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대륙철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2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문


"대륙철학이 과학주의를 비판하는 까닭은 자연과학의 모델이 철학 방법의 모델을 제공할 수도 없거니와 '제공해서도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에 접근하는 일차적이고도 가장 유의미한 길을 자연과학이 인간에게 제공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학주의에 대한 이런 우려는 비록 정당하기는 해도, 근 수십 년간 반과학적 태도와 융합하여 자칫 '몽매주의'로 빠져들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철학에서 피해야 할 두 극단은 (카르나프와 하이데거의 논전으로 대표되는) 과학주의와 몽매주의다." "오늘날 철학 연구의 분열은 부적절하고 분파적인 전문적 자기기술의 결과다.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둘 다 대단히 분파적인 자기기술이며, 이는 철학의 전문화, 내가 보기에는 철학의 비판 기능을 약화하고 문화생활에서 철학을 점차 주변화해온 전문화의 결과다. 철학은 문화생활의 필수적인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14-5)


1 지식과 지혜의 간극


"나는 지식과 지혜의 관계와 관련하여 덜 극단적인 견해를 취한다. 나는 삶의 의미라는 물음을 경험적 조사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이는 더 나은, 더 포괄적인 이론을 내놓아서 좁힐 수 있는 설명상의 간극이 아니라 도리어 '느껴지는' 간극이다. 설령 인식론적 걱정거리 전부를 과학적 탐구를 통해 경험적으로 해소한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이것이 어쩐지 지혜의 문제와는, 인간의 좋은 삶이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아는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느낄 것이다. 여기서 역설은 과학적 세계 파악이 지식과 지혜의 간극을 한층 민감하게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과학과 기술 면에서 고도로 발달한 사회들에서 이 역설을 가장 민감하게 느낀다는 쪽에 판돈을 걸기까지 할 것이다. 지식과 지혜의 간극이 심연처럼 넓어져 보이는 곳은 서구의 선진 사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의미라는 사변적 물음은 사치와 풍요의 결과다."(27-8)


"막스 베버의 표현대로, 과학혁명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자연의 탈주술화'를 초래했다. 더이상 자연은 인간도 참여하는 어떤 '세계정신'의 가시적인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순전히 비인격적인 객관적 '물질'로서 법칙의 지배를 받고,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인간의 의도와는 완전히 별개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근대인들의 문제는 분명하다. 과학혁명이 초래한 자연의 탈주술화에 직면하여 우리는 지식과 지혜의 간극을 경험하고, 그 결과 우리 삶에서 의미를 빼앗기고 있다. 자연은, 실은 인간은 의미 간극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고 좋은 삶에 관한 납득할 만한 견해를 내놓는 방향으로 '재주술화' 될 수 있을까? 이 딜레마는 해결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편으로 과학적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철학이 과학주의에 희생될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 우리는 짐승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우주를 새롭게 인간화하는 방식으로 과학주의를 거부한다면 몽매주의에 이를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 우리는 광인이 된다."(31-2)


"이런 논의가 대륙철학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여러분은 충분히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나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짐승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광인으로 바꾸겠다고 위협하는 이 딜레마를 오늘날 철학이 철저하게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의미는 지혜라는 물음, 그리고 이와 연관된 삶의 의미라는 물음을 적어도 철학 활동의 중심 가까이로 이동시켜야 하고, 무관심하거나 당혹스러워하거나 심지어 경멸하는 태도로 이 물음들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륙철학이라 불리는 철학의 주된 호소력은 지식과 지혜, 철학적 진리와 실존적 의미를 통합하려고, 적어도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한다는 데 있다." "그러니 지식과 지혜 사이 간극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을 구별하는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말해두자. 쟁점은 이것이 아니다. 이 책 전반에 걸친 나의 요지는 그 간극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모든' 철학함의 필요조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32, 35)


2 대륙철학의 기원: 칸트에서 독일 관념론에 이른 경로


# 대륙철학의 핵심적 운동들

1.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그 여파 (피히테, 셸링, 헤겔, 슐레겔과 노발리스, 슐라이어마허, 쇼펜하우어)

2. 형이상학 비판과 '의심의 대가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베르크손)

3. 독일어권 현상학과 실존철학 (후설, 막스 셸러, 카를 야스퍼스, 하이데거)

4. 프랑스 현상학, 헤겔주의, 반(反)헤겔주의 (코제브,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바타유, 보부아르)

5. 해석학 (딜타이, 가다머, 리쾨르)

6.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카치, 벤야민,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7. 프랑스 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 라캉, 알튀세르), 포스트구조주의(푸코, 데리다,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리오타르, 보드리야르), 페미니즘(이리가레, 크리스테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차이는 대부분 그야말로 칸트를 '어떻게' 읽는지, 그리고 칸트를 '얼마나 많이' 읽는지에 달려 있다. 제1비판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보통 초월론적 연역이라는 논증의 성공에 관심을 둔다. 이 논증에서 칸트는 우리가 어떻게든 대상을 경험하려면 자신이 말하는 '오성의 범주들'의 작용을 전제해야 하고, 따라서 인식하는 인간의 주관, 즉 지각 경험의 '지독하게 윙윙거리는 혼동'을 개념 아래 통일하는 주관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요컨대 칸트가 말한 대로 〈대상이 개념에 합치하는 것이지 개념이 대상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적 세계는 우리에게 참으로 현실적이지만, 우리가 그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설명하려면 개념 아래 직관들을 통일하는 주관을 논리적으로, 또는 칸트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초월론적으로' 전제해야만 한다." "이 관점에 의거해서 읽으면 칸트는 인식론에, 아울러 간접적으로 과학철학에 중대한 철학적 기여를 한 셈이 된다."(45-8)


"1890년부터 1920년대 말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강단 철학을 지배한 신칸트주의 학파는 십중팔구 칸트를 이렇게 읽었다. 근래까지 영미권에서 칸트를 수용하는 방식을 지배한 피터 스트로슨을 비롯한 이들도 칸트를 인식론적으로 독해했다. 그렇지만 제3비판의 야심은 사뭇 다르다. 칸트는 판단 능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오성 능력(자연에 관한 인식에 관심을 두는 인식론의 영역)과 이성 능력(자유에 관심을 두는 윤리학의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시도한다. 판단은 자연 영역과 자유 영역 사이에서 매개자가 될 것이고, 비판철학의 요소들을 하나의 체계로 조화시킬 것이다. 이 경로를 따라간다면, 칸트 철학의 뜨거운 쟁점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관계, 자연과 자유의 관계의 타당성이 되거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된다. 독일 관념론에 속하는 피히테와 셸링, 헤겔과 초기 독일 낭만주의에 속하는 슐레겔과 노발리스는 바로 이 경로를 따라갔다. 주장하건대, 이 시기부터 대륙철학은 줄곧 이 경로를 따라갔다."(48)


"하만은 1784년에 쓴 「이성의 순수주의에 대한 메타비판」에서 형식주의를 이유로, 즉 인식의 형식적 성격을 과대평가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이성과 경험이, 선험적인 것과 후험적인 것이 분리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이유로 칸트를 비판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일련의 잘못된 이원론(형식 대 내용, 감성 대 오성, 이성 대 경험, 자연 대 자유, 순수한 것 대 실천적인 것 등)으로 세분되며, 실천이성의 우위는 추상적 의무의 공허한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하만은 후대에 전개된 철학적 국면인 언어적 전회까지 신통하게 예측이라도 한 듯이, 이성과 경험의 분리, 또는 형식과 내용의 분리는 불가능하며, 그 이유는 당연히 이성과 경험의 혼합물인 언어에 사유가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언어를 사용할 때 당신은 개념과 직관 사이의 정확히 어디에 구별선을 긋는가? 하만은 〈사유하는 능력 전체가 언어에 의존할뿐더러······ 언어는 이성이 스스로를 오해하는 과정의 중심에 있기도 하다〉고 쓴다."(50-1)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을 통해 인간의 인식이 고전적 형이상학의 사변적 대상들(신, 영혼)에 접근할 수 있음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물자체를 인식할 가능성과 자신이 자아의 '본체적' 근거라고 부른 것─현상으로 현전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가능성을 둘 다 제거하기까지 했다. 야코비의 기본 테제는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을 변경하는 피히테의 작업이 객관도 주관도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빈약한 '자아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피히테의 입장이 니힐리즘적인 이유는 자아 외부에, 또는 자아와 별개로 존재하는 대상을 전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데카르트 비판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야코비의 피히테 비판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세속화하는 합리주의를 니힐리즘 혐의로 고발한다." "신을 부정할 경우 우리는 인간을 신으로 바꾸어놓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야코비가 보기에 칸트와 피히테의 관념론에는 인간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의 복제물로 바꾸어놓으려는 유혹이 담겨 있다."(57-60)


"마이몬의 중심 논증은 초월론적 관념론의 핵심에 자리한 칸트의 오성과 감성 이원론이 너무도 철두철미한 이원론인 까닭에, 선험적 개념과 경험적 직관이 상호작용할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이는 초월론적 연역 논증이 바로 칸트가 그 연역을 수행하기 위해 상정하는 이원론 때문에 타당성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런 비판에 영향받지 않을 어떤 상위의 통일 원리였다. 피히테 철학과 독일 관념론은 이 물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피히테는 이 통일 원리를 주관의 활동 안에 위치시켰다.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은 주관의 자기반성 안에서, 자유에 관한 주관의 의식 안에서 통일되었다." "청년기 셸링이 자신의 초기 자연철학에서 표현한 통일 원리는 힘 또는 생명 개념이었다. 통일 원리는 헤겔에게는 정신 개념이었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는 의지 개념이었으며, 니체에게는 힘, 마르크스에게는 실천, 프로이트에게는 무의식, 하이데거에게는 존재였다."(65-6)


3 안경과 눈: 철학의 두 문화


"여기서는 대륙철학의 역사적 의미에 관한 두 가지 주장을 펼치고자 한다. 첫째, 대륙철학은 본질적으로 '전문적 자기기술self-description'이다. 다시 말해 대륙철학은 철학자들과 철학과들이 자기네 연구와 강의를 조직하고 지적 충성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륙철학은 철학 전문직화의 일면이다. 전문적 자기기술로서의 대륙철학 개념이 정확히 무엇에서 기원했느냐는 물음에 대한 합의가 없기는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미국이라는 맥락에서, 아울러 정도는 덜하지만 영국에서, '대륙철학'은 기존 용어들인 '현상학'이나 '현상학과 실존철학'을 대체했다." "'현상학'이 '대륙철학'으로 대체된 이유가 완전히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대륙철학은 프랑스어권의 다양한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상 운동들을 다루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들은 갈수록 현상학에서 멀어졌고 대개 현상학에 적대적이었는데, 상대적으로 라캉, 데리다, 리오타르는 적대감이 약했고, 들뢰즈와 푸코는 적대감이 강했다."(78-9)


"영어권에서 분석철학은 거의 완전한 전문적 패권을 쥐고 있으며, 현상학 같은 비분석철학은 이 패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영어권에서 대륙 사상의 수용은 대부분 철학과 밖에서─문학이론, 예술사, 사회이론, 정치이론, 문화 연구, 역사서술, 종교 연구, 인류학 등─이루어져왔는데, 이는 의미심장하고도 중요한 사실이다." "대륙철학을 둘러싼 논전이 끊임없이 격앙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두번째 주장을 해야 한다. 전문적 자기기술 개념이 대륙철학을 둘러싼 다툼을 격화하고 악화하는 이유는, 이 개념이 대륙철학의 더 오래된 '문화적' 의미를 덮어버리기 때문이고, 또 대륙철학이 영국 및 영어권과 유럽 대륙의 관계에 관한 논쟁까지 거슬러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 전통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은 '영국 경험주의', '프랑스 합리주의', '독일 형이상학'처럼 모호하고 실상을 호도하는 개념들에 담긴 정치지리학의 이데올로기적 편견들과 불가피하게 얽히게 된다."(81-2)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과 콜리지를 결합하면 당대 잉글랜드 철학 전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밀에 따르면 벤담은 위대한 〈전복자〉 혹은 〈그의 시대와 나라의 위대한 '비판적' 사상가〉다. 그런 전복적 비판은 논리 분석의 방법과 경험적 양식(良識)을 사용하여, 〈실천적 사안들〉의 진실을 캐묻기에 이른다. 밀이 보기에 벤담은 흄의 회의주의를 특히 법률과 통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한 실천 지향적 사상가다. 벤담의 훌륭한 면모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자세로 이런 비판 재능을 공익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콜리지는 사안의 진실이 아니라 의미를 캐묻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까닭에 콜리지는 두루 받아들이는 학설이나 전통을 파괴하기보다는 그런 학설과 전통의 의미를 해석학적으로 재구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격변의 강력한 적으로서 전통을 지키려는 쪽은 '콜리지주의적 대륙철학'이고, 사회적 변화와 진보의 친구로서 전통을 파괴하려는 쪽은 벤담이다."(84-6)


"밀은 진리란 전체의 어느 부분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자체를 반성함으로써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밀은 그런 적대 또는 변증법의 필요성과, 자유민주주의 정체에서 필수적인 요소인 견제와 균형을 비교한다. 경쟁적 정당 제도가 정당한 한 가지 이유는 여당의 정책과 입법을 계속해서 검토하는 것이 야당의 의무이고, 여당이 야당이 되어도 응당 그런 의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오류는 밀의 희망적인 견해에 따르면 진리의 일부를 전체로 오인하는 것이고, 헤겔의 표현에 따르면 오류에 대한 두려움을 진리에 대한 욕구의 상위에 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제는 벤담이 옳은지 콜리지가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 철학 경향이 더 큰 진리를 함께 표현하고 진리를 보기 위해 안경과 눈을 공히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파괴와 끈기 있는 해석학적 재구축을 공히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은 더 큰 문화적 전체의 반쪽들이다."(90-1)


4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비판, 실천, 해방


"대륙 전통에서 철학적 문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완성품이 아니거니와, 영원한 철학이라는 비역사적인 공상의 요소도 아니다. 이 전통에서 고전적 철학 텍스트를 읽는 일은 대학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보다는, 우리가 이제 겨우 어렵사리 알아듣기 시작한 언어를 구사하는, 먼곳에서 온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철학적 문제들은 텍스트와 맥락에 '묻어 들어가(embedded)' 있는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떨어져(distanced)' 있다. 번역과 언어, 독해, 텍스트 수용, 해석, 그리고 역사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처럼 지엽적으로 보이는 문제들이 대륙 전통에서 그토록 중요한 이유를 바로 이런 묻어 들어가 있는 동시에 떨어져 있는 성격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 대륙철학자들은 흔히 '철학'보다는 '문학'을 하고 있다는 당혹스러운 혐의를 받곤 한다. 이런 혐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철학자의 명제와 경험의 관계가 마치 어떤 무매개적이고 투명한 관계이기를 바라는 것이다."(109-11)


"대부분의 분석철학과 달리 대부분의 대륙철학은 철학과 철학사를 구별하는 입장에 타당성이 있음을 부인할 것이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전통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이 대륙철학에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잠바티스타 비코와 후대의 장 자크 루소를 두드러진 예외로 치면, 역사 문제는 바로 이 전통에서 하만과 헤르더,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겔의 작업을 통해 철학적 중심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륙 전통의 장점은 실천으로서의 철학의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성격과 이 실천에 관여하는 철학자의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추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보통 '역사성'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통찰이다. 이 역사성에 대한 통찰로 말미암아,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심오한 철학적 물음들은 더이상 사변적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주제들(신, 자유, 불멸성)이라고 정당하게 불릴 수 없게 되었다─칸트는 이 주제들이 도덕적으로는 옹호할 수 있을지언정 인식론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114-5)


"철학(그리고 철학자들)의 본질적 역사성에 관한 인식은 두 가지 문제를 함축한다. ①인간 주체의 근본적인 유한성. 즉 인간 경험 외부에 신과 같은, 우리의 경험을 특징짓고 판정하는 견지나 준거점은 없다. 또는 설령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관해 전혀 알 수 없다. ②인간 경험의 철저히 우연적인 또는 피조적(被造的)인 성격. 다시 말해 인간 경험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우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며, 이렇게 만들어지는 환경은 그 정의상 우연적이다." "인간 경험이 우연적인 창조라면, 그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 이는 철학이나 예술, 시, 사고(思考)의 변혁적 실천, 또는 현재를 구원할 수 있는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대륙사상을 관통하고 하버마스나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을 계속해서 고취하는 이 요구는 곧 현재의 요건으로부터, 자유롭게 바꿀 여지가 없는 그 여건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비판과 해방은 실 한 가닥의 양쪽 끝이다."(115-7)


"대체로 대륙 전통에서 철학은 현재를 비판하고 현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반성적 자각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위기를 부르주아의 속물근성에 물든 세계에서 신앙의 위기로 표현하든(키르케고르), 유럽 학문의 위기(후설), 인간과학의 위기(푸코), 니힐리즘의 위기(니체), 존재의 망각의 위기(하이데거), 부르주아-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마르크스), 도구적 이성의 헤게모니와 자연 지배의 위기(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로 표현하든 다른 어떤 위기로 표현하든 말이다." "이 비판은 기존 실천에 대한 비판이며, 그 실천이 정당하거나 자유롭지 못하다고, 진실되거나 온당치 못하다고 느낀다. 이 비판은 기존과는 다른 개인적 또는 집단적 실천을 지향하는 해방, 인간의 삶을 생각하는 다른 방식의 해방을 목표로 삼는다. 그 목표는 니체가 말한 고독한 귀족의 삶일 수도 있고, 마르크스가 구상한 공산주의 사회일 수도, 들뢰즈와 가타리가 기술한 복수의 생성(~되기)일 수도, 또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130-2)


5 무엇을 할 것인가: 니힐리즘 대응법


"니체의 니힐리즘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한 구절은 그의 유고 제1권 『힘에의 의지』에서 찾을 수 있다. 니체에게 니힐리즘이란 다음을 의미한다. 〈최고 가치들이 스스로를 탈가치화하는 것, 목표가 결여되어 있으며,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스스로를 탈가치화하는〉이라는 재귀동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최고 가치들이 비판을 통해 탈가치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니체는 최고 가치들이 '스스로를' 탈가치화하는 일이 그것들의 전개 과정에 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니힐리즘은 의미의 질서의 붕괴다. 그렇게 되면 칸트 이전 형이상학에서 가치의 초월론적 원천으로 상정했던 모든 것이 무효가 되고 공허해지고, 삶의 의미를 걸어둘 인식론적 갈고리가 사라진다. 삶의 의미를 옹호하는 모든 초월론적 주장들은 그저 가치들로 격하되고 그 가치들은 믿기 어렵게 되어 니체가 말한 '가치 전환'이나 '재평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140-1)


"니체의 니힐리즘 진단은 니힐리즘을 극복해야 한다는 요구를 동반한다. 니체의 저술을 규정하는 것은 니힐리즘에 대한 저항이다. 이런 이유로 니체는 절망에 빠지거나 어떤 새로운 신을 발명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도 이 생성의 세계를 견디게 해줄 새로운 범주들과 새로운 가치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되풀이해 역설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니체의 저술에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영원회귀' 학설의 기능, 즉 〈의미도 목적도 없음에도 무(無)로의 결말 없이 불가피하게 회귀하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관한 학설의 기능이다. 니체는 영원회귀 개념으로 범신론의 반(反)테재를 시도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범신론이 만물에 신이 임재한다는 사상이라면, 영원회귀는 시종일관 신이 없는 우주를 생각하려는 시도다. 니체에게 무신론은 단순한 사실 진술이 아니다. 무신론은 인간이 굽실거리곤 하는 우상들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는 상당한 노력의 귀결이기도 하다."(147-8)


"칸트 윤리학의 토대는 순수하고 숭고한 의무이며, 이 의무는 어떠한 경험적 관심에도 근거할 수 없고, 행복과 같은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볼 수도 없다. 덕의 보상은 덕 그 자체여야 한다. 그럼에도 칸트의 윤리학은 순수한 실천이성의 요청으로서 신과 영혼불멸을 포함한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도덕적 행위와 먼 장래에 행복을 누리며 덕을 보상받을 것이라는 전망은 연결될 여지가 남아 있다. 니체는 칸트의 이런 사상을 칸트보다 더 칸트답게 바꾼다. 니체가 보기에 신은 없고, 영혼불멸 관념은 고약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으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가 없는 우주, 스스로를 끝없이 되풀이할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보장이 없는 우주에 존재하는 우리를 상상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상을 감당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이런 사태를 알면서도 '긍정'할 수 있다면, 기독교 도덕적 세계 해석이 함축하는 니힐리즘을 마침내 극복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148)


"물론 철학에서 니힐리즘과의 대결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니체, 하이데거, 아도르노처럼 각양각색인 사상가들이 인정한 대로, 철학이 다름 아닌 니힐리즘을 만들어내는 힘들과 공모해왔음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니체가 보기에 철학은 니힐리즘적이다." "그렇다면 니힐리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대체로 대륙철학은 근대의 위기에 대응할 수 있을 법한 비철학적 담론과 실천을 모색한다. 니체는 고대 아티카 희랍인들의 비극적 사유에서, 하이데거는 시적(詩的) 창조에 관한 명상적 숙고에서, 아도르노는 하이모더니즘(high modernism, 모더니즘의 한 형식으로 과학과 기술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특징으로 한다) 예술의 자율성에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에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진료에서 위기에 대응할 자원을 구한다. 여기서 요점은 대부분의 대륙철학이 예술이든 시든 정신분석이든 정치든 경제든 비철학과의 관계에 관심을 쏟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니힐리즘이라는 문제들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150-1)


6 오해에 관한 사례연구: 하이데거와 카르나프


"빈 학단의 기본적인 지향은 오토 노이라트의 '형이상학에서 자유로운 과학'이라는 문구로 표현할 수 있다. 철학은 과학의 조수로서 경험과학의 명제와 방법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작업만 한다. 나아가 빈 학단은 철학적 테제를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경험과학의 명제를 규명하고 전통 형이상학의 주장을 비판한다는 의미에서, 철학을 전혀 실천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노이라트는 이렇게 썼다. 〈단일한 경험과학에 속하는 다양한 분야들의 옆쪽이나 위쪽에 자리하는 기본적 또는 보편적 학문으로서의 철학 따위는 없다.〉" "이 과학적 세계 파악과의 관계에서 형이상학의 명제들은 거짓이라기보다는 그저 무의미한 편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그 명제들에는 인지할 내용이 없다. 그 명제들은 정당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감정을 표현할 적절한 수단은 철학이 아니라 예술이나 음악이나 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카르나프는 〈형이상학자들은 음악 재능이 없는 음악가들〉이라고 잘라 말했다."(164-5)


"하이데거는 철학을 이렇게 파악하는 입장과 극명히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학문/과학에 맞서 형이상학을 옹호하고자 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학문은 형이상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 바탕이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무(無)다. 하이데거는 그렇다면 〈무는 어떠한가?〉라고 삐딱하게 묻는다. 하이데거의 주장은, 학문은 이 무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자 하지 않는 반면에 제대로 된 형이상학은 무엇보다 이 무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카르나프의 주된 논점은 논리적 일관성을 갖춘 언어에서는 그 물음(〈무는 어떠한가?)〉이 형성될 수조차 없다는 것인데, 그 물음이 부정(否定)을 일종의 그럴싸한 명사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그런 물음이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형이상학이 일상언어에 내재하는 모호한 측면들을 양분으로 삼는다는 것, 논리적 개혁을 통해 형이상학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러한 논리적 언어 개혁은 빈 학단의 초기 프로그램의 일부였다."(165-7)


"하이데거의 논점은 지성적인 방식 외에 사물들을 생각하는 다른 방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물들을 이론적으로 현시하기에 앞서 그가 말하는 '기분'─아리스토텔레스의 파토스(pathos) 개념의 번역어─안에서 정서적 혹은 감정적 개시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그런 기분을─우울하든 신나든 그냥 무심하든간에─한낱 느낌으로, 이성 일색인 우리의 정신생활에 다른 색을 입히는 일종의 심리적 채색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기분은 인간이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그렇다면 무에 관한 물음은 이제 〈무를 드러내 보이는 기분이 있는가?〉가 된다. 하이데거는 그렇다고 답하며, 이것이 불안, 독일어로 앙스트(Angst)의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보기에 불안을 경험하는 가운데 개시되는 무는 존재의 의미에 관한 형이상학 '고유'의 물음을 제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러한 탐구는 빈 학단이 주창한 과학적 세계 파악으로 환원할 수 없다."(167-9)


7 과학주의 대 몽매주의: 철학의 전통적인 곤경 피하기


"대륙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에서 과학주의를 채택할 경우 철학의 비판적·해방적 기능을 포착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과학적 세계 파악과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이 공모할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과학주의는 세계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알아채는 데 근본적으로 실패했다. 이런 소외는 여러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고립된 인간 주체와 대립하는 객체의 영역,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영역으로 세계를 변모시키는 식일 수도 있고, 무심하게 조사하거나 거래할 수 있는 공허한 상품으로 객체를 변모시키는 식일 수도 있다. 이들의 신념은 자연과학의 모델이 철학 방법의 모델을 제공할 수도 없거니와 제공해서도 안 되고, 인간이 세계에 접근하는 일차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방편을 자연과학이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신념을 대륙사상가들 전반에 걸쳐서, 이를테면 베르그손, 후설, 하이데거에게서, 아울러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교제한 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190-1)


"그렇지만 과학주의에 대한 정당한 우려는 자칫 반과학적 태도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해 몽매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이제 나는 과학주의를 견제하는 동시에 몽매주의로 빠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 현상학을 옹호함으로써 그 중심에 관해 생각해보려 한다. 메를로퐁티는 세계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이론적 태도의 기반을 이루는 인간 경험의 〈전(前)이론적 층을 드러내는 것〉이 현상학의 과제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현상학 '하기'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경험의 전이론적 층을 드러내고, 이 경험 층을 그 자체로 엄밀하게, 그리고 타당성의 기준에 부합하게 기술할 적절한 양식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이 환경세계(독일어 Umwelt)는 과학의 가치중립적인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인지적·윤리적·심미적 가치들에 이미 물들어 있는 세계다. 다시 말해 과학주의 또는 후설이 말한 객관주의는 학문적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인 '생활세계'의 현상을 간과한다."(193-7)


"현상학 내에서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 등을 운운하는 어떤 신비적 견해의 이름으로 과학적 연구의 결과를 논박하거나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 비판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의식하는 일차적인 방편 또는 가장 유의미한 방편을 과학이 제공하지 않는다고 역설할 뿐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론적 지식은 실천적 관심에 뿌리박고 있다. 더욱이 현상학적 전학문은 그런 실천들에 필요한 것이 자연과학의 인과적 가설이나 사이비 과학의 인과적으로 들리는 설명이 아니라 해석적 규명 또는 해석학임을 보여준다. 현상학이 제공하는 것은 사람과 사물,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를 규명하는 재(再)기술이다. 그렇기에 현상학은 어떤 위대한 발견을 내놓기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자연과학의 이론적 태도를 취할 경우 은폐되는 것들을 상기시켜준다. 현상학은 '일종의 상기'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평범한 생활이라는 섬세한 그물망을 구성하는 배경의 실천들과 일과들을 기억하게 해준다."(197-200)


8 감히 알고자 하라: 이론의 고갈과 철학의 장래성


"칸트는 계몽주의의 기획을 〈감히 알고자 하라〉라는 말로 요약했다. 이 표현을 〈너 스스로 생각하고자 하라〉로 자유롭게 바꾸어서 철학의 장래성, 실현되기를 소망하는 철학의 장래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철학은 특정한 문화의 생활에서, 한 문화가 자기 자신과, 그리고 다른 문화들과 대화하는 방식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철학은 특수한 맥락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분석할 때,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처럼 가장 일반적인 형식의 물음으로 특정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때, 비판적 반성으로 기능할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바람은 그러한 물음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고찰이 탐구와 논증을 통해 교육적·해방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스탠리 카벨의 말마따나 철학은 성인(成人) 교육이다. 그러나 이를 새로운 견해로 보기는 어려운데, 소크라테스라면 철학에 대한 이런 기술에 놀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21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5
제임스 풀처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 자본주의의 세 가지 역사적 형태

1. 상업 자본주의

2. 자본주의적 생산(소비를 포함하는)

3. 금융 자본주의


"자본주의란 본질적으로 이윤을 기대하는 자금 투자이며, 영국 동인도회사의 교역처럼 상당히 위험한 장거리 모험사업에 투자할 경우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이윤은 퍽 단순하게도 희소성과 거리의 결과였다. 예컨대 말루쿠제도에서 후추를 사는 값과 유럽에서 후추를 파는 값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나면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이윤에 비하면 모험사업에 들이는 비용은 별것 아니었다." "이것은 확실히 자본주의였다. 장거리 교역을 하려면 큰 이윤을 기대하는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아니었다. 고수익을 올린 비결은 이런저런 수단으로 독점을 확립하고, 경쟁자를 차단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시장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 생산을 합리화하는 활동보다 희소한 생산물을 거래하는 활동에서 이윤이 나왔던 까닭에 상업자본주의가 끼치는 영향은 제한되었다. 유럽 인구 대다수는 자본 소유자들의 이런 활동에 영향받는 일 없이 일상을 영위했다."(9, 12-3)


"자본주의적 생산은 임금노동에 기반을 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과 노동 모두 추상적이고 이탈적인 특성을 띤다. 둘 다 특정한 경제 활동에서 분리되고 따라서 원리상 적절한 보상을 주는 어떠한 활동으로든 나아갈 수 있다." "(임금노동자 측에게) 이런 자유는 얼마간 허상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급 노동을 하지 않고 살기가 어렵고 노동의 종류와 고용주를 거의 고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임금노동자는 필요하거나 소비하고 싶은 재화를 스스로 생산할 수 없으므로 구입해야 하고, 그로써 일군의 새로운 자본주의 기업들 전체를 활성화하는 수요를 만들어낸다. 그런 수요에는 음식과 옷, 개인 소유물뿐 아니라 여가 활동까지 포함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도입되자 곧 여가의 상업화에 기초하는 새로운 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생산과 소비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해준 임금노동의 이런 이중 역할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단 작동되기 시작하자 그토록 빠르게 확대된 이유를 설명해준다."(27-9)


"시장은 전혀 새롭지 않지만 매우 새롭고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을 이룬다." "시장은 당신이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 약간의 물품을 추가로 구매하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물품이든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시세가 변화하는 까닭에 어떤 시장이든 투기를 통해 돈을 벌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상품을 장차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것을 기대하며 사들일 때, 아울러 그 상품을 어떤 식으로든 가공하여 가치를 높이지 않을 때, 투기는 일어난다. 거의 모든 상품이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개 비생산적일지라도 투기는 단순히 돈을 버는 방법이 아니라 위험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공급과 수요의 관계가 언제나 변화하는 탓에 시장은 불안정하다. 재고를 늘리고 쟁여두는 것은 이윤을 갉아먹고 사업을 망칠 수 있는, 피하고픈 시세 변동에 대비해 보험을 드는 방법이다." "투기는 자본주의와 별개인 무언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적 메커니즘에서 자라나는 불가피한 파생물이다."(29-32)


2 자본주의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영국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원을 찾으려면 16세기에 이루어진 생산과 소비, 시장의 성장을 살펴봐야 한다.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임금노동이 갈수록 흔해지고 있었으며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임금노동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곧 사람들이 상품을 구매할 돈을 가지고 있었고 시장관계가 그들의 일상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시기 영국에는 런던에 거점을 둔 교역상들에 힘입어 전국 단위 시장이 이미 뚜렷하게 출현해 있었다." "계급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14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날품팔이'를 뜻하는 직인(journeyman)들은 보통 도제 과정을 마쳤지만 아직 장인 자격을 얻을 만한 숙련도와 경험을 갖추지 못한 수공업자였다. 장인들은 갈수록 직인들의 장인 자격 획득을 막고 직종을 통제하는 길드에서 그들을 배제하면서 계속 싸게 부려먹으려 했다. 직인들의 대응은 자기네 지위를 지키고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향상을 단체로 협상하기 위한 조직화였다."(40-1)


"봉건 영주의 생계수단은 농민층으로부터 생산물이나 노동력, 현금을 받아낼 권리였다. 하지만 15세기에 시장관계가 봉건관계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영주는 지주로 변모해갔으며, 지주의 생계수단은 시장에서 소작권을 놓고 경쟁하는 소작농이 지불하는 지대였다. 토지는 갈수록 임금노동을 통해 경작되는 한편, 사고팔 수 있는 재산이 되어갔다. 15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단속적으로 이어진 인클로저 운동은 이런 토지소유권의 변화를 상징한다. 시장 지향형 농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렇다면 왜 영국에서 먼저 봉건제가 쇠퇴했을까? 주장하건대 영국에서 봉건제가 덜 단단하게 확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잉글랜드의 통치계급은 유럽 대륙의 통치계급과 비교해 농민층으로부터 잉여물을 얻어내는 데 지역의 군사력을 덜 사용했다. 그들은 토지소유권, 지대, 임금노동에 따른 경제적 메커니즘에 더 의존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통일된 국가가 전국 단위 시장의 출현을 촉진했다."(43-6)


"사실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기법은 때로 유럽의 다른 사회들에서 훨씬 더 발달했다. 유럽에는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의 오랜 역사가 있었다. 선대제는 플랑드르 또는 이탈리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고, 14세기와 15세기에 독일에서 널리 퍼졌다." "16세기 무렵 자본주의적 생산은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발전하고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성장을 생산의 관점에서만 봐서는 안 된다." "상업자본주의의 자본 축적을 위한 혁신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성장과 별로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금융 혁신은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배하게 된 대규모 산업기업들이 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일련의 작은 단계들을 거치며 차츰차츰 이루어진 자본주의적 생산의 성장보다는 대기업들이 조직한 대규모 자본집약적 공정의 확립이야말로 과거와 단절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17세기 네덜란드 상업자본주의의 금융 혁신은 극히 중요한 변화였다."(47-51)


"도시들이 불가결한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한 원인으로 도시들을 꼽는 설명에는 문제가 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분명 도시들이 독립성을 키워간 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그후로 먼저 되살아난 봉건 통치자들에 의해, 뒤이어 민족국가에 의해 자율성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게다가 자본주의적 생산은 도시보다 시골에서 더 단단하게 발전했다. 새로운 방법과 값싼 노동력을 무자비하게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시의 길드들이 차단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접근법은 유럽의 다국가 정치 구조에서 출발한다. 다국가 구조는 유럽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경제 발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질서를 제공했다. 또한 유럽에서 다국가 특징 덕에 기업가들은 경제 환경이 악화되는 나라에서 기업에 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나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 숨이 막힐 듯한 대항종교개혁 국가가 등장했음에도 자본주의는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56-9)


3 어떻게 지금 여기에 이르렀는가?


# 산업자본주의 발전의 세 단계

1. 무정부적 자본주의

2. 관리 자본주의

3. 재시장화된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가 획기적으로 발전한 18~19세기가 무정부적이었던 이유는 자본주의 기업가들의 활동이 조직된 노동에 의해서도 국가에 의해서도 비교적 견제받지 않은 데 있었다." "규제 완화는 이 시기에 부상한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신념과 잘 어우러졌다. 그렇다고 국가가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실은 정반대였다. 시장의 힘은 질서 잡힌 사회에서만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었고 그러자면 산업자본주의가 엄청난 무질서를 낳고 있던 이 시기에 국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업, 소요, 기계 파괴, 재산 범죄가 생산과 질서를 위협하는가 하면 노조와 급진적 정치 운동이 자본가 고용주와 국가에 직접 도전하는 실정이었다. 소요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어 이따금 심각한 폭력을 행사했다." "경쟁하는 소규모 제조업, 약한 노동조직, 경제 규제 완화, 강한 국가, 최소한의 국가복지는 자본주의 발전의 이 단계에서 서로를 강화한 특징들이었다."(67-70)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970년대에 절정에 이른 자본주의 발전의 다음 단계 동안, 산업의 양편이 더 조직되고 국가의 관리와 통제가 늘어남에 따라 시장을 통한 경쟁과 규제는 감소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 분쟁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각국 정부가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으로부터 자국 경제를 보호하는 한편, 적들에 맞서 자국 자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동원하려 했기 때문이다." "'관리자본주의' 단계를 형성한 대기업의 성장, 계급 조직화의 발전, 국가와 계급 조직들 간 합의주의적 관계, 국가의 개입과 규제, 국가복지, 공적 소유의 확대 같은 과정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서로를 강화했다. 이 모든 과정의 공통점은 사람들의 삶에서 시장의 중요성이 감소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갈수록 비인간화했던 시장의 힘에 반발하는 일반적 태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 단계 동안 자본주의는 민족적 제국들 안에서 조직되었다."(70-1, 77)


"관리자본주의가 무너진 한 가지 이유는 합의주의 제도가 결국 작동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물가와 소득을 규제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거듭 실패했다. 그런 규제에 필요한 노조, 고용주, 국가 간 협의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마련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국제 경쟁이 확대되면서 기존 산업사회들이 받는 압박이 커졌다는 것이다. 제국들이 쇠퇴하고 자유무역이 성장하는 가운데 각국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에 관리자본주의의 핵심 가치였던 복지와 평등, 고용에 대한 집단주의적 관심은 자유와 선택에 초점을 맞추는 더 개인주의적인 가치에 밀려났다." "결국 시장의 힘을 되살리기 위해 경제 활동에 대한 국가 규제는 없애거나 줄여나갔다. 규제 완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산업은 금융업이었을 것이다. 금융 기능들을 나누는 경계는 경쟁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신념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금융 규제 완화 덕에 속도를 올린 금융화 과정은 2007년 금융위기로 귀결되었다."(78-80, 83)


4 자본주의는 어디서나 똑같은가?


"스웨덴의 계급협력은 계급투쟁의 소산이었다. 노동자 조직과 고용주 조직이 모두 강하게 성장한 까닭에 관리자본주의가 확고부동한 합의주의 형태로, 즉 자본주의 관리를 양편의 중앙 조직들에 상당 부분 위임하는 형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사실 스웨덴이 '노동 평화'라는 평판을 얻은 주된 이유는 이 강력한 조직들이 자기네 조직원들을 통제한 데 있었다." "국가복지는 노동운동의 집단주의 정책의 한 측면일 뿐이었다. 노동운동 지도부는 복지가 사회주의 사상의 힘과 노조 조직만이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고 국가의 경제 파이를 키워주는 역동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에서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웨덴 경제 정책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수익을 못 내는 기업들을 파산하게 놔두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자원이 수익을 내는 기업들에게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조가 통제한 노동시장 정책은 일자리를 보호해주었던 게 아니라 노동자의 이직과 재교육을 지원해주었다."(96-8)


"개인주의로 유명한 미국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 및 조직면에서 스웨덴 자본주의와 정반대였다. 미국의 산업화는 분권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 모험심과 진취성을 발휘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진 사회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관리자본주의는 집단 조직화의 범위가 더 좁았고, 국가복지가 덜 보편적이었으며, 반트러스트 법률이 더 강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 단계를 통과했다. 재시장화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분명 생산 영역에서 일어났지만, 가장 두각을 나타낸 영역은 틀림없이 금융 활동에 자본이 투입됨에 따라 규모를 키워간 금융 영역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전 세계의 지배적인 공산품 생산 국가에서 금융상품 혁신을 선도하는 국가로 이행한 놀라운 변화였다. 미국은 아주 성공적으로 이행한 것으로 보였다. 금융 활동에서 큰 이윤이 생겼고 경제 전체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금융업 종사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활동이었다."(103, 112-3)


"일본은 독특한 관리자본주의를 창안했다. 국가는 지시를 내리는 역할을 맡았으며, 경제 전체를 무대로 사업을 하는 기업군들의 형태로 기업 집중이 진행되었다. 또다른 독특한 특징은 노동조직이 약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은 조직을 이루려 시도했고 또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노동력 수요가 많았던 1차대전 기간에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지만, 고용주들의 거센 반대와 국가의 탄압에 부딪혔다. 국가복지 역시 별로 발전하지 않았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통합하고 노동운동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기업복지제도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은 1990년대초부터 바뀌었다. 특히 노동시장에서는 확실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의 임시직화'가 진행되고 '성과 기반 고용'이 도입되었다. 2008년 노동력의 3분의 1은 대체로 파트타임, 계약직, 임시직 노동자로 이루어진 비정규직이었다. 이는 생각만큼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다. 초과근무수당이 없는 아주 오랜 노동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115, 120-1)


"1970년대 이후 세 나라 모두 관리자본주의의 관행을 포기하고 시장의 힘이 더 자유롭게 작용할 수 있도록 개혁을 도입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렇다면 동일한 관행을 받아들인 점이 세 국가별 차이를 사라지게 만들었을까? 먼저 지적할 점은 모델들이 변천한다는 것이다. 세 나라 모두 한때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라들이 모방해야 할 선도적 자본주의 경제로 보였다. 실제로 세 나라의 성공 경로를 다른 나라들이 똑같이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세 나라의 제도는 저마다 문제들을 낳고 결국 경제 위기를 야기했다. 가장 근래에는 미국의 자유시장과 주주자본주의가 무엇이든 정복할 것처럼 보였지만, 바로 이 자본주의가 숱한 스캔들과 2007년 시작된 긴 위기를 초래했다. 국제 경쟁의 격화와 지구화는 세 나라에서 공히 재시장화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이 결과를 수렴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세 나라의 자본주의는 이제까지 나름대로의 속도와 방식으로 재시장화되었기 때문이다."(125-6)


5 자본주의는 지구화되었는가?


"자본주의적 생산을 퍼뜨린 주요 매개체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이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멕시코에서 '마킬라도라'라고 알려진 제조공장이 있다. 마킬라도라는 1965년 멕시코가 미국과의 국경으로부터 10마일 이내 지역에 완제품을 재수출하는 조건으로 원료와 부품을 무관세로 수입하는 공장의 설립을 허용하면서 시작되었다.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어 무역 장벽이 제거되자 마킬라도라는 더욱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과 유럽의 자본이, 결국 일본의 자본까지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고자 들어왔다." "멕시코에서 노동력이 저렴했던 것은 단순히 공급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이 조직되지 않고 규제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약간의 보상이 있기는 했다. 기존 산업사회의 노동자들이라도 소비자로서는 분명 득을 봤기 때문이다. 외국의 더 저렴한 노동력과 더욱 치열한 국제 경쟁은 그들이 구입하는 상품의 가격을 낮췄다. 그렇지만 실질임금 증가율은 내림세였다."(131-4)


"제조업만 기존 산업사회에서 빠져나간 것이 아니다. 타자 치기, 전화 응답, 데이터 처리, 소프트웨어 개발, 문제 해결 같은 대다수 사무직 업무를 이제 원격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한 덕에 특히 이런 종류의 업무를 임금과 사무실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외국 지역으로 옮기기가 쉬워졌다." "세계에서 영어권에 속한다는 것은 상당한 이점으로, 이 덕분에 카리브해의 몇몇 섬나라와 인도는 유리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영어 하나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들보다 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카리브해 일대는 인도, 필리핀, 말레이시아, 중국에서 구할 수 있는 더욱 값싼 노동력과의 경쟁에 직면했다. 원격근무 시설을 쉽게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은 더 반복적인 저숙련 형태의 원격근무가 거의 제약 없이 퍼져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136-7)


"이제껏 검토한 자본주의적 관행이 확산되면서 필연적으로 통화 유통량이 늘었지만, 20세기 마지막 25년간 정말 놀라우리만치 증가한 국제 통화 유통량은 주로 투기적인 통화 이동의 결과였다. 대부분 투기적 성격이었던 국제 투자의 액수는, 1970년부터 1997년까지 거의 200배 증가했다. 20세기 말에 거래된 세계 통화는 하루 1조 5000억 달러에 달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올라가 2011년 하루 5조 달러가 되었다. 이 엄청난 증가세는 외국 여행이나 국제 무역을 위한 통화 거래가 아니라(분명 그런 거래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통화의 이동을 활용해 돈을 벌려는 투기와 관련이 있었다." "국제 통화 거래와 투자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통신 및 금융) 기술의 발전 덕분이었다. 1980년대 재시장화된 자본주의의 규제 완화 풍조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국가가 환율을 고정하고 통화의 국제 이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유시장과 경쟁에 대한 새로운 믿음에 부합하지 않았다."(143-6)


#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신화

1.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근래에 생겨났다. → 사실 자본주의는 거의 생겨나자마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 자본은 전 지구적으로 유통된다. → 사실 대부분의 자본은 소수의 부유한 나라들 사이를 오갈 뿐이다.

3.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조직된다. → 초국적 기업도 민족국가 내의 활동이 핵심이다.

4.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세계를 통합한다. → 자본주의가 지구화될수록 부의 불평등은 더 심화되어 왔다.


6 위기? 무슨 위기?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관계가 밀접했다. 대부분의 생산이 거의 직접 소비를 위해 이루어졌다. 반면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화가 갈수록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생산되었고, 생산과 소비의 관계가 멀어졌다." "과잉생산 경향은 사실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하는 경향이지만, 이런 위기들이 자본주의를 파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위기가 발생해야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폐업과 파업이 속출하는 위기가 닥쳐야 생산량이 수요량에 더 가까운 수준으로 감소해 과잉생산의 중압이 사라지고, 가장 비효율적인 생산자들이 퇴출당하고, 선순환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더 낮은 임금은 수익성을 높였고, 더 싼 가격은 수요를 자극했다. 더 낮은 이자율은 투자금을 더 저렴하게 빌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다시 생산이 확대되기 시작하고, 고용률이 올라가고, 상품을 구입할 돈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었다."(162-3)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위기를 통해 제 길을 넓히는 셈이었지만,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주장한 대로라면 이 확장은 〈더 폭넓고 더 파괴적인 위기들〉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어떤 거대한 경제 붕괴로 인해 자본주의가 끝나리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경우에만 자본주의가 끝날 것이라 전망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에 내재하는 특정한 경향들이 최후의 전복을 촉진할 터였다. 기술이 발전하고 소유권이 집중되면서 생산 단위의 크기가 커지는 한편, 노동자들이 더 큰 규모로 집중되어 더 쉽게 조직될 터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위기는 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을 급진화함으로써 분명 일익을 담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결국 혁명적 세력이 되리라는 마르크스의 예측은 입증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구조에 통합되었고, 자본주의가 차고 넘치게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매료되었다."(164-5)


"생산능력 향상과 기술 변화의 결과로 인해 늘어난 생산량은 수요량이 덩달아 증가하면 흡수될 수 있었지만, 전 세계 수요량은 상품 공급량과 같은 속도로 증가하지는 않았다. 결국 새로운 생산 중심지들이 등장한 한 가지 이유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데 있으며, 낮은 임금은 소비 수요를 많이 창출하지 않았다. 선진국들의 소비 수요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자본가들이 낮아지는 생산 수익성에 대응한 한 가지 방법이 국외의 값싼 노동력을 찾는 것이었다면, 다른 방법은 생산에 대한 투자에서 주식, 통화, 파생상품에 대한 투자로 자본을 옮기는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힘들고 불확실한 경제 환경에서 상품과 서비스 생산으로 수익을 내려고 애쓰느니 이런 금융상품들을 투기적으로 거래하는 방법으로 돈을 더 쉽게 벌 수 있었다." "국제 경쟁의 격화, 부채 증가, 규제 완화, 자본의 금융화는 안정을 깨뜨리는 갖가지 힘들을 낳았다. 이 추세는 2007년 시작된 위기로 이어졌다."(174-7)


"자본주의가 머지않아 어떤 위기를 맞아 파멸할 것 같지는 않다 할지라도, 오늘날의 문제들은 자본주의가 장기적 쇠퇴 과정에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막대한 환경 비용, 기반시설 비용, 사회적 비용을 사회에 떠넘겨야만 이윤을 낼 수 있다. 그 부담은 대체로 국가가 짊어지지만, 정부가 지출 삭감, 민영화, 긴축 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데다 어느 정도는 이런 정책의 결과로 불평등이 심화되어 정부의 정당성이 흔들리고 부담을 떠안는 국가의 능력이 약해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민간자본은 단기 이윤을 추구하면서 상당한 권력을 사용하여 자본주의의 장기 생존능력을 지탱하는 제도와 구조를 실제로 약화시키는 정책을 조장한다. 크레이크 칼훈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자신이 의존하는 조건을 파괴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금융화와 신자유주의는 이 추세를 악화시킨다. 자본주의의 향후 생존은 자본주의를 제거하지 않은 채 이 파괴 추세를 제한거나 뒤집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여부에 달려 있다.〉"(18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르네상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7
제리 브로턴 지음, 윤은주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로서 그는 프랑스 혁명의 평등주의 원칙을 전적으로 지지했던 프랑스 민족주의자였다." "그에게 르네상스는 이성, 진리,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위대한 미덕들을 고무했던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상태를 표상했다. 미슐레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근대와 그 자체로서 동일했다'." "그는 또한 르네상스를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시대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어떤 정신 혹은 태도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승격시켰다." "사실 미슐레식 르네상스가 갖는 가치들은 미슐레가 소중히 여기는 프랑스 혁명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해 보인다. 둘 다 자유, 이성, 민주주의의 가치를 꽃피우고, 정치적·종교적 전제정을 거부하고 자유의 정신과 '인간'의 존엄을 숭배했다. 그의 시대에 이러한 가치들이 실패하는 것에 실망한 미슐레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승리를 거두고 폭압이 사라진 근대 세계를 약속했던 역사적 시대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21-3)


"스위스 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15세기 이탈리아적 현상으로 정의했다. 그는 15세기 이탈리아 정치의 독특한 성격이 근대적인 개인의 탄생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고전 고대의 부활, 보다 넓은 세계의 발견, 종교적 불안정성의 확대가 '인간이 정신적으로 개별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러한 새로운 발전을 중세의 자의식 결핍과 대조했다. 그에 따르면 중세에 '인간은 종족, 민족, 분파, 가족 혹은 조합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스스로를 인식했다.' 달리 말하면 15세기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부르크하르트는 프로테스탄트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스위스의 개인주의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예술과 삶이 하나로 통합되었고, 공화주의의 대의가 옹호되기는 했으나 한계가 분명했고, 종교가 국가에 의해 길들여지던 시대로 그려졌던 르네상스의 모습들은 사실 부르크하르트가 사랑해 마지않던 바젤의 이상화된 모습이었다."(23-4)


"20세기 초에는 훨씬 더 이중적인 견해가 출현했다. 부르크하르트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1919년 요한 하위징아가 『중세의 가을』을 출간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위징아는 북유럽 문화와 사회가 이전의 르네상스 해석에서 어떻게 무시되었는지를 분석했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라는 부르크하르트식 시대 구분에 도전했다. 그에 따르면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라고 정의했던 양식과 태도는 사실 중세의 정신이 시들어가거나 쇠퇴하는 단계에 불과했다." "하위징아는 '르네상스'라는 용어의 사용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중세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19세기에 활동했던 선배 역사가들이 그토록 찬양한 르네상스의 이상형에 대해 하위징아는 매우 비관적인 설명을 내놓았다. 그리고 유럽 개인주의와 '문명'의 우월성의 만발로 르네상스를 설명하려는 어떤 욕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책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저술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27-8)


"20세기 중반에 전체주의가 등장하자, 중부 유럽의 지식인 이민자 집단을 중심으로 르네상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었다." "한스 바론은 봉건적인 전제군주정에 대한 시민 공화국의 승리로 설명할 수 있는 제2차 밀라노 전쟁(1397~1402)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은 학자이자 정치가인 레오나르도 브루니라고 보았다. 한스 바론에 따르면, 『피렌체 찬가』와 『피렌체인의 역사』에서 브루니는 '정치 참여와 공직 생활에 대한 새로운 철학'을 표명했고, 이를 '학자적인 은둔이라는 이상과 대비했다.' '사회와 국가의 성원으로 한 사람을 교육하는 데 헌신하는 것', 그리고 메디치 시대의 피렌체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공화주의적 미덕을 함양하는 것, 바로 이것이 바론의 시민적 인문주의의 정의다. 바론의 주장은 유럽이 정치적 전체주의의 등장으로 위협받던 시대에 인문학자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매력적인 답변이었고,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을 르네상스의 핵심 기원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8-30)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60년대의 사회적·정치적 격동, 특히 인문학의 정치화와 페미니즘의 등장을 거치면서 르네상스에 대한 평가가 다시 한번 크게 바뀌었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근대인이 탄생했다고 보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르네상스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린블랫은 16세기에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관한 자의식의 증대'가 목격된다고 주장했다. 남성들은 (그리고 때로는 여성들도) 자신의 사회적 조건에 맞게 자신의 정체성을 다듬는, 즉 '연출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그린블랫은 이것을 특별히 근대적인 현상의 시작으로 보았다. 그린블랫이 보기에 16세기 영국의 위대한 저술가들─에드먼드 스펜서, 크리스토퍼 말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돌이켜보고 다듬어나가는 파우스트나 햄릿 같은 가상의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근대인으로 보이는 최초의 사람들이다."(31-2)


"그린블랫과 제먼 데이비스 같은 비판적 연구자들은 또한 20세기 말의 철학적·이론적 시류, 특히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사조들은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 그리고 근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변화의 '대서사'에 대해 회의적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 미셸 푸코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기원했다고 규정되는 인문학적·문명적 가치들이 나치즘, 스탈린주의, 홀로코스트나 소비에트 강제수용소의 참상에 대해 어떠한 답변도 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에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20세기 말의 사상가들은 어느 누구도 르네상스의 위대한 문화적·철학적 성취들을 찬양하지 않았다. 대신 많은 역사가들은 훨씬 더 지역적인 수준에서 현상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에서 경시되었거나 잊힌 목소리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마녀', '유대인', '흑인' 같은, 배제된 집단이나 주변화된 사물이 새로이 면밀한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33-4)


1 세계적 르네상스


"르네상스에 대한 고전적 정의들이 가진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다른 문명을 배제한 채 유럽 문명의 성취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라는 용어의 발명을 목격했던 시대가 유럽이 전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가장 공격적으로 주장했던 순간이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최근 역사, 경제, 인류학 분야에서 르네상스에 대한 대안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미슐레나 부르크하르트 같은 19세기 사상가들에 의해 관련 없는 것으로 버려졌던 여러 요소들이 르네상스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사항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많은 쟁점들을 제기하는 르네상스 작품은 젠틸레 벨리니와 조반니 벨리니의 걸작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르코〉이다." "작품 속에서 마르코는 설교단에 서서 흰 천으로 몸을 감싼 동방 여인들을 향해 설교하고 있다. 성 마르코 뒤쪽으로는 베네치아의 귀족들이 줄지어 서 있고, 성자의 앞쪽으로는 동방의 인물들이 보다 많은 수의 유럽인들과 뒤섞이는 보기 드문 모습으로 서 있다."(38-9)


"벨리니 형제는 르네상스 유럽의 동쪽으로 펼쳐진 세계가 갖고 있던 신화적 이미지와 실제 모습 둘 다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동방 세계의 독특한 성격, 특히 베네치아의 오랜 무역 파트너였던 아랍 지배하의 알렉산드리아가 갖고 있는 관습, 건축, 문화에 관심을 보였다. 벨리니 형제는 이집트 맘루크, 오스만인, 페르시아인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문화들이 유럽 도시국가들이 소망하는 많은 것들을 가졌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동방의 진귀한 상품들, 기술·과학·예술 지식, 사업 기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런던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들의 문화와 소비에 미친 동방 상품의 영향은 점진적이었으나 심대했다. 음식부터 회화에 이르는 삶의 모든 영역이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르코〉라는 그림은 유럽 르네상스가 동방과의 대비가 아니라, 사상과 물질의 광범하고 복합적인 교환을 통해서 스스로를 정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42-4)


"1453년,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이제 유럽의 가장 강력한 제국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장차 르네상스의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주체로 등장했다." "오스만 제국과 유럽 간의 교류와 경쟁이 암시하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동방과 서방 사이에 분명한 지리적 혹은 정치적 경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문화적·정치적인 면에서 이슬람적인 동방과 기독교적인 서방 사이에 절대적인 분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19세기식 믿음이 두 문화 사이의 교역과 사상의 원활했던 교류를 가려왔다. 분명 양측은 종종 종교적·군사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의 물질적·사업적 교류가 계속되어왔다는 것이고 양측에 문화적인 발전을 위한 자양분 가득한 환경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전시대의 과거를 공통의 문화적 유산으로 함께 향유하면서 우리가 현재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결과물이라고 인식하는 새로운 성과물들을 만들어냈다."(52, 57-9)


2 인문주의자들과 책


"15세기 초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과 책은 소수 국제적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면 인문주의와 인쇄기는 엘리트와 민중 두 계층 모두의 읽기와 쓰기 능력 그리고 지식의 지위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그러한 혁명은 북유럽에 더 집중되었다." "인문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추종자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를 보장한다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먼저 인문주의는 고전을 익히는 일이 그들을 더 나은, 즉 더 '인문주의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고, 그러면 사회생활에서 개인이 마주치게 될 도덕적·윤리적 문제들을 숙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둘째로 인문주의는 학생들과 종사자들로 하여금 고전 문헌 교육이 대사, 변호사, 성직자 혹은 15세기 유럽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관료행정체계 속에서 서기관으로서의 미래 경력을 위해 필수적인 실용적 기술을 제공한다고 믿게끔 했다. 인문주의적 훈련은 엘리트 계층으로 진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시장성 높은 교육으로 보였다."(70-1)


"초창기 인쇄소들은 주로 성경, 설교집, 교리문답서 같은 종교적인 책들을 발간했다. 그러나 모험소설, 여행기, 팸플릿, 신문, 그리고 약 처방부터 아내의 의무를 다루는 각종 안내서나 지침서 같은 좀더 세속적인 책들이 차차 소개되었다. 1530년에 이르면 팸플릿 인쇄본이 빵 한 덩어리 값밖에 안 되는 가격으로 팔렸고, 신약성서 한 부의 가격이 노동자의 하루 일당과 같아졌다. 듣고, 보고, 말하면서 소통이 이루어지던 문화가 점차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문화로 변해갔다. 궁정이나 교회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 일종의 문필 문화가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진 인쇄소 주변에서 탄생하기 시작했다. 문필 문화의 의제는 종교적 정통 교리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요와 수익에 의해 정해졌다. 인쇄소는 지적·문화적 창조 활동을 집단적 모험으로 바꿔놓았다. 인쇄업자, 상인, 교사, 필경사, 번역가, 예술가, 저자 모두가 하나의 최종 결과물을 내놓는데 자신들의 기술과 부를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다."(86-7)


"에라스뮈스는 지속 가능한 학문 공동체를 세우고 교육 방법론을 다듬는 일에 엄청난 지적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쇄된 그의 글들과 최고의 '문필가'라는 지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쇄술은 에라스뮈스의 지적 경력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라스뮈스에 따르면 배움과 삶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홍보하기 위해 인쇄술을 이용함으로써 15세기 인문주의의 학구적인 성취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에라스뮈스 또한 인문주의가 교육과 종교를 개혁할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환심을 살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1516년에 『기독교 군주의 교육』을 쓰고 미래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에게 헌정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카를 5세가 그의 지침을 따랐는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어떠한 자리도 주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한 에라스뮈스의 반응은 카를 황제의 정치적 경쟁자인 헨리 8세에게 『기독교 군주의 교육』의 사본 한 부를 보낸 것이었다."(91-5)


3 교회와 국가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寄進狀」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근간이 되는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로렌초 발라는 수사학, 철학, 문헌학 분야의 역량을 동원하여, 문서의 역사적 시대착오, 문헌학적 오류, 논리적 모순이 「기진장」이 8세기에 위조된 것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발라의 폭로 사건은 르네상스 시대의 종교, 정치, 학문 사이의 관계에서 등장한 새로운 국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군주국과 같은 정치 조직들이 등장하면서 교회의 권위에 성공적으로 도전하기 위한 새로운 지적·행정적 기술들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후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발라를 교황 서기로 임명한 사실은 「기진장」을 폭로한 그의 전력에 비추어 이례적인 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학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모르는 악마보다 아는 악마가 나은 법이다). 그것은 또한 발라처럼 정치적으로 전략적인 인문주의자들이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준비가 얼마나 잘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103-4)


"1437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는 동방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의 통합을 논의하고 교황의 권위를 제한하려는 종교회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렌체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피렌체 종교회의는 르네상스의 본질이 밝혀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정상회담으로서는 실패였다. 동방교회와의 통합을 통해 자신의 지상권을 공고히 하려던 교황의 소망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치적·문화적 사건으로서는 대성공이었다. 이탈리아 국가들에는 약화된 교황권에 도전하여 동방과의 상업적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배적인 가문들은 통합령을 도출해내는 데 기여한 메디치 가문의 탁월한 능력을 주장했던 고촐리의 프레스코화처럼 호화로운 예술 작품들을 통해 종교회의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교묘하게 조작할 수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종교회의를 통해 고전 문헌과 사상, 예술 작품이 동에서 서로 전달되며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예술과 학문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07, 111)


"한편, 1420년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파당적 분열을 끝내고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곳이 너무나 황폐해지고 쇠락해서 도시 비슷한 모습조차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전 로마제국의 수도나 미래 가톨릭 제국의 수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마르티누스와 후임 교황들은 새로인 중앙 집중을 이룬 로마 교회의 영광을 기념할 수 있도록 야심찬 재건 계획을 세웠다." "로마는 기독교 세계의 제왕적 수도 자리를 두고 콘스탄티노플과 겨루고 있었다. 이 경쟁은 1453년 술탄 메흐메트에게 도시가 함락되자 더욱 거세졌다. 로마와 교황들은 이스탄불과 술탄들에게 뒤처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06년 4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를 건축가로 지명하고 새로운 베드로 대성당의 주춧돌을 놓았다." "역설적이게도, 장차 유럽의 사회적·정치적 풍경을 영구히 변모시킬 저항 운동, 곧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했던 것은 바로 이 기념비적인 작업을 완수하기 위한 비용이었다."(116-7)


"종교개혁으로 인해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이 잠식당하고 있음을 감지한 로마교황청은 권력을 재확인하려는 차원에서 예술과 건축에서의 과시적 소비를 크게 늘려나갔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예술에서 그러한 압박이 감지된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를 받아 시스티나 성당을 창세기의 장면들로 장식한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는 로마의 가르침에 기초한 천지창조에 대한 해석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장면들에서 엿보이는 우아한 역동성과 인물들의 강하고 긴장된 근육 역시 그 권위가 흔들릴 경우 표출될 로마교회의 힘과 잠재적인 분노를 표현했다. 이러한 긴장감은 바티칸 콘스탄티누스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에서도 감지된다. 이 작품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삶과 동방에서 서방으로의 교회 권력의 이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북유럽의 인쇄된 '말씀'이 남유럽의 웅장한 기념물들과 장엄한 프레스코화들을 이기고 있었다."(129-30)


4 멋진 신세계


"중세 기독교도들의 지리학은 창조론에 입각한 종교적 상징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14세기에 제작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실용적인 지도들은 르네상스 세계를 형성했던 혼합적인 문화 전통을 보여준다. 1330년경 제작된 작자 미상의 마그레브의 해도는 상인들과 항해가들이 지중해를 가로지르기 위해 사용했던 소위 '포르톨라노 해도'의 실제 예다. 십자형의 항정선(航程線)은 나침반으로 방위를 확인하는 일을 돕고 항해가들이 제법 정확한 항로를 따라 항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라나다나 모로코 둘 중 한 곳에서 만들어진 이 해도는 기독교와 이슬람 공동체 사이에서 지리 지식과 항해 기술의 교류 그리고 무역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202곳의 지명들 가운데 48개가 아랍어에서 나온 것이고, 나머지는 카탈루냐, 에스파냐, 또는 이탈리아어에서 온 것이었다. 아랍인, 유대인, 기독교인 항해가들과 학자들의 이런 실용적인 지도들 덕분에 유럽의 경계를 넘는 최초의 시험 항해가 가능해졌다."(139)


"1522년 9월 8일, 마젤란(의 남은 선원들)이 성공한 세계 일주는 외교적인 대소동을 불러일으켰다.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왕실 간에 말루쿠 제도 영유권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1529년 제작된 리베이로의 세계지도는 지리적 현실의 조작에 대한 증거로 남아 있다. 리베이로는 말루쿠 제도를 토르데시야스 선의 서쪽으로 172.5도에, 즉 카스티야 영역 안쪽으로 위치시켰다. 이 지도는 카를 5세에게 필요했던 협상력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는 말루쿠 제도에 대한 권리를 포르투갈인들에게 되팔았다. 카를 5세는 장기적으로 보장되는 상업적 투자 이익보다는 당장 받을 수 있는 현금을 선호했다. 말루쿠 제도로 가는 서쪽 교역로 개척에 들어갈 엄청난 비용과 실행 계획 때문이었다. 경도를 계산하는 정확한 방법 없이는 말루쿠 제도의 정확한 위치를 절대 알아낼 수 없을 터이기 때문에, 자신의 교묘한 지리학적 속임수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리베이로는 카스티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 제작자로 처신했다."(156-7)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대륙 수탈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이 대량 사망하자 에스파냐인들은 또다른 노동력 공급원을 필요로 했다. 해결책은 노예였다." "1529년과 1537년 사이에 카스티야 왕실은 아프리카에서 신세계로 노예를 실어나를 수 있는 허가증을 360건이나 발급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수치스러운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르네상스 유럽이 그렸던 세계는 혁명적으로 변화했다. 고전시대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뿌리 깊은 신념은 토착 주민들의 문화, 언어, 신념 체계를 설명하지 못했고,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중세로부터 좀더 뚜렷하게 근대적인 세계로 유럽을 변화시킨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새로운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에다 부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더함으로써, 아메리카에서 토착민들과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가공할 고통과 억압을 외면하게 만들었다."(161-3)


5 과학과 철학


"동방과 서방 사이의 학문적 교류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출현에도 기여했다. 아랍 천문학과 수학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는 13세기 중반 페르시아에 세워진 마라가 관측소였다. 관측소의 선두적 연구자는 나시르 앗딘 알투시(1201~74)로서, 그의 책 『천문학 논고』는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모순되는 설명을 수정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투시의 쌍원(Tusi Couple)' 개념을 고안해냈다는 데 있다. 이 정리에 따르면, 등속원운동으로부터 선운동이 파생될 수 있는데, 투시는 이 사실을 하나의 구가 반지름이 두 배가 되는 또다른 구 내부를 회전하는 모습을 통해 입증해보였다. 오늘날의 천문학사 연구자들은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투시의 쌍원 정리를 그대로 답습했으며, 이 정리는 태양계의 태양 중심 체계를 정의하는 데 핵심적이었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과거에는 어느 누구도 르네상스 과학에 아랍이 끼친 영향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180)


"인쇄술은 전에 없이 예술과 과학을 하나로 결합시켰고,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단연코 알브레히트 뒤러였다. 그는 동판화라는 새로운 기술을 재빨리 익혔고, '원근법의 비밀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새로운 예술은 반드시 과학, 특히 가장 정확하고 논리적이고 도식적으로 명확하게 구성할 수 있는 수학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었다. 1525년 그는 『컴퍼스와 자를 이용한 측량법』이라는 논문을 출간했다. 뒤러의 논문은 '화가들뿐만 아니라 금세공인, 조각가, 석공, 목수, 그 밖에 측량에 의존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유익하게' 쓰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예술적 재능과 실용적인 과학적 소양을 함께 갖춘 다빈치가 저지른 가장 큰 계산 착오는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출판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뒤러와는 달리, 레오나르도는 후대에 어떠한 구체적인 혁신도 남기지 못했다. 19세기에 월터 페이터에 의해 무명에서 벗어나기까지 그는 명민했으나 수수께기 같은 인물로 남아 있었다."(181, 186)


"인문주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새로운 번역본과 주석본을 출간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소홀히 다루어지던 고전 저자들과 철학 학파들 전체, 특히 스토아학파, 회의주의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플라톤학파의 주창자들을 재발견했다. 가장 획기적인 발전은 플라톤의 저작들을 재발견하고 번역한 것이었다." "플라톤식의 접근법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해 두 가지 뚜렷한 이점을 갖고 있었다. 먼저 영혼의 불멸성과 신에 대한 숭배라는 측면에서 15세기 기독교 신앙에 훨씬 더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둘째, 철학적인 추론을 인간이 가진 가장 값진 능력으로 정의했다. 플라톤을 이렇게 해석하면서 피치노는 철학자의 직업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기민함을 발휘했다. 신비주의적인 사색을 앞세워 정치학을 배격한 것은 피치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피렌체의 통치자 코시모 데 메디치의 통치 철학과 잘 들어맞았고, 이러한 이유로 피치노는 1463년에 메디치가 세운 철학 아카데미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187-8)


"그러나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두 철학자의 지적인 우위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1620년 프랜시스 베이컨은 '철학과 과학이 더이상 공중에 떠 있지 않도록 하고, 충분한 조사와 검토를 거친 모든 경험들의 견고한 토대에 기반하게 할' 학습의 '대부흥'을 촉구했다. 베이컨의 『신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 혹은 이성적 사고를 위한 도구』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의 글이었다." "베이컨은 과학 지식이 관찰, 실험, 귀납법에 기초하여 얻은 자연세계의 자료들의 신중한 집적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다. 이것은 17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왕립협회에 의해 진행될 경험 과학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1626년 베이컨은 플라톤의 유토피아 세계를 본떠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완성했다. 그러나 그곳의 가장 유력한 시민들은 이제 철학자들이 아니라 실험과학자들이었다. 그것은 근대 과학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과 철학을 결별하게 만든 엄청난 변화였다."(190-2)


6 르네상스 다시 쓰기


"점점 더 박식해지고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들을 찾고 있었던 대부분의 대도시 독자들 사이에서 수요가 생김에 따라 문학적 표현이 바뀌기 시작했다. 1554년 도미니크회 소속의 마테오 반델로는 『노벨레』라는 당대의 도시 생활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출간했다." "친티오라는 이름으로 대중적으로 더 잘 알려진 잠바티스타 지랄디는 1565년 『100편의 이야기』라는 소설집을 출간했다." "친티오와 반델로의 소설들은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1세 시대에 상연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위대한 비극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는데, 거기에는 토머스 키드의 『에스파냐의 비극』(1587년경), 셰익스피어의 『오셀로』(1603), 존 웹스터의 『하얀 악마』(1613년경)도 포함된다. 산문 쓰기와 마찬가지로, 특히 영국에서 희곡이 발달한 것은 궁정의 후원이나 종교적인 신앙심보다는 투자와 수익성 때문이었다. 덕분에 희곡은 사회와 개인에 대해 점점 더 복잡하게,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201-2)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르네상스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기에 알맞은 주제다. 그의 문학은 남유럽과 지중해의 영향으로부터 활력을 얻는 고전적 인문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의 끝을 의미하는, 보다 지역적이고 민족적인 주제에 대한 몰두로 옮겨가는 결정적인 이행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두 작품은 모두 셰익스피어가 과거 고전시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엘리자베스 시대 고유의 관심사들과 걱정거리들 또한 반영하고 있었다. 『실수연발』(1594)에서 일어나는 신원 오인이나 금전과 관련된 혼란스러운 상황은 영국이 이슬람교도에 의해 지배되는 지중해 국제무역에 진입하면서 돈의 유동성과 장거리 교역의 복잡성에 대해 영국인들이 느꼈던 불안을 표현했다.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또한 영국이 무어인 에런이라는 매력적이지만 불길한 인물 속에 구현된 다양한 문화와의 만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 인물은 후일 오셀로로 재탄생했다."(208-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인 햄릿, 맥베스, 리어왕, 오셀로가 그들을 만들어낸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불후의 창조물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르네상스를 정의하는 하나의 특징이 작품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능력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햄릿이 참으로 르네상스적인 인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즉 복잡하고 다면적인 근대성을 보여주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말한 통찰력을 예시하는 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는 또한 셰익스피어 시대의 고유한 압력들과 고민들 사이에서 창조된 인물이었다. 죽음에 대한 그의 내면적 독백과 살해당한 부왕의 복수를 하지 못하는 당황스러울 정도의 우유부단함이 근대의 소외된 모든 10대 소년들이 느끼는 희망과 공포를 반영했다고 해석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영국의 종교개혁이 만들어낸 프로테스탄트적 감수성과 그에 따른 구원이나 내세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냈다고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211)


"『템페스트』는 그동안 예술의 힘에 대한 명상록으로 여겨져왔다. 셰익스피어의 무대 고별작으로 알려져 있고, 셰익스피어의 가장 고전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나폴리의 왕 알론조는 그의 딸 클레리벨을 결혼시킨 뒤 튀니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항해에 나섰다가 지중해 어딘가에 있는 프로스페로섬에서 난파를 당한다. 이는 트로이에서 카르타고를 거쳐 로마로 간 아이네이아스의 여정을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또한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신세계의 식민화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템페스트』는 동서 양쪽 모두에, 즉 동쪽으로는 과거 르네상스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에게 풍성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던 동부 지중해와 고전 세계를, 서쪽 방향으로는 장차 17세기 후반과 18세기 계몽사상을 탄생시킬 대서양 세계에 주목했다. 문학적·지적·국제적 전망에서의 이러한 변화가 르네상스의 종말을 의미했다면, 그것은 또한 문화와 사회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명백히 근대적인 사고의 시작을 알렸다."(2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 제국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5
크리스토퍼 켈리 지음, 이지은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정복


"카르타고나 동방 세계에 대한 전쟁에서는─기원전 31년 이집트 정복으로 마무리되는─공화정이라는 로마의 전통적 통치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했다. 사실 군사 정복이 계속 이어진 기원전 2세기를 흔히 로마 공화정의 절정기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여러 면에서 '공화정(Republic)'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용어다. 이 용어는 적어도 현대의 독자들에게는─일반 대중이 폭넓게 정치에 참여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로마 공화정은 금권정치 국가임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시민 집단은 엄격한 재산 자격 기준에 따라 철저히 등급별로 나뉘었다. 결과적으로 이 등급별 분류가 투표권을 규정했다. 모든 성인 남성 시민은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거인단은 재산이 있는 자들이 (그들이 결집만 한다면) 가난한 자들보다 항상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거운동과 공직 활동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부유한 자산가들만이 국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18-9)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이같은 빠른 성장은 대략 한 세기 후에 제정이 확립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로 독재가 자유를, 또는 전제가 독립을 대체했다고 보는 것은 속단일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래 황제들 치하에서도 로마의 정치는 줄곧 제국의 전리품을 놓고 경쟁하는 몇몇 특권적 가문들이 지배했다. 제정의 성립으로 인해 바뀐 것은 이러한 경쟁을 규제하는 방법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부유한 속주 출신자가 자신들의 부를 바탕으로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는 귀족 사회로의 진입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변모한 것, 다시 말해 일개 군사령관이 황제로 성공적으로 변모한 것은 로마 정치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단절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경쟁이 심한 과두정하에서 달성된, 치열한 싸움 끝에 권력이 재편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군대 지휘권을 갖는 사태는 철저히 통제되었다."(23-4)


"잠시 멈춰 서서 로마 제국의 수립을 특징짓는 가공할 공포와 무자비한 파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갈리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는 100만 명의 전투원을 살해했고, 나아가 또다른 100만 명을 노예로 만들었다. 인적·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카이사르의 정복은─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글에서 군단의 파괴력을 과장되게 서술한 점을 감안하더라도─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때까지는 그 살육의 규모에서 필적할 만한 사례가 없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침략자였다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영토 보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적들을 평정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제국의 설립은 조국의 안전을 위한 온건하고 타당한 정책의 미리 계획되지 않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기원전 1세기의 가장 유명한 웅변가인 키케로가 이를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다. 〈전쟁을 벌이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로마인들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다.〉"(31, 38)


2 황제의 권력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도시들의 신전에는 황제들과 올림포스의 신들이 각각 묘사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역사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황제를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과 같은 존재로 여김으로써, 로마의 속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속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로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과거'를 로마 지배하의 '현재'라는 시간과 연결할 수 있었다. 아프로디시아스에서는 제국 지배의 가장 잔혹한 일면인 정복마저도 그리스 세계의 전통적인 종교 체계에 통합되었다. 무자비한 정복 활동은 그리스 신화와 로마의 역사, 아프로디시아스 시와 로마 시, 그리고 올림포스 신들과 벌거벗은 로마 황제들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그 잔인함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각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한층 더 발전하는 로마 지배를 찬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제국 찬미의 세계상에서는 아프로디시아스가 무기력하게 황제의 발에 짓밟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51-2)


"전통적인 신들과 지역의 오랜 신앙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되풀이된 황제 숭배라는 의례의 틀 안에서 통합되었다. 또한 이로써 황제라는 절대 권력을 이해하는 언어를 제공할 수 있었다. 에페소스의 살루타리스와 같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공동체 안의 최고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인간에게 순종의 표시로 머리를 숙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회적 굴욕을 무릅쓰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신으로서의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지방의 고위층에게 스스로의 체면을 잃지 않고도 열등한 지위를 수긍할 만한 방법을 제공했다. 실제로 공적·사적인 영예를 둘러싼 경쟁에서 신관직을 수행하고, 축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신전 건립을 후원하는 사람들은 초인간적인 황제와의 특별한 관계를 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한층 더 강화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황제 숭배를 통해서 자신들이 제국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안팎으로 과시할 수 있었다."(58-9)


"황제들은 신과 같이 제국을 다스릴 권력을 손에 쥐고 있지만, 그 행동을 적절히 억제해야 하는 도덕률에 묶여 있기도 하다는 것은 엘리트 귀족층에 의한 황제 찬미에서 거듭 등장하는 주제였다. 100년 9월, 저명한 원로원 의원 소(小)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와 원로원 앞에서 집정관 직을 부여한 황제에게 바치는 감사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플리니우스는 관용, 검소, 경건, 공평무사, 가까이하기 쉬움 등 트라야누스의 중요한 덕목들을 열정적으로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의 시민다운 태도(ciuilitas)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한 태도는 사회적 지위를 서로 존중하고 공히 법률의 구속을 받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플리니우스가 신중하게 규정한 정치 질서에서 좋은 황제는 좋은 시민이기도 했다." "플리니우스의 생각에, 황제에게 최고의 미덕이란 제국 엘리트층 집단 속에서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62-4)


3 공모


"로마 총독은 속주 도시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청원이나 사법적인 문제가 제기되면, 많은 경우 지역의 담당 관리에게 넘기는 정도였지만, 가끔은 결정을 내려주기도 했다. 총독들은 간청을 받거나 불가피하게 나서야 할 경우에만 사태나 분쟁에 대응했다. 총독은 직접 앞장서 행동하는 조사관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호소할 수 있는 정부 당국이었다." "속주의 많은 도시들은 이런 최소한의 통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플리니우스가 총독으로 부임하기 10년 전, 비티니아-폰투스의 중간급 도시인 프루사의 상층 시민 한 명은 동료 시민들에게 그처럼 장점이 많은 상태를 위협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디오 크리소스톰이 볼 때, 소도시 사회의 지속적인 활력의 근거는 바로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부유한 계층의 우월한 지위를 뒷받침하고, 그들의 도시 행정 지배를 정당화해주는 것도 바로 제국의 존재(그리고 도시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면 제국측에서 보복할 거라는 위협)였다."(80-4)


"로마 제국의 성공 열쇠는 지방 엘리트층에 있었다. 정복 초기의 정신적 충격을 견뎌내고, 조직적인 저항은 가망이 없다고 단념해버린 사람들은 지배 권력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분명 이득을 챙겼다. 실제로, 많은 속주민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지역에서 기존 과두지배자 그룹이 경쟁자 없이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강화한 것에서 로마의 지배를 실감했다." "로마의 통치를 지지한 부족의 지도자들은 자기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속주 총독 다음으로) 가장 유력한 지위가 제국 권력과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이들은 로마가 정복하기 이전에 소유했던 것보다 더 안정된 권력과 부를 가지게 되었다." "지방 유력자들의 우월한 지위는 로마 시민권 부여로 더욱 강화되었다.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전망은 모자이크상으로 제국을 이루고 있는 도시의 지배 엘리트층이 지역에 대한 충성심을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승화시키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7-9)


"로마 제국의 통치는 지역과 제국의 이해를 하나로 융합시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이익을 얻도록 하는 데 기초하고 있다. 그렇긴 해도, 문명화와 노예화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타키투스의 비아냥에는 예리함이 있다. 만약 무력 지원이 없었더라면, 혹은 그러한 문화의 수용과 과시가 현실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법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비록 제국의 공통 문화가 가져다주는 혜택이 컸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빠르고 성공적으로 제국의 통치가 확립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지방 엘리트층이 현지에서 얼마나 교묘하게 영향력을 유지하든지 간에 그들의 특권적인 지위는 바로 로마 통치의 매개자 역할을 하려는 지속적인 의지에 달려 있었다." "도시의 성공한 지도자들은 플루타르코스의 예리한 평가에 당연히 동의할 것이다. 당신의 지위에 대해 〈너무 큰 자신감이나 확신을 가지지 마십시오.〉 개인적인 일, 또는 도시를 위한 공무를 수행할 때도 〈로마 총독의 장화가 바로 당신 머리 위에 있음을〉 항상 기억하십시오."(106-8)


4 역사 전쟁


"하드리아누스는 오랫동안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전장의 지휘관이 아니라 여행자로서 로마 제국 전역을 순회한 최초의 황제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을 아테네에 완성했다. 아테네의 과거에 대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도전은 건축 분야를 넘어섰다. 올림피에이온 신전의 헌정은 그리스 도시들을 묶는 새로운 조직인 판헬레니온(Panhellenion, 문자 그대로 '범그리스'의 뜻) 동맹의 창설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동맹은 5개의 로마 속주들을 포괄했고, 그리스 본토는 물론이고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소아시아, 크레타 섬, 로도스 섬과 북아프리카의 도시들까지 망라했다." "하드리아누스의 판헬레니온은 그리스 세계를 재편했다. 전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고, 실제로는 심하게 적대했던 많은 도시들이 단일한 제도적 틀 안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아테네가 동맹의 본부로 지명되었다."(110-2, 115)


"한 도시에 4개의 신성한 축제를 집중시킨 것은 그리스 역사를 통틀어 유례없는 일로, 이렇게 재편되고 개선된 그리스의 과거 속에서 아테네가 핵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이 강조되었다." "결국 아테네 시의 상징적·종교적 중심은 페리클레스가 세운 파르테논 신전이 아니라, 다수의 황제상으로 둘러싸인 하드리아누스의 올림피에이온 신전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치하의 제국에서 그리스 세계는 지역 레벨과 제국 레벨의 열정이 하나로 모아져, 이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화합과 문화적 결속을 이루었다. 2세기에 '그리스' 도시들 사이에서 새로 일어난 전통 돌아보기 움직임은 오랜 분쟁의 기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분단의 과거는 잊혀져야 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베푼 은혜로 범그리스 세계가 마침내 소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까지 펼쳐지고, 아테네는 이 멋진 신세계의 진정한 수도가 되었다. 역사상 그리스가 그토록 애써온 통합 노력에서 로마 황제가 마침내 성공을 거둔 것이다."(116-8)


"하드리아누스가 후원한 건설 계획에서는 지난 역사에 대한 매우 독특한 해석이 기념물의 형태로 체계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한 과거는 황제 자신과 노골적으로 연계되어 이번에는 로마 제국이라는 현재의 세계와 일체화된다." "로마 황제들에게 과거는 '횡령'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정복의 상흔을 지우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밀월을 강조하기 위해 재구성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현실을 피하여 상아탑의 세계로 숨어들어버릴 위험이 있는 그리스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과거란 아직도 해방이라는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적어도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 신전 근처에는 황제의 자선 행위를 기념하는 멋진 아치문이 있다. 그 서측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여기는 지난날 테세우스의 도시였던 아테네이다.〉 이해가 더딘 사람을 위해서 반대편 비문이 요점을 다시 말해준다. 〈이곳은 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니라,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다.〉"(133, 136)


5 사자에게 던져진 기독교도들


"177년 여름, 루그두눔(지금의 프랑스 남부 리옹). 마침 축제 기간이었고, 원형경기장에서는 눈요깃거리로 기독교도들이 끌려나와 있었다. 이때의 일에 관해서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다른 기독교도들이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2세기 루그두눔의 주민들에게 기독교도들은 기분 좋은 나들이의 이벤트, 즐길거리의 하나,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군중은 마치 포효하는 사자처럼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그리고 이같은 폭력과 잔인함에 대한 수많은 일화에서도)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관중은 결코 부랑자와 같은 하층민들이 아니었음을 강조해야 한다. 이들은 미쳐 날뛰는 폭도가 아니라, 오히려 눈요깃거리로 준비된 폭력을 흥미진진한 소일거리로 여기는 선량하고 믿음직한 시민들이었다. 사회적으로 버림받는 자들이 점잖고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의 오락을 위해 잔인하게 죽은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마찬가지로, 전문 투사들이 싸움질을 하는 것도 당연시되었다."(140-1)


"80년 콜로세움의 개장식에서는 검투 경기와 9,000마리의 맹수 사냥을 비롯한 구경거리가 100일 동안 이어졌다." "검투 경기에 투여된 이런 놀랄 만한 시간과 자금, 그리고 로마인들의 강한 애착은 지배를 과시하는 행위로서 검투 경기가 갖는 중요성을 잘 드러낸다. 관중은 갈채를 보내고 리드미컬하게 성원함으로써 공동의 연대의식을 확인하며, 눈앞에서 무참하게 살해되는 검투사가 자신들과는 별개 집단임을 선언했다. 관중은 또 패배한 검투사의 운명을 좌우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행사했다. 죽음을 가지고 노는 이 구경거리는 사회가 스스로의 안녕을 다지기 위해서 제공하는 통제된 무질서의 막간극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형경기장, 그리고 철저히 통제된 관중과 잔인한 게임은 제국의 단합을 가져오는 폭력과 질서의 축도였다. 유혈이 낭자한 볼거리 속에서 폭력은 질서 잡힌 사회에 반드시 동반될 요소로 제시되었다. 마치 전쟁이 한때는 제국의 수립에 불가결한 것이었듯이 말이다."(145-6)


"기독교도들의 순교가 유혈이 낭자한 구경거리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77년 리옹에서 한 무리의 기독교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중은 기독교도들이 고문대에서 찢기고, 철판 의자에서 그을려지고, 황소 뿔에 받히고, 굶주린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며 갈채를 보냈다. 원형경기장에 질서 있게 앉은 잘 차려입은 군중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도들을 사자에게 던져주는 행위는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로마 다수파의 권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에게 순교는 결코 패배가 아니었다. 순교는 승리였다. 순교자의 처참한 육체는 기독교도들의 눈에는 아름답게 비쳤고 불에 탄 살내음은 달콤한 향기처럼 느껴졌다. 미화는 시복(諡福: 가톨릭에서 성인聖人으로 인정하기 전에 공식으로 공경할 수 있다고 교회가 인정하는 지위에 사후에 오르는 일)의 전단계로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순교 행위에서 기독교도들은 항상 승리했다는 사실이다."(150-3)


6 로마인의 삶과 죽음


"로마 제국은 질병과 죽음으로 고통받았다. 평균 수명은 20~30세로, 오늘날 서양화된 사회의 평균에 비하면 약 3분의 1밖에 안 되었다. 이러한 숫자의 산출은 고대의 사료에 직접 의거하기가 어렵다. 고대의 사료는 불완전하고 내용도 빈약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전도상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추세를 로마 제국도 따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상정하고 산출이 이뤄지고 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의 인도와 중국의 경우가 잘 알려져 있다. 이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적어도 그 상한과 하한은 볼 수 있다. 즉, 평균 수명이 20세 미만인 경우에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을 것이고, 반대로 평균 수명이 30세 이상인 경우에는 환경적·사회적·경제적 조건이 비슷한 전근대 사회보다 로마는 인구가 안정된 사회였을 것이다. 통계학적인 모델은 세대 구성, 출생률과 사망률을 추측한 명확한 틀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모델은 개연성을 반영하는 데 불과하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182-3)


"생활환경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부유한 사람들이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반드시 훨씬 더 오래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제정기에 로마 원로원은 정원이 600명 정도로, 결원 보충은 평균 25세 안팎의 재무관(quaestor) 경험자가 매년 20명씩 추가됨으로써 이루어졌다(재무관은 최하위 공직). 이러한 결원과 보충의 관계에서 보면, 재무관 경험자는 통상 50대 중반까지 사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해서, 좀더 넓게 말하면 출생시 그들의 평균 잔여 수명은 20대 후반이었던 셈이다. 로마 사회의 가장 특권적인 사람들인 원로원 의원은 분명 좀더 많은 자원을 우선적으로 향유할 수 있었을 텐데, 한편으로는 군단의 군영이나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심부처럼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 환경에서 장기간 지내야 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들의 혜택도 상쇄되었을 공산이 크다. 1세기부터 7세기까지 자연사한 로마 황제 30명의 항년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모든 부와 권력을 과시한 그들의 평균 수명은 불과 26.3세였다."(186-7)


"가혹하게 높은 사망률은 로마 여성의 출산 능력에 상당한 부담을 안겼다. 안정된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균해서 월경 개시기에 도달한 여성 1명이 딸 1명을 낳고, 그 딸도 월경 개시기까지 성장하는 것이 전제된다. 유아기 사망률이 높은 사회에서 이같은 냉정한 인구학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정상 출산 인구의 수는 급격히 증가한다. 안정된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평균해서 여성 1명이 딸 2.5명, 즉 아들까지 쳐서 적어도 5명의 아이를 낳지 않으면 인구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여성은 조혼으로, 평균 20세 직전에 결혼했다. 제국의 서부 속주에서 출토된 묘비에 따르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가 평균적인 초혼 연령이었다. 다산의 부담을 가능한 한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혼인이 널리 행해질 필요도 있었다. 이집트에서 여성의 60퍼센트가 늦어도 20세까지, 나머지도 30세까지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었다. 로마 제국에는 미혼녀가 거의 없었다."(188-9)


7 다시 찾은 로마


"'번영'과 '문명'이라는 키워드를 공통분모로, 로마와 영국을 동일선상에서 견주는 것은 제국의 지배에 관한 매력적인 사고방식이었다. 1901년에 처음 출간된 『고대 로마 제국과 인도의 영제국』이라는 연구에서 옥스퍼드의 역사학자이자 법률가, 저명한 자유당 정치가인 제임스 브라이스는 두 제국의 성공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두 제국 모두 〈제국 내부의 평화와 질서를 매우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탁월했다. 둘 다 인상적인 도로와 철도의 건설을 통해서 자신들이 〈훌륭한 공학기술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두 제국 모두 전쟁과 통치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러한 성공들이 〈모든 저항을 억누를 기회를 맞이했을 때 보여준 유사한 추진력과 에너지, 준비성〉을 드러내 보였다. 두 제국을 이처럼 좀더 확실히 비교하는 시각의 장점은 인도에 있는 영국의 존재에 설득력 있는 역사적 정당화를 제공하는 듯하다는 점이다."(211-2)


"로마 시의 현대적인 모습은 상당 부분 무솔리니가 조성했다. 고대 건축물들이 분명하게 부각되는데─관광객에게는 즐겁게도─그 이유는 바로 (무솔리니의 표현에 따르면) '추악한 그림 같은' 주변 환경이 조직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궁으로부터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임페로(제국)대로는─지금은 그보다 덜 논쟁적인 포리 임페리알리(황제 광장) 대로라고 불리는─전적으로 파시스트의 창조물이다. 무솔리니의 본부에서 콜로세움을 뚜렷이 보기 위해서 중세 도시를 관통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무엇보다도 이 도로는 군사 행진에 필요한 엄청난 공간을 제공했다. 로마는 땅 위에서만 재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한층 더 확대된 로마 제국의 영광이 아우구스투스 탄생 2천 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에서도 경축의 대상이 되었다." "전시의 목적은 방문객들을 위해서 부활된 제국의 일관성 있는 모습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인상 깊은 폐허가─적어도 축소된 모형으로─다시 한 번 완전한 모습을 찾았다."(220-1)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려지는 로마 제국의 현대적인 버전들은 넘치도록 풍부하게 재미있어야만 한다. 〈쿠오바디스〉, 〈로마 제국의 몰락〉, 〈글래디에이터〉 같은 영화들은 개선 행렬의 엄청난 장관, 아주 부유한 자들이 소유한 대저택의 호화로움, 유혈이 낭자한 검투 경기의 스릴, 전쟁의 공포, 독재정치의 무시무시한 변덕스러움, 로마의 대도시적인 장대함을 전달한다. 황제의 과제에 대한 로마의 생각을 포착한다거나, 제국의 권력 행사와 표현을 둘러싼 어려움과 모호함에 대한 인식을 제공한다거나, 속주 엘리트층의 민감한 위치를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정복과 저항은 판에 박은 듯 오로지 무력이라는 측면에서만 인식되었다." "할리우드 영화 속 로마의 중심에는 몹시 개인적인 투쟁, 즉 인간성을 파괴하는 전체주의적인 체제에 맞선 개인의 우월함에 대한 칭송, 사랑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 정당한 복수의 추구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매력적인 결합이 로마 제국의 지속적인 인기 요인임이 분명하다."(23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대 그리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3
폴 카틀리지 지음, 이상덕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서론


"고대에 '그리스'라는 도시국가는 없었다. 다만 그리스 도시들과 여타 공동체들이 종교적이라 할 수 있는 방식을 통해 표현된 공통 문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최초의 역사가라고 불릴 만한 헤로도토스는 아테나이 웅변가들의 입을 통해 '그리스다움'을 정의했다. 〈······아테나이인들이 그리스인들을 배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한 핏줄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그들과 함께 신전들을 세웠고 신들에게 희생제사도 지내는데다 같은 생활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도토스, 『역사』, 8.144)〉 헤로도토스가 창작해낸 이 연설은 정치적 행위에서 거의 실현된 적 없는 통일성을 암시하고 있다(문화적 행위는 또다르다). '범헬레네스'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정치적 통일성이 빠져 있다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리스 문명에 특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민족국가의 부재, 좀더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리스 폴리스들의 개별적인 면모다."(20-1)


2 크노소스


"청동기시대 크레테에 관한 한 '신화적 역사(myth-history)'를 통하는 것이 최선이다." "후기 청동기시대 크레테 궁전은 정치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최고 권위자, 지배자, '빅맨'(여왕이었을 확률은 낮다. 그리스 체제하에서는 이들을 아낙스anax 혹은 '우두머리'라고 불렀다)의 자리 혹은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 또한 궁전 주변에는 궁전만큼이나 아름답게 장식되고 훌륭한 석공 기술로 지은 '대저택'에서 특별한 지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근 3000년간 거의 변하지 않은 기후 덕분에 가능했던 근본적 농경국가의 중심에는 '지중해 3종' 작물이 있었다. 곡물(가뭄에 강한 보리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다양한 종의 밀과 수수 같은 부수작물 역시 재배되었다), 포도주, 올리브유(크레테의 토양과 기후는 포도와 올리브 재베에 안성맞춤이다)가 그것이다." "또한 국내 생산은 복잡한 해외무역과 연결되어 남으로는 이집트로, 북으로는 키클라데스제도와 펠로폰네소스반도 남부로, 그리고 레반트로 수출되었다."(31-2)


"크레테가 원주민 지배에서 외세 지배로 전환되면서 기원전 1450년대에 집중적으로 폭력이 발생한 것은 (청동 무기가 매장된) '전몰자 무덤'으로 알 수 있는데, 이는 이곳의 평화주의적 배경(이란 단어를 만들 수 있다면)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궁전 크레테의 최후'라고 알려진 것은 정복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으며 (선형문자 B 서판의 언어와 문장으로 보았을 때) 침략자들은 그리스어를 하는 그리스 본토 사람들, 특히 펠로폰네소스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듯하다." "크노소스와 크레테의 정치적 전성기는 분명 선사 청동기시대였다. 그러나 암흑기와 상고기(각각 기원전 11~9세기와 기원전 7~6세기)의 크레테 역시 결코 완전한 문화적 공백 상태는 아니었다. 이 섬은 전통적으로 초기 폴리스 건설이 활발하였으며, 한편 이 섬의 또다른 전통은 입법자와 법의 땅이라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예로는 드레루스의 아고라와 기원전 7세기 말의 법이 새겨진 청동 판을 들 수 있다."(34-5)


3 미케나이


"'미노스' 문명이 평화로워 보였던 것, 최소한 내부적으로 조화로워 보였던 것과 달리 미케나이와 그리스 본토의 코린토스 지협(테바이, 이올코스, 필로스 등) 남쪽과 북쪽 미케나이 문명 중심지들의 성채에 기반을 둔 통치자들은 전쟁을 선호했고 큰 성벽(두께가 6미터에 달했다)을 쌓아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통치자들이 글을 읽을 수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들은 선형문자 B라고 알려진 원시적 관료제의 그리스 문자 아카이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어 문자를 썼다고는 하나 미케나이 문명은 기본적으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 중심을 둔 중동 문화의 지방 거점이었다. 성채 입구의 인상적인 '사자문'은 히타이트의 하투샤를 연상시킨다. 또한 아트레우스(Atreus, 아가멤논의 아버지)의 보고(寶庫)나 아이기스투스(Aegisthus,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의 정인)의 내쌓기와 메쌓기로 만든 벌집형 무덤은 사후세계를 암시하여 이집트에 대한 향수를 보여준다."(40)


"청동기 이후 역사시대의 가난한 미케나이인들은 (호메로스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서사시 낭독을 지겹도록 들으면서 그들이 절실히 믿고 아가멤논 신전에 자주 찾아가기만 하면, 혹은 페르세우스에게 헌정물을 바치기만 하면 아가멤논의 기운이 그들에게 부흥을 가져올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했다." "영광스러운 미래(혹은 다른 어떤 미래라도)를 향한 역사시대 미케나이인들의 희망은 '뱀 기둥'에 미케나이가 포함되면서 더욱 커졌다. 이 기둥은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480~479년 페르시아의 공격을 함께 막아낸 것을 기념하여 세운 승전비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독립적인 미케나이인들은 늘 스파르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웃한 아르고스(스파르테와 적대관계에 있었고 페르시아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다)에게는 위협적이었다. 기원전 468년에 아르고스는 미케나이를 전멸시켰고, 이 작은 폴리스는 한동안 되살아나지 못했다(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46-7)


4 아르고스


"도시 아르고스는 미케나이로부터 거의 정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라리사(Larissa)와 아스피스(Aspis, '방패'라는 뜻)라는 두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그리스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이 살아온 곳이지만, 기원전 11세기 암흑기로부터 빠져나와 성장하기 시작한 도시는 새로운 아르고스였다. 단지 지형학적·건축학적으로 새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족적 의미에서도 새로웠다. 새롭게 진화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도리스인이라고 칭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중부에서 이주해왔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아르고스를 차지하여 펠로폰네소스의 세 거점 중 하나로 삼았다. 다른 두 곳은 스파르테와 메세네였다. 도리스인들은 남쪽으로 크레테까지 진출하였고(역사시대에 크노소스는 도리스계 도시가 되었는데 어쩌면 실제로 아르고스인들이 기초를 닦았을 수도 있다) 거기서 에게해를 건너 동쪽으로 현재의 터키 서남부와 로도스 같은 그리스 섬까지 진출하였다."(51-2)


"도리스화란 같은 방언의 사용 외에도 같은 제도(세 지역은 똑같이 가상-친족 부족명을 사용하였다)와 종교 관습(아폴론을 위한 카르네이아Carneia 축제를 매년 열었다)을 말했다. 아르고스의 도리스인들은 같은 도리스계인 메세네(아르테미스)나 스파르테(아테나)와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제우스의 누이이자 아내인 헤라 여신을 수호신으로 모셨다." "기원전 8세기 아르고스인들의 확장에 따라 점차 아르고스 평원 대부분이 잠식되었고, 이들은 청동기시대의 주요 거점인 미케나이와 티린스가 포함된 이 아르골리스 지역의 실질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때때로 해안도시 아시네와 같은 이웃 도시의 정복이나 축출이 일어났으며, 이곳에는 모도시가 파견한 정착민들이 자리잡았다. 이는 그리스 내부 식민화의 한 형태로 아르고스의 해외 식민시 건설 필요성을 나타내었는데, 아르고스보다 훨씬 가난했던 내륙의 코린토스가 겪은 기원전 8세기 후반의 이주 필요성과는 대조된다."(54-5)


5 밀레토스


"밀레토스는 이오니아로 불리던 지역(아나톨리아 서부, 즉 에게해 연안 중부)의 주요 도시였을 뿐 아니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그리스인들의 이주와 식민시 건설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아 그 영향력이 넓게 퍼진 도시였다." "기원전 8세기 훨씬 전에도 밀레토스에는 사람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후기 청동기시대에 이미 크레테에서 온 미노스인들과 그리스 본토의 미케나이인들이 이곳에 출몰하였다." "기원전 1210년에서 1190년까지 이 지역에 대변동이 일어난 후, 본토의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2~11세기 동안 에게해를 건너 소아시아로 이주한다. 역사가들은 이를 흔히 '이오니아인의 이주'라고 부른다." "아나톨리아 해안의 정착민들과 그리스 본토의 에우보이아 사람들은 동방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레바논의 페니키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알파벳,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 살던 바빌로니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수학, 그리고 (기원전 6세기 전반 리디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화폐 등이 있다."(63-4)


"기원전 520년대 말 그리스인들은 제국에 복속되는 것을 어떻게 느꼈든 간에 조용히 다리우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20년 후에 이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고, 그리스인들은 에게해 연안에서 키프로스 섬까지 일제히 일어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흔히 '이오니아 반란'이라고 한다." "다리우스가 그리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6년(기원전 499~494년)이 걸렸다. 마지막 싸움은 밀레토스 근해 라데섬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이었다. 반란을 주도했던 도시에 대해서는 일벌백계만한 것이 없었다. 다리우스는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생존자들을 티그리스강 하구의 암페로 강제 이주시키라고 명령하였다. 동료 이오니아인인 아테나이인들에게 밀레토스의 멸망은 여러 면에서 비극이었다." "밀레토스는 다른 도시(테바이)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파괴 이후에 꽤 일찍 재건되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재건된 도시는 아테나이 제국의 역사, 그리고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관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74-6)


6 마살리아


"이제는 '그리스 동부'로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이 '황금빛 서부'라고 경탄해 마지않았던 서쪽으로 이동하자, 이 지역은 시킬리아로부터 메시나해협을 지나 이탈리아 남부(마그나 그라이키아, 라틴어로 '대그리스')에 이르는 지역과 프랑스 남부, 스페인 동해안을 포함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미디(Midi)로, 어떤 이들에게는 프로방스 해안으로 알려진 곳이다." "프로방스 해안의 몇몇 도시들은 이름만 봐서는 그리스 기원임을 알 수 없다. 앙티브(Antibes)는 원래 안티폴리스('반대도시')였고, 니스(Nice)는 그리스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이름을 딴 니카이아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르세유인데, 옛 이름 마살리아는 그리스어가 아닌 페니키아어로 '정착지'라는 뜻이다. 기원전 600년경 밀레토스에서 탈레스가 명성을 떨치고 있을 무렵, 밀레토스와 함께 이오니아에 속해 있던 포카이아(현재 터키 서부의 포싸)의 그리스인 한 무리가 이곳에 와서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마르세유의 역사는 이 결정과 함께 시작된다."(80-2)


"마살리아는 놀랍도록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고 스페인 동북부의 엠포리온(현재의 암푸리아스) 같은 자도시를 건설할 만큼 성장하였다." "다양한 그리스산 상품들이 에게 해안으로부터 마살리아를 통해 내륙 원주민들에게 전해졌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연 빅스 크라테르(Vix Krater)라고 불리는 커다란(높이 1.64미터, 무게 208킬로그램, 부피 1.1리터) 포도주 희석용 청동 항아리인데 기원전 530년경 스파르테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포도주는 어디서 생산되었을까? 빅스 크라테르에 담겼을 희석한(혹은 희석하지 않은) 포도주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살리아의 그리스인들이 그보다 한두 세대 전 프로방스 지역에 처음으로 포도주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00년부터 1500여 년간의 포도 생산은 그리스 농업의 원천적 특징이 된다." "마살리아는 포도주 무역 도시로 자리잡게 되자 주요 기착지로서의 핵심 상품으로 자체 상표를 내건 포도주 항아리를 생산하고 수출하였다."(85-8)


7 스파르테


"스파르테를 특별한 그리스 도시국가로 변화시키는 개혁은 리쿠르고스(Lycurgus, '늑대-일하는 자')라는 전설적인 입법자가 단행했다고 전해진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경제, 정치-군사, 사회 세 분야에 대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분배가 이루어졌다. 이는 새로 획득한 메세니아 땅에 관한 것이었는데, 모든 스파르테인은 최소 얼마간의 토지를 받았다(클라로스klaros, '몫'을 의미). 공동 소유지와 거기서 일할 헤일로테스들도 있었다." "정치-군사적으로는 모든 스파르테인들이 전사 의회의 회원으로서 평등한 투표권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표가 아닌 함성으로 의결했고, 의회 위에는 30명의 연장자로 구성된 귀족주의 원로원(게루상Gerousia)이 존재했다. 두 명의 스파르테 왕(항상 동일한 두 귀족 가문에서 나왔다)은 은퇴하면 원로원 회원이 되었다." "스파르테의 사회구조는 군대와 완전하고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었다. 스파르테 소년은 7세부터 중앙 도시국가의 주도 아래 공동으로 '교육받았다'."(98-101)


"기원전 8~7세기에 부상한 사프라테는 강한 전사 공동체였다. 그들의 힘과 80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그들의 영토는 그리스에 가장 컸다. 두번째인 시라쿠사이의 영토는 4000제곱킬로미터였다)는 그리스인을 헤일로테스, 즉 '포로'라고 부르며 반노예로 착취하고 스파르테 남성들에게 아주 어린(그렇다고 절대 연약하진 않았지만) 나이부터 엄격한 군사훈련을 시기는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상고기 내내 스파르테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였다." "스파르테인들은 도시국가를 군사 기지화했다. 그 보상은 물론 매우 컸다. 스파르테는 기원전 7세기 중엽부터 기원전 4세기 초까지 단일 도시국가로는 그리스 전체에서 단연 가장 강력한 보병을 가졌으며, 기원전 480~479년에는 전 그리스와 서구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은 결코 이기적이라고도 비열하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도시국가 자체는 '상고기적'이었으나, 이들로 인해 그리스 전체에 고전기가 꽃피게 되었다."(103, 107)


8 아테나이


"부유한 귀족이었던 솔론은 기원전 594년에 아주 어려운 정치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다. 이 싸움은 구식 복고주의 귀족과 솔론 자신과 같은 진보적 귀족, 그리고 귀족은 아니지만 부유한 계층 사람들과 아테나이의 가난한 시민들(솔론은 그의 시에서 이들을 데모스demos라고 불렀다) 사이에서 벌어졌다." "솔론의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제한적 권한 이양과 기원전 508/7년 클레이스테네스의 더 급진적이고 실로 민주적인(데모크라티아는 '데모스의 권력'이라는 뜻이다) 권한 이양 사이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Pisistratus, 기원전 527년 사망)와 그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 '참주 살해자'들에 의해 그의 동생이 죽은 지 4년 만인 기원전 510년에 타도당했다)의 참주제가 있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이 이룬 것은 솔론의 정치경제 개혁을 바탕으로 아테나이의 문화 통일과 증가하는 인구의 정치 참여 독려였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룩한 정치 지형 변화는 이들이 기반을 닦아놓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117-9)


"해안에서 8킬로미터 내륙으로 들어와 있던 고전기 아테나이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져 번성하기 이전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가장 복잡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 도시는 세 도시가 하나로 통합된 형태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아테니아가 '단순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정치 독립체로서의 아테나이, 즉 폴리스 아테나이가 있다. 이는 도심과 약 2400제곱킬로미터의 교외(코라)인 아티케(Attike, '아테나이인들의 땅'이라는 뜻)를 뜻한다." "둘째로 아크로폴리스, 즉 '높은 도시'가 있다. 때로는 그냥 '폴리스'로 불린 이곳은 상징적인 중심지 역할을 했다." "셋째로 아테나이는 그리스 폴리스 중 유일하게 영토 안에 페이라이에우스라는 제2의 중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테나이는 민주정과 예술성, 철학적 고찰 등을 통해 '고전기' 그리스의 '황금기'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도시국가는 독립국가 '헬라스(Hellas)'의 영원한 수도가 되었다."(111-3, 134)


9 시라쿠사이


"시킬리아의 여러 도시에 정착한 그리스 이주민들 중 가장 성공한 부류는 시라쿠사이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시라쿠사이는 시킬리아의 그리스 도시 중 가장 크고 부유하며 강성한 도시로 성장했다. 영토는 모든 그리스 도시 중 두번째로 컸다. 스파르테계였던 도시민들은 대규모 원주민이었던 시켈(Sicel)족을 노예 신분으로 강등시켜 킬리리(Cilyrii, 혹은 칼리키리Callicyrii)라고 불렀다. 시킬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시켈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밖에 그리스 이주민과 여러모로 유사했던 시킬리아 서쪽 끝의 페니키아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카르타고(현재의 튀니지)를 건설했고, 그리스인들이 오기도 전에 스페인 동부와 사르데냐에 정착한 그들의 동족처럼 이미 도시 건설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이들이 건설한 도시로는 파노르모스(현재의 팔레르모)와 모티아(혹은 모지아) 등이 있다.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 정착민 사이의 전투들은 시킬리아 고전기 역사의 주요 사건을 이루며 섬의 운명을 좌우했다."(137-8, 142-3)


"시킬리아 민주주의의 뿌리를 시킬리아섬에서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란 아테나이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시라쿠사이에서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아테나이로부터 들어온 외래문화였는데, 신기하게도 이 외래문물은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빠르게 정착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시라쿠사이와 아테나이는 처음엔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길을 갔다. 시라쿠사이는 더욱 급진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갔고, 아테나이는 두 차례의 과두정 반동을 겪고 마침내 기원전 404년에 스파르테에 패하고 말았다." "아테나이에서는 기원전 413년부터 근본적인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던 터였다. 과연 민주주의가 제국을 통치하고 큰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가? 기원전 404년의 답은 분명히 '아니요'였다. 시라쿠사이 역시 군사적 실패 이전에 민주주의 세력이 치명적인 정치적 실패를 맛보았다. '민주주의 막간극'은 기원전 405년 카르타고의 위협이 높아지면서 끝나버렸다."(148, 151-2)


10 테바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테의 신실한 동맹이 되면서 테바이는 권력을 한층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테바이는 과두정에 대한 스파르테의 지원이 자기들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기원전 427년에는 스파르테의 지원으로 테바이의 오랜 숙원이 달성되었다. 그들은 보이오티아 민족이던 플라타이아인들이 아테나이와의 동맹(이 동맹은 기원전 519년으로 거슬러올라갈 만큼 유서가 깊었으며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의 군사 협력을 기억하는 것이었다)을 파기하도록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 도시 자체를 정복해야 했다. 또한 이 목적이 달성된 지 몇 년 후 그들은 아테나이 쪽으로 기울어 있던 테스피아이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정복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기원전 413~404년)에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테바이였다. 그들은 아테나이와 보이오티아 경계에 차린 스파르테 진영의 보호 아래 아테니아 외곽을 유린하였고, 아테나이의 은광에서 도주한 노예 수천 명을 싼값에 사들였다."(160-1)


"에파미논다스와 펠로피다스의 훌륭한 지도력 덕분에 테바이는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에파미논다스는 직접 메세네(기원전 369년)와 아르카디아의 메갈로폴리스를 독립시키면서(기원전 368년) 쇠약해진 스파르테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테바이의 위력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는 기원전 368년에서 365년까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자가 테바이에 인질로 가택 연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기원전 360년대에 일시적으로 테바이의 힘이 강해지자 민주주의 아테나이와 과두주의 스파르테는 테바이의 위협에 대응하고자 다시 한번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사 협력은 없었다. 기원전 362년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연합군은 만티네아에서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에파미논다스 자신은 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만다." "테바이는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이후 기원전 316년부터 훨씬 작은 규모로 재건되었다."(164-5, 168)


11 알렉산드리아


"처음에는, 즉 알렉산드로스의 생애 동안과 사후 몇 년간은 알렉산드리아가 제국 속주의 새로운 수도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와의 연줄을 개인적 목적이나 프로파간다를 위해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멤피스의 파라오라고 선언했다." "기원전 305년경,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성공적인 마케도니아 장군이자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프톨레마이오스(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 속주 총독으로 지명하였다)는 자신이 이 지역의 '왕'이라 선언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그는 심지어 왕조를 개창하기까지 했다. 그후로 약 300년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승계 왕국이 되었다. 여기서 '헬레니즘'이란 문화적·행정적으로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에는 새로운 박물관과 도서관 덕분에 알렉산드리아가 전 그리스 세계의 문화적 수도가 되었다. 유클리드 학자들과 수학 천재들, 에라토스테네스, 아르키메데스, 칼리마코스, 테오크리토스 같은 지성인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177-9)


"고대 알렉산드리아가 기원전 30년에 독립 정치체로서의 운은 다했다 할지라도 지적·문화적 운이 다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로마 지배하의 알렉산드리아에도 헬레니즘 시대 못지않은 지성인들이 있었다. 또다른 프톨레마이오스인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로 146~17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첫 여성 수학자는 판드로시온으로, 아마도 처음으로 세제곱근을 만드는 기하학 구성을 발명한 인물일 것이다. 히파티아라는 이름의 여성은 수학자 테온의 딸이었다. 히파티아는 아스트롤라베(astrolabe[천문관측 장치])와 수중투시경(hydroscope)을 제대로 사용하였다. 그녀가 기억되는 이유는 똑똑한 두뇌나 수려한 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안타깝게도 그녀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순교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녀는 415년 키릴 주교의 명을 받은 기독교 군중에게 이교도로서 살해당했다. '고전기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187, 190)


12 비잔티온


"비잔티온은 (기원전 688년 혹은 657년) 건설된 후 별다른 정치적 사건이 없다가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의 일부로 페르시아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비잔티온은 다행히도 반란의 주축이던 밀레토스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인들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토스를 (또다른 배다리로) 건너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했을 때는 그들의 요구대로 병력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페르시아 편에서 싸우는 그리스인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와 미칼레에서 그리스인들이 거둔 승리는 비잔티온 해방의 전조가 되었다. 스파르테가 아시아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동안 비잔티온이 동맹 본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테가 파우사니아스 장군을 소환하면서 아테나이가 페르시아 전쟁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비잔티온은 아테나이의 많은 동맹국 중 하나가 되어 1년에 은 15탈란톤이라는 비싼 공납금을 내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195-6)


"아테나이에 비잔티온이 중요했던 이유는 이 도시에 매년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 크리미아 등의 흑토지대로부터 아테나이와 그 밖의 에게 해안 지역들로 밀과 주요 식료품을 실어 오는 배를 관리하고 세금을 부과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잔티온은 아테나이 제국 네트워크의 중요한 포인트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미에서 그 직후까지(이때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마침내 괜찮은 함대를 갖추게 되었다) 비잔티온이 가장 중요한 전쟁 목표였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원전 404년 스파르테인들의 승리를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테나이 제국의 해체와 최대 300척에서 1200척까지 되던 엄청난 규모의 아테나이 함대가 감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테인들은 제국 자체엔 반감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새롭게 확장한 에게해 제국이 작동하도록 외부에 하르모스트(harmost, '관리자')라는 사무소를 세웠다. 가장 중요한 관리들은 자연스럽게도 비잔티온에 자리잡았다."(196-7)


13 에필로그


"영어의 정치(politics)는 고대 그리스어의 중성 복수 형용사 폴리티카(politika)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폴리스와 연관된 일'(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속 용례가 가장 유명하다)을 뜻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정치는 무대 중앙에서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앙으로(es meson)'라고 표현했다. 공적인 일은 그저 시민들의 걱정거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중앙으로' 모여 논의하고 논박했으며 옳든 그르든 그들이 공공선이라고 믿는 것, 도시와 시민의 공공 이해라고 믿는 것을 철저히 검토하였다. 물론 여성은 공동 정치 사업에서 의사 결정의 주체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또한 노예와 비슷한 신분의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 안팎에서 일하며 도시 내의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여가(스콜레skhole, 영어의 '학교school'의 유래)를 제공했다. 그리고 아테나이같이 급진적 민주정이 이루어지던 곳에서만 대부분의 가난한 남성 시민들이 의사 결정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2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