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4 - 보수, 보수주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4
루돌프 피어하우스 지음, 이진일 옮김 / 푸른역사 / 2019년 5월
평점 :
품절


1. 서론


2. 문제의 배경 : '전통주의' ─ '보수주의'


"보수주의의 특징은 개별적 변화에 대한 저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범위를 포괄하는 시대의 변화 전체에 대한 저항을 지향했다. 보수주의는 이미 정치적 성격들을 갖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통주의라는 보다 보편적인 형태 속에 가려져 있었으며, 변화에 대한 거부가 적극적인 창출Gestaltung에 대한 의지보다 강했다."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사회적 변화에 직면한 상황에서 보수주의는 자신들의 반동적 목표를 설정할 때 전적으로 급진적 노선을 취할 수 있다. 보수주의가 단지 과거의 지배형식을 재건하고, 지배계급의 귀환을 통해 과거 자신들의 역할을 되찾고자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할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도 한때는 신성했지만 인간적 오만함Hybris으로 인해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되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거부된 현재를 넘어 현실 저편의 신성한 미래를 목표로 추구하고자 한다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프로그램으로서의 보수주의는 혁명적 잠재력이 될 수 있다."(17-9)


3. 유럽의 과거 속 전통주의적·복고적·보수적 사유구조


"오래 전부터 통용되어 오던 진리에 기대는 일은 철저한 계획에 따른 변화에의 요구보다 사실 훨씬 오래된 일이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규범들Normen을 지향하였고, 이에 대한 추종, 어떤 경우에는 이들을 다시 들춰내고 부활시키는 일들을 도덕적 과제인 동시에 정치적 과제로 간주했다. 원형으로 돌아가기reformatio, 새롭게 거듭나기renovatio, 원천으로 돌아가기revolutio 등의 개념과 이의 독일어 표현들은 18세기 중반을 넘어서까지도 오래된 것에 대한 재발견과 회귀, 개선되고 발전된 원상회복Wiederherstellung을 의미했다. 즉 전혀 해방적이거나 혁명적 특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16세기 교회의 종교개혁도─헤겔에 의해 '혁명'으로 표현된 바 있는─독일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혁운동이기는 하지만, 중세적 의미에서는 교회 갱신renovation ecclesiae, 즉 그리스도의 상을 따라 인간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실현되는 그리스도 율법Lex Christi으로의 회귀로 보았다."(23)


"정치-사회적 발전의 가야 할 길이 변화와 고수 사이의 중간 길이며, 전진 속에 연속성이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확신은, 스스로를 좀 더 자유주의적으로 혹은 보수주의적으로 이해하는지 구별없이, 19세기 독일 식자층에게는 널리 퍼져있는 생각이었다." "1830년까지는 이러한 사고를 가리키는 그 어떤 명칭도 실질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7월혁명이 일어나면서 독일의 정치 환경도 변한다. 혁명에서 승리하지 않았어도 과거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며, 지키려는 힘과 변화를 추구하려는 힘, 이 양자 사이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음을 인식해야만 했다. 어느 한쪽만을 편드는 일이 일방적이라는 비난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지만, 이러한 선택을 불가피해 보였으며,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정의를 내리고, 같은 편임을 드러내며, 호소하는 행위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수적konservativ'이라는 표현은─독일인에게는 외래어로─ 자신의 정치적 대표성을 획득한다."(28-9)


4. 단어의 역사


"라틴어 'conservare(간직하다, 유지시키다, 구조하다)'는 이미 가치에 중점을 둔 의미 영역에 속해 있었다. 'conservator(수호자)'라는 단어는 행위에 근거를 둔 명사로, '수호자custos', 혹은 '보호자servator'라는 단어와 동의어였다." "기독교 세계에서 산발적으로 'conservator'는 구원자 예수Heiland라는 의미를 갖는 'salvator(구원자)'라는 표현과 나란히 쓰였다." "신을 〈만물의 창조자이며····· 보호자〉로 표현한 것을 빼면 'conservateur'라는 단어는 14세기 이래 무엇보다 법과 재산을 보호하는 직위에 붙여졌다. 〈군주는 본래 백성의 재산과 자유의 보호자conservateur다.〉 이런 오래된 법률-행정적 언어 용법과의 엄격한 구분을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프랑스혁명이 'conservateur'라는 표현을 정치적 개념으로 사용하게 된 첫 계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처음엔 반혁명적 입장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혁명의 성과물들을 보호하는 정책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2-3)


"마담 드 스탈은 〈혁명을 종식시킬 수 있는 현재의 상황들〉이라는 글에서 〈보존적 집단을 조직하는 것이 낫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용례는 혁명 자체의 결과에 대한 표현을 끌어와 사용한 것으로, 이를 통해 반혁명을 막는 것뿐 아니라, 다음에 올 급진혁명을 지켜내고자 한 것이다. 이후 점차 '보존적conservateur'이라는 개념은 혁명의 전제가 되었고, 또한 혁명을 종결시켰던 나폴레옹 체제의 자기 이해를 드러내는 개념이 되었다. 부르봉 왕조의 재건이 이루어지고 비로소 정당 체제가 성립되는데, 이는 1789년부터 1814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인정하는 정도에 따라, 제헌헌장을 변화의 종식으로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헌법상의 지속적 발전의 기반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그 판단은 달라진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conservateur'라는 개념은 프로그램을 갖춘 정치적 노선의 이름과 정당의 이름으로 쓰이면서 프랑스 밖에서도 받아들여지게 된다."(34-5)


# 제헌헌장Charte constitutionelle : 루이 18세가 1814년 즉위하면서 공포한 프랑스 헌법. 비록 그는 여기에서 1789년 혁명을 부정하고, 자신의 체제와 구체제 간의 연속성을 강조하였지만, 구체적인 헌법의 내용에서는 지난 20년간의 혁명을 통한 변화를 인정하고 반영하였다. 특히 소유권과 관련하여 프랑스혁명 이후의 변화를 용인하였고, 행정 체계도 혁명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5. 1830년 이후의 상황


"7월혁명은 그것이 가져온 제도적 변화의 규모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유럽의 정치적 환경을 변화시켰다. 7월혁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난 18세기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에 출현했던 민주적 경향들, 그리고 그 뒤에 존재했던 사회적 동력을 극복하고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 정치적 발전이 충분히 발전의 길로 연결될 수 없었다는 것들에 대해 자각하게 만들었다. 사회적·정치적 현실이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변화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꼭 필요한, 혹은 바라왔거나 허락되는 변화나 보존의 한도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정치적 성격을 띤 공적 영역의 점진적 확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한편을 선택하도록 요구했다. 즉, 자신의 사회적·국가적 질서에 대한 입장, 이들 중 이미 행해졌거나 저지된 것들, 그리고 어떻게 이들이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나아가 다른 이들의 동의를 받아내고 연대의식을 심으며, 반대자들을 확인하여 이들과 싸우고자 하는 의도가 놓여 있었다."(44-5)


"최종적으로 보수주의는 군주정 체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점차 방어적 자세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입장이 시대의 변화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근본적 변화로의 전환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가고자 하는 그런 시대적 경향에 대한 반대임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민주주의자들의 말뿐인 급진주의는 보수주의자들에게 〈파괴주의자들〉에 대항하면서 변화 속에서 보존을 정당화시키는 논거를 제공하였다. 이로써 보수주의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이 과거의 상태를 재건하거나 혹은 기존의 관계들을 단지 붙잡아두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변화를 방해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싸우며, 현재의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들 스스로의 정치이념은 적극적으로 되어간다. 이들은 (인간의 선천적 불평등에 대한 신념 같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사고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들을 프로그램의 목표로 삼았다."(56)


6. '보수당'


"'보수적', '보수주의자', '보수주의' 등의 개념은 1848년 혁명의 전야까지도 분명한 윤곽을 갖지 못한 채 사용되었으며, 명확히 지칭할 수 있는 정치적 집단이나 방향이 고정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보수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즉, 보수주의라는 개념은 이들에 대한 반대자들의 논박 속에 있었다. 이를 통해 보수주의자들은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오로지 보존만 하고자 하는 측으로 몰아붙여지고 있다고 느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당명과 연결시켜 만들어진 획일화된 정치 프로그램에 불신감을 느끼면서, 당이 의당 해야 할 정치적 행위에 대한 의무를 피해갔다. 전통적 지배계급이 지녀온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따르면, 이들에게 사회질서와 정치권력이란 존재의 영역이지 의지나 의무의 영역이 아니었고, 따라서 당 정치를 통한 각축의 대상도 아니었다. 이러한 입장은 많은 온건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72-3)


7. 1848/49년 혁명


"구 보수주의자들에게 1848년 봄의 사건은 커다란 충격이었으며, 이에 대해 그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후버는 새로운 국가질서를 현재의 적법한 상태로 인정하였다. 비록 조국이 위기의 순간은 극복했다 하더라도, 어쩌면 과거보다는 순화되었을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과거로부터 진행되어 온 싸움〉, 즉 자신의 발전 능력을 먼저 증명해보여야만 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는 또한 예지력 있게도, 자유주의가 약속했던 자유 속에서 보수주의적인 것들이 과거보다 더 잘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트만 홀벡은 〈건강한 보수주의〉를 지지하였으며, 〈정당한 소유권 주장〉을 옹호했다. 또한 그는 〈부르주아적····· 관계들의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변화〉를 제시했고, 〈고사되어 가는 삶의 형식을····· 복구〉시키고자 하는 그런 사람을 '반동주의자'로 칭했다. 《신프로이센 신문》은 반혁명 투쟁을 넘어, 〈사물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 현재의 동적인 사상〉에 대한 개입을 요구하였다."(82-3)


# 봄의 사건 : 1848년 3월부터 독일과 전 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의 물결들


8. 반동의 징표 속에서


"《국가와 사회 사전》 안의 〈보수적〉이라는 항목에서(보다시피 〈보수주의〉가 아니라) 바게너는 유지Erhalten라는 단어와 그 의미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정치적 부채Hypothek를 서술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단어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진행되는 시대에는 언제나 새롭게 정당화시킬 수 있는 개념 정의를 요구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당연히 단지 지켜내는 것만이 문제의 중심이 아니다." "기독교 정신을 지키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더 커다란 전체의 구성 요소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더 고상한 질서〉를 위해 복무하는 사람, 이러한 〈질서를 인정받고자〉 노력하면서, 기존의 존재하는 것들의 정신적 기반을 위해 발을 들여놓는 그런 사람만이 오직 〈진정으로 보수적인〉 사람이다. 〈하나의 정당이 적어도 제도와 문화의 총체를 보존하고자 하며, 시간이 흐르면서 보존시켜야 할 바른 기반 위에서 성장하고 발전된다면〉, 그때에 비로소 이 정당을 '보수적'이라고 칭할 수 있다."(93)


9. 제국 설립기


10. 전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