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사람들 -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2021년‘올해의 인권책’선정
정택진 지음 / 빨간소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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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서울시 용산구의 일명 '동자동 쪽방촌'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빈민 밀집 거주 지역이다." "그동안 쪽방촌 주민을 돕기 위한 기초생활보장제도와 무연고 공영 장례가 제도화되었고 서울시는 저렴쪽방 사업을 시작했다. 수많은 단체가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고, 소매를 걷어붙인 자원봉사자들이 매년 동자동 쪽방촌을 찾는다. 그러나 주민들은 여전히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한다. 범죄와 질병으로 일상이 파괴되며, 도움의 손길에도 인격과 자존감 박탈을 경험한다. 사람으로서의 필요와 욕망, 세계 안에서의 위치와 존재 방식은 부정 당한다.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는 경제적 측면을 넘어 주민들의 사회적 삶에 대한 개입이기도 하다. 개입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 '우리'에 대한 감각, 정치적 연대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킨다. 이 책은 쪽방촌을 위한 여러 개입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겪는 가난과 고통의 풍경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다."(6-8)


1 쪽방촌의 어제와 오늘


"서울역 11번 출구로 나와 벽산빌딩(현 게이트웨이타워)을 지나면 일명 '동자동 쪽방촌'의 초입이 등장한다. 우뚝 치솟은 빌딩들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데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 1층에는 온갖 음식점이 있어서, 1,000개가 넘는 쪽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조차 쉽지 않다. 쪽방촌 앞을 지나가는 시민들은 빌딩 숲 한가운데에 이렇게 허름한 건물들이 있다는 사실에 잠시 의문을 품을 뿐이다. 저녁이면 술에 취한 회사원들이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내뱉은 고함소리와 바로 옆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술판을 벌이는 쪽방 주민들의 목소리가 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자동 지역사에서 서울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동자동과 서울역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울 뿐 아니라, 빈민 밀집 거주 지역이라는 동자동의 역사적 정체성이 서울역 때문에 만들어졌다. 내가 서울역을 통해 다시 동자동을 찾아왔듯, 서울역은 동자동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이자 동자동의 역사를 설명하는 주요 표지다."(17-8)


"광무 4년인 1900년 서울역(당시 남대문역)이 최초로 개통된 뒤 주택가와 상가가 밀집한 이 지역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극심한 전재(戰災)를 겪었다. 서울역은 인적·물적 자원 수송의 핵심지이자 서울로 진입하는 철도 교통의 관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폭격이 서울역을 비롯해 철도, 도로, 교량이 밀집한 용산구에 집중되었다. 궁궐이 밀집한 종로구나, 주거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동대문구와 성북구에 비해 피해 역시 심각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폐허가 된 동자동 지역에 피난민과 빈민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 일부 건물은 서울역의 유동 인구를 상대로 숙박업을 벌였다. 남대문 상권 안에 위치한 데다가 서울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유동 인구가 많았다. 도동(현재 동자동 및 후암동)과 양동(현재 남대문로5가)에는 판자촌과 함께 대규모 윤락 시설도 들어섰다. 동자동의 지리적 위치와 서울역의 존재가 빈민 밀집 거주지역이라는 정체성의 출발이었다."(22)


"1970년대 말부터 40여 년간 이 지역에 살아온 주민 노정수(57세)의 기억에 따르면 서울역 근처에 인력사무소가 몰려 있어서 일거리를 구하기 쉬웠다. 새벽이면 인력을 구하는 차량이 사람을 실어 갔다. 그래서 서울역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것이 생계유지에 유리했다. 월세도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쌌다. 동자동은 〈몸 파는 사람〉, 〈노가다 다니는 사람〉, 〈이삿짐 나르는 사람〉, 〈신문 파는 사람〉, 〈구두 닦는 사람〉 등 도시의 다양한 하층 노동자가 몰려드는 곳이었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1970~1980년대의 동자동은 노동하는 사람의 공간이었다. 비록 안정적인 임금노동 시장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도시 하층 노동 혹은 비공식(informal)·저임금 노동시장에 종사했다. … 이러한 도시 하층 노동은 때때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범죄의 온상〉, 〈서울에서 손꼽히는 윤락가〉, 〈악의 소굴〉 등 동자동에 덧씌워진 윤리적 낙인은 이러한 노동 특성에서 비롯되었다."(24-5)


"칼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인구(surplus population)〉는 노동시장 바깥에 존재하지만 산업예비군으로서 도시의 생산 체계 안에 잠재적으로 흡수될 수 있는 이들이다. 반면 후기자본주의에 등장하는 잉여인구는 말 그대로 더 이상 노동시장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다." "외환위기로부터 약 2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버려짐의 공간'에 놓인 이들은 평균 12.8년이라는 거주 기간과 〈건강〉의 문제를 거치면서 더 이상 주변부 노동시장으로 흡수될 수도, 노동시장 바깥에서 도시 하층 노동을 담당할 수도 없는 인구가 되었다." "과거 동자동은 가난했지만 그나마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동자동은 일할 수 없는 인구 집단의 공간이자 임금노동시장 바깥에서 〈생존주의적 임기응변(survivalist improvisation)〉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이제 노동하지 못하는 인구가 된 쪽방촌 주민들은 각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쪽방촌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형태의 개입들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33-4)


2 돌봄의 역설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1조는 제도의 궁극적 목적을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이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돕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상정하는 〈최저생활〉 혹은 사람다운 삶은 일상적 돌봄을 포함하지 않은 경제적 차원에서의 삶이다. 일반수급자라는 정영희의 신분은, 그녀가 지적장애라는 개인적 특성 때문에 청소, 빨래, 요리 등 삶을 가꾸고 유지하기 위한 노동을 반드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물론 정영희의 지적장애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선정의 핵심 요소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적장애는 그녀에게 경제적 지원 이외에 또다른 일상적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근로 능력이 없기에 임금노동으로 자활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지적장애는 노동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의료적 지표로 일반화되며, 그녀가 수급 대상자로 선정된 후에는 '52만원의 생계급여'나 '23만원의 주거급여'라는 경제적 급부로 환원된다."(64-5)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제정과 시행에서 지속적인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까닭 역시 이와 연관된다. 생계급여와 중위소득 기준 등 급여 수준 향상을 요구하는 빈민 운동계의 목소리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전제하는 삶의 형식이 과연 온전한 삶의 충분조건인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다. 급여 수준이 최소한의 경제적·물질적 생존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낮기 때문에, 수급 대상자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관계〉를 포함해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활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물질적·경제적 필요가 먼저 충족되어야 하지만 경제적 삶이 곧 온전한 삶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전제하는 삶의 형식은 온전한 삶, 혹은 좋은 삶을 경제적 차원의 삶으로 축소한다. 이때 경제적 차원의 삶을 넘어서는 사회적 관계와 상호 의존, 일상적 돌봄은 실질적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개입하지도 않고 개입할 수도 없는 필연적 공백으로 남는다."(66)


"한국에서 가족은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장 근본 단위로서 〈부양과 보호, 교육, 주택, 금융, 고용, 심지어 생산과 경영 활동〉 등 경제 생산과 사회 재생산에 이르는 전반적 영역에서 중심 역할을 차지한다. 이는 일본, 대만, 싱가포르, 필리핀 등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하지만 정책이 의도하지 않는데도 실제 운용이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한국의 복지 체제는 더욱 특징적이다. 가족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은 공공 부조인 기초생활보장제도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일차적인 복지의 주체를 가족으로 설정하고, 가족으로부터 돌봄과 복지를 제공받지 못하는 대상에 한해서만 수급권을 부여하는 잔여전(residual) 형태로 구성된다. 수급 신청자가 소득 및 자산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법적 부양 의무자인 '1촌 직계 혈족(부모, 자녀) 및 그 배우자(며느리, 사위 등)'에게 부양 능력이 없거나 미약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수급권이 보장된다."(73-4)


"한편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지위가 말해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8조의 2 제1항 및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제5조의6 제1항은 부양 의무자가 수급권자인 경우 부양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기초생활보장법상 누군가 수급권자라는 사실은 그/그녀에게 다른 사람을 돌보고 부양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수급권자인 정영희는 아들의 법적 부양 의무자이지만, 아들을 부양할 능력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수급자라는 지위는 기초생활수급법상 그/그녀가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로 인해 공적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양육권과 연관되었을 때 이러한 지위는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가를 판별하는 문제로 나타났다." "결국 아들의 양육권은 전남편에게 넘어갔다. 일반수급자라는 지위는 이미 누구도 부양하거나 돌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내재하므로, 아이를 누가 돌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76-7)


3 죽은 자를 기억하는 법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죽은 자에 대한 의례의 주체는 반드시 혈연가족이어야 하며, 장례를 치러줄 다른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혈연가족이 아닌 이상 모두 무연고 사망자로서 비정상적 죽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안제동과 그다지 친분이 없던 마을 주민들이 장례에 참여하고자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연고 사망자로 규정된 안제동의 죽음은 행정 절차에 따라 처리되어야 할 비정상적 죽음이자 나쁜 죽음이다. 그러나 동료 주민들이 장례에 참석해 망자와의 연고를 드러낼 때 제도가 내포한 정상적 죽음의 기준은 위태로워진다. 동료 주민이라는 사회적 관계는 분명 혈연가족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료 주민들과 안제동의 관계는 그가 무연고 사망자가 아닌 '연고 있는' 사망자라는 점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장례에 참석함으로써 산 자와 망자 사이의 연결을 드러낸다. 양자의 연결은 무연고 사망자로 규정된 안제동에게 '연고 있는 무연고자'라는 역설적 위상을 부여한다."(122-3)


"쪽방촌 주민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서로의 〈각자 사정〉을 묻지 않는 암묵적 윤리를 기반에 두고 있다. 누군가를 온전히 알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망각함으로써 주민들 사이의 연결은 가능하다. 주민들이 보여주는 연결은 완전한 연결이나 가까워짐의 형태가 아닌 부분적 거리 두기와 단절을 포함하는 망각의 관계에 가깝다. 망각의 규범은 산 자와의 관계뿐 아니라 망자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유가족이 내뱉는 모진 말과 안제동의 과거가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추모와 애도받을 자격이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민들은 유가족의 비난을 〈그렇다 하더라도(그래도)〉나 〈마지막인데〉라는 말로 전유함으로써 안제동의 과거를 망각해야 할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의도적으로 망각하지 않은 채 망자의 과거를 모두 기억할 때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기 위한 연결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125-6)


"최경철과 강영섭은 모두 기초생활수급자였다. 그런데도 강영섭은 200여만 원의 장례비를 더 지불하며 최경철의 장례를 일반 장례로 치렀다. 어째서 굳이 일반 장례를 치렀느냐는 물음에 강영섭이 대답했다. 〈일반 장례식은 사흘, 나흘 만에 나갈 수가 있잖아요. 근데 무연고로 하면은 차디찬 데서, 영안실에서 짧게는 한두 달, 길면 3개월에서 6개월까지도 가요. 연고자 찾는 것도 있고 수사도 해야 하니까.〉" "무연고 장례와 일반 장례의 전반적인 절차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비용만 지불하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 장례에 비해 무연고 장례는 통과의례의 시작과 진행이 게속해서 지연될 수밖에 없다. 통과의례가 지연될수록 망자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시간 역시 지연되고, 그동안 망자의 몸은 얼어붙은 채 〈그 차디찬 데〉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강영섭은 실질적인 절차가 크게 다르지 않고 더 많은 비용이 드는데도 〈굳이〉 무연고 장례가 아닌 일반 장례를 치르고자 했다."(140-3)


"강영섭은 (안제동의 장례에서 주민들이 보여준 바 있는) 제도적 기준에 상징적 균열을 내는 것을 넘어 제도적 틀 자체를 우회했다. 그는 의료 기록을 통해 최경철에게 연고자가 있음을 제도적으로 증명했다. 장례에 드는 추가 비용을 감당하고 일반 장례도 치렀다. 최경철에게 부여된 무연고자의 위상을 기각하고, 그가 연고자로서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강영섭은 이에 따르는 부담과 책임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강영섭의 경제적 상황과 건강은 점차 나빠졌다. 강영섭의 쪽방을 방문했을 때, 그는 내게 수십 개의 처방전과 냉장고 전체를 가득 채운 각종 약을 보여주었다. 그가 제공한 돌봄이 스스로의 소모와 파괴를 대가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최경철과 강영섭은 의료 체계 안에서 형성된 연결을 통해 무연고 장례라는 제도적 틀을 우회하고 죽음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강영섭은 경제적·육체적·정신적으로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145-6)


4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주민협동회의 김동석 활동가가 언급한 〈길들여짐〉은 동자동 쪽방촌과 주민들을 설명하는 가장 전형적인 서사다. 〈여기는 나눠주는 게 정말 많잖아요. 이게 주민들을 마비시켜요. 이제 고마움도 못 느끼는 거죠. 나눠주면 좋아하긴 하는데 막상 물어보면 누가 준 건지도 몰라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내가 만난 모든 단체의 활동가와 관계자는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물품 지원이) 도움이 되죠. 근데 주민들이 일을 안 하려고 하고, '당연히 사회복지사 네가 나를 위해서 살려야 되는 거야' 이렇게 되요.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너 뭐 하는데? 나 먹이고 살리고 입히고, 의식주 다 해결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국가가 너희한테 그렇게 시킨 거 아니야? 근데 왜 넌 왜 안 해?〉 자신이 사회복지사인데도 서울역 쪽방상담소관계자 황민욱은 〈너희가 먹이고 살려야 된다〉라는 말을 듣고 난 뒤 복지의 역할에 대해 일말의 회의를 품었다."(158-9)


"황민욱은 주민들이 〈실업급여〉, 〈수급〉, 〈기초연금〉, 〈근로장려금〉 같은 복지 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우려한다. 물론 자활사업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장기간의 노숙이나 알코올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자활이 불가능한 예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주민이 아닌 한 자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조건적인 복지와 지원 활동이다. 자활하려는 의지나 실천 없이도 생계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이 지급되기 때문에 의존적 태도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의존에는 부정적인 윤리적 평가가 덧씌워진다. 의존은 윤리적 〈악〉이자 빈곤의 문화다. 또한 쪽방촌 주민들이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특성인 동시에 이들을 빈곤과 쪽방촌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누군가 복지 제도나 단체의 활동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은 그에게 자활의 의지와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의존은 쪽방촌의 주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낙인으로 나타난다."(164-6)


"이와 달리 김동석은 〈뭐 주는 거 없냐〉라는 마비와 길들여짐의 모습과 자신을 돌본 동료 주민을 위해 흔쾌히 〈3만 원〉을 내는 모습을 대비시킨다." "그가 바라보는 주민은 누구나 두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그중 후자가 주민의 〈본모습〉에 더 가깝다. 그러나 평소에는 전자에 가려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려져 있는 주민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주민자조조직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주민자조조직이 목적으로 삼는 변화란 의존에서 독립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의존에서 또 다른 형태의 의존으로의 변화다. 김동석은 각종 물품 지원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주민이 결국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지양해야 하는 까닭은 이러한 의존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품 지원에 대한 일방적 의존이 주민 간의 연대와 상호 돌봄, 즉 긍정적 상호 의존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167-9)


"길게 늘어선 줄과 단체의 활동을 함께 사진으로 남기는 일은 물품 지원 사업의 필수 절차 중 하나다." "서울역과 같은 공공 공간에서의 줄서기는 보여지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실외에서 실내로 이동해야 할 불편한 대상이다. 반면 동자동 쪽방촌에서 줄서기는 〈그림〉과 〈작품〉을 연출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전시되어야 하는 광경이다. 공공 공간이 아닌 쪽방촌에서 주민들의 줄서기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물건을 나누어주는 이와 물건을 받기 위해 줄을 늘어선 주민들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동자동에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불편함뿐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당사자가 느끼는 인격 손상과 자존감 박탈의 문제 역시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주민들은 필요에 따라 줄을 서 물건을 받는다. 단체들은 물건을 나누어주며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줄 세우기가 불러일으키는 전시 문제는 사라지고,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만족하는 〈그림〉과 〈작품〉만 남는다."(184-5)


"동자동사랑방의 사업들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랑방 식도락은 동자동 11-22번지의 공간을 임대해 주민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식도락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공짜가 아니다. 식도락에서는 식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1인당 천 원의 밥값을 받는다." "천 원의 밥값은 식사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자 자신이 받은 것을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되돌려주는 행위다." "공짜 식사는 주민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돌려줄 수도 없다. 그래서 주민들은 마치 자신이 〈거지〉가 된 것과 같은 모욕감을 느낀다. 그러나 천 원은 비록 쪽방촌 주민들이 극심한 경제적 궁핍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큰 부담 없이 낼 수 있는 금액이다. 받은 것을 천 원의 형태로 되돌려줄 수 있는 식도락에서 이들은 〈거지〉가 아니다. 천 원을 지불함으로써 주고받음의 과정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의 행위에 응답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은 식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과 공동의 사회를 구성하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는다."(189-91)


"또 다른 호혜적 실천도 있다. 다름 아닌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다. 주민협동회의 주된 사업은 조합원들의 출자로 모인 공동 기금을 다른 조합원에게 소액으로 대출하는 것이다. 조합원이라면 누구나 10개월 분할 상환을 조건으로 최대 50만 원, 3개월 분할 상환을 조건으로 최대 10만 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2020년 1월을 기준으로 대출 상환율은 88.5%에 이른다. 주민협동회는 난협과 마찬가지로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 사업도 시행한다. 조합원은 1만 2,000원을 내면 1년간 의료비 실비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의료비가 10만 원 이상 발생하면 의료비 지원 신청 및 심사를 통해 최대 30만 원의 의료비를 보상받을 수 있다. 이처럼 주민들은 출자와 대출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보존하면서도 공적 사회보장의 빈자리를 채운다." "주민들은 일상적·조직적인 차원에서 상호 의존과 연대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유지하고 마비와 길들여짐의 낙인을 거부한다."(192-3)


"인격 손상과 자존감 박탈을 거부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또 다른 실천이 있다. 공짜 식사와 물품 지원에 따르는 비난과 헐뜯기다. 대부분의 주민은 각종 지원 물품의 필요성과 쓸모를 인정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물품을 제공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지원 물품과 단체를 비난하고 헐뜯는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 부시맨에게는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을 모욕하고 비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사냥꾼이 너무 많은 짐승을 잡으면 마치 자기가 추장이나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결국 자만심 때문에 언젠가는 부족의 누군가가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시맨은 사냥꾼의 능력을 의례적으로 모욕하고 비난함으로써 교만해지지 않도록 억제한다." "주민들이 보여주는 비난과 헐뜯기는 부시맨의 〈모욕해야 할 의무〉와 비슷하다. 물건을 나누어주는 이들이 자신의 능력과 호의를 드러냄으로써 쪽방촌 주민들을 타자화하고 단순한 수혜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것을 막는 방식이다."(193-7)


"한편 천 원의 밥값을 통해 만들어지는 연대는 역설적으로 잠재적인 배제와 축출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대상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에는 필연적으로 누가 우리의 자격을 갖고 있는가에 관한 물음이 따른다." "장경진이 볼 때 서울역의 노숙인은 〈공짜〉를 기대한다. 여기서 노숙인의 인격과 자존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애초부터 상호 인정 과정에 참여하거나 자신이 제공하는 줌에 응답할 의사가 없다. 그러므로 서울역의 노숙인은 식도락과 천 원의 밥값을 통해 상호 의존 관계를 형성한 쪽방촌 주민들과 달리 인정받아야 할 인격과 체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다." "천 원의 밥값은 분명 주민들이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지키고 상호 의존의 연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천 원의 밥값을 통해 만들어진 상호 인정과 연대의 뒤편에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우리'가 아니라고 판명된 대상을 바깥으로 축출하는 구분짓기와 배제의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198-203)


5 방치된 시간의 무게


"공동의 작업장과 노동 경험을 공유하는 노동계급은 노동조합 등 공동 경험에 기반한 조직화와 제도화를 통해 자본의 힘에 대항한다. 그러나 쪽방촌 주민들은 생애 전반에 걸친 매우 다양한 요인들로 빈곤을 경험하고 쪽방촌에 정착한다. 따라서 공동의 경험에서 비롯된 동질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힘들며, 노동계급에 비해 정치적 주체화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15년 건물주의 퇴거 요구로 삶의 공간이 위협받자 주민들은 쪽방 세입자 모임을 결성하고 강제 퇴거에 공동으로 저항해 9-20을 지켜냈다. 삶의 환경에 대한 위협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위협 때문에 그동안 불가능해 보였던 주민들의 정치적 연대가 일시적으로나마 가능했다." "마침내 주민들이 낸 공사중지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지고, 서울시가 9-20 건물을 임대해 '서울시 저렴쪽방'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 당시 집합행동을 통한 주민들의 〈유대〉와 〈활기〉는 9-20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을 성공으로 결정했다."(214-5)


"그러나 9-20은 5년이 지난 2020년 현재 또다시 비슷한 문제에 맞닥뜨렸다. 문제는 9-20번지의 해뜨는집이 아닌 동자동 35-145번지의 '시계토끼집'에서 불거졌다." "저렴쪽방 사업은 서울시가 민간 소유의 건물을 일정 기간 임차해 주민에게 임대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약 5년의 계약 기간 동안 서울시가 건물의 임대와 관리 및 보수에 관한 권한을 갖지만, 건물의 소유권은 건물주에게 있다. 즉 저렴쪽방은 공공재가 아닌 사유재다. 소유 주체인 건물주의 의사에 반해 더 저렴한 월세를 제공하거나, 노후한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장기간 저렴쪽방으로 임대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서울시와 건물주 간의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계토끼집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건물주가 재계약을 거부하거나 건물의 용도 변경을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저렴쪽방의 지속가능서은 불투명해진다. 해당 건물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제대로 된 대비없이 당장 방을 비워야 한다."(216-9)


"9-20을 둘러싼 서울시와 건물주 간의 설전은 인프라의 '노후함과 황폐함'의 문제로 수렴된다. 쪽방촌의 노후함은 서울시에는 건물의 상태가 사업 기준에 미달한다는 행정적 판단으로, 건물주에게는 수리비가 쪽방 운용 수익을 초과한다는 경제적 판단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쪽방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재계약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쪽방촌의 노후한 건물이 안전규제의 대상으로 혹은 수익 창출의 수단으로 이야기되는 한 지속적인 거주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9-20이 마주한 문제가 건물주의 경제적 판단이나 서울시의 무관심이 아닌 노후함 자체의 문제로 이야기되자, 주민들의 적대가 향한 과녁은 희미해지고 주거권이라는 저항의 언어 역시 힘을 잃는다." "계약 만료를 앞두고 당장 6개월 뒤면 거리로 내몰릴 위기 앞에서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장기적 저항을 기획하는 것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퇴거 위기를 막는 일이 중요했다."(229-33)


"잠재적 재개발 구역으로 존재해온 3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주민들에게는 재개발과 강제 퇴거에 관한 소문도 〈말 뿐이다〉, 〈재개발될 리가 없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갈 것이다〉라며 별일 아닌 듯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건물주들의 사정은 다르다. 9-20의 건물주가 쪽방 운영을 통해 경제적 수익을 얻고 있음에도 대대적인 수리를 꺼린 이유는 동자동이 언제 개발될지 모르는 잠재적 재개발 구역이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재개발이 시작되면 당장 건물을 허물기만 해도 엄청난 재개발 이익을 올릴 수 있다. 건물에 굳이 큰 수리비를 쓰거나 환경 개선을 위해 추가 비용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유전처럼 재개발과 함께 엄청난 경제저거 이익을 가져다줄 동자동은 쉽게 손댈 수도,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곳이다. 결국 건물주가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은 빈곤 비즈니스, 즉 건물을 쪽방으로 운영하는 것이다."(237-8)


"그러나 동자동 쪽방촌을 낡고 마모된 건축물의 문제만으로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동자동 쪽방촌은 노후함과 열악함을 견뎌내며 이 지역을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내고자 한 주민들의 역사이자 성취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상호 의존의 연대를 통해 쪽방촌의 열악함을 견뎌내고 살아냄으로써, 그리고 점유와 참여를 통해 공간을 재구성해냄으로써 동자동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왔다. 9-20 건물에 대형 현수막을 늘어뜨리고 제대로 된 주거 정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때,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재개발과 퇴거에 관한 공적 대안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때, 공원의 한구석에 동료 주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공동 분향소를 차리고 돗자리에 둘러앉아 명절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을 때 쪽방촌은 정치적 공간으로, 추모의 공간으로, 상호 돌봄과 교류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주민들에게 동자동 쪽방촌은 노후하고 열악한 인프라를 넘어 다양한 의미와 사용가치를 제공하는 삶의 공간이다."(241-2)


"주거/퇴거 문제에서 동자동 쪽방촌이 돌봄과 사회적 관계, 공간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하는 삶의 공간이라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서울시가 말하는 9-20은 건축물로서의 의미이다. 서울시가 제기한 안전의 문제는 건물의 상태가 사업 진행을 위한 행정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뜻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저렴쪽방의 연장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한편 건물주가 이야기하는 9-20은 부동산으로서 자신이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이었다." "동자동 쪽방촌이 살만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주민들이 이 공간을 상호 돌봄과 사회적 관계로 채워왔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며 이 공간에 살아온 주민들의 역사는 동자동 쪽방촌이 이미 공동의 것으로서 주민들의 몫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쪽방촌의 노후함은 건축물이나 부동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공간에 대한 위협이다. 그리고 동자동 쪽방촌에 포함된 모든 사회적 삶과 의미, 사용가치를 포괄하는 공동의 것의 위기이다."(249-50)


나가며


"이 책을 통해 벽장 안을 들여다본 독자와 쪽방촌 주민들 사이에도 부분적인 연결이 생겨났다. 이 연결이 지속될 수 있을지, 지속된다면 언제까지 가능할지, 또 어떠한 형태로 지속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벽장과 그 바깥의 부분적인 연결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과 계속해서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방식은 같지 않을지라도, 각자 벽장 안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일 또한 이러한 물음을 놓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모른다. 쪽방촌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에도 결국 주민들이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하는 까닭은, 이러한 시도가 전미래 시점에 서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구원적 미래를 너무나 섣불리 제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은 중요하다. 공통의 구조 위에서 벽장 안팎의 부분적 연결은 드러난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응답은 이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262-3)


# 전미래 시제(前未來 時制, the future anterior) : 일종의 구원적 미래(redemptive future)를 상상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이때 현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이자 현재에 도래한 미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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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5 - 개발주의 시대로 1972-2014 중국근현대사 5
다카하라 아키오.마에다 히로코 지음, 오무송 옮김 / 삼천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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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혁명에서 발전으로, 1972~1982


"마오쩌둥 사상에는 개발주의적인 사고와 급진주의적인 사고가 병존했다. 마오쩌둥은 만년인 1974년 연말부터 1975년에 걸쳐 서로 대립되는 듯한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부르주아의 여러 권리를 제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주의 분배 원칙을 부정하고, 화폐 교환이나 상품마저도 비판하는 상당히 급진적인 지시였다. 이 지시는 '4인방'에 이용당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을 학습하는 운동을 추진하는 근거가 되었다. 두 번째는 안정과 단결에 관한 지시였는데, 이는 주로 '4인방'을 대상으로 한 비판이었다. 파벌적인 권력투쟁에 대한 충고이자 지도부는 단결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는 경제를 담당하는 부총리 리셴넨에게 내린 국민경제 수준을 끌어올리라는 지시였다 이 지시에 따라 덩샤오핑을 요직인 당 부주석, 제1부총리, 총참모장에 앉히고, 병석에 있는 저우언라이를 대신하여 당 중앙의 일상 활동을 책임지는 자리에 서게 했다."(33-4)


"1976년 2월, 총리대행으로 지명되었고, 그 해 10월 6일에는 주도적으로 '4인방'을 체포한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를 견지하는 이른바 '두 가지 범시론'이라는 방침을 표방해 왔다. 여기에 화궈펑은 〈마오 주석의 이미지를 손상하는 모든 언동을 제지해야 한다〉며 또 하나의 '범시'를 추가로 제기했다. 화궈펑이 보기에, 마오쩌둥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중국공산당 및 그 지배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1977년 1월 저우언라이 서거 1주기 무렵, 베이징을 비롯한 몇몇 크고 작은 도시에서 사람들의 자발적인 추도 움직임이 나타났다." "화궈펑 등은 이 때 '두 가지 범시론'을 제창했다고 알려졌다. 즉 '4인방' 잔당과의 투쟁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마오쩌둥의 유훈에 따르고, 만사를 〈과거의 방침에 따라야〉한다고 명확히 함으로써 권력 이행기에 대국의 안정을 확보하는 동시에, 그 시점에서 천안문 사건의 명예회복과 덩샤오핑의 부활을 좀 더 직접적으로 저지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42)


"그러나 화궈펑과의 사상 노선 투쟁에서 승리한 덩샤오핑이 도입한 개혁 정책은 무엇보다 분권화였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지방이나 기업에 예전보다 큰 경제상의 권한을 주었고, 노동에 따른 분배 원칙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보너스 제도나 작업량에 따른 임금지불 제도를 부활시켰다. 둘째로, 부분적인 시장 도입, 곧 생산과 유통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고 가격 자유화를 실시했다. 세 번째로, '개체호'(個體戶)라고 일컫는 자영업을 허용함에 따라 고용이 창출되었다. 규모가 큰 개체호가 나타나면 최종적으로 민간 기업으로 인정을 받았다. 농촌에서는 대약진 때에 만들어진 농촌 공업의 기초 위에 마을 운영이나 개인 경영 등을 통한 '향진(鄕鎭) 기업'이 발전했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 주체는 계획 대상에 들지 않았고 시장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즉 인구 압력에 따라 계획경제의 틀에서 빠져나온 경제 주체가 늘어나 시장경제가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메커니즘이 생긴 것이다."(53)


2장 개혁개방을 둘러싼 공방, 1982~1992


"1980년대 초반, 중국은 소련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며, 소련에 대한 전략적 관점에서 대일 관계를 고려하는 경향이 여전히 강했다." "하지만 1982년 9월 제12회 당대회의 정치보고에서, 후야오방 총서기는 '독립자주 외교'로 전환한다고 밝히고 '전방위 외교'를 제창하며 소련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된다. 독립자주 외교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 거리를 조정하는 데 있었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대미 관계에서 최대 현안 문제가 미국의 타이완에 대한 무기 수출이었다. 1981년에 등장한 레이건 대통령은 친타이완파로 알려졌고, 그해 말에 전투기 부품과 공군 서비스를 타이완에 수출한다고 결정함으로써 중국 측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82년 8월 미중공동코뮤니케가 발표되어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제12회 당대회 정치보고는 초강대국의 패권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중국은 〈그 어떤 강대국 또는 국가 블록에도 의존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68)


"중국은 초강대국(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에 대해 비판했지만 종래의 '반패권 통일전선' 노선은 드러내지 않았다. 국방 건설보다는 경제 건설을 우선하는 덩샤오핑에게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과 국경 지역의 긴장 완화가 더 중요한 과제였다." "그 배경에는 소련에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는 레이건 정권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미소 관계의 악화가 있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재검토하면서 중소 관계는 호전된다. 미중·중소 관계가 개선되면서, 1988년 덩샤오핑은 〈국제정치 분야는 대결에서 대화로, 긴장에서 완화로 전환되고 ······ 현재는 국제정치의 새 질서를 수립해야 할 시기〉라고 발언했다 .1989년 5월, 중·소 두 나라는 평화 5원칙을 담은 '베이징코뮤니케'를 발표한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던 고르바초프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공산당 지도부, 특히 좌파들한테는 경계의 대상이었다."(69-72)


"천안문 사건 후 덩샤오핑도 더는 당정 분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해체됐던 정부 기관의 당조가 부활하고 노동조합 등 조직들의 당으로부터 자립이 부정되었다. 1990년대에 실시된 공무원 제도는 1987년의 구상 단계에서 목표로 했던 정치적 중립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정치개혁은 거의 정지 상태에 빠졌다." "특히 1991년 8월 소련에서 발생한 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한 뒤로 좌파의 위기감과 공세는 강해졌다. 덩리췬은 사회주의 사회의 계급투쟁을 소유제와 결부시켜 공유제와 외자, 개인 경영 등 사유제 사이에는 모순과 투쟁이 존재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문혁기와 같은 어조로, 이런 모순은 사회주의의 길과 자본주의의 길 사이 모순이며 이런 현상이 당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2월에 열린 전국 조직부장 회의에서 다음해 당대회의 인사 정책이 검토되었지만, 회의에서 결정된 간부 선정의 첫 번째 기준이 된 것은 사회주의와 당의 영도에 대한 충성 그리고 천안문 사건 때의 언동이었다."(91-5)


3장 사회주의의 중국적 변화, 1992~2002


"1992년 초,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우한을 경유해 광둥 성의 경제특구를 시찰한다(제2차 남방시찰). 그는 지방 간부들한테 대담하게 개혁과 개방을 가속화하도록 강하게 호소했다. 일부러 광둥 성까지 발길을 넓힌 이유는, 그 전해에 상하이에서 발신한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중앙 선전 부문 등의 저항 때문에 선전 효과가 적었던 데 있었다. 이번 걸음은 홍콩의 미디어를 활용하여 반격의 봉화를 올린 것이다. 남방시찰을 통해 지방의 불만을 규합하여 중앙의 정국을 움직이려는 방법은,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을 발동할 때 마오쩌둥의 방식과 같았다. 덩샤오핑으로서는 이 발걸음이 중대한 국면이었고 말 그대로 건곤일척의 행동이었다. 생산력과 국력, 생활수준의 향상에 유리한 제도나 정책이라면 그것은 사회주의다라는 '세 가지 유리론' 등을 내용으로 한 덩샤오핑의 남방담화는, 먼저 홍콩의 미디어를 통해서 전 세계로 전해졌고, 다시 중국에 역수입되어 경기 침체에 고민하고 있던 지방 간부들의 강한 지지를 얻었다."(99)


"제2차 천안문 사건(1989) 직후에 덩샤오핑은 기존 교육의 실패, 특히 일반 인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상정치 교육의 실패가 사건을 일으킨 큰 원인이 되었다는 인식을 표명했다. 또 장쩌민도 민주화 운동을 매국주의라고 단정하고 전국 학교에 애국주의 교육 강화를 지시했다. 자국의 문화나 국제적 지위, 국력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려는 내셔널리즘은, 근대 이후의 중국 지도자들이 본질적인 동기로 되어 왔다. 그리고 1990년대 중엽 덩샤오핑에서 제3세대 지도자로 권한 위양이 완료되면서, 내셔널리즘을 국민 통합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1994년 8월에 발표된 〈애국주의 교육 실시 강요〉는 애국주의를 전 사회가 학습해야 할 과제로 규정하였다." "그전까지의 애국주의 교육이 마오쩌둥이나 공산당 영웅들의 정신이나 무용(武勇)을 강조하는 면이 강했던 데에 비해,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애국주의 교육은 열강으로부터 받은 침략이나 굴욕을 강조하는 피해자의식을 심어주는 특징이 있었다."(113-4)


"2001년 7월 1일 중국공상당 창립 80주년 기념강의에서 장쩌민은 사영 기업주,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실질적으로 용인하였다. 본디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이며 자본가는 계급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자본가를 입당시킨다는 대담한 결정에는 당 내부의 저항도 컸다.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는 억제되어 2002년의 제16회 당대회에서 당 규약이 개정되고, 중국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임과 동시에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의 전위라고 규정되었다. 그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2000년 2월에 장쩌민이 자신의 '중요 사상'으로 제시한 '세 가지 대표론'이었다. 공산당이 '선진적 생산력의 발전, 선진적 문화의 전진, 가장 광범위한 인민 대중의 근본적 이익' 세 가지를 대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공유제의 포기와 실질적인 사유화가 진척된 결과, 필연적으로 신흥 사회 세력으로 대두하는 사영 기업주를 '광범위한 인민'에 포함시킨 데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공산당은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전환한다."(135)


4장 두 개의 중앙 지도부, 2002~2012


"후진타오·원자바오 정권은 실로 미묘한 당내의 세력균형을 기초로 성립한 정권이었다. 오랫동안 중앙 지도부에 있었던 리펑이나 리루이환, 주룽지까지 은퇴했지만, 장쩌민의 영향력은 짙게 남았다. 돌이켜 보면 덩샤오핑은 제2차 천안문 사건 이후 장쩌민을 '제3세대 영도 집단의 중핵'이라고 부르고, 다른 지도자에게 장쩌민의 권위를 존중하도록 시달하면서 〈어떤 영도 집단에도 반드시 중핵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덩샤오핑의 이 생각은 총서기 자오쯔양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자신의 대립이 당시의 위기를 불러온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반성에서 나왔다고 추측된다." "그런데 이른바 그 은혜를 받은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유훈을 돌아보지 않았다. 후진타오 정권은 '후진타오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 아니고,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미묘한 호칭밖에 얻지 못했다. 이렇게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각각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중앙'이 존재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142)


"2003년 이후부터 활발해지던 홍콩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당초 후진타오 정권은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홍콩에서 2007년의 행정장관 직접선거나 2008년의 입법회 전면 직접선거에 대한 요구가 나오자, 2004년 초 장쩌민은 선전에서 '홍콩 지도층의 주체는 애국 인사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덩샤오핑의 경고를 되풀이했다." "타이완을 향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장쩌민은 1998년에 통일의 시간표가 필요하다고 발언하면서, 타이완 당국이 교섭을 무기한 연기할 경우 무력행사도 배제하지 않는 정책을 취했다. 반면 후진타오는 2005년 4월에 롄잔 국민당 주석을 대륙으로 초청하여 국공 양당의 역사적인 화해를 연출하였다. 그리고 9월의 항일전쟁·반파시즘전쟁 승리 60주년 기념대회에서 후진타오는, 국민당이 항일전쟁의 '정면'에서 주체로 싸우고 공산당은 '적의 후방 전장'을 지도하는 국공 양당의 분업이 이루어졌다고 발언하며 국민당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152-3)


"공산당에게 큰 과제로 떠오른 것은 후진타오 정권기에 폭발적으로 발달 보급된 인터넷에 대한 관리였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정보 발신 능력을 갖춘 일반 국민들이 당간부의 독직 부패나 권력 남용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동하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방법에 대해 당내의 의견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후진타오에 따르면, 여러 이익 충돌이 발생하고 있기에 사람들의 불만과 요구 표출이나 모순의 조정과 권익 보장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한층 더 정비해야 했다. 여기에는 이른바 시민사회, 즉 시민이나 농민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사회 조직을 활용하려는 사고방식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저우번순 중앙정법위원회 비서장은 《구시》(求是)에 논문을 발표하여 〈'공민사회'(civil society, 시민사회)는 서방이 중국을 목표로 설계한 올가미이다〉라고 단정했다. 중앙정법위원회란 경찰이나 사법 등 치안을 담당하는 부문의 총괄 부서인 강력한 당 기관이다."(173)


5장 초강대국 후보의 자신감과 불안, 2012~2014


"2012년 11월 15일에 열린 제18기1중전회에서 시진핑 총서기가 선출되었다. 그로부터 2주 후, 시진핑은 새로운 상무위원들을 인솔하여 국가박물관을 방문해 '부흥의 길'이라는 전시를 참관했다. 근대 이래 중국이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공산당의 영도 아래 당당한 나라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전시회에서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중국의 꿈(中國夢)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사회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고, 좋은 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는 연고주의의 만연이었다. 가령 회사에 들어가도 출세할 수 없다는 개인으로서의 차이니즈드림이 시들어 버린 것이었다. 거기에서 차이니즈드림(중국인의 꿈)을 대신하여 국가 차원의 차이나드림(중국의 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었다. 이는 곧 국가가 세계 챔피언이 됨으로써 개인의 꿈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는 내셔널리즘의 스토리였다."(190-2)


"시진핑의 말투나 행동에서 마오쩌둥을 방불케 했다. 예를 들면, 2013년 1월에 시진핑은 새 중앙위원회 위원들한테 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훈계 발언을 했다. 〈개혁개방의 전후 시대를 대립적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즉 개혁개방 후의 역사를 이용하여 개혁개방 전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도, 개혁개방 전의 역사를 이용해서 개혁개방 후의 역사를 부정해도 안 된다.〉 이는 문화대혁명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개혁개방에 착수했던 덩샤오핑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다. 덩샤오핑은 좌파도 우파도 사회주의를 멸망시킬 수 있다며, 중국은 우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좌를 방지하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남방담화에서 밝혔다. 이에 대하여 시진핑은 문혁을 되돌아보며 〈7년 동안의 상산하향(上山下鄕)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대중과 비교적 깊은 정을 맺게 하고, 성장과 진보를 위하여 비교적 좋은 기초를 쌓았다〉고 회고했다. 시진핑은 문혁을 고난을 극복한 성공 체험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194-5)


"'붉은 2대'(紅二代)라고 불리는 태자당은 일반적으로 혁명의 이념을 중시하면서도 개발주의에 편승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키지 않으면 지배의 정통성을 잃는다는 점도 알고 있다.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실천한 바와 같이 경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 혁명 정신을 환기하여 사람들의 정서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많은 태자당들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독점 권력 아래에서 시장화를 진행한 결과, 사회 모순이 커졌고 개발주의만으로는 인심을 모을 수 없었기에, '붉은 2대'는 혁명 회귀나 내셔널리즘을 국민 통합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30여 년의 개발주의 정책을 통해 사회는 크게 변했다. 중국의 발전과 글로벌화는 상호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경제성장 속도가 계속 느려지면, 언젠가 보수·국수주의와 개혁·국제주의의 줄다리기가 치열해질 것이다.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시진핑은 현재 전자를 후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붉은 3대'는 아직 없고 표변하는 군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20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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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4 - 사회주의를 향한 도전 1945-1971 중국근현대사 4
구보 도루 지음, 강진아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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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전후의 희망과 혼돈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한다는 대의명분이 사라졌음을 의미했고,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 간에 격렬한 항쟁이 펼쳐지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민중들 사이에는 부흥을 바라며 〈더 이상 전쟁은 사양한다〉는 내전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 대표로 충칭에 머무르면서 이러한 여론 동향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내전에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 지금 가장 인심을 얻을 수 있는 슬로건이다〉라고 거듭 옌안의 당 중앙에 보고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국제적으로는 국민정부 아래에서 안정된 통일 중국 재건을 기대하는 미국 정부가 필사적으로 국공 양당 사이를 조정하였고, 소련도 중국에서 내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국민당 역시 전후 헌정을 실시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하고, 전쟁이 끝나면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인 '훈정'을 끝내고 민주적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18-20)


"경제개방 정책의 파탄과 구일본군 점령지 경제 접수 작업의 혼란은 전후 국민정부의 재정경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생산과 유통의 재건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시장에 공급되는 물자가 부족해지고 물가가 상승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데도, 국민정부는 국공내전을 준비할 전비(戰費)를 확보하려고 방대한 적자예산을 편성하고 통화를 남발하여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했다. 당연히 물가는 폭등했다." "국민정부가 내놓은 인플레이션 대책은 통화를 새롭게 바꿈으로써 물가를 억제한다는 방안이었다. 1948년 8월에 금원권(金圓券)이라는 새로운 통화가 발행되었다. 정부는 종래의 법폐 300만 위안을 금원권 1위안으로 강제로 교환하도록 하여, 물가와 임금 동향을 진정시키려 했다. 금원권이란 신화폐를 유통시켜 표시 가격을 인하하면서 물가와 임금을 동결한 과격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규제를 싫어하는 시장에서 상품이 모습을 감추고, 물물교환이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이 개혁은 실패했다."(31-3)


"1946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헌법제정국민대회가 열렸다. 정당 중에 국민당, 청년당, 민주사회당이 출석했을 뿐이었다. 공산당과 민주동맹은 국민당이 정치협상회의의 결의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려고 한다며 항의의 표시로 대회 출석을 보이콧했다. 국민당의 강경책은 일시적으로는 국민정부의 통치를 강고한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민당의 지지 기반을 좁히고 약화시켰다. 헌법 시행(1947년 12월)에 따른 입법 활동을 위해 1948년 3월에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한층 두드러졌다. 대회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수도 난징에서조차 유권자 147만 명 가운데 80퍼센트가 기권할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선거를 둘러싼 매수 사건과 폭력 사태, 대리투표가 끊이지 않아 국민들에게 환멸을 주었다." "대조적으로 공산당은 생계보장과 내전 반대,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운동에 연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국민정부의 정치적 고립은 심화되었다."(37-40)


2장 냉전 속의 국가 건설


"1949년 10월, 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의 국가기구를 보면 각 성청(省廳)의 장관에는 민주당파가, 부책임자에는 공산당원이 취임하는 패턴이 많았다. 지방정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얼핏 보면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1911년 신해혁명 때, 성청 장관에는 청의 개혁파 세력이던 입헌파가 취임하고 부책임자로 혁명파가 취임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신해혁명 당시 상황은 현실 정치의 힘 관계가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1949년 혁명의 경우 실권은 대부분 공산당이 장악했으면서도 정권 밖의 일반 사회에 대해서 당외(黨外) 세력이 존중받고 있음을 과시하고, 당외 세력들한테서 새 정권이 신뢰와 협력을 얻어 내기 위한 방책으로서 이런 체제가 채용된 면이 강하다. 실제로 그 후 공산당이 사회주의로 조기 이행에 착수하고, 특히 1957년에 잠재적인 정권 비판자를 적발하는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면서 당외 세력 대부분은 정권 밖으로 배제되었다."(63)


"한국전쟁에 따른 재정적·경제적 부담에 대처하고 국민경제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증산과 절약을 호소했다. 그 일환으로 1951년 12월에 3반운동(三反運動)이 시작되었다. 원래 이 운동은 전시경제 체제 아래에서 생겨난 오직(汚職), 낭비, 관료주의 세 가지 부정적 현상을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 적발하고, 세 가지에 반대하여 증산과 절약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3반운동을 거치면서 국민정부 시대부터 계속 일해 온 전문가나 경제 재정 관료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통제와 감시가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민간 기업에 대한 비판도 확대되었다. 1952년 1월 말부터 시작되어 6월에 일단락되기까지 5반운동(五反運動)이 전개되었다. 5반이란 뇌물 공여, 탈세, 정보 누설, 부실공사, 공공재 절도 등 증산과 절약을 방해하는 민간 기업의 다섯 가지 행위에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5반운동으로 개별 민간 기업 경영자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통제와 감시도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83-5)


"신민주주의를 내걸고 출발한 공산당 정권은 1952년 후반부터 이듬해 전반까지 사회주의화 강행으로 크게 방향을 선회했다. 왜 공산당 정권은 사회주의화를 서두른 것일까." "무엇보다 공산당 지도부는 현대적 장비를 갖춘 미군과 대결한 한국전쟁에서 자국의 빈약한 장비에 위기감을 통절히 느꼈다. 그래서 소련이 선전하는 군수공업을 축으로 한 급속한 공업화를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다." "두 번째로 3반운동과 5반운동이 전시체제하의 증산과 절약을 목표로 전개된 결과, 민간 기업에 대한 통제가 이미 눈에 띄게 엄격해졌다는 점이다. 큰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상공업의 전반적인 집단화와 국영화를 실시하는 데 수월한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세 번째로 농촌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주도한 토지개혁으로 지나치게 영세한 경영이 이뤄지면서 농업 생산이 저조해진 바람에,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도 (집단화를 추진한) 1930년대 소련이 모델이 되었다."(86-7)


3장 '대약진운동'의 좌절


"중국이 소련형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한 직후인 1956년, 이러한 사회주의의 장래에 대한 신뢰를 뒤흔든 큰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소련에서는 중국이 모델로 삼으려 한 스탈린 시대의 실태가 폭로되면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어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에서는 사회주의화 강행에 항의하는 대규모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더해 중국 내에서도 식량과 일용품을 공급하는 농업과 경공업 생산이 저조했기 때문에, 민중들 사이에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이 분출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심각한 위기감을 안고 대응책을 모색했다." "표면적으로 중국은 소련에 동조하여 동유럽 국가들의 민중운동 탄압을 지지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지만, 실제로는 사태를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련이 동유럽에 개입하는 근거로 삼은 '제한주권론' 주장, 즉 사회주의국가들 사이에는 사회주의를 방위하기 위해 각국의 국가주권이 제한될 수도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강한 불신감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101-4)


"그렇지만 1950년대 중국은 뭐니 뭐니 해도 소련형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고 있었고, 소련의 기술과 경제, 군사원조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1957년 10월 소련과 '국방 신기술에 관한 협정'을 맺고, 소련이 원자폭탄의 견본과 원폭 생산의 기술 자료를 제공하기를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사실 중소 국방신기술협정이 체결에서 파탄에 이르는 중간에, 중국군은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6일에 걸쳐 포탄 44만 발을 샤먼 앞바다의 진먼 섬에 퍼부었고, 섬을 수비하는 타이완 정부군을 공격했다. 이때 미군은 타이완에 군수물자를 지원했을 뿐,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한편 중국군도 진먼 섬으로 상륙하는 작전은 강행하지 않은 채, 40일 동안 봉쇄와 포격으로 일관했다.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타이완 해방'을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소련에 통고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의사를 전달받은 소련의 회답은 국방신기술협정의 파기였다."(111-2)


"공산당 정권의 정치적·경제적 난항을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으로 타개하고자 하는 마오쩌둥 일파가 점차 소련과 대립을 심화시켜 나가면서 종래의 소련 모델과는 다른 사회주의를 모색하여 밀어붙인 것이 대약진운동이었다." "소규모 간이 용광로(土法高爐)를 이용한 제철이나 댐 건설에 수많은 민중이 동원되었다. 동시에 땅을 깊게 갈고 작물을 촘촘히 심어 증산을 꾀하는 농사법(深耕密植)이 장려되었으며, '인민공사'(人民公社)라고 불리는 대규모 집단농장화가 추진되었다." "하지만 토법고로, 심경밀식, 인민공사는 어느 하나도 뜻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아니, 오히려 참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연이은 대흉작 속에 중국 경제는 전면적인 붕괴 위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차후에 공표된 인구통계에 기초하여 추계해 보면, 식량도 물자도 부족한 이 시기에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적어도 2천만 명 이상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야말로 참상이었다."(123-35)


4장 시행착오를 겪는 사회주의


"(지도부가) 대약진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실패의 주된 원인은 자연재해였다고 규정함으로써, 대중 동원에 기댄 고도경제성장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제기되지 않았다.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마오쩌둥도 공산당 내에서 당 주석으로 수장의 지위를 계속 지켰다. 1960년 경제계획은 〈세계 과학기술의 정상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그해부터 막대한 자금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핵무기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개발계획은 조정 정책 아래에서도 계속되었다. 화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호소하는 등 다시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에 도전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원래 농업과 경공업 진흥을 중시하는 조정기의 방침 자체가 중화학공업화 노선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964년부터 추진된 제3차 5개년계획(1966~1970) 책정 작업에서 특히 중시된 것은 내륙지역에 군수공업 기지를 건설하는 '3선정책'(三線政策)이었다."(144-6)


"조정기의 동향은 단순히 경제정책의 수정에 그치지 않고, 공산당의 통치 방식 그 자체까지 수정할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농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표된 1961년 6월 15일의 지시에는 〈농촌 생활에 관여하는 간부나 일반 민중에 대해 우경화니 '좌경화'니 하며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은 앞으로 금지한다. 그들에 대해 정치적 딱지를 붙이는 것을 금지한다〉고 명기하였다. 7월 19일의 지시는 더욱 명확하게 〈'반우파' 투쟁 이후, 각 대학이나 기업에서 일부 지식인들에게 가한 비판은 재검토해야 한다. ······ 만약 잘못된 비판이 가해졌다면, 시시비비를 바로잡고 잘못을 고쳐야만 한다〉고 하여, 급진적 사회주의의 주도 아래 수많은 당원이나 전문가에 대해 과도한 정치적 비판이 거듭된 1957년 '반우파' 투쟁 이래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따라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조정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저항하는 자세를 강화해 가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다."(159)


"그 무렵 안후이 성과 광시 성에서는 농민이 촌(村)에서 농지를 빌려 경작하고 수확한 농작물 일부로 촌에 차지료(借地料)를 지불하는 도급 경작이 확산되고 있었다. 차지료를 지불하고 남은 농작물이 전부 농민의 수입이 되었기 대문에 농민의 경작 의욕을 자극하여 전체 농촌 생산도 증가했다. 그러한 움직임에 기초하여 농촌 증산을 꾀하기 위해 개별 농가의 도급 경작도 인정해야 한다는 방침을 공산당 중앙의 농촌사업부장 덩쯔후이가 제기하자, 이를 받아 덩샤오핑도 〈안후이 성 동지들은 '검은 고양이든 얼룩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일리가 있다〉라며 도급 경작을 지지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직후 1962년 7월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에서 덩샤오핑이 한 발언이 뒷날 유명해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라는 어구이다. 이러한 동향에 대해 마오쩌둥은 도급 경작은 집단농업의 해체로 이어지는 조치라면서 강하게 반대했다."(160-1)


5장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의 배후에는 경제조정 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다툼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지향하는 급진적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은 적었고, 당내 다수파는 경제조정 정책의 방향성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이 영향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부인 장칭이 인맥을 가진 당의 문화선전 부문이었다. 이리하여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항쟁이 '문화혁명'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전개되었다. 또한 국제 환경 아래, 한쪽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미국과의 대립이 격화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주의 건설 노선의 차이와 국경선 획정을 둘러싼 분쟁으로 야기된) 소련과의 대립 역시 심화되면서, 중국 지도부가 한층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던 점도 주의해야 한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확립해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은 가혹하고 치열한 정치투쟁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었다."(177-8)


"각지에서 혼란이 일어난 배경에는 문혁으로 기존의 사회질서가 파괴된 가운데 그때까지 억압당해 온 여러 사회계층의 불만이 분출한 측면이 있다.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 일본의 단카이 세대(團塊世代)에 해당하는 중국의 홍위병 세대는, 중국 경제가 계속해서 침체된 가운데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쉽사리 정규직을 찾지 못하고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다. 늘어만 가던 전후 출생 젊은 실업자 내지 반실업자들이야말로 홍위병을 자칭한 학생이나 문혁파 노동자들의 주된 공급원이었다." "한편 어느 정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대다수의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이미 대약진 정책의 파탄에 실망하여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문혁파가 내건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은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나마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고 농촌 경제를 활성화시킨 경제조정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을 뿐, 급진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183)


"홍위병은 원래 계통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족 당시인 1966년 8월 무렵부터 여러 가지 의견 차이로 분열과 다툼이 거듭되었다." "아무리 문혁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공산당 지도부라 해도 이런 사태에는 당혹감을 느껴 충돌을 억제하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우한의 7·20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1967년 7월 20일 항쟁 조정에 나선 공산당 중앙의 문혁파 간부 왕리와 셰푸즈가 문혁에 비판적인 '백만웅사'(百萬雄師)라는 현지 민중 단체에게 억류되어, 문혁파 계열 조직을 옹호하는 방침을 철회하도록 압박당한 사건이다. 이 행동에 참가한 2천 명의 주력은 공사용 헬멧을 쓰고 트럭 27대와 소방차 8대에 나눠 탄 채 밀고 들어온 노동자들로, 이들을 지지하는 시위대에는 1천 명 가까운 군인들까지 가세했다. 이러한 조직적 행동은 당 조직과 군의 지지 없이는 일어나기 어려웠다. 문혁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민중들뿐 아니라 기존의 당 조직과 행정 간부, 군부 사이에도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다."(189-91)


6장 문혁 노선의 불가피한 전환


"1966년에 문혁의 영향으로 대학교 입학생 모집 업무가 정지된 뒤로 1968년까지 3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생이 진로를 정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의 젊은이들이 홍위병 운동의 주된 인력 공급원이기도 했다. 따라서 홍위병 활동을 완전히 봉쇄하려면 그들이 나아갈 길을 정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문혁의 혼란으로 생산력은 떨어지고 도시 상공업의 일자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기된 것이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이었다. 도시 지역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농촌이나 오지의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을 '하방'(下放)'이라고 불렀다. 1968년 11월 15일 당·정부·군은 연명으로, 문혁 시기에 공부할 시간도 없이 졸업반이 되어 버린 학생들이나 진로를 정하지 못한 졸업생들에게 모두 직장을 정해 주겠다는 방침을 알렸다." "하지만 생산 현장에서 농민과 노동자한테 배우자는 말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 허울뿐인 성가신 존재를 쫓아 버린 것이었다."(204)


"문혁이 시작되던 시기의 중국은 미국과 소련 두 나라와 군사 충돌을 대비하면서, 동시에 '인도 반동파'와도 '일본 군국주의'와도 대결한다는, 이른바 사면초가에 가까운 고립감을 느끼며 세계와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운동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저지하고, 1969년에 중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이 일어난 뒤에는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련의 위협이 가장 절박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지하 방공호를 건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1969년 가을부터 1970년에 걸쳐 전시체제를 강화한 것도 특히 소련의 공격을 의식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미국과 소련의 움직임을 검토하고 국제 전략을 논의하면서 얻은 결론은, 미국과 소련 간의 모순을 이용하여 우선은 미국과 관계 개선을 꾀하고 소련의 공격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의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던 미국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서 이익을 찾아내고 있었다."(219-20)


# 1971년 7월, 베이징에서 키신저 국무장관-저우언라이 총리 회담 성사


"1971년 9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가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 국외로 도피하려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유일한 합법적 대표권을 인정하고, 중국을 다섯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로 맞아들이는 동시에, 타이완을 유엔과 그 관련 기관들에서 배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린뱌오 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중국 국내의 권력투쟁이 어두운 심연을 슬쩍 드러낸 직후에, 나라 바깥에서 화창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 셈이다. 물론 이 유엔총회의 결의는 타이완 외교에서는 고난의 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문혁 시기에 실각한 덩샤오핑이 복귀하여 중국 정부의 부총리로 유엔총회에 참여한 것은 1974년 4월의 일이었다. 이제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하는 일은 임박해 있었다. 문혁의 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미 역사의 수레바퀴는 문혁 이후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2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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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3 -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중국근현대사 3
이시카와 요시히로 지음, 손승회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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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론


1장 국민혁명 시대


"공산당원의 국민당 가입, 즉 국공합작(國共合作)은 1924년 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막이 올랐다." "국공합작은 공산당의 세력이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직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이 광저우를 비롯한 국민당 지배 지역에서 국민당원이라는 이유로 직책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지방 정권이라 해도 광둥 정권은 어엿한 정부였고 정권이 노농부조(勞農扶助)를 내걸고 사회운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박봉이지만 공적 기관에서 월급을 받으며 혁명운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재정 기반이 취약했던 초기 공산당은 전문적으로 당 업무에 종사할 다수의 활동가를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지원 아래 '직업혁명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의미가 컸다. 합작 당시 500명이던 당원 수가 1925년 가을에 2,500~3,000명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국공합작에 따른 이러한 경제적인 간접 효과도 컸다고 할 수 있다."(24-5)


"국공합작은 공산당원이 공산당 당적을 보유한 채 국민당에도 가입하는 형식이었는데, 이런 사정은 특히 국민당의 고참 당원에게는 공산당원이 국민당을 탈취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즉 공산당 쪽에서는 국민당원 가운데 누가 공산당원인지 파악하고 있었지만, 공산당 명부가 없었던 국민당 쪽은 누가 공산당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국민당 쪽의 의심을 배경으로 쑨원의 측근이기도 했던 다이지타오는 《쑨원주의의 철학적 기초》와 《국민혁명과 중국국민당》 같은 팸플릿을 통해 공산당의 '기생(寄生) 정책'을 비판하고, 철저한 '순정 삼민주의'를 강하게 주장했다. 국민당에게 골치 아픈 것은 적극적으로 국민당의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이 예외 없이 공산당원이라는 현실이었다." "이렇게 하여 국민정부는 연소용공(連蘇容共)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던 왕징웨이와 광둥의 군사적 통일에 성과를 올리고 있던 장제스를,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 고문단이 지원하는 체제로 유지되었다."(32-3)


"1927년 4월 12일에 벌어진 장제스의 반공 쿠데타와 난징 국민정부 수립(4.18)은 우한의 국민당과 정부를 크게 동요시켰다." "'붉은 도시' 우한의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혼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민중운동에 의해 붕괴된 사회질서였다. 후난과 후베이에서 일어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북벌이 전개되는 과정에 숨은 공로자였지만, 혁명으로 분출된 대중의 에너지는 당초 그것을 조장하고 지원한 공산당의 통제마저 뛰어넘는 '과화'(過火)가 되어 사회질서까지 파괴하고 말았다. 농민운동은 정부가 규정한 지조(地租) 제한이라는 범위를 넘어 토지를 몰수하고 지주를 박해하는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쌀의 유통을 가로막기까지 하였다. 도시에서도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파업이 이어졌다." "이런 현실은 난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난징정부 지배 아래에 있던 지역의 물가가 안정되어 있는 상황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우한정부는 내부에서 붕괴되고 있었다."(57-9)


2장 난징 국민정부


"상하이 쿠데타에 이은 우한의 분공(分共) 결정은─국민당을 재개조하라는 스탈린의 5월 지시가 폭로되면서 실행된─공산당에게 혁명운동의 실패 또는 패배를 의미했지만, 이로 인해 '국민혁명'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국민당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의 방해자였던 공산당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난징과 우한의 균열을 회복하여 본래의 혁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한의 왕징웨이든, 난징의 장제스든 그 후 자신들을 어디까지나 '혁명파'로 생각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국공합작 체제 아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기층 활동을 담당해 온 공산당원이 당밖에서 제거됨으로써, 국민당이 상대적으로 기층 조직이 약한 간부 중심형 정당에 머물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공산당을 대신하여 국민당을 지원한 것은, 북벌 과정에서 귀순한 여러 군대를 아우른 당군(黨軍)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 지역의 상공업자와 민족자본가, 그리고 치안 회복과 중국 통일을 염원하는 여론이었다."(65)


"지난사변은 중일 관계는 물론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치에도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첫째, 그때까지 영국을 주요 적으로 여겨 온 중국의 반제 운동이 명확하게 일본을 표적으로 삼게 만들었다. 둘째, 장제스 등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셋째, 제1차 산둥 출병에 동조를 보인 영국과 미국 두 나라가 국민정부에 접근하는 입장에 서서 일본을 비판하게 되었다. 또 지난사변은 파견된 기관(현지 군)이 사건을 확대하고 격화시켰다. 거기에 군 중앙과 정부가 추종하여 군 증파를 단행하고, 여기에 다시 '폭지응징(暴支應徵)이라는 여론을 배경으로 호응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그 뒤로 나타나는 일본의 중국 침략 행동의 패턴을 모두 보여 주고 있다.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에서 일본이 패전하기까지를 중일 15년전쟁이라 하는데, 국민혁명과 국가 통일에 대한 무력간섭이라는 전쟁의 주된 목적과 그 발생 형태를 보면, 지난사변은 훗날 벌어지게 될 전쟁의 예행연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73-4)


# 지난사변(濟南事變) : 1928년, 제2차 북벌이 재개되자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제2차 산둥 출병을 단행했다. 양측 병력이 산둥 성의 성도 지난(濟南)에서 충돌하면서 중국군인과 민간인 3천 명 이상이 사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28년부터 1930년대 초까지 당내 대립은 '훈정' 체제의 구체적 방법을 둘러싸고 장제스와 대립하는 왕징웨이, 쑨커, 후한민을 비롯한 문민 정치가들의 '이론 투쟁'이 군사 문제에서 장제스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군사 지도자(리쭝런, 펑위샹, 옌시샨·리지선 등) 각파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분의 와중에 발발한 만주사변(1931)은 이듬해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사변(1·28사변)으로 불똥이 번졌고, 이런 급박한 사태에 영향을 받아 국민정부는 1년 정도 뤄양으로 천도했다(그해 12월 난징으로 돌아왔다). 장제스가 3월에 군사 지도자로 중앙에 복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국난을 수습할 수 있는 실력자가 장제스 말고는 없다는 폭넓은 지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국난에 대처하자는 호소가 커졌고, 그러기 위해서는 훈정 체제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헌정으로 조기 이행,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 설립)이 더욱더 강화되었다."(85-9)


3장 공산당의 혁명운동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에 있다는 사실은 모스크바에서 전개된 권력투쟁과 노선투쟁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는 중국 혁명에 대한 인식이 쟁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북벌기 중국공산당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령 트로츠키는 우한 국민당의 반동화에 경종을 울리고 노농(勞農) 소비에트의 조직화를 주장했지만, 그에 반대한 스탈린은 우한에서 혁명을 추구하여 좌파 정부를 통한 토지혁명을 중국공산당에 요구했다." "그런데 우한 분공에 의해 사태가 공산당의 '패배'로 끝났을 때, 그 책임 소재는 교묘하게 바뀌어 중국공산당 총서기 천두슈의 '우경 기회주의 노선'으로 돌아갔고 그는 공산당 지도자의 지위에서 쫓겨났다. 그 뒤에도 코민테른의 지시나 정세 판단에 따른 노선과 방침이 실패로 끝났을 때, 모스크바가 아니라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책임을 추궁당했고 그때마다 지도부가 비판을 받아 교체되었다."(128-9)


"공산당의 중앙 조직은 아주 짧은 시기를 빼면 창당 이래 1930년대 초까지 상하이 조계 안에 있었다. 중국 관헌의 간섭이 직접 미치지 않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물론 조계 당국이라고 공산당의 활동을 자유롭게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27년의 난징정부 성립 후 국민정부가 조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함에 따라 '안전지대'로서 조계가 지니고 있던 의미는 크게 바뀌었다. 특히 국민정부가 주권 회복의 일환으로서 193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상하이 조계에 중국 측 특구법원(재판소)을 설치한 것은 의미가 컸다. 중국의 법률과 재판관이 중국인을 당사자로 삼아 직접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의 그림자와 목소리는 거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공산당의 세력은 늘 실제보다도 확실히 크게 보였다. 그것은 공산당이 선전 작업을 중시하는 정치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어찌 됐든 (공산당은) 자신들을 실제 이상으로 크게 보이게 하는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132-4)


"공산당이 농촌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공산당이 지닌 조직성과 규율성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사회의 조직성·공동성이 현저하게 낮은 중국 농촌에서 상당히 큰 통합력과 규범성을 지닐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공산당이 근거지를 구축한 화남의 농촌은 화북에 비해 농촌 사회의 결합력이 강했다고 할 수 있지만, 예컨대 근세·근대의 일본 농촌에 견준다면 중국 농촌의 결합력은 보잘것없었다. 따라서 공산당은 적어도 자신의 조직 활동이 촌락 내부 집단의 유대감에 저항을 받아 침투할 수 없는 사태를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포위 공격과 토벌에 직면하면서 근거지의 영역은 수시로 변화되었고, 가장 안전하던 근거지의 중심부에서조차 공산당 통치는 불과 4년밖에 실행되지 못했다. 이 짧은 기간에 추진된 토지혁명이 농촌의 기존 질서 해체와 홍군의 확충을 가져왔지만, 홍군의 보충이 지배 영역의 안정화로 연결될 만한 여유를 당시 농촌 근거지에서 전혀 찾을 수 없었다."(141-3)


4장 제국주의 일본에 맞서


"만주국의 영역 확대를 목표로 1933년 2월 시작된 관동군의 러허(熱河) 작전은 만리장성을 넘어 관내까지 미쳤다. 베이핑·톈진까지 전화가 번질 것을 걱정한 중국 측의 요청으로 5월 말에 허베이성 탕구에서 정전 교섭이 이루어졌다. 결국 일본 측의 일방적인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정전협정(탕구 협정)이 이루어졌다. 일본 측의 요구는 기동(冀東, 동허베이성 북동부)을 비무장지대로 하고 앞으로 중국군이 주둔하지 않으며, 일본군은 그 실시 경과를 임의로 사찰할 수 있고 중국이 협정을 준수하는지 확인한 후 만리장성 선까지 철수하기로 했다. 사실 만리장성 선 이북 지역 가운데 일부는 행정구역상 허베이 성과 차하르 성에 속하기 때문에 관동군은 이 협정을 통해 허베이와 차하르 일부까지 점령 아래에 둘 수 있었다. 이로써 9·18사변 이래의 군사행동은 일단락되었고 일본의 만주 영유와 만주국 영역이 '군사 정전' 협정에 의해 사실상 확정되었다."(165)


"〈평화가 절망적이지 않은 때 결코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최후 운명의 갈림길이 아니라면 가벼이 희생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화북 분리 공작이 진행되는 시점인 1935년 11월에 장제스가 천명한 대일 외교의 신조였다. 거듭되는 대일 타협으로 '일본 공포증'(恐日病)이라는 험담까지 들어야 했던 장제스였지만, 이러한 대일 타협은 그 나름으로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눈과 일본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지탱되었다. 장제스는 중국과 일본의 분쟁이 곧 태평양의 문제, 이어서 세계의 문제로 확대되어 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국에는 열강의 권익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일본이 계속 중국을 침략할 경우 필연적으로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것이고, 장차 예상되는 중일전쟁에서 지구전을 통해 열강의 대일 군사 간섭을 이끌어 내고, 최종적으로 중일전쟁이 원인이 될 세계 전쟁을 통해 일본을 패배시킨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중국이 기대한 바와 달리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177)


"다각적인 외교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국내의 공산당 문제와도 밀접한 소련에 대한 대응이었다." "소련은 만주사변을 대소 전쟁을 위한 일본의 준비 활동으로 파악하면서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만주사변에 대해서 중립과 불간섭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 관동군이 중동철도를 이용하는 것에 거듭 양보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대두함에 따라 독일과 일본이 동서 양쪽에서 소련을 협공할 수도 있다는 잠재적 위기가 증대했다. 그러자 중국에서 '일치 항일'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중국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일본을 저지시킨다는 구상이 부상하게 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 노선이 결정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창끝이 소련으로 향할 것이라 기대하는 장제스와, 중국을 후원하여 일본의 압력을 감소시키려는 소련의 판단이 결합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과 소련 양국은 점차 가까워졌다."(178-9)


5장 항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일본 정부(고노에 후미마로 내각)는 사건의 '현지 해결·불확대' 방침을 정했고, 군 중앙에도 '확대'와 '불확대'의 두 파가 있었다. 11일에 중국의 중앙군이 북상한다는 정보(실제로는 약간 지체되었다)가 입수되자, 일본 정부는 이 분쟁을 '북지사변'(北支事變)으로 부를 것을 결정하면서, 사변은 중국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에 의한 것이라 판단하여 화북에 파병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여전히 '불확대'를 언급하고 있지만 파병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그저 빈말일 뿐이었다. 11일에는 참모본부도 관동군과 조선군에게 파병을 명령했다. 〈포악무도한 지나를 응징〉하기 위해 일격을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군부와 민간에서 높았고 이는 사태의 확대를 압박하였다. 이리하여 이후에도 현지에서는 정전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교섭이 계속되었지만, 전투는 베이핑 주변에서 톈진으로까지 확대되었고, 7월 28일 일본군은 핑진(平津) 지역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203-4)


"1938년 1월 평화 교섭은 깨졌고, 일본 정부는 〈앞으로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제국과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는 신흥 지나 정권의 성립 발전을 기대하며, 그 정권과 양국 교섭을 조정하여 갱생 신지나의 건설에 협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틀 뒤 성명에 나오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라기보다 강경한 '말살'을 뜻한다고 보충 설명까지 했다. 중국군의 〈포악한 행동을 응징〉하고 난징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하여 시작된 전쟁은 이제 장제스 정권을 말살하고 괴뢰정권을 수립한다는 전략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방의 대일 협력 정권에 가담한 사람들은 이미 실력과 명성을 상실한 퇴역 군인이나 정객들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이 기대하는 원활한 점령치 통치 따위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었다. 일본이 점령지에 직접적인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 이런 괴뢰정권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상황이 '전쟁'이 아니라 (선전포고 없는) '사변'이었기 때문이다."(213)


"일본은 우한·광저우를 점령한 1938년 말 시점에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중국에 투입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는 근위 사단만이 남았고 군사 동원력은 이제 분명한 한계에 도달했다." "지난날 청조에서는 일단 외국군이 베이징에 임박하여 황제가 몽진(蒙塵, 피난)하고 수도가 점령당하면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내걸고 굴복했다. 하지만 이번에 국민정부는 수도뿐 아니라 요지 모두를 점령당했지만 항전을 이어 갔다. 일본 점령지에서 도피한 학생과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대학이나 기관과 함께 오지로 들어갔고, 그 가운데 많은 수가 지원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중화민국 25년 사이에 육성된 중국 내셔널리즘이었다. 일본의 침략은 이런 내셔널리즘이 높아지는 데 결정적인 촉매가 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면 할수록 내셔널리즘은 더불어 높아졌고, 저항은 일본의 예상과 반대로 오히려 강화되었다."(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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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2 -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중국근현대사 2
가와시마 신 지음, 천성림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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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구국과 정치 개혁


"지금까지 중국근현대사에서는 혁명을 중시하여 '양무(운동, 중체서용中體西用)-변법(개혁)-혁명'이라는 설명 틀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양무-변법-혁명'의 3단계론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본디 양무란 오랑캐(夷)와 관련한 여러 업무를 의미하는 '이무'(夷務)가 전화한 말이다. 특정 시기의 대외 사무, 외국 관련 업무의 총칭이다. 이러한 대외 사무는 곧 외무라 불리게 된다. 요컨대 1860~1870년대에 갑자기 대외 사무로서 양무(洋務)가 생겨난 것도, 또 양무운동이라는 운동이 제창된 것도 아니다. 또한 양무의 시대라고 하는 시기는 '중체서용'의 특징이 짙은 경우도 있지만, 정치와 제도 변혁을 제창하는 의견, 즉 '중체'의 변혁론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변혁론은 보수파의 저항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변법의 시대에는 보수파의 후퇴로 정치와 제도의 개혁이 정책으로 채용되었지만, 공업화와 군비 증강이라는 양무의 과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신해혁명을 거치고 나서도 변법의 과제는 변함없이 중앙정부의 과제였다."(48-9)


2장 왕조 유지와 '중국'의 형성


"의화단전쟁의 패배가 청조에게 안겨준 엄청난 충격을 살펴보면, 우선 청조의 권위가 하락하고 정치가 출렁인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이홍장의 죽음을 비롯하여 대관들이 타계하고, 그때까지 변법으로 치닫는 움직임을 억제하면서 체제 유지의 원동력이 된 보수 관료의 영향력이 감소한 것은 정치 개혁의 브레이크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후 청은 다소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을 실시해 나가게 된다. 다음으로는 주로 입헌군주정을 지향하는 무술변법의 여러 정책이 다시 채용되어, 재정난 속에서도 근대국가 건설이 추진된 점이다. 거기에는 천황의 강력한 권한을 인정하는 일본 같은 국가가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첫 10년 동안 청 자신의 청이라는 국가 건설과 함께, 점차 형성되고 있던 '중국'이라는 국가 상(像)이 '청'을 대신해 다양한 정치 세력을 아우르는 국가의 결집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 지역을 뛰어넘는 '중국인'으로서의 의식도 성장하기 시작했다."(88-9)


"(의화단전쟁 이후 광서제와 서태후가 추진한) 광서신정은 근대국가 건설로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문제가 깃들어 있었고, 더욱이 번부(藩部)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측면에서 파악될 여지도 많았다. 예를 들어 한인 엘리트층은 우승열패(優勝劣敗) 사상을 통해 세계에서 멸종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승열패의 논리를 국내에 들여와 한인과 중앙을 '우월한 자'(優者)에, 한인이 아니거나 변경의 사람들을 '열등한 자'(劣者)로 인식했다. 우열의 근거 가운데 하나는 '근대화'였을 것이다. '서양 근대'는 한편으로 중국을 침략하고 멸종시키려는 열강의 논리였는데, 중국 내부에서는 그것이 한인의 대내적 우위성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청조가 중시해 온 몽골과 티베트는 이 시기가 되면 중국의 '변경'으로 자리가 바뀌게 된다. 몽골과 티베트인이 사는 광대한 번부도 근대 주권국가 영역의 일부이자 실업 진흥의 대상으로서 인식되었다."(104-5)


"1890년대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망국의 위기와 분할의 위기가 문제로 등장하면서 구국은 그야말로 지식인의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분할의 위기'론은 오히려 국토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논의로서 기능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잡지 《신민총보》의 표지에는 균일하게 붉은색으로 칠해진 중국 지도가 등장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화이(華夷) 의식이 청산된 것도,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도 완전히 평등한 상태에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국제사회를 만국공법 속의 '열국병립'(列國竝立)으로 보는 경향이 지식인 사이에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청이라고 하는 왕조 이름보다도, '중국'을 국가의 명칭으로 의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국'은 이제 왕조를 관통하는 국가의 호칭으로서 자리 잡아 가기 시작했다. 국토의 면에서도 본디 통치에 농담의 차이가 있던 번부(藩部)와 토사(土司)의 공간을 모두 한 국토로 파악하고, 거기에 중국사라는 공통의 역사를 가진 중국인을 상정하게 되었다."(108-10)


3장 입헌군주제와 공화제


"청은 러일전쟁에서 거둔 일본의 승리를 전제에 대한 입헌의 승리로 받아들였다. 그 뒤로 재외 공사, 지방 대관 그리고 황족으로부터도 입헌군주제를 위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08년 8월 27일 청조는 예비 헌정에 관한 조서를 발포하여 9년 안에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아울러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을 제시했다." "헌법대강은 황제에게는 법률 발포권, 의원(議院) 소집 및 해산권, 육해군의 통솔권, 선전포고 및 강화권을 비롯한 갖가지 권한이 인정되었고, 의회의 권한이 황제의 대권에 미치지 않도록 조치했다." "반면 의회를 억제하여, 의원법요령(議員法要領) 제1조에 〈의원은 건의할 권한만 갖는다. 행정의 책임은 없다. 모든 의결 조건은 반드시 흠정을 기다린 뒤 정부가 시행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헌법대강은 중앙의 황제 권한을 강화해서 의회 권한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방 대관을 비롯하여 도시부나 해외의 입헌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144-8)


"청말 지역사회에서는 신상(紳商)을 비롯한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지만 교육 단체와 법정 단체를 결성해 지방 정치에도 관여했다." "청이 '고찰헌정(헌정편사관) 5대신'의 파견을 거쳐 중앙에 국정 자문기관인 자정원,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 단위의 자의국(諮議局)을 설치한다는 방침을 내걸자, 지역사회에서도 여러 단체가 자의국을 둘러싸고 토론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거기에 모인 지역 엘리트들이 현(縣)의 울타리를 넘어 성(省) 단위로 집결하게 된 것이다." "1908년 11월 14일부터 이튿날까지 자금성에서는 광서제와 서태후가 잇달아 서거했다. 12월 2일 광서제의 조카로서 겨우 세 살밖에 안 된 푸이(선통제)가 즉위했다. 한인 대관으로서 그 무렵 최대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즈리 총독 및 북양대신 직위를 사임하고 고향인 허난 성 장더에 은거했다. 1909년 10월 14일 지방의회의 기초가 될 것으로 기대된 각 성에 자의국이 개국했다."(150-3)


"1911년 10월에 봉기한 신해혁명은 만주인이 실시하는 입헌에 대한 깊은 실망, 그리고 배만 사상으로 뒷받침된 혁명운동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지만, 정치 과정으로 본다면 중앙정부에 대한 성정부(省政府)의 자립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중앙에 대한 성의 자립이라는 방향성은 분명히 있었지만, 자립한 성이 집합해서 어떻게 국가를 만들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1911년 말이 되면 화북에서 동북에 걸쳐 여러 성들이 청을 지지하고, 열강도 청을 승인하고 있었다." "(우창봉기 이후) 12월에는 청과 독립 성들 사이에 정전(停戰)이 성립되었다. 위안스카이의 의뢰를 받은 영국 공사 조던이 한커우 영사에게 조정을 부탁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청군이 한양을 함락하여 반란군이 불리해진 시점에서 조정을 알선한 것이므로 반란군도 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국은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정치가, '실력자'로서 위안스카이를 평가하고 기대했다."(168-9)


4장 중화민국의 구조와 위안스카이 정권


"열강의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안정된 통상 활동을 보장해 줄 인재가 필요했는데, 위안스키아가 거기에 부응하는 인물이었다. '강한 중국'을 바라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고, 입헌제 지지자들 가운데에도 그에게 기대를 건 이들이 있었다. 이 같은 위안스카이에 대한 기대감은 대총통 권한의 제한을 전제로 하는 의회 중심의 공화제 지지자의 지향성과는 달랐다. 중앙집권인가 지방분권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이 무렵 중국에서는 입헌군주인가 공화인가 하는 정치 구상에 대한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1912년 12월부터 1913년 2월까지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참의원·중의원 모두 국민당이 압승했다. 쑹자오런은 국민당을 통한 정당 내각을 조직하고, 의회의 힘을 이용해 위안스카이에 맞서려고 했다. 의회의 압력을 경계한 위안스카이는 3월 20일에 쑹자오런을 상하이역에서 암살하게 했다. 이때 쑹자오런의 나이는 31세였다."(185-6)


"위안스카이는 공화정체를 중시하는 세력과 지방분권을 요구하는 각 성 세력 양쪽 모두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각 성과의 합의 형성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제2혁명 후 의회가 작성한 헌법 초안에 대해 의회 권한이 여전히 너무 강한 '국회의 전제(專制)'라고 비판하면서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이윽고 1914년 초에는 국회와 성의회까지 해산시켰다. 그해 5월에는 임시약법도 폐지하고 새로운 중화민국 약법을 정했다. 여기에서는 대총통의 권한이 강화되고 내각을 대신하여 국무경(國務卿)이 설치되었다(쉬스창이 국무경에 취임). 또 의회인 입법원은 소집하지 않은 채 대총통의 자문기관으로서 참정원(參政院)이라고 하는 사실상의 의회를 두었다. 나아가 12월에는 참정원의 의결을 거쳐 대총통 선거법을 개정하고 대총통의 임기를 사실상 철폐했다. 지방 제도에서는 지방의회를 해산시키고 각 성 도독의 권한을 줄이기 위해 성(省) 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지만 이루지는 못했다."(187-8)


"1915년, 위안스카이의 제제(帝制) 채용을 둘러싸고 지방분권과 공화제를 주장하는 쪽의 반발은 강력했다. 더구나 중앙집권적인 입헌군주정체 추진을 위해 굳이 '황제'까지 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다." "1915년 12월 각 성은 중앙정부에 독립을 선언했다. 신해혁명, 제2혁명에 이어 이번에는 남방의 여러 성이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운동을 가리켜 제3혁명이라고도 한다. 1916년 5월까지 10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더욱이 위안스카이 쪽 지방장관들마저 제제를 정지할 것을 권고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는 결국 3월에 중화제국을 폐지했다. 독립을 선언한 여러 성은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사임을 요구했다. 항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는 6월 6일 요독증과 신경성 피로로 인해 사망하기에 이른다." "위안스카이의 사망과 리위안훙의 새 정권 성립이 제도적으로는 지방분권과 공화제적인 중화민국을 모색하는 전환점처럼 보이지만, 이후 정국은 극도로 혼미한 상황으로 빠져들게 된다."(200-1)


5장 국제사회의 변모와 중국


"제1차 세계대전은 중국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구조를 뒤흔들어 놓았다. 1901년 신축화약 이래 열강의 협조에 균열이 생기면서 일본은 단독으로 이권을 확대하여 산둥 이권과 21개조 요구뿐 아니라 푸젠, 장시 등에서 철도 건설에 착수했다. 또 영국이나 프랑스가 일시적이나마 후퇴하고 미국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18년 7월, 미국은 일본, 영국, 프랑스에 신4국차관단(新四國借款團)을 구성하자고 호소했다. 이는 네 나라가 저마다 보유하고 있는 현재와 장래의 대중국 차관을 일원화하려는 시도였다. 일본도 찬성의 뜻을 보이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만몽(滿蒙) 지역을 제외시켜, 일본의 특수 권익 전체를 인정받으려고 했다. 영국과 미국이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결국 저마다 제외해야 할 사항을 개별적으로 올려 그 차관에서 제외시키기로 했다. 이는 만몽 전체에 대한 일본의 장래 특수 권익이 자동으로 계승될 수 없음을 의미하지만, 이미 확보하고 있는 특수 권익은 옹호한다는 측면도 있었다."(233-4)


"워싱턴회의로 형성된 영·미·일 협조 체제를 가리켜 '워싱턴 체제'라고 부른다. 중국은 9개국조약을 통해 이 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워싱턴회의에 참가한 쪽은 베이징정부이며, 1920년대 전반에 점차 세력을 갖게 된 광둥정부는 거기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또한 국내의 국권회수 운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체제야말로 열강의 기득 권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워싱턴 체제에서 제외된 것은 광둥정부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소련과 독일(뒤에 9개국조약에 가맹)이 그러했다. 따라서 이 체제는 영·미·일 간의 협조 체제였는지는 몰라도, 독일이나 소련과도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관련된 국제 관계의 하나일 뿐이었다. 1926년에 광둥정부가 북벌을 개시했을 때, 이 '체제'는 9개국조약에 조인했던 베이징정부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 결국 베이징정부는 1928년에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워싱턴 체제는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으로 사실상 붕괴되었다."(239)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그 성 출신자가 성을 다스린다고 하는 성 자치의 경향은 1920년대에도 계속되면서 연성자치로 이어졌다. 여기에 찬성하는 각 성은 〈성 사람이 성을 다스려, 지역을 보위하고 민생을 안정시킨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중앙집권에 부정적이었고, '외성인'(外省人), 즉 다른 성에서 온 군인 등이 '본성'의 내부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성 연합에 기초한 국가 건설을 이루고자 했다. 이것이 창장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연성자치 운동이다." "이후 1922년 1월 후난성 헌법 발포와 같이 각 자치성은 자치의 경향을 한층 더 강화했다. 또한 연성을 통해 연방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움직임도 거세지면서, 상하이에서 열린 국시(國是) 회의에서 헌법 초안 채택 같은 성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군사 세력과 관계를 조정하지 못한 데다 연방국가의 그림에도 불명확한 점이 있어 베이징, 광둥을 대신할 전국적인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 내지는 못했다."(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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