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교주의 - 17-18세기 중국 지식인의 윤리, 학문, 종족의 담론 역사 모노그래프 2
카이윙 초우 지음, 양휘웅 옮김 / 모노그래프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명조 말기의 극심한 사회적 혼란은 농민들을 "세금과 임대료, 다수의 과도한 ‘잡판’(雜辦, 추가세금), 서리·아전·지주·신사층의 끝없는 압박이라는 삼중고"로 옭아매었다.(55) 유가 덕행의 전범이어야 할 신사층이 앞장서서 유가의 사회적 윤리를 벗어나자, 일반 백성들도 "더 이상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겠다는 욕망을 보이지 않았다."(58) 부패한 관료들은 어디에나 존재했지만, 과거에 "부패는 관료로서 있을 수 없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던 반면, 명말의 "가정연간 이후에는 부패행위가 비난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관료로서의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56) 사회 혼란은 언어의 의미를 바꾸는 지경에 이르렀고, 유가 사회의 전통 덕목들이 폐기되었다.


16세기에 나타난 가장 독특한 현상은 '대중적 유교'의 등장이다. 삼일교三一敎를 창시한 임조은은 도교와 불교의 정신수양을 받아들였고, 태주학파를 창시한 왕간은 "인간의 도덕적 의지의 실현이 ‘자연’ 그 자체에 의한 자발적인 이행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퍼뜨렸다." 왕간은 대중영합적인 공개강연을 통해 "도덕적 의지를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행동거지에 대한 엄격한 조절도, 강력한 정신적 수양도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71) 이지李贄도 "교의敎義, 구속, 규칙은 전혀 가치가 없"다고 말하면서, 일체의 외부 제약을 부정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가장 혐오한 위선僞善은 관료들이 방종과 탐욕을 버리지 않고도 성인 행세를 취하는 편리한 구실로 활용되었다.


동림서원은 태주학파의 대중영합주의에 반대하고, 엘리트가 주도하는 방식으로 유가 질서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관료들 사이에 벌어진 도덕적 공황상태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단적인 학설과 혼합주의적·대중영합적인 운동의 유행에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79)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주관적인 도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항하기 위해, 도덕적인 수양 과정에서 예禮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동림당파 학자들은 "인仁은 인간을 동물과 더욱 다르게 만들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문화의 산물"이라고 말하면서, "인仁은 사람의 자발적 행위가 아니라, 유가적 규범과의 조화 속에서 이뤄지는 행위라고 규정"하였다.(83)


이처럼 청조에 등장한 교훈주의와 의고擬古주의, 순수주의와 경전經典 지상주의의 출발점은 모두 '예禮'였다. 청초의 유학자들은 예가 "일상생활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조절하고, 감정을 적절하게 이끌며, 예의 바른 행동 양식을 분별하고, 정치질서를 유지하게 한다"는 순자의 가르침을 숭배했다. 순자는 "예의 근본적인 기능은 사회 구성원의 ‘분’(分, 신분)을 구별하는 것이다. 인仁이란 분화된 사회적 신분체계 안으로 자신을 편제編制시키는 인간의 능력과 관심을 통해서 규정된다"는 말로 신분 격차를 인정하였다. 청초의 예교주의자들에게 "공자가 말한 정명正名에서 ‘명’(名, 이름)이란 순자가 ‘분’(分, 신분)이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43)


예교주의는 정반대의 입장을 옹호하는 유효한 수단이기도 했다. 예의 실천은 청조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한족 지식인들이 "문화 정체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방법"이자, 관료로 진출한 한족 지식인들이 "자신을 명조의 체제보다는 중국의 문화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들이 이민족 통치 아래에서 (중국 문화의 보편성을) 수호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되었다.(97-8) 18세기의 유학자들은 경학經學에 대한 문헌학적 비평을 통해 예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얻고자 했다. 이는 "송대 신유학자들의 우주론적·본체론적 체계를 상당히 훼손"했으며, 송·원대에 행해진 "경전의 주석에 보이는 이단적 요소를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111-2)


강희제가 강남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자 "명조에 대한 유학자들의 충성은 시들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폭넓은 작업을 맡은 관료 밑에서 개인 막료의 길"을 걸었고, 학문의 전문직업화에 동참했다.(281-2) 송·명대 의례가 정치·문화적 상징성을 상실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만주족 정권이 정주학파와 한족의 의례를 후원한 점이었다. 정주학파에 대한 강희제의 관심 증가는 만주족에 대한 상징적 저항의 수단이었던, 송·명대의 의례를 향한 일종의 향수적 탐닉마저 의미 없게 만들었다."(283) 한학파 학자들은 "고대의 성인이 전해준 ‘의리’(義理, 도덕적 진리), 즉 도道를 경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순수주의 해석학을 경학의 기본 원리로 받아들였다.(290)


한학파 학자들이 보기에 "소학과 문헌학은 유가경전으로부터 이단적 생각을 삭제하는 강력한 무기이자, 윤리적 이론을 위한 확실한 근거"였다.(318) 한대 주석은 "주대周代와 시간상으로 가까운 것 외에도, 불교의 영향력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313) 능정감은 리理가 "추상적이고 애매하며 입증할 수 없는 개념"으로서 "도덕 수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인간의 욕망으로 더럽혀지거나 잃어버린 무언가를 회복한다는 신유학자들의 인식에서 나온 ‘복성’(復性, 본성의 회복)이라는 용어"를 삭제했다. 그는 "감정과 욕망이 예절과 조화를 이루어 표현되고 만족될 때, 인간의 본성은 조화로운 상태를 회복"한다고 주장했다.(328-9)


"명조가 붕괴한 이후, 학자들은 지방 권력의 주요한 중심으로서 혈연조직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150) "명·청 교체기에 종족宗族은 점차 신사층이 여러 문제점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한 가장 중요한 제도적 용법으로 떠올랐다." 종족은 "경전을 통해 인정받은 조직 형태"였으며, "유가의 사회윤리는 경전에 담긴 예의 실천을 통해서 친족들에게 전승"될 수 있기 때문에 순수주의자들의 구미에 맞는 제도였다.(144) 고염무를 비롯한 많은 청초 학자들은 "일반 백성에게 가치를 전달한다는 교훈주의적 접근"을 거부하고, 국가 기능을 보조하는 강력한 지역 집단으로 "종족이 안정된 사회와 군주제의 질서에 필수적인 사회 제도라고 생각했다."(160)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종족의 이론적 기초를 수립하려는 논쟁은 유학자들을 제사와 관련된 경전 연구로 이끌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세대를 고정한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정 확대된 일가의 집단을 선호"하는 방식이었다.(182) 일찍이 정이는 "모든 사람이 ‘사친’(四親, 4대의 직계조상), 즉 부·조부·증조부·고조부까지 제사를 지낼 권리를 가졌다는 점을 정당화"하는 소종小宗작업을 통해, "종자宗子에게만 직계 조상에게 제사를 올릴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는 "종자가 주관하는 공동의 의식에 친족들이 참여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여, "종자宗子에게 예禮의 권위를 집중"시켰다.(185-6)


만사대는 종법제도가 고대의 세습귀족 체제와 관련이 없으며, 대종법大宗法에서 종자의 지위는 자신의 관직 여부가 아니라 시조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시조가 명조나 그 이전의 왕조에서 관직을 가졌다면, 만주족 정권 치하에서 관계에 몸담지 않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한족 지식층도 종법 체제를 준수할 수 있었다." 종법 원칙은 "한족에게 황금시대였던 주대의 이상적 제도 중 하나"였기 때문에, 명조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족 지식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현실에 대한 적극적 거부는 "시대착오적인 제도를 중국 문화의 상징"이자, "중국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고수되어야 하는 것"으로 고착화시켰다.(208)


"18세기 중반에 유학은 한학과 송학으로 양분되었지만, 이것이 각 학파의 노선에 따라 여성의 정절 숭배에 대한 태도까지 양분시키지는 않았다."(353) "종족의 활동과 관련된 학자들의 관심은 자기 가문의 여성들이 적절한 행동을 위한 모든 규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것에 있었다."(357) "당연히 정주학파의 많은 지지자는 과부와 정혼녀의 정절을 지지"했으며, "도덕적 기준을 예교주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영향 속에서, 송대 신유학자의 윤리를 비판한 것으로 저명했던 대진 같은 주요 학자도 여성이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여성이 정절을 지키는 행위에 십분 동의했다."(354-5)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한학파 학자의 윤리도 송대 신유학자의 윤리 못지않게 획일적으로 제정된 행위준칙에 개인이 종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선호했다. 명말의 급진적 사상가들이 도덕성 발달에서 개성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한학파 학자들은 가부장적 권위이든 제도적 권위이든 간에 개인이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찬양했다."(343) 신유학이 사색과 자기반성에 몰두한다고 비난하면서 언어의 순수 해석학을 지향하던 예교주의는 "신유학 윤리의 형이상학적 상층구조"를 무너뜨렸지만, 오히려 "유가의 사회윤리를 강화"하여 결과적으로, 수절 과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패루牌樓나 시조를 모시는 건물인 조묘 같은 부정하고 싶은 유산을 남겼다.(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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