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러일전쟁 일본 근현대사 3
하라다 게이이치 지음, 최석완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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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통상항해조약(1894.7.16)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1885)에서 주장하던 주요 목표 중 하나를 이루어냈다. 그것은 "자국 영토를 법으로 지배하는 근대 국가의 주권을 제한"하던 치외법권의 철폐이다. 치외법권의 철폐는 일본이 "구미와 대등한 주권 국가로 승인되었음을 의미한다."(73) 이로써 일본은 서구 열강을 따라잡는 행보를 맹렬하게 진행시킨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은 제국의회에서 열린 시정 방침 연설(1890.12.6)에서 '주권선'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으로 ‘이익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식민지 대만과 세력권 조선을 발판으로 이후의 50년 동안을 군사력 확대와 전쟁으로 채색한다. 그 전환점이 청일전쟁이다."(79)


1894년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벌어지자 중의원의 내각 탄핵 상주안에 시달리던 이토 내각은 '이익선'에서 벌어진 외부 사태를 구실로 중의원 해산과 조선 파병을 결의하였다. 이토의 상주를 받은 천황은 "오야마 이와오 육상 등에게 '조선에 거류 중인 우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병대를 파견하고자 한다'는 칙어를 내렸다."(85) 그러나 6월 11일 전주화약이 성립되어 농민군이 조기에 해산하자, 무쓰 외상은  "만약 무슨 일도 하지 않은 채 또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끝내 그곳에서 허무하게 귀국하게 된다면, 몹시 체면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책이 달성되지 못한 것이라면서, 한성에 진출한 군대가 '무슨 일'인가를 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91)


이와 함께, 6월 15일 각의는 "1) 조선의 내정을 청일이 공동으로 개량하기 위해 양국에서 상설위원을 파견하여 지도한다. 2) 청국이 거부한다면 일본이 단독으로 개혁을 지원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우고 조선 문제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다. "공사관 및 거류민의 보호라는 당초의 파병 목적을 변경하여, 청일 간의 교섭에 새로운 과제를 끼워 넣는 작전으로 전환한 것이다."(92) 오토와 스기무라는 조선정부로부터 "조선은 자주국이며, 청군은 조선의 요청으로 온 원병이므로 퇴거를 요구할 수 없다"는 회답이 올 경우에 자주국 조선에 청군이 간섭하는 것은 부당한 행위라는 구실로 개전한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93)


※ 청일 전쟁의 전개 양상

한성전신국 절단 및 경복궁 공격(1894.7.23) - 풍도 앞바다 해전에서 청나라 함대 격파(7.25) - 청일 양국 선전포고(8.1) - 평양함락(9.16) - 일본의 황해 해전 완승(9.17) - 압록강 너머로 진출(10.25) - 여순 공략 개시(11.21) - 산동성 공략 및 위해위 요새 점령(1895.2.2) - 북양해군 항복(2.12) - 시모노세키 조약 조인(4.17) [조약 내용 : 조선 독립 승인 / 요동반도와 대만 할양 / 은 2억량 배상]


일본의 침략 야욕을 목도한 동학 농민군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맹주로 삼아 10월 9일 2차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 일본은 1894년 11월부터 다음 해 4월 초순까지 동학 농민군을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탄압 부대의 주력은 11월 초순에 도착한 후비 보병 독립 제19대대 등 2,700명의 일본군이었으며, 여기에 2,800명의 조선 정부군과 각지의 양반 사족 및 토호 등이 조직한 반동적인 민보군이 가담하였다." 촌 구석구석까지 몰아붙이는 섬멸 작전에 맞서, "5개월 동안 농민군이 치른 전투는 46차례이고, 농민군 참가 인원은 연 13만 4,750명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청일전쟁이었다."(103)


"청일전쟁은 청의 군사력이 약체라는 사실을 세계에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이 아시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결국, "19세기 말 이후에 찾아온 아시아의 위기는 청일전쟁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122) 구미 열강이 사태 수습에 개입하자, 일본 정부와 군부는 청일전쟁 후의 정세를 감안하여, 남진론의 거점인 대만을 열강에게 넘겨주어선 안 된다는 합의를 도출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말레이반도와 남양제도 진출의 근거지인 "대만을 사전 점령하고 청국의 할양을 요구"하는 화평조약을 모색한다. "마쓰카타는 이 의견서를 '천하 유식자의 공론'이라 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도 '동감·동정'의 뜻을 전하였다."(132-3)


일본은 "7만 6천 명의 병력(군인 4만 9,835명, 일본인 군부 2만 6,216명)을 투입하여, 일본군 사상자 5,320명(전사자 164명, 전병사자 4,642명, 부상자 514명)을 내고, 중국인 병사와 주민 1만 4천 명을 살해한 끝에 대만을 획득하였다."(138) 진정으로 대만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고자 했던 이사와 슈지(대만총독부 초대 학무부장)는 대만인들의 '정신을 정복'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사와의 구상은 본국에 재수입되어, 이념으로서의 '국어' 개념을 만들어낸다. 우에다 가즈토시는 "일본 전국에서 통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는 일"을 당면 과제로 삼는 동시에 "조선인, 미국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알아야 할 '동양 전체의 보통어'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156)


"청일전쟁 후 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은 무역과 금융 면에서 서구와 미국에 대해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거대한 구매자를 제공했다는 의미도 갖는다. 이에 따라 구미는 1873년 이래의 대大불황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독일(1893년~), 영국(1895년~), 미국(1897년~)은 차례로 호황을 맞이하였다. 또 일본이 영국에 대량 주문한 군함과 대포는 영국에서의 동형함 제조 비용을 낮추었고, 실험 연구비도 일본에 전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청일전쟁 배상금의 46%에 해당하는 1,753만 파운드가 런던에서 해외 지불 기금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해외 군비 확장비로 쓰였다. 청일전쟁의 열매를 가장 잘 맛본 것은 대영제국이었다."(165-6)


청일전쟁 배상금에 시달리던 청국은 "1895년 7월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 차관을 받아들였다(36년간 변제). 이어서 다음 해에는 영국과 독일도 1,600만 파운드의 공동 차관을 제공했다(36년간 변제). 재정 파탄에 이르게 된 청국은 일본에 갚아야 할 2억량의 배상금 때문에 여러 열강의 금융에 의존하는 구조로 변해 갔다."(244) 한편, 러시아 정부는 의화단 세력과의 충돌을 구실로 삼아, "1900년 7월 만주 파병을 개시하고 10월에는 전 만주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 "한국 문제만을 교섭해 온 방침을 버리고, 만주 문제와 한국 문제를 한 세트로 만들어(滿韓不可分) 서로가 만주와 한국을 완전히 확보한다는(滿韓交換) 새로운 방침"을 수립한다.(253)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고, 만주의 요양, 사하, 봉천 등지에서 벌어진 육상전투는 일본의 우세로 끝났지만 대규모 병력 손실이 불가피했다. 봉천회전에서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할 여력이 없던 일본 정부는 지구전이 될 "러일전쟁을 앞으로도 수행하기 위한 근거지 및 병참지로서 한국을 이용하기 위하여, 내정까지도 장악하는 보호국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277) 마침내 1905년 5월 동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어 러시아로부터 사할린을 할양 받고, 조선에 매진한다. 3차에 걸친 한일협약을 통해 조선의 내정,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1909.10)을 계기로 병합을 가속화하고 마침내 한국병합조약(1910.8.22)을 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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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과 헌법 일본 근현대사 2
마키하라 노리오 지음, 박지영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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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880년대에 민선의원 설립과 입헌정체를 주장한 자유민권운동에서 '민권'이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말한다.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은 "정부에게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한편, 민중의 '객분客分' 의식을 불식시켜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환기"시키고자 했다.(45) 후쿠자와 유키치가 "평등을 역설하고 학문을 장려"한 것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지닌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41) 당시는 메이지 정부와 민권파, 그리고 민중의 3극 대립 상황이었는데, "민권파와 정부는 대립하면서도 '근대국가의 건설' '민중의 국민화'라는 큰 틀을 공유했고, 민중과 민권파는 지향하는 방향은 달랐지만 '반정부'라는 점에서 뜻"을 같이 했다.(50-1)


메이지 정부 내에서는 '천황의 친정 여부, 재정 및 헌법 문제'가 핵심 사안이었다. 이와쿠라는 천황 즉위시 원로원에서 "국헌을 준수한다는 서약을 하도록" (2장 6조) 규정한 1876년 헌법 초안이 헌법을 천황보다 상위에 둔다고 지적하고, 각 참의들에게 '우리 국체(國體)'에 걸맞는 의견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영국식 입헌정치를 도입하려던 오쿠마 시게노부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세력에게 밀려 천황에게 파면당하는 '메이지 14년 정변'이 일어나고, 곧이어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농촌이 심각한 불경기에 빠지자, 정당 운동은 급속도로 쇠퇴한다. 현의회도 지역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하면서 "국회 개설 후 정치가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예비한다.(82-3)


천황 친정親政이 "천황 개인의 의사나 자질로 인해 정치가 좌우되고, 나아가 천황이 정치 책임을 지게 되는 빌미"가 된다고 생각하던 이토는 1885년 12월, "신분제와 태정관제를 폐지하고, 내각 총리대신과 9명의 국무대신으로 구성된 내각제를 발족시켰다."(200) 아울러 전국에 걸쳐 천황 순행을 실시하고, 궁중의례 등 천황과 관련된 전통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세신궁은 "천황의 조상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모시는 성지로 탈바꿈"(220)했고, 야스쿠니 신사도 재정비되었다. 이처럼 천황제는 "서양 문명과 입헌제, 의회제에 대항하기 위해 서구의 기준에 따르면서도 독자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전통'이었다."(223)


세이난 전쟁 이후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민중이 몸으로 느끼는 경제관념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이제 사람들은 "상업의 자유나 계약이 민중의 생활보다도 우선한다는 것, 윗사람의 도움이나 타인의 호의를 바라지 말고 자기와 가족의 힘만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곤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왔음을 실감하였다."(107) 1880년대 후반에는 "집단 내에서 명령받지 않더라도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규율을 지키며 노동하는 사람만이 근면한 사람이라는 문명국 표준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가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도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근대'의 막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119)


※ 세이난 전쟁 :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1873년 조선사절단 파견을 둘러싼 집권세력 다툼에서 이와쿠라 도모미 등에게 밀려난 뒤, 사족 세력을 모아 1877년 반정부 투쟁에 나섰으나, 정부군에게 진압된 사건. 이후 반정부 운동이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문명국을 동경하고 '탈아脫亞'의 길을 지향하던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서구 문명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지역은 미개하고 야만스러우며, 대등한 상대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대두되었다. 오히려 "야만스럽고 미개한 사람들을 '문명'화시키는 것이 서구인의 역사적 사명이고, 식민지화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따라서 '영토, 권력, 국민'이라는 근대국가의 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한 지역은 만국공법에 따라 '무주지無主地'로 간주하며, "최초로 점유한 자가 소유권을 가진다는 '선점先占'의 논리가 국가 차원에서도 적용되어 식민지 지배가 정당화되었다."(124)


1875년 체결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은 가라후토(사할린)를 러시아령으로, 지시마 열도(쿠릴 열도)를 일본령으로 정했다. 이 조약은 러·일 양국의 국민은 계속 거주할 수 있지만, '원주민은 현재 살고 있는 땅에 거주할 권리, 또 그대로 현재의 영주의 신민이 될 권리가 없다.'(조약 부록 제4조)고 규정하여, 3년 이내에 국적을 선택하고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126)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 조일수호조규(1876.2) 1조 역시 "중국의 조공 체계로부터 조선을 분리시키려는 의도"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다.(143)


근대적 소유권은 "독립적인 개인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는 자유권이나 참정권의 기초가 되었으며, 동시에 토지와 주민을 국경선으로 에워싸고 배타적인 국가 주권을 근거로 내정 간섭을 거부하는 독립 국가의 논리"로 발전했다. 소유와 자유가 동일시되는 논리 하에서 자유민권운동은 "민권과 국권을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국민주의 운동"으로 변모되었고, "문명화와 국민화를 강요"당한 대다수의 본토 민중들은 내국 식민지인의 처지로 전락했다. '욕망'의 시대인 근대는 이 과정이 "누군가로부터 강요당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의지, 자주적인 선택"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면서, 제도 수립과 정신 개조를 통해 국민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다.(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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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6
박훈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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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는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력과 방대한 관료제를 갖춘 중앙집권 정권이었다. 또한 막부는 전국 쌀 생산량의 25%를 차지하고, 경제 요충지인 간토와 기나이 지역, 특히 오사카를 장악했으며, 나가사키 직할령의 해외무역과 전국의 주요 광산을 운영했다. 막부는 "광산 지배권을 바탕으로 화폐를 발행하였는데 일본의 중앙정부가 통일 화폐를 발행한 것은 고대 이래 수백 년 만이었다. 그만큼 도쿠가와 막부의 전국 지배권이 단단했던 것이며 중앙정부로서의 신용이 높았다는 얘기다." 이 안정성은 나중에 막부에 독이 되는데, 19세기 막부 재정이 악화될 때 과감한 개혁을 실시한 번들과 달리, 막부는 "금화, 은화의 순도를 낮추는 안이한 방식"을 되풀이했다.(21)


"각 번이 막부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막부는 번의 행정권, 징세권, 경찰권을 인정해 주었다. 이 때문에 각 번은 막부의 강한 규제를 받기는 하지만 흡사 별개의 국가 같은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도쿠가와 체제를 '복합국가'라고 말하기도 한다."(32) 번들 간에는 경쟁 의식이 있었는데, 19세기 내우외환의 시기에 접어들자, "생존을 위한 부국강병의 경쟁, 개혁의 경쟁"이 시작된다. 복수의 정치체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는 점이 대내외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또한 번이 "중간 단체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일본은 대대적인 변혁 과정에서도 사회질서가 파국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치안이 유지될 수 있었다."(34-5)


18세기 후반 이래 급속히 확산된 유학은 "쇼군 권력의 근거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요구"하였다. 막부는 여기에 "천황에게서 대권을 위임받아 전국을 통치"한다는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을 내놓는다. 막부가 정당성의 원천을 "독자적으로 창출해 내지 못하고 천황에게서 구한 논리는 양날의 칼이었다." 실제로 19세기 들어 막부는 스스로 '대정'을 '봉환'하게 되는데, 이것이 "1867년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행한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다."(37) 이러한 변혁은 개항 이후 외국 무역이 시작되면서, 생필품 물가의 급등으로 치명타를 입은 "하급 사무라이와 도시 빈민"들이 대거 혁명의 대열에 뛰어든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41)


일본이 서양 문물을 신속히 수용하게 된 것은 1780년대 "북쪽의 에조치, 즉 지금의 사할린과 훗카이도 일대"에 러시아인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일본은 약 200년간 군사적 위기 상황이 전무했는데, 서양의 발달된 항해술과 선박 제조 능력을 목도하면서, "일본의 국방 강화와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들의 주장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게 된다."(53) 러시아가 에조치를 점령하기 전에 일본이 "직접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18세기 말부터 제기되었고, 19세기 전반 서양인들이 류큐에 출몰하자 류큐에 대한 지배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아져 갔다. 훗날 메이지 정부가 오키나와와 훗카이도를 각각 '남북의 자물쇠'로 삼은 전략은 이때 이미 마련된 것이다."(68)


"일본 지식인들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하고 있는 현상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결국 세계는 몇몇 강대국의 권역으로 구분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좋든 싫든 따라갈 수밖에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보았다. 따라서 식민지가 되기 싫으면 스스로 강대국이 되어 하나의 권역을 구축"해야만 했다. 특히 "무주지(無主地, 국제법상 어느 국가의 영토로도 되어 있지 않은 지역)의 경우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다른 국가가 차지할 것이라는 인식이 해외 팽창론을 더욱 부채질했다."(83-4) 막부 내에 쇄국파가 우세한 상황에서, 아편전쟁의 발발과 참담한 결과는 부국강병파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양이론자들은 부국강병을 국가 목표로 삼는 것을 혐오했지만, 일본 양이론자들의 목표는 적극적 개국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부국강병이었다." 장래에 도래할 개국을 위해 일본은 전면 쇄신을 단행해야 했지만, 그들이 보기에 "당시 일본은 태평의 잠에 취해 깨어날 줄 몰랐고, 막부는 태평을 유지하려고 '굴욕 외교'를 거듭했다." 양이론자들은 내정개혁을 위해 '양이의 수단화'를 주장했다. 여기에는 "대선(大船) 제조 금지의 해제, 참근교대의 완화, 농병제(農兵制) 채용(당시는 사무라이만이 군인이 될 수 있었다)" 등이 있었으며, 그들이 추구한 "가장 급진적인 개혁은 천황 친정(天皇 親政)이었다."(97)


일찍이 유학 등 학문이 발달했던 미토 번은 "천황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한 <대일본사(大日本史)>를 편찬하는 등 존왕(尊王)의 풍조가 강했다. 19세기 들어 내우외환이 심각해지자, 천황을 일본이라는 국가의 핵심에 위치시키고 그 존재를 신성시하는 국체(國體)라는 관념"이 만들어지는데, 이를 미토학(水戶學)이라고 한다. 미토 번은 정치적 야심이 큰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의 메카"가 된다.(120-1) 여기에 막부의 핵심 세력인 후다이번들이 "탁월한 로비 능력으로 막부의 재정 원조를 받아내 안일하게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도자마 번 같은 신흥 세력들은 번정 개혁(藩政 改革)을 대대적으로 벌여나갔다.


유학의 확산이 사무라이들을 정치화했다는 점도 중요한 개혁 동인이 되었다. 그들은 "점점 국가 대사, 천하 대사에 관심을 갖고 발언"하면서, "단순한 군인도 서리도 아닌 사(士)가 되어 갔다(사무라이의 '사화士化')." 이들은 무사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여전히 칼을 차고 무를 존중했지만, "학적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정치조직을 만들고(학당學黨), 상서를 이용하여 정치투쟁을 벌였다. 또 자신을 천하 공치(天下 共治)의 담당자로 여기고 군주의 친정(親政)을 요구했다." 뜻밖에도 이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19세기에 무인(武人)의 나라 일본에서 출현하여, 병영국가 도쿠가와 체제를 동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135-6)


"막번 체제의 근간은 월소(越訴, 직속상관을 뛰어넘어 그 윗선에 곧바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와 도당(徒黨)의 금지이다." 사대부적 정치 문화를 수용한 사무라이들은 "상서를 통해 월소의 금지를, 당파를 통해 도당의 금지를 무력화"하면서, 가신단 내의 엄격한 서열을 뒤흔들었다.(180) 18세기 후반부터 각 번 정부들은 "재정 위기와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것을 번사(藩士)들 뿐 아니라 민중에게까지 요구했다. 이에 따라 일반 사무라이와 상층 영민(領民)들이 봇물같이 의견을 내놓았다." 과거제가 없던 일본에서 상서는 인재 발탁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이것은 "막부 정치에 도자마 번, 신번 등의 세력이 간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96-7)


18세기 말부터 서서히 진행된 정치적·사상적 면에서의 일본 사회의 유학화는 "도쿠가와 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 직후 정점을 맞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전성기는 짧았다. 대외적 위기감 속에서, 특히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 쿠데타 이후 일본 사회는 급속히 서구화, 즉 문명개화·부국강병 노선으로 달려갔다."(217) 학적 네트워크에 의존한 당파 정치는 "자신을 군자당으로 인정하고 상대 당을 소인당으로 매도"하던 구양수 식의 붕당론 앞에서 사회적 낭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상 흐름 속에서 일본은 메이지 초기 정당 무용론과 '올바른 유일 정당론(公黨)', 군국주의 일본의 대정익찬회(大政翼讚會) 등 군주독재 체제를 옹호하고 보완하는 길로 들어선다.(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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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라스 일본사 - 역사읽기, 이제는 지도다! 아틀라스 역사 시리즈 4
일본사학회 지음 / 사계절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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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 조몬繩文 문화 (기원전 1만 년 ~ 기원전 3세기)

오모리 유적에서 최초로 '줄무늬(繩文)가 있는 그릇'을 발견하여 이것을 '조몬식 토기'로 명명

  - 특징 : '마제석기, 토기, 농경'이라는 신석기시대 일반의 특징과 달리 장기간 농경문화 결여


▷ 야요이 시대 (기원전 3세기 ~ 서기 3세기)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야요이식 토기가 등장

  - 특징 : 농경 개시와 금속기 사용 (자생적인 변화가 아니라 외부(한반도)에서 이식), 계급사회 출현으로 정치 공동체 '구니國' 형성


▷ 야마타이 국

여왕 히미코가 대부 난쇼마이를 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 (239년) → 위 명제가 '친위왜왕親魏倭王' 칭호를 내리면서 중국의 책봉체제 편입 시도

  - 한반도와 교류 : 철 자원 확보 목적


▷ 야마토 정권 (4세기 초)

긴카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게이타이 천황대에 호족 세력을 제압하고 세습 왕조 건설


▷ 소가씨 정권 (~ 645년)

게이타이 천황 사후 모노노베 씨와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고, 스이코 천황과 쇼토쿠 태자 옹립

  - 특징 : 불교 중심의 아스카 문화


▷ 덴무(673~686)·지토(690~697) 천황

진신(壬申)의 난을 통해 야마토 호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하고 정권 장악(덴무)

  - 특징 : 천황을 '아라히토가미(現神人)'로 신격화하고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변경, 율령 제정

* 율령 : 율은 형법, 령은 행정과 조세, 노역, 관리 복무 규정 등을 말한다.


▷ 나라시대 (710~794)

겐메이 천황(나라 천도) ~ 간무 천황(헤이안 천도) 시대

  - 특징 :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황족과 귀족들(후지와라 가문)의 정쟁이 계속되고, 궁전과 사원 조영으로 재정 파탄

* 공지공민제 붕괴 : 과도한 세금을 견디지 못한 농민층이 호족과 귀족에게 몸을 의탁하고, 이들이 대규모 장원의 주인으로 등장하면서 토지와 인민을 모두 국가 소유로 규정한 공지공민제가 유명무실해졌다.


▷ 국풍 문화의 발전

견당사 파견 중지(894)를 계기로 대외 관계를 단절한 채 대륙 문화를 일본의 풍토 및 사상과 조화시키려는 움직임 태동

  - 특징 : 가나 문자(히라가나, 카타카나) 발명, 일본 고유 형식의 시 와카(和歌) 성행, 모노카타리(物語) 성립


2. 중세


▷ 무사의 등장

10세기 농민군이 해체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중앙에서 내려보낸 중하급 귀족 계층(쓰와모노,兵)이 무사의 시조이며, 11세기부터 지방 호족과 결합하거나 무력으로 영지를 차지하여 지방영주로 변모. (사무라이待는 본래 교토에 머무르는 상급 귀족을 호위한다는 뜻)

* 무사단 구성 : 일족의 수장 - 가자家子(일족) - 낭당郞黨 - 하인下人·소종所從


▷ 가마쿠라 막부(1180년대~1333)

세이와 겐지의 후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운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헤이시 정권 타도 과정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사들이 적군의 토지를 몰수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은상으로 급여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통해 많은 무사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세력을 확장했다.

*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이하 쇼군) : 본래 나라·헤이안 시대에 동쪽 지역의 에미시 정벌을 위해 파견된 장군의 명칭이었는데, 요리토모가 천황에게 이 직책을 받으면서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 고케닌(御家人) : 막부의 수장과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


▷ 조큐의 난(1221)

요리토모 사후 권력 다툼으로 막부가 동요하자, 이를 틈타 고토바 상황(퇴위한 후에 천황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실권을 장악한 전임 천황)이 거병했지만, 막부군에게 패한 사건. 이를 계기로 막부는 천황을 폐위하고 세 명의 상황을 유배시킨다.

  - 영향 : 상황의 재산을 물려받은 고케닌들이 새롭게 지토(地頭)에 임명되어 서국 지역으로 대거 진출하였고, 막부 중앙에서는 유력 고케닌들로 구성된 평정중評定衆이 설치되어 집단 합의 정치가 시행된다.


▷ 몽골 침략

1차 원정(1274)과 2차 원정(1279) 모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10세기 이후 국제적 긴장 관계를 경험하지 못했던 일본은 정신적 충격이 심대했다. 2차 원정시 불어닥친 태풍은 일본을 가호하는 신들이 '가미카제(神風)'로 외적을 격퇴한다는 신국사상神國思想을 널리 퍼뜨렸다.

  - 영향 : 몽골 침략 방어에 동원된 고케닌들이 충분한 은상을 받지 못하고, 화폐경제의 발달로 생계가 날로 궁핍해지자 악당-장원영주나 막부체제에 저항하는 무사들을 지칭-으로 변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 가마쿠라 시대의 종교

1) 정토종淨土宗 : 염불(나무아미타불)만 외치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는 호넨의 가르침을 설파

2) 잇펜(시종, 時宗) : 정토종 계열로 신앙심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구제받는다는 가르침을 설파

3) 니치렌(법화종) : '남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외면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파

4) 선종(임제종) : 간토 무사들 사이에서 세력을 얻었으며, 막부가 가마쿠라에 겐초지(建長寺)·엔가쿠지(圓覺寺) 등 대사원 건립


▷ 남북조 시대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자인 호조 씨가 천황의 지묘인 계통과 다이카쿠지 계통이 교대로 천황에 취임하도록 하는 '양통질립兩統迭立' 정책을 시행하자, 다이카쿠지 계통의 고다이고 천황이 무사들의 반反호조 정서를 이용하여 거병하였고,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다. 이후 1336년 무가의 군사력에 눌린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를 탈출하면서, 교토 조정(북조)과 요시노 조정(남조)이 성립한다.

  - 영향 : 남북조의 분열로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왜구 준동


▷ 무로마치 막부 성립(1338)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북조 쇼군에 올라 무로마치 막부 개창. 동생 다다요시와의 내란(1350년 간노의 요란擾亂), 남조와의 항쟁을 거쳐 다카우지의 손자 요시마쓰 대에 통일정권을 수립한다. (1392년)

* 슈고 : 전국의 무사들을 통합하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가 파견한 아시카가 일족들로서, 지토와 고케닌을 부하로 편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점차 지방 유력자라는 뜻의 '다이묘'가 붙어 '슈고 다이묘'로 불리웠다.


▷ 오닌의 난(1467-1477)

무로마치 막부가 부패와 재정 낭비로 흔들리는 가운데, 1464년 쇼군 후계자 계승 싸움을 계기로 벌어진 전투. 극심한 전란이 이어지다가 동군의 가쓰모토, 서군의 모치토요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1477년 유야무야한 상태로 종전되었다. 오닌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는 통일 정권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였고, 슈고 다이묘도 신흥 세력인 전국 다이묘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 영향 : 경무장한 보병 용병 집단인 아시가루(足輕)가 주력부대로 등장하였으며, 이들은 방화, 약탈, 배신, 하극상을 일삼아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다.


▷ 잇키의 시대

잇키(一揆)란, 법규(揆)를 하나(一)로 한다, 즉 마음을 합해 행동한다는 뜻으로 농민 결속체를 의미하며, 1428년 대기근에 따른 궁핍이 심화되자 농민 봉기(쓰치 잇키, 土一揆)로 발전한다. 법화(法華) 잇키, 잇코(一向) 잇키 같은 종교적 성격의 잇키도 등장하여, 1488년에는 슈고 다이묘를 몰아내고 가가 국에 '백성이 지배하는 나라百姓持國'를 세웠다.


▷ 전국 다이묘

동족 결합이 중심이던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단과 달리, 전국 다이묘는 혈연이 다른 재지영주와 백성을 포함한 지역 결합이 핵심. 다이묘들은 확고한 지배력을 바탕으로 농업, 상공업, 광업을 진흥시켜 영국領國의 발전을 도모했다.

* 조카마치(城下町) : 전국시대 다이묘의 거점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 


3. 근세


▷ 오다 노부나가 정권

오와리 통합(1559) - 오케하지마 전투 승리(1560) - 미노의 사이토 씨 멸문(1567) - 교토 입성(1568) - 아네가와 전투 승리(1570) - 엔랴쿠지 파괴(1571) - 무로마치 막부 멸망(1573) - 나가시노 전투 승리(1575) - 이시야마 혼간지 정복(1580) - 다케다 가쓰요리 멸문(1582) 


- 혼노지의 변(1582)

* 나가시노 전투 : 대량의 총포부대를 이용하여 최강의 기마 군단을 이끌던 다케다 가쓰요리를 물리친 전투

* 혼노지의 변 :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마쓰히데의 반역으로 암살당한 사건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마쓰히데에게 승리(1582) -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리(1583) - 몇 차례 전투 후에 도쿠가야 이에야스와 화해하고 휘하로 편입(1584) - 규슈 정벌(1587) - 호조 우지마사 멸문하고 전국 통일(1590)

* 도검 몰수령(1588) : 농민 반란(잇키)을 봉쇄하고자 농민이 보유한 무기류 몰수


▷ 에도 막부의 성립

히데요시 사망(1598)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고다이로(五大老)의 필두로 등극(1598) - 세키기하라 전투에서 승리(1600.9) - 쇼군에 올라 에도 막부 개설(1603) - 오사카 성 함락으로 히데요시 가문 멸문(1615)

* 겐나(元和)의 대순교大殉敎(1622) : 기독교 금지령(1612)을 지키지 않은 55명의 선교사와 신도를 나가사키에서 처형

* 도자마다이묘(外樣大名) :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에 복종한 다이묘

*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 : 다이묘의 처자를 에도에 거주시켜 인질로 삼고, 다이묘가 에도와 영지를 1년마다 왕복하게 하는 제도

* 무라(村) : 농민 지배를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한 기초 행정 단위로, 40~60여 호 정도의 가옥이 모인 지연地緣 공동체

* 겐로쿠 문화 : 17세기 오사카나 교토의 부유한 신흥 조닌을 중심으로 융성한 문화로서, 우키요조시(浮世草子) 소설, 렌카(連歌)에서 파생한 하이카이(俳諧), 가부키, 우키요에(浮世繪) 판화 등이 있다.

* 교호 개혁 : 8대 쇼군 요시무네(1716)가 강력한 쇼군 권력과 재정 재건을 목표로 실시한 개혁. 그 중 아게마이(上米) 제도는 다이묘에게 헌상미를 부과하는 대신, 에도 체류 기간을 반 년으로 줄여주었다.

* 번정藩政 개혁 : 18세기 중엽 서남 지방의 조슈 번, 사쓰마 번, 히젠 번 등은 특산품 개발, 금융업 확대 등으로 재정을 개선하여 막부 말기 정국을 주도한다.

* 덴포 개혁(1841) : 막번체제의 재강화를 위해 풍속 단속, 귀농령, 유통 독점 해산 등을 시도했으나 경제 위축과 농민 저항을 야기하였다.


4. 근현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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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6-13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려 했는데... 이 글 읽고 갈무리해 놓으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른 일본 역사 책 읽을 때 큰 도움될 것 같습니다. ^^

nana35 2017-06-16 08:52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이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현대사 교양총서 1
정종섭 지음 / 나남출판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 임시헌법 변천 과정

1) <대한민국임시헌장> (1919.4.11) : 10개 조항. 10조에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명시

2) <대한민국임시헌법> (1919.9.11) : 임시헌장을 58개 조항으로 확대, 개정. 보칙 56조에 "대한민국헌법은 국회에서 제정하되 헌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본 임시헌법이 헌법과 동일한 효력을 유함"이라고 명시

3) 2차 개헌 (1925.4) : 인민의 권리와 의무조항을 삭제한 5개장, 35개조로 개정

4) 3차 개헌 (1927.4) : 총 50개 조항의 <대한민국임시약헌>으로 개정. 인민의 기본권은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법률상 평등이며 일체 자유와 권리가 있음"이라고 1개 조항으로 명시

5) 4차 개헌 (1940.10) : 충칭 임시정부에서 총강, 임시의정원, 임시정부, 회계, 보칙으로 구성되는 42개 조항으로 개정

6) 5차 개헌 (1944.4) : 부주석제 신설을 포함 총강, 인민의 권리의무, 임시의정원, 임시정부, 심판원, 회계, 보칙으로 구성되는 62개 조항의 <대한민국임시헌장>으로 개정


* 해방 후 헌법 제정 노력

1) 행정연구위원회 : 신익희 주도로 헌법기초요강 작성 (1946.3.1)

  - 주요내용 : 대통령과 부통령 직선, 국무총리제도 설치, 국무총리가 내각 관장, 국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내각, 대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 국회, 국회의 내각불신임 인정, 대통령의 대의원 해산권 인정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혼합한 정부형태)

2)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 김구, 이승만과 한민당 조직을 주축으로 결성된 범우파 단체로서 대한민국임시헌법(민주의원안) 작성 (1946.3~4)

  - 주요내용 : 국호 대한민국, 생활•문화•후생균등권 강화, 국민의 권리를 자유권•요구권(청구권)•참정권으로 구분, 정부형태는 대통령에게 강한 권한을 주는 의원내각제

3) 남조선과도입법의원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좌우합작과 미군정의 정책이 만나 결성된 조직으로 미군정으로부터 행정을 이양받아 남북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목표 아래 조선임시약헌 작성 (1947.7.7)

  - 주요내용 : 계획경제 수립, 농민 본위의 토지 재분배, 주요 기업의 경영관리에 종업원 대표 참여, 정부형태는 대통령제, 주석•부주석은 최초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간선 선출 후 국민 직선으로 전환, 지방자치는 선거와 임명 방식 절충


*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이후 헌법 제정 과정

1) 국회에서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하고 헌법초안을 작성할 헌법기초위원 구성 시작 (1948.5)

2) 30인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실무작업을 진행할 전문위원 10인 위촉 (1948.6.2)

3) 전문위원들은 회의를 거쳐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을 원안으로 하고 '권승렬안'을 참고로 헌법안 작성 (1948.6.22)

  - 주요내용 : 국호 대한민국으로 결정, 초등교육 의무제, 국회 단원제, 대통령 간선제(국회에서 선출), 독립된 헌법위원회에서 위헌법률심사

4) 국회는 제17차 본회의를 열어 헌법안 심의 시작 (1948.6.23)

  - 주요내용 : 기본권 주체를 가리키는 단어로 '국민'과 '인민' 가운데 '국민'을 사용하되 '외국인의 법적 지위'를 따로 설정, 국기를 태극기로 하는 조항을 헌법에 넣는 문제 부결, 고문과 잔혹한 형벌 금지를 헌법에 명시할 경우 사형제가 위헌으로 판단될 수 있으므로 제외, 국교를 부인하고 정교분리, 근로자는 이익 분배를 균점할 권리를 갖되 경영참가 조항은 배제, 혼인에서 남녀동등권 명문화, 국무총리는 국회 승인을 받아 임명, 대법원장은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 중요자원을 국유로 하고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을 헌법부칙에 규정

5) 제3독회를 거친 후 국회의원 전원 동의를 거쳐 헌법안 확정 (1948.7.12)

6) 국회의장 이승만은 국회의원 전원과 UN 한국임시위원단 각국 대표, 미군정의 하지와 딘 등이 참석한 가운데 헌법안에 서명하고 공포. 이에 따라 대한민국 수립 (1948.7.17)


* 1948년 이후 헌법 개정

1) 1차 개헌 (1952.7.4) : 이승만이 정권 유지를 위해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를 강제로 밀어붙인 '발췌개헌안' (대통령직선제와 야당의 국무원 불신임제를 발췌•혼합)

2) 2차 개헌 (1954.11.17) :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조항을 폐지하기 위해 사사오입 개헌 (135.33...을 올림하여 136으로 계산)

3) 3차 개헌 (1960.6.15) : 4•19 혁명 이후에 통과된 최초의 여야합의 개헌. 의원내각제 채택, 헌법재판소 설치, 대법원장과 대법관 선거방식 채택,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대한 사전허가 내지 검열 금지,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의 정치 중립 등의 내용 채택

4) 4차 개헌 (1960.11) : 3•15 부정선거와 관련된 반민주행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헌법부칙에 특별법 제정 근거 규정

5) 5차 개헌 (1962.12.17) : 표면상 5•16 군사정부의 민정이양을 위한 개헌. 국회 단원제, 헌법상 기본권 제한 사유에 국가안전보장 추가, 헌법재판소 제도 폐지

※ 쿠데타 주도세력이 민정불참선언을 반복하면서 5대 대통령 박정희 당선 (1963.10)

6) 6차 개헌 (1969.10.17) : 박정희의 집권 연장을 위해 야당을 배제한 채 여당 의원들만 표결에 참석하여 대통령 3선 허용.

7) 7차 개헌 (1972.11.21) : 국가비상사태 선포 (1971.12) 후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 신설, 비상계엄 선포, 국회 해산이라는 일련의 '유신조치' 하에서 이루어진 개헌. 기본권 제한에서 본질적 내용의 침해 금지 조항 삭제, 인신권•재산권•참정권 보장 축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1/3 선출, 대통령은 국회의 동의나 사후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 국회의원 1/3 추천권 보유, 대통령 중임 및 연임 제한 삭제

8) 8차 개헌 (1980.10.23) : 12•12 군사쿠데타 이후 1980년 '5•17조치'로 국회활동이 정지된 가운데 이루어진 개헌. 형사피고인의 무죄 추정, 연좌제 금지 및 사생활의 비밀과 불가침, 환경권과 적정임금 보장 조항 신설,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 도입, 대통령 7년 단임제, 대통령 임기연장이나 중임 변경을 위한 헌법 개정은 현직 대통령 적용 금지

9) 9차 개헌 (1987.10.27) :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이 이끌어낸 '6•29선언' 이후 진행된 개헌. 국군의 정치 중립 준수 명시, 기본권 조항 부활 및 강화, 대통령직선제 및 5년 단임제, 헌법재판소 부활

※ 5차 이후의 개헌은 모두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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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5-02-06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