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막부는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력과 방대한 관료제를 갖춘 중앙집권 정권이었다. 또한 막부는 전국 쌀 생산량의 25%를 차지하고, 경제 요충지인 간토와 기나이 지역, 특히 오사카를 장악했으며, 나가사키 직할령의 해외무역과 전국의 주요 광산을 운영했다. 막부는 "광산 지배권을 바탕으로 화폐를 발행하였는데 일본의 중앙정부가 통일 화폐를 발행한 것은 고대 이래 수백 년 만이었다. 그만큼 도쿠가와 막부의 전국 지배권이 단단했던 것이며 중앙정부로서의 신용이 높았다는 얘기다." 이 안정성은 나중에 막부에 독이 되는데, 19세기 막부 재정이 악화될 때 과감한 개혁을 실시한 번들과 달리, 막부는 "금화, 은화의 순도를 낮추는 안이한 방식"을 되풀이했다.(21)
"각 번이 막부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막부는 번의 행정권, 징세권, 경찰권을 인정해 주었다. 이 때문에 각 번은 막부의 강한 규제를 받기는 하지만 흡사 별개의 국가 같은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도쿠가와 체제를 '복합국가'라고 말하기도 한다."(32) 번들 간에는 경쟁 의식이 있었는데, 19세기 내우외환의 시기에 접어들자, "생존을 위한 부국강병의 경쟁, 개혁의 경쟁"이 시작된다. 복수의 정치체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는 점이 대내외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또한 번이 "중간 단체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일본은 대대적인 변혁 과정에서도 사회질서가 파국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치안이 유지될 수 있었다."(34-5)
18세기 후반 이래 급속히 확산된 유학은 "쇼군 권력의 근거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요구"하였다. 막부는 여기에 "천황에게서 대권을 위임받아 전국을 통치"한다는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을 내놓는다. 막부가 정당성의 원천을 "독자적으로 창출해 내지 못하고 천황에게서 구한 논리는 양날의 칼이었다." 실제로 19세기 들어 막부는 스스로 '대정'을 '봉환'하게 되는데, 이것이 "1867년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행한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다."(37) 이러한 변혁은 개항 이후 외국 무역이 시작되면서, 생필품 물가의 급등으로 치명타를 입은 "하급 사무라이와 도시 빈민"들이 대거 혁명의 대열에 뛰어든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41)
일본이 서양 문물을 신속히 수용하게 된 것은 1780년대 "북쪽의 에조치, 즉 지금의 사할린과 훗카이도 일대"에 러시아인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일본은 약 200년간 군사적 위기 상황이 전무했는데, 서양의 발달된 항해술과 선박 제조 능력을 목도하면서, "일본의 국방 강화와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들의 주장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게 된다."(53) 러시아가 에조치를 점령하기 전에 일본이 "직접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18세기 말부터 제기되었고, 19세기 전반 서양인들이 류큐에 출몰하자 류큐에 대한 지배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아져 갔다. 훗날 메이지 정부가 오키나와와 훗카이도를 각각 '남북의 자물쇠'로 삼은 전략은 이때 이미 마련된 것이다."(68)
"일본 지식인들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하고 있는 현상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결국 세계는 몇몇 강대국의 권역으로 구분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좋든 싫든 따라갈 수밖에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보았다. 따라서 식민지가 되기 싫으면 스스로 강대국이 되어 하나의 권역을 구축"해야만 했다. 특히 "무주지(無主地, 국제법상 어느 국가의 영토로도 되어 있지 않은 지역)의 경우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다른 국가가 차지할 것이라는 인식이 해외 팽창론을 더욱 부채질했다."(83-4) 막부 내에 쇄국파가 우세한 상황에서, 아편전쟁의 발발과 참담한 결과는 부국강병파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양이론자들은 부국강병을 국가 목표로 삼는 것을 혐오했지만, 일본 양이론자들의 목표는 적극적 개국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부국강병이었다." 장래에 도래할 개국을 위해 일본은 전면 쇄신을 단행해야 했지만, 그들이 보기에 "당시 일본은 태평의 잠에 취해 깨어날 줄 몰랐고, 막부는 태평을 유지하려고 '굴욕 외교'를 거듭했다." 양이론자들은 내정개혁을 위해 '양이의 수단화'를 주장했다. 여기에는 "대선(大船) 제조 금지의 해제, 참근교대의 완화, 농병제(農兵制) 채용(당시는 사무라이만이 군인이 될 수 있었다)" 등이 있었으며, 그들이 추구한 "가장 급진적인 개혁은 천황 친정(天皇 親政)이었다."(97)
일찍이 유학 등 학문이 발달했던 미토 번은 "천황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한 <대일본사(大日本史)>를 편찬하는 등 존왕(尊王)의 풍조가 강했다. 19세기 들어 내우외환이 심각해지자, 천황을 일본이라는 국가의 핵심에 위치시키고 그 존재를 신성시하는 국체(國體)라는 관념"이 만들어지는데, 이를 미토학(水戶學)이라고 한다. 미토 번은 정치적 야심이 큰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의 메카"가 된다.(120-1) 여기에 막부의 핵심 세력인 후다이번들이 "탁월한 로비 능력으로 막부의 재정 원조를 받아내 안일하게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도자마 번 같은 신흥 세력들은 번정 개혁(藩政 改革)을 대대적으로 벌여나갔다.
유학의 확산이 사무라이들을 정치화했다는 점도 중요한 개혁 동인이 되었다. 그들은 "점점 국가 대사, 천하 대사에 관심을 갖고 발언"하면서, "단순한 군인도 서리도 아닌 사(士)가 되어 갔다(사무라이의 '사화士化')." 이들은 무사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여전히 칼을 차고 무를 존중했지만, "학적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정치조직을 만들고(학당學黨), 상서를 이용하여 정치투쟁을 벌였다. 또 자신을 천하 공치(天下 共治)의 담당자로 여기고 군주의 친정(親政)을 요구했다." 뜻밖에도 이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19세기에 무인(武人)의 나라 일본에서 출현하여, 병영국가 도쿠가와 체제를 동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135-6)
"막번 체제의 근간은 월소(越訴, 직속상관을 뛰어넘어 그 윗선에 곧바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와 도당(徒黨)의 금지이다." 사대부적 정치 문화를 수용한 사무라이들은 "상서를 통해 월소의 금지를, 당파를 통해 도당의 금지를 무력화"하면서, 가신단 내의 엄격한 서열을 뒤흔들었다.(180) 18세기 후반부터 각 번 정부들은 "재정 위기와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것을 번사(藩士)들 뿐 아니라 민중에게까지 요구했다. 이에 따라 일반 사무라이와 상층 영민(領民)들이 봇물같이 의견을 내놓았다." 과거제가 없던 일본에서 상서는 인재 발탁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이것은 "막부 정치에 도자마 번, 신번 등의 세력이 간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96-7)
18세기 말부터 서서히 진행된 정치적·사상적 면에서의 일본 사회의 유학화는 "도쿠가와 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 직후 정점을 맞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전성기는 짧았다. 대외적 위기감 속에서, 특히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 쿠데타 이후 일본 사회는 급속히 서구화, 즉 문명개화·부국강병 노선으로 달려갔다."(217) 학적 네트워크에 의존한 당파 정치는 "자신을 군자당으로 인정하고 상대 당을 소인당으로 매도"하던 구양수 식의 붕당론 앞에서 사회적 낭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상 흐름 속에서 일본은 메이지 초기 정당 무용론과 '올바른 유일 정당론(公黨)', 군국주의 일본의 대정익찬회(大政翼讚會) 등 군주독재 체제를 옹호하고 보완하는 길로 들어선다.(2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