와 손을 잡을 경우 조선공산당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파트너를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측은 임시정부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이들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사는 너무 민족주의적이고, 너무 고집쟁이였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한국민주당 인사들의 마음은 이미 미군정의 지지를 받던 이승만 쪽으로 기울었고, 더 크게는 미군정에 기대고 있었다."(73-5)


"1946년 1월 초 주요 정치 세력들이 모여 정치 행동의 통일을 모색해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역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이 회합은 모스크바 3상협정에 대해 우리 민족이 통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 회합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4당 코뮈니케'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임시정부 측의 강력한 반탁 입장과 좌익 세력 일부에 의한 4당, 5당 회합에 대한 반대 등으로 실패하였고, 임시정부가 반탁운동을 내걸고 조직한 비상정치회의에 한국민주당, 국민당 등이 참여하면서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국민주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1월 7일 당의 수석총무로 김성수가 당선되면서 당내 분위기가 더욱 보수적으로 선회하였다는 점이 이 회합의 결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85-6)


"송진우 개인으로 보더라도,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동아일보」 중심의 민족운동을 전개했지만, 민족주의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던 여운형,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던 원세훈·김병로·홍명희 등과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좌우합작'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그의 죽음은 1946년 2월 초 이후 38선 이남의 정치 세력이 좌우익, 즉 모스크바 3상협정 지지 세력과 반탁 세력으로 나뉘어 격렬한 쟁투를 벌이게 되는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송진우의 죽음 이후 임시정부 세력은 1945년 말 이후 여타 우익 세력의 큰 반발 없이 '반탁'을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일시적이나마 정국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의 3상협정 지지 선언과 함께 전개된 찬·반탁 정국은 결국 좌우익 간의 골을 깊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수우익 내부에서 임시정부의 주도권도 미군정이 주도한 민주의원의 결성과 함께 이승만에게 넘어갔다."(86-7)


3 여운형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와 함께 생을 마감하다


"여운형은 대중적으로 명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정파의 지도자들은 그를 항상 경계하였다. 여운형이 건준을 조직하고 참여를 권유하자, 송진우를 비롯한 보수우익 민족주의자는 이를 거부했다. 여운형의 주도권 장악을 두려워한 보수적 민족주의자는 건준 안에서 여운형과 공동보조를 맞추기보다 여운형을 종이호랑이로 만들고 조직을 장악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여운형은 미국의 이승만과 중경의 임시정부 세력이 귀국하자 이들과 협조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운형이 상당한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좌파 정치인들과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런 여운형과 연합하기보다는 그를 경계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도 여운형과의 연합 가능성이 있었지만, 대중적 인기가 높은 여운형을 견제했다. 좌파 주도권이 여운형에게 넘어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남조선노동당 결성 과정에서 그를 고립시킨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99)


"각종 증언과 회고록, 그리고 당시의 상황 등을 통해서 보면 여운형의 암살범은 한지근이고 그 외 4~5명이 암살 현장에 행동대원으로 투입됐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김지웅과 염응택이 있었고, 이들 위에는 장택상이 자리 잡고 있다." "백의사의 고문이었다는 김지웅은 김구 계열의 인물로도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시기 만주에서 일본 헌병대 공작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악질 친일파였다. 또한 신익희 역시 임시정부에 활약했지만, 1946년 말 김구를 제치고 이승만이 독립촉성국민회를 장악하도록 만든 일등공신으로서 1947년에 가서는 김구보다 이승만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1947년 시점에서 백의사가 사건의 배후에 있다면 임시정부 요인보다는 김지웅이나 신익희, 그리고 그 상부 지도자에 연결될 가능성이 더 높다. 직접 연결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김지웅이나 염응택으로 추정되는 중간 브로커에게 암살을 의뢰했을 가능성도 있다."(119-20)


"그의 암살은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46년 말까지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정치 세력 재편 계획의 일환으로 입법 기구의 설치를 목표로 한 움직임이었지만, 1947년 초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남북을 통틀어 우익과 좌익 세력을 모두 아우른 통일민주정부를 수립하려는 진정한 민족주의운동이었다." "여운형의 죽음이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 좌절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죽음은 이제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합의를 추대할 만한 지도자가 없음을 의미했다. 소련이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이승만과 김구, 미국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김일성을 고려하면서 정치적 합의를 할 수 없었다." "여운형의 죽음은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는 세력들에게는 내적으로 중요한 장애물 하나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123-5)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여운형의 암살 시기를 즈음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척결을 위한 법안이 상정되어 논의된 사실이다. 당시 경찰에는 일제강점기 때 경찰 간부로 활동한 인물이 많았다. 미군정은 합리주의와 실용주의의 원칙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친일을 했을지라도 경찰로서 경험이 있는 인물을 대거 등용하였다." "(경찰이 입법회의 의장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한 여운형의 신변을 노리는 음모를 꾀하던) 당시의 경찰 수뇌부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모두 한국민주당 당원 출신이다. 이들은 경찰에 들어가면서 미군정의 요청으로 한국민주당에 형식적인 탈퇴를 하지만, 실제로는 막강한 힘을 가진 경찰력을 한국민주당의 활동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유고에서 장택상은 자신이 이승만을 거의 전적으로 추종했으며 그 외의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밝혔다."(128-9)


"여운형의 암살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또 하나의 주체가 있었다. 바로 당시 38선 이남에서 유일한 권력체인 미군정이다. 여운형은 미군정을 찾아가 자신에 대한 경호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사실에 대해 항의하고 자신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취한 일은 여운형에게 지방으로 피신하라고 하는 피동적인 권고만 했을 뿐이다. 미군정은 1946년 중반 이후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김규식과 여운형을 새로운 정치적 파트너로 선택하였다. 그런데 김규식은 어느 정도 신뢰한 반면 여운형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이 점은 여운형이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민주의원에 참여하지 않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을 때, 그리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참여하지 않았을 때 잘 나타났다. 민주의원과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의 남한 통치 정책에 가장 중요한 기관이었는데도 여운형은 미군정의 참여 요구를 거부했다."(131-2)


4 장덕수 - 죽어서 김구를 법정에 세우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한 이유로는) 첫째로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오랫동안 주둔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주한미군은 소련군과 함께 원래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임시적으로 주둔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항복했으므로 한국 땅을 떠나야 했다. 둘째로 미국은 한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킬 만한 여력이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국익의 관점에서 봤을 때, 보다 중요한 지역에 대한 원조에 집중해야 했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은 최우선 순위는 아니었다. 여기에서 미국은 딜레마에 빠졌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나간다면, 1945년 9월부터 진주하여 3년 넘게 운영한 미군정의 노력이 성과 없이 물거품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국제기구에 한국 관련 문제를 이관했다. 국제기구의 감시하에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한반도의 전부가 아닌 일부에서라도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겠다는 것이다."(140-1)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한국민주당이었다. 한국민주당은 미국이 하고자 하는 바와 가장 이해관계가 일치되는 정치 세력이었다. 비록 그 안에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전쟁에 적극 협력한 사람도 있었지만, 당시 미군정으로서는 한국민주당만큼 신뢰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 없었다." "이러한 미국의 대안에 대해,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정권을 잡고자 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전혀 손에 잡힐 것같이 보이지 않던 '정치권력'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가 정계를 뒤덮고 있었다. 이제는 그 죽음의 성격 자체가 달랐다. 그전까지는 단독정부 수립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추구하느냐의 분열로 일어난 테러였지만, 이제부터는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권력의 주도권을 둘러싼 테러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141-2)


"장덕수 암살사건의 주범 박광옥 경사는 한국민주당 김성수 집에서 일하는 식모의 아들로, 김성수가 조병옥에게 추천해서 경찰이 되었다. 암살사건의 용의자들은 윤봉길 의사를 흉내 내어, 거사 직전 태극기를 배경으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나는 조국 대한의 완전 독립을 위하야 혁명단원으로서 내 생명을 바치기로 서약함. 민국 29년 8월 26일 대한혁명단 OOO"이란 내용이 혈서를 가슴에 붙인 채 사진을 찍었다." "(암살의 배후로 밝혀진 대한학생총연맹은) 1947년 6월 운형궁에서 발족했으며,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총재로, 조소앙·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대한학생총연맹의 강령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살리고, 임시정부를 보호 육성하며, 이북의 '적색 마적'을 분쇄하고 , 남한의 단독정부 음모를 분쇄한다는 것이었다." "대한학생총연맹의 성립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올리는 것에 반대하지 않은 (김구, 엄항섭, 조소앙 등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150-1)


"이승만은 1947년 11월 이내에, 즉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결의하기 이전에 38선 이남만의 선거를 실시하자는 '조기 선거론'을 개진하였다. 만약 유엔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깊숙이 개입한다면 자신보다는 김규식을 지지할 것을 걱정했던 것일까? 조기 선거론은 이후에도 이승만의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다. 1950년과 1954년 총선거, 1956년과 1960년의 대선에서도 항상 조기 선거를 주장했다. 다른 쪽에서 선거 준비를 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한 전략이었다." "한국민주당은 미군정과 보조를 맞추어 유엔에 의한 38선 이남에서의 선거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동시에 신중한 준비를 통해서 선거에 임하고자 한다는 입장에서 이승만과 의견을 달리했다." "만약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에서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에 강력한 지지를 보낸다면, 이승만이 최고 지도자의 위치로 부각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권력은 상당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172-3)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지도자는 이승만이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도자는 김구였다. 김구는 암살사건의 증인으로 공판 과정에서 재판에 서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이 추진한 민족대표자대회와의 합동을 추진하던 일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찬물'은 그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는 시점에서 김구에게 쏟아졌다는 점에서 큰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176) "남북협상을 결심하는 것은 김구에게 너무나 힘든 결정이었다. 그는 평생을 반공주의자로 살아온 사람이며, 그의 추종자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장덕수 암살사건이 그의 노선 전환에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의 작은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암살의 배후를 김구로 몰아가려고 한 누군가의 음모는 오히려 김구를 민족의 지도자 반열에 올려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178)


5 김구 - 38선을 베고 쓰러지다


"(암살 39일 만에 나온) 공소장의 내용은 백범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암살자의 의중을 이해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김구가 반정부 활동을 했고, 공산주의자에게 동조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안두희는 당연히 김구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기상천외한 공소장이 나온 것이다."(188-9) "공소장만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현장범의 체포와 조사 모두 상식을 벗어났다. 암살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경교장에 도착한 헌병들은 안두희를 연행해 육군 헌병대에 수감했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검사장이던 최대교는 이렇게 회고했다. "수사의 기본인 현장 조사는 물론 안두희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 잠옷 차림의 신성모 국방장관은 김구 암살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 민주주의가 됐군' 하며 짤막한 한마디를 던졌다." 심지어 관할 서울지검도 모르게 검찰총장이 직접 (김구가 위원장이던 한국독립당 간부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190-1)


# 안두희 재판 :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의 비밀당원이라는 사실, 당 내에 이견이 있었다는 사실, 한국독립당이 이승만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일사천리로 진행


"성명서에 나타난 이승만의 관심은 오로지 김구 암살 직전에 발생한 국회 프락치 사건과 연계되지 않기를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김구의 암살범을 두둔하였다. 그는 암살범의 살해 동기를 공개한다는 것은 "그 생애를 조국 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이 성명을 통해 김구의 암살이 곧 한국독립당 내에서 "조국을 위하여 가장 유익"한 행동 노선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차이에 의해 표출된 것으로 표현했다." "정작 암살범 안두희는 취조도 받지 않은 상태였고, 특무대로 이송돼 환대를 받고 있었다. 그는 26일 헌병사령부에서도, 27일 군특무대에서도 본격적인 취조는 받지 않았고 치료만 받았다. 특히 6월 27일 특무대로 이송된 후에는 김창룡 특무대장이 직접 찾아왔다. 암살의 배후를 추긍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커피 마시면서 아주 화기애애한 기분으로 경어를 쓰는 반가운 회동"이었다."(192-3)


"김구의 암살 배후를 추적하는 작업은 해방 정국 때 암살된 다른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세워진 정권들이 모두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외세와의 불평등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에게 김구와 같은 민족주의자에 대한 향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김구의 암살에 대한 논의가 곧바로 민족주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암살범이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배를 두드리며 잘 살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안두희는 처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곧 반공투사라 하여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아 출소하였으며, 곧이어 '형 집행면제'를 받아 육군에 복귀하였다. 1950년대에는 군에서 제대한 후 강원도 양구에서 군에 부식 납품을 하면서 살았다. 그는 한때 강원도 내에서 소득세 2위를 기록한 인물이기도 했다."(197)


"1948년 12월 말까지 남한 주둔 971 CIC 파견대에서 근무한 실리 소령은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문서를 작성하여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안두희와 백의사에 대해 "안두희는 이 비밀조직(백의사)의 회원이자 혁명단 제1소조의 구성원이다. 나는 그가 한국 주재 CIC의 정보원(informer)이었으며, 후에는 요원(agent)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212) "암살단을 조직적으로 관리한 국방부 제4국 정보과장이 백의사의 중간 간부였다는 점은 이 암살이 조직적 차원에서 백의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김명욱이 백의사 정보국장이었으며 김구 암살을 국방부 차원에서 담당한 실무 핵심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백의사 출신'의 간부들이 김구 암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때 이들이 하는 일을 '정보 공작 전문기관'인 백의사 총사령 염응택이나 핵심 간부들이 몰랐을 가능성은 전무하다."(215)


"김구는 1948년 9월 9일, 38선 이북에서 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대해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이후 공식적인 정치 활동을 대폭 줄였다. 단지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는 남과 북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정치 세력을 결집하여 앞으로 평화통일을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암살되기까지 1년여 간, 1919년 임시정부에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매우 소극적인 정치 활동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어느 쪽의 정부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외국 군대의 철수와 평화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을 바란다는 성명만을 발표하면서 앞으로의 정치 활동에 대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김구가 암살되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가 주도적으로 정치를 하던 시기에는 어떠한 위험도 넘긴 그가 앞으로의 정치를 준비하고 있는 시기에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222)


# 1949년 6월이라는 암살 시점의 의미

1. 1948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진 암살 시도의 마무리 

  1) 여순 반란사건(1948.10)의 배후로 남로당과 더불어 김구의 지지 세력을 지목

  2) 8연대 2개 대대의 월북 사건(1949.5)의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지목

  3) 암살 다음날(6.27) 북한에서 발표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과 김구를 연계

    → 3가지 사건 모두 김구를 친공산주의자로 매도


2. 이승만 정권이 맞닥뜨린 정치적 위기들 타파

  1) 반민특위 활동과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평화통일 주장을 분쇄하기 위해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국회 프락치 사건' 사주

  2) 1949년 말, 신익희의 대한국민당이 한국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한 상황

  3) 여순 사건과 월북 사건에서 나타난 군부의 반反이승만 움직임

  4) 기정사실화된 주한미군 철수

  5) 인플레와 생산 침체, 농지 개혁의 미실시로 쌓여가는 대중의 불만


에필로그


# 암살사건의 공통점

1. 총을 이용한 개인의 저격으로 암살 실행

2. 장덕수 암살범을 제외하면 모든 암살범이 체포되었으나 조기 석방

3. 암살 주범은 모두 체포되었지만 배후는 오리무중

4. 암살 배후와 관련된 의혹에 항상 경찰이 등장(김구 암살에는 군부가 연루됨)

5. 백의사가 직간접적으로 전부 연관

6. 암살을 실행한 이들은 반공 성향이 강한 이북 출신의 청년들이었고, 배후로 거론되는 백의사, 경찰, 군 고위 간부들은 대부분 친일 경력 보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