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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어스 -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서론 히틀러의 세계
"히틀러의 견해는 인간은 동물이며 윤리적 숙고 그 자체가 유대인의 타락을 보여주는 징후라는 것이었다. 보편적 이상을 세우려는 시도와 이를 향한 노력은 바로 증오해야 할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비종족주의적 태도란 모두 유대적인 것이며, 보편 관념은 유대인의 지배 도구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둘 다 유대인의 특성을 지녔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명백히 투쟁을 포용한 것은 유대인의 세계 지배 욕망을 감추는 엄폐물일 뿐이었다. 국가에 관한 추상적 관념도 전부 유대인이 만든 것이다. 히틀러는 이렇게 썼다. 〈그 자체가 목적인 국가 따위는 없다.〉 히틀러는 분명하게 밝혔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특정 국가나 정부의 보존이 아니라 인류의 보존〉이었다. 기존 국가들의 국경은 종족 투쟁의 과정에서 자연의 힘에 의해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 국경의 존재 때문에 영원한 진실의 경계에서 돌아서서는 안 된다.〉"(22-3)
1 생활공간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쓰면서 생활공간Lebensraum이라는 낱말을 배웠고 이를 자신의 의도에 맞게 사용했다. 그의 저술과 연설에서 생활공간은 물리적 생존을 위한 부단한 종족 투쟁에서부터 세계 최고의 생활 수준을 갖춘다는 주관적 의미를 위한 끝없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가 자연에 투쟁을 부여한 온갖 의미를 다 표현했다. 생활공간이라는 용어는 독일어에 프랑스어의 생활 환경biotope에 상당하는 낱말로 들어왔다. 생활공간은 생물학적 맥락보다는 사회적 맥락에서 다른 것을 뜻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가족의 안락함이나 〈거실〉과 비슷한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한 낱말에 담는 것은 히틀러의 순환적 사고를 촉진했다. 다시 말해 자연은 곧 사회이고, 사회는 곧 자연이었다. 따라서 물리적 생존을 위한 동물의 투쟁과 더 나은 삶을 원하는 가족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둘 다 생활공간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37)
"유대볼셰비즘 신화는 히틀러의 전체적인 구도에서 빠진 조각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특정 지역을 지구 전체와, 슬라브족에 맞선 식민지 전쟁의 승리에 대한 기대를 유대인에 맞선 영광스러운 반식민지 투쟁과 결합했다. 소련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한 차례 공격함으로써 독일인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소련 유대인의 괴멸은 유대인 세력의 제거를 뜻했다. 그렇게 되면 동부 제국의 창설이 가능해질 것이고, 이는 동유럽에서 미국의 프런티어 역사를 되풀이한다는 뜻이었다. 독일 종족의 제국이 세계 질서를 교정할 것이며 유대인으로 오염된 지구에 자연을 되돌려줄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유대인은 편리한 대로 제거할 수 있었다. 열등한 슬라브인이 독일을 어느 정도 방해한다면, 유대인이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종족 제국의 추구는 유대인 근절 정책을 가져올 것이었다."(54)
2 베를린, 바르샤바, 모스크바
"히틀러는 독일 국가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 팽창은 실제로 그의 목적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주의의 효용을 이해했지만 실제로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히틀러에게 동포 독일인들의 민족 감정은 그들을 종족 투쟁으로 몰아갈 수 있는 이른바 〈공간 정복의 힘〉이었다. 독일인들은 종족 투쟁에서 자신들의 고귀한 운명을 보고 실현할 수 있을 것이었다. 독일인들을 나라 밖에 그들이 지배할 수 있는 외계 속으로 들여보내려면 조국애가 필요했다. 히틀러를 이해했던 어느 독일인 여성이 말했듯이, 〈좁은 공간을 좋아하는 성향은 끈적한 덩어리처럼 독일 국민에 들러붙어 있는데, 이를 극복해야 한다〉. 생활공간이라는 훨씬 더 큰 대망을 위해서 히틀러는 (군국주의적) 발칸 모델에 다음의 일곱 가지 혁신을 더했다. 일당 국가, 폭력 전문 집단, 무정부 상태의 수출, 제도들의 이종 교배, 국가 없는 상태의 창출, 독일 유대인의 세계화, 전쟁의 재정의."(68-9)
"1918년 독일의 재난은 폴란드의 기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에서 독일인들을 위협했던 것은 거의 전부 폴란드인들에게 유쾌한 것이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서는 부당함의 상징이었지만 독립국 폴란드가 존재할 수 있는 법적 질서의 기둥이었다. 독일군이 동유럽에서 철수했을 때, 새로운 폴란드 군대가 그 힘의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속국이었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소련군과 싸웠다. 폴란드는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승리했고,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소련에 맞닿은 폴란드 동쪽 국경이 정해졌다." "유대인은 거의 국토 전역에 많은 숫자로 존재했고, 따라서 다른 폴란드 시민들에게 유대인과의 교류는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독일만큼이나 폴란드에서도 많은 유대인이 동화되었다. 차이는 동화된 폴란드 유대인 중에 이디시어를 말하고 이러저러한 형태로 종교적 전통을 엄수하는 자가 열 배 더 많았다는 것이다."(77-8)
# 폴란드의 현상유지 정책
1. 소련과 불가침 조약 체결(1932.7)
2. 독일과 불가침 조약 체결(1934.1)
3 팔레스타인의 약속
"히틀러는 오스만 제국에서 발칸 반도의 국민국가들이 탄생한 것을 군국주의의 긍정적인 사례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폴란드인들은 같은 역사를 민족 해방으로 보았고 이것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확산되리라고 이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들에서 떨어져 나온 유럽의 속령들이 대체로 국민국가가 되었던 반면, 아시아의 속령들은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령〉 형태로 프랑스 제국이나 영국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지역들은 독립국을 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따라서 강대국에 맡겨져 정치적 훈련을 받아야 했다. 사멸한 오스만 제국의 남부 시리아에서 떨어진 팔레스타인은 그러한 위임 통치령의 하나였다. 1920년 영국이 점령했을 때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은 매우 적었지만, 영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미래의 유대 민족의 고향으로 제시했다. 이는 시오니스트들의 바람과 일치했다. 그들은 언젠가 완전한 국가의 지위를 얻기 위한 협상이 타결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100)
"독일의 유대인 정책과 폴란드의 유대인 정책이 처음으로 크게 충돌한 곳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였다. 나치의 탄압으로 독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는데, 이 때문에 아랍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우파 시오니즘은 더욱 과격해졌으며 이르군(Irgun, 폴란드군사기구를 본따 만들어진 유대인 민족군사기구)을 지원한다는 폴란드 외교 정책이 실현될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1935년 이후 외교 정책을 수립한 폴란드인의 작은 집단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프로메테이즘에서 다른 형태의 프로메테이즘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피우수트스키가 추진한 원래의 프로메테이즘은 폴란드가 동쪽의 이웃 민족들,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도록 도을 수 있다고 가정했다. 새로이 등장하던 프로메테이즘에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반대하는 유대 민족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폴란드 당국은 반反소련 노선을 포기하면서 친親시오니즘 음모로 노선을 바꾸었다."(109)
# 프로메테이즘Prometeizm : 제국에 반대하고 핍박받는 민족들의 대의를 지지하는 사업
4 국가 파괴자들
"1935년 독일 유대인은 2등 시민으로 영락했다. 1938년 일부 나치는 유대인에게서 국가의 보호를 박탈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임을 알았다. 법적 차별은 어느 것이든 법률과 관료적 업무의 다른 측면에 미치는 예기치 않은 영향 때문에 복잡해지곤 했다. 몰수와 이주 같이 간단해 보이는 문제들도 나치 독일에서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반면 오스트리아가 파괴됐을 때, 오스트리아 유대인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내다보고자 했던 대다수의 손에 고통을 당했다. 국가 없는 상태는 폭력과 절도를 수행할 준비가 된 자들에게 기회의 창을 열어 주었다. 나치 국가는 병합의 논리에 따라 그 창문을 닫아야 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가 되어야 했고 돌격대가 조장한 무정부 상태는 나치 국가의 통치 능력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국가 없는 상태의 순간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132-3)
"(1938년 11월 9일 자행된) 수정의 밤Kristallnacht으로 괴벨스는 오스트리아 모델에서 나타났던 몰수와 추방이 독일에서도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독일 유대인이 대규모로 고국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폭력이 자행된 이후였다. 그렇지만 제국 내부에서 벌어진 무질서한 폭력은 막다른 길이었음이 드러났다. 독일 여론은 대체로 그 대혼란에 반대했다. 사람들은 절망을 목격하자 나치가 기대했던 것처럼 정신적으로 거리를 두는 대신 유대인을 동정했다. 물론 독일인들은 유대인이 폭력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으면서도 동시에 유대인을 전혀 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괴링과 힘러, 하이드리히는 즉각 독일 내부에서 포그롬을 조장한 것은 실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머지않아 이들은 괴벨스가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렇지만 독일 국경 너머에서, 전쟁 중에, 독일군이 국가를 파괴한 곳에서 포그롬을 실행한다."(136-7)
"폴란드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은 유대인 문제에서 혼란을 초래하는 무익한 상대자였다. 독일의 유대인 정책은 팔레스타인의 문을 닫았고 수만 명의 유대인을 폴란드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만일 팔레스타인에서 어느 한편에 화를 내야 한다면 그것은 아랍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랍인과 무슬림의 충성은 영국 제국 전체에 매우 중요했기에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충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 없었다. 1939년 5월의 어느 영국 백서White paper는 훗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면 아랍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영국은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폴란드를, 이 점에서 간접적으로는 폴란드의 유대인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즉각 유대인의 대량 정착을 위해 열어 놓아야 한다는 폴란드의 의견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151-2)
"스탈린은 히틀러와 유럽의 동부를 나눠 갖기로 하면서 무력 충돌을 유럽의 서부로 돌리기를 바랐다. 그곳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상대해야 할 것이었다. 이는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보면 소련 외교의 작은 역할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이 전장에서 발현됨을 의미했다. 스탈린의 전술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훌륭한 전쟁 수행 방법은 다른 이들이 서로 싸워 있는 대로 피를 흘리게 한 뒤 전리품을 취하는 것이다." "폴란드는 유럽의 전쟁에서 더는 동맹국으로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몰로토프는 폴란드를 〈꼴보기 싫은 자식〉이라고 말했고, 히틀러는 폴란드를 베르사유 조약의 〈비현실적 피조물〉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옛 균형을 제거할 공동의 소망〉을 선언했다. 스탈린은 옛 균형의 파괴가 무정부 상태와 유대인의 고통을 뜻함을 알았다. 스탈린은 폴란드를 반으로 나누는 것이 200만 명의 유대인을 히틀러에게 넘겨준다는 의미임을 이해했다."(156)
5 이중 점령
"히틀러는 스탈린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대리인의 손을 빌려 국가를 파괴했다." "히틀러는 소련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늘 동맹국에 넘겨준 땅을 침공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1939년 히틀러는 스탈린에 국가를 파괴하라고 권유했지만 뒤이어 1941년에 같은 땅으로 직접 출정한다. 그러므로 독일의 퓌러는 국가의 이중 파괴를 염두에 두었다." "독일인들은 1941년에 소련을 침공할 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을, 즉 처음으로 유대인을 대규모로 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찾아냈다. 최종해결이 실현된 곳은 독일에 앞서 소련이 지배했던 곳, 소련이 두 대전 사이의 국가들을 파괴한 후 독일이 소련 제도를 폐지한 곳, 즉 이중 점령 지대였다. 1939년에 독일 지배하의 약 200만 명의 유대인이 거의 전부 죽게 된다. 1939년과 1940년에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된 200만 명의 유대인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애초에 소련의 지배를 받은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독일의 대량 학살에 희생된다."(176)
"(폴란드 시민들, 특히 장교단처럼 교육 받은 엘리트들을 대량 학살한) 볼셰비키는,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직접 그 일을 했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의미가 명확한 공식 문서로 남겨 기록 보관소에 잘 정리해 놓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찬동할 수 있었다. 진정한 책임은 공산당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는 종족의 우월성이라는 화려한 문구를 썼고, 힘러는 독일 종족을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이는 행위에 도덕적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때가 오자, 독일인들은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책임감도 없이 행동했다. 나치의 세계관에서, 일어난 일은 그저 일어났을 뿐이며 강자가 승리해야 하지만,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관계도 전혀 분명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역사History가 자신들 편이라고 믿었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나치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무질서만 빼고 모든 것을 두려워했다."(183-4)
6 더 큰 악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파멸했을 때, 소련이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점령하고 병합했을 때, 두 나라가 공동으로 폴란드를 파괴했을 때, 슈미트는 국가 없는 상태의 법률 이론을 준비했다. 이는 국제법은 규범이 아니라 힘에서 나온다는 원리에서 시작했다. 규칙은 누가 예외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는가를 드러낼 때에만 흥미롭다. 슈미트에게 〈구식의 국가 간 국제법〉은 구실에 불과했다. 누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는가, 이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독일이 퓌러를 따라 〈국가의 영토라는 공허한 개념〉을 무시한다면, 독일의 힘은 그 자연 국경으로 흘러넘칠 것이다. 그 결과는 정치적 행동과 군사적 행동에 대한 규범적 제약(바로 유대인의 것인)으로 교란되지 않는 〈이치에 맞게 분할된 지구〉였다." "힘이 정의였다. 실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원리의 문제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이 결론은 원리라는 개념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11-2)
"특수임무단은 유대인 이외의 다른 사람도 사살했으며, 특수임무단이 아닌 다른 이들도 유대인을 사살했다. 특수임무단이 제일 먼저 유대인을 대규모로 사살했지만, 이들은 독일인 가해자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 소수집단이었다. 이들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화는 전후 독일 연방공화국의 재판 중에 대다수 독일인 살인자들을 보호하고 학살을 독일 사회에서 떼어 내려는 의도에서 등장했다." "1941년의 학살에 현지인들이 연루되었다면, 그것은 독일의 정책이 아니라 현지 반유대주의가 초래한 결과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는 홀로코스트를 정치 없이 설명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동유럽인들의 야만성이 분출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설명은 위안이 된다. 오로지 지나친 반유대주의와 관련된 자들만이 재앙 같은 폭력에 탐닉했으리라는 생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안을 줄지언정 틀린 이 생각은 나치의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의 유산이다."(216-7)
"동유럽 현지에 반유대주의가 넘쳤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구한 반유대주의는 왜 포그롬이 정확히 1941년 여름에 시작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한 설명은 포그롬이 독일이 소련을 몰아낸 곳에서 가장 많았다는 암시 가득한 사실과 그러한 곳에서 포그롬을 부추기는 것이 독일의 노골적인 정책이었다는 명백한 객관적 사실을 무시한다." "1941년 후반에 일어난 일은 학살 속도전이었다. 그로써 100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고 독일 지도부는 자신들이 지배한 유대인을 전부 제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참화는 수동적인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 유대인, 명령 수행자 독일인이나 계획 실행자 독일인, 잔혹한 반유대주의자 현지인 같은 고정 관념으로, 그밖에 다른 어떤 진부한 문구로도, 그것들이 당시에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녔어도, 오늘날 아무리 편리하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다. 이 미증유의 대량 학살은 특별한 성격의 정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218-9)
"A 특수임무단 지휘관 슈탈레커는 이제 공식을 발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말을 옮기자면, 유대인을 공격하는 데 〈토착 주민이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자진하여 이 조치들을 수행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슈탈레커는 소련 점령기의 경험을 친독일 행위로 〈유도할〉 필요가 있음을 얘기했다. 리투아니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입을 통해서나 매체를 통해서 현지 언어로 전달된 선전의 목적은 그렇게 유도할 도랑을 파는 것이었다. 슈탈레커는 독일이 유도한 포그롬을 일종의 인력 충원 연습으로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이중으로 점령된 라트비아에서 새로운 모델이 등장했다. 독일의 명령에 따라 대부분의 살인을 수행한 현지인들의 학살파견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 지도자였던 빅토르스 베른하르드 아라이스는 유럽 역사상 가장 능숙한 대량 학살자의 한 사람이 된다."(242)
7 독일인, 폴란드인, 소련인, 유대인
"1941년 말 독일은 소련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점령지 소련에서 약 1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특수임무단은 살인 기술을 개선했으며 현지 주민에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법을 완성했다. 특수임무단은 치안경찰과 국방군과 나란히 유대볼셰비즘 논리의 완전한 이행을 향해 조용히 전진했다. 그리고 유대볼셰비즘 논리는 서서히 승리를 가져오는 방법이 아니라 패배를 덮어 가리는 방법이 되었다. 특수임무단은 소련 국가를 무너뜨릴 수 없었지만, 소련 기관들을 파괴한 곳에서는 유대인을 죽일 수 있었다. C 특수임무단 지휘관 오토 라슈는 1941년 9월 〈유대인의 제거〉는 그 전쟁의 원래 목적이었던 전체적인 식민지 개척 작전보다 〈실제로 더 쉬웠다〉고 썼다." "경찰이 원래 할당받은 임무는 1941년 말까지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던 훨씬 더 큰 영역을 통제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을 죽이는 데 대규모로 투입될 수 있었다."(272)
"독일인에 의해서든 소련에 의해서든, 둘 다에 해당되는 경우든, 국가가 파괴된 곳이라면 어디서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홀로코스트는 국가가 빠르게 연이어 두 번 파괴된 곳에서, 처음에는 소련이 전쟁 이전의 국민국가를 파괴하고 그다음에는 독일이 소련의 정부 기관을 파괴한 곳에서 집단 사살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이중의 〈국가 없는〉 지대에서 발전한 기술, 즉 현지인의 충원, 여러 독일 기관의 이용, 노출된 곳에서의 사살도 동쪽으로 더 나아간 곳, 다시 말해 독일 세력이 확장된 소련 지역 도처에서 적용되었다. 독일인들이 1939년 9월부터 들어와 있었으나 유대인의 대량 학살은 2년이 더 지난 후 시작된 서부 폴란드와 중부 폴란드에는 비밀 가스 시설, 게토에서 추방하기, 유대인 사냥이라는 다른 기술들이 적용되었다. 발트 국가들과 동부 폴란드, 소련의 유대인들에게는 총탄과 구덩이가 준비되었다. 유럽의 남은 유대인은 대부분 아우슈비츠라고 불린 곳을 향하게 된다."(290)
8 아우슈비츠 역설
"아우슈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서는 비교적 다루기 쉬운 상징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의 실제 규모를 크게 축소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의 융합은 독일인들이 유럽 유대인의 대량 학살이 발생하고 있을 때 그 사실을 몰랐다는 기괴한 주장을 가능하게 했다. 일부 독일인이 아우슈비츠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많은 독일인이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관해 몰랐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대인의 대량 학살은 독일에서, 적어도 가족들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우슈비츠가 학살 시설이 되기 훨씬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토론의 대상이었다. 3년에 걸쳐 수만 명의 독일인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수백 개의 죽음의 구덩이 위에서 사살했던 동유럽에서, 대다수 주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다. 수십만 명의 독일이 학살을 목격했으며, 동부 전선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독일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293-4)
"비슷한 이유에서, 아우슈비츠는 전후 소련과 오늘날의 탈공산주의 러시아에서 편리한 상징이 되었다. 홀로코스트를 아우슈비츠로 환원할 수 있다면, 독일의 유대인 대량 학살이 소련이 막 점령한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을 수 있다. 서부 소련에서는 누구나 독일인과 똑같은 이유에서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관해 알았다. 동유럽에서는 대량 학살 방법이 수많은 참여자를 요구했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목격했다. 홀로코스트를 오직 아우슈비츠와만 동일시한다면, 이러한 경험도 역사와 추모에서 배제될 수 있다. ... 물론 이 모든 일은 독일이 소련 국가의 파괴를 꾀했기 때문에, 문제의 소련 시민들이 전쟁 이전의 현실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몇몇 경우에는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려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소련의 선전은 소련 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대량 학살에 유용한 협력자가 되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294-5)
"아우슈비츠는 또한 홀로코스트를 간단히 표현하는 기준이 되었다. 신비적이고 환원적인 방식으로 다루면 유대인의 대량 학살을 인간의 선택과 행위로부터 떼어 놓는 것 같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가 아우슈비츠로만 국한되는 한, 아우슈비츠는 그 영향을 받은 대다수 국가들과 그것으로 바뀐 풍경과 절연될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문과 벽은 실제로 파리에서 스몰렌스크까지 세력을 뻗친 악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전쟁 전후로 폴란드에 있었던 작은 땅을 지칭하는 독일어 낱말인 아우슈비츠는 현실의 장소 같지 않다. 아우슈비츠 둘레에는 물리적인 가시철망은 물론 정신의 가시철망도 쳐져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기계화한 학살이나 냉혹한 관료주의, 근대성의 행진, 심지어 계몽의 종착점까지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아이들과 여자들, 남자들의 살해를 인간보다 더 큰 힘들이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하는 비인간적 과정으로 보이게 한다."(295)
"독일은 소련이 점령하지 않은 곳에서는 소련의 점령으로 생겨난 심리적, 물질적, 정치적 자원을 이용할 수 없었다. 독일은 자신들이나 소련이 국가를 파괴하지 않은 곳에서는 파괴된 국가의 파편들을 다시 모을 수 없었다. 독일은 전쟁이 종족 지배 전쟁이 아닌 곳에서는 상대적 박탈의 정치를 적용할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수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은 열차에 올라타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독일의 지배에 들어간 유대인 중에서 아우슈비츠로 가기로 되어 있었던 자들이 그곳으로 갈 예정이 없었던 자들보다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것이 아우슈비츠의 역설이며, 이는 국가들이 어떻게 파괴되고 어떻게 파괴되지 않았는지 고찰해야만 해소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일반적인 계획 속의 상이한 결과들을 설명하는 정치적 특수성이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일반적인 계획을 증명한다. 또한 유대인을 보호하는 데 국가의 지위가 갖는 보편적인 의미도 증명한다."(298-9)
# 에스토니아와 덴마크의 사례 비교
1. 에스토니아 : 소련과 독일의 이중점령 경험, 국가 조직 파괴, 내부인들이 적극적으로 학살에 가담(그럼으로써, 소련에 복무한 혐의 제거), 그 결과 99퍼센트의 유대인 말살
2. 덴마크 : 이중점령 X, 독일 침공 후에도 국가 주권 유지, 독일의 식량 공급 기지 역할, 주권 보호 차원에서 유대인 시민들의 안전 보장, 그 결과 99퍼센트의 유대인 생존
9 주권과 생존
"독일의 동맹국들 중에서는 다른 국가의 잔해로부터 탄생한 꼭두각시 국가들이 홀로코스트가 발생한 무법 지대와 가장 많이 닮았다. 그러한 국가들이 탄생하려면 하나의 국가를 제거해야 했고, 옛 국가의 종말과 새 국가의 창조는 둘 다 독일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다. 그 앞선 국가의 시민은 전부 그 이행기 동안 이전 정권의 보호를 빼앗겼다. 독일의 감독을 받아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 유대인이 그 국가에서 완전한 시민권을 얻기는 불가능했다. 독일은 이 새로운 국가들의 유대인 주민을 먼저 노동 수용소로, 그다음 학살 시설로 수용하기를 간절히 원했고, 이는 현지의 민족정화론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독일이 만들어 낸 꼭두각시 국가, 즉 유고슬라비아에서 탄생한 크로아티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탄생한 슬로바키아는 둘 다 다민족 국가가 파괴되지 않고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던 민족주의자들이 통치했다."(319)
#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셰와 슬로바키아의 요제프 티소 정권, 그리고 자발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나선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정권
# 네덜란드와 그리스, 그리고 프랑스의 사례
1. 네덜란드 : 미미한 반유대주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1940년 여왕 빌헬미나와 정부의 망명으로 관료 기구 붕괴 → 4분의 3 가량의 유대인 말살
2. 그리스 : 미미한 반유대주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1941년 독일에 맞서던 국왕과 정부 붕괴 → 4분의 3 가량의 유대인 말살
3. 프랑스 : 독일과 정책 협력을 맺은 비시 정부가 반유대인 법 주도, 그러나 프랑스가 시민권을 박탈한 유대인들에 한정해서 학살 실행 → 4분의 3 가량의 유대인 생존
10 잿빛 구조자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했을 때, 스탈린은 억류하고 있던 폴란드 남성 시민을 이전과 다른 식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굴라크를 떠나 폴란드인 군대로 편성되어 독일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스탈린은 폴란드 시민들을 동부 전선에서 싸우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그곳에서 싸운다면 나중에 소련에 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련군은 어쨌거나 그 전쟁 중에 이미 한 차례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이들이 바로 내무인민위원부로부터 탄압받은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소련과 폴란드에서 멀리 떨어진 서부 전선에서 싸우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곳에서 이들이 독일인을 죽이고 자신들도 죽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폴란드 시민들이 굴라크에서 나와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려면 유라시아 대륙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소련의 북부나 극동, 카자흐스탄에서 인도와 이란, 팔레스타인을 거쳐 서유럽으로 가야 했다."(364-5)
"어떤 이유에서든, 스탈린의 표적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든, 싸우고 싶은 열의가 더 강했기 때문이든, 아니면 폴란드 장교들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든, 베타르 구성원들과 수정주의 시오니스트들은 폴란드 군대에 상당히 많았다. 이런 식으로 많은 우파 시오니스트가 길고 둘러가는 길이었을지언정 폴란드에서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영국은 그 전쟁 중에 바다를 통해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려 했던 유대인들을 막았지만 연합군 군복을 입고 육지로 들어오는 유대인은 거의 막을 수 없었다." "1943년 말 이후 전황이 나치 독일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바뀌었으므로, 베긴의 이르군은 샤미르의 레히에 합류하여 반反영국 테러 활동을 수행했다. 이는 폴란드 유대인 두 사람이 폴란드의 동맹국에 맞서 식민지 해방 투쟁을 이끌고 있음을 뜻했다. 1944년 2월 베긴은 이르군이 영국 위임 통치령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고 선포했다."(366)
# 1949년 이스라엘 건설
11 신과 인간의 투사들
"소련은 전쟁으로 폐허에 된 나라로 들어갔고 전체적으로 적대적인 주민과 대면했다. 소련 세력은 나치가 폴란드에서 수행한 사회 혁명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승인했다. 결과적으로, 의도적이지는 않았을지언정, 독일은 소련의 표준적인 두 단계 혁명의 첫 번째 단계를 수행했다. 미래가 없어 보였던 집단의 재산을 권력의 은혜를 입게 된 다른 집단에 넘겼던 것이다. 이는 집단화를 통한 혁명의 완수를 준비했다. 소련 공산당의 선전은, 따라서 폴란드 공산당의 선전도 유대인의 특별한 고통을 부정했으며 유대인 학살을 평화를 사랑하는 소련 시민이나 폴란드 시민의 전체적인 수난의 일부로 묘사했다." "유대인을 구한 폴란드인들은 새로운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때로 성가신 존재였다. 전쟁에 관한 소련의 설명이 공허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소련 지배의 사회적 기반에도(유대인의 재산을 훔친 폴란드인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 때문이다."(397-8)
"자원하여 아우슈비츠로 들어갔다가 바르샤바 봉기에서 싸웠던 비톨트 필레츠키는 폴란드 공산당 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했다. 독일인들에 의해 아우슈비츠 행을 선고받고 제고타에서 유대인을 능숙하게 구했던 브와디스와프 바르토셰프스키는 국내군에 복무했다는 사실 때문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자발적으로 바르샤바 게토에 들어가 서방 지도자들에게 최종해결의 성격을 설명하려 했던 얀 카르스키는 종전 후 이민을 떠났으며 그래서 폴란드 공산다 당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유대인 혁명가들을 지원했던 폴란드 외교관 비톨트 훌라니츠키는 팔레스타인에서 피살되었다. 동유럽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유대인을 구조한 사람인 아마추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는 소련 방첩부에 체포되어 악명 높은 루뱐카 감옥과 레포르토보 감옥에 억류되었다. 비록 지금까지도 상세한 내막은 아무도 모르지만 발렌베리는 소련에 구금된 상태에서 사망했다."(398-9)
결론 우리의 세계
"히틀러를 반유대주의적 인종주의자나 반슬라브주의적 인종주의자로 본다면 나치 사상의 잠재력을 너무 작게 평가하는 것이다. 유대인과 슬라브인에 대한 히틀러의 사고는 어쩌다가 극단으로 흐른 편견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꿀 잠재력을 지닌 통일적 세계관의 발산이었다. 히틀러는 정치와 과학을 융합하여 정치적 문제를 과학적 문제로, 과학적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자신을 원의 중심에 두고 모든 자료를 종족 학살이라는 완벽한 세계의 구도에 따라 해석했다. 그 세계는 오로지 유대인의 인간화하는 영향력으로만 더럽혀졌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지구의 부조화에 책임이 있는 생태학적 결함으로 제시함으로써 세계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긴장을 인격화했다. 유일하게 건전한 생태학은 정치적 적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유일하게 건전한 정치는 지구를 정화하는 것이었다."(447-8)
"우리에게 구조라는 관념은 가깝고 살인의 이데올로기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생태학적 공황, 국가 파괴, 식민지적 인종주의, 세계적 반유대주의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람들은 대부분 잘 작동하는 국가에서 살기에 그 전쟁 중에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보전한 주권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즉 외교 정책과 시민권, 관료 기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두 세대 후, 녹색 혁명은 유권자의 정서와 정치인의 언어에서 굶주림의 공포를 제거했다. 반유대주의 사상의 공개적인 표명은 서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비록 그 힘이 약해지고는 있어도 여전히 금기이다. 우리는 다행스럽게 시간적으로 나치즘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나치 사상을 그 작동 방식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쉽게 내버릴 수 있다. 망각은 우리도 똑같을 수 있음을 덮어 가린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나치와 다르다고 확신한다."(450-1)
"미국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국가 권력의 부재가 자유라고 믿는 것이다." "정치적 우파는 국제적 자본주의에 의한 국가 권력의 침식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다. 정치적 좌파는 방향타 없는 혁명들을 미덕으로 묘사한다. 21세기에는 무정부주의적 저항 운동들이 전 세계적인 과두주의자들과 우호적으로 드잡이를 쳤다. 양쪽 다 국가를 진정한 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 싸움에서 어느 편도 다치지 않는다. 좌파나 우파 모두 질서의 파괴나 부재보다 질서를 더 두려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공동의 이데올로기적 습성은 탈근대성, 즉 큰 것보다 작은 것을, 구조보다 파편을, 넓은 전망보다 힐끗 보기를, 사실보다 느낌을 더 좋아하는 것이었다. 좌파와 우파에서 똑같이 홀로코스트의 탈근대적 설명은 1930년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통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이들은 장래의 범죄 가능성을 낮추기보다는 높이기 쉬운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4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