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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5
크리스토퍼 켈리 지음, 이지은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평점 :
1 정복
"카르타고나 동방 세계에 대한 전쟁에서는─기원전 31년 이집트 정복으로 마무리되는─공화정이라는 로마의 전통적 통치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했다. 사실 군사 정복이 계속 이어진 기원전 2세기를 흔히 로마 공화정의 절정기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여러 면에서 '공화정(Republic)'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용어다. 이 용어는 적어도 현대의 독자들에게는─일반 대중이 폭넓게 정치에 참여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로마 공화정은 금권정치 국가임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시민 집단은 엄격한 재산 자격 기준에 따라 철저히 등급별로 나뉘었다. 결과적으로 이 등급별 분류가 투표권을 규정했다. 모든 성인 남성 시민은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거인단은 재산이 있는 자들이 (그들이 결집만 한다면) 가난한 자들보다 항상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거운동과 공직 활동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부유한 자산가들만이 국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18-9)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이같은 빠른 성장은 대략 한 세기 후에 제정이 확립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로 독재가 자유를, 또는 전제가 독립을 대체했다고 보는 것은 속단일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래 황제들 치하에서도 로마의 정치는 줄곧 제국의 전리품을 놓고 경쟁하는 몇몇 특권적 가문들이 지배했다. 제정의 성립으로 인해 바뀐 것은 이러한 경쟁을 규제하는 방법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부유한 속주 출신자가 자신들의 부를 바탕으로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는 귀족 사회로의 진입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변모한 것, 다시 말해 일개 군사령관이 황제로 성공적으로 변모한 것은 로마 정치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단절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경쟁이 심한 과두정하에서 달성된, 치열한 싸움 끝에 권력이 재편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군대 지휘권을 갖는 사태는 철저히 통제되었다."(23-4)
"잠시 멈춰 서서 로마 제국의 수립을 특징짓는 가공할 공포와 무자비한 파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갈리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는 100만 명의 전투원을 살해했고, 나아가 또다른 100만 명을 노예로 만들었다. 인적·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카이사르의 정복은─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글에서 군단의 파괴력을 과장되게 서술한 점을 감안하더라도─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때까지는 그 살육의 규모에서 필적할 만한 사례가 없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침략자였다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영토 보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적들을 평정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제국의 설립은 조국의 안전을 위한 온건하고 타당한 정책의 미리 계획되지 않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기원전 1세기의 가장 유명한 웅변가인 키케로가 이를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다. 〈전쟁을 벌이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로마인들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다.〉"(31, 38)
2 황제의 권력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도시들의 신전에는 황제들과 올림포스의 신들이 각각 묘사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역사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황제를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과 같은 존재로 여김으로써, 로마의 속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속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로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과거'를 로마 지배하의 '현재'라는 시간과 연결할 수 있었다. 아프로디시아스에서는 제국 지배의 가장 잔혹한 일면인 정복마저도 그리스 세계의 전통적인 종교 체계에 통합되었다. 무자비한 정복 활동은 그리스 신화와 로마의 역사, 아프로디시아스 시와 로마 시, 그리고 올림포스 신들과 벌거벗은 로마 황제들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그 잔인함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각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한층 더 발전하는 로마 지배를 찬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제국 찬미의 세계상에서는 아프로디시아스가 무기력하게 황제의 발에 짓밟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51-2)
"전통적인 신들과 지역의 오랜 신앙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되풀이된 황제 숭배라는 의례의 틀 안에서 통합되었다. 또한 이로써 황제라는 절대 권력을 이해하는 언어를 제공할 수 있었다. 에페소스의 살루타리스와 같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공동체 안의 최고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인간에게 순종의 표시로 머리를 숙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회적 굴욕을 무릅쓰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신으로서의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지방의 고위층에게 스스로의 체면을 잃지 않고도 열등한 지위를 수긍할 만한 방법을 제공했다. 실제로 공적·사적인 영예를 둘러싼 경쟁에서 신관직을 수행하고, 축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신전 건립을 후원하는 사람들은 초인간적인 황제와의 특별한 관계를 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한층 더 강화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황제 숭배를 통해서 자신들이 제국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안팎으로 과시할 수 있었다."(58-9)
"황제들은 신과 같이 제국을 다스릴 권력을 손에 쥐고 있지만, 그 행동을 적절히 억제해야 하는 도덕률에 묶여 있기도 하다는 것은 엘리트 귀족층에 의한 황제 찬미에서 거듭 등장하는 주제였다. 100년 9월, 저명한 원로원 의원 소(小)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와 원로원 앞에서 집정관 직을 부여한 황제에게 바치는 감사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플리니우스는 관용, 검소, 경건, 공평무사, 가까이하기 쉬움 등 트라야누스의 중요한 덕목들을 열정적으로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의 시민다운 태도(ciuilitas)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한 태도는 사회적 지위를 서로 존중하고 공히 법률의 구속을 받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플리니우스가 신중하게 규정한 정치 질서에서 좋은 황제는 좋은 시민이기도 했다." "플리니우스의 생각에, 황제에게 최고의 미덕이란 제국 엘리트층 집단 속에서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62-4)
3 공모
"로마 총독은 속주 도시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청원이나 사법적인 문제가 제기되면, 많은 경우 지역의 담당 관리에게 넘기는 정도였지만, 가끔은 결정을 내려주기도 했다. 총독들은 간청을 받거나 불가피하게 나서야 할 경우에만 사태나 분쟁에 대응했다. 총독은 직접 앞장서 행동하는 조사관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호소할 수 있는 정부 당국이었다." "속주의 많은 도시들은 이런 최소한의 통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플리니우스가 총독으로 부임하기 10년 전, 비티니아-폰투스의 중간급 도시인 프루사의 상층 시민 한 명은 동료 시민들에게 그처럼 장점이 많은 상태를 위협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디오 크리소스톰이 볼 때, 소도시 사회의 지속적인 활력의 근거는 바로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부유한 계층의 우월한 지위를 뒷받침하고, 그들의 도시 행정 지배를 정당화해주는 것도 바로 제국의 존재(그리고 도시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면 제국측에서 보복할 거라는 위협)였다."(80-4)
"로마 제국의 성공 열쇠는 지방 엘리트층에 있었다. 정복 초기의 정신적 충격을 견뎌내고, 조직적인 저항은 가망이 없다고 단념해버린 사람들은 지배 권력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분명 이득을 챙겼다. 실제로, 많은 속주민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지역에서 기존 과두지배자 그룹이 경쟁자 없이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강화한 것에서 로마의 지배를 실감했다." "로마의 통치를 지지한 부족의 지도자들은 자기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속주 총독 다음으로) 가장 유력한 지위가 제국 권력과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이들은 로마가 정복하기 이전에 소유했던 것보다 더 안정된 권력과 부를 가지게 되었다." "지방 유력자들의 우월한 지위는 로마 시민권 부여로 더욱 강화되었다.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전망은 모자이크상으로 제국을 이루고 있는 도시의 지배 엘리트층이 지역에 대한 충성심을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승화시키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7-9)
"로마 제국의 통치는 지역과 제국의 이해를 하나로 융합시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이익을 얻도록 하는 데 기초하고 있다. 그렇긴 해도, 문명화와 노예화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타키투스의 비아냥에는 예리함이 있다. 만약 무력 지원이 없었더라면, 혹은 그러한 문화의 수용과 과시가 현실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법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비록 제국의 공통 문화가 가져다주는 혜택이 컸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빠르고 성공적으로 제국의 통치가 확립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지방 엘리트층이 현지에서 얼마나 교묘하게 영향력을 유지하든지 간에 그들의 특권적인 지위는 바로 로마 통치의 매개자 역할을 하려는 지속적인 의지에 달려 있었다." "도시의 성공한 지도자들은 플루타르코스의 예리한 평가에 당연히 동의할 것이다. 당신의 지위에 대해 〈너무 큰 자신감이나 확신을 가지지 마십시오.〉 개인적인 일, 또는 도시를 위한 공무를 수행할 때도 〈로마 총독의 장화가 바로 당신 머리 위에 있음을〉 항상 기억하십시오."(106-8)
4 역사 전쟁
"하드리아누스는 오랫동안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전장의 지휘관이 아니라 여행자로서 로마 제국 전역을 순회한 최초의 황제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을 아테네에 완성했다. 아테네의 과거에 대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도전은 건축 분야를 넘어섰다. 올림피에이온 신전의 헌정은 그리스 도시들을 묶는 새로운 조직인 판헬레니온(Panhellenion, 문자 그대로 '범그리스'의 뜻) 동맹의 창설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동맹은 5개의 로마 속주들을 포괄했고, 그리스 본토는 물론이고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소아시아, 크레타 섬, 로도스 섬과 북아프리카의 도시들까지 망라했다." "하드리아누스의 판헬레니온은 그리스 세계를 재편했다. 전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고, 실제로는 심하게 적대했던 많은 도시들이 단일한 제도적 틀 안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아테네가 동맹의 본부로 지명되었다."(110-2, 115)
"한 도시에 4개의 신성한 축제를 집중시킨 것은 그리스 역사를 통틀어 유례없는 일로, 이렇게 재편되고 개선된 그리스의 과거 속에서 아테네가 핵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이 강조되었다." "결국 아테네 시의 상징적·종교적 중심은 페리클레스가 세운 파르테논 신전이 아니라, 다수의 황제상으로 둘러싸인 하드리아누스의 올림피에이온 신전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치하의 제국에서 그리스 세계는 지역 레벨과 제국 레벨의 열정이 하나로 모아져, 이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화합과 문화적 결속을 이루었다. 2세기에 '그리스' 도시들 사이에서 새로 일어난 전통 돌아보기 움직임은 오랜 분쟁의 기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분단의 과거는 잊혀져야 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베푼 은혜로 범그리스 세계가 마침내 소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까지 펼쳐지고, 아테네는 이 멋진 신세계의 진정한 수도가 되었다. 역사상 그리스가 그토록 애써온 통합 노력에서 로마 황제가 마침내 성공을 거둔 것이다."(116-8)
"하드리아누스가 후원한 건설 계획에서는 지난 역사에 대한 매우 독특한 해석이 기념물의 형태로 체계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한 과거는 황제 자신과 노골적으로 연계되어 이번에는 로마 제국이라는 현재의 세계와 일체화된다." "로마 황제들에게 과거는 '횡령'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정복의 상흔을 지우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밀월을 강조하기 위해 재구성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현실을 피하여 상아탑의 세계로 숨어들어버릴 위험이 있는 그리스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과거란 아직도 해방이라는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적어도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 신전 근처에는 황제의 자선 행위를 기념하는 멋진 아치문이 있다. 그 서측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여기는 지난날 테세우스의 도시였던 아테네이다.〉 이해가 더딘 사람을 위해서 반대편 비문이 요점을 다시 말해준다. 〈이곳은 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니라,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다.〉"(133, 136)
5 사자에게 던져진 기독교도들
"177년 여름, 루그두눔(지금의 프랑스 남부 리옹). 마침 축제 기간이었고, 원형경기장에서는 눈요깃거리로 기독교도들이 끌려나와 있었다. 이때의 일에 관해서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다른 기독교도들이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2세기 루그두눔의 주민들에게 기독교도들은 기분 좋은 나들이의 이벤트, 즐길거리의 하나,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군중은 마치 포효하는 사자처럼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그리고 이같은 폭력과 잔인함에 대한 수많은 일화에서도)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관중은 결코 부랑자와 같은 하층민들이 아니었음을 강조해야 한다. 이들은 미쳐 날뛰는 폭도가 아니라, 오히려 눈요깃거리로 준비된 폭력을 흥미진진한 소일거리로 여기는 선량하고 믿음직한 시민들이었다. 사회적으로 버림받는 자들이 점잖고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의 오락을 위해 잔인하게 죽은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마찬가지로, 전문 투사들이 싸움질을 하는 것도 당연시되었다."(140-1)
"80년 콜로세움의 개장식에서는 검투 경기와 9,000마리의 맹수 사냥을 비롯한 구경거리가 100일 동안 이어졌다." "검투 경기에 투여된 이런 놀랄 만한 시간과 자금, 그리고 로마인들의 강한 애착은 지배를 과시하는 행위로서 검투 경기가 갖는 중요성을 잘 드러낸다. 관중은 갈채를 보내고 리드미컬하게 성원함으로써 공동의 연대의식을 확인하며, 눈앞에서 무참하게 살해되는 검투사가 자신들과는 별개 집단임을 선언했다. 관중은 또 패배한 검투사의 운명을 좌우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행사했다. 죽음을 가지고 노는 이 구경거리는 사회가 스스로의 안녕을 다지기 위해서 제공하는 통제된 무질서의 막간극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형경기장, 그리고 철저히 통제된 관중과 잔인한 게임은 제국의 단합을 가져오는 폭력과 질서의 축도였다. 유혈이 낭자한 볼거리 속에서 폭력은 질서 잡힌 사회에 반드시 동반될 요소로 제시되었다. 마치 전쟁이 한때는 제국의 수립에 불가결한 것이었듯이 말이다."(145-6)
"기독교도들의 순교가 유혈이 낭자한 구경거리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77년 리옹에서 한 무리의 기독교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중은 기독교도들이 고문대에서 찢기고, 철판 의자에서 그을려지고, 황소 뿔에 받히고, 굶주린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며 갈채를 보냈다. 원형경기장에 질서 있게 앉은 잘 차려입은 군중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도들을 사자에게 던져주는 행위는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로마 다수파의 권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에게 순교는 결코 패배가 아니었다. 순교는 승리였다. 순교자의 처참한 육체는 기독교도들의 눈에는 아름답게 비쳤고 불에 탄 살내음은 달콤한 향기처럼 느껴졌다. 미화는 시복(諡福: 가톨릭에서 성인聖人으로 인정하기 전에 공식으로 공경할 수 있다고 교회가 인정하는 지위에 사후에 오르는 일)의 전단계로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순교 행위에서 기독교도들은 항상 승리했다는 사실이다."(150-3)
6 로마인의 삶과 죽음
"로마 제국은 질병과 죽음으로 고통받았다. 평균 수명은 20~30세로, 오늘날 서양화된 사회의 평균에 비하면 약 3분의 1밖에 안 되었다. 이러한 숫자의 산출은 고대의 사료에 직접 의거하기가 어렵다. 고대의 사료는 불완전하고 내용도 빈약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전도상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추세를 로마 제국도 따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상정하고 산출이 이뤄지고 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의 인도와 중국의 경우가 잘 알려져 있다. 이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적어도 그 상한과 하한은 볼 수 있다. 즉, 평균 수명이 20세 미만인 경우에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을 것이고, 반대로 평균 수명이 30세 이상인 경우에는 환경적·사회적·경제적 조건이 비슷한 전근대 사회보다 로마는 인구가 안정된 사회였을 것이다. 통계학적인 모델은 세대 구성, 출생률과 사망률을 추측한 명확한 틀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모델은 개연성을 반영하는 데 불과하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182-3)
"생활환경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부유한 사람들이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반드시 훨씬 더 오래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제정기에 로마 원로원은 정원이 600명 정도로, 결원 보충은 평균 25세 안팎의 재무관(quaestor) 경험자가 매년 20명씩 추가됨으로써 이루어졌다(재무관은 최하위 공직). 이러한 결원과 보충의 관계에서 보면, 재무관 경험자는 통상 50대 중반까지 사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해서, 좀더 넓게 말하면 출생시 그들의 평균 잔여 수명은 20대 후반이었던 셈이다. 로마 사회의 가장 특권적인 사람들인 원로원 의원은 분명 좀더 많은 자원을 우선적으로 향유할 수 있었을 텐데, 한편으로는 군단의 군영이나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심부처럼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 환경에서 장기간 지내야 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들의 혜택도 상쇄되었을 공산이 크다. 1세기부터 7세기까지 자연사한 로마 황제 30명의 항년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모든 부와 권력을 과시한 그들의 평균 수명은 불과 26.3세였다."(186-7)
"가혹하게 높은 사망률은 로마 여성의 출산 능력에 상당한 부담을 안겼다. 안정된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균해서 월경 개시기에 도달한 여성 1명이 딸 1명을 낳고, 그 딸도 월경 개시기까지 성장하는 것이 전제된다. 유아기 사망률이 높은 사회에서 이같은 냉정한 인구학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정상 출산 인구의 수는 급격히 증가한다. 안정된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평균해서 여성 1명이 딸 2.5명, 즉 아들까지 쳐서 적어도 5명의 아이를 낳지 않으면 인구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여성은 조혼으로, 평균 20세 직전에 결혼했다. 제국의 서부 속주에서 출토된 묘비에 따르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가 평균적인 초혼 연령이었다. 다산의 부담을 가능한 한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혼인이 널리 행해질 필요도 있었다. 이집트에서 여성의 60퍼센트가 늦어도 20세까지, 나머지도 30세까지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었다. 로마 제국에는 미혼녀가 거의 없었다."(188-9)
7 다시 찾은 로마
"'번영'과 '문명'이라는 키워드를 공통분모로, 로마와 영국을 동일선상에서 견주는 것은 제국의 지배에 관한 매력적인 사고방식이었다. 1901년에 처음 출간된 『고대 로마 제국과 인도의 영제국』이라는 연구에서 옥스퍼드의 역사학자이자 법률가, 저명한 자유당 정치가인 제임스 브라이스는 두 제국의 성공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두 제국 모두 〈제국 내부의 평화와 질서를 매우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탁월했다. 둘 다 인상적인 도로와 철도의 건설을 통해서 자신들이 〈훌륭한 공학기술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두 제국 모두 전쟁과 통치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러한 성공들이 〈모든 저항을 억누를 기회를 맞이했을 때 보여준 유사한 추진력과 에너지, 준비성〉을 드러내 보였다. 두 제국을 이처럼 좀더 확실히 비교하는 시각의 장점은 인도에 있는 영국의 존재에 설득력 있는 역사적 정당화를 제공하는 듯하다는 점이다."(211-2)
"로마 시의 현대적인 모습은 상당 부분 무솔리니가 조성했다. 고대 건축물들이 분명하게 부각되는데─관광객에게는 즐겁게도─그 이유는 바로 (무솔리니의 표현에 따르면) '추악한 그림 같은' 주변 환경이 조직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궁으로부터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임페로(제국)대로는─지금은 그보다 덜 논쟁적인 포리 임페리알리(황제 광장) 대로라고 불리는─전적으로 파시스트의 창조물이다. 무솔리니의 본부에서 콜로세움을 뚜렷이 보기 위해서 중세 도시를 관통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무엇보다도 이 도로는 군사 행진에 필요한 엄청난 공간을 제공했다. 로마는 땅 위에서만 재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한층 더 확대된 로마 제국의 영광이 아우구스투스 탄생 2천 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에서도 경축의 대상이 되었다." "전시의 목적은 방문객들을 위해서 부활된 제국의 일관성 있는 모습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인상 깊은 폐허가─적어도 축소된 모형으로─다시 한 번 완전한 모습을 찾았다."(220-1)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려지는 로마 제국의 현대적인 버전들은 넘치도록 풍부하게 재미있어야만 한다. 〈쿠오바디스〉, 〈로마 제국의 몰락〉, 〈글래디에이터〉 같은 영화들은 개선 행렬의 엄청난 장관, 아주 부유한 자들이 소유한 대저택의 호화로움, 유혈이 낭자한 검투 경기의 스릴, 전쟁의 공포, 독재정치의 무시무시한 변덕스러움, 로마의 대도시적인 장대함을 전달한다. 황제의 과제에 대한 로마의 생각을 포착한다거나, 제국의 권력 행사와 표현을 둘러싼 어려움과 모호함에 대한 인식을 제공한다거나, 속주 엘리트층의 민감한 위치를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정복과 저항은 판에 박은 듯 오로지 무력이라는 측면에서만 인식되었다." "할리우드 영화 속 로마의 중심에는 몹시 개인적인 투쟁, 즉 인간성을 파괴하는 전체주의적인 체제에 맞선 개인의 우월함에 대한 칭송, 사랑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 정당한 복수의 추구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매력적인 결합이 로마 제국의 지속적인 인기 요인임이 분명하다."(2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