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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3 - 제국주의 ㅣ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3
외르크 피쉬 외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황승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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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서론
2. '제국주의' 형성기까지의 '임페리움'
"'임페리움imperium'은 동사 'imperare'(명령하다)에서 파생되었다. 원래의 비전문적인 의미로는 〈명령〉 또는 〈지시〉인데, 국법에 관해 사용될 때는 최고위 공무원의 공권력을 의미한다. 원래 군軍통수권에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포괄적인,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무제한적인 공권력을 일컫는 총괄 개념이 되었다." "'임페리움'은 적어도 공화정 말기 이후로는 '로마 인민의 지배imperium populi Romani'라는 뜻으로서 타민족에 대한 로마 민족의 힘을 의미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법적으로 엄밀하게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처음에는 사람에 대한 명령권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명령권을, 그리고 마침내 지배하는 지역 자체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즉 명령이 통용되는 영역이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이 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 이후로 이 용어는 로마 밖의 통치자나 제국과도 여러모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물론 그 경우 로마는 최고의 제국이었다."(14-5)
"서로마 제국 몰락 후 서방에서 '임페리움'은 카를 대제의 대관식(800)과 오토 대제의 대관식(962)을 계기로 다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때때로 이런 저런 다른 명칭이 덧붙기도 했지만, 제국의 명칭은 1806년 해체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임페리움과 더불어 왕의 영토, 즉 '레그나regna'가 생겨났다. '임페리움'과 '레그나'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황제 측에서는 세계 지배의 요구(물론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옹호자들에 의해서만)에서부터 의전儀典에서의 단순한 우위에 이르기까지 우월한 측면을 강조했다. 이와 상응하게 '레그나' 편에서는 임페리움에 대항하여 다소 강한 유보 조건들을 제시했다. 통치권에 대한 요구들은 항상 거부당했지만, 통상적으로 황제에게 더 높은 위엄과 더 큰 특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임페리움은 국법상 황제에게 귀속되지 않는 영역에서는 결코 현실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16-7)
3. 근대 이전의 제국주의 개념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제국주의 개념이 확산된 것은 19세기의 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1834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유럽문화 특유의 진보적 특성에서 유럽문화가 전 세계로 확산될 수 밖에 없음을 보증하는 ······ 세 가지 주된 작용이 생겨났다. 즉 1)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작업방식의 고안, 그리고 새로운 발견으로 인한 생필품 생산의 지속적인 증대, 2) 자본의 증대, 3)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가 그것이다. 이로써 리스트는 세기말 이후 일반적으로 근대 개념인 '제국주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역사적 정황을 최초로 표현한 인물이 되었다. 여기에서 제국주의 개념은 민족국가 안에서 국가권력의 증대나 독립과 연결되었다." "또한 민족국가들의 경쟁과 이들의 경제적·문화적 확장을 위한 열망은 곧 절대적으로 긍정적이며 유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대중과 대중의 영향은 (이데올로기적인 영향을 행사하려는) 모든 정부에 매우 중요해졌다."(30-1)
"'제국주의' 개념은 긍정적인 측면 또는 부정적인 측면을 막론하고, 유럽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현상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비평가들과 사회주의적 비평가들에게 와서야 비로소 그 개념은 역사적 분석을 위한 개념적인 도구로 발전하였다." "서구에서 '제국주의' 개념의 내용과 용법이 비판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은 1870년대의 영국뿐 아니라 독일어권에도 해당된다. 영국에서는 긍정적인 내용이 '엠파이어empire' 개념과,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임페리움' 개념과도 연결되었으며, 독일어권에서는 긍정적인 내용이 힘의 균형을 노리는 개념인 '세계 정책'과 확고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는 그 개념을 호전적이고 군국주의적으로 발전해 가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첨예화하는 데 사용했으며,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은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공산주의의 분열과 시사적인 논쟁에 이르기까지 토대와 척도가 되었다."(35-7)
4. 민족적 제국주의들
"영국이 의식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에 노력을 경주하던 시기에 전통적인 개념으로서의 '제국주의' (동시에 '카이사르주의' 또는 '나폴레옹주의')는 퇴색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자리에 '엠파이어'와 '임페리움'이 등장했다." "(1872년 4월 3일과 6월 24일에 행한 두 연설에서) 디즈레일리는 개인적으로 해외 지역보다는 민족적 명예와 위대성에 중점을 두었다. 확실한 본능으로 그는 선행된 논의들에서 영국 연방에 소속된 개별 국가들이 독립하는 방향이 아니라 엠파이어가 더 강하게 결속하는 방향이 시대의 특징─그리고 그에게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요소는 유권자들의 여론이었다─이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맞서 통합을 공고히 하고 강화하는 것, 즉 〈제국의 관세, 제국의 신탁통치, 제국의 방어, 그리고 대의제적 토대에서의 공동제국 협의회 형식〉을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네 개의 〈본질적인 기둥〉이라고 못 박았다."(43-4)
"다른 한편 미국에서는 동일한 정치적 우월감에서 기인한 〈문명적 사명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미 1853년에 독일 출신의 이주자들은 〈새로운 로마 또는 세계의 미국〉이라는 강령적인 글에서 세계 공화국의 건설, 보통선거권, 국민 개병제의 도입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전제정치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국이 유럽에 간섭해야 할 필요성 등을 선전했다. 비록 그러한 정치적 전제들이 실현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논거는 새로운 상황에서 관심 있게 다루어질 수 있었으며, 원래의 의도가 전도되어 필리핀 식민지화와 쿠바 점령에 이용되었다." "함장 앨프러드 머핸은 제국주의 정책의 범주에서 해군력을 높이 평가하고 그 위상을 정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존 실리의 논거를 받아들여 역사적으로 위대한 모든 결정은 궁극적으로 해군력의 강·약에 좌우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경쟁이 점점 더 격화되는 가운데 전 세계에서 결속을 유지하고 통제하는 것이 제국주의 정책의 핵심이 되었다."(53-4)
"미국의 팽창보다 훨씬 더 강력했던 러시아의 팽창에서는 군사적 요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동요하고 있던 시베리아의 남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다. 차르 제국은 지리적으로 해외 식민지 확장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세력 정치Machtpolitik 경쟁에서 범슬라브주의라는 독특한 형태의 민족주의에 호소했다. 범슬라브주의Panslawismus는 분명 제국주의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제국주의 유럽에 유럽의 세력 정책과 팽창 정책에 과잉 경향이 있음을 매우 첨예하게 드러내준 계기가 된 것은 바로 범슬라브주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역으로 유럽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를 단순히 확장하는 것만으로는 식민지의 지배권을 요구하는 데 대한 정당성을 끌어낼 수 없었기에, 자국민의 우월성을 점점 더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월한 민족이 다른 민족 위에 선다는) 예정설은 특히 종교적 토대에서 번성했으며 비합리적인 충동을 촉진시켰다."(54-5)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동화〉 정책에서 〈연합〉 정책으로 변화했다. 유럽에서 건너간 이주자들뿐만 아니라 본토박이들의 식민지에서 일으키는 소요는 〈동화〉 정책으로는 억제될 수 없다는 식민지의 자연스러운 특수성을 신속히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나폴레옹 3세 이후, 궁극적으로는 세기말 무렵 이후 프랑스 문명을 전파하겠다는 이념과 식민지를 통합하겠다는 이념은 점점 더 뒷전으로 밀려났다. 비록 철저한 식민지 정책을 운용했고, 중앙 집중식 행정을 발전시켰으며, 식민지를 위해 상당한 자금을 퍼부었을지라도, 프랑스는 영국에 비견될 만한 제국주의적 성과나 그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계급투쟁을 최초로 천명한 1848년 6월 봉기와) 1871년의 패배 그리고 파리코뮌 이후 정치적 에너지는 주로 민족 자체의 분열과 모순에 얽매여 있었다." "퇴적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외교적으로 분명한 적성국을 접하면서 비로소 분출되었다."(55-6)
5. 독일의 '제국주의'
"피히테의 강연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최초의 정점이었다. 강연의 직접적인 정치적 의도가 독일 민족국가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그 논거는 본래의 의도를 넘어섰으며, 독일 민족은 〈악의 심연에서 인류 전체를 구원해줄 희망〉으로 간주되었다. 식민지 문제에서는 영국식의 고전적인 정당화 도식이 다시 등장했다. 문명은 제국주의적 확장 근거를 스스로 제공하고 있다. 〈민족 경제〉가 문화에 종속됨으로써 경제와 정치의 연관성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해임되면서 독일 민족주의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강박관념에 빠져들게 되었다." "국가의 위대함은 더 이상 프로이센-독일에 국한된 힘이나 황제권의 방어적 규정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동맹체제 등과 상응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독일 민족주의는 젊고 저돌적인 독일 제국주의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독일 제국주의는 〈세계 정책〉이라고 지칭되었다."(61-2)
"'세계 정책'은 경제적·정치적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특히 확고한 지위를 가진 '영국 연방'의 요구에 반대하는 신생 독일 제국주의의 투쟁 개념이 되었다. 그 때문에 동시대의 논쟁은 독일의 요구 또는 〈사명〉이 유럽의 균형체제를 세계 전체로 전이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인기를 끈 가이벨의 말처럼 〈독일적 본질로 세계를 치유하는〉 데 있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1914년에 가까워질수록 논쟁은 대상을 상실했고, 두 개의 관점은 유사한 정치적 실천으로 귀결되었다."(66) "'세계 정책'의 정당성이 천박해지는 만큼, 세뇌와 세뇌에 따르는 사회심리적 메커니즘이 강화되었다. 이에 대한 사례로서, 한편으로는 민족적 충성심을 부인하고 국가 권위를 공격한 자로 평가된 사회민주주의적 희생양과 반유대주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 정책적인 적성국 이미지(시기심 많은 영국,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프랑스, 세련되지 못한 러시아)를 들 수 있다."(63)
"한편으로 독일 제국주의로 인해 생겨난 대량 징집과 다른 한편으로 현상 유지를 하려는 태도의 이율배반은 장기간에 걸쳐 파시즘이 등장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1890년 이후 급속도로 번진 전前파시즘적 태도와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전개에 대한 초기의 징표들이다. 제국주의 정책은 점점 더 국민들의 태도에 좌우되었고, 파당들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고조되었다. 물론 전반적으로 책임감 없는 의회는 통합 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프로이센-독일은 곧장 지속적인 민주화와 의회 제도화의 길로 간 것이 아니었다. 1903년과 1912년의 선거 충격이 있은 후 억압이 커졌고, 제국주의적 조치가 실행되면서 계급 간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그러자 계급 대립의 배후에서 이를 무마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대중 교화 조치가 취해졌다. 궁극적으로 '세계 정책'의 지배적인 역할은 국내정치적 위기 상황의 결과였으며, 그에 따라 독일 제국주의 특유의 민족적 색채가 두드러졌다."(85)
6. 제국주의의 정치경제학
"하인리히 쿠노는 1900년 5월 말 제국주의의 정복 성향의 원인이 〈화폐자본의 이용 욕망과 팽창 욕망〉에 있다고 보았다. 식민지 정복의 초기 단계에는 판매 시장이 핵심이었다면, 이제 영국의 지위는 식민지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반대로 식민지와 연관된 〈세계 무역 독점과 산업 독점〉으로 설명된다. 식민지와의 상품 교환에는 시장 법칙이 유효한 반면에, 〈이익을 낳는 투자처를 찾아다니면서 실제로 제국주의적 팽창 열망의 현실적인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화폐자본은〉 성격이 다르다. 〈솟아 넘치는 활동 욕구로 국내 투자보다 해외의 사업에서 더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에게 어떤 지역이 누구에게 속하는지는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럴 것이 정치적 지배력은 투자의 가능성과 안전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식민지는 대규모 산업의 판매 시장 역할을 하다가 부를 축적한 산업국가들의 잉여자본 투자 시장으로 발전했다.〉"(103)
"스페인-미국 전쟁, 의화단의 난Boxeraufstand 그리고 무엇보다 보어 전쟁 등으로 촉발된 해외 정책에 관해 커다란 논쟁들이 벌어지자 비로소 포괄적으로 이해된 제국주의적 발전에 대해 이론적인 비판이 다듬어져 표현되기 시작했다." "1902년 《제국주의》를 저술한 홉슨은 주요 유럽 열강들의 무역과 팽창에 관해 연구했고, 제국주의적 확장은 경제 전반과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가 팽창하는 이유를 〈국가 전체의 상업적 이해관계는 국가 자원의 통제권을 빼앗아, 그것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특정한 국지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 새로운 제국주의는 ······ 그 나라의 특정 계급과 특정한 무역을 위해 번창해왔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차관, 교통수단 등의 형태로 투자가 증가한 점에 근거하여 입증했다. 제국주의는 납세자에게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 한편, 투자자와 투기꾼들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원천이었다."(104-6)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적 붕괴를 다룬) 마르크스의 숙고를 그 성향과 이론적 최종 성과에 관련해서만 수용했다. 사실 그녀도 모든 국가와 생산의 모든 부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독점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오직 이론적인 구성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이론적인 가설을 제국주의적 발전의 근저에 놓인 실제적 모순이라고 가정했다. 〈마르크스의 확장된 재생산 도식이 현실과 상응하는 순간, 그것은 결말, 즉 축적운동의 역사적 한계를 예고하며, 나아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종말도 예상케 한다. 축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며, 또한 자본주의의 몰락이 객관적·역사적으로 필연적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부터 자본의 역사적 진행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서 제국주의라는 최후 단계의, 모순에 가득 찬 운동이 생겨난다.〉"(112-3)
7. 전망
"레닌이 내린 '제국주의'의 가장 간략한 정의─기존 자료들을 정치적-실용적 의도에서 조합하여 하나의 추상적인 이상형으로 재가공한─는 〈자본주의의 독점 단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 자신도 그러한 정의를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산업의 독점화와 경쟁에 기반을 두는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변화하는 것을 간략하게 공식화하려는 레닌의 노력은, 물론 종종 경제와 사회 현상들이 국가나 지역에 따라 차별화된 형태로 드러나는 특수성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경험적으로 확실히 뒷받침된 이론보다는 제국주의를 〈지배 관계〉로서 해독解讀하는 일과 〈역사 속에서 제국주의의 자리〉를 찾기 위한 역사철학적인 방향성을 띤 탐구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국주의는 레닌이 보기에 〈금융 자본과 독점의 시대〉 또는 〈붕괴에 직면한, 사회주의에 자리를 내어 줄 정도로 무르익거나 너무 무르익은 자본주의〉의 시대였다."(119)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에 대한 연구는 거의 같은 시기에 레닌의 이론보다 더욱 경험에 강한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무역 및 생산 통계들을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이 경제학자는 1914년 이전 세계 경제 체제의 구조적 연관성을 해명하려고 했다. 여기서 그는 〈경제 활동의 국제화 과정〉, 즉 전 세계적으로 생산과 상품 교역이 서로 얽혀 있는 것과 상호 대립적인 경향들, 즉 민족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이해관계들〉을 구분했다. 부하린은 그러한 이해관계들을 적대적이고, 원칙적으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부하린의 구상에 따르면 국제화와 〈민족주의화〉의 대립적인 과정 속에서 제국주의에게 주도적인 기능이 넘어간다. 그는 제국주의 개념을 힐퍼딩의 논지에 따라 (독점 세력과 금융자본 그리고 국가권력의 새로운 형태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나타나는) 〈금융자본주의의 정책〉이라고 정의했다."(122)
"마오쩌둥의 이론은 (1930년대 중국의 고유한 경제적·정치적 정황들에 대한 상황 분석에 기반하여) 〈중국의 특수성과는 동떨어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잡담들은 단지 추상적이고 공허한 마르크스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시작된다. 마오쩌둥에게 그러한 정황들의 결정 요소들은 외부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봉건체제〉였는데, 그로부터 마오쩌둥은 아주 일반적으로 자기 나라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낙후성을 이해했다. 이러한 상황 서술로부터 마오쩌둥은 중국의 독립은 오로지 인민해방 전쟁을 위한 인민의 동원을 통해 다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제국주의의 경제적·사회적 전제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보다는 군사적인 투쟁 조건들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마오쩌둥의 언어에서 '제국주의'는 '침략자', 다시 말하면 군사적으로 굴복시켜야 할 '적'과 동의어가 된다."(123-4)
"1920년대에 벌써 마르크스-레닌주의 정통 이론의 방법과 태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나타났다. 논란의 여지없이 인플레이션에 이어 자본주의 경제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자본주의가 기생적이고 부패하며 몰락해간다는 진단에는 들어맞지 않는 현상이었다." "제국주의 이론은 완전히 경직되었고, 제국주의 개념은 정치 투쟁을 위한 저속한 표어가 되었다." "제국주의 개념이 거의 완전히 내용이 없어지고 역사적 성격을 잃어버림으로써, 그것은 수많은 사회적 현상과 사건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 때문에 제국주의 개념은 아마도─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가끔 정치적인 선전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제국주의는 〈진보와 평화의 가장 가증스러운 적〉이고, 제국주의의 신봉자는 〈국가를 빼앗는 강도이며 식민지 정복자이고 전쟁광〉이다."(125-7)
"(정치 어휘를 '공간화'한 카를 슈미트의 '광역권(실행공간)' 개념으로 대표되는) 독일 민족 우파와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공간 이데올로기는 종국에는 극단적 팽창주의에 대한 암호가 된다. 그들은 그러한 팽창주의에 제국주의 개념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 이론가들에게 이 개념은 이중으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개념을 자신들의 이론과 특히 정치 일상에서 표어로 사용했다. 더욱이 독일 우파들에게 서구 열강의 정책은 대개 〈제국주의〉로 여겨졌다. 공간 이데올로기는 그들에게서 두 가지 기능을 충족시켰다. 먼저 그것의 불명료성이나 불확실성은 팽창의 실제적인 목표들에 대한 구체적인 결론을 보여주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특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식민지 열광자들의 변변치 못한 선전을 상기하지 않게 해주었다. 정치 분야에서 그러한 언어 조작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