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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동노 외 옮김 / 창비 / 2001년 10월
평점 :
3장 망국, 1905~1945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자유재량을 가졌음은 물론 도움의 손길까지 얻었다. 냉혹한 외교관으로부터 진지한 학자와 기독교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서구인들이 일본이 한국에서 맡은 "근대화의 역할"을 지지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긴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왜 20세기의 첫 10년간 각양각색의 영국인들이 하나같이 일본을 칭찬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영국은 쇠퇴하고 독일과 일본은 전진하는데, 독일은 위협적인 존재였으나, 일본은 1902년 이후 영국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150년간 지속된 두 번의 거대한 산업화 물결이 지나간 후, 영국은 신흥 산업열강들과 쇠퇴해가고 있는 산업기반에 포위된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토론에서 열띤 자기분석이 두드러졌고, 효율성이 표어가 되었다." "영국 학자들은 효율성과 생산성의 모델을 찾고 싶어했으며, "국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이 배워야 할 교훈을 줄 것으로" 생각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주목했다."(204-5)
"대다수가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한국인들이 식민독재에 부역했으며, 해방 후에도 너무나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관행을 자신의 행동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양자가 완전히 적대적이고 갈라선 관계였다고 할 수 없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세계의 관심을 급속히 끈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시아의 많은 진보주의자들에게 떨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중국 민족주의의 창시자인 쑨원과 많은 열렬한 중국 청년들이 도쿄에 몰려들었으며, 한국의 많은 학생들과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내에서는 일진회라는 단체가 일본의 정책을 후원하는 이 새로운 대중조직에 수많은 한국인들을 끌어들였다." "한일합방은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일본과 함께 근대화를 이루려 한 진보주의자들의 마지막 희망을 지워버렸지만,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의 유명한 '21개조 요구'와 그 요구가 유발한 중국의 5·4운동 때까지는 다른 아시아 근대화론자들의 꿈을 억누르지는 않았다."(209)
"처음에 일본은 한국의 상업을 직접 장악할 작정이었다. 식민지 당국자들은 1910년 한국 회사의 결성을 금지하고, 한국인이 납입하는 자본의 규모를 제한하는 법들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일본 자본이 이미 상당히 우세를 점한 다음에 나왔다. 일본인이 소유한 회사는 전체의 70%를 차지했으며, 한일 합작회사는 10.5%, 순수한 한국인 회사는 18%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0년대의 '문화정치' 아래서 한국의 상업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문화정치가 한국 산업에 가져다준 가장 중요한 성과는 한국의 산업이 곧 전체 동북아시아 지역경제에 대한 일본의 '행정적 지도' 내에서 통합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은 중심부와 배후의 경제를 연결시키는 계획에서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바로 이때부터 오늘날까지도 동북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국가의 산업전략에 기반한 수출주도형 개발이라는) 일본 특유의 구성적 자본주의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230-1)
"해방 이후 어떤 책이나 신문을 펼치더라도 박흥식을 반역의 원흉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본의) 협력자로 꼽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거물 자본가에게 정치적으로 원칙이 있는 행동을 기대한다는 것은 분개한 민족주의자들의 머릿속에서나 떠오를 법한 생각일 것이다. 뻔뻔스러운 친일파(이런 사람들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었다)인 박흥식은 1940년대 후반에 한국 최고의 갑부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1948년 국회에 의해 부역자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1949년 4월 이 파렴치하지만 교활한 기업가는 100만 원의 보석금을 토해내고 다시는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다. 기억해두어야 할 더욱 중요한 점은 김성수와 박흥식 같은 사람들은 많은 식민지들(예컨대 자바, 미얀마, 베트남)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일부 한국인들이 내가 19세기 말 미국의 악덕자본가들을 싫어하듯이 그들을 싫어하겠지만, 1930년대에 그들은 급진적인 변화의 선구자들이었다."(243)
"1930년대 중반에 일본은 동북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중공업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다수의 식민열강들과는 달리 일본은 식민지에 중공업을 건설했으니, 생산수단을 들여와서 식민지의 노동력·원자재와 결합시켰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에는 제철소, 자동차공장, 석유화학공단, 어마어마한 수력발전 시설이 있었다. 그 지역은 일본이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고 자국의 국내시장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국경은 초국가적으로 통합된 새로운 생산에 비해 덜 중요해질 정도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외적으로 유인되어 한국의 이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에 봉사했다. 따라서 이런 변화들은 일종의 과잉발전을 보여주었다. 똑같은 변화가 한국사회 전반에는 저발전을 초래했다. 이들 변화는 외부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상류계급과 경영계급은 번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발달은 지체되거나 혹은 일본의 뜻에 따라 갑자기 비대해졌다."(247)
"1942년이 되면 노동은 오직 징집되거나 징용되었을 뿐이다. 한국 노동자들은 일본의 산업적·군사적 팽창의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는 인력자본이 되었다." "전쟁이 지역적·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됨에 따라 한국인들에게 처음으로 군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비록 대부분은 징집된 보병들이었지만, 소수는 장교의 지위를 획득했으며 몇몇은 고위계급에까지 올랐다. 일본의 광범위한 전쟁 노력은 또한 제국 전역에서 노동력의 부족을 초래했다. 한국에서 이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한국인이 관료직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상당수의 한국 기간요원들이 중앙정부, 지방행정기관, 경찰 및 사법 기구, 경제계획기구, 은행 같은 곳에서 행정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이 일이 식민지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일어남으로써 불화를 일으키는 유산을 낳았다. 이때는 일본의 통치가 가장 가혹했던 시기로 한국인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249)
4장 열정, 1945~1948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을 후원한 미국의) 결정은 어떤 정치단체에도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국무부의 지침이든 불평등한 토지상황과 지주들의 대일협력에 대해 경고한 미국인들이 가지고 온 '육해군합동정보연구 75번'의 지침이든, 점령군의 지침에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니스트와 베닝호프와 하지가 이런 사람들을 좋아한 까닭은 모든 대안들, 특히 (미국인이 으레 정의하는 바의) 중도에서 좌측에 있다고 여겨지는 정치집단이면 어떤 것이든 더 나쁜 거 같았기 때문이다. 훨씬 나중에야 하지 장군은 니스트 대령의 상투적인 반응과는 반대로 한국의 정치상황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1947년 말에 하지는 그 나름의 소박한 방식으로 미국이 처한 딜레마의 본질을 포착했다. 미국은 장점이라고는 반공주의밖에 없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토착좌익들을 반대하는, 불운한 두 극단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한국사회에 들어설 토대가 전혀 없는 자유주의적인 결과를 바랐던 것이다."(273)
"조지 마샬 국무장관은 1947년 1월 말 딘 애치슨에게 보내는 비망록에서 "확실한 남한 정부를 조직하고 남한의 경제를 일본의 경제와 연결하는 정책을 입안하라"고 말했다. 참으로 적절한 말이었다. 몇개월 후 윌리엄 드레이퍼 육군장관은 "한국과 일본은 하나의 자연스런 무역·통상 지역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영향력이 한국에서 다시 확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애치슨은 국무장관 대행으로 행한 1947년 초 의회의 비밀증언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이미 분할선을 그었으며, 그리스와 터키를 원조하는 '트루먼 독트린'의 모델에 따라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주요한 프로그램을 위한 자금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봉쇄란 일차적으로는 정치적·경제적 문제, 즉 소련의 주변에 자족적이고 생존가능한 정권을 배치하는 문제라고 이해했다. 그는 두 동강이 난 한국경제가 "거대한 초승달"의 일부로서 일본의 복구에 여전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296)
"한민당은 부유한 지주와 지방유지의 조직으로서, 그 당원들 대다수의 출신성분인 옛 양반 귀족과 마찬가지로 자원 배분과 부의 지배권을 두고 중앙행정부 권력과 싸웠다. 이승만의 대통령직과 한민당 사이의 긴장은 조선왕조에서 국가-사회간 갈등에 대한 제임스 팔레의 분석과 흡사했다. 이승만은 왕의 역할을 했고, 의회는 토지귀족의 이익을 결집시켰다. 그것은 한국 특유의 보수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새 병에 든 묵은 술이었다. 토지와의 연을 끊고 산업에 투자한 한민당 당원들한테는 이런 긴장이 크지 않았는데, 그것은 국가 관료제도가 그들과 결탁해 기득권의 재산을 배분하고 초기의 수입대체 산업화 계획을 통해 토착산업을 부양하기 위해 보호장벽을 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를 얻기 위해서는 과거처럼 국가의 보증이나 관료층과의 유대가 필요했으며, 한민당 기업가 대다수는 김성수처럼 전통적 토지권력의 특권과 지위를 산업투자가 가져다주는 더 큰 수입과 결합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303)
5장 충돌, 1948~1953년
"1945년 8월 한국이 분단되기 전에는 한국전쟁이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해 전쟁은 그 이후부터 줄곧 생각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북한의 침략에 대한 최초의 암시는 1950년에 온 것이 아니라 하지 장군이 워싱턴에다 공격이 임박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알렸던 1946년 봄에 왔다. 남북한의 유력한 인물들이 통일전쟁을 심각히 고려했다는 최초의 증거도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겨우 6개월밖에 안 된 바로 이 해방 초기에 나타났다. 그러나 미국도 소련도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는 한, 증오의 대상이 된 38도선을 제거하는 군사행동을 지지하려 들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열띤' 내전의 시발점을 소련군은 이미 철수했고 미군이 철수중이던 1949년 초 이후로 잡을 수 있다. 게다가 1949년은 중국공산당이 승리한 해였다.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남북한 양측에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333-4)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이승만 정권이 거둔 하나의 절대적인 성공이 있다면, 그것은 1950년 봄에 이르러 남한 빨치산을 명백히 패배시킨 것이었다. 1년 전만 해도 유격대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증대될 듯이 보였었다. 그러나 1949년 가을에 시작된 진압작전으로 유격대는 많은 사망자를 내어 그들의 활동 재개가 예상되는 시기─1950년 초, 봄의 새싹이 돋아날 즈음─에 더이상 유의미한 작전을 재개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과 (정책입안 책임자인) 조지 케넌 양자는 내부 위협에 대한 진압능력을 이승만 정권의 절제력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보았다. 이것이 제대로 된다면 미국이 지원하는 봉쇄정책도 제대로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이승만 정권은 또하나의 국민당, 즉 '소(小)중국'으로 간주될 것이었다." "나약한 정책은 미국의 지지를 상실할 것이지만 그 위협을 잘 처리하면 "한국은 매우 존중받을 것이다"라고 굿펠로우는 썼다."(345)
"6월 25일 당일이나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이 전쟁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나라간의 국경을 침범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전의 투쟁이 시작된 지점도 아니었다. 이데올로기적인 폭발성으로 충만한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은 분명 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내전에 관한 질문이 아니며, 단지 동족상잔의 투쟁으로 직접 고통을 당한 세대들의 애간장을 쥐어짤 뿐이다. 미국인들은 남부가 썸터 요새에서 먼저 발포했다는 사실에 더이상 관심을 갖지 않지만 노예제도와 남부의 연방탈퇴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아무도 누가 베트남전쟁을 시작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남북의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이 마침내 그랬듯이 내전은 혼자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지혜를 깨닫고 화해할 것이다. 미국인들이 그렇게 하는 데 1세기 가량이 걸렸다. 그러므로 50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의 화해가 여전히 미결정 상태인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369)
6장 한국의 일출: 산업화. 1953년~현재
"이승만의 정치경제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일본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달라, 그것도 내일 당장 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만개한 산업경제를 원했고, 신생산업들은 방어벽─무엇보다도 일본으로부터의 방어벽─안에서 보육되기를 원했다." "한국과 타이완 각각의 60만 군대는 분명 비싼 경비가 들지만 무장해제한 일본과 긴 방어선을 가진 미국한테는 몰려드는 홍수를 막아주는 모래포대들이었다. 그러므로 공화당 행정부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 자유시장경제가 들어서지 못했다. 이승만은 전문가들이 '수입대체산업화'(ISI)라고 부르는 정책을 미국의 거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추진했다." "이승만은 이런 일에 노련한 대가였고, 미국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무상원조를 받아내어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이런 돈이 한국의 총수입 가운데 6분의 5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것도 '합법적'이거나 기록된 총액만 그렇다는 것이다."(427-9)
"수입대체를 촉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중에 원圓으로 개명된) 환화의 환율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수령된 달러의 가치를 높이고 원조수입을 극대화하는 한편 수입한 자본과 중간재의 비용을 저가로 묶어둘 수 있었다." "수입대체의 수혜자는 삼성의 이병철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은 이병철한테 제일제당과 제일모직과 같은 이전의 일본기업들을 두드러지게 유리한 구매가격으로 내주었다. 삼성은 이런 호의를 기억해두었다가 선거철에 보답했다. 이병철은 기억력이 흐리지 않은 사람이어서 나중에 이승만의 자유당에 6,400만 환을 주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주한미군의 존재 역시 군대식의 수입대체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이승만 정권과 미 제8군의 젖줄을 차지하는 경쟁에서 역대의 승리자는 나중에 대한항공까지 거느리게 된 한진기업의 사장인 조중훈이었다. 1950년대 내내 그는 주한미군과 운송계약을 맺었는데, 그 금액은 1960년에 이르면 연간 228만 달러에 달했다."(432-3)
"(쿠데타 이후) 혁명정부는 '부정축재자'라는 대집단을, 즉 이승만의 호의로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을 줄줄이 잡아들였다. 그 가운데 으뜸은 삼성의 회장인 이병철이었다. 그는 국민을 잡아먹는 돼지 같은 놈으로 기소된 기업인들을 대표하여 박정희 장군한테 가서 기업가들이 과거의 일본인의 적산(適産)을 훔치기 위해 정부의 뜻에 따르는 대신 외국자본을 추구하도록 장려함으로써 경제가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삼성, 금성 및 그밖의 기업들이 한국의 손바닥만한 내수시장을 이미 포화상태로 만들고 있으니, 이들 기업이 수출에 성공할지는 지켜보자는 것이다. 일부 미국인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혁명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병철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은 후 곧 그를 포함한 10대 재계 총수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협상했다. 그가 그들을 감옥에 보내지 않는 대신 그들은 새로운 산업에 돈을 투자하고 정부에 '지분'을 기부함으로써 '벌금'을 탕감하도록 하자는 것이다."(439)
"1970년대에 석유수출국기구(OPEC)로 말미암아 유가가 네 배로 급등한 후에 세계시장에 어마어마한 양의 오일달러가 떠돌아다니고 그 여파로 은행에서는 사람들한테 차관을 얻어가라고 구걸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이 돈의 흐름을 중개하여 이를 박정희의 '대대적인 중공업 추진정책'에 속하는 엄청난 고비용의 '6대 산업' 쪽으로 유도했다." "이 시기에 대규모 차관을 얻기 위해서는 회사 자체가 커야, 즉 재벌이라야 했다. 계속 차관을 받으려면 회사가 "거대해야 했다." 그러므로 한국형 모델의 핵심 요소는 금융이라 하겠는데, "한국 금융의 주된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자본을 출혈을 감수하며 중공업화 계획에 투여하는 것이었다." 1979년대 상당 기간 동안 이런 차관의 평균비용은 마이너스 6.7%였는데 이에 반해 사채금리조차 플러스였고, 사실 그것은 물가상승률을 훨씬 웃돌았다. 누군가가 거의 7% 이자를 물어가면서 자기 돈을 써달라고 하니 괜찮지 않은가."(445-6)
"냉전 시대에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비호를 받는 보호경제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보호주의, 대외적으로는 수출주도 성장이라는 이들의 국가주도 신(新)중상주의적 프로그램에 대해 미국은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심지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이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방대한 미국시장의 개방성에 의존했다. 여기에 바로 '아시아 개발국가'의 본질이 있었다. 이들 경제는 공산주의와의 전지구적 투쟁에서 대안적 개발 모델을 제공하는 데에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경제성장의 동력을 창출해냈다." "그러나 양극화된 냉전이 끝나고 이들 경제가 자유시장과 이른바 신자유주의에의 시대에 얼마나 '적합한가'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였으니,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은 놀라움과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1997~98년 아시아 위기의 깊은 의미는 일본/한국 유형의 '후발' 산업발전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미국의 시도에 있다."(467)
7장 미덕2: 1960~현재의 민주주의 운동
"4월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은 남한의 첫번째 민주정권이었다. 민주정권이라는 말에 부합되게, 야당은 내각이 입법부에 책임을 지는 2원내각제를 창출했다. 이 제도는 행정부의 폭넓은 권한을 약화시켰고, 대통령을 의식(儀式)의 용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명목뿐인 직위로 변환했다. 7월 29일에 선출된 새 국회는 다양한 견해가 분출되는 토론의 장이 되었고 언론은 자유로웠으며 경제건설을 위한 복잡정교한 계획들이 장면의 경제기획관들로부터 나왔다. 체제가 개방적일수록 국회는 더더욱 심한 언쟁에 휩쓸렸고, 더욱 독자적인 사상가들이 나타난 북한과의 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가두시위가 없는 날이 거의 없었으며, 어떤 때는 학생들이 국회에 들어와 몸을 사리는 정치인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자 서울 지배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 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497-8)
"1970년에는 한 노동자의 고독한 행동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이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섬유노동자인 전태일이 11월 13일 서울의 평화시장에서 분신했고, 불꽃이 그를 불사르는 순간에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고 외쳤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1년 김대중에 대한 대중적 지지야말로 유신체제의 핵심적인 이유였다. 1971년 10월 위수령 직후에 정권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에게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전국민을 동원하고 경제적 요구에 따라 임금과 가격을 정할 수 있는 (···) 거의 무제한적인 비상대권을" 부당하게 부여했다. 이런 조치들은 "유신 이전의 유신"이었으며, 즉각 산업노동자의 파업과 독립적인 노조들을 압살하는 데 활용되었다.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은 이제 대통령의 변덕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오직 단결권만이 문서상으로 남아 있었다."(532-3)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박정희는) 이전의 식민지 통치자로부터 또 하나의 모델을 따옴으로써 자신들의 끊임없는 반일적 호언장담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율사들한테 새로운 헌법을 쓰게 했는데, 거기에는 자기 임기에 대한 모든 제한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내각과 심지어 국무총리까지 임명하고 해고할 수 있는 권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하는 (국회를 한낱 거수기로 만드는) 권한, 시민의 자유를 중지하고 파괴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유신헌법의 입안자들이 깜빡 잊고 포함시키지 못한 것이 무엇이든 그 법령을 발포(發布)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 여전히 유효한 상황에 있건만 1970년대 초에는 청와대에서 긴급조치들이 황혼녘의 박쥐들처럼 줄줄이 나왔다. 1973년의 한 긴급조치는 모든 형태의 파업이 불법임을 선언했고, 1974년의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는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도 국가안보의 위반과 거의 다름없는 것으로 만들었다."(513-4)
"미국이 전두환의 부대를 거부하거나 광주시민의 편을 든다면 그것은 1940년대 이후 유례가 없는 내정간섭이었을 것이므로 광주시민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책임은 면할 수 없었고 전선부대 이탈을 허용함으로써 카터의 인권정책은 난자질당한 꼴이었다. 미국은 그후 한국인의 달라진 태도에서 이 양자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전두환은 김대중을 체포하여 그에게 광주반란의 죄를 뒤집어씌우고 유신체제를 거의 포장하지도 않은 채 '선거인단'(통일주체국민회의)을 소집하여 자신을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만듦으로써 12월 12일에 시작한 쿠데타를 매듭짓는 조치를 취했다. 광주항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마 결코 밝혀지지 않을 테지만 매월 평균 2,300명을 기록하던 광주시의 사망자 통계가 1980년 5월에는 4,900명으로 치솟았다."(541-2)
"학생들은 무엇에 관해 항의했는가? 시금석은 언제나 광주와 광주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자신의 인권정치를 통하여 미국이 박정희 독재, 인권침해, 테러 등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부풀렸다. 그는 한국에 정치적 위기가 증대되고 드물게도 경제적 하강국면이 도래했을 때인 1979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때쯤에는 카터의 보좌관들은 카터에게 인권강화 노력을 기울일 표적은 한국과 필리핀 같은 '전략적' 동맹국들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공산주의 독재정권들이라고 설득했다. 카터의 인권정책은 그의 행정부가 광주의 유혈사태에 고작 한가한 항의밖에 하지 않았을 때 카터의 면전에서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수많은 반미행동의 시발은 1980년 12월 광주 미국문화원의 방화였고, 수많은 청년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자살을 감행하는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런 반미행동은 흔한 일이 되었다."(550-1)
"1987년 6월의 광대한 반체제 운동을 묶어주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직선제 정치로 돌아가자는 우렁찬 요구였다. 노태우에게 압력을 가하여 6월 29일 직선제 요구를 받아낸 후 중산층이 자신의 비정치적인 추구로 돌아서자 급진화된 청년들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다시 한 번 소수가 되었음을 발견했다." "노태우 치하의 정치체제는 결코 '민간정권'이 아니었고 "군부가 야권에 비토권을 행사하면서 집권블록과 공존하는 형세였다." 또한 1987~88년의 남한에서 일어난 부분적인 민주화는 국가안전기획부와 같은 억압적인 국가구조를 해체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고도로 왜곡된 지역주의적 투표 패턴으로는 3자 경쟁에서 결코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할 것을 염려한 김영삼은 자신의 쪼개진 당을 이끌고 여권과 김종필 개인의 추종자들과 함께 합쳐서 '3당 통합'을 이뤄냄으로써 1990년 초에 민주자유당 혹은 민자당이 탄생했다."(558-9)
8장 태양왕의 나라: 북한, 1953~현재
"북한은 여전히 일본과 싸우고 있는 탈식민지 국가이다. 정부 통제하의 언론들이 50년 전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나 일본의 군국주의가 곧 부활할 위험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 날이 없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너무나 강렬하여 마치 전쟁이 방금 끝난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조선로동당의 독특한 상징/로고는 망치와 낫을 붓과 가로질러놓은 것인데, 이는 배운 자들과 전문가들을 끌어안는 정책을 상징한다. 마오쩌둥의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김일성은 이들을 거의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을 권력의 자리에 널리 등용하여 공산주의식의 '학자-관료' 계급을 공인하였다. 북한에는 서기·소상인·관리·교수 등을 일컫는 사무원이라는 모호한 범주의 사람들이 있다. 이 범주는 북한 체제의 입장에서는 남쪽으로 탈출했을지도 모를 식자나 전문가들을 붙잡아두는 데 쓸모가 있었고,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한테는 자신의 '불순한' 계급배경을 감출 수 있는 하나의 범주를 제공해주었다."(575)
"전통적 조합주의는 위계, 유기적 연계, 가족이라는 세 개의 커다란 주제와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부권(political fatherhood), 정치 통일체(body politic), 거대한 연결망이라는 세 가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존재의 연결망 전체는 거룩한 근원에 의해 가동되는 거대한 유기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전통주의자들이나 이후의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들에게 있어서 정치통일체는 문자 그대로 신체를 뜻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였다. 정치통일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를 위해 기능한다. 우두머리는 국민의 아버지였고, 통치자와 피통치자는 "완전한 사랑"으로 묶여 있었고, 지도자의 아버지 같은 지혜와 자비는 "의지할 수 있고 결코 의심될 수 없었다." 왕은 자신의 신민들에게 사랑의 배려와 "아버지 같은 보살핌"을 보여주었다." "보수적 조합주의는 이러한 옛 모습을 되살리려 했고, 19세기에 나타난 낭만적 반자본주의와 반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기였다."(578-9)
"아시아 사상가들은 실제로든 은유로서든 가족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단지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에서 대약진운동을 추진하면서 가족구조를 공격하였으나, 이 기념비적인 시도조차 곧 중단되고 말았다. 가족은 아시아적 조합주의의 중심체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일본이 시도했다 실패한 '가족국가(family state)'이다." "김일성의 이데올로기는 조합주의의 역사를 큰 목소리로 되뇌었다. 마노일레스쿠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역사적 갈등이 '단위'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신 민족을 상정하고, 예전의 식민지와 종속국가들, 그리고 주변부 사회주의 국가들은 공동의 대의를 걸고 수평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러한 고유 이론에 도달하기 위해 유럽이나 일본의 이론들을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김일성 시대 훨씬 이전에 이미 조선의 신유학은 인간의 신체를 적절한 생리학적 조화를 필요로 하는 유기체로 보았던 것이다."(582-3)
# 주체 사상(Juche idea)
"1963년 미 국무부를 위한 연구에서 이블린 머퀸은 이 체제의 본질을 최초로 파악했다. 그녀는 김일성과 측근의 관계를 "강철 같은 규율하에 이루어진 (···) 반半기사도적이며, 철회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결합"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 관계는 "복잡한 관료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체제라는 것이다. 1946년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의 유격대원은 항일유격대의 전통을 당과 대중조직한테도 좋은 원칙이라고 추천하였다. 이 원칙이 북한 전체의 조직화 원리라고 부언해도 좋을 듯하다(도쿄대학의 북한전문가인 와다 하루키 교수는 북한을 '유격대국가'로 부른다)." "그 결과 김일성의 유격대 집단은 다른 경쟁적 집단에 대해 쉽게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우러러 받다"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위로 쳐다보며 받아들이다"를 의미하며, 종교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사용한다. 이 용어는 아버지를 존대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한다."(5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