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성리학 성리총서 13
피터 K. 볼 지음, 김영민 옮김 / 예문서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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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는 한당漢唐 제국과 달리 강성한 부족들 사이에 위치한 "동등자 속의 중국(China among equals)"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11세기에 등장한 사士들은 "앎, 의미, 행위에 진정한 기초가 있어야만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면서, 과거의 절대적 보편주의의 모습을 바꾸어 존속시키고자 했다.(29) 그 중 하나는 '문화적 보편주의'로서, "문명이란 모든 이가 배우고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며, 모든 이가 "학學에 의해 사士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가 같은 도덕적 본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으로서, 신유학자들은 "도덕이란 모든 이에 의해 공유"될 수 있기에, 여진족이나 몽고족도 "학學의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39-40)


1050년 즈음의 이상주의적인 사士들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전 세계에 질서를 가져올 것이라는 "송나라 건국의 신념에 충실"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가 북부를 정복하여 안정적인 국가를 건설하자 상업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높은 남부 지방에서는 "정부 역할의 축소를 요구"하는 사유가 흥성하였다. 국가 행정기구는 실질적으로도 두 배 정도 늘어난 인구를 따라잡지 못하여 지방사회의 통제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부에 대한 정부의 몫을 줄이고 화폐공급을 유지하며 민영 부문이 주도하는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을 요구"하였고, 지방 사士들이 "공공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관료체제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물었다."(50) 


"1050년에 이르면 과거시험은 관료제에 들어갈 수 있는 주된 수단이자 고위관직에 오르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68) 관직 등용의 문이 좁아지자, 신유학자들은 "사士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 더 이상 관직봉직이 아니라 과거시험이 테스트하는 종류의 교육을 획득하였느냐의 여부"라고 규정지었다. 이들은 "지도적 지방사족과 통혼"하여 고향에서의 입지를 다졌고, 정부의 지원 없이 "출판 지원, 사당과 서원의 건립, 의창義倉(charitable granary)에 대한 기부, 종법체계의 확립"을 이루어냈다.(60) "남송대 그리고 그 이후의 신유학자들은 사적인 부의 독립성을 옹호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익이나 정치적 파워가 도덕과 동등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59) 


당대의 사士들은 당나라 스타일의 "시를 짓는 기술을 습득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문文에 담긴 이상을 이해한다거나 문文에 담긴 이상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과거시험 공부를 대체할 수 있는 '고문古文'을 진흥시켰는데, "고대의 문文이란 (하夏·은殷·주周라는) 이상적인 세계로의 접근 통로를 제공하는 텍스트(경전), 그리고 그러한 텍스트들의 스타일, 둘 다를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고문古文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성인들의 가치를 배우는 일인 동시에 그 가치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다.(95-6) 사士의 관점에 따르면, 송나라는 "한당 제국의 역사와 단절되어야만 고대의 성취에 다가갈 수 있었다."(98)


사士는 "개인이 자기 안에 어떤 실질적인 것을 함유하고 있고, 그것이 개인으로 하여금 사물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학學은 이제 "통치자가 교화敎化를 행하는 것을 돕거나 아랫사람들의 느끼는 바를 소통하게 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통치자에게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려주는 수단"이 되었다.(119-120) 정이程頤는 유학자가 여타 지식인들과 다른 핵심적 요소가 바로 '도道의 추구'라고 보았다. 그는 과거의 유학자들이 도 자체보다는 도에 대한 지식에 다가서는 매체(경전, 글쓰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비판하면서, "도덕적 학學은 ‘진정한 유학儒學’ 스승과의 실제 대면"을 통해서만 기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42)


"도덕적 앎을 위해서는 사물의 본래적 질서와 리理를 알아서 그것을 행동의 기초로 삼을 것이 요청된다."(188) 그러한 앎은 "사물의 의존 관계(本末)와 순서(終始)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며, "사물의 리理에 대한 이해라는 근본적인 작업으로부터 시작해야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각 단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188-9) 신유학자들이 보기에, 통치자는 "피라미드의 정점이라기보다는 아치의 쐐기돌 같은 존재, 즉 그가 제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그를 포함한 전체 구조물이 성공적인 작동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그러한 존재였다."(205) 정부는 '신민新民'을 행해야 하는데, "신민이란, 각자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도덕적 본성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였다."(209)


신유학자들은 리理를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동시에, 사물이 어떻게 작용해야만 하는지를 판별해 내는 규범적 용어로 사용"한다. 이는 리理에 따르는 사물이 "보다 큰, 자족적이고 유기적인 전체의 일부로서 조화롭게 기능할 수 있게끔 작동함을 의미한다."(262-3) 기氣는 사람마다 다르며, "욕망의 충족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각자가 목전의 욕망을 달래기 위한 것만 움켜쥐려 들기 때문에, 그 사회는 곧 자기만족을 위한 난폭한 경쟁으로 빠져들게 된다."(275) 따라서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리理의 통일성을 자각"해야 하며, "자아 외부에 있는 사물의 리理를 깨닫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학學이 추구하는 바이다.(277)


송대의 신유학자들이 "우주, 인간사회, 학설, 마음의 통일성을 예외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주장"하긴 했지만, 이것이 "차이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주학에서 말하는 ‘리일분수理一分殊'는 "모든 사물이 하나의 리라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각 사물은 또한 자기 나름의 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리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각자 특정한 관계망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대우받아야 함을 의미한다."(322) 신유학자들이 추구한 유기적 통일성은 역사적 주장이나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믿음(에 대한 의식적인 헌신)을 천명한 것"에 불과하다.(313)


지역공동체를 장악한 "신유학자들은 혈연에 기초한 전례단위로서의 가족에 초점을 맞추었다."(378) 예禮를 실천하는 가족家族과 씨족氏族은 "사회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도덕적 실체"였으며, 족보에 기반한 씨족은 "세대를 넘어서까지 가家들 간의 연속성을 유지해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390) 신유학자들에게 예禮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리理에 사회적 표현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예禮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세계를 위한 모델이었고, 삶의 모든 측면을 조화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는 실천의 총체였으며, 오랫동안 도교와 불교에 물든 주민들을 그 영향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비강제적 수단이었다."(379) 


"신유학자들은 문학적 성취나 배움보다는 윤리적 행동이 개인의 가치를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역사를 초월하는 진리를 추구하였으므로, 역사의 교훈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430) 이들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기보다는 인간으로서 관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정치의 인격화와 도덕화였다."(434) 지배 이데올로기로 고착된 신유학은 고증학에 이르러서야 중요한 단절을 맞는다. 고증학은 "사물에 필연적인 리理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회피"하며 고대를 "성인됨을 추구하는 이들의 도덕적 앎의 근원"이 아니라, "누적적 연구의 대상이자 학의 방법론의 가장 중요한 실험장"으로 간주하였다.(4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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