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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철학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2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평점 :
서문
"대륙철학이 과학주의를 비판하는 까닭은 자연과학의 모델이 철학 방법의 모델을 제공할 수도 없거니와 '제공해서도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에 접근하는 일차적이고도 가장 유의미한 길을 자연과학이 인간에게 제공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학주의에 대한 이런 우려는 비록 정당하기는 해도, 근 수십 년간 반과학적 태도와 융합하여 자칫 '몽매주의'로 빠져들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철학에서 피해야 할 두 극단은 (카르나프와 하이데거의 논전으로 대표되는) 과학주의와 몽매주의다." "오늘날 철학 연구의 분열은 부적절하고 분파적인 전문적 자기기술의 결과다.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둘 다 대단히 분파적인 자기기술이며, 이는 철학의 전문화, 내가 보기에는 철학의 비판 기능을 약화하고 문화생활에서 철학을 점차 주변화해온 전문화의 결과다. 철학은 문화생활의 필수적인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14-5)
1 지식과 지혜의 간극
"나는 지식과 지혜의 관계와 관련하여 덜 극단적인 견해를 취한다. 나는 삶의 의미라는 물음을 경험적 조사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이는 더 나은, 더 포괄적인 이론을 내놓아서 좁힐 수 있는 설명상의 간극이 아니라 도리어 '느껴지는' 간극이다. 설령 인식론적 걱정거리 전부를 과학적 탐구를 통해 경험적으로 해소한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이것이 어쩐지 지혜의 문제와는, 인간의 좋은 삶이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아는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느낄 것이다. 여기서 역설은 과학적 세계 파악이 지식과 지혜의 간극을 한층 민감하게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과학과 기술 면에서 고도로 발달한 사회들에서 이 역설을 가장 민감하게 느낀다는 쪽에 판돈을 걸기까지 할 것이다. 지식과 지혜의 간극이 심연처럼 넓어져 보이는 곳은 서구의 선진 사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의미라는 사변적 물음은 사치와 풍요의 결과다."(27-8)
"막스 베버의 표현대로, 과학혁명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자연의 탈주술화'를 초래했다. 더이상 자연은 인간도 참여하는 어떤 '세계정신'의 가시적인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순전히 비인격적인 객관적 '물질'로서 법칙의 지배를 받고,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인간의 의도와는 완전히 별개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근대인들의 문제는 분명하다. 과학혁명이 초래한 자연의 탈주술화에 직면하여 우리는 지식과 지혜의 간극을 경험하고, 그 결과 우리 삶에서 의미를 빼앗기고 있다. 자연은, 실은 인간은 의미 간극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고 좋은 삶에 관한 납득할 만한 견해를 내놓는 방향으로 '재주술화' 될 수 있을까? 이 딜레마는 해결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편으로 과학적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철학이 과학주의에 희생될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 우리는 짐승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우주를 새롭게 인간화하는 방식으로 과학주의를 거부한다면 몽매주의에 이를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 우리는 광인이 된다."(31-2)
"이런 논의가 대륙철학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여러분은 충분히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나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짐승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광인으로 바꾸겠다고 위협하는 이 딜레마를 오늘날 철학이 철저하게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의미는 지혜라는 물음, 그리고 이와 연관된 삶의 의미라는 물음을 적어도 철학 활동의 중심 가까이로 이동시켜야 하고, 무관심하거나 당혹스러워하거나 심지어 경멸하는 태도로 이 물음들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륙철학이라 불리는 철학의 주된 호소력은 지식과 지혜, 철학적 진리와 실존적 의미를 통합하려고, 적어도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한다는 데 있다." "그러니 지식과 지혜 사이 간극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을 구별하는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말해두자. 쟁점은 이것이 아니다. 이 책 전반에 걸친 나의 요지는 그 간극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모든' 철학함의 필요조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32, 35)
2 대륙철학의 기원: 칸트에서 독일 관념론에 이른 경로
# 대륙철학의 핵심적 운동들
1.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그 여파 (피히테, 셸링, 헤겔, 슐레겔과 노발리스, 슐라이어마허, 쇼펜하우어)
2. 형이상학 비판과 '의심의 대가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베르크손)
3. 독일어권 현상학과 실존철학 (후설, 막스 셸러, 카를 야스퍼스, 하이데거)
4. 프랑스 현상학, 헤겔주의, 반(反)헤겔주의 (코제브,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바타유, 보부아르)
5. 해석학 (딜타이, 가다머, 리쾨르)
6.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카치, 벤야민,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7. 프랑스 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 라캉, 알튀세르), 포스트구조주의(푸코, 데리다,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리오타르, 보드리야르), 페미니즘(이리가레, 크리스테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차이는 대부분 그야말로 칸트를 '어떻게' 읽는지, 그리고 칸트를 '얼마나 많이' 읽는지에 달려 있다. 제1비판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보통 초월론적 연역이라는 논증의 성공에 관심을 둔다. 이 논증에서 칸트는 우리가 어떻게든 대상을 경험하려면 자신이 말하는 '오성의 범주들'의 작용을 전제해야 하고, 따라서 인식하는 인간의 주관, 즉 지각 경험의 '지독하게 윙윙거리는 혼동'을 개념 아래 통일하는 주관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요컨대 칸트가 말한 대로 〈대상이 개념에 합치하는 것이지 개념이 대상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적 세계는 우리에게 참으로 현실적이지만, 우리가 그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설명하려면 개념 아래 직관들을 통일하는 주관을 논리적으로, 또는 칸트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초월론적으로' 전제해야만 한다." "이 관점에 의거해서 읽으면 칸트는 인식론에, 아울러 간접적으로 과학철학에 중대한 철학적 기여를 한 셈이 된다."(45-8)
"1890년부터 1920년대 말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강단 철학을 지배한 신칸트주의 학파는 십중팔구 칸트를 이렇게 읽었다. 근래까지 영미권에서 칸트를 수용하는 방식을 지배한 피터 스트로슨을 비롯한 이들도 칸트를 인식론적으로 독해했다. 그렇지만 제3비판의 야심은 사뭇 다르다. 칸트는 판단 능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오성 능력(자연에 관한 인식에 관심을 두는 인식론의 영역)과 이성 능력(자유에 관심을 두는 윤리학의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시도한다. 판단은 자연 영역과 자유 영역 사이에서 매개자가 될 것이고, 비판철학의 요소들을 하나의 체계로 조화시킬 것이다. 이 경로를 따라간다면, 칸트 철학의 뜨거운 쟁점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관계, 자연과 자유의 관계의 타당성이 되거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된다. 독일 관념론에 속하는 피히테와 셸링, 헤겔과 초기 독일 낭만주의에 속하는 슐레겔과 노발리스는 바로 이 경로를 따라갔다. 주장하건대, 이 시기부터 대륙철학은 줄곧 이 경로를 따라갔다."(48)
"하만은 1784년에 쓴 「이성의 순수주의에 대한 메타비판」에서 형식주의를 이유로, 즉 인식의 형식적 성격을 과대평가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이성과 경험이, 선험적인 것과 후험적인 것이 분리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이유로 칸트를 비판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일련의 잘못된 이원론(형식 대 내용, 감성 대 오성, 이성 대 경험, 자연 대 자유, 순수한 것 대 실천적인 것 등)으로 세분되며, 실천이성의 우위는 추상적 의무의 공허한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하만은 후대에 전개된 철학적 국면인 언어적 전회까지 신통하게 예측이라도 한 듯이, 이성과 경험의 분리, 또는 형식과 내용의 분리는 불가능하며, 그 이유는 당연히 이성과 경험의 혼합물인 언어에 사유가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언어를 사용할 때 당신은 개념과 직관 사이의 정확히 어디에 구별선을 긋는가? 하만은 〈사유하는 능력 전체가 언어에 의존할뿐더러······ 언어는 이성이 스스로를 오해하는 과정의 중심에 있기도 하다〉고 쓴다."(50-1)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을 통해 인간의 인식이 고전적 형이상학의 사변적 대상들(신, 영혼)에 접근할 수 있음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물자체를 인식할 가능성과 자신이 자아의 '본체적' 근거라고 부른 것─현상으로 현전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가능성을 둘 다 제거하기까지 했다. 야코비의 기본 테제는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을 변경하는 피히테의 작업이 객관도 주관도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빈약한 '자아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피히테의 입장이 니힐리즘적인 이유는 자아 외부에, 또는 자아와 별개로 존재하는 대상을 전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데카르트 비판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야코비의 피히테 비판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세속화하는 합리주의를 니힐리즘 혐의로 고발한다." "신을 부정할 경우 우리는 인간을 신으로 바꾸어놓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야코비가 보기에 칸트와 피히테의 관념론에는 인간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의 복제물로 바꾸어놓으려는 유혹이 담겨 있다."(57-60)
"마이몬의 중심 논증은 초월론적 관념론의 핵심에 자리한 칸트의 오성과 감성 이원론이 너무도 철두철미한 이원론인 까닭에, 선험적 개념과 경험적 직관이 상호작용할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이는 초월론적 연역 논증이 바로 칸트가 그 연역을 수행하기 위해 상정하는 이원론 때문에 타당성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런 비판에 영향받지 않을 어떤 상위의 통일 원리였다. 피히테 철학과 독일 관념론은 이 물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피히테는 이 통일 원리를 주관의 활동 안에 위치시켰다.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은 주관의 자기반성 안에서, 자유에 관한 주관의 의식 안에서 통일되었다." "청년기 셸링이 자신의 초기 자연철학에서 표현한 통일 원리는 힘 또는 생명 개념이었다. 통일 원리는 헤겔에게는 정신 개념이었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는 의지 개념이었으며, 니체에게는 힘, 마르크스에게는 실천, 프로이트에게는 무의식, 하이데거에게는 존재였다."(65-6)
3 안경과 눈: 철학의 두 문화
"여기서는 대륙철학의 역사적 의미에 관한 두 가지 주장을 펼치고자 한다. 첫째, 대륙철학은 본질적으로 '전문적 자기기술self-description'이다. 다시 말해 대륙철학은 철학자들과 철학과들이 자기네 연구와 강의를 조직하고 지적 충성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륙철학은 철학 전문직화의 일면이다. 전문적 자기기술로서의 대륙철학 개념이 정확히 무엇에서 기원했느냐는 물음에 대한 합의가 없기는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미국이라는 맥락에서, 아울러 정도는 덜하지만 영국에서, '대륙철학'은 기존 용어들인 '현상학'이나 '현상학과 실존철학'을 대체했다." "'현상학'이 '대륙철학'으로 대체된 이유가 완전히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대륙철학은 프랑스어권의 다양한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상 운동들을 다루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들은 갈수록 현상학에서 멀어졌고 대개 현상학에 적대적이었는데, 상대적으로 라캉, 데리다, 리오타르는 적대감이 약했고, 들뢰즈와 푸코는 적대감이 강했다."(78-9)
"영어권에서 분석철학은 거의 완전한 전문적 패권을 쥐고 있으며, 현상학 같은 비분석철학은 이 패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영어권에서 대륙 사상의 수용은 대부분 철학과 밖에서─문학이론, 예술사, 사회이론, 정치이론, 문화 연구, 역사서술, 종교 연구, 인류학 등─이루어져왔는데, 이는 의미심장하고도 중요한 사실이다." "대륙철학을 둘러싼 논전이 끊임없이 격앙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두번째 주장을 해야 한다. 전문적 자기기술 개념이 대륙철학을 둘러싼 다툼을 격화하고 악화하는 이유는, 이 개념이 대륙철학의 더 오래된 '문화적' 의미를 덮어버리기 때문이고, 또 대륙철학이 영국 및 영어권과 유럽 대륙의 관계에 관한 논쟁까지 거슬러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 전통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은 '영국 경험주의', '프랑스 합리주의', '독일 형이상학'처럼 모호하고 실상을 호도하는 개념들에 담긴 정치지리학의 이데올로기적 편견들과 불가피하게 얽히게 된다."(81-2)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과 콜리지를 결합하면 당대 잉글랜드 철학 전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밀에 따르면 벤담은 위대한 〈전복자〉 혹은 〈그의 시대와 나라의 위대한 '비판적' 사상가〉다. 그런 전복적 비판은 논리 분석의 방법과 경험적 양식(良識)을 사용하여, 〈실천적 사안들〉의 진실을 캐묻기에 이른다. 밀이 보기에 벤담은 흄의 회의주의를 특히 법률과 통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한 실천 지향적 사상가다. 벤담의 훌륭한 면모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자세로 이런 비판 재능을 공익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콜리지는 사안의 진실이 아니라 의미를 캐묻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까닭에 콜리지는 두루 받아들이는 학설이나 전통을 파괴하기보다는 그런 학설과 전통의 의미를 해석학적으로 재구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격변의 강력한 적으로서 전통을 지키려는 쪽은 '콜리지주의적 대륙철학'이고, 사회적 변화와 진보의 친구로서 전통을 파괴하려는 쪽은 벤담이다."(84-6)
"밀은 진리란 전체의 어느 부분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자체를 반성함으로써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밀은 그런 적대 또는 변증법의 필요성과, 자유민주주의 정체에서 필수적인 요소인 견제와 균형을 비교한다. 경쟁적 정당 제도가 정당한 한 가지 이유는 여당의 정책과 입법을 계속해서 검토하는 것이 야당의 의무이고, 여당이 야당이 되어도 응당 그런 의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오류는 밀의 희망적인 견해에 따르면 진리의 일부를 전체로 오인하는 것이고, 헤겔의 표현에 따르면 오류에 대한 두려움을 진리에 대한 욕구의 상위에 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제는 벤담이 옳은지 콜리지가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 철학 경향이 더 큰 진리를 함께 표현하고 진리를 보기 위해 안경과 눈을 공히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파괴와 끈기 있는 해석학적 재구축을 공히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은 더 큰 문화적 전체의 반쪽들이다."(90-1)
4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비판, 실천, 해방
"대륙 전통에서 철학적 문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완성품이 아니거니와, 영원한 철학이라는 비역사적인 공상의 요소도 아니다. 이 전통에서 고전적 철학 텍스트를 읽는 일은 대학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보다는, 우리가 이제 겨우 어렵사리 알아듣기 시작한 언어를 구사하는, 먼곳에서 온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철학적 문제들은 텍스트와 맥락에 '묻어 들어가(embedded)' 있는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떨어져(distanced)' 있다. 번역과 언어, 독해, 텍스트 수용, 해석, 그리고 역사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처럼 지엽적으로 보이는 문제들이 대륙 전통에서 그토록 중요한 이유를 바로 이런 묻어 들어가 있는 동시에 떨어져 있는 성격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 대륙철학자들은 흔히 '철학'보다는 '문학'을 하고 있다는 당혹스러운 혐의를 받곤 한다. 이런 혐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철학자의 명제와 경험의 관계가 마치 어떤 무매개적이고 투명한 관계이기를 바라는 것이다."(109-11)
"대부분의 분석철학과 달리 대부분의 대륙철학은 철학과 철학사를 구별하는 입장에 타당성이 있음을 부인할 것이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전통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이 대륙철학에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잠바티스타 비코와 후대의 장 자크 루소를 두드러진 예외로 치면, 역사 문제는 바로 이 전통에서 하만과 헤르더,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겔의 작업을 통해 철학적 중심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륙 전통의 장점은 실천으로서의 철학의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성격과 이 실천에 관여하는 철학자의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추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보통 '역사성'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통찰이다. 이 역사성에 대한 통찰로 말미암아,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심오한 철학적 물음들은 더이상 사변적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주제들(신, 자유, 불멸성)이라고 정당하게 불릴 수 없게 되었다─칸트는 이 주제들이 도덕적으로는 옹호할 수 있을지언정 인식론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114-5)
"철학(그리고 철학자들)의 본질적 역사성에 관한 인식은 두 가지 문제를 함축한다. ①인간 주체의 근본적인 유한성. 즉 인간 경험 외부에 신과 같은, 우리의 경험을 특징짓고 판정하는 견지나 준거점은 없다. 또는 설령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관해 전혀 알 수 없다. ②인간 경험의 철저히 우연적인 또는 피조적(被造的)인 성격. 다시 말해 인간 경험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우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며, 이렇게 만들어지는 환경은 그 정의상 우연적이다." "인간 경험이 우연적인 창조라면, 그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 이는 철학이나 예술, 시, 사고(思考)의 변혁적 실천, 또는 현재를 구원할 수 있는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대륙사상을 관통하고 하버마스나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을 계속해서 고취하는 이 요구는 곧 현재의 요건으로부터, 자유롭게 바꿀 여지가 없는 그 여건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비판과 해방은 실 한 가닥의 양쪽 끝이다."(115-7)
"대체로 대륙 전통에서 철학은 현재를 비판하고 현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반성적 자각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위기를 부르주아의 속물근성에 물든 세계에서 신앙의 위기로 표현하든(키르케고르), 유럽 학문의 위기(후설), 인간과학의 위기(푸코), 니힐리즘의 위기(니체), 존재의 망각의 위기(하이데거), 부르주아-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마르크스), 도구적 이성의 헤게모니와 자연 지배의 위기(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로 표현하든 다른 어떤 위기로 표현하든 말이다." "이 비판은 기존 실천에 대한 비판이며, 그 실천이 정당하거나 자유롭지 못하다고, 진실되거나 온당치 못하다고 느낀다. 이 비판은 기존과는 다른 개인적 또는 집단적 실천을 지향하는 해방, 인간의 삶을 생각하는 다른 방식의 해방을 목표로 삼는다. 그 목표는 니체가 말한 고독한 귀족의 삶일 수도 있고, 마르크스가 구상한 공산주의 사회일 수도, 들뢰즈와 가타리가 기술한 복수의 생성(~되기)일 수도, 또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130-2)
5 무엇을 할 것인가: 니힐리즘 대응법
"니체의 니힐리즘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한 구절은 그의 유고 제1권 『힘에의 의지』에서 찾을 수 있다. 니체에게 니힐리즘이란 다음을 의미한다. 〈최고 가치들이 스스로를 탈가치화하는 것, 목표가 결여되어 있으며,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스스로를 탈가치화하는〉이라는 재귀동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최고 가치들이 비판을 통해 탈가치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니체는 최고 가치들이 '스스로를' 탈가치화하는 일이 그것들의 전개 과정에 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니힐리즘은 의미의 질서의 붕괴다. 그렇게 되면 칸트 이전 형이상학에서 가치의 초월론적 원천으로 상정했던 모든 것이 무효가 되고 공허해지고, 삶의 의미를 걸어둘 인식론적 갈고리가 사라진다. 삶의 의미를 옹호하는 모든 초월론적 주장들은 그저 가치들로 격하되고 그 가치들은 믿기 어렵게 되어 니체가 말한 '가치 전환'이나 '재평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140-1)
"니체의 니힐리즘 진단은 니힐리즘을 극복해야 한다는 요구를 동반한다. 니체의 저술을 규정하는 것은 니힐리즘에 대한 저항이다. 이런 이유로 니체는 절망에 빠지거나 어떤 새로운 신을 발명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도 이 생성의 세계를 견디게 해줄 새로운 범주들과 새로운 가치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되풀이해 역설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니체의 저술에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영원회귀' 학설의 기능, 즉 〈의미도 목적도 없음에도 무(無)로의 결말 없이 불가피하게 회귀하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관한 학설의 기능이다. 니체는 영원회귀 개념으로 범신론의 반(反)테재를 시도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범신론이 만물에 신이 임재한다는 사상이라면, 영원회귀는 시종일관 신이 없는 우주를 생각하려는 시도다. 니체에게 무신론은 단순한 사실 진술이 아니다. 무신론은 인간이 굽실거리곤 하는 우상들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는 상당한 노력의 귀결이기도 하다."(147-8)
"칸트 윤리학의 토대는 순수하고 숭고한 의무이며, 이 의무는 어떠한 경험적 관심에도 근거할 수 없고, 행복과 같은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볼 수도 없다. 덕의 보상은 덕 그 자체여야 한다. 그럼에도 칸트의 윤리학은 순수한 실천이성의 요청으로서 신과 영혼불멸을 포함한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도덕적 행위와 먼 장래에 행복을 누리며 덕을 보상받을 것이라는 전망은 연결될 여지가 남아 있다. 니체는 칸트의 이런 사상을 칸트보다 더 칸트답게 바꾼다. 니체가 보기에 신은 없고, 영혼불멸 관념은 고약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으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가 없는 우주, 스스로를 끝없이 되풀이할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보장이 없는 우주에 존재하는 우리를 상상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상을 감당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이런 사태를 알면서도 '긍정'할 수 있다면, 기독교 도덕적 세계 해석이 함축하는 니힐리즘을 마침내 극복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148)
"물론 철학에서 니힐리즘과의 대결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니체, 하이데거, 아도르노처럼 각양각색인 사상가들이 인정한 대로, 철학이 다름 아닌 니힐리즘을 만들어내는 힘들과 공모해왔음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니체가 보기에 철학은 니힐리즘적이다." "그렇다면 니힐리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대체로 대륙철학은 근대의 위기에 대응할 수 있을 법한 비철학적 담론과 실천을 모색한다. 니체는 고대 아티카 희랍인들의 비극적 사유에서, 하이데거는 시적(詩的) 창조에 관한 명상적 숙고에서, 아도르노는 하이모더니즘(high modernism, 모더니즘의 한 형식으로 과학과 기술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특징으로 한다) 예술의 자율성에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에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진료에서 위기에 대응할 자원을 구한다. 여기서 요점은 대부분의 대륙철학이 예술이든 시든 정신분석이든 정치든 경제든 비철학과의 관계에 관심을 쏟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니힐리즘이라는 문제들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150-1)
6 오해에 관한 사례연구: 하이데거와 카르나프
"빈 학단의 기본적인 지향은 오토 노이라트의 '형이상학에서 자유로운 과학'이라는 문구로 표현할 수 있다. 철학은 과학의 조수로서 경험과학의 명제와 방법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작업만 한다. 나아가 빈 학단은 철학적 테제를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경험과학의 명제를 규명하고 전통 형이상학의 주장을 비판한다는 의미에서, 철학을 전혀 실천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노이라트는 이렇게 썼다. 〈단일한 경험과학에 속하는 다양한 분야들의 옆쪽이나 위쪽에 자리하는 기본적 또는 보편적 학문으로서의 철학 따위는 없다.〉" "이 과학적 세계 파악과의 관계에서 형이상학의 명제들은 거짓이라기보다는 그저 무의미한 편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그 명제들에는 인지할 내용이 없다. 그 명제들은 정당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감정을 표현할 적절한 수단은 철학이 아니라 예술이나 음악이나 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카르나프는 〈형이상학자들은 음악 재능이 없는 음악가들〉이라고 잘라 말했다."(164-5)
"하이데거는 철학을 이렇게 파악하는 입장과 극명히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학문/과학에 맞서 형이상학을 옹호하고자 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학문은 형이상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 바탕이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무(無)다. 하이데거는 그렇다면 〈무는 어떠한가?〉라고 삐딱하게 묻는다. 하이데거의 주장은, 학문은 이 무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자 하지 않는 반면에 제대로 된 형이상학은 무엇보다 이 무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카르나프의 주된 논점은 논리적 일관성을 갖춘 언어에서는 그 물음(〈무는 어떠한가?)〉이 형성될 수조차 없다는 것인데, 그 물음이 부정(否定)을 일종의 그럴싸한 명사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그런 물음이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형이상학이 일상언어에 내재하는 모호한 측면들을 양분으로 삼는다는 것, 논리적 개혁을 통해 형이상학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러한 논리적 언어 개혁은 빈 학단의 초기 프로그램의 일부였다."(165-7)
"하이데거의 논점은 지성적인 방식 외에 사물들을 생각하는 다른 방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물들을 이론적으로 현시하기에 앞서 그가 말하는 '기분'─아리스토텔레스의 파토스(pathos) 개념의 번역어─안에서 정서적 혹은 감정적 개시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그런 기분을─우울하든 신나든 그냥 무심하든간에─한낱 느낌으로, 이성 일색인 우리의 정신생활에 다른 색을 입히는 일종의 심리적 채색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기분은 인간이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그렇다면 무에 관한 물음은 이제 〈무를 드러내 보이는 기분이 있는가?〉가 된다. 하이데거는 그렇다고 답하며, 이것이 불안, 독일어로 앙스트(Angst)의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보기에 불안을 경험하는 가운데 개시되는 무는 존재의 의미에 관한 형이상학 '고유'의 물음을 제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러한 탐구는 빈 학단이 주창한 과학적 세계 파악으로 환원할 수 없다."(167-9)
7 과학주의 대 몽매주의: 철학의 전통적인 곤경 피하기
"대륙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에서 과학주의를 채택할 경우 철학의 비판적·해방적 기능을 포착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과학적 세계 파악과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이 공모할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과학주의는 세계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알아채는 데 근본적으로 실패했다. 이런 소외는 여러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고립된 인간 주체와 대립하는 객체의 영역,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영역으로 세계를 변모시키는 식일 수도 있고, 무심하게 조사하거나 거래할 수 있는 공허한 상품으로 객체를 변모시키는 식일 수도 있다. 이들의 신념은 자연과학의 모델이 철학 방법의 모델을 제공할 수도 없거니와 제공해서도 안 되고, 인간이 세계에 접근하는 일차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방편을 자연과학이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신념을 대륙사상가들 전반에 걸쳐서, 이를테면 베르그손, 후설, 하이데거에게서, 아울러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교제한 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190-1)
"그렇지만 과학주의에 대한 정당한 우려는 자칫 반과학적 태도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해 몽매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이제 나는 과학주의를 견제하는 동시에 몽매주의로 빠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 현상학을 옹호함으로써 그 중심에 관해 생각해보려 한다. 메를로퐁티는 세계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이론적 태도의 기반을 이루는 인간 경험의 〈전(前)이론적 층을 드러내는 것〉이 현상학의 과제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현상학 '하기'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경험의 전이론적 층을 드러내고, 이 경험 층을 그 자체로 엄밀하게, 그리고 타당성의 기준에 부합하게 기술할 적절한 양식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이 환경세계(독일어 Umwelt)는 과학의 가치중립적인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인지적·윤리적·심미적 가치들에 이미 물들어 있는 세계다. 다시 말해 과학주의 또는 후설이 말한 객관주의는 학문적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인 '생활세계'의 현상을 간과한다."(193-7)
"현상학 내에서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 등을 운운하는 어떤 신비적 견해의 이름으로 과학적 연구의 결과를 논박하거나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 비판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의식하는 일차적인 방편 또는 가장 유의미한 방편을 과학이 제공하지 않는다고 역설할 뿐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론적 지식은 실천적 관심에 뿌리박고 있다. 더욱이 현상학적 전학문은 그런 실천들에 필요한 것이 자연과학의 인과적 가설이나 사이비 과학의 인과적으로 들리는 설명이 아니라 해석적 규명 또는 해석학임을 보여준다. 현상학이 제공하는 것은 사람과 사물,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를 규명하는 재(再)기술이다. 그렇기에 현상학은 어떤 위대한 발견을 내놓기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자연과학의 이론적 태도를 취할 경우 은폐되는 것들을 상기시켜준다. 현상학은 '일종의 상기'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평범한 생활이라는 섬세한 그물망을 구성하는 배경의 실천들과 일과들을 기억하게 해준다."(197-200)
8 감히 알고자 하라: 이론의 고갈과 철학의 장래성
"칸트는 계몽주의의 기획을 〈감히 알고자 하라〉라는 말로 요약했다. 이 표현을 〈너 스스로 생각하고자 하라〉로 자유롭게 바꾸어서 철학의 장래성, 실현되기를 소망하는 철학의 장래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철학은 특정한 문화의 생활에서, 한 문화가 자기 자신과, 그리고 다른 문화들과 대화하는 방식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철학은 특수한 맥락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분석할 때,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처럼 가장 일반적인 형식의 물음으로 특정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때, 비판적 반성으로 기능할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바람은 그러한 물음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고찰이 탐구와 논증을 통해 교육적·해방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스탠리 카벨의 말마따나 철학은 성인(成人) 교육이다. 그러나 이를 새로운 견해로 보기는 어려운데, 소크라테스라면 철학에 대한 이런 기술에 놀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