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배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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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상은 성경적이었으며, 교부시대의 지속되는 업적 중 하나는 언어와 영감 면에서 성경적으로 사고방식을 형성한 것이다. 그것은 교회와 서양 문명에게 성경에 대한 통일되고 일관된 해석을 제공했다. 즉, 이것은 성경의 최초 독자들을 무시하는 해석은 교회의 책도 아니고, 서양 문학, 미술, 음악의 상상력이 풍부한 원천도 아닌, 단지 파편들의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토대로, 기독교 예배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성경(또한 성경에 대한 초기 해석들)으로부터, 곧 역사, 제의, 문헌으로부터 사고한다. 기독교 사상은 교회 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시편 암송 같은 경건 활동으로 유지되고 예배, 특히 정기적인 성찬식 참여로 양분을 얻는다. 이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개념과 관념은 그것들이 가리키는 대상물 자체인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고 기독교적 삶의 실천에 더 깊이 침잠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목적은 이해뿐 아니라 사랑이었다."(22-3)


1 기독교 사상의 토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최초의 기독교 문헌들은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2세기 중반에 이르러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적으로 외부인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책을 쓴 사람들은 변증가들apologists로 불렸고, 이러한 맥락에서 변증apology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삶과 신앙 방식에 대한 방어와 설명을 의미한다." "최초의 변증가들 중에서 가장 명석한 사람은 2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순교자 유스티누스였다." "유스티누스는 기독교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 사람들을 대상으로 몇 권의 책을 썼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들을 위해서도 방대한 책을 한 권 남겼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두 종류의 비판자들을 동시에 다루어야 했다. 하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가 기원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후자의 성경(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이라고 부른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성경으로 삼았다."(31-2)


"켈수스가 보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났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한 역사적 인물 속에 나타난 계시의 문제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된 것이었다." "켈수스가 신약성경을 읽음으로써 깨달았듯이, 기독교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내려왔고 인간들이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면, 세상의 근본적인 질서와 구조는 돌이킬 수 없이 방해를 받을 것이라고 켈수스는 말했다. W. H. 오든의 기억할 만한 시구(詩句)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영원한 존재가 일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고정되고 불변한다. 영적 실재는 지상의 삶을 지배하는 강제력에 종속될 수 없다. 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만일 당신이 지상에서 대단히 의미없는 어떤 것을 바꾼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뒤집고 파괴할 것이다.〉"(37-8)


"교회사에서 가장 용감하고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가 켈수수의 『참된 교리』에 대응하여 『켈수스에 대항하여』라는 상세한 반박서를 저술했다." "켈수스는 정신의 고양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감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에서 돌이켜, 일련의 정신적 단계를 거쳐 하나님을 향해 상승해야 한다. 또 다른 비판자의 주장처럼 〈지적인 문제는 지적으로 알 수 있고 감각적인 것은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주장에 대해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정신의 고양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적 인물 속에서 인간들을 향해 내려오심으로 시작한다는 주장을 한다. 〈나는 켈수스가 인용한 플라톤의 주장이 고귀하고 인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로고스)이 모든 인간과 접촉하기 위해 육신을 입었다고 성경이 주장할 때, 성경이 인류를 위해 더 많은 애정을 보여주는지 어떤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38-40)


"오리게네스는 두 종류의 보는 방법을 구별한다. 인간이 물리적 대상을 감지하는 일반적 방법과 하나님을 보는, 곧 아는 영적 방법이다. 〈육체적인 것을 보기 위해선 그들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사물에 집중하는 눈〉만 필요하다." "하지만 〈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무엇이 요구된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할 때 그것이 보이려고 의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나타났을 때 이 두 가지가 필요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제시해야〉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른 예언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바로 은총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마음의 눈은 그가 하나님을 보는 원인일 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에게 자유롭게 제공된 하나님의 은총이었기 때문에,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이다.〉"(47)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 앞에서 그들에게 〈예수와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우리에게는 낯설게 들리니,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싶다.〉 교인들 앞에서 행한 설교뿐 아니라 외부인들에게 쓴 글에서, 가장 초창기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그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예배와 관행, 기도와 교리 교육, 성경의 말씀과 이미지와 이야기 속에서 전해진 것이 확고한 지적 토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것이 요점이다. 즉, 기독교의 이야기는 일군의 사상이나 원리로 축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개념체계도 복음주의 역사를 대체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5세기 로마의 감독이었던 대 레오가 썼듯이, 기독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신비 위에 세워진 종교〉다. 기독교 사상은 어떤 독창적 사상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며, 어떤 중요한 영적 통찰력에 의해 양분을 공급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한 인간의 삶에서 비롯되었다."(51-2)


2 기독교의 예배: 놀랍고 피 없는 희생제물


"유스티누스는 성찬식에서 교인들이 살아 있는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이라고, 그들이 먹는 음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첫 번째 요점은 기독교 예배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축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을 함께 기억하는 기념 식사가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편 22편 설교에서 말했듯이 예배는 〈과거에 벌어졌던 일을 현재의 것으로 만들며, 이런 식으로 그것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요점은 그 예배가 명백히 삼위일체적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존재하기 전에도, 기독교 기도들은 성삼위일체를 초청했다. 유스티누스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우주의 아버지께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찬양과 영광의 기도를 올려 드린다〉고 말한다. 유스티누스가 말하는 것은 초기 예배에서 빵과 포도주에 대한 기도 속에 메아리친다."(60-1)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살아 있는 제물로 제시되었다." "예배에서 이를 반복적으로 기념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의 상상력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와 친밀한 관계로 이끌었다.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경험의 명백한 사실로서 말이다. 5세기 로마의 주교였던 대 레오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화해를 위해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우리는 단지 과거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알 뿐 아니라 현존하는 사역의 권능 안에서 경험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문이 집필되기 전, 성경에 대한 학문적 주석이 나오기 전, 은총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이나 도덕 생활에 대한 저술이 출현하기 전, 교회의 성찬식에 살아서 현존하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바치는 경외와 숭배가 존재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에 선행했다."(64-5)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집단적 행사였다. 감독과 다른 성직자들, 이웃과 친구들, 가족 등 모든 사람이 맡은 역할이 있었다. 매년 늦겨울과 봄에 반복될 때마다 엄격한 심사, 혹독한 금식, 낭랑한 신조 낭독, 축귀의식, 침례는 그 경험을 더욱 고양시켰다. 세례식은 장엄한 기독교 행사였다. 그리고 이웃과 친구들이 한 사람씩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을 뿌리거나 붓지 않고 물속에 잠겼다. 기독교는 빵과 포도주, 물, 기름처럼 사물과 관계가 깊다. 기독교 신앙은 사물들과 그것들을 사용하는 행위 속에 담겨 있다." "세례식의 물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논의에서, 하나님은 보고 만질 수 있는 한 인간을 통해 알려진다는 기독교의 핵심적 확신이 이제 물과 기름, 빵과 포도주, 우유와 꿀, 소금과 성인들의 뼈, 그리스도의 몸이 닿았던 성지(聖地), 그리고 성상처럼 만질 수 있는 다른 물건들로 확장된다."(68-9)


3 성경: 현재를 위한 하나님의 얼굴


"자신의 대표작인 『잡록』Stromateis에서 클레멘스는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유사성에 대한 논의는 현재 알려진 모습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알려줌으로써, 예기치 못한 주장을 시작한다. 그는 플라톤의 유사함이 형상이라는 성경적 개념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가 읽은 창세기에서 〈형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될 때 인간이 받은 것을 가리키며, 〈모양·유사함〉은 인간의 삶이 열망하는 목적을 가리킨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것의 기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이 가능하다. 유사함(모양)이라는 주제를 도입함으로써 클레멘스는 자신이 철저히 그리스인임을 보여주고, 최고의 철학자 플라톤에 대한 당대의 철학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하지만 창세기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클레멘스는 논의를 성경의 하나님께로 전환한다."(86-7)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변형을 요구한다. 클레멘스는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을, 특히 〈그리스도 따르기〉라는 측면에서 해석함으로써, 논의 전체에 독특한 성경적 광택을 부여한다. 그는 사도 바울을 인용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목적, 곧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절은 초기 기독교 사상에 헬레니즘 정신이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에 대한 증거로 여겨져 왔다. 전체 구절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헬레니즘 도덕 전통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 닮기(모양)란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클레멘스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그의 손에서 헬레니즘의 개념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 빌려온 새롭고 이국적인 맥락 속에 위치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유사함〉은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뜻이다."(87-8)


"성경은 〈우리 신앙의 토대이자 기둥〉이라고 이레나이우스는 말한다. 성경이 기이한 신학 프로그램을 위해 분할되고, 성경 본문이 영지주의자들처럼 자의적으로 사용된다면, 성경은 폐쇄적인 책으로 남을 것이며 〈그것들 안에서 진리를 찾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모든 것을 붙들고 있는 뼈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성경은 마치 설계도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배열된 모자이크처럼, 혹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임의로 가져온 구절들을 함께 묶은 후 그것을 호메로스의 작품이라고 상상하면서 재구성한 시처럼 모호하다." "이레나이우스의 개요는 매우 담대하게 설정되어 있다. 성경해석에 대한 그의 접근이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것은 후대의 모든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아리우스에 대항하는 아타나시우스, 펠라기우스에 대항하는 아우구스티누스, 혹은 네스토리우에 대항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읽든, 우리는 각 구절들을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95)


4 삼위일체: 항상 그의 얼굴을 구하라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성경에서 주어진 언어와 교회의 관행, 특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식에 의해 형성된 확신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탐구하면서 힐라리우스는 하나님을 먼저 창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통해 알았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에야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힐라리우스의 다소 수수께끼 같은 언어 배후에 모든 기독교 사상에 스며 있는 하나의 진리가 놓여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신 것, 초대교회가 경륜economy이라고 불렀던 것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질서와 정리를 뜻하는 이 그리스어 단어는 신학적 담론에서 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한 성경적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 있는 자기노출을 의미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힐라리우스의 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115-6)


"〈하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없다.〉 힐라리우스는 부활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무언가를,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 아니라, 부활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는 보다 충격적인 주장도 제기했다. 일단 예수가 부활하자 도마는 〈신앙의 모든 신비를 이해했다.〉 이제 부활의 관점에서, 도마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활 후에 그는 하나님의 단일성oneness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쉐마를 계속 암송할 수 있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고백은 〈제2의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나 신적 본성의 통일성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고독한 하나님〉이나 〈외로운 하나님〉이 아니라는 인식이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혼자가 아니라고 힐라리우스는 말한다."(118)


"삼위일체에 대한 책을 집필했던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삶의 특정한 행위들과 성령의 사역을 연결하는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태어났고, 성령은 그의 선구자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 성령은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받고, 성령은 그를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고, 성령은 그와 동행한다. 그리스도는 승천하고, 성령이 그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레고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성자만의 활동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성령의 현존을 통해 확증되고 중개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썼다. 〈신적 본성에 관해······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성부께서 아들과 협력하지 않고 혼자서 어떤 일을 행하시거나, 아들이 성령과 별도로 독자적으로 행동한다고 배우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와 관련되고 우리의 상이한 개념에 따라 지칭된 모든 신적 행동은 아버지 안에서 기원하며, 아들을 통과하고, 성령에 의해 완성된다.〉"(128)


"하지만 성령의 개별성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주장은 성경이 두 가지 〈보냄〉, 곧 아들의 보냄과 성령의 보냄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핵심 본문은 갈라디아서 4:4-6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보냄이 아들의 보냄 못지않게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이 본문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듯이,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보냄을 받거나 오순절 날에 교회 위에 부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처럼 〈영원부터 감추어진 것이 시간 속에 나타났다.〉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성령은 역사적 자료요 경험적 사실이었다."(128-9)


5 그리스도 인성의 비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설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난 인간이었고, 동시에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증거하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런 주장의 어떤 것을 불쾌하게 여긴 이들 중에서 가현설주의자들Docetists은 그리스도가 오직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그의 인간적 외모는 단지 겉모양만 그렇게 보였을 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극단에서, 에비온파 같은 집단은 그리스도가 단지 고대의 현인들이나 예언자들처럼 고귀한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신성을 부정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의 중심 전통은 그리스도가 온전히 신이며 온전히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5세기에 발생한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은 교회의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명확히 하려고 살았던 사상가들의 진정한 노력이었다."(140-1)


"요한복음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키릴로스는 힐라리우스와 다른 차원에서 부활을 바라보았다. 부활은 그리스도가 독특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인류의 첫 열매로 드렸다.·····그는 우리를 위해 인류가 예전에 알지 못했던 길을 열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 〈인간 본성은 죽음을 파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세상의 환란보다 우월하고 죽음보다 〈강하다.〉 따라서 그는 죽음과 부패를 정복할 수 있었던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자신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는 부활의 권능을 우리에게까지 확대한다. 그런 후에, 키릴로스는 다음 문장을 추가한다.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정복했다면,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으로서 정복했다면, 우리도 그 안에서 정복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하늘에서 우리에게 오신 두 번째 아담이기 때문이다.〉 키릴로스에 따르면, 예수의 인성이 그리스도를 독특하게 만든다."(146-7)


"이전 작가들은 예수께서 탄원하신 말씀, 곧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를 가설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진정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리스도 기도의 두 번째 부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가 이해되느냐고 묻는다. 동시에, 이 설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리스도가 그 잔을 마셨다는 것이라고 그는 언급한다. 막시무스가 보기에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저항이나 공포가 아니라 〈완벽한 동의와 일치〉를 표현한다.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고, 이런 식으로 〈신적인 의지에 대한 그의 인간적 의지의 최고 동의〉를 보여주었다."(154)


"막시무스는 복음서에 또 다른 명령, 곧 또 다른 〈내게 이루어지이다〉가 있다고 제안한다. 즉, 인간 그리스도의 고통 말이다. 그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는 이러한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의도한다." "고통의 잔을 받은 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동이었다. 영원한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연합하여 의도했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의도하신 것이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자신이 새로운 종류의 인간임을 보여주신다. 인간의 의지는 신적인 의지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덜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더 인간적이다. 키릴로스처럼 막시무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인간이 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리스도의 삶은 새롭다고 막시무스는 말한다. 〈지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놀라우며,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낯설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았던 사람의 새로운 에너지를 그 자체 안에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156-7)


6 천지창조 이야기: 처음에 주어진 끝


"창세기에 대한 기독교 주석가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중, 〈태초에〉라는 단어였다." "4세기 후반 카이사레아의 주교 바실리우스는 〈태초에〉라는 단어에 그리스어 arche의 의미를 이용한다. 〈그것은 적절한 시작이다. 세상의 형성에 대해 말하려는 사람은 가시적 사물들의 질서 속에서 지배적 영향을 행사하는 원리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리스어 arche는 단지 〈시작〉, 곧 〈때〉를 의미할 뿐 아니라,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원리〉도 의미한다. 서론도 없이 바실리우스는 청중을 그 원리로 이끈다. 창세기의 설명은 누군가 상상하듯이 세계가 자발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먼저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과 친교 및 친밀함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 없다.〉 우주론 연구는 영과 관련된 것으로 시작한다."(164-7)


"시작은 또한 목적end을 내포한다. 단지 세상이 끝날end 것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가 〈유용한 목적〉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창조는 〈독단적 힘〉이나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예술적 이성〉의 작업이다. 즉, 창조에 목적이 있다는 것보다 더 도전적인 교리는 성경에 없다. 바실리우스도 창조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작업이며, 세계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에 따라 섭리적으로 질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창조는 마지막 순간에 사물들에 영향을 끼친다. 태초에 하나님이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고 바실리우스는 말한다. 창세기는 자체 내에 성장과 발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생명계의 탄생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땅의 흙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적절한 시간 내에 새로운 피조물들이 정상적으로 발전하도록 만들었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다."(168-9)


"그레고리우스는 신약성경에서 직접 인용한 인간의 세 가지 특성을 소개한다. 첫째는 로고스(말씀) 혹은 이성이다. 이것은 그가 요한복음 1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썼던 사도 바울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셋째는 사랑이다. 이것은 그레고리우스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요한복음과 〈하나님은 사랑이자 사랑의 원천이시다〉라는 요한1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사랑이 없다면 〈그 형상의 흔적은 뒤틀린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는 인성의 회복뿐 아니라,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일체의 온전한 설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끝은 시작 속에서 주어진다〉라는 그의 말에서 완성과 시작이 상보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창조는 선물이자 약속이며,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민 태초에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된다."(180-1)


"〈인간의 창조〉에 대한 모든 온전한 설명은 인간의 파괴,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타락과 악의 완고함을 다루어야 한다. 그의 논문 중간 부분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경험에 관심을 보이고, 비록 간략하지만 인간의 비극적 삶을 논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생생한 언어로 죄의 결과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 안에 불순종이란 잡초의 씨를 뿌린 삶의 교활함 때문에, 우리 본성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을 보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죄 때문에 변형되고 흉하게 되었다. 우리 본성은 악한 본성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 본성은 죄의 아비가 거느리는 악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인간 본성은 악에 의해 〈약해졌고, 무기력해졌다.〉 인간은 〈악으로 돌아서는 것처럼 쉽게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지〉 못한다. 〈인간은 죄를 짓기 쉬우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죄는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 안에 존재한다.〉"(181-2)


7 인식의 길: 믿음의 합리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증인의 정직에 의존하는 역사적 지식과 확실하고 명백한 수학적 지식을 구별한다. 7X7=49는 구구단을 암기한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지식은 우리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항상 간접적이고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한다. '믿는다'라는 단어는 확실한 것이 아니라 개연성 있는 지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역사적 지식에 대한 적절한 단어는 〈믿음〉이지만, 그는 일반적으로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역사적 지식을 위해서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그는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 간의 차이도 유지하고 싶었다. 역사적 지식의 독특한 특징은 그것이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증인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martyr가 기독교 사전에서 거룩한 단어가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순교자martyr는 자신의 말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이다."(195-6)


"역사적 지식은 증인을 요구한다. 그리고 증언은 증거하는 사람의 말에서 믿음과 확신을 요청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에 대한 토론에 '권위'라는 단어를 도입한다. 그는 〈우리는 권위에 우리의 믿음을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절에, 권위라는 단어는 우리 시대의 용법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라틴어에서 권위auctorita는 auctor(이 단어는 영어의 author에 해당한다)에서 기원했고, 원래의 의미는 유언장이나 다른 법적 서류의 타당성과 진정성을 보증했던 사람을 가리켰다. 권위는 어떤 사람, 예를 들어 행정관이나 유언장 작성자의 그러한 특성, 곧 어떤 사람이 말한 것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특성을 가리켰다. 이런 의미에서 권위는 인간 삶과 사회에 공통되는, 없어서는 안 될 측면이다. 우리가 참된 것으로 인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성실과 신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196-7)


8 지상과 천상의 나라: 하나님이 주님인 백성은 복이 있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이 평화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가 이해했듯이, 평화는 이생에서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 인류가 자신들 안에 건설할 수 있는 평화는 항상 부서지기 쉽고 불안정하며 덧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 땅 위의 평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약속도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평화는 항상 소망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도성이 열망하는 평화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선지자 하박국에 따르면, 우리가 소망하는 목적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추구할 뿐이다. 우리가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려면,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 그 선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에 뛰어난 매력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땅에 평화를 성취하려는 노력(비록 그것이 연약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이 시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223-4)


"하나님의 도성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마음의 갈망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해결될 수 있고, 평화에 대한 희망도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성이 아직 순례 중인 이 삶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온전한 시민이었다. 다른 시민들처럼 그들도 법, 안정, 일치를 존중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은 특정한 형태의 강제력 없이는 더불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의 권력, 판사가 휘두르는 칼의 권력, 집행관의 발톱, 군인의 무기, 주인의 징계, 그리고 선한 아버지의 엄격함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자신들만의 방법과 명분, 이유와 유용함을 지닌다. 사람들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동안, 사악한 사람들은 특정한 울타리 안에 갇히고, 선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평화롭게 살 수 있다.〉 다만 모든 정치제도는 임시적이며, 그것들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228-9)


"『하나님의 도성』 제2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국가론』에서 정치 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한 문장을 인용했다. 〈시민은 공통된 법 정신과 집단적 이익으로 연합된 다수의 사람들〉로 정의된다. 이 정의에서 법으로 사용된 단어가 jus다. 이 단어에서 라틴어 단어 justitia가, 영어 단어 justice가 각각 유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가 정의justice없는 정치 공동체, 공화국,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 정의(定義)를 이해했다고 설명한다. 〈진정한 정의가 없는 곳에는 진정한 jus, 곧 어떠한 법, 평등,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공화국은 단지 한 이익공동체일 수 없다. 그래서 공화국은 jus로 함께 묶여야 한다. 단지 공통된 이익에 기초해서 연합된 사회는 기껏해야 폭도나 해적 집단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정의는 없고 오직 도둑질과 무법과 착취만 있다면,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정의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정의와도 관련이 있다."(230)


9 초기 기독교 문학: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행동


"몇몇 기독교 시인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전통적 시로 다시 쓰려고 했다. 잘 맞춘 운율과 시적 어휘를 사용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낯익은 표현으로 종교적 시를 제공하고 싶어했다." "가령, 요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초기 기독교 시는 성경의 단어 〈예언자〉 대신, 라틴어 단어 〈점쟁이〉를 사용한다. 증인에 해당하는 성경의 단어인 〈순교자〉 대신, 라틴어 단어 〈목격자〉를 사용한다. 〈천사〉 대신 〈전령〉을 선택했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은, 그 시인은 〈부활〉이라는 단어는 피하고 대신 〈죽음을 목격하는 것에서 벗어났다〉란 표현을 사용했다. 성경의 단어 〈성전〉은 이교적 단어 〈성소〉로 대체되었고, 〈요구하다〉라는 멋진 라틴어 단어가 〈기도하다〉란 성경적 단어를 대체했다. 이런 변화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늘날 〈이번 주일에 나는 제1침례교회의 컬트에 참석할 예정이다〉라는 표현에서, 기독교 예배를 〈컬트〉라고 지칭할 때처럼 그것은 고대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꺼림칙한 것이었다."(243)


10 초기 기독교 미술: 이것을 다르게 만들다


"고대 기독교 도시들에서 가장 경멸받던 관행 중 하나는 죽은 자를 예배하는 것, 특히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뼈를 숭배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강력한 적이었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전 세계를 죽은 자들의 무덤과 비석으로 가득 채웠다〉고 불평했다. 4세기 말 로마 세계의 도시들에는 유물들, 곧 거룩한 사람들의 뼈를 보관하는 성소들이 흩어져 있었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기 위해 이런 거룩한 장소들을 경건하게 방문했다. 2세기 초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와 중보기도를 위해 무덤에 모임으로써 죽은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무덤에, 〈여기에 베드로가 있다〉라는 비문이 적힌 장식판을 걸기 위해서 벽에 벽감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이런 성소에서 성인들의 고귀한 몸을 담은 석관을 바라보기 위해 신자들이 앉아 있던 의자와 제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뼈들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사람의 현존을 분명히 보여주었다."(265)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의 견해에 따르면 성상금지는,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 역사상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살았던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진 성육신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 신앙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가능했다. 〈몸도 없고 형태도 없이 그의 본성은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하며, 하나님의 형태로 존재하는 그가 자기를 비우고 본질과 본성에서 종의 모양을 취하시고 육신의 몸으로 발견될 때, 당신은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의 놀라운 낮아짐, 그의 동정녀 탄생, 그의 요단강 세례, 다볼산에서의 변화, 우리를 고난에서 자유롭게 했던 그의 고통, 죽음, 기적을 묘사하라. 그의 구원의 십자가, 무덤, 부활, 승천을 보여주라.〉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묘사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느냐고 요하네스는 말했다."(271-2)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 모두 물질이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성상파괴론자들의 경우, 물질이 거룩하게 되는 최고의 예는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다. 성찬식에 사용되는 그 물질들을 사제가 축복함으로써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된다.〉 하지만 성상은 보다 흔하고, 축성기도를 통해 축성되거나 성화되지 않았다. 성상옹호론자들은 성상이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축성기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테오도르는 말한다. 〈그것의 모양만으로도 성화聖化되기에 충분하다.〉 나무와 물감은 나무와 물감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것은 나무 위에 그려진 형상이며, 성상에 의해 묘사된 인격이다. 그것이 그 성상을 귀하게 만든다. 그 형상이 닳거나 지워지면, 그것은 더 이상 성상이 아니고 더 이상 거룩한 물건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인격의 형상을 담고 있는 한, 그 성상은 거룩하다."(288)


11 윤리의 삶: 하나님 닮기


"기독교가 등장했을 때,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잘 발달된 도덕 형성체계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것의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이 의미했던 행복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말은 〈좋은 느낌〉이나 특정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 환경이 변하거나 행운이 개입하면 왔다가 떠나는 일시적인 상태다. 고대인들에게 행복은 영혼의 소유물이었다. 즉, 사람이 획득한 어떤 것, 한번 획득하면 쉽게 빼앗길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행복은 인간 삶의 최고 목적, 고대철학의 언어로 말하면 자연과의 일치 속에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가리켰다. 도덕철학은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 즉, 가능한 것을 다루었다. 이런 이유로 고대 윤리학은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 개념에 따라 사람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보다는, 특정한 방식의 삶을 통해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303)


"그리스인들에게 도덕 생활의 목적은 〈신 닮기〉이고, 기독교 사상가들은 〈하나님 닮기〉나 〈신화〉(神化)라는 언어를 환영했다." "클레멘스의 동시대인들에게 〈하나님 닮기〉는 덕의 실천을 의미했다. 기독교 작가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을 향한 안내자로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는 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닮기 위해 주어진 모델은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한 인간이자 인간의 육신을 입은 하나님인 예수의 완전한 삶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은 모방할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가 선택한 하나의 신적 속성은 팔복 중에서 예수가 언급한 가난이다." "겸손 역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정말로 그것은 참된 덕의 징표다. 오직 겸손을 통해, 우리는 오만과 자만이라는 독특하게 인간적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짐으로써 〈하나님을 닮는다〉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한다."(306-7)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인내에 대한 글을 썼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의인과 죄인 모두에게 빛을 비추신다. 하나님은 땅이 가치 있는 자와 무가치한 자 모두에게 열매를 맺도록 허락하신다. 그는 인간의 죄와 잘못을 참으시고, 죄인들이 하나님을 잊고 살 때도 자신의 진노를 참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내의 가장 가시적인 징표는 성육신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한 여인의 자궁 속에 잉태되도록 허락하셨고, 그리스도의 탄생 전까지 인내 속에 여러 달을 기다리셨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인내의 특이한 징표는 참을성이나 용기가 아니라 희망이다.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인내심이 없는 것은 희망 없이 사는 것이다. 인내는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미래를 지향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의 징표는 현재의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선을 기대하는 열망이다. 따라서 인내는 사랑을 포함한 다른 덕들의 열쇠가 된다."(313-5)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기독교적 삶의 출발점(뿐만 아니라 종점)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다른 기독교 사상가들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행복이 〈하나님 닮기〉 안에서 발견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처럼 그도 하나님 닮기가 신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산다는 뜻임을 잘 알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의 생명과 빛과 성결로 충만해진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도전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삶의 원천에 대해 보다 체계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그의 저작들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돌이켜서 선을 꼭 붙들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주목한다. 또한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그리스도인의 삶의 끈질긴 내적 갈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십계명, 산상수훈, 자유의지는 한 사람을 덕스럽게 만드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사람은 선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사랑의 밧줄로 하나님께 묶여 있어야 한다."(316-7)


12 영의 삶: 감각적 지성의 지식


"초대교회에서 읽었던 그리스어 역본 아가서에서, 신부가 자신의 연인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사랑에 상처 받는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신랑의 〈화살〉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을 관통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 박힌 멋진 화살은 바로 그리스도, 예언자 이사야의 〈갈고 닦은 화살〉(선택된 화살)이라고 그는 썼다. 영혼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로 상처 입을 때 그것은 불타오르고, 그 행복한 구절에서 〈보답하는 사랑〉을 제공한다. 스페인의 위대한 신비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런 정서를 수세기 후에 다시 되살렸다. 〈사랑은 보답으로 사랑을 요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을 하나님께 데려간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는 불이 붙었고, 위로 상승했다. 우리는 더욱 붉게 타오르며 위로 상승했다. 우리의 마음이 상승한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음의 제단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사랑의 타오르는 불〉이라고 말한다."(323)


"『신곡』 '천국편Paradiso'에서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정확히 이런 길〉, 곧 성육신을 의도하셨느냐고 묻는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자신이 지금 그에게 설명하려는 것이 사랑의 불꽃 속에서 지성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려져 있다〉고 상기시켜 주면서 자신의 답변을 시작한다. 우리가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을 투신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도 못하고, 관음증 환자나 구경꾼, 호기심 추구자로 남는다. 하니님에게 모순은 신성모독이다. 오직 우리가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를 하나님께로 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물의 진리를 관통할 수 있다. 사랑이 부재하면 우리 마음은 진리를 단단히 붙잡지 못하고, 오직 한 가지씩만 시도하면서 유치하고 미성숙한 채로 남는다. 단테가 말했다. 인간은 〈지성과 사랑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이 마지막 장의 주제는 사랑임에 틀림없다."(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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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jsdirtjdwjs 2022-02-0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 단계
http://www.godnara.co.kr/bbs/board.php?bo_table=03_01&wr_id=119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단계를 배워야 참 하나님을 알게되는데 천국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배워서 참 하나님께 나아 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섯단계을 모두 깨달으신분들은 참 하나님을 알게되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비밀들과 구원의 해를 알게 되실겁니다.
 
바울
귄터 보른캄 지음, 허혁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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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바울 서신에 나타난 바울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리스도인이며 선교사인 바울을 묘사할 때 아직도 바리새주의에 의해 대표되고, 이제는 예수의 부활에 의해 실증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선조들의 율법에 충실히 머물러 있는 확실한 바리새인임을 강조하는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배척함과 동시에 그들의 가장 고유한 거룩한 전통들을 배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실제의 바울은 전혀 다르다. 특히 빌립보서에서 분명히 밝힌 대로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義)를 얻으려는 그의 옛 바리새적인 열심을 버렸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오는 구원을 얻기 위해 그것을 '해로운 것', '배설물'로 여겼다. 물론 이 분명한 차이 때문에 사도행전은 원시적이고 유대주의적인 경향을 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의 견해들이 가능하게 된 것은 율법의 타당성 문제를 둘러싼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투쟁이 조정되고, 율법이 옛 편협한 제한성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23)


"특히 주목할 점은 누가의 작품 전체의 어느 한 구절에서도 사도 자신의 서신을 알았거나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미루어 사도행전이 성립되던 시대에는 광범위하게 교회 영역들에 유포되어 있던 대표적인 바울 서신 수집록이 아직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물론 개개 서신들은 이미 일찍부터 이웃 교회들 사이에 교환되고 있었다. 고대 교회의 다른 저술가들이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수집록의 확실한 흔적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다가, 1세기 90년대부터는 점점 증가된다. 사도행전이 아직 서신들을 모르고 있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사도행전 역시 대략 이 시대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에 앞서 저술, 완결되어 있던 누가복음서─이것은 70년 이후에 저술된 세 공관복음서들 중 마지막 것인데─가 80년대에 기록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연대를 가장 근거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누가는 직접적인 증인이 아니라 이차적인 보고자에 해당한다."(25-6)


"사도의 문서적 유산이 오직 서신들뿐이라는 사실은 역사적인 우연일 뿐 아니라 중요한 내용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수십 년 뒤에 나온 마가복음서 기자와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같이, 가령 어떤 복음서를 써서 나사렛 예수의 역사를 전할 생각을 가졌었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 또한 그는, 가령 우리가 그와 동시대의 유대인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고대 그리스도교의 문필가들에게서 보는 바와 같은, 구약성서의 개별 문헌들에 대한 주석서를 쓰거나 고대 교회 이후 많이 선을 보인 교회제도에 관한 것, 신학적인 논문, 교리 지침서를 저술하려고 생각했다고 볼 수도 없다." "모든 순수한 편지처럼, 바울의 서신들도 특정한 기회에, 그 때를 위해, 구체적인 동기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쓴 것이다." "바울 자신은 이 편지를 임시변통으로, 헤어져 있어서 당장은 이룰 수 없는─이미 불가능하게 되었거나 아직은 가능치 않은─만남에 대한 불충분한 대안으로 생각했다."(27-8)


제1부 생애와 활동


"종교적으로나 세계관적으로 극도의 분열 상태에 있던 고대 말기 주변 세계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유대 종교의 방사력과 유인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시국가의 안온한 영역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세계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정도로 확장되었으며, 이와 함께 인간 자신은 개별화되었다. 아직 옛 신들을 위해 신전이 세워지고 계속 제사와 제물을 드렸으나 그것들은 진부한 것이고 신들에 관한 신화들은 쓸모 없게 되었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위한 보호와 축복, 구원과 속량에 대한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이미 무력해졌다. 도처에서 옛 종교들과 특히 동양으로부터 쇄도해 오는 새로운 종교들의 융합과 혼합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이질적이고 복잡할수록 그만큼 더 매력이 있었다. 운명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과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는 밀의(密儀) 종교의 의식(儀式)과 구원의 교리가 지나치게 판을 쳤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교는 전혀 다른 것,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고자 했다."(44)


"디아스포라 회당의 선교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원칙들에 따라 수행되었으니 이방 주민 중에 유대인 공동체에 가담한 '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유일신론적인 신앙 고백, 최소한의 의전적 계명들(안식일 계명, 음식물 규정 등), 그리고 율법의 윤리적인 기본 요구들을 이행하는 것으로 족했다. 그들에게는 물론 할례도, 그와 함께 유대 민족의 완전한 지체로 간주되는 '개종자(Proselyt :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의 신분으로 들어오는 것도 강요하지는 않았다. 율법에 대해 엄격한, 바리새파의 지도하에 있는 팔레스틴 유대교는 이 관례를 배교적인 행위라고 판단하고 모든 사람에 대한 할례의 요구를 고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파 역시 이방 선교에 열중했다. 물론 디아스포라 유대교에 비해 그 성과가 미미했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로써 이미 유대교적 이방 선교의 영역에는 할례에 대한 문제로 나뉜 두 방향이 서로 반목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47-8)


"헬레니즘 파는 그리스도에 대한 극히 혁명적인 주장했으며, 이러한 이해는 유대교적인 엄격한 율법 이해와 충돌을 일으켰고, 성스러운 전통들과 성전 예배, 선택된 백성만 구원받는다는 배타적인 주장을 문제시했다.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인 바울에게─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그리스도인을 박해하도록 자극한 이유들이다." "여기서 예수의 메시아됨에 대한 신앙이, 엄격한 유대교도에게는 충분한 박해의 이유가 되었다는 널리 알려진, 그러나 잘못된 가정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눈에도 과오를 범하고 있는 기괴한 하나의 유대교 종파로 보이기는 했을 것이나 결코 신성모독적인 이단은 아니었다. 이런 '예언자'를, 혹은 저런 '예언자'를 메시아로 믿은 추종자들의 집단은 이 밖에도 유대교 내에 적지 않은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유대교 측으로부터 박해받고 추방당해야 했던 일은 없었다."(53)


"바울이 후기에 에베소에서 활동할 때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글은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들의 선동으로 인해 유발되었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전하는, 율법에 구애되지 않는 복음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오직 선택된 유대 민족의 일원이 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이들의 공격과 더불어 동시에 그의 사도직도 문제시되었다. 아무도 이 직책을 그에게 위임한 이가 없다는 것이다. 적대자들이 비방하는 내용은 바울이 소식을 변조하고 자칭 사도가 되려는 독단적인 월권을 저질렀다는 두 가지였다. 그 때문에 그는 스스로 공격하면서 동시에 그의 서신에서 아주 날카로운 어조로, 이방인들을 위한 그의 복음의 진리와 그의 사명의 신적인 근원이란 두 가지 점을 변호했다. 이 둘은 불가분의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이것들은 같은 내용의 두 가지 측면이고, 그 배후에는 하나의 신적인 의지의 권위가 있다."(57-8)


"예루살렘 회합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그의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원사도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온전히 그리고 그것의 모든 결론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마치 신에 의한 기적적인 작용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직접적인 통찰이 순수한 신학적인 논증들보다 더 강하게 관여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가 회심하고 소명을 받은 이래 바울에게 거의 의심 없었던, 그리고 후에 그의 서신들에서 전개된 신의 새 창조로서의 교회에 대한 인식들, 즉 교회에서는 이미 유대인도 없고 모두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갈 3, 28)라는 인식들이 무조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제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유대인계 그리스도교 교회와 유대교인들에 대한 설교에서는 오히려 지금까지의 것이 그대로 계속 타당하고 안디옥 사람들은 그들대로 이 이상 더 강요받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그렇게 할 사람도 없었음이 분명하다."(82)


"바울은 개체 교회를 넘어서 언제나 곧 나라와 지방들을 생각한다. 방금 세워진 교회일지라도 모두 그에게는 각기 그 모든 지방을 위해 있는 것이다: 가령 빌립보 교회는 마게도냐 지방을 위해(빌 4, 15),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위해(살전 1, 7-8), 고린도 교회는 아가야를 위해(고전 16, 15 고후 1, 1),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를 위해(롬 16, 5 ; 고전 16, 19 ; 고후 1, 8) 있다." "즉 복음은 단 한 곳에만 선교되어도 스스로 길을 내고 개개 도시로부터 모든 주변 지방으로 퍼진다는 것이다." "남겨두고 간 교회들에 대해 바울이 무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얼마나 그들에 대해 책임지고 있었는지는 그의 서신들이 증명한다. 그러나 그가 이 교회들을 위한 지속적인 염려는 그의 동역자들에게 위임하고 그 자신은 그의 서신들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순간적인 방문으로써 교회들을 지킬 수 있었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한다는 그의 원대한 목표는 그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초조하게 했기 때문이다."(100-1)


"바울이 떠난 이후 고린도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고 활동적이었으며 결코 종교적인 가난과 불모에 떨어지지 않았다(1, 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혼돈된 모습을 제공하고 있다. 교회의 풍요로움이 교회에 큰 위험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교회에 당부하면서 또한 예리하게 비판한다. 그가 자세히 언급한 첫 질문(고전 1-4장)은 이미 그 교회가 바울 자신에 의해 닦여진 토대로부터 빗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교회는 경쟁적인 여러 파로 분열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의 통일성이 위협 받고 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전 1, 12)." "그 당파들의 구성과 논쟁의 출발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떻게 싸웠든지 간에 교회 생활에 개입한 열광주의는 바울에 의해 고린도전서에서 처리되어야 했던, 참으로 위험한 현상이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자신들만이 이미 '완전한' 상태에 도달했고, '영'과 '지식'을 소유했다고 자랑했다."(119-20)


"고린도전서 8-10장은 특히 주의할 만하다. 바울은 여기에서 열광주의자들이 자신을 변호하는 모든 거짓 신학적 논증들을 얼마나 단호하게 멸시하고, 제기된 문제들을 신과 주변 세계 앞에 져야 할 다른 사람을 위한 책임이라는 주제 하에서 얼마나 단호하게 다루었는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구원에 참여한다는 신념 하에 주의 만찬이 베풀어진 것은 확실하나 부유한 사람들이 이 만찬에 수반된 공동 식사에서 가난한 자들, 늦게 오는 자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바울에 의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수치스럽게 하는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예배 때 황홀경에서 연설하는 데 몰두하는 영 소유자들의 소란한 경쟁에 반대하고 이성적인 분명한 말로 선포함으로 인해 아직 멀리 있는 자들과 불신자들을 설복하고 그들을 감화시킬 것을 종용했다."(122)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이방 세계의 신적인 이적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의 사도직의 합법성을 변호해야 했었다. 이에 반해 고린도에서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들의 이방인 경쟁자들과 비슷하게 행동하며 바울과 그의 복음을 멸시하고 드러내 놓고 그에게 도전했다. 그들의 척도들에 의하면,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에 의해 위임된 참 사도의 표지들이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 표지들이 있음을 주장했고 그것들로 그들의 인상을 교회에 심었다." "이에 맞서 바울이 '자랑'으로 여긴 것은 바로 그의 선포에 의해 신앙에로 일깨워진 교회이며, 그의 나날의 노동의 피로이며 그가 그의 일에서 경험한 수난과 박해의 연속이다. 이것이 그에게는 참 '사도의 표지'이다." "새로운 적들이 고린도에서 교란을 일삼는데 직면해 바울은 그의 사도직의 옹호와 함께 그의 복음과 그리스도인됨의 이해 전반을 위해 싸워야 했다."(124-5)


"자신의 생애사의 마지막 장이 될 예루살렘 여행길에 오른 바울은 '장로들'을 에베소로부터 불러서 예언자적 선견으로 곧 순교하리라는 감동적인 장황한 연설로 그들과 작별한다(행 20, 17-38)."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은 무엇보다도 아주 자명하게 전제된 교회의 장로 제도인데, 이것은 바울 서신들이 아직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세의 것임을 특징지어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별 연설 자체의 문체와 내용이다. 이 연설은 사도의 전체 활동을 회고하면서 그의 마지막을 예측하고 그가 죽은 후에 물어뜯는 늑대처럼 교회를 파괴할 거짓 교사들의 출현을 예고한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바울은 그의 순수한 가르침의 전권을 이 장로들에게 계승시키고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양떼의 '관리자들(Episkopoi)'로 선임된 직권자들로서 그들을 임명한다." "이는 후기 교회가 특히 이단 방지 싸움에서 발전시킨 사상들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151-2)


"바울이 구금되기까지의 예루살렘 사건들에 관한 보도들은, 사도행전에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는 예루살렘 여행 목적, 즉 헌금의 전달과 연결시킬 때에 비로소 투명해진다." "헌금 전달과 함께 이것으로써 바울이 교회에서 가능하게 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의 통일을 과시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물론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그렇게도 큰 실천적이며 신학적인 정력을 가지고 모은 원교회를 위한 이방인계 그리스도 교회들의 헌금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만났는데 바울이 그의 동반자 가운데 유대교인이 아닌 한 사람, 즉 에베소 출신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온 줄 잘못 알고 죽이려고 했다. 그에 대한 소동은 결국 로마 군인이 개입해서 그를 보호 검속해 유대 군중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한다(행 21, 27-36). 그 후 바울은 로마의 죄수가 되었다."(152-4)


"누가가 바울의 재판의 계속과 그의 불법적인 죽음에 관해 알면서도(행 20, 22 이하, 21, 10 이하) 한 마디 말도 시사하지 않은 것은 기이하다. 그러나 누가적인 역사서의 구상, 즉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사마리아를 지나 땅 끝까지 이른 복음의 길을 서술한다(행 1, 8)는 계획을 회상하면, 이 책의 평화로운 마무리는 이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저자는 이 위대한 이방 민족의 선교사로 하여금 로마에서도 그의 위력적인 일을 완수하게 했다. 그리고 특별히 바울의 순교에 관한 침묵이 사도행전의 현실적인 목표 설정을 통해서 이해된다. 사도행전은 신자들을 고무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이방 제국에 대한 변호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이방 제국이 바울의 이 모습에서 그리스도교의 위대함과 평화의 의지에 관한 인상을 받고 로마 관원의 많은 대표들이 바울의 역사 과정에서 이미 보여 준 것과 같은 현명하고 바른 태도를 교회에 대해 취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사도의 실제 최후는 달랐을 것이다."(159)


제2부 소식과 신학


"지상의 예수의 선포와, 바울뿐만 아니라 부활 후의 교회 전반의 그리스도 소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놓여 있다. 이 차이는 생각 없는 사람만이 간과할 뿐이다. 바울은 그저 지상 예수의 설교를 전달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이 차이는 현저하게도 신약성서 문헌들이 각기 달리 보도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복음서들이 단순화된 도식적인 말로, 예수의 죽음과 그의 부활까지 그의 지상 역사 영역에서 일어난 그의 설교와 활동에 관해서 보도했다면, 사도의 소식(서신들, 사도행전, 요한묵시록)에서는 전자의 목표점이 부활 후의 증인들을 낳는 근거와 시초가 된다. 선포자가 선포되는 자로 되면서 그의 지상 역사의 제한성은 제거되었으며, 예수의 말 대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 부활, 마지막 날에 그의 옴에 관한 말이 등장한다. 바울을 이 과정의 제일 첫 책임자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서신들은 역시 우리로 하여금 특히 뚜렷하게 이 놀라운 사태에 직면하게 한다."(164)


"물론 이 변화 과정에는 종교사학적으로 후기 유대교적·묵시 문학적 사상들과 후기 고대 주변 세계의 신화적 표상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지상적인 예수가 신화적인 신적 존재로 바뀌고 역사는 절망적으로 포기되었다는 널리 알려진 주장은 피상적이고 잘못된 것이다." "원그리스도교적 증언들과 고백들, 즉 구약성서적·유대교적인 혹은 헬레니즘적인 언어로 그를 부른 수많은 호칭들이 예수의 이 구원의 의미를 분명히 말해 준다: 메시아, 그리스도, 퀴리오스(主), 사람의 아들(人子), 신의 아들 등. 이 모든 호칭들이 지상적인 예수를 대신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상적인 예수가 폐기된 것은 아니다. 그의 이름도 우연하거나, 공허한 혹은 바꿀 수 있는 낱말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호칭들은 오직 그만이 신에 의해 세계에서 성취된 구원의 내용과 전달자라는 것을 말한다. 선포되는 말을 듣고 신앙으로 대답하는 자들은 다 함께 이 사건에 소속되고 관련된다."(165-6)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선포를 위해 성별(聖別)되고 부름을 받고 파견되었음을 알고 있다(롬 1, 1 ; 갈 1, 15)." "복음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해 바울은 묵시 문학적인 울림으로 말하고 있다: 〈신의 의가 복음에서 계시된다〉(Apokalyptetai, 롬 1, 17)."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와 같이, 그가 미래적인 사건들을 예고하고 유대교적 묵시 문학에서처럼 환상적으로 세계의 파멸과 새 세대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 이미 지금 복음 자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오고 있는 구원과 파멸의 가능성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원을 가져오는 신의 도래가 그 안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복음 자체가 〈믿는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는 신의 능력〉이다(롬 1, 16). 이것은 이미 묵시 문학적 의도에 일치하지 않는다. 유대교적·원그리스도교적 묵시 문학에서 먼 혹은 가까운 미래에 기다려지던 것이 복음에서는 현재가 된 것이다."(169-70)


"아직 실제로 주목을 끌지는 않지만 지적되어야 할 중요한 바울 신학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즉 그의 신학은 처음과 끝이 서로 어울리는 주제들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배열된 체계로서, 이른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으로 그것을 재생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강하게 반대한다. 많은 학문적인 진술들이 마치 여기에 그런 어려움이 없는 것같이 그의 신학을 다루며 신과 그리스도, 인간, 구원, 성례전, 교회, 마지막 일들과 그와 유사한 것들에 관한 바울의 진술들을 열심히 체계적으로 배열한다. 그들은 흩어져 있는 것을 한데 모아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 수 있으면 있을수록 더 높은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설사 모든 구절을 위해 필요한 증거를 가져다 댈지라도 다음과 같은 단순한 관찰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은 거짓이 된다. 즉 바울의 진술들은 교의학적인 주제들의 체계적인 배열에 있지 않고 거의 언제나 단편적이며 항상 다른 것들과 엉켜 있다는 것이다."(172-3)


"구약성서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서도 율법은 그 원래의 의미상 구원과 생명을 위한 신의 부름이며 처방이다(롬 2, 6 이하 ; 7, 10). 율법은 순종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율법은 십계명으로, 특히 사랑의 계명으로 종합되면서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다(롬 7, 7 ; 13, 9 ; 갈 5, 14)." "그러나 바울에 이르러 바로 이 성스럽고 의롭고 선한 율법(롬 7, 12.16)이 실제로는 이미 구원과 생명에 인도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비로소 부각되었다. 이 의미에서 그는 율법의 보편성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했다." "즉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 앞에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보기에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실천하는 것도 유혹적으로 지배하는 죄의 세력의 구속에서 인간을 풀어 주지 못한다. 율법은 그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 율법의 지배하에 일어나는 모든 사람의 상실성의 불가피한 이 연대성이 비로소 그의 소식의 본래적 혁명성이다."(178-9)


"바울이 가르치는 의(義)는 신은 의롭다는 일반적인 신학 명제가 아니다. 그의 소식의 특수성은 믿는 자들에게 신의 의(義)를 넘겨 주는 것이다." "신의 의는 경건한 자가 율법의 일들에 의해 얻어내는 '의'와 정면으로, 배타적으로 반대된다. 그가 자신의 열심으로 이루어 놓은 것은 언제나 단지 그 '자신의' 의(롬 10, 3)에 불과하며 결코 신의 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신만이 의롭다고 선언하고 그럼으로써 의롭게 한다. 반면에 인간은 수동적이다. 즉 인간은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 의롭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소유격 결합인 '신의 의'는 문법적으로 말해서 주어적 소유격(이렇게 보면 신은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을 배제하는 먼 그의 존엄성에 숨어 버릴 것이다)이 아니라 근원자의 소유격을 의미한 것이다. 즉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그의 의를 마련해 주고 그를 의로 세움으로써, 신의 이러한 선언과 행위 없이는 멸망할 인간으로 하여금 지금의 신 앞에서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194-6)


"'오직 신에 의해서만(solo deo)' 그리고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sola gratia)'에는 만인을 포괄하는 철두철미 새로운 의미가 들어 있다. 신앙을 위한 신의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 근거를 두고 율법 없이 제시되었다(롬 3, 21 이하).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 관한 사상은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신의 언약의 성실에 대한 증거를 보고, 이스라엘의 범죄에 의해 파기된 시내산 계약의 회복에 그리스도를 관련시킨 유대인계 원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바울 자신의 해석에서 곧 완전히 후퇴하고, 그 대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바 현재에서 세계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며 일어나는 신의 행위가 부각된다(롬 3, 26)." "오직 신만이 의롭게 하고 경건한 사람은 신의 은혜에 의지한다는 사상을 통해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한정된 옛 시내산 언약에 철저히 대립되는 새로운 언약 사상을 확언한다."(198-9)


"소식과 고백은 시간과 더불어 영원히 어제에 머물러 보리는 옛 시대의 사건들을 내용으로 갖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그것이 일회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구원 사건으로서 현재와 미래를 규정한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깨워져서 다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죽음이 다시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는 그가 그의 죽음으로 죄에 대해 단번에 죽고 그의 삶으로 그는 신에 대해 살아났음이다〉(롬 6, 9-10; 비교. 14, 9). 복음은 구원 사건을 진정한 의미에서 '현재화'하고 이 사건에 스스로 속한다; 복음은 단지 이 사건에 관한 차후의 보도가 아니다. 복음의 선포와 함께 새로운 창조의 날의 빛이 신자들의 마음에서 빛나기 시작한다(고후 4, 6).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세계에 대한 신의 화해의 행위에 관해 말하면서 동시에 신이 '직책'을, 즉 '화해의 말'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선포가 단지 지나간 옛일의 회상만이 아닌 것처럼 그것은 미래에 대한 위로이다."(219)


"바울의 모든 역사는 양면에서 협공을 받았다. 한쪽은 율법과 할례, 제의적 의식을 받아들여 특권적인 구원의 백성에 관여하면서 그의 절망적인 길을 다시 타개하려는 시도이고, 다른 쪽은 외견상 반대 방향을 가는 노력같이 보이는데, 즉 모든 지상적인 제약들로부터 벗어나서─파렴치하게 선전되고 실천되는 윤리적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영에서' 새로운 실존을 보려는 것이다. 율법성에 되돌아가는 것과 영적인 체험에 심취하는 것─바울은 이 둘에 대해, 함께 십자가의 말을 부끄럽게 하고 무력하게 하는 것이며, 복음이 믿는 자들을 찾고 만나고 붙잡는 지상적이고 역사적인 현재를 상상적인 과거 또는 환상적인 '완성'에 넘겨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든 혹은 저렇게든 그의 소식에 만족하지 않는 그의 적들과 비판가들은 함께 절망적인 시대 착오에 빠졌으며, 참된 오늘과 지금을 탈취하는 데 그리고 이와 함께 그의 상대자, 즉 그 말이 상대하면서 해방시키려는 인간을 은혜의 말에서 탈취했다."(252-3)


"묵시 문학의 언어와 표상들이 바울 신학에 끼친 영향은 강하나 이 신학에서 심오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들은 완전히 거세되거나, 대개 단편적으로 또는 통일성 없이 산재할 뿐이다. 그의 종말론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냄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세대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바울의 신학에서 이것에 긴밀하게 연결된 것은 그 전에 전혀 없었던, 그에 의해 철저히 생각되고 전개된 통찰, 즉 신 앞에서 상실된 인간이 세계의 특징으로 확인되고 신의 구원의 행위는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이 인간에게 일어났다는 통찰이다. 신앙의 때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그의 도래 사이의 때로 된 것이다." "열광주의자들은 너무도 성급하게 때의 성취와 구원의 시작에 관한 소식을 탐욕적으로 받아들이고 새 시대를 그들 자신의 실존에서 연출시키되 낮아지고 고난받는 그리스도교적 현존의 나그네됨을 스스로 감내할 각오 없이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269)


결론 바울과 예수


"초기 교회사에서 바울에 대한 평가는 극히 분열적이었다. 예로부터 유대인계 그리스도교 측에서는 그를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의 적으로서 용서 없이 버렸다. 아니 이 그룹들에서는 그를 모든 이단자의 두목인 시몬 마구스와 동일시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위僞클레멘스서). 1세기 말에는 그를 높이 존경하고 그의 서신들을 인용하는 교회의 문필가도 몇 있었다(클레멘스 1서,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폴리갑). 그러나 이 밖에 바울을 자기 편에 둠으로써 그로 하여금 교회의 의심을 받게 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소종파의 두목들, 특히 마르시온 같은 사람이 곧바로 등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수십 년 동안 침묵 속에 파묻히거나 위조된 베드로후서(2세기 중엽)에서와 같이 '사랑하는 형제'로 호칭은 되지만 역시 주저하면서만 언급되었다. 그의 서신들의 난해성 때문에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스스로 멸망에 이르렀기' (벧후 3, 15-16) 때문이다."(304-5)


"'바울이 아니라 예수'라는 구호를 내세우는 이들은 바울이 비정상적인 묵시 문학적 헬레니즘계 유대교, 그러나 아주 이방적인, 그리스·근동적 신화와 사상들에 희생되었으며 동시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불행한 대립과 예수 자신의 설교 및 순수한 유대교를 변질시킨 교회의 교리 전통에 대해 본래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 옛날의 많이 알려진 논증들─지금은 세분화되고 완전히 변한 전제들이기는 하지만─이 새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즉 그들은, 율법과 할례의 제거, 예수의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변질시킨 것, 그에게서 이미 현재한다는 종말론적 구원의 시대에 대한 선포─이것은 세계와 역사 안에서 날마다 겪는 모든 경험들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이스라엘의 희망의 포기, 끝으로 개인을 민족과 역사, 세계의 숨은 보호에서 분리시킨 것, 아니 그것들을 피조물로 인정하지 않고 악마화한 것 등을 바울의 책임으로 지적한다."(307)


"그러나 바울은 지상의 예수의 말들 또는 비슷한 말들에도 직접 자신을 결부시키지 않았다. 그의 모든 말은 오히려 그가 그런 것들을 알지조차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자신 있게, 많은 사람들에게 아마 놀랍고 역설적으로 들릴 주장, 즉 거의 2천 년의 거리를 둔 오늘의 우리가 아마 역사적 예수에 관해 바울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주장을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가 예수에 관해 아는 것, 즉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해방의 일을 선포하고 신의 약속을 확인하는 '예(Ja)와 아멘'으로서 예수 자신을 이해했다(고후 1, 17 이하)." "예수와 바울 모두의 설교는 깨어 있으라는 부름과 고난과 시련에 대비하라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여기서 깨어있음과 대비는 불확실성과 묵시 문학적인 유토피아의 설계, 또는 인간이 '무덤 직전에서도 가질 수' 있는 희망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날의 빛 가운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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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치의 조건 - 미국 유일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서 배우는
조시 맥짐시 지음, 정미나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제1부 미국을 살린 뉴딜, 뉴딜을 지휘한 루스벨트


"1920년대에 등장한 다원주의는 사회가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엘리트 권력에 의해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이 조화를 이뤄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상이다.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따라 잘 정립된 다원주의는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가 고정적이고 위계적 방법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고 여기던 이전의 가정에서 탈피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고 역동적이어서 그런 식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원주의의 중심 가치관은 궁극적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결정과 행동의 연속적 과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전문적 지식의 역할을 경시하여 전문가의 위상을 지도자에서 남들이 더 나은 답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격하시켰다. 다원주의자들은 전문가들이 특정 원인에서 특정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또한 본질적으로 거대한 시스템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25)


"다원주의자들은 광범위한 진실이나 전체가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며, 특정 시기에 따라 고유한 모습을 취한다고 여겼다." "다원주의자들은 지역, 공동체, 공익, 연합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정부에게 정책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을 요구했다. 즉, 정부는 다양한 시각을 규합하여 문제 해결을 촉진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하며, 주어진 상황의 다양한 특징들을 처리할 수 있는 전문가 팀이 될 것을 주장했다. 이런 다원주의의 주장에 의하면, 정부 정책은 너무 전반적이거나 중앙집권적이어서는 안 되고 너무 지령적이어서도 안 되었다. 또한 지역적 조건들을 존중하여 정부 정책의 목표가 지역민들, 즉 일반 대중에게 공통의 노력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다원주의자들은 사회조직이 번영하려면 이런 식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루스벨트의 대통령 임기는 미국 정치사에서 이런 다원주의가 구현되는 시기였다."(26-7)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공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렇게 되면 공공의 자유는 더 이상 대중의 욕구의 합으로 규정되지 않고 공공 이익의 기본적 조화를 이끌어내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지도부에 의해 규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훌륭한 사회란 기능적 그룹들로 이루어진 사회이고, 각 개인에게는 주어진 역할이 있으며, 개인이 그 역할을 펼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사회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정부이며, 정부의 정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전문적 지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회적 지식에 따라 각 개인과 그룹의 기능이 정해지며,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이나 그룹의 사회제도 내에서의 가치도 정해진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그룹이 역할 수행 시에 합리적으로 행동하도록 촉구함으로써 사회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돕는다고 여겼다."(34)


"루스벨트의 기질 가운데 병으로 인해 가장 두드러지게 발휘된 부분은 내면의 용기였다. 그는 혼자 힘으로도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당장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이며, 그 어떤 시련도 자신을 흔들지 못한다고 여겼다." "조금 불확실한 견해지만 소아마비라는 병마가 루스벨트의 사회적 동정심을 키워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시의 보편적인 사회적 관념에 길들여져 있었지만, 그것에 의지해 내면의 안정을 얻지는 않았다. 가령 흑인이 대체로 하인이 되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하인이 아닌 흑인을 보고 의아해하지는 않았다. 또 반유대주의적 언급을 묵인하고 즐기기조차 하면서도 유대인을 친구나 협력자로 삼길 꺼려하지도 않았다. 때때로 인격과 성격이 인종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국민성이라는 개념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올바른 국내 질서나 세계 질서에 대해 판단할 때 이런 개념을 잣대로 삼지는 않았다."(40-1)


제2부 민주적 다원주의의 새로운 세상을 열다


"루스벨트는 복잡한 정치적·개인적 경험을 거치는 와중에 인간관계란 본래 심리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35년 국가비상대책심의회와 국가의 경제 건전성을 판단하는 여러 가지 척도들에 대해 토론할 때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최종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나는 1932년 이후로 이번에 미시시피 강 서부에 처음 와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얼굴이 아주 확연히 달라보였습니다. 그 달라진 모습은 기차 끝 쪽에 서서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번 알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얼굴에 용기가 가득했고, 표정도 활기찼습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 극복해낼 겁니다.〉 그것은 루스벨트가 육성하려고 애썼던 바로 그런 기운찬 용기였다. 루스벨트는 스스로도 자신에 찬 분위기를 풍겼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깊이 있고 심오한 품성에서 우러나오는 태도라고 믿었다."(213-4)


"(종종 잔인하거나 배려 없는 태도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히 있었지만) 루스벨트는 사람들을 국가의 도구로 삼았다. 그런 만큼 그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국가의 목적을 달성해내는 능력이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자질을 최대한 이용했다. 설계와 고안 능력을 발휘하고 목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면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헌신적인 이들을 모아서 그들의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했다. 이것은 공직에 몸담은 모든 사람들, 특히 중대한 책무를 맡은 사람들로서는 성공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리처드 닉슨처럼) 개인의 안위를 공적 책임보다 더 중시할 경우에는 그로 인해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된다. 루스벨트에게 사람들은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는 다양한 물건들과 같았다. 그 물건들은 그가 원할 때 조정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 것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이용하더라도 서툴게 이용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잘 이용했다."(216-7)


"루스벨트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판단, 특히 자신의 타이밍 감각을 믿었다. 그는 고문들에게 때에 따라 대담한 모습과 소심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즉, 행동할 때가 됐다고 결정할 때는 대담했고,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는 소심했다. 그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하면 실패와 곤경의 위험 앞에서도 완강할 만큼 단호해졌다. 반면에 오랜 기간 좌절에 빠져서 행동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동안에는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이 중심에 서서 통제하고 있지 않으면 흥미를 잃었다." "그는 오랫동안 침착하거나 난처하거나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대담한 행동을 취하곤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취임 후 첫 100일' 중에는 연방 대법원 개혁 계획, 공화당원인 스팀슨과 녹스의 각료 임명, 무기대여법(Lend-Lease Bill), 무기한 국가비상사태 선언, 독일의 U보트에 대한 '목격 즉시 발사' 명령, 무조건 항복 원칙 같은 눈에 띄는 결과들을 내놓았다."(221-2)


"루스벨트가 한 다음의 말에서 그의 정치적 현실 감각이 잘 드러난다. 〈후보자는 유권자들을 놀라게 해도 되지만 충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자신의 프로그램에 내포된 이점을 교육시킬 수 있으나, 후보자는 국민의 편견을 받아들이고 그 편견이 좋은 방향으로 이용되도록 돌려야 한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은 정치적 자산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 자산을 너무 빨리 소비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적 정치인들은 동맹자로 신뢰할 수 없다는 신념도 있었다. 루스벨트의 눈에 비친 진보주의자들은 언제나 기꺼이 소속된 편에서 떠날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타협의 순간이 오면 자신들의 편에서 가능한 것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루스벨트는 민주당을 '자유주의'나 '진보주의'의 당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진보주의자들의 지원에만 기대서는 그 바람을 달성할 수 없다고 믿었다."(224-5)


"루스벨트는 투표자들의 지지기반이 다양했다. 북부지역 백인 가톨릭교도와 남부지역 백인들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투표에 무관심했던 유권자층을 투표하러 나오게 만든 일은 루스벨트의 정치적 기반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1928~1940년에 민주당이 새로 동원한 투표자 수가 자연적으로 증가한 유권자 수의 세 배 이상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 상당수의 시카고 노동자들, 특히 백인 소수민족 노동자들이 대거 투표를 하기 시작했다. 뉴딜 프로그램들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국가에 대해서나 복지와 안전보장을 제공해주는 방면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신뢰가 생겼던 것이다." "1936년에 루스벨트가 얻은 지지표 가운데 20퍼센트 정도는 통상적으로 공화당원을 자처하던 투표자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뉴딜정책이 정부의 기업 규제와 노조 결정 지지 쪽으로 진행되자 북부의 진보파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으로 이동했던 것이다."(240-3)


"루스벨트의 두 번째 정치적 기반은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당을 차지하게 된 민주당의 위상이었다. 의회 다수당의 위상은 루스벨트의 인기에 크게 힘입은 결과였다.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는 상당히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1920년대의 민주당원들은 압도적으로 '안전한' 민주당 표밭에 의존하면서 대체로 남부지역과 북부 도시 인근의 소수민 가톨릭교도 지역의 표에 기대야만 했었고, 공화당원들과의 경합에서 통상적으로 거둔 승률은 40퍼센트 이하였다. 그러나 1932년부터 1940년까지는 남부지역과 도시지역의 지지 기반을 유지하면서 '안전한' 의석을 추가로 확보하여 경합에서 57퍼센트의 승률을 거두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의회의 민주당 의원들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루스벨트에 대한 충성심과 결부시켰다. 대통령을 부인했다간 당의 힘을 약화시키고 공화당에 정권을 넘겨줄 위험이 있었다." "의회의 어떤 회기 중에도 민주당 의원들의 루스벨트 지지율이 70퍼센트 아래로 내려간 적은 없었다."(248-9)


"루스벨트는 첫 임기의 절반에 걸쳐 연방 대법원의 영향력을 제한하거나 무효화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심지어 연방 대법원의 반발을 북돋기 위한 일환으로서, 일부러 사건을 보내 반뉴딜 판결이 더 나오게 하라고 조장하기도 했다. '뭔가를 할' 적절한 방법을 찾는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뉴딜 법안을 수월하게 승인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을 제안했지만, 헌법 개정 절차가 너무 오래 걸리고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이 방식은 거절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지루한 토론이 이어진 끝에 근본 문제는 헌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판사들의 헌법 해석에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국가산업부흥국에 불리한 판결은 만장일치였으나, 그 외의 다른 판결들은 1~3표씩의 표차가 있었다. 다시 말해, 헌법을 바꾸는 대신 대법원의 판사 구성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여러 곳에서 의회를 통해 대법원의 판사 수를 늘리자는 제안이 나왔다."(292)


"그러나 대법원과의 투쟁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법원 재정비 안은 뉴딜의 그 어떤 경제 부문 입법보다 더 효과적으로 공화당원들을 단결시켰다. 반면에 민주당원들은 물론 양당의 진보파 개혁가들을 분열시켜놓았다. 또한 루스벨트도 패배할 수 있으며, 대통령의 인기가 어디에서나 탄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적대자들에게 공격할 결정적 수단을 제공해주었다. 이제 적대자들은 루스벨트에게 '독재자'를 꿈꾸고 있다는 이미지를 씌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이 활개치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기세를 떨치며, 라틴아메리카에서 파시스트 독재정권이 부상하고 있던 1930년대 말에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강력한 공격 수단이었다." "아울러 루스벨트가 간파하지 못한 점은 국민들은 '뭔가를 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막상 하려는 일을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294)


제3부 더 강한 미국,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고립주의자들은 대부분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국제연맹이나 국제사법재판소 같은 국제협력기구를 불신했고, 방어를 위해 군사적 대비를 갖출 것을 주장했다. 1930년대에 고립주의자들은 루스벨트가 외교정책을 수립하여 유연성을 발휘하는 데 제한을 가할 만큼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은 루스벨트의 국제연맹과의 협력 시도를 사사건건 비난했고, 군축을 위한 협력 시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전쟁 채무로 인해 채무불이행에 빠진 국가에 대출을 해주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미국이 교전 중인 국가를 지원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로 중립 법안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루스벨트가 다른 나라들과 관세율을 낮추는 협정을 맺으려 할 때도 반대했다. 이러한 협정은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주장이었다. 그들은 '호혜무역 협정' 법안이 나올 때마다 통과를 저지하다가 번번이 실패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그들의 단결력은 증대되어갔다."(317)


"사실 라인란트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세계 강대국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루스벨트만이 평화에 대한 히틀러의 위협을 정확히 헤아리고 있었고, 루스벨트만이 히틀러를 봉쇄하기 위해서 무력으로 위협을 저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져보면, 루스벨트의 적대자들은 미국 국민의 눈을 멀게 하여 세계질서가 서서히 파괴되고 있음을 보지 못하게 했고, 건설적인 정책을 개발하기보다는 루스벨트를 공격하기 좋아했다. 그리고 자국의 심리적·물질적 전쟁 대비를 방해했고, 대통령과의 싸움으로 자신들의 위신을 손상시켰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루스벨트의 외교정책이 평화 유지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36년 8월에 루스벨트는 전쟁을 혐오한다고 공표했으며,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외교정책 수립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1930년대 말의 세계 상황이 평화가 아닌 전쟁을 요구했다는 점이다."(318-20)


# 라인란트 사건 : 1936년 3월 히틀러의 군대가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로 진군한 사건


"루스벨트는 뉴딜정책 초창기 이후로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노변담화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설명했다. 이때의 이야기는 대체로 히틀러에 저항하는 이들을 원조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을 최선의 방법이라는 주장의 되풀이였다. 연설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특별히 더 긴박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일부 실업가들이 공장 생산능력의 확대가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생산능력 확대가 추후에 국가의 과잉생산을 더 부추기기만 할 것을 우려했다. 루스벨트는 이런 우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새로운 방어시설이 요구되어 추가생산 능력이 필요해질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생산 확대를 하지 않으면 위험성이 아주 높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가가 〈전쟁만큼이나 심각한 비상사태를 맞았다〉면서 교전 중일 때와 마찬가지의 헌신과 희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국이 〈민주주의의 거대 병기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40-1)


"루스벨트는 강력한 행동을 정당화해줄 사건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보았다. 모겐소에게 말했듯이, 〈자진해서 전쟁에 나서기보다는 떠밀려 들어가고〉 싶어 했다. 주일 대사 조지프 그루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문제는 방어의 문제이니 엄중한 계획을 세울 수가 없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우리는 그 시점의 환경에 비추어보아 우리의 자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이용할 수 있는 시기와 장소와 방법에 대해 결정해야 하네.〉 루스벨트가 당시 가장 의욕적으로 나섰던 일은 여론이 어떠한 사건이든 전쟁의 명분으로 인식할 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1941년 5월 말로 접어들었을 때 그는 연설을 통해 히틀러가 세계 지배의 야심을 품고 있다고 비난하며, 미국의 방위 범위를 국경 너머까지 확대하는 한편 〈무기한의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더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겠다고 국민들을 안심시켰다."(348-9)


"루스벨트는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1시 직후에 진주만 폭격 소식을 들었다." "루스벨트의 오른팔인 해리 홉킨스는 그 소식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지만, 루스벨트는 덤덤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대꾸했다. 그는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각료 및 의원들과 논의를 시작하는 한편, 양원 합동회의에서 발표할 교서를 준비했다. 루스벨트는 현 상황에 대한 책임 소재를 따질 것이 아니라, 미국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본질적인 사실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양원 합동회의에 나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했다. 루스벨트는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던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위기에 처해서 자신의 리더십을 기꺼이 따르려는 국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몬태나 주의 평화주의자 재닛 란킨만이 루스벨트의 요구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이제 루스벨트의 대통령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360)


"테헤란 회담은 그 급변성, 변환성, 즉흥성에도 불구하고 연합국 간의 외교술의 모범을 제시했다. 루스벨트는 세계 구조를 미국의 국내 정치에서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구상하려 애썼다. 그래서 고립주의의 저항을 경계하여 전후 평화유지 활동에 미군을 투입하는 방식을 회피했고, 대신 정치적 분산, 신탁통치, 4개 경찰국들에 의해 후원되는 국제기구를 통해 독일과 일본의 힘을 제한하는 식의 체제를 지지했다. 그는 소련의 전후 안보에 대한 요구가 미국의 반식민지주의 및 인종별 투표 경향과 균형을 맞추길 바랐고, 스탈린에게 소련이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데 있어 민의(民意)와 조화시키는 상징적 조치를 취하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군사적 의제를 설정하도록 허용함으로써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구슬렀다. 뿐만 아니라 양국의 협력관계를 굳히기 위해, 또다시 소련의 대일본전 참여를 요구하며 그 승리의 전리품을 분배받을 기회를 제시했다."(396)


"한편 루스벨트는 (최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목표를 군수품 생산량 증대로 설정하면서도) 미국 내의 전시 경제를 다루는 일도 착수했다. 그는 전쟁 개시 첫 해에만 500만 명 규모의 군대를 인가했다.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일터에서 끌어내 전장으로 보낸다는 것은, 군수품의 폭발적인 수요로 국가의 생산 능력이 무리하게 동원된 시기에 노동력 부족을 유발할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미국의 가장 절박한 문제는 전시 국가가 보편적으로 겪는 현상인 인플레이션이었다. 루스벨트는 이 문제에 대해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법을 취하여, 전면적 세금 인상, 임금 및 물가 통제, 필수 물자의 소비제한, 전쟁공채 구매의 장려 등 7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의회에 제안했다. 프로그램에는 루스벨트의 신념인 전시에는 부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는 미국 국민 중에서 1년에 세금을 2만 5,000달러 이상 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406)


"1943년에 들어서면서 3개월 동안 내리 물가가 무섭게 치솟아오르자, 루스벨트는 '현상유지' 명령을 내려 임금과 가격을 현 수준에서 동결했다. 루스벨트는 가격과 임금을 관리하는 주무기관들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 뒤에 물가관리국에서는 39개 상품의 가격을 내리고, 200개 도시의 약 1,000개 식료품에 대해 적정가격을 정했다." "또한 전시생산국에서 점점 더 많은 소비자 상품들에 대해 배급제를 인가해주었고, 마침내 배급제 상품이 소비자 물가지수 산출에 포함되는 품목의 20퍼센트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유연탄 광부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자 루스벨트는 그 광산을 인계받았고, 결국 노조는 노동자들에게 일터로 돌아오라로 명령했다. 이처럼 가격 통제, 배급제, 정부의 인계가 어우러져서 큰 효과가 나타났다. 통제가 해제되었던 1943년 4월과 1946년 6월 사이에는 연 인플레이션율이 1.6퍼센트에 이르렀다."(411-2)


"미국은 (서반구의 다른 어느 국가보다 많은) 수천 명의 유대인 이민자들을 받아주었으나, 이 숫자는 종국에는 죽음을 맞게 될 수백만 명 가운데 극히 일부만 구해준 것에 불과했다." "루스벨트도 곤경에 처한 유대인들을 동정했지만, 으레 그렇듯 그는 우선 처리할 사항이나 운신 폭을 제한하는 정치적 압력들에 대해 (유대인 구출에 헌신하던) 엘리너 루스벨트보다 더 민감했다. 루스벨트는 이민자를 더 받아들이면 반대파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늘어나 전쟁 수행 노력에 위협이 가중될 것이라는 국무부의 우려에 공감했다. 국내 반대파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고 느끼던 백악관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루스벨트가 전쟁 수행에 매우 중요한 기술을 지닌 전문가들을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이민 절차를 파기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의회는 법이 바뀌면 이민자가 물밀듯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는 꼴이 된다면서 그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기까지 했다."(439-41)


"유대인을 구하는 문제에 이르면, 모든 사람들이 다른 급선무가 있었다. 전시난민위원회가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폭파시켜달라고 군에 호소했을 때, 군은 할애할 만한 전투기가 없다고 답했다. 또 유대인 피난민을 수송할 선박을 간청했다가 선박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 번에 수천 명씩 들어오는 비유대인의 수송은 이런 선박 부족 얘기가 나오지도 않았다. 일이 이렇게 이루어진 데는 동맹의 구축, 한 집단에 대한 '편애'의 회피, 적절한 절차와 문서를 내세운 변명, 관료주의적 실수 등 여러 사소한 원인들이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민주당원들은 뉴딜이 '주(Jew)딜'이나 다름없다는 비난에 자극받아 더 비난을 사지 않으려고 주저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 사회가 일종의 수동적 반유대주의에 물들어 있어서, 전국 각지에서 린치 가해자들과 인종차별자들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해주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해서였다."(442-3)


"행정학자 배리 D. 칼 교수가 통찰력 있게 간파했듯이, 루스벨트는 합리적 관리라는 척도에서는 점수가 낮은 편이지만, 참모와 각료를 정보 획득과 권한 양도의 방편으로 이용한 면에서는 칭찬을 받아왔다. 이런 접근법이 낳은 주된 결과는 복합적 기능에 이바지한 복합적 배치였다. 루스벨트는 프로그램들을 '조정'할 시스템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이해관계의 균형을 맞추고 충돌을 중재할 만한 조직망을 만들 수 있었다. 결정권은 자신이 확보한 채로 말이다." "루스벨트에 대한 호의적이거나 비호의적인 평가 모두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의 아주 일관된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리더십에 대한 자신감이 강하며 루스벨트라는 인물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라는 이미지다. 루스벨트는 계속해서 세상의 이목을 끌면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의 성공이나 실패는 그의 비전이나 정부 관리 측면에서의 취약성보다는 그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결과였다."(479-80)


"루스벨트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현대 복지국가를 위한 제도적 구조를 만들어낸 일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기관인 공공사업진흥국(WPA)을 비롯해 뉴딜정책 시행 기관들 대다수는 전시에 사라졌지만, 농산물 가격, 퇴직연금, 실업수당, 노사관계, 재무관리를 위한 프로그램들은 그대로 남았다.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업적은 그가 대통령에 재임하면서 정부가 시장의 변동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했던 심리적·정치적 장애물들을 제거한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덕분에 후임 대통령들은 정부를 창의적으로 이용하는 면에서 예전보다 더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트루먼의 페어딜(Fair deal, 자유주의적 국내 개혁 정책), 케네디의 뉴프런티어(New Frontier, 신개척자 정신), 존슨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교육·의료 증진과 빈곤 퇴치를 내세운 국내 사회복지 정책) 정책이 가능해졌다. 로널드 레이건의 일자리 창출 입법은 WPA를 고스란히 본뜬 것이었다."(480-1)


"(뉴딜 프로그램이 경쟁적 이익과 공공복리 추구를 함께 추구했듯이) 루스벨트에게 민주주의란 더 많은 그룹을 정부의 인정과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공공의 장(場)으로 이끄는 것을 의미했다." "루스벨트는 결국 다원주의의 애매성과 복잡성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도시 당수들, 인종차별주의적 대농장주들, 요직 임명을 갈망하는 의원들, 영리에 집착하는 기업 임원들을 통해 복잡하게 성취를 이뤄나갔다. 그토록 애쓰고 바랐지만, 자신의 비전을 예상한 대로 확실하게 성취시킬 정치 행정 구조를 창출할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 재임 동안, 계속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책략 구사, 재정비, 비위 맞추기, 훈계하기, 고무시키기, 회피하기, 얼버무려 넘기기 따위를 거듭했다. 이렇듯 그의 행동은 다원주의적 비전의 특징을 그대로 따르면서 복잡하고 다양하며 칭찬받을 만한 면모와 비난받을 만한 면모를 모두 지녔다. 그러나 언제나 '네 가지 자유'에 대한 신념과 민주주의의 이상이 그 토대가 되었다."(492-3)


# 네 가지 자유(Four Freedoms)

1.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

2. 신앙의 자유

3. (경제적)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4. 공포로부터의 자유(전세계적 군비 축소)


"여러 중요한 방면에서 살펴볼 때, 루스벨트의 대통령 재임은 곧 엘리너의 대통령 재임이기도 했다. 엘리너는 루스벨트를 보완하는 역할을 맡아서 그가 착수하길 주저하는 문제들에 대해 결정을 내린 뒤에 그를 압박하여 자신의 주도를 따르게 했다." "루스벨트가 후대에 전해줄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면, 엘리너는 후대들이 프로그램으로 전환할 수 있는 명분과 쟁점에 흥미를 보였다." "엘리너는 각종 의제에 흑인들 같은 그룹을 포함시킴으로써, 뉴딜의 다원주의적 목적의 명맥을 지켜나갔다. 또한 민권을 옹호함으로써, 전시에 진보주의를 경제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로도 재정의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1964년에 공민권법(인종·피부색·종교·출신국에 따른 차별을 철폐할 목적으로 제정된 연방법)이 제정되면서 마침내 1965년에 그녀의 사명이 성취되었지만,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을 목격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494-6)


"폴 애플비의 이론에 의거하면, 민주적 제도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그 제도의 관료들은 협력적이었다. 또한 민주적 제도는 유권자들과 화합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점으로서, 민주적 제도는 공익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었다. 애플비의 이론체계에는 다소 미해결의 문제가 있었다. 즉, 공익이란 것이 공개적이고 유연하며 상호작용적이고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제도의 필연적인 결과인지, 아니면 그 조직에서 공익이 목적임을 늘 염두에 둠으로써 비롯되는 결과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위대한 민주주의의 목적은 단순한 부분의 합을 뛰어넘는 전체라는 것이 애플비의 신념이었음은 분명하다. 애플비의 이론체계는 루스벨트가 행했던 다원주의적 행정과 정치에 대한 전형적인 이론체계였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의 뉴딜정책과 전시 행정에 대한 지적 소산인 셈이다. 루스벨트가 남긴 교훈들 가운데 이 부분이야말로 최고의 가르침인 것 같다."(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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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연설 - 분열된 국가를 통합시킨 대통령의 연설, 올바른 리더십의 본보기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프롤로그 그때 게티즈버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게티즈버그에서 남군의 리Lee 장군은 뚜렷한 확신도 없이 절체절명의 적진으로 돌진해 나갔다. 그 불운한 진격이 끝난 후 리 장군은 잔류 병력의 소집을 지시했지만 조지 피켓 장군은 다시 끌어모을 병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양 진영은 5만여 명의 병사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실종된 이 전쟁에 대한 광범위한 핑계거리를 준비해야만 했다. 리 장군은 남군이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려 했고, 미드 장군은 자신 때문에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이런 혼란과 희망의 상실 그리고 무의미한 죽음들로부터 벗어나 국가적 지표와 자부심 그리고 이상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 추악한 현실을 소중하고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변형시켰다. 그는 오직 272개의 단어만을 사용하여 그 일을 해냈으며, 그 단어들보다 더 강력한 호소력을 갖춘 것은 없었다."(14-5)


"링컨의 연설은 대학살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벌어진 전투를 추상의 단계로 끌어올렸으며 그것을 통해 그 전투를 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사건으로 만들어냈다." "링컨은 어느 한 전장에서 얻어낸 성과를 남북전쟁 전체에 적용하려 했다. 그는 헌법과 지역주의, 소유권과 국가를 너저분한 논쟁들로부터 떼어내 추상화시켰다. 그의 연설 속에 게티즈버그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처럼 노예제도 역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의 논의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을 뛰어넘어 더욱더 깊숙한 핵심으로 파고들어갔으며, 정신적인 투쟁을 통해 원형 그대로 획득되어야 할 위대한 이상을 향해 다가갔다. 링컨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부터 초월적인 의미를 새로이 이끌어냈다." "링컨은 게티즈버그의 험악한 분위기를 진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공적인 죄악들과 대물림된 범죄에 오염돼 있던 미국의 역사 그 자체를 정화시켰다."(41-2)


1장 그리스 문화 부흥 시기의 웅변술


"간결함은 단순히 길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스의 웅변에서처럼 어떤 것을 이상화하는 링컨의 기술에는 특별한 것들의 묘사가 억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억제가 미학적인 역설을 창조했으며, 그것에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음에도 미묘한 감동을 자아냈다. 그리스 웅변가들은 도시국가의 규정에 따라 답변할 때를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링컨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모든 시민을 지칭하는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했다. 또한 죽은 자들을 일일이 호명하지 않았다. 전사자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이들(사람들)'이라 불렸다. 이것은 링컨이 '그들이 여기서 했던 일' 또는 '이들 전사자들'이라고 지칭했던 경우와 같다." "플라톤은 에피타피오스(국장國葬연설)에서 (연설가들이) 시인들의 수사를 제거한 꾸밈없는 언어를 사용했다고 말한다. 산문 형식 그 자체는 정치적 삶으로 회귀하는 것이며, 가족 단위의 애도보다 더 커다란 사회적 목적으로 전이하는 것을 뜻한다."(65)


"아테네인들의 연설에서처럼 링컨의 연설에서 주된 대조는 삶과 죽음에서 나타난다. 플라톤은 에피타피오스가 목적하는 주요한 두가지 임무는 죽은 자를 칭송하고extol 산 자를 분발exhort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죽은 자를 칭송하고laud 살아남은 자를 이끈다lead'와 같은 표현에서처럼 어원이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여 압운을 맞추었다. 장례 연설에는 두 가지 주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죽은 자를 위한 칭송epainesis과 산 자에게 주는 충고parainesis이다." "그리스 저자들은 이러한 주제를 각각의 경우에 확장하거나 축약하고 생략함으로써 발전시켰다. 또한 대부분의 요소들은 그 순서가 변경되거나 강조점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연설 속에 반영되어 드러난다. 그것은 기계적인 공식으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 통찰력으로 나타난다. 링컨의 연설이 경이로운 것은 그 통찰력이 그리스의 연설들과 비슷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74-5)


"게티즈버그 전투의 생존자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이 대륙의 토지에 생명의 씨앗을 뿌렸던 것처럼 죽음으로부터 삶을 이끌어낸다. 생존자들은 전사자들이 '모든 것을 다 바쳐 온전히 헌신'했음에도 '더욱더 증대된 헌신'을 떠맡는다. 그 증대된 헌신은 생존자들이 그전에 느꼈던 헌신을 넘어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사자들이 제공해준 궁극적인 그 어떤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전사자들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만이 완수해낼 수 있는 '남아 있는' 임무를 물려주었다. 죽은 자들은 나라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완수해야 할 진로를 한 걸음 더 진전시킨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앞에 놓인 그 임무를 위한 교훈이었다. 〈국가가 살 수 있도록who here gave their lives / 여기 목숨을 바친 사람들that that nation might live〉. 또한 그 국가가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라는 실험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80-1)


2장 게티즈버그와 죽음의 문화


"도시 경계 외곽으로 매장지를 이전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위생상의 문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왔다. 즉, 교회 묘지와 도시 내에 위치한 묘지가 현대화된 도시계획에 방해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죽음의 문화를 연구했던 필립 아리에스의 추종자들은 관념적인 요인들이 훨씬 더 강하게 작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교회 묘지에 드리워진 신학적 음울함으로부터의 탈피, 자연으로의 회귀, 소멸과 생성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적 사상과 같은 태도에서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월주의자들은 세미테리cemetery가 '인생의 배움터'로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묘역은 삶에서 동떨어진 채, '그저 침입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담으로 가로막혀' 주변과 소통이 단절된 협소한 영역이었다. 반면에 새로운 세미테리는 죽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한 방편으로서 자연을 벗삼으려는 자들의 발길이 잦은 장소인 것이다."(85-6)


"그러므로 게티즈버그의 봉헌식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매료되어 공동묘지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19세기 문화의 한 일면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 의식을, 단순히 즉각적이며 어쩔 수 없이 연상하게 되는 남북전쟁과 군사적인 의식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죽은 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자연의 새로운 일부분을 헌납하는 것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의식에 대한 더 크고 더욱 오래 지속되어온 반응 양식을 완전하게 설명해낼 수 없다." "공동묘지는 19세기에 경계성을 나타내는 최고의 장소였다. 그것은 삶과 죽음, 현세와 영원, 과거와 미래 사이의 경계지역이었다." "만약 자연의 순환이 자연스러운 최면술의 역할을 한다면, 죽은 자들과 가까이 있다는 감각은 강신술의 한 형태일 것이다. 스토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 죽은 자와의 교류를 통해 우리 자신이 더 순수해지고 더 나아지고 더 현명해짐을 느끼게 된다.〉"(94-9)


"링컨은 에버렛과는 달리 어느 한 병사를 추모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대륙에서 이루어지는 한 국가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시련에 의한 시험과, 새로운 자유의 탄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어머니는 단지 그 나라를 태어나게 한 대륙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링컨의 연설이 아테네의 에피타피오이와 얼마나 닮았는지 살펴보았다. 그리스의 연설에서도 역시 선조들progonoi의 전통은 언급되지만, 대지 그 자체의 모성이 더욱 강조되며 아테네 시민을 '흙에서 태어난autochthones'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지역에 대한 애국적인 애착심과 국가주의적 종교의 공통된 주제이다. 이러한 생각이 '처녀처럼 순결한 대륙' 위에 미국이 건립되었다는 진부한 표현을 낳았던 것이며 이것은 거짓된 은유(대륙을 '처녀'로 만들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무시되었고 또 제거되었다)임에도 끈질기게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아메리카 신화의 너무도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103)


"어떤 사상으로부터 탄생한 국가는 그 사상이 생명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상을 다시 주입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그 사상과 그 사상의 지지자들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탄생'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유용한 것이다. 연설문의 마지막 문장 속에 나타난 '자유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표현은 우리들을 첫 문장의 기적적인 탄생으로 다시 데려가주며, 또한 이러한 이미지의 이면에는 '다시 태어난'(요한복음 3장 3절~7절) 사람들이라는 성서적 개념 역시 드러난다." "독립선언문은 영적 재탄생의 도구로서 복음서를 대체했다." "연설 끝 부분에 표현된 '남아있는 그 위대한 임무'는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과업으로서 그들이 항상 행하고 있는 것이며 모든 투사들을 국가의 영원한 이상인 영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119-20)


3장 초월주의 선언


"링컨의 연설에는 몇 가지 사안들이 빠져 있었다. 게티즈버그 연설에 정작 게티즈버그에 대한 언급은 없다. 노예제도에 대해서도 그렇거니와 더 놀라운 것은 미합중국 자체에 대해서도 거론하지 않고 있다. (남부도 물론 언급하지 않는다.) 1863년의 노예해방령과 관련한 주요 내용도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옹호는 물론 변호도 하지 않고 있다. 연설에서 언급된 '위대한 과업'은 노예해방이 아니라 자치의 보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치를 이야기할 때 백인뿐 아니라 당연히 흑인들까지 포함한 자치라고 생각하지만, 게티즈버그에서 연설을 할 당시까지도 링컨은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들의 선거권에 대해서는 전혀 주창하지 않았다. 예술적이며 웅변적이기도 한 게티즈버그 연설은 당대의 역사적 공간에서 가장 까다롭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주요 사안에 대해 교묘히 회피하고 침묵했던 것 때문에 링컨은 살아 있는 동안 줄곧 비난을 받았다."(124)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파커는 노예제도 반대에 링컨보다 더 솔직했다는 이유로 윌리엄 수어드를 지지했다. 그러나 수어드는 바로 그 솔직함 때문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에서 탈락했다. 링컨은 더 조심스러웠고 우회적이었다." "링컨의 정치적 기반인 일리노이 주는 후일 웨스트버지니아 주가 된 전체 지역보다 훨씬 남쪽인 지점(남부도시 카이로)에까지 이르렀으며 또한 켄터키 주와 버지니아 주에 속한 대부분의 지역보다 훨씬 남쪽으로 뻗어나간다. 링컨이 더글러스와 토론을 벌이기 10년 전이었던 1848년, 일리노이 주에서는 널리 퍼진 '흑인 공포증'으로 자유를 얻은 흑인들이 주 내로 이주해오지 못하도록 하는 수정법안을 투표에 붙였다. 흑인 전입금지에 관한 주 전체의 투표율은 70%였지만 남부와 몇몇 중부의 카운티에서는 90% 이상이 찬성했다. 링컨은 자신이 속해 있는 주의 인종적 지도를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때그때의 청중들에 따라 노예제도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고 있었다."(125-6)


"링컨은 흑인이 백인에 비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선호했으며, 흑인을 사회적으로 열등한 상태로 유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조지 프레더릭슨이 지적했던 것처럼, 흑인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에 대해 확실성보다는 불가지론을 표명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링컨을 비롯한 그 어느 누구도 (흑백 인종의) 사회적 혼합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링컨은 이러한 정서와 관련되어 있고 또 그 당시로는 해결할 수도 없었던 문제들과 정치적 평등의 문제가 한 묶음으로 다루어지게 되는 것을 꺼려했다. 그에게, 제대로 확립시키기는 어려웠지만 실현 가능한 최소한의 것, 즉 그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소한, 인간을 자산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링컨은 그 결과들을 하나하나 명쾌하게 밝혀나감으로써 그러한 태도를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나갔다."(133-4)


"만약 어떤 흑인이 타인의 자산이 아니라 스스로를 책임지는 인간이라면, 자신의 노동으로 얻게 된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흑인들이 나와 동등하지 않다는 더글러스 판사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들과 나는 분명 피부색이 다르며, 어쩌면 도덕이나 지적인 천부의 자질도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획득한 빵을 다른 어느 누구의 허락 없이도 먹을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나와 동등하며, 또 더글러스 판사와 동등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등합니다.〉 링컨은 한 가지 편견에 대항하기 위해 또 다른 편견을 활용하려 했다. 미국인들은 성경에서 인용된 것이라면 우선적으로 호의를 보이는 성향이 있다. 링컨은 언제나처럼 뼈 있는 내용의 성경 구절을 활용하고 있다. 인류를 향한 예외 없는 구절인 '그대의 얼굴에 땀을 흘리고 나서야 빵을 먹을 수 있게 되리라'(창세기 3장 19절)는 적어도 흑인들의 입장에서는 냉소적인 권리인 것이다."(136)


# 또 하나의 논리 :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천부인권의 원리 아래 왕정을 반대한 독립선언문의 정신 주창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고결함과 이상과 간결함을 이룩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1850년대의 대부분의 시기를 그 시대의 가장 민감한 문제들과 더불어 독립선언문의 위대한 원칙과 끊임없이 연관시키며 보냈기 때문이었다. 만약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난 것이라면 그들 스스로 자산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은 그를 소유하는 군주에 의해 지배될 수 없다. 그들은 최소한의 의미에서도 자기 자신의 소유자로서 스스로를 다스려야만 한다." "연설에서 이 문제들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언급될 필요조차 없다. 다시 말해 자유롭게 국가의 이상을 표명해온 국가라면 오랜 시간에 걸쳐 어느 특정하거나 제한적인 개혁들, 심지어 노예해방만큼 중요한 개혁들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국가의 이상에 다가가기 위해 자주적인 노력을 기울여왔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혼란스러운 특별한 사건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며 오랫동안 품어온 평등과 자치라는 과업으로 복귀하는 것이다."(169-70)


4장 사상의 혁명


"링컨은 독립선언문을, 추구해야 할 초월주의적 이상의 한 표현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링컨으로서는 독립선언문을 건국 문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시어도어 파커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몇 가지 생각들을 확실히 해두어야만 했다. 파커의 견해에 의하면, 남부 지역의 주들이 한 국가로서 미국의 비전을 부정한다면 미국의 비전을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남부에 그대로 남겨두고 합중국 내에서 오염인자가 될 남부 지역의 주들을 합중국에서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선언문이 단일 국민의 주권 행위였다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라 해도 그 국민은 분열될 수 없는 것이었다." "링컨이 '나의 정의로운 주인인 미국 국민들'이라고 선언하며 권좌에 오른 그 순간부터 그 두 가지 견해─국민은 확실한 역사적 실체이자 독립선언문의 주체로서 헌법적 실체라는 파커와 웹스터의 견해─는 링컨의 말과 행동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었다."(187-8)


"따라서 호전주의자들의 지위 문제에 관해 링컨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에게 이 문제는 전쟁이 아닌 반란이었다. 남부군은 외국 호전주의자들의 집합체가 될 수 없었다. 취임연설에서 '합중국은 부서지지 않는다'고 천명했듯이 그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도, '연방에서 탈퇴한 주들'이라는 표현을 잘못된 것이라는 일관된 주장을 펼쳤다. 그 주들은 탈퇴가 가능하지 않았으므로 탈퇴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임스 맥퍼슨이 그랬던 것처럼 링컨이 마침내 독립전쟁을 시민 봉기가 아닌 외국과의 전쟁이라는 견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사실, 북부는 대부분의 경우 국제법하에서 해외 강대국들과의 관계 때문에(예를 들어 외국 선박에 영향을 끼치는 봉쇄 조치의 관리) 교전국으로서의 절차들(예, 죄수의 교환)을 채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제퍼슨 데이비스의 군대를 남부를 약탈하는 도적떼로 여겼던 링컨에게는 법적인 가설일 뿐이었다."(189)


"〈노예해방은 정서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인 힘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마력이나 증기동력이 측정되고 평가될 수 있는 것처럼 보존되고 평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측정된 바에 의하면, 흑인들의 지지는 우리가 잃고 살아가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입니다.〉" "링컨은 스스로 언급했던 것처럼, 노예들의 힘마저 말이나 증기의 힘과 같은 물리적은 물자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군의 사기라는 군사적인 이유에서도, 복합적인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중요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노예해방이라는 위협과 그것의 실질적인 실현은 남부군의 사기에 타격을 입혔으며 북부군의 희망을 더욱 강화시켰다." "링컨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호프스태터를 비롯한 비판자들은 노예해방의 동기로는 '저열한 것'이라며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새 세대의 흑인 역사가들은 그의 말에서 흑인들의 공헌을 인정하려는 현실주의적 자세를 찾아냈다. 즉, 노예들을 위해 노예해방을 추진한다는 생색을 내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201-4)


"(흑인 '투사들'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링컨이 노예해방에 대해 육군과 해군의 총사령관으로 자신의 권한을 제한했던 헌법적 도덕관이 가져다 준 여러가지 부수적인 효과 중의 하나였다. 민간의 권한으로는 남부의 제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서약을 지킴으로써 링컨은 남부 사람들에 맞서 도덕적인 장광설을 구사하지 않고도 그들이 감당할 만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질서가 회복되었을 때, 그들은 통치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또한 엄격하게 지켜진 군사적 조치는(비록 간접적인 압력을 가중시키기는 했지만) 접경지역 주들의 자발적인 노예해방과 1865년 모든 노예의 해방을 선언한 제13차 수정법안을 이끌어낸 시민적 합의의 과정을 훼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방적인 분리는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하여 일방적인 노예해방을 피하는 방법으로 링컨은 모든 국민을 위한 헌법(노예조항을 비롯한 모든 조항들)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시켰다."(204-5)


"링컨은 개별적인 것, 지역적인 것, 분열적인 것을 극복하려 했다. 그는 이상적 국가의 모습을 향한 노력으로 전쟁 이후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위대한 책무'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가 개별적인 주보다 그 시기와 중요성에서 앞선다는 제임스 윌슨, 조지프 스토리 그리고 대니얼 웹스터와 같은 법률가들이 단순한 이론이 이제는 미국의 전통 속에 살아있는 실체가 되어 있다. 이러한 이론의 성과들은 한꺼번에 드러났다. 독립전쟁 시기까지는 (연합된 주들이라는 의미에서) '합중국the United States'은 언제나 복수명사로 사용되어왔다. 즉, 'The United States are a free government'라고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게티즈버그 연설 이후부터는 서서히 단수명사로 바뀌어 'The United States is a free government'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그것은 링컨이 연합을 신비주의적인 희망 사항이 아니라 헌법적인 실체로 만들면서, 자신의 표현뿐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 표현해낸 투철한 철학의 결과라 할 수 있다."(205-6)


5장 문체의 혁명


"링컨의 산문적 특징으로 드러나는 간소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연구의 결과이다. 링컨 당대의 고대 수사법 해설자인 블레어는 꾸밈이 없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설령 문장의 정상적인 질서를 뒤바꾸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적절한 단어들이 두드러지게 배치되어야 한다. 젊은 시절에 링컨은 일종의 언어적 운동경기를 치르듯 이 문제에 몰두했다. '부서진다 해도, 나, 역시 어쩌면, 그것에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다Broken by it, I, too, may be; bow to it I never will.' 그는 일생을 통해 문법적인 도치를 즐겨 사용했지만, 그것을 제대로 연구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는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 '우리들은 간절히 바라며 열정적으로 기도 드립니다We fondly hope and fervently pray'라 하지 않고 '진정으로 간절히 우리들은 바라며, 진정 열정적으로 우리들은 기도 드립니다Fondly do we hope, fervently do we pray'라고 표현했다."(231)


"또한 블레어는 균형 잡힌 대조법을 통해 뜻을 명확히 할 것을 권했다." "링컨은 1854년까지 미국이 처해 있었던 적대적인 분할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남부는 승리에 들떠 무리한 시도를 획책하려 하며, 북부는 배신감에 노여워 자신들의 잘못을 질책하며 복수심에 불타오릅니다. 한쪽은 선동하고, 다른 한쪽은 저항합니다. 한쪽은 조롱하고, 다른 한쪽은 무시합니다. 한쪽은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보복합니다.〉" "블레어는 이러한 모든 장치들이, 의미를 더 명확히 하고 진실을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정직한 의도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자멸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분명, 이것이 바로 링컨의 웅변이 갖고 있는 비밀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소리로 나타내기 위해 큰 소리로 읽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글로 옮겨 썼다. 그는 분석적인 훈련에 열성적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가장 무미건조한 과목이라 생각했던 문법을 즐겨 연구했다."(231-3)


"그랜트 장군에 대한 링컨의 존경심은 부분적으로, 군사 작전에 대해 설명하거나 주장을 펼칠 때 애매모호했던 매클렐런과는 달리 그가 언어를 적확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맥퍼슨은 링컨이 언어의 힘으로 전쟁에서 이겼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반쪽 진실은 적어도 하나의 완벽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즉, 논점이 분명한 언어들은 그랜트와 링컨이 놀라울 정도의 상호교감과 군사적 의견일치를 이룰 수 있게 한 매개물이었다는 것이다. 1864년 8월 17일에 링컨이 보낸 전보에는 오해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계속 불독처럼 물고 늘어지고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버리시오. 최대한으로.' 이 전보문을 읽은 그랜트는 폭소를 터트리며 '대통령께선 그 어떤 고문들보다 배짱이 있다'고 말했다. 링컨이 전보문에 사용한 수사에는 단음절과 스타카토식의 박자가 있다. 〈받아들이지 마시오. 확고한 자세를 유지하시오. / 그 지점에서 확고히 지키시오. 마치 강철 사슬처럼. / 매일, 매시간 경계하고 강압하시오.〉"(244-5)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긴 라틴어 어원의 단어들 대신 간략한 앵글로색슨의 단어들을 사용하여 '세속적인' 문체를 만들어냈다며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링컨은 자유 속에 태어난born in freedom 국가로 표현하지 않고 자유 속에 잉태된conceived in Liberty 국가라 표현하며, 하나의 진실에 서약한vowed to a truth 국가라고 표현하지 않고 하나의 명제에 헌정된dedicated to [a] proposition 국가, 그리고 병사들의 헌신devotion을 보여주는 봉헌된consecrated 국가라고 표현하고 있다. 온통 라틴어 어원의 단어들이다. 심지어 링컨은 과거에 '명제proposition'와 같은 '비문학적인' 단어를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비록 링컨이 전원묘지 운동으로부터 다산의 이미저리를 빌려와 사용하긴 했지만,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그 자체가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라틴어인) 전보문적인telegraphic 문체라 할 수 있다."(251)


"링컨은 민주주의의 일반원리와 자명한 이치들을 유클리드 수학의 '명제들'과 비교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사고를 지닌 초월주의자였다. 그는 추상적인 단어들이 잘 어울리는 과학의 시대와 교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대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그의 한결같은 주장은 '있는 그대로 말하기'와 같은 거친 방법보다는 연설의 내부적인 '연결'과 '실행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농업적인 미래가 아닌 기계론적인 미래를 연설하고 있었다. 그의 연설은 그 자신이 전투를 위해 시험을 거쳐 발전시킨 그 기계처럼 경제적이면서 간결하고 내부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비록 그 언어들이 전쟁의 와중에서 평화의 무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동원된 것이지만, 그에게 언어는 바로 무기였다." "그가 연설에서 제시한 상징은 경험에 의한 시험을 거친 것이었으며, (얼음 속의 불처럼) 침착한 추상적 개념 속에 감성적 긴박감을 지니고서 완벽하게 표현된 국가적 가치를 호소하는 것이었다."(252)


에필로그 그 밖의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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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개정판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1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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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1장 감추어진 시간들


"네 개의 복음서 모두 예수의 사역의 시작을 세례 요한의 급진적인 개혁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찾고 있다. 예수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거친 옷을 걸치고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누가 3:7)이라며 독설을 퍼붓는 거친 사람과 함께 행동했다." "예수가 에세네파의 영적인 은둔으로부터 벗어나 침례파(세례 요한)의 행동주의적인 선언으로 옮겨갔을 때, 그의 가족들은 더욱 심각한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는 예수가 광야에서 체험한 일들이 갖는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특히 누가는 예수가 받았던 교육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난 이후에 예수가 겪었던 시험들을 묘사하고는 있지만, 서술방식은 광야에서 마주친 사탄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상징으로 삼아, 그가 사춘기와 청년기에 겪었던 정신적 탐구의 전 과정을 축약해놓았음이 분명하다."(50-1)


"광야에서의 유혹은, 아버지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남들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대한 인물들은 종종 매혹과 혐오 속에서 소명에 대해 번민하면서, 어렴풋하던 그것들을 명쾌하게 만들어가는 청년기를 겪곤 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위대한 인물의 형성에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을 '후퇴와 복귀'로 일반화시켜 정의했다. 예수의 경우 보다 적절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선택된 땅을 향해 40년 동안 나아갔던 유대 민족이 황야에서 겪었던 시련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이 누가에 의해 예수의 40일간의 고난이라는 특별한 서술로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배고픔과 극기를 알게 해준 가장 중요한 영적 형성 과정을 거치고 난 후, 천사들은 비로소 더욱 강해지고 편안해진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준다.(마태 4:11)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막에서 만나를 먹었던 것과 같은 일이다."(60-1)


2장 사역을 시작하다


"(요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사역에 나서기 시작한) 예수의 그 다음 행로는 분명 요한을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었다. 실제로 예수는 초기 고행 수도로부터 멀어져 갔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것처럼, 아주 빨리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속세의 사람들과 뒤섞였다. 그가 단순히 요한처럼 단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통적인 식사 관습마저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는 죄인들, 창녀들, 그리고 로마의 부역자들과 함께 식사했다." "예수에게 있어 먹보이며 술꾼이라 불리는 일은 결코 가벼운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레위의 율법에 근거한 비난이었다. 신명기 21장 20절에는 지파의 관습에 반항하는 아들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으며, 지파의 장로들 앞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처벌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예수가 그처럼 너무 급진적이었으므로 처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64-5)


"예수는 기적을 위한 기적은 일으키지 않았으며 그에게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을 꾸짖었다.(마태 12:39, 16:4, 마가 8:12, 누가 11:16) 그의 기적들은 자신이 가져올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한 가지는 바로 사람들을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 가치 있는 자와 가치 없는 자, 존경받는 자와 존경받지 못하는 자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가 일으킨 기적들 중 많은 것들이 유대인이 아닌 로마 백부장이나(누가 7:9) 튀루스(두로)의 여인(마가 7:29) 혹은 사마리아의 나병환자(누가 17:16) 등과 같은 아웃사이더들을 위해 행해졌다. 대부분의 기적들은 유대인들이 접촉조차 않으려고 하는 문둥병자, 창녀, 불구자, 천덕꾸러기, 이교도 혹은 병으로 인해 부정해진 자들(그로 인해 '귀신들린 것'이므로)과 같이, 부정한 자들과 관련하여 일어났다."(76-8)


3장 급진주의자, 예수


"복음서들은 부유함이 영혼의 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권력에 대해, 특히 정신적인 권력에 대해서는 한층 더 강력하게 경고한다. 예수는 자기들끼리 혹은 남들을 넘어서는 권위를 갖추려 하는 제자들을 거듭해서 꾸짖는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크게 될 것인지를 묻자 예수는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태 18:4-5)라고 대답했다. 제자들이 거듭 자신의 서열에 대해 논쟁할 때 예수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마가 9:35)라고 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지침으로 삼았던 규칙은 높은 자리를 피하라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낯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누가 14:11)"(96)


"예수는 급진적인 인류평등주의자였다. 남녀평등은 가부장 사회였던 예수의 시대에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어서 남자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가 그 여자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게다가 상대는 사마리아 여인이었던 것이다.(요한 4:27)" "예수를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서 일하고 있던 마르다를 돕는 대신, 예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았던 마리아의 이야기는 아주 오랫동안 현실 생활과 대비하여 명상적인 생활이 더 훌륭하다는 근거로 이용되었다.(누가 10:38-42)" "하지만 웨스턴 신학대학의 제롬 너레이 교수는 예수 시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 끝에, 예수가 당대에 허용된 공간을 벗어나 지식인의 세계로 들어서는 행동 때문에 (선생님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는 것으로 나타나는) 비난받을 수도 있는 여인을 옹호했던 것임을 밝혀냈다."(102)


4장 종교를 거부하다


"예수는 정결예식과 안식일이 지니고 있는 형식주의뿐만 아니라 동물을 희생제물로 쓰는 성전에서의 모든 제사를 비판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요한 9:13) 예수는 사무엘상 15장 22절의 〈순종에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제물로 쓸 짐승들을 팔고 사는 것과 그것들의 거래에 사용되던 금전을 성전 경내에서 내쫓았을 때, 짐승 제물을 비난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단지 장사꾼들이 '내 아버지의 집'(성전 그 자체)을 장사꾼의 장터(요한 2:16) 혹은 도적들의 소굴(마가 11:17)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만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예수는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통해, 이미 타락했으며 썩어가고 있다고 여기던, 제물을 바치던 제도 자체를 통박했던 것이다."(122-4)


"제사장들과 예수 사이의 적대적인 반목을 생각해보면, 그의 제자들 중에 제사장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네 개의 복음서나, 바울의 편지에서 '히에레우스'(hiereus, 제사장)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는 어느 누구도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바울 자신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그가 설립한 교회들 중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호칭으로 부른 사람은 없었다. 신약성서에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들을 13번 언급한다. 사도, 예언자, 교사, 기적을 행하는 사람, 병을 고치는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 여러가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12:27-28), 지혜로운 사람, 지혜를 해석하는 사람, 영혼을 분별하는 사람(12:8-10)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4:15) 등이다." "그것들은 모두 역할을 나타내는 것이지 직책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128-9)


"예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 무리(사마리아 지역의 그리심 성전을 파괴했던 계급)가 피해 지나쳤던, 치명상을 입은 한 남자를 도와주었던 사마리아 여행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드러냈다.(누가 10:30-36) 부상을 당한 그 남자는 거의 죽게 될 지경이었지만 레위 법에서는 죽은 사람을 만지면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 문장에서 계율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이 '피하여 지나갔다(antiparelthon)'라며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중의 복합동사를 사용한 이유였다. 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단순히 구원자가 지닌 착한 심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유대 제사장들의 비인간적인 정결규례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 이야기는 바로 '종교'의 형식주의에 대한 예수의 비난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133)


5장 하나님의 나라


"신약성서의 초기 저작물들은 그리스도가 죽은 지 20년 후에 기독교 '교회들'에게 쓴 바울의 편지들이었다.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번역되는 그리스 단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 즉 '회중'이며, 이 단어는 단 하나의 복음서에만 등장한다(마태복음). 사도행전 19장 32절과 40절에서는 '군중'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바울이 편지를 보냈던 모임들은 전혀 계급적이지 않은 집단이었다. 그는 그 집단의 지도자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성직자가 없는 회중에게 보낸 것이다. 더 나아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교회 건물을 의미하는 교회도 없었다. 회중은 집에서 모임(oikoi)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바울이 기독교도들을 말할 때 '믿음의 식구들(oikeioi)'이라 부르는 것이 표준이었다.(갈라디아서 6:10)" "그러므로 사도로서의 베드로와 바울은 주님의 형제로서의 사도가 아닌, 예루살렘 회중의 '기둥들' 중 하나인 야고보와 대비하여, 단순히 안디옥에 모인 회중에 보내진 사절인 것이다."(142-3)


"만약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예수는 왜 왔던 것일까? 그는 처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 거듭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온 것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마가 1:15, 누가 10:9-11) 여기서 '나라'(basileia)에 해당하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왕국'으로 번역되지만, 그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왕국은 어떤 장소나 정치적인 체제를 나타내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예수의 실존 그 자체인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주기도문에서 우리들에게 '나라가 임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라고 했으며, 그 나라는 종말Eschaton, 즉 세상이 완성될 때에만 완전하게 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예수는 또한 처음에는 설교와 치유,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것으로 이미 그 나라가 임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창조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 것이다."(150)


6장 지옥으로 내려가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성전에서 제의를 훼방했던 일을 예수가 체포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는다. 광야에서의 시험을 예수의 사역의 시작으로 삼았던 누가처럼, 요한은 이 에피소드를 사역의 시작으로 꼽았으며, 이런 일화들이 예수의 공적인 사역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요한은 나사로를 살려낸 일을 예수가 체포된 원인으로 꼽는다. 예수가 마르다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이 사건은 메시아적인 행위였다. 이 사건은 예수를 생명의 주님으로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는 죽어야만 했다." "사실 이것은 생의 경계에서 격렬히 고뇌하던 예수가 자기 자신의 무덤 속으로 들어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베다니로 돌아가기를 주저하거나, 다가오는 어둠에 대해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의 영적인 격정과, 그가 보이는 눈물로 복음서에 나타나 있다."(165-6)


7장 하나님의 죽음


"만약 우리들이 예수의 피에 의해 구원받은 것이라면, 그의 피가 아버지에게 바치는 희생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예수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린 것이지, 성난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주獻酒로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방법이었다. 성서 속에서 예수의 희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구절들이 있다. 바울은 예수에 대해 '힐라스테리온(hilasterion)'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십계명에 새겨진 돌을 집어넣는) 법궤의 금으로 만든 덮개를 뜻하는 것으로(출애굽기 25:17) '자비의 좌(속죄제물)'로 알려져 있으며, 속죄의 날에 피가 흩뿌려졌던 곳이다." "즉, 예수는 새로운 속죄제물이며, 그곳에서 인간의 적들에 대항해 그 자신의 피가 뿌려져, 아버지와 결속되는 것이다."(202-3)


8장 하나님의 삶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앞으로 있을 식사를 위해 기도한다. 〈앞으로 있을(epiousios) 양식을 오늘도 우리에게 주십니다.〉 '앞으로 있을'에 해당하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형용사인 'epiousios'는 '현존하는' 혹은 '앞으로 닥쳐올'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들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 어원을 '현존하는'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그 문장을 즉시 먹을 수 있는 빵(일용할 양식)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기도문 전체의 내세론적인 맥락은 예수가 마지막 잔치를 기다리며 포도주를 아주 조금만 마시겠다고 했던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예수가 했던 많은 말과 행동들은 마지막 잔치를 향하고 있다. 마지막 잔치의 특징은 궁극의 성취를 예시豫示하는 충만함과 풍부함이다." "예수가 현생에 있는 동안 베풀었던 성찬은 단지 현재의 배고픔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완전한 성취를 위해 하늘나라를 가져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예수는 훨씬 더 심한 목마름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214-5)


맺는 말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성을 인간의 가장 숭고한 능력이라고 찬양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인 이상을 부인하기 위해, 적절한 때에 등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지닌 최고의 능력은 사랑, 즉 자기 자신을 비우는 예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다음과 같은 글을 쓸 때의 성 바울보다 예수의 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린도전서 13:1, 13)"(2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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