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와 검사 - 죄수들이 쓴 공소장
심인보.김경래 지음 / 뉴스타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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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죄수들이 쓴 공소장


"죄수란 갇혀 있는 사람이다. 죄수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경우는 질병으로 인한 입원이나 직계가족의 사망 등 특별한 사유에 한한다. 하지만 특별한 사유 없이도 구치소나 교도소 밖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출정이다. 출정이란 원래 구치소에 수감된 재소자가 재판을 받거나 자신의 사건과 관련한 검찰의 추가 조사를 받으러 구치소 밖으로 나가는 절차를 말한다. 재판이야 정해진 일정대로니 별다른 특혜나 조율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검찰 조사를 받으러 나가는 출정이다. 검사가 클릭 몇 번으로 공문 한 장을 보내기만 하면 언제든 죄수를 자신의 검사실로 불러들일 수 있다. 공문에 구체적인 수사 내용을 적시할 필요도 없다. 수사하는 내용의 제목 정도만 적어주고 관련 수사라고만 쓰면 된다. 본래 수용자에 대한 관리의 책임과 권한은 법무부 산하 교정본부, 즉 구치소나 교도소 측에 있지만 검사는 이 방법으로 죄수들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 똑같은 수사기관이지만 경찰은 출정을 요구할 권한이 없다."(21-2)


"일단 검사에게 '간택'을 받은 죄수는 구치소 안에서 일종의 권력을 가지게 되고, 그 권력을 악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악용의 결과는 대개 죄수들 사이의 사기 사건으로 귀결되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2차, 3차의 피해를 입기도 한다." "검사나 수사관도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 마찬가지다. 금융 범죄를 저지르고 구속된 죄수는 감옥 밖에 여전히 상당한 재산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몸이 구속되어 궁박한 처지에 놓여있으므로 아주 작은 편의를 받는 데 큰돈을 쓰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검사실에 드나드는 죄수는 누가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현재 가장 아쉬워하는 편의는 무엇인지 등 다른 죄수에 관한 정보를 검사나 수사관에게 전달하고 심지어 다리까지 놓아준다." "금전적인 유혹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바로 성과를 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고자 하는 유혹이 그것이다. 흔히 '별건 수사'라고 알려진 타건 압박 수사로 재소자를 쥐어짬으로써 원하는 진술과 증거를 얻어내는 수법이다."(33-4)


"서울남부지검은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 조세 범죄를 중점으로 수사한다. 지난 2013년 서울중앙지검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신설됐는데, 이듬해인 2014년 서울남부지검으로 이전했고, 2015년에는 역시 중앙지검에 있던 금융조세조사 1부와 2부가 남부지검으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남부지검은 대한민국의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 수사를 총괄하는 사실상의 컨트롤타워가 되었다. 그런데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는 내용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수사가 매우 어렵다. 자본시장 전문가인 죄수를 수사에 활용했다는 주장이 개연성을 갖는 대목이다." "그런데 수사를 하는 검사 입장에서는 수사가 어려울수록 역설적으로 사건을 축소하거나 덮을 수 있는 재량의 범위가 넓어진다. 더군다나 금융 범죄나 기업 범죄 사건은 변호사들의 수입 액수가 일반 사건에 비해 적게는 몇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에 이를 정도로 크다. 바로 이 지점을 전관 변호사들이 파고들어 검사와 유착하고 사건을 은폐한다는 것이다."(37)


"죄수 K와 김형준 전 검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내리 동창이었다 둘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죄수 K는 반장이었고 김형준은 전교 학생회장이었다." "죄수 K와 김형준 두 사람의 우정이 파탄 나는 과정은, 아무리 우정을 가장하고 있다 해도 돈으로 맺어진 스폰서 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죄수 K가 김형준 검사에게 내연녀의 오피스텔까지 알아봐주며 '충성'을 다한 것은 그가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 아니라 유사시에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검사였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유사시'가 되자 당연히 도움을 기대했다. 김형준 검사에게도 죄수 K는 어려울 때 자기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도와야할 친구가 아니었다. 죄수 K로 인해 자신이 위험에 빠지자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려 했다. 수사 검사를 만나 했다는 '죄수 K는 법대로 엄정하게 처리하고 자신에 대한 오해만 없도록 해 달라'는 부탁은 죄수 K를 진짜 친구로 생가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43, 55)


"도피 중이던 죄수 K가 한겨레신문에 제보를 하고 이 제보가 기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형준 측이 긴박하게 움직였던 1박 2일 동안 가장 중요한 장면은 손영배 검사가 신현식 변호사에게 전화를 건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 전화 한 통이 모든 뒷거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겨레신문 기자에게도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이 다 된 거냐, 내가 알기로 김형준 검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보도를 꼭 해야 하나〉라는 얘기를 했다." "검찰은 죄수 K의 고소 사건에 김형준 검사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압수수색 영장을 두 번이나 기각했고 결국 경찰에 맡겼던 사건을 다시 빼앗아왔다. 비위 사실을 보고 받은 대검은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사건을 철저히 뭉갰다. 죄수 K가 김형준 검사의 비위를 언론에 제보하자 이번에는 현직 검사가 개입해 사건 무마를 시도했다. 그리고 다시 검찰은 이 같은 현직 검사의 개입 사실을 알면서도 덮었다. '검찰 식구' 전체로 보면 4중 5중의 제 식구 감싸기다."(58-60)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림자처럼 계속 등장했던 인물이 있다. 바로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 박수종이다." "박수종 변호사가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에서 한 일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1) 김형준이 내연녀에게 줄 돈 천만 원을 빌려줬고 2) 김형준의 내연녀가 일하던 술집에 드나들며 김형준에게 회당 수십만 원어치의 술을 사줬다. 3) 일이 터지고 난 뒤 김형준이 죄수 K에게 돈을 갚을 때는 돈 심부름을 했고, 4) 김형준의 내연녀를 찾아가 입단속을 시켰다. 5) 이른바 '셀프 고소' 작전을 기획했고 6) 죄수 K의 언론 제보를 막기 위해 현직 검사 손영배를 끌어들였다. 7) 언론 제보를 막기 위한 뒷거래 비용으로 죄수 K에게 2천만 원을 보냈고 8) 죄수 K와 연락하며 언론 제보를 취소하도록 설득했다. 9) 한때 자신의 의뢰인이던 죄수 K가 체포되도록 죄수 K의 차명 전화 번호를 검찰에 제공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친분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66, 70-1)


2부 악어와 악어새


"제보자 X 역시 박수종을 알고 있었다 주식시장에서 그의 이름은 제법 유명하다고 했다. 짧은 기간 동안 워낙 큰돈을 벌어 '박 재벌'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제보자 X 자신이 연루됐던 사건인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도 박수종은 한 주가조작범의 변호인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제보자 X가 남부지검에서 수사에 참여했던 한 사건에서는 주가조작 혐의자로 등장했다. 그런데 두 사건 모두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제보자 X는 그로 미루어, 박수종의 뒷배에 큰 힘을 가진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게 어렴풋한 감을 가지고 있던 박수종에게 제보자 X가 분명한 의심을 품게 된 건 바로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 이후다. 서울남부지검의 증권범죄합수단장을 지낸 김형준 검사가 박수종의 친구라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박수종 변호사에게 분명한 범법 혐의가 있다면, 김형준 검사 스폰서 사건에서 그가 기이할 정도의 저자세로 '견마지로'를 다했던 게 이해가 간다."(79-81)


"우리가 박수종의 진술조서에서 확인한 것처럼, 금융위는 2015년 초부터 박수종의 네 가지 금융 범죄 혐의를 조사하고 있었다. 금융위는 두 차례나 출석을 요구했지만 박수종은 거부했다. 그는 대검 특별감찰팀에 〈죄가 없으니까 (금융위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죄가 없으니 조사를 받으러 가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얘기다. 아마도 일반인이었다면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성실하게 금융위 조사에 응했을 것이다. 금융위는 결국 대검찰청에 박수종을 수사 의뢰했고, 이 사건은 그해 11월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으로 배정됐다. 그런데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의 단장은 바로 김형준이었다. 김형준이 죄수 K에게 했던 〈지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라는 말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형준 사건에서 박수종이 했던 일들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모든 일들이 '피의자'가 '수사책임자'를 위해 해준 일이 되는 것이다."(84)


"제보자 X는 M&A 시장에 〈검찰이 세 번만 봐주면 누구나 재벌이 될 수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합법과 불법의 영역이 가깝고 살짝만 불법을 저지르면 큰 수익을 올릴 기회가 널려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검찰은 박수종 변호사가 다스텍 주식을 활용해 수익을 올리는 과정에서 눈을 여러 번 감아줬다(다스텍을 포함한 세 사건은 약식기소, 한 사건은 불기소 처리됐다). 주범 서정기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다스텍을 수사하지 않은 것이 첫 번째다. '다스텍을 수사하지 않는다'는 수사 기밀을 박수종에게 귀띔해준 것이 두 번째다. 김형준 검사가 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장으로 재직할 당시 금감원이 수사 의뢰한 박수종의 금융 범죄 혐의를 봐준 게 세 번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6년 9월 김형준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진 뒤 대검 감찰본부가 직접 박수종을 조사하면서 금융 범죄 혐의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약식기소를 한 것이 네 번째다."(97)


"한국의 약탈적 주식담보대출은 상상인과 상상인플러스 두 개의 저축은행이 거의 도맡아왔다. 주식담보대출이 그렇게 좋은 사업이라면 상상인 계열의 저축은행들만 도맡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너무 가까워 언제든 쇠고랑을 찰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상인을 주식담보대출에 '올인'하도록 이끄는 '용감한' 사람은 유준원 회장이라는 인물이다." "박수종은 유준원의 도움으로 위기에 빠진 상장사를 장악했다. '회사 정상화'라는 명분을 걸고 들어왔지만 상장폐지를 막는 유일한 길인 유상증자를 포기했고 대신 상장폐지 이후 소액주주들의 주식을 헐값에 거두어들였다. 결과적으로 박수종은 천억 원이 넘는 가치를 가진 손자회사를 거느린 비상장회사의 오너가 됐다. 그 사이 회삿돈 360억 원을 빼내 유준원 회사의 주식을 사는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 반면 모다와 파티게임즈의 소액 주주들은 상장폐지로 천 6백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102, 114-5)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유준원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단 한 차례의 참고인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 유준원이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주식 계좌관리인이었던 브로커 김 씨가 검찰조사에서 끝내 유준원의 공모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주가조작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진술을 한 브로커 김 모 씨의 변호인은 박수종이었다. 그리고 박수종은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인 김형준에게 자주 향응을 제공하는 사이였다. 결국 박수종 자신의 금융 범죄 사건도 유야무야됐고 유준원도 무사했다."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은 유준원과 박수종 두 사람이 자본시장에서 왜 막강한 '콤비'로 불렸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유준원에게는 자본이라는 무기가, 박수종에게는 검사들과의 네트워크라는 무기가 있었다. 두 사람이 단기간에 쌓아올린 막대한 부는 두 무기의 결합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134-7)


3부 검찰의 썩은 꽃, 특수부


"전체 검사 2천 2백여 명 가운데 특수부 검사는 불과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특수부는 인지수사를 한다. 인지수사를 한다는 건 고소나 고발 없이 수사기관이 자체적으로 범죄를 알아차려서 즉 '인지'해서 수사를 한다는 뜻이다." "구치소나 교도소의 죄수들이 처벌받은 범죄는 그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여러 건의 범죄 중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꼭 자기 사건이 아니라도 죄수들은 범죄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검사는 죄수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 어떤 죄수의 여죄를 파헤쳐 수감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여죄가 드러난 죄수를 봐줄 수도 있다." "검찰의 출세 코스인 특수부, 인지수사의 부담, 범죄 정보의 보고인 구치소, 절박한 죄수들, 그리고 죄수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줄 수 있는 검사의 막강한 권한. 이 모든 조건이 합쳐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검찰 특수부의 하수도에는 오수가 흐르게 되고 그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 독초에서는 썩은 꽃이 피게 된다."(164-6)


"나는 김영일 검사와 죄수 이 씨, 죄수 K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거래에 '삼각 사건 거래'라는 이름을 붙였다. 삼각형의 첫 번째 꼭짓점인 죄수 이 씨가 두 번째 꼭짓점인 죄수 K에게 돈을 주고 사건을 산 다음 이걸 세 번째 꼭짓점인 검사에게 상납했기 때문이다." "출정 내역에 따르면 죄수 이 씨는 2016년 한 해에만 김영일 검사실에 94번이나 출정을 갔다. 주 1.8회 꼴이다. 주말을 제외하면 닷새의 평일 가운데 이틀 정도를 구치소가 아닌 검사실에서 지낸 것이다. 이 정도면 죄수가 아니라 검사실 직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수 이 씨의 혐의는 특가법상 횡령이다. 횡령범에 불과한 죄수 이 씨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방위사업수사부나 특수부 수사에 그토록 자주 출정을 나간 이유는 김영일 검사와 죄수 이 씨가 '특수관계'라는 점을 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즉 죄수 이 씨는 김영일 검사에게 사건 정보를 물어다 주는 역할을 하는 '브로커 죄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172-4)


"IDS홀딩스는 투자자들의 돈을 유치해 그 돈을 굴려 수익을 낸 뒤 투자자들에게 원금과 수익을 돌려주는 일종의 투자회사였다. 홍콩의 FX 마진 거래에 투자해 수익을 낸다고 했다. 그러나 홍콩의 FX 마진 거래에 투자해 수익을 낸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검찰 수사로 밝혀진 전모에 따르면 이 사건의 피해자는 만 2천 명, 이들이 투자한 금액은 무려 1조 855억 원에 달했다. 2016년 9월 IDS 홀딩스의 대표였던 김성훈이 구속됐다." "서울중앙지검 별관에 있는 방위사업수사부는 굵직한 방위산업 비리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조직이다. 그런데 지난 2016년 방위산업 비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죄수들이 중앙지검 별관 408호 김영일 검사실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브로커 죄수 이 모 씨, 그리고 IDS홀딩스 사건의 주범 김성훈이 그들이다. 그런데 당시 김영일 검사실에 이들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던 죄수가 바로 한 모씨다. IDS홀딩스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스스로를 8천억 자산가로 소개했던 그 한 씨다."(182-3, 194)


"검찰 수사에서 김성훈이 홍콩에 숨겨두었던 27억 원을 한 씨에게 송금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 돈으로 한 씨는 거물 사업가 행세를 하며 피해자들에게 접근했고 다시 한번 사기를 쳤다(김성훈의 채무를 자신이 대위변제 해줄테니 그에 대한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써달라고 했다). 검찰은 한 씨를 사기 혐의뿐 아니라 범죄수익 은닉 혐의로도 기소했다. 김성훈으로부터 받은 27억 원이 피해자들에게 사기를 쳐서 벌어들인 범죄수익이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막힌 일이다. 애초에 자신들의 돈이었던 범죄수익이 다시 자신에게 사기를 치는 자금으로 사용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한 씨와 김성훈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귀인'이었다. 한 씨는 김성훈 덕분에 합의금을 지불한 뒤 출소해 사업가 행세를 하면서 또 한 번 사기를 칠 수 있었고, 김성훈은 한 씨 덕분에 피해자들로부터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받아냈으니 말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배경이 바로 김영일 검사실이었다."(198-9)


"죄수들에게 돈은 힘이다. 돈이 있으면 그걸 영치금으로 넣어서 음식도 사먹을 수 있고 신문도 마음껏 구독할 수 있다. 내의도 추가로 구매해 교도소 안의 추운 겨울을 그나마 좀 따뜻하게 날 수도 있다. 그보다 돈이 많으면 접견 변호사를 몇 명씩 두고 거의 매일같이 변호사 접견을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자잘한 효용보다 더 중요한 돈의 효용은 바로 검사와 브로커 죄수들 사이에 벌어지는 '거래'에 한 몫 낄 수 있다는 것이다." "죄수 이 씨를 중심으로 한 '사각(김성훈을 포함한) 사건 거래'와 죄수 한 씨를 중심으로 벌어진 대위변제 사기 역시 김성훈의 돈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김성훈은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출정이라는 명목으로 김영일 검사실에 수시로 나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브로커 죄수 이 씨와 한 씨를 자신의 형집행정지나 감형을 위한 '작전'에 마치 아랫사람처럼 동원했다. 힘의 근원은 역시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이다."(202)


4부 한명숙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당선됐다. 김대중-노무현, 민주당 계열 정권 10년이 끝났다. 말하자면 세상이 바뀐 셈이다." "정연주 사장을 내보내려면 KBS 이사회가 해임안을 의결해야 했다. 이사회는 모두 11명의 이사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전임 정부 시절 여당 쪽에서 추천된 이사가 7명이다. 7대 4 구조. 새로운 여당 입장에서는 표가 부족했다. 7명 중 2명을 설득해서 정연주 사장 해임안에 찬성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6대 5로 해임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설득이 안 되면 이사 2명을 입맛에 맞는 인사로 교체하는 방법도 있었다. 2008년 5월 이사장이었던 김금수가 돌연 사퇴했다. 김금수는 전임 참여정부 측에서 추천한 인사였다. 김금수는 KBS 사장 교체를 진두지휘했던 최시중 방통위원장에게 정연주의 해임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왜 사퇴했는지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정 사장 해임에 찬성하는 유재천 교수가 이사장으로 들어왔다."(229-30)


"신태섭 이사가 다음 타깃이었다. 신태섭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적당한 해임 사유가 필요했다. 이명박 정부는 꽤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신태섭은 부산 동의대 교수였다. 먼저 동의대가 움직였다. 동의대는 KBS 이사직을 하면서 겸임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태섭 교수를 해임했다. 그다음 방통위는 신태섭을 KBS 이사에서 해임했다. 교수에서 해임됐으니 국가공무원 결격사유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2008년 7월이었다. 이렇게 정족수를 채운 KBS 이사회는 2008년 8월 8일 (드디어) 정연주 사장 해임안을 의결했다." "8월 11일 이명박은 이사회 제청을 받아 즉각 정연주를 해임했다. 8월 12일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연주를 체포했다. 배임 혐의였다. (정연주는 2012년 최종적으로 배임 혐의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해임 처분도 취소됐다. 하지만 KBS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세상이 이상했으니까, 한명숙 사건은 당시 벌어졌던 수많은 이상한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230-1)


"법원행정처는 2015년 5월 6일 한 문건을 작성한다. 문건 제목은 '상고법원 입법을 위한 대 국회 전략'. 한명숙 사건 대법원 판결을 석 달여 앞둔 시점이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에서 한명숙 사건을 전부 무죄 취지로 파기할 경우,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법안과 관련해 김무성을 설득하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문건에 적었다. 또 다른 문건은 법원행정처가 2015년 7월 20일 작성한 '상고법원 추진을 위한 BH 설득전략'이다." "〈향후 예정돼 있는 정치인 형사사건에도 BH의 관심과 귀추 주목될 것, 주요 현안 관련 접점 모색을 위한 유화적 태도 보일 가능성 충분.〉 말을 어렵게 해놨지만 간단하다. 앞으로 정치인이 연루된 형사사건 판결이 많다. 청와대가 관심이 많다. 그래서 청와대가 당분간 법원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 뒤에 주요 정치인 형사사건 목록을 죽 적어 놨다. 첫 번째가 한명숙 사건이었다."(256-7)


"한만호는 분양 사업 실패로 회사가 부도가 나서 2008년 구속됐다. 2010년 1월 형이 확정됐다. 3월 통영교도소로 옮겼다. 형이 확정된 기결수는 통상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된다. 만기출소는 2011년 6월이었다. 한만호는 출소를 1년 3개월 앞둔 평범한 죄수였다. 통영교도소로 옮긴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3월 31일 갑자기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 한만호는 이유를 몰랐다." "서울구치소 이감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걸 한만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이감 다음 날(4월 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출정을 나간다." "특수1부에 가자 검찰은 아는 정치인이 있냐고 묻기 시작했다. 한만호는 처음에 검찰이 원하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친박계 ○○○ 의원에게 6억 원을 줬다고 진술했다. 〈특수부 소환 첫날 자금이 한나라당 의원 쪽으로 제공되었음을 이야기했다. (조사를) 종료했다. 급히 덮었다.〉" "한만호 주장의 핵심은 검찰이 이미 타깃을 정해 놨다는 말이다."(273-5)


"한만호가 검찰에 협조하기로 마음을 먹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다음 날부터 한만호는 스스로 '스토리를 구상해' 검찰에 진술하기 시작했다. 4월 5일 1차 조서를 썼고 5월 11일 마지막 5차 조서가 완성된다. 한 달 만에 모든 일이 끝났다. 검사와 수사관들은 한만호에게 편의를 제공하면서 칭찬했다. 한만호는 자괴감을 느꼈다.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검찰에 협조하는 자신과, 그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자의식이 싸움을 벌였다. 공포와 욕망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불안한 심리상태는 스스로를 '강아지'라고 부를 지경이 됐다." "〈매주 불러서 테스트하고 변호인 답변 피해가는 방법 교육하더니 아예 검찰 진술조서도 제공해주고 구치소에서도 공부하라 하며 "시험 본다"라며 테스트했다. 열심히 하는 체했다. 50을 넘기고 머리 허연 놈이 쪼다 짓을 했지만 그래도 20년 넘게 CEO 한 사람을 마치 저능아 취급했다. 그 모멸감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 밖에서였다면 눈도 마주칠 수 없는 한참 동생뻘들이다.〉"(279-80, 284-5)


"한만호가 한명숙에게 돈을 줬든 안 줬든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한 이유는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한만호의 행동이 상식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검찰이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도움을 약속했을 수도 있고, 한만호가 막연히 기대했을 수도 있다. 다만 한만호는 검찰에 협조하고 그 대가로 검찰의 도움을 받아 재기하려고 했다. 한만호는 2011년 6월 출소할 예정이었다. 검찰에서 진술한 대로 법정 증언을 마치면 그만이었다. 검찰이 명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한만호가 검찰에게 협조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밖에서 다시 사업을 일구고 가족과 즐겁게 살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왜 진술을 뒤집었을까."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한만호의 검찰 진술이 모두 진실이었다면 한명숙이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한만호는 돈을 전혀 받은 적이 없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한명숙 앞에서 일관된 태도로 사죄의 마음을 표시했다. 더구나 위증죄를 무릅쓰고."(297-8)


# 한명숙 사건 타임라인

2010.03.31 한만호 서울구치소로 이감

2010.04.03 한만호, 한명숙에게 9억 제공 검찰 진술 시작

2010.06.02 한명숙 서울시장 선거 낙선

2010.07.21 검찰, 한명숙 정치자금법위반 불구속기소

2010.12.20 한만호, 법정에서 진술 번복

2011.02.21 동료 재소자 김 씨 1차 법정 증언(한만호 진술 번복 탄핵)

2011.03.07 동료 재소자 최 씨 법정 증언(한만호의 진술 번복 탄핵)

2011.03.23 동료 재소자 김 씨 2차 법정 증언

2011.06.09 검찰, 한만호 감방 압수수색, 비망록 압수

2011.06.13 한만호 출소

2011.07.07 검찰, 한만호 위증 혐의 기소


"김 씨는 2010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89번 검찰청에 출정을 갔다. 한 달에 평균 15번이다. 주말과 휴일을 빼면 사실상 매일같이 불려나간 셈이다. 최 씨도 비슷하다. 2010년 4월부터 2011년 3월까지 1년 동안 148차례 검사실에 출정을 나갔다. 한 달 평균 12번이다." "한만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김 씨와 최 씨의 증언이 법정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었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하지만 검찰은 목적을 달성했다. 언론이 김과 최의 증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한만호가 진술을 번복한 것은 한명숙의 도움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만호는 한명숙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재개할 꿍꿍이가 있었다. 증인 김 씨와 최 씨의 논리이고 정확하게 검찰의 입장이었다 언론은 검찰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김과 최의 증언을 확대 재생산했다. 당시 실체적 진실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취재했던 언론은 없다. 이쪽 저쪽 주장만 중계했을 뿐이다. 그래서 검찰의 수고로움은 그리 헛되지 않았다. 목적은 달성했으니까."(315-8)


"2020년 뉴스타파 보도 이후 대검 감찰이 시작됐다. 한동수 감찰부장은 판사출신이다. 법조비리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2006년 김홍수 게이트 이후 2008년부터 감찰부장은 외부 공모를 통해 선발했다. 한동수는 2019년 당시 조국 법무부장관의 제청으로 감찰부장에 임명됐다. 임은정 검사는 평소 SNS나 언론을 통해 검찰 개혁을 강하게 주장해온 인물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비주류, 정확하게 말하면 왕따로 평가 받는다." "검찰 수뇌부는 한동수와 임은정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2021년 3월 2일 윤석열 검찰총장은 '한명숙 재판 모해위증 사건'의 주임검사를 허정수 감찰3과장으로 지정했다. 2020년 6월부터 감찰이 시작됐는데 공소시효 나흘을 남기고 담당 검사를 갈아치웠다. 윤석열은 3월 3일 총장직에서 사임했다. 윤석열은 임기 마지막 지시로 검사 모해위증교사 의혹을 덮었다. 3월 5일 허정수 감찰3과장은 사건을 불기소 종결처리했다. '합리적인 의사 결정'으로 내린 결론이라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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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3 - 철학적 급진주의(1815~1848)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4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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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 철학적 급진주의(1815~1848)


서언


"벤담은 『정치적 오류들』에서 이렇게 썼다.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인간은 항상 두 갈래의 이익에서 영향을 받는다. 〈전체 공동체의 (중략) 행복에 그가 참여한 몫으로써 구성되는〉 공적인 이익과, 〈공동체 전체보다 작은 일부분의 복지에 그가 참여한 몫으로써 구성되는〉 사적인 이익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자신의 사적 이익이 일반이익과 충돌할 때, 일반이익에 등을 돌리고 자기가 소속한 개별적 단체의 이익을 기필고 옹호하길 원할수록 오류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익이 일치하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그러한 일치의 실현을 위해 일하는 것이 개혁가들이 노력하는 방향이다.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와 같은 이익의 일치가 이미 달성되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는 것이 통치하는 단체에 속한 모든 회원들이 말하는 방향이다. 평화가 회복된 이후로 마침내 얘기를 들어줄 청중까지 생긴 참에, 철학적 급진파는 보수파 세력들의 모든 오류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한목소리로 공격한다."(3-4)


# 평화의 회복 :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을 가리킨다.


# 보수파의 오류

1. 경제적 오류 : 보호무역주의는 생산자 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해 나머지 시민들에게 고통을 부과한다. 따라서 집단이익은 일반이익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 방식은 모든 개인들 사이에 모든 생산물의 자유로운 교환이다.

2. 정치적 오류 : 정치 및 사법제도의 복잡성은 인민의 자유가 아니라 귀족의 특권들을 지켜주는 방호벽이다. 따라서 보통선거를 시행하여 집행자들은 의회에 의존하고, 의회는 인민 다수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3. 철학적 오류 : 귀족제는 희생의 도덕을 가르치고,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상반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이기적으로 수호함으로써 전체의 번영을 실현하라고 안내한다.


1장 / 경제사회의 자연법칙


"리카도는 정치경제학을 이제 더 이상 〈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탐구가 아니라 부가 일단 생산된 다음에 그것을 만드는 데 함께한 계급들 사이에서 그 부가, 교환과는 상관없이, 분배되는 방식에 관한 탐구로 새롭게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따져 물을 때, 리카도의 경제철학 내부에서, 정태적 관점과 동태적 관점을 구분해야 할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리카도에서 교환이라고 하는 정태적 법칙만을 중시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비록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를 확인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가치의 법칙이 실제 작동에서는 수많은 방해 요인들 때문에 한계를 만나며 리카도 자신이 그런 요인들을 엄밀하게 정의하려 애쓰고 있지만, 리카도의 신조가 낙관주의가 된다. 리카도에서 인구와 지대와 임금과 이윤의 동태적 법칙을 분석해내려는 사람이 보기에는, 리카도의 신조는 반대로 상대적 비관주의가 되고, 그러한 비관주의의 근거가 되는 원리는 이익의 자연적 균열 원리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15-6)


"〈상거래에서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동등하게 이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지주와 일반 공중 사이의 관계는 그런 거래와 같지 않다. 한쪽은 온전히 손해만 보고, 다른 한쪽은 온전히 이득만 본다〉.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에서 새로운 국면이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여기다." "이제 지대의 운동법칙이 정치경제학의 근간이 된다. 그 법칙이 일정한 〈계급〉 이익들 사이의 괴리에 관한 법칙인 만큼 정확히 그러하다. 우리는 이제 사회 안에서 자기네 노동의 산물을 서로서로 자유롭게 교환하는 개인들만이 아니라 계급들도 고찰해야만 한다. 이러한 계급들은 자연적으로 일치하는 이익들을 정부가 서로서로 맞서게 만들어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 작용한 결과다. 애덤 스미스가 단지 윤곽만을 그려 놓았던 부의 분배 이론과 조세 부담의 귀착 이론을 리카도가 풀어낸 것은 차액지대의 동태적 법칙을 기반으로 삼고, 그것이 다양한 경제적 〈계급들〉의 형성에 기여하는 경로를 연구한 덕택이었다."(37-8)


# 조세 부담의 귀착 이론 : 조세를 외견상 납부하는 사람 말고, 궁극적으로 조세 부담이 귀착되는 경제 주체가 누군지에 관한 이론. 리카도가 보기에 오직 지대에 비례한 토지세만이 지주들의 부담으로 귀착된다.


"이윤과 임금이 역비례로 변동하게 되는 법칙은 자본가 계급과 임금소득자 계급 사이에 이익의 자연적 괴리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도는 이윤의 축적이 임금 하락의 핵심적 원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리카도에 따르면, 이윤의 운동법칙은 궁극적으로 인구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된다. 지대의 징수는 생산물의 가치 가운데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분배되어야 할 부분을 모든 구획의 토지에 대하여 평준화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 반면에 인구가 증가하고 더욱 척박한 토지에도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간 생계에 필요한 식량의 가격은 끊임없이 올라가기 때문에, 노동의 자연가격도 동일한 비율로 상승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자본가가 챙길 수 있는 몫은 끊임없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생산물의 '가치'에서 이윤이 차지하는 비중은 언제나 줄어든다. 생산물의 '이윤율'은 더욱 급격한 속도로 하락한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빈곤 덕에 부유해지는 것은 제조업자가 아니라 지주다."(44-6)


"지대, 이윤, 그리고 임금의 움직임을 규율하는 법칙들은 이런 식으로 경제적 세계의 세 계급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아니라 이익의 갈등을 산출한다. 리카도의 추상적인 공식들은 그 자신의 시대가 보여주는 광경을 신실하게 표현한 것이었을 뿐이다." "균열은 1815년 이후에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고 대륙에서 산업이 재개되었다. 유럽에서 영국의 산업 생산물은 전만큼 필요하지 않았다. 영국 산업은 전만큼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낮은 임금을 받게 된 노동자들은 빵이 비싼 체제를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었다. 과거의 토지 귀족과 새로운 상업과 산업과 금융의 귀족들 사이에 궁극적인 융합이 이뤄질 수 있을지 의문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토지 귀족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지와 민중,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의 동맹이 1832년의 정치개혁과 1846년의 경제개혁으로 이어진 운동의 공식이었다. 리카도가 제창한 부의 분배 이론은 영국의 경제사에서 이렇게 획기적인 시기의 표현이었다."(49-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도는 국가가 경제적 관계들에는 가능한 한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바랐다. 신조에 차이점들이 있지만, 이 점에서 그는 케네와 애덤 스미스의 전통에 충실했다." "리카도는 산업화 수준이 높은 나라들에서 심각한 위기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정부의 책략에 의해 그런 위기를 방지하거나 단기에 종식하려 시도하면 안 된다. 〈[그런 위기는] 부유한 민족이 감수해야 하는 악이다. 이에 관해 불평한다는 것은 부유한 상인이 가난한 이웃의 오두막은 그런 위험으로부터 안전한데 자신의 선박은 바다의 위험에 노출된다고 한탄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리카도에 있어서, 경제적 자유의 이론은 많은 경우에 자연에 대한 신념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인간을 공격하는 재앙을 인간이 교정할 수 없다는 무력함의 인정이다. 이것은 낙관론이라기보다는 운명론이다. 정부는 경제적 관계들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가 시도하는 치유책이 그 폐단보다 어쩌면 더 나쁠 수가 있기 때문이다."(51-7)


"리카도는 지주를 농업종사자, 다시 말해, 제조업자처럼 자본가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 했다. 그가 역설한 유일한 이익의 대립은 모두 자기 각자의 생산물을 가급적 비싸게 팔고 싶어 하는 생산자 집단들과 소비자 전부, 다시 말해, 모든 생산물들이 최저가격에 팔리기를 누구나 예외 없이 신경 쓰는 모든 개인들 전체 사이의 대립뿐이었다. 생산자들의 집단 모두의 이익 하나하나를, 서로 모순될 것이 뻔한 일련의 세세한 법률들에 의거해서, 한꺼번에 보호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의 이익, 이런저런 경제적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들로 고찰되는 모든 개인들의 이익을 과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학파는 개인주의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 학파는 일반이익을 서로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은 집단이익들의 총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개인이익들의 총합으로 보기 때문이다."(58-9)


"사회의 번영에 대해 이토록 순조롭지 않은 여건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물들의 정상적인 진행에 인위적인 수단으로써 대응하여 평형을 잡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교환의 자연적 작동에, 자생적인 분업에 〈공급과 소비〉를 규율하는 필수적인 기능을 맡겨야 하는가? 애덤 스미스 이래 모든 경제학자들의 고전적 명제가 그것이었다. 제임스 밀도 스스로 애덤 스미스의 제자라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여기서 제임스 밀은 분업이 일을 잘 못한다고 꾸짖는다. 그 까닭은 정확히 분업이 〈흔히들 일컫듯이 실천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 우연에 의해서, 개별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개인들이 지내다 보니 알게 된 것들 덕분에 어떤 특정한 이득을 이런저런 분야에서 얻을 수 있겠다고 눈치채는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이 질문을 논제로 올리고, 분석과 종합에 의해서 업무들을 체계적이고 숙고를 거친 방식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97)


"제임스 밀은 지주의 이익과 공동체의 여타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 사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괴리를 지대에 대한 과세를 통해 교정하는 가능성을 리카도보다 더욱 명료하게 지각했다." "영국령 인도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그는 거기서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체계가 바로 그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구획되기 이전까지, 토양의 생산력은 공동체의 공동 재산이고, 그러므로 공동의 또는 공통의 목적과 요구를 위해 특별히 맞춰진 하나의 기금이다〉." "그렇다면 제임스 밀은, 자기 아들이자 제자였던 스튜어트 밀도 옹호했고, 헨리 조지 학파의 농업사회주의자들도 옹호했던, 단일토지세를 통한 해결을 옹호했을까? 전혀 아니다. 제임스 밀은, 리카도처럼, 애덤 스미스가 정리한 원리에 끝까지 충실했다. 〈공정하게 작동하는 세금이란 납세하는 여러 계급들 사이의 상대적 조건을 납세 이후에도 납세 이전과 동일하도록 놔두어야 한다〉는 것이, 〈국가의 임무 수행을 위해 요구되는 액수〉와 관련한 〈진정한 분배의 원리〉다."(99-101)


"이제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할 일이 남았다. 소득이 일단 국가에 의해 몰수되었다고 할 때, 그것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자본으로 전환할 것인가?" "가장 확실한 방법, 시행했을 때 가장 꾸준하게 효과를 보일 것으로 확인되는 방법은, 간접적이며 도덕적인 방법들이다. 입법자는 대중에 의한 제재라는 강력한 무기를 활용할 수 있다." "구빈법은 구걸 상태를 어떤 의미에서 합법화하고 재가해주는 법률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한다. 국가가 설립해야 할 것은 이 지구 위에서 심리와 생리와 물리의 법칙들이 결합해서 인간에게 제공한 실존의 조건들에 관해 사람들을 가르치는 하나의 교육체계다. 나아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제임스 밀이 맬서스의 관점에서 이론을 마련해준 저축은행이나 공제조합 같은 기관들도 마찬가지로 결혼 시기를 연기하고, 출산 횟수를 줄이며, 자본을 축적하는 성향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사람들을 신중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만들기 위한 성격이었다."(102-4)


"그렇지만 제임스 밀이나 플레이스의 신-맬서스주의에서 콩도르세의 낙관론까지는 머나먼 길이다." "콩도르세는 조건의 절대적 평등을 지향하는 항상적인 경향, 그리고 자연의 후원을 받는 경향을 인류의 역사에서 자기가 인지했다고 믿었다. 반면에 공리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의 자연법칙들이 절대적 평등에 상반되는 방향으로 설치한 난제들을 극복할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벤담은 언제나 평등을 입법에서 단지 부차적인 목표로 간주했었다." "공리주의자들에 따를 때, 재화의 평등한 분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야말로 정부가 필요한 근거 아니겠는가?" "자연은 조건들을 불평등하게 설정해 놓았고, 경제학자들은 어떤 법칙들이 작용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만약 폭력으로 이 불평등을 파괴한다면, 그 대신에 더 나쁜 불평등 또는 보편적 빈곤이 자리를 잡을 뿐이다. 폭력에 맞서서 재산의 불평등을 보호하는 것이, 애덤 스미스에게서 차용한 벤담의 정의에 따를 때, 정부의 존재 이유이자 본질이다."(108-10)


# 신-맬서스주의 : 건강에 해롭지 않은 임신 방지 예방법을 명확하고,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적시해야만 인구의 과잉 증가를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이들로 스튜어트 밀과 그의 친구들이 대표적이다.


"경제적 진보에 관해 리카도와 맥컬럭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두 가지 상반되는 사고방식은 어쩌면 두 가지 상이한 심리학, 다시 말해서, 근본적인 경제적 동기를 생각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방식에 기인한다. 맥컬럭은 이렇게 쓴다: 〈올라가려는 야망이 사회에 활력을 주는 원리다. 모든 시대 인류의 커다란 목표는 아버지들의 여건에 만족하며 지내기보다는 그보다 위로 올라가는 것─부의 저울에서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반면에 리카도와 제임스 밀이 중시한 것은, 일단 획득한 경제적 위상을 향상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유지하려는 욕구로 구성되는 동기다. 제임스 밀에 따르면, 인간은 지적인 존재로서 무한한 진보의 역량이 있다. 인간은 지적인 자본을 무한히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자로서, 인간은 단지 작은 범위에서만 저축하고 축적할 역량이있다." "이와 반대로 맥컬럭에 따르면, 자본의 축적은 쉽고 자연적이다. 그리하여 진보의 철학은 다시 한번 거의 무제한적인 낙관론이 된다."(114)


2장 / 정의의 조직과 국가의 조직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변호인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다른 사람의 변호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프랑스 사법기관의 조직을 위한 법률안 초안」(1791)에서부터 벤담이 늘 표명한 바람이었다." "이는 〈개인 각자가 자기 이익의 최고 판관〉이라는 경제적 격률을 떠올리게 하며, 〈사람은 각자가 사제〉라는 루터의 공식과 연결되는 격률이기도 하다. 자유거래의 최초 이론가들이 상업의 자유를 향한 요구에서 일종의 상업적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목도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벤담과 그 주변의 반교권주의 집단은 자기네 공리주의에서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주의에 의해 시작된 해방 운동의 마지막 단계를 목도했다. 사제의 자격과 법률가의 자격은 하나다. 판사들에 의해 제작되는 법률은 사제들에 의해 제작되는 종교와 매한가지다." "여기서도 공리의 규칙은 곧 단순성의 규칙이다. 사법개혁을 일궈내려면 기술적 체계의 복잡성에서 자연적이고 가족적인 체계의 단순성으로 탈바꿈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141-2)


"몽테스키외의 증언에 따르면 문명 세계 전체에 걸쳐서 신성시되고 있던, 자유주의적 편견들 또는 자유주의적이라고 간주되던 편견들에 벤담주의자들의 단순주의는 충격을 안겼다. 단순한 제도는 독재국가에 알맞고 자유국가에는 복잡한 제도가 어울린다는 것이 자유주의 파당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절차의 문제에 있어서, 벤담은 증언과 증거를 평가할 때 판사의 의견을 속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규칙, 그리고 몽테스키외의 제자들이 보기에는 피고인의 자유를 지켜줄 수많은 안전장치에 해당하는 그 모든 규칙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항상 요구했다. 사법부의 조직에 관해서는, 벤담은 여러 명의 판사가 재판하는 체제를 부정하고,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한 판사가 단독으로 주재하기를 바랐으며, 영국 자유주의의 자랑거리였던 배심제를 경멸하는 경향을 보였고, 법정 공방의 공개만으로도 판사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구현할 것이라며 만족할 수 있었다."(127-8)


"공론에 대한 두려움이 개인적 책임감의 핵심을 구성한다. 이는 벤담이 일찍이 도달했고 끝내 버리지 않았던 확신이다. 〈(판사들을 공론으로 통제하는) 공개가 없다면, 여타 모든 견제장치가 헛되게 된다. 공개에 비하면, 여타 모든 견제장치가 보잘것없다. 영국의 절차 체계가 최악이 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 가운데 가장 덜 나쁜 체제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여타 모든 사항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더욱 공개의 덕택이다. 사법의 영역에서 프리드리히와 예카테리나가 선의를 가지고 노력했지만 목표로 삼았던 과녁에 그렇게 한참이나 못 미친 채 실패로 끝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원칙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벤담이 『헌법전』에서 사법조직 체계의 기초로 삼은 동기는 40년 전 『파놉티콘』에서 교도소 행정 체계의 기초로 삼았던 동기와 같았다: 〈영향력이 가장 강하고, 가장 지속적이며, 가장 획일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동기, 곧 가장 광범위한 공개에 의해서 교정되는 개인적 이익〉이라는 동기였다."(181-2)


"벤담의 신조에 의해 구상되는 판사는 자기 재판정 안에서 홀로 고립된 일종의 군주로서, 공론에 의해 그에게 행사되는 순수한 도덕적 통제 말고는, 결과적인 권력 남용을 예방할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는 어떤 통제도 없이, 그리고 어떤 법률적 형식도 없이, 자기 나름의 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이런 신조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신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신조의 어법은 19세기에 카이사르주의자들이 한 인물에 의한 정부를, 그리고 그것이 한 인물에 의한 정부인 만큼만 책임을 지는 정부를, 세우자고 요구했을 때 사용한 어법과 거의 동일하다. 벤담은 가족의 비유 그리고 가정의 다스림에 대한 비유를 호출한다. 17세기에, 로버트 필머 경은 동일한 비유를 기초 삼아 하나의 신정적인 군주정 체제의 이론을 건축했었고, 로크에 의해 반박당했다. 《에든버러 평론》에 따르면, 벤담의 급진주의는, 사법절차와 사법조직의 영역에서, 절대군주제를 옹호했던 로버트 필머가 주창한 가부장 체제의 복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182-3)


# 벤담의 정치철학의 세 가지 원리

1.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리 : 입법자는 그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최대 다수(모든 개인의 최대 행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에)의 최대 행복을 지향해야 한다.

2. 자기-선호의 원리 : 모든 개인은 본질적으로도 자연적으로도 이기주의자다. 따라서 사적 이익과 일반이익의 일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3. 이익의 연합 원리(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 : 따라서 정부는 정치사회의 구성원들을 사적 이익과 일반이익이 일치하는 여건들 아래에 위치시켜야 한다.


"벤담에 따르면, 모든 쾌락들은 어떤 고통을 대가로 치르고 구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두 개의 악 중에서 더 작은 악을 선택해야 한다〉가 아마도 공리주의 철학의 근본적인 격률일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정치 분야에서) 〈행복을 최대한 가져오기 위해서〉는, 또는 벤담의 다른 표현으로는,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오직 두 가지 방법만이 있다: 공직자의 적성이 최대화되어야 하고, 비용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형용사적인 법률의 근본 문제를, 약간 수정된 형태지만, 여기서도 인지할 수 있다. 정부의 기능이 잘 수행되기 위해서는, 보수가 가능한 한 많이 지급되어야 하며, 비용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가장 광범위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비용은, 고통을 담고 있거나 쾌락의 박탈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악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비용이 가능한 한 적을수록 바람직하다. 그리하여 문제는 이윤과 손해를 계산하는 수학적인 형태로 환원된다."(188-9)


# 형용사적인 법률 : 벤담은 법률을 〈실체적〉인 법률들과 〈형용사적〉인 법률들로 나눈다. 여기서 형용사적인 법률이란 문법에서 형용사가 실사(實辭, substantive)와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듯이, 실체적인 법률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절차에 관한 법률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질적인 사안은 통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권력이 결과적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보장책이다. 통치자들이 더욱 지성적이고 더욱 활동적일수록, 남용은 어쩌면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적절한 도덕적 적성의 최대화〉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정부의 모든 구성원은, 처벌하거나 보상하는, 협박하거나 약속하는, 쾌락과 고통을 분배하는, 두 겹의 권력을 자기가 부여받은 사실을 안다. 그는 이 권력을 악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선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그가 이 권력을 선을 위해 사용하고 악을 위해 사용하지 않게끔 만사를 편성하는 것이 과제다. 이 과제의 해결은, 단일한 규칙에 달려있다: 〈신임을 최소화하라〉. 그런데 벤담이 최대행복의 원리에 접목하는 이 규칙은 기실 영국의 모든 자유주의자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피치자들이 통치자들을 불신해야 한다는 것은 휘그파 중 가장 소심한 부류에서부터 급진파 중 가장 완강한 부류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신념이었다."(189-90)


# 벤담이 헌법을 제시한 민주국가는 삼권분립의 국가가 아니라, 모든 성인 시민들을 대표하는 기관인 입법부가 〈전능한〉 힘을 발휘하는 국가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도덕적 비관론에 근거한다.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그리고 도시의 진정한 이익이나 개인의 진정한 이익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정부는 악하다. 가장 덜 나쁜 헌법이란 정부 조치의 집행에 맞서서 장애물을 가장 많이 설치해 놓은 헌법일 것이다. 여기서 혼합헌정 또는 복합헌정이라는 발상이 일어난다." "반면에 벤담의 공리주의에 의해서 정의된 급진적 국가는 주권을 인민에게 부여하는 국가다. 그 후에 인민은 일정한 수의 정치적 기능들을, 인민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거나, 주권의 일부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의지를 표명하고 이어서 그 집행을 더욱 효과적이고 더욱 집중되게 만들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아니면 간접적으로 선출된, 소수의 개인들에게 위임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인민의 대표들이 자기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혀준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주권 전부 또는 일부를 훔쳐가지 못하게 방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193)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담의 체계에서 인민의 주권은 불가항력적인 장애물에 봉착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인민주권은 모든 시민들의 주권을 의미하고, 만장일치의 투표를 함축한다. 그러나 헌법적으로 최고 권위를 가지는 의견의 분포가 분열되어 나타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가 십상이다." "이에 대해 플레이스는 〈공리의 원리는 계몽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명료하게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임스 밀은,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진술한 바 있었다: 〈이성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증거를 저울질해보고, 무게가 더 나가는 쪽으로 인도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하다. 다양한 결론들이 나름의 증거를 가지고 동등한 정성과 동등한 수완에 의해 제출되었을 때, 비록 극소수 몇몇은 잘못 이끌려 갈 수도 있으나, 대다수는 바르게 판단할 것이고, 증거의 가장 강력한 힘이 어디에 있든지 튀어나와 가장 강력한 인상을 산출하리라는 도덕적 확실성이 있다〉. 벤담주의자들은 다수의 주권을 이런 식으로 정당화했다."(194-6)


"벤담은 의회에 진출한 대표들에게 다섯 가지 〈보장〉을, 유권자들과의 관계에서, 요구한다. 이중 둘을 그는 〈일차적 또는 주된〉 보장이라고 보는데, 유권자들에 대한 의존과 왕과 궁정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이차적 또는 도구적〉인 보장도 둘인데, 매년 재선거에 임해야 한다는 조건과 공무원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서, 이것들은 주된 보장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무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보장은 벤담의 용어로 〈출석의 보편적 항상성〉이다. 다음으로는 의회의 선거인들이 규정되어야 한다. 벤담은 자신의 계획을 네 가지 요점으로 정리한다: 사실상의 보통선거권, 실천적인 평등 선거권, 투표의 자유 또는 진정성, 비밀투표." "벤담은 단순화의 원리를 적용한 결과로 〈세대주 참정권〉에서 〈사실상 보통선거권〉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했고, 그 뒤로는 그 운동의 공인된 이론가가 되었다. 〈보통선거권〉, 〈매년 의회선거〉, 그리고 〈비밀투표〉가 급진파 모임에서 으레 등장하는 공식이었다."(204-6)


"정치경제학에서, 공리주의자들은 불평등한 여건들을 자연적이고 필연적이라고 간주했다. 그들은 또한 정치적 권리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제도를 확립하더라도 경제적 여건의 불평등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부자가 빈자에게 미치는 《필연적이면서 자연적인》 영향이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라고 봤다." "공리주의자들의 요구는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시장으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하고, 비유적으로 말해서 정치적 시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도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하자는 것으로서, 이는 곧 각자가 자신의 부와 재능과 평판에 의해서 부여받는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가 사회의 진정한 이익에 해를 입히면서 엄청난 재산을 지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독점이나 특권에 의해 이 자연적 불평등이 인위적으로 악화되면 안된다. 왜냐하면, 경제적 진보를 결정할 자본의 축적에 더욱 역량이 나은 계급, 즉 중간계급이 많이 형성되는 것이 사회에 이익이기 때문이다."(224-5)


"새로운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모든 개인은 각자가 자신의 이익에 관한 최선의 판관이며, 모든 개인의 이익은 하나의 일반적 규칙으로서 동일하다고 말한다. 벤담이 추천한 체제는 이 동일성이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체제에서 정부 권위는 인민으로부터 직접 발출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집행권은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의지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헌법전』에서는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만이 끊임없이 적용된다. 벤담은 한편으로 개인들의 이익을 체계적으로 보호할 정부를 조직하고자 권위와 행정권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자들을 피치자에게 복속시킴으로써 그들의 개별적인 이익을 민족의 이익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도록 예방할 일련의 헌법적 장치들을 처방했다. 벤담이 구상한 국가는 개별적인 존재로 이해되는 개인 각자가 모든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의 통제로부터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게끔 잘 축조된 하나의 기계다."(231-2)


"벤담과 제임스 밀의 〈대의민주주의〉란 단지 순수한 민주주의를 하나의 거대한 민족의 실존적 필요에 맞춰 적응한 결과일 뿐이었다. 영국인들로 하여금 유럽에서 자유로운 인민의 본보기가 되게 만들어준 지방자치제에 영국인들이 긍지를 가지고 있던 그 시기에, 공리주의 급진파들은 대체로 프랑스의 체제에서 영감을 받아 행정적 중앙집권체제를 옹호했다. 개인의 행위든 정부의 행위든, 모든 행위는 두 가지 계기를 함축한다: 행위에 앞서는 숙고와 행위 자체의 집행이다. 권위주의자들은 의회의 일상적 절차를 단순화함으로써, 정부 조치의 집행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만들고자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헌법적 조직들을 복잡하게 편성함으로써, 행위에 앞서는 숙고의 기간을 가능한 한 연장하기를 바랐다. 벤담은 자유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박애주의적 개혁을 위해 항상 안달이 나 있던 그는, 군주적 권위주의에서 민주적 권위주의로, 앵글로색슨의 자유주의에 해당하는 중간 단계에 머무른 적 없이, 곧바로 건너갔다."(128-9)


3장 / 사유의 법칙과 행동의 규범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은 사회과학을 하나의 합리적인 과학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모든 사회 현상들이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고, 사회 세계의 모든 법칙들은 다시 〈인간 본성의 법칙들〉에 의해 해명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인간 본성의 법칙들은 그 자체로 두 종류다: 물리학자와 지질학자와 생물학자가 정의해 놓은 것을 경제학자와 법학자가 빌려와야 하는 물리적 법칙과, 그런 법칙이 있는지 여부가 아직 질문거리로 남아있는 심리적 법칙이다. 자연과학의 유형에 맞춰서 구성되는 어떤 과학적 심리학이라는 것이 가능한지마저 의문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학적 심리학이 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해 제임스 밀은 그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존재하기 시작한 다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방식을 취했다." "이 새로운 심리학의 역사에서 제임스 밀이 수행한 역할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역사에서 리카도가 수행한 역할(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 맬서스의 혁신을 포함한)과 흡사하다."(233-4)


"토머스 벨셤이나 프리스틀리 같은 여러 저술가들은 하틀리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심화해서, 그 원리들을 새로운 문제들의 해결에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의식의 상태를 탐구자의 엄밀한 관찰을 통해 포착할 수 있게 해줄 모종의 유형적 등가물을 찾기 위해서, 어떻게든 생각을 물체로 번역해보려는 고유한 경향이 이 철학에는 있었다. 예를 들어, 신경의 요소를 의식 상태의 표식 또는 원인 또는 심지어 본체와 같은 것으로까지 여길 수 있다. 단어 역시도 관념의 표식 또는 어떤 경우에는 관념의 본체인 것으로까지 여길 수 있다. 정신 현상에 관해서 에라스무스 다윈은 하나의 생리학적 이론을, 그리고 혼 투크는 하나의 언어학적 이론을 제시했다. 그들의 두 갈래 이론은 오늘날에는 불신의 대상이지만, 20여 년 동안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다윈과 투크는 제임스 밀의 사상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그를 통해서, 연상주의 심리학의 부활에도 영향을 미쳤다."(245-6)


"제임스 밀은 유명론의 명제를, 로크나 하틀리처럼, 수많은 결합된 관념들을 지칭하는데 〈복합관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원래 구분되는 여러가지 관념들이 하나의 단일한 관념으로 합쳐질 때, 진정한 심리적 결합이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화학은 자연에 관해 관해 뉴턴의 체계가, 데카르트의 물리학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맞다고 확인해줬다. 다시 한번, 인과의 고리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이해할 수 있는 연계가 아닌 것처럼 보였고, 원인을 보고 결과를 예측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산소와 수소의 속성들로부터 물의 속성을 예측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모든 자연의 법칙들이 인력의 법칙이라는 단일한 법칙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는 희망을 뉴턴의 과학이 지탱해준다손 치더라도, 한편으로는 원소들과 법칙들의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기계적 과정만으로 원소를 분리해낼 수 없는 경우에, 새로운 물체들이 결합을 통해 생성된다고 인정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260-1)


"『인간 정신 현상 분석』에 의해서, 제임스 밀이 인간 정신에 관한 〈해명〉 또는 〈이론〉이라고 부른 것이 벤담주의자들에게 확립되었다. 이론가는 〈관찰되는 사안들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에 자신을 국한하기를 그는 바랐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불행히도 이론이라는 단어는 이와 아주 다른 작업을 가리키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살펴보는─관찰하는─부분이 대체되고, 그 대신에 본질적으로 상정(想定)하는 일, 그리고 상정된 사안을을 관찰된 사안들이라고 내세우는 일에 해당하는 작업이 되고 말았다 이론은 기실 가설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론〉은 현상들을 관찰하는 데에만 목표를 두고, 생각에서 나오는 자의적인 요구들을 현상에 부과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설〉과 구분된다. 그러나 적어도 관찰된 현상들을 배열하는 과제, 그리고 가급적 손에 쥘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형태의 지식이 산출되도록 고안된 계획에 따라서 그것들을 배열하는 과제는 이론 자체의 몫으로 남는다."(266, 272)


"〈해체될 수 없는 결합의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최초로 알리고〉, 의지와 행동의 심리학에 해체될 수 없는 결합의 원리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이 바로 제임스 밀이다." "복잡한 쾌락들은 자체의 본질을 가진다. 복잡한 쾌락들은 새로운 쾌락들이고, 인간 본성을 가장 잘 음미해준다. 그것들이 그러함을 우리의 내부적 경험이 말해준다." "단순한 쾌락들은, 서로서로 결합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원인에 관한 관념들과 결합해서, 정감을 생성한다. 정감은 동기를 생성하고 동기는 성향을 생성한다. 만약 우리의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우리의 쾌락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러한 성향들이 발휘되고 이러한 습관들이 획득되기에 이르는 것이라면, 우리의 사심 없는 느낌들이, 우리에게 자체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우리 안에 자라나는 것을 이기주의 도덕이 왜 방해하겠는가? 제임스 밀의 분석은, 이런 식으로 인식된다면, 복잡한 느낌들을 파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생산할 이유와 방법을 제공해줄 것이다."(296-7)


"제임스 밀은 인류의 진보를 믿었고, 이 진보가 필연적인 법칙들에 맞춰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겼다. 이를 최초로 정형화한 사람 중 한 명인 프리스틀리에 의하면, 이 진보의 법칙은 다름 아닌 관념결합(연상)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이 법칙에 따라서 사회에서 쾌락의 총합은 고통의 총합을 능가하는 경향을 항상 보인다. 그러나 제임스 밀은, 『인간 정신 현상 분석』에서, 가장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부모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인류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감의 느낌들이 어떻게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에 의해서, 한 느낌이 다른 느낌으로부터, 생성되는지를 보이고자 시도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관계들이 증가하고 긴밀해짐에 따라,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과업을 수행하도록, 이기적 느낌과 공감적 느낌 사이의 구분이 더 이상 불가능해질 때까지, 그리고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기가 더 이상 불가능해질 때까지, 사세(事勢)에 의해서 점점 더 빡빡하게 속박을 받을 것이다."(300-1)


"자기 부모와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그들의 행복은 아이에게 욕구의 대상이 되고, 그들의 불행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제임스 밀에 따르면, 이 자연적 진보를 장려하고, 그만큼 그 아이의 주변에서 우연의 역할이나 개인적 변덕의 역할이 가능한 한 제거되도록, 그리고 공감적 정감들이 아주 세세한 대목에서까지 그 자체의 발전의 일반법칙에 부합해서 이뤄지도록, 제반 사정들을 조합하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다."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보존에서 얻는 이익은 다른 사람의 보존에서 얻는 이익에 비교할 때 무한히 크다. 그러나 그 개인이 자신의 보존을 위해 맘대로 쓸 수 있는 힘은 다른 모든 개인들이 연합해서 그에게 대항해서 쓸 수 있는 힘과 비교할 때 무한히 작다. 그렇다면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자신의 사회적 실존 조건들에 맞추는 것이 그 개인으로서는 현명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석한다면, 도덕은 일종의 낙관적 운명론이 되고, 체념과 희망이 대등한 비율로 들어가 섞인 합성물이 될 것이다."(301-2)


#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는, 소수에 비해 다수의 수가 더 많아지는 데 비례해서,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에 근접한다.


"개인적 이익과 집단적 이익을 조화시키려는 공리주의자들의 시도는, 자기희생을 격하하고 이기주의를 복권하려는 시도가 그들의 철학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했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그대의 선행이 언제나 그대 자신의 이익에 간접적으로 복무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선의를 가지고 선을 행하라─덕에 관한 벤담과 제임스 밀의 이론 전부를 이 공식이 요약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기주의는 도덕의 기초 그 자체에 자리를 잡았다. 연상주의 심리학의 모든 노력은 이기주의가 원초적 동기로서 영혼의 모든 정감들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이어진 복합물들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상응하여, 공리주의 도덕학자의 모든 노력은, 이기적이든 아니면 사심이 없든, 감성적인 충동들을 하나의 성찰적 이기주의에 종속시키기 위함이었다. 행복의 총합은 개인적 단위들로 이뤄지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각자가 이기적이기만 하면 충분하지 않겠는가?"(305, 310-1)


"공리주의자들의 도덕은 명령문으로 번역된 그들의 경제심리학이었다. 두 세기 전에 홉스는 공리의 신조 위에 사회적 독재의 완전한 체계 하나를 세웠었다. 그리고 실제로, 벤담의 사법이론의 근거가 된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는 공리주의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을 정당화했다: 이익과 의무의 연관을 개인을 위해 확립해주는 것은 주권자가 강요하는 처벌의 위협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경제학이 성장하고 승리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그 신조 안에 다른 원리가 주도적인 자리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본성에 부합하는 사회 안에서 이기주의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원리였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공리주의 이론가들에게 도덕의 근본적인 개념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교환의 개념이었다. 도덕적 행동의 동기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신뢰였다. 공리주의 도덕학자는 입법자가, 사회 안에 이기주의들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해 챙기는 일 말고는, 그 이상의 개입은 불필요하게 만들었다."(312-3)


4장 / 결론


"벤담과 그 제자들에 따르면, 윤리는 하나의 고된 기예다. 나아가, 우리가 그들을 믿는다면, 윤리라는 기예의 기초는 합리적인 과학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공리주의자들은 〈경험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방식 역시 그들 철학의 근본적 특질과 관련해서 오해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은 로크 학파에 속했고, 본유적 원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진리는 모두 경험에서 차용되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연역적 또는 종합적 방법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확인하는 데 조금이라도 인색했던 것은 아니다. 만유인력이라는 뉴턴의 법칙은 경험에서 추출된다. 그러나 일단 그 법칙이 공표되면, 단지 그 법칙을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 끊임없이 그 법칙의 응용을 종합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정당하고 유익하다." "이제, 벤담주의자들의 야심은 모든 사회과학들을 연역적 과학의 모델에 맞춰 확립하는 것이었다."(343)


"진실을 말하자면,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을 정당화하기보다는 당연한 전제로 여겼다. 하나의 사회과학이 가능하려면, 행복이 쾌락들의 총합으로 여겨지기를, 또는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쾌락들의 총합이 고통들의 총합을 상쇄하고 남는 초과분이 행복이라고 여겨지기를 그들은 원했고, 이러한 쾌락들과 고통들의 계산이 가능하기를 그들은 원했다." "벤담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주체들이 서로 다른 행복을 합산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엄밀하게 고찰하면 허구적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모든 정치적 추론이 중단되어야 하는 대전제다〉." "그러나 만일 허구가 성공적이라면, 그것을 하나의 실재로 취급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허구임을 번번이 되새기지 않는 편이 낫다. 벤담에 의하면, 공리주의 신조의 합리주의적 전제는, 만일 수많은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고 과학적 정치의 확립을 초래할 역량을 그것이 진실로 가지고 있다면, 그 결과에 의해서 정당화된다."(345-7)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에 따르면,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에 관한 틀림없는 판관이고, 자신의 이익을 자유롭게 제약 없이 추구할 수 있다.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이익의 조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입법자의 선의와 역량이 기대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공리주의는, 자체로 모순이 아니라손 쳐도, 실현되기 위해 거의 하나의 기적과 같은 우연을 전제한다. 실지로, 모든 이익들을 조화롭게 만들기에 필요한 지성적·도덕적 적성을 주권자가 가진다는 어떤 보장이 우리에게 있는가? 벤담과 그 친구들이 1807년 이후 채택한 해법의 취지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주권을 인민 전체, 또는 적어도 다수에게 귀속시켰다. 어떤 자유들은 희생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자유들은 언제나 소수의 자유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런 권력을 가진 다수는 공리주의 경제학자들의 가르침에 의해서 계몽되어 있어서 보편적 이익을 위해서 국가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알 것이다."(364)


"벤담과 그 제자들의 신조는 이제 우리 앞에서 그 모든 복잡한 실상을 드러냈다. 그것은 분명히 쾌락의 도덕인데, 스스로를 확립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했던 것처럼 정의된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를 전제하는 쾌락의 도덕이다. 이 두 가지 기초 위에 세워진 이 신조는, 어떤 의미에서 이 체계 내부에서 서로 경합하는 이 두 가지 상이한 원리에 끊임없이 호소한다. 한 원리에 따르면, 자연적으로 갈라지는 이익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입법자의 과학이 간섭해야 하고, 다른 원리에 따르면, 이기주의들의 조화에 의해서 사회 질서가 자생적으로 실현된다. 공리주의자들이 자기네 논리체계에 의해서 이들 두 원리 가운데 한쪽 또는 다른 쪽에 호소할 자격이 얼마나 있느냐가 질문거리다. 공리주의자들은 합리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라는 점 때문에 비난받을 일은 아니고, 오히려 자신들의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로부터 필연적인 결론들을 어쩌면 모두 도출하지 않은 점 때문에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367)


"벤담이 사망한 지 20년 후에, 벤담의 제자라기보다는 훨씬 더 애덤 스미스의 제자들로 바뀐 공리주의자들은 이제, 정부나 행정을 통한,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를 더 이상 자기네 신조에 포함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종류의 규제와 법률도 적대시했던 이 새로운 이론가들의 사회적 사고방식은 자유거래의 이념 그리고 이익의 자생적 일치라는 이념으로 요약되었다." "다윈이 맬서스의 법칙을 모든 생물종에게 연장하는 와중에, 버클은 역사의 철학 전부를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의 원리로 환원하고 있었다. 『사회정학』에서 허버트 스펜서는 경제학자들의 자연법칙들과 법학자들의 자연법을 명시적으로 동일시했다. 그리고 법의 원천이 실정법과 정부의 의지인 것으로 만들었던 벤담주의를 반박하는 데서 자기 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공리주의가 기초로 삼았던 두 가지 원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이제 명백해졌다. 그때는 이미 영국의 사상사 그리고 입법사에서 철학적 급진주의가 그 힘을 다 소진한 다음이었다."(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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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2 - 공리주의 신조의 진화(1789~1815)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3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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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 공리주의 신조의 진화(1789~1815)


서언


"정치 분야에서 벤담과 그의 제자 뒤몽은, 〈인간의 권리 선언〉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위해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았다. 반면에, 매킨토시와 페인과 고드윈의 경우에는, 평등한 권리의 원리보다는 이익 일치의 원리가 항상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의 공리주의는 장래의 철학적 급진주의를 예시한다. 경제 분야에서, 고드윈은 개인재산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개인들이 필요한 만큼의 생계를 평등하고 풍요롭게 제공받게 될 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았다. 맬서스는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서 언제나 근간이었던 노동의 법칙을 역설하면서,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아 어두운 면을 지적했다. 인간이 본능을 억제할 줄 모르는 한, 소비자 수가 가용한 생계자원의 양보다 계속해서 빨리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행복은 이처럼 고통스러운 조건에 종속된다. 이와 같은 두 갈래의 공리주의 중에서, 정통 교리가 되는 쪽은 고드윈의 것이 아니라 맬서스의 것이었다."(5)


"자유주의 이념들이 영국에서 재신임을 얻고 있던 시기였던 만큼, 자유주의 이념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세상 사람들 모두가 말하는 언어였던 공리의 언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았겠는가? 여기에 1808년 벤담과 제임스 밀의 만남이라는 특별한 사정이 추가된다. 오랫동안 휘그당 내 진보파였던 제임스 밀은 벤담을 자유주의의 명분으로 개종시켰고, 종내에는 정치적 급진주의의 명분으로 개종시켰다. 제임스 밀은 리카도에게도 이념을 주입했다. 리카도가 경제적 신조 전체를 통일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다가 맬서스의 두 가지 진화법칙을 결합한 것은 밀의 지령과 감독에 따른 일이었다. 결국, 제임스 밀은 가능한 모든 출판 수단을 통해서 스스로 벤담주의의 열렬한 선전가가 된다. 오랫동안, 18세기부터, 서로 격리된 개인들이 여기저기서 선전해왔던 이념들이, 이제야 비로소 제임스 밀 덕택에 그리고 벤담의 후원 아래, 공리주의 학파로 집중되었다."(5-6)


1장 / 정치적 문제


"흄과 애덤 스미스와 벤담은 저항권이라는 발상과 결부시켰기 때문에 사회계약이라는 발상을 비판했었다. 버크는 반란이라는 수단을 꾸짖을 하나의 이유가 거기에 들어있다고 봤기 때문에 사회계약론을 받아들였다. 사회계약이란 사람들이 서로 묶여있다는 뜻이지, 다수파에게 자기네 맘대로 사회적 연대의 끈을 풀어버릴 자유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반적 공리라는 관점을 취하는 사람에게는 인민주권의 교의는 오류다: 〈누구도 자신의 대의명분에 관해 스스로 판관이 될 수 없다〉. 다수의 의지가 다수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인민주권이란 다수파의 절대 권력일 뿐으로, 한 사람의 절대 권력을 뜻하는 군주주권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법을 농단하는 것이며 해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버크는 공리주의 철학에서 반민주주의 정치를 연역했다. 그가 보기에, 인권의 이론은 비현실적인 〈형이상학〉이었고, 프랑스 혁명에 책임이 있는 저자들, 문사들, 필로조프들의 작품이었다."(12-3)


"벤담은 한때 공화주의 쪽으로 기운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위기는 극히 짧았고 극히 피상적이었다. 제헌의회 연설가들의 〈망상〉과 〈열광적인 웅변〉은 이미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루이 14세 시절에 박해받은 신교도의 후손들에게 조상의 재산을 돌려주는 등의 시책은 그가 보기에 안전의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었다." "1793년에 아직 영국을 떠나지 않은 탈레랑에게 벤담은 『식민지를 해방하라!』는 제목의 소책자 한 부를 증정했다. 이 책은 원칙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하여, 식민제국의 소유가 인권이라는 신조의 관점에서 불의할 뿐만 아니라, 식민을 하는 나라의 이익에도 식민지의 이익에도 무용하고 해로움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남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를 공격하는 어리석음은 무엇 때문이냐고 1797년에 상원에서 그는 캐물었다." "벤담은 이것이 자신의 자코뱅주의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경제적 자코뱅주의를 제외하면, 벤담은 반-자코뱅파였다."(40-2)


"1789년 초에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의 말미에, 미국의 인권선언들, 특히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의 인권선언을 비판하는 내용의 주석을 첨가했다. 이 두 선언은 제1조에, 〈사람들이 사회계약을 형성할 때 후손들에게 수여할 수도 없고 박탈할 수도 없는 일정한 자연권이 있다. 재산을 획득하고 소유하고 보호할 수단, 행복과 안전을 추구하고 확보할 수단을 가지고 생명과 자유를 향유할 권리가 거기에 포함된다〉고 확인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서 '생명 또는 자유의 향유를 박탈하는' 모든 법률과 기타 명령은 무효〉라는 말과 같다─다시 말해서, 모든 형법은 예외 없이 무효라는 말인 것이다." "벤담이 생각하기에, 인민은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 인민의 선량한 즐거움만이 오직 인민을 제어할 수 있고, 어떤 다른 고삐도 거기에 추가될 수 없으며,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무효화될 수도 없다. 벤담은 박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획가였다. 그러나 그는 공화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아니었다."(44-5, 52)


"벤담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의 초점을 모은다. 첫째, 인권선언의 언어가 잘못되었다. 사람들이 평등하고, 법은 시민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억압된 평등을 회복하고 위협받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인권선언문에서 서술문으로 표현된 내용은 명령문으로 적혔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평등'해야 하고', 법은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어야 하는 것이다. 법에 대한 〈합리적 검열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차이, 균형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차이가 이것이다. 합리적 검열자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런 법의 폐지를 요구한다. 무정부주의자는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변덕을 법으로 세우면서, 인류 전체를 초대한다." "벤담이 보기에, 한 민족 전체가 숙고해서 고안했다고 자처하는 헌법은, 영국 헌정 같은 〈우연의 합성〉보다 덜 지혜롭고, 행복의 생산성도 낮다."(45-6)


"둘째, 인권선언은 네 가지 자연권의 존재를 인정한다: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 그런데 이 네 가지 자연권은 벤담의 민법철학에서 지목된 네 가지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다. 자유?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유를 자의적으로 정의하지 않는 한, 자유를 제약하지 않는 법, 따라서 이 불가양의 권리에 대한 위협이 아닌 법은 없다. 하지만 악을 행할 자유 역시 자유가 아니던가?" "재산? 재산은 법이 확정한다. 그러나 모든 세금과 모든 벌금은 재산권에 대한 공격이고, 따라서 저항과 봉기를 정당화한다. … 안전? 제약을 가하거나 처벌을 위협하는 법은 모두 안전에 대한 공격이다. 억압에 대한 저항권? 이 권리는 다른 권리들과 같은 근거에서 나오는 근본적인 권리가 아니다: 이것은 시민들이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여길 때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눈길을 돌리는 수단이다." "이 권리의 정의는 그 이론의 반역적이고 반사회적인 성격을 특히 정확하게 보여준다."(46-8)


"권리는 사회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생성된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법률적 구성이 완성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인권선언문을 작성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때까지는 '자연법'이니 '자연권'이니 하는 문구들은 장광설의 구름 속에 자신의 무지를 감추는 교사들에게나 편리한 〈무의미한 전문용어〉에 불과하다. 〈진실하고 변하지 않는 유일한 원리는 '일반이익'이다. 공리가 지고지상의 목표로서, 법과 덕과 진리와 정의를 그 안에 포섭한다〉. 그것만이 하나의 객관적 과학으로서 도덕에 관한 지식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공리의 원리 위에서 추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의견 차이가 오래 가는 경우가 확률상 드물다. 그들은 경험에 즉각 의거해서 확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의 판단을 교정할 규칙이 쉽고 단순하고 오직 한 갈래의 진로만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금세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논쟁을 매조지하는 굉장한 비결이다.〉"(54)


2장 / 경제적 문제


"〈모든 물건의 진정한 가격, 모든 물건이 그것을 취득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진실로 드는 비용은 그것을 취득하는 데 따르는 땀과 고생〉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말했다." "윌리엄 고드윈은 애덤 스미스의 명제를 이어받아, 인간의 노동 이외에 어떤 다른 부(富)도 세상에서 인정하지 않고자 했다. 그는 부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다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게끔 강제하도록 일정한 개인들에게 사회의 제도가 부여해준 권력〉일 뿐이라고 봤다." "〈부의 소유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권력은 (중략) 구매의 권력, 그 시점에 시장에 있는 모든 노동 또는 노동의 모든 산물에 대한 일정한 장악력이다. 그의 재산이 많은지 적은지는 이 권력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그것 덕분에 그가 구입할 수 있게 된 또는 장악할 수 있게 된,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양 또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산물의 양에 비례한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의 말이다. 고드윈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112-4)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보기에, 부의 불평등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적 정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정부가 그러한 불평등의 원인은 아니다. 따라서, 부의 불평등 분배는 부의 생산 자체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자연적 현상이다. 반면에 고드윈은 자본주의와 토지재산에서 상속의 효과, 다시 말해서 하나의 적극적 제도, 정부가 만든 하나의 인공물의 효과를 봤다. 〈우리의 개인적 용도에 활용되어야 할 물건들과 관련해서, 또는 우리의 근면으로 얻은 생산물과 더더욱 관련해서, 재산 또는 영구적 지배권이라는 발상은 그것을 보장해주는 모종의 법 또는 관행이라는 발상을 불가피하게 시사한다. 이런 것이 없다면 재산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재산은 어떤 형태를 띠든지 제도의 직접 간섭에 의해서 지탱된다.〉 그러므로 애덤 스미스가 정의하듯,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에 따라 받는 상태만이 아니라, 공리의 원리에 부합하게,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받는 상태를 지향해야 한다."(115-6)


"고드윈은, 애덤 스미스가 단지 혼동된 방식으로만 지각했던 실제 사회에는 이익의 조화가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된 사회 상태가 주어졌다면, 빈궁한 사람은 오직 부자가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할 때만 생계수단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부자들이 자기네 부를 소비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쓸데없는 일들을 새로 발명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혜택을 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모든 정교한 사치품, 수많은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경향이 있는 모든 발명은 행복의 확산에 정면으로 역행한다.〉 사치품이 하나 발명되었다는 것은, 일시적인 차원 이상으로는 임금이 늘어나지 않은 채, 사회의 최하위 계급에게 강요되는 노동의 양이 그만큼 증가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대다수 구성원들의 노동을 사거나 팔 권력을 사기 또는 무력으로써 찬탈한 자들은 '노동자들이 생계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관리하는 데 충분히 이골이 나 있다.〉"(119-20)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일단 토지가 점유되고 자본이 축적되고 나면, 노동자는 더 이상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전부 누리지 못한다. 그의 임금은 그 자신과 고용주 사이에서 맺어진 흥정의 결과로 정해진다. 이 흥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주인이 유리하다. 고용주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한계에 의해 제지될 때까지 임금을 낮춘다." "이제 부자가 빈자의 생계를 허락하는 것은 일과 교환한 대가다. 똑같은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교환이 이뤄지는 조건들이 교환을 불공정하게 만들고, 이익의 일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 애덤 스미스가 단지 희미하게만 감지했던 이 사실을 최초로 드러낸 사람 중 한 명이 고드윈이었다." "이처럼 개인재산 제도 위에 세워진 실제 사회에서는,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아니라 갈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는 손상되지 않는다. 개인재산 자체가 현실 속의 정부 제도에 근거하며, 인위적 문명의 상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121-3)


"문명화된 동시에 평등주의적인 사회, 아무도 다른 사람의 노동의 산물을 소유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노동의 산물도 소유하지 않는 사회, 다만 각자가 공동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필요에 비례해서 향유할 뿐인 사회, 추구해야 할 목표는 그런 사회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려면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결정적으로) 일어나야 할 변화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성향이 바뀌어, 자기가 소유할 때보다 이웃 사람이 소유했을 때 더 큰 공리를 생산할 것을 자발적으로 내놓게 되는 변화다: 이런 성향이 풍미하게 될 시대는 아직 머나먼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이 팽배한 사회가 이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리고 만사의 자연적 진보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성도 항상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시대가 올 것이다. 고드윈은 이익의 조화를 위한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이기적이기를 멈추고 분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반드시 이 최종적 상태를 지향한다고 여겼다."(123-5)


"1786년, 벤담과도 알았던 조지프 타운센드라는 경제학자가 〈인구의 원리〉라고 일컬을 수 있는 입장에 근거해서 구빈법의 문제를 다룬 한 편의 〈논문〉을 제출한다. 타운센드는 살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고, 근로의 의무를 부과하는 모든 법률적 질서는 굶주림이라는 자연의 제재에 비해 약하고 실효성이 없다는 원칙을 바탕에 깔면서 출발한다. 가난한 사람들, 다시 말해, 미래를 대비할 줄 모르고, 사회적 기능 가운데 가장 〈굴욕적이고 더럽고 비천한〉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 이로써 〈인간 행복의 재고량〉이 최종적인 회계에서 증가한다. 굶주림, 빵을 얻으려는 욕망은 가장 힘든 일도 받아들일 수 있고 부드럽게 만든다. 반면에, 구빈법은 〈세상의 본질과 구성 자체에 의해 실현될 수 없는 것을 달성하겠다고 나서는 셈으로, 어불성설과 접경지대에서 걸치는 원칙들에서 추진된다〉. 〈사회가 진보하는 와중에서〉, 누군가는 궁핍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144-5)


1797년 2월, 벤담은 피트를 상대로 「구빈법안에 관한 관찰」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의 태도가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 법안을 비난하는 데는 그것이 하나의 평등주의적인 조치임을 증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평등화 체제가 임금에 적용되었을 때 근면과 그리고 이어서 재산에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더라도) 위협을 가하는 정도는 그것이 재산에 적용될 때 재산과 그리고 이어서 근면에 위협을 가하게 될 정도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다〉. 하나의 표준임금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확립하려는 모든 시도를 그는 비난했고, 특히 피트의 법안에서 〈능력 부족 조항 또는 보조임금 조항〉이라 명명한 대목을 비난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잘못이 아니라 단지 불운일 뿐인 어떤 약점 때문에 이웃들보다 더 열악한 상태로 그를 내버려두기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벤담이 보기에, 이런 감상주의는 모든 종류의 엄밀한 법과 어울릴 수 없다."(152-4)


"구빈법의 취지를 옹호하던 맬서스가 〈맬서스주의〉로 개종하게 된 것은 1797년 고드윈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다." "콩도르세는 물었다: 〈(인간 근면 진보의 법칙과 인구 진보의 법칙) 이 두 가지 대등하게 필연적인 법칙들이 서로 모순을 일으킬 단계, (중략) 사람 수 증가가 생계수단의 증가를 능가하는 단계가 틀림없이 오지 않을까?〉 물론 고드윈과 콩도르세에 따르면, 인구와 인간 번영에서 그와 같은 퇴보는 지극히 머나먼 일이었다. 그러나 맬서스는 이렇게 말한다─모든 사람에게는 생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생계수단의 분배에서 현재와 같은 불평등을 치유할 권력이 사회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생계의 권리가 있고, 따라서 동료로부터 도움받을 권리가 있다─모든 사람에게는 생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연은 계속 수가 증가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에 충분한 양의 생계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계의 권리는 착각 속의 권리이며, 만사의 본질 안에 근거하지 않는다."(157-9)


"인간의 산업이 진보해서 풍요가 일단 실현되었다고 하면, 재산이라는 제도와 교환이라는 현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이기주의가 쓸데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분업에 기초한 이익조화의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재산, 교환, 이기주의 등의 개념들을 함축한다. 맬서스는 이익 융합의 원리를 거부했다. 선의의 감성은 이기주의로부터 점진적 진화에 의해 파생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기주의 대신에 선의로 사회의 작동 원리를 바꾸게 되면, 오늘날 단지 소수만이 느끼는 결핍의 아품을 전체 사회가 느끼도록 만드는 결과밖에 없을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문명사회를 야만사회와 구분해주는 모든 것은 확립된 재산 체제 덕분이고, 편협한 것처럼 보이는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이기주의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맬서스는 애덤 스미스의 전통을 충실하게 물려받은 수탁인으로 보인다." "이 신조를 적용한다는 것은 곧 도움받을 권리를 규탄하는 것이고, 그 권리를 인정해주는 구빈법을 규탄하는 것이다."(162-3)


"맬서스는 국가에게 교육의 기능이 맡겨지기를 바랐다.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이, 가난한 집의 아동들이 초등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구 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를 그는 옹호했다. 기존의 소규모 〈자선학교〉와는 달리, 이런 학교에서는 더욱 실천적인 성격의 교육이 이뤄져야 하고, 기하학과 역학의 요지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애덤 스미스는 이미 요구한 바 있었다. 맬서스는 이보다 나아가, 정치경제학을 인민에게 실천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기존의 움직임에 공리주의적 공식을 마련해줬다. 교회개혁파들은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성경에 관해, 신의 법에 관해, 그리고 도덕의 법칙에 관해, 지식을 가능한 한 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자연이 그들의 처분에 맡긴 쾌락의 양의 증가에 맞춰 자기네 필요의 증가를 어떻게 규율해야 할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인간 종의 발전과 증가를 결정하는 물리적 법칙을 아는 것이 '유용'하다고 주장했다."(168-9)


"이제 우리는 맬서스의 지적 태도를 정의할 수 있다. 자신의 신조로부터 그려지는 인간 삶의 모습은 〈암울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수동적 복종의 정치이론이나 악에 대해 체념하는 도덕이론이 거기서 도출되어야 한다거나, 또는 인생이라는 것이 〈더 높은 행복의 상태를 준비하기 위한 시련의 상태이자 덕의 수련장〉이라는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신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잘되기를 원한다. 육체적 필요는 정신을 발동시켜 진보의 역량을 일깨울 목적을 가진다. 인구가 식량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끔 예정된 것은, 지구 전체를 경작지로 만들도록 인간을 제약하기 위해, 이런 종류의 자극제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인구와 식량의 증가 법칙이 같았다면, 인간은 결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맬서스는 속죄라고 하는 초자연적 이념에 반해서 진보라는 인간적 이념의 편에 섰다. 실제로 그는 자유주의자이자 휘그파였고, 언제나 자유주의자이자 휘그파로 남았다."(169-70)


3장 / 벤담, 제임스 밀, 벤담주의자


"제임스 밀과 알게 된 1808년에 벤담은 예순 살이었다. 그렇지만, 괴이하게도, 영국의 공중에게 법과학의 이론가로서 그리고 개혁가로서 그의 면모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로는, 『파놉티콘』을 쓴 사람이라는 점 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는 〈한 가지 구상의 제창자〉 가운데 한 명쯤으로 치부되었을 뿐인데, 그런 사람은 당시 영국에 무척 많았다. 농업 공산주의를 설파한 스펜스, 보통선거권을 옹호한 카트라이트, 사각형 모양의 마을 구조를 통해서 인간의 도덕적 갱생을 제창한 로버트 오웬 등등이 있었다. 또는, 벤담은 어떤 보편적 해결책을 제창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감옥 개혁가 하워드라든지, 노예제에 반대했던 윌버포스와 같은 유형의 박애주의자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1808년으로 접어들 무렵, 벤담은 자신의 박애주의 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여겼다. 실망으로 끝난 박애주의는 그의 마음 안에서 인간에 대한 일반적 불신으로 탈바꿈했다."(188-9)


"제임스 밀은 여러 해 전부터 휘그당원이었고, 아마 휘그당원 중에서도 진보파였을 것이다. 그는 무한한 완성 가능성의 이론을 지지했다. 그는 가톨릭 해방을 요구한 점에서 《에든버러 평론》의 출판인들과 뜻이 같았다. 의견과 언론의 자유는 그가 가장 열렬히 옹호한 대의명분이었다. 그런데 벤담은 제임스 밀과 만나게 된 때부터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언론의 자유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임스 밀은 휘그 자유주의의 전통적 명제로 가까이 간다. 그보다 앞서 프리스틀리가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 밀은 정부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일단 전제하면 정부 자체도 하나의 조직된 통제에 복속하는 것이 순서라고 요구하기 위해,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를 기초로 삼았다. 하지만 제임스 밀은 아직 무척이나 소심했다! 그는 미국에게 하나의 민주적 헌법을 부여할 태세는 되어 있었지만, 애당초 그 헌법의 '형태를 갖추는' 임무를 인민에게 맡길 만큼 신임하지는 않았다."(198-9, 203)


"벤담은 오랫동안 민주주의 이념에 무관심했거나 심지어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환경의 영향 아래, 벤담의 내면에서 민주주의 이념은 끊임없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벤담은 카트라이트와 같은 신조를 자신도 제창하도록 모르는 사이에 이끌려왔음을 깨달았다. 단체의 혼은 정의상으로 일반적 공리의 원리에 적대적이고, 정치적 귀족계급은 하나의 폐쇄적인 단체였다. 이 귀족계급이 자신의 박애주의적 기획을 향해 보여준 무관심 때문에 벤담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다시 말해, 민주주의 운동의 다름 아닌 중심지에서 살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제임스 밀을 만났고, 밀을 통해서 프랜시스 버데트 경과 플레이스와 카트라이트를 만났다." "그러나 벤담이 한 명의 급진파로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급진당의 성격 자체가 변하게 된다. 1814년에 급진적 개혁가였던 브롬은 1818년에 버데트에 의해서 대변되고 있던 벤담과 결별한다."(215-6)


"기성 정부들을 폭력 혁명을 통해 전복하자는 요구는 이제 논외였다. 머지않아 벤담은 코베트나 헌트 같은 선동가와도 말다툼을 벌인다. 지성이 자연스럽게 진보하면 모든 정부가 쓸모를 잃고 폐지되는 날이 오리라는 고드윈과 같은 사람의 동경도 논외였다. 벤담과 밀은 정책적 사안에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가 아니라 인위적 일치 원리를 적용했다. 보통선거 제도를 통해서 그들은 일반이익, 즉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입법부에서 채택되는 결정으로부터 틀림없이 귀결될 그런 조건 아래 대의적인 정권을 조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식으로 해석된 대의제 정권의 급진적 이론은,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영국 자유주의의 명제와 동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당파는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상실하는 경향, 그리고 부르주아 소신가들의 당파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당파는 15년이 지나면, 〈급진적 지식인들〉의 당파 또는 〈철학적 급진파〉로 불리게 된다."(216-7)


"리카도와 애덤 스미스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에게 정치경제학은 산업계와 상업계의 현상에 관련된 일정 개수의 관찰들의 실천적 응용의 총합을 의미했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 정치경제학의 구성에서 '예비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그리고 오로지 예비적인 부분에 불과한,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연역추론이 귀납과 뒤섞이는데 각각의 비율은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흄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애덤 스미스는 한 명의 관찰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역사가로서 진행하기를 원했던 것이 확실하다. 애덤 스미스에게는 예비적이었던 것이 리카도에게는 정치경제학의 핵심이 된다. 이제, 정치경제학은 실천에서 유리된, 나중에 어떤 실천적 결과를 빚게 되든지 상관없이, 하나의 이론이다." "리카도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의 목적은 '법칙들'이다. 애덤 스미스에게는 정치와 입법의 한 분과였던 정치경제학이 리카도에게는 부의 자연적 분배 법칙의 이론이 된 것이다."(222)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의 체계적이고 연역적인 성격은, 벤담과 제임스 밀의 매개를 통해 소개된, 프랑스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벤담에 관해서는, 이 여부는 매우 불확실하다. 세와 리카도가 의도했듯이, 벤담도 애덤 스미스의 〈뒤범벅〉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의 정치인 스페란스키가 벤담의 『정치경제학 교본』의 원고를 1804년에 뒤몽으로부터 받아보고 칭찬한 표현들은 한 마디도 바꿀 필요 없이 그대로 세의 책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시야의 범위, 분류의 명료함과 정밀함, 그리고 편제의 체계적 성격〉을 그는 칭송했다." "그러나 벤담이 정치경제학을 체계화하기 위해 채택한 관점은 세와 리카도의 관점과는 정면에서 상반된다. 벤담에게 공리의 원리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하나의 격언, 의무체계의 기초였다. 일반적 공리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의 일치를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입법자의 기예고, 정치경제학은 그 한 분과다."(230)


# 리카도식 정치경제학의 법칙적 성격은 진보의 철학을 설파한 (콩도르세의) 계몽 철학의 영향 아래 있다. 그렇기에 이 법칙들은 정태적인 균형의 법칙만이 아니라, 동태적인 진화와 진보의 법칙이기도 하다.


"1818년의 「교육」이라는 기사에서 제임스 밀은, 인간 본성의 유용한 자질들 중에 교육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 속하는 것이 어느 정도고, 속하지 않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라고 썼다. 엘베시우스에 따르면, 불완전하고 명백히 평균 이하로 태어난 상대적으로 제한된 수의 개인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탁월해질 수 있을 만큼 대등하게 민감하다고 간주할 수 있고, 그들의 불평등을 치유할 수 있는 원인도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의견을 가진 것은 확실히 엘베시우스뿐이었다." "엘베시우스의 이론을 최초로 실험을 통해 검증하려고 제임스 밀은 자신의 맏아들 존 스튜어트를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스튜어트 밀이 교육을 마친 다음에야 벤담의 작품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아버지는 스튜어트 밀을 엘베시우스와 벤담의 신조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사상가이자 시민이자 인간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더욱 힘든 길을 따라, 온 힘을 쏟았다."(253-6)


"그러나 벤담의 제자이자, 말하자면, 자기 주군에게 봉사하는 수상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던, 제임스 밀은 개인적 교육이라는 고립된 경험에 자신의 노력을 국한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육의 보편화가 그 자체로 선이라는 점이었다." "《에든버러 평론》에 기고한 글에서 제임스 밀은, 고향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긍지를 담아, 인민 교육이라는 발상이 스코틀랜드에서 나왔음을 되새긴다. 인민에 대한 강습이 공공 서비스여야 하느냐는 질문에 관해, 그는 가급적 정부의 간섭을 멀리하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원칙에 부합할 것이며 경험에서 오는 교훈과도 어울린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인민이 극도로 무식하고 강습을 받기 위해 비용을 지불할 수 없도록 가난한 현실에서는, 국가가 개입해서 이 사업에 추동력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위임받은 권력을 국가가 남용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일종의 지성적 독재체제를 세우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보장책, 곧 언론의 자유만으로 족하다."(259, 268-9)


"철학적 급진주의라는 것이 진실로 1832년경에 있었다면, 이와 같은 집단적 교조주의가 형성된 데에는 의문의 여지없이 일반적인 근거들이 있다. 정치와 경제와 사법의 질서에서 일정한 개혁들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18세기 말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1815년에는 여론의 상당한 일부가 모두 비슷한 강도로 개혁을 부르짖었고, 그런 세력은 날마다 커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적인 존재인 인간이 이 모든 개별적인 요구들을 하나의 단일한 원리 안에 체계화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은, 이때부터 필연적이었다. 그런 원리가 공리의 원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거의 필연이었다. 왜냐하면, 그 원리가 영국적 지성의 근거였으며, 보수주의자든 민주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세습적 사유재산을 지지하는 자든, 자유거래의 산봉자든 보호주의자든, 영국의 사상가라면 모두 본능적으로 그 원리로 돌아가 준거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벤담이 그 운동의 우두머리로 선택된 것이다."(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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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1 - 벤담의 젊은 시절(1776~1789)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2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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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 벤담의 젊은 시절(1776~1789)


서문


"프랑스 혁명의 백 년은 바다 건너편에서 산업혁명의 백 년에 대응하며, 사법에 주목하면서 영혼을 강조했던 인권의 철학에는 이익의 동질성을 강조한 공리주의 철학이 대응했다. 모든 개인의 이익은 동질적이다─각 개인은 모두 자신의 이익에 관한 최고의 판관이다─그러므로 전통적 제도들이 개인들 사이에 세워놓은 인위적 장벽과, 개인들을 서로로부터 그리고 자신들로부터 보호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사회적 제약들을 모두 부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해방철학이다. 장-자크 루소의 감성적 철학과는 영감이나 원리에서 아주 다르지만, 응용에서는 여러 면에서 흡사한 해방의 철학이다. 대륙에서 인권의 철학은 결국 1848년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이익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철학이 맨체스터학파에 의한 '자유거래주의'의 승리를 낳았다." "따라서 우리의 연구는 철학의 역사에 들어갈 하나의 장(章)인 동시에 역사의 철학에 들어갈 하나의 장이기도 하다."(5-6)


# 자유거래주의(doctrine of free trade) : 국제 거래만이 아니라 국내 거래도 포함되며, 교환, 유통, 직업선택 등등 포괄적인 경제활동을 가리킨다.


서언


"1789년 초에 이르면, 사법적 논제들에 관한 한, 공리주의 신조는 모든 세목에서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리주의 신조는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공리주의 정치경제학도, 나중에 맬서스와 리카도가 애덤 스미스의 신조에 첨가한 내용을 제외하면, 가치이론이라든지 상업과 산업의 자유주의 같은 핵심 주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 이미 인기를 끌고 있었던 애덤 스미스의 발상들을 벤담은 채택했다. 『국부론』은 미국 혁명이 일어나고 중상주의가 붕괴하던 시점(1776)에 나왔다. 그만큼 당대의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책이었다. 아울러, 공리주의자들은 정치에 관해서 회의주의적이면서 권위주의적이었다. 편견을 타파하고 개혁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면 정부가 무슨 수단을 쓰든 개의치 않는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혁명과 소요의 와중에 미래의 급진주의 강령이 이미 형체를 갖춰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정치적 주제에서는 시대가 공리주의 신조를 앞질렀다."(9-10)


1장 / 기원과 원리


"법칙은 오직 일반성을 갖출 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어떤 관계가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관계가 항상적이라는 말이다. 외부의 자연에 대해 내가 뭔가 유용한 행동을 하려면,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고, 그 관계가 항상적인 것으로 족하다. 다시 말해, 첫 번째 현상을 일으키면 내가 목표로 삼은 두 번째 현상이 초래되리라고 내가 확신할 수 있다면 족한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에 관한 뉴턴의 사고방식이다." "뉴턴의 물리학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실험적 증거에 입각하면서 동시에 엄밀한 과학의 성격을 갖춘 정신의 과학과 사회의 과학이 구성된 다음이라면, 그러한 새로운 학문을 토대로 도덕이론과 법률이론도 과학적인 형태로 정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공리주의 또는 철학적 급진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은 일종의 뉴턴주의라고, 달리 말하자면, 정치와 도덕에 뉴턴주의를 적용하려는 시도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다."(12-4)


"흄의 방법 안에는 이중성이 내재한다. 어떤 측면을 보면, 그의 방법은 합리주의적이다. 도덕의 영역에서 만유인력이라는 물리적 원리에 상당하는 법칙과 원인을 확정하려 한다. 그는 도덕과학의 창시자로서, 이 도덕과학은 후일 하나의 학파가 만들어져서 연역적이며 체계적인 형태로 조직해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연상주의─흄에게 연상주의는 추론을 이어가다 보니 추론 자체에 반기를 들게 되는 추론, 곧 하나의 비합리주의였다─라는 교조는 그에게서 비롯되었고, 그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적 신조도 그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는 우주에서 필연성이라는 관념을 추방할 길을 찾아 나섰고, 새로운 과학을 창시하기는커녕 기성의 과학이 취하고 있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겉모습을 파괴하러 온 회의주의자였다고 일반적으로 간주된다. 궁극적으로 보면, 흄은 오히려 행동하는 권능을 마비시킨다는 이유로 성찰을 문죄한다."(25)


# 연상주의(associationisme) : 하나의 정신 상태가 거기서 이어지는 다른 정신 상태와 결합하는 과정으로 정신작용을 이해하는 발상


"어떤 면에서 보면, 도덕과학 자체를 흄이 이해했던 의미가 후일 공리주의 도덕학자들이 이해했던 의미와 달랐다. 그는 의문의 여지없이 뉴턴주의의 경로를 따라 진행한다. 개인적 장점이라는 관념을 분석하는 데 그는 〈실험적 방법〉을 응용하겠다고 명시적으로 천명한다. 선과 악의 구분과 여타 뚜렷한 심리적 구분 사이에서, 두 구분이 같은 비례로 같은 원인의 영향 아래 함께 변화하고 있다는 공존 관계를 만약 확정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두 구분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현상들이 서로 달라 보이거나 심지어 모순적으로 보이더라도, 일반법칙은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라인강과 론강은 같은 산에서 발원하지만, 똑같은 인력의 법칙에 따라 상반되는 방향으로 흐른다. 도덕철학에서는 공리의 원리가 만유인력에 해당한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행위가 사회의 이익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이는 정도에 따라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 상찬할 만하다고 말한다."(27-8)


"그러나 순수하게 실험적인 방법을 채택하겠다고 천명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흄은 명령을 발하는 것은 도덕철학자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찾아다닌다. 대다수 도덕학자들이 같은 경로를 따라왔으면서도 느닷없이, '있어야 할 당위'를 규정하러 나서는 것은 이상한 순환논법에 빠진 탓이다. 만일 여기에 순환논법이 끼어든 것이라면, 반론은 벤담에게도 해당한다. 왜냐하면 공리의 원리 안에서 하나의 과학적 법칙과 동시에 하나의 도덕적 명령도 발견했다는 것이 정확히 벤담의 중심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존재와 당위를 한꺼번에 가르치는 명제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흄에 따르면, 이성은 본질적으로 비활동적이다. 이성의 유일한 목적은 관념들을 비교하는 데 있기 때문에, 행위에서 선과 악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 도덕적 판단이란 관념이 아니라 인상에, 하나의 〈느낌〉에, 기반을 둔다. 도덕학자의 과제는 이 느낌을 분석하고, 도덕적 느낌이 과연 무엇인지 규명하는 데 있다."(28)


# 공리의 원리에서 이기심의 문제

1. 맨더빌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이 나름대로 화합을 이루면서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한다(그렇다면 왜 이기심을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라 명명하는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2. 하틀리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은 점진적이며 누진적이다. 즉 이기적인 것과 공감적인 것의 (무수한) 결합은 '마침내' 순수한 쾌락의 상태로 나아간다.

3. 벤담(입법자의 과제)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은 저절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인의 이익과 일반 이익을 일치시키려면 인공구조물(훌륭한 헌정구조)이 필요하다.


"엘베시우스는 흄의 선례를 따라 〈도덕학을 여타 모든 과학들처럼 취급하고, 도덕학도 물리학 같은 실험과학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가 도덕학에 부여한 원리는 〈공공의 이익, 다시 말해 최대다수의 이익〉이었고, 그는 정의(正義)를 곧 〈더 많은 수에게 유용한 행위의 실천〉과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몽테스키외의 물리적 결정론 또는 지리적 결정론 대신에 엘베시우스는 하나의 도덕적 결정론을 제출한다. 인간은 지리적 정황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정황의 산물이다─가장 넓은 의미의 교육의 산물이다. 〈정신의 불평등의 진정한 원인은 도덕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이론의 귀결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관해 획득한 지식 덕택에 인간에게는 인간을 변혁하거나 개혁할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벤담의 제자 제임스 밀과 고드윈의 제자 로버트 오웬 등, 19세기 초의 교육운동가들이 채택하는 이론이 이것이다─교육을 통해 개인들은 자기네 이익을 일반이익과 어떻게 합치시킬지를 배운다."(47-8)


"입법자는 교사,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다. 오로지 좋은 법을 통해서만 덕스러운 사람들이 형성될 수 있다." "도덕학자의 모든 연구는 상급과 벌칙에 어떤 효용이 있을지, 그리고 개인적 이익과 일반적 이익을 한데 묶는 데 그것들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를 확정하는 데 있다. 개인적 이익과 일반적 이익의 연합에서 그는 〈도덕학자들이 스스로 목표로 삼아야 할 주된 과제〉를 봤다. 그리고 이보다도 더욱 예리한 문구로 엘베시우스는 벤담이 멀지 않은 후일 실행하려 시도했던 바로 그 설계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 〈법의 탁월성은 입법자의 통일된 견해, 그리고 법률들 사이의 상호의존에 좌우된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을 확립하려면, 모든 법을 어떤 단순한 원리로 축약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공중을 위한 공리의 원리, 다시 말해, 하나의 정부 형태 치하에서 살아가는 최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공리의 원리 같은 원리로서, 아직 그 범위와 결실이 완전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도덕과 입법 전체를 망라하는 원리다.〉"(49-50)


"엘베시우스의 신조는 영국보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퍼졌다. 이탈리아의 베카리아는 유명한 저서에서 엘베시우스의 철학을 형법이라는 주제에 체계적으로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범죄와 처벌』은 1764년에 나왔다. 벤담은 엘베시우스의 제자인 만큼 베카리아의 제자이기도 하다. 벤담은 사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리의 원리를 적용하는 작업을 베카리아가 갔던 지점 너머로 연장했다. 그는 하나의 보편적 법전을 구상하고 작성하기 시작해서, 하나의 포괄적인 형법전을 일궈냈다." "벤담은 베카리아의 작은 책 도처에 산재한 여러 가지 관찰들을 활용해서 공리주의 철학에 하나의 수학적 엄밀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베카리아의 책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식이 엘베시우스에서보다 더욱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강도, 지속성, 근접성, 확실성 등, 고통의 무게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관한 베카리아의 분석에서 그는 자신의 도덕계산법을 구성하게 될 첫 번째 요소들을 발견했다."(50-1)


"그리고 공리주의 신조가 이즈음에 영국에서 인기를 누렸던 두 사람의 저자들에 의해 거의 최종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성직자로서, 한 사람은 비국교도였던 프리스틀리고 다른 한 사람은 국교도였던 페일리다. 프리스틀리는 1768년에 출판된 논문, 『정부의 첫 번째 원리, 그리고 정치적·시민적·종교적 자유』에서, 정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최상위 기준〉으로서 〈국가의 구성원들, 다시 말해, 다수 구성원의 선과 행복〉을 채택하자고 제안했다." "페일리는 1785년에 나온 『도덕정치철학의 원리』에서 공리의 원리를 도덕과 신학의 문제에 적용한다. 그는 쾌락들이 오직 지속성과 강도에서만 차이가 난다고 보면서, 행복을 쾌락의 합계로 정의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한다면, 쾌락의 합계에서 고통의 합계를 차감한 나머지로 정의한다. 도덕적 행위는 경향에 의해서 부도덕한 행위와 달라지며, 법의 기준은 공리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후 반세기 동안 페일리는 공리주의 도덕의 공식 대변인으로 남는다."(52-4)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엘베시우스에서 거의 단어 하나도 바꾸지 않고 베껴온 명제 하나로 시작한다. 〈자연은 인류를 두 개의 주권적 주인, 즉 고통과 쾌락의 다스림 아래 놓았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리키고,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이 두 주인들이다. 한편에서 옳고 그름의 표준도, 다른 한편에서 원인과 결과의 고리도 이 주인들의 왕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공리의 원리'는 이와 같은 종속 관계를 인지하고, 행복이라고 하는 대구조물을 이성과 법의 손으로 축조하는 목표를 추구하는 그런 체계를 세우기 위해 그러한 종속 관계를 대전제로 삼는다. 공리의 원리라 함은 이익 당사자의 행복을 확장하거나 아니면 축소하는 경향, 같은 뜻을 다른 말로 바꾸면, 그 행복을 증진하거나 반대하는 경향에 따라서 모든 행동을 승인하거나 부정한다는 원리를 뜻한다. 나는 모든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적 개인의 모든 행동만이 아니라, 정부의 모든 조치도 포함된다.〉"(65-6)


# 쾌락과 고통을 계량화하는 기준

1. 강도(intensity)

2. 지속성(duration)

3. 확실성(certainty) 또는 불확실성(uncertainty)

4. 근접성(proximity) 또는 거리(distance)

5. 생산성(fecundity) : 쾌락 또는 고통이 그것과 같은 종류의 감각으로 이어질 확률

6. 순수성(purity) : 쾌락 또는 고통이 그것과 상반되는 종류의 감각으로 이어지지 않을 확률

7. 범위(extent) : 쾌락이 도달하는 사람의 수, 다시 말해 쾌락의 영향을 받는 사람의 수


2장 / 벤담의 법철학


"벤담은 '단순명령적' 법과 '처벌적' 법을 구분한다. 단순명령적 법은 예컨대, 〈도둑질은 금지한다〉와 같은 형식으로 진술되고, 처벌적 법은 〈도둑질을 한 자는 누구든 교수형에 처한다〉는 형식으로 진술된다. 민법은 여러 권리들의 정의(定義)로 구성된다. 형법은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 다시 말해, 범죄의 정의로 구성된다. 사법 기능을 행사하는 주체로 간주되는 국가는 여러 가지 의무들을 창설하고,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행위는 형벌로써 억누른다. 이제, 범죄의 존재 자체는 이익 융합의 원리도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도 해당 사안에서는 자명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범죄가 저질러질 때마다, 공감의 정서보다 반감의 정서가 주도한 것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개인들이 적어도 겉보기에는 이웃의 이익을 해치는 데서 자신의 이익을 봤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가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사적인 이익이 공적인 이익과 인위적으로 일치할 수 있도록 의무와 형벌을 정의하는 일이다."(85)


"벤담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입법자들 그리고 정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철학이다. 다시 말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을 위해 쓰인 철학이다. 벤담은 루소의 나라 그리고 심지어 베카리아의 나라에서 팽배하던 인간주의 철학과 영구적으로 구별되는 색깔을 영국의 개혁철학에 이미 칠해놓았다. 엘베시우스의 제자로서 그는 인간을 쾌락과 고통의 능력을 지닌 동물로 여겼고, 입법자를 어떤 법이어야 인간의 감수성이 복종할지를 아는 현자로 여겼다. 그는 고통을 종식시키기를 희망하지 않았고, 차라리 이익의 인위적 일치를 이룩해내기 위해서 형벌을 가할 권력을 몰수하여 무엇이 유용한지를 알고 있는 입법자의 손아귀에 맡겼다. 최종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쾌락의 합계가 고통의 합계를 능가하도록 만드는 일은 입법자가 독재적으로 그리고 엄밀한 절차에 따라 고통을 개인들에게, 그들의 본능적이거나 감상적인 저항은 무시하면서, 부과함으로써 꼼꼼히 살피도록 입법자의 이성에 맡겨진다."(159-60)


"법을 자기들끼리만 알고 공중은 모르며, 따라서 법이 성문화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법률가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다. 영국에서 법의 압도적인 대부분이 법률가들의 용어로 보통법이라 불리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불문법, 옛날부터 내려오는 법정의 법학 이론들로 구성되는 까닭이 이것이다. 불문법은 〈기억할 수 없도록 아득한 옛날부터 오랫동안 사용됨으로써, 그리고 왕국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구속력과 법적 효력을 획득했다〉고 블랙스턴은 썼다." "법률가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공이익과 상반되는 자기네끼리의 이익을 찾아내는 지점이 바로 이 모호함 안에서다. 모호함 덕분에 그들은 법에 관한 지식과,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번번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자의적으로 정의할 권력을 독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의 보호자인 법이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간들의 계급보다는 개별적인 개인 각자에게 우호적이기〉를 원한다면, 법은 성문화되어야 한다."(163-5)


"이 당시 영국에서는 체계화된 성문법전에 대한 요구가 없었다. 그렇지만 유럽 전역의 개혁가들이 모방해야 할 모델로 계속해서 인용했던 것은 바로 영국의 사법제도였다. 일반적으로 영국은, 정부의 권위가 아니라 신민의 자유가 무제한이라고 간주되는 나라로 비쳤다. 개인의 행동들은, 그것을 불법이라 선언하는 법이 특정되기 전까지는, 합법으로 간주되는 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소가 이뤄진 다음에 법은 유죄판결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지연시키고 방해하기 위해 모든 주의를 다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였다. 영국은 심문이나 고문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거기엔 배심재판제가 있었다. 사법제도가 복잡한 것 자체가 신민의 자유를 위한 안전장치로 보였다." "영국은 왕이 찬탈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고 항상 의심을 받고, 그런 왕의 권력에 맞서 법률이라는 직능이 배심원단의 후원 아래 영국인들의 자유를 지켜줄 옹호자라고 전통적으로 간주되어 오던 나라다."(17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에 개혁과 박애의 거대한 운동이 벤담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있었다. 박애주의자들과 법률가들과 입법자들을 모두 몰두하게 만든 것은 형법의 문제, 교도소 체제의 문제였다. 경건주의적인 동시에 실천적이고 사회적이며 〈공리주의적〉인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전형적인 대변자들은 〈복음주의 교파〉의 사람들, 〈성자들〉, 일종의 감리교도지만 영국교회 안에 머무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혈이 낭자한 사냥의 폐지, 일요일 안식의 엄격한 준수, 노예제 폐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 개혁을 요구했다." "그 후, 1784년에 의회가 오스트레일리아로 행정적 추방이라는 편법을 개시했을 때, 벤담은 새로운 체제를 제시하면서 종래의 체제에 맞섰다. 추방이라는 발상과 대조적으로, 그는 스스로 『파놉티콘』이라고 명명한 모범 감옥의 설계도를 그려냈다. 이것은 엘베시우스에서 그가 발견한 이익의 인위적 일치라는 원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적용한 결과였다."(176-9)


3장 / 경제이론과 정치이론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 우리는 벤담의 사법이론에서 만났던 〈자연〉이라는 단어를 다시 만난다. 벤담에 따르면, 형벌의 〈자연적〉 척도는 판사에 의해 가해지는 물리적 고통의 양과 범죄로 분류된 행위에서 결과하는 물리적 고통의 양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다. 애덤 스미스에게, 가치의 〈자연적〉 척도는 그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경험된 고통의 양, 다른 말로 표현하면, 희생된 쾌락의 양과 그 물건을 획득한 결과로, 이 획득이 노동을 통해 직접 이뤄졌던지 아니면 노동에 교환이 뒤따름으로써 간접적으로 이뤄졌든지 상관없이, 기대되는 쾌락의 양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다. 형벌이 효과적이려면 형벌의 악이 범죄의 악을 보상하고 넘쳐야 한다. 노동이 효과적이려면 보상의 선이 노동의 고통을 보상하고 넘쳐야 한다." "다만 벤담의 사법이론에서 쾌락과 고통의 계산은 입법자와 행정관의 의도적인 작업에 의해 인위적으로 확정된다. 반면에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는 동일한 계산이 저절로 이뤄진다."(201-2)


"애덤 스미스는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가 성립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모든 조건들을, 물리적 조건이든지 심리적 조건이든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앞장섰다. 첫째, 어떤 시점에서든, 도처로부터, 그리고 무한한 양으로, 대상들이 시장에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조건이 더욱 잘 충족될수록 시장가격은 자연가격 언저리에서 일정한 수준으로 더 잘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인들이 언제나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완벽하게 깨우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에게는 경제 현상들의 본질이 이 마지막 조건을 충족시켜준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생산물을 얼마만큼의 양으로 시장에 내놓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인지에 관해 판매자들이 틀리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 결산에서는 개별적인 착오들이 상쇄된다." "완벽하게 이기적인 개인은,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동시에 완벽하게 합리적이라는 가정이 여기에 들어 있다."(209-10)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노동은 생산량대로 소비되지 않은 자본을 생성하고, 자본의 소유자는 '이윤'을 고려하면서 그것을 노동자에게 꿔줄 태세를 갖추게 된다. 시간이 또 흐름에 따라 토지는 모두 점유되고, 그러면 지주가 자기에게 속한 땅을 사용하는 대가로 '지대'를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윤도 지대도 노동의 '임금'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윤과 지대가 어떤 상품의 가격에 요소로서 포함된다면, 분업에 상응하지 않게 할당되는 이득이 있다는 뜻이다. 이익의 일치를 낳는 것은 교환에 근거한 분업이기 때문에, 이익의 일치는 더 이상 필연적이지 못하고 균열이 발생할 수도 있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어떤 나라에서는 〈지대와 이윤이 임금을 잡아먹는다〉고 말하며, 자기 용어로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 두 계급 사이에 이익의 필연적인 대립을 정립한다." "그리하여 그에 따르면 자연적 독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인위적 독점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교환의 메커니즘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212-3)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상업과 산업의 자유를 제창한 이론가들의 새로운 관점에서는 나약한 정치권력에도 민사를 내버려두고 레세-페르를 실천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권력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결함, 지출하고 지출을 방치한다는 심각한 결점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새로운 신조의 지지자들도 정부에게 자기관리를 촉구했다. 정부가 상업과 산업을 규제하기 위한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세금 징수 역시 간섭의 한 방식이다. 정부는 가능한 한 적게 다스리고 또 적게 지출하는 것이 적당하다─이 두 조건은 하나로 축약된다.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의 원래 의미가 이런 사고방식에 부합했었고, 1780년까지도 이 의미는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 『국부론』을 쓸 당시의 애덤 스미스, 그리고 경제개혁에 관해 유명한 연설을 행할 때의 버크는 〈정치경제학〉을 〈정치인 또는 입법자의 과학 분야〉로서, 공공재정을 사려 깊게 관리하는 과학이자 하나의 실천 이론으로 이해했다."(221-2)


"정치경제학은 하나의 '과학'과 함께 하나의 '예술'을 담고 있는데, 과학이 예술에게 아슬아슬하게 복속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벤담은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벤담은 정치경제학을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이 정의했다: 그것은 〈입법의 예술의 한 분야〉로서, 민족의 부를 이끌어갈 최선의 방향에 관한 지식이자, 〈최대행복이라는 더욱 일반적인 목적이 최대의 부와 최대의 인구를 생성함으로써 촉진되는 한, 최대행복을〉 생성해내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찾아낼 지식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명제 아래에서 노동자들, 자본가들, 지주들로 구성된 사회 안의 부의 분배를 검토해보면 이익은 자연스럽게 균열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벤담은 이 질문을 파고 들어가지 않는다." "제네바의 뒤몽에 따르면, 〈이런저런 지점에서 법이 어떠해야 하는지, 민족의 번영이 가능한 최고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법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무엇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이것이 벤담이 제안하려는 목표였다."(227-8)


"1785년 무렵에, 벤담은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과 자신의 사법이론을 융합─고리대금업을 옹호하고 식민지 보유에 반대하면서─하는데 성공했다고 봤다. 그 두 이론은 국가의 기능에 대한 정의에서 일치했다. 모를레는 셸번 경에게 이렇게 썼다. 〈자유는 자연적 상태고 제약은 반대로 강박의 상태이므로, 도둑과 살인자들만 계속해서 잡아낸다면, 자유를 돌려줌으로써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고 만사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실제로 가졌던 견해를 경구의 형식으로 표현한 셈과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부를 직접 증가시키고 자본을 직접 조성하는 것은 국가의 기능이 아니다. 국가의 기능은 부가 일단 획득된 다음에 부의 소유에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국가는 완수해야 할 사법적인 기능이 있지만, 국가의 경제적 기능은 최소한으로 축소되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이론들을 채택함으로써 벤담은 40년 후에 철학적 급진주의의 구성으로 이어지게 될 이념체계의 형성에 첫걸음을 떼었다."(245)


"프리스틀리가 1768년에 『정부의 제일 원리』에서 채택한 것은 이익의 인위적 일치라는 원리였다. 그가 이 책에서 공리의 원리와 민주주의 이념을 의식적으로 융합했기 때문에,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을 연구할 때 이 책이 중요하다. 하나의 국가에 상관되는 모든 일의 기준은 〈어떤 국가든 구성원들의, 다시 말해 구성원 다수의, 복리와 행복〉이다. 그러므로 최선의 정부 형태는 〈현재 인류의 행복에 가장 도움이 되고, 미래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형태다. 따라서 하나의 정부를 세우려고 할 때의 관건은, 흄이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통치자들의 이익과 피치자들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위태로운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이익 일치를 어떻게 확보할까? 〈그런 군주들을 한계 안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경쟁자에게 우호적일지 모를 반란에 대한 지속적인 공포뿐이다. 다시 말해, 인민에게서 애호를 받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 되게끔 만드는 것뿐이다.〉"(267-8)


# 동시에 프리스틀리는 모든 사람이 모든 기능을 선출할 권리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하여, 정치적 자유에 제한을 두었다.


"1776년에 출판한 『정부에 관한 단상』에서 벤담은 블랙스턴이 제시했던 민주주의의 고전적 정의, 즉 〈모두에 의한 정부〉를 고찰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형태의 정부는 모든 정부에 대한 부정에 해당한다며 반대한다." "민주주의 체제가 자연상태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라는 견해를 토머스 페인은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이념을 공리의 원리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는 여러 갈래지만, 해석하려는 이런 시도들은, 일단 당시에는,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한 시도에 불과했다. 이 당시에 영국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전반적인 근거로 삼았던 것은 계약의 개념, 흄과 벤담이 공리의 개념을 제시하여 대조했던 상대 개념인 바로 그 계약의 개념이었다. 보통선거권 또는 임기 1년의 의회를 요구했던 개혁가들은 그런 개혁에 효용이 있다는 이유보다는,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확립된 역사적 규약의 원래 조항들과 그것이 부합한다는 이유에서, 존중할 만한 하나의 전통과 부합한다는 이유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세웠다."(272-3)


"그러나 원초적 계약의 이론가들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정부의 역사적 기원을 하나의 협약에서 찾는 설명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정부들이 행사하는 권위의 기초도 이 협약에서 찾는다. 만일 우리가 이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주권자가 신민에게 정의와 보호를 제공하는 정도에 정확히 비례해서 신민의 의무도 부과한다는 조건부 약속이 군주나 정부를 구속하지 않는 한, 어떤 군주나 어떤 정부에도 복종을 바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명제는 일반적인 의견에 상반된다. 정부에 대한 자신의 복종이 하나의 계약에 달려있고, 정부가 그 계약의 조건들을 이행한다는 조건에 연동되어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정부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하나의 원초적 계약 위에 구축하는 이론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 하나의 추상적 이론에 불과하다. 또는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277-9)


"홉스의 전통에 충실했던 벤담은, 자기가 보기에는 여전히 만들어진 추상이자 법률적 허구일 뿐이었던 '권리'의 개념 또는 '자연권'의 개념을 위한 자리를, 자신의 사법체계에서는 허용하지 않는 편을 선호했던 것이 명백하다. 의무와 범죄는 실정법이 창조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정부가 설치된 까닭은 사람들이 권리를 가져서가 아니라 아무 권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할 수 없는 옛날부터 권리가 있어서 바람직했다고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되지만, 문제 되는 그 권리가 그때 아직 존재하지 않았음을 바로 그런 주장 자체가 증명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민주주의자들은 보통 원초적 계약과 자연권이라는 관념들을 자기네 요구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조가 공리주의 신조의 창시자들에게 안겨줬을 역겨움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다. 처음에 미국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음에는 프랑스를 장악한 인권 이론은, 공리의 원리 위에 입지를 세우고자 했던 버크와 벤담으로부터 완강한 반대를 겪어야 했다."(288-91)


"벤담이 보기에, 하나의 〈정치사회〉라는 개념, 여러 가지 제약들이 강요되고 경험되는 하나의 체제는 실증적인(positive) 개념이다. 그러나 하나의 정착된 정부에 복종하는 습관이 없는 하나의 〈자연상태〉라는 개념은, 그리고 제약의 부재를 뜻할 수밖에 없는 자유의 개념도 마찬가지로, 순전히 부정적인(negative) 개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유는 〈우리에게 제약이 부과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되고, 안전은 〈남들에게 제약이 부과되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된다. 공리에 관해 말하라.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과 인위적으로 일치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도 제약에 복속해야 함을 저 개인이 납득할 것이다. 자연권에 관해, 자연법에 관해 말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양심을 완강히 붙들고, 그리고 공감과 반감의 원리가 부추기는 대로 넘어간 상태에서, 자기 기분에 거슬린다고 생각되는 모든 법에 맞서서 무기를 들라고 초대하는 셈이다. 공리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자유의 철학이 아니다."(299-301)


"1788년 말 무렵에 벤담은 다가오는 삼부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프랑스에 자신의 성찰들로써 도움을 줄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개인은 행복을 향해 평등한 욕구를 가진다. 모든 개인들에게, 어느 한 물건이 행복을 증진하는 경향을 가늠하는 능력이 그 행복과 같다면, 〈최선의 정부 형태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아주 간단한 질문이 될 것이다. 이 사회의 모든 개인에게 투표권을 주기만 하면 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미성년자, 정신병자, 그리고 (약간 다르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로) 여성을 빼면, 선거인에게 필요한 지적인 역량의 정도를 확정하는 데 적당한 규칙이 없는 터라서, 모두에게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수여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권의 이론이 공리의 언어로 표현되는 일종의 번역이 이뤄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논리 연습의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루소의 평등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벤담은 그것을 위한 공리주의적 공식을 찾아내보자 애썼던 것이다."(308-9)


"무정부주의적 명제를 지지하기에는 엘베시우스의 제자로서 그는 과학의 통치를 너무 많이 신봉했다." "통치자들에게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벤담이 의지하는 유일한 제재는 도덕적 제재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기가 〈공론의 재판정〉이라고 부른 상시적인 관할권 아래 통치자들이 복속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 그의 태도는 엘베시우스나 볼테르, 또는 왕이 저술가들의 조언을 듣고 비판을 받고 그리고 〈계몽되어야〉 한다면서, 필요한 개혁을 실현해주기를 그리고 특권적인 단체들의 사욕에 사로잡힌 완고함을 무찔러주기를 왕에게 의존했던 대륙의 모든 철학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벤담은,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처럼, 통치자들의 이익은 피치자들의 이익과 같다고 확인하고, 따라서 통치자들을 개혁의 명분으로 개종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진정한 이익에 관해 그들을 계몽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태세가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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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흑역사 - 부지런하고 멍청한 장군들이 저지른 실패의 전쟁사
권성욱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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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양이 사자의 탈을 쓰면?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이집트 침공


"그라치아니는 젊은 시절 촉망받는 군인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알프스산맥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우면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최연소 대령으로 진급했고 두 번이나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라치아니가 명성을 떨치게 된 비결은 리비아 반란 진압과 에티오피아 정복이었다. 여기에는 나치 못지않은 잔혹함이 숨어 있었다. 1930년 그는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베두인족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만 2000여 명이 처형되었으며 키레나이카 주민 절반에 달하는 10만여 명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강제수용소 환경이 워낙 열악하여 수감자 절반이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다. 코란을 가르치는 교사 출신으로 저항운동의 수장이었던 오마르 알무크타르는 지형을 이용하여 20년 동안 게릴라전을 펼치며 이탈리아군을 괴롭혔다. 하지만 끝내 그라치아니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라치아니는 무솔리니의 골칫거리 하나를 해결해주었지만, 아랍인들은 '페잔의 도살자'라고 부르며 그를 증오했다."(25)


"무솔리니는 새롭게 리비아 총독에 임명된 그라치아니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1940년 8월 8일까지는 이집트로 진격하라고 닦달했다. 대경실색한 그라치아니는 영국군과 싸우는 일은 베두인족 게릴라를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무솔리니의 등쌀에 내몰린 그라치아니는 처음부터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렇다 할 전투가 거의 없었는데도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영국군이 측면을 기습할 수 있다는 핑계로 시디바라니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더이상 한 발짝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후퇴를 고려하거나 영국군의 반격에 대비하지도 않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으려는 노력도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상대였던 리처드 오코너 장군은 물론이고 로멜, 몽고메리 등 앞으로 북아프리카에서 명성을 떨칠 다른 장군들에 비해 어떠한 인상도 남기지 못했다."(44-9)


"전후 에티오피아 정부는 그라치아니를 전범으로 기소했다. 에티오피아 침략 당시 조직적인 학살과 독가스 사용으로 수많은 에티오피아인을 살해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탈리아인들을 전범으로 단죄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지중해에서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는 데 이탈리아의 협력이 필요했던 영국은 그라치아니가 실제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소에 반대했다." "이탈리아 법정은 그라치아니에게 나치에 협력한 죄로 19년 형을 내렸다. 하지만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호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4개월 만에 풀려났다. 연합군의 방관과 냉전 속에서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라치아니는 네오파시스트 이탈리아 사회당을 조직하여 명예 당수가 되었다. 죽는 날까지 어떤 처벌이나 책임 추궁조차 받은 일이 없이 1055년 로마에서 일흔두 살의 나이로 평온하게 사망했고 로마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아필레에 묻혔다."(57-8)


2장 일본군은 초식동물, 쌀 없으면 풀 먹으면 되지 -무다구치 렌야와 임팔작전


"〈버마에서는 주변 산들이 이처럼 푸르다. 일본인은 원래가 초식동물이다. 이만큼 푸른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임팔작전을 입안하며 보급 문제를 거론하는 참모들에게(1944년 2월)" "〈제군, 사토 사단장은 군명을 어기고 코히마 방면의 전선을 포기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며 제멋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싸워야 하는 것이다. 무기가 없다, 탄환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따위는 싸움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탄환이 없다면 총검이 있지 않은가. 총검이 없다면 맨손으로 싸우는 거다. 맨손도 쓸 수 없다면 발로 걷어차라. 발도 쓸 수 없다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일본 남자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일본은 신의 나라다. 신들께서 지켜주신다.〉 ─자신이 만든 제단 앞에서 장교들을 집결한 후 임팔작전을 훈시하면서(1944년 7월 10일)"(61-2)


"1937년 7월 7일 밤 베이핑 교외 루거우차오에서 야간 훈련중이던 현지 일본군 부대가 중국군의 도발로 병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는 허위 보고를 했다. 무다구치 렌야는 처음에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 참모를 파견했다. 하지만 공명심에 눈이 멀어서 마음을 바꾸고는 본국의 허락도 없이 반격을 지시하여 사건을 확대했다. 이것이 8년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루거우차오사건이었다." "그의 독단적인 행동은 통수권이 천황에게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월권이자 군법재판에 회부될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바꾸어 말해서 무다구치 렌야 한 사람의 자의식 과잉이 수천만 명의 사상자와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는 중일전쟁을 초래한 셈이었다. 그때까지 무다구치 렌야는 야전에서 실전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쟁을 모르면서 전쟁을 떠드는 군인이었다. 내세울 공은 없는 주제에 윗선의 눈에 들어 꽃길만 밟아온 터라 거만과 허세로 가득했다."(71-2)


"임팔작전은 단순히 중과부적으로 패했다기보다 기획 단계부터 개인적인 공명심에 눈이 먼 무책임한 졸속작전이었다. 여느 나라였다면 무다구치 렌야와 주요 지휘관, 참모들, 직속상관이 가와베 마사카즈, 데라우치 히사이치 모두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엄중한 문책을 받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처벌은커녕 군법재판조차 열리지 않았다. 일이 시끄러워지고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무다구치 렌야는 잠시 예비역에 편입된 뒤 몇 달 후에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육군예과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종전을 맞이했다. 가와베 마사카즈는 본토의 중부군 사령관으로 영전되었다. 가와베 마사카즈의 뒤를 이어 버마 방면군의 지휘를 맡은 기무라 헤이타로 중장은 포로들과 민간인들에게 워낙 잔혹하여 '버마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떨쳤다." "일본 패망 후 무다구치 렌야는 싱가포르에서 포로 학대 죄목으로 BC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지만 증거 부족을 이유로 1년 6개월 만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88-9)


3장 나야말로 히틀러의 X맨 -모리스 가믈랭과 프랑스 전역


"제1차세계대전 당시 가믈랭은 마른 전투의 작전을 기획했고 풍전등화였던 파리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제11사단을 맡아 다른 프랑스군 지휘관들처럼 맹목적인 공세제일주의에 매몰되어 병사들의 목숨을 무익하게 희생하게 하는 대신 뛰어난 전술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프랑스 북부 누와용을 탈환했다. 1918년에는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원수를 보좌하여 독일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전후 해외 주재 무관과 식민지 주둔군을 지휘했다. 1931년에는 베강을 대신하여 프랑스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가믈랭은 세계대공황이라는 매우 불리한 여건 속에서 프랑스군의 재무장과 마지노 요새의 건설을 추진했다. 이때만 해도 유럽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손꼽혔고, 심지어 독일 장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에서 그는 예전의 명성에만 연연할 뿐 변화에 둔감하고 우유부단한 고집불통의 어리석은 노인이었다."(99)


"가믈랭이 독일과의 싸움에 그토록 조심스러웠던 이유는 1914년의 악몽 때문이었다. 총사령관이었던 조프르 원수를 비롯하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복수심에 불타 있었던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광적으로 전쟁을 외치며 프랑스인들을 전란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근거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혀 현실적으로 프랑스가 독일을 이길 힘이 있는지에 대해, 전란이 불러올 엄청난 참사나 고통에 대해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맹목적인 공세제일주의는 수많은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프랑스는 영국·미국의 도움을 받아 기나긴 싸움 끝에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한 세대가 사실상 파멸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얻은 것이라고는 상처투성이 영광뿐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정치인들과 장군들은 이전의 호전적인 모습과는 정반대로 완전히 위축되었다.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는 오랜 격언을 잊은 듯이 공격이라는 말은 쏙 들어가고 이번에는 방어만이 능사라는 식이었다. 그 상징이 마지노 요새였다."(102)


"'D 계획'은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면 즉각 영불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벨기에에 파병하여 독일군과 결전을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가믈랭은 프랑스군 최강부대로 구성된 22개 사단을 벨기에 북부로 진격시켰다. 독일군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주력부대를 출동시킨 진짜 이유는 위기에 처한 동맹국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가믈랭은 벨기에를 전장으로 삼아서 제1차세계대전 때처럼 자국 영토가 또 한번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한마디로 기왕 싸워야 한다면 내 집 마당이 아니라 남의 집 마당에서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얄팍한 잔머리는 도리어 프랑스가 패망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가믈랭은 독일군이 자신의 함정에 빠졌다고 믿었지만 정작 함정에 걸려든 쪽은 자신임을 깨닫지 못했다. 프랑스군이 벨기에를 향해 신나게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의 진짜 공세는 아르덴에서 시작되었다."(112)


4장 사디스트가 사단장이 되다 -하나야 다다시와 하호작전


"어릴 때부터 군인의 길을 택한 하나야 다다시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정통 엘리트 코스인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차례로 졸업했다. 그는 관동군 사령부와 도쿄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같은 사관학교 동기생이라도 학교 성적에 따라 이후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일본군이었다.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제아무리 전장에서 뛰어난 공적을 쌓고 실력 있는 유능한 장교라 하더라도 사관학교에서 성적이 나빴다면 영원히 열등생으로 낙인찍힌 채 만년 대위나 소령에 머물러야 했다. 진급에 필수적인 육군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보니 나중에는 자신보다 한참 후배를 상관으로 모셔야 했다. 반면 공부 잘하는 우등생은 사고를 치고 말썽을 부려도 '엘리트'라는 이유로 출셋길이 보장되었다. 성적이 곧 신분이었고 인간의 가치 척도였다. 하나야 다다시도 일본군의 성적 지상주의 문화가 만들어낸 수많은 괴물 중 한명이었다."(135)


"1944년 2월, 일본 버마 방면군은 제15군 사령관 무다구치 렌야의 건의에 따라 인도 동부의 요충지 임팔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다. 북부 버마를 침공한 중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버마에서 연합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별도로 양동작전이 수립되었다. 남부 버마를 맡은 제28군 산하 1개 사단이 국지적인 공세로 연합군의 시선을 속여 제15군의 진격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호작전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역할을 맡은 부대가 하나야 다다시의 제55사단이었다." "하나야 다다시는 무조건 공격하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영국군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준비 부족이 아니라 일선 장병들의 의지 부족 탓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하나야 다다시는 불리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해당 지휘관을 불러 정신력 탓을 하면서 몇 시간씩 두들겨팬 뒤 자결을 강요했다. 단 한번도 전선을 시찰하지 않은 그의 작전 지도는 전황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비현실적인 명령만 반복했다."(144-8)


"하호작전은 졸속작전과 영국군의 강력한 저항 앞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어떤 문책이나 조사도 없었다. 오히려 버마 방면군 사령부는 임팔작전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대신 3월 8일 당초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결과는 제15군 전체의 괴멸이었다. 영국군은 일본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버마 탈환을 시작했다. 제55보병사단은 또 한번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하나야 다다시의 사령부가 있는 버마 중부 핀마나도 풍전등화였다. 제33군 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 중좌는 하나야 다다시에게 후퇴 불가와 옥쇄를 명령했다. 그동안 하나야 다다시가 부하들에게 강요했던 짓을 자신이 당하게 된 꼴이었다. 그러나 하나야 다다시는 참모장이 더이상의 손실을 줄여야 한다며 철수를 건의하자 냉큼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후퇴하여 전선 붕괴에 일조했다. 물론 이번에도 무단 후퇴의 처벌이나 문책은 없었다. 이후 타이 주둔 제18방면군 참모장으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평온한 종전을 맞이했다."(150-1)


5장 동토의 땅에서 혼쭐이 난 스탈린의 간신배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겨울전쟁


"1924년 1월 레닌이 죽었다.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레닌에 비견되는 혁명 지도자이자 소련 건국의 공신이었다. 냉혹하면서 탁월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언변, 군사적 재능을 두루 갖추었으며 군권까지 쥐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이상으로 권력욕과 냉혹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오만한 성격의 트로츠키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간부들과 손을 잡으며 은밀하게 세력을 모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헌신적인 충복이 보로실로프였다. 1년 뒤 소련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이자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미하일 프룬제가 죽자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를 그 자리에 추대했다. 우직하고 충성스러웠던 그는 스탈린을 도와 트로츠키에게 군권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공을 잊지 않았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비호 아래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35년 11월에는 세묜 부됸니, 바실리 블류헤르,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더불어 소련 5대 원수 중 한 명이 되었다."(167-9)


"1937년의 대숙청은 이전처럼 스탈린을 위협하는 몇몇 정적이나 반혁명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탈린이 보기에 2억 명에 달하는 소련 인민 자체가 잠재적인 적이었다. 소련체제를 유지하려면 자신이 나서서 당과 인민들을 더욱 옥죄어야 한다고 여겼다. 스탈린의 광기 속에서 숙청은 계급과 지위를 막론하고 소련 사회 전 방위적으로 확대되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처형하느냐였다. 스탈린은 그 숫자까지 정해주었다. 지역 책임자들은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 더 많이 잡아들이려는 실적 경쟁을 벌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편집광적인 숙청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히 거역할 배짱도 없었다. 그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장교들의 처형 명령서에 쉴새없이 서명했다. 다섯 명의 원수 중 보로실로프 자신과 부됸니를 제외한 세 명이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총살당했다."(172)


"부작용은 금방 드러났다. 서쪽에서는 야심을 드러낸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4주 만에 정복했다. 무솔리니도 발칸의 약소국 알바니아를 손쉽게 손에 넣었다 그동안 유럽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영국, 프랑스는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스탈린은 자신도 이참에 히틀러를 흉내내어 영토 확장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손바닥만한 발트 3국을 집어삼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총 한 발 쏠 일 없이 호통 한번으로 굴복시킨 스탈린의 다음 목표는 동토의 나라 핀란드였다. 하지만 핀란드는 단호히 거절했다. 말로 안 되면 다음은 주먹이었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장담했다. 1939년 11월 30일 전 전선에 걸쳐 소련군의 대규모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로실로프의 호언장담과 달리 소련군이  한 달이 넘도록 승리는커녕 한 발도 전진하지 못한 채 핀란드의 동토에 갇혀서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자 스탈린은 분통을 터뜨렸다. 1941년 1월 7일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를 자리에서 쫓아냈다."(174-80)


# 1941년 3월 12일 평화조약 체결


6장 국민과 군대보다 내 목숨이 우선 -피에트로 바돌리오와 이탈리아 패망


"전쟁보다 처세에 능했던 바돌리오는 무솔리니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20년 동안 군부의 수장으로 지냈다. 하지만 무솔리니가 좌충우돌 사고를 치면서 이탈리아의 운명은 점점 기울어졌다." "무솔리니는 뮌헨회담 때만 해도 자신이 뒤를 봐주었던 히틀러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자 질투심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기보다는 동업자의 승리에 숟가락 얹을 궁리만 했다. 프랑스 침공은 겨우 체면치레라도 했지만 그 후에는 모조리 재앙으로 끝났다. 이집트로 진격한 그라치아니는 영국군의 거센 반격으로 대패했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통치자였던 아오스타 공작은 영국령 소말리아를 점령하여 반짝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군이 반격하자 파국에 직면했다. 바돌리오는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는 데 6개월이 걸렸지만 영국군은 3개월 만에 승리했다. 50여 년에 걸친 이탈리아의 동아프리카 지배도 끝장났다. 제일 손쉬워 보였던 그리스 원정조차 참패였다."(216-7)


"시칠리아전투가 한창이던 1943년 7월 25일 밤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무솔리니의 불신임을 전격 선언했다. 다음날 무솔리니는 국왕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가 22년이나 파시스트들의 지지를 받으며 철권통치를 했다는 점에서 내전을 촉발할 수도 있었지만 정권 교체는 의외로 순탄했다. 무솔리니에게 충성하던 파시스트단체들은 침묵했고 자신들의 수령을 구출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바돌리오는 자신을 쫓아낸 무솔리니에게 복수하고 권력의 정점에 앉았다. 그는 입으로는 여전히 독일 곁을 지키면서 연합군과 싸우겠다고 했지만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독일에게 승산이 사라진 이상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이탈리아인들은 없었다."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에 깜짝 놀란 히틀러는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지금의 폴란드 켕트신)의 사령부 '볼프스샨체(Wolfsschanze, 늑대 소굴)'에서 급히 장군들을 모은 다음 〈돼지들을 그곳에서 끌어내야 한다〉라며 길길이 날뛰었다."(226-7)


"9월 8일,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에서 만슈타인을 만난 뒤 라스텐부르크로 돌아와 저녁 7시 50분 영국 BBC를 통해 이탈리아 항복 뉴스를 들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이텔에게 '악세 작전(Operation Achse)' 발동을 명령했다. 이탈리아의 점령과 유럽 각지의 이탈리아군을 무장 해제하라는 명령이었다. 로멜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3시간 뒤인 밤 11시가 되자 각지에 주둔한 이탈리아군 부대에서 독일군이 행동에 나섰다는 보고와 명령 요청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상황은 급박했다. 그 순간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 각료들, 군 수뇌부의 선택은 싸우는 것도, 독일과 협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치졸하게도 국민과 군대를 버리고 본인들만 도망칠 참이었다. 바돌리오는 국왕을 찾아가 당장 로마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한 장군이 떠나기 전에 내릴 명령이 있냐고 묻자 〈없소, 나는 바로 떠날 것이오〉라고 말하고 국왕 일행과 함께 야반도주하듯이 로마에서 빠져나갔다."(231-4)


7장 군신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이름과 성욕뿐 -나폴레옹 3세와 스당전투


"여론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시작되기만 하면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강을 자랑하는 대육군의 후예들이 베를린을 또 한번 짓밟아 프랑스의 위세를 보여줄 것이라며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군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규모의 직업군인제를 선호했던 장군들은 프로이센식 대규모 징집제도를 도입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발목을 잡았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진짜 군인이지 쓸모없는 신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쟁 직전에야 '기동근위대'라는 이름의 예비군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론적으로는 전시에 40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고 무기는 구식이었으며 치안 유지 이외에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징병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장군들과 정치인들이 프랑스 국민들을 무장시키기를 꺼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민중은 애국자가 아니라 언제라도 혁명을 일으켜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에 지나지 않았다."(292-4)


"나폴레옹 3세는 두 가지 결정적인 오판을 저질렀다. 첫번째는 전쟁이 시작되면 4년 전의 복수를 꿈꾸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호응하여 프로이센을 협공하리라는 것이었다. 또한 바이에른을 비롯한 독일 남부의 친오스트리아 왕국들도 가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스트리아는 참전을 주저했고 독일 남부 왕국들은 프랑스를 편들기는커녕 오히려 프로이센 편에 서서 프랑스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프로이센이 운이 좋았다기보다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지키도록 물밑에서 설득하고 반프랑스 감정을 선동하여 독일 전체를 하나로 결집하는 데 성공한 비스마르크의 능수능란한 외교술 덕분이기도 했다." "두번째는 프로이센의 부대 동원 능력에 대한 오판이었다. 프로이센의 동원 속도는 프랑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는 몰트케가 이끄는 참모본부가 지난 수년 동안 얻은 귀중한 경험을 활용하여 전쟁 계획과 병력 동원, 철도 수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준비한 성과였다."(296-7)


"유럽 최강자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결승전은 프로이센의 완승으로 끝났다.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배상금으로 50억 프랑을 5년 내에 납부하되, 그것을 갚을 때까지 독일군의 주둔을 허용해야 했다. 프랑스인들 입장에서 더욱 치욕적인 일은 라인강 서쪽의 알자스로렌 지역을 빼앗겼다는 점이었다. 면적 1만 4000제곱킬로미터에 프랑스 산업이 집중되어 있는 알짜배기 땅이었다. 독일인 입장에서는 그 옛날 신성한 독일의 일부였으며 2세기 전 루이 14세에게 부당하게 빼앗긴 땅을 230여 년 만에 되찾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가 두 번 다시 일어서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의 오판이었다. 프랑스는 2년 만에 배상금을 모두 지불함으로써 여전히 만만치 않은 강적임을 증명했다. 알자스로렌의 할양은 양국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 40년 뒤 제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309-10)


8장 흑인들에게는 희망을, 백인들에게는 조롱을 -오레스테 바라티에리와 아두와 전투


"이른바 '빅토리아시대'라고 불리던 그 시절(19세기 중후반) 유럽 열강은 너도나도 아시아, 아프리카를 경쟁적으로 침략하면서 식민지를 확장해나갔다. 유럽인들에게는 황금기였다. 잘 훈련된 유럽 군대와 현대적인 무기, 강철 군함의 함포 앞에서 중국이나 인도처럼 가장 오랜 역사와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비(非)유럽권 국가들조차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탈리아 역시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이탈리아는 비록 통일은 했지만 열강의 반열에 들기에는 여전히 약하고 가난했다. 하지만 식민지를 얻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포르투갈, 벨기에처럼 유럽에서는 변변찮은 약소국도 자국보다 훨씬 넓은 땅을 식민지로 경영했다. 이탈리아인들의 시선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동아프리카였다. 지형적으로 툭 튀어나온 모습이 마치 코뿔소의 뿔을 닮아 '아프리카의 뿔'이라고도 불렸다. 그때까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손길이 아직 뻗치지 않은 아프리카의 몇 안 남은 지역이었다."(323)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국경의 작은 마을 아두와에서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이 지휘하는 이탈리아군 4개 여단 1만 4000여 명은 10만 명의 에티오피아 군에게 포위 섬멸되었다. 그것도 유럽인들이 미개하다며 깔보던 아프리카인들에게 패했으니 변명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때까지 유럽 여느 나라들, 벨기에나 포르투갈 같은 약소국조차 아프리카인들에게 그 같은 참패를 당한 경우는 없었다. 국회의장 도메니코 파리니는 일기에 〈이탈리아는 끝났다〉라고 썼다.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내각은 총사퇴했다. 국왕 움베르토 1세는 3월 14일에 자신의 52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대신 '애도의 날'로 정했다. 이탈리아는 온 유럽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로마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어 무모한 원정을 강행한 정부를 비난하는 폭력 시위가 벌어졌다. 아두와전투가 이탈리인들에게 절망을 주었다면 유럽의 침략에 시달리던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유럽인들이 무적이 아니라는 (섣부른) 자신감을 주었다."(319-21)


9장 미군, 1라운드에서 KO패 당할 뻔하다 -로이드 프레덴들과 횃불작전


"1943년 1월 아르님 휘하의 독일 제10기갑사단과 제334보병사단, 이탈리아 제1보병사단 '수페르가'는 로멜과의 통신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에 나섰다." "이에 맞서 프레덴들이 내린 명령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생뚱맞은 소리였다. 그는 미 육군의 표준 명령 규약을 무시하고 자신이 만든 기묘한 은어로 명령을 내렸다. 보병대는 '워킹 보이(walking boy)', 포병대는 '팝건(popgun)'이라고 불렀다. 인명과 지명에 대해서는 〈~로 시작하는〉이라는 식으로 제멋대로 붙였다.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에서 프레덴들의 해괴한 행태는 부하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알쏭달쏭한 명령을 해석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명령 하달. 땅개 소년들, 장난감 총, 베이커의 팀과 베이커의 팀을 제외한 나머지 팀은 현재 귀관의 위치에서 북쪽에 있는 M으로 갈 것. 가능한 한 당장. 귀관의 상관은 M에서 왼쪽으로 다섯번째 사각형 격자 판에 있는 D로 시작하는 장소에서 J로 시작하는 이름의 프랑스 신사에게 보고할 것.〉"(388-9, 373)


"2월 14일 미 제1기갑사단 A전투단과 제34사단 제168연대 보병들이 지키고 있는 시디부지드를 향해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평야와 언덕 여기저기에 분산 배치된 미군을 손쉽게 포위했다. 프레덴들이 현장에 와보지도 않고 지도만 보고 배치한 결과였다. 제168연대장 토머스 드레이크 대령이 프레덴들에게 당장 철수해야 한다고 했지만 프레덴들은 구원부대를 곧 보낼 테니 진지를 굳건히 지키라고 엄명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꾸물대며 시간을 낭비했다. 다음날에야 제1기갑사단 C전투단이 출동했다. 미군 전차부대는 마치 열병식을 하듯 대오를 이루고 행군을 하던 중 독일 공군의 폭격과 매복에 당해 전차 46대와 차량 130대, 자주포 9문을 잃었다. 전차 4대만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단 한번의 전투로 사단 전력의 3분의 1이 전멸한 셈이었다. 프레덴들은 그제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포위된 미군 병사들에게 내린 명령은 그냥 알아서 탈출하라는 것이었다."(390-1)


"미 제2군단 전체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독일군은 1000명의 사상자와 전차 20대를 잃은 반면, 미군은 전사자와 부상자, 행방불명자를 포함하여 3000여 명이 넘었고 37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또한 전차 183대, 600여 대의 차량도 격파되었다. 굴욕적인 패배 소식에 워싱턴이 들끓었다. 충격을 받은 루스벨트는 〈우리 병사들이 싸움을 할 줄은 아는가?〉라고 물었다. 영국군은 경멸감을 드러내며 미군을 가리켜 〈우리의 이탈리아군〉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프레덴들은 비겁하게 모든 책임을 워드에게 떠넘겼지만 아이젠하워는 직접 제2군단을 방문했다. 그로서도 자신의 앞날이 걸린 문제였고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는 부사령관 브래들리를 비롯하여 일선 지휘관들을 일일이 만났다. 그리고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이 프레덴들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프레덴들은 해임되었다. 워드도 함께 쫓겨났다. 워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군대식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393)


10장 식초 조, 중국을 망치다 -조지프 워런 스틸웰과 버마작전


"스틸웰은 사령부에서 군림하던 프레덴들과는 정반대로 '병사들 중의 병사'였다. 그는 고위장성에 걸맞지 않게 항상 허름한 군복을 입고 야전에서 병사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직접 소총을 메기도 했다. 그런 탈권위적 모습은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귀족적인 군인보다 서민적인 군인을 선호했던 미국의 젊은 좌파 언론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스틸웰이 향한 곳은 중국이었다. 그는 일개 사단장이나 연대장이 아니라 장제스의 참모장이자 연합군 전선의 한 축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전술적인 역량보다는 외교관의 유연성과 전략가의 시야, 조직가의 수완이 더 요구되는 자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었다. 외교관으로서 빵점이라면 전략가로서는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패튼이나 로멜, 구데리안과 같은 특출한 재능을 지닌 위대한 야전군인도 아니었다 그는 버마 전선에서 정글전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었다. 현대전에서 전차와 항공기가 차지하는 중요성도 알지 못했다."(402-3)


"따라서 스틸웰은 굳이 전선에 나와 익숙지 않은 전투를 지휘하기보다 차라리 충칭에 남아 중국군을 돕고 자신과 미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뢰를 쌓는 데 노력하는 편이 최선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웅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쪽이었다. 스틸웰은 중국에 오자마자 장제스를 압박하여 최정예부대를 얻어낸 뒤 버마에서 무리한 작전을 펼쳤고 재앙적인 패배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쫓겨난 맥아더가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스틸웰 역시 명예를 회복하겠다면서 버마 탈환에 매달렸다. 그에 따르는 희생과 대가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치러야 할 몫이었다. 스틸웰은 자신의 권한을 악용하여 원조 물자의 대부분을 중국에 제공하는 대신 인도에 쌓아두었다. 이 때문에 스틸웰이 직접 지휘하는 인도 주둔 중국군 부대 이외에 중국 본토에 남은 대다수 중국군은 전쟁 내내 미군의 원조 물자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404)


"스틸웰과 장제스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양국 관계는 파국 직전에 이르렀다. 결국 루스벨트는 1944년 10월 대선에 악영향을 끼칠까 우려하여 스틸웰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여 두 사람의 기나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장제스도 승자는 아니었다. 중국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했던 루스벨트는 스틸웰의 악선전만 믿고 〈왜 장제스의 군대는 전혀 싸우지 않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중공의 교묘한 심리 전술에 넘어간 이들은 장제스보다 마오쩌둥이 더 다루기 쉽고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고 착각했다. 트루먼은 공산주의에 덜 유화적이었지만 그 역시 누가 진짜 친구이고, 누가 진짜 적인지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평화 중재자 노릇을 하겠다며 국공의 싸움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 장제스가 수세에 몰리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손을 떼었다. 1년 뒤 한반도에서 맥아더가 마오쩌둥 군대에게 여지없이 패한 뒤에야 비로소 중국 공산당이 미국의 친구가 아님을 깨달았다."(406-7)


11장 가벼운 주둥이가 프랑스군을 결딴내다 -로베르 니벨과 니벨 공세


"프랑스군에게 베르됭전투는 단순히 그때까지 수없이 반복된 여느 전투의 하나가 아니었다. 양군은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총력전이나 다름없는 싸움을 벌였다. 승리에 도취된 프랑스인들은 드디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찾았다고 우쭐했다. 그 비결이란 위대한 명장 니벨과 그가 자랑하는 '이동탄막전술(creeping barrage)'이었다. 헤이그와 달리 니벨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성공은 페탱의 강력한 병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베르됭전투 내내 프랑스군이 독일군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10개월 동안 독일군은 35만 명이 죽거나 다쳤지만 프랑스군은 4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손실되었다. 제아무리 니벨이 승리를 장담한들 독일군은 일석일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니벨과 망징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프랑스 청년들이 제아무리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들은 결과에 열광했다."(491)


# 이동탄막전술(creeping barrage) : 보병이 돌격하기 직전에 포병이 적군 진지에 엄청난 양의 포탄을 쏟아 부은 뒤 보병의 진군 속도에 맞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탄막을 전진하여 적진을 파괴하는 방식


"베르됭전투가 끝나자마자 정치인들은 조프르를 원수로 승진시키고 새로운 총사령관에 니벨을 임명했다. 니벨은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을 어겼다. 바로 보안이었다. 평소에도 자기 과시에 열을 올리던 그는 극비를 유지해야 할 계획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정치인들과 기자들에게 세부 계획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작전 지도까지 보여주었다. 런던 방문중에는 한 사교클럽에서 자리를 함께 했던 귀부인들에게도 신나게 떠벌렸다. 니벨의 계획은 영국과 프랑스 언론을 통해 모두 공개되었다. 더이상 공격이 언제 어디서 어느 부대에 의해 시작되는지는 비밀이 아니었다. 니벨의 보안 위반은 일반 병사들에게는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비밀 유지 명령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공세 성공이 기습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나사 빠진 행동이었다. 게다가 일선부대에 너무 빨리 작전 계획서를 배포하는 바람에 독일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독일군 정보부는 니벨 공세의 전모를 손쉽게 파악했다."(495)


"루덴도르프는 전선 일부를 축소하기로 했다. 그럼으로써 방어를 한층 강화하고 최일선에 배치된 일부 병력을 예비대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방어선의 이름은 '지크프리트선(힌덴부르크 선)'이었다." "니벨은 독일군이 제 발로 점령지를 포기하고 후방으로 철수중이라는 정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의 가벼운 입 때문에 정보가 독일군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리 없었다. 어쨌든 영불 연합군은 피를 흘리지 않고 잃은 땅 일부를 찾은 셈이지만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니벨의 목적은 단순히 일부 영토를 탈환하는 것만이 아니라 압도적인 포격으로 독일군의 주력을 박살내고 적진을 돌파하여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이 물러나면 작전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니벨은 독일군의 철수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엿보는 대신 당장 자신의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만 불쾌하게 여겼다. 그에게는 전략가로서의 사고가 없었다."(496-7)


"4월 16일에 개시된 니벨 공세는 그의 호언장담과 달리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5월 9일 모든 공세는 중단되었다. 15일 동안 프랑스군은 2만 8500명의 포로와 187문의 대포를 노획했으며 최대 6, 7킬로미터를 전진했다. 독일군은 16만 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군도 18만 7000명을 잃었지만 겨우 수백 미터를 전진하려고 수만 명씩 죽어나가던 당시 기준에서 보면 큰 손실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1년이나 2년 전이었다면 니벨의 공세는 충분히 성공이라고 평가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계에 직면한 프랑스군으로서는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니벨은 결정적인 승리를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실망한 프랑스군은 내부에서부터 붕괴될 뻔했다. 니벨의 실패는 다른 장군들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서가 아니라 애초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론이 급격히 약화되고 항명과 반란이 이어졌다. 5월 15일 니벨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511)


12장 내 군단은 어디로 갔나? -유재흥과 현리전투


"1949년 3월 2일 유재흥은 새로운 보직을 받았다. 막중하면서도 민감한 임무였다. 제주지구 전투사령관이 되어 지옥이나 다름없던 제주도에서 (1년여 전에 일어난) 공산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그 시절 육지에서 좌우익의 격렬한 대립과 반미 시위로 무정부의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에 비하면 제주도는 오히려 조용한 편이었다. 제주도에서도 신탁통치 찬반을 놓고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평화적으로 진행되었고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을 휩쓸었던 1946년 '10월 항쟁(대구 10·1사건)' 때도 제주도는 참여하지 않았다." "제주도가 다른 지역보다 이념색이 약했던 이유는 토지 집중화 현상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 전체의 소작농 비율이 43퍼센트에 달했던 반면, 제주도에서는 자작농 비율이 72.8퍼센트였다. 소작농은 겨우 6.3퍼센트에 불과했다. 따라서 육지와 달리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좌익에 물들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억지였다."(531-3)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미군정 산하에서의 생활고였다. 맥아더는 남한보다 일본의 안정이 더 중요했다. 흉작으로 일본의 식량 사정이 나빠지자 미 본토에서 가져오는 대신 남한에서 대량의 식량을 강제 공출했다 남한 역시 식량 사정이 나쁘다는 사실을 무시한 처사였다." "그중에서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는 제주도는 특히 고통이 심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대책을 마련하기보다 〈조선인들은 쌀이 없어도 생선과 해초로 능히 살아갈 수 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발표하여 분노를 사기도 했다. 결국 제주도민들도 폭발했다. 육지에서 이미 10월 항쟁과 미군정의 탄압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뒤인 1947년 3월 1일 제주 읍내에서 2만 명의 주민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여섯 명이 죽었다." "미군정 조사팀은 〈제주도는 전체 인구의 70퍼센트가 좌익 세력에 동조하는 좌익 거점〉이라는 허위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군정이야말로 제주도민들을 자극하여 좌익들의 온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었다."(533-5)


"유재흥이 제주도에 내려온 때는 이미 광기의 피바다가 섬 전체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그는 전임자들의 무분별한 섬멸전 대신 보다 이성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불만이 온상이었던 극우단체들의 행패부터 금지했다. 유재흥의 선무 활동은 대번에 효과를 드러냈다. 산속에서 궁지에 몰려 있던 주민들은 그제야 내려오기 시작했다. '물'을 잃은 게릴라들의 세력도 빠르게 약화되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불과 두 달 남짓 있었지만 육지로 떠나는 5월 초에는 대부분의 반란이 종식되면서 모처럼의 평화가 찾아왔다." "당시는 유재흥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조차 권력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면서 모르는 척 침묵을 지키거나 오히려 과잉 충성을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유재흥이 20대의 젊은이답지 않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제주도민의 민심을 안정시킨 사실만큼은, 그가 한국전쟁에서 군인으로서 보여준 과오를 떠나서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541-2)


"한국전쟁 당시 의정부 방면을 맡은 유재흥의 제7사단은 북한군 주력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았다. 북한군은 3개 사단 및 1개 기갑여단 등 3만 2000여 명에 달한 반면, 제7사단은 2개 연대 7000여 명에 불과했다." "유재흥이 평생 처음 경험하는 '진짜 전쟁'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동두천을 맡은 제1연대는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격퇴했다. 하지만 더이상 버티지 못한 채 그날 밤 밀려났다. 포천 방면의 제9연대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채 후퇴했다. 육군 본부에서는 부랴부랴 제3연대는 다시 제7사단에 배속하여 전선으로 출동시켰지만 병력의 대부분이 자리에 없었기에 실제 병력은 1개 대대에 불과했다. 그들 역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압도적인 공격에 간단하게 분쇄되었다. 그 와중에도 대통령 앞에서 큰소리쳤던 채병덕은 직접 전선으로 나와 사단장들에게 즉각 반격하여 적을 격퇴하라고 닦달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된 반격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개전 이틀 만에 제7사단은 붕괴되었다."(544-5)


"중국군의 제2차 춘계 공세(1951.5.16~25)를 가장 먼저 받은 쪽은 한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이었다." "현리는 공세에 밀려 철수중인 두 사단의 병력으로 넘쳐났다. 하지만 당장 오마치 고개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철수는커녕 독 안에 든 쥐가 될 판국이었다. 그러나 유재흥은 2개 사단이 아직 건재하여 오마치 고개를 충분히 탈환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그는 군단장으로서 일선에서 직접 전황을 살피고 독려하는 대신 제3사단장 김종오에게 모든 지휘를 맡기고 사령부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그 모습이 결정적이었다. 이미 적에게 퇴로가 막혀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은 〈군단장이 달아난다!〉며 패닉에 빠진 채 너도나도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리 주변은 남쪽으로 무질서하게 달아나는 한국군 병사들로 가득했다. 중화기는 모조리 버려졌다. 손에 쥐고 있는 무기는 소총에 불과했다. 게다가 패잔병의 태반은 험준한 산속에서 길을 잃은 채 탈진과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추격해온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다."(559-61)


"유재흥은 하진부리에서 일단 잔여 병력을 수습하고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최악의 위기 속에서 밴 플리트는 유재흥에게 더이상 한 발짝도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또한 폭격기를 출격시켜 맹폭격을 퍼붓고 미 제2사단과 한국군 제1군단에서 병력을 빼내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보강했다. 스스로 무너진 제3군단과 달리 백선엽의 제1군다는 북한군의 공세를 잘 막아내 동부 전선을 끝까지 지켜냈다." "결국 중국군의 5차 공세로 괴멸한 부대는 유재흥의 제3군단밖에 없었다. 게다가 5월 21일 유재흥은 중국군의 기습 공격을 막지 못하고 또 한번 돌파당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미 폭격기들은 한국군이 버리고 간 장비와 탄약을 폭격하여 파괴해야 했다. 분노가 폭발한 밴 플리트는 참모총장 정일권과 함께 직접 제3군단 사령부를 찾았다. 그는 유재흥을 크게 질책하고 그 자리에서 지휘권 박탈과 한국군 편제에서 제3군단을 아예 지우겠다고 선언했다."(561-2)


"아무리 유재흥의 추태를 더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해도 밴 플리트의 조치는 냉철하거나 불가피하다기보다는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또한 미군의 우월적인 지위를 남용한 횡포이기도 했다. 그는 전후 사정을 살피고 우리측 입장을 들어보는 대신 마치 분풀이하듯이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다." "유재흥은 그 자리에서 밴 플리트에게 맞서느니 일단 참고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는 쪽이 일을 더 키우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일본군에서 일본인을 주인으로 섬겨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주인이 하는 일이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머슴이 불만을 품을 수는 있으되 감히 대들 수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저자세가 오히려 밴 플리트의 마지막 인내심을 건드리면서 더 큰 분노를 사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더욱이 유재흥은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아니라 참모총장인 정일권, 제1군단장 백선엽과 더불어 한국군 전체를 대표하는 장군이었다."(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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