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이 해전 -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조너선 파셜.앤서니 털리 지음, 이승훈 옮김 / 일조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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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모든 면에서 1942년 6월 4일은 분수령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미드웨이 해전은 지난 6개월간 거두어 온 승리의 갑작스런 종막이었다. 태평양에서 공세를 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대부분 소멸된 것이다. 일본 해군의 최강 항공모함인 아카기, 가가, 히류, 소류의 손실은 전쟁의 문을 연 세계 정상급 해군항공대를 회복 불가 수준으로 망가뜨렸다." "미드웨이 해전이 일본의 야욕에 제동을 걸고 공세의 주력을 꺾었다면 미군에게는 정확히 그 반대를 예고한 사건이었다. 미군 지휘관들은 진주만의 굴욕 이래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격을 고려할수 있게 되었다. 미군이 미드웨이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또 하나의 중요한 결전장인 과다카날섬에서 싸울 물적·정신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이 입은 손실은 다음 해까지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입은 만큼의 피해는 아니었지만, 미드웨이 해전은 1942~1943년에 벌어진 지옥 같은 소모전의 문을 열어젖힌 사건이었다."(16-7)


제1부 서막


"미드웨이 작전과 알류샨 작전은 일본 군부, 특히 1942년 초 일본 해군이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 갈피를 못 잡은 결과였는데 넓게 보면 이 어려움의 원인은 전쟁 초 4개월 동안 일본이 거둔 예상외의 대승이었다." "1942년 3월경, 일본은 백인 식민세력을 모두 추방하고 새로운 태평양제국에 필요한 원유와 기타 전략자원을 즉시 조달할 수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남방 자원지대를 확보했다. 중국에서 이미 정복한 땅에 더해 일본은 북으로는 만주, 중국 중부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거쳐 남서쪽의 버마, 말라야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일본의 속령은 수마트라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따라 라바울까지 닿았고, 일본 해군의 거점인 추크섬을 거쳐 북으로 쿠릴 열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몇 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일본은 인류 역사상 광대한 제국들 중 하나를 만들어 냈다."(61-4)


"1942년 초, 일본 해군의 관점에서 보면 전략적 선택지가 여럿 있었다." "첫 번째 전략적 선택지는 공세에서 수세로의 태세 전환이었다. 나구모의 참모장 구사카 소장은 이 견해의 주요 지지자였다. 1942년 초에 일본은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얻은 것을 공고히 다지지는 못했다. 일본은 방어선 외곽을 강화하여 미국의 반격에 대비해야 했는데 외연을 확장하는 한 이를 달성할 수 없었다. 방어태세로 전환하면 이미 총력전에서 입은 피해가 완연한 항공모함부대는 함재기와 조종사들을 보충할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논점은 옳았으나 구사카는 이 계획을 대변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구사카와 상관 나구모는 진주만 기습계획에 반대했다. 그 결과 모순되게도 기동부대의 최고위 간부 두 사람은 연합함대에서 발언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접근은 일본 해군처럼 공격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조직의 지지를 받기에 너무 수동적으로 보였다."(70)


"두 번째 선택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이었다. 목표의 크기로 볼 때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보였지만 몇 가지 매력적인 점도 있었다. 크기만 컸지 오스트레일리아는 인구밀도가 낮았고, 방어에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몇 개 사단 정도였다. 영토 크기로 인해 오스트레일리아군은 해안선 전체를 방어할 수 없었고 이는 일본이 '어딘가에는' 확실하게 상륙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육군은 작전 실행에 최소 10~12개 사단이 소요된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여 이 제안에 재빨리 찬물을 끼얹었다. 육군에게 오스트레일리아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인력을 빨아들이는 수렁이었다. 따라서 육군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복에 몇몇 이점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간단히 말해 필요한 병력과 수송수단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멀리 남쪽으로 작전을 확대하면 해상보급능력 밖에 있는 전역戰域을 추가하게 된다고 해군의 아픈 곳을 찔렀다."(71)


"미국 항공모함 격멸이 야마모토의 의중에서 과도한 상징성을 띠게 된 것은 당연했다. 쓸모가 있건 없건 항공모함의 존재는 일본이 벌인 전쟁에 내재된 모순 그 자체였다. 일본이 개전 초기에 거둔 승리는 눈부셨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의 산업 잠재력이 존재하는 한 결국 속빈 강정이었다." "눈에 보이는 출구전략이 없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야마모토가 내놓은 '미 함대 격멸을 목표로 한 공세 지속'은 당연했으나 공허한 답이었다. 야마모토는 미국이 절대 포기하지 못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목표를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미국 항공모함을 유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야마모토는 하와이를 위협하는, 중간 어디쯤의 목표물을 공격한다면 미국이 격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 목표물이 하와이 주둔 항공전력의 작전범위 밖에 있어야만 하와이 주둔 미군기가 전투에 끼어들 여지를 줄일 수 있었다. 야마모토가 선택한 목표물은 '미드웨이 제도'였다."(78-9)


"4월 18일 아침, 나가노 군령부총장이 미드웨이 작전계획을 히로히토에게 상주한 지 불과 이틀 뒤, 미 육군 B-25 쌍발 중형폭격기 16기가 마법처럼 도쿄와 다섯 도시 상공에 나타났다. 육군항공대 제임스 둘리틀 중령의 지휘하에 폭격기들은 일본 해안에서 약 400해리(74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도달한 항공모함 호닛에서 발진했다." "직설적으로 말해 둘리틀 공습의 군사적 결과는 웃어넘길 정도로 미미했다. 몇몇 목표물이 눈먼 폭탄 몇 개를 맞았고 요코스카의 선대에서 개장 작업 중이던 항공모함 류호가 가벼운 손상을 입었을 뿐이다. 그러나 공습의 심리적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둘리틀 공습의 효과는 바늘에 찔린 정도였지만 야마모토가 중부태평양 작전에 대하여 육군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확고한 역할을 했다. 미 항공모함들이 확실하게 바다 밑에 가라앉지 않는 한 본토는 이런 공격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따라서 4월 18일 이후 미국 항공모함 격멸이 연합함대, 군령부, 육군 공통의 절대 목표가 되었다."(90-1)


모든 것이 계획대로 풀린다면 미 함대는 일본군 상륙 후 미드웨이 수역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야마모토는 적 함대가 미드웨이 부근에서 여봐란 듯 움직일 곤도 부대를 습격하기 위해 오아후섬에서 서쪽으로 출격하여 북쪽으로 항해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연합함대는 미 해군이 항공모함뿐만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전함까지도 이 결전에 끌고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더 나아가 연합함대는 미국 항공모함들이 전함 중심의 주력부대에서 떨어져 작전하며 서북서쪽에서 이들을 엄호할 것이라고 상정했다. … 그러나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이 노후 전함을 빠른 항공모함과 같이 운용한다는 개념을 폐기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 일본 해군은 잠수함 공격과 항공모함의 공습으로 약회된 미 함대를 마지막에 전함들이 포착하여 격멸할 것으로 기대했다. 어떤 의미에서 야마모토의 계획은 함포 위주 철학으로의 회귀였다. 여기에서 나구모 부대 항공모함의 역할은 결전 전에 적의 전력을 소모하는 역할로 격하되었다. 102-3)


"쓸데없이 교묘하고 복잡한 작전은 전전戰前 일본 해군 작전의 전매특허였다. 일본 해군의 함대 연습은 대개 일본 측의 정교하게 짜인 함대 기동에 편리하게 맞춰 미숙한 미국 해군이 서투른 기동으로 맞대응하다가 언제나 결국 전멸당하는 판에 박힌 공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전략적 꿈나라에 빠진) 야마모토는 함선 22척만으로 작전의 핵심인 미드웨이 무력화를 수행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본의 수적 우위를 무위로 돌리는 어리석은 작전을 폈다. 22척은 야마모토가 다양한 작전목표로 태평양 전역에 뿌려 놓으려 한 함선 수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알류샨 작전은 일본 해군이 경솔하게 정한 목표들의 정점에 있다. 어떤 기준으로도 더치하버 공습은 50여 척에 이르는 함선을 보내기에 좋은 구실이 아니었다. 알류샨 작전이 양동작전으로조차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귀한 전략자산을 이렇게 비전략적 목적에 쏟아부은 결정을 이해하기가 어렵다."(104)


"그러나 1942년의 일본은 극히 제한적으로 미국의 전력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 해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전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해전을 벌인 경우가 많았다. 일본 해군은 전투를 피하는 적을 공격하는 데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 4개월 동안 일본군의 이러한 자아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적대관계가 시작된 이래 연합군은 끝없는 패배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합군 장병 개개인의 용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연합군의 장비, 교리, 훈련 등 많은 부분에서 일본보다 뒤쳐졌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미국의 사기가 완전히 무너진 적은 없었으나 그때까지 미군의 군사적 능력에 뭔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껏 미 해군이 겪은 패배를 볼 때 일본 해군이 당연히 미 해군이 원양에서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105)


"많은 전후 연구자들은 야마모토가 나구모 부대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위치에 주력부대를 배치한 결정을 비판해 왔다." "나구모 부대가 전함의 포격지원이 필요했다면 주력부대를 분리해서 유지하되 나구모 부대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운용하는 방법이 더 이치에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사실 나구모 부대 지원은 주력부대의 목표인 미 함대 격멸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이었다. 야마모토 계획의 핵심은 격멸이었다. 만약 미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진주만 밖으로 유인해야 한다면 일본군 총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도록 적을 기만함과 동시에 상호지원이 가능하게 함대를 배치할 길은 없다. 이 두 목표는 양립할 수 없다. 야마모토는 자신이 두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음을 알았고 따라서 필요하다고 여긴 은폐를 위해 상호지원을 기꺼이 희생했다. 사실 적을 속여서 꾀어낼 수 있다고 본 전제가 처음부터 작전계획을 망쳐 놓았다."(108-9)


"모든 합리적 기준으로 봤을 때, 나구모 부대가 미드웨이에서 물량 우세를 유지하려면 5항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실제로 미드웨이 작전의 실행 가능성은 포트모르즈비 공략작전에서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보유한) 5항전이 심각한 손해를 입느냐 입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 도박은 큰 실수였는데 두 작전 중 더 중요한 작전이 덜 중요한 작전의 인질로 잡힌 모양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효용 극대화'와 전력 분산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력을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면 더 신속한 세력 확장을 기대할 수도 있으나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하다. 국지적으로 우세한 적이 작게 나뉜 아군 전력을 각개 격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일본이 점유한 항공모함 전력의 우위는 예상보다 빨리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한 번 수적 우위를 잃으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112-3)


"도상연습 종료 이틀 후인 1942년 5월 8일, 제4함대의 이노우에와 5항전으로부터 산호해에서 미 항공모함 2척과 교전을 치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첫 상황보고의 내용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정규 항공모함들과 떨어져 단독 작전 중이던 경항공모함 쇼호가 공습을 받아 격침당했고, 후속 교전에서 일본 함대는 요크타운과 새러토가라고 여긴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이들을 침몰 직전 상태로 만들었다고 믿었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일본이 새러토가로 잘못 본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요크타운은 큰 손상을 입었으나 무사히 도망쳤다." "일본군이 생각했듯이 산호해에서 미 항공모함 2척이 모두 격침되었다고 가정해도 미 해군은 태평양에서 가용한 항공모함 3척─엔터프라이즈, 호닛, 와스프─을 아직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이 최대 3척의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고 미드웨이 기지항공대가 다가오는 전투에 투입된다면 기동부대는 더 이상 물량 우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119-21)


"일본 해군 교리의 기본 원칙은 미국의 수적 우위 상쇄였다. 수적 열세를 극복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는 통합·집중된 화력 사용의 원칙을 신이 정한 법의 차원으로 격상한 전술교리라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은 강력한 무기로 보다 먼 거리에서 먼저 공격하는 방법을 미국의 수적 우세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으로 보았다." "그러나 한 가지 임무에 과도하게 편중된 일본 해군의 교리는 왜곡되었다. 교리는 한 종류의 전투만 비현실적으로 강조했고 제해권 확립, 수륙양용 세력투사, 통상보호 같은 다른 열강 해군들이 수행하던 전통적 임무를 깡그리 무시했다. 그 결과 1930년대 말에 일본 해군의 전술 교리는 기형적으로 공격 원리에만 집중된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 교리에는 전쟁 전반기에 실전에서 유용하게 활용된 부분이 많았으나(예를 들어 뛰어난 야간전투 능력)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 진정한 지적 기반은 되지 못했다."(147-8)


"일본 해군이 받은 압박은 무기체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어떤 의미에서 전투함과 비행기는 교리의 물질적 형태이다. 따라서 무기체계는 해군 전체의 전투 방법에 맞추어 작동하도록 설계되어야 의미가 있다." "일본 함선은 속력과 화력을 강조했는데 이는 일본 해군이 변함없이 추구한 전술적 통일성에 잘 맞는 요소였다. 항공기에도 해군의 항속거리, 화력, 기동성 선호라는 교리 일반이 반영되었다. 반면 일본 함선 설계에서는 구조강성, 항해안정성, 방어력, 손상통제가 경시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본 항공기들은 공격력을 갖추었으나 그만큼 공격받을 때 버텨내기가 어려웠으며, 잘 훈련된 조종사가 조종하면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었으나 조종사를 보호하는 기능은 뒷전이었다. 일본 함선과 항공기는 인명손실이 덜 치명적인 요소인 단기 해상분쟁에 적합했으며, 장기전이 가능한 진정 저력 있는 해군이 의지할 비장의 카드는 아니었다."(148-9)


제2부 전투일지


"6월 4일 오전 7시~8시 사이, 일본군이 도모나가 공격대 108기를 띄우는 데 고작 7분이 걸린 반면, 호닛과 엔터프라이즈는 고작 9기가 더 많은 공격대를 발진시키는 데 거의 한 시간 동안 고전했다. 미군 공격대는 전투기 20기, 급강하폭격기 68기, 뇌격기 29기로 총 117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호닛과 엔터프라이즈는 연합 공격대를 편성하는 대신 2개 비행단을 3개 방향에서 접근시켰다. 나중에 같이 발함한 공격대 일부는 잠시 후 따로 떨어져 나가 목표를 향해 각자 비행했고, 그 결과 전력이 더욱 분산되었다. 따라서 미군 비행기들이 일본 함대에 어찌어찌 도착했더라도 요크타운 공격대를 제외하고는 비행대 단위로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8시경에는 나구모와 기동부대의 운명이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위치를 파악했고 확실하게 큰 타격을 입힐 전력을 상공에 띄울 수 있었다. 이제 적을 만나기만 하면 되었다."(265)


"이 사실은 나구모의 선택을 둘러싼 질문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만든다." "가장 속력이 느린 일본군 함상기인 97식 함상공격기의 순항속력은 138노트(255킬로미터)였다. 따라서 일본군 공격대가 미 기동함대까지의 거리인 200해리(370킬로미터)를 가려면 약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 그러나 최선의 상황에서도 08시 38분에야 겨우 공격대 발진을 개시한 요크타운을 공격하려면 나구모는 07시 15분에는 공격대를 띄워야 선제공격이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구모는 적어도 06시 30분에는 공격대 배치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더 나아가 엔터프라이즈와 호닛이 공격대를 발진시키기 전에 공격하려면 늦어도 05시 30분에는 공격대를 발진시켜야 했다. 따라서 나구모가 관련 정보를 가지고 참모들과 토론하던 07시 45분~08시에는 미군의 선제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날 아침의 사건들을 되돌리기 위해 나구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266)


"이 상황을 야기한 진짜 중요한 정찰 실패 책임은 지쿠마 1호기에 있었다. 지쿠마 1호기는 나구모에게 제시간에 필요한 정보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 유일한 정찰기였다. 이 정찰기가 정확하게 항로를 따라 수면에 더 가까이 붙어 비행했더라면 06시 15분에서 30분 사이에 미 기동함대를 발견했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나마 결정적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시간대였다. 지쿠마 1호기의 정찰 실패로 나구모는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한 시간 이상 잃었다. 도네 4호기의 지각 발함이 아니라 지쿠마 1호기의 정찰 실패가 전술적으로 부정적 효과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러나 지쿠마 1호기의 실수는 더 큰 실패의 일부일 뿐이다. 아침 정찰에 쥐꼬리만 한 수의 비행기를 투입한 것이야말로 나구모의 성공 가능성을 해친 원인이다." "일본군은 정찰에 좀 더 많은 비행기를 투입했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군의 교리와 공격 위주의 가치관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266-7)


"08시 00분~09시 17분, 공중에서 난타전이 벌어지던 당시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사건의 전후관계를 재구성하려는 후세의 역사가들에게나 당시 아키기의 함교에 있던 이들에게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미군은 물리적으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끊임없이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 결과 불행히도 기동부대는 자신의 박자에 맞춰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적에게 끌려 다녔다. 설상가상으로 적의 공격에 대한 기동부대의 여러 반응 가운데 최소한 함대방공만큼은 중앙통제를 거의 받지 못했다. 08시 00분경 직위전력이 급격히 감소한 데 대해 각 항공모함의 비행장은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해 직위전력을 보강했다.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며 필요한 일을 파악하고 교통정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상황이 조금 잠잠해지나 싶으면 공습경보가 또 울렸다. 일본군은 미군 공격대들이 계속 밀려들자 거의 반사적으로 대응했고 되는대로 찔끔찔끔 직위기들을 올려 보냈다."(282)


"레이더는 다가오는 위협을 미리 보여 주고 대책을 세울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이 장면은 일본군이 사전에 적기 내습을 경고해줄 레이더가 없어서 전투에서 이길 기회를 상실했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레이더가 없었기 때문에 직위기와 미군기의 교전 가능한 유효거리가 짧아졌다. 일본군의 조기경보는 진형 외곽에 있는 순양함과 구축함이 담당했다. 조기경보를 맡은 순양함과 구축함은 항공모함에서 보이는 거리까지만 대형 바깥쪽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직위기들은 자주 항공모함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미군기와 교전했다. 제로센은 아군 함대 상공을 가로질러 도망치는 미군기를 추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 행동일뿐더러 직위대가 효율적으로 작전하기에 필요한 공간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좀 더 먼 거리에서 적기를 탐지할 수 있었다면 미군 공격대의 상당수는 일본 함대에 도달하기 전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282-3)


"10시 00분 경, 지금까지 연이은 미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에 대한 일본군의 태도가 경멸로 변했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일본군은 B-17을 제외하고 내습한 모든 미군 공격대를 분쇄했다. 고위 지휘관들 사이에 자만심이 만연했을 것이다. 공격대 발진이 지연되어 다소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나 고급 간부들의 증언 어디에도 이때 진심으로 전투의 최종결과를 걱정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월드론과 린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자 겐다는 공습으로부터 함대를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는 작전 초기의 우려가 사라졌다고 언급했다. 미군의 공격이 성가셨고, 심지어 미드웨이 공습이 지연될까 봐 우려한 것도 사실이나 진정으로 절박함을 느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만약 실제로 그러했다면 이는 기동부대 수뇌부가 적의 능력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계점에 다다른 함대방공 체계의 취약점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319)


"기동부대의 일부 조종사들은 상황이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미군은 쉴 틈 없이 공격해 왔으며 이제 전방위에서 기동부대에 도달했다. 직위대는 원거리에서 적을 탐지할 방법이 없었고 모함의 관제유도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적이 공격해 오는 '위험 방향' 단 하나만을 방어할 수가 없었다. 조종사들은 거의 모든 방향에서 닥쳐올지도 모르는 위협에 계속 눈을 부릅떠야 했다. 따라서 직위기대는 대형 곳곳에 분산되어 대공경계를 맡은 함선이 내는 시각신호에 주의를 기울이며 모함 근처에서 작은 소대 단위로 비행하다가 자신의 구역으로 날아오는 적기를 덮치기 위해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투기의 탄약 소진은 함대방공이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위험신호였다. 특히 방금 적을 격퇴했다면 더 그랬다. 결론적으로 조종사와 비행장은 나구모의 참모 누구보다도 현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이해했을 것이다."(320)


"10시 02분과 03분 각각에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 공격대에 포착된 일본 기동부대는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이전에는 제병통합의 이점이나 전투기 지원도 없이 단독 행동한 비행대들(해병항공대의 VMSB-241, 해군항공대의 VT-6, VT-8 및 육군항공대 소속대 등)이 진입해 와서 다시 둘로 나뉘어 일본 항공모함 1척을 양면에서 공격했다. 이번에는 3개 폭격비행대와 1개 뇌격비행대가 동시에 공격했다. 미군 비행단 2개[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가 2개 축선으로 접근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했는데 게다가 우연의 일치로 이들은 같은 시간에 목표물 상공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두 비행단의 3개 비행대[VS-6, VB-6, VB-3]는 고고도에서, 1개 비행대[VT-3]는 비교적 저고도에서 다가왔고 추가로 전투기[VF-6]까지 투입되었다. 이번 공격은 이날 아침 일본군이 마주친 공격 중 가장 위험했다. 그리고 일본군 함대방공은 이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지게 된다. (항공모함 3척의 대파로 이어지는) 파멸적 실패였다."(324)


"제2차 세계대전기의 군함은 놀랍도록 화재에 취약했다. 윤활유, 용제, 가솔린, 수천 톤의 연료 등의 형태로 실린 석유 제품에서 풍기는 강한 냄새가 함선에 배어 있었다." "무엇보다 항공모함에서 가장 큰 위험은 항공유[경질유] 급유체계였다. 항공모함에서는 격납고 안이나 비행갑판에서 비행기에 급유할 수 있었다." "전·후방 항공유 탱크는 수직으로 설치된 항공유 주관主管들로 수평배관(고옥탄 항공유와 일반유용 하나씩)과 연결되었고, 수평배관은 격납고 갑판 전체를 둘러 설치되었다. 비행갑판 주변의 움푹 들어간 곳에 설치된 항공유 공급장치는 수직배관으로 연료를 공급받았다. 따라서 모든 항공모함은 항공유 공급배관으로 촘촘히 둘러싸여 있고 항공작전 중에 모든 배관은 가연성이 높은 항공유로 가득 찼다. 더구나 모든 배관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연료배관을 타고 멀쩡한 부분까지 영향을 받아 결국 항공유 탱크까지 문제가 퍼질 소지가 있었다."(361-2)


"일본 항공모함 설계와 운용의 두 번째 문제점은 항공병장의 이송과 보관이었다. 충실한 화염방지 설비 및 바베트barbette와 주포탑의 장갑으로 탄약이송 시설을 보호하던 전함이나 순양함과 달리 항공모함, 특히 일본 항공모함의 보호설비는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항공병장의 반출은 전함의 포탄 반출보다 더 위험했다. 범용 고폭탄과 대함용 철갑탄은 장갑 관통을 위한 탄체에 대부분의 무게가 실린 전함 철갑탄보다 작약량이 많았다. 범용 고폭탄은 무게의 약 50퍼센트를 작약이 차지했고 경장갑 목표에 투하했을 때 같은 무게의 포탄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불행한 점은, 폭탄이 아군 항공모함의 내부에서 터져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항공모함 폭탄고의 장갑방어 수준은 최소한도였다. 이러한 설비는 평시 운용조건에도 간신히 적합한 수준이었으며 만약 격납고 갑판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다면 대참사로 이어질 터였다."(362-3)


"자랑스러운 아카기는 제1항공함대 창설 이래 14개월 동안 나구모의 기함이었다. 나구모는 이제 아카기 (그리고 가가와 소류) 없이 항공모함(히류) 1척과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5척으로 이기든 지든 싸워야 했다." "나구모의 항공전력이 항공모함 1척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히류의 비행기들이 반격 중이었으므로 승리할 가능성을 조금 더 높일 수 있었다. 일본군이 미군 뇌격비행대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음을 알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뇌격기 없이 미군이 나구모의 전함들을 격침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전함은 항공모함보다 급강하폭격기의 폭탄을 훨씬 잘 견딜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3전대의 하루나와 기리시마, 그리고 빠른 속도의 강력한 어뢰를 갖춘 8전대의 도네와 지쿠마가 공습을 뚫고 적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만했다. 만약 히류 공격대가 단 1척이라도 적 항공모함을 무력화한다면 이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392-4)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적의 전력이 확실히 압도적이었으므로 히류 혼자서 전투의 향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영리하게 싸워야 했다. 히류를 곤란한 상황에서 끄집어내려면 히류가 적 항공기의 행동반경 한계점에 있어야 적절한 기회가 왔을 때 후퇴시킬 수 있었다. 나구모나 야마구치가 이런 방책을 떠올렸다 해도 이대로 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둘 다 당연히 싸우고 싶어 했고 싸움은 공격을 뜻했다. 그러나 이대로 공격하는 것은 적의 배만 불려 주고 귀중한 전력을 낭비하는 행위였을 뿐이다. 사실 두 사람 다 비난받을 부분이 있다. 나구모는 히류의 운용과 관련해 직접명령을 등한시함으로써 야마구치가 히류를 직접 운용하게 만들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나구모는 수뢰전 지휘관으로 퇴행해 버리고 말았다. 나구모는 일본군 전체 전력에서 가장 중요한 단 1척의 함선[히류]의 운명에 신경 쓰는 대신 자신이 하려는 수상전투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396-7)


"히류가 동쪽으로 돌격하는 동안 공격당한 세 동료는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렸다. 아카기, 가가, 소류에 화재가 발생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나자 영구적 구조 손상이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통로가 추락한 아카기와 가가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는데, 엘리베이터 통로가 일종의 연통 역할을 하면서 위로 연기를 뿜어내고 아래로 외부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양 함 내부는 일종의 용광로가 되었다. 고온으로 장시간 가열된 강철 구조물들이 붉게 달아올라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변형되고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13시 38분, 아오키 함장은 현실을 인정하고 어진영御眞影[덴노의 초상 또는 사진]을 노와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어진영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명정에 실려 노와키로 이동했다. 이제 덴노에 대한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난 아오키 함장에게는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일만 남았다. 아카기는 음울한 선회를 계속했다."(436)


"야마구치는 나름의 이유로 미국 항공모함 2척을 대파시켰다고 믿었고(실제로는 요크타운 1척), 이제 세 번째 항공모함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손에 쥔 것이 거의 없었다." "히류의 마지막 시련이 닥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혼성 급강하폭격대가 거의 근접했다." "17시 01분~17시 10분, 이제 히류는 가가와 마찬가지로 폭탄세례를 맞게 되었다. 히류는 왼쪽으로만 선회했고 적이 너무 많은 데 반해 대공화기가 너무 적었다. 엄호하는 제로센 조종사들은 용감했으나 SBD에 비하면 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첫 명중탄은 셤웨이가 올린 것으로 보이며 이어서 세 발이 연속으로 명중했다. 모두 1,000파운드짜리였고 전방 엘리베이터 앞에 명중했다. 흥미롭게도 나중에 미군 조종사들은 히류의 비행갑판 앞부분에 칠해진 식별용 히노마루를 편리한 조준점으로 이용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결과는 없었다."(467-71)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전시 공보 역사의 큰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중국 및 남방전선의 전황과 관련하여 일본 언론은 관례적으로 불편한 세부상황을 빼고 여과된 소식만을 전했지만 철면피한 날조 보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대중에게 미드웨이 해전은 대승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6월 11일자 『재팬타임스 앤드 애드버타이저』 지는 〈해군 다시 역사적 대첩!〉이라는 제호하에 일본 해군이 미국 항공모함 두 척을 격침했다고 대서특필했다. 며칠 후 전과에 미군 중순양함 1척과 잠수함 1척이 추가되었다. 언론 보도에서 일본군의 손실은 애매하게 표현되었으나 6월 11일, 유명한 해군기자이자 군사평론가인 이토 마사노리가 한 방송에서 일본이 항공모함 2척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토는 미드웨이에서 거둔 〈상상을 초월한〉 성과에 비해 미미한 대가를 치렀을 뿐이라고 언급했다. 〈상상을 초월한〉은 사실이었으나 이토가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다른 의미였다."(555-6)


"대다수의 부상병들은 비밀 환자로 분류되어 특별병동에 따로 수용되어 다른 환자, 수병, 가족들과 완전히 격리되었다. 기동부대의 파멸에 대해 어떤 말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도 이등국민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간부 대다수는 격오지로 발령 받았다. 수병들은 남태평양에서 전투 중인 부대들의 보충병력으로 지정되어 가급적 신속히 배치되었다. 생존자들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남태평양의 최전방으로 보내져 최후를 맞았다. 일본 해군은 아군조차도 모욕적으로 처우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실수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반면 이 참사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연합함대 지휘부와 참모진에는 부상자들이 겪은 불명예스러운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여전히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다. 나구모는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중심으로 새로 편성된 항공모함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555-7)


제3부 결산


"일본 해군이 경험에서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 이유는 1905년 쓰시마 해전의 승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쓰시마 해전에 승리한 후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에서 결정적 패배의 원인이 될 세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이 세 가지 전훈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대결할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불건전한 방향으로 일본 해군의 사고방식에 뿌리 내렸다. 미국과의 분쟁은 압도적 산업생산량으로 계속 양적 우위를 누릴 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양 대 양으로 싸울 수 없었던 일본 해군은 우월한 기술과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일본민족의 고유한 정신]가 결합하면 질로써 양을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 근본적 믿음에서 모든 교리와 함선설계 사상이 탄생했다. 그 결과 일본 해군에게는 열강 해군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온 역할들, 예를 들면 교역로 보호, 통상 파괴, 상륙 지원 등은 부차적 위치에 머물렀다. 일본 해군에게는 오로지 속도, 거리, 화력이 전부였다."(575-6)


# 쓰시마 해전(1905)이 일본 해군 교리에 미친 영향

1. 분쟁을 국지화하고 제한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 해군력이 분쟁의 범위를 설정하고 이를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 지리적 길목만 수호하면 되었던 러일전쟁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은 광대한 태평양 전체가 활동영역이었다.

2. 주력함대 사이의 결전에서 승리해야만 완전한 제해권을 획득할 수 있다. → 미국 같은 거대한 나라는 아무리 크게 패배하더라도 단 한번의 결전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 즉, 전쟁의 향배를 결정할 결전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3. 방어보다 공격이 우선한다. 적절한 거리에서 적보다 큰 화력을 동원하면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 → 전략적 차원에서 보면 일본해군의 일선 전력은 막강하지만, 어쩔 수 없이 뛰어든 장기전을 치를 만한 특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가장 중요한 학습 실패는 태평양전쟁의 첫 5개월간의 경험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관념과 정반대로, 적에 대한 일본군의 물량우세가 미드웨이 직전까지 대승을 거둘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원인이 승리병이건 전훈에 대한 대한 무관심이건 간에 결과적으로 1942년 상반기에 일본 해군에서는 치열한 지적 고민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항공모함 집중운용의 이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작전을 적게 수행하되 항공모함을 한꺼번에 많이 투입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정확하게 그와 반대로 행동했다.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이 지나치게 많은 목표를 한 번에 달성하려 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전력을 분산함으로써 지금까지 거둔 승리의 공식을 버렸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자신보다 약한 적이 일시적으로 전력을 집중해 수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 밀어 넣음으로써 불필요한 위험성을 높였다."(577-8)


"학습 실패 다음은 예측 실패이다. 코언과 구치가 지적하듯이 〈예측 실패의 핵심은 원래 알 수 없는 미래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지한 위험에 대해 적절한 예방책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학습 실패에 이어 명백히 예측 실패까지 범했다." "야마모토가 놓친 부분들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작전계획에서 예상한 시간보다 미군이 더 일찍 현장에 와 있을 상황을 대비하지 않은 것이었다. 미군은 이미 패배했으며, 미군을 유인해야만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야마모토의 믿음이 여기에 한몫 했다. 야마모토는 미군이 미리 와서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야마모토의 가장 큰 실책은 적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적의 의도에 맞추어 작전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적이 패했고, 적을 유인해야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작전을 세운 결과 야마모토는 적을 눈앞에 두고 전력 분산을 결정하는 실책을 저질렀다."(581-2)


"마지막으로 일본군이 저지른 (현재 상황에 대한) 적응 실패는 신줏단지 모시듯 작전계획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적당한 용어를 쓰자면 '계획 타성'이 일본 해군의 사고방식에 만연했는데 이것은 여러 (문화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다." "개전 초기에 일본 육해군은 계획에 집착한 데 대한 보상을 받았다. 진주만 기습 시 일본 해군이 보여준 능숙함이 좋은 예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신의 계획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여 한 번 공식화된 계획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드웨이 작전을 연기하지 않음으로써 야마모토는 5항전의 항공모함들을 전열에 추가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구모는 미드웨이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미군과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게 되었다." "작전수행 차원에서 계획 타성은 전투 전이나 전투 중에 상황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금언인 〈적과 접촉함과 동시에 계획의 수명은 끝난다〉를 귀담아들을 사람은 일본 해군에 없었던 것 같다."(585-6)


"종합적으로 전투 경과를 상세히 살펴본 후 나온 불가피한 결론은, 일본군의 패배가 계획의 중요한 부분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승리병 때문도, 몇몇 지휘관의 실책 때문도 아니었다. 일본군의 패배는 전투의 모든 측면, 즉 전략, 작전, 전술에 퍼진 실패들이 복잡하게 얽힌 총체적 난국으로 인한 결과였다. 모든 부분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다. 표면상 드러난 문제의 근저에 있는 원인은 수많은 개개인이 저지른 실수의 총합일 수도 있다. 그중에는 중대한 실수도 있으나 대다수는 일본 군부와 일본 해군의 문화, 교리, 그리고 선호한 전투방법에 내재된 더 큰 문제점이 일으킨 병의 증상에 불과하다. 이 모든 실패는 과거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배우지 않고, 미래를 위해 견실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며, 계획에 결함이 있음을 인지하고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조직의 최종 산물이다. 이 모든 문제의 씨앗은 일본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인 쓰시마 해전 이후에 뿌려졌다."(589)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초창기 연구들은 흔히 항공모함 4척이 격침되면서 일본 해군 최정예 비행사들도 크게 손실되어 일본의 세력 확장이 저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탑승원 121명의 전사, 실종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자체가 재앙은 아니다." "미드웨이 해전으로 인해 개전 전에 항공모함 발착함이 가능한 비행기 탑승원 2,000명을 보유한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전반적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지는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이 아니라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진 지독한 소모전을 겪으며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전력은 급전직하했으며 산타크루스 해전을 거치며 전쟁 전의 정예 탑승원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존 프라도스는 여기에 더해 정예 정비원과 기술인력의 손실을 지적한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항공모함의 정비기술 인력 중 721명이 전사했는데 이는 승선 인원의 40퍼센트에 해당한다. 미국보다 덜 산업화된 일본 사회를 생각해 보면 대체하기 어려운 손실이었다."(592-3)


"탑승원, 기술인력, 조직 지식의 상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42년에 일본 입장에서 비행기는 귀중한 자산이었으며 인적, 조직적, 전술적 자원의 총체적 가치 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중요한 자원을 자주 낭비했다. 그러나 항공모함 손실의 중요성에 비하면 앞서 말한 자원의 손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행기와 조종사를 싣고 전장으로 갈 항공모함 없이는 해군항공전의 혁명도 의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세력투사Power Projection'란 투사될 전력이 발진할 기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동기지는 전체 시스템에서 가장 비싸고 소중한 요소이다." "개전 당시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6척에 상응하는 정규 항공모함 5척─렉싱턴, 새러토가,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와스프─을 보유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 직후 양군의 전력차는 4척[엔터프라이즈, 호닛, 와스프, 새러토가] 대 2척[쇼카쿠, 즈이카쿠]으로 미군에게 극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반전되었다."(593-5)


"일본 해군은 1944년 11월 시나노가 준공된 후에야 미드웨이에서 잃은 4척을 채울 수 있었다. 항공모함 4척을 상실함으로써 일본 기동부대의 전술적 균일성은 사라졌다. 특성이 비슷한 함들을 함께 운용한다는 생각은 도입될 때부터 일본 해군의 건함 준칙이었으며 쓰시마 해전 때부터 미드웨이 해전 때까지 잘 활용되어 왔다. 진주만을 기습한 기동부대는 견실한 1항전, 재빠른 2항전, 미숙하나 잠재력 있는 5항전으로 구성된 균형 잡힌 함대였다. 각 항전은 속력, 항속거리, 탑재기 구성 면에서 잘 어울리는 항공모함 한 쌍으로 이루어졌다. 비슷한 성능의 함선들을 한 부대로 기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전투를 벌이는 중에 함선마다 성능이 다르다면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복잡한 요소 하나를 추가하게 된다. 통일성은 지휘 통제 시 생기는 불필요한 마찰을 줄여 주는 역할을 한다. 1, 2항전의 상실은 일본 기동부대의 놀라운 균형과 통일성을 완전히 무너뜨렸다."(597)


"단기적으로 보면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이 거둔 승리로 인해 미일 양국 항공모함 수가 균형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으며, 이로써 전쟁의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전투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보다 덜했다. 기동부대가 미드웨이에서 살아남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본군이 1943년 말쯤에 바란 최선의 상황은 실제처럼 완전히 절망적이지 않고 근소하게 열세한 상황에서 교전하는 것이었다. 진주만을 기습한 항공모함 6척이 모두 살아남아 1943년에 길버트 제도에서 미군을 상대했더라도 전투는 일본군의 대참패로 끝났을 것이다. 미드웨이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도 낙관적으로 보아 일본군이 전략적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기간은 18개월 정도였을 것이다. 일본군은 항공모함 4척을 손실하여 이 18개월을 잃은 셈이다. 미드웨이의 승패와 상관없이 미국의 거대한 산업생산력은 태평양전쟁에서 미 해군이 절대적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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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
M. T. 앤더슨 지음, 장호연 옮김 / 돌베개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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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세계가 나치의 폭력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어느 화창한 여름 아침에 미국 대리인과 소련 대리인이 만났다." "우리가 아는 것은 논의를 마치고 나서 소련 측이 미국인에게 나무 상자 하나를 건넸고, 미국인이 상자를 들고 건물을 나갔다는 것이다. 상자 안에는 마이크로필름이 들어 있었다. 필름을 다 펼치면 길이가 30미터나 되었고, 거기에 글은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선들과 점들과 옛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상징들이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그것이 전쟁의 판세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마이크로필름에는 신경과민의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악보 252페이지가 들어 있었다. 첫 페이지에는 〈레닌그라드에 바친다〉고 쓰여 있었다. 거기 적힌 암호와 상징들은 백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의해 소리로 바뀌어 라디오 앞에 앉은 수백만 사람들에게 방송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곡이 담고 있는 은밀한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9-14)


1부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에 음악원에 입학했다. 내전으로 러시아 전역이 아직도 몸살을 앓는 중이었으므로 음식도 난방도 충분치 않았지만, 미챠(드미트리의 '애칭')는 음악으로 힘을 얻었다." "러시아인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항상 시와 음악을 좋아했다. 1920년대 초에 정부는 이 같은 열정을 촉진하려고 애썼다. 볼셰비키 정부는 음악과 다른 예술들이 더 이상 부유한 자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전 노동자에게 교육을 확산하는 일을 맡은 계몽위원회가 공장 근처에 음악학교를 마련하여 연령과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법을 배우도록 했다. 음악원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내보내 인민을 위해 음악을 만들도록 했다. 부르주아 가정에 있던 피아노가 끌려 나와 트럭에 실렸다. 성악가,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가 트럭 뒤에 올라타고 시골을 돌며 쉬고 있는 붉은 군대와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공연을 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야외 현장과 식당에서 공연했다."(50-2)


"예술의 도시 페트로그라드에 열광적인 실험의 분위기가 휩쓸었다. 〈거리가 우리의 붓이고,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다.〉 러시아 미래파 시인이자 화가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이렇게 선언했다." "10월 혁명 기념일을 맞아 1만 명이 동원되어 〈차르의 겨울궁전 급습〉을 공연했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를 보며 경외하고 감동하고 즐거워했다. 실험적인 극단들이 시골을 돌며 새로운 이야기, 우스꽝스러운 광대극, 에스에프 드라마를 공연했다. 미래주의자 마야콥스키는 〈미스테리야-부프〉 같은 기괴한 선전물 연극을 만들었다. 성서의 대홍수에서 용케 살아남은 몇몇 노동자들이 천국과 지옥을 거쳐, 마침내 영광의 새 러시아가 전기와 제조업으로 힘차게 일어서는 새로운 공산주의 유토피아─기계 세상!─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페트로그라드에는 입체-미래파, 신-원시주의, 구성주의, 절대주의, 광선주의, 생산주의 등 새로운 미술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52-6)


"작곡가들도 러시아의 새로운 현대성을 찬양하고자 했다. 최전선에 선 이들은 이제 어둡고 뒤엉긴 화음이 난무하고 천둥처럼 요란한 곡을 쓰거나 크리스털 조각 같은 음악, 그러니까 급격하게 돌출하다가 눈부신 표면이 이어지는 날카롭고 딱딱한 구조의 곡들을 썼다. 미래파에 열광했던 이들은 기계 장치의 굉음과 반복을 특징적으로 묘사하는 곡들도 쏟아냈다. 이름에서부터 잔혹한 기계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모솔로프의 〈주물 공장〉(마지막에 가서는 타악기 주자들이 거대한 금속 조각을 요란하게 내리쳐서 혼을 빼놓는다), 프로코피예프의 《강철의 춤》, 데셰보프의 《철도》, 오른스테인의 《비행기에서의 자살》 같은 곡들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협회는 〈오케스트라는 공장처럼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음악을 평균적인 산업 노동자에게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페트로그라드의 한 제조공장에서는 공장의 경적과 터빈 돌아가는 소리로 '교향곡'을 빵빵거렸다."(57)


"1922년 2월, 폐렴으로 아버지를 잃은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애도를 담은 자료를 우리에게 남겼다. 바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이다." "열다섯 살의 작곡가가 쓴 음악치고 뛰어나다. 그와 마리아는 살롱에 모인 음악가들 앞에서 이 곡을 연주하여 아버지에게 바쳤다. 모음곡 가운데 한 곡, 환상적인 춤곡은 조야를 위한 곡일 수 있다. 그녀는 댄서가 되고 싶어 했다(화가, 가수를 꿈꾸기도 했다). 드미트리는 종종 여동생을 위해 괴상한 춤곡들을 썼는데, 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녀의 무릎과 뾰족한 팔꿈치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러나 이 밝은 춤곡, 조야의 장난을 나타내는 이 곡에서도 애도의 종소리가 메아리친다. 모음곡에서 가장 뭉클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분위기가 어떻든 간에 다급한 종소리가 가끔 끼어든다. 죽음을 겪고 나서 멍한 순간에 우리가 다른 뭔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슬픔이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낚아채는 것처럼 말이다."(64)


"1926년 5월 12일은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제2의 탄생'이라고 불렀던 날이다. 그는 평생 이날을 축하했다. 바로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된 날이다. 그의 나이 불과 열아홉 살이었다." "음악원을 졸업한 뒤에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의 초超현대주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부 극단주의자들만큼 멀리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이후 몇 년간 그의 음악은 보다 넓은 예술적 혁명의 요소들을 많이 보였다. 각진 구성의 묘미, 깜짝 효과가 주는 재미, 그로테스크함에 대한 집착, 아이러니와 빈정거림과 풍자, 밝은 색채와 평평하고 딱딱한 구조의 강조가 그런 예들이다. 글을 쓰는 친구들과 지인들은 기계화된 세상의 동화 같은 에스에프 오락물, 방향과 논점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교훈 없는 우화들을 내놓았다. 말 없는 음악에 '등장인물'이라는 것이 있다면, 쇼스타코비치의 인물들은 작가 친구들의 부조리한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하다."(75-9)


"1930년대 초반 소련에 불어 닥친 음울한 기운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쇼스타코비치가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을 얼마나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에 그는 자신이 작곡가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말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술가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시키도록 할까 항상 고민하며, 여기에 실패하면 내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쇼스타코비치가 무슨 뜻으로 위의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의 옆 소파에는 미국인 인터뷰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부의 공식 통역자도 있었고, 미심쩍은 것은 무엇이든 상관에게 보고했을 소비에트 언론 담당관도 자리에 함께했다. 쇼스타코비치를 연구한 한 학자의 말대로 자유롭게 생각들을 터놓고 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103-4)


"발레곡 〈볼트〉(1931)나 〈맑은 시냇물〉(1935)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소비에트 러시아 예술계를 휩쓸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요구에 충실했다.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불리게 되는 양식이다.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딱히 사실적이지는 않다. 아무튼 작가들과 작곡가, 화가들은 더 이상 20년대처럼 꿈, 동화, 부조리, 에스에프적 상상물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묘사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소비에트의 현실이 보편적인 완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소비에트 작곡가 연맹은 1934년 아래와 같은 지침을 내렸다. 〈소비에트 작곡가들은 무엇보다 현실이 승리를 향해 진보한다는 원칙, 영웅적이고 밝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쇼스타코비치가 〈맑은 시냇물〉을 작곡했을 때 그는 집단 농장에서 벌어지고 있던 불안, 굶주림, 필사적으로 곡식을 숨기려는 노력을 묘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소비에트 리얼리즘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현실이었다."(106)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초연은 1934년 1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두 극장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19세기 단편 소살이 원작으로 줄거리는 낡았지만, 음악은 강렬하고 대담하고 단도직입적이었다. 살인을 저지르는 여주인공에 감동적인 숭고함과 깊은 슬픔이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쇼스타코비치는 계몽인민위원을 리허설에 초대했고, 공연을 보고 나서 정부는 《맥베스 부인》이 〈소비에트 오페라의 창조성이 찬란하게 꽃피는 출발점〉이었다고 선언했다. 오페라는 곧바로 성공을 거두었다. 첫 공연이 열리고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해서 쇼스타코비치는 막이 끝나고도 무대에 올라가서 인사를 해야 했다. 동료 작곡가들은 〈비범하고 깊이 있고 관현악 편곡이 뛰어난 작품〉, 〈쇼스타코비치의 창조력의 정점〉이라고 말했다. 레닌그라드 신문들은 오페라가 곧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 대열에 오를 것이라고 흥분했다."(113)


"맥베스 부인이 무대에서 연인과 함께 남편의 목을 졸라 죽인 바로 그해인 1834년 말, 레닌그라드의 공산당 총수 세르게이 키로프가 당 본부의 복도를 걷던 중에 암살범이 경호원들을 용케 피해 꺼내 든 권총에 목을 맞았다. 키로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는 크렘린의 스탈린 방에서 묵기도 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스탈린은 장례식에서 그의 관을 들었다. 독재자는 친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신속하게 찾아내어 처벌하도록 했다. 키로프가 암살된 12월 1일, 국가에 대한 테러로 체포된 사람들은 열흘 이내에 재판에 넘겨지고 유죄로 판명되면 항소 없이 즉각 처형되도록 하는 긴급명령이 통과되었다. 훗날 '대공포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1935년 4월 7일, 스탈린은 아이가 열두 살만 되어도 어른처럼 재판을 받고 처형될 수 있다고 알렸다. 아이들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은 부모는 반역자와 공모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야 했다."(114-6)


# 실제로는 스탈린 본인이 키로프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1월 28일, 쇼스타코비치는 『프라우다』를 한 부 샀다. 페이지를 훑어보다가 자신에 대한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음악은 없고 혼란 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하여」라는 표제의 기사였다." "스탈린은 왜 젊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고발하려고 했을까? 그것도 2년 가까이 공연되면서 큰 사랑을 받았고 소비에트 오페라의 희망으로 여겨졌던 《맥베스 부인》을 보고 나서 말이다. 확실한 대답은 모르겠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세계적 명성이 스탈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에 묘사된 성적 분출에 스탈린이 혐오를 느꼈을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스탈린이 쇼스타코비치를 본보기로 삼아 〈진정한 예술, 진정한 과학, 진정한 문학〉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 지도자들 전체를 꾸짖고 괴롭히려 한 것 같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정권의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고, 그들에게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123-5)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인민의 적이 작곡한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특히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은 기이했다. 거대하고 요란하고 성난 작품이다. 전체적인 구조가 이리저리 뻗어가고 모호한데, 한 가지는 확실하다. 교향곡이 작아지고 대화의 분위기로 접어들 때면 여지없이 거대하고 섬뜩한 뭔가가 치고 올라온다." "결국 결정적인 타격이 찾아왔다. 쇼스타코비치는 강압에 못 이겨 초연을 취소해야 했다. 『소비에트 예술』 잡지에 이런 안내문이 올라왔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자신의 《교향곡 4번》 공연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 창조적 확신이 없고 길고 낡은 국면으로 여겨진다는 이유에서다.〉" "잔혹하면서 복잡하게 얽힌 《교향곡 4번》은 쇼스타코비치의 가장 매혹적이고 독창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지만, 공포에 재갈이 물려 대중과 만나기까지 사반세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142-4)


"곡조의 변형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4번》 같은 교향곡들은 특정 사건을 전혀 묘사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예컨대 1악장에서 더듬거리고 덜컹대고 무력해 보였던 여러 주제들이 교향곡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여 쾌활한 거리 무용처럼 연주된다. 그런 다음에 그것들은 짓눌리고 침묵에 던져진다. 뭔가 극적인 것을 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지막에 요동치는 악마적 송가에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오이디푸스 왕》의 한 구절이 들어 있다. 오페라에서 왕비에게 환호하는 합창단이 노래하는 대목이다. 그들은 왕과 왕비가 벌인 죄 때문에 자신들에게 역병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전의 교향곡에서라면 노동자들이 볼셰비키에게 바치는 찬가를 넣었을 바로 그 대목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이런 구절을 사용했다는 데에 아이러니가 있다. 그의 갈채는 병들어 죽어가면서 역병의 책임이 있는 지도자에게 환호하는 도시에서 가져왔다."(146-7)


"쇼스타코비치는 무엇이라도 세상에 내놓아야 했다. 조만간 그의 침묵도 주위에서 벌어지는 문화 혁명에 대한 논평으로 읽힐 터였다. 침묵은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는 봄에 《교향곡 5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37년 11월 21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D단조 작품번호 47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모두가 중요한 순간임을 알았다.〉 한 전기 작가의 말이다." "피날레가 결말을 향해 치달을 때 청중들은 무아지경에 빠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다들 히스테리 같은 흥분에 빠졌다." "청중에게 이 교향곡의 승리는 단순히 쇼스타코비치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날 밤 공연장에 모인 모두가 생존자였다. 모두가 작곡가가 겪었던 고통을 나름의 방식으로 겪었다. 그들은 이제 막 애도할 기회를 얻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함께 슬퍼할 기회를."(175-81)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체포를 피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국제적 명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대공포 소식이 서방으로 새어나갔지만, 스탈린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은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상황에서 소비에트의 가장 유명한 시민이 실종된다면 전 세계가 의심할 게 뻔했다. 그러는 동안 NKVD는 작곡가를 기소할 수 있는 사건을 꾸미려고 자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그들은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을 것이다." "나데즈다 만델시탐은 이렇게 썼다. 〈공포의 공기를 들이마신 사람은 명목상으로는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파멸한 것이다. 모두가 희생자이다.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인자들, 이데올로기 신봉자들, 눈을 감거나 손을 씻은 공범과 아첨꾼들도, 밤에 몰래 후회에 시달린다 해도 그렇다. 전 부문에 걸쳐 모두가 공포로 인한 혹독한 병에 시달렸고, 지금까지 아무도 회복하거나 일상적인 시민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195)


2부


"소비에트 연방 시민들은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나치에 협력한 시민들을 무참하게 죽였던 소비에트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나치를 비판하면 투옥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쇼스타코비치와 어울리던 사람들에서 보자면,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과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얼마 전에 〈알렉산드르 넵스키〉라는 걸작을 완성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야만적인 독일 기사단과 전투를 벌여 기념비적 승리를 거둔 중세 러시아 영웅의 이야기다." "1938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영화가 개봉했을 때 스탈린은 영화의 친러시아적, 반독일적 정서를 찬양하며 흡족함을 드러냈다. 영화는 곧 소비에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학생들은 영화에 나오는 합창곡을 노래하고 다녔다. 이것은 1938년의 일이다. 1939년에 독일이 동맹국이 되자 뿔 달린 튜턴족 기사들이 침략자로 나오는 영화는 상영관에서 사라졌다. 영화는 나중에 다시 상영되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207)


"전쟁이 발발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군부대를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부대를 돌아다니며 사기를 진작하는 소규모 앙상블이 연주할 수 있도록 노래와 클래식 곡을 단순하게 편곡했다." "소비에트는 슬라브 문화를 열등하고 심지어 인간 이하라고 여기는 적과 싸우는 중이었다. 나치는 특히나 러시아의 문화유산들을 업신여겼다. 마치 러시아의 위대한 사상가, 시인, 음악가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작가 안톤 체호프의 집을 엉망으로 더럽히고, 레프 톨스토이의 육필원고로 불을 붙였다. 박물관을 약탈했다. 위대한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살았던 마을을 차지했을 때는 그의 집을 모터바이크 차고로 만들었다." "음악 공연단들이 붉은 군대 해군, 공군, 지방의용군을 찾아다니며 연구하도록 한 목적은 침략군에 의해 더럽혀진 러시아 문화의 힘과 정통성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레닌그라드 음악단은 시민들과 병사들을 위해 매달 평균 160회의 공연을 했다."(241-3)


"1941년 7월 18일, 시 관료들은 배급카드를 나눠주었고 빵과 버터 같은 생필품을 구입하려면 카드를 제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가게에는 여전히 값비싼 물품들이 있었다. 아무도 굶주림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공식 신문들은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식량이 부족해지는 일은 없을 터이고, 독일군은 결코 그곳까지 오지 않는다며 안심시켰다. 이런 거짓말에 시 정부도 넘어갔다. 포위되었을 때 사용하라고 소비에트 상공장관이 레닌그라드에 생필품을 실은 거대한 차량을 보냈을 때, 보로실로프 원수와 레닌그라드 공산당 총수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시 정부가 물품을 받으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창고에 공간이 부족〉하다면서 수송된 물품을 거절했다. 훗날 레닌그라드가 굶주림에 허덕이며 1년을 보내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7월 19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로 향하고 있을 때,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교향곡 7번》 서두를 써 내려갔다. 훗날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 불리게 될 작품이었다."(257-8)


"〈나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아주 빠르게 썼다.〉 쇼스타코비치의 회상이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전쟁이었다. 나는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궁지에 몰린 조국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음악에 새기고 싶었다.〉 말 그대로 그의 사방이 전쟁이었다. 도시 북쪽에는 핀란드군이 있었다. 서쪽은 핀란드만이었는데 부유기뢰가 떠다니는 죽음의 바다였다. 동쪽에는 라도가 호수가 있었고, 독일군이 호수 남쪽 연안에서 폭격을 가했다. 남쪽은 독일군이 쫙 깔린 전선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세 갈래가 악마의 쇠스랑처럼 러시아의 살갗에 깊게 박혔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남부집단군은 키예프를 포위했고, 소비에트 네 개 부대를 함정에 몰아넣었다. 중부집단군은 스탈린과 국가방위위원회가 두려움에 떨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는 수도 모스크바에서 이제 불과 32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275-7)


"9월 8일,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2악장 작곡을 시작했다. 레닌그라드가 보다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기분으로 작곡된 조심스러운 춤곡 악장이다. 그는 여기에 '회상' 또는 '꿈'이라는 제목을 붙일까 생각했다. 전날 거센 폭격이 있었지만, 기분 좋은 간주곡의 우아한 첫 마디에는 그런 공포의 기색이 전혀 없다. 대대적이고 잘 조직된 독일 공군 폭격기들이 레닌그라드로 쳐들어오는 것을 못 본 체 무시하고, 쇼스타코비치는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음표를 그렸다." "가볍게 흔들리는 춤곡 악장이 중간쯤에 이르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를 비웃는 패러디가 된다. 중간에 폭발하는 대목은 9월 8일 폭탄이 터졌을 때 그가 작곡했을 법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회상'의 주제를 전개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작곡가의 경험과 그가 작곡하는 음악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 미묘한지 보여주는 예이다. 이것은 지옥의 한가운데서 작곡된 온화한 음악이었다."(278-82)


"《교향곡 7번》의 3악장은 느리고 긴 명상으로, 간간이 삭막한 팡파르가 반복되고 변형되어 끼어든다. 원래 그는 여기에 '조국의 광야'라는 제목을 붙였다. 아마도 러시아의 광활함, 시베리아의 타이가 삼림지대, 외로운 자작나무 숲, 찰싹거리는 라도가 호수 연안, 풍요로운 우크라이나 들판에 대한 자부심을 담으려 했던 것 같다. 북쪽으로는 툰드라, 동쪽으로는 사막, 남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록빛 언덕이 닿은 땅, 갈망으로 가득한 곡이다. 지독하게 여린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최종적으로는 악장에 붙인 제목들을 지웠다." "어떤 사랑은 너무도 강력해서 결국에는 슬픔을 항상 속에 묻어야 한다. 그 안에 암호로 새겨진 것은 언젠가는 사랑이 끝나리라는 깨달음이다. 이것은 폭격기들이 레닌그라드를 화염과 먼지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울음으로 채웠을 때 쇼스타코비치가 쓴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는 9월 29일에 교향곡 3악장 아다지오를 마무리했다."(318-9)


"전세는 1941년 12월 둘째 주에 역전되었다. 소비에트가 모스크바 근처에서 독일의 3개 기갑사단을 모두 물리친 것이다. 거의 500대의 전차를 파괴하여 독일 중부집단군을 흩어지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히틀러의 육군이 진격을 멈추었다. 엄청난 소식이었다. 소비에트 정보국은 며칠째 승리를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13일 마침내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을 실었다. 〈모스크바를 포위하고 접수하려던 독일의 계획이 무너지다: 독일군 패배.〉 (쿠이비셰프로 피난해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어쩌면 이 소식을 듣고 교향곡 작곡을 재개하여 승리의 피날레를 쓰고자 생각했을 것이다." "니콜라이 소콜로프의 회상에 따르면 〈파시스트들이 모스크바 외곽에서 박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쇼스타코비치는] 자리에 앉아 활기차게 신이 나서 작곡을 했다.〉" "잠깐 동안 세계는 낙관적인 쇼스타코비치를 얻었다." "그리고 12월 27일, 쇼스타코비치는 조용히 말했다. 〈오늘 《교향곡 7번》을 마침내 끝냈소.〉"(358-64)


"오랫동안 러시아인들과 미국인들은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5개년 계획과 대공포 시대의 참상을 제대로 아는 미국인은 드물었어도 스탈린과 공산당에 대해 깊이 불신할 만큼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미국의 도를 넘는 자본주의를 경멸했다." "그래서 소비에트 정부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것은 전쟁에 관한 곡으로 소비에트 시민의 삶과 독일 침공의 공포, 다가올 영광의 승리를 묘사했다. 작곡가는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국제적 유명세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 곡으로 서구인들에게 러시아인이 볼셰비키 야만인이 아님을 보란 듯이 말해줄 수 있었다. 그들은 포위된 와중에도 교향곡을 쓰고 있었다. 미국의 전차와 비행기, 통조림 고기들이 독일 잠수함 유보트가 돌아다니는 바다와 독일 공군이 정찰하는 하늘을 넘어 러시아로 전달되는 동안, 러시아 외교관들은 교향곡 악보를 서방으로 보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397-401)


"이 작품 덕분에 실질적으로 원조가 늘었을까? 교향곡은 스탈린이 그토록 바랐던 제2의 전선을 만들지는 못했다. 1942년 여름에 동맹국은 유럽으로 치고 들어가 독일을 공격할 생각을 할 만큼 두터운 전열을 갖추지 못했다. 스탈린은 격노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1944년에 가서야 제2의 전선을 펴게 된다. 하지만 비행기, 전차, 무기, 의료품, 식량 형식으로 러시아에 보내는 원조는 가파르게 늘었다. 덕분에 소련이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원조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은 전쟁에서 절망적으로 내몰린 러시아를 돕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대중을 설득하는 캠페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였다. 1943년 1월의 여론 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90퍼센트가 설사 자국의 식량을 줄여서라도 러시아에 더 많은 식량을 원조해야 한다고 믿었다. 불과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소련은 적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430-1)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의 레닌그라드 초연은 1942년 8월 9일에 열렸다. 의도적인 도발의 제스처로 선택한 날짜였다. 1년 전 히틀러가 아스토리아 호텔 무도회장에서 축배를 들겠다고 떠벌렸던 바로 그날이었다."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많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의미했다.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강력한 연대감과 우정을 심어주었다. 많은 러시아인들에게는 승리의 희망을 꿈꾸게 했다. 일부 독일인들에게는 슬라브족을 인간 이하의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주민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들렸다. 하나 된 일체감을 갖도록 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감정으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 음악을 와서 들으려고 이 순간까지 살아남은 것이니까요.〉 그날 밤 공연장에 있었던 한 여성의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겪은 진짜 교향곡이었습니다. 우리의 교향곡, 레닌그라드 주민들의 교향곡입니다.〉"(444-50)


3부


"이야기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다. 역사는 완벽한 마무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7번》을 연주한 것은 공세를 전환시킨 계기였다고 지금 기억되지만,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전세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그것은 기억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포위는 이후로도 1년 반이나 더 이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점차적으로 레닌그라드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되찾았다. 이미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라도가 호수를 건너 도시로 수백 톤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전함, 화물선, 바지선들이 줄을 이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호수 아래로 파이프가 설치되어 레닌그라드는 겨울이 와도 연료가 부족하지 않게 되었다." "1943년 1월 18일, 마침내 도시를 에워싼 독일의 포위망에 균열을 냈다. 도시 안쪽 군인들과 봉쇄 고리 바깥쪽 군인들이 서로 얽혀 기쁨의 포옹을 나누었다. 포위는 이어졌지만 봉쇄는 끝났다."(457-8)


# 1944년 1월 27일, 고보로프 원수가 공식적으로 해방 선언


"전쟁이 끝나고 소련과 다른 연합국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렸다. 소련 내에서 서구의 자본주의 정권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제 무엇이든 위험했다. 이미 전쟁 말년부터 NKVD는 미국의 과학기술을 칭찬하는 것을 범죄로 취급했다. 이제 서구 영화, 서구 소설, 서구 음악이 또다시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러시아 민족주의가 활개를 쳤다. 프랑스의 바게트 빵은 '도시 빵'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렸다. 정부는 다른 나라와 혈통으로 연결된 〈뿌리 없는 세계인〉에 대해 비난하고 나섰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유대인을 뜻하는 말임이 곧 드러났다. 쇼스타코비치는 서구에서 칭송을 받았다. 『타임』 표지에 등장했다. 기사들은 그가 '부르주아'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레닌그라드의 작가들이 또다시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전쟁을 도우려고 애쓴 노력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공격이 다가오고 있었다."(472-3)


"1948년 2월, 레닌그라드 공산당 총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명망 있는 음악가, 작곡가, 음악학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소비에트 음악에 대해 논의하고 그들에게 법령 하나를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현대 음악의 〈형식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같은 〈반인민〉 작곡가들의 음악이 〈도로를 뚫는 드릴 소리나 음악적 가스실〉처럼 들린다고 불평했다. 1936년의 공격과 「음악은 없고 혼란뿐」 논란의 재현이었다." "《교향곡 7번》의 성공은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다시 그를 공격하고 나선 당의 입장에 자기도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부르주아, 퇴폐적 서구에 영합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러시아가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그는 승리의 《7번》을 작곡했고, 전세가 역전되어 러시아가 승기를 잡았을 때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8번》을 작곡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473-4)


"1948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금지되었다. 그해 가을에 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모아둔 돈이 떨어지자 그는 스탈린을 칭송하는 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하며 돈을 벌었다." "1953년 3월 1일 이른 아침, 공산당 서기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침대에서 쓰러졌다." "스탈린 동지는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했다. 그는 3월5일에 죽었다." "감옥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이자 유대인인) 바인베르크는 간수들이 갑자기 공손해진 것을 알아챘다. 그는 곧 서류에 서명하고 풀려났다. 이제 더 이상 숙청은 없을 터였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0번》을 작곡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자신의 이니셜로 만든 음악 모노그램─DSCH─을 선율 속에 은밀히, 하지만 반항적으로 끼워 넣은 곡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불안하게 부르지만 교향곡의 후반부로 가면 위풍당당하게 돌아온다. 마치 〈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다! 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다!〉 하고 소리치는 듯하다."(477-80)


"쇼스타코비치는 남은 세월 동안 교향곡을 계속해서 써서(총 15곡을 작곡했다) 연민과 저항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동시에 현악 4중주곡도 잇달아 썼다."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느린 《현악 4중주 15번》을 어떻게 연주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파리가 공중에서 죽은 채로 떨어지도록, 청중들이 그냥 지루해서 연주회장을 떠나도록 그렇게 연주하시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였다. 마지막 악장에 보면 그가 50년도 더 전인 열다섯 살 때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에 썼던 다급하게 울리는 조종 소리의 흔적이 들린다. 당시에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지금은 조용히 무시무시하게 자신의 죽음을 위한 종을 울린다. 선율은 점차 흐릿해지고 약해지고 아마도 온화해지다가 마침내 알쏭달쏭한 수평선으로 사라진다. 쇼스타코비치는 1975년 8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교향곡 7번》이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었던 바로 그날이었다."(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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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슈베르트
한스-요아힘 힌리히센 지음, 홍은정 옮김 / 프란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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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슈베르트의 빈


"빈이 음악도시로서 명성을 다지던 기간이 '요제프의 10년'으로 역사에 기록된 시기와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제프 2세가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1780~1790)에 오스트리아는 계몽적 절대왕정의 전성기였고, 군주가 거주하는 빈은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가 1781년 잘츠부르크의 안정적 기반을 모두 포기한 채 이주해 올 만큼 매력적인 창작의 조건을 갖춘 도시였다." "이 당시의 음악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인 '빈 고전주의'라는 가설이 수용사적으로나 양식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은 어쨌든 이 용어를 붙일 만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시기를 1781년부터 1804년까지로 규정하는 것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하이든의 기념비적 작품인 현악 4중주 여섯 곡(Op. 33)이 출판되고 모차르트가 빈에 정착한 무렵에 시작되어, 하이든이 작곡을 그만두고 베토벤이《영웅 교향곡》으로 음악 지형에 영속적인 변화를 안겨준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끝난다고 보는 것이다."(13-4)


"슈베르트와 관련해서 짚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슈베르트는 빈 음악계의 핵심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고전주의'의 일원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베토벤의 중기와 후기를 통틀어 어떤 작품도 이 역사적 양식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얼핏 보기에는 동일한 공간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것 같지만(베토벤은 1827년에, 슈베르트는 그로부터 1년 반 뒤에 사망했다) 실은 한 세대가 차이 나는 두 작곡가가 '고전주의'라는 음악 유산을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음을 의미한다. 베토벤이 젊은 시절의 스승이었던 하이든의 스타일을 모방하면서 고전주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었던 반면, 슈베르트는 살아 있는 듯 보이나 이미 완성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해당 작품들에서 고전주의의 규범을 찾아냈다." "두 사람은 같은 도시에서 살고 활동한 것 같지 않다는 인상마저 든다. 즉, 베토벤의 빈은 슈베르트의 빈이었지만, 슈베르트의 빈은 베토벤의 빈이 아니었다."(15)


"그러나 이 짧은 전성기는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군은 충격적인 패배를 맛보았고, 귀족들의 사유재산은 붕괴했으며, 국가는 파산에 이르렀다. 이 모두가 슈베르트의 유년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마침내 빈 회의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 이후를 '비더마이어' 시대라 일컫는데, 1800년 이전의 공적 음악 생활은 대체로 귀족이 주도하고 소수 중심이었던 데 비해, 메테르니히 시대의 빈에서는 음악 활동이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1790년대에 귀족의 체계적인 비호 덕분에 비교적 일찍부터 견고한 명성을 얻었던 베토벤은, 이미 안정적인 작곡가로서 기존 제도의 붕괴를 무사히 견뎌낼 수 있었다. 반면 슈베르트가 음악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정확히 반나폴레옹적인 왕정복고의 전성기에 해당했고, 빈 소시민계급 출신인 슈베르트는 비더마이어 시대의 가정 중심의 음악 문화와 더불어 성장했다. 슈베르트는 평생을 가정 음악회 같은 형식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16-8)


2 최초의 시도들과 대가의 기운


"놀랍게도 슈베르트의 초기작들은 단순히 시작을 알리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린 초보 작곡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처음부터 모든 장르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도이치 번호 10번여까지의 작품들만 보더라도 피아노곡, 가곡, 4중주 혹은 5중주 편성의 현을 위한 실내악곡, 교향곡,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곡, 연극을 위한 서곡, 미완성으로 남은 오페라 《거울의 기사》(D. 11) 등이 있다. 그중에서 적지 않은 곡, 특히 실내악과 관현악곡이 시도에 머무른 채 완성되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모두는 슈베르트가 걸음마 단계인 1810~1811년에 작곡한 것인 데다가 당시의 음악 장르 체계에 속하는 거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여기서 제외된 것은 교회음악과 협주곡뿐이다." "모든 초기작에서 슈베르트는 아직 서툴렀고,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다. 그러나 유독 한 장르만큼은 먼 길을 돌아갈 필요 없이 즉시 그만의 스타일을 안착시킬 수 있었다. 바로 가곡이었다."(39-44)


"슈베르트가 가곡에서 그렇게 일찍부터 성숙한 결과물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그의 월등한 시적 재능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슈베르트는 시의 형태로 접하게 된 거의 모든 것을 음악으로 창작했다." "또한 가곡은 별다른 준비 없이 즉석에서 바로 부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사전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칠 필요 없이 초고 악보 한 장만 있으면 연주가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곡은 비더마이어적인 사교나 교양 모임에 딱 들어맞는 예술 형식이었다. 게다가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는 장르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완전히 새로운 미지의 작곡 세계와 맞닥뜨릴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슈베르트는 그 안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알아보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다. 여러 기악 장르와는 달리 가곡 분야에서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처럼 그를 주눅 들게 만드는 대가와 경쟁할 필요도 없었다. 적어도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Op. 98, 1816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44-5)


"슈베르트의 유년작인 여섯 교향곡은 놀랄 만큼 성숙하고, 음향이 거의 예외 없이 우아하게 울리며, 힘들게 애쓰지 않고 만들어진 듯이 보인다. 게다가 그는 당시 빈에 살고 있던 거장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없이 순진하게 작곡했고, 이 장르를 대표하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견줄 생각도 없었다. 물론 이 본보기들이 그에게 자극이 되었을 수는 있다. 여섯 개 중 첫 교향곡은 기숙학교에서 나오기 직전에 완성되었고, 마지막 곡(1818년 2월에 완성)은 부모 집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작곡되었다." "여기에는 독특한 역사적 아이러니도 있다. 21세의 작곡가가 베트벤식 장르 모델과 동떨어진 작품을 쓰고 난 다음에 비로소 베토벤 교향곡을 더 이상은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교향곡 작곡가 슈베르트는 유년작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에 수년간 침묵을 지켰고, 그것은 그가 역사적인 모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을 의미한다."(57-61)


3 위기, 돌파, 자기 결정


"베토벤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은 슈베르트가 작곡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진작부터 싹텄다. 진지하고 믿음직한 목격자인 요제프 폰 슈파운은 어린 슈베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을 전해주었다. 그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기숙학교 시절 초반이었을 것이다. 〈은밀하게,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베토벤 이후에 누가 해낼 수 있단 말인가?〉(『회고』, 150).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 이 발언은 열 살 더 많은 슈파운이 슈베르트의 첫 가곡을 열광적으로 칭송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슈베르트는 여기서 〈베토벤 이후〉의 근본적인 문제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비판적으로 이해했다. 비판적인 자기 이해가 이렇게 일찍, 더군다나 가곡 분야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이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아 보이지만, 자의식 강한 어린 작곡가의 한숨은 베토벤이라는 철옹성 같은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왔을 것이다."(67)


"슈베르트는 1822년 10월 30일에 《미완성》 교향곡 b단조(D. 759)를 악보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1821년 8월에 작곡한 교향곡 E장조에 이어, 베토벤 교향곡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 조성으로 작곡하는 두번째 시도였다." "《미완성》 교향곡의 첫 악장은 슈베르트가 처음으로 자기만의 선율적, 화성적 어법을, 베토벤에 의해 숭고하고 장대한 것으로 격상된 대규모 교향곡 형식과 설득력 있게 결합해낸 모델이다. 여기서 그가 찾아낸 해법은 현악 4중주 c단조나 교향곡 E장조의 첫 악장에서 시도했던 형식 실험의 성과가 직접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친구에게 선물로 건넨 것만 봐도 슈베르트가 이 교향곡을 실패작으로 여긴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이미 끝낸 악장들에서 어떤 결함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이 미완성 작품을 갑자기 중단한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후 그의 말을 통해 짐작해 보자면, 이 시기에 슈베르트는 아직 자신이 대규모 교향곡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76-9)


4 비운의 사랑: 음악극


"진작부터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보편주의자라 자처했던 젊은 작곡가가 일찍부터 오페라 작곡에 이끌렸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작곡 영역과는 달리, 빈의 극장과 오페라 시스템은 풋내기가 섣불리 파악하고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1820년에 케른트너토어 극장과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두 개의 소규모 무대 작품이 무사히 상연되었고, 그 뒤를 이어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대규모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질 참이었다. 빈의 언론도 이미 여러 차례 기대감을 드러냈다. 1823년에는 오페라 작곡가 슈베르트의 성공이 코앞에 다가온 듯 보였고, 친구들도 신문기사를 통해 그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를 돌파하지 못했고,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가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이 분야에서 충분한 입지를 굳히지 못한 탓이었다. 친구들의 호의적인 지원도 이런 불행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고, 이로써 슈베르트는 빈 오페라계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다."(88-92)


"슈베르트는 한참 동안 휴식기를 가졌다가 몇 년 뒤에 마지막으로 다시 이 장르로 돌아온다. 끝내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음악극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여전히 컸지만, 1824년 이후 음악극은 결국 채워지지 않는 불운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인생의 막바지인 1827년 6월에 작곡을 시작한 《글라이헨 백작》(D. 918)이 그 증거다." "이런 상황은 그의 작품 목록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흔히 언급되는 '위기의 시간'은 바로 무대에서의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 분투하던 시기였다. 1819년에서 1823년까지의 슈베르트의 창작 활동을 종합해보면, 작곡 위기의 징후로 여겨질 수도 있는 기악 장르의 현저한 감소는 음악극 분야에서의 성공적인 성과와 확실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다가 1824년 초 슈베르트가 갑자기 음악극에서 등을 돌리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내 중심축은 다시 기악으로 옮겨 갔다. 이제 작곡가의 사후 명성의 기반이 되어줄 대작들을 위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102-4)


5 대중을 위한 작곡


"오페라 무대로 향하는 문은 가로막혔고, 슈베르트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폭넓은 대중 앞에 나설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두 선배 작곡가는 피아노 독주자로 직접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데 비해, 그는 경험은 많으나 실력이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슈베르트가 1824년 실내악 작곡에 착수해서 단계적으로 '대교향곡'의 청중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은 대단하다. 그렇게 되면, 그가 작곡한 작품의 실제적인 수혜자는 돈을 지불하고 음악회를 방문한 청중이 된다. 이는 실내악만이 아닌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슈베르트에게도 새로운 방식이었고, 그와 동시에 작곡에서의 사회적 패러다임의 급진적인 전환을 의미했다." "과거에 친구와 가족을 위해 작곡했던 실내악곡이라든가 기숙학교 오케스트라나 하트비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했던 관현악 서곡과 초기 교향곡과는 달리, 1824년 초의 작품들은 확실히 대중을 겨냥한 것이었다."(110-1)


"슈베르트의 후기 현악 4중주는 분명 콘서트용 음악이고,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 기존의 가정 음악회와 사교 음악회를 위해 쓰인 곡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디베르티멘토와 세레나데 전통에 젖어 있는 여섯 악장짜리 8중주 F장조(D. 803)만이 여전히 사교 음악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다. 어쩌면 슈베르트가 유명한 베토벤 7중주(Op. 20)를 표본으로 삼아 이 곡을 작곡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8중주에는 슈베르트의 고유한 특성이 잘 담겨 있다. 《송어 5중주》(D. 667)와 《방랑자 환상곡》(D. 760) 같은 대규모 순환 형식의 작품에서 이미 시도해본 것이자 앞으로 등장할 실내악곡에서도 계속 이어질 특성으로, 예전에 작곡한 성악 선율을 변주를 위한 주제로 다시 활용하는 것이었다. 위의 두 작품도 잘 알려진 가곡 선율을 인용했기 때문에 '송어'니 '방랑자'니 하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좌절된 오페라 프로젝트에 쓰인 유용한 재료를 다른 분야에서 재활용하고 보존하려는 것이 슈베르트의 전략이었다."(113)


"그러나 작곡가가 이 시기에 중점을 둔 프로젝트는 '대교향곡'이었다. 《그레이트》 교향곡(D. 944)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의 교향악적 콘셉트를 최대한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많은 후세대 작곡가들이 베토벤의 대작 교향곡에 맞먹는 대안으로 생각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알게 된 이후(쿠펠비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1824년 5월 음악회에서 들었을 것이다) 어떤 위협이나 불안도 느끼지 않고 일관성 있게 독자적인 교향곡 모델을 추구했다. 베토벤 교향곡의 특징을 '극적'이라 한다면, 슈베르트 교향곡의 특성은 C장조 교향곡에서 드러난 것처럼 '서사적'이다. 슈베르트의 C장조 교향곡은 훗날 로베르트 슈만이 깊이 매료되어 '천상의 길이'라고 했을 만큼 그 발전과 전개의 폭이 엄청난데, 그로 인해 음악적 시간을 전혀 새롭게 조직하는 방식이 교향곡 장르에 도입되었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화성을 새롭게 형상화하는 기술인데, 슈베르트는 이 무렵에 그 기술을 스스로 터득했다."(121)


6 젊은 작곡가의 후기작


"슈베르트와 친구들은 메테르니히 시대를 냉혹한 시기라고 느꼈다. 그에 따라 《겨울 나그네》(D. 911)에 깃든 절망을 정치적으로 이해하며, 억압과 경직으로 점철된 절망적인 상태를 음악적으로 그려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슈베르트가 빌헬름 뮐러의 제스처를 하인리히 하이네에게서 재발견했다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앞뒤가 들어맞는 이야기다. 그는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이면서 (훗날의 슈만처럼) 거기에 내재한 순수한 아이러니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서 이른바 '세계고世界苦, Weltschmerz'라 지칭되는 존재론적 불안감에 대한 비극적인 풍자에 관심을 가졌다. 《겨울 나그네》 전반부를 당혹스러워하는 친구들에게 슈베르트는 〈몸서리쳐지는 노래 연작〉(『회고』, 161)이라고 소개했다." "비극적 세계관과 불안감에 에술적으로 접근했던 슈베르트는 이를 상쇄할 만한 더 많은 사교와 우정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말년의 그는 와인하우스 렝카이나 징거슈트라세에 있는 카페 보그너를 자주 드나들었다."(141-2)


"1928년 늦여름 슈베르트는 함께 살던 도심의 쇼버 집을 떠나 남쪽 변두리 비덴에 사는 형 페르디난트네로 거처를 옮겼다.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심의 뜨거운 여름을 잠시 피해 있을 생각이었으므로, 친필 악보 대부분은 쇼버 집에 두었다. 의사의 충고에 따라 거주지를 바꿨는데, 그것이 도리어 건강에 해가 되고 말았다. 역사의 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빈 변두리 신시가지의 열악한 위생 상태는 감염을 일으켰다. 나중의 연구에서는 이를 확실한 근거로 삼아 슈베르트의 병이 장티푸스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쇼버를 포함해서 많은 친구들은 감염이 무서워서 병상의 슈베르트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본인조차도 상황이 그렇게 나빠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1828년 11월 19일 심각한 고열과 함께 갑작스러운 죽음이 찾아왔다. 아마 몇 년 전에 받은 수은 치료로 이미 손상된 체력이 병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149-50)


"1828년 7월, 라이프치히의 프롭스트 출판사는 피아노 3중주(D. 929)를 누구에게 헌정하고 작품번호를 어떻게 매길 것이지 물어왔고, 슈베르트는 8월에 이에 대해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한 답신을 보냈다.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의 기념비를 세울 때 같이 새겨 넣어도 좋을 만큼 중요한 문구이다. 〈존경하는 귀하께! 3중주의 작품번호는 100번입니다. 이 판본이 한 치의 흠도 없었으면 하고, 그렇게 출판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이를 마음에 들어할 사람들에게만 헌정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수익을 낳는 헌사일 것입니다.〉 이제껏 출판된 작품번호 중에서 가장 높은 100에는 명백한 상징성이 깃들어 있다. 슈베르트는 외국에서 출판되는 첫 악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기 음악을 이해해줄 광범위한 대중을 위해 개인을 겨냥한 헌정을 자랑스럽게 포기했다. 그러나 피아노 3중주의 견본 악보가 11월 빈에 도착했을 때, 슈베르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161-2)


7 에필로그: 슈베르트 수용


"슈베르트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일차적으로 가곡 작곡가로 여겨졌다. 베토벤의 기악 유산이 작곡가 사후에 더욱 명성이 높아진 반면, 슈베르트의 것은 중심에서 자꾸 밀려났다. 그의 기악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일찍부터 간파한 이들은 연주자나 저널리스트, 학자들이 아니라 베토벤의 유산을 버겁게 여겼던 작곡가들이었다. 1839년에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에게서 C장조 교향곡 《그레이트》를 발견한 사람은 로베르트 슈만이었고,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와 프란츠 리스트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슈베르트 음악에 매료되었다. 슈베르트를 평생 동안 깊이 존경했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그의 작품을 일찍 접한 덕분에 베토벤의 그늘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경우도 그와 비슷했다." "슈베르트 음악의 편파적인 수용은 서서히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곡뿐만 아니라 피아노 음악, 실내악곡, 관현악곡이 제대로 대중에게 소개될 수 있었다."(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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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사회적 초상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음악의 글 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포노(PHONO)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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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모차르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는 1791년 35세의 나이로 죽었고 12월 6일 빈민 묘에 매장되었다. 이 요절을 불러온 급성질환이 무엇이었든 모차르트는 죽기 전 얼마 동안 종종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었다. 삶의 실패자라는 느낌이 서서히 엄습해왔다. 빚이 쌓여가고 가족은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에게 소중했던 빈에서의 성공은 불발에 그쳤다. 빈 상류 사회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의 급격한 진행은 아마 삶이 그에게 살 만한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 자신의 사회적 실존이 좌절되었다는 느낌 속에서, 수사학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의미가 공동화空洞化되었다는 느낌 속에서, 마음속 깊이 간절히 바랐던 소망의 성취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처절한 상실감 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청중의 호응 상실과 아내의 애정 약화는 그가 마지막 몇 년 동안 체험했던 의미 상실로서 상호의존적인 두 층을 이룬다."(9-12)


"다른 한편 모차르트는 육체적이나 정서적 관계에 있어서 사랑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지닌 사람이었다. 모차르트가 어릴 적부터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은 그의 삶의 비밀스러운 부분에 속한다. 그의 음악은 많은 부분 호감을 얻으려는 부단한 노력 그 자체였다. 즉 그의 음악은 어린 시절부터 소중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자신에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사람, 아마 여러 면에서 자기 자신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의 구애求愛였던 것이다. '비극'이란 단어는 피상적이고 너무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즉 그토록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썼던 그가 아직 젊은 나이인 생애의 마지막 무렵 어느 누구로부터도,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는 것에 대하여 모차르트 일생의 비극적 측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12-3)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으로 유명해진 이들을 이런저런 시대의 정점으로 서술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은 이런 정태적 시대 개념을 사용할 경우 기껏해야 과도기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즉, 그것들은 항상 몰락하는 구 계급의 규범과 부상하는 신흥 계급의 규범 사이에 전개되는 역동적인 갈등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궁정 지도층의 기득권이 여전히 대단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정치적으로 덜 위험한 문화 영역에서 표출되는 저항을 원천봉쇄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았던 시대에, 모차르트의 생애는 궁정 귀족이 지배하는 경제에 종속된 국외자로 속해 있었던 시민 집단의 상황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모차르트는 시민 계급 출신 국외자로서 궁정에 근무하면서 놀랄 만한 용기로 자신의 귀족 고용주와 위임자를 상대로 저항 운동을 벌였다 그는 개인적 품위와 음악 활동을 위해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싸움에서 패배하였다."(20-1)


"음악 분야에서 모차르트 세대에 이르기까지 음악가가 사회적으로 비중 있는 예술가로 인정받고 동시에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처지에 있으려면 궁정 귀족적 제도와 그 산하 기관의 관계망 안에 특정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오로지 궁정, 특히 화려하고 부유한 궁정에서 상근직을 얻어야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때 우리가 말하는 제후들의 궁정이란 원래 제후의 가정을 의미했다. 음악가들은 그런 큰 집안에서 과자 제조공이나 요리사 또는 시종들처럼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고 궁정의 위상 서열에서 보통 이들과 같은 위치를 차지했다. 조금 비하해서 표현하자면, 그들은 '궁정 아첨꾼들'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음악 천재가 자신들의 재능을 펼쳐야 하는 고정된 사회적 구조이자 틀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조건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시대 음악의 종류, 소위 '양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24-5)


"시민 계급 출신으로 궁정에서 성공한 대예술가의 특징은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두 개의 사회적 세계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일생과 작품 창작은 이러한 이중적 모순의 특징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궁정-귀족 집단에서 활동하면서 그들의 취미 전통을 수용했고 또 반대로 그 집단 역시 그에게서 궁정의 표준에 일치하는 행동을 기대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우리가 좀 조야한 범주로 그 시대의 '소시민'이라 일컫는 특수한 유형을 대표하고 있는데 바로 그 자신이 중간급의 궁정 고용인층에 속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소궁정의 변두리에서 자라났고 훗날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특별한 궁정적 세련미를 몸에 익힌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사교인(homme du monde), 즉 18세기의 의미에서 신사(gentleman)가 결코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생 동안 골수 시민의 면모를 지녔다."(30-2)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국가의 중앙집중화로 인해 음악가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자리는 거의 모두 수도 파리나 런던에 몰려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높은 직위의 음악가가 고용주인 제후들과 불화에 빠질 경우 도피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권력과 부, 명성에서 왕의 궁정에 비견되는, 그래서 왕의 노여움을 산 프랑스 음악가를 환대하며 망명처를 제공할 수 있는 경쟁 상대의 궁정들이 없었다. 이와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위상과 음악가들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는 무수한 궁정과 도시들이 있었다. 구독일 제국의 승계 지역에서 궁정 음악의 뛰어난 생산성을 이 결합태─많은 궁정과 그에 따른 무수한 일자리─와 연관 짓는다 해도 지나친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결합태는 당시 이탈리아와 독일에 비교적 많은 수의 직업 음악가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으며, 동시에 음악가라는 지위와 그들이 고용주에 대해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강화하는 요소였다."(43-4)


"물론 모차르트가 아무리 무모하다 할 만큼 대담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미래에 대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의 희망은 우리가 빈 상류 사회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곳을 향해 있었다. 그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집단 역시 궁정 귀족 가문들이었고, 모차르트는 그들 중 몇 명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선 그는 음악 수업을 통해, 그리고 귀부인과 신사들이 그를 가정으로 초대하거나 그를 위해 주선해주는 연주회를 통해 생활해나갈 작정이었다." "모차르트가 독자적 길을 선택했을 때 잘츠부르크 궁정의 한 동료는 거의 예언자적 형안으로 빈 궁정 사회의 호의란 믿을만한 게 못된다고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의 명성이 오래가지 않아. 몇 달만 지나면 빈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지.〉 그러나 모차르트는 이미 온 희망을 빈 청중의 호응에, 수도 상류 사회의 여론적 성공에 걸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생애 최고의 염원이었고 동시에 그의 비극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음은 분명하다."(49-53)


"모차르트의 개인적 모반은 언뜻 보기에 당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제국 내에서 '교양'이나 '문화' 개념들을 지향하는 인본주의 저서들 속에 반영되었던 반향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경우 자신이 한낱 아랫사람이며 기껏해야 고급 연예인 부류에 속할 뿐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게 해준 귀족들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보편적 원리들을 통해 정당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이런 악감정들을 근거 짓기 위해 보편적인 인류 이데올로기를 끌어대지 않는다. 모차르트가 베토벤과 다른 점은 바로 이런 이념에 대한 무관심인데 그 차이는 개인적 차이일 뿐 아니라 세대 차이라 할 수 있다. 자신도 귀족보다 못하지 않다는 느낌, 동급으로 대우해달라는 그의 요구는 주로 그의 음악, 즉 그의 작품과 업적에 근거를 둔다." "궁정 사회에 대한 모차르트의 관계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이중적이었는지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이해는 요원해진다."(54-5)


"우리는 '천재적 재능'의 성숙이 그 개인의 인간적 운명과는 별개로 완성되는 자동적이고 '내면적인' 과정이라는 생각과 드물지 않게 마주친다." "그러나 그런 미화─예술가 모차르트와 인간 모차르트를 분리하는 식의─는 '위대한' 인물들을 신격화하는 형태들 중 하나로서, 그 이면에는 평범한 사람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쪽을 인간 수준 이상으로 높임으로써 다른 쪽을 낮추는 것이다. 한 예술가의 업적에 대한 이해와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인간 사회 속에서의 그의 운명과 그 작품의 연관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깊어지고 강화될 수가 있다. 특출한 재능, 또는 모차르트 시대의 용어로 말한다면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특성을 뜻하는 '천재'는 그의 사회적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며, 이런 점에서 천재가 아닌 범인凡人들의 범상한 재능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다."(78-80)


"음악가였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아마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자력으로는 만족스럽게 되지 않는, 자기 기대에도 못 미치는 정도로밖에 이룰 수 없었던 사회적 상승을 아들을 통해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희망을 일찍이 가슴에 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 전심전력을 기울였고 그의 이런 헌신은 보통 수준을 넘어서서 과하다 할 정도였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들을 소유물로 점유하고 신동의 아버지로서 그때까지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삶을 살아간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그때까지 찾지 못했던 자기 삶의 의미를 아들을 통해 구하려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정당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자기 존재의 의미 실현이 문제될 때 인간은 무자비하고 가혹해질 수 있다. 20년 동안 아버지는 마치 조각가가 작품을 빚듯이 아들에게 공을 들이고 작업한다."(107-8)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아버지의 욕구는 아들이 어린 동안에는 아들의 욕와 특정한 방식으로 일치했다. 아들을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하겠다는 아버지의 희망은 그의 음악적 자극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아이의 강한 애정 욕구 속에서 반향을 얻는다." "모차르트가 스물두 살 되던 1778년, 그는 너무 성급하게 17세의 소녀, 훗날 자신의 처형이 되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애인을 열심히 교육시켜 이탈리아 공연에서 가수로 출세시키겠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계획한 파리 여행을 포기하려 했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계획이었고 프랑스의 수도에서 아들이 성공을 거두리라 기대했던 아버지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이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말도 안 되는 무모한 아들의 구상에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억제하고 가능한 한 설득하여 아들의 반항을 제어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편지로 서서히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는 아들에게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었다."(113-6)


제2부 모차르트의 반란: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1781년 5월 기분이 상해 있던 젊은 음악가 모차르트와 그 못지않게 화가 나 있던 고용주이자 공국의 지배자인 잘츠부르크 대주교 콜로레도 백작 사이의 긴장관계는 노골적인 갈등으로 증폭된다.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원만치 못했고 따라서 갈등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결별의 순간에는 모차르트 자신도 안정된 직장 없이 빈에서 살아갈 삶이 가져다줄 고난을 어느 정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황제가(또는 그와 비슷한 서열의 왕이) 정식 일자리로 자신과 같은 재능을 알아줄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그동안에는 어떻게든 연명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거라는, 자신을 믿는 사람 특유의 막연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25세의 나이로 그는 자신의 욕구와 재능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길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을 분명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온 세상의 반대에도, 심지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을 밀고 나갈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171, 186)


"모차르트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사소하고 세부적인 사항까지도─예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현실 감각은 제한되어 있었고 소망과 환상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었다. 그가 여행하면서 새 궁정에 도착했을 때 제후가 친절한 말을 건네거나 그의 작품들 중 하나에 박수갈채를 보내면, 안정되고 명예로운 일자리에 대한 자신의 꿈이 이제 곧 이루어지리라는 절대적 확신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말하다 보면 우리는 다른 측면에서 그가 얼마나 어른스러웠는지 쉽게 잊어버린다. 그 증거는 한 나라의 군주인 자신의 고용주에 대한 개인적 반란을 실행하면서 그가 보였던 단호함이며, 그 못지않게 중요한 증거는 훨씬 더 어려웠을 아버지에 대한 반란이다." "아버지와의 분리 자체는 그 선행 단계인 결합의 강도와 기간을 생각할 때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그의 교육에 비추어볼 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의 강한 성격을 증명해준다."(189-91)


"모차르트가 내린 결단은, 그 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그 정도의 위상을 가진 음악가로서는 극히 평범하지 않은 결정이다. 그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궁정 음악가가 다른 일자리 없이 현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당시 이 사회에서는 다른 대안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차르트는 빈을 방문하면서 평소 알고 지냈던 궁정 귀족들의 도움으로 밥벌이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이들이 일깨워주었던 희망이 잘츠부르크의 자리를 버리겠다는 결정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자신의 음악적 환상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했던 모차르트는 '자유 예술가'와 여러 면에서 닮았다. 그러나 사회의 지도자층이 예술이나 의복, 가구가 건축물에 관한 섬세한 미적 감각을 자기네 사회 집단의 자명한 특권으로 간주할 경우 사태는 전혀 달라진다. 이런 사회에서 기존의 규범을 넘어서서 혁신을 지향하는 '자유 예술가'의 성행은 그에게 극도의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다."(196-200)


"독일 징슈필의 전형인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의 기획에 참여했던 황제 요제프 2세는 완성된 작품이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빈 초연 후 작곡가에게 〈친애하는 모차르트,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라고 말했다." "옛 양식의 궁정 오페라에서는 성악가들이 지배자였다. 기악 음악은 그 밑에 종속되어 있는 처지였다. 기악곡은 성악가들의 반주를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에서 이를 변화시켰다. 인간의 음성과 악기의 음을 일종의 대화 속에 엮어놓으면서 그는 기쁨을 느꼈다. 이로써 모차르트는 특권을 누리던 성악가들의 지위를 추락시켰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음성만을 듣고 공감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관현악의 반주에는 낯설어하던 궁정 사회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에도 무언가 말할 것을 부여했지만 청중은 그것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너무 많은 음'을 들었을 뿐이다."(200-1)


제3부 계획: 표제어로 본 모차르트의 삶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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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 듣는 사람을 위한 가이드
최은규 지음 / 마티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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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교향곡의 탄생


"이탈리아어로 신포니아(sinfonia)라고 불리는 교향곡은 본래 매우 짧고 간단한 음악이었다. 게다가 정식으로 무대 위에서 연주되지도 않았다. 교향곡은 '오케스트라 피트'라 불리던 무대 앞쪽에 파인 작은 구덩이에서 오페라 공연의 막이 오르기 직전에 연주되곤 했다." "오페라의 서곡처럼 연주됐던 18세기의 교향곡은 일종의 기능음악이었다. 지금처럼 객석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악장이 조율을 지시하고 지휘자가 입장해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일으켜 세우는 드라마틱한 의식이 없었던 그 당시,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짧지만 재미있고 강렬한 서곡을 연주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 교향곡들은 '크고 웅장한 도입'과 '흥미로운 진행'을 갖추어야 했다. 오페라 공연이 시작되기 전 '소음 제거'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음악이니 만큼 기선을 제압할 만한 큰 소리로 시작했고, 언제나 청중의 귀를 사로잡을 만한 흥미로운 선율을 들려주었다. 그 점이 교향곡의 발전을 유도했으리라."(19-2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1714~88)는 함부르크 시절 모두 열 곡의 교향곡을 남겼다." "음악학자들은 바흐가 구사했던 독특한 교향곡 양식을 '감정 양식'(Empfindsamer Stil)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음악적 단편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바흐의 교향곡을 듣고 있노라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봉건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던 18세기에 가장 보수적이었던 베를린 궁정에서 음악가로 일했던 바흐가 음악이 일종의 '감정 언어'라는 19세기의 미학을 체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그는 가사 없는 기악곡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음악으로 증명했다. 교향곡의 역사 속에서 기악의 위력을 선포하며 이후 다가올 위대한 교향곡의 시대를 예견한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교향곡 양식을 계승한 작곡가는 아무도 없었다."(27-33)


2장 교향곡 실험: 하이든


"에스테르하지 궁정 시절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이 이끌었던 오케스트라의 일반적인 연주 인원은 열세 명에서 열여섯 명에 불과했다. 바이올린 각 세 명씩에 비올라와 첼로, 더블베이스는 각 한 명씩이고 여기에 목관악기 몇 대가 추가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1792년에 런던에서 잘로몬이 주최한 음악회에서 하이든의 교향곡을 처음 소개할 때 오케스트라 연주 인원은 40명이었고 1795년에는 오늘날 오케스트라 규모와 비슷하게 거의 60명에 육박했다. 작은 살롱에서 연주되는 소규모 실내악의 작은 소리에 익숙했던 당시 청중들이 60여 명의 음악가가 만들어내는 웅장한 교향곡을 듣고 얼마나 열광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하이든은 대(大)편성 오케스트라로 크고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 대중을 위한 교향곡의 화려한 효과를 추구하는 한편, 베토벤의 중기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동기발전수법과 소나타 형식의 변증법을 다루는 노련한 솜씨를 발휘하여 18세기 '교향곡의 절대군주'로 등극했다."(46-7)


3장 자유음악가: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91) 당대의 교향곡은 점차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 음악'으로 변모해갔으며 콘서트의 중심이 되는 음악으로 떠올랐다. 이는 18세기 후반의 음악가들이 직면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계몽주의가 득세하고 시민계급이 부상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공공연주회가 생겨나고 출판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는 오랜 세월 궁정악사로서 하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오던 음악가들이 귀족의 취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다소 애매했다. 모차르트의 선배 하이든은 생애의 대부분을 봉건적 하인으로 살았고 19세기의 베토벤은 독립 음악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면, 모차르트는 그 두 세계의 중간에 서 있었다. 모차르트 시대에는 음악가가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음악 시장이 넓지 않았기에 모차르트는 봉건질서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도, 그렇다고 자유음악가로 온전히 독립하지도 못했다."(98)


"모차르트가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 시점을 전후로 모차르트의 교향곡 형식에는 몇 가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모차르트가 1781년에 쓴 편지를 보면, 빈의 교향곡 연주회에 바이올린 주자만 40명에 비올라 주자 열 명, 첼로 여덟 명, 더블베이스 열 명을 포함해 총 80명의 연주자가 참여했다. 오늘날 교향악 연주회 규모에 결코 뒤지지 않은 대편성이다. 늘어난 현악기의 수에 맞추어 관악기도 점차 추가되었다. 오보에와 바순이 음향의 균형을 위해 더블 편성되기도 했다." "변화는 단지 편성뿐만이 아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로부터 탈출을 시도하기 시작한 1770년대 말과 1780년대 초에 작곡된 교향곡 악보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발견된다. 결정적인 변화는 교향곡의 저음부를 맡은 더블베이스와 바순, 첼로 파트가 각기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베이스 라인을 맡은 저음 악기가 모두 같은 선율을 연주하는 관행을 깨고 각 악기의 선율을 분리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전보다 더 풍부해졌다."(108)


4장 불멸의 아홉: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 그는 모차르트가 헛되이 추구했던 자유 음악가의 길을 완전하게 성취해냈다. 출판업자들은 그의 작품을 얻기 위해 달려들었고 귀족 후원자들은 그를 천재 음악가로 숭배했다. 베토벤은 더 이상 의뢰인의 취향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음악으로 자신의 취향을 청중에게 강요할 수 있었다. 그는 귀족들과 한 테이블에서 접시를 받았고, 〈귀족은 많지만 베토벤은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당당한 자유음악가였다. 재봉사나 재단사 같은 기술자나 다를 바 없었던 예술가는 베토벤 시대에 이르러서야 초월적인 상상력과 지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승격되고 존중되었다. 이는 '수공업 예술'에 불과했던 음악이 '예술가의 예술'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술가가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을 뜻했다. 즉, 예술가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로서 신성한 진리를 드러내는 존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131-2)


"말을 못 한다는 것이 큰 약점이었던 기악음악과 교향곡은 베토벤이 활동했던 19세기 초에 비로소 최고의 예술 형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당대의 낭만주의 문필가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성악 우대, 기악 천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서양 음악사의 대세가 기울기 시작한 18세기 말, 시인이자 소설가인 티크는 이렇게 말했다. 〈교향곡들은 수수께끼 같은 언어로 수수께끼 같은 것을 보여주며, 현실의 법칙에 의존하는 바가 전혀 없고, 이야기나 성격과 관련지을 필요가 없으며, 순수하게 시적 세계에 남아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프만은 '순수' 기악음악이 '낭만적'이며 이러한 낭만성이 듣는 이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체험하게 하므로 음악에서 '표현'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티크 역시 음악에서 묘사적인 요소를 제거해 음악을 형이상학적 위치에 올리려 했다. 하지만 정작 베토벤은 소나타와 교향곡을 '표현적인 예술'로 인식하고 소리로서 그 성격을 드러내고자 했다."(144-5)


5장 거인의 그림자: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베를리오즈


"19세기 음악가들의 시름은 날로 깊어만 갔다. 어떤 교향곡을 내놓든 그것은 필연적으로 베토벤 교향곡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는 몇 차례 교향곡 작곡을 시도했으나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1818년 5월에 슈베르트는 교향곡 D장조의 피아노 스케치를 25쪽가량 쓰다가 포기해버렸고, 1821년 8월부터 쓰기 시작한 e단조의 교향곡 작곡도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 교향곡의 아다지오 도입부는 인상적이지만 슈베르트는 그에 어울리는 악상을 전개시킬 수 없었다. 그러다가 1822년 가을에 b단조로 된 위대한 교향곡을 썼으나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슈베르트 교향곡 중 가장 유명한 〈미완성〉이다." "슈베르트는 생애 말년에 '그레이트'라는 부제가 붙은 C장조 교향곡으로 마침내 교향곡 분야에 위대한 걸작을 남기는 데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생전에 이 교향곡이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지 못한 채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193-6)


"슈베르트의 관현악이 계속되는 연주 거부와 초연 연기로 수난을 겪는 동안, 빈 청중은 오로지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만을 고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간혹 음악회에 작품을 올린 동시대 작곡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1809~47)다. 멘델스존은 당시 빈 음악계를 주름잡던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관현악 콘서트 프로그램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몇 안 되는 작곡가 중 하나였다."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개성과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음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던 멘델스존은 15세부터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다섯 곡의 교향곡에서 특유의 가볍고 청명한 관현악의 울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당대 모든 교향곡 작곡가가 그러했듯, 멘델스존 역시 교향곡의 거장 베토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의 찬란한 풍광을 담은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은 베토벤이 남긴 불멸의 아홉 곡 가운데 7번의 계보를 이었다고 평가된다."(209-13)


"1841년은 로베르트 슈만(1810~56)에게 가히 '교향곡의 해'라 할 만하다." "슈만은 1841년 1월 23일부터 26일까지 단 나흘 만에 교향곡 1번의 스케치를 마쳤고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되는 2월 20일에 세부 오케스트레이션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을 완료했다. 그리고 1841년 3월 31일, 교항곡 1번 〈봄〉은 멘델스존이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로써 슈만은 명실공히 베토벤 이후의 주요 교향곡 작곡가로서 자신을 당당히 증명해 보였다." "슈만의 '봄의 교향곡'은 '교향곡의 봄'을 불러왔다. 슈만은 1841년 '교향곡의 해' 이후 10여 년에 걸쳐 교향곡 2번과 괴테 『파우스트』의 장면음악, 네 대의 호른을 위한 연주회용 소품, 〈만프레드〉 서곡 등의 관현악 작품들을 꾸준히 내놓으며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851년까지 슈만이 완성하고 개정한 교향곡은 모두 네 편으로, 이는 그로부터 2년 후에 그를 찾아온 젊은 브람스가 작곡하게 될 교향곡의 수와 똑같다."(224-7)


"베를리오즈의 관현악이 내뿜는 독특한 음향은 평범한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베를리오즈는 상상 속에나 가능할 법한 음향의 판타지를 실제 오케스트라 소리로 옮기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물론 오케스트라의 전통적인 체계까지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 전통이란 기본 뼈대일 뿐이었다." "베를리오즈 이전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주로 고전적 양식에 따랐다. 즉, 주선율은 대개 현악 파트에 주고 관악기는 주선율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고 가끔 독주를 했다. 그러나 베를리오즈는 전통적인 악기론과 관현악법의 모든 규칙과 관습을 무시하고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는 하나의 선율을 조각내서 여러 파트에 분산시켜 입체적인 음향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같은 선율을 연주하고 있는 현과 관 파트의 리듬을 달리해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베를리오즈에게 화성을 채우는 일이나 주선율을 두드러지게 하는 일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236-47)


6장 누가 베토벤의 후계자인가: 리스트, 브람스


"베토벤의 후계자를 자처한 프란츠 리스트(1811~86)는 베토벤의 음악 사상이 〈첫째, 전통과 형식을 통해, 둘째, 그 사상 자체의 필요와 영감에 의해 형식과 양식을 확장하고 파괴하며 재창조하고 구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택한 길은 후자였다. 그리고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교향곡'과 '시'가 결합된 이 변종 관현악 장르는 '시적인 교향곡',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시', '시적인 기악곡' 등으로 풀이될 수 있다. 굳이 '시'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그가 이 새로운 장르에 문학과 미술 등의 자매예술을 끌어들여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표제음악'(program music)이다. 베토벤이 교향곡 6번 〈전원〉에서 시도했던 표제음악의 아이디어는 리스트에 이르러 형식의 틀마저 파괴하는 극단적 형태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리스트는 교향곡과 같이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 형식보다 단악장 형식이 표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251-2)


"하지만 실상 리스트의 음악을 자세히 보면 그가 고전적 형식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음악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아니다. 단지 4악장 구조의 정형화된 틀을 버렸을 뿐, 단악장으로 된 그의 교향시 〈전주곡〉을 유심히 살펴보면 소나타 형식을 근거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1주제군은 C장조, 노래하는 제2주제는 E장조로 되어 있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의 조성 구조를 그대로 빼닮았다. 주제 변형 방법 역시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의 주제 변형 방식과 대단히 유사하다. 비록 겉보기에 그가 베토벤 교향곡의 4악장 구조를 따르지 않았다 해도 그가 주장하는 '미래의 음악'은 '과거의 음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리스트가 청년 시절부터 베토벤 교향곡과 서곡들을 피아노로 편곡하며 베토벤 음악을 향한 열정을 보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베토벤을 숭배했고, 나름의 방식대로 베토벤 음악을 계승했을 뿐이다."(255)


"요하네스 브람스(1833~97)가 빈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는 베토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음악가들이 출몰했는데 그중에서도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신독일악파는 전통적인 형식의 교향곡은 끝났다고 주장했고, 각종 표제를 끌어들여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관현악곡들을 내놓으며 음악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일찍이 슈만으로부터 독일 음악계를 구원할 메시아로 지목된 브람스의 눈에는 베토벤이 이룩한 견고한 음악 전통을 흔들어놓는 신독일악파의 시도가 무척이나 위험하고 불경한 것으로 비쳐졌다. 더구나 그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적 음향과 신파조의 선율로 가득한 리스트의 교향시에 역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신독일악파의 활동이 전통적인 음악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 빈의 음악평론을 주도하고 있던 한슬리크 역시 전통적인 형식을 존중하고 어떠한 표제도 없이 음악 속에서만 의미를 추구하는 브람스의 음악을 이상적인 음악예술이라고 보았다."(275-80)


"이런 혼란 속에서 브람스가 택하고자 한 것은 '절대음악'의 길이었다. 즉, 어떤 표제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음을 재료로 하는 견고한 형식과 고전적 균형미를 갖춘 순수 기악곡으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정치적 격변(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을 겪고 주가가 폭락(1873년 경제 위기)하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빈 사람들이 음악에 열광했던 것은 어쩌면 오스트리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구질서가 재편되고 이민자가 늘어나는 데 위기를 느낀 빈 토박이들은 메테르니히 재상이 집권했던 옛 시절의 안락했던 생활을 그리워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저항과 보수주의가 설득력을 얻고 1848년 이전의 비더마이어 시대를 향한 향수가 일었다. 정치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럴수록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빈 고전주의 음악을 숭배하고 음악회 문화를 활성화해 정치적으로 무력해지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281-4)


7장 기념비적인 교향곡: 브루크너


"안톤 브루크너(1824-96)의 교향곡은 대단히 신비로우며 규모가 장대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 음악적인 표현이 애매모호하고 비논리적인 것 같기도 하다. 브람스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의 논리성을 모범으로 몰락해가는 교향곡 형식을 구원했다면, 브루크너는 베토벤의 9번을 모델로 교향곡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태초에 우주가 생성되듯 서서히 상승해가는 베토벤 9번 1악장 도입부의 신비로움은 브루크너의 거의 모든 교향곡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브루크너 교향곡 특유의 우주적인 소리는 듣는 이를 종교적 신비와 신을 향한 경외감으로 인도한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전무후무한 장엄한 사운드를 만들어냈지만 안타깝게도 발표될 때마다 비평가들의 호된 비판을 받는 수모를 겪었으며, 오늘날에도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에 비해서는 인기가 없는 편이다. 그러나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것은 작품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음악 정치'에 너무나 무지했기 때문이다."(311-2)


"브루크너는 위대한 작곡가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겸손했다. 브루크너의 주요 작품들은 모두 40대 이후에 작곡되었는데,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작곡에 임하기 전까지 작곡을 자제하고 작곡법을 갈고닦는 데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오토 키츨러와 수업하며 베를리오즈와 리스트 등 당대의 혁신적인 작곡가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새로운 음악세계에 눈뜬 브루크너는 같은 시기에 바그너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감전된 듯 바그너에게 빠져들었다." "브람스를 지지하는 음악평론가 한슬리크와 추종자들은 〈브람스의 음악이 동시대의 이상을 반영한다면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역겨운 바그너의 미학에 기대고 있다〉고 평가하며 브루크너를 가리켜 〈그로테스크하고, 엉성하고, 지나치게 야심이 많고, 음악적인 논리성이 결여되었고, 표현이 부자연스럽고, 노예처럼 바그너를 숭배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브루크너가 어떠한 외적 보상도 없이 대작 교향곡들을 꾸준히 작곡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다."(313-5)


8장 러시아와 동유럽의 교향곡: 러시아 5인조,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시벨리우스, 닐센


"동방 교회의 비잔틴 성가와 러시아의 민속 선율이 섞인 즈나메니(Znameny)는 러시아 고유의 단성음악으로 발전했다. 서구의 음악이 단성음악에서 다성음악으로 발전해갔던 것과 달리 즈나메니는 별다른 변화 없이 17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18세기 초에 이르러 러시아는 급격히 서구 문물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서구 문물의 수입을 계기로 러시아 궁정에 소개된 이탈리아 오페라는 이때부터 200년 가까이 러시아 음악을 지배했고, 오페라를 좋아했던 안나, 엘리자베스,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를 거치면서 이탈리아 오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외국 문물에 대한 충격과 동경을 느끼며 빠른 속도로 서양 문화에 흡수되어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갑작스러운 서구화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러시아의 음악가들 역시 갈등과 혼란에 휩싸였다. 그들은 서양의 세련된 음악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모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360-1)


"러시아 음악의 선구자는 1836년에 첫 번째 민족주의 오페라인 《황제를 위한 삶》을 작곡하여 명성을 얻은 미하일 글린카였다. 그는 러시아 민속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사용한 오페라를 작곡하여 러시아 음악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오늘날 글린카의 이름은 오페라 《로슬란과 류드밀라》의 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가 워낙 높았던 터라 글린카의 오페라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 글린카의 민족주의 음악정신은 '러시아 5인조'라 불리는 다섯 작곡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러시아 5인조' 작곡가는 밀라 발라키레프, 체자르 큐이, 알렉산드르 보로딘,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가리킨다. 이들은 서구의 음악에서 독립한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작곡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당시 러시아의 음악평론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로부터 '강력한 소수파'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만큼 이들의 음악은 가장 러시아다운 음악으로 여겨졌다."(361-2)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93)는 서유럽의 음악이론에 통달한 서구적인 작곡가로 평가받지만, '러시아 5인조'와 마찬가지로 일생을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바친 인물이다. 1868년에 러시아 민요 모음집을 출판하고, 러시아의 문학과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차이콥스키가 서구적인 음악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의 음악가로서의 행보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이 유행할 당시에 그들의 반대파가 세운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다는 점이나 잦은 여행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점 등이 그를 서구적인 작곡가로 평가 받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표현하는 러시아 민족주의는 러시아 5인조의 토속적이고 사실적인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차이콥스키는 서양식 훈련을 통해 학습한 낭만적이고 세련된 기법과 러시아의 민속적 요소를 결합하여 국제적이면서도 민족적인 음악을 작곡했던 음악가이다."(370)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와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를 배출한 나라 체코는 음악의 역사가 깊다. 1627년에 합스부르크 가에 의해 합병되기 전까지 독립된 국가였던 체코는 14세기에 프랑스 작곡가 기욤 드 마쇼의 음악을 받아들여 일찌감치 '아르스 노바'라 불리는 당대의 최신 음악을 즐길 정도로 앞서나갔다. 합스부르크 가와 합병한 후 체코 음악은 한동안 독일의 지방음악쯤으로 인식되었으나, 1803년에 보헤미아 음악가 그룹인 '소시에테'가 결성되고 1811년에 음악원이 설립되면서 체코의 민족음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체코의 민족음악과 유럽의 음악어법을 결합시킨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낸 음악가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이다. 스메타나가 주로 오페라와 교향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반면, 드보르자크는 오페라뿐만 아니라 교향곡과 실내악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그가 남긴 아홉 곡의 교향곡은 19세기 민족주의 교향곡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인정받고 있다."(399-400)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는 관현악의 전성시대였다. 독일어권에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화려한 교향시와 구스타프 말러의 대규모 교향곡이 탄생했고, 프랑스에선 클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의 색채적인 관현악이 발표됐으며, 이탈리아에선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가 옛 로마의 영광을 현란한 음향으로 재현한 로마 3부작을 내놓았다. 이 시기 핀란드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1865~1957)는 시대의 주류와는 상관없는 독자적인 관현악곡을 내놓아 주목받았다." "교향곡을 〈모티브들 간의 내적 연관성을 창조해내는 심오한 논리〉라 생각했던 시벨리우스는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나의 교향곡은 음악적 관점에서 인식되고 작곡된 음악입니다. 그것은 문학에 바탕을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문학적인 음악가가 아닙니다. 내게 음악은 말이 멈춘 곳에서 시작하지요. 풍경은 그림으로 표현되고 드라마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교향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어야 합니다.〉"(413-5)


"시벨리우스와 더불어 북유럽을 대표하는 교향곡 작곡가 카를 닐센(1865~1931)은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듯하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여섯 곡의 교향곡은 교향곡의 역사에 있어 매우 비중 있는 작품들로, 오케스트라의 다채로운 색채감과 활력 넘치는 리듬이 매력이다." "그가 23세에 작곡한 현악 5중주 곡은 1888년 4월 28일 초연 당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 음악회를 계기로 젊은 음악가 닐센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닐센이 독일을 중심으로 한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적이고 훌륭한 작품을 작곡해 북유럽 음악 특유의 개성을 지켰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당시 덴마크 음악계는 보수적인 성향의 작곡가 닐스 가데의 영향으로 매우 답답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한 닐센은 처음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으나, 전위음악의 물결이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429-30)


9장 세기 전환기의 교향곡: 말러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뛰어난 재능으로 당대 청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지휘자로서의 능력은 경이로웠다." "그러나 이 젊고 활동적인 음악가가 빈 오페라극장 및 필하모닉과 계약을 맺자 빈 음악계는 일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말러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유대인이란 사실이 암암리에 논란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말러가 빈 오페라극장과 계약할 당시 반(反)유대주의의 선봉이던 카를 뤼거가 빈의 시장이 되면서 말러의 빈 음악계 입성은 정치적 문제로 비화했다." "하지만 말러 시대의 빈 오페라극장에서 이루어진 공연은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리히터가 지휘할 당시 바그너 오페라 공연에서 생략되곤 했던 부분이 말러에 의해 모두 복원되었고, 바그너의 음악극은 음악과 드라마가 한데 어우러진 정교한 대작으로 거듭났다. 현대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오페라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수와 오케스트라의 호흡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439-40)


"말러는 평생에 걸쳐 여러 가지 음악 양식을 실험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 쉬지 않고 변화를 추구한 말러의 음악은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던 세기말 빈 사회를 비추는 듯하다. 당시 빈의 구질서와 새 질서의 충돌을 목도한 말러는 음악을 통해 이를 풍자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한 경탄과 구시대에 대한 향수를 냉소했다." "이 시절 '왈츠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만큼 빈 사람들의 욕구를 잘 충족시켜준 음악가도 드물다." "말러는 슈트라우스풍의 왈츠가 당대 사회에 나타난 아이러니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한 재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음악 속에서 왈츠는 비틀어지고 왜곡되며 빈의 거리와 시골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뒤섞인다. 어디선가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들려온다. 독일의 전통과 슬라브적인 요소, 빈의 개성을 지닌 음악 재료들이 말러의 작품 속에서 절묘하게 혼합된다. 그 음악은 마치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며 왈츠와 향락을 탐닉하는 빈 사람들을 조소하는 듯하다."(442-3)


"교향곡인지 가곡인지 모를 '변종' 형식의 작품들을 말러 자신은 '교향곡'이라고 불렀지만, 과연 그가 주장하듯 〈대지의 노래〉나 8번 〈천인 교향곡〉을 '교향곡'이라 할 수 있을까?" "문제의 발단은 말러가 선배 작곡가들의 교향곡을 하나의 대우주 속에 편입시킨 데 있을 것이다. 베토벤의 역동적인 동기발전수법과 〈합창〉에 나타난 '성악 교향곡' 양식, 슈베르트풍의 노래하는 선율, 슈만풍의 낭만적 열정, 베를리오즈 교향곡의 표제적 묘사, 브루크너 교향곡을 방불케 하는 우주적 음향, 차이콥스키 〈비창〉의 쓸쓸한 결말은 말러의 교향곡 속에 모두 하나로 녹아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왈츠와 푸가, 나팔 소리와 민요, 성악과 기악, 나무망치와 소 방울 소리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와 악기로 마치 우주의 음향과도 같은 다채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다. 어쩌면 말러의 교향곡은 '함께 울린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교향곡'(symphony)이라는 말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지 모른다."(444-5)


10장 20세기 교향곡: 쇼스타코비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75)의 주요 스승으로 꼽히는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는 러시아 고유의 음악어법과 서유럽풍의 음악을 절묘하게 결합해내 많은 이를 사로잡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이 된 후 음악원 학생이었던 쇼스타코비치를 지도했고,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격려에 힘입어 15세가 되던 1921년에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 Op.3을 완성해 숙련된 작곡기법을 보여주며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후 1923년에는 피아노과를, 1925년에는 작곡과를 졸업했다. 졸업 작품으로 제출한 교향곡 1번은 1926년에 초연되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전 생애에 걸쳐 교향곡 작곡에 힘을 쏟아, 무려 열다섯 곡의 교향곡을 남겼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이 교향곡 9번의 벽을 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교향곡 열다섯 곡은 대단한 숫자였다. 이 작품들을 통해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 교향곡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520)


"천재 음악가 쇼스타코비치의 고뇌는 그가 남긴 열다섯 곡의 교향곡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넘긴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은 교향곡 1번을 19세에 완성하며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후 소련의 권력자들이 문화·예술 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예술가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에 맞는 예술 작품만을 생산할 것을 요구했고, 쇼스타코비치도 이러한 검열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생 당의 방침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를 꺾어야 했고, 표면적으로는 당의 요구를 수용한 작품을 쓰는 듯 가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잘 들어보면 그 속에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뎌낸 한 예술가의 진실한 고백과 전쟁으로 먼저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깊은 슬픔을 발견하게 된다.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교향곡 대부분이 '묘비'라 말한 것은 그 때문이리라."(5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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