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역사가들 - 서양사 연구를 위한 입문
마크 길더러스 지음, 강유원, 이재만 옮김 / 이론과실천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서문


1장 역사 연구의 목적과 의도


"지식체계로서의 역사학은 서구 문명에서 장구하고 영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정의와 강조점이 때때로 변해왔지만, 쓰여진 서사는 언제나 인간사에 집중했고 진실을 내세웠다. 역사가들이 진실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들의 서술이 타당하다고 믿을 만한 근거를 증거의 형태로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현대 미합중국 역사가 폴 콘킨은 간결한 정의를 제시했다. 역사란 〈인간의 과거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다.〉 여기서는 〈진실한〉과 〈인간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역사를 전설, 우화, 그리고 신화와 구별하는 것은 진실의 질이며, 전설, 우화, 신화는 분명 어떤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대개 문자 그대로 보면 그렇지 못하다. 역사가는 인간의 과거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주로 자연의 사건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만 주목한다. 예를 들어 화산 폭발의 경우 주로 폼페이 같은 도시들을 묻어버렸을 때 주목을 받았다."(17-8)


"철학자 칼 포퍼는 문제의 다른 측면을 지적했다. 그는 무엇보다 사회과학자와 역사가가 의도적인 인간 활동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고찰해야 한다고 믿었다. 때로는 상황이 나빠진다. 역사적 행위자는 일련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뜻밖이거나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포퍼는 인간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의도와 결과 사이의 연계를 탐구하길 바랐다. 유럽을 정복하려는 나폴레옹의 시도는 봉건적 구조를 무너뜨려 근대화를 위한 길을 닦았다. 미합중국은 남베트남의 자결권을 보호하려고 군사력을 동원했을 터이지만, 오히려 그 작은 나라의 소멸을 앞당기고 말았다. 때로는 비극적이고 때로는 희극적인 그러한 아이러니는 인간의 경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원대한 의도는 길을 잘못 드는 경우가 아주 흔하므로 그것을 추구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목적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보다 잘 추정할 수 있다면 더욱 건설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24)


# 역사적 탐구의 3단계 모델

1.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역사적 행위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으로 탐구를 시작한다.

2. 〈왜?〉라는 질문을 던져 행위자들의 행동을 해명한다. 여기서 인간 활동에 대한 역사가들의 설명이나 해석이 제시된다.

3. 〈사태의 결과는 어떻게 판명되었는가? 누가 이익을 얻었고 누가 고통을 얻었는가? 그 결과는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사건의 결과를 평가한다.


2장 역사의식의 등장


"어떤 고대인들은 기록을 전혀 보관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반면 이집트인, 수메르인, 아시리아인, 히타이트인은 서기전 3천~2천 년부터 쓰여진 유물을 남겼다. 그중 다수는 위대한 인물들의 위업을 자세히 기록한 목록과 비문으로 이루어졌다. 이 기록들은 연대기에 대한 감각과 같은 원초적 역사의식의 등장은 입증했지만, 약간의 단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친다." "반면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고대인들보다 역사를 중시했다. 실제로 그들에게 역사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었고, 그들은 역사를 이해하여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정립하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고대 유대인들은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신 야훼와 특수한 관계를 맺었다." "이처럼 유대인의 역사 저술은 비판적 혹은 이성적 탐구의 표명이라기보다는 종교적 경험과 신앙의 산물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굳건한 신념에 따라 해석했다."(33-5)


"희랍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던 시간 차원은 순환적 사고방식이었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같은 호메로스의 시는 웅장하고 숭고한 방식으로 과거의 영웅적·서사시적 이야기를 말했고, 희랍인들은 그것을 역사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상 그것은 역사가 아니었고, 흔히 초자연적 힘이 사건의 진행을 좌우하는 전설, 신화, 우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처럼 역사적 정신과 무관해 보이던) 희랍인들은 역사적 사유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들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방법으로 비판적 역사를 발명했다. 고대 희랍어 '히스토르(histor)'는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학식을 갖춘 사람을 가리켰다. 그는 사실을 조사했고, 탐구를 통해 그 정확성을 판별했다. 그랜트는 '히스토리에(historie)'가 〈이성적 설명을 위한 조사와 현상에 대한 이해〉를 의미했다고 설명한다. 서기전 5세기에 두 천재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이성적 기법을 사용하고 역사 저술을 창시하여 지적 혁명을 일으켰다."(36-5)


"희랍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로마인들 역시 통치 엘리트의 정치적·군사적 활동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러나 그들은 희랍인들과 달리 공평성과 객관성에 관심을 덜 기울였다. 진지한 도덕주의자인 그들은 판단을 내리고 자신들이 보기에 타락한 것 혹은 모범적인 것을 묘사하는 편을 선호했다." "로마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정치적·군사적 주제에 관해 몇 권을 저술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로마제국 연대기》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재위에 오른 서기 14년부터 네로 황제가 죽은 직후인 68년에 이르는 제국의 일들을 기술했다. 서기 2세기 초에 쓰여진 이 책은 로마 통치자들의 개성뿐 아니라 그들의 부패와 타락도 생생히 묘사했다. 전형적인 로마 역사가들처럼 한때 관리였던 타키투스는 공적인 덕을 칭찬하고 부도덕과 악행, 특히 황제들의 무절제와 그들을 둘러싼 이기적인 파벌을 비난했다. 그는 냉소적 아이러니와 깊은 비관론을 품은 채 그들을 책망하곤 했다."(41-3)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이원론을 체계 원리로 정립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역사철학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유대인의 개념에서 유래한 그의 시간감각은 희랍의 원운동 관념을 명백히 거부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끝없는 회전과 덧없는 반복은 사실상 신의 영향력과 의도를 수포로 돌려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천지창조라는 분명한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을 가진 선을 따라 역사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은 중심적 사건을 나타냈고, 시간의 종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자의 구원은 과정의 완성을 의미했다. 인간의 도시에 대한 신의 도시의 최후의 승리는 마지막 목적의 달성, 곧 신자들이 역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었다." "두 도시와 선을 따라 움직이는 사건들이 특징인 그 도식은 중세 전체와 그 이후에 기독교 저술가들을 강하게 자극했다."(46-7)


"중세 동안 역사적 주제를 다룬 저술가들은 1천 년 이상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 아래에서 작업했다." "중세 저술가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유일신은 논란의 여지 없이 인류 위에 위치하고 있었고, 사건들의 행로를 관찰했으며, 정기적으로 신성한 개입을 통해 그 사건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그러한 신앙의 표현은 인간 행위에 대한 논의와 현상에 대한 분석에 영향을 미쳤다. 연표와 연대기의 편자들은 종교를 인류의 궁극적인 관심사로 보았고, 역사는 목적론적인 설계에 따라 신이 미리 정한 결론을 향해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러한 성향은 인간 경험을 도덕주의적으로 심사하는 경향을 낳았다. 중세의 저술은 흔히 평결과 판결을 내렸고, 그리하여 그 객관성과 진실성에 관한 현재의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학자들은 객관성과 진실성이라는 쟁점을 근대적인 것으로 인정해왔다. 대다수 중세 연대기는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려는 의도였다."(48-50)


3장 근대의 역사의식


"중세 역사 서술과의 임박한 결별에 대한 최초의 암시들 중 하나는 14세기 르네상스의 초기 단계에서 나타났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평생 고대 로마 전통의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페트라르카는 (비록 기독교의 권위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로마를 조사하여 인간 존재와 그 세계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내세웠으니,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실제 사건들은 단지 상징적 중요성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그는 인간의 분투와 성취가 실재한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 16세기에 또 다른 피렌체 사람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대한 저술을 통해 역사에서의 인간적 차원에 주의를 집중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역사란 자신의 처세술을 조명하기 위한 일종의 사례 모음집이었다. 그는 《피렌체의 역사》에서 자신의 도시에서 벌어진, 정치의 특징인 음모와 책략을 상세히 다루었고, 인간의 행위를 기회주의와 자기강화에 의해 동기화되는 것으로 묘사했다."(60-2)


# 르네상스 역사가들의 결함 : 역사적 유물을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고, 고대인들을 분석과 해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그들을 숭배하고 모방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16~17세기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개혁과 잇따른 종교적·정치적 격변은 적대하는 파벌들이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는 당파들이 논쟁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적대하는 세력들은 현재 자신의 입장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모든 측면에서 과거를 끌어들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황의 통제가 초기 교회로부터 물려받은 믿음과 실천의 순수성을 타락시켰다고 역설하며 적들을 공격했다." "일련의 논쟁은 기독교세계 전체를 갈라놓았고, 유럽 대학들에서 최초로 역사학 교수직이 마련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한 혁신은 장기적으로 보면 전문적 역사학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획일적인 기독교적 역사 해석을 분열시키고, 역사에 대한 신성한 이해와 세속적 이해 사이의 간극을 벌렸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결과 보편사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하던 합의가 사라졌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롭고 통합적인 접근법은 곧장 등장하지 않았다."(64-5)


"17세기의 위대한 과학혁명은, 과거에 대한 신뢰할 만하고 정확한 서술을 고안하는 문제를 뒤흔드는, 또 다른 질문들을 제기했다. 뉴턴, 케플러, 갈릴레오의 발견에 이어진 과학적 세계관이 유럽 지식인들을 사로잡았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역사처럼 부정확한 탐구 분야에서 입증 가능한 지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자연과학의 옹호자들이 판단하기에) 역사가들이 수학적 이상에 부합하는 형태로 지식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들은 〈혼란스러운 지각에 대한, 해롭지는 않으나 부적절한 향락〉에 빠진 것이거나 심지어는 〈진리에 이르는 길에서 위험한 오류〉를 시작한 것이었다." "자연과학의 옹호자들은 역사가들에게 지난 4세기 동안 가장 중요했던 인식론적 쟁점 가운데 하나를, 특히 자연과학이 인간사에 대한 연구에서 어느 정도로 지식과 이해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해야만 하는가라는 쟁점을 제기했다."(66-7)


"계몽주의 시대는 소나기를 퍼붓듯 역사 저술을 생산했고, 동시에 역사적 사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에 유럽 철학자들은 인류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신이 아닌 이성이 인간의 행위를 안내할 것이었다. 계몽주의 운동은, 일종의 필연적 결과로서, 전통적 종교의 권위에 대한 반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일선의 역사가들─볼테르, 데이비드 흄, 그리고 에드워드 기번─은 종교를 인간의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묘사하여 종교의 역할을 비하했다. 볼테르는 성직자 계급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거대한 사기꾼이었다고 보았다. 실로 그들은 편협함, 불관용, 억압의 납품업자 역할을 했다. 인민을 종교적 미신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계몽주의 역사가들에게 합리성과 해방을 향한 인간의 진보를 알리는 이정표였다." "계몽주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열망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로의 일탈을 탈선이나 어리석은 시도로 여겼다."(70-1)


"비코는 지나치게 과장된 자연과학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서 〈새로운 학문〉을 내놓았다." "비코가 보기에 역사 연구의 적절한 수단은 철학에서, 곧 공리, 정의, 그리고 가설을 세우고 그로부터 추론하는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또한 그가 언어, 역사 문학에 대한 경험적 연구라고 여겼던 문헌학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비코는 말, 전승, 이야기, 신화, 전설, 그리고 법률 체계의 뿌리를 중요한 실마리로 여겨 면밀히 조사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지상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무지와 미신을 의미했다. 반면 비코가 보기에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관해, 그리고 우주에서의 자신들의 위치에 관해 가지고 있던 개념을 탐구할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비코는 맥락과 자기인식을 강조함으로써 19세기를 사로잡을 '역사주의'의 선구적 모형을 내놓았다."(78-9)


# 19세기 역사학의 갈래

1.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중에 생겨난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접근법(쥘 미슐레, 프랑수아 기조)

2.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졌으며 역사의 흐름을 추상적·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헤르더, 칸트, 헤겔)

3. 기록 연구에 기초한 탐구를 통해 실제 일어난 일을 밝히고자 했던 전문 역사학(역사주의 학파, 랑케)


"헤겔은 인간의 과거에 대한 헤르더의 전체론적 개념, 곧 각 단계는 뒤따르는 모든 단계를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통합성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지했다. 헤겔이 보기에 계몽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는 과거를 왜곡하고 진정한 이해를 방해할 뿐이었다. 그는 역사가들이 지나간 시기와 시대를 그 자체의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헤겔의 방법론적 조언을 받아들인 19세기 독일의 '역사주의' 학파는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지적하였고, 서로 다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세상을 다르게 보았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이 과거를 이해하려면 과거 행위자들의 정신 세계에 공감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들의 현실상(像)을 재구축해야만 했다." "이러한 방법론을 실천했던 일선의 연구자들 가운데 레오폴드 폰 랑케는 역사적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자 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역사학을 근대적인 학문 분과로, 전문적인 학문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86-7)


4장 역사철학 : 사변적 접근


"(칸트와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사변적 역사철학은 부분적으로는 전통적인 그 장대한 목적 때문에 20세기 들어 호소력을 일부 상실한 낡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점점 더 적은 것에 관해 점점 더 많이 안다〉는 유명한 경구에 따르면, 고도로 전문화된 탐구를 수행하는 시대에 빈틈없는 관찰자들은 인간의 과거 전체를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한 신념이 거의 없었다." "많은 학자들이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렸지만, 사변적 역사의 오래된 형태들은 결코 소멸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것들은 어느 정도 변화된 형태로 살아남곤 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념과 융합했고, 세계 각지에서 지적이고 혁명적인 호소력을 유지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아널드 토인비는 보편적·철학적 역사를 구성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사변적 저술체계를 내놓았고, 라인홀트 니부어 같은 종교 사상가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리게 하는 역사에 대한 접근법을 사용했다."(108)


# 마르크스 이후의 사변철학

1. 마르크스-레닌주의 :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들은 잉여 자본의 이윤에 복무하는 제국주의 국가들로서, 이들이 벌이는 만성적인 투쟁은 혁명이 승리할 때까지 지속된다.

2. 종속이론 :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유의 변종으로서, 주변부와 식민지에서 선진세계로 부를 유출하도록 설계된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빈곤과 저개발의 원인이다.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문화를 생물학적 세계의 유기체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문화가 탄생기-청년기-성숙기-노년기-죽음의 단계를 거친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부활시켰다.

4. 토인비의 〈역사 연구〉 : 각지의 문명들은 주어진 환경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노력에 따라 형태를 갖추었으며, 한 문명은 잇따르는 도전에 창조적으로 대응할 때 성장해나간다.

5. 프로이트 : 개인들의 정신분석에서 발견한 통찰력을 더 큰 인간 영역으로 확장했는데, 이는 〈인간 본성과 문화적 발전 그리고 원초적 경험의 침전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6. 라인홀트 니부어 : 인간의 자유와 힘의 증대는 〈이기적인 욕망과 충동〉을 표출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했을 뿐이며,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신의 주권이 인간 경험 전체를 주재한다.


5장 역사철학 : 분석적 접근


"(과학적 역사와 전통적 역사 간의) 논쟁은 19세기 중반 실증주의의 도래와 함께 특히 두드러졌다. 주로 프랑스인 오귀스트 콩트의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뒤이어 두 영국인 헨리 토머스 버클과 존 스튜어트 밀이 받아들여 정교하게 가다듬은 이 사상체계는, 자연과학의 기법을 지지함으로써 인간사에 대한 연구를 보다 체계적인 종류의 탐구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실증주의자들은 독특하거나 개별적인 사건보다는 인간사의 궤적에서 나타나는 균일성과 유사성에 주의를 집중했고, 곧이어 같은 종류의 경험들을 연결하고 있는 불변의 관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기보다는 혁명의 현상들을 조사하려 했다. 실증주의자들은 자연 세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결과들을 지배하는 일반법칙들을 가정했고, 그것들을 발견할 만한 지적 역량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132)


"콩트, 버클, 그리고 밀이 선언한 실증주의 철학은 격렬한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비판가들은 대개 〈관념론자〉라고 불렸는데, 이 학파는 독일인 빌헬름 딜타이, 이탈리아인 베네데토 크로체, 그리고 잉글랜드인 로빈 콜링우드로부터 나왔다. 그들 모두는 자연과학에서 이끌어낸 유추는 유효하지 않으며 복잡한 역사 저술에는 매우 다른 개념적 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말에 딜타이는 자연과학과 정신학을 근본적으로 구별하였다. 각각은 그 실천에 있어 확연히 다른 방법론을 필요로 했다. 딜타이에 따르면 자연과학자는 자연 내의 규칙성과 균일성을 다루는 반면, 역사가는 자연 밖의 독특하고 특정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들을 다루었다." "크로체는 역사가들이 과거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재사유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말했다. 콜링우드는 역사 연구의 대상은 (중층적인) 인간 정신의 활동이며, 역사가들은 정신의 작용을 연구함으로써 정신에 관해 배운다고 주장했다."(136-7)


"미합중국 역사가 칼 베커가 말했듯이, 〈실제 과거는 지나가버렸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재창조된 역사의 세계는 만질 수 없는 세계이다.〉 자연과학의 많은 형식들과는 달리, 역사가들이 실제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역사가들은 과거의 유물들을 이용해서 역사를 재구축하며, 언제나 관점의 제한을 받는 가능성(확실성이 아니라)에 대한 진술을 사용한다. 역사적 서사는 시각 혹은 관점을 거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시각이나 관점이 없다면 역사적 유물은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고 역사적 서사는 일관되게 전개되지 못할 것이다. 역사가들이 항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은 옳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반드시 지적으로 양립 불가능하거나 오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 견해는 다른 견해들을 풍요롭게 있게 만들 것이며, 이론적으로 볼 때 역사가들이 과거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이야기들의 수는 무한하다."(150)


6장 최근의 전문적 역사학


# 역사방법론의 분화

1. 경제사 : 산업화가 가져온 극적인 변화에 주목한 역사가들은 생산 체계와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벌이는 경제적 투쟁과 이익 추구를 분석하면서 수량화와 사회과학 방법론을 활용했다.

2. (새로운) 사회사 : 노동자, 농민, 인종, 여성 등의 범주에 속하는, 역사적 서사에서 완전히 익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지도 않았던 이들의 역사적 행위에 초점에 맞추었다.

3. 비서구사 : 여타 지역에 대해 우위를 점한 서구 중심의 보편사 혹은 세계사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사 개념들, 세계체제 분석, 탈식민지 연구, 서발턴 연구 등이 행해졌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구성원들 가운데 비판적 사상가들은, 경제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순진한 변종들을 거부했으며, 인간 행위를 형성하는 영향력들의 다양성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를 역설했다. 예를 들어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과 융합된 형태를 찾았다." "프랑스 학자들 역시 인간의 과거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형태의 이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29년 마르크 블로흐와 뤼시앙 페브르가 창간한 영향력 있는 저널 〈경제사회사 연보〉를 중심으로 아날 학파를 구성한 역사가들은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역사의 흐름에 반대했다. 아날 집단은 페브르가 '사건사' 또는 '사건지향적 역사'라고 폄하한 정치, 전쟁, 외교에 국한된 강조를 거부했으며, 인간 실재의 많은 차원들을 보다 완전하게 파악하려 애썼다. 역사서술가 에른스트 브라이자흐가 설명했듯이, 이 프랑스 학자들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새롭고 보다 완전한 역사를 구상했다."(171-2)


"아날 학파의 저작에서는 두 가지 특성이 두드러진다. 첫째, 아날 학자들은 전형적으로 집단의식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심성구조〉라 이름 붙은 이 현상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인간집단의 정신적·심리적 특성에 주의를 집중했으며 그럼으로써 개인들에 대한 제한적이고 근시안적인 관심 너머로 역사가들을 이끌었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집단성은 총체적 역사로 이어지는 설명을 정식화하는 데 거의 모든 것을 포함시켰다. 둘째, 앞의 경우와 비슷한 방식으로 아날 역사가들은 장기지속 개념을 사용했다. 실제로 시간 개념인 이 술어는 역사적 변화의 행로에 개입하는 구조적 연속성을 가리켰다. 장기지속은 무엇보다 토지, 바다, 기후, 그리고 식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조건들은 인간사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나타냈으며 정치, 전쟁, 외교와 관련된 일시적 사건들보다 더 느린 속도와 리듬에 주목하게 했다. 더 나아가 이것들은 삶의 방식을 결정했다."(173)


"여러 종류의 특이성과 다양성이 오늘날 역사학의 기예를 특징짓고 있지만, 한 가지는 어느 정도 분명한 듯하다. 역사학은 더 이상 모든 독자의 정체성과 경험을 대변하는 공통의 이야기를 내놓지 않는다. 역사를 소비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백인 남성 엘리트들의 활동에 집중하는 서사들은 더 이상 만족이나 자극, 또는 진실에 도달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과거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주의를 끌려고 경쟁하는 엘리트와 비엘리트,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 중 하나만 강조하는 다수의 관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차이를 조화시킬 만한 뾰족한 방편은 없는 실정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역사가들에게는 그러한 차이와 비일관성이 끔찍한 난관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러한 조건은 세계의 혼란과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196)


7장 문화전쟁, 포스트모더니즘, 그 밖에 다른 쟁점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이성, 객관성, 그리고 진보의 가능성에 관한 계몽주의적 관념들이 전혀 타당하지 않다면,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분과에서 진실을 확증하는 부분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달갑지 않은 전망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던적 도전은 고도로 회의적인 형태의 철학 사상, 언어학, 그리고 문학 비평에서 흘러나왔다. 대체로 이 도전은 서구의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한 환멸과 불신을 나타냈으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러한 세계관을 권력과 권위의 이용과 남용에 대한 전형적인 정당화로 인식했다. 포스트모던적 반대자들에게는 객관성이라는 관념 그 자체가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관찰자도 편견, 선입견, 이기심, 개인적 선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무언가에 관해 말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역사 속의 객관성이라는 관념은 두 배로 못마땅한 것이 되었는데, 객관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과거라 부르는 것은 순전히 상상력의 구조물이기 때문이다."(213-4)


"프리드리히 니체는 객관적으로 입증 가능한 서술이 역사가의 당파성 및 성향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역사학을 지식의 형태라는 지위에서 내쫓았다. 20세기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의 과학적 합리성이 신화적 사유 형태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언어가 현실의 이미지를 형성하긴 하나 현실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복잡한 분석을 전개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폴 드 만, 롤랑 바르트, 그리고 헤이든 화이트의 뒤이은 정교화 작업에서 언어 개념은 언어 그 자체를 가리킬 뿐 외부의 그 무엇도 가리키지 않는, 기호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자기 충족적 체계로 등장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역사가는 언제나 자신이 사유하는 세계 안에 갇힌 죄수이며, 역사가의 사상과 인식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범주들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모든 역사적 작업은 문학 비평의 범주들에 의해 판단되어야만 하는 문학 작업〉이 된다."(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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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3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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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해제 


1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와 사상의 발전 


"아테네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죽기 직전에 안티파트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상황(외국인 거주자)에 대해 불편을 느끼던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피력하고 있다. 〈아테네에서는 동일한 일들이 시민에게서만큼 이방인에게도 적당하지 않다. 아테네에서 지내는 것은 어렵다〉라고.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다른 시민들과 더불어 살며 폴리스에 [공동으로] 참여하는(koinonein) 삶 혹은 오히려 정치적 공동체(koinonia)로부터 차단된 외국인과 같은 삶, 이 둘 가운데 어떤 삶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논하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 점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학문 연구 활동에 전심전력으로 몰입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출신이 아테네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웃사이더로서 아테네의 현실 정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그는 『정치학』에서 중립적 관점에서 당시의 정치 상황을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620) 


"『정치학』 제1권에서 자연적 노예제를 옹호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에게도 친절함을 베풀며, 자신을 돌봐준 노예들을 적절한 시점이 되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라고 유언을 남긴 점은 조금은 당혹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언장에 남긴 대로 노예를 해방시켜준 점에 비추어보면, '주인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자유라는 보상(athlon)을 얻을 수 있다'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자연에 의해 그들 양자에게 부여된 상응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 노예와 주인 서로에게 어떤 유익함과 친애(philia)가 있게〉 된다(1255b12-13)라고 말하는 점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노예인 한에 있어서는 그를 향한 친애가 없지만, 인간인 한에 있어서는 그를 향한 친애가 존재한다. ······ 인간인 한에서 친애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1161b2-8)라고 말하는 점을 고려하게 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항이다."(625-6)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곳곳에 플라톤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들을 도입한 사람들이 우리의 벗들〉이라고 표명하면서 자신이 플라톤의 추종자에 속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가 스승에 대해 여러 분야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때조차도 그는 늘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채로 애정을 표명하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두고 〈사악한 사람은 찬양할 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으로, 죽어야만 하는 인간들 중에서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플라톤만이 그 자신의 삶과 자신의 저술 탐구를 통해 인간이 동시에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줬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리학 작품을 가리키는 『오르가논』이 아카데미아 시절에 쓰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플라톤의 학생으로서 스승의 철학에 도전하는 일에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643-4) 


"『정치학』 제1권 제2장에서 피력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자연주의에 기초하는 세 가지 기본 테제는 이렇다. 첫째, 인간은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폴리스적 동물이다. 둘째, 폴리스는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셋째, 폴리스는 자연적으로 개인에 앞선다. 다음으로 그가 냉정하고도 중립적인 태도로 정치체제에 대한 관찰자로서의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아테네에서 거류 외국인(metoikos)으로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옹호하는 정치체제는 다수가 번갈아 지배하는 민주정(인민정, 제3권 제11장 〈다중이 소수인 가장 좋은 사람들[tous aristous oligous]보다도 더 최고의 권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견해가 ······ 어쩌면 어떤 진리마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고 여겨질 수 있겠다〉)과 가장 우월한 자가 지배하는 왕정(제3권 제17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이 경험한 아테네의 민주정과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의 절대적 왕권의 영향으로 추정할 수 있다."(655-6) 


# 제4권에서는 귀족정과 폴리테이아가 혼합된 '혼합정'이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상 제작학에 속하는 수사학을 '오르가논'(논리학)이나 정치학에 포함하는 것이 그 목적에 더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변증술이나 수사학적 방법이 논증을 만들기 위한 기술(dunameis tines tou porisai logous)임은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술에 대한 '짝패'(antistrophos)로 보았다. 하지만 수사학은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설득적 논증을 고안하는 것 이외에도 연설가는 청중의 심리와 그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만 한다. 즉, 연설가의 앎은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를 향한다. 그래서 수사학은 인간의 감정을 해부해야 하며, 설득을 목표로 하는 정치 연설가들은 경제적 문제, 군사적인 사항과 제도적인 정보를 포함한 앎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론』의 하나의 곁가지이자, 정당하게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도덕적 성품에 대한 탐구〉라고 말한다(『수사학』 1356a25-27)."(662-3)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은 페리파토스의 지도자였던 안드로니코스가 헬레니즘 시기의 학문 분류 방식을 좇아 편집했다는 것이 일반적 정설이다. 이에 앞서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크세노크라테스가 처음으로 학문을 삼분(三分)해서 분류했다고 하는데, 헬레니즘 시기의 스토아 철학의 주요 부분도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으로 분류된다.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벡커판의 편집 순서도 논리학에 해당하는 『오르가논』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이어서 자연에 대한 탐구에 해당하는 『자연학』을 비롯하여 생물학에 관련된 작품들, 그 뒤를 잇는 문자 그대로 '자연학 다음에 오는 것들'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이 자리하며, 다음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비롯한 실천 영역에 적용되는 윤리학 저작과 『정치학』이 그 뒤를 잇는다. 맨 끝자리에서는 제작에 관련된 탐구에 해당하는 『수사학』과 『시학』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편집 순서는 그의 학문 분류 방식과도 얼추 맞아떨어진다."(671-2)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6권 제1장에서 인간의 활동을 '안다(본다)', '행한다', '만든다'로 삼분하고 각각 이에 해당하는 앎을 이론지, 실천지, 제작지로 크게 구별한다. 이론지에는 자연학, 수학, 제일철학(혹은 신학), 영혼에 대한 탐구 등의 학문이 귀속되고, 실천지에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그리고 제작지에는 시학과 수사학 등이 포함된다. 이론학(epistemai)은 그 자체적인 앎을 추구하고, 실천학은 개인과 폴리스에서의 행위의 좋음과 관련되며, 제작학은 아름답고 유용한 대상을 만드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가령 선박 건조, 신발, 시(詩), 건강이나 힘과 같은 좋은 성질들이 실천학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오르가논'으로 총칭되는 논리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모든 학문을 위한 예비학이자 도구였지 결코 독립된 지위를 갖는 학문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며, 이런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논리학은 이론철학과 자연철학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될 수 있다."(672-3) 


"아리스토텔레스는 고결하게 저 높은 세계에 있는 것들에서만 아름다움(kalos)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생물학 탐구자로서 아무리 비천한 생명체들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가 언급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일화를 예로 들어보자. 철학자로 좋은 평판을 받던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나기 위해 그를 방문한 사람들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부엌의 화덕 가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멈칫거렸다. 그러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두려워 말라는 듯이 〈들어오시오. 여기에도 또한 신들이 있소이다〉(einai gar kai entautha thous)라고 말을 건넸다. 이 일화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하는 현상세계에서도 진리가 찾아질 수 있음을 보이면서 현상세계에 대한 탐구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모든 동물에도 무언가 본성적이고 아름다운 것〉(tinos phusikou kai kalou)이 있음을 알기 위해 우리는 주저 없이 동물에 대한 탐구에 다가서야만 한다는 것이다."(678-9)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윌리엄 키스 C. 거스리) 


1.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목표를 독단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자체의 명료화와 문제 자체들이 포괄하고 있는 난점(아포리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에 두었다. 

2. 직접 관찰한 경험과 상식을 기반으로 학적 탐구를 수행─플라톤과 비교하여 강력한 경험론적 측면─하고 있으며, 관찰과 이론이 일치하는 경우에 그 이론을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3.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정초하는 일반적인 전제를 찾는 방법이 바로 논리학이라고 보았기에, 자기의 학적 인식의 기반을 이루는 논리학을 독립적인 포괄적 체계로 논구했다. 

4. 아리스토텔레스를 특징 짓는 사유 형식은 목적론적인 사유 방식이며, 그에 따르면 한 사물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작업은 사물의 목적인을 제시하는 것과 동일하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김재홍) 


1. 해당하는 주제에 대한 일련의 엔독사(통념, ta endoxa)를 수집하여 하나의 부류로 분류한다. 여기에 속하는 엔독사는 인간이 함께 공유하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것들이다. 

2. 이것들 중에 적절한 것과 부적절한 것을 탐지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 작업은 해당 학문의 원리와 사실에 부합하는가와 관찰에 부합하는가라는 '논리적 정합성'에 따라 행해진다. 

3. 부적절한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부류의 엔독사를 만들어낸다. 가장 유력한 것들을 포함하는 최적의 부류를 선택하기 위해 매듭을 풀고, 왜 그것들이 그런지를 밝혀낸다. 

4. 경험적으로 수집된 '현상'을 개념 분석하여 정교하게 해석한 엔독사는 충분하게 증명된 것들이다. 최종적으로 남겨진 엔독사는 한 주제의 탐구를 위한 참된 후보가 될 수 있다. 


"『변증론』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탐구의 중요한 도구가 되는 변증술적 방법(dialektike)을 논하는 저작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인 분야와 경험적 탐구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 방법의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는 학적 탐구에서 잠정적이고 단계적인 절차를 밟는 접근 방법을 취한다. 그 방법과 절차는 우선, 다루어질 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정보를 수집하여 그 문제를 적절하게 형식화하여 진술한 다음, 그 진술들이 문제의 핵심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질문으로 정립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 이어서 그 논쟁점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원래 사유 방향에 부적합한 것들은 폐기하며 새롭게 문제를 정립해나가는 길을 찾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적인 탐구의 태도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체계는 독단적이지 않으며, 그의 철학 방법은 진리 탐구 모형의 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704) 


"인간의 행위와 감정과 관련된 실천철학의 목적은 원칙적으로 〈앎이 아니라 행위〉이다. 앎(gnosis)은 수학과 같은 정확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행위(praxis)를 목적으로 하는 윤리학은 개연성만 확보하면 되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제3장에서는 윤리학의 주제와 물음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윤리학적 주제들은 늘 어떤 가변성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대강에서 또 개략적으로(pachulos kai tupo) 참을 밝히는 데 만족헤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것'들에 대해 논의하고 또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전제'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에,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것'(결론)들을 추론하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윤리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그 주제의 본성(phusis)이 허용하는 한, 그만큼의 정확성을 추구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수학자에게는 엄밀한 '증명'을 요구하며, 수사학자에게는 설득적 논의만을 요구한다."(705)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의 임무가 아포리아의 해소에 있음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철학에 대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규정을 떠올리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곳에서 〈아포리아를 해소한다는 것은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법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그에게서 난점을 푸는 일(euporean)은 먼저 난점이 왜 일어나는지를 상세하게 밝혀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diaporean', 즉 난점을 상세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를(aporean)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가서 아포리아를 해소한다는 것은 애초의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diaporean'의 과정과 'aporean'의 과정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양자가 동의어로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diaporean'은 난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어진 난제에 얽혀 있는 사항을 상세히 들춰내는' 작업을 의미한다."(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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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엘리트 정치 -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조영남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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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엘리트 정치인가?


"중국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통치 엘리트라고 할 때는 공산당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의 구성원인 중앙위원을 가리킨다. 개혁기에 중앙위원은 약 200인의 정(正)위원과 약 150인의 후보 위원(투표권 없음)을 합쳐 350인 전후다. 여기에는 공산당중앙, 국무원, 전국인대,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 인민해방군의 지도부가 포함된다. 또한 지방 31개 성급(省級) 단위의 당서기 및 성장·시장·주석, 중요한 인민 단체의 지도자, 중앙 소속 일부 국유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도 포함된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정치국 같은 다른 권력 기구, 혁명 원로의 비공식 모임, 혹은 중앙 공작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을 사후에 추인하는 역할에 머무는 일이 많다. 따라서 중앙위원회에 초점을 낮추어 분석할 경우에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엘리트 정치를 파악할 수 없다." 즉, 중국 엘리트 정치의 중심은 중앙 정치국(政治局, Politburo)이며 그 중에서도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핵심이다.(19-20)


# 중앙 정치국 구성 인물들

1.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혹은 총서기 : 마오 주석과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총서기(1982년에 당 주석 폐지)를 가리킨다.

2. 정치국 상무위원회 : 공산당 중앙, 국무원, 전국인대, 전국정협, 중앙 기율검사위원회(중앙기위) 등 '5대 권력 기구'의 현직 최고 지도자들로 구성된다.

3. 중앙 서기처(書記處) :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 기구로서, 공산당 중앙 판공청 주임, 조직부 부장, 선전부 부장, 통일전선부(통전부) 부장, 정법위원회 서기 등으로 구성되며, 서기처의 실질적 책임자인 상무 서기는 총서기의 후계자가 맡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4. 중앙 군사위원회(중앙군위) : 인민해방군을 지도하는 군 지도자 중에서 두 명이 정치국원으로 선발된다. 중앙군위 주석은 공산당 총서기가 겸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유일한 예외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총서기 시절 덩샤오핑이 중앙군위 주석을 계속 유지한 경우다).

5. 지방 당서기 : 4대 직할시(베이징, 톈진, 상하이, 충칭)와 중요 성급 단위(성과 자치구)의 당서기들이 정치국 구성원에 포함된다. 4대 직할시는 고정이며 나머지 성과 자치구는 바뀔 수 있다.


# 중국 엘리트 정치의 유형

1. 일인지배(마오쩌둥) : 당 주석이나 총서기 개인이 정책결정권, 인사권, 군 통수권을 독점 행사한다.

2. 원로지배(덩샤오핑) : 혁명 원로 등 소수의 최고 지도자가 위의 권한을 행사한다. 원로지배는 혁명 원로가 주도하는 비공식 정치가 (공식 정치에 앞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이중 정치 구조’라는 점에서 집단지도와 다르다.

3. 집단지도(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이 위의 권한을 집단적, 공식적으로 행사한다.


"새롭게 선임된 총서기는 먼저 주어진 인사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파 세력을 권력 기관의 요직에 앉힌다. 장쩌민의 상하이방(上海幇), 후진타오의 공청단파(共靑團派), 시진핑의 '시진핑 세력' 등 다양한 파벌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다음으로 이들은 정풍 운동(整風運動, rectification campaign)과 부패 척결(反腐敗, anti-corruption) 운동을 전개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경쟁 세력이나 반대파를 굴복시킨다.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이 집권하자마자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전개한 것은 권력 공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총서기는 여세를 몰아 자신의 통치 이념을 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립한다. 장쩌민의 ‘삼개대표(三個代表) 중요 사상’,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시진핑의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일명 '시진핑 사상')은 이렇게 해서 지도 이념이 되었다."(29-30)


"과두제의 딜레마로 인해 과두제가 일인지배로 변질되는 과정, 다시 말해 최고 지도자(소련의 경우 공산당 서기장)가 권력을 축적하여 과두제가 붕괴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 권력의 순환 이론(circular flow of power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공산당 서기장은 정책 집행의 권한을 갖고 있고, 이를 이용하여 지방 당서기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방 당서기는 서기장을 지지하는 사람을 당대회 대표로 선출하고, 당대회 대표는 다시 서기장을 지지하는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선출한다. 이 위원들이 서기장의 뜻에 따라 정치국원과 서기국 서기를 선출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기장의 권한은 강화되고, 과두제는 일인지배로 변질된다." "다만 중국의 총서기는 소련의 서기장과는 달리 집단지도를 붕괴시킬 정도로까지 권력을 축적하지는 못했기에 중국의 엘리트 정치는 지금까지 집단지도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49-50)


1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시대의 엘리트 정치


"마오쩌둥 시대(1949~1976)의 엘리트 정치는 마오의 일인지배를 특징으로 한다. 먼저, 마오는 통치 기간 내내 최고 지도자로서 정책 결정, 인사 선임, 후계자 지명, 군대 동원과 관련된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중요한 회의를 소집하여 공산당의 노선이나 방침을 결정하거나 변경할 수 있었다. 또한 후계자를 자기 마음대로 선정하거나 취소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마오는 평생 동안 그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 '압도적 지위(predominant status)'를 누린 최고 지도자였다. 그러나 '압도적 지위'에 있었다고 해서 마오쩌둥이 항상 독재자로 군림했던 것은 아니다. 1949년 중국 건국부터 1958년 대약진운동 추진 전까지 마오는 동료들과 협의하여 주요 문제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권한을 행사했다. 반면 1958년부터 1976년 사망할 때까지는 독재자처럼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했다."(63-4)


#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특징

1. 카리스마적 권위와 권력(정책 결정권, 인사권, 군 통수권) 독점

2.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공산당 위에 군림하는 '사회주의 황제' 양상

3. 개인숭배가 일상화되면서 동료 지도자들과 주종 관계 형성


#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시기별 과정

1. 권위의 확립(1935~1948) : 중국 건국 직전까지의 시기로 마오를 정점으로 뭉친 혁명 세력이 엘리트 정치를 행사하는 '옌안 체제'가 성립된다.

2. 협의적 권력 운영(1949~1956) : 건국부터 공산당 8차 당대회까지의 시기로, 마오가 자신의 '압도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협의적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3. 일인지배의 발전(1957~1965) : 대약진운동 시기부터 문화대혁명 직전까지의 시기로 1-2선 체제의 수정주의적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은 마오가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면서 '독재 방식'이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1-2선 체제 : 공산당을 총괄하면서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류사오치의 1선과 국가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는 마오쩌둥의 2선으로 구성된 체제

4. 일인지배의 비극(1966~1976) : 문화대혁명 시기부터 마오 사망까지의 시기로 마오의 일인지배가 극단화되었고, 중국이 전체주의 체제로 전락했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 원로들은 1978년 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회의(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마오쩌둥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계속혁명' 노선, 일명 문화대혁명(1966~1976) 노선을 과감히 폐기했다. 대신 공산당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새로운 당 노선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노선을 실천하기 위해 공산당은 ‘개혁 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유화(私有化, privatization), 시장화(市場化, marketization), 개방화(開放化, opening-up), 분권화(分權化, decentralization)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덩샤오핑 시대에는 사회주의 혁명과 건국을 주도했던 혁명 원로들이 엘리트 정치를 주도하는 원로지배(gerontocracy)가 나타났다. 이는 마오쩌둥의 일인지배를 벗어난 과도기의 엘리트 정치체제로, 장쩌민 시기에 들어 집단지도가 등장하면서 소멸했다."(237-8)


"이중 정치 구조에서는 공식 정치의 구성원, 즉 총서기,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원, 서기처 서기가 원로 정치의 결정에 의해 언제든지 임명되거나 파면될 수 있었다. 만약 공식 정치의 구성원이 원로 정치를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로들의 결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다고 원로들이 판단할 때, 원로 정치는 공식 정치를 개편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은 이런 이중 정치 구조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즉 이들은 이중 정치 구조의 희생물이었다." "이중 정치 구조의 문제점은 집단지도가 수립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은 장쩌민 시기에 시작되어 후진타오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원로 정치의 종결이었다. 원로 정치는 개인적 명성과 인맥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가진 혁명 원로들이 주도한 것으로, 원로들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져야만 끝날 수 있었다."(251-2)


2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1 : 집단지도와 권력 운영


# 이중 정치 구조의 운영 사례

1. 후야오방의 실각(1986~1987) : 아직 공식 지위를 갖고 있던 혁명 원로들은 학생들의 자유화 요구에 우유부단하게 대처하고,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의 퇴진 문제를 거론한다는 등의 이유로 후야오방을 1987년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2. 공산당 13차 당대회의 지도부 선출(1987) : 덩샤오핑의 제안으로 혁명 원로들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물러났지만, 후임 인선(자오쯔양, 리펑, 차오스, 야오이린, 후치리)의 권한은 여전히 원로들의 사전 결정 사항을 추인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3. 자오쯔양의 실각과 장쩌민 총서기 선임(1989) : 덩샤오핑을 필두로 한 원로들은 톈안먼 사건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동란(動亂)〉으로 규정하고, 무력진압에 소극적이던 자오쯔양과 후치리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한편, 장쩌민을 총서기에, 리루이환과 쑹핑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새로 임명했다.


"장쩌민 시기에는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방이 주도 세력이었지만, 이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장쩌민 집권 1기에는 장쩌민(총서기)-차오스(전국인표 위원장)-리펑(국무원 총리)의 삼두 체제, 집권 2기에는 장쩌민(총서기)-리펑(전국인대 위원장)의 이원 체제가 형성되었다. 후진타오 시기에 들어서는 공청단파(후진타오)와 상하이방(장쩌민)-태자당(쩡칭훙) 연합 세력이 중앙과 지방에서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2002년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인선 과정에서는 최대 세력인 상하이방이 다수(9인 중 6인)를 차지하고 다른 세력이 일정한 지분을 인정받은 형태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2004년 9월 장쩌민의 중앙군위 주석 사임과 후진타오의 승계, 2006년 9월 천량위 상하이 당서기 퇴진과 2007년 3월 시진핑 당서기 임명 등은 후진타오 세력과 쩡칭훙 세력 간의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다."(322)


# 집단지도가 자리잡은 배경

1. 공산당의 제도화 :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등 주요 권력 기구가 당헌과 당규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된다.

2. 혁명 원로의 퇴진 : 혁명 원로들의 퇴진으로 자연스럽게 특정 개인이나 파벌이 절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되면서 각 세력 간에 타협을 중시하는 일종의 신사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 주요 파벌

1. 학연그룹 : 칭화방(칭화대학 출신), 베이다방(베이징대학 출신)

2. 지연그룹 : 베이징방, 상하이방, 간쑤방

3. 혈연그룹 : 태자당(혁명 원로의 자제들)

4. 기타 : 공청단파(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의 지도자들)


# 집단지도를 보완하는 제도

1. 연령제 및 임기제 : 장기집권을 막고 통치 엘리트의 정기적인 순환을 위해 .동직(同職) 2회 10년, 동급(同級) 15년 제한. 원칙을 수립하고,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들(중앙군위 주석과 국가주석(부주석) 제외)의 연령을 68세까지로 제한한다.

2. 민주 추천제 : 혁명 원로나 공산당 총서기 등 소수의 최고 지도자가 아니라, 공산당 중앙위원을 비롯한 350~400인 정도의 통치 엘리트가 일종의 선거인단이 되어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을 추천한다.


3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2 : 집단지도와 권력 승계


# 권력승계의 규칙

1. 연령제

2. 임기제

3. 권력 기구 인선에서 세력 균형 유지

4. 후계자 사전 선임(민주 추천제)

5. 점진적 '집단' 승계


"시진핑의 권력 기반은 장쩌민 및 후진타오의 집권 초기와 비교했을 때 매우 공고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정치국 상무위원의 분포에서 태자당과 상하이방이 절대 다수로, 시진핑 본인을 포함하여 총 7인 중에서 6인이나 되었다. 또한 퇴임 후 후진타오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진타오 본인이 중앙군위 주석까지 이양하고, 비공개 회의에서 정치 원로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친 이상 최대한 현실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7인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시진핑이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9인제 상무위원회보다 유리했다. 시진핑이 주요 정책과 인사 문제를 결정할 때,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을 설득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작은 규모가 상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7인제 상무위원회는 후진타오가 시진핑에게 준 커다란 선물 중의 하나였다."(492-4)


4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3 : 집단지도와 권력 공고화


"권력 공고화(power consolidation)란, 정치 지도자가 권력원을 확보하여 직위에 상응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과정과 결과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군 통수권, 이념적 권위(ideological authority), 개인적인 관계망(personal networks) 혹은 파벌(faction)을 장악해야 한다. 그 밖에도 국민이나 특정 집단, 예컨대 노동자, 농민, 지식인의 지지 역시 최고 지도자의 중요한 권력원이지만 앞서 말한 세 가지와 비교했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공산당 일당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신임을 얻고 자신을 잘 선전하여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화궈펑이 덩샤오핑 세력에 의해 권력에서 축출된 것이나, 대학생과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지만 보수파 원로들에 의해 총서기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후야오방의 사례는 이를 잘 증명한다."(526)


# 장쩌민, 후진타오 , 시진핑의 권력 공고화

1. 자파 세력(파벌)의 충원 : 장쩌민(상하이파), 후진타오 (공청단파), 시진핑(태자당)

2. 정풍 운동(整風運動, rectification campaign)과 부패 척결 운동의 전개

※ 정풍 운동 : 당정 간부의 업무 태도와 사업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당 중앙이 전 조직과 당원을 대상으로 학습과 상호 비판 활동을 전개하는 일종의 공산당 정화 운동

3. 이념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교육과 선전

3-1. 장쩌민의 삼개대표(三個代表) 중요 사상 : 선진 생산력 발전, 선진 문화 전진,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 추구

3-2.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 균형 발전 및 지속 가능한 발전에 방점

3-3. 시진핑의 시진핑 사상 :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해 사개전면(四個全面) 추진(전면적 소강 사회 완성, 전면적 개혁 심화, 전면적 의법치국(依法治國), 전면적 당 엄격 관리)


"장쩌민은 2001년 7월 공산당 창당 80주년 기념식 축사를 통해 삼개대표 이론을 공식화했다." "이때 공산당 내외에 포진하고 있던 '좌파(左派)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이 이론이 갖는 현실적 의의는 여러 가지인데, 그 중 핵심은 사영 사업가의 입당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사영 사업가는 과학 기술자처럼 '선진 생산력'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1989년 일부 사영 사업가들이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이후 공산당은 이들의 입당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제 장쩌민의 삼개대표 이론이 발표됨으로써 이런 금지 결정은 정당성이 사라졌다. 반면 좌파 이론가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사영 기업가는 착취계급으로 노동자 계급의 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공산당 입당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00년 2월 장쩌민이 삼개대표 이론을 제기한 이후 이를 기정사실로 하기 위한 교육과 선전 활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후진타오는 이를 적극 지지하고 추진했다."(562-3)


결론 : 집단지도의 분화와 전망


"시진핑은 강력한 조직 체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먼저, 공산당 중앙의 권위를 강화했다. 전에도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이 있었지만 성과는 그때뿐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달랐다. 전과는 다른 강력한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공산당 중앙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후진타오 시기에 유행했던 '구룡치수(九龍治水)', 즉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관리한다'와 같은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또한 시진핑은 영도소조를 대규모로 신설하여 당·정·군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개혁을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영도소조를 신설하여 자신이 직접 조장이나 주임을 맡고, 요직에는 자파 세력을 충원했다." "마지막으로 시진핑은 강력한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대를 극복할 수 있었다."(6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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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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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창하는 의식의 우주 속에서 자유의지는 유영하는가? 침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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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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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전히 시달리고 있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 :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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