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말


"지금까지 스페인 내전은 자주 좌파와 우파의 충돌로 묘사돼 왔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좌우의 충돌 말고도 이 전쟁에서는 두 개의 갈등 축이 더 나타나는데, 하나는 국가의 중앙집권과 지역적 독립 간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와 개인의 자유 간의 갈등이다. 우파 국민 진영은 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결속력이 강한 세 가지 극단적 경향이 한데 결합했기 때문에 공화 진영에 비해 훨씬 통일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익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으며, 권위주의적이었다. 반면에 공화 정부는 공존이 불가능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중앙집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자들이 지역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어지럽게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 시기의 열정과 증오는 건강하고 안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비군사적 환경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시민권과도 거리가 먼 그야말로 '다른 세계'였다."(12-3)


# 국민 진영(nationalists) : 공화 정부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내전의 계기를 제공한 우파 연합 세력


제1부 제2공화정의 탄생


"세 가지 서로 다른 이 갈등─좌우 대립, 중앙과 지방의 대립, 권위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의 기원은 과거 무어인들에게서 빼앗긴 스페인 땅을 되찾으려는 재정복 운동이 만들어낸 스페인의 사회 구조와, 그 운동이 카스티야 정복자들의 태도를 형성해낸 방식까지 거슬러올라간다. 8세기에 서고트족 군벌들이 무어인들과 간헐적으로 벌이기 시작한 전쟁은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두 공동왕이 위풍당당하게 그라나다에 입성하면서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스페인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수백 년 동안 끌어온 십자군 운동의 정점이자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었다. 그런 생각은 1936년 (쿠데타를 주도한) 국민 진영 연합 세력에게도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가톨릭 공동왕 시대의 영광을 찬미하고, 자신들의 싸움이 제2의 재정복 운동이라고 말했으며, 자유주의자들, '적색분자들', 분리주의자들에게는 현대판 이교도(이슬람교도 무어인)의 역할을 부여했다."(26-7)


"1873년 2월, 국민투표를 거쳐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여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카를로스파 주력 부대는 바스크 지역의 완고한 가톨릭 신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무엇보다도 마드리드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분리주의적 야심에 자극받고 있었다." "장군들은 군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스페인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그런 생각은 아메리카 제국의 마지막 거점을 상실하고 나서 더욱 강해졌다. 장군들은 카스티야 중심의 중앙집권주의자들이었는데, 피레네 산맥 국경 지역에 자리 잡은 바스크와 카탈루냐가 독립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들은 연방제에도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자치적 주정부를 선언하자 주저하지 않고, 카를로스파와 바스크인들 못지않게 중앙집권적 통치에 반대하는 이 움직임을 박살내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제1공화국은 불과 몇 달 만에 붕괴되었다."(35-6)


# 아메리카 제국의 마지막 거점 : 미국과의 전쟁(1898)에서 패배하면서 상실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지방에서는 때로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서로 악의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수도에서 활동하는 그들의 지도자들은 사실상 신사협정을 맺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지지는 받지 못하지만 강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이 생길 때마다 보수주의자들이 그것을 실행하고 나서 물러나면 이제 그들과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된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해 집권했다. 부패를 고발하는 신망 높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설령 귀족이더라도 반역자로 몰리고 기피 인물로 낙인 찍혔다. 군대·왕정·교회의 삼위일체는 과거에는 제국을 만들어낸 주역이었지만 이제는 제국을 무너뜨리는 주역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항해서 부상(浮上)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지만 그것은 19세기 초의 자유주의와는 달리 지배 구조에 흡수되지 못했다. 결코 양립할 수 없었던 '영원한 스페인'과 새로이 떠오른 정치 운동은 충돌로 발전했고, 그것이 후에 국가를 갈가리 찢어놓는다."(37)


"일찍이 1830년대에 스페인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첫 시도가 있었고, 19세기 중엽이면 비정치적인 소규모 조합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후 새로운 정치 이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에 뿌리를 내렸다. 아나키즘적 혹은 절대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가 먼저 들어왔는데, 이 이념과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불화는 훗날 스페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초기에 아나키즘이 스페인 노동계급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나키즘은 자유롭게 연합하는 공동체들의 협력 구조를 주장했는데, 이것이 스페인 노동자들의 뿌리 깊은 상호부조 전통과 맞아떨어졌다. 또한 아나키즘이 내세우는 연방주의적 조직은 중앙집권적 경향에 적대적이었던 노동자들에게 호소력이 컸다. 많은 관찰자들은 아나키즘이 안달루시아 지방의 무토지 농민들에게 불어넣은 순진한 낙관주의를 지적하기도 했다."(41-2)


"19세기 마지막 4반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자들, 즉 '권위주의자들'은 더디게 성장했다. 1871년 말에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파리코뮌이 붕괴된 후 스페인에 입국했고, 그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마드리드에 스페인 사회주의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그들이 중앙집권적 국가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농촌 특성이 강했던 스페인 사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세력 확장이 더뎠던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마르크스가 농민들은 물론, 그 자신이 '농민적 삶의 어리석음'이라고 한 것에 경멸적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 자체의 산물인 산업 프롤레타리아만이 타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산업의 주요 부문은 이미 아나키즘의 아성이 되어버린 카탈루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국 카스티야 사회주의자들은 산업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빌바오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43-4)


# 빌바오 : 바스크 지역의 대표적 산업 도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수출 붐이 수그러들자 노동자들은 점점 호전적으로 변해 갔다. 또한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은 좌파 세력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유럽의 양쪽 끝(러시아와 스페인)이 혁명이 불길에 휩싸일 것이라는 얘기들이 오갔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안달루시아에서는 폭동이, 바르셀로나에서는 대규모 노동쟁의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시기는 '볼셰비즘의 3년'으로 알려졌다." "전국노동연합이 과격해지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이끌던 노동자총동맹의 온건 노선과 자주 충돌했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노동계급에 대한 반역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개량주의자 정도로 여겼다." "한편 농촌에서는 안달루시아 지역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결국은 실패로 끝날 불운한 농민 폭동을 이어 갔다." "마드리드의 정치가들조차 모종의 토지 개혁 프로그램이 시급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문제와 진지하게 씨름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한 정부가 거의 없었다."(49-50)


"1931년 4월 14일 아침 6시에 에이바르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이 소식은 즉각 스페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로마노네스 백작은 공화주의자들을 이끌던 알칼라 사모라와 회동했는데, 사모라는 왕과 그의 가족이 그날 오후에 스페인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왕은 군대가 지켜줄 것이라는 한 장관의 조언을 거부하고, 배를 타기 위해 마드리드를 출발해 카르타헤나 항으로 갔다. 왕의 출발은 아무런 소동도 일으키지 않았다. 미겔 마우라는 〈왕정은 그것이 붕괴되기 오래 전에 이미 스페인 사람들의 마음에서 증발해버리고 없었다〉라고 썼다. 같은 날, 코르도바 출신의 가톨릭 신자이자 지주였던 알칼라 사모라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위원회가 공화국 임시정부로 전환되었다. 이어 알칼라 사모라가 국가 수반이자 총리로 취임했다. 공화국 지도자들은 농업 개혁, 비타협적인 군부 문제,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자치, 그리고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 스페인 사회의 뿌리 깊은 난제들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58-9)


"1934년 10월에 발생한 아스투리아스 혁명은 좌파의 지각 있는 사람들마저도 엄청난 재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급진 투사들, 특히 라르고 카바예로 같은 사람에게 반란은 마치 마약에 취한 것과 같은 혁명의 열정을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반면에 우파에게 반란은 칼보 소텔로가 주장한 것처럼 오직 국가의 중추인 군대만이 혁명적 상황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보루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반란은 국가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스페인 민주주의에 치명타였다. 보수 세력에게 이 반란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창출하려는 또 다른 시도를 막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신념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라르고 카바예로는 〈나는 계급 투쟁 없는 공화국을 원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한 계급이 사라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아스투리아스로 인해 보수 세력은 이제 러시아 혁명 이후의 대공포와 부르주아를 절멸하겠다는 레닌의 결심을 굳이 상기할 필요가 없었다."(77-8)


# 아스투리아스 혁명 : 1934년 10월,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무장 노동자들이 코뮌을 설립했지만 불과 2주 만에 치안유지군에게 진압되어 1천 명 가량이 희생되고 수천 명이 해고 및 구속된 사건


"1936년 1월 7일에 선거 일정이 공표되었고, 선거 운동은 곧바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전에 치렀던 선거 결과를 보면 정치적으로 연합한 쪽이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이렇게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연합체를 구성하도록 자극하는 분위기는 중간 지대를 공동화하고 사람들을 좌우로 양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좌파의 혁명적 폭동과 군대와 치안대의 잔인한 진압은 타협의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감정의 골이 너무나 깊어서 민주주의가 숨쉴 만한 여지가 없었다. 양쪽 모두 종말론적 언어로 상대편을 공격했고, 지지자들의 기대를 정치적 결과가 아니라 폭력적 결과 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만일 이번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하면 우리는 곧장 내전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뒤질새라 우파도 비슷한 태도로 맞섰다. 우파는 선거에서 좌파가 승리하면 폭력 혁명과,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미 약속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81-2)


"각 주 선거위원회에서 2월 20일 선거 결과를 발표했는데, 인민전선이 15만 표 차이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민전선은 총 투표의 2퍼센트도 안 되는 근소한 차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에서는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좌파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들이 혁명적 변화를 이끌 압도적인 통치 위임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우파는 군중들이 사면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갇혀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러 감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휩싸였는데,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총참모부 부장 프랑코 장군은 치안대 사령관 포사스 장군에게 밀사를 보내 스페인의 질서와 복지 수호를 위해 단행하려는 결정에 동참해 달라고 권유했다. 프랑코는 또한 포르텔라 바야다레스에게도 사람을 보내 인민전선에 권력을 넘겨주지 말라고 설득하면서 군대의 지지를 약속했다. 그는 치안대와 돌격대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87-8)


"우파 중에서 격렬한 분란을 일으킴으로써 쿠데타가 일어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단체는 팔랑헤당이었다. 팔랑헤당은 1936년 봄, 국민행동 청년당원 1만 5천 명이 합류하면서 당원 수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팔랑헤주의는 매우 보수적인 성격이었다는 점에서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달랐다. 무솔리니는 단지 선전 효과를 노리고 연설할 때 로마의 상징과 제국의 형상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팔랑헤당은 근대적이고 혁명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근본은 반동적이었다. 그들에게 교회는 스페인다움(Hispanidad)의 핵심이었다. 새로운 국가는 '전통적 가톨릭의 정신에서 영감을 끌어낼' 것이라고 했다. 팔랑헤당의 상징은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상징물인 권위주의 국가의 멍에와, 이단을 쓸어버리기 위한 절멸의 화살이었다. 그들은 상징물만 차용한 것이 아니라 카스티야식 정신도 부활시키려고 했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팔랑헤 전사는 '반은 수도승, 반은 병사'인 사람이었다."(91-2)


제2부 두 스페인의 전쟁


"마드리드의 공화 정부는 7월 17일 저녁에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발생한) 반란 사실을 알았다. 다음날 아침 정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이번 사태가 보호령의 일부 지역에 국한한 것임을 밝혀 둔다. 그외 본토에서는 어떤 지역도, 결단코 어떤 지역도, 이 터무니없는 모험에 가담하지 않았다.〉 7월 18일 오후 3시 카사레스 키로가는 정부를 지원하겠다는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모두에게 평소와 다름 없이 행동하고 '국가의 군사력을 신뢰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이 공화 정부 편에 서서 안달루시아 중부 지역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케이포 데 야노는 이미 그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카사레스 키로가는 〈정부의 신속한 예방 조치로 반란은 이미 소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누구라도 내 승인 없이 무기를 내주는 자는 총살에 처할 것이다〉라며 다시 한 번 노동자들의 무장을 거부했다."(119-20)


# 7월 19일, 노동자 조직에게 무기 배포 시작


"해군은 군사 반란 계획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해군 소속 선박들은 아프리카 주둔 육군을 이베리아 반도 본토로 이송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다. 병력 수송은 카나리아 제도 인근에서 함대 기동 훈련을 수행할 때 이미 프랑코 장군과 해군 고위 장교들이 합의한 일이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곧바로 전함들이 전속력으로 스페인령 모로코로 달려오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파죽지세 같은 점령 계획은 성급한 판단으로 드러났다. 육군 장교들보다 더 귀족적이었던 해군 장교들은 압도적 다수가 반란을 지지했지만, 해군 병사들은 7월 13일 엘페롤에서 비밀 회합을 열고 만일 장교들이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이미 태도를 정리해 두었다." "마드리드의 전신 기사 벤하민 발보아는 해군부의 명령을 받고 즉각 승선 중인 모든 무전병들과 연락하여 사태의 추이를 잘 지켜보고 '파시스트 깡패 집단인 장교들의 행동'을 잘 감시하라고 지시했다."(143-4)


"영국 해군 장교들은 지브롤터에서 사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하급 수병들이 한 행동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영국 해군 장교들이 마음속으로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그 점은 여러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당장은 대부분의 전함들에서 반란 세력이 제압되자 반란 가담자 다수는 아프리카 군대가 본토로 건너올 수 없으므로 자신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몰라 장군도 계획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달리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위기가 국민 진영의 재난으로 끝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병력을 공중 수송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병력의 공수(空輸)는 얼마 되지 않은 스페인 공군의 브레게트기, 니에우포르트기, 이탈리아의 사보이아기들이 반란 시작과 함께 거의 즉각적으로 시작했지만 히틀러가 보낸 융커52기들이 도착하고 나서부터 본격화됐다."(146-7)


"8월 초에 이르자 각각의 진영이 분명해지고 전선이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반란 세력은 서쪽 갈리시아와 레온에서부터 동쪽 나바라와 북부 아라곤까지 좌우로 넓게 퍼져 있는 띠 모양의 땅을 차지했다. 이 띠 모양의 지역이 반란 세력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던 아스투리아스, 산탄데르, 바스크 등의 북부 해안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남쪽과 서쪽에서는 반란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 안달루시아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이때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페인이 폭력적 형태로 권력을 다투는 쿠데타가 아니라 진짜 내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공화 정부 측이 초기에 즉각적으로 쿠데타를 제압하는 데 실패한 것은 이제 그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싸움, 즉 이기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자질이 필요한 그런 싸움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무렵 국민 진영은 병영 국가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공화 진영에서는 혁명 과정이 시작되었다."(156-7)


"지역적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공화 진영을 통틀어 최악의 폭력이 자행된 것은 개전 초기 처음 며칠 동안이었다." "공화 진영이 지배한 지역에서 발생한 폭력의 주요 특징은 반란 초기 며칠 동안 폭력 행위에 거의 아무런 통제가 없었다는 점, 살인 행위가 집중적이고 신속했다는 점, 좌파나 공화 정부 지도부가 폭력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9월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자·공화주의자·공산주의자로 구성된 라르고 카바예로의 '통합 정부'가 법과 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인민 법정을 설치했는데, 그것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개선책이었다. 그리고 시위원회를 구성하여 순찰대를 대체하고 순찰대원들은 전선으로 보냈다. 이런 조치로 약탈과 살인 건수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내전 기간 동안 공화 정부 지역에서 적색 테러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3만 8천여 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 약 절반이 마드리드(8815명)와 카탈루냐(8352명)에서 1936년 여름과 가을에 발생했다."(168-70)


"'백색' 스페인에서 나타난 살인 양상은 '적색' 스페인에서 나타난 것과 상당히 달랐다. 반란 세력의 전략 핵심은 '정화(limpieza)' 개념이었는데, 그 과정은 어떤 한 지역이 그들의 지배에 들어가자마자 시작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의 장소는 바다호스였다. 국민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야구에 중령의 군대가 저지른 대학살과 뒤이은 탄압은 전쟁 초기에 양측이 앞다투어 선전전에 이용했다. 국민 진영은 전투에서 입은 인명 손실과 그에 앞서 좌파가 살해한 우파 인사의 수를 크게 부풀려 발표했다. 그러나 사실 야구에 측의 인명 피해는 사망자 44명, 부상자 141명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국민군 측이 좌파에게 살해되었다고 주장한 인원은 243명을 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바다호스 주에서 국민군이 살해한 사람은 적게는 6천 명, 많게는 1만 2천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군 부대들은 마드리드로 진격하면서 같은 방식으로 마을들을 장악하고 초토화했다."(171-7)


"장군들의 반란은 공화국 붕괴의 주요 원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위기에 직면한 중앙 정부의 지리멸렬한 대응을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중도 좌파 정부는 한편으로는 우파의 반란에 맞서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의 혁명에 대처해야 했으므로 그러한 마비 상태는 아마도 불가피했을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각자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의 사회적 공존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각각의 정치 철학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것은 다른 정치 집단들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협력하자는 의미였다.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극히 단순한 견해였다. 노동자 관리 혹은 자율 경영의 개념은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저주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두 집단은 후에 아나키스트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처음에는 아나키스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원칙 가운데 많은 것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나중에는 권력의 자리에서 그들을 쫓아냄으로써 거둔 승리였다."(195-202)


"제대로 편제를 갖춘 정규 군대가 거의 없었던 공화 진영에서 장군들의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노동자 의용군이었다. 그런데도 아나키스트, 통합노동자당, 라르고 카바예로를 포함한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의용군을 필수 요소로 보기보다는 단지 부가적 장점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마드리드 공화 정부, 정규군 장교들, 중앙집권적 정치가들, 공산주의자들은 국민 진영의 공세를 막아낼 유일한 방법으로 전통적 군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는 자신들이 중앙집권적 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규율, 위계, 조직화'를 주장했다.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군대화' 계획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주장은 '반(反)혁명적'일 뿐더러 정부가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해 통제권을 회복하려고 내놓은 술책으로 보았다. 아나키스트들은 더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에게 정규 군대는 국가의 최악의 측면이었다."(231-2)


제3부 내전의 국제화


"반란 세력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정부와 노동조합들이 반란을 신속히 제압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스페인은 피비린내 나는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오랜 싸움에서 무기의 필요성은 양측 모두를 외국에서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였다. 이것이 스페인 내전이 국제전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첫 번째 중요한 행보였다. 중립을 선언한 가장 중요한 세 나라 가운데 영국의 역할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고립주의를 견지해 왔던 미국은 국제 문제에 개입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스페인의 분쟁이 더 넓은 범위로 확산될까 우려한 영국 외무부는 프랑스 정부에게는 프랑스가 스페인 공화 정부를 돕는 것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국민군을 돕도록 자극할 뿐이라고 경고했다."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외국군의 간섭이 없다면 프랑코 측과 공화 진영, 양쪽의 군사력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므로 어느 쪽도 쉽게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했다."(243-6)


"유화 정책이 네빌 체임벌린의 발명품은 아니었다. 유화 정책의 뿌리는 볼셰비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926년의 총파업과 경기 침체는 영국 보수 정치가들에게 혁명의 가능성을 매우 현실적인 걱정거리로 만들어놓았다. 그 결과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분쇄한 독일과 이탈리아 체제에 호오(好惡)가 뒤섞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많은 유권자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로 전쟁을 혐오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 강요한 굴욕에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공화 정부에 무기 판매를 거부한 것은 사실 공산주의자들의 힘을 강화하고 비공산주의 중도파나 좌파의 힘을 약화했을 뿐이다. 1936년 여름에 에스파냐 공산당이 공화주의 연합 세력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도록 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소련의 군사적 도움이라는 효과적인 수단과 권위였다."(247-50)


"무솔리니는 지중해에 파시스트 국가가 하나 더 들어서기를 기대했고, 더구나 자신에게 빚을 진 국가가 들어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의 야심은 영국에 맞먹는 해군력을 보유하고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를 능가하는 힘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동맹국' 스페인은 지브롤터를 장악하여 해협을 통제하고, 발레아레스 제도에 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략적으로 프랑코를 지원했다. 스페인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 프랑스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고, 또한 수에즈 운하로 가는 영국의 해상 루트에도 중대한 위협이 될 터였다. 또한 대서양 해안에 U보트 기지를 건설할 수도 있다는 즐거운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스페인 내전은 히틀러의 대 중유럽 전략이 유럽 각국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해주고, 반면에 독일의 인적 자원을 훈련하고 장비와 전술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251-5)


"1920년대 이래로 스페인에서 소련은 대개는 문화적 선전의 형태로 꾸준히 세를 넓히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스페인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서 했던 일과 마찬가지로 침투해서 때를 기다리는 것, 그 이상은 하지 않고 있었다. 1936년 7월 18일 쿠데타 소식을 듣고 나서 코민테른은 주요 대리인들, 그중에서도 1932년 이후 에스파냐 공산당의 감독관으로 활동해 오던 아르헨티나인 비토리오 코도비야로부터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한편 소련 당국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9월에 이르러서야 소비에트 체제는 스페인 내전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뿐더러 국내와 국제적 지지 모두를 얻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모스크바의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스페인 공화 정부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한편으로 코민테른은 국제적 캠페인을 시작했다. 소련 시민들은 공화 진영 스페인에서 펼칠 인도주의 활동을 위해 2억 7400만 루블(약 225억 원)을 모금했다."(276-7)


제4부 대리인들의 세계 대전


"역사는 결코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1936년 12월에 일련의 전투가,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유형의 전투들이 마드리드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과 같은 방식의 구식 전투에서 공화 진영 의용군이 패한 것은 1937년 2월 단기전으로 치렀던 말라가 전투가 마지막이었다. 총통 프랑코는 상상력이 빈곤한 전략에 발목이 잡혔다. 독일 외교관들이 냉소적으로 '투우 경기'라고 부른 것이 10월에 불러일으킨 엄청난 기대와, 11월 마드리드 점령 실패로 프랑코는 집착과도 같은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공화군 지원군이 도착하자 전선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양측 모두 힘이 고갈된 상태였고, 1월 중순 양측 군대 모두 방어 진지에 꼼짝없이 들어앉은 상태가 되면서 전투가 중단되었다. 국민군은 엘에스코리알도로(라코루냐 가는 길)를 따라 마드리드 코앞(아라바카)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그러나 공화군은 서부 전선에서 국민군의 마드리드 포위를 이겨내는 데 성공했다."(339-44)


"만약 공화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예정되었던 전투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말라가 전투였다. 공화군 점령지의 지형적 특성과 길게 늘어진 형태 때문에 국민군은 언제 어디서든 원하기만 하면 적진(敵陣)을 차단할 수 있었다. 당시 말라가는 전쟁이라는 현실과 단절된 채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방어 태세가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공화군 병력은 의용군 1만 2천 명에 불과했고, 3분의 1이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총을 가진 병사들도 대부분 실탄이 몇 발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무엇보다도 공화 정부의 고의적인 태만 때문이었는데, 공화 정부는 이 지역의 변함없는 독립 의지를 극도로 싫어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말라가에는 탄약 한 발도 주지 마라〉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공화군 사령관 비얄바 대령이 의도적으로 도시 방어를 방해했다고 믿을 만한 강력한 근거가 있는데, 공화군이 전쟁에서 패한 뒤에 비얄바는 국민군에게 예외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357-8)


"의용군 부대를 인민군으로 전환하는 일은 '군대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나키스트, 통합노동자당, 좌파 사회주의자 등은 원칙의 토대 위에서 의용군 체제를 고수하려 했고, 의용군 체제로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또한 상황이 전혀 다른데도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 스페인의 경우를 억지로 비교하려고 했다. '전쟁 기계'는 오직 더 나은 전쟁 기계나 비정규전의 사보타주 전술로만 격퇴할 수 있는데 의용군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즉흥적 속성은 혁명 상황이라면 모를까 군사적 덕목은 아니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잘 조직된 적에 대항하는 군대로서도 그들은 시대에 많이 뒤떨어졌다." "아나키스트들과 통합노동자당은 비록 전통적 전쟁에서 '통일된 지휘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지만 공산주의자들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367-8)


"이탈리아인들은 북부 지역에서 바스크의 가톨릭 교도들을 공격하는 것이 교황을 자극하지나 않을까 걱정했고 바스크의 주도인 빌바오를 폭격하는 데 머뭇거렸다. 추정컨대 아마도 이에 따른 리히트호펜의 좌절감이 콘도르 군단의 작전을 통틀어 가장 악명 높았던 게르니카 폭격을 실행하는 데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4월 25일 하루 동안 많은 피난민들이 지친 모습으로 마르키나를 떠나 게르니카로 들어왔다. 당시 게르니카는 전선에서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4월 26일, 부르고스에서 출발한 3개 비행대대가 두 시간 반에 걸쳐서 20분 간격으로 게르니카 시에 매우 체계적으로 융단 폭격을 가했다." "콘도르 군단의 4월 27일 치 전투 일지는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리히트호펜이 말했듯이 도로 봉쇄가 공습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외 나머지 모든 요소는 공습의 주요 목적이 공중 폭격의 효과를 실험해보려는 것이었음을 말해준다."(411-5)


"바스크에서 국민군이 비교적 신속하게 승리를 거둔 데는 무엇보다도 콘도르 군단의 기여가 컸다. 나치 정부는 지체 없이 국민 진영에 그 대가를 청구했다. 독일 기술자들은 (독일 공군이 치른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이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공장과 제강소로 달려가 시설물을 접수했다. 그에 비해 프랑코는 비록 북쪽 바스크 지역을 함락시킴으로써 결국에는 북쪽에 주둔 중인 군대가 중부와 남부로 이동할 수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익을 보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했다. 만일 유럽 내부의 갈등이 먼저 폭발하지만 않는다면, 바스크 점령은 공군과 포병 지원에서 점증하는 우위와 함께 프랑코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안겨줄 중요한 승리였다. 이제 프랑코에게 전쟁은 계속적인 공격에 다름 아닌 것이 되었고, 적군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는 일만 남았다. 프랑코는 바스크 지역 전투를 통해 자신의 동맹군들이 적의 동맹군들보다 훨씬 우수한 타격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했다."(423)


"국민 진영은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정서에 호소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최대한 이용했다." "국민 진영은 자신들이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맞서 기독교, 질서, 서구 문명의 대의를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공화 정부를 열정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은 좌파가 부르주아를 절멸하려고 했던 위협과 1936년 봄에 전개된 혁명 직전의 상황이 우파로 하여금 자위적 차원에서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러시아 내전이 불러일으킨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이어 출현한 억압적인 소련 체제는 우파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되었다." "양측 모두 역사관이 매우 선택적이고 조직적이었다. 후에 공화 진영 지지자들은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의 출발점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프랑코주의자들은 스페인 내전이 서구 문명과 공산주의가 벌이는 세 번째 세계 전쟁의 서막이었으며 자신들이 나치와 파시스트들로부터 받은 도움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425-7)


제5부 내전 속 내전


"국민군 내에서 가장 중요한 부대인 아프리카 군대 사령관이었던 프랑코는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권력의 정점을 향해 오를 수 있었다. 그에게 도전할 만한 경쟁자는 없었으며 국민 운동의 성격 자체가 단일하고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요구했다. 그 결과 프랑코는 시의적절한 두 번의 단계(1936년 9월과 1937년 4월)를 통해 최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는 첫 번째 단계에서는 법률상의 지도자가 되었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모든 잠재적 반대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사실상 독재자가 되었다. 팔랑헤당, 카를로스파, 전임 알폰소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인 '에스파냐혁신', 자치우익연합의 '국민행동' 같은 우파 집단들이 프랑코의 명령으로 하나의 당으로 통합되고, 그 당은 프랑코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강제 합병에서 카를로스파는 가장 큰 패배자였다. 이제 프랑코는 장기간의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향후 스페인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구축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454-6)


"권력 투쟁은 1936년 겨울과 1937년 봄 기간 동안 공화 정부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투쟁의 승자인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프랑코에게 맞먹는 권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매우 제한된 기반에서 출발한 데다가 권력을 집중화하려는 그들의 정책은 공화 진영 내 주요 동맹 세력이었던 아나키스트들의 완강한 저항에 맞닥뜨렸다. 동시에 발렌시아 정부는 독립적 성격을 띤 지역, 특히 카탈루냐와 아라곤 지역에서 확실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탈린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외교 정책에 장애가 되는 것을 회피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특히 스탈린에게는 한편으로는 나치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영국, 프랑스와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스탈린은 〈스페인의 적들이 스페인 공화 정부를 '공산주의 공화국'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회 공화국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56-7)


"공화 정부의 통치 시스템은 차츰 네그린과 공산주의자들이 후에 '통제된 민주주의'라고 부른 것으로 변해갔다." "모스크바의 여론 조작용 공개 재판과, 1937년 스페인의 분위기로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통합노동자당에게 뒤집어씌운 파시스트 집단이라는 혐의를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었는지, 또한 통합노동자당 지도자 안드레스 닌과 그의 추종자들이 납치되어 고문을 받고 나서 '실종되었는데' 정부는 왜 스탈린주의자들이 수행한 '더러운 전쟁'을 중단하기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훈련된 기계'는 민중의 지지를 인수하기는 했으나 민중의 에너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지켜야 할 이상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나키스트 이론가 아바드 데 산티얀은 〈네그린이 공산주의자 무리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프랑코가 이탈리아인들과 독일인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우리에게 그 결과는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482-5)


"7월 6일, 공화 정부는 마드리드 서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인 브루네테를 공격했다. 이 작전은 국민군 전선의 취약 지점을 돌파하여 마드리드 외곽까지 뻗쳐 있는 돌출부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루네테 공세는 북부 지역에서 국민군의 압박을 줄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패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민군의 월등한 공군력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브루네테 공세가 전체적으로 볼 때 자신들의 승리라고 세계에 선언했다." "자주 자기편 병사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대한 집착은 국제여단 내부에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제13국제여단 소속 미국인, 영국인, 폴란드인 병사들이 일으킨 소규모 소요들은 모스크바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기록되었다." "병사들은 엄청난 희생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특히 그 죽음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개죽음이 아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분노가 더욱 컸다."(505-7)


"1937년 가을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군이 개선되었다며 대대적인 선전 공세를 펼쳤다. 부대 수준에서 보면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휘관이나 참모 중에 군사적 능력이나 전술적 감각을 입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병참 조직은 여전히 부패하고 비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도 후방에서 벌어지는 사건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의 제 식구 챙기기와 전선에서 퍼붓는 전향 공세는 도가 지나쳐 정규군 장교 중에서 과거에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사람들까지도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프리에토는 공산당원이 아닌 부상병들이 자주 치료를 거부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공산당 입당을 거부한 대대장들에게는 무기나 전투용 식량이 제공되지 않는가 하면 심지어는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의 급료가 거부되기도 했다. 반면 입당 요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진급도 빨리 되고, 공문서나 신문기사 등에서도 그들의 평판이 과장되어 소개되었다."(541)


제6부 파국으로 가는 길


"1937년 말이면 국민군의 군사적 우위가 명백해졌다. 그 무렵 그들이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면 북부 지역 점령은 승리로 가는 과정에서 핵심 중간 단계였다. 북부 지역 점령을 계기로 국민군은 개전 이후 처음으로 병력 수에서 공화군과 균형을 이루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 균형은 국민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었다. 칸타브리아 해안 지역 정복은 그곳에 묶여 있던 병력을 중부 지역으로 내려보낼 수 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국민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업상의 포상도 얻게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스크 지역의 무기 공장, 빌바오 지역의 중공업 지대, 북부 광산 지대의 석탄과 철광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공화군 참모들과 소련 군사 고문들은 정규군의 방어를 계속 유지하면서 적 후방에 비전통적인 게릴라 공격을 시도하여 양동작전을 펼치는 것과, 전선에서는 적의 취약 지점 몇 곳을 동시다발로 급습하는 것만이 공화군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549-50)


"1937년 12월 중순, 공화군의 공세로 시작된 테루엘 전투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참혹한 시가전이 벌어진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국민군 사상자는 4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4분의 1은 동상이 원인이었다. 공화군 측 손실은 더 심해 약 6만 명의 사상자가 났다. 공중전에서 국민군 전투기들은 자신들이 공화군 전투기들에게 격추당한 것보다 훨씬 많은 공화군 전투기들을 격추했다." "공화군 보병은 테루엘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바로 그 점이 테루엘 작전 전체의 비극성과 무가치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화군은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고 점령할 필요도 없는 이 도시를 점령하려고 했던 것이다. 엄청난 인명과 장비를 희생하면서 말이다. 다시 한 번 선전 목적 때문에 성급한 승리에 발목이 잡혀 있던 공화군 지도자들의 고집이 최정예 부대 대부분을 헛되이 희생시키고 만 것이었다. 생존자들의 참담한 상태, 사기 저하와 체력 고갈은 수 주 안에 또 한 번의 더 큰 재난으로 이어지게 된다."(563)


"테루엘 전투 이후 공화군 병사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으며 장비도 형편없었다. 전선에 새로 투입된 부대들은 경험 없는 신병이 다수를 차지했다. 후퇴는 일시적 철수라기보다는 패주(敗走)라 할 수 있었다." "공화군의 후퇴는 쫓아오는 적이 쉬느라 멈출 때에만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측면 부대의 철수는 공황 상태를 불러일으켰다. 혼란의 와중에서 누구도 인접 부대에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던 것 같다. 휴대 식량과 탄약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적 전투기들은 시종일관 사냥개처럼 후퇴하는 공화군을 쫓아가면 괴롭혔다. 전투기들은 곡예를 하듯이 급강하하여 공화군에게 수류탄을 떨어뜨리고 기총 소사를 퍼부었다. 전쟁 초기에 의용군들을 파괴했던 고립의 공포가 이제 인민군의 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마침내 4월 15일 국민군이 해안 도시 비나로스를 점령했다. 이로써 카날루냐와 공화 정부가 지배하는 스페인 나머지 지역을 둘로 가르는 회랑 지대가 만들어졌다."(568-71)


"전쟁 피로감이 공화 정부 진영에 퍼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일반인들이 정부 지도자들의 행동에 냉소적 태도를 보이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직접적으로든 국제 사회의 중재를 통해서든 양 진영이 협상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공화 정부가 선전하더라도 궁극적 승리를 보장해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종전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절망과 패퇴의 공황 상태를 떠올렸다. 반면에 중간계급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전쟁을 더 계속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르티네스 바리오 같은 사람은 프랑코가 승리하면 자신들이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참혹한 처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38년경에는 특히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또한 오랜 무역 파트너인 프랑스와, 특히 영국이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는 데 분노했다. 그들은 패배주의에 빠져들었으며, 민족주의자들도 혁명적 좌파도 싫어하는 카탈루냐 중도파에 가담했다."(581-2)


"프랑코가 군대 전체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장악하고, 그 자신이 (하느님과 역사에만 책임을 지는) '국민 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 나서, 그는 초기 시대의 기술위원회를 정식 정부로 대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1938년 1월 30일 프랑코는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하여 발표하고 국가 중앙 행정법을 제정했다." "3월 동안 프랑코 장군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 폐지를 포함하여 세라노 수녜르가 들고 온 모든 법령을 승인했다. 법무부와 교육부 장관은 공화 정부에서 제정된 교회와 교육 관련 법령을 모두 파기하는 일에 착수했다. 각급 학교 지배권은 다시 교회 지도부로 넘어갔고, 교실에는 십자가를 내걸게 했다." "4월 5일에는 카탈루냐 법령이 폐지되었다. 4월 22일에는 모든 간행물이 프랑코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규정한 출판법이 제정되었다." "5월 21일에는 카스티야어가 스페인의 유일한 공식 언어로 선언되어 공식석상에서 바스크어와 카탈루냐어를 더는 쓸 수 없게 되었다."(593-6)


"네그린은 평화 협상 제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차례 위대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통해 국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성공한다면 공화 정부는 더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군사적 명분은 바다로 통하는 국민군 회랑 지역을 재탈환함으로써 분리된 두 공화군 지역을 다시 연결하겠다는 공허한 구상이었다." "7월 25일에 시작된 에브로 강 전투 작전은 처음부터 중대한 결점을 안고 시작되었으며, 일단 초기 기습의 이점이 소진되고 나자 공산당 야전 지휘관들은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그들은 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 목적도 없이 병사들의 목숨만 희생시키는 예의 관행으로 돌아갔다. 처음 한 주 동안에만 공화군에서 엄청난 인명 손실이 났는데, 폭격과 기총 소사에 당한 데다가 이질과 발진티푸스까지 덮쳤다."(608-14)


"다시 한 번 공화군의 대공세는 주요 목표물을 향해 달려가는 대신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적의 진지들을 제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그에 이은 마무리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그 같은 상황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아무런 정당성도 없었으며, 특히 공화군이 당시 매우 허약한 상태에다 원래 공세 목적을 달성할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공화 정부 지도부는 훗날을 기약하며 최정예 부대를 질서정연하게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는 쪽을 택했다. 모든 것은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 네그린의 판단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정치적인, 그리고 선전상의 고려가 재난을 자초했던 것이다." "11월 16일, 전투가 시작된 지 113일 만에 종결된 에브로 강 전투에서 공화군은 참혹한 인명 손실은 물론 카탈루냐 방어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무기를 잃고 말았다."(616-22)


"1938년 4월에 체결된 영국-이탈리아 조약은 이탈리아의 전쟁 개입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어떻게든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노력하던 공화 정부의 희망에는 치명타였다. 9월에 체결된 뮌헨 협정은 더 심각한 타격이었다. 유화 정책의 정점이랄 수 있는 이 조치는 스페인에 대한 영국의 기존 정책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의미했을 뿐 아니라, 스탈린이 소련의 이익은 히틀러와 화해하는 것이라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의 공화 정부 지원은 이제 난처한 일이 되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를 지켜본 스탈린은 마침내 히틀러에 대항하는 동맹 세력으로서 영국과 프랑스를 믿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자신의 약점을 독일과 동맹을 맺어 보완해야 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화 정부의 운명을 온전히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과 연계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공화 정부의 생존 가능성은 적어도 뮌헨 협정을 체결하기 한 달 전인 에브로 강 전투에서 이미 파괴되기 시작했다."(628-32)


# 뮌헨 협정 : 1938년 9월 30일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체결한 협정. 이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서쪽의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합병되었다.


"바티칸에서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만이라도 휴전하라고 호소했지만 국민군은 12월 23일에 카탈루냐 공격을 시작했다." "1939년 1월 3일, 발라게르 지역에서 출발한 국민군은 그 지역 거점도시인 아르테사를 점령했다." "보르하스블랑카스는 1월 5일에 함락되었다." "솔차가 장군의 군대가 1월 6일 비나이샤를 점령했다." "1월 12일, 국민군은 몬트블랑크를 점령했고, 14일에는 발스를 점령했다." "국민군은 2만 3천 명을 포로로 잡고 전사자 5천 명과 부상자 4만 명이라는 손실을 적군에게 안겨주었다. 카탈루냐 전투는 영토의 3분의 1이 점령된 상태에서 이미 승패가 결정났다고 할 수 있다." "1월 22일, 국민군은 페랄레다델사우세호를 되찾았고, 사흘 후에는 푸엔테오베후나를 수복했다." "1월 26일에 선발대, 특히 야구에가 이끄는 모로코인 레굴라르들은 소유자가 우파인지 좌파인지에 상관없이 며칠 동안 도시에 있는 가게나 아파트를 약탈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것이 그들이 거두는 '전쟁세'였다."(647-54)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부르고스에 있는 국민 진영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프랑코를 '서유럽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검'이라고 부른 필리프 페탱 원수가 스페인 주재 프랑스 대사로 부임했다. 파리에서는 호세 펠릭스 데 레케리카가 프랑스 대통령 르브룅에게 신임장을 제출했다. 전쟁부 장관 달라디에는 프랑스에 남아 있는 공화군의 무기와 전쟁물자 전부, 몽드마르상에 보관 중이던 공화 정부가 맡긴 금을 프랑코 정부에게 넘겨주었다. 달라디에는 또한 프랑스 땅에서 공화 진영 사람들이 국민 진영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런던에서 알바 공작은 세인트제임스 궁정에서 스페인 대사로 취임했다. 체임벌린은 정치책임법이 공포된 지 불과 2주 만에 프랑코가 모든 정치적 보복을 포기했다고 말함으로써 영국 하원 의원들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미국 역시 프랑코 정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전에 공화 정부에 파견했던 클로드 바우어스 대사를 소환했다."(669)


# 정치책임법 : 2월 12일에 프랑코가 발표한 법으로서,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공화 진영 사람들에게 내전 기간 동안 벌어진 모든 종류의 파괴와 전복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한 법률


"국민군은 3월 28일 아침 카사데캄포 전선에 머물던 부대를 시작으로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마드리드는 1936년 7월 19일보다 더 극적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인민전선의 슬로건은 국민군 슬로건으로 바뀌었다. 언어 자체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좌익에서 쓰던 '여성 동무' 대신 '아내'를, '건강하세요' 대신 '안녕하세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돌아갔다. 3월 31일 프랑코 군대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프랑코에게 보낸 축하 메시지에서 〈우리의 온 마음을 하느님께 올리면서, 가톨릭 스페인의 승리를 위해 애쓰신 각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치아노는 일기에서 〈마드리드는 함락되었고, 수도와 함께 적색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도 모두 함락되었다. 이는 파시즘의 새롭고 위대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지금껏 거둔 가장 큰 승리일 것이다〉라고 썼다. 런던에서는 프랑코가 승리의 입성을 하고 나서 정확히 3주 후에 불간섭위원회가 해체를 선언했다."(685-6)


제7부 끝나지 않은 전쟁


"새 정부가 추진한 첫 번째 우선 사업은 토지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1936년의 혁명 기간 동안에 몰수된 토지뿐만 아니라 공화 정부에서 추진했던 토지 개혁의 영향을 받은 토지도 포함되었다. 임금이 동결되어 농촌에서는 공화 정부 때 농촌 노동자들이 받은 것보다 약 절반으로 줄었는데, 1956년에 가서야 1931년의 임금 수준을 회복했다. 국가는 농산물 판매를 통제했고, 가격도 동결했다." "일종의 자급 경제 체제를 만들어내려는 목적에서 국가가 산업을 통제했는데, 유럽 수준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경제의 우선순위를 군수품 생산에 둔다는 내용이었다. 산업 소유주들과 경영자들은 자신들이 일종의 병영식 통제 경제에 들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파업이 불법화되어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노동 현장의 활동가들은 사라졌고, 임금은 고정되고 노동 시간은 늘어났다. 그러나 공장주들도 원료 구매나 완제품 판매에서 발언권을 박탈당했다."(693)


"프랑스 국경을 넘어 다시 국민 진영 스페인으로 돌아온 15만 명의 공화 진영 사람들은 비록 참호 속에 사람들은 없었지만 사회가 아직도 전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1940년 4월 26일에 제정된 것과 같은 탄압법들은 '1936년 7월 18일 쿠데타 발생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적색 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사항에 보복을 요구했다. 조사는 대인(對人) 범죄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예술, 국가 재산 등에 대한 '도덕적' 범죄까지 망라했다. '책임의 귀속'은 '인민전선 내 여러 당, 노조, 프리메이슨 단체 간부들의 물리적 파괴'와 '공화 정부를 후원하고 지지한 정치 세력의 절멸'을 목표로 삼았다. 프랑코 정부가 저지른 테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아직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진 3만 5천 명에, 비공식적이고 무작위적 살인과 전쟁 중에 이루어진 처형, 자살, 굶주림, 감옥에서 병으로 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사망자 수는 20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696-7)


"프랑코 체제와 스탈린 치하 러시아가 공통적으로 지녔던 역설적 유사성은 외래 이데올로기의 오염에 대한 비정상적인 두려움이었다." "볼셰비즘의 오염이라는 개념은 좌익 쪽의 한 설명에서 보듯이 엉터리 과학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마드리드 대학 정신의학 교수였던 안토니오 바예호 나헤라 소령은 1938년 여름 '마르크스주의 탐닉 정신병'을 연구하기 위해 국민 진영에 14개의 클리닉을 둔 심리학 연구센터를 설립했다. 그의 결론은 스페인의 종족적 소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내 적당한 기관에 맡겨 국민 진영이 추구하는 가치를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43년에 1만 2043명의 아이들을 엄마 품에서 억지로 떼어내 팔랑헤 사회구호소, 고아원, 종교시설에 인계했다. 일부 아이들은 선택된 가정에 양자로 넘겨졌는데, 이 방식은 30년 후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체제에서 그대로 되풀이된다."(695-700)


"1944년 11월 4일 연합통신과 기자회견을 하면서 프랑코는 국민 진영 스페인은 한 번도 파시즘이나 국가사회주의였던 적이 없으며, 추축국들과 동맹을 맺은 적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히틀러는 '프랑코 선생의 뻔뻔스러움'은 끝이 없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코는 1945년 7월 17일, 스페인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내전 이후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에게 일반 사면을 베푸는 내용이었다. 7월 18일에는 새 내각을 구성했는데, 중요한 자리를 가톨릭 정치가들에게 할당함으로써 국정의 중심을 국민 운동에서 국가 가톨릭주의로 옮겼다. 1946년 12월 13일 국제연합은 각국 정부에 스페인에서 대사들을 철수시킬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 후 40년 동안 지속되는 냉전이 프랑코 체제를 구해주는 구세주 역할을 했다. 1948년 4월 17일 프랑코 장군은 스페인 내에서 전쟁 상태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내전이 시작되고 거의 12년이 지나고 나서였다."(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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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덴 대공세 1944 -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막
앤터니 비버 지음, 이광준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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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 독일군의 전선은 붕괴 직전이었지만, 연합군은 심각한 보급 문제로 진격을 늦춰야 했다. 프랑스의 철로망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기에 매일 1만 톤의 연료, 식량, 탄약을 미 육군의 "레드 불 익스프레스" 특별 보급대의 트럭으로 노르망디에서 실어 날라야 했다. 9월 초에 확보한 전선까지의 거리는 셰르부르에서 500킬로미터에 달했고 왕복 3일이나 걸렸다. 파리 하나만 탈환하는 데도 하루 1500톤의 물자가 필요했다." "엄청난 규모의 물자 수송 과정에서 9000대의 트럭이 폐차되었다. 특별 보급대는 프랑스를 가로질러 최일선까지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제9병력수송사령부는 수송기만이 아니라 폭격기까지 동원해 제리캔(기름통)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항공기들은 3갤런의 연료를 사용해야 일선에 겨우 2갤런을 갖다줄 수 있었다. 급박한 물자 수송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안트베르펜 항구를 확보해야 함에도, 몽고메리는 라인강을 건너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31-2)


"1944년 9월 16일, 히틀러는 볼프샨체에서 오전 상황 회의가 끝난 후 별도의 회의를 소집해 측근들을 놀라게 했다. 크라이페 항공대장의 일기에 따르면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이 서부 전선에 중화기와 탄약 그리고 전차가 부족하다고 말하려고 하자 〈총통이 가로막았다. 총통은 '안트베르펜 항구를 최종 목표로 하는 반격을 아르덴에서 실시한다. (···) 새로운 국민척탄병사단과 새로 창설한 기갑사단, 동부 전선에서 온 기갑사단을 합쳐서 총 30개 사단으로 공격군을 편성한다. 영국군과 미군의 틈새를 돌파하여 또 한번의 됭케르크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러시아와의 동부 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 구데리안은 동부 전선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반대 의견을 냈다. 요들은 제공권을 연합군이 갖고 있기에, 네덜란드와 덴마크 그리고 북부 독일에 낙하산부대가 침투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11월 1일까지 1500대의 항공기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42)


"히틀러는 결코 협상은 없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괴링은 총통을 설득하여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크라이페 항공대장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히틀러는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의 동맹은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곧 와해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동부와 서부, 양 전선에서 소모적인 방어전을 펼치느니, 차라리 마지막 대공세를 취하는 것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요들은 〈방어전을 펼치면 패배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차라리 모든 것을 걸고 절망적인 도박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동부 전선에서는 32개 사단을 동원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소련군의 막강한 힘에 눌렸다. 히틀러는 두 개의 기갑군으로 안트베르펜까지 밀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서부의 연합군을 분리시켜서 캐나다를 전쟁에서 발을 빼게 하고, 영국군까지도 〈제2의 됭케르크〉로 밀어 넣어 루르 지방의 군수 산업을 위협하려는 연합군의 게획이 좌절되리라 믿었다."(104-5)


"히틀러가 예상했던 연합군 내부의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기대했던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 육군 참모총장 앨런 브룩 원수와 몽고메리는 연합군의 진격 속도가 더딘 것에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브룩은 몽고메리가 이 문제에 불평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정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군대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사이에, 서북 유럽에서의 전쟁은 완전히 미국의 독무대였다. 그래서 지상군에 단일 지휘관이 있어야 한다면, 몽고메리가 아닌 브래들리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몽고메리가 〈아르덴 북쪽에서는 자신이 지휘권을 맡아야 하고, 남쪽의 지휘권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계속 우길 때에도 브래들리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았다." "브래들리는 나중에 아이젠하워에게 만약 제12집단군이 몽고메리의 지휘를 받게 된다면, 자신은 지휘관으로서의 실패를 인정하고 사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125-8)


"아르덴 대공세를 둘러싼 논란은 연합군이 이 공세를 눈치 챌 것인가 아니면 눈치 채지 못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여러 첩보를 종합해보면, 독일군의 의도를 눈치 챌 만한 정보가 흩어져 있었는데도, 대개의 정보전 실패가 그렇듯이, 고급 장교들이 자신의 편견에 부합하지 않는 첩보들을 흘려들은 것이 문제였다." "연합군은 붉은 군대의 동계 공세에 대비해서 전력을 아껴야 할 필요가 있는 시점에 독일이 감히 전략적인 대공세를 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부 전선 최고 사령관 룬트슈테트는 절대로 이런 도박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룬트슈테트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연합군은 히틀러가 군권을 얼마나 강하게 장악하고 있는지 과소평가했다. 고급 장교들은 항상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훈련받았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게도 만들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독일이 연료와 탄약, 그리고 병력 부족으로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129-31)


"12월 16일 오전 5시 20분, '공격 개시' 10분 전에 제프 디트리히의 제6기갑군이 포문을 열었다. 대부분의 미군은 축축한 눈의 냉기를 피해 16시간이나 되는 밤 동안 농가, 나뭇꾼들의 오두막, 헛간, 외양간 등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지평선 위로, 여름날 번쩍이는 번개 같은 섬광을 본 보초는 동료들을 깨우기 위해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포탄이 날아와 터지기 시작했을 때에야 침낭에서 나온 병사들은 장비와 철모, 무기를 든 채 상태에 빠졌다." "히틀러는 예전처럼 보병사단이 앞장서서 전선을 돌파하게 하고 그다음에 값비싼 기갑사단이 뫼즈강의 다리를 향해 진격하게 했다. 아들러호르스트에 도착한 첫 번째 보고는 가히 용기백배할 만했다. 요들은 히틀러에게 〈기습 공격은 완벽히 성공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실제로 기습 공격은 성공했다. 하지만 독일군에게 필요한 것은 이 기습 공격이 적군을 거의 마비시킬 정도의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였다."(149-50)


"바스토뉴에 있는 미들턴 장군의 제8군단 사령부는 독일군의 공세 규모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슈파에 있던 미 제1군의 호지스 장군은 독일군이 루르 댐으로 향하는 제5군단의 진격을 방해하기 위해서 〈국지적인 양동 작전을 벌이고 있을 뿐〉이라고 추측했다. 호지스 장군은 미군이 '폭명탄buzz-bombs'이라 부르는 V-1비행폭탄이 머리 위로 계속 날아가 리에주를 폭격하는데도, 여전히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다(그날 저녁 V-1비행폭탄이 안트베르펜 극장에 명중하는 바람에 300명의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죽고, 200명이 다쳤으며,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게로 장군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호지스 장군은 제2보병사단의 북상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전 9시 15분, 룩셈부르크의 제12집단군 사령부 브리핑에서는 G-3 작전 참모조차, 아르덴에서는 아무 특이 사항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 시간 브래들리 장군은 아이젠하워와 병력 보충을 의논하기 위해 베르사유로 향하는 중이었다."(160)


"독일군이 내린 명령을 감청한 뒤에야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히 깨달았다. 아이젠하워는 모든 예비 병력을 출동시키는 한편, 베델 스미스, 스트롱, 영국군 작전 참모본부의 존 화이틀리 소장에게 세부 작전 계획의 준비를 명령했다. 세 사람은 참모장실 바닥에 대형 지도를 펼쳐놓고 둘러섰다. 스트롱 장군이 독일군의 의장용 검으로 바스토뉴를 가리켰다. 이 마을이 아르덴의 중심부였다. 뫼즈 강으로 가는 주요 도로가 모두 이곳을 관통하기에 독일군의 뫼즈 강 진격을 막을 요충지라는 점에 모두 의견이 일치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네덜란드 작전(마켓가든 작전을 가리킴)을 끝내고 랭스에서 휴식 중인 미 제82공수사단과 제101공수사단을 즉시 예비전력으로 편성했다. 이 병력이 동쪽에서 오는 만토이펠의 기갑군 선봉대보다 바스토뉴에 먼저 도착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스트롱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자 출동 명령이 부대에 즉각 떨어졌다."(179-80)


"제101공수사단은 아직 병력이 모자랐고, 장비도 보충되지 않았다. 35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네덜란드 전투에서 잃었지만 무르멜롱르그랑에 있는 동안 충원된 보충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동 명령이 떨어지자, 규율 위반, 주로 싸움이나 부사관을 때려서 영창에 있던 병사들까지 중대로 돌려보내야 했다. 장교들은 군대 병원에 가서 거의 치료가 끝난 병사들에게 스스로 퇴원할 것을 요청했다. 반면 정신적으로 심하게 불안정한 병사들은 그대로 놔두라는 지휘관들도 있었다. 지난 열흘간 전투피로증으로 자살한 병사가 여러 명 있었다. 심지어, 사단 참모장도 45구경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제82공수사단은 네덜란드 전투에서 손실을 본 후, 보충병이나 장비를 보충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제101공수사단은 모든 것이 부족했다. 특히 겨울철 방한복이 그러했다. 밤이 되면 병사들이 모자란 것을 얻거나 훔치러 다니자 병참 장교들이 그동안 모아놓았던 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195-6)


"한편 독일의 기갑교도사단 그리고 제26국민척탄병사단이 북쪽 방어선을 뚫고 바스토뉴로 향하고 있는 가운데, 제47기갑군단은 교통 체증 때문에 바스토뉴로의 진격을 서두를 수 없게 되자 단단히 화가 났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세 일정표를 완전히 어긋나게 만들어버린 쪽은 미 제28보병사단의 용감한 중대들이었다. '스카이라인 드라이브'라고 불리는 남북으로 뻗은 능선에 낸 도로를 따라 하이너샤이트, 마르나흐, 호싱겐 같은 마을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이 도로의 교차로를 방어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인츠 코코트 소장은 나중에 〈호싱겐에서의 방어는 제26국민척탄병사단 전체의 진격을 지체시켰다. 결과적으로 기갑교도사단은 하루 반나절이나 늦어졌다〉고 인정했다. 기갑교도사단장도 호싱겐에서 12월 18일 아침까지 버텨준 K중대의 방어 때문에 결국 〈바스토뉴 지역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고백했다. 이 점이 촌각을 다투었던 바스토뉴 전투에서 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210)


"12월 23일 아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다. 미군 지휘관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러시아 고기압대가 동쪽에서 밀려와 하늘은 수정처럼 맑아졌지만 기온은 더 떨어졌다. 〈시계, 무한대!〉 항공 관제관도 들떠 있었다." "룩셈부르크 시민들처럼 브래들리의 참모들도 거리로 나와 실눈을 뜨고 눈부신 하늘 위에 떠 있는 연합군 중폭격기들의 비행운을 바라보았다. 폭격기들은 트리어와 그곳의 보급품 야적장을 폭격하러 가는 중이었다. 폭격기를 올려다보는 참호 속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전투폭격기 편대가 세찬 강물에 비친 생선비늘마냥 반짝이며 머리 위를 날아갔다. 연합군의 항공 지원은 뜻밖의 이점까지 가져다주었다. 전투폭격기가 주변에 있으면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될까 겁을 먹은 독일군 포병들이 포격을 할 수 없었다. 〈적기가 나타나자마자 아군 포격이 50~60퍼센트 줄었습니다.〉 모델 원수의 포병 사령관이 보고했다."(303-4)


"12월 24일 일요일, 푸른 하늘에 밝은 태양이 떠올랐다. 제101공수사단 대원들이 〈서부 개척 시대의 마차 대열처럼 자기 위치를 굳건히 지켰기에〉 브래들리의 전술 사령부에서는 바스토뉴 방어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참호 속의 병사들을 덜덜 떨게 만든 혹한에도 불구하고 바스토뉴 방어선의 병사들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낙하산병들이나 제10기갑사단 병사들은 패튼 장군의 병력에 의해서 곧 포위망이 풀릴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자신들이 구출되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쾌청해진 날씨와 함께, 병사들은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온갖 종류의 연합군 항공기들을 올려다보았다. 전투기들이 독일군 차량 대열에 폭격하는 소리, 기총소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는 이 기간 독일군의 집결지를 폭격하여 적의 공세를 분쇄하는 데 굉장히 효과적인 존재임을 입증했다. 바스토뉴에 있는 관제사들이 폭격기들을 표적으로 유도했다."(323-5)


"독일 공군이 마그네슘 신호탄을 바스토뉴 상공에 떨어뜨리면서 짧았던 크리스마스 밤의 평화는 끝났다. 몇 시간 후 재개된 공격은 독일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제15기갑척탄병사단은 전투를 계속할 만한 전차가 더 이상 한 대도 남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어두워진 후, 정찰대대 소속 잔여 구축전자의 지원 아래 절망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 제502낙하산보병연대의 바주카포 팀이 독일 지휘관 차량을 포함한 절반 이상을 근거리에서 기동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동남쪽에서는 기갑교도사단의 제901기갑척탄병연대 돌격대가 공격에 나섰다가 고립되어 〈문자 그대로 전멸〉당했다. 이 연대는 남은 예비 병력이 없어서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 가용 병력이 남김없이 전장에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코코트는 더 이상의 공격을 중단했다." "코코트는 〈대공세는 엄청난 희생만 초래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마을 몇 개를 점령한 것으로 끝났다〉라고 기록했다."(343-7)


"만헤이와 그랑메닐 근처의 전투에서 아직도 미 제1군의 근심덩어리로 남아 있는 독일 제2친위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를 제외한 다른 기갑사단들은 독일 전선 돌출부인 벌지의 서북쪽 측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독일 제116기갑사단은 마르슈 동쪽을 뚫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발덴부르크 소장이 기록한 대로 〈이 전투에 투입된 사단의 예하부대들은 거의 전멸했고〉 제60기갑척탄병연대의 바이어 전투단은 고립되었다. 소수의 병력과 차량만이 겨우 탈출했다. 그날 밤,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히틀러에게 대공세가 실패했다고 보고했다. B집단군도 포위당하기 전에 빨리 후퇴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히틀러는 이 건의를 묵살하면서 바스토뉴를 다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다시 맑은 날씨가 시작되자 미 전투폭격기들이 생비트를 초토화했다. 일명 '도시 전체를 길거리에 나앉히기' 전략은 도로를 온통 파편투성이로 만들어서 독일군 수송대가 도로를 아예 이용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생각이었다."(351-3)


"히틀러의 아르덴 대공세가 남긴 망령인, 괴링의 마지막 도박은 '보덴플라테 작전'이라고 불렸다. 날 수 있는 모든 항공기를 총동원해 연합군의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활주로에서 모두 파괴한다는 작전이었다. 비록 몇 주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새해 전날 오후 작전 회의에서 브리핑을 받은 장교들은 대경실색했다. 그날 조종사들은 일절 음주를 금하고 새해를 맞이한다고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도 자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의 지상 공격인 반자이 돌격을 연상케 하는 이튿날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 모두 회의적이었다." "작전은 하다못해 부분적인 승리도 거두지 못했다. 독일 공군은 전투기 271대가 파괴되었고 65대가 손상을 입었다. 조종사들의 피해는 정말 처참했다. 모두 143명의 조종사가 죽거나 실종되었고 7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21명이 부상당했다. 이 수치에는 3명의 비행단장, 5명의 비행전대장, 14명의 비행대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을 보충할 인력을 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389-93)


"1월 12일 금요일, 보덴플라테 작전의 실패를 용서받은 괴링이 쉰 두 번째 생일을 축하받기 위해 히틀러에게 불려갔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이날은 다른 이유로 무척이나 중요한 날이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새벽 5시, 이반 코네프 원수가 지휘하고 있는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이 엄청난 선제 포격에 뒤이어 비스와 강 서쪽의 산도미에서 독일군 교두보를 공격했다. 소련군의 포격은 기갑척탄병 장교가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경악했을 정도였다. 소련의 전차부대는 〈가자! 파시스트의 소굴로!〉 〈복수! 그리고 독일 놈들에게 죽음을!〉이라는 슬로건을 전차 포탑에 써놓았다. 이튿날에는 게오르기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이 바르샤바 남쪽에서 공격했다. 또 다른 두 전선군은 동프로이센을 공격했다. 구데리안은 결코 상황을 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산드라처럼 그의 경고는 무시당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동부 전선 전역에 걸쳐 670만 명을 동원했다."(430-1)


"1월 15일, 히틀러는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주코프와 코네프의 전차군이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의 방어선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슐레지엔 산업 지역은 풍전등화였다. 이후, 총통이 베를린 밖으로 나간 것은 오데르 전투 때가 마지막이었다. 이날 해 질 무렵 야간 전투를 대비해 강화된 미 제2기갑사단의 2개 전투부대가 우팔리즈 전방 1킬로미터 남짓한 곳까지 진격했다. 그 후 적정을 살피려고 정찰대를 내보냈지만 새벽 1시쯤 시내로 들어간 정찰대는 독일군의 낌새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정찰대는 우르트 강 동쪽으로도 갔지만 적은 그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르덴 대공세는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영국의 한 연대가 독일군은 이미 훈장마저 바닥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훈장 대신 룬트슈테트 원수의 서명이 된 사진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사단에서는 이런 식의 포상이 병사들의 전의를 끌어올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군단 사령부로 보고하는 내용이 감청되었다."(438)


"아르덴 전투는 미군에게는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영국에게는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몽고메리의 기자회견이나 런던 언론들의 몽고메리 띄우기는 미국 내에서 특히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장서들 사이에서 영국에 대한 경계심만 한층 부채질했다. 그러한 야단법석은 알렉산더 원수가 테더 공군 사령관의 후임이 되어 연합군 부사령관이 되기를 바랐던 처칠의 희망을 좌절시켰다. 그렇게 되면 영국이 〈지상 작전의 통제권을 갖게 되는 것〉이었기에 마셜은 단호히 반대했다. 처칠도 깨달았겠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라인 강을 건너 독일로 진격하는 동안 몽고메리는 곁다리로 밀려났다. 영국의 의견은 대부분 묵살되었다. 연합군 위원회에서의 영향력 또한 거의 사라졌다. 11년 뒤에 있을 수에즈 위기에서 영국의 배신에 대한 아이젠하워의 분노는 상당 부분 1945년 1월 그가 겪었던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그 원한은 아이젠하워가 죽을 때까지도 잊지 않았다.)"(451)


"볼프샨체에서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지 정확히 1년 뒤인 1945년 7월 20일, 카이텔 원수와 요들 상급대장이 아르덴 대공세와 관련해서 조사를 받았다." "두 사람은 합동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예비 병력을 서부 전선이 아닌 동부 전선에 투입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은 후세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 〈아르덴 대공세로 전쟁을 연장하는 결과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전쟁범죄인지는 연합군 법정이 판단하라. 어떻게 판단하든 우리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제5, 제6기갑군을 아르덴 대공세에 투입한 결정이, 결국 1월 12일 비스와 강 교두보에서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비스와 강에서 오데르 강을 향한 소련군의 진격이 성공적이었던 비결은 히틀러가 아르덴 대공세를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점은 분명했다."(449)


"히틀러는 끝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독일 장군들은 아르덴 대공세 개시 1주일 만이 이미 실패했다고 깨달았다. 기습은 일단 성공했지만, 정작 중요한 미군의 전의 상실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독일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아르덴 대공세는 동부 전선의 잔인한 전투 행테를 서부 전선으로 전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나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침략을 보더라도 전면전의 충격이 처음 예상처럼 국가 전체의 공포나 붕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포위된 상태에서 굴복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덤비는 처절한 저항을 초래하기 일쑤였다. 독일군이 제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호각을 불면서 공격을 해도, 고립된 중대가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 속에서도 끝까지 중요한 마을들을 지켜냈다. 이러한 희생이 증원군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를 벌어주었다. 나아가서는 히틀러의 야욕을 무너뜨리는 디딤돌이 되었다."(4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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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 서해역사책방 7
안토니 비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제1부 세계가 숨을 죽이리라


"1941년 6월 21일, 지난 8개월 동안 발령된 80차례의 경고와 함께 독일의 의도가 점점 명확히 드러나자, 크렘린은 병적인 흥분 상태에 빠진 듯한 분위기였다. NKVD의 부책임자에게서 그 전날, 그러니까 6월 20일 하루 동안에 최소한 '독일 공군이 39회 이상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었다. 독일 국방군의 전쟁 준비는 날이 갈수록 노골적이 되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복잡했던 스탈린은 그조차도 보다 많은 양보를 이끌어 내기 위한 아돌프 히틀러의 책략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스탈린은 대부분의 경고를 이른바 '영국의 선동'으로 간주했는데, 여기에는 소련의 숙적 윈스턴 처칠이 소련과 독일 사이에 전쟁을 유발하기 위해 꾸민 계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독일의 침공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여전히 행여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를 뱀의 최면에 걸린 토끼에 빗댄 괴벨스의 비유에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다."(18-21)


#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개전 소식이 알려지자, 스탈린그라드 기술대학 학생들은 벽에다 큼직한 지도를 내걸었다. 독일로 진격하는 붉은 군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지도였다. 당시 학생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던 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이 독일을 초전에 박살낼 거라고 생각했다.〉 공장에서 탱크와 전투기가 생산되는 뉴스 화면을 수도 없이 봐 온 그들로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업과 군사력을 과대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술적으로 후진국에 머물러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막강한 군사력에 대한 환상은 더욱 커졌다. 게다가 스탈린 체제의 권능이 적어도 국내에서는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 탓에 소련 국민들은 그 체제가 천하무적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앞날에, 나아가 많은 공장과 공원과 깨끗한 고층 아파트들이 위대한 볼가 강을 내려다보는 시범 도시 스탈린그라드의 앞날에 어떠한 참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28)


"독일군 사령관들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이반(Ivan)', 즉 평범한 소련군 병사들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포위를 당하거나 명백한 수적 열세 때문에 다른 병사들 같으면 항복을 해도 벌써 했을 상황에서도 이 '이반'들은 끝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첫날부터 소련군 병사들의 남다른 용기와 희생은 사방에서 빛을 발했다. 물론 집단적인 공포심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련군의 전반적인 혼란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1945년 종전과 함께 석방되어 조국으로 돌아온 포로들은 영웅 대접을 받는 대신, 스메르시(SMERSH)에 의해 그 길로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적군에게 생포된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반역죄를 면할 수 없다는 스탈린의 지침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7월 16일, 비테브스크 근교에서 독일군에게 생포된 자신의 아들 야코프와 부자 관계를 끊어버리기까지 했다."(48-9)


"독일에서도 전면전을 치르는 동안의 역학 관계는 필연적으로 강압적인 분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1941년 12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현재 위치를 사수한다는 히틀러의 입장에 반대했던 장군들은 하나같이 제거되었다. 히틀러는 강제로 브라우히치를 물러나게 한 뒤, 국가사회주의자의 의지를 갖춘 장군이 아무도 없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독일군은 스몰렌스크 동쪽에 굳건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가진 우리는 이제 1941년 12월 당시 독일군이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고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추축국에 대한 힘의 균형이 지정학적, 산업적, 경제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의 심리적 전환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도시 이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결투의 양상으로 전개된 이듬해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다려야 한다."(78-9)


제2부 바르바로사의 부활


"전 세계의 이목이 독일군의 모스크바 진격에 쏠려 있던 1941년 11월, 동부 우크라이나의 전세는 숨가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남부 집단군의 진격이 정점에 달했던 11월 19일, 클라이스트가 이끄는 제1기갑군의 선봉은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돈 강변의 로스토프에 도착했다. 다음 날 그들은 카프카스로의 진격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인 이 거대한 강의 다리를 장악했다. 그러나 헝가리 군이 맡고 있는 독일군 선봉의 왼쪽 측면이 허술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소련군 사령관 티모셴코는 맹렬한 반격을 개시한 끝에 클라이스트의 부대를 격퇴했다. 모스크바와 카프카스의 유전이 둘 다 코앞에 와 있다고 믿었던 환상에 큰 상처를 입은 히틀러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게다가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들어 독일군 최초의 퇴각 사례로 기록된다는 점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렇게 해서 1942년 1월 6일, 그때까지 사단이나 군단을 지휘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는 파울루스가 졸지에 제6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게 되었다."(82-4)


"파울루스가 처음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1942년 1월은 마침 스탈린이 간신히 모스크바를 지켜 낸 뒤 총공세를 시도한 시기와도 일치한다. 사실 그 무렵은 남부 전선의 모든 독일군이 상당한 곤욕을 치르던 시기였다. 크림의 폰 만슈타인 장군과 그 휘하의 제11군은 아직 세바스토폴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12월 말부터는 카프카스에서 반격에 나선 붉은 군대가 케르치 반도까지 밀고 내려온 상태였다. 분노에 사로잡힌 히틀러는 군단 사령관 폰 스포네크 장군을 군법 회의에 회부해 버렸다." "독일군이 소련군에 '질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믿음에 변함이 없는 히틀러는 따로 예비 전력을 남겨 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마치 군단 사령관들을 해임함으로써 최근의 실패에 대한 기억까지도 모조리 씻어졌다는 듯한 태도였다. 해임된 장군들 가운데 가장 먼저 복귀한 폰 보크 원수는 과연 자기네에게 카프카스 유전을 장악할 만한 힘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97-101)


"5월 12일, 카르코프를 봉쇄하기 위해 볼찬스크와 바르벤코포 양쪽에서 공격을 감행한 붉은 군대는 말 그대로 전멸을 면치 못했다. 파울루스와 클라이스트 군은 24만 명에 이르는 포로와 2천 문의 야포, 그리고 티모셴코 탱크 부대의 전력 가운데 상당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들의 손실은 2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졸지에 나치 언론에서 영웅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반동적인 귀족들에 대해 다분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언론이 평범한 가문 출신의 파울루스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총통은 그에게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했으며, '수적으로 압도적인 적군에게 승리한 제6군의 노고'를 높이 치하하는 전문을 보내왔다. 파울루스의 참모장 슈미츠는 훗날 이 전투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히틀러에 대한 파울루스의 태도였다고 주장했다. 야심만만한 반격을 지원하기로 한 총통의 결단은 파울루스에게 전술적 상황을 판단하는 히틀러의 능력과 현명함을 새삼 확인해 주었던 것이다."(105)


"제6군과 제1기갑군이 6월 28일로 예정된 '청색 작전'의 출발선을 준비하는 동안, 지휘 본부는 적지 않은 혼란에 사로잡혀 있었다. 6월 19일에는 제23기갑 사단의 작전 장교인 라이헬 소령이 일선 부대를 방문하기 위해 피셀러 스토치 경비행기를 타고 이륙했다. 그는 치밀하게 구상된 보안 지침에도 불구하고, '청색 작전'의 모든 계획이 자세하게 적힌 명령문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그가 탄 경비행기가 독일군 점령 지역 너머에서 격추당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 문건을 노획했다는 보고를 들은 스탈린이 틀림없이 위조 문서일 거라며 철저히 외면해 버렸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많은 생존자와 냉전 시대의 독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교활한 소련군의 함정에 말려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소련군의 후퇴를 용인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스탈린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110-3)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라'는 스탈린의 명령이 가장 큰 의미를 함축했던 때는 물론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집단 농장은 비축해 둔 곡물을 붉은 군대에 내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애국적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자들을 재판하는 법정도 설치되었다. 가족 가운데 탈영하거나 징집을 거부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신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의무를 위반할 경우 10년형에 처해졌다." "법정은 또한 민간인 '탈영자'에 대한 결석 재판도 처리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피난민이었다. 유죄 선고를 받은 자는 '당과 소비에트에 대한 반역자'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한동안 스탈린그라드 전선 정치국에서는 '1941~42년 겨울 사이에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징집된 남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자신이 살던 마을에 머물며 '피난을 거부한' 자들은 '체계적인 반소비에트 활동'이나 독일군에 부역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146-9)


"8월 23일 거행된, 동부 전선에서 가장 격렬했던 스탈린그라드 공습은 게르니카 이후 리히토펜의 경력 가운데 정점을 차지한다. 제4항공 함대는 그날 하루 동안의 출격 횟수만 1,600회를 기록했으며, 1천 톤의 폭탄을 투하하면서 단 3기만이 격추되었다. 어떤 분석에 의하면 당시 스탈린그라드에 60만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었는데, 공습 첫 주에 4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볼가 강 서쪽에 그토록 많은 시민과 피난민이 남아 있었던 이유는 전형적인 체제의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NKVD는 강을 건너는 모든 선박의 통제권을 거의 장악한 반면, 민간인을 소개하는 일에는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스탈린 역시 공황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스탈린그라드 주민들을 볼가 강 건너편으로 철수시키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주로 이 지역 출신인 의용군이 더욱 결사적으로 도시를 방어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157-8)


제3부 운명의 도시


"할더가 '만족스러운 스탈린그라드 진격'을 언급한 9월 7일, 카프카스 진격 실패에 따른 히틀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러한 임무를 달성하기에는 리스트 원수의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었다." "폴란드와 스칸디나비아, 프랑스 등지에서 승리를 거둔 후 히틀러는 마치 자신이 정상적인 전쟁의 요소들을 초월한다는 듯 연료나 병력의 부족 등과 같은 '사소한' 요소들을 얕잡아보기 시작했다." "카프카스를 차지하지 못하면 전쟁을 끝내야 할 거라고 장군들에게 말한 바 있듯이 어쩌면 히틀러 본인도 진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차마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볼가 강이 봉쇄된 이상 스탈린그라드의 군수 산업은 파괴되어도 좋지만 지금의 히틀러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그 도시를 무슨 일이 있어도 장악해야 했다. 이 위험한 몽상가는 이를 벌충할 다른 상징적 승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히틀러는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어도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178-9)


"이 위기의 시기에 예레멘코와 흐루시초프가 내려야 했던 가장 중요한 결단은 스탈린그라드 사수라는 신념을 상실한 것이 분명한 제62군의 후임 사령관으로 누구를 선택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9월 10일, 제62군은 도심 깊숙한 곳까지 밀려났다. 제29차량화 보병 사단이 스탈린그라드 남쪽 외곽에서 쿠포로스노에를 통해 볼가 강을 건넜을 때, 제62군과 그 남쪽의 제64군은 서로 차단되어 있었다." "예레멘코와 흐루시초프는 지휘 본부를 강 건너편으로 철수해도 좋다는 스탈린의 허락을 간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볼가 강 서쪽에 아직 지휘 본부가 남아 있는 부대는 제62군밖에 없었다." "마침내 스탈린그라드의 새 사령관으로 추대된 추이코프 장군은 이미 독일군이 백병전, 특히 어둠이 내린 이후의 근접 전투를 가능한 한 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모든 독일군이 소련의 총부리가 뒷덜미를 겨누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했다."(181-4)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자 로딤체프는 독일군의 야포와 공습을 조금이라도 둔화시키기 위해서 적군과의 거리를 항상 50야드로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혹독한 전투의 피로에 눈이 붉게 충혈된 독일군 병사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동료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탓에, 그 동안 팽배했던 승리감도 자취를 감추었다. 상황이 갑자기 일변한 것이다. 그들은 도시 지역에서는 야포가 훨씬 더 위협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탄의 파편만이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고층 건물이 포격을 당하면 포탄 파편뿐만 아니라 건물의 잔해까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독일군 병사들은 고층 건물의 저격수들에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수시로 하늘도 올려다보아야 했다. 독일 공군기가 나타나면 독일 보병 역시 소련군과 똑같이 은신처를 찾아 몸을 날려야 했다. 그들은 스투카 폭격기가 붉은색과 흰색, 검은색이 어우러진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203-4)


"독일군 장군들은 이 폐허의 도시에서 무엇이 자신의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통적인 범주와 차원의 군사 작전과는 동떨어진 근접 전투는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안겨 주었다. 군사 이론가들은 진지전이야말로 '변칙적인 병법'이라는 주장을 펼쳤지만, 시가전에서는 독일군 특유의 기동력이라는 장점을 살릴 수 없었고 전투의 상당 부분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를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제6군은 1918년 1월에 선을 보인 이른바 '폭풍 쐐기 작전'까지 동원했다. 이는 열 명 가량의 병사들이 짝을 이루어 기관총과 경박격포, 화염 방사기 등으로 무장한 채 벙커와 지하실, 하수구 등에 숨어 있는 적군을 섬멸하는 방식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베르됭에서의 야만적인 살육보다 훨씬 더 끔찍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독일 병사들은 무너진 건물이나 벙커, 지하실과 하수구 등을 뒤져야 하는 근접 전투를 '쥐들의 전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212-3)


"독일군의 예비 병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련군은 보다 일반적인 전술도 구사했다. 추이코프는 야간 공격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는데, 이는 독일 공군의 대응을 피하기 위한 전술이기도 했지만 독일군이 대부분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점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특히 바티우크 대령이 지휘하는 제284소총사단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시베리아 출신의 병사들이 어떤 먹잇감도 놓치지 않는 천부적인 사냥꾼 기질을 타고 났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독일군 병사들은 밤만 되면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이 발견될 때마다 총을 발사하곤 했고, 누구 한 사람이 발포를 시작하면 주변의 다른 병사들까지도 맹목적인 일제 사격을 불사하는 바람에 9월 한 달 동안에만 2천 5백만 발의 탄약이 소모되었다. 소련 병사들은 가끔씩 밤하늘에 조명탄을 쏘아 올려 공격 개시가 임박했다는 암시를 풍김으로써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키곤 했다."(214-5)


"도시 안쪽에서는 10월 말이 되면서 피로와 탄약 부족 때문에 독일군의 공세가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11월 1일, 붉은 10월 공장에 대한 제79보병 사단의 마지막 공격은 볼가 강 쪽에서 날아오는 강력한 포격 아래 그 막을 내렸다. 제6군 지휘본부는 소련군의 야포가 자신들의 공격력을 크게 약화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1월 6일자로 모스크바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 있다. 〈지난 이틀 사이에 적군의 전술이 바뀌었다. 아마도 지난 3주에 걸친 막대한 손실의 여파가 아닐까 추정되는데, 이제는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는 작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1월 초로 접어들자 소련군은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앞 갑판에 T-34 탱크의 포신을 장착한 볼가 함대 소속의 포함들이 리노크의 제16기갑 사단에 포격을 가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야간 공습은 독일군 병사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295-6)


"제6군의 공세에 맞선 소련군 측의 대반격, '천왕성 작전'은 그 전해 겨울에 스탈린이 보여 준 조급증에 비춰볼 때 비정상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불타는 복수심이 그의 조급증을 누그러뜨려 주었던 것이다." "붉은 군대는 '천왕성 작전' 준비 상황을 위장하기 위해 은밀한 기만 작전이 필요했지만, 기대하지 않은 두 가지 행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히틀러가 소련군에게 예비 병력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일의 두 번째 오판은 붉은 군대에게 그보다 훨씬 큰 도움을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주코프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근처의 북쪽 측면에 배치된 제14기갑 군단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지만 그 효과는 지극히 미미했다. 독일은 그 같은 작전 수행 능력으로는 절대로 독일군에게 타격을 입힐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제6군 전체를 완전히 포위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305-10)


"독일이 한 달에 500대의 탱크를 생산하던 그해 여름, 할더 장군은 히틀러에게 소련이 한 달에 1,200대의 탱크를 생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총통은 탁자를 내려치며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사실 소련은 그보다 훨씬 많은 탱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히틀러는 산업 지역을 거의 다 빼앗긴 소비에트 연방이 독일보다 더 많은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나치 지도자들은 소련 인민들의 애국심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산업 설비를 우랄 산맥으로 옮겨 가고자 하는 소련 측의 필사적인 노력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다. 서부 지역에 건설되었던 1,500개 이상의 공장이 볼가 강 동쪽, 특히 우랄 산맥 부근으로 옮겨졌다. 일단 가동되기 시작한 생산 라인은 기계가 고장을 일으키거나 전력이 부족한 경우, 혹은 부품이 부족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중단되는 법이 없었다."(310-1)


제4부 주코프의 함정


"11월 19일, 독일 시간으로 5시 20분에 야포 및 박격포 부대는 '사이렌'이라는 암호에 따라 포탄을 장전했다." "이윽고 최초의 포성이 적막한 대지를 뚫고 터져 나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탄착점을 수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조준을 해둔 탓에 비교적 정확하게 목표 지점을 타격할 수 있었다." "제6군이 폰 바이흐스 장군으로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공격이 시작된 지 17시간 만인 그날 밤 10시경의 일이었다. 루마니아 제3군이 주둔했던 지역의 상황 변화 때문에 제6군의 후미를 보호하고 통신망을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스탈린그라드의 모든 공격 행위는 '즉각 중단'되었다. 기갑 부대와 기계화 부대가 급히 서쪽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 대한 준비가 워낙 부족했다. 추이코프의 제62군은 예상대로 독일군의 이동을 막기 위해 강력한 공세를 취해왔다."(329-39)


"이날 벌어진 사건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파울루스 장군이 별다른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적군의 공격에 대비한 전력을 충분히 구축해 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벌어진 후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붉은 군대의 공격이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제6군의 후미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기만 했을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한편 B 집단군은 총통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상황을 혼자 힘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히틀러의 집착이 최대한의 신속성이 요구되는 시기에 실로 한심한 무기력증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적군의 의도를 분석하기 위해 차분히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제6군의 후방을 지키기 위해 상당수의 병력을 돈 강 부근으로 철수시킨 탓에 독일군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은 크게 줄어들었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그 때문에 남쪽 측면의 대문이 활짝 열려 버렸다는 점이다."(336-40)


"'일시적인 포위'의 위험에 굴하지 말고 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파울루스에게까지 전달된 것은 그가 니즈네치르스카야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파울루스에게는 스탈린그라드 남쪽에 머물러 있던 호트의 병력과 루마니아 제6군단 잔여 병력의 지휘권을 책임지라는 지시까지 함께 떨어졌다. 핵심은 '철도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볼가 강 주변에서 후퇴하여 B 집단군과 합류할 것을 고려하고 있던 파울루스는 이러한 갑작스런 명령이 무척 난감하게 느껴졌다." "파울루스가 니즈네치르그카야로 날아간 것은 지휘 본부가 그곳에서 B 집단군 및 라스텐부르크 부근의 볼프산체와의 비밀회의를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왔다는 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그가 소련을 탈출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즉각 적군의 포위망 안쪽에 해당하는 굼라크로 돌아가 참모들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363-4)


"파울루스는 스트레커가 '모든 군인에게 가장 어려운 양심의 문제'라고 표현한 고민에 봉착했다. 스스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향과 상부의 명령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고민이 그것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제6군의 거의 모든 장교들이 소련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모종의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믿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군단장과 사단장, 참모 장교 등은 확실히 돌파 작전을 선호한 것이 사실이지만, 보병 부대, 특히 연대장과 대대장 선에서는 그 정도의 확신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벙커 속에 진지를 구축한 병사들은 은신처를 버리고 붉은 군대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벌판으로 나가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히틀러가 머지않아 자기네를 구출해 줄 강력한 반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374-6)


"제6군을 구출하기 위한 만슈타인의 계획 '겨울의 폭풍 작전'은 총통의 지휘 본부와 철저한 논의를 거친 끝에 수립되었다. 이것은 제6군에게 돌파구를 열 기회를 제공하고 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한 통로를 뚫음으로써 '1943년의 작전을 염두에 두고' 제6군으로 하여금 볼가 강 주위에 '전초 기지'를 고수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 본인은 제6군의 돌파 작전을 허락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차이츨러에게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퇴각이 불가능한 이유는 〈대의를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고 주장했다. 클루게가 만슈타인에게 경고한 바와 마찬가지로, 그는 아직도 전해 겨울에 있었던 일을 떨쳐 버리지 못한 셈이었다. 히틀러는 참모장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한 부대가 도주하면 그 패배의 물결 속에 법과 질서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한다.〉"(398-401)


"파울루스 군의 의사들이 추위를 싫어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날이 추울수록 환자들의 회복이 그만큼 늦어졌다. 상처 부위에 서리라도 끼는 날이면 치명적인 결과가 빚어진다." "12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심각한 동상으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발이 자줏빛으로 부어오르는 정도의 증세는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서 돌려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발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얼른 잘라 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12월 둘째 주부터 의사들은 아주 곤혹스러운 현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부상을 당하거나 병에 걸리지도 않은 병사들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보급품이 크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기아에 의한 사망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병리학자들은 이들의 죽음이 '극심한 피로(포위망 안쪽에서 근무하던 600명의 의사들 가운데 감히 기아라는 표현을 입에 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와 정체불명의 질병' 때문이라고 보고했다."(409-10)


"독일군 병사들의 희망은 적군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에 대한 갈망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른바 '포위병[Kesselfever]'이라는 증세를 보이는 이들은 SS 기갑 군단이 나타난 붉은 군대를 시원하게 쳐부수고 자신을 구원한다는 공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돈 전선 지휘 본부의 선전국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노래를 좋아하는 병사들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확성기가 실린 트럭을 몰고 다니며 선전 방송을 하는 것은 아주 고전적인 방법에 해당했다." "다양한 소리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는 방법도 개발되었다. 이를테면 한동안 째깍거리는 시계 바늘 소리를 들려준 다음, 동부 전선에서 7초에 한 명 꼴로 독일군이 목숨을 잃는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식이었다. 그런 다음 〈스탈린그라드, 히틀러 군의 거대한 무덤!〉이라는 멘트에 이어, 경쾌한 탱고 음악이 얼어붙은 평원에 울려 퍼진다. 때로는 귀를 찢을 듯한 카튜샤 로켓포의 발사음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기도 했다."(415-6)


제5부 제6군의 종말


"1월 10일에 소련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6군이 안고 있던 주된 관심사는 변함이 없었다. 한 의사는 '공적 1호는 변함없는 배고픔'이라고 단언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경계선을 넘어 무인 지대로까지 나아가서는 죽은 소련 병사들의 시신에서 빵조각이나 말린 완두콩 따위를 찾아내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애타게 찾은 것은 소금을 담아 접은 종이였다. 포위망 안쪽의 독일군 병사들의 배고픔도 엄청난 고통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큰 괴로움에 시달린 이들도 많았다. 보로포노포와 굼라크의 수용소에 갇혀 있던 3,500명의 소련 포로들이 바로 그들인데, 그들의 사망률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몇몇 독일군 장교들은 1월 사이에 이 포로들 사이에서 식인 행위가 급속히 번져 나갔음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보고한 바 있다. 1월 말에 이들 수용소에 도착한 붉은 군대는 3,500명 가운데 살아남은 이가 불과 20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471-2)


"'고리 작전'은 1월 10일 일요일의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마리노프카와 카르포프카 지역에 토치카와 포상(砲床) 등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밀물 같은 붉은 군대의 진격을 막는 데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남은 탱크와 보병들로 반격을 시도하는 독일군의 노력은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붉은 군대는 박격포를 이용해 보병을 탱크로부터 분리시킨 후 생존자를 제거하는 방법을 활용했다. 돈 전선의 정치국은 〈항복하지 않는 적군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물리적·물질적 약점을 고려할 때 제6군의 저항은 실로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처음 사흘 동안 이들이 적군에게 입힌 피해 상황을 보면 그 같은 사실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돈 전선은 26,000명의 병사를 잃었으며 절반 이상의 탱크가 파괴되었다. 붉은 군대의 사령관들은 사상자 수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고스란히 노출된 벌판을 진격한 탓에 쉬운 목표물이 되었다."(476-80)


"한편 소련의 주력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포위망의 서쪽 지역을 강타했다. 제29차량화 보병 사단은 효과적으로 제압되었다. 제3차량화 보병 사단은 연료가 떨어져 차량과 중화기를 포기한 채 수북이 쌓인 눈밭을 도보로 걸어서 퇴각해야 했다. 땅을 팔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병사들을 데리고 허허벌판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월 16일, 제295보병 사단 소속의 한 대대가 완전히 항복을 했다. 포로를 정당하게 처우하겠다는 보로노프의 전단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본 듯했다. 항복한 대대의 지휘관은 댜틀렌코 대위에게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고 한다. 〈도주한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행동이다. 나는 부하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투항하려 한다고 말했다.〉 전직이 영어 교사였던 그 대위는 이렇게 덧붙였다. 〈독일군 중에서 일개 대대 전체가 투항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욱 참담한 심정이었다.〉"(483-5)


"1월 20일 아침, 붉은 군대는 새롭게 구성한 병력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제65군은 이미 그날 밤 곤치라 북서쪽의 저지선을 돌파했다. 몇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굼라크가 그들의 주요 목표였다. 다음 날 저녁, 비행장과 그 부근의 지휘 본부가 철수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미 카튜샤 포대의 공격으로 엄청난 혼란이 발생했다." "그 무렵 이미 파울루스 장군은 거의 자포자기 심정이었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괴벨스가 '전면전'을 주창하며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을 희석시킬 준비를 한 다음 날인 1월 22일, 제6군은 히틀러로부터 운명의 마지막을 알리는 전문을 받았다. 〈항복은 절대 안 된다. 최후의 순간까지 싸워야 한다. 전투 능력을 유지하고 있는 병사들을 총동원하여, '요새'를 사수하라. '요새'의 용기와 불굴의 의지가 새로운 전선을 구축할 기회를 제공하였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제6군은 독일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498-501)


"히틀러는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파울루스의 결단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언급했다." "북쪽 고립 지역에서는 스트레커 장군 휘하의 6개 사단 잔여 병력이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 제11군단의 지휘 본부를 설치한 스트레커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우리 부대는 중화기도, 보급품도 없는 상태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탈진해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한다. 그러나 그들은 얼어 죽는 순간까지도 무기를 놓지 않는다. 스트레커.〉 그의 메시지는 아주 생생했지만, 나치 특유의 상투적인 표현은 빠져 있었다. 그의 전문을 수령한 히틀러는 그날 오후 늦게 답신을 보냈다. 〈본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위망 북쪽이 유지되기를 기대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잠시 후 또 하나의 명령을 전달했다. 〈제11육군 군단은 적의 전력이 다른 전선에서 마음 놓고 작전을 펼치지 못하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붙들어 두어야 한다.〉"(524-5)


"2월 2일 아침은 짙은 안개로 시작되었다. 이 안개는 싸락눈을 동반한 세찬 바람이 밀려와서야 서서히 걷혀 갔다. 제62군 전체에 독일군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볼가 함대의 수병들과 반대편 강둑의 병사들이 다섯 달 동안 폐허 속에 갇혀 있었던 스탈린그라드의 시민들을 위해 빵 덩어리와 통조림을 들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왔다. 기쁨에 들뜬 사람들은 자신이 마주친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소련 수비대는 정말로 스탈린그라드가 막을 내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먼저 죽은 동료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놀랍게만 느껴졌다. 볼가 강을 건너갔던 사단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살아남은 병사가 채 1백 명이 되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붉은 군대는 11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 가운데 485,751명이 목숨을 잃었다."(528)


"독일 육군이 입은 정확한 손실은 지금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지금까지의 독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패배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제6군과 제4기갑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천왕성 작전이 시작된 이래 포위망 안쪽에서만 60,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대략 130,000여 명이 포로로 생포되었다. 여기에는 8월과 11월 사이 스탈린그라드 주변에서 발생한 사상자의 숫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 이 기간에 4개의 동맹군이 궤멸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슈타인의 구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점, 또한 소(小)토성 작전 때 발생한 피해 등을 모두 합치면 추축국은 50만 명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셈이다." "이런 와중에 괴벨스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사실을 왜곡하는 뻔뻔스러운 재주를 총동원하여 이 사태를 헤쳐 나갔다." "제6군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던 그들이 이제 180도 방향을 바꾸어,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533-4)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전쟁이 끝나면 파울루스와 그의 장군들을 군법 회의에 회부하여 자신이 하달한 명령, 즉 마지막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벌을 받게 하겠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식탁에서 장황한 설교를 늘어놓던 습관이 이제 거의 사라진 대신, 혼자 식사를 하고 싶어 했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발견했다. 〈왼손이 약간 떨리기 시작했고, 등은 구부정하게 굽었으며,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었고, 두 눈은 튀어 나왔으나 전의 광채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뺨에는 붉은 반점이 생겼다.〉 그러나 히틀러는 밀흐를 만났을 때도 스탈린그라드의 엄청난 희생에 대해 어떤 유감의 표시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또 하나의 모험을 일으켜 더 많은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금년 내에 이 전쟁을 종결지을 생각이네, 이미 그에 따라 독일 국민의 모든 힘을 동원할 방안을 세워 놓았어.〉 히틀러가 밀흐에게 한 말이다."(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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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최대의 전투 : 모스크바 공방전
앤드루 나고르스키 지음, 차병직 옮김 / 까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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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모스크바 전투는 모르긴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고, 이론의 여지없이 두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의 전투였다. 양측을 합쳐서 약 700만 명의 장병이 참전했고, 그중 250만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실종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러시아 군사 기록에 의하면 전사자, 실종자, 포로로 잡힌 병사를 포함한 95만 8,000명이 결국에는 모두 〈사라졌다.〉 그 외 93만 8,500명의 군인들이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소련군의 전사자 수는 모두 189만 6,500명에 달했다. 반면 독일군의 희생자 수는 61만 5,000명이었다." "모스크바 전투는 국제사회 전체가 주시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미국, 영국, 일본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이 전투의 결과를 어떻게 예측하느냐에 따라서 중요한 정책 결정을 달리 하고 있었다. 독일군을 모스크바 근교에서 저지하지 못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의 귀추를 포함한 전반적인 국제정세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10-1)


1장 히틀러는 1941년에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개전 전야 : 2인의 독재자


"스테판 미코얀은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경고를 담은 첩보를 계속 수집해서 보내던) 자국 정보원들을 불신했던 스탈린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제시한다. 〈정보원들의 보고에 대한 스탈린의 반응은 인간에 대한 그의 극도의 불신을 드러냅니다. 스탈린은 모든 인간이 그를 속이고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어요.〉" "스탈린의 의심증을 놓고 보았을 때, 히틀러가 머지않아서 그를 배신할 것이라는 서구 국가들의 경고를 무시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41년 4월,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인 로렌스 스타인하트와 윈스턴 처칠은 스탈린에게 히틀러의 계획을 알리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독일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리려는 다른 시도들, 특히 영국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스탈린은 이러한 경고를 독일과 소련을 이간질해서 결국에는 서로를 배신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자신들이 득을 보려고 한다〉면서, 스탈린은 불만을 터뜨렸다."(43)


"스탈린이 시간을 벌려고 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전기작가였던 아이작 도이처는 스탈린이 나폴레옹과 화해함으로써 전쟁을 준비할 4년이라는 시간을 벌었던 알렉산드르 1세처럼 되고 싶어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스탈린이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그는 임박한 전쟁을 앞두고 군대를 준비시키는 데에 활용할 수 있었던 시간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준비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막았다." "게다가 스탈린이 당시 폴란드 동부와 발트 해 연안국가들에서의 소련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는 소련과 나치 독일 사이에 영영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적인 시나리오를 믿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독일과 연합국이 오랜 갈등 속에서 서로를 지치게 하는 동안 소련은 숨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었고, 어쩌면 후에 더 많은 영토를 획득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47-8)


2장 우리가 얼마나 똑똑한지 이 꼴을 보고 말해보라지─기습, 개전, 반격


"공격 개시 한 달 만에 독일군은 약 700킬로미터 이상을 진군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경이적인 속도였는데, 이는 그들이 공격한 대부분의 지역들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독일군의 사기는 그들이 소련 영토 깊숙이 진격해 들어가면서 맞닥뜨린 소련군의 혼란에 비례해서 치솟았다." "전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일리야 드루즈니코프는 아들 유리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부대에는 10명당 1대의 총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는 곧 무기가 없는 병사들은 총을 든 병사의 뒤를 줄줄이 따라다녀야 한다는 뜻이었다. 총을 들고 있던 병사가 쓰러지면, 다음 병사가 얼른 그 총을 집어들어야 했다. 장교들은 적군 속으로 뛰어드는 대신에 도망치려고 대열을 이탈하는 병사를 언제든지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병들은 전장으로 달려가서 적군의 시체에서 무기 탄약, 군복 등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거두어오라는 명령도 종종 받았다."(58-9)


"모두가 우왕좌왕 헤매는 상황에서 소련군 최고 사령부, 일명 스타브카(Stavka)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스탈린도 심리적 압박감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고 크렘린 궁에 복귀했고, 그 순간부터 다시 통제권을 손에 쥐었다. 7월 3일, 그는 마침내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시작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동지들! 형제들과 자매들이여! 우리의 육군과 해군 전우들이여! 나는 당신들에게 말하고 있소, 친구들이여!〉 스탈린은 외쳤다. 독재자 스탈린이 국민들을 〈형제들과 자매들〉 그리고 〈친구들〉이라고 부른 것은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국민들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탈린이 국민들을 신하가 아니라 공동의 싸움을 함께 치러나갈 동료로 대하려고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매우 혁명적인 변화였고, 연설을 듣는 국민들 모두 그렇게 느꼈다."(67)


"히틀러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한 순간, 생사를 건 대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독일군으로서는 소련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모스크바를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1941년 여름, 목표가 가시권 안에 들어오자 히틀러는 주저했다. 모스크바의 운명, 아울러 궁극적으로는 두 독재정부의 운명이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때, 평소에는 대담하던 히틀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히틀러의 장군들도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공격 초반의 성공이 가져다준 낙관적 관측은 히틀러에게 동부전선의 다른 목표, 특히 우크라이나를 정복할 여유가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한편, 모스크바 점령에 대한 내심의 초조함이 히틀러로 하여금 모스크바 공격을 미루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게 했다. 머지않아서 히틀러의 그 결정이 스탈린에게 한 가닥 희망을 안겨준 중대한 오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마치 두 독재자들이 상대방의 실수에 자신의 실수로 대응하기로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80)


3장 숙청의 대가─혼란의 방어


"스탈린은 독일군의 포로가 된 자들과 탈주병들을 처형당해 마땅한 '변절자'라고 칭하면서 병사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는 지휘관들도 실책을 범하는 경우에는 병사들과 똑같은 처지에 빠진다고 경고하고 싶었다. 게다가 전쟁 초반에 계속된 치욕스런 패배의 책임을 전가할 몇 명의 희생양이 필요했다. 서부전선의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의 부대는 민스크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는 독일군을 막지 못했고, 그의 수석 부관들은 그 희생양의 역할을 맡을 자들로 즉시 지목되었다. 그들은 체포되었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혐의는 〈반소련군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서 대략 15만 8,000명의 소련군 병사들이 처형되었다. 반면에 독일 군사법정은 동부전선뿐만 아니라 모든 전선에 걸쳐서 총 2만 2,000명에게 도주를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자기 군대의 병사나 장교를 처벌하는 일에 관해서라면 스탈린은 히틀러를 가볍게 능가했다."(94-5)


"스탈린의 지지자들과 옹호자들은 그의 숙청 정치 전략이 독일의 침략 전후를 막론하고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1986년 사망하는 그날까지 스탈린에게 충성했던 몰로토프는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의 군부 숙청을 이렇게 옹호했다. 〈물론 과도한 면은 있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그 모든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 즉 국가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허용되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오직 진정한 스탈린주의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보여주었다. 당신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그 자신조차 그것을 모를지라도, 누구나 인민의 적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전쟁 전 스탈린의 논리였고, 독일군의 진격이 계속되던 전쟁 동안에도 여전히 그의 논리였다.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도망치는 아군의 등 뒤에 총을 쏘는 〈저지부대〉의 형태이든 힘들여서 피란시킬 필요를 없애기 위한 수감자들에 대한 광란의 처형의 형태이든, 오직 숙청 또 숙청만이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107-8)


4장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좌충우돌의 공격


"히틀러가 생각하는 동쪽 정복지의 미래상이란 숙청 정치에 따르는 죽음과 예속 외에는 없었다." "히틀러의 말은 결코 허황된 수사가 아니었다. 군인들 사이의 전우의 개념을 잊으라는 히틀러의 선언은 그 악명 높은 코미사르 지령(Commissar Decree)으로 이어졌다. 붉은 군대 소속의 정치 장교들은 설사 투항할 의사를 표시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처형하라는 지시였다.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하기 한 달도 더 전인 5월 12일에 작성된 코미사르 지령은 이러했다. 〈붉은 군대의 정치 군인은 생포되더라도 전쟁포로가 아니다. 전쟁포로들과 함께 일시적으로 임시수용소에 수용하더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 독일군의 코미사르 지령은 발령과 동시에, 붉은 군대의 정치 장교들로 하여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확고한 결의를 다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어차피 패배는 곧 처형으로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114-5)


"독일군에게 좋은 소식도 있었는데,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모스크바로 곧장 통하는 지형에 관한 것이었다. 소련이 독일 중앙집단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간신히 병력을 보강하여 버티는 가운데, 스몰렌스크까지 도착한 중앙집단군 지휘관 페도르 폰 보크에게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적은 동부전선 중 오직 한 곳에서 철저하게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다. 바로 중앙집단군과 대치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대단한 자기 확신에서 오는 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초기의 여러 목적을 달성했던 히틀러는 부하 장군들의 간청에 대답하기까지 약 3주일 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침내 그가 내린 결론은 보크나 할더뿐만 아니라 브라우히치와 다른 최고 간부들의 제안과도 완전히 상반되는 명령이었다. 핵심은, 현재 북부전선에서는 레닌그라드로 향한 진군을 최우선으로 하고, 남부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캅카스까지 밀어붙이는 데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돌발적인 결정이었다."(128)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명령은 됭케르크 바로 목전에서 구데리안 부대의 진군을 멈추게 했던 결정보다 더 중대한 실수로 느껴졌다."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히틀러도 그의 장교와 병사들이 적군의 군사적 행동에 의한 희생보다 다른 요인에 의해서 더 큰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었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병사들의 희생자 수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었다. 그 결과, 마침내 모스크바를 향하게 된 독일군은 여전히 승리를 구가하고 강력한 힘을 과시했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기처럼 통제 불가능할 정도의 괴물은 아니었다. 독일군은 한 번 이상 호되게 당했고, 구데리안의 경우과 같은 경로와 목표의 갑작스런 변경을 포함하여 그렇게 빠르게 그리고 그렇게 멀리까지 이동하는 데에 따른 긴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것보다 더 어려운 시련에 직면하기 직전이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은 커져갔다."(134-8)


5장 모스크바가 위험하다─함락이 목첩에


"키예프 전투에서는 스탈린이 그의 장군들에게 우크라이나 수도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했으므로, 소련군은 독일군에 포위된 채 큰 손실을 입었다. 주코프 장군과 다른 지휘관들은 후퇴하는 것만이 큰 손실을 막고 전력을 재편성하여 이후의 다른 전투에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키예프를 적에게 빼앗기는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소리를 질렀다. 히틀러처럼, 스탈린도 그의 장군들의 충고를 조금도 주저함 없이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 "이와 달리 비야즈마 근교에서 일어난 비극은 통신수단과 사령부의 명령 전달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기 때문이었다. 타이푼 작전을 시작하면서, 가능한 많은 붉은 군대 병력을 비야즈마 근교에 포위하여 가두려고 독일군이 신속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소련의 지도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따라서 그곳은 죽음과 파멸의 지옥인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141)


"9월 11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함락하는 데에 곧 성공할 것처럼 보이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보로실로프 원수의 임무를 대신 맡도록 했다." "새로 임지에 도착한 주코프는 신속하게 명령을 하달하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보이는 장교들을 해고하거나 재배치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후퇴를 금지하고 다시 공격을 시도할 것을 요구했으며,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 총살형을 집행하는 부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달 말 독일군의 진군은 저지되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해서 결국 주민들을 아사 상태에 빠뜨리는 900일 동안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전개되었다." "스탈린과 그의 장군들이 처음에 인식하지 못한 것은, 9월의 후반부 동안 히틀러가 많은 군대를 모스크바 침공을 위한 타이푼 작전에 대처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부대를 재배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레닌그라드에 대한 독일군의 공세가 약화된 이유였다."(157-8)


"스탈린의 귀환 명령을 받고 서부전선의 사령부로 달려갔던 10월 6일 밤, 주코프는 그곳의 장교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상황이 정말 암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휘관들은 비야즈마 근처에서 포위된 부대들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주코프의 표현에 따르면 〈서부에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전선이 없었다. 보충할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 공백과 결함을 메울 수가 없었다.〉" "주코프는 포돌스크 사관학교에서 4,000명의 사관후보생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방어선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취약한, 독일군이 진군해서 접근한 말로야로슬라베츠 부근을 맡도록 했다." "그들은 영웅적인 활약으로 시간을 벌었다. 그동안 다른 부대는 모스크바를 완전히 둘러싸며 참호를 파고, 사격 진지와 대전차 장애물을 구축하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면서 결사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또한 장교들이 부대를 재정비하고 방어선을 강화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부대를 끌어모을 시간을 만들어주었다."(163-5)


"그런 와중에도 독일군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10월 14일, 독일군은 르제프를 점령했다. 르제프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2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독일군이 북쪽에서 모스크바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따라서 르제프의 함락은 독일군이 이제 모스크바 침공을 위한 절호의 거점을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르제프에서도 곧 비야즈마에 비교할 수 있을만큼의 대량 학살이 일어나서, 그곳 또한 또 하나의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집어삼킬 지옥의 도가니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비야즈마와 르제프 두 곳에서의 패배는 모스크바에 대한 최종 전투가 실제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모스크바 시민들은 전투가 장기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승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모스크바는 대혼란에 휩싸이기 일보직전이었다."(167-8)


6장 인간의 형제애─기만의 동맹


"소련의 수도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맹공격을 주시했던 것은 당사자였던 모스크바 시민들이나 히틀러 또는 스탈린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명 윈스턴 처칠은 영국에 대한 압박의 부담을 완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소련이 히틀러의 군대를 묶어두기를 바라면서 관찰하고 있었다. 영국은 유럽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공격만 했다 하면 승리를 거둔 독일의 기계 군단에 홀로 저항하여 오랫동안 버텨온 터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틀림없이 주시하고 있었는데, 국민들에게는 털어놓지 않았지만 조만간 미국도 불가피하게 그 국제적 분쟁에 휘말려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도 분명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군의 공격 진행 과정을 신중하게 관찰하면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붕괴될 소련이라면 독일의 편에 가담하여 동쪽에서 공격을 시도해야 할 것인지를 저울질했다."(169)


"전투지역이 모스크바에 점점 더 가까워짐에 따라서, 모스크바에 주재하던 영국,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각국의 외교관들은 소련이 독일의 진격을 막을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점점 더 부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런 진단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국가의 재외공관에서는 내부 동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던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가 표면화되기도 했다. 모스크바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매우 위태로운 근무지였는데, 스탈린 체제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에 기인한 격한 내부 갈등이 재외공관들 안에서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이 그 도시를 점령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은 그런 갈등을 격화시켰다. 모스크바가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각국의 외교관들은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소련의 원조 요청에 서구 국가들이 어떻게 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토론했다."(171-2)


"독일의 침략 전날 밤, 처칠의 개인 비서 존 콜빌은 처칠에게 확고한 반공산주의자로서, 소련 정부를 돕는다는 사실에 고민이 되지 않는지 물었다. 처칠은 대답했다. 〈전혀. 나의 목적은 오직 하나, 히틀러의 파멸이네. 그것으로 내 인생은 아주 단순명쾌해지지. 만일 히틀러가 지옥을 침략한다면, 국회에서 나는 악마에게 최소한 호의적인 언급은 해줄 것이라네.〉" "루스벨트와 그의 최측근들은 곧 처칠을 비롯한 영국 관료들 이상으로, 러시아의 전쟁 수행 노력을 칭찬하고 지원의 대가로 스탈린으로부터 무엇인가 양보를 얻어내려는 그 어떤 현실적 고려도 하지 않는 성선설적 입장의 정책을 펼쳤다.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루스벨트가 러시아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가치가 있는 동맹국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루스벨트는 일시적으로 상호주의 외교관계를 제안한 스타인하트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정책에 의해서 명백히 폐기되었다."(185-8)


7장 대혼란의 모스크바─1941년 10월


"소련의 대조국전쟁에 대한 공식적 견해에 일관된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독일의 침략자들에 대한 항전에서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고 또 엄청난 희생이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941년 10월 16일은 다른 어떤 날보다도 결정적으로 그러한 신화를 산산히 부수어놓았다." "아무리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도 모스크바 사태에 대한 다음 두 가지의 극단적 현상을 조화시킬 수는 없다. 하나는 매우 정화된 해석들이다. 다른 하나는 강탈, 파업 그리고─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체제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여러 행위들을 포함한 법과 질서의 갑작스런 붕괴라는 현실이다. 그러한 일은 대부분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그들의 도시가 독일군에 의해서 점령되기 직전이라고 확신했던 순간에 발생했다. 도시의 시민들은 단결되어 있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분열되었고, 통제가 불가능한 위험한 상황이었다."(205-6)


"독일군은 거의 매일 공중폭격을 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스탈린은 자주 키롭스카야 지하철역으로 피신해야 했는데, 그는 합판으로 만든 벽에 의해서 역의 다른 공간이나 다른 열차들로부터는 가려진 특별히 준비된 열차칸에서 일하고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한 번은 스탈린은 지상에서 폭격을 직접 목격했다." "스탈린이 그 순간 느낀 것이 용기였든 공포였든 간에, 모스크바가 마치 안팎으로 무너질 듯이 보였던 10월 16일 그날, 그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무것도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시민 다수가 스탈린은 이미 도망갔다고 믿고 있던 상황에서,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들 훨씬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의 결정은 자포자기 또는 결단의 신호로 비추어질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 며칠 동안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스탈린의 고민의 이유였을 것이다."(222-3)


"여전히 결정을 서두르지 않고 있던 스탈린은 마침내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갑자기 다시 모든 업무를 장악했다. 그가 생애를 통틀어서 의지해온 전략인 폭력의 사용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10월 19일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내무인민위원부의 군대를 거리에 출동시켰다. 그들은 의심스러워 보이는 자는 누구든지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비상 재판소는 약탈자들은 물론 법과 질서를 위반한 자들을 규율할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즉각적인 처형을 의미했다." "그 뒤로 계속 이어진 강압적 단속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살해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다. 다만 스탈린이 다시 지휘한다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는 없었다. 약탈은 순식간에 중단되었고, 모스크바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독일의 점령을 저지하고야 말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다지기 시작했다."(224-5)


"독일군을 피해 퇴각하는 군인들을 총살하는 사격이 보여주듯이, 소련 지휘부의 상투적 수법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누구든지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소련 정부로서는 현재의 전투와 관련이 있든 없든, 공포 정치를 철회할 어떠한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다. 반대로 억압체제는 계속 유지되었고, 종종 강도가 배가되기도 했다. 주코프가 인민에 대한 호소문을 발표한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스탈린의 총살 집행관들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1930년대의 군부 숙청 재판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을 없애버렸다. 희생자들 중에는 1938년에 재판에 회부되어서 총살된 투하쳅스키 원수와 다른 몇몇 고위 장교들의 부인들, 스페인 내전에서 활약한 유명한 전투기 조종사들인 파벨 리차고프와 야콥 스무시케비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심지어 모스크바를 살리려는 필사적인 노력조차, 내부의 유혈 사태를 중지시킬 수 없었다."(233-4)


8장 파괴 공작원, 곡예사, 스파이─끊임없는 계략


"1941년 10월 초, 내무인민위원회는 독일군이 곧 모스크바를 점령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최후의 저항수단은 지하조직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서 이전이 불가능한 공장과 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예이틴곤의 메모에 적힌 다른 특수 공작원들의 조직 이름은 '어부들', '노인들', '충신들', '무법자들' 그리고 '소가족' 등이었다. 개별 첩보원들의 신상은 모두 코드명으로 기재되었고 각자가 맡은 구체적인 특수 임무도 표시되었다. 예를 들면, '무법자들' 조직의 지휘관 '마르코프'는 전에 강도였다. '무법자들'의 임무는 〈독일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행하는 것〉이었다. '소가족'의 조직원 '그립 바이스'는 〈엔지니어, 스포츠맨 그리고 귀한 집안 출신〉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 직원과의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8년 동안 강제 노동수용소에 수용당하는 선고를 받았지만, '그립 바이스' 자신은 〈아주 충직한 첩보원〉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었다."(237-43)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정확한 보고서 때문에 스탈린을 격노하게 만든 이래로, 소련군 첩보부에 있는 그의 상관들은 조르게가 독일의 스파이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바로 그 때, 조르게는 소련 정부가 원하는 내용을 보고했다. 9월 중순, 주일 독일 대사 오트와 다른 독일 외교관들은 일본이 독일의 참전 요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소련을 공격하는 대신에 일본 정부는 동남 아시아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야망을 달성하는 데에 미국을 최대의 장애물로 보고 있었다." "그 결과, 스탈린은 소련 극동 지역의 대부분의 병력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서 이동시키는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다. 10월로 들어서자, 그들 스스로 시베리아인이라고 부르는 극동 지역의 병사들이 소련의 심장부로 이동했다." "거의 대부분이 방한용품을 제대로 갖춘 시베리아 부대의 지원병이 도착하자, 모스크바 방위군의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263-4)


9장 하느님, 오 하느님─혁명 기념일 : 전쟁의 전환점


"1941년 8월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한 독일 병사는 붉은 군대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사용되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인해전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기 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자 〈기관총 사수의 환상적 표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회상했다. 〈적이 600미터 전방까지 다가오면 우리는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면 파도처럼 밀려오던 맨 앞쪽의 적군들은 거의 쓰러지고, 살아남은 몇 명만이 마치 아무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계속 앞으로 걸었다. 그런 모습은 기분 나쁠 정도로 기이했으며, 믿을 수 없었고, 비인간적이었다. 우리 독일 병사들 같았으면 결코 그렇게 혼자 걸어서 계속 전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된 사격으로 독일군의 기관총은 과열되었고, 소련군 측에서는 끊임없이 병사들을 내보냈다. 소련 병사들은 3일 동안 동일한 방식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동안 소련 진영에서는 사상자를 위한 들것 운반병을 단 한명도 보내지 않았다."(275)


"구데리안은 한때 모스크바 돌파라는 독일의 희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지만, 어느새 그의 탱크부대가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 말았다. 10월 3일, 구데리안 탱크부대가 오렐을 제압하고 난 직후, 그들은 소련의 T-34 전차와 맞붙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바로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 탱크의 우수한 성능을 즐길 수 있었다. T-34를 만난 직후부터 상황은 역전되었다〉라고, 그는 회고했다." "다른 중요한 변수는 날씨였다. 10월의 진흙탕은 그 자체가 막강한 적이었다. 독일군 중앙집단군 사령관 육군 원수 페도르 폰 보크는 10월 21일자 야전 일기에 〈러시아놈들보다 습기와 진흙탕이 우리를 더 괴롭히다니!〉라고 썼다." "11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서리가 진흙탕 길을 얼어붙게 만들어서 구데리안 부대가 진군하기에 한결 수월해졌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얻은 안도감은 하강하는 기온이 부대에 미칠 영향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상쇄되었다."(279-80)


"추위에 언 것은 독일군만이 아니었다. 탱크를 비롯한 모든 차량에 들어있던 윤활유까지 얼어붙었다. 모스크바 진입로에 주둔하던 독일군 부대에는 부동액은 물론, 꼼짝하지 않고 멈춘 차량을 끌 수 있는 체인조차도 보급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독일군 전투기가 로프를 던져주어서 그것으로 차량을 견인했다.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독일 전쟁 계획 수립자들로 하여금 겨울 장비를 공급할 생각조차 못하게 한 조기 승리론의 지나친 낙관주의적 기대는 점점 심각해지는 보급 수송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시베리아 부대는 모스크바 북서쪽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재탈환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났다." "그 전투에 참전한 예델만은  전쟁의 기록을 정확히 하고자 애썼다. 〈사람들이 '조국을 위하여!', '스탈린을 위하여!'라고 소리쳤다는 것은 신화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 누구도 그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전쟁 뒤에는 수많은 신화만 남았습니다. 진실은 조각조각 발견될 뿐이지요.〉"(290-3)


10장 감상에 빠지지 말라─1941년 11월, 생사의 결전


"스탈린이 주코프에게 12월 6일 최초의 반격을 개시하라고 지시하는 동안, 히틀러는 독일군이 한계에 이르렀고 지칠 대로 지쳤다는 장군들의 간청에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히틀러는 겨울 동안 모스크바 점령과 다른 주요 목표를 위한 군사작전을 잠시 멈추라고 지시했다. 12월 8일에 내린 지령 제39호의 내용은 이러했다. 〈동쪽에서 놀랄 만큼 빨리 찾아온 혹독한 겨울 날씨와 이에 따른 군수물자 보급의 어려움 때문에 모든 주요 공격작전을 중단하고 방어태세로 돌입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실책, 특히 겨울 전투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결과로 일어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표면상으로는 히틀러가 독일군이 방어태세로 전환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었지만, 실제 전투 현장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고 열악했다. 그는 여전히 장군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모스크바 전투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상황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군사적 판단을 맹신함으로써 스탈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298-9)


"히틀러는 12월 8일 마지못해서 공격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 동안 방어선을 구축하고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모스크바 근방에 포진한 부대 지휘관들의 조언을 계속 묵살했다. 독일군이 이듬해 봄에 다시 모스크바 장악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전력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러나 히틀러도 스탈린처럼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인명을 걱정하는 것은 나약함을 드러낸다고 보는 사람이었다. 스탈린이 희생시킬 수 있는 병사들이 히틀러보다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육군 총사령관 폰 브라우히치 원수는 구데리안에게 제한적인 후퇴를 허락했고, 구데리안을 재빨리 이행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러한 퇴각이 예외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12월 16일 밤에 구데리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은 다소 불안정했지만 히틀러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구데리안은 현재의 위치를 유지해야 하며 더 이상의 후퇴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306-8)


"1942년 3월 6일의 일기에서 괴벨스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이래 모스크바 근교 전투를 포함한 동부전선 전체에서 발생한 병력 손실을 계산해보았다. 전사자들은 약 20만 명에 달했고, 사상자들과 실종자들까지 포함한 숫자는 거의 1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는 겨울 날씨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특별히 지적했다. 〈2월 20일까지 11만 2,627명의 동사자와 동상 환자가 보고되었다. 그중 1만 4,357명이 3도 동상이었고, 6만 2,000명이 2도 동상이었다. ······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혹한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 그는 그러한 사태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을 다시 한번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래도 최종 집계한 피해자 수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늘 그렇듯이 괴벨스의 결론이 의미하는 것은, 나치 지도부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만큼의 위엄과 금욕적 인내를 발휘하지 못한 병사들 때문에 그런 희생자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315-6)


11장 최악의 시나리오─전후의 세계 질서 구상


"1941년 7월, 처칠 정부의 재촉에 따라서 주영 소련 대사 마이스키는 런던에 망명 중이던 폴란드 정부의 지도자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 장군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비록 영국이 폴란드의 동맹국으로 참전하긴 했지만, 이제는 소련과 새로운 동맹을 맺는 일이 처칠의 주요 관심사였다." "7월 30일에 체결된 소련과 폴란드의 조약은 소련 영토 내에서의 폴란드 군부대 결성과 소련에 감금된 폴란드인들의 사면 조항을 포함했고, 소련과 폴란드 사이의 외교관계를 복원시켰다. 그러나 1939년의 독소 조약을 무효로 선언한다고 하더라도 영토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영국 하원에서 외무장관 이든은 1939년의 영토 변경은 승인하지 않는다는 영국 정부의 입장을 되풀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영제국이 국경 문제와 관련해서 어떠한 보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치에하노프스키가 표현한 대로, 그로써 폴란드인들은 〈영국의 새로운 회유정책의 개막과 함께 첫 먹잇감〉이 되었다."(330-2)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첫 회담에서 스탈린은 즉시 이든에게 두 가지 조약 초안을 내놓았다. 하나는 영국과 소련 사이의 전시 군사 동맹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래 유럽의 국경선 획정(劃定) 같은 영토 문제를 포함한 전후 체제 구상에 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곧장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달복달 화를 냈다. 그는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얻어낼 수 있는 데까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언제 물러나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자신의 공격적인 전략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느끼면 바로 한 발짝 양보했다." "이든은 가까스로 스탈린이 요구한 약속을 모두 회피할 수 있었지만, 그 첫 번째 방문이 앞으로 계속될 사건들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든은 알고 있었다. 이든은 처칠에게 보낸 전부에 스탈린은 영토 야욕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우리는 이 문제에 계속 시달릴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라고 썼다."(333-9)


"처칠의 냉정한 계산에 따른 접근이 전쟁 후반 스탈린의 야욕을 꺾는 데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면, 루스벨트의 해결 방식은 순진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진심으로, 비밀 협약을 맺거나 나중에 처리하고 싶어했던 영토 문제에 대해서 서면으로 약속하는 것을 피하기를 원했다. 특히 그는 영토 문제에 대한 입장 덕분에 전후의 폴란드 고위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폴란드계 미국인 유권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다른 신호를 보냈으며, 스탈린의 의도를 호의적으로 해석했다. 그 모든 것들이 소련 문제와 관련한 영국과 미국 사이의 긴장을 조성했다." "결국 1945년 얄타 회담에서 동유럽은 소련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었고, 스탈린이 바랐던 대로 국경선이 재획정되었다." "비록 서로 다른 전략을 구사했지만, 처칠과 루스벨트 모두 결국 스탈린에게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확신만 심어준 셈이 되고 말았다."(342-5)


12장 참혹한 승리─상처뿐인 영광


"1942년 1월 11일, 스탈린은 칼리닌 전선의 지휘관에게 부근의 르제프를 재탈환하라는 명령을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하달했다. 르제프는 인구 5만 4,000명의 도시로, 1941년 10월 14일 이래로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북서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르제프는 소련과 독일 군대 모두에게 모스크바로 향하는 핵심 발판기지로 간주되었다." "모스크바 전투의 연장전이나 다름없었던 르제프 전투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독일군을 몰아내라는 스탈린의 반복된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일련의 작전은 거듭 실패했다. 당시 통계가 과장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소련 측의 사상자 수는 충격적일 정도로 많았다. 현재 생존해 있는 소련군 참전용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르제프 전투를 〈르제프 고기 분쇄기〉라고 표현한다. 독일군이 결전을 벌이지 않고 후퇴하기로 결정해서 마침내 1943년 3월에 소련군이 르제프에 입성하기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359)


"훗날 주코프와 그의 옹호론자들은 소련군의 그 희생 덕분에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사면초가에 빠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육군 원수의 제6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묶어두었다고 주장했다. 우라누스 작전을 수행하던 붉은 군대는 11월에 파울루스 부대를 포위하는 데에 성공해서 독일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주코프가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르제프에서의 실패를 우라누스 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의 하나로 정당화하는 것은 〈잘 봐줘야 솔직하지 못한 변명 아니면 뻔한 거짓말〉이라고 군역사학자 데이비드 M. 글랜츠는 지적했다. 글랜츠는 그의 저서 『주코프의 대패』에서, 마르스 작전이라는 이름의 북부 공격은 스탈린의 최고 군사사령관으로서 그가 초래한 최악의 패배라고 주장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1943년 1월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그토록 집착했던 르제프는 그해 3월까지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었던 것이다."(363-4)


"소련은 전쟁 기간 중 계속된 스탈린의 숙청정책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반역, 대열 이탈, 그외의 다른 범죄에 대한 혐의를 받은 소련 병사들은 임의로 처형되었다." "그 결과 전대미문의 수많은 탈주자와 망명자가 생겼다. 훗날 러시아 해방운동을 조직한 블라소프 장군만이 독일군 편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었다. 전쟁 시작과 함께 〈히비스들〉이 있었다. 히비스(Hiwis)란 독일어 힐프스빌리게(Hilfswillige)의 약칭으로, 자발적으로 독일군에 협력한 러시아인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대부분의 히비스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절박하게 구하던 소련군 전쟁포로들이었고, 그들은 독일군에 협력함으로써 생존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를 기대했다. 많은 변절자들은 자신이 정말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스스로 초래한 정책의 실패를 히틀러의 공포 정치에 의해서 만회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점령정책으로 현지 주민들에게 불러일으킨 공포심이 스탈린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된 셈이었다."(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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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전쟁사 1941~1945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지음, 윤시원.남창우.권도승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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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918~1941


"적백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립된 군사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투하쳅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가 발전시킨 연속적인 작전에 관한 전략적 이론일 것이다. 이 이론의 토대는 1920년 폴란드를 상대했던 소련의 군사적 실패와 1918년 프랑스를 상대했던 독일군의 공격 실패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은 현대식 군대는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방대하고 피해로부터의 회복도 빠르다고 믿었다. 따라서 공격자는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를 펴야 하며, 각 공세는 직후에 적 후방에서의 신속한 전과확대로 연계되거나, 방어자가 전력을 재정비할 때는 새로운 전투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6년까지 기술적 진보가 가속화되자, 보다 큰 규모인 종심 작전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종심 작전의 핵심은 최신식 무기를 사용하고, 적의 방어선을 최대한 종심에서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적이 적시에 새로운 방어선을 재구축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28-9)


"1930년 중반의 소련은 기계화 부대의 장비 생산, 계획, 야전 배치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고 있었다.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은 붉은 군대가 독일에 비해 기계화 전쟁의 이론적 개념과 실질적 경험 모두에서 상당히 앞섰다는 사실일 것이다." "1939년에 이르자, 그동안 소련군이 누려 왔던 장점들은 사라졌고, 붉은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변화를 유발한 여러 가지 원인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스탈린이 소련군 지도부에 가한 대숙청이었다." "군 숙청에서 특이했던 것은 과거 스탈린의 공포 정치 시대에 언제나 행해졌던 공개 인민재판도 없이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37년 6월 12일, 보로실로프는 국방인민위원이자 2개 군관구 지휘관인 투하쳅스키와 그의 동료 장교들에 대해 거두절미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4년간, 독일의 침공이 임박할 때까지 소련 장교들은 걸핏하면 사라져 버렸다. 대략 75,000~80,000명에 이르는 장교들 가운데 적어도 30,000명이 투옥되거나 체포되었다."(32-4)


"제1차 핀란드 전쟁(1939~1940)으로 인해 소련은 국제 연맹에서 축출되었고,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더욱 고립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관계에 핀란드 전쟁이 끼친 영향은 양측 모두에서 심대했다. 실수투성이의 과감하지 못한 소련군의 모습을 보고 히틀러와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이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침공을 통해서 핀란드를 도와주려던 영국과 프랑스의 때늦은 행동은 히틀러가 1940년 4월에 노르웨이를 침공하는 데 일조한 셈이 되었다. 이것은 소련의 입장에서 불편할 정도로 지척인 곳에 독일군이 배치되었음을 의미했다." "1940년 7월 하순에 소련이 루마니아로부터 오늘날 몰도바인 베사라비아와 북(北)부코비나 지방을 강점하면서 (독일 정부의 불편한 감정 역시) 더욱 심해졌다. 소련이 취한 이 마지막 행동은 루마니아의 독일에 대한 석유 공급에 위협적으로 비치게 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불안한 평화는 급속히 파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49-50)


"1941년 4월까지 소련과 독일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고, 소련 정보 부서에서는 독일의 공격 준비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몇 달 사이에 독일의 공격 징후를 보여주는 증거가 증가하였음에도, 스탈린과 소련 외교관들은 최고의 평화 시기를 구가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평화적인 정치 행보에도 불구하고, 1941년 4월에 스탈린은 〈특별한 전쟁 위협에 대한〉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이 특별한 대비 태세는 전쟁이 임박해서야 발동할 계획이었다. 1941년 봄이 분위기에서 이 대비 태세는 외교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두면서도, 부분적인 동원령이 내려졌음을 의미한다. 스탈린의 심중에 동시에 존재했던, 즉 1941년까지 유지되었던 평화에 대한 갈망과 전쟁 발발 시에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신중한 방어 조치를 취하고 싶은 욕구 사이의 괴리가 혼란을 초래했고, 1941년 붉은 군대가 겪을 파멸적인 패배의 길을 마련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53-4)


"1941년에 스탈린이 걱정하던 상황 중 하나는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격보다 독일 측 영토로 밀려 들어간 돌출부에 대한 점령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적백 내전 당시 매우 효과를 보았던 유동적인 방어를 포기하고, 국경 전면을 따라 경직되고 연속적인 방어를 계획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1939년에 점령한 지역에 20개의 요새 구역을 설치하기 위해 구(舊) 폴란드-소련 국경의 전쟁 전 방어 계획 중 일부를 포기했고, 일부 지역에서 지뢰, 가시철조망 및 야포를 제거했다. 이곳들은 특별 군관구로 명명되었다. 1941년 봄의 때늦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새로운 방어선은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도 완성되지 못했다. 전방의 소총병 전력은 전선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주둔했다. 독일 측을 자극하는 어떠한 행위도 피하기 위해 일선 국경은 내무 인민 위원회 보안 병력이 매우 낮은 밀도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군 일선 방어선은 6월 22일에 병력을 증강하기도 전에 휩쓸려 버렸다."(62)


"어떻게 1941년 독일군의 공격이 그처럼 놀라운 정치적·군사적 기습의 효과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복잡한 의문이 남는다. 돌이켜 보면,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조짐은 충분히 많았다. 많은 정보원들이 동쪽에서 독일군이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일견 파멸적 상황이 스탈린의 완고하면서도 맹목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보편적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가 종종 적의 공격 의도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무시했던 지도자의 전형으로 언급되어 왔다." "어쨌든 스탈린이 히틀러를 오판한 최초의 유럽 지도자는 아니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서부에서 영국을 패배시키기 전에는 동부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나치게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국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릴 의도에서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자신만의 논리는 어쩌면 믿기 힘들 만큼 복잡한 것이었다."(72-3)


독소 전쟁 제1기 1941.6~1942.11


"1941년 6월 22일, 독일 공군은 해뜨기 전에 폭격기 500대, 급강하 폭격기 270대, 전투기 480대를 동원해 전방 지역의 소련 비행장 66곳을 공격했다. 붉은 군대 공군은 개전 첫날 오전에만 1,20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그 후 수일간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했으며, 소련군의 병력 및 철도 이동은 끊임없이 독일 공군의 공격에 시달렸다." "붉은 군대의 조직과 지휘 체계 모두 순식간에 붕괴돼 버렸다. 전쟁 첫날, 서부 전선군 부사령관인 볼딘 중장이 수많은 독일 전투기들을 뚫고 바아위스토크 외곽에 위치한 제10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사령관 골루베프 중장은 두절된 유선 전화와 전파 방해로 마비된 무전망으로 반격 명령을 내리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6월 23일, 골루베프 중장이 전쟁 이전에 수립된 작전 계획을 따라 얼마 남지 않은 예하 부대들을 동원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제10군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헛된 시도 끝에 완전히 전멸했다."(79-81)


"공황 상태에 빠진 서부 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 대장은 6월 26일에 모스크바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독일 제3기갑집단의) 1,000대 가량의 전차가 민스크를 북서쪽에서부터 포위하고 있다······. 적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 제20기계화군단과 제4공수군단이 슬루츠크에서 시도한 최후의 반격도 실패로 돌아갔다. 6월 30일, 제2기갑집단과 제3기갑집단은 민스크 서부에서 소련 제10군, 제3군, 제13군 주력을 가두는 포위망을 완성했다. 이로써 서부 전선군은 사실상 전멸하고 말았으며, 이어 이루어진 사령관 파블로프 대장의 처형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 민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417,000명의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독일군은 대부분의 경우 포위망을 빈틈없이 구축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소련군이 중장비를 포기하고 독일군 포위망의 허술한 부분을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83-4)


"전쟁 초기에 소련에는 강력한 중앙 통제 조직이 없었다. 스탈린은 충격에 빠져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일 전황 보고 자리에도 불참했다. 침공 당일인 6월 22일 오후 늦게야 수상 겸 외무 인민 위원 몰로토프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독일의 침공을 발표했으나, 그 또한 전면전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7월 3일이 돼서야 스탈린은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고, 국민들에게 게릴라 저항과 침략자들에게 유용한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철수시키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그의 연설에서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닌 러시아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이것은 전쟁 기간 내내 계속됐다." "게다가 전쟁 초반의 패배로 사단, 군단, 야전군의 평균 전력이 크게 감소해 더 이상 복잡한 지휘 체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지휘·통제 능력의 부족과 전차와 대전차포 같은 특수한 장비의 부족은 붉은 군대의 조직 체계를 극히 단순화하도록 만들었다."(95-7)


"전쟁이 시작되자 전쟁 인민 위원회는 수개월 만에 집단, 혹은 〈제파(梯波)〉 단위로 새로운 군을 편성하는 데 돌입했다." "1941년 12월 1일에 소련의 동원 체제는 동부에서 서부로 배치한 97개 사단들 외에도 194개 사단과 84개 독립 여단을 신규 편성할 수 있었다. 신규 편성된 사단 중 10개 사단은 〈인민 지원 사단〉 또는 도시 노동자로 편성한 사단으로, 대개의 경우 군인으로서 필요한 체력과 군사 훈련이 부족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독일은 전쟁 발발 전 소련군의 전력을 약 300개 사단으로 추산했으나, 12월에 이르러 소련군의 현역 사단은 그 두 배에 달했다. 초기 전투에서 소련은 100개 이상의 사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41년 가을과 겨울까지도 소련군이 형편없는 전투 능력을 보인 것은 그들이 너무 황급히 편성됐고, 지휘관과 부대 모두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원 사단들이 이렇게 싸운 결과 독일측은 적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101-4)


"1941년 7월 말, 독일군은 그들이 감행한 작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거둔 눈부신 승리 덕분에 빈약한 보급 지원 능력을 초과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7월 30일에 독일 육군 총사령부는 중부 집단군에게 휴식과 보충을 위해 사실상 진격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옐냐에 있는 데스나 강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고전하고 있던 제2기갑집단은 가장 가까운 철도역으로부터 72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빈약한 도로망은 차량의 기동에 장애를 초래했으며, 결국 도보로 행군해 온 후속 보병들만으로 병력이 크게 줄어든 전차 부대의 진격을 지원하는 실정이었다. 보병들은 군화가 부족했고, 참모장교들은 겨울 피복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8월 2일, 독일 3개 집단군은 6주 간의 전투에서 179,500명의 인명 손실을 냈으나, 보충된 인원은 47,000명에 불과했다. 독일 국방군에게 남아돌았던 것은 다음 작전의 목표뿐이었다."(108-9)


"1942년 1월 1일, 소련군은 북쪽으로는 칼리닌, 남쪽으로는 칼루가를 탈환하고, 일부는 이미 포위된 일련의 독일군 방어 거점들을 공격했다." "이때 히틀러는 그 유명한 현 위치 사수 명령을 내렸다. 1942년 겨울에 이것이 성공하자, 히틀러는 전쟁 기간 내내 무조건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남발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몰랐던 것은 스탈린이 지나치게 무리한 목표를 세우지 않고 1941~1942년 중부 집단군에만 전력을 집중했다면 중부 집단군을 격파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1942년 1월, 스탈린은 지나치게 야심적이었으며 낙관적이었다. 11월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12월의 공세로 분위기가 반전되자 스탈린은 크게 고무되어, 반격 목표를 중부 집단군과 북부 집단군의 상당수를 포위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소련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주코프의 생각이 옳았다. 소련군은 독일 중부 집단군에 대한 야심찬 포위 작전을 감당할 병력과 능력이 없었다."(129-31)


"800킬로미터에 걸친 전선 전체에서 전투가 격화되면서, 전투는 개별 부대의 영웅적 활약과 혼란스러운 기동 전투, 그리고 양측에 단순한 소모전을 강요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소련군은 보통 농촌 지역을 장악했고, 독일군은 주요 거점 도시들과 마을, 교통선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1942년 4월 모스크바 반격 작전이 끝날 때까지도 전쟁 결과를 낙관하면서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잘못된 결론을 얻었으며, 히틀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군은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련군이 능력 밖의 목표를 노렸기 때문에 붕괴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홀름, 데먄스크, 뱌지마 남쪽에 포위된 독일군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중 보급 능력은 히틀러가 공군의 보급 능력을 과신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잘못된 생각은 1년 뒤 스탈린그라드에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133-6)


"독일군은 (소련의 겨울과 모스크바의 반격에 희생양이 되기 전에) 병력과 장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었다. 바로 군대의 사기였다. 전쟁 첫해에 살아남은 고참병들은 자신들이 낯선 환경에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처절한 사투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인간적인 적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탈영이나 항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전선의 병사들은 그들이 싸우는 동기가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라는 확신을 얻으려 했다.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이런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인종적, 이데올로기적 전쟁을 강조하는 나치의 선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 초급 장교와 사병들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익숙해지면서 더욱더 슬라브계 〈열등 인종Untermenschen〉들에게 잔학 행위를 일삼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독소 전쟁을 통해 소련이 이데올로기보다 애국심을 강조하게 된 반면, 독일군은 소련식의 정치 및 사상 교육을 강화하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145)


"1942년 4월 5일자 총통 지령 41호에서 히틀러는 육군의 작전 계획, 즉 〈청색 작전Operation Blau〉에 자신의 계획을 일부 첨가했다. 1942년 공세의 주목표는 캅카스 지역이고, 두 번째 목표는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독일군의 목표를 나누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스탈린을 돕는 꼴이 되었다." "독일 야전 지휘관들은 철도망이 복구될 때까지 연료와 수송 수단의 부족에 시달렸다. 8월에 A집단군이 마이코프의 소규모 유전 지대를 점령했을 때, 이미 이곳은 소련군이 체계적으로 모든 유정과 정유 시설을 파괴하고 철수한 뒤였다. 독일군이 철도 종점으로부터 더 멀리 진격할수록 독일군의 전력은 점점 더 소모되어 갔고, 동시에 광대한 영역에 넓게 퍼지게 되었다. 1941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전술적 성공은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고, 진격을 거듭할수록 목표는 불확실해졌다. 돈 강 동쪽에는 특정한 전략적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자연히 스탈린그라드에 주목하게 되었다."(151, 162-3)


"스탈린그라드의 소련 방어군은 놀라운 인내력을 보이며, 막대한 사상자와 손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싸웠다. 전투 초기에 추이코프는 독일군의 공군과 화력의 우세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다. 추이코프는 최대한 독일군에 근접해서, 독일 지휘관들이 아군의 인명 손실을 우려해 항공 지원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몇 주에 걸쳐 붉은 군대의 소규모 보병과 전투 공병들이 독일군에 근접해 싸웠는데, 보통 도로 하나, 심지어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대치했다. 수색과 매복을 거듭하는 동안 전투는 미터 단위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런 전술에도 불구하고 방어군은 점차 뒤로 밀려났다." "히틀러는 11월 2일 완강히 저항하는 방어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시가전에 투입되지 않은 사단의 전투 공병 대대들을 스탈린그라드로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양측은 몇 블록 안 되는 폐허 더미를 둘러싸고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었으나, 이때 소련군은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165-6)


"수많은 재앙에도 불구하고 소련 체제가 붕괴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소련은 국민과 그 군대의 희생에 힘입어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도 희생이 뒤를 이었다. 1942년 말이 되자 인명손실은 무려 11,000,000명에 달했다. 의도된 것이건 우연이건 간에 이런 희생은 성과가 있었다. 1942년 말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싸우는 법을 체득했고 종종 훌륭하게 싸웠다. 이들의 희생은 스탈린이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자들이 사용할 무기를 풍부하게 생산할 수 있도록 산업 동원 체제를 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독일 육군의 예리한 검인 〈전격전〉은 이미 1941년 모스크바의 문턱에서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1942년 스탈린그라드에서 다시 한 번 그 명성에 상처를 입었고, 1943년 쿠르스크에서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다. 살아남은 각급 제대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종종 그들의 〈독일 스승들〉만큼 뛰어난 살인 기술을 터득했다. 이렇게 독일은 점차 소련이 결정하는 조건에서 싸워야 했다."(167-8)


독소 전쟁 제2기 1942.11~1943.12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 내내 바실렙스키는 N. I. 보코프가 이끄는 소규모의 참모장교단을 유지하면서, 동부 전선 중앙부와 상단에서 동시에 시행되는 야심찬 동계 반격을 구상했다. 9월 13일에 보코프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최돌출부 양 측면에 있는 약체 루마니아군 전선을 공격해 궁극적으로 독일군을 차단한다는 요지의 브리핑을 스탈린에게 올렸다." "주요 공세 2개의 첫 번째는 작전명 〈우란Uran(천왕성)〉으로, 스탈린그라드 일대의 추축군 격멸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후 토성 작전으로 연결하여, 소련 남부 전선 전체의 독일 A 집단군과 B 집단군을 포함한 추축군 모두를 사정권에 두었다. 동시에 서부 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이 주코프의 지도하에 공세에 나서, 르제프 돌출부에 있는 독일 중부 집단군을 섬멸하고 남부 집단군으로부터 병력을 끌어와 독일군의 중부 전선과 남부 전선에 공히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는 계획이었다."(172)


"북쪽에서도 스타브카는 여전히 모스크바에 위협적인 르제프 돌출부 일대의 독일 중부 집단군에 대한 또 다른 대규모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주코프가 입안·감독하고 작전명 〈마르스Mars(화성)〉라고 명명된 이 공세는 M. A. 푸르카예프 대장의 칼리닌 전선군과 코네프 상장의 서부 전선군이 르제프 돌출부의 양 측면을 강타하기로 되어 있었다. 목표는 독일 제9군을 돌출부에서 섬멸하고 뒤이어 스몰렌스크로 쇄도하는 것이었다." "훗날 이 공세는 남부 전선의 작전에 도움을 줄 목적의 양동 공격이었다는 왜곡된 설명이 붙여졌지만, 규모나 작전 범위, 전투의 치열함으로 볼 때 이 공세는 독일 중부 집단군을 패퇴시키기 위한 중요한 시도였고, 작전 초기에는 천왕성 작전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화성 공세에 나선 소련군을 완벽하게 물리쳤으며, 중부 집단군에 대한 소련군의 야심찬 대규모 공세를 꺾어 놓았고, 주코프의 계획을 무산시켰다."(180-2)


# 스타브카Stavka : 소련 국방 인민 위원회(GKO) 산하에 조직된, 독소 전쟁 당시 최고 사령부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무적이라는 명성 이상을 상실했다. 히틀러가 현지 사수를 명령한 데다 악천후 속에서 두터운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독일군은 극소수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 수천 명의 부상병만이 돌아오는 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6군의 전멸 양상은 이전에 있었던 소련군의 포위 소멸 때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소련군의 경우는 충분한 기간 요원과 지휘관을 탈출시켜 새롭게 부대를 재건하고 다시 전투에 참가했다. 독일 제6군은 완전히 파멸되었으며, 147,000명의 전사자와 91,000명의 포로가 발생했고, 소련군의 인명 손실은 500,000명에 달했다. 상당수의 병력이 스탈린그라드에 2개월 이상 매달려 있으면서, 소련군의 차후 동계 공세는 산술적인 영향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의 1942년 겨울도 1941년과 같은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즉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여 아슬아슬한 외줄에 매달려 전략적인 대규모 공세를 펼침으로써 전선이 과도하게 확장된 것이다."(186-7)


"아마도 1942~1943년에 서방 연합군이 소련에 가장 큰 도움을 준 분야는 항공전이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에 가해지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1942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400대의 독일 공군기가 러시아 전선에서 지중해로 이동했다. 실제로 지중해 전역에서 1942년 11월부터 1943년 5월까지의 공군기 손실은 2,422대에 달했고, 이것은 독일 공군 전체 전력의 40.5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때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헛된 보급 임무 외에도 수송기 조종사들은 2회에 걸쳐 북아프리카로 병력과 장비를 보급하고 증강하는 과중한 임무에 시달렸다." "6개월간에 걸쳐 진행된 3회의 주요 항공 보급 작전에서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즉 항공기의 손실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이 귀중한 조종사 양성 교관들까지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항공 수송력이 없어지면서 훗날 공수 작전과 항공 보급 작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197)


"1942~1943년의 기간은 상당한 양의 〈무기 대여법〉에 따라 원조 물자가 소련에 도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소련의 공식적인 기록을 보면 랜드리스 물자의 총량이 소련 생산의 4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폄하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다. 랜드리스 덕분에 소련의 생산 능력은 급속히 재건되었다. 서방 연합군은 천연자원 외에도 34,000,000벌의 군복과 14,500,000켤레의 군화, 4,200,000톤의 식품을 제공했으며, 11,800량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도 제공했다." "특히 원조된 트럭들은 소련군의 가장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해 주었다. 즉 독일군의 최초 방어선을 돌파하고 나서 후방으로 깊이 진격하는 데 있어 재보급과 기동 집단의 전력 유지에 필수적인 문제점을 해결했다. 트럭이 없었다면 1943~1945년에 이루어진 소련군의 공세는 얕은 돌파만 달성하고 곧 공세의 탄력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독일군이 곧 방어선을 재건해서, 소련군은 또 다른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198)


"1943년 봄, 돈바스와 하리코프 일대에서 거둔 만슈타인의 빛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심한 소모전을 거친 독일군은 암울한 미래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유연 방어 전략을 거부하고, 1916년 당시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이 시행했던 완강하면서도 인명 피해가 많은 고착 방어를 고집했다. 하지만 이 방어 개념은 충분한 보병 전력과 함께 대량의 가시철조망, 대전차 지뢰와 방어 구역을 요새화하는 다량의 물자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안고 있었다. 두 번째로, 히틀러는 방어에 임하는 부대에 소련군의 주 진격 축선 양측으로 이동하여 방어 전력을 증강할 것을 요구했다. 이 개념은 독일 방어 병력이 소련군의 집결을 정확히 파악하고 향후의 주 공격로를 예측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히틀러의 간섭은 독일군의 전술적 성공에 큰 획을 그었던─즉 지휘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달성할메 있어 방법적 선택의 독립성 보장─상징에 크나큰 오점이 되었다."(200-1)


"(쿠르스크 돌출부를 향한) 독일군의 공격 시간은 최종적으로 1943년 7월 5일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 탈주병들과 정찰 보고서를 통해 독일군이 몇 시 몇 분에 공격을 할지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프로호롭카 점령을 놓고 격전이 벌어지던 7월 12일 무렵, 히틀러는 폰 만슈타인에게 제2 SS 기갑 군단을 전선에서 이탈시켜 시칠리아에 상륙한 서방 연합군을 맞으러 보낼 것을 명령했다. 폰 만슈타인은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승복했다. 그로써 비록 현실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독일군이 재개하려고 했던 모든 공세의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다." "이로써 소련군의 공병과 짜임새 있는 대전차 방어 준비, 우수한 정보력, 새 전차군의 기동성 있는 운용으로, 전격전의 주역인 독일군은 최악의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 결과는 그때까지 독일군이 시도했던 전략적 공세 가운데 적의 방어선을 뚫고 전략적 종심 돌파를 달성하기도 전에 실패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217-9)


"독일군은 지금껏 그래 왔던 대로 소련군의 공세를 꺾을 계획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더 이상 과거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소련군이 아닌 독일군이 지쳐 있었고, 전선이 지나치게 늘어나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저지하고 제1 전차군 소속 3개 여단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지만, 다음 날 제5 근위 전차군이 증원 병력을 파견했고, 8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독일군은 후퇴 작전을 위해 전투를 감행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소련의 2개 전차군은 8월 28일 코네프의 보병들이 하리코프 시가지를 점령할 때까지 엄호를 위해 그 일대를 장악했다. 보고두호프 일대의 전차전을 포함한 루먄체프 공세를 소련군은 〈벨고로드-하리코프 작전〉이라 부르고, 독일군은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이라 부른다. 이 작전은 쿠르스크 전투의 종말, 즉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주도한 마지막 전투였음을 뜻한다. 동시에 소련군의 하계-추계 전역의 시작이기도 했다."(222-3)


독소 전쟁 제3기 1944.1~1945.5


"1943년 12월 초 스타브카는 세 번째 겨울의 작전 계획을 발표했는데, 북에서는 레닌그라드로의 접근로, 중앙에서는 벨로루시, 남쪽에서는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남쪽에서는 제1, 제2, 제3,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관여하였다. 공세는 1943년 12월 말에서 1944년 4월까지 번갈아 가며 이어졌는데, 초기에는 차례로, 나중에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수행되었다. 스타브카는 계획된 공세의 목표를 한동안 은폐한 채 중요한 포병과 기계화 부대들을 한 전선군에서 다른 전선군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사이 파르티잔들은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는 쪽이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원하는 쪽이건 독일군의 후방 지역을 점점 더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5회의 초기 공세로 2월 말에 드네프르 강의 독일 방어진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강을 이용한 방어진이 없어지자 만슈타인은 이제 광활한 우크라이나 평지에서 완패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241-6)


"남부에서는 크림 반도의 탈환을 위한 또 다른 공세가 벌어지고 있었다." "히틀러는 크림 반도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는데, 그 이유는 크림 반도가 루마니아 유전을 겨냥한 폭격기의 기지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의 저항은 거칠었지만, 2년 전 소련군의 저항만큼은 아니었다. 5월 6일에서 10일 사이 여전히 소련군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히틀러로서는 못마땅한 일이었지만, 해상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원래 150,000명에 달하던 제17군 병력 가운데 40,000명 이하가 크림 반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44년 5월에 소련군은 남부의 거의 모든 영토를 수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독일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는 온통 남부 지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련의 6개 전차군이 모두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다음 하계 공세가 남부에서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런 탓에 다음 여름 소련군이 중부 집단군을 노린 웅대한 공세를 펼쳤을 때 독일은 경악하게 되었다."(248-9)


"스탈린이 1812년의 영웅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이라고 명명한 공세는, 1944년 여름에 계획된 5개의 공세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의 개시 시각에 대해서는 독일과 소련의 기록이 다소 상이한데, 이것은 소련군의 공격이 시차를 두고 일어난 탓도 있다. 1944년 6월 19~20일 밤, 잔존한 파르티잔들이 중부 집단군 후방의 철도 교차점, 교량, 기타 중요한 수송 거점에 공격을 가했다. 독일군은 많은 경우 소련 파르티잔의 공격을 꺾어 놓기는 했지만 수천 개소에 달하는 수송 거점들이 망가졌고, 그 결과 추후 퇴각과 보급뿐 아니라 부대 간 이동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6월 21~22일 밤이 되자 독일군 후방 지역에 폭격이 가해졌고, 소련군 수색 대대들은 드문드문 있는 독일군 전방 거점들 사이로 이동하며 방어진을 1겹씩 벗겨 내고 있었다. 주공은 사실 23일에 실시되었는데, 수색 부대들의 성공으로 많은 경우 긴 시간의 준비 포격 없이 공세가 개시되었다."(264)


"바그라티온 작전, 그리고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과 루블린-브레스트 작전의 결과로 소련군은 네만 강을 건너 동프로이센 경계까지 진격했고, 중부와 북부 폴란드에서는 비스와 강과 나레프 강을 건넜다. 바르샤바와 리투아니아에서의 독일군의 반격을 예외로 하자면, 소련군의 진격을 멈춘 것은 독일군 때문이 아니라 병참선의 지나친 신장(伸張) 때문이었다. 이 2개월간 독일이 겪은 인적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중부 집단군은 거의 450,000명을 잃었고, 양 측면에서의 보충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888,000명에서 445,000명으로 줄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도 100,000명 정도가 사라졌다. 30개 이상의 독일군 사단이 사라지고, 남아 있는 사단들의 인적 손실도 컸던 데다가 소련 기계화 부대의 진격이 300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 독일 집단군 가운데 한때 가장 강했던 중부 집단군이 와해되었다. 북(北)우크라이나 집단군도 심한 손실을 입었고, 이제 붉은 군대는 독일 본국의 국경에까지 이르렀다."(275)


"전반적으로 1944년 여름과 가을은 독일군에게는 영락없는 재앙의 연속이었다. 하계 공세만으로도 추축군은 465,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6월 1일에서 11월 30일 사이, 모든 전선에서의 독일군 손실은 1,457,000명이었는데, 이 중 동부 전선에서의 손실이 903,000명이었다. 기갑 부대는 제쳐 놓고라도 차량도 그리 많지 않은 독일군은 이 기간 동안 254,000필의 말과 다른 견인용 동물을 잃었다. 1944년 말에는 헝가리군만이 독일군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북쪽의 동프로이센에서 폴란드의 비스와 강, 헝가리의 도나우 강까지 소련군이 발을 들여놓았고, 서방 연합군이 독일의 서부 국경에 가까이 오면서 독일군은 포위되고 고립되어 갔다." "이제 어느 군대가 1945년에 어디까지 진주하느냐가 전후 유럽에서의 정치적 판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명백한 사실이 베를린을 향한 차기 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동시에 소련은 서방 연합국들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296-7)


"2개월도 지나지 않아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의 독일군 방어진이 붕괴되었고, 소련군은 서쪽으로 700킬로미터나 진격하여 베를린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밀고 갔다. 이 과정에서 독일 A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2월과 3월, 독일군이 베를린 방위를 위해 오데르 전선을 강화하자 소련군은 다시 측면에 신경을 써서 바익셀 집단군을 연신 두들겼고, 남부 집단군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를 제거했다(이 전략 예비대는 사실 독일 전체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였다). 4월 중순, 소련군은 슈테틴에서 체코 국경의 괴를리츠에 이르는 오데르-나이세 선에 도달하였고, 빈 북쪽의 체코 국경에서 그라츠 외곽까지 뻗어갔다. 1944년에 그랬듯이, 소련군이 지나간 곳에는 앞으로 수십 년간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정치적 우위를 보장해 줄 공산 정권의 핵심들이 들어왔다." "이제 소련군 6,461,000명이 가장 중요한 축에 집중될 수 있었다. 전체 병력 중 3분의 1 이상의 다음 목표는 베를린이 될 것이었다."(324)


"베를린 작전 기간 동안 소련군은 한때 무적이었던 독일 국방군의 잔존 병력을 박살냈으며, 48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대가도 컸다. 소련군과 폴란드군에서 361,367명의 전 사상자가 발생했다. 베를린 작전이 준비 기간은 짧았지만, 베를린에 있는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고 베를린을 점령한다는 목표는 17일 만에 완수했다. 소련은 그 이후로 이 작전을 거의 공식적으로,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여러 개의 전선군이 공세를 취한 전형적인 사례로 여겨 왔다. 300킬로미터 구간에서 3개의 전선군이 6개의 돌파구에서 거의 동시에 공세를 취하여 독일 예비대를 묶고, 독일군의 지휘와 통제를 혼란시키고, 경우에 따라 작전적, 전술적 기습까지 이루었다. 베를린 작전은 다른 측면에서도 교훈적이었다." "다소 도시화된 베를린과 그 주위의 숲이 많은 지형에서의 전투는 소련 입안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공격 측의 손실이 매우 컸다. 이 경험과 교훈은 전후 소련군의 개혁에 기초가 되었다."(343-4)


"1945년 봄에 실시된 작전들의 군사적 결과는 명확했다. 한때 자부심 강하고, 일견 불패일 것 같던 독일 육군의 잔존 부대는 동쪽과 서쪽에서 연합군이 공격을 하자 격파되었다. 나치 독일은 전례 없는 폭력과 파괴를 동원한 전쟁의 토대 위에서 권력을 추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완벽히 무너졌다. 베를린 작전의 어마어마한 범위와 크기는 이전의 전쟁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이 작전은 섬뜩할 정도의 소련군 인명 손실을 가져왔고, 마찬가지로 독일의 수도도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여러 독일 참전자들이 느꼈듯이 동부 전선의 전쟁이 완전히 전율로 가득한 것이었다면, 서부 전선의 전쟁은 품위 있는 여흥이었다." "그렇지만 서방은 전쟁의 승리에 뒤따른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소련의 권리 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몇 년 안 가서 전쟁의 참혹함은 냉전의 험악함으로 바뀌었고, 서방이 갖는 소련에 대한 의심이 소련 인민의 유례없는 고통과 승리를 가려 버렸다."(347-8)


"소련의 대단히 숙련된 교전 기술에 대한 공로는 스탈린뿐만 아니라 그의 정부 전체에게 되돌아갔다. 공산 정권은 독일의 침공에 대항하며 승리를 일궈 낸 정권으로서 유례없는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정권에 냉담했던 국민들은 침략자에 대한 투쟁에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연관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순수성보다는 애국심을 강조하여, 자신들과 전체 국가의 생존을 동일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병들이 공산당이나 콤소몰에 가입하는 것이 매우 쉬워졌고,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군과 전체 국가에 널리 퍼졌다. 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 거의 모든 소련 국민이 독일군을 몰아낸 일과 1941~1942년의 참혹함을 다시 겪지 말자는 결의로 하나가 되었다. 전후 소련 경제는 이미 전쟁을 겪으면서 충격을 받았었는데, 다시금 가장 소중한 자원들을 국가 방위를 위해 할당해야 했다."(363-4)


"보다 일반적으로, 독일 침공은 침략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러시아의 전통적이고 정당화되어 온 걱정을 강화시킨 셈이 되었다. 대조국 전쟁은 그 결과 주어진 황폐, 고통과 함께 역대 소련 지도자들의 전략적 사고에 덧칠을 했다. 전후 소련 정부는 침공으로부터 소련을 보호하기 위해, 충격 완화의 역할을 하는 위성 국가들을 다루는 정교한 체계를 구축했다. 바르샤바 조약 가입국이 소련의 방위와 경제에 도움을 주었을런지는 몰라도, 반항적인 인민들은 계속해서 소련 정권의 치안에 대한 관념을 위협하였다. 쿠바나 베트남 같은 전초 국가가 서방과의 냉전에 쓸 만한 희생물이었는지는 몰라도, 결국은 소련 경제에 부담만 가중시켰다." "돌이켜 보자면, 승리의 과실을 지키고 미래에 침공받지 않으려는 결심은 소련 정부에 위험한 짐이 되었다. 이 결단은 막대한 군사 지출과 잘못된 방향의 대외 정책과 함께 소련 경제를 파멸로 내몬 장본인이었고, 소련이라는 국가도 결국 그렇게 되었다."(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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