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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7
제리 브로턴 지음, 윤은주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10월
평점 :
서론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로서 그는 프랑스 혁명의 평등주의 원칙을 전적으로 지지했던 프랑스 민족주의자였다." "그에게 르네상스는 이성, 진리,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위대한 미덕들을 고무했던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상태를 표상했다. 미슐레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근대와 그 자체로서 동일했다'." "그는 또한 르네상스를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시대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어떤 정신 혹은 태도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승격시켰다." "사실 미슐레식 르네상스가 갖는 가치들은 미슐레가 소중히 여기는 프랑스 혁명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해 보인다. 둘 다 자유, 이성, 민주주의의 가치를 꽃피우고, 정치적·종교적 전제정을 거부하고 자유의 정신과 '인간'의 존엄을 숭배했다. 그의 시대에 이러한 가치들이 실패하는 것에 실망한 미슐레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승리를 거두고 폭압이 사라진 근대 세계를 약속했던 역사적 시대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21-3)
"스위스 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15세기 이탈리아적 현상으로 정의했다. 그는 15세기 이탈리아 정치의 독특한 성격이 근대적인 개인의 탄생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고전 고대의 부활, 보다 넓은 세계의 발견, 종교적 불안정성의 확대가 '인간이 정신적으로 개별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러한 새로운 발전을 중세의 자의식 결핍과 대조했다. 그에 따르면 중세에 '인간은 종족, 민족, 분파, 가족 혹은 조합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스스로를 인식했다.' 달리 말하면 15세기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부르크하르트는 프로테스탄트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스위스의 개인주의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예술과 삶이 하나로 통합되었고, 공화주의의 대의가 옹호되기는 했으나 한계가 분명했고, 종교가 국가에 의해 길들여지던 시대로 그려졌던 르네상스의 모습들은 사실 부르크하르트가 사랑해 마지않던 바젤의 이상화된 모습이었다."(23-4)
"20세기 초에는 훨씬 더 이중적인 견해가 출현했다. 부르크하르트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1919년 요한 하위징아가 『중세의 가을』을 출간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위징아는 북유럽 문화와 사회가 이전의 르네상스 해석에서 어떻게 무시되었는지를 분석했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라는 부르크하르트식 시대 구분에 도전했다. 그에 따르면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라고 정의했던 양식과 태도는 사실 중세의 정신이 시들어가거나 쇠퇴하는 단계에 불과했다." "하위징아는 '르네상스'라는 용어의 사용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중세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19세기에 활동했던 선배 역사가들이 그토록 찬양한 르네상스의 이상형에 대해 하위징아는 매우 비관적인 설명을 내놓았다. 그리고 유럽 개인주의와 '문명'의 우월성의 만발로 르네상스를 설명하려는 어떤 욕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책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저술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27-8)
"20세기 중반에 전체주의가 등장하자, 중부 유럽의 지식인 이민자 집단을 중심으로 르네상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었다." "한스 바론은 봉건적인 전제군주정에 대한 시민 공화국의 승리로 설명할 수 있는 제2차 밀라노 전쟁(1397~1402)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은 학자이자 정치가인 레오나르도 브루니라고 보았다. 한스 바론에 따르면, 『피렌체 찬가』와 『피렌체인의 역사』에서 브루니는 '정치 참여와 공직 생활에 대한 새로운 철학'을 표명했고, 이를 '학자적인 은둔이라는 이상과 대비했다.' '사회와 국가의 성원으로 한 사람을 교육하는 데 헌신하는 것', 그리고 메디치 시대의 피렌체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공화주의적 미덕을 함양하는 것, 바로 이것이 바론의 시민적 인문주의의 정의다. 바론의 주장은 유럽이 정치적 전체주의의 등장으로 위협받던 시대에 인문학자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매력적인 답변이었고,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을 르네상스의 핵심 기원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8-30)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60년대의 사회적·정치적 격동, 특히 인문학의 정치화와 페미니즘의 등장을 거치면서 르네상스에 대한 평가가 다시 한번 크게 바뀌었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근대인이 탄생했다고 보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르네상스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린블랫은 16세기에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관한 자의식의 증대'가 목격된다고 주장했다. 남성들은 (그리고 때로는 여성들도) 자신의 사회적 조건에 맞게 자신의 정체성을 다듬는, 즉 '연출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그린블랫은 이것을 특별히 근대적인 현상의 시작으로 보았다. 그린블랫이 보기에 16세기 영국의 위대한 저술가들─에드먼드 스펜서, 크리스토퍼 말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돌이켜보고 다듬어나가는 파우스트나 햄릿 같은 가상의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근대인으로 보이는 최초의 사람들이다."(31-2)
"그린블랫과 제먼 데이비스 같은 비판적 연구자들은 또한 20세기 말의 철학적·이론적 시류, 특히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사조들은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 그리고 근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변화의 '대서사'에 대해 회의적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 미셸 푸코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기원했다고 규정되는 인문학적·문명적 가치들이 나치즘, 스탈린주의, 홀로코스트나 소비에트 강제수용소의 참상에 대해 어떠한 답변도 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에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20세기 말의 사상가들은 어느 누구도 르네상스의 위대한 문화적·철학적 성취들을 찬양하지 않았다. 대신 많은 역사가들은 훨씬 더 지역적인 수준에서 현상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에서 경시되었거나 잊힌 목소리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마녀', '유대인', '흑인' 같은, 배제된 집단이나 주변화된 사물이 새로이 면밀한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33-4)
1 세계적 르네상스
"르네상스에 대한 고전적 정의들이 가진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다른 문명을 배제한 채 유럽 문명의 성취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라는 용어의 발명을 목격했던 시대가 유럽이 전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가장 공격적으로 주장했던 순간이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최근 역사, 경제, 인류학 분야에서 르네상스에 대한 대안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미슐레나 부르크하르트 같은 19세기 사상가들에 의해 관련 없는 것으로 버려졌던 여러 요소들이 르네상스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사항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많은 쟁점들을 제기하는 르네상스 작품은 젠틸레 벨리니와 조반니 벨리니의 걸작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르코〉이다." "작품 속에서 마르코는 설교단에 서서 흰 천으로 몸을 감싼 동방 여인들을 향해 설교하고 있다. 성 마르코 뒤쪽으로는 베네치아의 귀족들이 줄지어 서 있고, 성자의 앞쪽으로는 동방의 인물들이 보다 많은 수의 유럽인들과 뒤섞이는 보기 드문 모습으로 서 있다."(38-9)
"벨리니 형제는 르네상스 유럽의 동쪽으로 펼쳐진 세계가 갖고 있던 신화적 이미지와 실제 모습 둘 다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동방 세계의 독특한 성격, 특히 베네치아의 오랜 무역 파트너였던 아랍 지배하의 알렉산드리아가 갖고 있는 관습, 건축, 문화에 관심을 보였다. 벨리니 형제는 이집트 맘루크, 오스만인, 페르시아인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문화들이 유럽 도시국가들이 소망하는 많은 것들을 가졌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동방의 진귀한 상품들, 기술·과학·예술 지식, 사업 기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런던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들의 문화와 소비에 미친 동방 상품의 영향은 점진적이었으나 심대했다. 음식부터 회화에 이르는 삶의 모든 영역이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르코〉라는 그림은 유럽 르네상스가 동방과의 대비가 아니라, 사상과 물질의 광범하고 복합적인 교환을 통해서 스스로를 정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42-4)
"1453년,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이제 유럽의 가장 강력한 제국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장차 르네상스의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주체로 등장했다." "오스만 제국과 유럽 간의 교류와 경쟁이 암시하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동방과 서방 사이에 분명한 지리적 혹은 정치적 경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문화적·정치적인 면에서 이슬람적인 동방과 기독교적인 서방 사이에 절대적인 분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19세기식 믿음이 두 문화 사이의 교역과 사상의 원활했던 교류를 가려왔다. 분명 양측은 종종 종교적·군사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의 물질적·사업적 교류가 계속되어왔다는 것이고 양측에 문화적인 발전을 위한 자양분 가득한 환경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전시대의 과거를 공통의 문화적 유산으로 함께 향유하면서 우리가 현재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결과물이라고 인식하는 새로운 성과물들을 만들어냈다."(52, 57-9)
2 인문주의자들과 책
"15세기 초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과 책은 소수 국제적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면 인문주의와 인쇄기는 엘리트와 민중 두 계층 모두의 읽기와 쓰기 능력 그리고 지식의 지위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그러한 혁명은 북유럽에 더 집중되었다." "인문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추종자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를 보장한다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먼저 인문주의는 고전을 익히는 일이 그들을 더 나은, 즉 더 '인문주의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고, 그러면 사회생활에서 개인이 마주치게 될 도덕적·윤리적 문제들을 숙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둘째로 인문주의는 학생들과 종사자들로 하여금 고전 문헌 교육이 대사, 변호사, 성직자 혹은 15세기 유럽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관료행정체계 속에서 서기관으로서의 미래 경력을 위해 필수적인 실용적 기술을 제공한다고 믿게끔 했다. 인문주의적 훈련은 엘리트 계층으로 진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시장성 높은 교육으로 보였다."(70-1)
"초창기 인쇄소들은 주로 성경, 설교집, 교리문답서 같은 종교적인 책들을 발간했다. 그러나 모험소설, 여행기, 팸플릿, 신문, 그리고 약 처방부터 아내의 의무를 다루는 각종 안내서나 지침서 같은 좀더 세속적인 책들이 차차 소개되었다. 1530년에 이르면 팸플릿 인쇄본이 빵 한 덩어리 값밖에 안 되는 가격으로 팔렸고, 신약성서 한 부의 가격이 노동자의 하루 일당과 같아졌다. 듣고, 보고, 말하면서 소통이 이루어지던 문화가 점차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문화로 변해갔다. 궁정이나 교회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 일종의 문필 문화가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진 인쇄소 주변에서 탄생하기 시작했다. 문필 문화의 의제는 종교적 정통 교리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요와 수익에 의해 정해졌다. 인쇄소는 지적·문화적 창조 활동을 집단적 모험으로 바꿔놓았다. 인쇄업자, 상인, 교사, 필경사, 번역가, 예술가, 저자 모두가 하나의 최종 결과물을 내놓는데 자신들의 기술과 부를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다."(86-7)
"에라스뮈스는 지속 가능한 학문 공동체를 세우고 교육 방법론을 다듬는 일에 엄청난 지적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쇄된 그의 글들과 최고의 '문필가'라는 지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쇄술은 에라스뮈스의 지적 경력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라스뮈스에 따르면 배움과 삶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홍보하기 위해 인쇄술을 이용함으로써 15세기 인문주의의 학구적인 성취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에라스뮈스 또한 인문주의가 교육과 종교를 개혁할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환심을 살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1516년에 『기독교 군주의 교육』을 쓰고 미래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에게 헌정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카를 5세가 그의 지침을 따랐는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어떠한 자리도 주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한 에라스뮈스의 반응은 카를 황제의 정치적 경쟁자인 헨리 8세에게 『기독교 군주의 교육』의 사본 한 부를 보낸 것이었다."(91-5)
3 교회와 국가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寄進狀」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근간이 되는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로렌초 발라는 수사학, 철학, 문헌학 분야의 역량을 동원하여, 문서의 역사적 시대착오, 문헌학적 오류, 논리적 모순이 「기진장」이 8세기에 위조된 것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발라의 폭로 사건은 르네상스 시대의 종교, 정치, 학문 사이의 관계에서 등장한 새로운 국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군주국과 같은 정치 조직들이 등장하면서 교회의 권위에 성공적으로 도전하기 위한 새로운 지적·행정적 기술들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후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발라를 교황 서기로 임명한 사실은 「기진장」을 폭로한 그의 전력에 비추어 이례적인 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학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모르는 악마보다 아는 악마가 나은 법이다). 그것은 또한 발라처럼 정치적으로 전략적인 인문주의자들이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준비가 얼마나 잘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103-4)
"1437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는 동방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의 통합을 논의하고 교황의 권위를 제한하려는 종교회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렌체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피렌체 종교회의는 르네상스의 본질이 밝혀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정상회담으로서는 실패였다. 동방교회와의 통합을 통해 자신의 지상권을 공고히 하려던 교황의 소망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치적·문화적 사건으로서는 대성공이었다. 이탈리아 국가들에는 약화된 교황권에 도전하여 동방과의 상업적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배적인 가문들은 통합령을 도출해내는 데 기여한 메디치 가문의 탁월한 능력을 주장했던 고촐리의 프레스코화처럼 호화로운 예술 작품들을 통해 종교회의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교묘하게 조작할 수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종교회의를 통해 고전 문헌과 사상, 예술 작품이 동에서 서로 전달되며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예술과 학문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07, 111)
"한편, 1420년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파당적 분열을 끝내고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곳이 너무나 황폐해지고 쇠락해서 도시 비슷한 모습조차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전 로마제국의 수도나 미래 가톨릭 제국의 수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마르티누스와 후임 교황들은 새로인 중앙 집중을 이룬 로마 교회의 영광을 기념할 수 있도록 야심찬 재건 계획을 세웠다." "로마는 기독교 세계의 제왕적 수도 자리를 두고 콘스탄티노플과 겨루고 있었다. 이 경쟁은 1453년 술탄 메흐메트에게 도시가 함락되자 더욱 거세졌다. 로마와 교황들은 이스탄불과 술탄들에게 뒤처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06년 4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를 건축가로 지명하고 새로운 베드로 대성당의 주춧돌을 놓았다." "역설적이게도, 장차 유럽의 사회적·정치적 풍경을 영구히 변모시킬 저항 운동, 곧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했던 것은 바로 이 기념비적인 작업을 완수하기 위한 비용이었다."(116-7)
"종교개혁으로 인해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이 잠식당하고 있음을 감지한 로마교황청은 권력을 재확인하려는 차원에서 예술과 건축에서의 과시적 소비를 크게 늘려나갔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예술에서 그러한 압박이 감지된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를 받아 시스티나 성당을 창세기의 장면들로 장식한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는 로마의 가르침에 기초한 천지창조에 대한 해석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장면들에서 엿보이는 우아한 역동성과 인물들의 강하고 긴장된 근육 역시 그 권위가 흔들릴 경우 표출될 로마교회의 힘과 잠재적인 분노를 표현했다. 이러한 긴장감은 바티칸 콘스탄티누스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에서도 감지된다. 이 작품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삶과 동방에서 서방으로의 교회 권력의 이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북유럽의 인쇄된 '말씀'이 남유럽의 웅장한 기념물들과 장엄한 프레스코화들을 이기고 있었다."(129-30)
4 멋진 신세계
"중세 기독교도들의 지리학은 창조론에 입각한 종교적 상징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14세기에 제작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실용적인 지도들은 르네상스 세계를 형성했던 혼합적인 문화 전통을 보여준다. 1330년경 제작된 작자 미상의 마그레브의 해도는 상인들과 항해가들이 지중해를 가로지르기 위해 사용했던 소위 '포르톨라노 해도'의 실제 예다. 십자형의 항정선(航程線)은 나침반으로 방위를 확인하는 일을 돕고 항해가들이 제법 정확한 항로를 따라 항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라나다나 모로코 둘 중 한 곳에서 만들어진 이 해도는 기독교와 이슬람 공동체 사이에서 지리 지식과 항해 기술의 교류 그리고 무역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202곳의 지명들 가운데 48개가 아랍어에서 나온 것이고, 나머지는 카탈루냐, 에스파냐, 또는 이탈리아어에서 온 것이었다. 아랍인, 유대인, 기독교인 항해가들과 학자들의 이런 실용적인 지도들 덕분에 유럽의 경계를 넘는 최초의 시험 항해가 가능해졌다."(139)
"1522년 9월 8일, 마젤란(의 남은 선원들)이 성공한 세계 일주는 외교적인 대소동을 불러일으켰다.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왕실 간에 말루쿠 제도 영유권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1529년 제작된 리베이로의 세계지도는 지리적 현실의 조작에 대한 증거로 남아 있다. 리베이로는 말루쿠 제도를 토르데시야스 선의 서쪽으로 172.5도에, 즉 카스티야 영역 안쪽으로 위치시켰다. 이 지도는 카를 5세에게 필요했던 협상력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는 말루쿠 제도에 대한 권리를 포르투갈인들에게 되팔았다. 카를 5세는 장기적으로 보장되는 상업적 투자 이익보다는 당장 받을 수 있는 현금을 선호했다. 말루쿠 제도로 가는 서쪽 교역로 개척에 들어갈 엄청난 비용과 실행 계획 때문이었다. 경도를 계산하는 정확한 방법 없이는 말루쿠 제도의 정확한 위치를 절대 알아낼 수 없을 터이기 때문에, 자신의 교묘한 지리학적 속임수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리베이로는 카스티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 제작자로 처신했다."(156-7)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대륙 수탈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이 대량 사망하자 에스파냐인들은 또다른 노동력 공급원을 필요로 했다. 해결책은 노예였다." "1529년과 1537년 사이에 카스티야 왕실은 아프리카에서 신세계로 노예를 실어나를 수 있는 허가증을 360건이나 발급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수치스러운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르네상스 유럽이 그렸던 세계는 혁명적으로 변화했다. 고전시대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뿌리 깊은 신념은 토착 주민들의 문화, 언어, 신념 체계를 설명하지 못했고,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중세로부터 좀더 뚜렷하게 근대적인 세계로 유럽을 변화시킨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새로운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에다 부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더함으로써, 아메리카에서 토착민들과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가공할 고통과 억압을 외면하게 만들었다."(161-3)
5 과학과 철학
"동방과 서방 사이의 학문적 교류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출현에도 기여했다. 아랍 천문학과 수학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는 13세기 중반 페르시아에 세워진 마라가 관측소였다. 관측소의 선두적 연구자는 나시르 앗딘 알투시(1201~74)로서, 그의 책 『천문학 논고』는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모순되는 설명을 수정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투시의 쌍원(Tusi Couple)' 개념을 고안해냈다는 데 있다. 이 정리에 따르면, 등속원운동으로부터 선운동이 파생될 수 있는데, 투시는 이 사실을 하나의 구가 반지름이 두 배가 되는 또다른 구 내부를 회전하는 모습을 통해 입증해보였다. 오늘날의 천문학사 연구자들은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투시의 쌍원 정리를 그대로 답습했으며, 이 정리는 태양계의 태양 중심 체계를 정의하는 데 핵심적이었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과거에는 어느 누구도 르네상스 과학에 아랍이 끼친 영향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180)
"인쇄술은 전에 없이 예술과 과학을 하나로 결합시켰고,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단연코 알브레히트 뒤러였다. 그는 동판화라는 새로운 기술을 재빨리 익혔고, '원근법의 비밀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새로운 예술은 반드시 과학, 특히 가장 정확하고 논리적이고 도식적으로 명확하게 구성할 수 있는 수학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었다. 1525년 그는 『컴퍼스와 자를 이용한 측량법』이라는 논문을 출간했다. 뒤러의 논문은 '화가들뿐만 아니라 금세공인, 조각가, 석공, 목수, 그 밖에 측량에 의존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유익하게' 쓰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예술적 재능과 실용적인 과학적 소양을 함께 갖춘 다빈치가 저지른 가장 큰 계산 착오는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출판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뒤러와는 달리, 레오나르도는 후대에 어떠한 구체적인 혁신도 남기지 못했다. 19세기에 월터 페이터에 의해 무명에서 벗어나기까지 그는 명민했으나 수수께기 같은 인물로 남아 있었다."(181, 186)
"인문주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새로운 번역본과 주석본을 출간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소홀히 다루어지던 고전 저자들과 철학 학파들 전체, 특히 스토아학파, 회의주의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플라톤학파의 주창자들을 재발견했다. 가장 획기적인 발전은 플라톤의 저작들을 재발견하고 번역한 것이었다." "플라톤식의 접근법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해 두 가지 뚜렷한 이점을 갖고 있었다. 먼저 영혼의 불멸성과 신에 대한 숭배라는 측면에서 15세기 기독교 신앙에 훨씬 더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둘째, 철학적인 추론을 인간이 가진 가장 값진 능력으로 정의했다. 플라톤을 이렇게 해석하면서 피치노는 철학자의 직업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기민함을 발휘했다. 신비주의적인 사색을 앞세워 정치학을 배격한 것은 피치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피렌체의 통치자 코시모 데 메디치의 통치 철학과 잘 들어맞았고, 이러한 이유로 피치노는 1463년에 메디치가 세운 철학 아카데미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187-8)
"그러나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두 철학자의 지적인 우위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1620년 프랜시스 베이컨은 '철학과 과학이 더이상 공중에 떠 있지 않도록 하고, 충분한 조사와 검토를 거친 모든 경험들의 견고한 토대에 기반하게 할' 학습의 '대부흥'을 촉구했다. 베이컨의 『신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 혹은 이성적 사고를 위한 도구』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의 글이었다." "베이컨은 과학 지식이 관찰, 실험, 귀납법에 기초하여 얻은 자연세계의 자료들의 신중한 집적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다. 이것은 17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왕립협회에 의해 진행될 경험 과학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1626년 베이컨은 플라톤의 유토피아 세계를 본떠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완성했다. 그러나 그곳의 가장 유력한 시민들은 이제 철학자들이 아니라 실험과학자들이었다. 그것은 근대 과학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과 철학을 결별하게 만든 엄청난 변화였다."(190-2)
6 르네상스 다시 쓰기
"점점 더 박식해지고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들을 찾고 있었던 대부분의 대도시 독자들 사이에서 수요가 생김에 따라 문학적 표현이 바뀌기 시작했다. 1554년 도미니크회 소속의 마테오 반델로는 『노벨레』라는 당대의 도시 생활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출간했다." "친티오라는 이름으로 대중적으로 더 잘 알려진 잠바티스타 지랄디는 1565년 『100편의 이야기』라는 소설집을 출간했다." "친티오와 반델로의 소설들은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1세 시대에 상연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위대한 비극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는데, 거기에는 토머스 키드의 『에스파냐의 비극』(1587년경), 셰익스피어의 『오셀로』(1603), 존 웹스터의 『하얀 악마』(1613년경)도 포함된다. 산문 쓰기와 마찬가지로, 특히 영국에서 희곡이 발달한 것은 궁정의 후원이나 종교적인 신앙심보다는 투자와 수익성 때문이었다. 덕분에 희곡은 사회와 개인에 대해 점점 더 복잡하게,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201-2)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르네상스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기에 알맞은 주제다. 그의 문학은 남유럽과 지중해의 영향으로부터 활력을 얻는 고전적 인문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의 끝을 의미하는, 보다 지역적이고 민족적인 주제에 대한 몰두로 옮겨가는 결정적인 이행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두 작품은 모두 셰익스피어가 과거 고전시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엘리자베스 시대 고유의 관심사들과 걱정거리들 또한 반영하고 있었다. 『실수연발』(1594)에서 일어나는 신원 오인이나 금전과 관련된 혼란스러운 상황은 영국이 이슬람교도에 의해 지배되는 지중해 국제무역에 진입하면서 돈의 유동성과 장거리 교역의 복잡성에 대해 영국인들이 느꼈던 불안을 표현했다.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또한 영국이 무어인 에런이라는 매력적이지만 불길한 인물 속에 구현된 다양한 문화와의 만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 인물은 후일 오셀로로 재탄생했다."(208-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인 햄릿, 맥베스, 리어왕, 오셀로가 그들을 만들어낸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불후의 창조물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르네상스를 정의하는 하나의 특징이 작품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능력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햄릿이 참으로 르네상스적인 인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즉 복잡하고 다면적인 근대성을 보여주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말한 통찰력을 예시하는 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는 또한 셰익스피어 시대의 고유한 압력들과 고민들 사이에서 창조된 인물이었다. 죽음에 대한 그의 내면적 독백과 살해당한 부왕의 복수를 하지 못하는 당황스러울 정도의 우유부단함이 근대의 소외된 모든 10대 소년들이 느끼는 희망과 공포를 반영했다고 해석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영국의 종교개혁이 만들어낸 프로테스탄트적 감수성과 그에 따른 구원이나 내세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냈다고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211)
"『템페스트』는 그동안 예술의 힘에 대한 명상록으로 여겨져왔다. 셰익스피어의 무대 고별작으로 알려져 있고, 셰익스피어의 가장 고전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나폴리의 왕 알론조는 그의 딸 클레리벨을 결혼시킨 뒤 튀니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항해에 나섰다가 지중해 어딘가에 있는 프로스페로섬에서 난파를 당한다. 이는 트로이에서 카르타고를 거쳐 로마로 간 아이네이아스의 여정을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또한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신세계의 식민화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템페스트』는 동서 양쪽 모두에, 즉 동쪽으로는 과거 르네상스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에게 풍성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던 동부 지중해와 고전 세계를, 서쪽 방향으로는 장차 17세기 후반과 18세기 계몽사상을 탄생시킬 대서양 세계에 주목했다. 문학적·지적·국제적 전망에서의 이러한 변화가 르네상스의 종말을 의미했다면, 그것은 또한 문화와 사회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명백히 근대적인 사고의 시작을 알렸다."(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