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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2 - 혁명 ㅣ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2
라인하르트 코젤렉.오토 브루너.베르너 콘체 엮음,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한운석 옮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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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서론
"혁명 개념은 근대적인 것이다. 중세 말 이후 이 말은 처음에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이어 서유럽에서 정치적인 언어로 유통된다. 오늘날 이해되고 사용되는 개념은 엄격히 말해서 프랑스혁명 이후 일상화되었다." "분석적으로 볼 때 근대적인 혁명 개념은 필연적으로 공동 줄기에 속하는 것은 아닌, 적어도 두 개의 경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 개념은 내전으로 상승할 수 있고, 헌법의 변경을 초래하는 봉기에서 표출되는 폭력적 소요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개념은 과거로부터 미래에까지 이르는 장기적인 구조 변동을 함축한다. 그럴 경우 이 개념은 '영구혁명'에서와 같이 '과정'과 '발전'에 접근한다." "두 개의 의미 영역은 개별적으로 이용될 수 있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두 영역이 동일한 혁명 개념 속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보통이다. 역사적 양상은 정치적 목적을 설명하고 거꾸로 정치적 목적 설정을 통해 역사적 차원이 설명된다. 개념은 인식을 이끄는 동시에 행동을 안내한다."(12-3)
2. 고대에서의 '혁명'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혁명〉 이전에 보통 모든 생활관계들이 뿌리째 흔들린 장기간의 시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흔히 잔인한 분노들의 표출로 나타났다. 그것은 그러나 광범위한 계층의 경제적 공고화 이후에야 가능했다. 그것은 그 후 적어도 아테네에서 그리고 아마도 많은 다른 장소들에서도 비교적 〈비혁명적〉 방식으로 완수되었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민집회를 갖고 있었거나 옛 전범에 따라 혹은 이웃 도시들의 예를 따라 그것을 쉽게 재건할 수 있었다." "이 전통적인 〈명목적normistisch〉 지평에서는 헌법 변경을 위한 많은 인민들의 결정들은 지금까지 지배계층에게는 금시초문이고 모든 전통에 모순되고 거의 혁명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당하다. 이 과정과의 연관 속에서 소요와 폭력은, 아무튼 아테네에서는, 과거의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민주주의로의 운동은 점차 변형되는 기존 법률의 지평 속에서 장기간에 걸쳐 수행되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23)
"특히 작고 불안정한 폴리스에서는 통상적인 것과 예외적인 것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존재했다. 거기에는 〈중간층〉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소수〉의 〈재산가들〉이 하층민들에게서 시민권을 빼앗거나 크게 제한함으로써 그들의 공통 이익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민주주의는 모든 자유로운 공동체 구성원들의 제약받지 않는 시민권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능동적 시민권 문제가 그렇게 중심적이 됨으로써만 과두정과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대립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양 헌법은 여러 가지로 당파적이었다. 이에 따라 시민이든 과두정이든 그 공통의 중요한 이해관계는 헌법 전복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헌법과 당파의 역량은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현대에는 헌법 내에서 가능한 것이 당시에는 헌법 교체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이 전환이 매우 빈번했다. 그것은 불분명한 경계를 형성했지만 경계는 정치적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25)
"고대에는 잠재적인 혁명적 에너지의 정체停滯도, 그것의 폭발도 없었다. 고대에는 커다란 영토의 정치적 단위와 정치권력과 정당성의 집중이라는 의미를 가진 국가도 없었고, 그것이 약한 시기에도 군주국으로 하여금 사회에 대해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만드는 내외적 규율화도 없었다. 이에 따라 자신의 사상, 곧 구체제에 대한 포괄적인 대안을 사상 속에 구축하기 위한 단초와 보장을 자체 내에 충분히 갖고 있는, 정치로부터 압박을 받는 사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목할 만한 국가의 〈낙차〉, 곧 개별적인 입장들 사이의 폭넓은 차이들은 형성될 수 없었다." "그들의 정치사회적 현실은 훨씬 더 긴밀하고 더 닫혀 있었으며 그들의 개념들은 덜 추상적이었고, 그들은 그들 공동체 전체를 대표성이라는 추상적 형식에서가 아니라 시민적 혹은 귀족적 정체성에서 찾았다. 이렇게 그들의 정치에는 사회변동을 계획하는 계기가 빠져있었다. 그들은 자신과의 거리두기가 부족해서 자기변혁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26-7)
"그리스인들에게 없었던 것은 로마인들에겐 더욱 없었다. 귀족들과 평민들 사이의 신분 투쟁은 그리스인들처럼 동시적인 위기와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 〈원로원과 민중들의 투쟁들〉은 불규칙적인 일이었으며, 정확히 다른 방식으로는 원로원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강력한 적들을 무너뜨리고 죽음으로 몰아간 유혈적 폭력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전복이 아니었다. 원로원 반대파의 목적도 결코 혁명적이 아니었다." "여기서 어떤 새로운 계층도 전면으로 부상하지 않았으며, 한 질서가 해체되었고, 구질서가 오랜 내란에서 탈진했을 때 군주정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 "로마는 시민성이 강하게 각인되어 있지 않았으며 아테네처럼 강한 시민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 권리의 모든 실질적 분화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은 대표성이 아니라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리스에서보다 혁명적 잠재력이 덜 축적될 수 있었다."(29-31)
3. 중세
"중세에는 근대의 혁명 개념에 상응하는 개념이 이 명칭하에서건 다른 명칭하에서건 없었다." "여기서 '혁명'이라는 말의 역사와 후에 그로써 파악된 사안의 역사가 구분되어야 한다. 사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중심적이다. 1) 적어도 권력 관계의 부분적인 전복을 목표로 하는, 법적으로는 동등한 자격을 갖지 않은 당파들 사이의 불법적인 혹은 일반적으로 합법적이라고 이해되지 않는 폭력 사용 : 봉기, 반란, 모반 등. 2) 단 한 번의 행위에서건 보다 장기적인 과정에서건 전체 정치사회적인 구조의 포괄적인 변혁. 첫 번째 형태는 중세에 빈번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표현들에 의해 포착되는 반면, 두 번째 형태의 개념사적 포착은 상응하는 사상이나 요구들이 개념적으로 전혀 명료화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초래한다. 여기서 '개혁reformatio'과 '혁신renovatio'이라는 용어가 가장 중요하다. 포괄적인 변혁은 근대적인 혁명 개념의 특수성 중 하나이다."(42-3)
"(모반, 봉기, 반란 같은) 모든 종류의 폭력적 봉기들이 중세에 널리 퍼져있었다." "이것들과 전쟁과의 구분 기준은 폭력 사용의 합법성이나 불법성에 있지 않고, 당파들 사이의 법적 관계에 있다. 전쟁은 법적으로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반면에 봉기 등은 법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맞서 수행된다." "범죄와의 구분도 유동적이다. 반란자들을 일상적인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흔히 법률에서 처벌 위협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적으로 우월한 쪽의 완전한 승리로 나타난다." "법적으로 종속된 사람만이 그의 상급자에 맞서 봉기하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지배세력으로부터 대립의 원인이 출발한다면 다른 용어가 사용된다. 군주의 '부당한 폭력', '폭정', '독재' 등. 명칭은 항상 가치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반란은 합법적인 군주에 맞서는 것이고 따라서 불법적이다." "편향성은 단지 나중에 첨어를 통해 상대화시키거나 전도될 수 있다."(46-7)
4. 근세 초부터 프랑스혁명까지
"루터는 〈정신적 봉기〉를 찬미했다. 그는 오직 선포만을 지지했다. 인간은 〈신의 성스러운 말씀에 감사해야 하며 이 영적인 봉기를 곧 말로써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실의 빛〉을 열어주며 어떤 당파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당파적인 이름을 지우고 기독교인이라 일컫자 ····· 교황파들은 기꺼이 하나의 당파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악마의 명부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이 정신적 폭동설은 평화적 선포를 목표로 하며 루터에 의해─그의 두 나라 이론에 따라─세속적인 정부에 대한 물리적 폭동으로부터 엄격히 분리된다. 세속적인 지상에서의 모반은 개선시키기보다는 점점 더 많은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폭동은 아무런 합리적 사고도 갖고 있지 않고, 죄 지은 사람보다 죄 없는 사람에게 더 큰 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것이 항상 올바른 측면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폭동도 정당하지 않으며 항상 개선보다는 손해가 더 많이 발생한다.〉"(86-7)
"보댕은 권력의 필연적 독점론을 관철하였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는다면, 결코 국가는 폭도들과 싸움을 좋아하는 시민들에 의해서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국가들은 결코 소요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왕들은 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전bellum civile'이라는 표현은 보댕에서 홉스까지 종교적 경계를 넘어서 순수하게 정치적인 해결책을 추구했던 정치이론가들이 선호했는데, 이는 의미론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두 사람은 내전이 국가를 통해 극복되어야 할 가장 큰 해악이라고 보았다." "국가라는 대안을 고려하여 전체 사회가 숙명적으로 몰락하는 경우가 아니면 내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역사적 목표 설정이 거부된다. 평화가 내전보다 더 낫다는 키케로로부터 재삼재사 인용된 문구인 〈내게는 시민들 사이의 어떤 평화든지 내전보다 낫다〉는 그로티우스의 말은 내전에는 뒷날 혁명에 부여되었던 어떤 역사적 목표도 설정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92-4)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순환에 대한 6권의 서적》에서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것과 항성으로 격상된 지구의 순환운동을 표시하고, 지구가 그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7세기에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들에 관계된 보다 좁은 혁명 개념이 관철되었다. 그것은 지배권의 교체, 정치적 암살 혹은 다른 현저한 사건들, 봉기나 내란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이 큰 행위들을 가리킬 수 있다. 이 연관 속에서 그 개념은 항성의 순환과 그 필연성에 대한 유추적 서사로부터 벗어나 정치적·역사학적 언어의 경험적 개념으로 되며 흔히 제목에 등장하고 대부분 복수로 사용된다. 새로운 용법에서 결정적인 것은 혁명들이 연대기적 순서 속에서 생각되어지고, 그 회귀가 필연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은 이제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고 그곳으로 안내하는 전환점을 표시한다."(121-2)
"'명예혁명'으로 일컬어진 1688년의 헌법 변동과 더불어 우선 영국사를 위한 일회성, 곧 합법칙성 그리고─〈비자연적인 내전〉과는 반대로─사건의 비폭력성과 동시에 혁명이 일어난 필연성을 강조한 개념의 특이화Singularisierung가 시작되었다." "특히 단수 개념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 1688년의 혁명은 결코 내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상을 선취했다." "1688년의 혁명은 18세기 중엽부터 확산되어간 역사철학적인 개념 발전에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것은 계몽사상의 명제들을 실현하기 시작했으며,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실현하게 될 정신과 여론의 자유로운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달랑베르의 말을 따르면 〈빠름으로 인하여 더 많은 것을 약속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변화〉였다." "계몽사상가들이 경제와 헌법 영역에서 구체제 말기의 수많은 개혁 시도들에 부여한 낙관적 의미가 이 언어 사용에 연결된다. 개혁들은 거의 항상 '혁명'으로 분류되었다."(123-4)
"1770년 이후에는 필요한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 비상시에는 내전도 불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메르시에는 1770년에 〈많은 국가들에게 그것은 불가피한 시대이며, 가공할 시대이며 유혈적이지만 자유의 징표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전이다〉라고 말했다. 이 시기는 모든 혁명들 중 가장 행복한 시기이고, 지금까지 감추어진 계몽적 인물들은 이제 지도적인 역할을 행하리라는 것이다. 이 개념에 경험적인 뒷받침을 제공한 것은 미국의 독립전쟁이었다. 그것은 곧바로 자연적 인권의 이름으로 이제는 독재의 폭력적 전복도 정당화한 '혁명'으로 환영받았다. 디드로와 레이날의 말을 빌리면 〈탄압이 반란을 불러일으킬 구원의 운동〉인 것이며, 〈하루 아침에 새로운 세기에 들어온〉것이다. 진보적 미래 개념으로서 '혁명'은 내전을 자유로 가는 길목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로 간주하도록 했다. 이 역사적으로 입증된 기대 개념을 가지고 다가오는 프랑스혁명을 위한 성향이 표현되었다."(124-5)
"'혁명'이 얼마나 특별히 미래 개념으로 되었는지는 다가오는 변혁을 필연적이고 도덕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예견한 수많은 진단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의 비판이 정치체제를 넘어 전 역사로 향하였던 루소는 1762년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들은 지금의 질서를 신뢰한다. 그들은 이 질서가 불가피한 혁명의 주제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아이들이 부딪힐 것을 예견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루소에게서 혁명 개념은 '위기'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선동적이고 인류학적이고 도덕적으로 뒷받침된 종말론적 차원을 획득하였다. 그의 적보다 더 차분하였던 디드로는 다가오는 혁명을 노예제와 무정부 상태, 공포와 자유의 변증법적 산물로 예견했다. 그는 고대의 순환 및 독재론을 빌려서 자유에 도취한 인민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굴복할 위대한 인간의 독재를 결과적으로 예언한다. 그러나 디드로가 도출하는 문제는 현대적이며 그것은 열려있는 미래를 가리킨다."(126-7)
5. 프랑스혁명과 당시 독일의 수용
"프랑스혁명이 급진화되고 당의 분열, 의심과 추적, 테러와 독재, 계몽되지 못한 대중의 전제주의, 전체적으로 유혈 내전의 형태와 결합되면서 (독일에서) 다수의 동의는 사라져버렸다." "새로운 혁명 개념은 곧 내전의 전통적인 교훈을 받아들였다. 가브는 〈모든 경험에 의하면 내전이 국가 간 전쟁보다 잔혹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혁명 과정에서 단순히 당쟁의 결과로 생기는 열정 역시 모든 선한 것을 ·····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격앙된 성격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단 전쟁이 국가 내부에서 발생하면, 그 진행과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정의가 아니라 성공이 결정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무질서의 해악을 통해서 잘못된 질서의 해악과 맞서싸우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고도 했다. 그렇게 혁명의 경과가 내전과 수렴되었는데, 이에 힘입어서 빌란트는 고전 역사에 근거해 쿠데타 일 년 전 보나파르트의 독재를 예견할 수 있었다."(138-9)
"에드먼드 버크가 수립한 프랑스혁명 비판의 핵심은 인민지배로 추정되는 것을 향해 있다. 버크는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모든 정치적 괴물 중에서 가장 파렴치한 것〉을 감지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개개인의 모든 책임을 익명의 보편성에 떠넘기고 그럼으로써 파국을 잉태한 안일함이 번식토록 오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혁명'은 모든 낯선 경험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당파 선택을 강요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 개념은 계몽시대의 일반적인 지지를 상실했다. 이론적인 전제들과 그에 상응하여 여과된 경험에 따라 진영들은, 이념형으로 말하자면, 일관된 민주주의자, 헌법주의자, 그리고 경향적으로 보수주의에 더 가까운 정치적 실용주의자로 나뉘었다. 이들 모두에게 '혁명'은 다양한 의미가 내장된 당파 개념이 되었지만, 이것은 프랑스혁명의 핵심이 더 이상 '폭동'이나 '반역' 같은 전통적인 범주들로 파악될 수 없는 비상한 사건이라는 공통된 인식에 기초해 있었다."(144-5)
"행동주의적 혁명가들에게 혁명 개념은 구원의 기대와 이를 행동으로 실현하려는 전체적 요구의 결합이었다. 〈혁명은 범죄의 지배가 정의의 지배로 넘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명 의식의 주문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세계 혁명의 절반은 이미 수행되었다. 나머지 절반을 완수해야 한다〉라고 로베스피에르는 외쳤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와 같다는 자연의 비유─한 반구는 여전히 암흑 속에 잠겨 있지만, 다른 쪽 반구는 이미 빛 속에 있다─를 덧붙였다. 어쨌든 혁명 개념은 미래에도 확장되어서 그의 실현에 대한 기대감을 일깨웠다. 반쪽짜리 혁명에 만족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생쥐스트는 말했다. 수많은 재앙과 점점 더 빠르게 다가오는 세계의 종말과 결합되어 있었던 이전의 기독교 구원의 기대가 이제는 진보적으로 변형되어 재등장했다." "일단 혁명의 역사적 유일성이 의식화되면, 그로부터 공정한 행동으로의 정당화가 뒤따랐다."(152-4)
6. 역사철학적 관점 속 '혁명'과 그 반대 개념들
"헤겔은 〈세계사가 영원한 이성의 산물이고 이성이 그의 대혁명들을 규정했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혁명을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프랑스혁명을 로마 가톨릭 세계의 특별한 산물로 상대화했다. 바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자유주의 추상화야말로 그곳에서 지배하는 〈종교적 예속〉에 대한 반동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패한 도덕성, 국가 헌법과 입법 체제를 종교의 변화 없이 바꾸는 것, 즉 종교개혁 없이 혁명을 하는 것은 근대의 우행으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적 양심의 해방 없이, 곧 종교의 변화 없이는 어떤 정치적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독일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혁명은 앞서 있었던 종교개혁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불필요해졌고, 부분적으로는 보상을 받았다. 어쨌든 소위 게르만적 자유 원칙이 이후 독일을 실제 혁명들과 예상 혁명들의 (통시적) 서열에 끼워넣는 데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171-2)
"프랑스혁명을 지지자들이 기꺼이 세계사의 최종 결정으로 간주한 것은 프랑스혁명을 일회적이고 유일무이한 혁명으로서 경험한 일에 속했다. 토마스 페인도 그렇게 간주했고, 개념에 들어있는 귀환, 즉 천부 인권과 시민권의 복구는 반半종말론적 해석과 반半순환적 해석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러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혁명'은 그 후 '대위기'라는 개념에 가까워졌고, 구간에 따라 그와 교환 가능했다. 그러나 '혁명'은 동시에 이 개념의 다의성을 공유했다. '혁명'은 열려있는 미지의 미래로 이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기는 했지만 옛 어법을 따라서 반복될 수도 있었다. 즉 그것은 '사회적', '산업적', 혹은 '영구혁명'까지 되었다. 이로써 그것은 시간 경험을 정지시키는 변화와 변화 압력을 개념화시키기 위한 지속 범주로 승격되었다. '혁명'은 근대의 역사적 근본 운명으로서의 끊임없는 위기와 일치될 수 있을 만큼, 위기들의 합을 자신 안에 묶어내는 하나의 과정 개념이 되었다."(177-8)
"1789년 이래 계몽된 혁명에 대한 희망이 폭력적으로 침식됨으로써, 변화의 필연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평화 혁명과 혁명에 대한 이성적인 계획 가능성을 구하려는 반대 개념이 신속히 분리되어 나왔는데, 그것은 '진화'였다. 1792년에 헤르더가 썼듯이 〈내 좌우명은 사물의 지속적·자연적·이성적 진화이지 혁명이 아니다. 전자가 저지당하지 않고 계속되면, 이를 통해 후자를 가장 확실하게 예방하게 된다.〉 '진화'는 우선 계획 가능한 개혁이라는 의미에서 타동사적으로 사용되었고, 에어하르트 역시 1795년에 그렇게 사용했다. 모든 인민은 성숙해가면서 혁명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헌법들이 다양한 성숙도에 순응함으로써 본래의 혁명을 예방할 수도 있다····· 그런 국가에서는 다른 국가에서 혁명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지혜에 의해 촉발된 진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칸트는 〈국가가 때에 따라 스스로 개혁하고 혁명 대신에 진화를 시도하면서 좀 더 나은 것을 위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진보라고 보았다."(179)
"개혁을 통해 폭력적인 혁명을 예방하기 위해서 역사적 발전을 증거로 대는 것은 그 이후 역사철학적으로 조성된 위상학Topologie의 영역에 속했다. 바더는 모든 역사가 〈진화주의〉에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출발 전제로 삼았다. 이것이 개혁을 통해서 가속화되는 대신, 반동에 의해서 저지되고서야 비로소 그 부정적인 상응물, 즉 〈혁명주의〉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바더는 하르덴베르크처럼 〈혁명운동의 발생〉은 진화의 〈정지 혹은 저지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역사적 원리를 내세웠다. 그는 양극단, 즉 〈반혁명〉과 〈혁명주의〉에 반대했다. 〈진화주의〉는 역사적인 선제 명령이고, 〈혁명주의〉는 인간의 잘못에서 생긴다. 여기서 바더는 〈무산자〉보다 유산자에게 더 큰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지배자들이 단지 〈혁명적 반동의 자극물로〉 작용하는 반면,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반란이라는 성스러운 권리〉가 무산자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181-2)
"독일의 대다수 시민들이 그들의 개혁 요구가 아무리 급진적이었다고 해도 '진화'를 지지하고 '혁명'에 반대하도록 만든 것은 당연히 프랑스혁명의 역사를 통해 알려진 폭력적이고 테러적인 단계와 그에 뒤이은 보나파르트 독재였다. '진화'는 역사적 개념으로 한층 높은 기대 수준을 갖고 있었고, 포괄적인 연관관계 속에 장기적 혹은 단기적 변화를 보장했다. 혁명은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한 것으로 남았다. 마르크스 이론의 특징은 그가 '진화'와 '혁명'을 서로 반대되는 함의를 갖는 개념들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 단계상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전복 과정의 정점은 그들이 마지막 혁명이라고 예견했던 정치혁명이었다." "여기서 '진화'와 '혁명'은 반대 개념이 되기를 그만두었다. 오히려 경제적 발전이 필연적으로 혁명을 향해 움직여가면서, 이제까지 비상 상태로 여겨졌던 내전은 일상적인 계급투쟁의 정상 상태로 그 해석이 바뀌게 되었다."(184-5)
"서로 중첩되는 집단들을 지지했던 세 명의 대변자들이 거론될 수 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경제 발전의 법칙이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파국으로 절대 이끌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로 댔다. 〈자유주의 제도들은····· 파괴될 필요가 없고, 계속 발전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조직과 의욕적인 행동이 필요하지만 혁명적 독재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카우츠키도 똑같이 경제적 발전을 증거로 댔지만, 이러한 발전의 종말은 의사-종말론적으로 자본 권력과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대결정 투쟁〉과 다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카우츠키는 〈사회혁명〉과 현재 사회를 토대로 하는 〈사회개혁〉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개혁파와 가장 급진적이고 조롱조로 논쟁을 벌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순응을 통해서 〈혁명의 망치질, 즉 프롤레타리아를 통한 정치 권력의 장악〉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회개혁은 자기자신을 위해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86-8)
"무어하르트에 따르면, '반동'은 모든 새로운 것의 절멸을 목표로 하고 '근대' 자체에 대항한다. '반동주의'는 역사를 자신의 특권과 이해를 보장하기 위한 구실로만 사용하고 사회적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역행적인 혁명〉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의미론적 구조에서 보자면 혁명에게 보다 큰 정당화의 잠재력을 할당하는 지속적인 강제적 대안이 '반동'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진화와 개혁과 다르게 반동에는 일시적 가치서열 상에서 오직 몰락에만 바쳐질 수 있는 반발전적인, 반진보적인, 반민주적이고 반사회적인 힘이 지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되돌리려는〉 헛된 시도이고, 한 짧은 혁명 구호처럼 반동에 대항한 가차 없는 투쟁은 〈진보의 친구들의 의무〉가 된다. 혹은 프뢰벨이 1847년에 공개적으로 호소했듯이 〈혁명은 옳고 반동은 옳지 않다. 혁명은 합법적이고 반동은 불법이다. 혁명은 법적 의식과 법의 유효성에 있어서 법적 평등의 진보이기 때문이다.〉"(195-6)
"7월혁명 직후 '영구성 속의 혁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푈리츠는 〈혁명으로 인해 극도로 자극되고 증가된 모든 힘들의 계속적인 운동을 통해서 내적인 국가 생활 전체의 완전한 '부활'이 초래되도록 그것[혁명]을 말하자면 영구성 속에서 설명할 것이다〉라고 썼다." "하이네는 '혁명'이 끝나지 않은 한, 〈국가병〉과 〈고열〉이 지배한다고 함으로써, 의학적 위기의 비유로 표현을 바꾸었다. 중요한 것은 아직 열려져 있는, 장기적으로 작용하는 위기였다." "빌헬름 슐츠는 50년 전부터 시작된 변혁을 〈지금 벌써 완전히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가련할 정도로 피상적인 역사관〉이라고 말한다. 종교개혁은 유럽의 불화를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진정시키는 데 130년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사회운동이 〈더 넓은 공간〉에 걸쳐 있고 더 많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더 일찍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로써 구조적 유추가 새로이 '회귀'의 의미에서 등장했다."(198-9)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는 〈많든 적든 재산이 있는 모든 계급들을 지배층으로부터 몰아낼 때까지,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연대가 한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지배국가들에서·····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력이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집중될 정도로 진척될 때까지 혁명을 영구화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고 우리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장기적인 혁명 개념과 그 당시의 정치적 혁명 개념을 합쳤다. 〈정치혁명의 전투 구호는 영구혁명이어야 한다.〉 중심이 되었던 것은 정치혁명적 희망의 좌절을 앞으로 다가올 실현의 증거물로 해석할 것을 가르친 역사철학적 보상 개념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그의 분석에다 〈혁명의 실패!〉라는 표제를 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 굴복한 것은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 이전의 전통적인 추종자들이었다.〉 환상은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01)
"1848년 혁명이 좌절되고 난 후 1906년에 가서야 트로츠키가 '영구혁명'에 새로운 내용을 채웠다. 그는 첫째로 러시아와 같이 자본주의적으로 저발전된 나라에서는 마르크스가 이미 인정했듯이 헌법적이고 민주적인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혁명으로의 단절 없는 이행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함께 영구혁명의 시민적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집권하면, 프롤레타리아는 따라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테두리에 제한되어서는 안 되고 영구혁명의 전술을 전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1917년 4월에 집어든 테제이다. 트로츠기가 산업후진국에서 도출한 자신의 모델들로부터 발전시킨 두 번째 테제는 우리 지구상의 식민적 종속 국가들에 대한 사회주의의 차용 가능성에 있었다. 사회주의는 언제나, 그러나 오직 지구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만 도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영구혁명은 세계혁명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205)
7. 전망
"전체적으로 혁명 개념은 모두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일종의 존재론적 지속 범주로 굳어진 특징을 보인다. 프랑스혁명 이래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던 모든 표현법들이 그렇듯이, 혁명을 〈보장할〉, 〈확정할〉, 〈추진할〉 필요가 있다거나, 그것을 〈위반〉, 〈희생〉,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을 서로 엄격히 구분했던 기준들은 혁명 진행의 단계설, 혁명 가속화의 계획 가능한 속도, 사회주의를 내전의 경로를 통해서라도 들여오려는 정치적 결단에 있었다."(235-6) "확실한 것은 '폭동', '전쟁', '내전', '혁명'의 개념 영역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내포하고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전쟁'과 '내전', 그리고 '내전'과 '혁명' 간 구분이 모호해진 이래로, 우리 지구상의 투쟁 형태들은 새로이 급진화되었다. 테러와 게릴라 투쟁은 부분적으로는 견제되고 부분적으로는 보호 아래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원자적인 위협으로부터 정치의 거의 정규적인 요소들로 탈바꿈했다."(2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