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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벤저민 엘먼 지음, 양휘웅 옮김 / 예문서원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명대 유학자들은 "도학에 대한 자신들의 책무를 자각하고 있"었으며, "명 왕조가 몰락하기 전까지 위대한 중국의 학자들이 심취했던 가장 지배적인 사상은 내성지학內聖之學이었다."(57) 흔히 17세기에 도학道學이 결정적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되지만, 명대 중반부터 이미 "과거 시험관들은 ‘입증할 수 있는 것에 근거한 학문’을 의미하는 ‘고거학考據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16세기에 왕수인은 "사서四書에서 ‘격물格物’(사물의 연구)이라는 용어에 나타난 주희의 ‘현상론자’적 입장을 통렬히 논박하였다."(161) 왕수인의 비판 정신을 이어받은 태주학파泰州學派는 "경전이 절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보고寶庫"가 아니라는 말로, 비평의 자율성을 강조하였다.(162)
여기에 "만주족의 승리가 가져온 폭발적인 영향은 청대 고증학의 내부적인 성립과 방향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많은 이들이 "명의 멸망을 도덕적 쇠약과 사상적 혼돈의 결과로서 해석했고, 이러한 결과는 공허하고 피상적인 도학道學의 공리공론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173-4) 강남 지역의 학자들은 "자기수양만으로 효과적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역동적인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면서, "실증할 수 있는 주제로만 학술 담론을 제한"하였다.(178-9) "도학적 해석의 장막 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경전과 역사 서적에 보이는 ‘명칭과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名物)을 설명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166)
청조淸朝는 비정치적 학술 활동을 장려하면서 대규모 편찬 사업을 벌여 학자들의 생활 양식을 규정하였다. "지식인들은 서원, 고위 관료들의 막부幕府, 지방과 국가의 편찬 사업 등의 학술 작업에 고용"되었으니, "많은 청대의 학자들에게 학술은 생계의 수단이었다."(241) 그 정점에 달한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 작업을 통해, "편찬자들은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작품에 대한 비평적인 해제를 작성하였고, 전서全書 내에 포함될 가치가 있는 책을 선정하였으며, 선정된 작품 중에서 당시 남아 있는 가장 훌륭한 판본을 기준으로 정교한 교감 작업을 진행하였다."(257) "18세기의 고증학자들은 언제 어느 곳이든지, 학술 후원과 관료의 막우직幕友職을 받아들였다."(266)
고증학의 혁신은 방법론상의 개혁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실증을 중시하는 고증학자들의 목적은 "‘과학적 또는 객관적인 것에 있지 않았고, 고대 성현들의 생각과 의도를 다시 찾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대 경전의 언어를 사용하려는 유학자들의 책무와 관련이 있었다."(15) 이들은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처럼 사회 혁명가나 정치혁명가라기보다는 도덕적인 개혁가로서 활동"했고, 정확한 연구와 재구성을 통해 "고대 경전 본래의 순수한 언어"에 기반한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56) "청대 고증학의 학문적인 '의도'와 (급진적인 인습 타파 운동 같은) 그것의 문화적인 '결과'는 '별개'였다."(15)
고증학자들이 보기에 시급한 것은 "문헌 자체에 대한 학습과 실증적인 학술에 대한 복귀였다." 이들은 "고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학 전통은 정확한 고증과 분석을 통해서만 부활할 수 있"으며, 고대와의 단절된 대화를 소통시키는 것이, 당대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이에 따라 경전 고증 방법론인 소학小學이 명 말기부터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연구 영역으로 발전하였다. 매작梅鷟(약 1513년 경 활동)은 고문 <상서>를 검토하여, "위작자가 무의식적으로 집어넣은 문체, 지리, 연대상의 착오를 밝혀내었다."(131) 이에 대응하여 도학의 가르침을 수호하려는 진제의 방어 전략도 "철학 자체가 아닌 소학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138)
소학은 과거로 통하는 길이었으며, "고대를 재구성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에 존재해 왔던 광범위한 지적, 실용적 지식의 영역을 재창조하는 작업이었다."(194) 고증학자들은 "당시 ‘서학西學’으로 전수되었던 것이 원래 고대 중국의 성왕들이 가르친 것이며 이것이 서양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이른바 “서양학문의 기원은 중국”이라고 알려진 학설을 주장"하였다.(220) 그러나, 2차 방정식을 푸는 "송원 시대의 방법이 예수회파 선교사들이 소개했던 대수학(algebra)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던 고증학자들은 "서구의 수학이 예수회가 소개한 대수학의 수준을 넘어 얼마나 발전했는지 깨닫지 못했다."(195)
19세기 초, 제국이 서구의 압력과 내부의 분열로 흔들리자 장사長沙와 광주의 서원들을 중심으로 경세학파가 등장한다. 방동수方東樹는 "고증학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수양의 결핍과 사회적 관심의 하락"이 중국을 도덕적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하였고, 학자 겸 관료였던 증국번曾國藩은 "동아시아에 서양의 군사력이 침입함으로써 발생하게 된 ‘자강운동自强運動’의 주요한 제창자로서, 지역과 국가의 서원에서 송학을 후원하였다."(451) 결국 "강남의 고증학 학술공동체 기구는 19세기 초반에 나타난 고증학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서 사상적으로 분해되었고, 양자강 하류 유역에서 진행된 태평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대파괴 속에서 소멸되었다."(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