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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1월
평점 :
1 뜻하지 않은 재앙, 패전
"패전은 반세기 동안 아시아를 호령한 일본제국에 총체적 균열을 가져왔다. 좀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은 그동안 애써 감춰왔거나 제국의 논리로 강제 봉합되었던 일본인 사회 내부의 잠재된 불신과 갈등이 패전을 계기로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특히 비상시국을 맞아 사리사욕과 개인의 보신만을 추구하는 사회 지도층의 낯 뜨거운 행태는 결국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또한 그것은 오랜 기간 해외의 일본인 사회를 하나로 묶어낸 제국의 이념과 가치관을 급속도로 무너뜨렸다. 지도력과 상호 신뢰의 붕괴는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위기감과 피해 의식을 고조시켰고, 급기야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닫게 만들어 곳곳에서 일본인 공동체의 해체를 촉진했다. 이제 '나만 살겠다'는 원초적 본능만 남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정체되고 균질화된 제국의 일본인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22-3)
해방 직후에 경찰서·주재소·행정관서 및 각 지역의 신사를 겨냥한 공격이 빈발했는데, 특이하게도 일본인보다 조선인 피해자가 훨씬 더 많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행정조직 말단의 조선인을 이용해 대민 지배를 꾀해온 총독부의 통치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집단행동은 때로는 치밀한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방 후 약 1주일 사이에 나타난 폭행·습격 등의 사태는 그동안 봉인되었던 조선인의 해묵은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한꺼번에 표출된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벌어진 사건은 갑작스레 맛본 해방감에서 나온 비이성적 행동이기도 하지만 조선인의 가장 솔직한 속내가 드러난, 즉 양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결과 식민 지배 말기 전시체제 속에서 먹을거리와 물자를 공출하고 해외의 군수공장·탄광·전쟁터 등으로 사람들을 징발할 때 앞장서며 악역을 맡았던 조선인들이 지난날의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26)
"재류 일본인들이 느낀 생경한 공포는,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조선·조선인에 대한 총체적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직업적으로 조선인 사회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첩보·정보계 관료나 한반도에 대자본을 투자한 기업의 간부 등 극소수 인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인은 사실상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수많은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식민자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본래부터 일본 본토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3·1운동 이후로) 패전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한반도 안에서만큼은 집단적 저항을 피부로 감지할 수 없었다. 조선의 일본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일상의 평화로 받아들였고, 조선인들을 자신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관심 밖의 존재로 치부했다."(26-7)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대혼란과 위기 속에서 더없는 기회를 포착하는 집단이 으레 등장하기 마련이다. 금융기관에서 너나없이 인출해간 돈이 시중에 풀리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이른바 패전 특수를 노린 환전상이 나타났다." "환전상은 대개 일본 현지의 브로커나 그곳에서 돌아오는 조선인들로부터 일화日貨를 조달했으며, 이렇게 마련한 일화로 귀환하려는 일본인들이 인출한 조선은행권을 바꿔주었다. 이들 환전상은 조선은행권이 대량 인출된 시점에서는 일화를 비싼 값에 일본인들에게 팔았다. 또 일본인들이 본토로 거의 돌아가 일화 수요가 급감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해외에서 돌아온 조선인들에게 조선은행권을 비싸게 파는 환치기 수법으로 재차 이익을 챙겼다. 이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 모은 돈을 가지고 일본인 재산을 헐값에 매수하거나 한일 양 지역 사이의 밀수에 관여함으로써 이중 삼중으로 이익을 극대화했다."(35-6)
"짧은 기간이었지만 패전 후 약 1주일은 일본인 집단 내부의 다양한 차이가 드러난 시공간이었다. 평소에 조선인들로부터 원성을 사 그야말로 생명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진작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또 본토에 생활 기반을 두고 있거나 조선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이른 시기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리고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면 가급적 일찍 돌아가야만 늦게 온 사람들보다 정착 과정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한 자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뭐든지 먼저 하는 사람이 위험부담도 크지만 기회도 많은 법이라고 믿었다. 반면에 조선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뿌리 내리고 정착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끝까지 남을 궁리를 했다. 패전 후 경성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인지 이리저리 복잡한 경우의 수를 따져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본인이 만든 낯익은 '경성'의 모습은 어느새 이질적인 조선인의 '서울'로 변해가고 있었다."(46-7)
2 사면초가에 처한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가 제일 우려하는 부분은 일본인들의 무더기 예금 인출로 발생할 수 있는 금융기관의 부도 사태였다. 만일 패전이 초래한 집단의 위기감 속에서 금융기관마저 부도에 처한다면 총독부의 행정력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패전 후 1주일 사이에 많은 일본인이 현금에 집착하게 되면서 각 은행에는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상황이 전국적으로 지속될 경우 앞으로 1주일 안에 조선의 각 은행이 폐점할 것으로 예측했다." "한편 일본 정부도 1945년 8월 17일 시마즈가 대장대신에 취임하면서 본토로 돌아오는 일본인들에 대한 현금 지불, 외환 송금에 대한 현금 지불 한도액, 외지 예금 처리 방안 등을 비로소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쟁점은 조선에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지 않되, 예금 인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통화 증발增發(화폐발행량을 늘리는 것)과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 방지책에 관한 것이었다."(65-7)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모라토리움 카드를 버렸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식민지에서 발생한 경제적 위기의 여파를 차단하기 위해 만주와 조선에서 각기 통용되고 있던 다롄은행권과 조선은행권을 새로이 조달하는 것이었다. "비상수단을 동원해 화폐를 조달한 결과, 조선은행 발행고는 1945년 3월에 35억 엔이던 것이 8월 15일 현재 49억 엔, 10월 18일 현재 88억 엔까지 늘어났다. 바로 이 돈이 청산자금으로 일컬어지는, 조선군과 조선총독부 등 각 식민기구와 일본인이 귀환하면서 발행한 자기방어적 화폐이다. 조선은행 기록에 따르면 이 돈은 제대군인의 귀환 여비 등 군 퇴각 비용, 관리의 퇴직수당과 귀환 여비, 그리고 각 회사의 퇴직금과 해산수당 등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의도적 지출'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돈이 향후 남한 사회에 심각한 경제 교란을 초래했으며, 그중 상당한 금액이 점령군을 상대로 한 접대비 명목으로 불투명하게 사용되었다."(67-8)
"194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경성의 일본인 유력자를 불러 향후 대책을 논의하며 패전 후 총독부의 통치력 저하에 따른 고충을 토로했다. 그는 현재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조선군도 곧 점령군이 진주함에 따라 무력화될 것이므로 이에 대비해 민간 조직이 나서서 일본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1945년 8~9월에 걸쳐 경성·부산·인천을 비롯해 전국에 37개의 세화회가 결성되었고,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한반도 거주 일본인의 원호 활동을 개시했다." 세화회는 애초에 민간 기부금을 모집해 설립하려고 했지만 모금 성과가 부진하자 "총독부에서 1,000만 엔, 은행과 회사에서 400만 엔, 그리고 9월 초 조선군사령부가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남은 돈 400만 엔 가량을 지원받고서야 겨우 발족할 수 있었다. 즉 모라토리움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에서 발행하여 조달한 화폐, 곧 청산자금 중에서 약 1,800만 엔이 일본인 세화회로 흘러들어갔다."(73)
3 잔류와 귀환의 갈림길에 선 일본인들
"한국 병합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종교를 통해 지원한 어용 기독교 세력인 경성YMCA는 일본이 패망한 지 2주일 만에 조선어 강좌를 부활시켰다." 조선어 강사를 맡은 오쿠야마 센조의 스승이 "몽골어·조선어·일어 등 동양어 비교 연구의 권위자였던 가나자와 쇼사부로이다. 가나자와는 언어학과 한일 양국의 고대 지명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법은 물론이고 일상 회화까지 능통했던 오쿠야마의 조선어 강좌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강생을 모집하자마자 희망자가 정원을 넘어서는 바람에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학급을 증설해야 했을 정도였다." "꽤 오랫동안 조선어를 배우지 않았던, 혹은 배울 필요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일본인들이 조선어 강좌로 몰려든 사실은 패전 후에도 조선에 잔류하고자 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조선 잔류의 희망을 품었던 일본인들의 꿈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만다."(81-3)
# 미군정의 집단 송환 방침(일본인 총철퇴령, 1946.1.23)
"1945년 10월 민간인 송환이 막 시작될 무렵, 서울 도심에는 왜노소탕본부倭奴昭蕩本部라는 단체의 명의로 '일본인들은 빨리 집을 내놓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선전문이 돌기 시작했다." "'왜노 소탕'이란 말 속에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 깔려 있었다. 즉 해방 후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일본인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새로운 문제가 계속 생겨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더 팍팍해지고 있다는 현실적인 불만과 실존적인 고민이 한데 섞여 있었다. 제일 먼저 사회문제로 부각된 사안은 주택 부족이었다. 이것은 식민지 시기 민족 차별적인 주택 정책으로 인해 일본인과 조선인의 주택 보급률 편차가 크게 확대된 상황에서 해방 후 해외 귀환자가 급속히 증가하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일본인이 조선에 남아 각종 물자를 횡령하거나 밀반출하는 것도 큰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인들이 귀환 국면에서 저지른 물자의 횡령과 반출로 인한 피해는 일반 서민이 감당할 몫으로 고스란히 전가되고 말았다."(97-99)
4 억류·압송·탈출의 극한 체험
"1946년 1월 초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북한 일본인의 남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군 장교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소련군 관계자는 상부로부터 일본인 송환에 관한 지시를 받은 적이 없지만, 일본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기에는 '매우 귀중한 노동력'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것은 거류 일본인에 관한 미소 양국 점령군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즉 일본의 GHQ와 주한 미군의 가장 큰 사명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분리하여 다시는 미국을 상대로 일본이 무모하게 도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군의 일본인 송환정책은 군사적 관점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분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신분에 따라 순차적으로 돌려보냈다는 점에서 계획 송환이고, 궁극적으로는 모두 돌려보냈다는 점에서 일괄 송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소련군의 정책은 일괄 '이동 금지' 후 필요에 따른 선별적 '활용과 방치'였다고 볼 수 있다."(114)
"만주와 북한 지역은 소련의 전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과 설비·기계를 제공하는 노다지로 인식되었다. 특히 만주 지역의 경우 잠재적으로 소련을 위협할 수 있는 전시 산업을 파괴함으로써 군사적 안정을 꾀하고, 동시에 이들 시설을 전리품으로 반출해 감으로써 소련 국내의 산업 생산력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만주 철군을 거부하며 각종 시설을 반출하는 데 주력했다." "전투를 통해 입북한 소련군이 보기에 일본군 포로는 더 없는 인적자원이었다. 더욱이 고급 기술을 연마한 엔지니어 그룹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미국 측이 1945년 11월부터 북한을 비롯한 소련 점령지의 일본인 송환에 대해 협의를 요청했음에도 소련 측이 한사코 거부해온 주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일본인에 대한 이 같은 인식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처음부터 일본인들을 본토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116-7)
"과거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정체성·위생·근면의 잣대를 들이대며 근대화·문명화된 일본인이라는 우월감을 바탕으로 집단적 자기 정체성을 공유해왔다. 하지만 종전을 계기로 그러한 허상 아래 복류하던 균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 균열은 해외 일본인 내부에서만 끝나지 않았고, 본토인과 해외 귀환자 사이에 더욱 큰 파장으로 전개되었다. 남한의 일본인보다 불쌍한 북한의 일본인, 북한의 일본인 중에서도 제일 불쌍한 만주 피난민이라는 등식은 하카타 등 일본 귀환황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본토인 입장에서 외지에서 돌아오는 모두가 자신의 삶을 더욱더 어렵게 만드는 민폐 집단일 뿐이었다. 단적인 예로 해외 일본인들은 점령군으로부터 '선량한 처자'를 지키기 위해 게이샤와 창기들을 위안대로 삼고자 했으나, 본토에 도착한 순간 결국 모든 부녀자는 외지에서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134-5)
5 뒤집어진 세상을 원망하며
"북한의 일본인들은 대략 1945년 9월부터 이른바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무상 노동, 즉 집단 사역에 징발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세 달이 지나자 출역자들은 일당 5~7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으로는 충분한 호구책이 될 수 없었다. 그마저도 없으면 연명이 불가능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결과 별다른 수입도 없는 일본인들은 9월에 동결된 자신의 예금 중 매월 인출이 허가된 약간의 생활비와 요행히 접수를 면한 은닉 현금, 그리고 소지품 밀매 등을 통해 근근이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1945년 12월에서 1946년 1월을 고비로 돈을 벌어올 남성이 없는 가정, 패전 초기에 여러 번 강제 이사를 당한 가정, 숨겨둔 재산을 도난당한 가정이 제일 먼저 파탄에 이르기 시작했다." 이 무렵 무임 노동의 유상화 등 일련의 제제가 완화되자 "빈곤에 처한 군인·경찰 가정의 부녀자를 비롯하여 생활난에 허덕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발소, 여관, 목욕탕 등에서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162-4)
"북한의 일본인들이 1946년 봄부터 대거 남하한 데는 '여기서 또 한 번의 겨울을 지낸다면 일본인 전체가 몰살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기본적으로 작용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외적인 요인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탈출을 묵인한 소련 점령 당국의 태도 변화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은 이 시기 북한과 만주 등 점령지에서 생산 설비를 반출하려는 애초의 점령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으므로 비교적 일본인 송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1946년 겨울을 지나면서 북한 정계 역시 사실상 김일성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정권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 일반의 여론도 점차 일본인 송환을 요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점령 초기 조선인들은 해방의 열기 속에서 일본인에 대한 당국의 제재 조치를 환영했다. 그러나 1945년 겨울을 지나며 서서히 당국의 방침을 비판하며 하루빨리 일본인들을 돌려보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183-4)
# 일본인 송환 주장
1. 동정론 : 권력자들은 애초에 다 빠져나가고 약자들만 남아있는 상황이므로 돌려보내야 한다.
2. 무용론 : 식량과 주택 문제 등이 악화되는 와중에 일본인까지 챙길 수 없으니 돌려보내야 한다.
6 모국 일본의 배신
"귀환자·제대군인·소개민은 전후 일본의 열등 국민으로 전락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해외 귀환자는 본토인의 뿌리 깊은 편견으로 인해 혼처를 찾기가 더욱 어려웠다.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여성의 경우는 이미 조선에 있을 때부터 본토인과의 결혼이 쉽지 않았다. 본토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조선에 살던 일본인 남성조차도 "혈통을 믿을 수 없다, 가정적이지 않다, 본토의 시부모를 모실 줄 모른다"는 이유로 조선 태생 여성을 신부로 맞아들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전 후에는 (조선 태생 일본인 여성을 '불량한 말괄량이'라고 싸잡아 매도하는) 선입견 위에, 본토인에게 민폐만 끼치는 '귀환자(히키아게샤)'라는 또 다른 차별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게다가 소련 점령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점령군의 각종 폭행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실제로 피해자들이 본토로 돌아온 후 혼혈아를 출산함으로써 해외 귀환 여성은 정조마저 잃은 집단으로 매도되었다."(190-1)
"민폐 집단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귀환자라는 '주홍글씨'는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 마음속에 한동안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1957년 미요시 아키라가 작성한 논문에서 주목해 볼 대목은 "본토 귀환 이래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너희들은 외지에서 호사를 누릴 만큼 누렸으니 조금 힘들게 사는 것도 당연하다"는 본토인의 따가운 시선을 꼽는 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다." "즉 패전으로 인해 이들을 구호할 여력이 없었던 일본의 객관적 상황,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인조차도 침략주의자로 오해하거나, 단지 식민지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질시하던 본토인들의 정서에서 이런 인식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귀환자들이 식민지에서 누렸던 온갖 특권과 풍요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냉대·배척·경계·질시 등 귀환자에 대한 본토인의 정서와 태도가 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198-200)
"일본 정부는 '전쟁 피해의 균분'이라는 국민 통합의 대원칙이 무너질 경우에 감수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고 이들 각 집단의 불만을 그때그때 무마하는 선에서 전후 보상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일본 정부가 보상에 대한 국가책임 문제를 명기하지 않고 최대한 보상 액수를 낮추려고 한 것도 바로 여타 전쟁 피해자 집단으로부터 형평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막고자 한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다. 특히 해외 귀환자들에게 특별교부금이 지급된 시기는 이들이 일본에 돌아온 지 무려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대상자 중 50세 이상의 65%, 35~49세의 32%가 이미 사망한 뒤였다. 일본 정부가 1980년대 말부터 한국을 비롯한 구 식민지 출신자가 제기하는 소송에 대해 이른바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을 비롯해 '개인 청구권의 부인', '시효' 등 옹색한 이유를 들어 시간을 끌면서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을 회피해온 법리적 태도는 이미 30년 전부터 자국민을 상대로 무수히 활용되었던 것이다."(210-1)
#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 : 1945년 이전 국가의 권력 행사로 인한 개인의 손해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질 법적 근거가 없다는 논리
"어쨌든 해외 귀환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이들이 입은 객관적 피해에 대한 보상 개념이 아니라, 전후 일본 정부의 다양한 '필요와 지향'이 녹아든 담론적 성격이 강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재정 상태로는 어차피 공적자금을 통한 구제가 어려웠던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 일반의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각기 다른 피해와 보상을 주장하는 여러 집단의 요구를 무마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새로운 국민국가의 국민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도 무언가 공통의 화두가 필요했다. '전쟁 피해자'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여 전 사회적으로 유포되었다. 귀환자들은 피해자 집단으로서 정부의 공인을 받았지만 정부의 형식적인 지원과 본토인의 계속되는 냉대와 멸시 속에서 자신이 떠나온 식민지와 돌아온 조국에서 이중의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211)
7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른 기억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구 일본인 부동산의 부정 매매는 명의조작 등의 방법을 통해 계속 이루어졌으며, 이른바 뒷돈으로 10만 원이라는 '공정가격'이 상식화되었을 정도로 투기 행위가 일반화되었다. 이같은 투기는 남한의 주택 시장을 연쇄적으로 교란했다. 일본인 주택을 중심으로 시작된 투기붐은 조선인 주택까지 번져 집값은 날로 치솟았다. 그 영향은 심지어 도시 빈민과 해외 귀환자 등 최하층에까지 파급되어 방공호 한 칸도 2,000~3,000원의 세를 내야만 가까스로 얻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군정 초기에 자유 매매를 허가함으로써 더욱 악화된 식량난은 1948년 유령인구 색출에 관계당국이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에도 쌀을 매개로 한 밀수가 계속됨으로써 개선될 기미가 없었다." "해방 초기부터 국내의 의식 있는 인사들이 일본인 재산 매매 금지를 강력히 요구한 것도 이 문제가 사회적 부의 분배 문제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사회 체질 자체를 왜곡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38-9)
"일본인 재산을 바라보는 사회 지도층의 기본 시각은, 이것이 향후 건국의 경제적 기초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또한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할 재산이라는 것이었다." "산업 시설의 해체·산매·반출 등은 결국 공업 생산의 저하와 그에 따른 노동자의 대량 실업, 그리고 임금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해외 귀환자의 대량 유입으로 실업률이 급상승했으므로 노동자의 생활을 더욱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회사나 공장을 집단 관리·운영함으로써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해방 후 조선인 노동자들이 자주관리운동에 나선 것도 궁극적으로는 생산 시설의 조업 재개를 통해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일본인들의 재산 처분과 밀항을 도와 한몫 챙긴 조선인이 있었는가 하면 각 지역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요 항구를 돌며 밀항하는 일본인을 직접 단속하고자 했다."(253-4)
"일본인이 처분한 재산은 관재인의 지위를 요행히 얻은 극소수에게 돌아갔고, 생산 시설의 파괴 및 물자의 투매와 폐기는 인플레를 부채질했으며, 물자 부족을 초래하여 밀수업자들을 창궐케 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서민들은 초인적 내핍을 강요당한 반면, 모리배나 간상배로 통치되던 신흥 집단은 재력을 바탕으로 사회 각계에 손을 뻗쳐 온갖 비리를 저지름으로써 해방 당시 대다수가 지향하던 건강한 사회·국가 실현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러한 폐해는 결국 남아 있던 일본인들에 대한 '추방론'·'응징론'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제 조선인에게 일본인 송환 문제는, 억압과 착취의 원흉이니 마땅히 이 땅에서 추방해야 한다거나 혹은 해방이 되었으니 당연히 물러가야 한다는 식의 관념적 차원을 넘어, 그들로 인해 당장 자신의 일자리·먹을거리·잠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다. 조선인에게 일본인의 마지막 모습은 그들이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와 마찬가지로 살상과 파괴로 점철되었다."(2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