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정체성 정치를 넘어
마크 릴라 지음, 전대호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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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나는 20세기 미국 정치사를 기독교 신학 용어에 빗대 두 개의 《통치 체제》로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제안한다. 첫째는 루스벨트 통치 체제로, 뉴딜 시대부터 1960년대 시민권 운동과 '위대한 사회'(린든 존슨 대통령이 내세운 구호)의 시대까지 이어지다가 1970년대에 소진되었다. 둘째 레이건 통치 체제는 1980년대에 시작되어 현재 기회주의적이고 무원칙적인 대중영합주의에 의해 종결되는 중이다. 각각의 통치 체제는 미국의 미래에 관한 고무적 이미지와 정치적 의제들을 좌우하는 특징적인 원칙들을 동반했다. 루스벨트 체제는, 시민이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 기본권의 부정否定에 맞서는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그런 미국을 그렸다. 표어는 연대, 기회, 공적 의무였다. 레이건 체제는 국가의 속박에서 풀려난 가정과 소규모 공동체, 기업이 번창하는 더 개인주의적인 미국을 그렸다. 표어는 자기 신뢰, 최소 정부였다. 첫째 체제는 정치적이었고, 둘째는 반反정치적이었다."(12)


"진보의 중대한 기권은 레이건 시대에 시작되었다. 루스벨트 체제가 끝나고 야심찬 통합 우파가 부상하면서, 미국 진보주의자들은 심각한 과제에 직면했다. 미국 사회의 새로운 현실에 적합하게 과거 시도들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반영하여 미국민이 공유할 미래에 관한 신선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라는 과제에 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우리가 시민으로서 공유하는 바와 우리를 한 나라로 묶는 것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은 채 정체성 정치 운동에 몰두했다." 정체성에 매혹되고 집착하는 태도는 그 원리, 곧 개인주의를 강화했다. "루스벨트 진보주의와 이를 지지하는 노동조합들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서로 악수하는 두 개의 손이었다. 정체성 진보주의를 표현하는 흔한 이미지는 프리즘이 단일한 광선을 색깔 성분들로 분해하여 무지개를 만드는 모습이었다. 이 두 상반된 이미지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12-3)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원래 대규모 민중 계층들─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치 제도를 동원하고 정비함으로써 중대한 역사적 과오들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 즈음에 자기 존중과 점점 더 협소하고 배타적으로 되는 자기 정의定義를 내세우는 사이비정치에 자리를 내주었다 .오늘날 우리의 학교와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그런 사이비정치다. 그로 인한 주요 결과는 젊은이들의 시선이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공익에 대해서 생각하고 공익을 실현하려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준비를 하지 못한 채로 방치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과 무척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공동의 노력에 참여하게 하는 어렵고 생색나지 않는 과제를 맡을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13-4)


"그러나 정체성 진보주의에 대해서 제기할 수 있는 가장 뼈아픈 비난은 그 정치적 입장이 특정 집단들을 보살핀다면서 오히려 그 집단들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진보주의자들이 소수자에게 추가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소수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할 위협이 가장 크니까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소수자들을─공허한 인정과 〈찬양〉의 몸짓에 머물지 않고─유의미하게 돕는 유일한 길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장기적으로, 정부의 모든 층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성취하는 유일한 길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메시지로 그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 진보주의는 정반대의 일을 한다." "정체성 진보주의의 역설은 그 입장이 소망한다고 공언하는 바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사고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에 있다."(15-7)


제1장 반反 정치


"한 혁명은 다른 혁명을 은폐할 수 있다. 역사적 기억 속에서 1989년의 대표적 사건은 소련의 붕괴다." "(소련 붕괴의) 가장 큰 역설은, 냉전의 마지막 10년에 걸쳐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진보하는 동안 미국인들이 민주주의 정치의 실행에 투입하는 역량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공개적으로 폴란드의 연대자유노조를 비롯한 친민주주의 세력들을 지지하고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베를린 장벽의 철거를 극적으로 촉구했지만, 미국 내에서 그는 공익이나 공익 달성을 위한 정치 참여을 운운하는 것이 더는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민중이 선출한 대통령이었다. 미국에서는 삶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이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그 관점은 사회의 필요와 욕망보다 개인들의 필요와 욕망에 절대적 우선권을 부여했다. 이 부지불식간의 혁명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일어난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 더 강력하게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30-1)


"미국 사회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부르주아 사회가 되었다. 물질적으로도 그러하고 문화적 신조들에서도 그러하다. 당사자의 선택. 개인의 권리. 자기 정의. 우리는 마치 혼인서약을 읊듯이 이 단어들을 말한다." "(개인주의 신조를 충실히 반영한) 레이건의 교리문답은 어떤 전통적 의미에서도 보수적이지 않다. 의존과 의무를 통한 전통적 결속보다 자기 결정이 우선이라는 점을 공리로 삼으니까 말이다. 자연적인 (가정부터 국가까지의) 집단 소속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나 우리가 그 욕구를 충족시켜야 마땅하다는 것에 대해서 이 교리문답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 것과 네 것을 따지기 위한 어휘는 있으나, 공익을 환기하거나 계급을 비롯한 사회적 실재들을 다루기 위한 어휘는 없다. 이 교리문답이 그리는 그림 속에서 우리는 공간 속에 뿔뿔이 흩어진 채로 제각기 고유한 속력으로 자전하며 고유한 궤적을 따라 운동하는 기본입자들이다."(33-6)


# 레이건의 교리문답

1. 좋은 삶은 독립적인 개인의 삶이다.

2. 부의 분배가 아니라 축적을 우선해야 한다. 

3. 시장이 자유로워질수록, 시장은 더 많이 성장하고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만든다.

4. 독재적 정부나 비효율적 정부 혹은 부당한 정부가 아니라, 정부 그 자체가 문제다.


이 모든 것은 루스벨트 통치 체제에 동반되었던 교리문답과의 근본적 결별이었다. "무릇 교리문답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완고해지고 형식화하다가 결국 사회적 현실로부터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런 변화를 미국 진보주의가 1970년대에 겪었다. 공익을 위한 집단적 활동은 합법적인 것이라는 원칙에 더하여 미국 진보주의는 공익 달성을 위한 최선의 길은 언제나 세금, 재정 지출, 규제, 법원의 판결이라는 신앙고백을 추가했다. 1980년대에 이르자, 정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가정을 의문시할 이유들이 셀 수 없이 쌓여 있었다. 베트남전쟁, 워터게이트 사건, 스태그플레이션 앞에서의 무능함 등이 그런 이유들이었다. 위대한 사회에 너무 많은 프로그램들이, 너무 서둘러, 거창한 미사여구와 함께 도입되어 사람들의 기대를 부풀렸고,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40-1)


"그들의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그들의 (또한 나의) 바람이 입법 과정에서 성취되지 않으면 그 과정을 우회하기 위해 법원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한 것이었다. 희귀어류 보호부터 낙태와 통학버스 같은 더 민감한 사안들까지 모든 것에 법원의 판결이 비 오듯 쏟아졌다. 진보주의자들은 여론의 동향을 살피고 합의를 이끌어내고 보폭을 좁히는 습관을 상실했다. 그리하여 대중은, 법이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들의 전유물에 불과하다는 우파의 주장에 점점 더 귀가 솔깃해졌다. 결국 그 비난이 정착했고, 그때 이래로 사법부 공직 후보자에 대한 인준은 고도로 당파적인 절차가 되었다. 현재 그 절차를 주도하는 것은 우파다. 이 모든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으로, 정부의 행위는 비효율적이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역효과를 낸다, 혹은 제멋대로다, 라고 믿는 미국인이 (협력을 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점점 더 늘어났다."(42)


"레이건의 공화당은 동부의 진보주의적 상류층과 억울함을 느끼는 남부 주민, 민주당을 저버린 중서부 소수민족 육체노동자들, 외곬의 자유시장주의자들, 반공 투사들, 정신 이상에 가까운 음모론자들, 1960년대의 분화적 변화에 밀려난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이 집단을 경시할 수 없는데─여성주의를 어머니이자 주부인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여긴 보수적 여성들을 결집했다. 그들이 이룬 집단은 이데올로기적으로나 기질적으로나 통합되기 어려운 연합체였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공통의 비전이 부재했다. 레이건이 그 비전을 제시하자 공화당은 연합체이기를 그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되었으며 선거 승리의 역량을 갖춘 세력이 되었다. 현재 미국 대통령의 특징적인 표현을 빌리면, 이후 공화당은 〈잘 정비된 기계well-tuned machine〉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그러했다."(48-9)


제2장 사이비 정치


"새로운 반정치적 국가관에 직면한 진보주의자들은 정체성 정치의 덤불 속에서 길을 잃었고 그 덤불에 어울리는, 억울함을 토로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차이의 수사법을 개발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제도권 바깥에서 작동하는 사회운동들에 매혹되었고 민중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발전시켰다." "진보주의자들은 (학생들에게 시민의 책무를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도록 훈련하고 학생 자신의 머리 바깥에 펼쳐진 세계에 무관심하도록 방치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진보 및 급진진보 정치 활동가들은 주로 노동계급이나 농업 공동체 출신이었고 지역의 정치 클럽이나 직업 현장에서 육성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오늘날 진보 및 급진진보 정치 활동가들은 거의 다 대학교들에서 육성된다." "이는 진보주의의 전망이 우리의 고등교육기관들에서 일어나는 일에 적잖이 의존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63-5)


"어떤 의미에서 시민권 운동은 더 과거에 있었던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 집단들의 투쟁과 공통점이 더 많았다. 양쪽 모두에서 관건은 시민으로서의 평등과 존엄을 인정받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여성주의의 1차 물결과 2차 물결, 그리고 초기 동성애자 권리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전이轉移가 시작되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한편으로 우리가 민주 시민으로서 우리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미국 내 다양한 사회집단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사이의 관계가 더는 아니었다. 시민의 지위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신에 사람들은 개인적 정체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인종, 성적 취향, 성별 등으로 물든 유일무이한 난쟁이, 내면의 호문쿨루스를 의미하는 개인적 정체성을 말이다.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존 F. 케네디의 도발적인 질문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되었다."(70)


"원래 신좌파는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약간 맑스주의 식으로 해석하여, 겉보기에 개인적인 모든 것이 실은 정치적이라는 뜻으로, 권력투쟁에서 벗어난 영역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저 구호를 정반대의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우리가 정치 활동이라고 여기는 것이 실은 그저 나를, 내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표현하는 개인적인 활동일 따름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정체성'은 신좌파를 산산이 분열시켰다. 흑인들은 대다수의 지도자가 백인이라는 점에 불만을 표했고, 여성주의자들은 대다수 지도자가 남성이라는 점을 불평했다. 머지않아 흑인 여성들은 급진주의적 흑인 남성들의 성차별과 백인 여성주의자들의 암묵적 인종차별을 싸잡아 불평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인 여성들 역시 여성동성애자들로부터 이성애 가족의 자연스러움을 전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집단들이 정치로부터 바라는 바는 사회정의와 전쟁 종식 그 이상이었다."(79-80)


"건강한 정당 안에서 작동하는 힘들은 구심력이다. 그 힘들은 파벌들과 이해 관심을 모아서 공통의 목표와 전략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한다. 그 힘들은 공통 이익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혹은 최소한 발언하는 것을 모든 각자의 의무로 만든다. 반면에 운동 정치에서 작동하는 힘들은 모두 원심력이다. 그 힘들은 점점 더 작은 파벌들로의 분열을 유도한다. 단일한 사안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을 엄숙하게 내세우는 파벌들로의 분열을 말이다." "사안 중심의 운동에서 정체성 중심의 운동으로 관심이 서서히 이동하면서, 미국 진보주의의 초점도 공통성에서 차이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폭넓은 정치적 비전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사이비정치가, 느끼는 자아와 그 자아의 인정 투쟁에 관한 뚜렷이 미국적인 수사법이 차지했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 수사법은 생산하는 자아와 그 자아의 이익 투쟁에 관한 레이건의 반정치적 수사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81-2)


"우리의 상상 속 대학생이 캠퍼스의 정체성 중심 사고방식에 깊이 빠져들수록, 그는 '우리'라는 단어를 더욱 불신하게 될 것이다. 집단들의 차이를 은폐하고 특권층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보편주의자가 사용하는 계략이라고 선생들이 가르쳐 준 그 단어를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학문적 경향들이, 사실상 우리 사회의 전 분야에서 권장되는 급진적 개인주의에 지적인 멋까지 부여한다는 점이다. 삶의 모든 것을 익명의 권력이 주무른다는 신비주의적 사상을 우리의 상상 속 대학생이 받아들인다면, 그가 민주 정치에서 발을 빼고 그것에 빈정거리는 시선을 던지더라도, 그 행동은 완벽하게 정당화될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페이스북 정체성 모형'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 모형에서 자아란, 내가 '개인 브랜드'와 유사하게 구성하는 홈페이지다. 그 자아는 타인들과 연결되는데, 나는 그 연결들을 나의 재량대로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다."(89-91)


"루스벨트 통치 체제 기간에 집단 정체성은 우리의 정치 시스템이 사회구성원들의 평등한 지위라는 약속을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필수 수단으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페이스북 모형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아, 바로 나의 자아다. 공통의 역사나 공통의 이익, 심지어 공통의 생각조차도 그 모형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늘날 좌파 성향의 젊은이들은─우파 성향의 젊은이들과 정반대로─자신의 정치적 참여를 이런저런 정치사상들과 관련지을 가능성이 작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X로서, 다른 X들에 관심이 있고 X성과 연관된 의제들에 관심이 있어서, 정치에 참여한다고 말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들은 Y들, Z들과 동맹할 전략적 필요성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각자의 정체성은 유동적이며 여러 차원을 지녔고 그 차원들 각각이 인정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동맹은 결코 정략결혼 이상일 수 없다."(93)


"지난 10년 동안 새롭고 매우 의미심장한 어법 하나가 대학교들에서 주류 언론으로 흘러들었다. 그것은 'X로서 말하는데'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발언자가 특권적인 지위에서 이 사안에 관하여 말한다는 점을 듣는 이에게 알린다. 이 표현은 정의상 비X의 관점에서 유래한 질문들을 차단하는 장벽을 세운다. 그리고 의견 대립을 권력 관계로 규정한다. 결과적으로 논쟁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정체성을 들먹이고 질문이 들어올 때 가장 강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그리하여 과거라면 '나는 A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근거는 이러이러해'라는 식으로 시작되었을 학급 토론이 지금은 'X로서 말하는데, 네가 B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는 형태를 띤다. 만약에 정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이런 형태의 논쟁 전술은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정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은 공평한 대화의 장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금기가 논쟁을 대체한다."(94)


제3장 정치


"우리의 공적인 삶이 하루가 다르게 더 추해지고 있는 트럼프 집권 이후 진보주의자들이 트럼프에게 저항하기 위해 매우 신속하게 조직을 꾸리는 광경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저항은 본성적으로 반응이다. 저항은 앞을 내다보기가 아니다. 그리고 반反트럼프주의는 정치가 아니다. 나는 진보주의자들이 트럼프의 모든 행보 각각에 대응하는 데 몰두하느라 사실상 그가 원하는 게임을 하게 되는 불상사를 염려한다. 트럼프가 진보주의자들에게 내준 기회를 그들이 잡지─심지어 알아채지─못하게 되는 불상사를 염려한다. 트럼프가 통상적인 공화당 정신과 그나마 얼마 남지 않았던 원칙 있는 보수주의를 파괴해버린 지금, 경기장은 텅 비어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월을 통틀어 최초로 우리 진보주의자들 앞에 이렇다 할 이데올로기적 적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트럼프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105-6)


# 민주정치를 재학습하기 위한 4가지 교훈

1. 운동 정치보다 제도 정치가 먼저다.

2. 목표 없는 자기표현보다 민주적 설득이 먼저다.

3. 집단 정체성이나 개인 정체성보다 시민의 지위가 먼저다.

4. 개인주의와 원자화를 막는 시민 교육이 긴요하다.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선거 승리가 정치 활동의 제일 목표라는 교훈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운동 정치의 마법에 걸려 있다." "미국 헌법의 기틀을 잡은 사람들은 정치 활동이 반드시 협의와 타협을 요구하는 제도를 통해 걸러지도록 만들고, 정치 활동이 빈번한 선거, 견제와 균형, 공무원의 자율성, 군대와 법규의 제정 및 공평한 집행에 대한 시민의 통제로 구성된 시스템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이 모든 일이 세 층위의 정부에서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는 조금씩 쌓아가는 지루한 작업이 아주 많이 필요함을 의미했고, 미국 헌법의 입안자들은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낭만주의자들은 이같이 극적이지 않은 정치관을 꺼린다. 그들은 정치를 제로섬 대립─민중과 권력의 대립, 또는 문명과 폭도의 대립─으로 간주하는 쪽을 더 선호한다. 그쪽이 훨씬 더 가슴 설레는 일이기 때문이다."(109-11)


"그러나 운동 정치의 그 어떤 성취도 제도 정치를 통해 무효화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철칙이다. 반대로 제도 정치의 성취가 운동 정치를 통해 무효화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철칙이 아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을 개혁한 운동들은 많은 것을 해냈고 특히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어쩌면 이것이 무릇 운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운동은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을 혼자 이뤄낼 능력이 없다. 운동은, 운동의 목표에 공감하지만 기꺼이 느리고 끈기 있게 선거운동을 벌이고 법안을 만들고 협상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키고 관료들을 감독하면서 법이 집행되는지 감시하는 시스템 정치가들과 공직자들을 필요로 한다. 마틴 루터 킹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운동 지도자였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이 옳게 지적한 대로, 파벌 정치가 린든 존슨의 노력이 없었다면 킹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을 것이다."(113-4)


"입법 절차에 대한 불신과 당의 목표 성취를 위해 법원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화되면서 민주당 엘리트들은 폭넓은 민중에서 분리되었다." "의제를 법원으로 가져간다면, 당신은 당신의 주장이 절대적인 법에 따라 옳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되고 당신의 사건을 배당받은 판사들만 설득하면 된다." "이 전술은 모든 의제를 협상의 여지가 없는 불가침의 정의에 관한 문제로 간주하는 습관을 진보주의자들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이 전술은 불가피하게 반대자들을 다른 견해를 지닌 동료 시민들이 아니라 부도덕한 괴물들로 낙인찍어서 내친다. 더 나아가 이 전술은,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그들을 설득하려 애쓰고,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가는 끈기 있는 작업으로부터 진보주의자들을 해방시켰다." "이 접근법은 공화당 정치인들이 자신들이야말로 민중의 진정한 대변자이며 민주당 정치인들은 고위성직자 계급이라고 주장할 여지를 대폭 열어주었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대중의 정신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117-8)


"민주 정치의 관건은 설득이지, 자기표현이 아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퀴어queer다'라는 말로는 머리 쓰다듬기나 곁눈질 이상의 반응을 결코 유발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과 사람들이 모든 사안에 대해서 동의하는 일은 영원히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여라. 민주주의에서는 다른 견해가 항상 존재하리라고 예상해야 한다. 정체성과 연결된 사회운동에 열중할 때 발생하는 결과 하나는 당신이 유사한 생각과 유사한 얼굴과 유사한 학력을 가진 사람들로 둘러싸이는 것이다. 당신이 설득하려는 사람들을 순수성 검사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 만사가 원칙의 문제인 것은 아니며, 원칙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에도, 대개의 경우 이 원칙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 원칙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원칙들을 어쩌면 희생시켜야 함을 상기하라. 도덕적 가치들은 결국 완벽하게 맞아 들어가서 전체를 이루도록 제작된 퍼즐의 조각들이 아니다."(121-2)


"선입견과 무관심은 뿌리가 깊다. 대다수 사람들은, 나나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당할 수도 있는 고통이라고 (비록 추상적으로라도) 느끼지 않는 한, 타인들의 고통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동성애자 권익 보호 운동은 대중이 이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했지만, 태도의 변화는 미국 전역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식들이 부모에게 (때로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반면에 인종은 전혀 다른 문제다. 미국 사회의 인종 분리를 감안할 때, 백인 가족들은 흑인 미국인들이 삶을 볼 기회가 거의 없고, 따라서 이해할 기회도 거의 없다. 나는 흑인 남성 운전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영원히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흑인 남성 운전자의 경험에 공분하려면 나 자신과 그를 동일시할 모종의 길이 더욱더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유일하게 공유한 것은 시민의 지위다. 우리 사이의 차이가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그가 당한 학대에 내가 격분할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132-3)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자치self-government의 원리에 입각한 교육을 통해 민주적 시민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원리가 행동을 유발하려면, 우리가 타고나지 않은 감정 속에 그 원리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감정은 가르칠 수 없다. 감정은 우러나도록 유도해야 한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정치 분야가 존재하는 모든 일을 통틀어 가장 기적에 가깝다. 시민적 감정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다. 시민들 사이의 연대가 열악하거나 약화되면 자연스럽게 정치-아래의subpolitical 애착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자들이 없는 민주주의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그런 민주주의는 타락하여 과두정치, 신권정치, 인종적 민주주의, 부족주의, 권위적 일당독재, 혹은 이것들이 조합된 체제로 된다."(136-7)


"또 한 세대의 시민을 이전 세대와 유사하게 시민으로 키우는 것은 그리 끔찍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약간의 수정을 거친다면, 옛 모형은 본받을 가치가 있다. 열정과 헌신뿐 아니라, 지식과 논쟁도 그러하다. 당신의 머리 바깥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 당신과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미국과 미국의 모든 시민들을 위하는 마음,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를 본받을 가치가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공통의 미래를 상상하는 야심도 그러하다. 이것들을 가르치는 부모나 교육자는 정치 활동─구체적으로 시민을 육성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들이 진보적 시민으로 되는 것을 바랄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진보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는 미국을 더 나은 궤도에 진입시키는 것을 바랄 수 있다. 당신이 도널드 트럼프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당신의 출발점이어야 한다."(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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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서론 자유주의의 종말


"자유주의는 실패해왔다. 어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충실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자유주의가 '더 완전'해질수록 자유주의의 내적 논리가 더 분명해지고, 자기모순이 더 드러날수록 자유주의 주장의 변질인 동시에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실현인 병폐들이 생겨났다. 공정성을 증진하고, 문화와 신념의 다원성을 옹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유를 확대하겠다던 정치철학이 실제로는 엄청난 불평등을 낳고, 균일성과 균질성을 강요하고, 물질적·정신적 퇴폐를 조장하고,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자유주의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가늠하는 방법은 자유주의가 달성하겠다던 목표와 정반대되는 목표를 얼마만큼 달성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누적되는 재앙을 우리가 자유주의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하는 증거로 여길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초래한 폐해가 바로 자유주의의 성공의 징후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21-2)


1장 지속 불가능한 자유주의


"그리스 철학은 파이데이아paideia, 즉 덕성 교육을 폭정을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주된 방안으로 강조했다." "로마와 중세 기독교의 철학 전통은 한편으로 그리스의 전통을 좇아 폭정을 막는 주된 방향으로 덕성 함양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도층의 권력을 제한하는 동시에 정치적 여론을 비공식적으로, 때로는 공식적으로 표현할 길을 (다양한 정도로) 열어두기 위해 제도적 형태들을 개발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주의와 연관 짓는 통치의 제도적 형태들 중 상당수, 이를테면 입헌주의, 권력분립, 정교분리, 임의적 통치를 막는 권리와 보호책, 연방주의, 법치, 제한된 정부 등은 적어도 처음에는 근대 이전에 수백 년에 걸쳐 구상되고 개발된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없다는 신념은, 비록 언제나 한결같이 인정되고 실천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중세 유럽의 철학적 성취였다."(46-7)


"그렇지만 자유주의의 성취는 대부분의 경우 본래 공유하던 어휘와 개념을 재규정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인간학적 가정에 입각해 기존 제도를 식민화하는 방법으로 달성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자유는 정치체 안에서나 개인의 영혼 안에서나 폭정을 미연에 방지하는 자치의 조건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에는 개인 차원에서 욕구를 스스로 제한하는 규율과 훈련이 필요하고, 이에 상응해 정치체 차원에서 자치의 기술을 증진시키는 덕목들을 가르치는 사회적·정치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근대의 현저한 특징은 이 오래된 정치관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토대를 놓은 사상가들의 주요 목표는 국내 평화를 위해 비합리적이라고 결론 내린 종교와 사회의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안정과 번영을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개인의 양심과 행동의 자유를 증진할 것으로 그들은 내다보았다."(47-8)


# 근대 자유주의적 사고와 실천 방안

1. 마키아벨리 : 정치의 토대를 (공동선과 정치적 화합 같은) '높은 것'에 대한 염원이 아닌 (계급별 이해관계에 기반한 대립 같은) '낮은 것'의 신뢰성에 두고자 한다.

2. 홉스 : 개인주의적인 합리성이 오래된 사회 규범과 관습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보았고, 합리성에서 이탈하는 경우는 국가의 법적 금지와 제제로 바로잡을 수 있다.

3. 베이컨 : 자연과학으로 대표되는 유용한 실용 학문을 장려, 확대한다면, 자연의 지배력과 한계에 인간이 종속되어 있는 상태를 극복하고 삶의 조건을 개선할수 있다.


"첫 번째 혁명이자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이고 뚜렷한 측면은 주의주의主意主義 이념─개인의 규제받지 않는 자율적 선택─을 정치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56) "주의주의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권리'를 옹호하지 그 어떤 의미에서도 특정한 '좋음'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토대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경제학 강의가 인간을 그저 효용을 극대화하는 개별 행위자로 기술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쳐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는 사람들에게 헌신을 피하고 유연한 관계와 유대를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정치적·경제적 관계만 대체 가능하고 끊임없이 재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장소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국가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종교와의 관계를 막론하고 모든 관계가 그러하다. 자유주의는 느슨한 연계를 조장한다."(60)


"근대 이전 정치사상,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영향을 받은 정치사상은 인간을 포괄적인 자연계 질서의 일부로 이해했다." "그러나 두 번째 혁명이자 자유주의를 구성하는 두 번째 인간학적 가정은 이런 인간의 자기제한이라는 요건을 거부했다. 자유주의는 먼저 인간을 구속하는 자연계 질서 관념을 대체했으며, 그런 다음 인간 본성 관념 자체를 대체했다. 자유주의는 자연과학과 인간과학, 그리고 인류와 자연계의 관계를 변형하기 시작했다. 이 혁명의 첫 번째 물결─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대 초 사상가들이 처음 일으켰다─은 인간이 자연과학과 변형된 경제체제를 이용해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두 번째 물결─대체로 여러 역사주의 학파들이 특히 19세기에 일으켰다─은 고정된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을 인간의 '가소성'과 도덕적 진보 역량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했다."(61-2)


"아이러니하게도 자율성의 영역을 더욱 완전하게 보호하려면 국가의 역할을 더 확대할 수밖에 없다. 자율성의 영역에서 자유를 누리려면 가족부터 교회까지, 학교부터 마을과 공동체까지, 비공식적이고 익숙한 기대와 규범으로 행동을 통제하는 모든 형태의 결사와 관계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이런 통제는 대체로 정치적인 통제가 아닌 문화적 통제였다─법은 가족과 교회, 공동체를 통해 배우는 비공식적인 행동 기대치인 문화 규범만큼 포괄적이지 않았고, 대체로 문화 규범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개인들이 이런 결사들로부터 해방됨에 따라 실정법을 통해 그들의 행동을 규제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자유주의는 결국 두 가지 존재론적 요소, 즉 해방된 개인과 통제하는 국가에 이른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이 두 실체를 완벽하게 묘사했다. 국가는 오로지 자율적인 개인들로만 구성되고, 이 개인들은 국가에 의해 '억제'된다."(65)


2장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통합하기


"홉스와 로크 모두 우리가 사회계약을 맺는 까닭은 단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더 안전하게 행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또한 두 사람 모두(특히 로크) 정치체 이전 상태에서는 다른 개인들의 무법 경쟁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다루기 어렵고 적대적인 본성 역시 자유를 제한한다고 본다. 로크 철학의 주된 목표는 국가의 비호를 통해 우리의 자유─욕구를 충족하는 능력으로 정의된 자유─의 전망을 확대하는 것이다. 법은 자치를 위한 규율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다." "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를 '창출'함과 동시에 실질적 의미에서 자유주의 국가가 자유(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점점 더 정의된 자유)를 확대할 조건을 마련함으로써 개인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현대의 숱한 정치 보도가 시사하는 것처럼 개인과 국가가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유주의는 양자 사이에 아주 깊은 연계를 확립한다."(79-80)


"듀이는 '공공 사회주의'를 요청했고, 크롤리는 '노골적인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썼다. 그러나 이들이 개인의 불가침성과 존엄성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다면 잘못일 것이다. 두 사람 저술의 일관된 주제는 '구舊자유주의'의 갑갑하고 제한적인 개인주의를 제거해야만 더 진실하고 더 나은 형태의 '개성'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자유의 족쇄들─특히 경제적 퇴보와 불평등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만 새롭고 더 나은 개성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절정에 이르면 '여럿'과 '하나'가, 우리의 사회적 본성과 우리의 개성이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우리는 구자유주의가 말끔히 제거된 뒤에야 '개성'과 '공동사회'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완전하게 알 수 있을 테지만, 진보적 자유주의 전통의 이런 핵심 주장에 따르면 바로 고전적 자유주의를 극복해야만 진정한 자유주의가 출현할 수 있다."(88)


"서로 경쟁하면서도 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앙편 모두는 개인이 선호하는 생활방식을 영위할 수 있는 해방의 영역을 넓힌다는 목표를 일관되게 추구해왔고, 자율적 개인이 출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환경으로서 국가의 팽창을 공히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국가 팽창에 불굴의 적대감을 보이면서도, 공동체의 삶에서 시장의 역할을 제한할 수도 있는 지역적인 통치 형태나 전통적인 관습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 시장과 국제 시장을 보호하는 국가의 능력에 줄곧 의지한다. 그리고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팽창하는 국가가 개인 자유의 궁극적인 보호자라고 열변을 토하면서도, 특히 성적 관행과 무한히 유동하는 성 정체성, 가족의 정의, 자신의 삶을 끝내는 개인의 선택 같은 문제를 개인 '구매자와 판매자'의 공개 시장에 맡기는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에 '품행과 도덕'에 관한 한 국가의 강요를 제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91)


"1953년 저작 《공동체 추구》에서 로버트 니스벳은 전통적인 인간 공동체와 제도를 해체한 결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공동체 추구'를 더 이상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국가주의는 원자화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폭력적으로 반발하는 가운데 등장했다. 정치적·사회적 동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일군의 두꺼운 집단 연대를 필요로 한다. 가족(확대가족뿐 아니라 핵가족까지), 장소, 공동체, 지역, 종교, 문화와 이어진 가장 깊은 유대를 빼앗겨 뿌리가 없어진 사람들, 이런 결속의 형태들이 인간의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마음 깊이 믿게 된 사람들은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 남은 정당한 조직, 즉 국가를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려 한다. 니스벳이 보기에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발흥은 자유주의가 국가보다 작은 결사와 공동체를 공격하는 데 따른 예측 가능한 결과였다."(93)


"토크빌은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서 이렇게 썼다. 〈평등의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타인을 도울 의무가 없고 동료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을 아무런 권리도 없으므로, 누구나 독립적인 동시에 취약하다. 따로 떼어서 생각해서도 안 되고 섞어서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이 두 가지 상태는 민주정의 시민들에게 극히 상반되는 두 가지 본능을 부여한다. 시민은 독립적인 까닭에 서로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지만, 취약한 까닭에 때때로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시민은 어느 동료에게도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데, 모두가 무기력하고 냉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는 전반적으로 몸을 낮추는 가운데 홀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실체[후견 국가]로 자연히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그의 욕구는, 특히 갈망은 계속해서 그 실체를 생각나게 하며, 결국 그는 그 실체를 자신의 개인적인 취약함을 보강하는 유일하고도 긴요한 지지물로 여기게 된다.〉"(95)


3장 반문화로서의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통치체제 또는 법적·정치적 질서인 것 이상으로 인간의 시간 인식을 재규정하려는 노력이다. 다시 말해 시간 경험을, 특히 과거, 현재, 미래의 관계를 바꾸려는 노력이다. 사회계약론은 개인을 인간관계와 장소에서만 분리해냈던 것이 아니다. 시간에서도 분리해냈다. 사회계약론이 묘사하는 것은 역사가 없는 영원한 조건, 어느 시대에나 적용햐려는 의도가 담긴 사고실험이다. 이렇게 기발한 착상을 하는 뻔한 이유의 이면에는 인간이란 본래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숨어 있다. 이 착상은 우리가 참고하기 위해 되돌아봐야 하는 어떤 역사적 '사회계약'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나 본래 자율적인 선택을 하는 행위자, 계속 계약을 맺으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인식하는 행위자라는 부단한 믿음에 호소한다." "자유주의는 이 조건을 특히 인간의 시간 경험을 담는 그릇인 문화를 해체하는 방법으로 만들어낸다."(111-2)


"토크빌은 '조각난 시간'이 개인주의를 낳는 방식을 인식했고,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논리에 따라 이런 개인주의가 다시 심대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결과를 불러올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가 특히 우려한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행위를 시간 연속체의 일부로 보지 못하고, 따라서 자신의 행위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인간 공동체의 일부로서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귀족 시대의 본질적 특징은 누구나 스스로를 세대 간 질서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의 특징은 개인을 해방한다는 명목으로 그런 사슬을 '부순다'는 것이다. 조각난 시간 경험은 세대 간 질서와 빚으로부터 개인을 해방하는 데에는 이로울지 몰라도 정치적 영향 면에서는 (현재의 행동이 미래 세대에게 끼칠 영향을 도외시하는 식으로) 해로울 것이었다."(114)


"자유주의는 무無장소성을 중시한다. 자유주의의 '자연상태'는 추상적인 개인들이 똑같이 추상적인 장소에 있다는 무장소 견해를 상정한다. 자유주의는 사람들이 그 누구에게서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인간학적 가정(홉스의 표현대로 〈땅에서 버섯처럼 생겨나 서로에 대한 그 어떤 의무도 없이 자란〉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가 그 어디에서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가정에도 의존한다. 누군가 태어나고 자라는 장소는 그의 부모나 종교, 관습만큼이나 우연히 정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무엇보다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로 여겨야 한다. 모든 관계와 제도, 믿음과 마찬가지로 장소 역시 선택하는 존재로 말이다."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에 앞서 자기 견해를 로크식으로 조정한 글에서 언명한 대로, 자유주의적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권리는 자신의 출생지를 떠날 수 있는 권리다. 우리의 기본 조건은 집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117-8)


"문화 해체는 뿌리 뽑힌 개인의 해방, 구석구석 스며들고 에워싸는 시장, 국가의 권한 확대, 셋 모두의 전제조건이다. 사람들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당국에 개인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문화 규범과 관행을 느슨하게 풀어달라고 호소하고, 당국은 다양한 압력을 가해 오래된 비공식 규범의 본질적인 특징을 축소하거나 해체한다. 규범이 사라진 상황에서 개인들은 해방된 자유를 추구하면서 법을 위반하거나 명백한 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욕구를 채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문화적 관행과 기대를 통해 발전하는 행위의 본보기가 없을 경우, 해방된 개인들은 필연적으로 분쟁을 벌이게 된다. 오늘날 그런 분쟁을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는 국가다. 이런 이유로 국가는 한때 보통 문화 규범으로 해결했던 지역의 사안을 다루기 위해 법적·정치적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문화 해체를 요구한다. 그리고 문화가 사라질수록 리바이어던은 커지고, 책임감 있는 자유는 작아진다."(128-9)


"자유주의 치하에서 '문화'는 진본에 기생하며 실제 문화를 대체하는 자유주의적 모조품을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문화'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불리곤 하지만, 실제 문화는 다수이고 지역적이며 특수하다. 우리는 영리기업이 대량소비를 염두에 두고서 시장조사를 거쳐 표준화한 산물인 '대중문화' 같은 현상들에 대해 말하곤 한다. 문화는 지역적·역사적 경험과 기억의 축적인 반면, 자유주의 '문화'는 지역적 경험이 뿌리 뽑히고 기억이 사라지고 모든 장소가 다른 모든 장소가 될 때 남는 공백이다. 다수의 실제 문화들은 '다문화주의'에 대한 찬양으로 대체된다." "모든 문화를 똑같이 찬양하는 것은 사실상 어떤 문화도 찬양하지 않는 것이다. '다원주의'나 '다양성', 또는 소매업 세계의 '선택'을 운운하는 주장이 늘수록 실제 문화들은 더 확실하게 파괴된다.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와 다양성은 하나같이 차이를 지지하는 균질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널리 퍼진 무관심주의를 요구하고 보장한다."(130-1)


4장 기술과 자유 상실


"오늘날의 기술사회는 새로운 종류의 정치기술을 통해 생겨난다. 이 기술은 우리를 무엇보다 각자의 야심과 욕망을 이루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개인으로 만들고자 고안된 것이다. 즉, 고대의 덕성 찬양과 공동선을 향한 열망을 개인의 자기이익과 고삐 풀린 야심, 공공복리보다 사적 이익 추구를 우선하는 태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관계를 재고하는 후천적 능력 등으로 대체한다. 새로 발명된 정치기술─'새로운 정치학'─은 사실상 과학과 기술의 목표와 목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좌우한다. 기술은 정치적·사회적 규범 및 믿음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규범이 기술 개발과 응용을 결정짓는다. 그럼에도 자유주의가 도입하는 일군의 규범은 기술이 그 어떤 규범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발전한다는 믿음, 외려 기술이 우리의 규범과 정치체, 심지어 인간성까지 형성하고 우리의 통제에서 필연적으로 벗어나기 마련이라는 믿음으로 우리를 이끈다."(147-8)


"일찍이 1978년에 대니얼 부어스틴은 《기술 공화국》에서 〈기술은 그 자체로 추진력을 만들어내고 비가역적〉이며 〈우리는 갈수록 치료 감호의 세계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라고 썼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더 이상 기술들을 선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홉스와 로크가 상상한 자연상태에 있는 존재로 우리를 바꾸어가는 기술들 쪽으로 불가피하게 이끌린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율적이고 자유롭되 우리에게 독립감을 선사하는 바로 그 기술들에 종속되리라는 것이다. 기술들은 우리의 선택을 받기보다는 우리가 더는 통제하지 못하는 역학으로부터 생겨날 것이고, 우리가 그저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는 체제를 더욱 확대할 것이다. 텔레비전 채널들은 기술적 파국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들로 점점 채워지고 있으며, 그 중 다수는 우리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조차 저 멀리 막후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듯한 그림자 같은 미지의 권력을 가정한다."(155)


5장 자유학예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자유학예가 반영하는 전근대의 자유관은 예컨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의 가르침에서, 그리고 성서뿐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단테, 모어, 밀턴의 저술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는 기독교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로 간의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자유란 우리의 선천적 상태가 아니라 습관 들이기와 훈련 및 교육을 통해, 특히 자제력 단련을 통해 획득하는 상태라는 데 동의한다. 자유는 오랜 학습 과정의 결과다. 자유는 이성과 정신의 고귀한 능력을 사용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덕성 함양을 통해 학습하는 역량이다. 이런 전근대적 자유관은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는 상태를 노예 상태로, 가장 저열한 욕구에 이끌려 더 나은 본성을 거스르는 상태로 규정한다. 자유학예의 핵심 목표는 자유민과 자유시민을 이런 자유관에 부합되게 양성하는 것이었다. 자유학예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었다."(162)


"반면 자유주의는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정하지 않고 우리가 자유롭게 태어난다고 가정하면서 시작한다. 자유주의 치하에서 자유학예는 인문학에서,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에서 그리고 경제학과 경영학에서 시종일관 추구하는 목표인 개인 해방의 도구가 된다. 인문학 내에서 정체성 주장에 기초하는 해방운동들은 과거를 억압의 저장고로 간주하고, 이런 이유로 교육의 원천으로서 인문학이 가진 정당성을 대체한다. 그러는 동안 자율성 경험을 실질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증진하는 학문들─STEM, 경제학, 경영학─이 정당한 연구의 유일한 주제로 여겨지기에 이른다. 자유학예를 통해 자유로운 인간을 교육한다는 고대적 견해는 사적 개인의 학예를 강조하는 견해로 대체된다.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공공의 것)에 알맞은 교육이 '레스 이디오티카res idiotica'(그리스어로 '사적'이고 고립된 사람)에 적당한 교육으로 대체되는 것이다."(160-1)


6장 새로운 귀족정


"사회적 상향 이동과 하향 이동이 모두 가능하고 이제 경쟁이 세계화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계급은 만연한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다." "전진하는 자유주의가 장담하는 대로라면 개인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출생과 인종, 젠더, 지역의 우연성으로부터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학생들은 거의 누구나 경제적 제로섬 게임에 얽매여 있다. 출세주의와 스펙 쌓기는 오늘날 교육 실패의 결과가 아니다. 그런 현상에는 학생들이 교육 초기부터 깊숙이 받아들이는 가르침, 즉 오늘날의 사회는 경제적 승자와 패자를 양산하며 교육 인증서야말로 개인의 최종 지위를 결정하는 거의 유일한 요인이라는 가르침이 반영되어 있다. 고대인이라면 '노예교육'이라고 불렀을 법한 것에 속박되어 있는 오늘날의 대다수 학생들은 부모와 사회 일반이 만류하는 자유교육을 기피한다. 자유주의는 한때 자유민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졌던 교육의 쇠퇴를 불러온다."(189-90)


"존 로크는 자유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문헌인 《통치론》에서 새로운 정치경제 체제가 기존과 다른 지배층을 낳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소유권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로크는 세계를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었다. 즉 '근면하고 합리적인' 사람들과, '불만 많고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로크는 게으르고 현실에 안주하는 통치자 계층, 지위를 물려받고 경쟁이나 도전에 부딪힐 일 없이 다스리는 계층이 다른 무엇보다 불만 많은 성격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집단을 다른 집단으로, 즉 불만 많은 귀족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탓에 자신들의 뚜렷한 성격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근면성과 합리성'에 고무되는 집단으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이 대목에서 로크는 통치와 무관한 평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근면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통치하는 사회는 생산성과 자산 가치를 높여 결국 모두의 부를 늘려줄 것이라고 주장한다."(192-4)


"자유주의 지배층liberolocracy은 안정된 사회제도, 얄궂게도 오늘날 밀의 사상을 따르는 개인들을 위한 도약대 역할을 하는 제도의 이점 덕택에 자신들의 지위가 유지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 귀족 가문의 지위는 토지 및 영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그래서 세대 간 연속성과 장자 상속제를 중시했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 지배층의 가족은 느슨한 세대 간 연대, 휴대 가능한 자격증명서, 대체 가능한 부의 상속, 그리고 계층 이동의 전망에 의존한다. 한편 자유주의 지배층은 로크라면 '불만 많고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법한 이들 사이에서 가족과 그에 따른 사회 규범이 현저히 약화되는 세태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침묵을 지킨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의 산물인 해방된 개인들이 이제 하층민으로 떨어진 '불만 많고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전통적으로 불우한 가족까지 지원했던 사회 형태와 제도의 해체에 따르는 대가를 떠안으라고 명령한다는 데 있다."(210-1)


"플라톤은 '이상적인 정체'를 철학적 연습 문제로 제시했던 데 반해, 자유주의는 '이상적인 정체'와 비슷하게 구성되는 질서, 즉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신화를 동원해 불평등의 정당성을 믿게 만드는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 '고귀한 거짓말'의 한 버전을 채택했다. 자유주의 질서는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발전하는 체제 내에서 그들의 지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형편이 계속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부추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 중요한 점은 자유주의 질서가 자유주의 지배층에게 그들이 새로운 귀족이 아니라 오히려 귀족 질서의 반대파라는 심각한 자기기만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 자기기만을 감추는 주된 수단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정의와 관심이라는 겉치장이다. 자유주의 지배층은 어려서부터 흔히 그들을 엘리트로 길러내는 교육기관에서 그런 겉치장을 빈틈없이 주입받는다. 그런데도 바로 그들은 《국가》를 읽다가 '고귀한 거짓말' 논의를 마주하면 대개 속임수라며 혐오감을 보일 것이다."(212-3)


# 고귀한 거짓말 : 이 나라에 있는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 그러나 신은 여러분을 만들면서 통치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에게는 황금을 섞었으니, 그들이 가장 존경받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반면에 보조자들에게는 은을 섞었고, 농민들이나 다른 장인들에게는 쇠와 청동을 섞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모두 동족이기에, 대개 여러분 자신을 닮은 자손을 낳기는 하지만, 때로는 황금의 자손에게서 은의 자손이, 은의 자손에게서 황금의 자손이,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에게서 다른 종류의 자손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국가》 3권 415a-415b


7장 시민권의 퇴화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오늘날 서구의 대다수 사람들이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조직 형태로 여기는 정체를 가리킬 때 널리 쓰인다.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에서 '자유주의'는 형용사처럼 명사 '민주주의'와 함께 쓰여 인민들이 통치하는 오래된 정체 형태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표현은 겉보기 의미와는 다른 목적을 가진다. 우선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변경할 뿐 아니라 유구한 정체를 사실상 정반대되는 정체로, 즉 인민들이 통치를 하지 않고 자유주의적인 사적 개인으로서 물질적·군사적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는 데 만족하는 정체로 재규정하자고 제안한다. 그와 함께 명사 '민주주의'는 한층 강직한 형태의 시민권을 이른바 대중의 동의로 대신하는 자유주의 정체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자유주의는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을, 시민 정신보다 자기이익을, 공동선보다 개인들의 의견 취합을 끊임없이 강조함으로써 시민권의 퇴화를 불러온다."(217)


"(대중의 분열과 파편화를 부추기고 정예 엘리트들이 정부를 운영하는 구조를 제도화한) 자유주의의 진짜 비범한 성과는 미묘하되 꾸준하게 영향을 끼치고 교육하는 방법으로 시민들로 하여금 자수성가한 개인이라는 이상─표현적 개인주의─과 '민주주의'를 동일시하게 만든 것, 그리고 정부가 강력하고 멀리 있으며 실은 표현적 개인주의의 기회와 경험을 확대함으로써 정당성을 얻는다는 사실을 감추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광휘를 받아들이게 만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주로 권리, 권력, 부의 확대라는 형태로 '자유의 제국'을 계속 넓히는 한, 능동적인 민주적 자치의 부재는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한 목표가 된다. 결국 자유주의는 정체로서 규율 잡힌 자치를 함양해야 하는 민주정의 난제를 포기한 채 정부를 유익하되 별개인 실체, 재화를 무한히 공급하고 사적 정체성을 제약 없이 확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실체로 여기기에 이른다."(218)


"평범한 시민들의 '민주적 능력'에 대한 우려는 민주주의에 대한 명시적인 비판을 낳았을 뿐 아니라 민주적 외피를 주장하는 이들마저 민주적 통치를 제한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혁신주의자들은 관료제의 성장─정치의 전문화─과 행정의 '과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공공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기에 가장 적절하고 객관적인 방법은 유권자들의 일시적인 변덕이 아닌 사회과학(특히 정치학을 포함해)이라며 사회과학을 앞장서 홍보했다. 20세기 초에 우드로 윌슨 같은 사회과학계의 주요 인물들은 정치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추진함으로써 가치 편향적인 정책을 사회과학 방법론으로 대체할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여론의 역할은 정책을 만드는 책임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행정 전문가들이 능숙한 솜씨로 알맞은 정책을 수립하면서 검토하고 참조하는 선호의 표현, 개인 의견의 총합 정도로 국한되었다."(222-4)


"시민적 문해력civil literacy, 투표, 공공정신이 계속 낮게 나타나는 문제는 자유주의로 해결할 수 있는 부수적인 병폐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전례 없는 성공의 결과다." "매디슨은 특히 민주정─시민들의 참여도가 높은 소규모 직접 민주정─의 위험을 두 가지 원천에 힘입어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새로운 정치학의 '대의 원리'이며, 둘째는 '관할 범위 확대', 즉 시민들의 연합('파벌') 가능성을 최소로 줄이고, 이권의 수를 늘리고, 시민들 간의 정치적 신뢰와 활동을 억제할 만한 대규모 정치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매디슨은 궁극적 주권이 선거라는 연계를 통해 계속 국민에게 있기는 하지만, 대표들이 국민의 의지를 지나치게 따라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대의제의 바람직한 결과는 〈자국의 진짜 이익을 지혜로써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는 선출된 시민들이라는 여과재를 통과하게 하는 방식으로 대중의 견해를 정제하고 확대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주장했다."(225-7)


"오늘날 민주주의─특히 우리가 민주주의라 부르는 쇠약한 구경꾼 정치─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실은 자유주의의 소산인 퇴화된 시민들의 뒤틀리고 쪼그라든 통속적 행동을 비난한다. 주요 자유주의자들은 그런 퇴화를 대중의 에너지를 더욱 차단할 필요성의 증거로 들면서, 그 대신 자유주의 국가의 선출된 금권 정치인과 관료가 원격 운영을 통해 더욱 보장해줄 사적 영역에서의 욕구 충족을 제안한다. 이렇듯 오늘날 국가 정치에 초점을 맞춘 시민 교육을 확대함으로써 민주적 참여를 북돋자고 외치는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해결책이 바로 그들이 없애려는 병폐의 근원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시민들의 무관심을 바로잡으려면 중앙정부의 권력을 엄격히 제한하고 시민들에게 지역 자치를 참여할 기회를 주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여전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시민들의 무관심 또는 무지를 핑계로 정치를 자유주의 국가의 조치와 동일시하는 견해를 강화한다."(242-3)


결론 자유주의 이후의 자유


"자유주의 이후 시대로 나아가려면, 자유주의가 초기에 감탄스러운 열망을 바탕으로 호소력을 발휘했으나 대개 그런 열망의 변질에 의존해 성공해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자유주의 옹호자들은 여성이 불평등한 조건에서 해방된 것을 자유주의의 성공 사례로 곧잘 거론하고,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조건 여성을 자유주의 이전의 속박 상태로 다시 밀어넣자는 제안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여성해방의 주된 실질적 성과는 여성 다수를 시장자본주의의 노동력으로 투입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꼽는 여성해방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여성이 생물학에서 점차 벗어난다는 것, 그리하여 실체가 없는 다른 신체─미국이라는 '법인'─에 이바지하고 또 실질적인 정치적 자유를 모조리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경제질서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여성이 가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곧 해방이나 마찬가지라고 단정하지만, 실은 여성에게나 남성에게나 인간을 훨씬 더 에워싸는 굴레를 씌운다."(256)


"자유주의는 일군의 고귀한 정치적 이상에 호소하면 부상했으나 결국 새롭고 포괄적인 퇴화를 초래했다. 더 무정하게 말하자면, 자유주의 설계자들은 두루 공유하는 정치적 이상을 의도적으로 전유한 다음 자유, 민주주의, 공화주의의 새로운 정의로부터 이득을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그것을 전복했다. 자유주의의 성공을 발판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유주의가 초기에 발휘한 호소력의 정당성과 실패의 깊은 이유를 둘 다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민의 자치와 개인의 자치 둘 모두의 형태로 실질적인 자유를 제공한다는 뜻이지, 소비자주의적·성정 방종을 자율성으로 착각하는 오해와 체제 내 시민의 무력함을 결합한 자유의 대용물을 제공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유주의는 서구의 이상에 복이자 재앙이었으며, 어쩌면 그 실패와 거짓 약속, 충족되지 않은 갈망으로 우리를 더 나은 무언가로 이끄는, 불가피한 단계인지도 모른다."(2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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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된 정신 - 정치적 반동에 관하여
마크 릴라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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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반동反動, reaction이란 무엇인가?" "혁명의 발생과 활력 그리고 소진에 관한 수많은 이론들과 달리 반동에 관한 한 그런 이론은 없고, 그저 반동이란 비록 사악한 동기까지는 몰라도 어쨌든 무지와 비타협성에 뿌리를 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도취적인 확신만 있을 뿐이다. 이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두 세기 동안 세계 전역의 정치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었던 혁명의 정신은 자취를 감추었을지언정, 오히려 혁명에 맞서 생겨난 반동의 정신은 살아남아서 중동에서부터 중앙아메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매우 강력한 역사적 힘을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우리의 호기심을 유발해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 대신 우리는 일종의 우월감에 젖은 분노를 표출하다가 그나마도 그냥 접어버리고 만다. 반동주의자들은 훌륭한 지적 탐구의 변두리로 내몰려 있는 마지막 남은 '타자他者'다.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8-9)


"반동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반동주의자들 역시 혁명가들 못지않게 나름대로 급진적이며 역사적 상상의 산물들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 구원의 새 사회 질서와 회춘하는 인간을 기대하는 새천년의 꿈이 혁명가들을 고취시킨다. 반면에 반동주의자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새로운 암흑시대에 돌입하고 있다는 묵시록적 공포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 같은 반反혁명 사상가들에게 1789년은 영광스러운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그 여정의 종말을 의미했다. 가톨릭 유럽이라고 하는 그 견고한 문명이 순식간에 거대한 난파선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드 메스트르와 그의 수많은 후예는 일종의 공포 이야기를 늘어놓는 달변가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에 걸친 문화와 지성의 발전이 어떻게 계몽주의라는 정점에 도달했고 그것이 구체제를 대체 어떻게 갉아먹었기에 그 체제는 도전을 받자마자 산산조각 나버렸는지 흔한 신파조로 늘어놓았다."(11-2)


"반동주의자의 신앙 고백은 억지 인과 관계로 점철되어 있다." "반동의 정신은 난파된 정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늘 원래 모습 그대로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보지만, 반동주의자들은 천국의 파편 더미가 눈앞에서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본다. 반동주의자는 시간의 망명자다. 혁명가의 눈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찬란한 미래가 보이며 그 미래에 감전된다. 지금 시대의 거짓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온갖 광채를 발하는 과거만을 바라보는 반동주의자 역시 그런 과거에 감전된다. 반동주의자는 자기가 적수보다 더 강력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자기는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의 예언자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의 수호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동 문학에 면면히 흐르는 그 기이하게도 신명 나는 절망감, 그 선명한 사명감을 설명해준다." "반동주의자가 전통적 인간상이 아닌, 확연히 현대적인 인간상으로 비치는 이유는 그가 가진 노스탤지어의 호전성 때문이다."(12-3)


1부 사상가들


"19세기 내내 헤겔은 옳든 그르든 세계 역사의 합리적 전개 과정을 발견한 인물로 이해되었다. 그 과정이란 근대 관료주의 국가, 부르주아적인 시민 사회, 프로테스탄트적인 시민 종교, 자본주의 경제, 기술의 진보, 그리고 헤겔 자신의 철학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될 터였다." "이런 주장에 맞서 역사(철학)으로부터 사유의 독립성을 되찾고자 희망했던 일부 반反헤겔주의자들은 칸트나 데카르트 같은 이전 철학자들에게로 회귀하라고 장려했다. 다른 이들은 더 주관적 행로를 택했다. 니체나, 세기말에 때마침 독일어로 번역되고 있던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역설들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헤겔의 역사의식이 전체 문화를 상대주의의 위기로 이끌었다는 느낌이 점점 자라나는 가운데 이러한 전환들은 뒤이어 에드문트 후설과 청년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저술들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철학의 오류는 오로지 인간을 일상의 경험으로 되돌려 보내줄 새로운 종류의 치료적 사유를 통해서만 교정될 수 있을 터였다."(32-4)


"로젠츠바이크가 '20세기적 의미에서 종교를 지키기 위한 전투'를 요청한 것은 헤겔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더 근거리의 목표물은 19세기 내내 독일의 종교적 사유를 지배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여러 학파였다.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같은 인물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신학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교리들을 근대적 사유와 타협시키려는 시도에서 출발했고, 이런 노력에서 헤겔은 유용한 동맹군으로 입증되었다. 헤겔은 종교가 단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계몽주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다. 또한 근대적인 자연 정복이 종교를 소멸시킬 것이라고도 믿지 않았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주의와 근대 국가가 근본적으로 사실상 조화를 이루었으며 역사가 절정에 이르더라도 종교는 계속해서 도덕과 시민 교육을 통해 개인을 국가와 화해시키는 일을 도우면서 준準관료주의적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34-5)


19세기가 양산한, 스스로에게나 유대주의에게나 어떤 위험도 없는, 일체의 수식어가 붙지 않은 '유대인'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귀환이라는 생각은 "역사에 반대하고 종교를 옹호하며 두 전선에서 싸우는 로젠츠바이크의 전투를 연결하는 고리다.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절정에 도달한 근대 철학은 인간을 삶에서 떼어놓았고 자신이 가진 대부분의 것들로부터 소외시켰다. 기독교이건 유대교이건 근대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을 신에게서 소외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신의 명령은 훌륭한 시민 정신과 부르주아적 예의범절 수준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만약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에게 귀환하고자 한다면, 만약 다시 완전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모종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시간 속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부터 탈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 치료법이 로젠츠바이크의 저술들이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37)


"《정치 종교들Die politischen Religionen》에서 그 싹을 전부 찾을 수 있는 뵈겔린의 이야기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해 고대 근동 지역의 초기 문명들에서 시작한다. 이곳의 국가들은 자기들에게 정통성을 제공하는 신의 기운을 하사받았다." "(기독교의 부흥 이후에 등장한) 초월적인 신국神國을 인간의 지상 국가와 구분한다는 생각은 서구 역사에서 심오한 영적·정치적 함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 구분은 한편으로 왕궁을 통과하지 않고도 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직접적인 인도 없이도 인간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겠다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정신적 풍요는 정치적 빈곤의 위험을 수반했고 마침내는 인간이 신의 감시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유혹까지 생겨났다. 17세기와 18세기의 과격한 계몽주의는 그 유혹에 기꺼이 굴복하면서 기독교가 시작한 그 과업을 완성했다. 뵈겔린의 말을 빌리자면, 〈신을 참수해버린 것이다.〉"(59-60)


"하지만 정치가 신으로부터 근대적 해방을 이룩한 것이 곧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계몽주의는 신이 국가에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문명을 처음 생겨나게 한 신격화의 관행을 철폐할 수는 없었다. 뵈겔린의 견해에 따르면, 계몽주의 이후 근대 서구 역사에서 벌어진 일이란 곧 인간이 그 자신의 행위를 신성한 어휘들로 진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인간 자신이 전통적 권위의 원천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 질서를 창조한 일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근대의 인간은 프로메테우스가 되었다. 무엇이든지 전부 다 자기 의지대로 바꿔버릴 수 있는 신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신이 세상의 뒤로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세상의 사물들이 새로운 신이 되었다〉는 뵈겔린의 말을 이해하고 나면, 20세기의 거대한 이념 운동들인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등은 모두 선지자들, 사제들, 신전에 바쳐진 희생 제물들로 가득 찬 '정치종교들'이 된다."(60)


"뵈겔린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리게 된 사상, 곧 그노시스적인 '기독교 종말론의 내재성'을 통해 현 시대가 탄생했다는 사상 덕분에 그는 냉전과 대중문화와 학생 반란, 그리고 그 밖에 사실상 거의 모든 것에서 '서구의 위기'를 목도한 미국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많은 숭배자를 거느렸다. 뵈겔린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그노시스적인 선지자이자, 〈그노시스의 정신이 그 속을 휘젓고 있는 시시한 중재자들〉로 격하함으로써 그들과 그 아류들을 떨쳐낼 수 있는 세계사적 이유들을 제공했다. 근대 정치 혁명들, 자유 진보주의, 기술의 발전, 공산주의, 파시즘의 이력들이야말로 초월적 질서라는 바로 그 관념에 맞선 그노시스주의의 반란을 증언하는 것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뵈겔린이 이런 반란에 대해 기독교가 부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나, 미국 혁명이 그런 반란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은 어쨌든 그의 보수주의 독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67)


"초기 저술에서 스트라우스는 '신학-정치적 문제'와 그것이 근대 계몽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에 관해 독특한 시각을 발전시켰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종교 전쟁들에 혐오감을 느끼고 고전 철학의 현실초월성에 좌절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와 고전 철학 둘 다에게서, 즉 아테네와 예루살렘 둘 다에게서 벗어난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창조하고 싶어 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종교를 조롱하면서 그것의 분쇄를 원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철학의 주된 관심이 진리나 아름다움이나 선에 대한 사색에서 벗어나 더 실천적인 목적들을 지향하도록 방향을 전환했다. 이 방향 전환의 기념비가 바로 프랑스의 《백과전서》다." "계몽주의의 사상가들이 기껏해야 철학과 세계가 더 악화되도록 방치함으로써 철학의 사명을 왜곡하자, 철학은 19세기에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를 탄생시키면서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는 통로가 되리라는 자기확신을 신속히 잃어버렸다."(80-1)


"스트라우스는 소크라테스의 활동에서 비롯된 고대와 중세의 플라톤적 전통이 정치적 관계나 교육상의 관계에서 비밀스런 전승을 실천했다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스트라우스가 포착한 특징에 따르면 중세 초기의 이슬람 철학자 알파라비와 중세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는 자신들이 고전 세계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계시 종교들이 설정한 강력한 규약들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계시와 철학은 결코 서로를 논박할 수 없으며 또한 어느 한 쪽을 버리지 않고 지성적으로 종합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이것은 독자에게 진정한 철학이란 모든 신학적·정치적 몰입에서 벗어나 자유를 유지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알파라비와 마이모니데스의 성취는 철학이 비밀스런 전승으로 실천될 때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고 또 통속적으로 실천되었을 때는 어떻게 정치적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였다는 것이다."(83-5)


"그의 관심은 이 전통이 근대기에 들어서 어떻게 사라져버렸는지를 규명하는 데 고정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서구 사상의(그리고 암묵적으로 서구 문명의) 쇠퇴와 타락의 미토스로 전환했다. 여기서 스트라우스가 하이데거에게 진 빚이 가장 뚜렷하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저작을 함께 읽으면 역사적 비관주의가 지적 노스탤지어로 옮겨지고 그런 다음 정치적 행동으로 되먹임 되는 상이한 방식들과 관련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도 한다. 하이데거 자신이 바로 이 주로를 따라 달린 사람이다. 전도유망한 현대 철학의 위대한 희망으로 출발한 그는 10년 후 '국가사회주의의 내면적 진리와 위대성'을 찬양하는 열정적인 파시스트가 되었고 시종 〈오로지 신만이 지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예언하면서 정치적 불명예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스트라우스는 정치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창도한 학파가 양성해낸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워싱턴 정가의 열성적인 정치 파벌로 경력을 쌓았다."(85-6)


2부 흐름들


"초기 문명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고자 사용했던 가장 흔한 역사적 신화들이 숙명적인 쇠퇴의 이야기들이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심리학적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어째서 지금의 삶이 그렇게 고단한지에 대한 현세적인 이유들을 제공한다. 우리는 황금시대 우리의 원천들에서 한참 멀리 내쫓긴 '철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괴롭다." "기독교는 숙명적 쇠퇴라는 이 옛날이야기에 등을 돌렸다." "기원후 4세기 초 사람인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든 최초의 기독교 사상가인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신은 섭리의 한 손을 사용하여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히브리의 역사를 인도함으로써 '복음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신은 작은 공화정이었던 로마를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건설했다." "에우세비오스는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라는 비관적인 이교異敎 신화에 맞서, 낙관적인 '이제 모두 안녕'을 제공했다."(105-6)


"당연히 에우세비오스주의는 신학적 올가미다. 나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 신화와 거기에 매여 있는 희망들이 무너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10년 로마 약탈 사건 이후에 이를 직접 목격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즉시 절망감이 퍼져 나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버린 고대 이교의 신들에게서 벌을 받은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식 사고의 방향을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종말론적 결말을 지향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이교적인 로마를 번성케 해서 교회와 결합시킨 이유를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신이 로마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이유도 역시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신의 소관이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파하고 옳게 처신하며 계속 독실하게 신을 섬기는 것이다. 나머지는 신의 두 손 안에 있다."(106-7)


"단지 거쳐 지나가는 순례자의 교회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미지와 승리의 교회라는 에우세비오스의 이미지가 빚어내는 이 긴장은 중세 가톨릭의 시대에서는 결코 해소되지 않았다. 교황의 권위를 둘러싼 내부 갈등 및 동방 교회가 오스만 튀르크와 빚은 외부 갈등이 수세기 동안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승리를 거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랬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받은 종교개혁의 충격은 410년 이후 로마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충격만큼이나 컸다. 단, 한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루터와 칼뱅과 과격한 개혁가들의 맹공 이후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결코 그들의 근대판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도전들에 맞서 혁신자들을 비난하고, 일부 차이들은 묵인하고, 마지막에는 그런 혁신들이 본래 가톨릭 교리와 잘 맞는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107-8)


"그러나 여러 문명이 단일한 하나의 '프로젝트'가 규정해놓은 불연속적인 시기들을 거치는 것처럼, 〈중세 기독교가 실패했고, 종교개혁이 실패했고, 신앙 고백적인 유럽이 실패했고, 그리고 서구 현대성이 실패하는 중〉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삶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도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직전의 수십여 년 동안 서구 문명이 절정에 도달했다고 상상하는 것도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슬람 문명이 초기 칼리프 정권 때나 중세 스페인에서 절정에 도달했다고 상상하는 일이 무슬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신화들은 '가보지 않은 길'(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데에 정치 활동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식의 더 음헌한 몽상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일밖에는 하지 못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훈대로 우리는 우리가 가는 대로 우리의 길을 포장해야 할 운명이다. 나머지는 신의 소관이다."(125-6)


바울을 좌파의 보고寶庫로 승격시킨 최초의 인물은 슈미트를 숭배한 유대인이었던 야콥 타우베스다. "그의 중요한 주장은 〈바울의 당면 과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민족을 확립하고 적출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슈미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한 용어인 '정치 신학political theology'이라 부르는 것의 본보기다. 그가 의미하는 정치 신학은 법적·정치적 구조물들이 적법성을 얻거나 잃는 방식에 관련된 논의다. 이 절차는 인간이건 신이건 '주권자'가 내린 임의의 결단에 의존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정치적 계시에 암묵적으로 의존하며 이 계시는 그 어떤 보편적 원리도 반영하지 않고 그 어떤 자연적 한계도 인정하지 않으며 단지 무언가를 있게 하는 의지와 능력일 따름이다." "슈미트뿐만 아니라 타우베스도 진지한 정치학은 모두 이러한 신비로운 이중적 성격을 띤다고 보았다."(132)


"1993년에 타우베스의 강연 원고가 정식 출간되자 유럽 좌파는 사도 바울을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바울에 관한 책과 논문이 드문드문 선을 보이고 있다. 일부는 흥미롭고 일부는 싸구려다. 가장 놀라운 사람은 확실히 알랭 바디우다. 1960년대 초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루이 알튀세르에게 배운 학생이었고, 1970년대에는 급진적인 마오주의자이자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정권의 옹호자였던 바디우는 이제 거의 여든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중국의 문화혁명을 따뜻하게 묘사하는 글을 쓴다. 그러던 바디우가 1997년에 《성 바울 : 보편주의의 토대》를 출간했을 때 프랑스는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은 성 바울의 급진적 보편주의를 재발견해서 혁명 정치에 적용할 것을 좌파에게 요청한다. 바디우가 바울의 특출난 광신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그는 '민주주의'라는 멋진 단어 뒤로 숨어서 너무도 졸렬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는 야비한 '자본가-의회주의'를 비난할 때 자기 말에 귀 기울이는 청중을 발견한다."(133-5)


"다른 형태의 전가 행위와 마찬가지로 반反유대주의 역시 역사적 비관론이 먹여 살리고 있다." "반식민주의 운동들은 일당 독재 정권으로 바뀌었고, 소비에트 모형은 소멸했고, 학생들은 정치를 포기하고 취업 경력을 좇았으며, 서구 민주주의 정당 체제는 고스란히 현상 유지 중이고, 경제는 부富를 생산했고(골고루 나눠 갖지 않는 채로), 세계 전체가 연결성connectivity에 홀려 있다. 페미니즘, 동성애자 인권, 가부장적 권위의 쇠퇴 등 성공적인 문화 혁명이 있었고 그것이 지금은 서구 바깥으로도 퍼저 나가기 시작한 상태다. 그러나 정치 혁명은 없었고, 이제는 일어날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겨냥할 것인가? 누가 지휘할 것인가? 그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무도 이런 질문들에 답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런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우리가 오늘날의 좌파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역설적 형태의 노스탤지어가 전부다. 바로 '미래'를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다."(141-2)


"그리하여 그 노스탤지어에 자양분을 제공할 수 있는 지적 보고寶庫를 찾는 아주 절박한 탐색이 이어졌다." "이를테면 정치적 지배는 맨눈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존한다는 식의 설명이었다. 에테르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모든 곳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미셸 푸코의 '권력' 이론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였다. 그다음은 슈미트의 복권이었다.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라면서 태연하게 옹호한 피아彼我의 구분이 정치는 투쟁이지 숙고나 협의나 타협 같은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생각들에다가 반 토막만 이해된 성 바울의 종말론을 보태보라. 기적과도 같은 구원의 혁명에 대한 확신이 실제로 다시 한번 가능할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역사에 작용하는 힘들이나 논쟁과 조직화라는 고된 노력을 통해 분출된 혁명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기대하기 어려울 때, 한밤의 도둑처럼 그렇게 도래하는 혁명이다."(142-3)


3부 사건들


"2015년 1월 7일 아침에 두 명의 프랑스인 무슬림 사이드 쿠아치와 셰리프 쿠아치 형제가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지의 파리 사무실에 침입해서 열두 명을 살해했다. 도주하기 전에 그들은 이 신문사가 여러 해 동안 선지자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카툰을 여러 편 실은 데 대한 복수라고 외쳤다." "이 살인 행위들은 경악보다는 공포를 자극했다. 정치적 이슬람주의는 적어도 2년 동안 프랑스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파리의 학살은 프랑스 사회에서 이슬람의 본분을 둘러싸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문화 전쟁을 재연했으며 그 방식이 매우 심각했다. 뒤이어 나타난 격렬한 대중 토론의 양상은 친숙한 양태였다. 좌파 언론인과 정치인은 신속하게 그 공격이 〈이슬람과는 무관하다〉라고 선언하고 프랑스의 실패한 경제·사회 정책의 희생자들에게 퍼붓는 비난을 멈추라고 경고했다. 우파 진영의 비판자들은 그들이 현존하는 정치적 이슬람주의, 이민, 다문화주의의 위험성을 무시하고 있다며 비난했다."(147-9)


"그런데 그때 새로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우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가까운 과거만이 아닌 세계 역사의 흐름 전반에 관해 낭랑한 선지자의 논조로 말하는 목소리였다. 그들은 현재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훨씬 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들로, 제3공화국의 흥망성쇠로, 나폴레옹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심지어 계몽주의나 중세 때까지 한참을 뒤로 말이다. 이런저런 정부 정책이나 이런저런 개혁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 참극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저 눈을 감고 있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더는 우리의 운명을 통제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이 문제의 진실이다. 우리가 비로소 깨달은 상황은 프랑스를, 어쩌면 서구 문명 전체를 파국의 경로에 기어코 들어서게 만든 비참한 정치적·문화적 실책들이 빚어낸 예견된 결과다. 그리고 이제 그 계산서가 도착한 것이다."(149-50)


"문화적·물리적 약점 탓으로 돌려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의 패배 이후로 지금껏 프랑스인들은 출생률에 집착해왔다. 오늘날 출생률은 유럽 기준으로는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북·중 아프리카 이민자 '인종' 가족들의 높은 출생률이 그 수치를 떠받치는 것으로 보인다.(정부는 민족별 통계를 내놓지 않는다.) 이것이 극우파에게는 주요한 강박 관념이 되었다. 그들의 저술은 인구학적 관성의 힘으로 프랑스를 조용히 무슬림 국가로 바꿔놓게 될 이른바 '거대한 대체grand remplacement'가 임박했다는 예측들로 가득 차 있다. 백인 여성의 자궁은 페미니즘 때문에 시들어버렸다. 다문화주의 덕분에 밀물처럼 쇄도하는 다산多産의 이민자들이 계속 허용된다. 이것이 프랑스 무슬림들을 '국민 속의 국민un peuple dans le peuple'으로 여겨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다. 이는 사실 우파가 현재의 위험에 맞춰 번안한 유럽 반유대주의의 고전적 주제일 뿐이다."(157)


후기


"'시대'란 우리가 역사를 읽기 쉽게 만들려고 숫자 표시 테이프 위에 적어놓은 두 개의 연도 사이에 있는 공간에 불과하다. 우리가 혼돈의 경험들에다 '사건들'을 새겨 넣을 때에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 더 가까울수록, 그리고 우리의 구분들이 사회와 더 밀접하게 관련될수록 연대학의 책임이 더 커진다. 이 말은 또한 분류법에도 해당한다. 유類 개념을 식물에 적용할 때는 반향을 얻지만,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할 때는 사정이 다르다. 후자의 위험은 바로 물상화物象化다. 이런 일은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의 분류에 도움이 되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난 다음(예를 들면 '아리안' 어족) 뒤이어 그 개념이 실재에 아로새겨진 사실이라고 선언할 때 일어난다.(특징적인 문화와 역사를 지닌 동질적인 '아리안' 민족) 우리는 인종과 관련하여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우고 있으나, 역사를 이해하는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여전히 구제 불능의 물상화하기 족속이다."(182-3)


"진보와 퇴보, 순환의 서사들은 모두 역사의 변화를 유발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우주의 자연법칙일 수도 있고, 신의 의지일 수도 있고, 인간의 정신이나 혹은 경제적 힘들의 변증법적 발전일 수도 있다. 일단 그런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슨 일이 다가올지 틀림없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만에 하나 그런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 "이에 대한 응답으로, 매년 해가 지날 때마다 점점 벌어지는 찢어진 시간의 부위가 황금시대 혹은 영웅시대 혹은 그냥 평범한 시대로부터 우리를 점점 멀어지게 한다고 하는 묵시록적 역사관이 발전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실제로 역사에는 오로지 한 사건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의도했던 세계와 우리가 살 수밖에 없게 된 세계를 분리시킨 카이로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알 수 있고 또 알아야만 하는 전부다."(185-6)


# 카이로스kairos :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제우스의 아들인 기회의 신을 뜻하기도 한다.


"묵시록적 역사 자체에도 인간적 절망의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가 있다." "이 사건들이 결정적 파열구로 집단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묵시록적 상상 속에서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현재가 타향이다. 그것이 바로 그런 상상이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젖힐 두 번째 사건을 그렇게라도 꿈꿔보려 하는 이유다. 그런 묵시록적 시선의 초점은 지평선 위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면서 그 시선은 메시아, 혁명, 지도자 혹은 시간 그 자체의 종말을 기다린다. 오로지 세상의 종말만이 지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물론 파국에 직면한 상황이라면 이 섬뜩한 확신이 실제로는 간단명료한 상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통틀어 보건대, 그런 상상은 터무니없는 희망을 자극하여 불가피하게 실망으로 이어졌고 그런 희망을 간직했던 사람들을 훨씬 더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다.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고,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패배와 파멸, 망명의 기억들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렸다."(186-7)


"묵시록적인 역사 서술은 결코 유행에 뒤처지는 법이 없다. 오늘날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강하고 고결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나라가 어쩌다 '60년대의 대재앙' 이후 위험한 세속 정부에게 지배되는 방탕한 사회가 되고 말았는지를 말하는 통속적 신화를 선호한다." "사정은 유럽에서 더 심각하다. 특히 동유럽에서 그렇다. 헝가리 사람들은 주변에 유대인과 집시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 때 얼마나 살기가 더 좋았는지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황금시대의 믿음이 가장 크게 설득력을 얻고 당연시되는 곳은 무슬림 세계다." "독실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선지자가 7세기의 여명에 그랬듯이 지금 이 시대와 맞서 싸워야 한다. 그 선지자는 타협하지 않았고, 해방시키지 않았고, 민주화하지 않았고, 발전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신의 말씀을 대변하고 신의 율법을 실행했다. 우리가 선지자의 신성한 본보기를 따라 그 일을 성취하고 나면 영광의 시대가 영원히 되돌아올 것이다. 인샬라."(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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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학사 -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역사학은 끝났는가?
게오르그 이거스 지음, 임상우.김기봉 옮김 / 푸른역사 / 1999년 9월
평점 :
품절


서설 근대화 담론의 쇠퇴와 20세기 역사학


"(랑케적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사회·경제적 요인에 초점을 맞춘) 사회과학적 역사학이 근거했던 근대 세계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낙관론은 후기 산업 세계의 사회적 존재의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함에 따라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사회과학적 역사가들은 근대 세계를 랑케 학파보다 더욱 역동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사회 질서의 구축에 합리성을 적용하는 시도를 근대적 실존을 규정하는 긍정적 가치로 간주하였다. 역사 과정에 대한 이러한 가정들은 19세기 후반에 이미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통렬한 비판에 직면했다." "여러 측면에서 1960년대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던 근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위기 의식이 전면에 부상한 전환점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2차 세계대전이 창출했던 상황들이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그러한 상황에는 식민 제국의 종말과 비서구인들에게도 역사가 있다는 각성이 포함되었다."(21-2)


성, 인종, 종족 및 생활 양식 같은 다양한 형태의 구분들이 점차 부각되는 가운데,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의 전환은 의식에 한층 영향을 미쳤다. 처음으로 경제 성장이 배태한 부정적인 측면이 인식되어 안정적인 환경을 위협한다고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 학살Holocaust이 몰고 온 충격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새로운 세대가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대중의 의식 속에 스며들 수 있었다. 문명화 과정이 지닌 파괴적 측면이 점차로 의식의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몇 가지 측면에서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많은 역사가들에게 '거대 담론grand narrative'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서구 문명은 점차 여러 문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그 어떤 문명도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근대성 또한 그 특권을 상실하였다."(22-3)


"객관적으로 역사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의문시되었다는 사실은 한층 심각한 도전이었다. 근대 서구 문명의 특성에 대한 환멸로 인해 근대 과학관은 통렬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인류학자들은 삶을 이해하고 영위하는 데 있어 근대의 과학적 합리성이 '야만적인' 신비적 사고에 비해 더 유용하다고 보지 않았다." "니체는 이미 초기 저작인 『비극의 탄생』(1872)과 『삶을 위한 역사학의 효용과 오용에 관하여』(1874)에서 과학적 역사 연구와 역사 서술의 유용성은 커녕 그 가능성까지도 부정하였다. 그는 연구 대상은 역사가의 이해 관계와 편견에 의해 결정될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 서구 사상의 근간을 이루었던 하나의 믿음, 즉 사유자의 주관성을 넘어서 객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지지될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적인 논리적 사고가 신화적 혹은 시적 사고 같은 전논리적 사고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부인하였다."(25-6)


"포스트모던적 비판에는 중요하고 타당한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단선적인 통합적 역사의 개념은 지지될 수 없으며, 역사는 연속성뿐 아니라 단절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포스트모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전문적 역사학의 지배적 담론에 깊이 새겨진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을 올바르게 지적했을 뿐 아니라, 전문가의 권위로 말하는 과장된 주장들을 정당하게 공격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합리적인 역사 담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역사적 사실과 허위의 개념을 의문시함으로써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도 던져버리는 과오를 범했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허구적 요소를 포함하는 역사 담론과 주로 실재를 해석하는 것을 추구하는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유동적 경계뿐 아니라, 정직한 학문과 선전·선동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마저도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포스트모던적 도전은 역사 사고와 서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 도전이 이전의 개념 및 실행과의 연속성을 파괴하지는 않았다."(32-3)


제1부 전문 분과로서 역사학의 출현


"(역사학이 철학을 대체하여 인간 세계의 의미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과학이 될 수 있다는) 랑케의 주장처럼 사물을 '비당파적unpartheyisch'으로 파악한 결과는 모든 가치의 상대성과 무의미성을 보여주기는커녕 사회 제도들이 역사적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윤리적 특성을 지닌다는 점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 사회제도란 비록 헤겔의 철학적 방식을 역사학적 방식으로 대체했을지라도, 랑케는 헤겔에 동의하여 현존하는 국가는 그 자체가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서 하나의 〈도덕적 에너지〉, 즉 〈신의 생각〉을 구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랑케는 에드먼드 버크의 입장에 근접하여, 혁명적 수단이나 광범위한 개혁을 통해서 기존의 정치·사회적 제도에 도전하는 것은 역사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단지 〈실제 일어났던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랑케의 과거에 대한 '비당파적' 접근 방식은 사실상 현존 질서를 신이 의도했던 것으로 제시하는 결과를 낳았다."(47-8)


"(독일과 달리) 프랑스와 미국의 역사가들은 역사학과 사회과학 간에 좀더 긴밀한 연관 관계를 확립하는 데 더욱 개방적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두 나라의 상당히 다른 정치적 환경이 그러한 환경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독일의 경우 사회사는 수세적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프랑스의 경우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 역사 연구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한 것은 사회학이었다. 1888년에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 강의」에서 역사학이 과학의 지위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역사학은 특수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경험적 검증을 할 수 있는 일반적 진술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경험적 검증이야말로 과학적 절차와 사고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역사학은 엄격한 과학이 될 수 있는 사회학에 정보를 제공하는 보조 과학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경제학자 프랑수와 시미앙은 경제사만이 사회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역사학의 한 분야라고 주장했다."(61)


"19세기 말에 이르러 몇몇 중요한 신칸트주의 철학자들, 특히 빌헬름 딜타이와 빌헬름 빈델반트, 하인리히 리케르트는 그들이 자연과학에 대비하여 '정신과학 Geisteswissenschaften' 혹은 '문화과학 Kulturwissenschaften'이라 불렀던 것을 위해 명확한 방법론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 방법론들은 모두 과학의 지위를 요구했기 때문에 명확한 개념화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생명 없는 자연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유형을 추상적인 용어로 '설명 explain'하는 '법칙 정립적인 nomothetic' 혹은 일반화하는 공식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 정신과학 혹은 문화과학은 구체적인 문화적·사회적·역사적 배경 속에서 인간 행동이 지니는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 understand'하기 위해 '개성 기술적인 idiograpic' 개별화의 방법을 적용하였다." "랑케는 이러한 과정을 '감정이입 Einfuhlung'이라 칭했고, 딜타이는 '체험 Erlebnis'이라 표현하였다."(66-7)


"역사를 합리적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한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견해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버는 여전히 적어도 히브리와 고대 그리스 이래의 서구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지성화 intellectualization'와 '합리화 rationalization'의 과정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믿었다. 이렇게 볼 때, 베버는 역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콩도르세, 헤겔 또는 마르크스의 낙관적 믿음이나, 역사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질서를 낳는다는 랑케와 드로이젠의 낙관적 믿음은 거부했을지라도, 역사에는 연속성과 일관성이 존재한다는 역사주의자의 신념과는 결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비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시각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버는 역사, 적어도 서구 역사를 특징짓는 일관성에 관련된 19세기의 핵심 개념들을 유지했다. 또한 초문화적 타당성을 지닌 논리를 따르는 과학적·사회과학적 탐구가 '객관적' 특징을 지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굳게 믿었다."(70-1)


"(역사학에 수학 모델을 적용하는) 엄밀과학을 바탕으로 작업한 역사 서술의 가장 중요한 옹호자로는 미국의 '신경제사 The New Economic History' 연구자들을 들 수 있다. 신경제사가들은 고전경제학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정치와 사회에서 분리된 경제 성장의 모델을 가지고 작업하였다. 따라서 『철도와 미국의 경제 성장』이라는 유명한 '반 사실적 contrafactual' 연구에서, 로버트 포겔과 더글러스 노스는 경제 자료만을 이용하여, 철도가 발달하지 않았다면 미국 경제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포겔은 역사과학의 객관적이며 가치 중립적인 성격을 주장했음─역사가의 비당파성과 객관성을 강조한 랑케와 다르지 않게─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치 중립적인 전제들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기존의 성장 지향적·소비 지향적 경제학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경제학에 내포된 위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78-81)


제2부 사회과학의 도전


"프랑스의 '아날' 학파는 19세기와 20세기에 대다수의 역사가들이 견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시간 개념을 제공하였다. 사실상 랑케로부터 마르크스와 베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후 미국의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가들은 역사를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일차원적 시간을 가로지르는 운동의 차원에서 파악하였다. '아날' 역사가들은 시간의 상대성과 다층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였다."(85-6) "프랑스 역사학이 지리학과 경제학, 인류학 간에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는 반면, 베버를 포함한 독일의 전통은 국가와 행정, 사법을 강조하면서 그와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배경에서 뤼시앙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가 익명의 구조에 대단히 중요성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역사인류학의 주제를 구성하는 집단 망탈리테에 깊이 새겨진 감정과 경험의 측면들에 주목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88)


"푸코는 '하나의' 관념은 이미 종결된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간주한다. 대다수의 '아날' 역사가들도 이에 동의할 것이다. 하나의 역사적 시간 대신에 그들은 상이한 문명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각각의 문명 내에 공존하는 시간의 복수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관념은 지중해를 다룬 페르낭 브로델의 저작의 구조 속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발전되고 있는데, 그는 각기 고유한 속도를 지닌 세 개의 서로 다른 시간, 즉 하나의 지리적 공간으로서 지중해의 '거의 정지된 시간 longue duree'과, 사회·경제 구조 변화의 '느린 시간 conjonc-tures', 그리고 정치적 사건의 '빠른 시간evenements'을 구분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자크 르 고프는 「중세에서 상인의 시간과 교회의 시간」이라는 고전적인 논문을 저술했던 것이다. 직선적 시간 개념이 폐기됨과 더불어 진보에 대한 확신과 서구 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 또한 파기되었다. 인간의 역사에 대한 거대 담론이 기반할 수 있는 통일된 역사 발전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94)


"1960년대에 사회과학 전반이 계량화에 경도된 점 또한 '아날'에서도 발견된다. '아날' 역사가들은 점점 더 과학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의 연구소를 '실험실'이라고 부르고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을 운위했는데, 이는 의문의 여지 없이 사회과학이었다." "1960년대에 프랑스 사회사의 많은 부분이 계량화에 깊이 의존했는데, 이는 대량의 인구통계학적 자료에 근거하여 어떤 지역의 '전체사 historire totale'를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연구는 출산에 관련된 교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통계 자료에서 출발하여 성적 태도라는 좀더 광범위한 문제를 다루었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가장 야심적인 계량적 연구는 르 르와 라뒤리의 『랑그독의 농민들』이다. 이는 과도할 정도로 〈사람 없는 역사 history without people〉였는데, 맬서스적 가정이 제공한 인구 성장의 장기적 주기와 곡물 가격 간의 상호 연관성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한 것이었다."(98-9)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과 마르크스주의 사고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의 구현이라 자임해 왔던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가들이 몰락함에 따라 그 신뢰성과 위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가 근대 역사과학에 기여한 점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만약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베버의 편에 섬으로써 마르크스의 반대편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근대 사회과학의 수많은 이론들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역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역사학이 과학의 지위를 획득하자면 역사 발전의 법칙을 발견하고 공식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합법칙적 역사 발전의 주 동인을 경제적 불평등에 기초한 사회적 갈등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토마스 헨리 버클과 텐느와 같은 여타 실증주의자들과는 달랐다. 역사의 배후에 있는 원동력은 관념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서문에서 간명하게 진술했듯이 생산력이었다."(124-6)


"그러나 근대사의 거대한 정치적 격변과 산업 혁명을 다루던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는 곧이어 익명의 사회 과정에서 관심을 돌려, 이러한 변화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나타난 형태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르크스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와 『독일 농민전쟁』을 통해 그와 같은 역사에 접근했다." "마르크스는 이제 자신과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애국적인 기억과 상징 같은 비경제적 힘이 정치 의식과 행동에서 수행한 역할뿐 아니라 부르주아 내에서 전개된 첨예한 사회적·정치적 분열을 인식한 근대 사회의 상을 제시하였다." "한편 중세와 근대 유럽의 정치적·경제적 격변을 고찰한 영국과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는 역사에 인간의 얼굴을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앙리 르페브르는 『1789년의 대공포 : 혁명기 프랑스 농촌에서의 공포』에서 그러한 길을 준비하였다."(135-6)


"민중 문화의 역할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를 지향하는 이러한 움직임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1963)이라고 할 것이다. 저서의 표제는 〈노동계급은 정해진 시간에 뜨는 태양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은 만들어질 때 거기에 존재하였다〉라는 톰슨의 테제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톰슨은 〈닫힌 체계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에서 유래한 열린 탐구와 비판의 전통〉을 구별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첫 번째의 것은 신학의 전통에 서 있고, 두 번째의 것은 활동적 이성의 전통에 속한다.〉 톰슨은 마르크스로부터 계급 개념과 함께 〈계급 경험은 대체적으로 인간이 태어나면서 속하게 되는 생산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채택한다. 그러나 여기서 계급은 〈하나의 '구조'나 심지어 하나의 '범주'가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문화적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어떤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137-8)


제3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과 역사학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는 과학과 기술이 성장과 발전에 공헌했던 팽창하는 근대 산업 세계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상정하였다." "이와 달리 근대 서구 문명의 과정과 특성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가 대다수의 '신문화사 New Cultural History'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는 마르크스주의와 역설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것은 역사 서술의 해방적 기능과 관련된 마르크스주의의 견해는 공유했지만, 갑남을녀가 해방되어야 할 속박의 구조에 대해서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이해하였다. 착취와 지배의 원천은 일차적으로 정치나 경제와 같은 제도화된 구조가 아니라, 인간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젠더 또한 새롭고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겨졌다. 푸코가 권력 및 권력과 지식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가로서 마르크스를 대체했던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152-4)


"(이탈리아의 카를로 긴즈부르그나 카를로 포니 같은) 일상 생활의 역사가들은 역사 연구의 주제를 권력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주변'의 대다수 사람들로 전환해 갔다." "이들은 다수의 사람들을 군중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세계사적 과정에서 혹은 익명의 군중들 사이에서 잊혀져서는 안되는 개인들로 파악한다. 이미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목표를 〈가난한 양말직공 ··· ··· [그리고] '시대에 뒤진' 베틀 노동자를 ··· ··· 후대의 거대한 오만에서 구해내는 것〉이라고 선언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역사의 동기를 명확히 하였다. 그러나 만약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망각으로부터 구출해 내고자 한다면, 역사를 더 이상 단일한 과정으로, 즉 수많은 개인들이 묻혀 버리는 거대 담론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별적 중심을 지닌 다면적 흐름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개념적·방법론적 역사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 이제 역사가 아니라 역사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들이 문제가 된다."(159-60)


"미시사 연구자들은 역사가들이 실재하는 대상을 다룬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전통적인 사회과학적 접근 방식을 비판한 이유는 사회과학이 불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과학자들이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소규모적 삶의 구체적인 실재에 비추어 검증해보면 지지될 수 없는 일반화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미시사 연구자들은 〈중요해 보이지 않은 단일의 기호를 통해〉 접근해야 하는 '해석적' 문화 연구를 목표로 한다. 레비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시사적 접근 방식은 어떻게 우리가 다양한 실마리와 기호, 징후를 통해서 과거의 지식에 접근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실재는 역사적 텍스트 밖에 존재하며,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주장을 계속한다. 물론 지식은 매개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시사적 방법은 〈실재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역사가들이 채택하는 전통적인 단정적·권위적 담론 형태와 결별한다.〉"(167-9)


# 미시사를 향한 비판


1. 역사를 일화적인 호고好古주의로 전락시켰다.

2. (근대 세계를 혐오하고) 과거 문화를 낭만화한다.

3. 상대적으로 안정된 문화를 연구하기 때문에, 급격히 변화하는 근·현대를 다룰 수 없다.

4. 3번과 관련하여 미시사는 정치를 다룰 수 없다.


"결국 미시사는 대규모의 사회·정치적 과정을 분석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필수 불가결한 보완책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또한 구술사가 일정한 공헌을 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연구는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역사에 새로운 관점을 추가한다. 그때까지 홀로코스트는 라울 힐베르크가 묘사했던 것처럼,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어 〈악의 일상화〉를 구현했던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관료들이 책상머리에서 수행했던 광대하고 복잡한 행정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브라우닝은 이제 〈파괴기계〉의 계서제의 밑바닥에서 개인적으로 수백만 명에 대한 처형을 단행한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수행한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101 예비경찰대대에 대한 그의 설명은 어떻게 대부분 노동계급 출신이었던 중년의 함부르크 경찰들이 뚜렷한 반유태적 감정 없이 폴란드에서 대량 학살에 가담했는지를 보여 주었다."(175-8)


"포스트모던 역사 서술 이론의 기본 관념은 〈과거에 일어난 변화에 대한 정합적인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역사 서술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의 과거를 준거로 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와 헤이든 화이트는 역사 서술은 허구와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였다." "사료에 대한 문헌학의 비판적 작업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를 넘어서 역사적 설명을 구성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화이트의 경우 과학적 고려가 아니라 미학적·윤리적 고려에 의해 결정된다. 그는 계속해서 역사가들은 형식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들이 제시하는 설명의 내용까지도 미리 결정하는 한정된 수의 수사적 가능성만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 대문에, 우리가 보았듯이 〈역사 이야기는 언어적 허구이고, 그 내용은 '발견'된 만큼 '창안'되며, 그 형태는 과학보다는 문학과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고 주장한다."(181-2)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1916년 사후에 출판된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연관된 관념을 기초로 해서 언어이론을 공식화했다. 언어는 구문적 구조를 가진 폐쇄적인 자율적 체계를 형성하며, 나아가 언어는 의미와 의미의 단위를 의사소통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의미가 언어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생각이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구조주의적 개념의 중심을 이루는 관념에 도달한다. 즉 인간은 자신이 구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결정하는 구조─이 경우에는 언어 구조들─의 틀 내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에서 전개된 '신비평 New Criticism'의 문학이론과 이와는 독립적으로 바르트에 의해 시작되어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방법론에 이르는 프랑스의 문학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84-5)


"푸코가 착수한 다음 단계는 텍스트 생산에 관계하는 저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저자가 사라지면, 의도성과 의미 또한 텍스트로부터 사라진다." "푸코와 데리다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모든 텍스트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텍스트가 저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들은 소쉬르의 언어 개념을 급진화시킨다. 소쉬르의 경우, 언어는 여전히 하나의 구조를 지니며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말(기표)과 그것이 지시한 사물(기의) 간에는 여전히 통일성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데리다의 경우, 이러한 통일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명확한 의미가 없는 무수한 기표들을 본다. 명확한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그 어떤 아르키메데스의 지렛점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을 위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세계에는 인간 행위자, 인간의 의지 혹은 의도가 없으며, 정합성을 완전히 결여한, 의미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185-6)


"문화인류학자인 기어츠는 최근의 역사 사고에서 문화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 방식의 가장 중요한 추동력을 제공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가 짜 놓은 의미의 그물망에 매달린 동물이라는 베버의 주장을 믿기 때문에, 나는 문화를 이러한 그물망으로 간주하며, 그것에 대한 분석은 법칙을 추구하는 실험과학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의미의 그물망'이라는 개념에 베버와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인류학자에게 문제되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두터운 묘사'라고 말한다. 방법의 대안으로서, '두터운 묘사'는 기어츠가 〈기호학적〉이라 정의하는 문화의 개념에 근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문화는 언어의 특성을 소유하며, 언어와 마찬가지로 '체계'를 구성한다. 각각의 행동과 각각의 표현이 전체로서의 문화를 반영하는 상징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해석이 가능하다."(188-90)


"낯선 문화의 '의미'는 인류학자와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이것은 이론으로 유도된 문제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분석적 사회과학자와 자신들의 연구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전통적 역사가 모두의 작품을 물들인다고 여겨진 주관적 편견의 도입을 저지한다. 그러나 사실상 기어츠의 문화 해석에는 그 어떤 통제 기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인류학자의 주관성이나 상상력이 그의 연구 대상에 다시 개입한다." "로버트 단튼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민중문화를 되찾고자 한다. 동시에 이러한 텍스트를 자본주의 근대화의 압력 하에 있던 인쇄업의 경제적 변화에서 유래된 갈등이라는 더 넓은 컨텍스트 내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기어츠의 「발리 섬의 닭싸움」을 연상시키는 고양이 대학살에 대한 두터운 묘사를 통해 어떤 문화가 그것이 지닌 모든 복합성을 고려해서 실제로 재구성될 수 잇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191-3)


"(이와 달리 언어 혹은 담론에 핵심적인 위치를 부여하여 언어를 사회적 실재의 대용물이 아니라 실재의 길잡이로 파악하는) 경향 가운데 문화인류학과는 가장 동떨어져 있는 반면, 전통적 형태의 지성사와는 매우 가까운 것이 포코크와 퀸틴 스키너, 코젤렉에 의한 정치사상사의 연구들에서 발견된다." "이들에 따르면, 사상들은 더 이상 근본적으로 위대한 정신의 창조물로서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그 표현이 생성된 지적 공동체의 담론의 일부로 파악되어야 한다." "담론은 비교적 자율적인 행위자들의 공동체를 상정하는데, 이들은 정치적·사회적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서로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담론 개념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이론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담론은 정치적 실재의 형성에 기여하며, 역으로 또한 그러한 실재의 영향을 받는다."(193-5)


"역사 연구에서 '언어적 전환'은 이전의 사회경제적 접근 방식에 내재한 결정론을 깨뜨리고, 언어가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적 요소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스테드먼 존스가 주장하듯이, 이것은 사회적 해석을 언어적 해석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검토하는 문제이다. 언어적 분석은 정치사와 사회사, 문화사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연구들에서 중요한 보조 수단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룬 역사가들은 언어와 수사 및 상징적 행위가 정치적·사회적 의식과 행동에 미친 영향을 강조했다. 하지만 대체로 〈실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언어만이 존재한다〉(푸코)라는 극단적 입장을 공유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었다.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언어적 차이는 사회를 구조화하며, 사회적 차이들은 언어를 구조화한다〉라는 캐롤 스미스-로젠버그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202-3)


맺음말


"19세기는 역사 발전의 혜택에 대한 확신이 최고조에 도달한 시기이지만, 그와 동시에 근대 문화의 특성에 대한 커다란 불확실성이 싹튼 시기이기도 하였다. 초기의 비판은 19세기 문명이 대단한 가치를 부여했던 과학적 합리성과 기술적 진보, 인권의 개념 그 자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 나왔다. 거기에는 전근대적, 전산업적 세계를 향수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던 사상가들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기를 원했던 일부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때때로 반민주적인 색채를 띠었던 이러한 비판은 계몽을 통해 인간이 종속과 박탈, 폭력이라는 오래된 해악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거부하였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부르크하르트,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보들레르를 괴롭혔던 것은, 근대 유럽 세계에 내재한 폭력과 불의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들은 대중화의 과정 속에서 통속화된 가치관 및 그것을 수반한 영웅주의의 몰락을 염려했다."(215)


"오스발트 슈펭글러, 아놀드 토인비 등은 역사의 단일적 통일성에 대한 관념을 거부하고, '고급 문화들'에 대한 비교사를 서술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명화된' 민족과 '원시' 민족 간의 이와 같은 구분은 〈역사 없는 민족들〉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문화인류학에 의해 역시 거부당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역사가들에 의해 무시되었던 인구의 다른 부분들이 역사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역사의 초점은 권력의 중심부뿐 아니라 사회의 주변부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었고, 이를 통해 미시사와 복수의 역사들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역사에 방향을 제공하는 거대 담론을 발견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곧바로 역사가 모든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는 여전히 집단과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하나의 의미 있는 과정 대신에 이제 수많은 상이한 집단들의 실존적 삶의 경험들을 다루는 이야기들의 다원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다."(217)


"명백히 계몽주의는 많은 모순적인 측면들을 지닌다. 가령 계몽주의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콩도르세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과학적 지식과 그 결과인 기술적 지식을 사회의 영역에 체계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부와 복지를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콩도르세에게 과학과 기술은 확실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포함하는 인간을 무지와 박탈, 압제의 천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수단이었다. 진실로 계몽주의에는 이중적인 측면이 존재하였다. 즉 계몽주의의 보편성 및 이성적 계획과 통제에 대한 믿음은 로베스피에르에서 레닌에 이르는 급진주의자들의 유토피아주의와 전체주의의 싹을 배태하고 있다. 그렇지만 계몽된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독단적 권위와 절대적 통제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비록 계몽주의는 단죄되었을지언정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다."(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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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 - 중국사 연구를 위한 입문
오카다 히데히로 지음, 강유원.임경준 옮김 / 이론과실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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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중국인의 역사관─만들어진 '정통正統'과 '중화사상中華思想'


"지중해 문명보다는 훨씬 나중인, 서기전 221년 진 시황제의 통일이 엄밀한 의미에서 '중국'의 기원이 된다. 중국 문명의 3대 요소인 '황제'와 '도시' 그리고 '한자'가 이때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만 한자가 중국에서 극히 소수의 지배계급, 그중에서도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대중적인 문자가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야만 한다. 한자에는 품사나 성性, 수數, 격格, 시제가 없으며, 한자를 엮어놓은 한문에는 문법이 없다. 한문의 의미를 해독하는 단서는 고전에서의 용례밖에 없다. 그래서 한자의 사용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고전 텍스트를 통째로 암기해야만 한다. 여기에 더하여, 한인漢人이 말하는 언어는 지역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정도 있다. 결국 중국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언어[漢語]와 쓰는 언어[漢文] 사이의 이러한 단절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5-6)


"『사기』는 중국에서 쓰인 최초의 '정사正史'로 그 체제와 내용은 후세 중국인의 역사의식과 중국에 대한 의식을 결정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천하'라고 부르는 지역은 자신이 섬겼던 한漢 무제武帝의 지배가 미쳤던 범위를 가리키는데,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천하'는 중국과 동의어가 된다. 게다가 사마천이 황제黃帝의 업적으로서 서술하고 있는 것은 모두 현실의 무제의 업적과 겹친다." "신화 속 황제와 현실의 무제를 연결시키는 것은 '정통'이라는 관념이다. 사마천이 그것을 채택하고 있는 까닭에 '정통'은 중국 문명 역사관의 근본이 되었다. 중국 문명 역사관은 '정통'의 역사관이다. '정통'의 역사관이란, 어떤 시대의 '천하天下'(지금으로 말하면 중국)든지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황제)가 분명히 한 명이어서 그 천자만이 천하를 통치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통'은 오제의 시대에서는 선양禪讓, 즉 어진 천자에서 다시 어진 천자로 물려주는 방식을 통해 이어졌다."(17-8)


"『사기』에서 「하본기夏本紀」,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진본기秦本紀」가 다루는 시대가 되면 제위는 방벌放伐, 즉 추방이나 정벌을 통해 손에 넣는 것으로, 이긴 쪽에게는 천명이 부여되고, 패한 쪽에게서 천명이 제거된다. 이것이 본래 의미에서의 '혁명革命'으로, '혁革'은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이때부터 '천자'는 하늘이 혁명을 명하는 자, 즉 새로운 천명을 받은 군주가 '정통'의 천자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이 하夏에서 은殷으로, 은에서 주周로, 주에서 진秦으로 거듭하여 교체되어, 마지막으로 사마천이 섬기는 한 무제가 천명을 넘겨받은 '정통'의 '천자'로서 천하를 통치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쓰고 있는 것은 '정통' 황제의 역사인 것이다. 세계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국'이라는 관념이나 중국민족이라는 관념도, 사마천의 시대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념은 19~20세기 국민국가 시대의 산물이다."(18)


제1장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역사의 창조


# 『사기』의 구성

1. 「본기本紀」 : 황제나 왕의 재위 중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 기술

2. 「표表」 : 정치세력의 흥망과 교체의 시간적인 관계

3. 「서書」 : 제도, 학술, 경제 등 문명의 여러 측면 개괄

4. 「세가世家」 : 진 시황제 통일 이전에 있었던 지방 왕가와 통일 이후 지방에 세웠던 역대 제후들의 행적

5. 「열전列傳」 : 저명한 인사의 행적


"『사기』가 하夏, 은殷, 주周를 진 시황제나 한 무제 등과 나란히 「본기」에 싣고 있는 까닭은 '정통正統'이라는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무이한 ‘정통'(중국세계의 통치권)이 천하 어느 곳에서나 늘 존재하고 그것이 오제에서 하로, 하에서 은으로, 은에서 주로, 주에서 진으로, 진에서 한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정통'을 이어받는 왕조만이 '전통傳統'이 될 수 있다. '전통'을 이어받는 절차는 세습이 원칙이다. 오제五帝는 황제와 그의 자손이며, 요는 순에게로 순은 우에게로, '선양禪讓'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무력으로 하를 무너뜨린 은의 탕왕과 은을 무너뜨린 주의 무왕이 어떻게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왕조의 '덕德'(힘)이 쇠퇴하면 '천天'이 그 '명命'을 거두어들여('혁명革命') 새로운 왕조가 '천명'을 받게 되는 ('수명受命') 식으로 '정통'이 옮겨진다고 설명된다."(52-3)


제2장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단대사斷代史의 출현


"『사기』가 다루는 시대 범위는 오제五帝에서 시작하여 하, 은, 주, 진 왕조를 거쳐 사마천이 살았던 한 무제 치세의 중반까지이다. 이처럼 여러 왕조에 걸쳐 있는 체제의 역사서를 후세 중국사학사에서는 '통사通史'라 부른다. 반면 하나의 왕조만을 다루는 역사서를 '단대사斷代史'라 부른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고 약 180년이 지난 뒤에 반고班固(32~92년)가 『한서』 100편을 저술했다. 『한서』는 『사기』와 다르게 '단대사' 체제를 취해 서기전 206년 한 고조의 즉위에서 시작하여 한의 찬탈자 왕망王莽이 서기 23년에 멸망하기까지를 기술하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한 왕조만을 다루는 역사서인 것이다. 『한서』 이후의 '정사'는 모두 '단대사' 체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서』를 보면 고조에서 무제까지의 부분은 『사기』를 그대로 본뜬 데 불과한데, 반고가 왜 『사기』처럼 '통사'가 아닌 '단대사' 체제를 취했는가가 문제로 남는다."(60)


"한漢 황실의 외척으로 왕망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반고는 왕망을 매우 존경하였다. 유교가 반고가 살았던 후한 초창기의 통치원리가 되었던 것은 왕망의 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망의 행적만을 기술하는 것으로는 역사가 되지 않는다. 왕망은 한 왕조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러한 전후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한 황실의 일대기를 기술해야만 하는 것이다. 앞서 사마천의 『사기』가 있어서 역사는 '기전체紀傳體'로 쓰는 것이 통념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기』의 속편이라면 몰라도 이래서는 한 무제의 치세 중반부터 시작하게 되어 역사의 서술 체계를 잡을 수가 없다. 매듭을 짓고 역사를 새롭게 기술하기 좋은 때는 한 왕조 초대 황제인 고조 유방劉邦부터이다. 그러므로 『한서』가 취한 '단대사'라는 체제는 왕망의 공적을 기술하기 위해 형편상 채택한 것이지 처음부터 '단대사'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81-2)


제3장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정통'의 분열


"중국 문명에서 역사가 '정통正統' 황제가 지배한 변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서술이라는 점은 그로부터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세계의 현실에서는 '정사正史'가 표현하는 중국인의 역사관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변화가 진행되었다. '정사正史'의 구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에 들어맞지 않게 되었지만 이미 『사기』와 『한서』를 통해 확정된 구조를 대체할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 중국의 역사가들은 한대漢代에 만들어진 구조의 범위 안에서만 역사를 기술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게 되었다." "『삼국지』가 서술하는 대상이 세 제국이니 그 체제가 「위서魏書」, 「촉서蜀書」, 「오서吳書」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실 황제皇帝를 다루는 「본기本紀」를 수록하고 있는 것은 「위서」뿐으로 「촉서」의 유비나 「오서」의 손권에 관한 행적은 모두 「열전列傳」으로 기술되어 있다."(93-4)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장화張華의 비호庇護를 받았던 인물이다. 장화는 문벌門閥 출신이 아닌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사마소의 휘하에 들어갔고 마침내 진무제와 혜제의 측근으로까지 성장했다. 진수로서는 장화가 꺼릴 만한 얘기는 쓰지 않으려 했을 것이 당연하니 사마소의 부친인 사마의에게 불리한 내용은 가급적 생략하고 유리한 내용은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인지 『삼국지』는 정사正史 중에서도 그 서술이 간략하기로 유명한데 이를테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대개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이다. 당대의 역사를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폐해는 진수가 죽은 지 150년 정도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서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년)가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 다량의 사료를 인용함으로써 사실을 보충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99-100)


제4장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중화사상의 억지


"수당隋唐 시대의 황실은 모두 서위西魏의 우문태宇文泰와 함께 일어났다. 우문태는 선비인이었는데 534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자 서위의 문제文帝를 지지하여 장안長安에서 독립하였고 동위東魏 고환高歡(역시 선비계)과 대립하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정사正史'로서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을 한데 묶어서 『남사南史』를,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를 한데 묶어서 『북사北史』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복수의 「본기本紀」가 있어서 각각의 국가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두 계열의 황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천명天命'이나 '정통正統'이 두 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비계가 세운 왕조를 북조를 계승한 당나라의 정치적 입장에서 본다면 북조 역시 '정통'이라 주장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당나라와 그 이후 시대가 되면 '정사正史' 체제를 따라 역사를 충실하게 서술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 간다."(110-2)


"1004년 거란의 성종聖宗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북송을 침입하여 전주(하남성 북쪽의 복양현)에서 북송의 진종眞宗과 대치하였다. 여기서 진종이 거란의 황태후를 자신의 숙모로 대하면서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세폐歲幣로 바치겠다고 약조함으로써 거란과 북송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를 '전연의 맹약'이라 부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화의조건은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그리 문제될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정통'의 역사관에서 본다면, 북송으로서는 두 명의 황제가 병존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북송의 황제는 천하의 통치권을 가진 유일한 '정통' 황제가 아님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북송에게는 굴욕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새롭게 북방에서 대두한 유목민족제국을 가리켜 문화는 없고 무력만 강한 '이적夷狄'이라 멸시하는 식으로 울분을 토하였다. 바로 이것이 '중화사상'의 기원이다."(120-1)


"『자치통감』의 중화사상은 무엇보다도 남북조 시대를 다루는 태도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자치통감』은 진 시황제 이전인 서기전 403년에서 시작하여 북송의 태조 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해인 959년까지 약 1,362년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을 추적하여 기록한 역사서이다. 그런데 남북조 시대를 다루면서는 남조의 연호만을 표기하고 북조의 연호는 표기하지 않고 있으며, 동진東晉,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 등 남조에 속하는 황제들은 '황제'라 부르는 반면에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로 이어지는 북조의 황제들은 '위주魏主' '제주齊主', '주주周主'라 부르고 있다." "『자치통감』의 이러한 태도에는 북송과 대립하고 있던 거란제국, 즉 요遼나라를 북조北朝로 상정함으로 해서 요나라 황제는 '정통' 아니며 따라서 천하를 지배하는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한 가짜 황제라는 것을 멀리 돌아서 주장하고픈 심정이 숨겨져 있다."(122-4)


제5장 송렴宋濂 등의 『원사元史』─진실을 은폐하는 악폐惡弊


"원元나라에서 편찬한 『송사宋史』는 북송北宋과 남송南宋 모두를 '정통'으로 대우하고 있다. 그런데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에서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황제들 역시 「본기」를 편찬하여 '정통'으로 취급하고 있다. 천하가 다시 한 번 둘로 갈라졌으며 그에 따라 '정통'도 둘이라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중국의 바깥을 지배했던 요나라의 지배권을 이어받아 중국의 북반부를 지배한 국가가 금나라이며, 금나라와 동맹부족이었던 몽골 부족에서 칭기즈 칸이 출현하여 금나라의 황제로부터 독립하였고 그가 건국한 몽골 제국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남송까지도 멸망시켜 전 중국을 정복했기 때문에, 요나라와 금나라 그리고 원나라는 독자적인 일련의 '정통' 계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원나라의 입장에서는 요나라의 황제나 금나라의 황제 모두 '정통'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원나라는 '정통'이 아닌 왕조가 되고 만다."(135)


"그러나 명나라의 시대가 되었어도 중국의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방식은 전과 변함없이 『사기』와 『한서』의 틀을 답습하였다. 명나라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가 지시하여 1370년에 완성을 본, 송렴宋濂(1310~1381년) 등이 편찬한 『원사元史』 210권은, 물론 몽골인이 남겨놓은 사료를 활용하여 편찬한 것이기는 하나 그 체제는 이전의 정사正史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어서 역사 서술의 대상도 정사가 간주하는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138) "그렇기 때문에 정사의 전통에 따라 교육 받은 중국인이 『원사』를 읽게 되면, 원나라를 유목민이 중국에 들어와서 만들어놓은 중국식 왕조로 오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실제로 원나라는 온전한 유목제국이었으며, 중국식의 요소는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한자로 명기되어 있는 관직명을 사용했다는 것뿐이다." "결국 변하지 않은 것은 '정사'의 서술형식일 뿐이지 중국의 현실 상황은 시대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거듭했다."(143-4)


제6장 기운사祁韻士의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역사에 대한 새로운 도전


"청나라가 멸망한 지 2년 뒤인 1914년에 총 68명의 학자들이 『청사淸史』 편찬에 투입되었으나,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여 관련 업무가 정체되어 있는 데다가 편찬관도 점차 줄어듦에 따라 청사관에 남아 있던 이들도 마음 놓고 편찬에 전념하기가 불가능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1928년에 겨우 원고가 대강이나마 갖추어져서 『청사고淸史稿』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150) "그런데 『청사고』에는 『명사明史』까지의 ‘정사’에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번부세표藩部世表」나 「번부열전藩部列傳」이 대표적이다. 청나라에서 '번부'란 왕조의 발상지인 만주를 뜻하면서 청나라가 간접 통치하는 중국 이외의 주민을 가리킨다. 몽골의 호르친Qorchin 부에서 티베트까지를 아우르는 각 부의 역사를 기재해놓는 것은 이제까지의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까닭은 건륭제乾隆帝 시대인 1789년에 만주어에 능통한 한인 기운사가 편찬한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 120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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