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교주의 - 17-18세기 중국 지식인의 윤리, 학문, 종족의 담론 역사 모노그래프 2
카이윙 초우 지음, 양휘웅 옮김 / 모노그래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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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명조 말기의 극심한 사회적 혼란은 농민들을 "세금과 임대료, 다수의 과도한 ‘잡판’(雜辦, 추가세금), 서리·아전·지주·신사층의 끝없는 압박이라는 삼중고"로 옭아매었다.(55) 유가 덕행의 전범이어야 할 신사층이 앞장서서 유가의 사회적 윤리를 벗어나자, 일반 백성들도 "더 이상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겠다는 욕망을 보이지 않았다."(58) 부패한 관료들은 어디에나 존재했지만, 과거에 "부패는 관료로서 있을 수 없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던 반면, 명말의 "가정연간 이후에는 부패행위가 비난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관료로서의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56) 사회 혼란은 언어의 의미를 바꾸는 지경에 이르렀고, 유가 사회의 전통 덕목들이 폐기되었다.


16세기에 나타난 가장 독특한 현상은 '대중적 유교'의 등장이다. 삼일교三一敎를 창시한 임조은은 도교와 불교의 정신수양을 받아들였고, 태주학파를 창시한 왕간은 "인간의 도덕적 의지의 실현이 ‘자연’ 그 자체에 의한 자발적인 이행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퍼뜨렸다." 왕간은 대중영합적인 공개강연을 통해 "도덕적 의지를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행동거지에 대한 엄격한 조절도, 강력한 정신적 수양도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71) 이지李贄도 "교의敎義, 구속, 규칙은 전혀 가치가 없"다고 말하면서, 일체의 외부 제약을 부정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가장 혐오한 위선僞善은 관료들이 방종과 탐욕을 버리지 않고도 성인 행세를 취하는 편리한 구실로 활용되었다.


동림서원은 태주학파의 대중영합주의에 반대하고, 엘리트가 주도하는 방식으로 유가 질서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관료들 사이에 벌어진 도덕적 공황상태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단적인 학설과 혼합주의적·대중영합적인 운동의 유행에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79)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주관적인 도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항하기 위해, 도덕적인 수양 과정에서 예禮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동림당파 학자들은 "인仁은 인간을 동물과 더욱 다르게 만들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문화의 산물"이라고 말하면서, "인仁은 사람의 자발적 행위가 아니라, 유가적 규범과의 조화 속에서 이뤄지는 행위라고 규정"하였다.(83)


이처럼 청조에 등장한 교훈주의와 의고擬古주의, 순수주의와 경전經典 지상주의의 출발점은 모두 '예禮'였다. 청초의 유학자들은 예가 "일상생활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조절하고, 감정을 적절하게 이끌며, 예의 바른 행동 양식을 분별하고, 정치질서를 유지하게 한다"는 순자의 가르침을 숭배했다. 순자는 "예의 근본적인 기능은 사회 구성원의 ‘분’(分, 신분)을 구별하는 것이다. 인仁이란 분화된 사회적 신분체계 안으로 자신을 편제編制시키는 인간의 능력과 관심을 통해서 규정된다"는 말로 신분 격차를 인정하였다. 청초의 예교주의자들에게 "공자가 말한 정명正名에서 ‘명’(名, 이름)이란 순자가 ‘분’(分, 신분)이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43)


예교주의는 정반대의 입장을 옹호하는 유효한 수단이기도 했다. 예의 실천은 청조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한족 지식인들이 "문화 정체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방법"이자, 관료로 진출한 한족 지식인들이 "자신을 명조의 체제보다는 중국의 문화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들이 이민족 통치 아래에서 (중국 문화의 보편성을) 수호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되었다.(97-8) 18세기의 유학자들은 경학經學에 대한 문헌학적 비평을 통해 예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얻고자 했다. 이는 "송대 신유학자들의 우주론적·본체론적 체계를 상당히 훼손"했으며, 송·원대에 행해진 "경전의 주석에 보이는 이단적 요소를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111-2)


강희제가 강남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자 "명조에 대한 유학자들의 충성은 시들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폭넓은 작업을 맡은 관료 밑에서 개인 막료의 길"을 걸었고, 학문의 전문직업화에 동참했다.(281-2) 송·명대 의례가 정치·문화적 상징성을 상실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만주족 정권이 정주학파와 한족의 의례를 후원한 점이었다. 정주학파에 대한 강희제의 관심 증가는 만주족에 대한 상징적 저항의 수단이었던, 송·명대의 의례를 향한 일종의 향수적 탐닉마저 의미 없게 만들었다."(283) 한학파 학자들은 "고대의 성인이 전해준 ‘의리’(義理, 도덕적 진리), 즉 도道를 경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순수주의 해석학을 경학의 기본 원리로 받아들였다.(290)


한학파 학자들이 보기에 "소학과 문헌학은 유가경전으로부터 이단적 생각을 삭제하는 강력한 무기이자, 윤리적 이론을 위한 확실한 근거"였다.(318) 한대 주석은 "주대周代와 시간상으로 가까운 것 외에도, 불교의 영향력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313) 능정감은 리理가 "추상적이고 애매하며 입증할 수 없는 개념"으로서 "도덕 수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인간의 욕망으로 더럽혀지거나 잃어버린 무언가를 회복한다는 신유학자들의 인식에서 나온 ‘복성’(復性, 본성의 회복)이라는 용어"를 삭제했다. 그는 "감정과 욕망이 예절과 조화를 이루어 표현되고 만족될 때, 인간의 본성은 조화로운 상태를 회복"한다고 주장했다.(328-9)


"명조가 붕괴한 이후, 학자들은 지방 권력의 주요한 중심으로서 혈연조직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150) "명·청 교체기에 종족宗族은 점차 신사층이 여러 문제점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한 가장 중요한 제도적 용법으로 떠올랐다." 종족은 "경전을 통해 인정받은 조직 형태"였으며, "유가의 사회윤리는 경전에 담긴 예의 실천을 통해서 친족들에게 전승"될 수 있기 때문에 순수주의자들의 구미에 맞는 제도였다.(144) 고염무를 비롯한 많은 청초 학자들은 "일반 백성에게 가치를 전달한다는 교훈주의적 접근"을 거부하고, 국가 기능을 보조하는 강력한 지역 집단으로 "종족이 안정된 사회와 군주제의 질서에 필수적인 사회 제도라고 생각했다."(160)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종족의 이론적 기초를 수립하려는 논쟁은 유학자들을 제사와 관련된 경전 연구로 이끌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세대를 고정한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정 확대된 일가의 집단을 선호"하는 방식이었다.(182) 일찍이 정이는 "모든 사람이 ‘사친’(四親, 4대의 직계조상), 즉 부·조부·증조부·고조부까지 제사를 지낼 권리를 가졌다는 점을 정당화"하는 소종小宗작업을 통해, "종자宗子에게만 직계 조상에게 제사를 올릴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는 "종자가 주관하는 공동의 의식에 친족들이 참여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여, "종자宗子에게 예禮의 권위를 집중"시켰다.(185-6)


만사대는 종법제도가 고대의 세습귀족 체제와 관련이 없으며, 대종법大宗法에서 종자의 지위는 자신의 관직 여부가 아니라 시조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시조가 명조나 그 이전의 왕조에서 관직을 가졌다면, 만주족 정권 치하에서 관계에 몸담지 않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한족 지식층도 종법 체제를 준수할 수 있었다." 종법 원칙은 "한족에게 황금시대였던 주대의 이상적 제도 중 하나"였기 때문에, 명조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족 지식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현실에 대한 적극적 거부는 "시대착오적인 제도를 중국 문화의 상징"이자, "중국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고수되어야 하는 것"으로 고착화시켰다.(208)


"18세기 중반에 유학은 한학과 송학으로 양분되었지만, 이것이 각 학파의 노선에 따라 여성의 정절 숭배에 대한 태도까지 양분시키지는 않았다."(353) "종족의 활동과 관련된 학자들의 관심은 자기 가문의 여성들이 적절한 행동을 위한 모든 규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것에 있었다."(357) "당연히 정주학파의 많은 지지자는 과부와 정혼녀의 정절을 지지"했으며, "도덕적 기준을 예교주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영향 속에서, 송대 신유학자의 윤리를 비판한 것으로 저명했던 대진 같은 주요 학자도 여성이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여성이 정절을 지키는 행위에 십분 동의했다."(354-5)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한학파 학자의 윤리도 송대 신유학자의 윤리 못지않게 획일적으로 제정된 행위준칙에 개인이 종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선호했다. 명말의 급진적 사상가들이 도덕성 발달에서 개성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한학파 학자들은 가부장적 권위이든 제도적 권위이든 간에 개인이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찬양했다."(343) 신유학이 사색과 자기반성에 몰두한다고 비난하면서 언어의 순수 해석학을 지향하던 예교주의는 "신유학 윤리의 형이상학적 상층구조"를 무너뜨렸지만, 오히려 "유가의 사회윤리를 강화"하여 결과적으로, 수절 과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패루牌樓나 시조를 모시는 건물인 조묘 같은 부정하고 싶은 유산을 남겼다.(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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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벤저민 엘먼 지음, 양휘웅 옮김 / 예문서원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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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유학자들은 "도학에 대한 자신들의 책무를 자각하고 있"었으며, "명 왕조가 몰락하기 전까지 위대한 중국의 학자들이 심취했던 가장 지배적인 사상은 내성지학內聖之學이었다."(57) 흔히 17세기에 도학道學이 결정적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되지만, 명대 중반부터 이미 "과거 시험관들은 ‘입증할 수 있는 것에 근거한 학문’을 의미하는 ‘고거학考據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16세기에 왕수인은 "사서四書에서 ‘격물格物’(사물의 연구)이라는 용어에 나타난 주희의 ‘현상론자’적 입장을 통렬히 논박하였다."(161) 왕수인의 비판 정신을 이어받은 태주학파泰州學派는 "경전이 절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보고寶庫"가 아니라는 말로, 비평의 자율성을 강조하였다.(162)


여기에 "만주족의 승리가 가져온 폭발적인 영향은 청대 고증학의 내부적인 성립과 방향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많은 이들이 "명의 멸망을 도덕적 쇠약과 사상적 혼돈의 결과로서 해석했고, 이러한 결과는 공허하고 피상적인 도학道學의 공리공론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173-4) 강남 지역의 학자들은 "자기수양만으로 효과적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역동적인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면서, "실증할 수 있는 주제로만 학술 담론을 제한"하였다.(178-9) "도학적 해석의 장막 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경전과 역사 서적에 보이는 ‘명칭과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名物)을 설명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166)


청조淸朝는 비정치적 학술 활동을 장려하면서 대규모 편찬 사업을 벌여 학자들의 생활 양식을 규정하였다. "지식인들은 서원, 고위 관료들의 막부幕府, 지방과 국가의 편찬 사업 등의 학술 작업에 고용"되었으니, "많은 청대의 학자들에게 학술은 생계의 수단이었다."(241) 그 정점에 달한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 작업을 통해, "편찬자들은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작품에 대한 비평적인 해제를 작성하였고, 전서全書 내에 포함될 가치가 있는 책을 선정하였으며, 선정된 작품 중에서 당시 남아 있는 가장 훌륭한 판본을 기준으로 정교한 교감 작업을 진행하였다."(257) "18세기의 고증학자들은 언제 어느 곳이든지, 학술 후원과 관료의 막우직幕友職을 받아들였다."(266)


고증학의 혁신은 방법론상의 개혁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실증을 중시하는 고증학자들의 목적은 "‘과학적 또는 객관적인 것에 있지 않았고, 고대 성현들의 생각과 의도를 다시 찾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대 경전의 언어를 사용하려는 유학자들의 책무와 관련이 있었다."(15) 이들은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처럼 사회 혁명가나 정치혁명가라기보다는 도덕적인 개혁가로서 활동"했고, 정확한 연구와 재구성을 통해 "고대 경전 본래의 순수한 언어"에 기반한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56) "청대 고증학의 학문적인 '의도'와 (급진적인 인습 타파 운동 같은) 그것의 문화적인 '결과'는 '별개'였다."(15)


고증학자들이 보기에 시급한 것은 "문헌 자체에 대한 학습과 실증적인 학술에 대한 복귀였다." 이들은 "고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학 전통은 정확한 고증과 분석을 통해서만 부활할 수 있"으며, 고대와의 단절된 대화를 소통시키는 것이, 당대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이에 따라 경전 고증 방법론인 소학小學이 명 말기부터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연구 영역으로 발전하였다. 매작梅鷟(약 1513년 경 활동)은 고문 <상서>를 검토하여, "위작자가 무의식적으로 집어넣은 문체, 지리, 연대상의 착오를 밝혀내었다."(131) 이에 대응하여 도학의 가르침을 수호하려는 진제의 방어 전략도 "철학 자체가 아닌 소학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138) 


소학은 과거로 통하는 길이었으며, "고대를 재구성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에 존재해 왔던 광범위한 지적, 실용적 지식의 영역을 재창조하는 작업이었다."(194) 고증학자들은 "당시 ‘서학西學’으로 전수되었던 것이 원래 고대 중국의 성왕들이 가르친 것이며 이것이 서양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이른바 “서양학문의 기원은 중국”이라고 알려진 학설을 주장"하였다.(220) 그러나, 2차 방정식을 푸는 "송원 시대의 방법이 예수회파 선교사들이 소개했던 대수학(algebra)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던 고증학자들은 "서구의 수학이 예수회가 소개한 대수학의 수준을 넘어 얼마나 발전했는지 깨닫지 못했다."(195)


19세기 초, 제국이 서구의 압력과 내부의 분열로 흔들리자 장사長沙와 광주의 서원들을 중심으로 경세학파가 등장한다. 방동수方東樹는 "고증학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수양의 결핍과 사회적 관심의 하락"이 중국을 도덕적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하였고, 학자 겸 관료였던 증국번曾國藩은 "동아시아에 서양의 군사력이 침입함으로써 발생하게 된 ‘자강운동自强運動’의 주요한 제창자로서, 지역과 국가의 서원에서 송학을 후원하였다."(451) 결국 "강남의 고증학 학술공동체 기구는 19세기 초반에 나타난 고증학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서 사상적으로 분해되었고, 양자강 하류 유역에서 진행된 태평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대파괴 속에서 소멸되었다."(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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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총, 투표 - 왜 독재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폴 콜리어 지음, 윤세미.윤승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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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절차를 학습(學習, 배운 바를 일상에서 꾸준히 익힘)하지 않는 공동체에는 언제든지 '미친 민주주의(democrazy)'의 그림자가 드리울 가능성이 상존한다. 최빈국은 그러한 사회적 자본을 모을 시간과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지만, 우리의 뒤틀린 일상은 어디 그런 변명이 통하겠는가.



(최빈국까지 확산된) 엄청난 정치 지형의 변화는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선거 제도의 확산이었다. 그런데 승리자의 권력에 제한이 없다면, 선거는 사실상 생사의 문제가 된다. 이러한 생사 투쟁이 선거 관리 규칙의 지배 아래 있지 않으면 선거 참가자들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민주주의(democracy)가 아닌, `미친 민주주의(democrazy)`다. pp.23-24

민주화가 평화 유지를 더 어렵게 만드는 실례를 원한다면 이라크를 보라. 현 체제의 한계가 무엇이든, 사담 후세인 체제보다는 훨씬 민주적이다. 하지만 후세인 통치하의 이라크는 평화로웠다. 비록 매력적인 평화는 아니었지만, 그것도 일종의 평화였다. 다만 국민의 동의보다는 선제적 탄압에 의존했다. 그리하여 억압 기술의 약화는 곧 민주주의로부터 초래되는 정치적 폭력 위험의 증가라고 난 생각했다. (...) 최빈국에서 민주주의의 책임성과 합법성의 효과가 정치적 폭력의 위험성을 감소시키지 않는 단도직입적인 이유는 이 나라들에서는 민주주의가 책임성이나 합법성을 담보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p.34

전통적 경제에서 집단에 대한 충성심은 때로 다른 집단에 피해를 입히는데, 주로 경쟁 집단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현대 경제에서의 종족에 대한 충성심은 다른 집단에 훨씬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공적 자금은 한 집단의 집단행동이 다른 집단을 훼손시켜가며 가질 수 있는 공동 재원이 된다. 이 단계에서 종족 집단에 대한 도덕적 의무는 전체 사회의 도덕적 의무와 충돌한다. (...) 일반적으로 이들 국가에서 도덕성은 종족 정체성이 사회에 해가 되더라도 집단에는 가치 있는 행동으로 여기게 한다. pp.66-67

선거가 치러지기 전에는 선거만이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이므로 모든 정당이 참여할 만한 인센티브가 있다. 때문에 정당은 선거 캠페인에 모든 동력을 쏟고, 결과적으로 위험성은 줄어든다. 하지만 선거 결과가 정해지면, 승리자와 패배자가 생긴다. 당연히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패배한 당은 승자를 축하하고 충실한 반대 세력을 구성해야 한다. 집권당의 권력 남용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패배한 당은 5년 안에 권력을 다시 잡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쟁 이후 상황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승자는 신이 나서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않는 자유로운 권력을 기대한다. 이렇게 되면 패배자는 상대의 손안에 있는 자신의 운명을 예상하고, 이제는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 p.98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은 협력이다. 아프리카는 군비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집단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협력에서의 진짜 문제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각 정부는 인접국이 군비 지출을 감소하도록 격려하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는다. 협력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직접적인 것은 중립적 경찰이 실행에 옮기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이 경찰은 원조의 비정상적 누출을 막는 후원자나 무기 교역 금지를 내리는 유엔일 수도 있다. pp.138-139

전통적으로 최빈국들의 정부는 힘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자신들을 반대하는 국제 시스템의 피해자로 여긴다. 식민지로 있다가 어렵게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아직도 더 강한 나라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고, 이런 강자와 약자 이미지가 역기능을 불러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빈국 정부가 주권을 아주 적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갖고 있다. (...)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들 국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공공재 가운데 하나가 정부의 책임성이다. pp.229-230

현실적으로 일반적인 최빈국 사회는 국민 주권(national sovereignty)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는 있으나 아직 국민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선거 행위나 당선자에게 충분한 제한을 두는 결속력이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주권’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이 민족 주권을 부러워하는 것은 곧 자신의 권력을 질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 엘리트 집단은 국민의 요구에 응하는 것보다 국민 주권에 대해 지나친 열정을 갖고 있는데, 나는 이를 "얻어먹기보다는 죽는 게 낫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숭고할지 몰라도 엘리트가 배고픔을 겪는 게 아닌 것을 감안하면 생각이 바뀐다. pp.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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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성리학 성리총서 13
피터 K. 볼 지음, 김영민 옮김 / 예문서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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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는 한당漢唐 제국과 달리 강성한 부족들 사이에 위치한 "동등자 속의 중국(China among equals)"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11세기에 등장한 사士들은 "앎, 의미, 행위에 진정한 기초가 있어야만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면서, 과거의 절대적 보편주의의 모습을 바꾸어 존속시키고자 했다.(29) 그 중 하나는 '문화적 보편주의'로서, "문명이란 모든 이가 배우고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며, 모든 이가 "학學에 의해 사士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가 같은 도덕적 본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으로서, 신유학자들은 "도덕이란 모든 이에 의해 공유"될 수 있기에, 여진족이나 몽고족도 "학學의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39-40)


1050년 즈음의 이상주의적인 사士들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전 세계에 질서를 가져올 것이라는 "송나라 건국의 신념에 충실"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가 북부를 정복하여 안정적인 국가를 건설하자 상업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높은 남부 지방에서는 "정부 역할의 축소를 요구"하는 사유가 흥성하였다. 국가 행정기구는 실질적으로도 두 배 정도 늘어난 인구를 따라잡지 못하여 지방사회의 통제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부에 대한 정부의 몫을 줄이고 화폐공급을 유지하며 민영 부문이 주도하는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을 요구"하였고, 지방 사士들이 "공공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관료체제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물었다."(50) 


"1050년에 이르면 과거시험은 관료제에 들어갈 수 있는 주된 수단이자 고위관직에 오르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68) 관직 등용의 문이 좁아지자, 신유학자들은 "사士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 더 이상 관직봉직이 아니라 과거시험이 테스트하는 종류의 교육을 획득하였느냐의 여부"라고 규정지었다. 이들은 "지도적 지방사족과 통혼"하여 고향에서의 입지를 다졌고, 정부의 지원 없이 "출판 지원, 사당과 서원의 건립, 의창義倉(charitable granary)에 대한 기부, 종법체계의 확립"을 이루어냈다.(60) "남송대 그리고 그 이후의 신유학자들은 사적인 부의 독립성을 옹호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익이나 정치적 파워가 도덕과 동등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59) 


당대의 사士들은 당나라 스타일의 "시를 짓는 기술을 습득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문文에 담긴 이상을 이해한다거나 문文에 담긴 이상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과거시험 공부를 대체할 수 있는 '고문古文'을 진흥시켰는데, "고대의 문文이란 (하夏·은殷·주周라는) 이상적인 세계로의 접근 통로를 제공하는 텍스트(경전), 그리고 그러한 텍스트들의 스타일, 둘 다를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고문古文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성인들의 가치를 배우는 일인 동시에 그 가치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다.(95-6) 사士의 관점에 따르면, 송나라는 "한당 제국의 역사와 단절되어야만 고대의 성취에 다가갈 수 있었다."(98)


사士는 "개인이 자기 안에 어떤 실질적인 것을 함유하고 있고, 그것이 개인으로 하여금 사물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학學은 이제 "통치자가 교화敎化를 행하는 것을 돕거나 아랫사람들의 느끼는 바를 소통하게 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통치자에게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려주는 수단"이 되었다.(119-120) 정이程頤는 유학자가 여타 지식인들과 다른 핵심적 요소가 바로 '도道의 추구'라고 보았다. 그는 과거의 유학자들이 도 자체보다는 도에 대한 지식에 다가서는 매체(경전, 글쓰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비판하면서, "도덕적 학學은 ‘진정한 유학儒學’ 스승과의 실제 대면"을 통해서만 기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42)


"도덕적 앎을 위해서는 사물의 본래적 질서와 리理를 알아서 그것을 행동의 기초로 삼을 것이 요청된다."(188) 그러한 앎은 "사물의 의존 관계(本末)와 순서(終始)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며, "사물의 리理에 대한 이해라는 근본적인 작업으로부터 시작해야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각 단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188-9) 신유학자들이 보기에, 통치자는 "피라미드의 정점이라기보다는 아치의 쐐기돌 같은 존재, 즉 그가 제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그를 포함한 전체 구조물이 성공적인 작동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그러한 존재였다."(205) 정부는 '신민新民'을 행해야 하는데, "신민이란, 각자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도덕적 본성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였다."(209)


신유학자들은 리理를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동시에, 사물이 어떻게 작용해야만 하는지를 판별해 내는 규범적 용어로 사용"한다. 이는 리理에 따르는 사물이 "보다 큰, 자족적이고 유기적인 전체의 일부로서 조화롭게 기능할 수 있게끔 작동함을 의미한다."(262-3) 기氣는 사람마다 다르며, "욕망의 충족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각자가 목전의 욕망을 달래기 위한 것만 움켜쥐려 들기 때문에, 그 사회는 곧 자기만족을 위한 난폭한 경쟁으로 빠져들게 된다."(275) 따라서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리理의 통일성을 자각"해야 하며, "자아 외부에 있는 사물의 리理를 깨닫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학學이 추구하는 바이다.(277)


송대의 신유학자들이 "우주, 인간사회, 학설, 마음의 통일성을 예외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주장"하긴 했지만, 이것이 "차이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주학에서 말하는 ‘리일분수理一分殊'는 "모든 사물이 하나의 리라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각 사물은 또한 자기 나름의 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리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각자 특정한 관계망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대우받아야 함을 의미한다."(322) 신유학자들이 추구한 유기적 통일성은 역사적 주장이나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믿음(에 대한 의식적인 헌신)을 천명한 것"에 불과하다.(313)


지역공동체를 장악한 "신유학자들은 혈연에 기초한 전례단위로서의 가족에 초점을 맞추었다."(378) 예禮를 실천하는 가족家族과 씨족氏族은 "사회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도덕적 실체"였으며, 족보에 기반한 씨족은 "세대를 넘어서까지 가家들 간의 연속성을 유지해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390) 신유학자들에게 예禮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리理에 사회적 표현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예禮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세계를 위한 모델이었고, 삶의 모든 측면을 조화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는 실천의 총체였으며, 오랫동안 도교와 불교에 물든 주민들을 그 영향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비강제적 수단이었다."(379) 


"신유학자들은 문학적 성취나 배움보다는 윤리적 행동이 개인의 가치를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역사를 초월하는 진리를 추구하였으므로, 역사의 교훈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430) 이들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기보다는 인간으로서 관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정치의 인격화와 도덕화였다."(434) 지배 이데올로기로 고착된 신유학은 고증학에 이르러서야 중요한 단절을 맞는다. 고증학은 "사물에 필연적인 리理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회피"하며 고대를 "성인됨을 추구하는 이들의 도덕적 앎의 근원"이 아니라, "누적적 연구의 대상이자 학의 방법론의 가장 중요한 실험장"으로 간주하였다.(4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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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의 사유세계 - 주자학의 패권
호이트 틸만 지음, 김병환 옮김 / 교육과학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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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년 여진족이 중국 북방을 정복하여, 북송北宋이 몰락하자 "유가 지식인들은 충성과 절개를 지키지 못하였거나 심지어 오랑캐에게 몸을 의탁한 사대부들에게 큰 수치심을 느꼈다." "많은 유학자들은 문화와 도덕관을 부흥시키는 것이야말로 국가를 재건하고 외적의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 아래 "어떤 전통이 비로소 ‘도道’에 대한 정확한 해석인지, 어떤 전통이 유교 사회의 가치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심도있게 토론하였다."(26) 그러나 고종은 "진회(秦檜, 1090-1155)의 주화파가 의견이 다른 인사들을 탄압하는 것을 용인하였으니, 특히 금과의 전쟁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도학인사들을 배척하였다."(30)


이런 상황에서 "도학道學 인사들은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유대를 형성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였으며, 사회 정치 문화를 개선함으로써 도덕가치를 부흥시키고 유학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서원은 도학 집단의 중요한 활동 중심이었으며, 그들은 서원에서 각종 예의 규범을 실행하였고 단체의 책임감과 응집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예를 행하고 제단 앞에서 유가의 성현과 선사先師들을 향해 향을 피워 공경을 다함으로써 도학 전통 내부의 연속성과 응집력을 강화했다. 도학 인사들은 서로 이끌고 도와주었으며, 관직 추천이나 승진 시에 특히 서로를 후원하여 훗날 그들이 매우 크게 성공할 수 있게 하였다."(15) 


대표적인 도학자인 정이는 "오늘날의 학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문장에 능한 자는 문사文士라 하고, 경전을 담론하는 자는 강사講師에 가까우며, 오직 도를 아는 자만이 바로 유학자이다"라고 말했다. 즉, "'도道'를 아는 학자만이 비로소 '유儒'라고 불릴 수 있으며, 전통적인 문학과 유가의 <오경五經>을 연구하고 익히는 것은 더 이상 유학자를 가늠하는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19) 이들은 구양수(歐陽修, 1007-1072),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소식(蘚軾, 1036-1101)같은 문사형 인사들이나 전통 방식을 옹호하는 '세유世儒'에 맞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했으며, 그 중심에는 동시대 학인들과의 논쟁과 대립을 통해 도학 이론을 가다듬은 주희朱熹가 있다.


장구성張九成은 "불교가 유교의 기본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파괴하고 윤리적 실천의 결핍을 초래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는 참선 정좌에 만족하지만, 도덕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수신 양성을 그치지 않아 더욱 완전한 자아와 사회를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36) 호굉胡宏은 "앎[知]이 실천[行]에 앞선다고 독실히 믿었고, 불교가 유가의 ‘심心’과 같은 개념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고 여겼다. 호굉은 선종의 영향을 뿌리 뽑고 경전과 역사를 연구하여, 고대의 이상적 제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38)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본심을 체득하는 수양 공부를 중시했으며, 수양을 통해 "인仁과 지智가 합일된 연후에야 군자의 학문이 성취된다"고 보았다.(45)


1160년대에 이르러, 주희는 "소식형제와 장구성 및 여본중이 유가경전과 노자, 장자, 붓다의 사상을 혼합"하여 "이단의 사설邪說이 차츰 발전하여 기세를 떨친다고 생각했다."(52) 장식張栻은 "그들도 사실 유가의 도덕을 따르지 않는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면서도, "그렇기에 ‘우리 도당[吾儒]’과 각종 이단의 가르침을 추구하는 무리들을 구분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57) 장식은 "유가의 기본인 가정·사회 윤리가 인간의 삶과 국가 생존의 근본"(63)이라 믿었으며, "반드시 격물格物의 수양 공부로 리理에 대한 인식을 강화해야만 비로소 주관적 편견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67)


여조겸呂祖謙은 “한 스승만을 따르지 않았고 한 학설만을 추종하지 않”는 학문 방식을 통해 다른 도학파들의 사상을 결합하였다.(106) 그는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편견의 원천이 되는 곳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고치기 위해 도덕적 노력, 즉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9) 그는 "풍속은 단지 우리들이 만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풍속이 어떻게 좋아질 수가 있겠는가?”라면서, 학생들이 과거 시험에 적극적으로 응시하여, "정치의 중심지인 조정에서부터 사회를 변화시킬 것"을 요청했다.(118-9)


주희와 여조겸은 "불학과 도학과의 경쟁, 교육제도 개선 그리고 유학의 발양"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의식과 단결을 강화할 수 있는 서원 재건에 주력한다. 여조겸은 주희와 함께 "왕안석 신법 중 교육제도의 폐단을 비판하며, 학교교육이 과거科擧를 위한 문장연습에 치중하고 있는 점에 반대"하고, "유가경전의 학습과 도덕 교육을 강조"하여, 서원을 중심으로 "정이·정호와 장재의 학설을 심도있게 연구한다."(147) 주희와 여조겸은 "'천심天心'이 곧 '군자의 마음'이라고 여겼다." 주희는 "성인이 그 마음을 극진히 해서 천天과 본성을 알게 되고 만물과 합하여 일체가 될 때, 성인의 마음은 ‘천심’과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161)


1180년대 이후로 "주희는 정치적 함의가 짙은 ‘오당吾黨’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도학 동도同徒들을 지칭했으며, 그들의 문화적·정치적인 사명을 제시하여 간접적으로 조야의 여러 유생과 학인들을 향해 도전했다."(172) 그는 "흑과 백을 구별하지 않으면 옳고 그름을 논할 수도 없다. 함부로 ‘무당無黨’을 말하는 것은 도를 더 혼란하게 한다”고 하면서, 당을 구별하지 말 것을 제창하는 인사들을 질책하고, 도학에 한층 짙은 정치적 색채를 입혀나갔다. 주희는 "국내 학술의 폐단은 두 가지 설에 불과하다. 강서의 돈오頓悟와 영강의 공리주의인데, 만약 온 힘을 다해 이들과 쟁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도는 밝아질 수 없다"는 말로 도학 내부에서 사상 논쟁을 벌여나갔다.(177)


진량陳亮은 "모든 원칙을 판단할 수 있는 추상적인 혹은 초월적인 표준은 없다고 여겼다."(223) 그는 주희의 불변하는 기본 가치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여, "도道가 역사 발전과 인류의 행위에 내재되어 있으며,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37) 주희는 유일한 도를 바탕으로 모든 만물과 제도를 평가해야 비로소 “천지의 불변하는 이치와 고금에 통용되는 옳음을 나 자신 안에서 얻어”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불변적 도덕규범의 도와 역사 속에서 단속적으로 실현된 도라는 함의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도를 구분한다." 주희가 보기에 "도道는 본래 소실된 적이 없고, 단지 인간이 도를 준수하지 못했을 뿐이다."(241-2)


주희가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학문 연구와 도덕 훈련을 강조한 것과 달리, 육구연陸九淵은 모든 사람이 "맹자가 말한 '본심'과 인의예지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육구연은 "사단은 곧 마음이며,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 곧 마음이다. 사람에겐 모두 이 마음이 있으며, 마음엔 모두 이 이치가 있으니, 마음이 곧 이치理致”라는 말로 '심즉리心卽理' 사유를 전개하였다.(255) 주희는 "마음이 곧 리理"라는 논리는 불교도의 견해와 같은 것으로, 이는 경전經典 연구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소홀히 하면서, 쉬운 수양 방법으로 본심의 각성覺醒에 도달하려는 방식이라고 준엄하게 비판했다.


주희는 "지식에 매우 의미 있는 독자적 지위를 부여했으며, 지식이 도덕윤리의 기초라고 생각했다."(287)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의 주석을 지으면서 자신이 공자와 맹자로부터 북송사자北宋四子에게 직접적으로 전승된 도통道統의 계승자임을 은연중에 암시하였다. 육구연은 "전통과 도통을 정의하는 주희의 권위를 의심"하면서, "동도同道들과 학문을 토론하여 ‘하나의 올바른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300) 주희는 그의 말이 합당한 표준이 되지 못한다고 반박하면서도, "표준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주희는 육구연이 자기 마음속의 판단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전통적인 경전의 판단에 의거하지 않았다"고 공격할 뿐이었다.(299)


"1241년 1월, 송나라 이종은 칙령을 반포하여 정통 사상으로 도학을 전면 수용"하였다. 남송 정부가 입장을 바꾼 이유는 "몽고인들이 북방에서 공묘를 건설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하는 등, 자신들이 "유가 문화를 후원하는 신정권이며 나아가 중국의 합법적인 통치자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315) 주희의 후학들은 자신들이 "대도大道를 혼란케 하는 학자와 대항한다고 자임하였다."(310) "주희, 주돈이, 장재 및 정씨 형제의 초상화가 공자사원"에 모셔졌고, 주희의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註>는 도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번영"시켰다고 공인되었다. "왕안석의 위패는 공묘에서 퇴출되고, 태학은 도통을 전수한 성인과 현인들에게 경의를 표할 것을 명령"받기에 이르렀다.(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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