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황선애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 / 푸른역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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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서문


"시간 그 자체는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역사적 표현들은 은유적으로 역사와 그 〈움직임〉에까지 확대되는 자연적이고 공간적인 배후 의미에 의지하게 된다. '진보' 개념 역시 그런 표현들 가운데 하나다. '걸어가다Schreiten'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물리적·공간적 구성 요소를 지니며, 걷는 행위가 이루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간적 구성 요소가 첨가된다. 왜냐하면 마우트너가 강조한 것처럼 걸어간다는 것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기, 즉 진보하기Fortschreiten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Fortschritt'는 공간적으로 여기와 저기, 시간적으로 지금과 나중 및 이전을 서로 연관시키는,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길'이라는 공간에는 시간적 흐름이 상응하기 마련이다. 일반적 관계 범주로서 '진보' 개념은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역사적 움직임을 호명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고 중립적이다."(12-3)


# 근대에 형성된 '진보' 개념의 함의

1. 역사철학의 보편적 개념으로 쓰인다.

2. 개별 영역이나 구체적 행위와 관련된다. 옛것은 언제나 뒤처짐을 의미한다.

3. 역사적 운동이 스스로를 진보의 주체로 생각할 때 진보 개념이 이념화된다.

4. 보통 개선을 향한 움직임을 의미하며, 거의 종교적 색채를 띤 희망의 개념이다.

5. 고대와 달리 비순환적인, 직선적인 진행을 가리키며, 후퇴는 항상 진보보다 짧게 지속된다.

6. '진보'의 목표는 유한한 범위 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과 그 목표를 무한하게 연기하는 것 사이에서 동요한다.

7. '진보'는 종종 가속화를 가리키며 역사적 동력에 의해 촉발되거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2.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진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넓은 의미에서 '진보Fortschitt' 혹은 '나아가기Fortschreiten'를 나타내는 많은 단어들은 특정한 관점에서 어떤 것이 증가하고 개선되거나 혹은 악화되는 상황도 나타냈다. 특히 개개인의 교양이나 덕성이 완벽해지는 것을 종종 의미했다. 하지만 도시나 제국의 권력과 부가 증가하는 것을 나타내거나 학문의 발전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때 진보의 주체나 영역은 대체로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시간적으로도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진보 개념이 아직 형성된 건 아니다. 적어도 이교도적인 고대 사람들은 사회적·도덕적 조건들이 순차적으로 개선된다는, 다시 말해 역사가 전반적으로 변화 과정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물들이 변화해도 변화 자체는 감지하지 못했고 시간의 흐름이 개선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따라서 진보에 대한 어떤 생각을 몰락에 대한 또 다른 생각과 나란히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모순된다는 의식을 하지 못했다."(18-9)


"현재와 이어지는 다리인 동시에 (동양 문화권은 완전히 배제한 상황에서) 그리스인들의 진보성을 서술하는 유일한 자료는 투키디데스의 고고학이다. 거기에서는 문명의 기본 요소들이 생성되는 것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중요한 것은 기술, 경제 및 권력의 진보였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필요한 유일무이한 잠재력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때 그리스인들은 야만인들에 비해 진보적으로 묘사되었다." "이 외에도 기원전 5세기에는 인간이 이제까지의 모든 발전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정치적 계획을 수립하고 관철함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능력을 획득했다고 생각했다." "예술가와 철학자, 심지어 소피스트의 경우 현대적인 것에 대한 의식이 거의 지배적이었다. 오래된 것들은 이제 우습게 생각되었고, 새로운 것은 더욱 새로워지기를 원했다. 자신들의 상황을 크로노스가 실각한 후 〈젊은 제우스〉가 지배한 상황과 유사하게 생각했다."(20-1)


"이러한 인식은 시종일관 계속되거나 지속적이진 않더라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성공 사례들로 인해 더욱 힘을 얻었다. 그것이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인식은 기껏해야 그리스인에게만 퍼져 있었고, 순진한 자기중심적 태도였으며, 단지 막연하게 원시시대와 고대 선사시대에 견주는 것이었다 진보에 대한 확신은 새로운 행위의 가능성에 대한 의식에서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의 그 유명한 합창에서 인간의 영민함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 새로운 발명의 증가에 대해 말하고 있진 않다. 섬뜩할 정도로 놀라운 인간의 능력에 대해 말하지만 인간의 진보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상응해서 아마도 정치를 개선한다는 생각은 대규모의 제도적 변화를 감행하는 능력과 관련 있을 뿐이지, 가령 사회와 도덕성이 개선되는 과정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23)


"스토아 학파는 개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진보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시민국가가 역사적 흐름의 목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달랐다. 루크레티우스는 발명의 역사가 현재를 넘어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고는 그에 대한 종합적인 그림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과학과 기술에서 예기치 못한 것들을 기대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개별적 진보들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별다른 결과 없이 그 자체로 끝나고 말았다. 학문은 학문으로만 머물렀고 학문 바깥으로부터의 흥미나 지원을 거의 얻지 못했다. 연구자가 받는 보상은 지식 그 자체였고, 실제적 응용은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학문적 정신 활동이 좀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전쟁 기술뿐이었다. 경제적 변화 과정이 그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다. 생산을 강화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확산되어 새로운 것을 생산하도록 자극하지도, 습관의 벽을 깨뜨리지도 못했다."(28-9)


"인류가 전반적으로 진보한다는 인식은 마침내 로마제국의 성립과 로마제국 내에서의 기독교 옹호론과 관련해서 형성되었다."(30) "사람들은 일찍이 예수의 탄생과 아우구스투스가 지배하는 제국의 공고화 사이에 신이 의도한 관계가 있다고 봤었다. 로마제국에 와서야 선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교통체계가 만들어졌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과거에 제국들이 있어온 것을 신이 원한 진보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무엇보다 정치와 관습 그리고 종교에 있어서 그러했다. 동시에 제국의 평화와 복지는 기독교 신의 영향이라 보고 싶어했고, 이 영향으로 인해 그것이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제 미래로 생각을 돌려 제국을 옹호하는 논거를 선교를 위한 논거로 확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오리기네스에 따르면 제국의 권력과 안전 유지는 예수를 인정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로마 시대에 처음으로 미래의 보편적 진보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생겨났다."(32-3)


3. 중세 시대의 '진보Profectus'와 근대 종교 영역에서 사용된 '진보Fortschritt'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시로 바뀌는 정치적 권력 상황이 교회나 신앙과 동일시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고 따라서 기독교화된 로마제국을 신의 계획에 따른 진보적 요소의 하나로 해석하려는 에우세비오스의 섣부른 낙관에 일침을 놓았다.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는 두 제국, 즉 '신의 도시civitas Dei'와 '지상의 도시civitas terrena'가 진행하는 방향은 '앞으로 나아가기procursus, procurrere' 혹은 '돌아가기excursus, excurrere'로 묘사되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건 진행에 대한 시간적 규정이 이중적 의미를 띠는 것이었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돌아가기'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더 적절하다고 보았다. 접두사 'pro'에 내재된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 '인류의 전진과 번영'에서조차도 비하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그는 두 제국이 혼용되어 오해가 확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7)


"하지만 신앙적 경험의 '나아감proficere'에 대해 얘기할 때는 신앙적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이 지상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선택된 부류의 인간이 나아가는 길은 부차적으로 역사적 진행이지 일차적으로는 신을 향한 도정이다. 〈한 개인을 교육할 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믿는 자들에 의해 대표되는 인류의 교육은 시대를 지나면서 진보되었고 따라서 인류는 점차적으로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으로, 그리고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상승할 것이다.〉 교육도 시간적 단계를 거치면서 '역사'를 목표로 하는 대신 선택된 자들이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에 이르도록 도와야 한다. 따라서 '진보profectus'는 역사적 개념이 아니었다. 진보의 목표는─나중에 파울리누스의 명언에 요악된 것처럼─시간 바깥에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완성은 시간 속에 있지 않고 영혼 속에 있다.〉"(37-8)


"(진정한 진보는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는) 초역사적 진보 개념은 당연히 현세적 삶의 태도에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역사 자체에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신의 완벽성을 향한 긴장은 역동성을 불러왔고 이는 기독교인들이 〈진보적〉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인식하도록 압박했다." "이러한 태도가 미친 영향은 인간의 행위와 이후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초역사적 진보는 처음에는 신앙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현세의 여러 영역에까지 침투하게 된다. 따라서 늦어도 스콜라 철학 이후에는 종교적, 정신적 인식 행위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장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점차적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은 근원이 변함없이 동일하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물론 예수를 따른 사도들의 견해를 결코 넘어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순차적 시간의 흐름은 인식이 확장되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41-2)


"근대 초기의 과학 혁명으로 인해 비로소 종교적 기대 지평을 줄이고 밀어내는 주도 영역들이 생겨났다."(44) "종말론적 역사 해석도 이제 보편적인 역사 원리로 이해되는 진보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계획이 점차적으로 이행될 것이라는 전통적 믿음이 기독교적 진보뿐만 아니라 일반적 진보 개념에 맞춘 논리로 무장한 신학에 의해 지탱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신의 계획이 종교를 윤리로 만드는 것에서 발전되었든 또는 그것이 계시라는 역사적 근거에서 도출되었든 상관없었다. 처음에 초역사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기독교의 '진보' 개념은 미래가 개선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었고, 세속적으로 해석된 후에 다시 거꾸로 신교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전혀 단절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지속성 속에서 진보가 증명되었다. 1897년에 트뢸취가 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진보 개념을 이 일회적이고 불변하는 원래 의미와 다시 연결했기 때문이다."(48)


4. 근대적 진보 개념의 형성


"근대의 진보 개념과 이전의 종교적 진보 개념의 차이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대가 이제 열린 미래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용어상으로는 종교적인 '진보profectus'가 세속적인 '진보progressus'에 의해 밀려났다고 혹은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근대 초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르네상스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의식이 생기게 했지만,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진보 의식은 아직 가져다주지 못했다. 특히 중세가 어두운 중간 시기로 인식되고 이를 뛰어넘어 저 멀리 고대가 여전히 모범적 전형이 되는 동안은 그러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의 증가로 인해 고대의 권위가 독립적인 이성에 의해 물러나고서야 비로소 역사적 시간이 진보한다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자연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지만, 방법론적 발전을 통해 그것을 새롭게 발견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삶의 개선이라는 현세적 목표가 생겨났고, 이는 종말에 대한 이론을 열린 미래를 향한 도전으로 대체하는 것을 허용했다."(50)


"(근대적) 진보 개념을 관철시키는 척도는 이성과 현세적 시간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의 지양이었다. 이성의 사용이나 이성을 통한 발견과 새로운 고안들은 시간과 함께 증가되었다. 결국은 이성 자체가 시간성을 띠게 되었다." "베이컨은 현재가 경험이나 판단에서 고대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숙한 어른과 젊은이를 비교할 때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고대〉는 이제 그가 살고 있는 시대 이전에 있었던 역사로 저평가되었다. 베이컨의 비유가 이전의 자연 비유와 다른 새로운 점은 그가 소멸의 과정인 자연적 노화를 배제했다는 점이다. 대신 그는 첫째, 〈고대는 세상의 젊은 시절이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와 현재를 역으로 보는 시간적 관점을 취했다. 둘째, 그는 시간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영원한 진리와 더 이상 분리하지 않았다. 모든 권위는 고대가 아니라 시간에 근거를 두며,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고 그는 말한다."(51-2)


"파스칼은 1647년 《진공에 대한 연구》의 서문에서 이 같은 비유를 더욱 확장한다. 그는 이성의 무한한 진보를 위해 성장 메타포를 퇴출시킨다. 그는 고대인들의 역사적 권위를 손상하지 않고─사실 이들이야말로 젊은이들이다─이성이 무한하게 새로운 것을 고안함으로써 자신만의 규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제한된 완전성을 보이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파스칼의 확신은 이제 인간이 초역사적으로 신의 영원성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세계가 노화함에 따라 인간이 지속적으로 진보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은 〈영원을 위해 만들어졌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단계에서 시작하지만, 〈진보 속에서 끊임없이 배운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선인들의 그것과 함께 축적하여 학문을 발전시킨다고 보았다." "무한한 진보는 이제 자연의 노화 메타포에서 벗어난 미래를 개척하게 되었다."(52-3)


"(신적 완벽성에 비해 상대적인) 완벽성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대의는 18세기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전환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즉 하강이 따를 거라는 순환론적인 생각 역시 널리 퍼져 있었다. 볼테르, 디드로, 루소와 같은 위대한 계몽주의자들도 이런 하강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개선될 거라는 순수한 진보 개념은 해당 세기를 규정할 때 아직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진보는 자연의 항구적인 법칙에 의해 한계를 갖게 되는데, 학문은 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야 하고, 도덕은 이를 성취해야 하며, 예술은 이를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반면 콩도르세는 인류의 개선은 무한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진보 자체가 갖는 한계 외에 다른 한계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콩도르세는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진보성Fortschrittlichkeit의 원칙을 표현했다."(58-60)


"칸트는 개선을 향한 진보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도, 신이 의도한 계획도 아니며, 인간에게 영원히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은 도덕의 뒷받침이 없으면 불안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칸트는 미래를 도덕적인 방향으로 끌어갈 실천적 윤리계명을 내세워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독립적인 이성을 통해 중재한다. 칸트는 실천이성을 통해 좀 더 결정적인 답을 제공한다." "인간은 시간의 변화에 예속되지 않는 도덕적 존재로서 스스로 진보의 목표를 세울 수 있다. 일단 한 번 그렇게 하고 나면 언제나 역사가 진보를 가져온다고 보게 된다. 또한 〈실천이성의 힘을 통해〉 그렇게 되도록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진보'는 선험적 논증 맥락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도덕적 진보가 필연적이라는 인식 조건이 동시에 그것의 실현 조건이 된 것이다. 또한 진보는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67-9)


"'진보'는 완벽이라는 이상에 시간성을 부여함으로써 역사적 개념이 되었고, 또한 기대 지평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까지 초월적 목표로 설정되었던 것이 이제 역사적 실천 안으로 편입된 것이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이러한 기대 지평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의 왕국을 실현하고자 하는 혁명적인 욕구야말로 진보적 발전의 탄력적 요소이며 현대 역사의 시작이다.〉 역사적 흐름 안으로 편입된 기대 지평이 역사를 역동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역사의 〈근대〉 시기와 역사의 진보는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었다. '진보'로 개념화된 것은 달라진 미래와 개선의 미래만이 아니었다. '진보'는 또한 새롭게 바뀐 경험 세계를 표시했다. 일단 일회적이지만 추월이 가능해진 현실 경험이 이 개념에 각인되었다. 1800년 무렵에야 비로소 단수형 집합 개념 '진보'는 이미 뒤로 물러난 '나아가기Fortschreiten'의 여러 가지 방식을 자체 내에 내포하게 되었다."(82-3)


"역사적 경험으로서 서서히 형성되는 진보 경험의 특징들은 슐레겔이 콩도르세를 비판하면서 언급했듯이 하나의 공통된 분모를 갖고 있다. 〈역사의 근본적 문제점은 인간이 성취한 다양한 분야에서 진보가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지적인 발전과 도덕적 발전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슐레겔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Gleichzeitigkeit des Ungleichzeitigen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이 어긋남의 긴장이 '진보'를 경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크고 작은 〈역행〉과 〈정체〉, 특히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도달한 모든 교양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역행〉을 언급할 수 있다. 슐레겔은 콩도르세가 역사를 직선으로 구상하면서 이러한 역행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고 말한다." "(역사의 흐름에 불규칙성이 있다는) 슐레겔의 언급은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다양한 흐름과 그 속도의 차이가 '진보' 현상을 가져옴을 설명해준다."(83-4)


"시간적 관점은 언제나 지리적으로 규정되었고, 그런 다음 종교적, 민족적, 인종적 관점에서 보완되었다.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제한하는 이러한 논지는 '식민주의'에서 시작해 '제국주의'를 거쳐 '공존'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되풀이되었다." "진보의 단계적 차이와 괴리에 근거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명제는 그것이 임의로 해석되는 것과 상관없이 정치적 지도층에게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앞서가고 뒤좇아 가도록 만드는 괴리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진보의 주체이거나 수혜자이며 따라서 인간 종족은 그렇게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반쪽의 인류가 진보를 추구할 때 이러한 논지는 이데올로기적인 요구의 성격을 띠고, 요구의 이행이 미래로 연기됨으로써 진보는 무한하게 재생산된다. 이 경우 역시 진보 개념의 이 같은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처음으로 꿰뚫어 본 사람은 다름 아닌 헤겔이었다."(96-7)


"헤겔은 이제까지 나란히 사용된 진보의 의미들, 즉 진행, 행위 범주, 역사 흐름의 특징 그리고 인식 개념으로서의 의미를 모두 종합해서 사고했다. 헤겔은 《철학의 역사》, 《세계사의 철학》 같은 저서에서 동일한 사건의 내면과 외면을 보여주었다.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구체적인 역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정신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정신의 삶은 행위 그 자체다.〉 이렇게 해서 헤겔은 이제까지 초역사적으로 규정된 목적을 온전히 역사적 실현의 장으로 옮겨놓았다. 〈목적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그것을 성취하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차이로 인해 균열된 구조들은 구체적 상황의 변증법 속에 묶이고, 이 변증법이 시간 속에서 실현되면서 현실과 법을 이끄는 기능을 갖게 된다. 진보와 역사는 이후 진행의 범주 안에서 서로 수렴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헤겔은 이제까지 진보 개념을 가능하게 한 세 가지 입장들이 개념의 시간성을 온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106)


"우선 헤겔은 기독교의 완성 이론을 비판한다. 이는 내세적 성취만을 이야기할 뿐이며, 따라서 모든 현세적 행위는 준비이자 수단으로 격하된다고 본다. 오히려 스스로를 창조하는 절대 정신은 역사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 즉 절대 정신이 〈실제로 세계 역사를 다스려왔고 다스리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사항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두 번째로 헤겔은 완성 가능성에 대한 모든 해석을 문제 삼는다. 〈완성 가능성이란 사실 가변성처럼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도 목표도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이것이 헤겔의 세 번째 비판이다─헤겔은 괴리에 대한 온갖 형태의 해석 역시 거부한다. 〈개인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누구나 자기 시대의 자식이다. 마찬가지로 철학도 그 사상 속에 당대를 반영한다. 개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철학적 사상이 당대를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106-7)


5. 19세기의 중심 개념 '진보'


"'진보'가 특정한 주체나 객체와 뚜렷하게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용되자 곧 표어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830년대 이후로 이러한 표어 사용이 확산된다. 이것은 산업화 시대의 사회 문제를 헌법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다. 시대에 발맞추어 앞으로 나아가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거나 요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이것은 이미 프로이센의 개혁파 관리들의 입에 박힌 어법이었으며, 나중에 이들의 비판자들─예를 들어 한제만─역시 같은 어법을 사용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843년에 역사적 흐름을 조종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보 그 자체가 헌법이다.〉" "'진보 자체'가 삶의 모든 영역을─마인홀트는 이를 종교적, 도덕적, 학문적, 예술적, 사회적, 정치적 진보로 구분한다─ 포괄함으로써 '진보'라는 말의 의미는 희석되었고 상투어가 되었다. 이제 동시대인 누구도 세상이 진보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116-7)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진보주의적 경험 체계와 해석의 패턴을 더욱 세분화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생각한 역사적 진보가 남다른 것은 경제를 이론의 기초로 삼고 연속적인 계급투쟁을 진보의 역동적 형태로 본 점이었다. 〈반대가 없으면 진보도 없다. 그것이 문명이 오늘까지 밟아온 법칙이다.〉 마르크스의 이 일반적 명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역사에서 진보는 현재 상태의 부정으로서 나타난다는 헤겔의 아류가 사용하는 문구도 새롭지 않다. 혁명이 진보를 향해 간다는 원칙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게 아니다. 독일에서 새롭게 영향을 끼친 것은 정치의 중심이 된 역사철학적 명제였다. 즉 헤겔이 세계정신에서 상정한 변증법적 운동이 계급투쟁에서 단계적으로 실행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회적 진보에 대한 명제로부터 자유주의 진보 개념에서보다 더 직접적인 행동강령을 유도해낼 수 있었다. 이때 모토는 항상 다른 이들보다 〈더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135-6)


6. 전망


"승리를 확신하던 진보에 대한 믿음은 19세기 후반부에 다윈의 진화론Entwicklungslehre이 대중화되면서 또 한 번 추가로 지원병을 얻게 된다. 자연이 역사성을 띤 이후에는 자연도 진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고, 따라서 문명의 진보를 자연사를 통해 확인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내재된 비판을 넘어서 진보에 대한 신념을 원칙적으로 비판하는 소리가 점점 확산되었다. 시대정신에 맞서 외톨이로 소리친 자는 키르케고르와 보들레르였다." "독일에서는 쇼펜하우어에 이어 니체가 진보에 대한 믿음을 데카당스 현상으로 폭로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비판적 공격과 달리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 개념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데, 이때 진보는 권력에의 의지, 과감한 삶을 향한 의지를 달리 표현한 경우다. 〈진정한 진보는 더 큰 권력을 향한 의지와 방법 그 자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니체의 언설은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140-2)


"모두는 아니지만 시민 계층의 많은 이들이 진보 개념을 혐오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진보를 강조하면서 이 개념을 독차지하려는 것이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니체의 영향이 컸고, 특히 생철학 진영에서 이런 경향이 강했다." "두 번이나 치른 세계대전의 결과로 혹은 두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좌파 지식인들도 주도적 개념인 진보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 이렇게 대응한다. 〈진보 개념은 파국의 개념에서 근거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계속' 가면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호르크하이머는 1947년 절망적인 심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기술적 수단의 진보가 비인간화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 진보는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 즉 인간 이념을 파괴할 위험에 처해 있다.〉" "이처럼 어떤 관점이든 관계없이 진보 개념에는 예측의 잠재력이 내재하고 이것은 언제나 정치적 입장을 띌 수밖에 없다."(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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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 문명과 문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외르크 피쉬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안삼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 서론


2. 그리스 : 문화 개념이 없는 문화


"고대 그리스에서 문화 개념과 가장 근접한 말은 '교육(Paideia, Erziehung)'과 '교양(Paideusis, Bildung)'이다. 이 두 표현은 '아이Pais, Kind'의 파생어인데, 물론 그렇다고 아동 교육에만 한정되어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이 두 표현은 아주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교양을 위해 사용되고, 따라서 그 결과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말은 이미 데모크리토스에 의해서 자질 또는 교양인의 자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교양Paideia은 행복한 자들의 장신구이며, 불행한 자들의 피난처다.〉 여기서 'Paideia'라는 말은 항상 교양의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고전적 교양 이상의 신봉자들은 19세기 및 20세기에 충분한 전거도 없이 'Paideia'를 문화 그 자체로 양식화했다. 특히 베르너 예거가 그런 부류다. 그는 '교양'과 '문화'를 동일시했고, 이런 의미에서 문화 의식, 즉 문화에 대한 의식적 관념을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최고의 핵심적 가치로 보았으며, 이런 문화 의식을 그리스인들한테서 발견했다."(21)


3. 로마 : 문화 개념의 기초들


"출발점으로서 'cultus'와 'cultura'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밭의 경작cultura agri'이나 '밭을 일구는 일cultus agrorum'과 같은 농업적 의미, 즉 '돌봄'과 '밭의 경작'이다. 여기에는 '가축을 돌보는 것'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자연으로부터 얻어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세 영역으로의 의미 변전이 이루어진다. 우선 '돌봄'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데, 교육이나 존경의 의미 또는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의미로 쓰이게 된다. 즉 의복이나 장신구로부터 개인적 능력이나 성격의 훈련까지도 의미하게 되었다." "'마음의 닦음cultura animi'이 지칭하는 두 번째 의미 변전 영역은 추상적 영역으로 능력, 학문, 예술 등을 장려하는 영역이다." "세 번째의 의미 전이 영역들은 초자연적인 일, 종교 그리고 신과 우상, 하느님과 악령들 등에 대한 경배다. 'cultura'는 특히 고대 말기에 이런 의미로 나타나곤 했다."(28-30)


"원래의 농업적 의미에서 볼 때 'cultus/cultura'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인간은 이것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것이 삶에 필요불가결하지 않은 영역들을 포괄해감에 따라, 즉 따라 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유리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게 됨에 따라 가치 판단상의 명백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문화 비판이 생겨났다. 문화가 난숙한 문화로 변화하고, 사람들은 이 난숙한 문화로부터 벗어나 참된 문화를 보여주는 좀 더 원초적인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가령 수사학 무용론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수사학이란 (처음부터 자연에 의해서 주어진 것, 혹은 예전의 것만이 자연적인 것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생존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큰 위험성을 무릅쓰지 않고도 이 수사학을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33-4)


"문명 개념의 경우 사정이 문화 개념에서와는 전혀 다르다. 고대 라틴어에는 'cultus'와 'cultura'처럼 후대의 의미들이 한데 묶일 수 있는 단어도 없고, 어떤 상응어도 없다. 출발점은 시민이란 의미의 'civis'이며, 여기서부터 형용사 'civilis'가 파생된다. 발음상의 기저基底로 볼 때 이것과 그나마 가장 가까이 비교될 수 있는 명사는 'civilitas'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 어원의 영역, 즉 도시와 시민계급의 주변 영역에 국한된다." "그러나 'civilis'와 'civilitas'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얻는데, 특히 고대 말기에서 문명화된 삶과 문명화된 습속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대체적으로, 문화가 아주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는 영역에서는 'civilis'와 'civilitas'의 중요성과 사용 빈도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간과 관련되는 활동 영역으로부터 자연을 향한 행위 영역으로 전이되는 것이 그 반대 방향의 전이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이 새로이 드러나고 있다."(37-8)


4. 중세


"'cultura'는 아퀴나스에게서는 농경적 의미와 제의적 의미로 쓰이는 빈도수가 대략 같은 데 반해, 여타 저자들한테서는 제의적 의미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훨씬 더 자주 쓰이는 'cultus'는 모든 저자들의 제의적 의미로 쓰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가장 흔한 상투적 어구는 '신에 대한 경배cultus divinus'와 '하느님에 대한 경배cultus Dei'다." "좀 더 중요한 것은 제의적 의미가 인간, 특히 양친, 조국 그리고 산발적으로는 돌보고 닦아야 하는 덕성이나 학문에까지도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 'cultus'는 '존경'으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상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리하여 인간의 존경으로부터 신의 섬김에 이르기까지 경배에 관한 일종의 품계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층 강력하게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연관되었던 이 개념의 원래적 요소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문화가 어느 정도는 경배로 신앙화된 것이다."(47-8)


"'civilis'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시민적 상황〉은 자연을 벗어나게 만든다." "이런 양상들은 'civilitas'라는 명사에서 다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단지 드물게만 사용되는 명사이긴 하다. 이 단어는 보통 '도시', '시민', '시민권'을 가리키지만, 특히 한 도시의 '헌법', 즉 'Politia'를 의미한다." "'civilitas'는 이따금 도시나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의 올바른 삶 자체, 즉 '문명화된 삶zivilisiertes Leben'을 지칭하는 데까지 어의가 확장되기도 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가 들어서기 이전이라 할 수 있는 삶과 정치적 삶(즉 인간에게 적합한 유일한 삶으로 간주되는 공동체 안에서의 삶) 사이의 구별이다. 이렇게 해서 개념 안에서의 쳠예한 구분이 생겨난다. 야수적 또는 야만적인 인간들은 언제나 이미 공공성civilitas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만인들이 축출되는 것은 '문화cultura'로부터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civilitas'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52-4)


5. 16세기와 17세기에 볼 수 있는 현대적 문화 개념의 토대들


"중세 후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이 수용되면서 '공공성civitas'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나 16~17세기에 상황이 다시 역전된다. 고대의 뿌리를 재수용하면서 'cultus'와 특히 'cultura'는, 아직까지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자명한 개념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광범위하게 현대적 의미의 외연을 획득하게 된다. 이에 반해 'civilitas'는 점점 더 예절의 좁은 영역으로 축소된다. 'civilitas'의 정치적, 공동체적 요소들은─적어도 부분적으로는─'cultura'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문주의의 경우 처음에는 'civilitas'가 더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예절〉, 〈훌륭한 태도〉 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이 경우에도 물론 '도시국가civitas'가 배경을 이루고 있다. 즉 정말로 교양 있고 완성된 삶은 도시에서만, 도시적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은 주제가 되지 않고 그냥 전제가 된다. 이에 반해 야만적 삶과 대비되는 문명화된 삶이라는 의미는 계속 보존된다."(60-1)


"최초로 'cultura animi'를 핵심적인 개념으로 만든 사람은 베이컨Francis Bacon이었다. 1623년에 그는 이 개념을 윤리학의 두 주요 부분 중 하나로 설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윤리학을 근본적으로 두 부분의 가르침으로 나눈다. 하나는 선善의 예시 혹은 모범을 다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교육cultura animi 혹은 정신의 훈련에 대한 것인데, 우리가 종종 정신의 농사라고 부르곤 하는 분야다.〉" "'cultura animi'는 인성계발을 위한 포괄적인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를 모방한 관용구 '정신의 농사Georgica Animi'라는 말을 원용하여, 'cultura'의 농업적인 기본 의미를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즉 베이컨은─〈섬세한 교육culture〉이라고 표현한 몽테뉴와 비슷하게 그러나 몽테뉴보다 더 의식적으로─에라스무스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교육Erziehung'이라는 의미에서의 'civilitas' 대신에 'cultura' 혹은 'culture'를 사용한다."(68-9)


6. 18세기와 19세기 초 : 현대적 문화 및 문명 개념의 생성


"1760년대 이래로 '문화Kultur'라는 개념이 독일에서 폭넓게 확장되는 동시에 대중화되었고,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는 '문명civilisation'이라는 신조어가 동일한 기능들을 떠맡게 된다." "문화 개념은 가장 먼저 프랑스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농업적 의미는 자명하다. 그리고 18세기의 경과 중에 'culture'는─다른 언어들에서도─널리 퍼진 전문용어로 정착된다. 비유적인 영역에서는 '마음의 가꿈cultura animi'이라는 전통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와 연결되어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이미 나타난 바 있던 '교육', '교양'의 의미가 중심이 된다. 그것은 개인의 교양으로, 처음에는 집단과의 관련성은 대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빈번하게 사용되다 보니 가끔 목적어 없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루소는 〈교육은 가꿈culture에 비례하여 ······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를 만든다〉고 쓰고 있다. 다음 단계에 이루어진 중요한 진전은 개인적인 개념을 특정 집단, 제 민족들, 심지어는 인류에까지로 확장해 나간 것이다."(80-1)


독일에서 역사철학적 체계 진술의 한 기능으로 사용된 '문화' 개념은 "단순히 인간의 문화 업적들을 포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문화 업적들을 시간적 시각Perspektive 안에 세워 놓는다. 그리고 이 시간적 시각 안에서 이 개념의 대상은 비로소 그 고유한 의미를 얻게 된다. 이러한 기능들을 충족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개념이 새로운 강조점을 부여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초이자 가장 중요하게 이루어져야 할 확장은 개인에서 집단으로, 제 민족으로 그리고 인류로의 확장이다. 그 다음에는 농업, 교육, 학문들과 같은 개별적인 능력이나 영역들로부터 인간의 모든 생산물들로의 이행이 필요하다. 가장 많이 주춤하면서 이루어진 세 번째 단계는 인간 혹은 그 환경의 교양화라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그 결과물에 이르는 이행이었다. 여기서 결과물은 우선 교양화된 인간을 그리고 결국에는 문화 생산물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84-5)


"헤르더가 생각하기에, (정신문화와 교양이라는 의미를 넘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문화는 일차적으로 한 민족의 문화다. 이를 통해 역사화가 가능해진다. 한 민족의 역사는 동시에 그 민족의 문화의 역사이기도 하다."(87) "헤르더는 양가적인 유산을 남겼다. 한 민족의 문화, 즉 국민문화는 헤르더로 인해 핵심적인 가치가 되었다. 그는 이러한 국민문화를 자신의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우월한 가치를 가진다는 식의 민족주의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다. 헤르더는 그의 관심이 세계사 속에서의 다양한 문화들의 운동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세계시민Kosmopolit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개별 민족들의 문화로 인해 이 개념을 민족주의적으로 징발하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마련되었다. 다만 '국민문화'와 '문화민족주의'를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화민족주의는 국민문화가 배타적이 될 경우에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93)


"피히테의 경우 의문의 여지없이 긍정적인 개념을 좀 더 상세하게 규정하는 것만이 문제였다면 실러에게서는 루소와 칸트에 연이어 '문화'가 부정적인 측면들도 얻게 된다. 문화는 인간을 자연상태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데, 이 자연상태란 긍정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인간이 그 상태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문화의 압박과 문화의 해악〉이 운위되기에 이른다. 대립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정치적 영역이다. 〈자유와 문화는 최고로 충만한 상태에서 서로 뗄 수 없게 하나가 되고 또 이 합일을 통해서만 최고의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성 과정에서는 그 둘이 서로 결합되기 어렵다. ······ 계몽되고 도덕화되었으며 동시에 예속화되지 않은 나라들은 오직 유럽에만 존재한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곳에서는 자유로운 경우에는 야만적이고, 문화가 있는 경우에는 예속된 채 살고 있다.〉" "이로써 문화는 역사의 구체적인 과정 속에서 양가적인 성격을 얻게 된다."(100-1)


"중요한 것은 민족들 혹은 인류에 대한 '문명'과의 관련성이다. 물론 문명의 과정은 개인을 포함하지만, 그 상관계수는 '문화'의 경우와는 달리 거의 언제나 집단이다. 한 개인의 문명화라는 주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결정적인 것은 진보와 도덕의 이원론이다. '문명'은 운동, 변화, 분화를 의미한다." "1760년대에는 비교적 소수의 저자들만이 새로운 개념을 사용했다. 반면 1770년대 초반에는 '백과전서파' 안에 이 새로운 개념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외적인 문명의 진보와, 도덕과 미덕 영역에서 있을 수 있는 후퇴를 구분한 미라보에게서는 문명이 역사철학적으로도 야만과 퇴폐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점차 진보의 낙관주의에다 길을 비켜주게 되었다. 여기서는 문명의 진보와 무제한적인 인류의 진보가 일치하고, 도덕은 별도로 주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문명은 점점 더 일종의 역사 발전의 지표가 된다."(105-7)


7. 일반사전과 언어사전에서의 '문화'와 '문명'


8. 19세기 : 한 시대의 자의식의 표현으로서의 두 개념


"등급을 매기고 분류를 하는 것은 진보 모델과, 모든 민족의 문명의 단계를 한 가지 척도로 잴 수 있다는 비교 가능 원칙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이런 논의들의 결과는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모든 민족에게 문명으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몇몇 민족들은 특히 인종적 특수성 때문에 문명을 이룰 수 없다는 견해가 계속해서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주변적인 현상에 머물렀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 모델을 통해서 비로소, 다른 종류의 문화 내지 문명을 가진 민족들이 문화와 문명에 있어서 미달된 민족들로 되어버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도 자명한 토대로 보이던 그런 종류의 진보의 단계 속에서 이 두 개념이 유럽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측면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문화와 문명은 세계 속에서 유럽의 지도적 위치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다. 이는 대개 그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었고, 따라서 지리적 위치를 통해 이미 논증된 것으로 보였다."(156-8)


"독일어에서 '문명'이 '문화'에 대한 동의어로 쓰였던 것에 비해, 프랑스어의 '문화'는 '문명'에 대한 동의어로 쓰이는 정도가 독일어보다 훨씬 약했다. 프랑스어에서 문화의 무게중심은 정신적·학문적 영역에 놓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문화는 언제나 '문명'보다 협소한 의미를 지녔다. 처음에 문화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개인적 교양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때부터 18세기 독일어에서와 비슷하게 점점 역사의 과정 속으로 삽입된 집단적이고 과정적인 함의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독일어 어법과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프랑스어에서 민족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더 일찍 그리고 더 뚜렷하게 관철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프랑수아 기조가 〈프랑스는 유럽 문명의 중심, 발상지였다〉라고 기준을 제시했다. 프랑스 문명은 〈가장 완전하고 가장 진정하고 가장 문명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문명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배타적이지 않고, 유럽 공동의 요소들과 연결되어 있었다."(174-6)


"19세기 초엽에 '문명'은 영국과 미국에서도 일상적인 개념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보편적인 인기를 누렸다. '문화'는 문명과 더불어 프랑스어에서보다 더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독일어와 반대로 개인적인 교양과 관련된 측면이 중심을 차지했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프랑스처럼 '문명'이 그 세기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성장했다. 독일어와 비슷하게 영국에서는 부분적으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문명'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다." "1869년에 매튜 아놀드는 〈문화란 우리의 총체적인 완성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현재의 난국에서 벗어나는 데 크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문화를 추천〉하고자 한다. 〈완성을 정신과 영혼의 내면적인 상태로 간주하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문명과 다르다.〉 여기서도 구별은 일반적인 어법까지 퍼지지 않았지만, 그러한 구별이 근대 경제와 기술의 결과에 대해 가해진, 전 유럽에 퍼진 비판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것이다."(177-8)


9. 양차 세계대전의 시기 : 서구의 몰락


"양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내전이라는 것과 유럽 몰락의 시작을 알리고 그 사실을 확정지었다는 점은 '문화'와 '문명'의 개념사에도 반영된다." "'문화'와 '문명' 개념이 19세기에 담지해 왔던 유럽적 자의식은 늦어도 1918년 이래로는 깨어졌다. 진보의 위기는 문화와 문명의 위기로 이어졌다. 물질적 발전과 경제 그리고 기술의 긍정적 결과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 두 개념들은 이제 자의식보다는 한 시대의 자기회의를 구현하게 되었다. 독일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문화'와 '문명'의 대립을 형성해냄으로써 이 위기의 언어적 극복을 위해 가장 큰 준비 작업을 수행했다. 이러한 준비 작업은 두 개념 중 하나에서 부정적인 요소들을 거의 없애는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다른 언어들도 매우 더디기는 했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때 '문화'가─세계전쟁의 선전에도 불구하고─부담이 적은 개념으로 드러났는데, 왜냐하면 문화는 언제나 정신적인 영역에 더 많이 관계되었기 때문이다."(184-5)


"1918년에 나온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문화'-'문명'의 대립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이 저작만큼 세계대전 선전의 에피소드적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슈펭글러는 진보와 작별을 고하고, 문화 내지 문명의 유럽적 사명과도 작별을 고한다. 문화는 '일개의' 민족과는 결코 결부되어 있지 않다. 이 원칙은 특히 서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서구 문화에 해당된다. '독일 문화'라는 개념은 슈펭글러에게는 비개념어Unbegriff일 것이다. 문명은 문화의 필연적이고 미룰 수 없는 최종 단계다. 〈목표에 도달하여, 내적 가능성들, 즉 이념이 모두 풍족하게 피어나서 완성된 다음, 외부를 향해 실현되면, 문화는 갑자기 굳어버리고 죽어가며, 문화의 피가 응고되고 그 기력이 쇠하게 된다. 즉 문화는 문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와 '문명'의 대립은 계속해서 주제화되고, '삶'-'죽음', '외적인'-'내적인', '영혼이 담긴'-'영혼이 없는', '유기적인'-'기계적인' 등 무수한 개념쌍들 속에서 달리 설명된다."(188-9)


10. 전망 : 1945년 이래의 문화의 호황


"제2차 세계대전의 물질적 결과는 유럽이 제2급 세력으로 하강한 것이었다. 진보하는 것으로 믿어지던 인류 발전의 최첨단에 서 있다는 확신 그리고 자신의 문화 내지 문명을 전 세계에 전파시킬 수 있다는 희망은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다. 회의와 비판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모든 언어에서의 온갖 부정적인 측면들이 점점 더 문명 개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반면, 문화 개념은 정신적인 것과의 밀접한 연관 덕분에 근본적으로 '하나의 이상'이라는 특징을 유지하거나 이제야 비로소 획득했다. 또 언급해야 할 요소가 하나 있는데, 단지 겉보기에만 위와 같은 사실과 유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영어의 영향을 받아 '문화'가 인간 활동의 모든 형식들과 그 활동의 결과물들을 지칭하는 학술 개념으로 점점 더 강하게 관철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문명'은 점점 더, 고도로 발달된 특수한 한 문화에 대해서만, 자주 현대 서양 문화에 대해서만 사용된다."(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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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미래 - 모더니티총서 4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음, 한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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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나의 가설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혹은 인류학적으로 말해서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규정 속에서 '역사적 시간'이라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들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시간이 새로운 시대로, 즉 '근대(Neuzeit)'로 경험될수록, 미래의 도전은 점점 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현재와 지금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그 당시의 미래가 고찰대상이 된다.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경험을 소화해내는 가운데 미래의 비중이 커진다면, 그 세계는 틀림없이 새로운 경험을 모으고 점점 빨라지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에게 점점 짧은 시간간격을 강요하는, 기술적·산업적으로 고도로 형식화된 세계이다." "방법론적으로 이 글들은 역사적 시간경험들을 포착하는 중요개념들의 의미론에 초점을 맞춘다." "현대적 역사개념은 경험의 조건들이 점점 경험 자체를 벗어나는 '역사 일반'의 점증하는 복잡성에 대한 계몽주의적 성찰의 결과이다."(13-4)


1 근대사에서 과거와 미래의 관계


- 근대 초기의 지나간 미래


"비전을 지닌 모든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로마교회의 통치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세계의 미래와 종말은 교회사로 편입되었고, 새롭게 유포되는 예언들은 불가피하게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이제 세계종말이라는 미래의 가능성은 교회의 구성요소로서 시간에 포함되었다. 그러한 미래는 선형적 의미에서 시간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의 끝은 교회가 그것을 항상 지양하기 때문에 경험될 수 있고, 그러는 한 교회의 역사는 구원의 역사이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전통이 갖는 내적 전제를 파괴했다." "피비린내나는 한 세기의 싸움 끝에 얻어진 결론은 종교내전은 분명히 최후의 심판의 서곡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종교가 가진 잠재력들이 공개적 투쟁 속에서 소진되고 고갈되었을 때, 혹은 종교를 정치적으로 속박하거나 중립화하는 것이 성공했을 때 평화는 이루어졌다. 이로써 새로운 미래가 열렸다."(25-8)


"항상 나름대로의 계기를 가지고 지속되었던 (종말론적) 미래해석들이 마침내 해체되었다는 것이 17세기의 특징이다. 특히 세벤느봉기에서 그랬듯이 국가는 힘이 있을 때 미래해석을 반박하면서, 그것을 개인적이고 지역적이며 민속적이고 비밀스런 영역으로 추방했다. 이와 병행하여 인문주의자와 회의주의자들이 저술활동을 통해 신탁과 미신들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그 최초의 인물들이 몽테뉴와 베이컨이다." "16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신앙심 깊은 기독교도들의 기대나 모든 종류의 예언들은 당연히 정치적 행동으로 전이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치적 계산과 인문주의적 요소들은 미래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하나의 세계종말도, 몇몇 작은 종말들도 인간사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기대했던 종말의 시간 대신 예전과 다르면서 새로운 그 어떤 시간이 시작되었다."(30-1)


"이제 예언을 대신하여 (미래구상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합리적 예견, 즉 예측이었다." "미래가 유한한 가능성의 영역이 되었고, 이 영역은 개연성이 큰가 작은가에 따라 자체적으로 등급이 나누어졌다. 이것은 바로 보댕이 인간사의 주제로 만들었던 지평이다." "정치가들이 내릴 수 있는 도덕판단의 유일한 척도는 '대악이냐 소악이냐'라는 것이었다. 이런 뜻에서 리셜리외는 국가에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예견이라고 말했다. 그래야만 한번 빠져들면 벗어나기 어려운 수많은 해악들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현재보다 미래를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리셜리외의 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예측과 정치적 상황의 관계는 너무도 긴밀한 것이어서 예측을 한다는 것은 이미 상황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예측은 정치적 행동의 의식적 계기이다. 그것은 사건에 관계하면서 새로움을 창출한다. 그러므로 예측은 예측가능하면서도 불확실한 시간을 만들어낸다."(32-3)


"근대 초기의 정치적 시간의식과 기독교적 종말론의 차이는 보기보다 그렇게 크지 않다.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맞이하건 아니면 냉정하게 미래를 계산해보건 간에, 영원성의 관점에서 새로운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정치가들이 아무리 영리하고 교활해지며, 술수를 잘 쓰고, 현명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더라도, 그들은 역사 속에서 미래라는 새로운 미지의 영역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예언된 미래가 예측된 미래로 바뀐다고 해서 기독교적 기대의 지평이 원칙적으로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입헌군주국들이 기독교의 영향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이들은 중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철학이야말로 근대 초기를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면서 새로운 미래와 더불의 우리의 근대를 열었던 장본인이다." "합리적 미래예측과 구원을 확신하는 기대의 혼합은 18세기의 특성이었고, 이것은 진보의 철학으로 이어졌다."(37)


"예측에는 과거를 미래로 끌어들이는 진단이 내재해 있었다. 과거가 지니는 이미 보장된 미래성이 국가의 행동반경을 열어주는 동시에 제한했다. 과거 자체가 이미 미래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과거를 경험할 수 있고 또 그 역도 성립한다면, 국가의 정치적 존립은 정태적 운동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간구조와 연관된다." "반면, 진보가 바라보는 미래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그 하나는 가속성이다. 미래는 가속적으로 다가온다. 다른 하나는 미지성이다. 자기가속적 시간, 즉 우리의 역사가 경험영역을 축소시키고 그것의 항상성을 빼앗으면서 언제나 새로운 미지의 것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미지의 것이 갖는 복잡함 때문에 현재적인 것 역시 경험불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자기가속성을 지닌 시간은 현재로 하여금 현재로서 경험될 기회를 빼앗고 미래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경험할 수 없게 되어버린 현재는 미래를 통해 역사철학적으로 포착될 수밖에 없다."(38-9)


- 역사는 삶의 스승인가


"'역사는 삶의 스승'이라는 표현은 헬레니즘시대의 예를 본받아 키케로가 한 말이다. 키케로의 이 말은 웅변술과 연관된다. 즉 삶에 교훈을 주는 역사에 불멸성을 부여할 줄 아는 웅변가만이 그 역사의 소중한 경험들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외에 이 말은 은유적으로 역사의 임무를 규정하기도 한다 〈참으로 역사란 시대의 증인이요, 진리의 등불이요, 기억의 생명이자, 고대의 전달자이다. 웅변가의 목소리 이외에 그 무엇이 역사에 불멸을 가져다 주겠는가?〉 여기서 키케로가 역사학에 설정하는 과제는 주로 웅변가가 개입하는 현실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주려고 역사를 범례의 집합소로 이용한다." "이에 더해 선인들에게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모방하라는 마키아벨리의 요구는 역사에서 끊임없이 유용함을 얻어내라는 원칙을 강화시켰다. 그가 범례적 사고와 경험적 사고를 새롭게 통일시켰기 때문이다."(46-9)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역사 자체가 신의 전유물인 전지전능함과 절대적 정당성과 신성함을 지닌 주체가 된다.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의 노동〉이 인간을 지배하고 그들의 자연적 동일성을 파괴하는 추동력이 된다. 이때에도 독일어는 그에 대한 전조를 보여주었다. 당시에 '역사'라는 단어가 지녔던 의미와 새로움은 이 단어가 대표단수로 쓰였다는 데에 있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이 말은 일반적으로 복수로 쓰였다. 1748년에 나온 전형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야블론스키의 『예술과 학문에 관한 일반사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역사들은 미덕과 악덕의 거울이다.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어떤 일들이 행해졌고 벌어졌는지를 배울 수 있다. 역사들은 악행과 선행의 기념비이다.〉 여기서 보이는 전통적 정의에 주목해야 한다. 즉 이 정의는 부가되는 다수의 개별역사들'die Geschichte(n)'에 대해 말하고 있다."(57-8)


"일련의 개별사들을 포함하는 보편사가 세계사로 변화하는 때에 칸트는 인간행위의 무계획적 집합을 이성적 체계로 바꾸어줄 수단을 찾고 있었다. 세계사에서건 개별사에서건 간에, 역사라는 대표단수를 통해 비로소 그러한 생각들이 표현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역사'라는 대표단수가 등장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사건과 고통에 내재하는 힘, 비밀스러운 혹은 분명한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연결하거나 추진하는 힘, 사람들에게 의무감을 주고 또 그 이름 아래 행동할 수 있다고 믿도록 했던 힘이 역사에 주어졌다. 이러한 언어사적 사건 뒤에는 시대적 연관이 숨어 있다. 이 시대는 사회적·정치적으로 신분사회에 대항했던 단수화·단순화의 위대한 시대였다. 즉 이 시대에 자유들에서 자유가, 정의들에서 정의가, 진보들에서 진보가, 수많은 혁명들에서 혁명이 탄생했다. 서유럽의 사고에서 프랑스혁명이 일회적으로 가졌던 중심적 위치가 독일어권에서는 '역사'에 주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60-2)


"가속, 무엇보다도 최후의 심판이 도래하기까지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묵시론적 기대는 역시 18세기 중반 이래로 역사적 희망개념으로 변했다. 하지만 동경의 대상이기에 가속되어야 했던 미래에 대한 이러한 주관적 기대는 기술화와 프랑스혁명을 통해 뜻밖에도 견고한 현실성을 획득했다." "1789년 이후 시점상의 소실점들을 지닌 새로운 기대공간이 형성되었다. 이 소실점들은 동시에 지나간 혁명의 상이한 여러 단계들을 가리키기도 했다. 칸트는 계속 반복되는 혁명에 대한 모든 시도들에 대해 시대적으로 규정되지는 않지만 유한한 목적을 설정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적 경험의 이러한 현대적 체계를 예견했다. 실패라는 〈잦은 경험을 통한 가르침〉이 혁명을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그 이후 역사의 가르침은 역사철학적으로 정당화된 행동강령이라는 뒷문을 통해 정치무대에 등장한다. 마치니, 마르크스, 프루동이 혁명을 호소한 첫번째 스승들이다."(72-3)


2 사적 시간규정의 이론과 방법


- 개념사와 사회사


"개념사와 사회사의 관계는 일단 느슨해 보이고 적어도 어려워 보인다. 개념사가 우선 텍스트와 언어를 다루는 반면, 사회사는 텍스트 자체에는 담겨 있지 않은 실상과 운동을 끌어내기 위해 텍스트를 이용할 뿐이다. 이때 텍스트와 그것의 생성상황은 참고사항일 뿐이다." "이러한 일차적 비교는 피상적이다. 방법론적으로 고찰해보면 개념사와 사회사의 관계는 단순히 전자를 후자에 환원시키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두 분야의 대상영역을 살펴보면 쉽게 드러난다. 공통적 개념들이 없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행위단위는 존재할 수 없다. 반대로 개념들은 정치적·사회적 체계들에 근거하며, 이 체계들은 단순히 특정한 주도개념하의 언어공동체로 파악하기는 너무 복잡하다. 사회와 그것의 개념들은 긴장관계를 이루며, 개념과 관계된 역사의 학문분과들 역시 이 긴장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122)


"정치적 혹은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지위를 지키거나 관철시키려는 의미론적 투쟁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위기상황에 나타난다. 프랑스혁명 이후 이 투쟁은 첨예화되었고 구조적으로 변화했다. 즉 개념들은 사건들의 파악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에까지 개입했다. 점점 많은 미래개념들이 만들어졌고, 장래에나 획득될 지위들이 언어적으로 먼저 생겨나서 이 지위들을 획득하는 데에 일조했다. 따라서 개념들의 실현에 대한 요구는 커진 반면, 그 개념들의 경험내용은 더 적어졌다. 점점 경험내용과 기대공간이 일치하지 않게 된 것이다. '─주의'라는 수많은 말들도 그러한 개념들이었다. 집합개념이자 운동개념으로서 이 말들은 신분제에서 벗어난 대중들을 새롭게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표현들의 사용을 둘러싼 긴장은 구호에서 학술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말을 생각해보라."(128)


"여태까지 사회사적 문제에 대한 보조요소로서 개념규정의 문헌 비판 측면만을 강조했다면, 그것은 개념사의 영역을 축소시킨 것이다. 개념사는 오히려 사회사와 긴장관계를 이루며 독자적 영역을 형성한다. 역사서술적으로 보았을 때 이미 개념사의 특화가 사회사적 문제설정에 적지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우선 개념사는 정체에 관한 현재적·시대연관적 표현들이 조사되지 않은 채 과거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비판이고, 또 핵심은 변하지 않은 채 여러 상이한 사적 형상들로 나타나는 상수인 이념사에 대한 비판이다." "단어가 같다는 것이 실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충분한 지표가 될 수는 없다. 가령 '시민'이라는 표현의 개념변화를, 즉 거칠게 말해서 1700년경의 (도시) 시민에서 1800년경의 (국가) 시민을 거쳐 1900년경의 (비프롤레타리아로서의) 시민으로 가는 경로를 조사하지 않는다면, '시민'이라는 동일한 단어의 의미는 밝혀지지 않는다."(130-1)


"모든 개념들은 단어에 근거하지만, 모든 단어들이 사회적·정치적 개념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정치적 개념들은 항상 다의적이며, 구체적으로 보편성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국가'라는 단어를 개념으로 만드는 것은 이 단어로 유입되는 모든 것들, 즉 통치, 행정구역, 시민층, 입법, 사법, 행정, 조세, 군대 등이다. 다양한 모든 실상들이 그에 따른 용어 및 개념성과 더불어 '국가'라는 단어로 파악되어 공통적 개념이 된다. 따라서 개념은 많은 의미내용들의 농축물이다. 단어의미와 그 의미의 대상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역사적 현실과 경험들이 한 단어의 다의성으로 유입되고 그 단어에서만 의미를 얻어 파악되는 한, 개념에서 의미와 대상은 일치한다. 단어는 의미잠재성을 지니고, 개념은 충만한 의미들을 자체적으로 통일시킨다. 개념은 다양한 역사적 경험들과 이론적·실천적 실재연관들의 총합을 연관지으며, 이 연관 자체는 개념을 통해서만 주어지고, 현실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134-5)


"개념사적 방법은 단어와 실재 사이의 소박한 상호순환구조를 파괴한다. 개념을 언어화된 시대정신과 사건연관의 동일성으로 이해하면서, 그러한 개념에서만 역사를 파악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단견이다." "한 개념이 어의론적으로만 조사되어서는 안되며, 그러한 조사가 단어의미와 그것의 변화에 국한되어서도 안 된다. 개념사는 항상 정신사적 혹은 실재사적 연구결과들을 고려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의미론적 접근을 명칭론적 접근과 교대로 사용해야 한다." "이를테면 세속화 현상은 이 표현만 분석함으로써 연구될 수 없다. '세속화'라는 개념을 그것이 지칭하는 역사에 대한 요소이자 충분한 지표로서 생각하기 이전에, 단어사적으로 '현세화' '시간화'와 같은 병립 개념들이, 실재사적으로는 교회법과 정체의 영역이, 정신사적으로는 이 표현에서 결정화되는 이데올로기적 흐름이 고찰되어야 한다."(136-7)


- 서술, 사건, 구조


"'역사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서술에 관한 질문은 인식영역에서 역사운동의 다양한 시간적 외연들을 겨냥하는 것이다." "무한한 일들에서 분리된 사건들은 이미 동시대인들에게 사건 연관, 서사할 수 있는 의미단위로 경험될 수 있다." "이때 여러 소여들의 총계를 하나의 사건으로 묶어주는 공간은 우선 자연적 연대기이다. 따라서 하나의 사건을 이루는 모든 계기들을 배열하는 데에 있어서 연대기적 정확성은 사적 서사의 방법론적 요구 중의 하나이다. 이때 역사적 시간연쇄의 의미에서 〈세분화의 문턱〉(짐멜)이 존재하며, 사건은 그 아래에서 일어난다. 최소한의 '이전'과 '이후'가 있어야 의미단위가 구성되어 소여들에서 하나의 사건을 만들 수 있다. 한 사건의 연관, 그것의 '이전'과 '이후'는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사건의 일관성은 시간연쇄에 얽매여 있다. 행동하는 주체들이 하나의 사건연관을 수행하는 한, 그 사건연관의 상호주체성 자체가 시간연쇄의 망에 고정된다."(160-1)


"(시간성의 관점에서 보면) 구조는 더 견고한 지속과 더욱 큰 항상성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변화만을 나타낸다. 이때 지난 세기에는 '상태'라는 말로 파악되었던 것이 '중·장기성'이라는 범주로 시간적으로 더 큰 요구를 지니며 포착된다." "(사회적 삶이나 국가 간의 삶의 흐름을 중·장기적으로 규제하는 관습이나 법체계 같은) 구조들의 상호관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 구조들의 시간적 상수들이 한 사건의 연대기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경험공간을 넘어선다는 점은 모든 구조에 있어서 동일하다. 규정가능한 주체들이 사건을 일으키는 반면, 구조는 그 자체로 초개인적이고 상호주체적이다. 구조는 한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집단들로 환원되기도 힘들다. 그래서 방법론적으로 구조는 기능적 규정들을 유발한다. 이로써 구조는 시간 외적 단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종 일상의 경험에도 개입할 수 있는 과정적 성격을 얻는다."(163-4)


# 다양한 구조들 : 정체의 구성형식, 통치방식, 생산력과 생산관계, 지리적·공간적 조건, 관습이나 법체계 등


"따라서 사건과 구조들은 역사적 운동의 경험공간에서 상이한 시간적 외연을 지니며, 학문으로서의 역사만이 그것을 다룰 수 있다." "사건과 구조의 두 차원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시한다. 게다가 이 두 차원의 위치가치는 변화하며, 질문 방향에 따라 상호간의 배열관계가 달라진다. 통계적 시간연쇄는 구체적 개별사건들에 의지하며, 이 사건들은 고유한 시간을 갖지만 긴 기간이라는 망을 통해서만 구조적 발언력을 얻는다. 서사와 묘사는 서로 맞물리며, 이때 사건은 구조적 진술의 전제가 된다. 반면에 지속적 구조 혹은 장기적 구조는 가능한 사건들의 조건이다. 도대체 하나의 전투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삼박자로 정리될 수 있으려면 특정한 통치형식, 자연적 조건에 대한 기술적 지배, 적-동지 관계의 조망가능성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구조는 이 전투라는 사건을 조건지으면서 이 사건의 일부를 이루고, 이 사건에 개입한다."(165-6)


"사후에 탐구된 사건의 사실성은 예전에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었을 지나간 연관들의 총체성과 동일하지 않다. 사적으로 탐구되고 제시된 모든 사건은 사실적인 것의 허구에 의존하며, 현실 자체는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임의적으로 혹은 자의적으로 설정할 수는 없다." "역사가는 지나간 현실의 증언에 소극적으로 얽매여 있다. 역사가가 사료들을 통해 한 사건을 발굴해낼 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사실적인 것의 허구에 열중하는 문학적 이야기꾼에 가까워진다." "그것을 위해 역사가는 역사적 개념들을 사용한다. 이 개념들은 지난날의 풍부한 사건연관들을 포괄해야 하고, 또 오늘날 역사가 자신 혹은 독자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 과거를 파악하게 해주는 역사적 개념들이 없다면, 어떠한 사건도 서사할 수 없고, 어떠한 구조도 서술하지 못하며, 어떠한 과정도 묘사할 수 없다. 모든 개념성은 지나간 단수성 이상의 것이다."(169-70)


- 우연 (역사서술에서의 계기화의 불가능성)


"시간적으로 말하자면 우연은 순수한 현재범주이다. 기대지평의 갑작스러운 돌발현상으로 우연을 미래에 대한 기대지평에서 이끌어낼 수는 없으며, 지나간 근거들의 결과로서 그것을 경험할 수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역사서술의 목적이 시간적 외연 속에서의 연관을 밝히는 것이라면, 우연은 역사 외적 범주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역사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연은 당황케 하는 것, 새로운 것, 예기치 못했던 것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항상 이런 식으로 경험되는 것을 기술하기에 적합하다. 그래서 우연을 통해서만 연관이 설정되기도 하고, 연관이 약할 때에 그에 대한 보충물로서 우연이 필요하기도 하다. 역사서술에 이용될 때, 우연은 조건들이 수미일관하지 못하거나 그 결과들이 비길 데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가능한 한 우연을 회피하는 것이 현대의 사적 방법론인 반면, 18세기까지는 역사 해석에 우연이나 행운의 여신의 모습을 한 요행을 끌어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76-7)


"기독교도들과 인문주의자들은 행운의 여신이 '섭리의 딸'이자 '우연의 어머니'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보에티우스가 기독교적 역사해석에 끌어들인 '돌아가는 바퀴'의 은유는 모든 일들의 반복가능성을 나타냈다.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이 세계의 그 모든 부침현상에 있어서 원칙적으로 새로운 것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행운의 여신은 측정불가능한 것에 대한 상징으로서 신의 정당화로 이어졌다. 인간적 사건연관에 끼어들었던 요행이나 비탄은 바로 인간적 사건연관에 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 두 얼굴을 한 행운의 여신은 단지 가능성에 머무는 모든 역사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었고, 이 여신의 풍성한 선물탁자는 〈모든 세대〉를 위한 자리였다. 세속적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서술가능성에 대해 항상 동일한 전제를 보장했던 것이 바로 행운의 여신의 변화가능성이었다."(178-9)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과거와 미래의 역사적 사실은 강제적 필연성을 배제하는, 실현되었거나 실현될 가능성이다. 충분히 근거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들은 우발적이며, 인간의 자유의 영역에서 생겨난다. 그렇다면 지나간 미래와 다가올 미래는 항상 우연적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에게 우연의 연쇄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일회적 확실성을 갖는다. 그리고 그 연쇄는 최선의 세계라는 신의 계획 안에서 설정되고 지양된다. 신정론의 계명 아래에서는 우발적인─역사적인─사건들 역시 필연적인 것이 된다." "보다 높은 시점에서 보면 우연은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이후 우연은 더이상 계기화의 불가능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18세기에 발전하기 시작한 새로운 역사 이론에서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세속적인 것의 단수성이라는 신학원칙과 역사의 내적 통일성이라는 미적 범주가 근대의 역사철학에 편입되었고, '역사'라는 현대적 개념을 만들어냈다."(193)


"〈철학적 고찰의 의도는 우연적인 것의 제거에 있다. 우연성은 외적 필연성과 같은 것으로서, 자체적으로 외적 상황일 뿐인 원인으로 돌아가는 필연성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하나의 보편적 목적, 즉 세계의 궁극적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헤겔의 이 문장은 그가 지난 세기에 이루어졌던 우연의 합리화를 얼마나 넘어서고 있는지, 세계사의 신학적 통일성이 계몽주의보다 얼마나 더 수미일관하게 우연을 배제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믿음과 사고를 역사로 옮겨야 하니, 의지의 세계는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다.〉 이상주의의 역사개념 내부에서 모든 우연을 배제했던 것은 신학적 유산뿐만이 아니었다 역사서술에 내적 개연성을─그로써 더 높은 현실내용을─요구한 문학적·미학적 성찰 역시 무의미하게 보이는 우연을 추방했다." "선사적 역사관의 영역에서 행운의 여신이 했던 일을 현대에는 이데올로기가 떠맡게 되었다. 불변의 법칙성으로 치장할수록 이데올로기는 항상 새로운 조작을 필요로 한다."(194-5)


- 입장연관성과 시간성


"근대의 역사를 이전의 역사들과 구분하는 것은 계몽주의자들의 성찰을 통해 무대상적인 '즉자대자적 역사'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역사는 성찰개념이 된다. 역사적 흐름의 조건, 역사 속에서의 행위의 조건, 역사의 인식의 조건이 계몽주의 이후 서로 연관된다." "역사가는 예술가나 도덕적 판관으로서 생산적 역할을 했고, 이 역할의 기준은 효과적 전달이라는 요구였다." "청중은 전해듣는 사건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하기 때문에 역사서술가가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루키안은 생각했다. 그래서 보기, 나타내기, 반영하기의 영역에는 '생산적 조각술'이라는 비유가 남아 있기도 하다." "즉 윤색되지 않은 벌거벗은 진리, 명확하게 모사되는 진리를 궁극적 목표로 하는 예들은 18세기까지의 역사적 서술의 상황을 보여준다. 소박한 실재론을 포괄하는 은유들은 청각적 증인보다는 자신의 현전을 통해 역사의 진리를 보장하는 시각적 증인에 의존한다."(203-4)


"클라데니우스(1710~1759)는 역사서술에서 모든 직관 판단, 모든 경험의 상대성을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두 가지 서로 모순되는 보고가 각자 진리임을 주장할 수 있다." "그는 물론 상반된 증인들을 정확하게 조사하고 단서들을 확보함으로써 지나간 역사 자체를 인식하려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는 한 그 역시 적절한 실재론적 인식이상을 숭배한다. 그렇지만 클라데니우스는 지나간 사건연관들은 어떠한 서술을 통해서도 전체적으로 모사될 수 없다고 한다. 〈역사의 원래 모습〉은 서사를 하는 가운데 이미 변한다. 증인들만 입장연관성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의미로 충만한 역사〉를 쓰려는 훌륭한 역사가는 그 역사를 〈젊어진 영상〉으로 모사할 수밖에 없다. 그는 선택해야 하고 잘라내야 한다. 또 은유를 이용하고 보편적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이로써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체적으로 해석을 필요로 하는 다의미성을 만들어내고 만다."(207-8)


"플랑크는 시간적 거리가 커질수록 인식기회가 많아진다는 점을 누구보다 먼저 생각했다. 이로써 시각적 증인은 클라데니우스가 이미 상대화시켰던 그때까지의 특권적 위치에서 밀려났다. 이제 구전이나 문자적 전수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적 방법을 통해 과거는 재구성된다." "역사들을 계속 기록하면서 전승했던 역사의 테마는 더이상 지나간 현재가 아니다. 이제 과거 자체가 주제가 되며, 그것도 그 고유성을 오늘에야 드러내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루어진다. 지나간 현재들의 서사는 성찰을 통한 과거의 현재화로 바뀌고, 사학은 시간적 입장을 고려하면서 과거연구가 된다. 확실히 프랑스혁명이 가져온 급속한 경험변화가 이러한 시점의 시간화를 촉진시켰다. 연속성이 단절되면서 과거는 분리되는 듯했고, 사적 연구만이 점점 낯설어지는 과거를 해명하고 만회할 수 있었다." "오래된 과거일수록 더 잘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은 혁명 이전의 진보철학의 산물이다."(213-4)


"헤겔은 자신의 철학적 세계사를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의 주관성과 분리하면서, 〈모든 관점들의 총체성〉을 〈그 세계사의 정신적 원칙〉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무당파성에 대한 요구 역시 정당하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요구는 이해에 이끌리는 일면성에 대항하여 〈있었던 일을 주장하는〉 사실성에만 몰두한다. 이로써 헤겔은 역사연구의 전통적 기준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그는 당파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무당파성이 역사가를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것저것 떠들어대는 〈관객〉으로 만든다면, 무당파성 자체가 무목적적인 것이 된다고 그는 보았다. 〈판단이 없다면 역사는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서술은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한 역사서술은 본질적인 것을 위해 당파를 취하며, 그것에 연관된 것에 집착한다.〉 헤겔에게 본질적인 것에 대한 기준은 분명했다. 그것은 역사의 이성이었다."(222-3)


"역사가가 사건사에서 눈을 돌려 장기적 흐름, 구조, 과정을 관찰한다면, 내재적 사료해석은 더욱 극복되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어떠한 사료도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해줄 수 없다. 우리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 한다면, 사료는 그것을 방해할 것이다. 사료는 거부권을 갖는다. 완전히 틀리거나 신빙성이 없는 해석을 감행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사료는 금한다. 잘못된 자료, 잘못된 숫자들, 잘못된 계기설명, 잘못된 의식분석, 이 모든 것들이 사료비판을 통해 발견된다. 사료는 우리가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지만,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나의 역사를 역사로 만드는 것이 사료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료로 하여금 말하게 하려면 가능한 역사들의 이론이 필요하다. 이때 당파성과 객관성은 이론형성과 사료해석의 긴장지평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교차한다. 양자 중 어느 하나가 없다면, 연구에서 나머지 하나도 무가치한 것이다."(230-1)


3 역사적 경험변화의 의미론


- 비대칭적 대응개념의 사적·정치적 의미론


"역사적 행동단위들은 보편개념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능한 보편개념들을 단수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교회(die Kirche)'는 가톨릭 교도에게 자신들만의 교회이며, '당(die Partei)'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들만의 당이며, 프랑스혁명에 있어서의 '국가(La Nation)'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때 쓰이는 관사는 정치적·사회적 단수화에 기여한다. 이 경우에 구체적 집단은 언어적 보편개념을 자신에게만 관계시키고, 모든 비교가능성을 거부하면서, 보편성을 배타적으로 요구한다. 그러한 자기규정이 배제된 것들을 구별하면서 '대응개념'을 만들어낸다. 가톨릭 교도가 아니면 이교도나 이단자가 된다. 공산당을 탈당한다는 것은 정당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인류에게서 뛰쳐나가는 것과 같다〉(루친스키). 유럽민족들이 갈등기에 서로에게 사용했고, 세력관계가 변하면서 하나의 민족에서 다른 민족으로 옮겨져 쓰였던 부정적 용어들은 말할 것도 없다."(237)


"일상에서처럼 정치적 언어사용은 항상 이러한 비대칭적 대응개념이라는 기본구조에 근거한다." "불평등하게 대조되는 대응개념들의 특징은, 반대입장을 부정할 수 있는 기준들에 따라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응개념들의 정치적 효율성이 있지만, 바로 이 때문에 이 개념들을 학문적 인식과정에서 활용하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일단 생성되면, '헬레나인과 야만인', '기독교도와 이교도',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개념쌍은 특정한 경험방식과 기대가능성을 가리킨다.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라면 이 개념쌍들은 그때그때 다른 이름으로 등장할 것이다. 이 안티테제들은 고유하면서도 공통적인 구조들을 지니며, 이 구조들은 항상 정치적 언어로 사용된다. 비록 역사가 흐르면서 단어나 이름이 변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응개념들의 구조가 개념쌍을 형성하는 단어들에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단어들이 바뀌어도 비대칭적 논거구조는 지속될 수 있다."(240)


"계몽주의시대에 인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비판적 기능 혹은 더 나아가 대립입장을 부정하는 기능을 했다. 이 개념은 세 가지 방향, 즉 여러 교회와 종교들, 신분적 권리의 차별화, 군주의 개인통치에 저항했다.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 인간이나 인류라는 표현의 위치가치가 변했다. 문자 그대로 모든 인간을 포괄하기 위한 상위개념이었던 인류가 정치적으로 사용되면서 부정적 대응개념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비정치적이었던 인류의 의미를 통해 최대의 보편성을 요구할 수 있었고, 정치적 비판과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것에 필적할 것은 없었다. 모든 인간의 산술적 총계였던 인류가 단어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정치적 자기정당화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법적인 규정 없이 인간이나 인류개념을 정치적으로 사용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잉여가 생겼다. 이것은 그리스인, 야만인, 기독교도, 이교도와 같은 구체적 개념들에는 없었던 것이다."(276-7)


"〈군주는 인간이고, 노예는 자유롭네. 황금시대가 다가오네〉라는 시는 상이하게 대조되는 두 개념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자유가 노예제의 반대이듯, 군주는 암시적으로 인간에 대한 대립입장이 된다. 루소가 더 분명하게 왕과 인간을 대립시켰다. 〈왕이 왕좌를 포기하면, 그는 인간의 신분으로 격상하리라.〉" "인간을 짐승과 신 사이의 긴장영역에 위치시키는 것은 고대 이래의 위상학적 사고였다 .18세기에 인간과 왕이 대립되면서 군주들은 갈 곳을 몰라했다. 군주는 이전처럼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고,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 이하도 아니었다. 군주는 오히려 인간 일반의 도덕을 근거로 하여 배제하고 근절시켜야 할 적이 된다. 루이 16세는 이것을 경험해야 했다. 그에 대한 변호가 그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는 점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생쥐스트는 그것을 반박했다. 〈나는 왕이 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왕을 적으로 평가한다기보다 차라리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279-81)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미래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분명히 과거에 경험된 것과는 다른 식으로 제한된다. 제기된 기대는 따라잡을 수 있고, 체험된 경험은 결집된다. 경험이 미래에 반복되고 확증되기를 오늘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에 이미 기대를 경험할 수는 없다. 희망에 차서 혹은 불안에 떨며, 염려하거나 계획하며 생기는 미래에 대한 긴장은 물론 의식 속에서 성찰될 수 있다. 그러는 한 기대도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기대를 통해 의도했던 상황이나 행동결과 자체가 이미 경험내용인 것은 아니다. 경험의 특징은 지나간 일들을 세공하여 현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현실로 충만하다는 것이고, 성취되거나 실패한 가능성들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개념들은 단순한 대응개념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동일하지 않은 존재방식을 가리키며, 이 존재방식의 긴장에서 역사적 시간과 같은 것이 나올 수 있다."(396-7)


"특정한 사건 위에 근거하는 경험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할 수 있다. 그것들은 서로 겹치고 상호침투한다. 게다가 새로운 희망이나 환멸, 새로운 기대가 그 속에 유입된다. 따라서 일단 만들어진 것으로서 항상 동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험들은 변한다. 이것이 소급작용하는 기대가 없다면 결집될 수 없는 경험의 시간적 구조이다. 경험이 없다면 존재할 없는 기대의 시간구조는 이와는 다르다. 경험에 근거하는 기대가 적중했을 경우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대되지 않았던 것만이 놀라움을 준다. 이때 새로운 경험이 생긴다. 즉 기대지평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경험이 발생한다. 그때의 경험획득을 통해, 그때까지의 경험을 통해 주어졌던 미래의 한계가 사라진다. 기대가 시간적으로 추월되면서 이 두 차원은 그때그때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한다. 그때그때 상이하게 새로운 해결을 유발하고, 그러면서 역사적 시간을 추동시키는 것이 경험과 기대 사이의 긴장이다."(398)


"새로운 기대지평이 열리자 이러한 상황은 진보개념에 의해 마침내 변했다. 용어론적으로 정신적 '완성'이 세계의 '진보'를 통해 밀려나거나 해체되었다. 이전에는 내세에서만 도달가능한 것이었던 '완전성'이라는 목적규정은 그 이후 세속적 현존의 개선을 위해 쓰였고, 이로써 열린 미래라는 대담한 계획을 통해 종말론은 밀려날 수 있었다." "'완전' 이론이 이렇게 시간화되면서 프랑스에서는 '완전화'라는 표현이 나왔다. 루소는 이 표현에 인간의 '완전성'이라는 역사적 기본 규정을 덧붙였다. 그 이후 전체 역사가 지속적인 완전화의 과정으로 파악되었고, 모든 퇴보와 우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마침내 인간 스스로에 의해 계획되고 수행될 수 있는 과정이 되었다. 그 이후 목적은 세대를 거치며 계속 규정되었고, 계획이나 예측 속에서 선취된 작용들은 정치적 행동의 정당성의 명분이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대지평은 그 이후 시간과 함께 진보하는 변화계수를 얻는다."(402-3)


"그러나 기대지평만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질을 얻으면서 유토피아적 목적을 계속 설정했던 것은 아니다. 경험공간 역시 점점 변했다. 진보개념은 18세기말경에야 비로소 지나간 3세기의 충만한 새로운 경험들을 결집시키며 만들어졌다. 유일하고 보편적인 진보개념은 일상 속으로 점점 깊게 개입하는 수많은 개별적인 새로운 경험들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분과적 진보에 의지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기술의 등장, 신대륙과 상이한 발전단계에서 살고 있는 민족들의 발견, 산업과 자본을 통한 신분세계의 해체가 그 예이다. 이 모든 경험들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가리킨다." "새로운 점은 미래를 향한 기대가 이제 그때까지의 모든 경험들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식민지를 개척하고 학문과 기술이 전개되면서 새롭게 경험에 부가된 것들 역시 미래의 기대를 생산하기에는 불충분했다. 그 이후 경험공간은 더이상 기대지평을 통해 제한되지 않았고, 양자의 경계들은 분열되었다."(403-4)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간의 비대칭성이 돌이킬 수 없는 진보로 협소화되어 일면적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이 근대를 '새로운 시대'로 파악하려는 첫번째 시도였다. '진보'는 경험과 기대 사이의 시간적 차이를 하나의 개념으로 만든 특수하게 역사적인 첫번째 개념이다. 항상 문제는 더이상 그때까지의 경험들에서 도출될 수 없었던 경험들을 소화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그때까지 제기될 수 없었던 기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 도전은 근대 초기에 성장하여, 유토피아적 잉여잠재력을 공급했고, 프랑스혁명의 사건적 성격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그때까지 항상 세대의 연쇄에 연결되었던 정치적·사회적 경험세계가 파괴되었다." "18세기말 이후에는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기술적·산업적 진보가 덧붙여졌다. 학문적으로 창안하고 그것을 산업에 적용할 때 원칙이 된 것은 미리 계산할 수 없는 새로운 진보를 기대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진보는 시간적으로 전진하는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되었다."(4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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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사란 무엇인가 - 역사와 언어의 새로운 만남
나인호 지음 / 역사비평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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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역사의미론에 의하면, 언어가 과거의 실상, 다시 말해 역사적 실재를 구성한다. 이는 이중의 의미에서 그렇다. 먼저, 역사가 실제로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여러 행태의 언어 행위 혹은 언어적 매개체 없이는 어떤 사건도 완성될 수 없고 어떤 정치·사회적 시스템도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정치·사회·경제적 행위는 말하기와 답변, 계획의 발표, 논쟁, 밀약, 명령, 규약의 작성, 합의와 이견의 선언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처럼 모든 사건의 발생, 모든 제도의 형성과 변화는 이미 언어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역사가 일어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한다면, 언어 없이는 어떤 역사적 사실, 나아가 과거의 정치·사회적 현실 세계 전반의 전달과 재구성도 불가능하다. 유물이나 유적 등의 비언어적 전승물도 결국 언어에 의해 구성되고 유의미하게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과거의 사실은 언어가 없다면 존재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고, 그것에 대해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14)


# 개념사 : 언어와 정치·사회적 실재, 혹은 언어와 역사의 상호 영향을 전제한 채 이 둘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탐구하는 역사의미론(historical semantics)의 한 분야


1부 개념사란 무엇인가?


1장 개념이란 무엇인가?


"실재와 실재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균열과 불일치가 존재한다." "따라서 개념사가에게 개념이란 정의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말했다시피, 정의될 수 있는 것은 단지 비역사적인 개념뿐이다. 언어와 실재의 관계는 모호하다. 역사적으로 언어도 변화했고 현실도 변화했다. 언어의 변화는 현실의 변화에, 현실의 변화는 언어의 변화에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이 둘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양자의 변화는 시간적으로 일치하기도 하지만, 다르게 전개되기도 한다. 또 양자 간에는 변증법적 지양도 일어나지만, 해결되지 못할 대립 관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 개념을 해석한다는 것은, 언어의 역사와 실재의 역사 간의 이런 모호하고도 복잡한 긴장 관계를 탐구한다는 의미이다. 개념 속에는 이렇게 모호하고도 복잡한 긴장 관계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28-9)


"그런데 '실재'란 달리 보면 후대의 역사가가 만든 언어적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와 실재 사이의 긴장을 탐구한다는 것은, 곧 통시적으로 볼 때 과거 행위자가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표현해놓은 사료의 언어와, 그가 경험한 것 이상의 사실을 표현하려는 현재 역사가의 언어가 갖는 긴장 관계를 탐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언어와 실재 사이의 긴장이란 과거 행위자들이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 즉 '과거의 현재'와 오늘날의 우리가 재구성한 당시의 현실, 즉 '현재화된 과거' 사이의 긴장이기도 하다." "이 난제를 대하는 개념사의 연구 방식은 과거 행위자가 경험한 '현재'를 표현하고 있는 사료의 언어와 우리가 경험한 '과거'를 표현하고 있는 현재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밝히고, 전자를 후자로 번역하면서 양자가 어느 지점에서 수렴될 수 있는가를 밝히는 절차로 이루어져 있다."(29-31)


"이념사와 관념사에 의하면, 이념/관념은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실제 역사적 맥락, 즉 각 시대의 구체적 정치·사회적 맥락을 초월해 핵심적 의미의 내용이 변하지 않는 단단한 실재이다." "독일 이념사를 이론화한 미국의 러브조이는 관념사란 〈널리 확산된 채 많은 사람들의 생각(mind)의 뿌리〉가 된 관념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러브조이가 말하는 '관념'이란, 여러 사상들로부터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맥락과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불순물 및 역사적 영향을 제거한 뒤 남는 순결한 '단위관념'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위관념'은 마이네케의 '이념'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역사적 맥락을 초월해 핵심적 의미 내용이 변하지 않은 채 여러 시대의 여러 사상('관념복합체')들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상수常數이다. 또한 상수로서의 관념은 초경험적·초역사적·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생성, 발전, 완성이라는 고유의 장기지속의 역사를 갖는다."(35-6)


"개념사는 이와 달리 개념을 인간의 경험 세계, 즉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초월해 불변하는 단단한 실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내뿜고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언어적 구성물로 본다. 이념/관념사가들과 달리 개념사가들은, 어떤 이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어떤 어휘를 어떤 의도로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중시한다. 즉 특정한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일어나는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사용과 의미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코젤렉이 마이네케의 이념사를 비판하면서 말했듯이 〈개념사는 그 속에서 개념이 발전하고 특정한 화자에 의해 사용되는 특정한 상황의 특정한 언어 사용〉을 연구한다. 따라서 이념/관념사가들에게는 '오류'의 원인이 되는 개념(관념/이념)의 다양성과 모호함, 혼란스러움이 개념사가들에게는 '개념'의 진정한 특징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관념(이념)'은 진화할 수 있지만 '개념'은 진화할 수 없고, 단지 변화하는 것이다."(38-9)


# 개념사와 담론사의 차이점

1. 개념은 특정 담론의 구성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특정 담론의 의미론적 상징이 된다. ('대중'이나 '국민'이라는 개념이 특정 담론에 사용되었을 때, 주어진 맥락 외에도 다른 많은 의미를 연상시킬 수 있다.)

2. 개념은 전혀 다른 담론과 담론 사이를 이동한다. ('계몽'은 17세기에는 날씨 담론의 맥락에서 사용되다가 18세기에 철학과 역사 담론으로 편입되었다.)

3. 개념들은 경우에 따라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의미구조를 형성한 채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등장하는 담론들에게 반복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기독교도'와 '이교도', '서양'과 '동양' 같은 비대칭적 반대개념들이 그러하다.)

4. 개념사는 담론사와 달리 역사적·사회적 실재가 언어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


"개념은 단어 이상이다. 모든 개념은 단어가 될 수 있지만, 역으로 모든 단어가 개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단어는 어떻게 개념이 되는가? 실용적 차원에서 언급하자면 한 단어가 다의적多意的이면 다의적일수록, 한 단어가 모호한 뜻을 내포하면 할수록 단어는 개념에 가까워진다. 코젤렉은 말한다. 〈단어는 사용되면서 명확해질 수 있다. 반면 개념은 개념이 되기 위해 다의적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단어와 개념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그것의 의미들이 정의定意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해석의 대상인가에 달려 있다. 〈단어의 의미들은 정의에 의해 정확히 결정되지만, 개념들은 단지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명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순수한 기술적 용어나 전문용어들은 개념이 아니다. 반면 각 시대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공적 논쟁에 동원되는 용어들은 개념이 된다. 그 용어들은 항상 다의적이며, 더 나아가 그 안에 상호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는 논쟁적인 의미들을 쌓고 있기 마련이다."(51-2)


"개념사는 실재의 변화와 이와는 다르게 전개되는 개념의 변화를 관련지어 탐구함으로써 과거의 인식지평과 현재의 인식지평을 포괄하는 통일적인 역사 서술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루치앙 횔셔의 '산업화' 개념 연구를 보면, 1900년 이전의 유럽인들에게는 산업 발전이 필연적으로 다른 경제 부문─특히 농업 부문─의 희생을 가져올 것이라는 경제철학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불균형한 경제 발전은 반드시 사회적 위험을 초래하리라는 우려가 '산업주의'라는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1900년경 관세 논쟁의 와중에 일부 자유주의적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 그들에 의하면, 산업적 생산방식의 원리는 단지 산업(상공업)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농업 등의 다른 경제 분야, 나아가 문화 및 사회 전반에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산업화'는 '근대화'라는 목적론적인 역사철학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64-5)


2장 개념사의 다양성


# 개념사 연구 방법론

1. 코젤렉의 기본개념의 구조사 : 오랫동안 반복되어 사용됨으로써 체계화된 의미론적 구조를 파악한다. 개념의 의미구조는 경제나 정치 같은 물적 구조들과 더불어 언어 행위라는 사건의 전제조건을 만든다.

2. 라이하르트의 사회사적 의미론 : 코젤렉이 다루지 않은 일상용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개념의 사회적 영향력을 분석한다. 코젤렉이 말한 '언어의 사회사', 즉 개념의 공시적 분석을 특별히 강조한다.

3.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핵심어 연구 : 핵심어, 즉 기본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의 헤게모니 관철을 위한 문화적 도구라는 전제하에 일상 영역에서 관철되는 개념의 의미론을 탐구하면서 개념사의 정치를 지향한다.

4. 페레스의 '기본 개념이 아닌 개념'의 연구 : 기본개념과 불평등한 의미론적 대립구도 속에서 열등한 타자와 우월한 자신을 규정하는 비대칭적 반대개념들에 주의를 기울여, 그 안에 내재된 모순, 모호함, 공백 등을 추적한다.


"코젤렉에 의하면 한 개념의 여러 의미들은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시대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개념은 다양한 시간의 층을 지닌다. 다시 말해 개념의 다양한 의미들은 서로 다른 시간의 지속성을 갖는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한 개념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에 주목한다고 했다. 마치 아날 학파가 역사를 단기적 사건의 층위, 그 밑의 중기적 변화, 그리고 보다 깊은 곳의 장기지속이라는 세 범주로 구분했듯이, 코젤렉은 개념의 역사를 개별 언어 행위(사건), 중기지속, 그리고 장기지속이라는 시간적 구조 속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한 개념이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사용될 때 다양한 의미들이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당파성, 사회적 이해관계, 혹은 그 개념의 정치·사회적 기능상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그 속에 내포된 각 의미들의 다양한 시간적 지속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73-4)


"여기서 근대적 시간에 대한 코젤렉의 중요한 명제인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의 균열'을 언급해보자. 18세기가 경과되면서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서 경험의 공간과 기대지평 사이의 간극은 점점 빠른 속도로 멀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 시기를 경과하면서 현존하는 정치·사회적 실재에 대한 경험과 미래에 달성되어야 할 이상적 상태에 대한 기대 사이의 간극이 점점 멀어지고, 새로운 경험이 빠른 속도로 축적되는 것과 비례해서 기대지평은 빠른 속도로 점점 더 먼 미래를 향해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 변화는 바로 개념의 의미 변화를 통해 가시화되었다. 예를 들어 '공화주의' 개념은 18세기 이후 더 이상 현존하는 정치적 사실 관계를 묘사하는 개념이 아니라 미래에 달성되어야 할 완전한 공화국의 이상이라는 기대를 담은 개념이 되었다." "이처럼 개념 속에는 과거의 경험, 현재의 실재, 미래에 대한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79-80)


"라이하르트의 개념사는 코젤렉의 개념사 연구에 아직 남아 있는 〈이념사적 잔재〉를 떨쳐버리고자 했다. 라이하르트는 특히 코젤렉의 개념사 연구가 이론적 의도와 달리 그 실행에서 지식인들과 대사상가들의 텍스트에 치중하는 〈정상에서 정상으로의 이동〉이라는 종래의 이념사적 관행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라이하르트에 의하면, 개념사 연구가 의미를 지니려면 무엇보다 개념의 사회적 대표성, 다시 말해 개념에 담긴 의미론의 사회적 영향력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개념의 사회적 대표성은 보통 사람들이 사용했던 일상용어의 연구를 통해 비로소 정확히 측정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무엇보다 일상 생활 세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개념 속에 어떤 일상적 경험과 기대가 반영되었는가, 그리고 일상의 경험과 기대가 개념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말하기 전략이 조직화되고,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이 담기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83-4)


"윌리엄스는 역사의미론을 표방하면서도 단어의 의미 변화와 역사적 콘텍스트 사이의 관련성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런 취약점에도 불구하고─아니면 바로 그 취약점 때문에─윌리엄스의 개념사는 독특한 면모를 보인다. 코젤렉이나 케임브리지 학파의 연구가 개별 개념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개념과 개념 사이의 관계, 더 나아가 여러 개념들 사이에 어떤 구조적 특징이 있는가를 거의 밝혀주지 못하고 있는 데 비해, 윌리엄스는 그것들 사이의 상호 관계, 즉 특정 단어들의 〈내적 구조〉를 조명한다. 윌리엄스에 의하면 특정 단어들의 의미의 확장, 변형, 전위는 유관 단어들에서 보이는 비슷한 변화와 상호 영향 관계에 놓여 있다." "윌리엄스의 핵심어 연구는 개별 개념의 개념사를 넘어서 정치·사회적 어휘 체계의 통합적 재구축을 통해 전체 담론의 특징적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담론사적 개념사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100-2)


"페레스가 보기에 코젤렉의 기본개념의 구조사는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코젤렉의 근대성 개념에 담긴 보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기본개념이라는 개념에 내재된 보편주의이다. 주지하듯이 보편주의는, 정확히 말해 유럽(서양)보편주의는 다른 한편 유럽예외주의, 이와 관련하여 오리엔탈리즘과 같이 타자들을 불평등한 대립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정신적 습속과 함께 유럽(서양)중심주의의 핵심적 요소이다." "문제는 그의 근대(성) 개념이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의 관계에서 형성된 보편적 구조로 환원됨으로써 시간적·공간적 특수성이 무시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구체적인 역사주체들, 그리고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의 균열'에 대한 그들의 구체적인 경험이 도외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유럽(서양)보편주의는 비유럽인들과 유럽(서양)사회 내에 존재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경험을 주변화 혹은 배제시키고, 그들을 침묵하는 하위주체로 만들어버린다."(112-3)


3장 근대 비판으로서의 개념사─코젤렉의 성찰적 역사주의에 대하여


"중세사가 브룬너에게 개념사란 서구에서 발원한 자유주의에 대항하고 독일 민족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한 지적·정치적 도구였다. 그는 19세기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구축한 '헌정국가(Rechtsstaat)'를 역사적 필연성이 결여된 우연한 에피소드로 치부하면서, 이런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질서는 이제 나치 독일의 민족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질서에 의해 대체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신념을 견지했다. 이런 정치적 신념에 기초하여 그는 자유주의 역사 서술에 의해 왜곡된 역사학을 구원할 새로운 수단을 찾았는데, 그것이 개념사였다. 그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규범에 의해 각인된 현존하는 '기본개념'들이 과거의 실재를 왜곡시킨다고 비판하면서, 이 시대착오주의를 수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과거의 개념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복원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에게 개념사란 단순히 역사 연구의 한 방법이 아니라 역사가에게 부과된 인식론적 명령이었다."(137-8)


"1945년 이후 독일 개념사는 탈나치화 과정을 겪었다. 이제 독일 개념사는 서구적 근대성의 극복이라는 민족주의적 과제로부터 벗어나, 범 유럽적 관점에 입각해 근대 산업사회와 전통사회 사이에 놓인 인식의 심연을 이어주려는 사회사적 개념사로 변화했다." "콘체는 브룬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사에 나타난 언어 혼란에 대한 불쾌함〉을 없애기 위해 개념을 명료하게 정리하려 했다. 그리고 이런 의도는 과거의 실재를 객관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학술 개념의 구성이라는 목표로 구체화되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근대 학술 개념을 불신하고 과거 행위자의 언어를 복원시키려 했던 브룬너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콘체는 언어를 근대화라는 사회사적 진행 과정의 지표로서만 간주하는 전형적인 사회사가의 태도를 견지했다. 그에게 개념의 변화는, 이를테면 경기지수의 변화와 유사하게 사회구조의 실제적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다."(139-40)


"반면 코젤렉은 이런 실재론을 극복했다. 그는 언어와 실재 간의 차이, 개념 변화의 역사와 사회사적 진행 과정 간의 내용적·시간적 차이를 강조했다. 이런 전제 아래서 양자의 긴장 관계 및 복잡한 상호 얽힘의 관계를 섬세하게 읽어내려 했다. 이런 태도는 언어가 근대화라는 사회사적 진행 과정의 지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를 추동했던 요소라는 명제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에는 그의 독특한 역사인식론이 작용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실재 혹은 진실이란 사료의 언어와 현재 역사가의 언어, 즉 과거 행위자의 개념과 현재 역사가의 학술적 개념, 그리고 이에 내포된 과거의 인식지평과 현재의 인식지평 모두를 포괄하거나, 혹은 그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근대화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양자 모두의 관점에서 다차원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코젤렉은 브룬너의 텍스트 해석학적이고 정신사적인 방법과 콘체의 사회사적이고 실증주의적인 방법 모두를 넘어선 개념사 연구 모델을 정립했다."(140-1)


"홉스봄은 서구에서 두 가지 혁명, 즉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통사회가 해체되고 현대사회가 출현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서구 사회 근대화의 원동력을 정치혁명과 급진적 산업화에서 찾는 그의 '이중혁명' 이론은 서구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코젤렉은 이 대전환기를 특징짓는 또다른 혁명적 변화를 상정했다. 바로 '언어혁명'이다. 코젤렉은 대략 1750년에서 1850년까지의 기간을 이른바 '말안장의 시대(Sattelzeit)', 말년에는 '문턱의 시대(Schwellenzeit)'라고 은유적으로 명명하면서, 이 기간 동안 유럽 사회는 전통적 개념 세계에서 근대적 개념 세계로의 근본적인 변화, 즉 언어혁명을 겪었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세계관과 상징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이 개념의 혁명적 변화야말로 서구인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경험한 가장 근본적인 문화적 혁명으로서, 근대 서구 사회를 탄생시킨 또 하나의 원동력이었다."(142-3)


# 개념의 혁명적 변화 과정을 함축하는 네 가지 범주

1. 민주화 : 신분사회가 해체되면서 많은 개념들의 사용 범위가 엘리트층을 넘어 하부계층으로 확대되었다.

2. 시간화 : 많은 개념들의 의미 내용 속에 이전에는 없던 미래의 기대와 목표를 지닌 운동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3. 이데올로기화 : 많은 개념들이 내용적 구체성, 혹은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실재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잃고 점점 더 추상화되었다.

4. 정치화 : 더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참여하고, 동원되면서 해당 용어들(과 반대개념들)의 정치사회적 활용도와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역사들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배울 수 없지만, 동시에 역사학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역사주의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코젤렉은 탈이데올로기화된 새로운 역사철학, 즉 '역사' 개념에 담긴 함의들에 대한 새로운 비판적 성찰을 주장했다. 그리고 역사학은 이 '성찰적 역사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성찰적 역사주의'의 목표는 메타역사인 '역사'를 경험 세계 속에서 역사화하자는 것이다. 이 목표는 이중의 전략을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역사철학자들의─결국은 비역사적이고 형이상학적인─거대서사를 해체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박한 역사학자들에게 '역사적 인식'이란 결국 메타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후자의 맥락에서, 그는 역사적 문제제기 없이 사료 자체는 아무런 역사적 인식을 주지 못하며, 역사적 문제제기는 역사적 경험을 뛰어넘는 메타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계몽했다."(164)


2부 여섯 개의 개념으로 근대 읽기


1장 근대─근대 개념의 새로운 이해를 위한 단상


"비교문학가이자 문예사가인 굼브레히트는 '모던'이라는 용어를 통해 개념화될 수 있는 것들을 이 용어에 내포된 세 가지 의미 유형을 가지고 구분했다. 먼저 '현 교황'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의'라는 뜻과 반대되는 '현재의'라는 의미 속에서 '모던'은 그때그때 현재마다 바뀔 수 있는 제도를 대표하는 개념·대상·사람을 지칭한다. 둘째, '낡은'과 반대되는 '새로운'의 의미 속에서 '모던'은 한 시대로 체험된 현재를 지칭한다. 이때 '모던'은 '과거 시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영원한'과 반대되는 '일시적인'이라는 의미 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특정 시기의 현재가 '미래에 다가올 현재의 과거'로서 생각된다. 이때의 '모던'은 '미래를 준비하는 이행기'의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런 구분은 단지 '모던'이라는 말을 통해 개념화된 복잡한 의미의 층위들을 분석하기 위한 이념형적 구분에 불과하다."(172-3)


"서양의 근대 개념에는 무엇보다 서양인들의 새로운 역사적 시간 경험에서 비롯된 '근대'라는 시대 자체의 역동성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근대가 '새로운 시대'인 것은 근대가 성취한 문명적 내용 때문이 아니라, '시대 스스로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과거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포함한 동양의 근대 개념에서는 서양문명과의 조우로 인한 정치·사회·경제·문화적 변화의 내용이 갖는 새로움이라는 함의가 강조된 반면, 서양의 근대 개념에서는 무엇보다─사후적 관점에서 회고한 것이 아니라─당대인들이 경험한 '시대 자체의 완전한 새로움'이라는 함의가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시대 자체의 완전한 새로움'이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새로운 시대', 곧 '새로운 역사적 시기(period)'라는 의미를 넘어, 이전에는 없던 '신기원적 시대(epoch)'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180-1)


2장 문명과 문화─핵심어로 읽는 유럽인의 근대적 정체성


"고대 로마의 식자층에게 civilis란 '미개한', '야만적인', '군사적인', '형사처벌적인' 것의 반대개념을 의미했으나, cultus/cultura는 그런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 후자는 경작되지 않은 농토와 경작된 농토의 차이처럼 모든 인간의 정신적 개발(발전)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 차이만을 강조하기 위해 쓰였다. 특히 civilis라는 개념 속에는 농촌적 삶보다 도시적이고 정치적으로 조직된 삶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의식이 담겨 있다. 이런 점은 오늘날에도 '야만'의 반대개념으로서 '문화'보다 '문명'이 더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음을 고려해볼 때 현대적 '문명' 개념에도 일정 부분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civilis는 정치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처럼 문명은 정치적 뿌리를 갖고 있음에 비해, 문화는 그렇지 못했다. cultura는 정치적 함의를 내포하지 않은 채 개인으로서의 인간 활동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191-2)


"그러나 16~17세기를 지나면서 '문명' 개념의 뿌리가 된 civilitas가 civilite, civility 등으로 번역되면서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 내지 '도시 시민의 공동체 생활'이라는 전통적인 정치적 의미보다는 점점 더 '예절바름', '공손함' 같은 도시사회 구성원(시민)의 도덕적 덕목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또한 civilitas는 상태나 성취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강조하는 civilize, civiliser 등으로 번역되면서 유럽 내부나 유럽 외부의 '야만적' 타자들을 도덕적·정신적으로 교육시키자는 함의가 내포된 개념으로도 쓰였다. 이런 변화는 종래의 cultus/cultura 개념에 내포된 개인의 교육, 개인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활동의 의미와 일치한다." "이제 cultura는 부분적으로 (정치사회) 공동체 생활과 관련된 정치 규범적이고 실제적인 부분까지 포함된 인간의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광의의 의미로 확산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cultura 개념은 많은 점에서 새로이 변화하는 civilitas 개념과 중복되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192-3)


"또한 두 개념은 학술 담론에서 유럽중심주의적 세계상을 확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명과 문화야말로 유럽적인 것, 나아가 미국까지 포함한 서양적인 것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결정적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런 관념에 기초하여 단선적 진보의 등급에 따라 세계 각 민족들의 문명 및 문화의 정도를 측정하고 서열 짓는 분류 작업들이 행해졌다. 전통적인 '문명' 민족 대 '야만' 민족의 이항 대립적 표현 외에 새로운 개념들이 첨가되면서 더 복잡한 분류가 행해지곤 했다. '비문명적' 민족과 '야만' 민족이 구별되었으며, '야만인' 외에 '역사 없는 민족', 혹은 '반半문화' 민족, '완전문화' 민족 등의 술어가 만들어졌다. '문명' 민족과 '야만' 민족의 구별은 다른 뉘앙스의 '자연 민족' 대 '문화 민족'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야만 상태-미개 상태-문명 상태'라는 다단계적 분류가 학문적으로 시도되기도 했다. 이처럼 문화와 문명이야말로 세계 속 유럽의 지도적 위치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었다."(203-4)


3장 미국과 아메리카니즘─독일인이 정형화한 미국


"대개 타자는 부정적으로 규정되고 정형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주제인 ‘미국’ 개념은 다르다. '미국'은 한편으로 '독일'과 반대되는 부정적 이미지로 정형화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독일인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투영된 긍정적 이미지로 졍형화되기도 했다. 이런 내용적 모호함과 더불어, 여타의 비대칭적 반대개념들과 달리 '미국'은, 독일에서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면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표현하고 또 이를 심화시키는 전형적인 기본개념이었다. 그 가운데 미국은 '낯선 땅'이라는 공간 개념에서 '근대성의 상징', 따라서 독일의 미래를 선취하는 탈영토화된 시간 개념으로 바뀌었다. 개념의 변화는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표현되었다. 이처럼 '미국'은 단순히 타자 지칭을 위한 비대칭적 반대개념일 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의 변화를 이끈 역사적 선도 개념의 역할도 수행했다."(227-8)


4장 여자─비대칭적 반대개념의 병리학


"근대의 특징은 '남자'와 '여자'라는 일상어가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으로, 더 나아가 정치적 슬로건으로 바뀌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서로 다른 남자들과 여자들이, 혹은 너무나 이질적인 궁정사회의 남녀와 농촌사회의 남녀가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한 철학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속성, 즉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닌 존재로 추상화되고 불평등하게 구별된 것은, 근대 부르주아지 사회에 들어서였다. 이와 더불어 '남자'와 '여자' 개념의 사회적 위상도 변했다. 두 개념은 부르주아지 사회와 국민국가의 도덕적·정치적 질서를 지탱해주는 핵심적 규범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단계가 바로 '정상적인' 남자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정상적인' 여자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던, 따라서 이런 분업을 여자가 올바르게 수행하는 한 여자의 가치가 인정되었던 단계이다."(264)


"1890년대부터 1920년대에 이르는 세기 전환기를 특징짓는 중간층 남성들의 지적·문화적 운동이자 정치·사회적으로 성장하는 '여자'의 사회적 의미를 부정하던 '세기말 모더니즘'은 아버지 세대에 대한 분노와 부정, 자신의 현재적 남성 정체성에 대한 과도한 불안 속에서, 새로운 남성성을 갈구했다. '순수한' 남성성, '새로운 남자', 남자만의 유토피아가 구상되었고, 남자만의 우정과 사랑이─물론 동성애까지 포함하여─강조되면서, 마침내 '여자' 개념이 적대적 개념으로 변했다. 이제 더 이상 '여자'는 열등하지만 우월한 남자의 역할과 남성성의 정체성을 위해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여자' 개념은 이른바 '남자에 속하지 못하는 자', 즉 유대인 및 여타의 소수인종, 여성적 남성 동성연애자, 노숙자, 범죄자, 평화를 외치는 정치가, 위선적 남성 등과 함께 진정한 남자가 아닌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광범위한 외연을 지닌 기표로 확대되었다."(265-6)


"'여자'가 제거되어야 할 적을 지칭하는 기표로 전화된 것은 '남자'가 정치적인 개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남자' 개념의 정치화 현상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 시작되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확립되었다. '남자' 개념의 정치화 현상은 방황하는 남성성이 마침내 안식을 얻은 이른바 '남성동맹'이라는 하위문화가 사회에 뿌리내림으로써 시작되었다."(286) "제1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남성동맹의 전투 강령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여성적인 것'과 '여성'은 정치적으로 부르주아지 사회와 그 정치적 구성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평등의 원칙과 의사소통,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동일시되었다." "마침내 여성적 민주주의를 이기고 남성적 파시즘이 승리했다. 역사상 그 어느 곳에서도 파시즘 국가만큼 남자다움이 과시되고 남성성이 고양된 적은 없었다. 특히 남자의 몸이 핵심적인 정치적 상징으로 고양된 것은, 인종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나타난 독일 나치즘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290-2)


"그러나 더 큰 역설을 언급하자. 파시스트 체제가 패한 1945년 이후 유럽 각국에서는 탈파시스트화, 탈나치화가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자'는 민족의 순결성을 더럽힌 부역자를 지칭하는 부정적 기표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나치 독일군과 관계를 맺은 프랑스 여자들에 대한 강제 삭발과 폭행, 그리고 강간 행위를 꼽을 수 있다. 분노한 프랑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가한 폭력을 애국적 행위로 미화했다. 더 나아가 파시즘 자체를 비난하기 위해 또 한 번 '여자' 개념이 동원되었다. 나치는 여자의 본성인 색욕을 전유한 '동성애자'라는 전통적 의미에서 '동성애자'로 비난받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 속에서 '나치 팜므 파탈'이 창조되었다. 이처럼 여자들을 부역자로 규정짓고 파시즘을 여성화시키면서 남성사회는 부르주아적 전통을 회복했다. 이후 남자의 전통적 헤게모니는 본질적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여자는 정형화된 하위주체로 머무르고 있다."(297)


5장 역사─근대적 역사 개념의 새로움


"헤로도토스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미래 세대를 위해 서술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인간계의 사건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잊혀져가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이룬 놀라운 위업들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역사』를 썼다." "투키디데스는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반복되거나 유사할 것이 틀림없는 미래에 대한 해석을 위해 과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연구가들에게 본인의 역사가 유용하다고 판단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저서가 〈영원한 유산〉으로 저술되었음을 강조한다." "중국의 경우도 유사했다. 공자가 『춘추』에서 확립한 유교적 역사해석학은 도덕 정치적 이념에 입각해 있었다. 잘한 일은 칭찬하고 잘못된 일을 호되게 꾸짖는다는 이른바 포폄褒貶의 태도가 그것이다. 향후 중국의 역사 해석은 항상 도덕 정치적 정통성이라는 전제로 했으며, 역사는 도덕적 가르침과 정치적 교훈을 주는 교사의 역할을 했다."(309-11)


"대략 18세기 후반 이전의 서양에서는 '역사'라는 집합단수 대문자 역사는 무척 낯선 것이었다. 단지 그 경험 주체('누구의')나 서술 대상('무엇에 대한')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던 '역사들'이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특히 코젤렉에 의하면 독일어권에서는 대략 1780년 이후로, 집합단수 '역사' 개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전체적 역사', '역사 자체', 혹은 '역사 일반'이나 '즉자 대자적 역사'라는 새로운 표어들과, 종래에는 복수명사였으나 이제 단수명사로 쓰이기 시작한 '역사'라는 단어는, 모두 근대적 집합단수 역사 개념을 의미하는 표현들이었다. 동시에 이 새로운 집합단수 '역사' 속에 이전까지 Geschichte라는 말로 표현되던 실제로 일어난 일(사건, 사실)의 의미와 Historie라는 말로 표현되던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서술(이야기) 및 지식의 의미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럼 이렇게 정의된 집합단수 '역사'에는 어떤 함의들이 새롭게 내포되었는가?"(312-3)


"역사라는 하나의 개념 속에 실제로 일어난 일과 그에 대한 서술(이야기) 및 지식이 통합되었다는 데 주목해보자. 이는 곧 사건들이 진행되는 과정과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 혹은 객관적 실재와 그에 대한 주관적 성찰이 하나로 수렴되었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이 역사적 실재가 되려면 단순히 1914년에서 1918년의 기간 동안 일어났던 여러 전투 및 여타 사건들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이것들을 역사적 실재로 인식할 수 있는 역사 자체라는 주관적 인식 범주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는 동시에 역사 자체라는 인식 범주는 역사 자체라는 객관적 실재가 전제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을 일반화시켜보면, 역사란 그것이 인식되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역사를 인식하려면 역사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집합단수 역사 속에는 역사 자체라는 선험적 범주가 없다면 모든 개별 역사들은 경험될 수도 또한 인식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314)


"마지막으로, 이처럼 역사가 실재 개념이자 동시에 성찰 개념으로 수렴되면서 내용적으로도 분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제 역사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기 자신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관장하는 최종심급이 되었다. 〈세계의 심판으로서 세계사〉(실러)나 〈세계사가 행하는 일〉(헤겔) 같은 표현이 유행했다. 이전에는 역사 자체라는 것을 경험하거나 인식하기 위해 신神이나 자연 혹은 운명(티케Tyche, 운명의 신으로 역사 자체를 관장하는 주체로 인식됨) 같은 역사외적 존재들에게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되는 역사'라는 생각이 집합단수 역사로 표현되면서 이런 역사외적인 존재들이 역사로 대체된 것이다. 이제 역사는 과거 오로지 신만이 지녔던 전지전능함과 절대적 정당성, 신성함을 지닌 주체가 되었다. 이런 생각은 특히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며 일반화되었다."(315)


"근대적 역사 서술에서는 과거처럼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적 사례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배열할 것인가 하는 수사학적 문제가 아니라, 특정 사건과 특정한 상황의 역사적 맥락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시간과 그 연속을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개별 사건들과 특정 상황들은 시간의 연속 속에서 단순한 연대기적 배열을 뛰어넘어 그것들 사이의 내적 관계를 구조화시키는 설명 맥락, 즉 플롯에 따라 새롭게 질서지어졌다. 그리고 이 통일적인 서사구조를 통해 역사가 체계적으로 이해되며, 개별 사건들에 내재된 보편적인 역사적 의미와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과학적 역사의 발전은 역사 서술의 심미화와 상응한다. 개별 역사들에 내재된 전체적 맥락과 보편적 의미, 즉 집합단수 역사의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역설적으로 개연성을 높이는 서사적 통일성이 강조되면서, 과학을 지향하지만 동시에 허구적 거대서사가 되어버린 근대 역사학이 등장한 것이다."(323-4)


#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관점 : 집합단수 역사를 전제로 한 거대서사, 서구(유럽)중심주의, 과학의 권위로 포장된 역사 서술 및 지식의 권력화 현상,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집합단수 역사 자체에 대하여 비판


6장 자본주의 정신─신조어로 표현된 세기말의 근대 비판


"1902년 독일의 국민경제학자 좀바르트가 『근대 자본주의』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때나, 그 2년 뒤 좀바르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 개념을 말했을 때, 이 개념은 단순히 사회 근대화를 위한 발전 이데올로기의 표어로서 사용되거나, 혹은 자본주의적 근대문명을 찬양하고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사용한 '자본주의 정신' 개념 속에는 오히려 서구의 혁명적인 근대화 과정에 대한 불쾌함, 혹은 비관주의적 근대 진단과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점철된 당대인들의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응축되어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본주의 정신' 개념을 사용하면서 당대인들의 근대문명 비판 담론을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화하려 했다. 이처럼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원래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의 표현이자 동시에 문명 비판의 도구로서 기능했다."(329-330)


"베버에 따르면, 서구의 개신교 시민계급은 오늘날 〈근대적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근대적 주체이다. 이제 모든 인류의 생활 방식을 규정하는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우주〉를 탄생시킨 세계사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근대적 주체는 '세속적 금욕주의'에 기반을 둔 자아를 잃어버렸다. 〈승리하는 자본주의〉는 자신의 〈기계적 토대〉 위에서 〈고도의 정신적 문화 가치〉를 집어던졌다. 이제 근대적 주체는 자신이 만들어낸 제도화된 합리성, 즉 관료주의적 메커니즘의 〈단단한 강철 구조물(stahlhartes Gehause)〉 속에 감금되고 말았다. 이렇게 자아를 상실한 근대적 주체의 문화적 태도는 배금주의 및 물질주의, 유대인의 〈천민자본주의적〉 에토스, 경쟁의 열정에 입각한 스포츠적 성격의 영리 추구, 공리주의 같은 무목적적이고 비윤리적인 공허한 '자본주의 정신'에 의해 특징지어진다."(346-7)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비관주의적인 근대문명 비판의 상징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매우 강한 정치적 함의도 담고 있었다. 이 개념은 비주류로 밀린 민족주의적이고 종파주의적인 독일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사회 비판 담론과 보편적인 근대문명 비판 담론을 통합시키는 매개 고리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자아를 상실한 독일 개신교 부르주아지에게 한편으로는 민족의 지도계급으로서의 사명, 즉 '금욕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인격체(Personlichkeit)로 발전해 대중민주주의 시대의 새로운 문화적 에토스를 지도하는 독일 민족의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각성시키려는 베버의 염원이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역설적이게도 영미 세계 민족주의의 보편사적이고 시민종교적인 자기정당화에 기여했다. 특히 미국의 퓨리타니즘 신화와 냉전 시대 아메리카니즘의 자기정당화는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에 힘입은 바가 크다."(347-8)


"좀바르트는 베버와 마찬가지로 근대적 문명을 창조한 주체가 자신의 결과물에서 소외되었음을 강조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고도자본주의 시대〉는 〈관료주의적 거대 경영〉 속에서 기계화 되어버렸다. 그런데 베버와 달리 좀바르트는 그 근본 원인으로서 근대적 주체의 자아 상실 대신 자아 분열과 변질을 강조한다. 그는 근대적 주체를 특징짓는 두 가지 '자본주의 정신' 중 〈사업 정신〉은 소수의 〈영웅적〉인 것과 제도의 틀 안에서 기계화된 〈대중적〉인 것으로 분열되었고, 〈시민 정신〉은 자연과학과 근대기술을 탄생시킨 〈게르만-로마적 정신〉과 상인적 〈유대 정신〉으로 분열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분열의 결과는 전반적인 〈영웅 정신〉의 소멸과 〈시민 정신〉의 탈종교화와 탈윤리화, 마침내 '자본주의 정신' 일반의 〈상인 정신〉으로의 변질이다. 이것이 창조적이었던 〈초기 자본주의〉에서 물화된 〈고도 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 과정이다."(351-2)


"좀바르트는 〈상인 정신〉을 가장 대표적으로 구현한 주체를 때로는 유대인에게서, 때로는 영국이 대표하는 '서구 문명'에서 찾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영미 세계의 퓨리타니즘 정신과 유대 정신을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수세에 몰린 자유주의자들과 문화비관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교양시민들의 잡다한 신경질적 근대 비판 담론들을 통합시켜주는 매개 고리 역할을 했다. 정치적으로 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반유대주의와 반영反英 감정 및 반국제주의를 고취시키면서 독일 민족을 정치사회적으로 통합하려 한 급진민족주의의 표어로 기능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당시 독일 부르주아지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험, 그로 인한 노이로제적 위기의식, 그리고 역사의 종말론적 반전에 대한 갈망을 잘 표현해주는 지표라는 점에서 핵심적 의의를 지닌다."(3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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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반양장) - 현실적 급진주의자를 위한 실천적 입문서
사울 D. 알린스키 지음, 박순성.박지우 옮김 / 아르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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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문


"조직가로서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의 세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부터 시작해 나간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모습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가려는 우리의 바람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수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체제 내부에서 일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체제 내부에서 일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말에 따르자면, 새롭게 한 발을 내딛는 것이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모든 혁명적 변화는 반드시 우리 대중들이 변화를 수동적으로나마 수용하고 거부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난 다음에야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와 연합하도록 그들을 격려하지 않으면, 그들은 보수화될 것이다."(28-9)


"우리의 젊은이들은 의미 있는 행동에 반드시 필요한 예비절차에 대해 조바심을 낸다. 효과적인 조직화는 즉각적이고 극적인 변화에 대한 욕구, 또는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처럼 혁명이 아닌 계시에 대한 요구 때문에 좌절된다." "급진적 실용주의의 이름으로,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현 체제 안에서 그 모든 억압에도 여전히 거리낌 없이 정부를 고발하고 정책들을 공격하고 반대파의 정치 기지를 만들기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물론 정부가 괴롭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싸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자유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정치적 광기를 제외하고는 다른 출발할 곳이 없으므로, 바로 현재의 체제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혁명적 변화를 원하는 우리 중 일부는 혁명이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는 너무도 중요하다. 정치적 혁명이 대중적 개혁이라는 지지 기반 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정치에서는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이다."(29-31)


1장 지향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주로 움직이는 권력정치의 현장이며, 그곳에서 도덕은 편의주의적인 행동과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사학적인 근거일 뿐이다." "법규들은 '공공선'이라는 고결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지지만, 그 이후 실제적으로는 공공의 탐욕이라는 동기 하에 집행된다. 이 세상에서는 불합리성이 인간에게 마치 그림자처럼 들러붙어서 옳은 일들이 그릇된 이유로 행해진다. 일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정당화를 위하여 옳은 이유들을 긁어모은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불가피하게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는 영원히 행복한 결말도, 영원히 슬픈 결말도 없다." "지평선이란 영원히 저 멀리에 있을 뿐이며, 우리를 앞쪽으로 손짓해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이는 삶 자체를 좇는 것과도 같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고, 당신의 출발점이다."(52-4)


"일단 있는 그대로의 세상으로 들어서고 나면, 잘못된 생각들을 하나씩 버릴 수 있다. 우리가 버려야 하는 가장 주요한 환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사물의 양면성을 분리시켜 파악하는 인습적 사고방식이다. 지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이 기능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행동할 때의 우리는 모든 가치와 문제들을 분할하고 고립시킨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을 빛과 어둠, 선과 악, 생과 사와 같이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반대개념의 짝으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어가기 시작한다. 행복과 불행은 분리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삶이라는 거대한 노아의 방주 안에서 짝지어져 있다." "이러한 모순 또는 반대개념과 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긴장에서부터 창조가 시작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긍정에는 부정이 있으며, 반드시 뒤따라오는 부정적인 것 없이는 어떠한 긍정적인 것도 없고, 부정적 측면을 갖지 않은 어떠한 정치적 낙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54-5)


2장 수단과 목적


"행동하는 사람은 수단과 목적의 문제를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는 목적에 대해서는 그것이 성취될 수 있는지 또한 성취를 위해 치러야만 하는 대가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묻고, 수단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잘 작동할지에 대해서만 묻는다." "현실적인 혁명가는 〈양심은 관찰자들의 덕목일 뿐 행동하는 사람의 덕목은 아니다〉라는 괴테의 말을 이해할 것이다. 실질적인 행동 과정에서는 개인적인 양심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이득이 되는 결정이라는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상황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인류의 이득을 위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행동은 집단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 한 사람의 개인적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 양심을 위하여 집단의 이득을 희생시키는 사람은 '개인적 구원'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을 위하여 '부패'될 만큼 그들을 염려하지 않는다."(66-7)


"링컨은 자신의 첫 번째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저는 지금 합중국에서 존재하고 있는 노예제도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제게 그렇게 할 적법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라고 선언하였던 연설들 중 하나를 저는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를 후보로 지명하고 선출한 사람들은 제가 이를 비롯하여 많은 유사한 선언을 했으며 결코 그것들을 번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그런 결정을 한 것입니다.〉 입장을 전환한 링컨의 윤리적 태도에 대해 아마도 비판을 가할 사람들은, 원칙이나 입장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해 사람이 한결같고 헌신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는 세상이라는 이상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 실제 인간사의 정치에서, 일관성은 미덕이 아니다. 옥스퍼드 대사전에 따르면, 일관성이 있다는 것은 〈정지하고 있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74)


3장 단어들에 대해


"왜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지만 평화적인 그리고 그토록 부정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이 정당하게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단어들을 대체할 수 없는 몇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먼저, '힘(권력)'이라는 한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에너지를 활용함'과 같은 단어의 조합을 사용하게 되면 그 의미가 희석된다. 순화된 동의어들을 사용함에 따라 본래의 단어들에 결합되어 있는 비통함과 고뇌, 애증, 고통, 승리감이 사라진다. 그 결과로 남는 것은 무균무취의 활기 없는 인생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실제 인간사의 정치에서 우리는 노예들과 황제들을 다루고 있지, 신전의 처녀 사제들을 다루지 않는다." "힘(권력)이 아닌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모든 것의 의미를 바꾸는 것이다. 일찍이 마크 트웨인이 말한 것처럼, 〈적절한 단어와 거의 적절한 단어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와도 같다.〉"(95)


"타협은 허약함, 우유부단함, 고매한 목적에 대한 배신, 도덕적 원칙의 포기와 같은 어두움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단어이다. 순결이 하나의 덕목이었던 과거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여자가 (순결을 잃은 것을) 〈타협했다〉고 표현했다. 이 단어는 보통 윤리적으로 불미스럽고 추잡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조직가에게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이다.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인 활동 속에 존재한다. 타협은 거래를 하는 것이다. 거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숨 고르기, 보통 승리를 의미하며, 타협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다. 당신이 무에서 출발한다면, 100%를 요구하고 그 뒤에 30% 선에서 타협을 하라. 당신은 30%를 번 것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는 끊이지 않는 갈등 그 자체이며, 갈등은 간헐적으로 타협에 의해서만 멈추게 된다. 일단 타협이 이루어지면, 바로 그 타협은 갈등, 타협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타협의 연속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107)


4장 조직가의 교육


"조직가들을 교육시키려고 노력했던 경험은 어디에서도 내가 바라던 만큼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나와 나의 동료들에게는 상당한 교육이 되었다. 우리는 항상 자기반성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경험과 소통이라는 영역은 조직가에게 근본적인 것이다. 조직가는 자신의 청중이 경험한 범위 내에서만 소통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소통도 불가능하다. 조직가는 패턴, 보편성, 의미를 끊임없이 찾아감으로써 언제나 하나의 체계화된 경험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조직가는 자신의 상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사건들 속으로 부단히 들어가려고 하며, 그들과 공명하면서 그들이 사건들을 자기 자신의 정신적 소화기관 속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더 많은 경험을 축적하려고 한다. 조직가가 그들이 경험을 아는 것은 소통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조직가가 비정상적일 만큼 거대한 체계화된 경험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는 것은 분명하다."(122)


"(인생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불확실성이라고 생각하는) 조직가는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쉬지 않고 창조한다. 그는 모든 새로운 생각들이 갈등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또한 인간이 새로운 생각을 가졌던 때에는 언제나 바로 그 생각이 과거와 현재에 존중되고 있던 생각들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필연적으로 갈등이 몰아쳤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기심, 불경, 상상력, 유머 감각, 자유롭고 편견 없는 마음, 가치의 상대성과 인생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태도, 이 모든 것은 서로 융합되어, 창조를 자신의 최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종류의 인물을 만든다. 그는 창조를 인생의 의미에서 진정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지도자와 조직가의 기본적인 차이이다. 지도자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권력을 쌓기 위해 그리고 사회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권력을 잡고 휘두르기 위해 행동한다. 그는 스스로 권력을 원한다. 조직가의 목표는 다른 사람이 사용할 권력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34)


5장 의사소통


"대중조직에서 당신은 주민들의 실제 경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예를 들자면 나는 이런 질문을 받아 왔다. 왜 당신은 가톨릭 신부나 기독교 목사나 유대교 목사에게 유대-기독교 유리나 십계나 산상수훈에 의존해서 말을 걸지 않습니까. 나는 결코 그런 말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나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자기이익, 그들 교회의 복지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의 물질적 재산에 기초해서 접근한다. 내가 그들에게 도덕주의적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이는 그들의 경험 바깥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 말을 듣기만 하고, 기껏해야 매우 호의적으로 나에게 내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말할 것이다." "협상에서처럼 설득을 위한 소통은 다른 사람의 개인 경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는 상대방의 중요 가치나 목표를 알아내고 당신의 행동 방침을 바로 그 표적에 맞추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쟁점의 합리적인 사실이나 윤리에만 단순히 기초해서는 어느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146-7)


"효과적 소통에서 또 다른 실천원칙은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가 하느님에게 하느님이 해야만 하는 것을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조직가라도 공동체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래도 많은 경우 조직가는 공동체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꽤 괜찮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공동체가 그러한 행동을 하도록 제안하고 유도하고 설득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공동체에게 말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함축적인 질문들을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어느 누구도 체면을 잃지 않도록 하면서, 또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면서 잘 다듬어진 질문들이 계속된다. 제안된 모든 행동방침들의 모든 약점들이 질문을 통해 검토된다.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행동방침 Z가 제안되고, 다시 질문을 거친 다음에 그것의 장점들이 드러나면서 그것으로 결정이 난다."(150-1)


6장 시작의 순간


"조직가가 해야 할 일은 기성질서가 조직가 자신을 '위험한 적'이라고 공개적으로 공격하기에 이르도록 기성질서를 교묘하게 부추기고 괴롭히는 것이다. '적'이라는 말은 조직가를 인민의 편에 놓고 무산자들과 동일시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 말은 조직가에게 특별한 자질을, 곧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기성질서에 대항하여 그 자신의 힘을 강하게 세워줄 수 있는 수단을 그에게 주게 되는 특별한 자질을 제공할 정도는 아니다. 여기에서 또다시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권력과 공포가 믿음의 형성에서 핵심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부족 부분은 '위험한'이라는 낙인을 기성질서가 사용함으로써 해소된다. 바로 그 한마디 말 속에 기성질서는 조직가에 대한 두려움, 조직가가 기성질서의 절대력에 위협적인 존재라는 두려움을 담아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비로소 조직가는 자신의 '출생증명서'를 가지게 되었고,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162)


"종종 조직화를 시작할 때 부딪히는 큰 어려움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조직가들은 민주적인 사회를 위한 결단을 내릴 역량이 일반 대중에게 있는가 하는 회의를 마음 속으로 가지게 된다." "조직가나 선교사, 교육자, 또는 다른 어떤 외부인이라도 그들에게 분명하지 않은 문제는 간단히 말해서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열악한 상황을 바꿀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사람들이 조직화되어 변화를 일으킬 힘을 가지게 되면, 그때 그들은 변화의 문제에 부딪히면서 어떻게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소통과 교육을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은 주민들이 알려고 하는 이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힘을 위한 도구나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이유를 제공하고 지식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만든다."(167-9)


7장 전술


"갈등 전술 속에는 조직가가 언제나 보편적인 것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일정한 규칙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상대방을 골라내어 표적으로 만든 뒤에 '고정화' 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잡하고 상호 연관되어 있는 도시 사회에서 어떤 특정한 나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을 골라낸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그리고 어느 정도는 정당한 책임 전가가 일어난다. 도시화, 복잡한 대도시 행정체계, 상호 결합된 대규모 기업들의 복잡성, 도시·군 및 대도시의 행정당국들 사이에 서로 얽혀 있는 행정업무 등이 특징으로 부각되고 있는 요즈음, 적을 정확하게 식별해 내는 어려운 문제는 점점 더 자주 발생할 우려가 있다. 만일 집중해서 공격할 표적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는 분명 전술상 좋지 못하다." "표적은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만 한다. 책임이 여러 영역으로 분산되는 것을 조직이 내버려 둔다면, 공격은 불가능해진다."(199-200)


"유산자들에 대항한 전쟁에서 기본이 되는 전술은 정치적 대중유술(柔術)이다. 무산자들은 유산자들에게 경직된 방식으로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잘 계획된 능숙한 방법으로 움직여서 유산자들의 힘의 우위가 그들의 파멸의 원인이 되도록 한다. 예를 들자면, 유산자들은 공공연하게 책임감과 도덕심, 법, 정의의 관리인인 체하기 때문에, 그들은 도덕원리와 규칙을 담은 자신들의 고유한 교본에 따라 살아가라고 하는 압박에 항상 노출될 수 있다. 어떤 조직도, 심지어 조직화된 종교조차도 자신들의 고유한 교본에 쓰여 있는 자구에 맞추어 살 수 없다. 당신은 그들의 규칙과 규범 '교본'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 바로 이것을 위대한 혁명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223)


"일단 싸움이 시작되어 어떤 전술적 행동이 채택되면, 갈등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의 경험 속에는 이러한 점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너무 오래 끄는 갈등은 지겨운 일이 된다는 사실은 아무리 자주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 동일한 보편적 원리가 전술 행동이나 특정한 다른 행동들 모두에 적용된다. 인간은 단지 제한된 기간 동안만 어떤 구체적 주제에 대해 관심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러한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집중, 감정적인 열중, 심지어 신체적 에너지, 흥분되고 도전적이고 매력적인 특별한 경험은 단지 그런 만큼만 지속될 수 있다. 이는 성욕에서 갈등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위의 전 영역에서 진실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지루하고 반복적인 것이 되고, 감정적으로도 단조로운 일이 되며, 심지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나쁜 따분한 것이 된다. 전술가가 갈등에 개입하는 순간부터 시간이 그의 적이다."(231-2)


8장 위임장 전술의 기원


"우연, 당신의 행동에 대응한 예상할 수 없는 반응, 불가피성, 즉흥성 등이 전술의 방향과 설정을 결정한다. 분석적 논리는 당신이 서 있는 위치, 당신이 다음에 할 수 있는 일, 당신이 예상할 수 있는 위협과 희망을 평가하는 데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분석이 당신을 전술의 맹목적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해주고 또한 당신을 전술에 뒤따르는 우연한 사건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하지만 전술 그 자체는 행동과 대응행동의 자유로운 흐름으로부터 나타나며 조직가에게 표면상의 혼란을 쉽게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조직가는 상황 적응에 유연하고, 진부하지 않아야 한다. 비록 어떤 기회나 붙잡아야 할 수단이 자신이 특정한 시기에 염두에 두고 있던 논점들이 아닌 다른 논점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러한 기회나 수단에 예민하게 반응해야만 한다. 조직가는 자신이 어떤 계획이나 일정표 또는 구체적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된다."(240-1)


9장 가야 할 길


"행동을 위한 조직화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10년 동안 미국의 백인 중산계급에 집중될 것이다. 우리 국민의 4분의 3이 경제학적 관점에서나 그들의 자기정체성 관점에서 중산계급이라고 할 때에, 그들의 행동이나 무반응이 변화의 반응을 결정할 것은 분명하다. 중산계급의 대부분을 이루는 '침묵하는 다수'는 행동을 하도록 자극을 받아야만 한다. 침묵과 굴복이 하나인 것처럼, 행동과 발언도 하나이다." "모든 저소득층이 조직화되더라도 그리고 어떤 천재적 조직화를 통해 그들이 모두 하나의 연합체로 단결된다고 하더라도, 그 연합체는 중대하고 기본적이고 필요한 변화를 가져올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지 못할 것이다. 그 연합체는 모든 소수자 조직, 소수민족, 노동조합, 정당 또는 작은 조직 등 조직이라면 종류에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은 협력자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권력의 실제적 활용이라는 차원에서 다른 어떤 대안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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