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러일전쟁 일본 근현대사 3
하라다 게이이치 지음, 최석완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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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통상항해조약(1894.7.16)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1885)에서 주장하던 주요 목표 중 하나를 이루어냈다. 그것은 "자국 영토를 법으로 지배하는 근대 국가의 주권을 제한"하던 치외법권의 철폐이다. 치외법권의 철폐는 일본이 "구미와 대등한 주권 국가로 승인되었음을 의미한다."(73) 이로써 일본은 서구 열강을 따라잡는 행보를 맹렬하게 진행시킨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은 제국의회에서 열린 시정 방침 연설(1890.12.6)에서 '주권선'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으로 ‘이익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식민지 대만과 세력권 조선을 발판으로 이후의 50년 동안을 군사력 확대와 전쟁으로 채색한다. 그 전환점이 청일전쟁이다."(79)


1894년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벌어지자 중의원의 내각 탄핵 상주안에 시달리던 이토 내각은 '이익선'에서 벌어진 외부 사태를 구실로 중의원 해산과 조선 파병을 결의하였다. 이토의 상주를 받은 천황은 "오야마 이와오 육상 등에게 '조선에 거류 중인 우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병대를 파견하고자 한다'는 칙어를 내렸다."(85) 그러나 6월 11일 전주화약이 성립되어 농민군이 조기에 해산하자, 무쓰 외상은  "만약 무슨 일도 하지 않은 채 또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끝내 그곳에서 허무하게 귀국하게 된다면, 몹시 체면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책이 달성되지 못한 것이라면서, 한성에 진출한 군대가 '무슨 일'인가를 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91)


이와 함께, 6월 15일 각의는 "1) 조선의 내정을 청일이 공동으로 개량하기 위해 양국에서 상설위원을 파견하여 지도한다. 2) 청국이 거부한다면 일본이 단독으로 개혁을 지원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우고 조선 문제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다. "공사관 및 거류민의 보호라는 당초의 파병 목적을 변경하여, 청일 간의 교섭에 새로운 과제를 끼워 넣는 작전으로 전환한 것이다."(92) 오토와 스기무라는 조선정부로부터 "조선은 자주국이며, 청군은 조선의 요청으로 온 원병이므로 퇴거를 요구할 수 없다"는 회답이 올 경우에 자주국 조선에 청군이 간섭하는 것은 부당한 행위라는 구실로 개전한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93)


※ 청일 전쟁의 전개 양상

한성전신국 절단 및 경복궁 공격(1894.7.23) - 풍도 앞바다 해전에서 청나라 함대 격파(7.25) - 청일 양국 선전포고(8.1) - 평양함락(9.16) - 일본의 황해 해전 완승(9.17) - 압록강 너머로 진출(10.25) - 여순 공략 개시(11.21) - 산동성 공략 및 위해위 요새 점령(1895.2.2) - 북양해군 항복(2.12) - 시모노세키 조약 조인(4.17) [조약 내용 : 조선 독립 승인 / 요동반도와 대만 할양 / 은 2억량 배상]


일본의 침략 야욕을 목도한 동학 농민군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맹주로 삼아 10월 9일 2차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 일본은 1894년 11월부터 다음 해 4월 초순까지 동학 농민군을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탄압 부대의 주력은 11월 초순에 도착한 후비 보병 독립 제19대대 등 2,700명의 일본군이었으며, 여기에 2,800명의 조선 정부군과 각지의 양반 사족 및 토호 등이 조직한 반동적인 민보군이 가담하였다." 촌 구석구석까지 몰아붙이는 섬멸 작전에 맞서, "5개월 동안 농민군이 치른 전투는 46차례이고, 농민군 참가 인원은 연 13만 4,750명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청일전쟁이었다."(103)


"청일전쟁은 청의 군사력이 약체라는 사실을 세계에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이 아시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결국, "19세기 말 이후에 찾아온 아시아의 위기는 청일전쟁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122) 구미 열강이 사태 수습에 개입하자, 일본 정부와 군부는 청일전쟁 후의 정세를 감안하여, 남진론의 거점인 대만을 열강에게 넘겨주어선 안 된다는 합의를 도출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말레이반도와 남양제도 진출의 근거지인 "대만을 사전 점령하고 청국의 할양을 요구"하는 화평조약을 모색한다. "마쓰카타는 이 의견서를 '천하 유식자의 공론'이라 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도 '동감·동정'의 뜻을 전하였다."(132-3)


일본은 "7만 6천 명의 병력(군인 4만 9,835명, 일본인 군부 2만 6,216명)을 투입하여, 일본군 사상자 5,320명(전사자 164명, 전병사자 4,642명, 부상자 514명)을 내고, 중국인 병사와 주민 1만 4천 명을 살해한 끝에 대만을 획득하였다."(138) 진정으로 대만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고자 했던 이사와 슈지(대만총독부 초대 학무부장)는 대만인들의 '정신을 정복'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사와의 구상은 본국에 재수입되어, 이념으로서의 '국어' 개념을 만들어낸다. 우에다 가즈토시는 "일본 전국에서 통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는 일"을 당면 과제로 삼는 동시에 "조선인, 미국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알아야 할 '동양 전체의 보통어'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156)


"청일전쟁 후 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은 무역과 금융 면에서 서구와 미국에 대해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거대한 구매자를 제공했다는 의미도 갖는다. 이에 따라 구미는 1873년 이래의 대大불황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독일(1893년~), 영국(1895년~), 미국(1897년~)은 차례로 호황을 맞이하였다. 또 일본이 영국에 대량 주문한 군함과 대포는 영국에서의 동형함 제조 비용을 낮추었고, 실험 연구비도 일본에 전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청일전쟁 배상금의 46%에 해당하는 1,753만 파운드가 런던에서 해외 지불 기금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해외 군비 확장비로 쓰였다. 청일전쟁의 열매를 가장 잘 맛본 것은 대영제국이었다."(165-6)


청일전쟁 배상금에 시달리던 청국은 "1895년 7월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 차관을 받아들였다(36년간 변제). 이어서 다음 해에는 영국과 독일도 1,600만 파운드의 공동 차관을 제공했다(36년간 변제). 재정 파탄에 이르게 된 청국은 일본에 갚아야 할 2억량의 배상금 때문에 여러 열강의 금융에 의존하는 구조로 변해 갔다."(244) 한편, 러시아 정부는 의화단 세력과의 충돌을 구실로 삼아, "1900년 7월 만주 파병을 개시하고 10월에는 전 만주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 "한국 문제만을 교섭해 온 방침을 버리고, 만주 문제와 한국 문제를 한 세트로 만들어(滿韓不可分) 서로가 만주와 한국을 완전히 확보한다는(滿韓交換) 새로운 방침"을 수립한다.(253)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고, 만주의 요양, 사하, 봉천 등지에서 벌어진 육상전투는 일본의 우세로 끝났지만 대규모 병력 손실이 불가피했다. 봉천회전에서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할 여력이 없던 일본 정부는 지구전이 될 "러일전쟁을 앞으로도 수행하기 위한 근거지 및 병참지로서 한국을 이용하기 위하여, 내정까지도 장악하는 보호국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277) 마침내 1905년 5월 동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어 러시아로부터 사할린을 할양 받고, 조선에 매진한다. 3차에 걸친 한일협약을 통해 조선의 내정,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1909.10)을 계기로 병합을 가속화하고 마침내 한국병합조약(1910.8.22)을 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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