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본주의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5
제임스 풀처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평점 :
1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 자본주의의 세 가지 역사적 형태
1. 상업 자본주의
2. 자본주의적 생산(소비를 포함하는)
3. 금융 자본주의
"자본주의란 본질적으로 이윤을 기대하는 자금 투자이며, 영국 동인도회사의 교역처럼 상당히 위험한 장거리 모험사업에 투자할 경우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이윤은 퍽 단순하게도 희소성과 거리의 결과였다. 예컨대 말루쿠제도에서 후추를 사는 값과 유럽에서 후추를 파는 값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나면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이윤에 비하면 모험사업에 들이는 비용은 별것 아니었다." "이것은 확실히 자본주의였다. 장거리 교역을 하려면 큰 이윤을 기대하는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아니었다. 고수익을 올린 비결은 이런저런 수단으로 독점을 확립하고, 경쟁자를 차단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시장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 생산을 합리화하는 활동보다 희소한 생산물을 거래하는 활동에서 이윤이 나왔던 까닭에 상업자본주의가 끼치는 영향은 제한되었다. 유럽 인구 대다수는 자본 소유자들의 이런 활동에 영향받는 일 없이 일상을 영위했다."(9, 12-3)
"자본주의적 생산은 임금노동에 기반을 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과 노동 모두 추상적이고 이탈적인 특성을 띤다. 둘 다 특정한 경제 활동에서 분리되고 따라서 원리상 적절한 보상을 주는 어떠한 활동으로든 나아갈 수 있다." "(임금노동자 측에게) 이런 자유는 얼마간 허상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급 노동을 하지 않고 살기가 어렵고 노동의 종류와 고용주를 거의 고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임금노동자는 필요하거나 소비하고 싶은 재화를 스스로 생산할 수 없으므로 구입해야 하고, 그로써 일군의 새로운 자본주의 기업들 전체를 활성화하는 수요를 만들어낸다. 그런 수요에는 음식과 옷, 개인 소유물뿐 아니라 여가 활동까지 포함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도입되자 곧 여가의 상업화에 기초하는 새로운 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생산과 소비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해준 임금노동의 이런 이중 역할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단 작동되기 시작하자 그토록 빠르게 확대된 이유를 설명해준다."(27-9)
"시장은 전혀 새롭지 않지만 매우 새롭고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을 이룬다." "시장은 당신이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 약간의 물품을 추가로 구매하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물품이든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시세가 변화하는 까닭에 어떤 시장이든 투기를 통해 돈을 벌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상품을 장차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것을 기대하며 사들일 때, 아울러 그 상품을 어떤 식으로든 가공하여 가치를 높이지 않을 때, 투기는 일어난다. 거의 모든 상품이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개 비생산적일지라도 투기는 단순히 돈을 버는 방법이 아니라 위험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공급과 수요의 관계가 언제나 변화하는 탓에 시장은 불안정하다. 재고를 늘리고 쟁여두는 것은 이윤을 갉아먹고 사업을 망칠 수 있는, 피하고픈 시세 변동에 대비해 보험을 드는 방법이다." "투기는 자본주의와 별개인 무언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적 메커니즘에서 자라나는 불가피한 파생물이다."(29-32)
2 자본주의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영국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원을 찾으려면 16세기에 이루어진 생산과 소비, 시장의 성장을 살펴봐야 한다.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임금노동이 갈수록 흔해지고 있었으며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임금노동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곧 사람들이 상품을 구매할 돈을 가지고 있었고 시장관계가 그들의 일상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시기 영국에는 런던에 거점을 둔 교역상들에 힘입어 전국 단위 시장이 이미 뚜렷하게 출현해 있었다." "계급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14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날품팔이'를 뜻하는 직인(journeyman)들은 보통 도제 과정을 마쳤지만 아직 장인 자격을 얻을 만한 숙련도와 경험을 갖추지 못한 수공업자였다. 장인들은 갈수록 직인들의 장인 자격 획득을 막고 직종을 통제하는 길드에서 그들을 배제하면서 계속 싸게 부려먹으려 했다. 직인들의 대응은 자기네 지위를 지키고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향상을 단체로 협상하기 위한 조직화였다."(40-1)
"봉건 영주의 생계수단은 농민층으로부터 생산물이나 노동력, 현금을 받아낼 권리였다. 하지만 15세기에 시장관계가 봉건관계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영주는 지주로 변모해갔으며, 지주의 생계수단은 시장에서 소작권을 놓고 경쟁하는 소작농이 지불하는 지대였다. 토지는 갈수록 임금노동을 통해 경작되는 한편, 사고팔 수 있는 재산이 되어갔다. 15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단속적으로 이어진 인클로저 운동은 이런 토지소유권의 변화를 상징한다. 시장 지향형 농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렇다면 왜 영국에서 먼저 봉건제가 쇠퇴했을까? 주장하건대 영국에서 봉건제가 덜 단단하게 확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잉글랜드의 통치계급은 유럽 대륙의 통치계급과 비교해 농민층으로부터 잉여물을 얻어내는 데 지역의 군사력을 덜 사용했다. 그들은 토지소유권, 지대, 임금노동에 따른 경제적 메커니즘에 더 의존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통일된 국가가 전국 단위 시장의 출현을 촉진했다."(43-6)
"사실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기법은 때로 유럽의 다른 사회들에서 훨씬 더 발달했다. 유럽에는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의 오랜 역사가 있었다. 선대제는 플랑드르 또는 이탈리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고, 14세기와 15세기에 독일에서 널리 퍼졌다." "16세기 무렵 자본주의적 생산은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발전하고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성장을 생산의 관점에서만 봐서는 안 된다." "상업자본주의의 자본 축적을 위한 혁신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성장과 별로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금융 혁신은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배하게 된 대규모 산업기업들이 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일련의 작은 단계들을 거치며 차츰차츰 이루어진 자본주의적 생산의 성장보다는 대기업들이 조직한 대규모 자본집약적 공정의 확립이야말로 과거와 단절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17세기 네덜란드 상업자본주의의 금융 혁신은 극히 중요한 변화였다."(47-51)
"도시들이 불가결한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한 원인으로 도시들을 꼽는 설명에는 문제가 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분명 도시들이 독립성을 키워간 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그후로 먼저 되살아난 봉건 통치자들에 의해, 뒤이어 민족국가에 의해 자율성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게다가 자본주의적 생산은 도시보다 시골에서 더 단단하게 발전했다. 새로운 방법과 값싼 노동력을 무자비하게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시의 길드들이 차단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접근법은 유럽의 다국가 정치 구조에서 출발한다. 다국가 구조는 유럽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경제 발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질서를 제공했다. 또한 유럽에서 다국가 특징 덕에 기업가들은 경제 환경이 악화되는 나라에서 기업에 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나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 숨이 막힐 듯한 대항종교개혁 국가가 등장했음에도 자본주의는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56-9)
3 어떻게 지금 여기에 이르렀는가?
# 산업자본주의 발전의 세 단계
1. 무정부적 자본주의
2. 관리 자본주의
3. 재시장화된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가 획기적으로 발전한 18~19세기가 무정부적이었던 이유는 자본주의 기업가들의 활동이 조직된 노동에 의해서도 국가에 의해서도 비교적 견제받지 않은 데 있었다." "규제 완화는 이 시기에 부상한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신념과 잘 어우러졌다. 그렇다고 국가가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실은 정반대였다. 시장의 힘은 질서 잡힌 사회에서만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었고 그러자면 산업자본주의가 엄청난 무질서를 낳고 있던 이 시기에 국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업, 소요, 기계 파괴, 재산 범죄가 생산과 질서를 위협하는가 하면 노조와 급진적 정치 운동이 자본가 고용주와 국가에 직접 도전하는 실정이었다. 소요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어 이따금 심각한 폭력을 행사했다." "경쟁하는 소규모 제조업, 약한 노동조직, 경제 규제 완화, 강한 국가, 최소한의 국가복지는 자본주의 발전의 이 단계에서 서로를 강화한 특징들이었다."(67-70)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970년대에 절정에 이른 자본주의 발전의 다음 단계 동안, 산업의 양편이 더 조직되고 국가의 관리와 통제가 늘어남에 따라 시장을 통한 경쟁과 규제는 감소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 분쟁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각국 정부가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으로부터 자국 경제를 보호하는 한편, 적들에 맞서 자국 자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동원하려 했기 때문이다." "'관리자본주의' 단계를 형성한 대기업의 성장, 계급 조직화의 발전, 국가와 계급 조직들 간 합의주의적 관계, 국가의 개입과 규제, 국가복지, 공적 소유의 확대 같은 과정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서로를 강화했다. 이 모든 과정의 공통점은 사람들의 삶에서 시장의 중요성이 감소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갈수록 비인간화했던 시장의 힘에 반발하는 일반적 태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 단계 동안 자본주의는 민족적 제국들 안에서 조직되었다."(70-1, 77)
"관리자본주의가 무너진 한 가지 이유는 합의주의 제도가 결국 작동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물가와 소득을 규제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거듭 실패했다. 그런 규제에 필요한 노조, 고용주, 국가 간 협의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마련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국제 경쟁이 확대되면서 기존 산업사회들이 받는 압박이 커졌다는 것이다. 제국들이 쇠퇴하고 자유무역이 성장하는 가운데 각국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에 관리자본주의의 핵심 가치였던 복지와 평등, 고용에 대한 집단주의적 관심은 자유와 선택에 초점을 맞추는 더 개인주의적인 가치에 밀려났다." "결국 시장의 힘을 되살리기 위해 경제 활동에 대한 국가 규제는 없애거나 줄여나갔다. 규제 완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산업은 금융업이었을 것이다. 금융 기능들을 나누는 경계는 경쟁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신념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금융 규제 완화 덕에 속도를 올린 금융화 과정은 2007년 금융위기로 귀결되었다."(78-80, 83)
4 자본주의는 어디서나 똑같은가?
"스웨덴의 계급협력은 계급투쟁의 소산이었다. 노동자 조직과 고용주 조직이 모두 강하게 성장한 까닭에 관리자본주의가 확고부동한 합의주의 형태로, 즉 자본주의 관리를 양편의 중앙 조직들에 상당 부분 위임하는 형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사실 스웨덴이 '노동 평화'라는 평판을 얻은 주된 이유는 이 강력한 조직들이 자기네 조직원들을 통제한 데 있었다." "국가복지는 노동운동의 집단주의 정책의 한 측면일 뿐이었다. 노동운동 지도부는 복지가 사회주의 사상의 힘과 노조 조직만이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고 국가의 경제 파이를 키워주는 역동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에서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웨덴 경제 정책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수익을 못 내는 기업들을 파산하게 놔두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자원이 수익을 내는 기업들에게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조가 통제한 노동시장 정책은 일자리를 보호해주었던 게 아니라 노동자의 이직과 재교육을 지원해주었다."(96-8)
"개인주의로 유명한 미국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 및 조직면에서 스웨덴 자본주의와 정반대였다. 미국의 산업화는 분권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 모험심과 진취성을 발휘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진 사회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관리자본주의는 집단 조직화의 범위가 더 좁았고, 국가복지가 덜 보편적이었으며, 반트러스트 법률이 더 강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 단계를 통과했다. 재시장화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분명 생산 영역에서 일어났지만, 가장 두각을 나타낸 영역은 틀림없이 금융 활동에 자본이 투입됨에 따라 규모를 키워간 금융 영역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전 세계의 지배적인 공산품 생산 국가에서 금융상품 혁신을 선도하는 국가로 이행한 놀라운 변화였다. 미국은 아주 성공적으로 이행한 것으로 보였다. 금융 활동에서 큰 이윤이 생겼고 경제 전체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금융업 종사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활동이었다."(103, 112-3)
"일본은 독특한 관리자본주의를 창안했다. 국가는 지시를 내리는 역할을 맡았으며, 경제 전체를 무대로 사업을 하는 기업군들의 형태로 기업 집중이 진행되었다. 또다른 독특한 특징은 노동조직이 약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은 조직을 이루려 시도했고 또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노동력 수요가 많았던 1차대전 기간에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지만, 고용주들의 거센 반대와 국가의 탄압에 부딪혔다. 국가복지 역시 별로 발전하지 않았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통합하고 노동운동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기업복지제도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은 1990년대초부터 바뀌었다. 특히 노동시장에서는 확실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의 임시직화'가 진행되고 '성과 기반 고용'이 도입되었다. 2008년 노동력의 3분의 1은 대체로 파트타임, 계약직, 임시직 노동자로 이루어진 비정규직이었다. 이는 생각만큼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다. 초과근무수당이 없는 아주 오랜 노동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115, 120-1)
"1970년대 이후 세 나라 모두 관리자본주의의 관행을 포기하고 시장의 힘이 더 자유롭게 작용할 수 있도록 개혁을 도입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렇다면 동일한 관행을 받아들인 점이 세 국가별 차이를 사라지게 만들었을까? 먼저 지적할 점은 모델들이 변천한다는 것이다. 세 나라 모두 한때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라들이 모방해야 할 선도적 자본주의 경제로 보였다. 실제로 세 나라의 성공 경로를 다른 나라들이 똑같이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세 나라의 제도는 저마다 문제들을 낳고 결국 경제 위기를 야기했다. 가장 근래에는 미국의 자유시장과 주주자본주의가 무엇이든 정복할 것처럼 보였지만, 바로 이 자본주의가 숱한 스캔들과 2007년 시작된 긴 위기를 초래했다. 국제 경쟁의 격화와 지구화는 세 나라에서 공히 재시장화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이 결과를 수렴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세 나라의 자본주의는 이제까지 나름대로의 속도와 방식으로 재시장화되었기 때문이다."(125-6)
5 자본주의는 지구화되었는가?
"자본주의적 생산을 퍼뜨린 주요 매개체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이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멕시코에서 '마킬라도라'라고 알려진 제조공장이 있다. 마킬라도라는 1965년 멕시코가 미국과의 국경으로부터 10마일 이내 지역에 완제품을 재수출하는 조건으로 원료와 부품을 무관세로 수입하는 공장의 설립을 허용하면서 시작되었다.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어 무역 장벽이 제거되자 마킬라도라는 더욱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과 유럽의 자본이, 결국 일본의 자본까지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고자 들어왔다." "멕시코에서 노동력이 저렴했던 것은 단순히 공급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이 조직되지 않고 규제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약간의 보상이 있기는 했다. 기존 산업사회의 노동자들이라도 소비자로서는 분명 득을 봤기 때문이다. 외국의 더 저렴한 노동력과 더욱 치열한 국제 경쟁은 그들이 구입하는 상품의 가격을 낮췄다. 그렇지만 실질임금 증가율은 내림세였다."(131-4)
"제조업만 기존 산업사회에서 빠져나간 것이 아니다. 타자 치기, 전화 응답, 데이터 처리, 소프트웨어 개발, 문제 해결 같은 대다수 사무직 업무를 이제 원격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한 덕에 특히 이런 종류의 업무를 임금과 사무실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외국 지역으로 옮기기가 쉬워졌다." "세계에서 영어권에 속한다는 것은 상당한 이점으로, 이 덕분에 카리브해의 몇몇 섬나라와 인도는 유리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영어 하나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들보다 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카리브해 일대는 인도, 필리핀, 말레이시아, 중국에서 구할 수 있는 더욱 값싼 노동력과의 경쟁에 직면했다. 원격근무 시설을 쉽게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은 더 반복적인 저숙련 형태의 원격근무가 거의 제약 없이 퍼져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136-7)
"이제껏 검토한 자본주의적 관행이 확산되면서 필연적으로 통화 유통량이 늘었지만, 20세기 마지막 25년간 정말 놀라우리만치 증가한 국제 통화 유통량은 주로 투기적인 통화 이동의 결과였다. 대부분 투기적 성격이었던 국제 투자의 액수는, 1970년부터 1997년까지 거의 200배 증가했다. 20세기 말에 거래된 세계 통화는 하루 1조 5000억 달러에 달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올라가 2011년 하루 5조 달러가 되었다. 이 엄청난 증가세는 외국 여행이나 국제 무역을 위한 통화 거래가 아니라(분명 그런 거래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통화의 이동을 활용해 돈을 벌려는 투기와 관련이 있었다." "국제 통화 거래와 투자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통신 및 금융) 기술의 발전 덕분이었다. 1980년대 재시장화된 자본주의의 규제 완화 풍조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국가가 환율을 고정하고 통화의 국제 이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유시장과 경쟁에 대한 새로운 믿음에 부합하지 않았다."(143-6)
#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신화
1.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근래에 생겨났다. → 사실 자본주의는 거의 생겨나자마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 자본은 전 지구적으로 유통된다. → 사실 대부분의 자본은 소수의 부유한 나라들 사이를 오갈 뿐이다.
3.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조직된다. → 초국적 기업도 민족국가 내의 활동이 핵심이다.
4.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세계를 통합한다. → 자본주의가 지구화될수록 부의 불평등은 더 심화되어 왔다.
6 위기? 무슨 위기?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관계가 밀접했다. 대부분의 생산이 거의 직접 소비를 위해 이루어졌다. 반면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화가 갈수록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생산되었고, 생산과 소비의 관계가 멀어졌다." "과잉생산 경향은 사실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하는 경향이지만, 이런 위기들이 자본주의를 파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위기가 발생해야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폐업과 파업이 속출하는 위기가 닥쳐야 생산량이 수요량에 더 가까운 수준으로 감소해 과잉생산의 중압이 사라지고, 가장 비효율적인 생산자들이 퇴출당하고, 선순환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더 낮은 임금은 수익성을 높였고, 더 싼 가격은 수요를 자극했다. 더 낮은 이자율은 투자금을 더 저렴하게 빌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다시 생산이 확대되기 시작하고, 고용률이 올라가고, 상품을 구입할 돈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었다."(162-3)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위기를 통해 제 길을 넓히는 셈이었지만,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주장한 대로라면 이 확장은 〈더 폭넓고 더 파괴적인 위기들〉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어떤 거대한 경제 붕괴로 인해 자본주의가 끝나리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경우에만 자본주의가 끝날 것이라 전망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에 내재하는 특정한 경향들이 최후의 전복을 촉진할 터였다. 기술이 발전하고 소유권이 집중되면서 생산 단위의 크기가 커지는 한편, 노동자들이 더 큰 규모로 집중되어 더 쉽게 조직될 터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위기는 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을 급진화함으로써 분명 일익을 담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결국 혁명적 세력이 되리라는 마르크스의 예측은 입증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구조에 통합되었고, 자본주의가 차고 넘치게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매료되었다."(164-5)
"생산능력 향상과 기술 변화의 결과로 인해 늘어난 생산량은 수요량이 덩달아 증가하면 흡수될 수 있었지만, 전 세계 수요량은 상품 공급량과 같은 속도로 증가하지는 않았다. 결국 새로운 생산 중심지들이 등장한 한 가지 이유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데 있으며, 낮은 임금은 소비 수요를 많이 창출하지 않았다. 선진국들의 소비 수요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자본가들이 낮아지는 생산 수익성에 대응한 한 가지 방법이 국외의 값싼 노동력을 찾는 것이었다면, 다른 방법은 생산에 대한 투자에서 주식, 통화, 파생상품에 대한 투자로 자본을 옮기는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힘들고 불확실한 경제 환경에서 상품과 서비스 생산으로 수익을 내려고 애쓰느니 이런 금융상품들을 투기적으로 거래하는 방법으로 돈을 더 쉽게 벌 수 있었다." "국제 경쟁의 격화, 부채 증가, 규제 완화, 자본의 금융화는 안정을 깨뜨리는 갖가지 힘들을 낳았다. 이 추세는 2007년 시작된 위기로 이어졌다."(174-7)
"자본주의가 머지않아 어떤 위기를 맞아 파멸할 것 같지는 않다 할지라도, 오늘날의 문제들은 자본주의가 장기적 쇠퇴 과정에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막대한 환경 비용, 기반시설 비용, 사회적 비용을 사회에 떠넘겨야만 이윤을 낼 수 있다. 그 부담은 대체로 국가가 짊어지지만, 정부가 지출 삭감, 민영화, 긴축 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데다 어느 정도는 이런 정책의 결과로 불평등이 심화되어 정부의 정당성이 흔들리고 부담을 떠안는 국가의 능력이 약해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민간자본은 단기 이윤을 추구하면서 상당한 권력을 사용하여 자본주의의 장기 생존능력을 지탱하는 제도와 구조를 실제로 약화시키는 정책을 조장한다. 크레이크 칼훈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자신이 의존하는 조건을 파괴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금융화와 신자유주의는 이 추세를 악화시킨다. 자본주의의 향후 생존은 자본주의를 제거하지 않은 채 이 파괴 추세를 제한거나 뒤집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여부에 달려 있다.〉"(1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