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문명
루이스 멈퍼드 지음, 문종만 옮김 / 책세상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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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세의 공간은 "상징과 가치를 기준으로 구성됐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는 교회의 뾰족탑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뾰족탑은 교회가 인간의 희망과 공포를 지배하듯 더 낮은 건물들 위에 군림했다. 공간은 일곱 가지 미덕, 12사도, 십계명, 삼위일체 등을 표현하는 상징 형식들로 분할되었다." 중세의 또 다른 특징은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으로 독립된 두 체계로 이해한 것"이었다. "제프리 초서는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의 전설을 동시대 이야기처럼 그렸다. 중세 예술가들은 시간의 경과라는 분명한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리스도의 삶을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 양 묘사했다." 사건들을 연결하는 끈은 "우주적이고 종교적인 질서였다. 공간의 진정한 질서는 신이, 시간의 진정한 질서는 영원성이 부여했다."(44-6)


이처럼 기독교인들은 본래부터 "규칙적 기도와 헌신을 통해 영원성 속에서 정신의 충만을 도모"해왔다. 그러나 기계식 시계의 발명으로 시간 준수라는 오래된 개념은 "시간 절약, 시간 계산, 시간 배분으로 거듭 확대"되었고, 그 가운데 "인간 행동의 척도이자 근간이었던 영원성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38-9) 시계는 "시간이라는 아주 특별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기계로 인간의 경험에서 시간을 분리해냄으로써 수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독립적 세계, 즉 특별한 과학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싹틔웠다."(39) 린 손다이크에 따르면, "1345년 경 한 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나누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런 분할된 시간이라는 추상적 사고방식은 점차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41)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추상과 계산이라는 새로운 사유 습관이 도시인의 삶에 깊이 배어 들었다." 미다스나 크로이소스 같은 "전설 속 인물들이나 드물게 추구했을 법한 ‘획득의 경제economy of acquisition’가 일상의 생활양식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생활양식은 '필요의 경제economy of needs'를 대체했고, 삶의 가치는 화폐 가치로 환원됐다. 상업의 전체 과정이 점점 더 추상적 형식으로 굳어져가면서 상품이 아닌 상품 가격, 상상의 산물인 선물 투기, 미래를 획득하리라고 가정된 이익에만 모든 관심이 쏠렸다."(52) 자본주의적 추상은 과학적 추상보다 앞서 나타났고 전형적인 과학적 방법의 모든 절차적 합리성을 강화"했는데, 과학 권력과 화폐 권력은 모두 "추상, 측정, 양화量化의 권력"이었다.(54)


중세 질서의 붕괴는 두 가지 현상을 낳았다. "하나는 익숙한 과거의 전통과 자기 원칙을 내팽개치고 약탈자, 발견자, 개척자의 삶을 살도록 인간을 떠미는 현상이었다. 다른 하나는 격동 속에서 강제로 사회를 조직화된 모듈로 만드는 군대의 교관, 군인, 회계사, 관료의 방법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현상이었다." 새로운 경제 체계에서 "가장 유용한 덕목은 절약, 선견지명, 방법을 적용하는 솜씨였다. 발명은 상상력과 의식儀式을 대신했고 실험은 신중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대체했으며 연역적 논리와 학문의 권위는 사례를 통한 입증으로 갈음되었다."(76-7) 새로운 질서의 이상적 인간형은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였다. 이제 자연 세계는 "공간, 시간, 질량, 운동, 양의 관점에서 질서 정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단순화 과정"을 거쳐나갔다.(84)


감각을 극대화하여 실용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수단들은 질의 영역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질적 성질들은 주관적이고 보이지도 않고 측정될 수도 없었기에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돼 묵살되었다. 직관과 느낌은 기계적 과정과 기계적 설명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87) 17세기를 지배한 "시계 제작, 시간 절약, 지리상의 발견, 수도원의 규칙성, 부르주아 질서, 기술 장치, 프로테스탄트 금욕주의, 마술, 그리고 특별한 질서, 정확성, 자연과학의 명확성, 이 모든 것은 서로 분리된 활동이었고 각각은 사소한 의미만 가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기계의 방대한 영향력을 지원하고 기계 이용을 확대하는 복잡한 사회적·이념적 연결망을 형성했다." 사실상 이들은 "장기적 기후 변화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계절의 변화를 알렸던 것이다."(99)


어떤 산업보다 "광업은 근대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미 16세기에 광업은 자본주의적 착취 패턴을 확립했다." 기술 발전이 가져온 "광산 굴착, 새로운 탄층으로의 작업 확대, 갱도에 찬 물 빼기, 광선 운반, 갱내 환기를 위한 복잡한 기계류의 설치, 새로운 용광로의 풀무 작업에 수력 사용을 늘리는 등의 일은 애초에 광부들이 소유한 것보다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노동은 하지 않고 자본만을 투자하는 부재 소유absentee ownership 동업자들이 생겼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소유한 지분은 점차 부재 소유자들에게 넘어갔고 노동자들이 공유했던 이익은 단순한 급여 형태로 전환"됐고, 마침내 "기술 혁신과 자유노동의 기초를 놓았던 광업의 협력적 길드의 토대는 무너졌다."(123-4)


15-16세기에 이르면, "광업은 전쟁의 원천을 제공하고 자본의 초기 축적을 가능하게 했으며 군사 비용을 조달하는 핵심 산업이었고 무기의 산업화를 강화함으로써 금융가들의 배를 불렸다. 전쟁과 광업의 불확실성은 투기적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증가시켰고, 금융이라는 기생 권력이 창궐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었다."(126) 전쟁은 "개인적 매력 없이도 여성을 얻고, 지식 없이도 권력을 획득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또 유용한 기술을 습득하지 않고도 노동의 보상을 가로채서 누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아울러 "근대 전쟁의 조직화는 군대의 실제 규율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임무를 떠맡았다. 상명하달식 명령 체계는 기계적 복종을 요구했다."(134-5) 군대는 "산업의 순수한 기계적 체계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 형식이었다."(142)


돈을 규율의 주요 수단으로 삼았던 "용병 부대는 언제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항복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전투는 옛날식 축구 시합처럼 조심스럽게 정해진 규칙 아래서 진행되는 흥미로운 의례와 비슷해졌고 위험성도 줄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기계적 체계는 군대에 절도와 통일성을 부여했다. "군사훈련은 군인들을 마치 한 사람이 행동하는 것처럼 단련했고, 규율은 마치 한 사람이 반응하는 것처럼 만들었으며, 군복은 마치 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145-6) 산업화가 진척되고 "개별 국가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국가 간의 경쟁은 계급 투쟁을 압도했다. 한때 왕조의 전유물이었던 전쟁은 프랑스혁명 이후 전 국민을 동원하는 주된 산업적 과업으로 재탄생했다. 이런 변화를 든든히 뒷받침한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부산물인 '징병제'였다."(275)


"원기술 시기eotechnic phase에 풍력과 수력이라는 에너지원과 목재와 유리라는 물질이 단단히 묶여 있었고, 구기술 시기paleotechnic phase에 석탄이라는 에너지원과 철이라는 물질이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듯이, 신기술 시기neotechnic phase에 전기는 폭넓은 산업 분야에서 특별한 물질들과 짝을 이룬다. 대표적으로는 새로운 합금, 희토류 금속, 초경량 금속 등이다."(329) 전기가 지역, 산업 중심지, 공장을 하나로 연결하고 수많은 관련 업무와 제도를 창출하면서 "신기술 수단들이 존재하고 공통 언어가 통용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한때는 아티카의 가장 작은 도시에서나 가능했던 정치 집단과의 직접 접촉이 일상화"되었다. 이제 목소리와 이미지를 통한 이차 접촉은 "점점 더 넓은 지역에서 대중적 사회 통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344)


"처음부터 기계의 가장 지속적인 정복 대상은 빠르게 유행에 뒤처지는 기구도, 빠르게 소비돼버리는 상품도 아닌, 바로 삶의 양식이었다. 즉 삶의 양식을 기계를 통해서, 그리고 기계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철커덕거리며 돌아가는 기계는 한 명의 교사였다. 기계는 한편으로는 비굴한 예속 상태를 강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성의 해방을 약속했다. 기계는 이전의 기술 체계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상상과 도전의 가능성을 열었다. 기계가 질서·체계·지성이 자연의 어디에 깃들어 있는지를 보여주자마자, 그때까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환경과 사회적 관습은 즉시 효력을 상실해갔다." 인간은 "인간 개성의 한 측면을 기계의 구체적 형식에 투사함으로써, 개성의 모든 다른 측면에 영향을 주는 독립적 환경을 창조했다."(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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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 - 문명을 읽는 새로운 코드 옥스퍼드 세계사
대니얼 R. 헤드릭 지음, 김영태 옮김 / 다른세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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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구를 만들어낸 후에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 - 마샬 맥루한


옛 호모 사피엔스를 신인류로 재탄생하게 만든 요인은 바로 문화이다. 수백만 년 동안 생물학적 진화에 묶여 있던 인류에게 "상징 표현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면서 인류의 문화는 절대 느려지거나 멈추지 않게 되었으며 새롭고 더 창의적인 발전 방법을 찾아나가게 되었다."(18) 신석기 시대에 정착문화가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찾는 데 몰입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너무 무겁거나 약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물건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29) 인류의 신체와 두뇌는 신석기 시대에 정체되어 있었지만 "이들이 만든 유물의 다양성·효율성·의미는 지수적으로 증가하였다. 기원전 1만 년경 이들의 기술과 제작품 덕분에 인간은 가장 효율적인 수렵채집자가 되었으며, 이전에 보지 못한 가장 성공적인 포식자가 되었다."(33)


신석기 마을에서 문명사회로 전환할 수 있었던 주요인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잉여 식량을 생산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급진적이고 새로운 사회조직이 생산을 증대시키는 새로운 농업기술과 함께 등장한 셈이다."(36) 최초의 문명사회는 강이나 호수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건조 지대와 사막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해 운하나 둑을 쌓는 토지 작업을 하면서, 협동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고대 문명이 남긴 "문자 기록과 기념물, 대부분의 수공예품은 엘리트가 만들었거나 엘리트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문명을 특징짓는 기술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비롯하여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사람들을 지배하는 능력을 크게 발전시켰다."(62-3)


철기시대 초기에 생산된 괴철bloom은 "청동보다 부드러웠지만, 쉽게 부서지고 날이 쉬 무뎌지며 녹이 잘 슬었다." 그럼에도 철은 "거의 모든 국가의 발굴하기 쉬운 지표면 근처에서 광석이 대량으로 발견된다"는 엄청난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널리 쓰이게 되었다.(67) 말과 바퀴 달린 이동수단 그리고 "저렴한 철제 무기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유라시아 전역이 전쟁에 휩싸였다."(72) 철기시대에는 모든 건설사업이 관개시설이나 운하처럼 "수력과 관계된 것만은 아니었다. 제국은 통일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우수한 운송수단이 필요했다. 따라서 도로 건설은 부분적으로는 무역을 위해, 더 중요하게는 수도와 외곽 지방 사이의 빠른 통신과 원활한 군대 이동을 위해 필수적이었다."(78)


"8세기 초 등자가 유럽에 도달하였고 여기서 전쟁의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크족의 지도자인 샤를 마르텔은 무거운 창으로 무장한 기병(창기병)의 가능성을 깨달은 유럽 최초의 지도자였다. 기수가 창을 단단히 잡고 등자가 있는 말과 한 몸이 되어 달리면, 창 자체의 무게뿐 아니라 기수와 말의 무게까지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창기병의 창은 보병이 던진 창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105) 말 가슴걸이와 편자의 발명은 농업 혁명뿐만 아니라 운송 혁명도 불러왔다. "목수들은 회전이 가능한 앞 차축, 브레이크, 물추리막대whippletree(길모퉁이를 돌 때 두 말이 끄는 짐의 무게를 같게 해 주는 수평막대)를 갖춘 바퀴가 네 개인 마차를 만들었다. 12세기에는 이런 무거운 마차를 흔히 볼 수 있었다."(118)


대항해 시대는 세계의 중심을 유럽대륙 너머로 확장시켰다. "폭풍이 몰아치는 유럽의 대서양 쪽으로 항해하기 위해서 북유럽의 선박 기술자들은 카그cog라고 불리는, 커다란 사각돛과 한 개의 돛대를 가진 둥근 통 모양의 배를 만들었다."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박 제조업자들은 "갤리선과 카그선의 장점만을 결합하여 카라벨caravel이라고 부르는 배를 만들었는데, 이 배는 세계 어느 대양에서나 항해가 가능했다." 바스코 다 가마, 콜럼버스와 마젤란 모두 개량한 카라벨을 타고 항해에 나섰다. 카라벨의 더 큰 형태인 "무장 상선 캐럭carrack과 큰 돛을 단 상선 갤리언galleon은 다음 4세기 동안 유럽 항해의 버팀줄이 되었다."(131) 16세기에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옥수수와 카사바는 열대우림 지역에서도 잘 자라나 아프리카인의 생존력을 크게 높였다.


18세기 산업혁명은 본질적으로 네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는 분업화이다. 이는 공장·농장·건설 현장에서 하는 일을 일련의 단순화 작업으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여 생산·운송·통신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처음 두 가지의 결과물, 다시 말해 예전 방식으로 만든 제품보다 저렴해진 대량생산된 제품을 말한다. 그리고 네 번째는 화석 연료로부터 역학적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이다."(158) 증기기관은 "석탄·철·기계 제작의 다른 세 가지 산업과 발맞추어 진화하였다. 석탄은 물을 퍼내고, 기계를 돌리고, 마차를 끌고, 광산에서 승강기를 들어 올리는 엔진의 연료로 사용되었다." 그중에서도 "동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증기기관을 운송에 응용한 것이었다."(170-1)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이전 100년 동안 이룩한 기술의 승리였다. 1869년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이런 승리를 잘 보여주었다. 첫 번째 사건은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이었다. 이로써 유럽과 동남아시아가 연결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미국의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최초의 철도가 개통된 것이었다."(188) 적당량의 탄소를 함유하여 단단하면서도 휘어지는 강철은 철도와 해운을 전세계로 확산시켰다. 영국인 헨리 베세머는 강철 생산 과정을 개량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한 번에 수 톤의 강철을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전환로converter를 만들었다." 곧이어 한층 발전한 "지멘스-마르탱 평로법Siemens-Martin open-hearth furnace과 길크리스트-토머스법Gilchrist-Thomas process(1875)"이 등장한다.(189-90)


"20세기에 내연기관보다 인간의 삶과 환경에 더 큰 충격을 준 기술은 없었다. 화실이 실린더와 분리된 증기기관과 달리, 내연기관에서는 연료가 실린더 내부에서 연소되고 더 많은 에너지가 운동으로 바뀌었다. 이런 아이디어는 17세기부터 존재했지만 실제로 작동이 되는 내연기관을 처음 제작한 사람은 1859년 프랑스의 기술자 에티엔 르누아르였다." 다음 목표는 "내연기관을 (운송수단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가스관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1883년 독일의 기술자 카를 벤츠가 석유로부터 등유를 얻을 때 생기는 부산물인 휘발유를 기화시키는 법을 발견했다. 3년 후 벤츠는 다른 독일의 기술자 고트리프 다임러가 했듯이 3륜 마차에 휘발유 엔진을 달았다. 다임러와 벤츠는 곧 힘을 합쳐 최초의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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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찰스 P. 킨들버거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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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상대적 쇠퇴라는 생명주기에서 각국의 경험은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한 요소가 다른 요소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명력과 유연성이 경직성으로 변한 것이야말로 그 패턴을 결정한다."(65) 


11~12세기에 제노바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상업혁명은 한편으로 조선업, 다른 한편으로 재정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두 도시 모두 경작 가능한 땅이 없었으므로 피렌체 식의 봉건주의를 피할 수 있었고, 그 대신 선출된 관리(베네치아의 경우 통령[doge])를 둔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유지했다. 베네치아는 1104년에 건립된 국영 아르세날레(Arsenale)가 조선업을 주도했는데, 이곳에서는 해군용 갤리 선과 상업용 '대大갤리 선'을 건조했다." 배를 끊임없이 개량한 결과 "1300년에 이르는 약 100년의 기간 동안 상업혁명은 항해혁명을 초래했다." 상업혁명은 단지 "선박의 개량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전문화가 더욱 진행되었다. 상품을 가지고 직접 여행하는 여상(旅商, merchant-traveler)은 줄고, 회계사무소와 창고에 머물면서 상품운송은 선장에게 부탁하여 거래 항구의 대리인에게 전달하게 하는 정주상인이 증가했다."(94-6)


"1380년 제4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 중의 키오자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제노바를 꺾었다. 제노바의 쇠락으로 15세기에 베네치아는 군사적, 경제적 패권을 차지했다."(97) 15세기 말까지 베네치아가 성공적으로 선두를 유지한 원인은 "공화정의 효율적인 정부 덕분이었다. 정부를 이끈 것은 평의회와 선출직 도제(doge)였는데, 이들은 거리낌없이 무역과 산업을 통제했다." 그러나 제노바와의 4번째 전쟁 이후 "공화국은 항상 20-30개의 상위 가문과 그들 밑에 위치한 100여 개 남짓한 귀족가문으로 이루어진 과두정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특히 구귀족 가문의 거만한 매너 때문에 분쟁이 풍토병처럼 지속되었다." 본질적으로 상업도시였던 베네치아는 금융 분야에서 피렌체에 뒤처졌다. "베네치아는 피렌체처럼 환어음이나 복식부기의 혁신을 이루지도 않았고, 무역활동 중의 많은 부분은 피렌체에서 융통한 자금으로 충당되었다."(100-1)


"베네치아의 상대적 쇠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르투갈과의 향신료 경쟁, 영국과의 모직물 경쟁, 네덜란드 및 영국과의 조선 경쟁이었는데, 이것들이 베네치아의 '지위, 제국' 그리고 헤게모니 상실로 이어졌다. 철 지난 표준에 매달린 것은 길드와 정부 모두의 실수였으며, 이야말로 태도의 경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111) 대외 부채도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경제발전을 저해한 주요인이었다. "과시소비가 이 모든 것에 한몫을 했다. 의상, 시골의 토지, 교외 별장, 공공건물, 그리고 예술품 등이 그 대상이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공직에 오르면서 메디치 은행 지점 통제권을 프란체스코 사세티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사세티 자신은 로렌초에게 충고했던 대로 해외지점을 엄밀히 통제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기를란다이오에게 그리게 한 가족 예배당의 제단화에 더 관심을 쏟았을지도 모른다."(114) 


포르투갈은 "15세기 전반에 자국 해안을 벗어나서 멀리 외국으로 진출함으로써 부국으로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선박건조창과 항해학교 덕분에 엔리케 왕자는 서아프리카의 보자도르 곶 부근까지 항해해 가서 금과 노예 무역을 하였으며, '발견의 시대'의 막을 올렸다."(115-6) 그러나 포르투갈인은 "훌륭한 상인은 아니었다. 에스파냐에서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은 육체노동과 상업을 혐오했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필요한 물품을 자체 생산하지 못했고, 그 대안으로 영국상품을 수입했다. 그 결과 브라질산 금이 리스본에서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쇠퇴의 또다른 요소는 신교도들에 대한 박해이다. "종교재판소에 구금되거나 이민을 떠나면 그들의 자산은 몰수되었다. 이 조치는 그들과 거래하던 영국상인들을 멀어지게끔 했다." 마지막으로 1580년 포르투갈은 에스파냐로 합병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인력이 부족했던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의 군사모험에 충원될 인력을 제공해야 했다."(119-20)


에스파냐의 지리·정치·종교적 조건은 경제발전의 걸림돌이었다. "우선 도로가 형편없었다. 노새와 소달구지로는 멀리 떨어진 지역들을 통합할 수 없었다. 국내 생산량은 한정되어 있었고, 먼 거리는 배를 통해서만 연결되었다." 카스티야 중심부에 위치한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는 "상업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도시로서, 다른 지역들로부터 곡식, 관세, 지대를 긁어 모았을 뿐 에스파냐 내륙에 자극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의 로마처럼 마드리드도 기생적이었다. 이 도시는 궁정, 대귀족(grandee), 이달고, 관료들을 유치했으며, 극빈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곡물 외에도, 해외의 사치품들과 지방 기술자들이 만든 준準사치품들을 소비하는 도시였다." 관세는 국내뿐만 아니라 식민지로 향하는 양모와 모직물 수출길을 봉쇄했다. "고리대금업에 반대하는 종교적인 명령에 의해서 국내 환어음 결제도 금지"된 형편이었다.(124-5)


"중앙집중주의 대 다원주의의 고전적인 보기는 네덜란드 연합주인데, 이곳에서는 홀란드 주가 전체 7개 주를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홀란드 주는 육군, 해군, 상업 활동을 지휘했으며 다른 주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세금을 분담함으로써 '무임승차자들'인 각 주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특권 비용을 치렀다. 그러나 조너선 이스라엘은 다른 주들이 암스테르담으로 하여금 외환정책, 해운업, 무역과 어업을 통제하거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제어해서, 네덜란드 연합주는 본질적으로 탈집중화되고 연방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가 쇠퇴하던 18세기,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던 때에 다른 주들이 의사결정―특히 조세정책과 관련된―에서 고도의 중앙집중화를 허락하기를 망설이거나 심지어 거부한 것은 탈집중화가 얼마나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가로막고 쇠퇴를 재촉했는지 보여준다."(72-3)


네덜란드 역사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초기의 역동성의 원천이 과연 이 나라의 분권화된 특성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이다."(149)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6세기 말의 치열한 경쟁에서 한자 동맹을 물리친 후 기본적으로 '어머니 무역'(moederhandel, 근대 초 네덜란드의 경제에 발트 해 무역이 대단히 중요하고 또 다른 교역활동이 여기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어머니'에 비유한 표현)으로 이익을 얻었다." 조너선 이스라엘은 "네덜란드인들의 진정한 이점은 아시아 및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와의 '사치품 무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150) 어떤 면에서 보면, "네덜란드의 중계무역은 본질적으로 과도기적이었다. 품질, 수량, 가격에 대한 정보가 확산되고 무역량이 증가할수록 직교역이 더 경제적이 됨으로써 중계지는 건너뛰게 되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도 비우호적으로 변해갔다. "바다는 해적들로부터 안전해졌고, 선박은 대형화되었으며, 각국은 자신의 상선단을 구축하고자 했다."(154)


네덜란드 쇠퇴의 다양한 '원인들' 가운데서 "전쟁, 외국의 중상주의, 외국이 네덜란드의 기법을 따라한 것, 무역과 금융에서 유럽 각국이 더 이상 암스테르담을 중계지로 이용하지 않은 것,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에 빌려준 자본을 잃은 것, 프랑스에 의해서 전쟁 배상금이 부과된 것 등은 외적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네덜란드 역사가들은 쇠퇴를 이런 것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무역과 산업에서 철수하여 금융으로 전환한 것, 런던에서 파리로 대부를 전환한 것, 소비품에 높은 세금을 매기고 또 이것이 고임금을 초래한 것, 세금 문제와 같은 것에서 지방이 중앙의 지도에 대해서 저항한 것, 길드가 존속한 것, 숙련공들을 상실한 것, 과소비가 행해진 것, 소득분배가 비대칭적인 것 등은 내적"인 요인이다. "생명력과 에너지를 가진 젊은 국가들은 오래된 독점권에 도전하지만, 늙은 국가들은 이러한 도전에 혁신적으로 대응할 역량이 없다."(171)


프랑스는 "성장이 쇠퇴로 이어진다는 우리의 복잡한 국가 생명주기 모델에 대해서 다른 측면에서 예외적이다. 이 나라는 우위를 획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나머지 나라들에 비하면 장기적인 쇠퇴도 겪지 않았다. 그 대신 프랑스는 골드스톤 모델에서 묘사된 것처럼 일련의 정부 붕괴와 격동을 겪었는데, 올슨이 말했듯이 오히려 이것이 새로운 출발의 기회들을 제공했다."(174)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난 뒤, 루이 14세는 왕실의 군대로써 프롱드 난을 진압했다. 중상주의 정책을 펼친 콜베르는 "보조금과 관세를 통해서 산업을 장려하고, 네덜란드의 조선공, 스웨덴의 광부, 이탈리아의 유리 제조공, 플랑드르의 레이스 제조공을 프랑스로 데려왔으며, 특히 모직물 교역에서 영국, 네덜란드와 맞서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바다에 대해서 무지했으며, 그의 호전적인 귀족들은 인력(人力)과 지도력을 놓고 바다와 육지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을 때 늘 잘못된(즉 육지) 쪽을 택했다."(176-7)


프랑스와 영국의 성장률과 성장단계를 비교할 때 "지폐, 은행, 중앙은행, 청산소, 보험회사, (장기 공채를 제외한) 유가증권 시장의 발전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비해서 약 1세기 정도 뒤떨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182) 재정개혁 시도는 "모두 재정가들의 거친 저항 때문에 실패했다.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재정개혁은 결국 "프랑스 혁명기에 35명의 관리 및 재정가들이 체포되고, 이중 28명이 기요틴에서 처형되어서야 성취되었다."(183-4) 프랑스 대혁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들의 태도는 오랫동안 구체제의 귀족적 가치가 지배했다. 이러한 정신은 개인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부심을 특징으로 한다." 귀족들은 "상업이 고상하지 않다고 여겼고, 그래서 지방 신사와 부르주아지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영국과 달리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성을 소유하고 귀족 신분으로 상승하기 위해서 부를 갈망했다."(197-8)


17-18세기에 해외무역을 장악한 영국은, 초기에는 유럽이 "주요 수입원 및 수출시장이었으나 후기에는 식민지가 그 뒤를 이었고 더 뒷시기에는 미국, 남아공 등의 독립국들과 준-독립적인 자치령들이 식량과 원재료의 수입원이자 제조품의 판매지가 되었다."(208-9) 자유무역으로의 긴 도정은 "1841년부터 1846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이 사이에 600개 이상의 관세가 철폐되고 1,000개 이상의 품목에 대한 관세가 '조세개혁'이라는 표어 아래 인하되었다." 자유무역은 "1846년 곡물법 폐지 직후에 목재 관세 및 항해법의 철회로 확대되었다."(217) 1880년대 곡물가격이 하락하자, 독일은 자유무역에서 재빨리 후퇴했다. 1879년 비스마르크가 호밀과 철을 필두로 관세인상 정책을 펴는 동안, 영국은 여전히 자유무역에 집착했다. "갈수록 영국의 단기이익에 반하는 데에도 자유무역을 고집한 것은 집단적인 기억 혹은 제도적인 지체의 전형적인 사례이자 코스의 정리(the Coase theorem)의 반증이다."(219)


"선두 주자의 불리함에 대해서 일부 경제학자들은, 만일 공장이나 기술 혹은 제도가 무용하고 비효율적이라면 언제든지 그것을 폐기해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며 조소를 보낸다. 이것은 경로 의존성의 힘을 간과하는 것이다."(230) 영국에서 신기술의 병목현상이 발생했을 때, 기술 개발에 실패하거나 다른 국가의 성공 사례를 도입하는 상황이 점차 누적되면서 "일부 산업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개입한 상인층이 너무나 두터워서 이들이 기술 향상을 저해했다. 이는 특히 면직물과 공작기계 분야에서 심했다." 상인들은 사실상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장벽을 둠으로써, 생산자에게는 "소비자는 이런 식의 것을 원하지 않소"라고 말하고 소비자에게는 "생산자는 그런 식의 것을 만들지 않소"라고 말하는 형국이 되었다.(231-2) 영국이 세계경제의 선두 자리에서 점차 내려온 것은, "강렬한 생명력이 점차 경직성과 변화에 대한 저항에 잠식당한다는, 국가 생명주기 개념에 잘 부합한다."(240)


"사회변동이나 심성 같은 요소들은 앞에서 설명한 국가 생명주기에서 종종 전면에 자리잡곤 했지만, 독일만큼 경제적 경로에 사회발달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곳은 없었다. 그것은 정치사뿐 아니라 산업, 관세, 통화, 경제의 역사에 모두 적용된다."(243)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독일은 "355개의 영방(Land)과 1,476개의 자율적인 제후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정복 전쟁으로 라인 강 서안은 1801년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나폴레옹은 1803년에 112개의 제후령―세속화된 두 개를 제외하면 모두 종교적 제후령들이었다―을 제거하고 대부분의 소규모 도시와 읍의 정치적 독립성을 종식시킨 뤼네빌 협약을 강제로 부과했다." 프로이센이 1871년에 프랑스에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은 완결되었고 "알자스와 로렌의 획득으로 영토가 더욱 확대되었다. 프로이센의 탈러는 마르크로 이름을 바꾸어 제국의 통화단위가 되었다. 1875년에는 제국은행이 설립되었다."(244-5)


"산업정책, 관세동맹 그리고 독일 철도체계 정비는 1850년에서 1857년까지 경제적 활력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길을 열었다.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영국의 곡물법 폐지는 곡물 수출 붐을 가져왔다. 특히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루르로, 그중에서도 비철금속 분야로 자본이 유입되었다." 영국에 대한 증오심은 철강 공업의 발전을 촉진했고,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베를린, 작센, 슐레지엔에서 산업의 고용이 증가"했다. 1860년대의 세 전쟁의 승리는 "행복감을 가져 왔고, 이것이 주택건설 붐과 회사 창설 시대(Grunderzeit)에 걸맞는 증권가격의 상승을 초래했으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으로 막대한 양의 정금이 유입되고 따라서 국가와 지방 자치체의 부채를 갚을 수 있게 된 덕분이기도 했다. 1873년 증권가격의 대하락은 경기하락을 드러냈지만, 소위 '대불황(great depression)'은 독일에서는 유럽 다른 지역에 비해서 미약했다."(251-2)


1945년 혹은 1950년부터 "대략 4반세기 동안 지속된 황금기는 미국의 경제적 우위가 전혀 도전받지 않았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나라들의 따라잡기와 미국 내부의 쇠퇴 징후가 함께 나타난 때이기도 했다. 항공, 컴퓨터, 전자공학, 제약, 인간의 달 착륙을 가능하게 한 관성 유도 장치, 컴퓨터 단층사진과 같은 의료기기 등의 신산업에서 1950년대의 큰 격차는 다음 10년 동안 좁혀지기 시작했다." 더욱 의미심장하게 미국의 쇠퇴를 가속화한 것은 "생산성의 둔화, 저축의 감소, 연방예산과 국제 경상수지 계정의 쌍둥이 적자, 다니엘 벨이 '탈산업국가'라고 일컬었던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전환, 그리고 특히 금융에의 몰두이다. 이것은 재화보다는 자산의 판매와 구매, 그리고 제조업에서 신상품과 신공정을 개발하는 대신에 새로운 금융수단을 개발하거나 옛것을 부활시키는 데에 전념하는 것이다."(278-9)


국가주기의 일반적인 패턴은 교역, 산업, 금융의 순서이다. "첫 단계에서 교역은 경쟁적이고 공격적이며, 불명예스러운 수단을 통해서라도 외국의 기술을 습득할 준비가 되어 있고, 배우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제품을 외국 것으로 위장하곤 한다. 성장은 종종 수출지향적이며, 가끔 외국제품과의 경쟁에서 수입대체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유치산업의 육성을 위해서 보호무역 조치가 강구"되고 생존자들은 변화에 저항하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금융 주기는 "단기 혹은 때로 장기 자본대부를 통해서 교역과 산업을 촉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산거래, 그리고 생산보다는 부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 이행한다. 상인과 사업가들은 '위험 감수자'를 졸업하여 금리 수취인 신분이 되고 활력은 침체된다. 수입 중 소비의 몫이 증가하고 저축은 감소한다." 다양한 이해집단의 정치적 의사표출과 소득불평등, 부자들의 정치권력 독점은 "효율적인 정부의 행위를 가로막는다."(336-7)


"외부적 변화가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인지 지체시킬 것인지는 그 (국가의) 경제가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342) 혁신을 지속시키려는 노력의 딜레마는 이것이다. "안정적인 시기에는 장인의 본능과 낮은 수준의 혁신적 능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분권화가 선호된다. 반면에 위기나 중대한 변화의 시기에는 중앙의 지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앙이 너무 크게 성장하면 관료주의적 경화가 시작되어 그 다음 위기에 대응할 중앙권력의 능력을 저하시킨다."(346) 독자적인 기준 중 하나는 타이밍이다. "평화시에는 경제가 전향적으로 움직이고 분권화, 연방적이고 다원적인 자치의 기반 혹은 보완성이 촉진될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는 중앙집중화나 리더십이 요구되거나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중앙집중화를 선호하거나 분권화를 선호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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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사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7
로버트 C. 앨런 지음, 이강국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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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명된 대부분의 기술은 선진국에서 나타나는데 "그들은 더욱 더 비싸지는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저임금 국가에서는 이 신기술들이 비용 면에서 비효율적이었지만, "경제 도약을 위해 계획과 투자 조정을 사용하는 빅 푸시(Big Push)와 함께 이러한 기술을 급속히 도입"한 국가들은 서구와의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10-11) 경제발전을 통해 최저생계 수준을 높이는 일은 사회 후생에 여러가지 함의를 갖는다. 최저생계 수준으로 살아가는 사회는 건강 상태와 교육 수준이 낮다. 무엇보다 "최저생계 수준은 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경제적 동기를 제거한다. 하루의 노동으로부터 더 많은 산출을 얻어내야 하겠지만, 이 경우 노동이 너무 값싸서 기업들이 굳이 생산성을 높일 기계를 개발하거나 도입할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이다. 최저생계 수준은 빈곤의 덫이다."(23-4)


국부의 요인을 "경제학자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경제 발전 이론들에서 찾지만, 경제사가들은 역사적 변화의 동적인 과정에서 찾는다."(8) 제도, 문화, 지리는 언제나 "경제 성장의 배경에 숨은 요인이었던 반면, 기술 변화, 세계화, 경제 정책은 불균등 발전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게다가 산업혁명 자체가 콜럼버스, 마젤란을 비롯한 위대한 탐험가들의 항해와 함께 15세기 말에 시작된 세계화의 첫번째 단계의 결과였다. 따라서 대분기는 첫번째 세계화와 함께 시작된다."(29-30) 산업혁명 전야에 가장 크게 변화한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중은 (74퍼센트에서) 45퍼센트로 하락했다. 또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급속하게 도시화되었다." 1750년 영국 '농촌의 비농업 인구 비중'은 32퍼센트였다. "이들 대부분은 제조업에 종사했고 이들이 생산한 제품은 유럽을 가로질러 때로는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38)


도시화와 농촌 제조업의 성장은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켜 노동시장을 타이트하게 만들고 임금을 끌어올렸으며, 식품 생산을 위한 농업과 노동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다. 그 결과로 영국과 네덜란드 모두에서 농업혁명이 나타났다."(39) 또한 도시의 수요 증가로 에너지 혁명이 발생했다. 도시가 성장하고 나무 가격이 급등하자 대체 연료가 발전했는데, "네덜란드에서 대체 연료는 이탄(peat)이었고, 영국에서는 석탄(coal)이었다." 영국은 18세기에 "대규모 석탄 광산업을 지닌 유일한 나라였고, 석탄은 세계에서 가장 싼 에너지원을 영국에 제공했다." 식자율(literacy)의 상승 요인으로 흔히 종교개혁을 이야기하지만, 가톨릭 지역인 프랑스 북동부와 벨기에, 라인 강 계곡에서도 식자율이 상승한 현상을 감안하면, 이는 "고임금, 상업 경제의 등장 때문이었다." 고임금 경제는 식자율뿐만 아니라 계산력, 숙련의 형성을 촉진했다.(40-1)


문화·정치적 배경은 지역별 차이를 낳았다. "프랑스의 귀족은 세금에서 면제되었지만, 영국 의회는 1693년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토지세를 부과했다." 재산권과 관련해서도 "토지 수용이나 운하 건설, 토지를 가로지르는 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재산권 소유자들의 권리를 무효로 하는 영국 의회의 사법률[private acts, 특정 지역이나 특정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법률] 같은 것이 프랑스에는 없었다. 명예혁명이 현실에서 의미했던 바는 '1688년 이전에는 간헐적으로만 존재했던' 국가의 '독재적인 권력'이 이후로는 언제나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46-8) 도시화와 상업의 발전으로 "장인, 기능공, 상점주인, 농부의 아들 대부분과 노동자의 아들 일부가 몇 년 동안의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전례가 없을 만큼 대중들이 신문을 읽고 정치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는 톰 페인 같은 급진주의자가 <인간의 권리The Rights of Man>라는 책을 수십만 권 팔아서 유명해질 만큼 새로운 세계였다."(49)


"과학의 발견들은 유럽 전역에 알려졌고, 자연철학에 대한 상류층의 관심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화적 발전으로는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없다. 대신 산업혁명에 대한 설명은 영국의 독특한 임금과 가격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고임금과 값싼 에너지에 기초한 영국 경제에서는 기업들이 산업혁명을 일으킨 혁신적인 기술을 발명하고 사용하는 것이 이익이 되었다." 영국 기업들은 값싼 에너지와 자본을 사용하여 값비싼 노동을 절약했고, "더 많은 자본과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영국 노동자들은 더욱 생산적이 되었다."(49-50) 제니 방적기, 아크라이트 방적기, 뮬 방적기 등이 연이어 발명된 것은 과학적 발견에 빚진 것이 아니라, 노동이 비싸고 자본이 싼 곳에서 기계를 사용하면 이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엄청난 사고의 발전이 아니라 진부한 아이디어를 실행하기 위해 기계를 발명하고 개량하는 데 시간과 돈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증기기관은 발명을 추동하는 경제적 인센티브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증기기관의 과학은 유럽 전체에 알려져 있었지만 연구개발은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영국에서 증기기관 개발에 자금 지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58) 증기력은 또한 "19세기의 교통을 혁명적으로 탈바꿈시켰다. 고압 증기기관을 발명한 모든 이들(퀴뇨, 트레비식, 에반스)은 지상의 운송 수단을 움직이는 데 증기기관을 사용했다. 그러나 포장되지 않은 도로 사정을 극복할 수 없었던 탓에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 가지 해결책은 선로 위에 증기기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다."(61) 19세기 중반 "영국 노동생산성 상승의 절반은 증기기관 덕이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이득이 경제 성장이 100년 동안 지속된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다른 원인은 여러 산업 분야에 과학이 더 많이 적용되었다는 점이다."(63) 산업혁명기의 발명들은 이전 세기와 달리 계속되는 혁신의 물결을 촉발하면서 연달아 이루어졌다.


산업혁명의 서막은 영국이 열어젖혔지만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는 1870년에서 1913년 사이에 산업 생산에서 영국을 추월했을 뿐 아니라 기술 역량에서도 명백하게 추월했다."(74) 선도국들은 저발전 국가들과 격차를 벌리면서 경쟁우위를 더욱 강화했고, 제국주의로 나아갔다. 산업혁명은 유럽 제조업의 생산력을 높였지만, 저임금 노동력이 풍부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자본을 활용한 기계화가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지 않았다. "인도의 직물 산업 이야기는 19세기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의 이야기였다. 세계화와 결합된 편향적인 기술 변화가 유럽 국가들의 산업화를 촉진했고 동시에 아시아의 오랜 제조업 경제를 탈산업화했다."(98) 그러나 식민지 인도에서는 표준적인 개발 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다. "인도 인구의 겨우 1퍼센트만이 교육을 받았고, 성인 인구의 식자율은 6퍼센트였다. 관세는 낮았고 오로지 정부 수입을 위한 것이었다. 산업에 자금을 조달하는 은행 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100)


북아메리카의 동부 해안 지역은 "큰 규모의 경제를 지원하기에 충분히 넓고 비옥했고, 대륙의 내륙 지역은 세인트로렌스, 모호크-허드슨, 미시시피 등의 강들을 따라 접근 가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활동 대부분은 멕시코 내륙과 안데스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강은 이 지역에서 해안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수출 비용이 높았다."(105) 라틴 아메리카의 "팜파 지역은 적어도 펜실베니아만큼 쇠고기와 밀을 잘 생산할 수 있었지만 식민지 시대에 아르헨티나는 유럽으로부터 너무 멀었다. 아르헨티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량의 가죽 수출뿐이었다. 칠레는 유럽으로부터 더욱 멀었다. 이 국가들의 경제사는 그들의 수출품이 유럽에서 경쟁할 수 있을 만큼 선박이 충분히 개선된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진정으로 시작되었다."(119) 멕시코가 정체된 원인은 20퍼센트를 차지하는 백인 인구와 비슷한 수준의 식자율이 말해주듯, "노동력의 전반적인 기술 부족" 때문이었다.(139)


오늘날 아프리카의 가난을 이해하려면 1500년의 사회경제구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지리, 인구 그리고 농업의 기원이다."(147) 얌 재배 농민들이 열대우림을 처음 개간할 무렵 등장한 말라리아와 수면병 같은 열대 질병들은 서아프리카의 인구 증가를 억제했다. "서아프리카는 토지가 풍부한 농업 지역이었으므로 이동 경작이 그러한 상황에 적절한 대응이었다." 따라서 마을에는 "토지 없는 노동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고 누구든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지 않고 토지를 개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토지를 구입하거나 빌리기 위한 수요가 존재하지 않았다."(150-1) 아울러 인구 밀도가 낮고, 운송 비용이 높았기 때문에 대규모 시장을 떠받치는 전문 제조업이 발전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생산 체제를 지탱한 정치 체제는 토지를 배분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군대를 구성하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무리 또는 부족 연합이었다. "리더는 '족장'이라 불렸고 족장의 지위는 설득으로 유지되었다."(153)


이동 경작은 "위계적이지 않은 사회 조직을 만든 특징이 한 가지 있었다. 경작자들이 많은 여가시간을 즐겼다는 점이다." 게으를 권리와 권력의 매력은 노예제에 대한 욕망을 부추겼다. "문제는 토지가 상당 부분 점유되지 않은 환경에서는 노예들이 도망쳐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족장들은 "다른 지역의 노예들을 사냥하여 이러한 가능성을 차단했다. 사로잡힌 노예들은 토착 언어를 알지 못하거나 토착 생태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몰랐다. 물론 그 자녀들은 그 언어와 생존법을 알았다. 따라서 노예제는 한 세대 동안만 지속되었고, 노예의 아이들은 부족의 구성원으로 허락되었다. 노예제는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 아프리카에서 매우 흔했으며 많은 국가의 기초였다." 토지가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사적 재산권을 조직하기 위해 사용한 측량, 계산, 기하학, 쓰기 같은 법적, 문화적 제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153-5)


초기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은 "북아메리카의 선례와 같이 '직접 통치'를 통해 조직되었다. 이러한 통치하에서 비록 토착민은 흔히 선거권이 없었지만 식민 정부는 영토 전역의 정착민과 토착민에게 본국의 법을 적용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직접 통치가 '간접 통치'로 대체되었다. 모든 인종적 차이를 인식하게 하고 외국인에 대한 지원을 대가로 그들을 잘 따르는 지도자들에게만 권력과 부를 부여함으로써, 토착민이 외세의 점령에 덜 반대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식민지 국가는 본국의 법을 정착민과 도시에만 적용한다. 시골의 토착민에 대한 통제는 그들 종족의 '관습'을 적용하는 '족장'에게 맡겨졌다." 관습은 "식민주의의 목표에 맞게 재정립되었다. 노예제 같은 '야만적인' 관습은 (비록 현실에서는 계속되었지만) 제거되었고 부불노동을 요구하는 부족장의 권리 같은 쓸모 있는 관습은 유지되었다. 이런 식으로 강제노동이 식민지의 삶에서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164-5)


"선진국들이 연 2퍼센트씩 성장한다고 했을 때, 후진국의 일인당 GDP가 연 4.3퍼센트씩 성장하면 두 세대(60년) 만에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 인구 증가율에 따라 다르지만 그러려면 총 GDP는 매년 6퍼센트 이상 성장해야 한다." 저개발 국가들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진국 경제의 모든 요소―제철소, 발전소, 자동차 공장, 도시 등―를 한꺼번에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빅푸시(Big Push) 산업화이다.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부른다. 수요와 공급이 있기 전에 모든 것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공장에 앞서 제철소가 건설되어야 하며, 제품에 대한 유효수요가 있기 전에 자동차 공장을 건설해야 한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이 성공하려면 계획기구가 경제 활동들을 조정하고 그 활동들이 반드시 실행된다고 보장해야 한다. 계획기구의 역할은 서로 많이 달랐지만 20세기에 빈곤에서 탈출한 대규모 경제들은 이러한 과업에 성공했다."(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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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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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흥망성쇠를 분석하는 이론으로는 지리 가설, 문화 요인 가설, 무지 가설 등이 있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에서 농업 생산성이 바닥을 치는 이유는 토양의 품질 때문이라기보다는, "토지 소유구조, 정부 및 제도 때문에 농부들이 인센티브를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88) 문화는 인간 자원을 움직이는 내부 동력 중의 하나이지만, 새로운 기술과 제도가 도입되면 쇠퇴의 길을 걷곤 한다. 부유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무지 가설은 "지도자와 정책입안자를 계몽하면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실상 실패의 가장 큰 걸림돌은 그 사회가 직면한 제도적 제약이다.(108) 19세기 이후 심화된 세계 불평등은 농업 생산성의 차이가 아니라 "산업기술 및 생산 기반의 불공정한 분배에서 기인한다."(89) 국가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정치와 정치제도다."(27)


국가의 경제 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착취적 경제제도extractive economic institutions는 충분한 중앙집권화와 다원적 정치제도 중 어느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는 체제이다. "착취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 간의 시너지 관계는 강력한 순환 고리feedback loop를 만들어낸다. 착취적 정치제도 덕분에 정치권력을 쥔 엘리트층은 제약이나 반대 세력이 거의 없는 경제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또 향후 정치제도와 그 발전 방향도 멋대로 선택할 수 있다."(127) 포용적 경제제도inclusive economic institutions는 시민 사회의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시장이 존재하고 기술 및 교육이라는 번영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충분히 중앙집권화되고 다원적인 체제를 가리킨다. 다원주의pluralism와 포용적 경제제도가 중앙집권화를 요구하는 이유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과 그에 따른 일정 수준의 중앙집권화가 없다면 정부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것은 물론 법질서를 강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126)


착취적 정치 체제도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생산성이 높은 활동에 자원을 분배하거나, 엘리트층의 입지가 확고해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는 포용적 경제 제도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경우에는 성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착취적 제도 하에서 지속적인 성장이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정치제도와 경제제도 모두 착취적이라면 창조적 파괴와 기술 변화를 유발할 인센티브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정 기간 정부가 강제로 자원과 인력을 분배해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룰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한계점에 다다르면 1970년대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성장은 멈추고 만다."(143) 그뿐만 아니라 착취적 정치 체제는 막강한 정부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늘 이면에 도사리고 있어서, "그런 분쟁이 내전으로 비화되거나 심지어 정부를 완전히 와해 또는 몰락"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본질적으로 빈약하기 마련이다.(144)


흑사병 발발(1346~ )이라는 역사의 우연은 노동인구의 급감을 가져와 그전까지 억눌려 지내던 농노의 형편을 개선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는 농노를 영속적으로 영주의 토지에 얽어매던 봉건제의 약화를 가져왔고, 그전까지 별다른 차이가 없던 동서유럽의 정치·경제 제도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1600년 무렵이 되면 "서유럽의 노동자는 봉건적 세금이나 벌금, 규제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호황을 맞은 시장경제의 핵심 일원이 되었다. 동유럽 역시 그런 경제 호황을 맞았지만, (이는) 식량과 농산품에 대한 서유럽의 수요를 맞추려고 농노를 강제로 부린 덕분이었다."(154-5) 도시 기반이 미약한 동유럽에서는 농노들이 대지주에 맞서 세력화에 실패했고, 더욱 비참한 재판농노Second Serfdom로 전락했다. 동유럽의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를 수호하는 지배층들은 작은 차이가 쌓여 제도 분화institutional drift가 축적되고, 마침내 결정적 분기점에 이르는 양상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베네치아는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는 포용적 제도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일구었다. 베네치아는 경제면에서 자본을 제공하는 자본가와 무역을 실행하는 여행가로 구성된 합자회사 제도인 코멘다commenda를 발전시켰고, 정치면에서 대평회의Great Council와 도제doge 지명 위원회를 창설하고, 권력을 제한하는 도제의 취임 선서를 도입했다. 신흥 부자들은 기존 엘리트층의 정치권력에 도전했고, 경제 성공의 과실을 나누어가졌다. 그러나 1286년의 헌법 수정은 "이른바 ‘베네치아 폐쇄’의 전주곡이었다." 대평회의는 "외부인에게 문을 닫아걸었고 초기 의원은 세습귀족으로 변모했다. 이 체제는 1315년 확정되었다. 베네치아 귀족의 공식 명부인 ‘황금의 책Libro d’Oro’이 만들어진 것이다." 1324년부터는 "개인이 무역하려면 높은 세금을 물어야 했다. 장거리 무역은 이제 귀족의 전유물이 되었다. 베네치아 번영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229-30)


1445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모두가 인쇄술을 바람직한 발명품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1485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는 이슬람교도의 아랍어 인쇄 행위를 분명하게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1727년이 되어서야 "뮈테페리카는 인쇄소 설립을 승인받았지만 인쇄하는 책마다 이른바 ‘카디’라고 부르는 종교 율법학자 세 명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 오스만제국에서 "인쇄술은 엘리트층이 지식을 장악하던 기존 질서를 파괴할 위협으로 여겨졌다. 술탄과 종교 집단이 두려워한 것은 인쇄술이 초래할 창조적 파괴였다. 이들의 해법은 인쇄술을 금지하는 것이었다."(312-4) 중앙집권화 과정이 극심한 절대주의 체제를 불러오는 사례도 많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보야르Boyars라는 구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근대 관료주의 정부와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 수도를 건설하고, 자신을 차르의 자리에 앉혀준 ‘귀족 회의Boyar Duma’마저 철폐했다."(316)


반면 명예혁명(1688)은 구 시대의 유산을 일소했다. "정부는 투자와 거래, 혁신을 꾀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제제도를 채택했다. 아이디어에 대한 재산권인 특허권을 부여해 혁신을 추구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등 사유재산권도 단호하게 집행했다. 법질서도 수호했다. 잉글랜드 법을 온 시민에게 적용한 것은 역사를 통틀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의적 과세는 중단되었고 독점은 거의 철폐되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상업 활동을 적극 장려했고 국내 산업 육성에 힘썼다. 이를 위해 산업 활동 확대를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는 한편 잉글랜드 해군을 총동원해 상인의 상업 활동을 보호했다. 사유재산권을 완연히 합리화함으로써 잉글랜드 정부는 도로망, 운하에 이어 훗날 철도에 이르기까지 산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사회 기간시설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토대 덕분에 사람들이 느끼는 인센티브가 완전히 바뀐 것은 물론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 산업혁명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157)


잉글랜드의 사례를 보면 "다원주의 및 포용적 제도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사적 우발성과 광범위한 연합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307) 명예혁명은 정치 권력을 국왕에게서 의회로 이동시키는 최종 기착지였고, 무역과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의회 귀족층의 이해관계가 국가 정책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예혁명이 가져다 준 중요한 제도적 변화가 한 가지 더 있다. 의회는 튜더왕조가 불을 지핀 중앙집권화 과정을 지속해나갔다. 정부가 제약만 늘리고, 경제 규제 방식만 바꾸거나 여기저기 돈만 쓴 것은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정부의 기능과 역량이 확대되었다. 이 역시 중앙집권화와 다원주의 간의 상관관계를 증명해준다." 1688년 이후 의회는 "과세를 통해 수입을 늘리는 정부의 역량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1690년 1,211명에 불과하던 소비세 담당 관료가 1780년에는 4,800명으로 크게 불어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변화였다."(285-6)


"에스파냐에서는 잉글랜드의 경제성장과 제도적 변화를 이끌었던 과정이 현실화되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이사벨라와 페르디난트는 세비야의 상인 길드를 통해 새로운 식민지와 에스파냐 간 무역을 주관했다. 이 상인들이 모든 무역을 통제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얻는 부의 일정 지분을 왕실이 차지할 수 있도록 했다." 식민지와의 자유무역은 꿈도 꾸지 못했으며, 이들이 "무역을 워낙 편협하게 독점한 터라 식민지와 무역 기회를 통해 광범위한 상인 계층이 부상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320) 잇따라 비싼 전쟁을 치르는데 여념이 없던 카를로스 5세는 1520년 잉글랜드 의회와 비슷한 조직인 코르테스에 세금 인상을 요구했다. 도시 엘리트층은 이를 기회 삼아 개혁과 권한 확대를 요구했지만, 카를로스는 왕실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무참히 진압했다. "1664년 이후 코르테스는 개원조차 하지 못하다가 거의 150년이 흘러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고서야 부활할 수 있었다."(321-2)


"신석기혁명에서 산업혁명까지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나아지지 않은 주된 이유는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술혁신은 인류사회에 번영을 가져다주지만, 옛것을 새것으로 갈아치우고 특정 계층의 경제적 특권과 정치권력을 파괴한다." 기술혁신이 "사회에 번영을 가져다 준다 해도 그 때문에 촉발되는 창조적 파괴 과정은 옛 기술을 사용해 일하는 이들의 생계를 위협한다." 더 중요한 측면은 윌리엄 리의 양말 짜는 틀 편물기계(1589)처럼 중대한 혁신은 "정치권력의 판도마저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리에게 특허를 거부한 것은 사실 그의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될 백성이 가여워서가 아니었다. 정치적 패자로 전락할 것이 두려웠던 것뿐이다. 리의 발명품으로 곤경에 처한 백성이 정치 불안을 초래하고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268-9)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가혹한 식민지 정책의 시달림을 받아 발전의 퇴보가 일어났다. 네덜란드는 "1618년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 이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원주민들을 학살, 착취하면서 대농장 사회를 건설하여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위협을 피하고자 "여러 나라가 수출용 작물 재배를 포기하고 상업 활동을 중단했다. 자급자족 정책을 견지하는 편이 네덜란드를 상대하는 것보다 안전했기 때문이다. 1620년, 자바 섬에 있는 반텐은 네덜란드의 침범이 두려워 후추나무를 죄다 잘라버렸다."(359-60) 아프리카를 강타한 노예무역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나마 유지되던 질서와 정통성 있는 정부당국을 파괴해버렸다. 노예 획득 수단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납치하거나 소규모 공격을 통해 포로로 붙잡기도 했다. 노예를 만들기 위해 법까지 동원하는 지경이었다. 어떤 죄를 짓든 노예로 전락시켜 징벌했다."(365)


19세기 들어 점차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시에라리온에서 노예제도가 마침내 철폐된 것은 1928년이 돼서였다. 애초 수도 프리타운이 18세기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돌아온 노예의 안식처로 마련된 곳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예무역에 기반을 둔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 때문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경제 발전을 이룩하던 세계의 여타 지역과 달리 경제가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다."(371-2)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13년 ‘원주민 토지법Natives Land Act’을 제정하여,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밖에 안 되는 유럽인에게 87퍼센트의 토지를 주었다."(381) 1913년 이후 "엄청난 수의 아프리카인이 백인이 차지한 자기들 땅에서 쫓겨나 좁은 자치지구에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원주민들은 정부가 의도했던 대로 "백인 경제권에서 생계유지 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면서 연명했다.(383)


포용적 정치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뒷받침하면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포용적 정치제도 덕분에 포용적 경제제도가 마련되면 소득이 더 공평하게 분배되고 힘을 얻는 사회계층이 한층 더 넓어지며 정치면에서도 더 공평한 경쟁의 장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권력을 찬탈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이 낮아지고, 착취적 정치제도를 재창출할 동기 역시 약화시킨다."(442) 선순환 구조 속에서 권리를 자각한 잉글랜드 대중은 "단순히 투표권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의석을 바랐다. 이른바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의 본질이었다."(446) 점진적 변화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무리수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프랑스혁명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첫 실험은 공포정치로 이어졌고, 1870년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설 때까지 왕정복고에 이은 민주주의 복원 과정을 두 차례나 되풀이했다."(454)


"제도적 부동浮動은 작은 차이로 이어지지만, 결정적 분기점을 통과하면서 제도적 확산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제도적 확산은 이어 한층 더 결정적인 제도적 차이를 만들어내고, 다음 결정적 분기점이 도래할 때 그 영향력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열쇠는 역사가 쥐고 있다. 제도적 부동을 통해 결정적 분기점이 찾아왔을 때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610) 결정적 분기점을 만드는 이 역사적 과정은 숙명이나 불가피성을 띠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contingent 사건들이 겹쳐서 나타난다.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패한 국가들의 공통점은 바로 착취적 제도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다원주의의 태동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646) 스스로 잘 돌아가는 제도란 없으며, 집권층의 정치·경제적 실패와 무능에 대한 "정보가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면 사회 전반의 권한강화를 조율하고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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