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분열하는 제국 - 11개의 미국, 그 라이벌들의 각축전
콜린 우다드 지음, 정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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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륙의 "유럽 문화는 동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제국 군인과 선교사들에 의해 남쪽에서부터 전파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 하위문화는 대서양의 코드 곶 해안이나 체서피크 남쪽 지역이 아니라 뉴멕시코 북부의 건조한 고원과 콜로라도 남부에서 시작됐다. 1595년 엘 노르테에 정착한 이래 지금까지 줄곧 자신들만의 문화를 간직한 채 사는 스페인계 미국인은 19~20세기가 되어서야 뒤늦게 이 지역에 진출한 멕시코계 미국인을 자신들과 한 덩어리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매우 큰 불쾌감을 느낀다."(38-9) 교황에게 남반구 세계를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도덕적 명령'을 받은 "스페인 국왕은 아즈텍과 마야 제국을 손쉽게 정복한 후 은이 잔뜩 매장된 산맥과 금광을 발견하자 신이 단순히 자기편인 것을 넘어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심판의 날'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제국Universal monarchy'을 건설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말라는 계시를 내린 것이라 믿었다."(43)


"엘 노르테는 자체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고 선거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지역 군사령관이 총독 역할을 대행했고, 지역 협의회나 의회 같은 민주적인 제도는 전무했다. 샌타페이, 샌안토니오, 투손, 몬테레이 같은 몇 안 되는 도시에서조차 의회는 부유층 올리가키들oligarchy의 전유물이었다. 1700년대 말에는 그마저도 기능이 거의 마비됐고, 시정 운영은 지역 군 장교들의 손에 넘어갔다. 일반 주민들은 그들의 생계를 돌봐줄 지역 후원자patron나 기득권층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충성을 바쳐야 했다. 후원자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과부, 고아, 병약자들을 돌봤다. 또 종교 행사나 교회활동에 자금을 지원했다. 농장 일꾼들은 이에 복종하고 따랐다. 마치 중세 시대의 농노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시스템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엘 노르테 지역의 정치,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47-8)


# 엘 노르테El Norte의 출발

1. 개신교를 적대한 스페인의 영향으로 양키덤, 애팔래치아,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와 적대 감정

2. 스페인이 에너지와 자원을 종교 전쟁에 탕진하면서 평균 이하의 빈곤 지역으로 전락

3. 열렬한 개종 과정에서 인디언과 스페인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급증하여 인종 차별 의식 약화


뉴프랑스 지역에 정착한 "당시 사람들은 숲에서 사는 사람을 나무꾼(혹은 모피상)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원주민 문화와 가치관에 부분적으로 동화된 1세대 이주민들이었다. 그들의 자식은 프랑스인이면서 동시에 미크맥, 몽타니에, 휴런 족의 후손이기도 했다. 이들은 메티스metis(캐나다 프랑스인과 북미 원주민 사이의 혼혈)라는 새로운 인종을 형성했다. 메티스는 스페인의 메스티소와는 달리, 유럽 정착민 문화만큼이나 원주민 문화에도 편안함을 느꼈다. 모피상들은 유목민이나 수렵인들처럼 자유와 독립을 누릴 수 있는 자신들의 삶을 자랑스러워했다." "뉴프랑스에서 평등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구대륙의 봉건제를 압도하면서 점점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인디언을 동화시키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메티스 사회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 사회는 프랑스적인 요소만큼이나 북미 원주민들의 가치관과 문화가 많이 반영된 사회였다."(63-4)


# 뉴프랑스New France : 행정구역으로 독립하려는 퀘벡 주가 포함된 지역으로 앙시앵 레짐 시절의 프랑스 북부 소작농 민속 문화와 북미 동북부의 토착 원주민 문화가 결합하여 형성했다.


"타이드워터는 애초부터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없는 자들로 구성된 사회였다. 피라미드의 맨 위에 군림한 부유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타이드워터의 경제, 정치를 빠르게 장악해갔다."(71-2) "타이드워터에서 권력은 세습됐다. 주요 가문들은 영국과 미국, 양쪽 모두에서 혼맥으로 얽혔다. 그중에서도 특히 버지니아 일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서로 모두 친인척 관계였다. 식민지의 상원, 대법원, 행정 내각 역할을 한 것은 물론 토지의 분배까지 관장했던 버지니아 왕실 의회Royal Council는 1724년 의회의 모든 멤버가 혈연이나 결혼으로 얽힌 상태였다."(79) "타이드워터의 젠트리가 받아들였던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공화정을 모델로 한 '전통적인' 공화주의였다." "고대 라틴사회의 계몽 정치철학인 리베르타스Libertas에서 파생된 자유 개념은 양키덤과 미들랜드의 정치철학에 영향을 미친 게르만 사회의 프라이하이트(Freiheit, 자유)에서 파생된 프리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80-1)


#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자유 vs 천부인권으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유


# 타이드워터Tidewater : 영국 남부 젠트리의 후손들이 세운 사회로 권위와 전통을 중시하고 대중의 정치 참여에 우호적이지 않다. 헌법에 귀족적인 요소들(가령, 대선 선거인단 제도)을 첨가했다. 토머스 제퍼슨이나 조지 워싱턴, 제임스 매디슨이 타이드워터 출신이다.


"청교도들은 미 대륙에 영국 시골 마을의 삶을 옮겨심고 싶어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세우고 싶어했던 사회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장 칼뱅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개신교 신정사회, 즉 종교적 유토피아였다. 그들은 뉴잉글랜드의 황무지에 새로운 시온을 건설하고자 했다."(84) "양키덤 초기 정착민의 절반 가량은 영국 제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이스트 앵글리아(영국 동남부) 출신이었다. 이스트 앵글리아에 속하는 7개 카운티는 영국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심지였고 교육 수준도 높아서 중산층이 빠르게 증가하는 곳이었다. 또 전제정치에 굴하지 않은 오랜 저항의 역사를 자랑했다." "이들은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향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황무지의 불확실성을 선택했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이 70퍼센트를 차지했기 때문에 성별, 연령 비율이 다른 국민이 세운 사회보다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86-7)


1624년 네덜란드인들이 정착한 뉴네덜란드는 비록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북미의 어떤 지역과도 달랐다. 모피 교역소로 출발한 이 도시는 사회를 어떻게 단결시킬 것인지, 혹은 어떤 사회적 모델을 지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모두 거세된, 그저 상업적인 목적에만 충실한 곳이었다. 도시의 행정은 글로벌 기업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의 관할 아래 놓였고, 실제로 처음 몇십 년 동안은 서인도 회사가 공식적으로 뉴네덜란드를 통치했다. 양키덤과 타이드워터 사이에 위치한 이 도시는 양쪽 모두가 이용하는 화물 집산지가 됐다."(96) 관용을 중시하는 네덜란드인들은 "다양성을 축복이라 여겼던 것이 아니라 그저 '참고 견딘' 것이었다. 샹플랭의 고향인 생통주 마을 사람들처럼, 네덜란드인들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유럽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대안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103)


디프사우스를 형성한 사람들은 "역사가 좀더 오래된 식민지인 서인도 제도 바베이도스를 세운 자들의 아들과 손자들이었다. 바베이도스는 영국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하면서도 가장 잔인한 사회였다. 그들은 찰스턴에서 영국 지방 영주와 같은 삶을 누리고자 한 것도 아니고, 종교적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 시대에도 악명이 높았을 만큼 비인간적이었던 서인도 노예국가 제도를 이곳에 확장시키려 했다." "디프사우스는 애초부터 부와 권력이 철저히 불공평하게 나뉜 사회였다. 소수 지배층이 공권력을 등에 업고 테러적 수단을 동원해 모든 이의 복종을 강요하는 곳이었다."(119-20) "디프사우스는 군사화된 사회인 데다 카스트 구조로 이뤄져 권력에 대한 복종 문화가 강했다. 그뿐 아니라 매우 공격적인 팽창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이기도 했다. 농장주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저지대에서 비슷한 지형을 가진 해안가 위아래로 영토를 넓혀나갔다."(130)


"1680년대에 형성된 미들랜드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뒤섞인 관용적인 사회였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평범한 서민층 가족들이 사회의 주를 이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내버려두는 것뿐이었다. 그 후 300여 년 동안 미들랜드의 문화는 계속 서쪽으로 뻗어나가 필라델피아 주변과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미국 중부를 휩쓸었다. 미들랜드인들은 매우 중요한 특징을 가진 국민이다. 북미 대륙에서 가장 일반적이면서 표준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종종 킹메이커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들이다." 미들랜드의 주요 구성원들인 "퀘이커교는 폭력과 전쟁을 강하게 거부하고 평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퀘이커는 이 같은 교리를 너무나 경직되게 엄격히 적용한 나머지 반세기 후인 1690년대에 미들랜드에서는 영원히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133-5)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마지막 국민인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인들은 등장하자마자 가장 골칫덩이 같은 존재가 됐다. 영국의 국경 분쟁 지대에서 이주해온 그들은 미들랜드 산간에 씨족을 기반으로 한 전사 문화Warrior culture를 퍼뜨렸다. 미들랜드,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의 변방에 정착한 이들은 행정, 군사, 인디언 정책에 대한 기존 지배 세력의 독점적 통제력을 산산이 깨버린 주체이기도 하다." "상시적인 격변과 불안정한 일상에 시달린 국경지대인들은 (씨족끼리 뭉쳐 서로를 의지하면서) 칼뱅주의에 입각한 장로회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됐다. 보혈의 피로 정화되어 성경이 약속한 주의 나라 백성이 되었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진노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았다. 모든 외부 세력을 불신하는 국경지대인들은 개인의 자유와 명예를 중요시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기를 들었다."(146-7)


"1775-1782년에 벌어진 독립 투쟁은 표현, 종교,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미국인'들이 힘을 합쳐 싸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각 식민지의 문화적 특성, 권력을 지배하는 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느슨한 군사적 동맹을 맺어 함께 싸운, 매우 보수적인 행동의 발로였다. 반란에 동참한 식민지들은 결코 하나의 공화국을 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영제국이 미 대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식민지를 섣불리 일원화시키려 하자, 공동의 위협에 대항해 일시적인 연합을 형성했을 뿐이다."(162) "그러나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식민지들이 합의한 영국으로의 수출 금지 조치가 발효될 무렵, 양키의 공동묘지에는 이미 영국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시신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 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177-8)


# 각 공동체들의 반응

1. 양키덤 : 종교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대표들을 소집하고, 혁명군을 조직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대영 투쟁

2. 타이드워터 :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조지 메이슨, 조지 워싱턴 등 피드먼트에 사는 젠틀맨들이 애팔래치아 너머의 잠재력을 보고 대영 투쟁에 합류

3.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 자유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적대한다는 신념에서 독립파에 합류

4. 미들랜드 : 평화적 해결 추구. 독립이 호전적인 팽창주의 세력의 힘을 키울 것으로 보고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지 않음

5. 뉴네덜란드 : 뉴욕이 완전히 양키들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한 왕당파의 근거지 역할

6. 디프사우스 : 농장주들의 특권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항의하는 영국상품 보이콧 운동에 만족. 노예반란 우려


"양키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앞으로도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치권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투표로 선출된 대표들이 운영하는 지역 정부(주가 아니라 마을 단위로 세워진 정부), 사회 중심에 있는 청교도 교회, 앵글로색슨으로서 폭압에서 벗어나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로울 권리, '신의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180-1) "양키덤이 자유를 위한 혁명의 근거지였다면, 뉴네덜란드는 독립을 반대하는 왕당파와 영국군을 위한 근거지로서 정확히 정반대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여느 주변 식민지와 달리 주권을 수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뉴네덜란드는 한 번도 주권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뉴네덜란드인들은 뉴욕이 영국에서 독립하고, 양키의 수중에 넘어가면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종교적 관용과 문화적 다양성이 훼손될 가능성을 우려했다.(182-3)


"양키덤을 제외한 상당수 영국 식민지들이 독립에 대해 양면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면, 그들은 대체 어떻게 독립을 하게 된 것일까? 첫째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독립을 간절히 바랐던 타이드워터 젠트리의 적극적인 동참, 그리고 둘째는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는 누구와도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던 펜실베이니아, 캐롤라이나, 조지아 지역의 애팔래치아인들이었다. 외떨어진 산간지역에 위치한 데다, 가난하고, 하나의 정부로 통합되지도 않았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는 독립 전쟁에서 가장 복잡한 변수였다. 외부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던 국경지대인들은 '혁명'을 핑계 삼아 판을 뒤엎고자 했다."(192) "소수의 '왕당파' 국경지대인들은 영국군이 그들의 적인 디프사우스 농장주의 적이기 때문에 영국 편에 섰다. 반면 다른 산간지대 마을에서는 영국을 더 큰 압제자로 여겼다. 결국 국경지대인들은 농장주와의 싸움에 더해 같은 국경지대인끼리도 내전을 겪게 됐다."(194)


"전쟁이 시작될 무렵, 식민지 사이에 구축된 협의체는 외교 기구인 '대륙 의회'뿐이었다. 대륙 의회는 기본적으로 참여국 과반수의 찬성을 통해서만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국제 조약 기구였다. 결의안을 이행하지 않는 회원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회원을 군사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는 한,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대륙 의회는 군사적 제재는 물론 영국의 위협에 더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지금의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비슷한 성격의 연합군을 창설했다. 그것이 바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이다. 그들은 수많은 입씨름을 거친 끝에 대륙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군사적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이 커지고, 더 중요하게는 회원국 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조약기구에 훨씬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 최초의 헌법인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은 이러한 두려움 속에서 탄생했다."(198-200)


"식민지 지도자들은 전쟁에 사람을 동원하기 위해 영국과의 전쟁을 독재 및 압제와의 싸움으로 포장했다. 그들은 평민들에게 민병대에 합류하고 대규모 회합에 참석해 지도자들이 설명하는 결의안을 열렬히 지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행동대를 구성해 결의안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곤봉이나 노로 구타하거나 뜨거운 타르를 끼얹은 후 온몸에 깃털을 붙이는 공개 처벌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과정은 오히려 평민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민주주의에 관한 글을 쓰거나 읽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토머스 페인이 쓴 <상식>과 1776년 미국의 독립 선언은 이러한 열망에 불을 댕겼다." "하층민들이 통제 불능이 되어간다는 우려가 높아지자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훨씬 더 강한 연대를 맺어 각 지역의 독립하려는 움직임과 민의를 수시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게 됐다."(204-5)


"미국 헌법은 결국 서로 경쟁관계인 국민 사이에서 벌어진 골치 아픈 타협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타이드워터의 젠트리와 디프사우스로부터 평범한 시민의 직접 투표가 아니라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물려받았다. 뉴네덜란드는 양심과 표현,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 장전을 물려주었다. 오늘날 미국이 영국식 의회 모델을 따라 강력한 단일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것은 남부의 폭정과 양키의 간섭에 대항할 수 있도록 각 주의 주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한 미들랜드 때문이다. 양키는 인구 비례대로 의석을 배정하기 원했던 타이드워터와 디프사우스를 상대로 싸워 이겨서 작은 주들도 상원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양키는 또한 의석을 배분하기 위해 인구를 셀 때 노예는 5분의 3만 포함하도록 절충안을 내고 이를 밀어붙였다. 투표권이 없는 노예들은 대표될 수 없으므로, 의원 수를 배정할 때 이 점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양키의 논리였다."(208-9)


"타이드워터와 디프사우스를 제외한 다른 식민지 사람들의 상당수는 (1789년) 헌법이 반혁명적이며 교모하게 민주주의를 억압한다고 여겼다. 또 소수의 지역 엘리트와 신흥 은행가, 금융 투기꾼, 그리고 같은 인종과 문화를 가진 국민에게 아무런 충성심도 없는 지주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켜줄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존경받는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 같은 목적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거를 치르지 않는 의원인 상원을 높이 평가했다. "건방진 민주주의를 억제하고"(알렉산더 헤밀턴), "민주주의의 어리석음과 불안정함을 막아줄 수 있는"(에드먼드 랜돌프) 제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불편함을 막기 위해 연방 선거구는 클수록 좋다"(제임스 매디슨)고 생각했다. 메디슨은 직접 민주주의에 유리한 소규모 집단은 파벌이 생겨나기 쉬우므로, 어리석은 이들이 쉽게 다수를 정하지 못하도록 선거구가 클수록 바람직하다고 여겼다."(220)


"뉴잉글랜드가 서부 진출에 박차를 가한 이유는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는 당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 좋은 토지는 이미 임자가 있었고, 개척할 땅이 빙식氷蝕 지형인 동부 메인 변두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식 세대 앞에 놓인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다. 이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도 뉴욕 국경을 넘어 펜실베이니아 북부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다."(241) "양키는 자신들의 이주 여정을 1600년대 초 뉴잉글랜드 선조들이 종교 사역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바라봤다. 1787년 매사추세츠 입스위치에서 머스킹엄 밸리로 향한 첫 이주민들은 네덜란드를 떠나던 필그림 파더스처럼 예배당 앞에서 퍼레이드를 벌인 후 성직자들의 고별사를 받으며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하이오 강 하류에서 탈 작은 배를 만든 후 '서부의 메이플라워호'라는 이름을 붙였다."(244)


뉴잉글랜드인이 '서북부 영토'의 북쪽을 거쳐 서부로 진출하는 동안, 미들랜드인들은 중앙 중서부로 쏟아져 나갔다. "양키처럼 미들랜드도 유럽이나 동부 연안에서 이곳으로 올 때 가족 단위로 이웃사촌들과 함께 이주해왔다. 그러나 양키들과 달리 그들은 주 전체는커녕 이웃 마을 공동체를 동화시키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델라웨어 밸리처럼 각 마을은 민족별로 형성되곤 했지만, 카운티 전체로 놓고 보면 다문화적인 성향을 띠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독일인들은 전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기술을 보유한 장인이었으며 농업 지식이 풍부했다." "미국에 개척의 광풍이 불어닥칠 때도 독일인들은 가족과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땅을 경작하면서, 안정되고 영구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렇게 한곳에 뿌리를 내린 생활 덕분에 독일인들은 미들랜드, 더 나아가 미국의 중서부 문화에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259-60)


"국경지대인들은 최초로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까지 진출한 사람들이었고, 미국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인디언의 영토까지 파고들어갔다. 그들은 대륙 의회가 서북부 영토를 편입시키고 그곳에 살던 인디언을 정복하기 오래전부터 트랜실베이니아나 프랭클린 국가 같은 자신들만의 정부를 세웠다."(262) "이들은 숲과 빈터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뒤늦게야 도시를 형성했고, 공공 투자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어디에서나 지방세는 매우 낮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도시 정부는 거의 없거나 극히 드물었다."(264) "중서부 애팔래치아인의 개인주의적 자유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간섭하기 좋아하는 양키들이었다. 그 결과, 국경지대인들이 장악한 지역은 19세기부터 민권운동 시대에 이르는 동안 내내 디프사우스가 이끄는 민주당의 견고한 지지층이 됐다."(268)


"1820년 전까지 대륙의 동남부를 지배한 세력은 타이드워터였다. 식민지 시대와 초기 공화국 시절,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버지니아였다. 타이드워터 젠트리는 애팔래치아가 가져가야 할 의석수를 박탈한 덕에 그 지역은 물론 나라 전체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미국의 초기 대통령 5명 중 4명을 배출했고, 독립선언문과 1789년 헌법 제정에 지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웃한 디프사우스보다 넓고, 훨씬 더 부자이며, 더욱더 발달한 타이드워터는 '남부'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영국 전원 지역의 개화된 젠트리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던 타이드워터의 엘리트들은 노예의 존재를 유감스러워했고, 그것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타이드워터는 1820~1830년대에 빠르게 팽창하는 디프사우스에게 힘과 영향력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세력 역전은 타이드워터를 부양하던 담배 플랜테이션이 쇠퇴하고, 디프사우스의 목화 플랜테이션이 성황을 이루면서 발생한 일이었다.(277-8)


엘 노르테인들은 1821년에 독립한 멕시코가 극심한 경제 파탄으로 중앙 정부 역할을 방기하자, 숭숭 뚫린 국경을 넘어 텍사스로 대규모 불법 이민을 감행했다. "멕시코 법은 앵글로-아메리칸의 이주를 까다롭게 규제했지만, 새로운 정착민을 간절히 필요로 했던 텍사스 관료들은 이를 못 본 척했다."(291) "이주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텍사스 동부 내커도치스의 마을을 향해 북쪽으로 여행하던 한 멕시코 장군은 어느 순간 자신이 완전히 낯선 외국 문화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샌안토니오에서 내커도치스로 가다보면 거리에 비례해 멕시코의 영향력이 점점 감소하다가, 종국에는 멕시코 문화가 아예 소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상관에게 보고했다." "멕시코 중앙 정부는 디프사우스 이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텍사스가 미국에 병합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앞장서서 반란을 이끈 사람들은 멕시코 북부인인 노르테뇨, 자신들이었다."(292-3)


"1850년, 자유 주州에 정착한 외국인 이주민의 숫자는 노예 주州보다 8배가 더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키덤, 미들랜드, 뉴네덜란드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들이 하원에서 차지하는 의석수도 계속 증가했다. 양키가 장악한 레프트코스트는 디프사우스를 더욱 사면초가로 몰아넣었다. 연방정부는 디프사우스의 바람과 달리 카리브해 지역 점령을 거부한 반면,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워싱턴이 미연방에 자유 주州로 합류하는 것을 승인했다. 1860년,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의 지도자들은 연방정부를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자신들이 밀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850년대에 미국인들 중에 "양키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노예제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 앞에서 눈을 감으려고만 했다. 결국 세상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노예제가 일으키는 도덕적 문제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양키들이 노예 해방운동의 중심이 됐다."(313-4)


# 레프트 코스트The Left Coast : 뉴잉글랜드의 상인, 선교사, 벌목꾼 무리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출신의 농부, 채굴업자, 가죽 무역상 등이 정착한 지역. 개인의 성취를 중요시하고, 정부를 신뢰하며 사회 개혁을 추구한다.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시애틀, 밴쿠버 등)


186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양키덤의 지지를 받은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가장 먼저 연방에서 탈퇴했다. 취임식이 열리기도 전에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 디프사우스가 장악한 주州들이 줄줄이 탈퇴에 합류했다." "만약 디프사우스 연합이 (연방정부의) 요새나 구호 선박을 먼저 공격할 경우 디프사우스 편에 서기로 한 애팔래치아, 미들랜드, 뉴네덜란드의 지지자들은 등을 돌릴 공산이 컸다." "남부연합의 국무장관인 리처드 래더스는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북부를 몰아간다면 분리주의자들은 협상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남부연합의)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전쟁이 시작되면 애팔래치아, 미들랜드, 뉴네덜란드가 남부 편에 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래더스의 충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는 북미 역사상 최악의 오판 중 하나가 된다."(320-1)


디프사우스는 백인 우월주의에 찬성하는 애팔래치아가 남부연합 편에 설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양키보다 농장주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더 위협한다고 여겼다. 결국 남부연합은 1865년에 패배했다. 그러나 패전 후에도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 남부연합 애팔래치아인은 "양키의 개혁에 단호히 저항했고, '재건' 지역의 백인들은 1876년 북부군이 철수하자 모든 개혁 조치를 무효로 만들었다. 양키 공립학교들은 폐지됐고, 양키가 강제로 도입한 헌법은 다시 쓰였다. 백인 우월주의가 되살아나면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내고 '문맹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 등 흑인의 투표권을 빼앗기 위한 각종 장치가 부활했다. KKK 단원들은 공직에 출마하거나 예전의 카스트 제도에서 벗어난 일을 한 '건방진' 흑인들을 살해했다. 전쟁과 점령 기간을 거친 후에도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그들의 문화적 근본을 고스란히 유지했고, 앞으로 다가올 세기에 또 다른 문화적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331-2)


"파웨스트는 민족적 지역 문화가 아니라 외부 수요에 따라 정체성이 형성된 독특한 지역이다. 환경적 요인이 정착민의 문화적 특징을 압도한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유로-아메리카는 암석 채굴, 철도, 텔레그래프, 개틀링 기관총, 가시철조망, 수력발전 댐 등 자본집약적인 기술을 이용해 이 지역의 환경적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기술을 도입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가진 세력은 일찌감치 동부에 식민지를 형성한 국민과 연방정부뿐이었고, 결국 파웨스트는 이들의 내부 식민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파웨스트인들은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에 지금도 깊이 분노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지금 상황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정책을 지지한다."(336) "다른 지역은 보통 정착촌이 형성된 후 철로가 놓이고 수요에 따라 노선이 확장됐지만, 파웨스트 대부분 지역에서는 철로가 먼저 놓이고 그다음에 정착촌이 형성됐다. 기업들은 정착민을 끌어오려고 엄청난 돈을 홍보에 쏟아부었다."(340)


# 파 웨스트The Far West : 미국에서 유일하게 기후와 지정학적 요인이 민족성을 압도하는 광활한 황야 지대. 끊임없이 연방정부에 손을 벌리면서도 자신들을 내부 식민지 취급하는 정부를 향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애리조나 북부, 노스웨스트, 다코다, 네브레스카, 캔자스 서부, 아이다호, 몬태나, 콜로라도, 유타, 네바다 등)


"남북전쟁 당시 북부 편에서 남부연합에 맞서 싸웠던 애팔래치아까지 결과적으로 딕시연합에 합류한 것은 전쟁이 끝난 후 양키가 주도한 재건 사업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그들의 제도와 인종 카스트가 위협 받게 되자, 당시 유일하게 자신들의 수중에 남아 있던 시민 조직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그 조직은 바로 교회였다. 남부 지역의 여러 교파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복음주의 교회는 전쟁 전의 사회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남부 침례교 등 복음주의 교회들은 양키덤의 교파와 달리,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내면적 개신교'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는 북부 지역의 '공공적 개신교'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북부의 점령에 강력히 반발한 강경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구원자Redeemers'라고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1877년 북부군의 철군은 (이들 지역에서) '구원Redemption'이라 불렸다."(362-3)


# 상실된 대의Lost Cause : 남부 독립을 위해 벌인 전쟁은 정의를 지키고자 고난과 맞서 싸운 것이라는 주장


"양키덤과 뉴네덜란드, 미들랜드의 공공적 개신교도들은 미신과 다를 바 없는 비이성적 신앙과 미국의 가치에 어긋나는 독재적인 성향을 지닌 남부인은 지옥에 떨어져도 시원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리주의자들은 1930~1940년대에 성경 모임과 기독교 대학, 복음 라디오 방송국을 확대해나가면서 조직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0년대가 되자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원리주의자의 숫자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반면 사람들의 신앙을 약화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종교와 주 정부를 분리하려 했을 뿐인 주류 개신교는 성도의 숫자가 감소하면서 탄력을 잃어갔다. 그 결과, 세속주의 노력 또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후 시대에 번영을 거듭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던 미국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전면적인 문화 전쟁의 조짐이 조용히 들끓고 있었고, 이는 1960년대에 마침내 폭발하게 된다."(373)


"이 기간에 북부와 남부는 각자 자신만의 또 다른 내전을 치러야 했다. 딕시연합에서는 분리 정책과 카스트 제도에 반발한 흑인들이 투쟁에 나섰고, 북부동맹의 4개 국민은 새로운 세대가 이끄는 문화적 저항에 직면했다. 두 사건 모두 각 지역의 기존 체제에 반발한 자들이 일으킨 내부적 현상이었지만, 양측은 곧 상대방의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먼저, 남부에서 일어난 흑인 민권운동에 북부의 개입은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북부는 타이드워터, 애팔래치아, 특히 디프사우스의 인종 카스트 제도를 강제로 폐지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권한과 군사력을 동원했다. 반면 딕시연합은 레프트코스트, 뉴네덜란드, 양키덤에서 일어난 신세대의 '반란'인 60년대 문화 혁명에 반대하며 이에 개입하고자 했다." "이 두 개의 닮은꼴 반란에서 비롯된 서로를 향한 분노는 북미 국민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합의점과 상호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찾으려던 21세기 초의 노력을 무위로 만들었다."(374-5)


"민권운동과 60년대 문화운동 후 딕시연합은 낮은 세금과 느슨한 규제, 노조 약화 등을 장점으로 부각시켜 국외와 국내 기업을 남부로 끌어들였다. 양키와 미들랜드의 제조업은 남부 지역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북미의 양키 자동차 산업은 1990~2000년대에 거의 붕괴했지만 디프사우스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에 있는 외국 자동차 공장은 예전 남부의 섬유·목재 산업처럼 승승장구했다. 일각에서는 '신新남부연합'이 미국을 서유럽과 동북아시아의 고학력 사회에 종속된 "저임금 수출 공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혁신적 연구는 교육과 이성주의를 강조했던 북부의 지식 클러스터에 집중돼 있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은 모두 레프트코스트 도시에 몰려 있다. 그전에 보스턴에는 양키 고속도로로 알려진 루트 128을 중심으로 최초의 '실리콘밸리'가 있다."(388)


"북부동맹과 딕시연합이 서로 꿈쩍도 안 한 채 양극단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면, 역학 구도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해답은 미들랜드, 엘 노르테, 파웨스트, 이 세 개의 '부동층' 국민에게서 찾아야 한다. 두 개의 슈퍼파워 연합 중 누구도 최소 2개 이상의 부동층 국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미국 정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1877~1933년 북부동맹은 파웨스트와 미들랜드의 지원 덕에 연방을 장악했다. 1980~2008년 딕시의 영향력과 지배력이 증가한 것은 파웨스트와 미들랜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데다 베리 골드워터,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같은 엘 노르테 출신의 보수적인 앵글로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덕분이다. 어느 한쪽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을 때 다수당이라도 되고 싶다면 이들과의 연합은 필수적이었다."(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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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한울공간환경 5
데이비드 하비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 제1장 현대문화 :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가는 길 요약


"보들레르(Baudelaire)는 1863년에 발표된 자신의 시론적 에세이 <근대생활을 그리는 화가>에서 '모더니티의 한쪽은 찰나적·일시적·우연적 측면이며 다른 한쪽은 영원불변한 측면'이라고 쓰고 있다."(26) "모던 생활이 실제 이처럼 찰나와 순간, 분절과 우연 따위의 감각들로 충만해 있다면 적지 않은 심층적 결과들이 초래된다. 우선 모더니티는 전前모던 사회질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조차도 전혀 존중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사물의 일회성으로 말미암아 그 어떠한 역사적 연속성도 보존될 수 없게 된다.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견되고 규정되어야 하는데, 이 소용돌이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논의에서 구사되는 어휘에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모더니티는 그 이전의 모든 역사적 상황과의 가차 없는 단절을 뜻할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단절행위와 분절화 과정을 그 특성으로 삼는다."(28-9)


"베른슈타인이 (모더니티를 비판한) 베버의 전반적인 주장을 정리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베버는 계몽사상가들의 희망과 기대가 독설적·반어적인 환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과학의 발전, 합리성, 보편적 인류 자유 사이의 필연적이고도 튼튼한 연결을 계속 시도하였다. 그러나 가면을 벗기고서 들여다보면 계몽의 유산은 ··· 목적적·도구적 합리성이 승리하는 결과를 빚었다. 이러한 형태의 합리성은 경제구조, 법률, 관료행정, 심지어 예술까지를 포괄하는 사회적·문화적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감염시킨다. [목적적·도구적 합리성의] 성장은 보편적 자유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지 못하고 헤어날 길 없는 관료주의적 합리성의 '철창'을 만든다." 베버의 '냉철한 경고'가 계몽이성에 대한 사망선고라면, 계몽이성의 전제들에 대한 니체(Nietzsche)의 앞선 비판은 그것의 인과응보로 여겨져 마땅하다."(33)


보들레르의 정식으로 되돌아가 보면, "성공적인 근대 예술가란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고 '우리 시대의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미적 형태들'을 숙성시켜 '삶이라는 술에 담긴 쓰고도 자극적인 맛을 만들어낼 수 있는'(Baudelaire, 1984: 435) 이들이었다." 예술가나 건축가, 작가들은 "(혼돈의 수렁 속에서 영원불변한 것을) 표현할 묘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그 시작부터 언어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즉 영속적 진리에 대한 특수한 재현양식을 찾는 데 매진했던 것이다." 이는 예술 전반을 '사회의 반영이라기보다 자기지시적 구성물(self-referential construct)'로 바꾸었으며, "제임스 조이스(J. Joice)나 프루스트(Proust) 같은 작가들이나 말라르메(Mallarme)나 아르공(Aragon) 같은 시인들, 마네(Manet)나 피사로(Pissarro), 잭슨 폴락(J. Pollock) 같은 화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구성한 어휘 속에서 새로운 약호나 기호, 은유적 암시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다."(39)


"모더니즘은 단지 시간과 시간의 일시적 속성을 모두 고정시킴으로써 영원함을 언급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영구적인 공간구조물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건축가들에게 이는 단순명쾌한 정리(定理)였다. 1920년대에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건축이란 '공간적 용어 속에 내포된 시대 의지'라고 했다." 다른 예술가들은 "이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몽타쥬·꼴라쥬 기법을 사용하였다. 상이한 시간(옛날 신문)과 공간(공통적인 대상의 사용)에서 추출된 상이한 효과들이 동시효과를 주기 위해 중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시성을 추구함으로써 모더니스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신들이 대하는 바로 그 상황의 막강함을 재차 확인함과 동시에 자기 예술의 설 자리로서 순간성과 일회성을 받아들였다."(40)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으로 "인간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계몽적 확신이 사라져 버렸으니 모더니티에 적합한 새로운 신화를 찾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다."(51)


"추상적 표현주의의 발흥과 함께 일어난 모더니즘의 탈정치화는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활용된 정치적·문화적 기성 형태들에 의해 포섭될 운명임을 역설적으로 예견한 것이었다."(59) 이제 모더니즘은 "몇몇 반동적이고도 '전통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혁명적 반명제로서 자신이 지녔던 호소력을 잃어버렸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1960년대의 다양한 대항문화, 반反모더니스트 운동들이 생겨났다. 기업이나 국가, 기타 제도화된 권력 등 거대한 단일체를 이룬 세력들(관료화된 정당이나 노동조합도 포함)이 만들어 놓은 기술적, 관료적 합리성은 '과학적'이라는 미명 아래 서슴 없이 압제를 휘두르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대항문화들은 독특한 '신좌파' 정치를 통해 반反전체주의적 입장이나 반反전통, 일상생활 비판을 포용함으로써 개별적인 자아실현 영역을 개척했다."(60)


# 분야별 포스트모던 현상

1.건축 : 대규모 계획도시에서 꼴라쥬 같은 다원적 공간으로 변모

2.소설 : 인식론 중심(복합적이면서도 단일한 실체의 의미 추구)에서 존재론 우위(서로 다른 주체들이 공존하고 충돌하는 상호 관계 조명)로 변모

3.철학 : 추상적 이성에 대한 철저한 반항과 보편적 인간해방과 관련한 모든 프로젝트 거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놀라운 점은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개념 가운데 한쪽 측면, 즉 순간성, 분절성, 불연속, 혼돈을 전면 수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 사실에 대한 대응은 {보들레르와 달리}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사실에 맞대응해 넘어서고자 애쓰지 않으며, 심지어 그 배후에 깔린 '영원불변'한 요소들을 밝혀보고자 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마치 그것이 전부인 듯 '분절성과 변화의 무질서한 흐름' 속에서 헤엄치며 심지어 이에 탐닉한다."(68) 푸코(Foucault)나 리오타르(Lyotard)의 경우처럼, 메타언어나 메타서사, 또한 메타이론이 존재한다는 생각들을 단호히 배격하고, "모든 그룹이 자신 고유의 목소리로 자신들을 대변한 권리를 갖는다는 생각,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가 신뢰성이 깃든 적법한 것이 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필수적이다."(72-3)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매우 상이한 이론들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모더니스트들은 언급되는 것(기의 또는 '메시지')과 언급하는 방법(기표 또는 '미디어') 사이에 튼튼하고도 뚜렷한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이것을 '끊임없이 쪼개어져서 새로운 조합으로 다시 뭉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해체주의'─1960년대 말 데리다(Derrida)의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 읽기로부터 시작된 운동─는 바로 이 대목에서 포스트모던 사고방식에 대한 강력한 자극으로서 등장한다. 해체주의는 철학적 입장이라기보다는 텍스트에 대한 사고법이자 '독서법'이다."(74) 이들이 보기에 "텍스트와 의미의 영원한 상호교차는 우리의 통제영역 밖에서 벌어지므로 힘들여 텍스트를 정복하고자 함은 부질없는 일이다. 언어는 우리 내부에서 유통되고 있다."(76)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듯 세상에 대한 그 어떠한 통일적 재현도 기대될 수 없다면, 또는 세계를 끊임없이 변동하는 파편들로 묘사하지 않고 그것을 연관과 차이로 가득찬 총체로 묘사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세계에 대해 일관된 방식으로 행위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간단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일관된 재현이나 행위가 억압적이거나 환상적일 따름이므로(그에 따라 자기소모적, 자기배제적일 운명이므로), 우리는 결코 어떠한 총론적 프로젝트에도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듀이(Dewey)류의 실용주의가 유일한 행위철학으로 떠오르게 된다."(77)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개인들이 고전적 맑시즘의 주장처럼 소외되어 있다고 볼 수가 없다. 소외되었다는 말에는 소외의 대상이 될 자아에 대한 의식이 분절적이지 않고 일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미리 상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80)


이와 같은 "시간적 질서의 붕괴로 말미암아 과거가 특이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보의 개념을 잃어버리는 과정에서 역사적 연속성이나 그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폐기해 버리며, 동시에 역사를 훔치고 거기서 현재의 모습이라 여겨지는 것들이라면 모두 집어삼킨다."(82) 이제 "역사가들에게 남는 유일한 역할은, 푸코가 주장했듯이, 과거를 쫓는 고고학자가 되는 일이다. 즉 보르헤스가 그의 소설에서 그러했듯이 땅을 뒤져 역사의 유물을 찾고 그것들을 차례차례로 박물관에 모으는 일이다. 철학을 통해 몇몇 불변의 인식론적 문제제기 틀을 설정해볼 수 있으리란 기대를 공격하면서 로티(Rorty, 1979: 371)도 비슷한 주장을 편다. 곧 하나의 문화 속에서 오가는 엇갈린 대화들의 불협화음 속에서 철학자가 맡는 유일한 역할이란, '여러 견해들에 대한 한 가지 견해를 가지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무언가에 대해 오직 하나의 견해만을 인정하는 입장을 비난하는 일'이다."(84)


"모더니즘은 근대화라는 특수한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모더니티의 조건들에 대한 미학적 대응으로서, 불안정하게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개념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을 적절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근대화의 본질을 파악해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포스트모더니즘이 변함없는 근대화 과정에 대한 하나의 또다른 대응인지, 아니면 이른바 '탈산업' 사회 또는 심지어 '탈자본주의' 사회의 일종을 지향하여 근대화의 본질 그 자체가 급격히 변동한 것을 반영하거나 혹은 그 징조를 보여주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132)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 권력인 "화폐는 정치 및 경제적인 것들을 순수한 지배권력 관계의 정치경제로 결합시킨다. 화페와 상품이라는 가장 공통적이고도 구체적인 어휘들은 모든 사람들을 동일한 시장평가 체계로 묶고, 그에 따라 객관적으로 자리잡은 사회적 결속체계를 통하여 사회적 삶의 재상산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이야말로 시장자본주의의 보편적 기반을 이루는 것들이다."(136)


"시장 거래에 동참하려면 생산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소외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일정한 분업 또한 미리 가정되어야 한다. 그 결과 개인 경험의 산물로부터 개인이 소외되고 사회적 업무들이 분절화되고 생산과정의 주관적 의미가 시장에서의 객관적인 제품 평가와 분리된다. 고도로 조직화된 기술적·사회적 분업은 비록 자본주의에만 고유한 것은 아닐지라도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기본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아울러 "노동이 임노동으로 바뀐 것은 '노동 생산물로부터 노동의 분리, 객관적 노동조건들로부터 주관적 노동력의 분리'를 뜻한다. 이는 아주 색다른 유형의 시장 거래가 생겨났음을 말해준다. 노동력을 구매해야 하는 자본가들의 경우 필연적으로 노동력을 도구적으로 다루게 된다. 노동자는 전인(全人 : whole person)이 아니라 '일손'으로 여겨진다. 노동이 단지 생산의 한 '요인'으로만 취급되는 것이다(이 물상화에 주목하라)."(137-9)


"모더니즘의 역사 전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운동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연속성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속에 일어난 특정 종류의 위기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보들레르 정식 가운데 분절적이고 순간적이고 혼돈된 측면(맑스는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총체의 일부임을 훌륭하게 분석하고 있다)을 강조하고 영원불변한 것을 사유하고 재현하거나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모든 특정한 처방에 대해 깊은 회의를 보이는 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현대 세계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수단 노릇을 하는 분절화나 불협화음을 수용하라고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껏 즐기라고 말한다. 그들이 마주치게 되는 모든 형태의 견해들을 해체하고 비합법으로 내모는 데 집착한 나머지, 그들은 합리적 근거를 갖춘 행동이라곤 전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자신들의 타당성 주장을 스스로 비난할 수밖에 없다."(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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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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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위협에 지배되었다는 가정은 옳지만,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20세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자유주의가 조만간 승리하리라는 것은 그 시대의 사태 전개를 봐서는 정말로 예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 p.490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은 계급대립에 대한 실증적 연구나 프롤레타리아의 근본성격에 대한 정치투사로서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관찰을 하거나 정치투사적 경험을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 즉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그 계급적 존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구성하는 역사적 사명을 발견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이 사실에 대해 자주 강조했다. 프롤레테르들을 실증적으로 관찰한다 하더라도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사명을 알 수 없다. 반대로 프롤레테르들의 계급적 사명을 이해할 때 그들의 진실한 존재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프롤레테르들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의식을 갖고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른 식으로 말해, 프롤레타리아 존재는 프롤레테르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선험적이다. 프롤레타리아 존재로 인해 프롤레테르들은 올바른 계급노선을 선험적으로 보장받는다."(15)


# 프롤레테르 :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개개인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은 기독교와 헤겔철학, 과학주의가 통합된 사상이며, 그 중에서도 중심축은 헤겔철학이다. 헤겔철학에서 "역사는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 신의 통치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신은 자신들의 선험적 작업의 의미를 여전히 이해 못하는 역사적 인간들을 매개로 자신의 도래를 완성해간다. 그런데 이 역사적 인간들에 대해 신의 작업은 선험적인 변증법을 통해 완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인간들의 의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 변증법의 모태를 알아본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직한다. 개인들의 의식에서 독립해 존재하는 역사의 의미, 그리고 개인들이 역사로부터 무엇을 얻건 그들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역사의 의미,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그 의미는 헤겔처럼 "허황된 모습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팔과 다리로 실현될 것이다."(18-9)


"마르크스가 (필연성과 실존성의 연결 고리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었던 까닭은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원 개인이 모든 존재가 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명제와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명제가 동일한 층위의 명제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철학적 층위에 속한다. 마르크스가 헤겔철학을 차용해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의 이상理想으로부터 도출되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세계와 역사의 원천으로서 자신을 의식하는 '노동'을 실천할 보편적 가능성의 존재다. 반대로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명제는 프롤레타리아화化의 역사적 과정에 대하 분석으로부터 도출되었다(혹은 그러한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명제이기를 바란다). 사실상, 이 분석으로는 앞의 철학적 전제를 정립할 수 없다."(31-2) "마르크스는 전문기술을 지닌 다양한 노동자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이상을 지닌 프롤레테르의 모습을 보았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35)


"계급적 존재로서 프롤레테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는 노동력을 지닌 다른 인간과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로서 착취를 당하지만, 또한 바로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그 자신과 완전히 동일하게 전적으로 소외된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타자'이기 때문에─다른 모든 프롤레테르들과 힘을 합해 착취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은 '자본'의 권력과 정대칭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자본에 대해 소외되어 있고 자본의 공무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프롤레테르도 그 동일한 '자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게" 될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소외될 것이다."(47-9) "따라서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한 노동자는 사회를 위해서만 노동한다. 그는 추상적 보편노동의 순수한 제공자이고, 결과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순수한 소비자다."(50)


"이제는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는 노동과 관계 맺지 않는다. 노동은 완전하게 규격화되었고, 무기체적 과정이 되었다. 노동자는 스스로 진행되는 작업을 보조하고 이것에 자신을 맞춘다. 그는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는다. 노동이 노동자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노동에 대해 무관심하다. 월말에 임금이 나오는데, 중요한 일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이런 원한어린 태도가 '자신의' 일을 하는 프롤레테르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다. 그들은 수동적인 프롤레테르를 원했을까? 그렇다면 프롤레테르는 수동적으로 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한 수동성으로부터, 이 수동성을 강요한 사람들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프롤레테르에게서 수동적인 능동성을 원했다. 그런데 그는 능동적인 수동성을 가질 것이다."(52-3)


"프롤레테르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헐벗음을 내면화하며 부르주아 세계의 폐허 위에서 보편적 프롤레타리아 사회를 이루어내는 대신, 자신들의 완전한 의존성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기 위해 헐벗음을 내면화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적 요구가 이런 식으로 대중적 요구로 바뀌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계급적 요구는 (원자화되고 서로간의 연결성이 없는 프롤레테르들로 구성된) 대중의 소비에 대한 요구로 바뀌고, 이 경우 프롤레테르들은 사회로부터, 다시 말하면 권력으로부터, 현실적으로 다시 말하면 국가기관으로부터 그들이 갖거나 창조하기 불가능한 것을 받고자 한다. 이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권력의 지위에 자신들의 대표자를 앉히기 위한 대중적 행위로 축소된다."(54-5)


"따라서 자신들이 국가에 의지하는 만큼, 역으로 국가도 노동자들에 대해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가 노동계급에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그 계급에 대해 모든 의무를 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도 노동계급이 절대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렇게 실제로는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책임지고 있다. 노동계급과 국가권력 사이에 놓인 모든 장벽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고, 계속 이렇게 된다면 상황은 다루기 쉬울 것이다. 곧 지금까지 존재해온 정치적 중개, 그람시가 말한 의미의 시민사회 고유의 제도, 자율적인 사회적 관계와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은 독점자본주의에 의해 이미 모든 현실성을 상실했다."(57-8)


"노동자들의 권력에 대한 생각, 혁명적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포스트-테일러리즘 시대에 그 생각들이 부여받던 의미와는 매우 다른 실제적인 의미를 갖는다. 권력의 지위에 오르는 일을 목표로 삼았던 그 노동계급은 비참하고, 탄압받고, 무지하고, 일정하고 안정된 거처나 직업이 없던 민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소유한 전통·엘리트층·문화·조직 때문에 노동민중 한가운데서나 일반적 의미의 사회 내에서 헤게모니를 쥘 잠재성이 있던 계층이었다. 이 계층에게는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빼앗은 다음 국가를 경영할 지위에 앉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노동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기생계급인 부르주아지, 그 탄압적 기구의 존재로 인해 부르주아지가 민중의 궐기를 우습게 보는 국가를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66-7)


"생산조직의 자율성을 파괴시킨 그 기술적 전문화·경제적 집중화 과정이 노동자들의 자율성의 원천인 예능적 기술을 파괴시켰다. 테일러리즘으로 인해,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위계와 질서의 자리에 공장의 지휘부에서 고안하고 강제한 경영자 중심의 위계와 질서가 들어앉았다. 치열한 투쟁의 과정들을 거친 다음 예능적 기술의 노동자들은 제거되고, '생산의 하사관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비록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지만 고용주 측에 속하게 됐다. 즉 그들은 지도부에서 교육 받고 선별된 다음, 다른 노동자들을 지도하고 감시할 권력을 부여받았다. 생산작업은 자율성이나 기술적 권력이 없는 원자화된 노동자들로 구성된 대중에 의해서만 수행됐다. 이런 대중에게 생산에 대한 "권력을 쟁취한다"는 사상은 의미가 없다. 적어도 오늘날의 공장에서는 의미가 없다."(69-70)


"권력의 정당성을 이루는 토대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자본주의 사회의 해결되지 않는 커다란 문제 중 하나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따른다면, 항상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지배적 위치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의 존재를 전제하고, 이 능력주의는 권력 관계들이 매우 유연하고 쉽게 변화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따라서 사회는 물적으로나 제도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더라도, 사회 내의 이런 유동성을 막아서는 안 된다. 어제의 승자가 오늘, 그보다 더 능력있는 사람이 있다면, 대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하지 않는 권력, 자신의 권력을 특정인에게 위임하려 하지 않는 권력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상, 권력은 지배적 지위를 독점한다는 것이고, 지배적 지위는 필연적으로 특권화되고 희소성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지위들 중의 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이 그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84-5)


대다수가 지배적 지위를 추구하지만, "사람들이 갖게 될 모든 지위는 이 지위에 필요한 자질과 함께,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지배적 제도의 경화증은 권력의 관료화와 더불어서 발생한다.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위해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 그는 단지 매우 작은 권력이 부여되어 있는 지위들 중의 한 지위에 오르기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더 이상 권력을 소유하지 않고, 권력의 지위들이 인간들을 소유한다. 더 이상 '자아'의 개성을 확장할 능력을 갖고 있는 개인들이 자신들에 맞추어 그 지위들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지위들이 지위를 점하는 인간들을 맞추어 가공해낸다." "이 변화는 개인 자본가가 익명적 집단, 기업가가 '은행', 고용주가 '자본'과 그 공무원들(곧 경영자들)에 의해 대체된 시기부터 현실에 뿌리내렸다. 모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휘·경영 기관이 이윤창출과 자본유통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조화되었다."(86-7)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적으로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비록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자본'에 의해 설치되어 있던 지배기구를 장악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자본의 지배와 유사한 것을 재생산할 것이고, 이어서 그들 스스로가 기능적 부르주아지가 될 것이다. 지배기구 내에서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이 점하던 자리를 차지하며 그 계급을 축출할 수 없다. 그러한 시도를 하는 계급은 권력을 이양받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지위를 이어받을 따름이다."(99-100) 사회적 생산의 토대가 되는 업무를 담당하는 "기능적 권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배관계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곧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떠맡는 것과 같다. 지배관계를 제거할 유일한 가능성은 곧 권력과 지배를 분리시키고 시민사회·정치권·국가 각각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능적 권력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전에 정해진 한정된 자리를 그 기능적 권력에 부여하는 데 있다."(101)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의 고유한 행위가 아니다." "노동자는 더 이상 "자신의" 노동에, 생산과정 내 자신의 역할에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모든 일이 그를 제외한 채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 자체는 노동자와 마주해 그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어떤 일정량의 물화物化된 행위다." 따라서 노동자가 "노동 가운데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노동의 주인이 되고, 노동을 위해 권력을 정복하는 일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노동의 본성·내용·필요성·방식들을 부정하며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만이 문제다. 그런데 노동을 거부한다는 것은 또한 노동운동의 전통적 전략과 그 조직적 형식들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곧 노동자로서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더 이상 없는 대신, 노동자로서 기능하지 않을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권력이 문제가 된다. 계급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107-8)


"노동계급과 달리, 이 비非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지도 않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낙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계급은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해, 그리고 새로운 생산기술들의 영향력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들의 해체로 생겨났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따를 때 노동계급이 지니고 있어야 하는 부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부정성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 근본화됐다." "실제로 이 비계급은 노동의 소멸과정에 따라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지적 노동의 산업화(즉 자동화와 정보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일자리를 얻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실제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지속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임시직의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노동, 곧 노동의 존엄·가치화·사회적 효용·욕망에 토대를 두었던 구舊사회가 해체되며 나타난 산물이다."(108-9)


"그들에게서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노동계급이나 다른 어떤 계급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명칭에서도, 아니면 이와 대칭선상에 있는 '실업자'라는 명칭에서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이 신新프롤레테르는 은행·관공서·청소서비스업체·공장 등 어디에서 일하건, 무차별한 직무에 일시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비노동자다. 그는 "아무 일이든" 하고, 또한 "아무나" 그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생산관계를 매개로 사회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사회의 전반에 자리한 생산기구가 '노동'을 만들어내고, 우연적이고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인들에게 우연적인 형식으로 그 노동을 강요한다." "젊은 마르크스가 모든 특수한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보편적 가능성을 그 안에서 보았던 프롤레테르는 오늘날에는 기구들의 보편화된 능력에 대항하는 특수한 개인성일 뿐이다."(113-4)


"타율성 영역은 개인들의 생활과 사회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프로그램화하고 계획화해 가장 효율적으로, 곧 가장 적은 노력과 자원을 들여 생산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자율성 영역에서는 개인들이 경제영역 바깥에서 혼자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든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데, 이 상품과 서비스는 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욕망과 취향과 상상력에 따라 만드는 것이다."(156) "사회공간을 (사회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비인격적인 일을 하는) 타율성의 영역과 (모든 것이 진행될 수 있는) 자율성의 영역으로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조직하더라도 두 영역이 어떤 경우든 서로에 대해 닫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평범화된 노동들로 구성된 사회화된 섹터의 존재를 통해 각자가 공동체의 협소한 공간을 벗어날 수 있고, 공동체가 자급자족적 경향 때문에 폐쇄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165-6)


"사회적으로 결정된 노동을 없앤다 하더라도, 혹은 각자가 객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일의 완수규칙을 내면화하도록 설정했던 외부적 의무들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해방은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해방은 필연성의 영역이 타율적인 일들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타율적인 일들의 기술적 요구사항들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확한 규칙을 정해 그 일들을 특정 사회공간 내로 한정시키는 데 있다.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후자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168) "필연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물적으로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량만을 축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일은 또한 직접적인 생산이 필요로 하는 외부의 비경제 시스템과 국가의 활동들을 축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축소는 생산기구 자체와 이 생산기구가 결정하는 노동의 분할이 조정될 때만 가능하다."(170)


"후기산업사회의 사회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국가의 철폐가 아니라 지배의 철폐다. '법'과 지배, 국가기구와 지배기구는 지금껏 항상 혼동되어 왔지만, 분리되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국가기구들은 모든 지배의 원천도 그 최종동기도 아니다. 그 기구들 자체는 지배의 사회관계 때문에(한 계급의 전 사회에 대한 지배 때문에) 존재하고,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지배양식에 자신들의 고유한 지배양식을 추가하며 그 사회관계를 연장하고 강화한다. 국가기구들에 의한 사회의 지배는 자본이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집중화를 통해 지배함으로써 생겨난 결과이자, 그 지배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지배기구를 걷어내면 나타나는 "국가는 협업과 중앙적 규제 수단들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끝으로 국가는 자율성 영역의 확장을 위해 스스로의 권력과 고유 영역을 축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186-7)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역사의 종말로서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세계 공산주의, 전 지구적 민주주의, 천년왕국 등 종류만 다를 뿐이다.

...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안내자로서보다는 신념과 정치적 행동의 견인차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과거의 도그마가 더는 우리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처음부터 거대한 속임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재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의 종언을 "환상의 종언"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 분석은 추도사가 아니다. 1945년 직후에 사람들은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했다. 악마에 사로잡힌 광기 어린 한 독재자가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었던 정치적 병리 현상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 대륙이 받은 상처를 그저 몇몇 정신 나간 인간들의 소행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으며, 그 상처가 남긴 정신적 외상이 히틀러나 스탈린의 정신세계 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좋건 싫건 간에 파시즘과 나치즘 모두 대중 정치·산업화·사회 질서라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다.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나쁜 과거를 내던지고 시간의 망각 속에 묻어버리면서 과거에 좋았던 것만을 우리의 유산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여러 가치 체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다른 것들도 존재한다. 유럽의 20세기는 이들 가치 체계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대한 이야기다.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pp.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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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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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지의 상승세와 귀족계급의 하강세가 어느 시점에서 일정한 균형을 이루어 어느 쪽도 상대방을 누를 수 없는 상태에 들어섰을 때 국왕은 어느 쪽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양자의 대립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왕권을 절대군주권이라고 하며, 절대군주 체제하에서 봉건귀족은 후퇴와 하강을 거듭하면서도 낡은 봉건권을 방어하려고 최후의 몸부림을 친다. 이 같은 상황에 놓인 18세기 프랑스 사회를 앙시앵레짐이라고 한다. 앙시앵레짐하에서 부르주아는 기회 있을 때마다 몰락하는 귀족의 토지를 사들였다.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가 봉건영주의 봉토를 살 경우 국왕에게 프랑-피에프franc-fief라는 세금을 납부하기만 하면 토지에 대한 영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1758년 말에 중농학파 케네의 저서인 <경제표>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출판된 지 약 10년 만이었다. 새로운 경제 이론과 계몽사상은 곧 절대주의에 대한 위험 신호였다. 21-2)


# 18세기 프랑스의 신분구성

1. 제1신분 가톨릭 성직자 : 주교 특권층과 하급 사제와 조제들

2. 제2신분 세속 귀족 : 전통 세습 귀족인 대검 귀족과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 귀족

3. 제3신분 그 외 나머지 : 다수의 농민과 소수의 도시 상공업자


18세기 프랑스의 농민과 부르주아는 "봉건제도하에서는 봉건적 부과를 영주에게만 바치면 되었으나 이제 절대주의 체제에서는 새로 국왕이 부과하는 각종 세금까지 바쳐야 했다. 농민이 부담하는 이 이중 조세 체계야말로 앙시앵레짐의 이중적 성격을 말하는 동시에 그 모순을 잘 보여준다.(32)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재상과 네 명의 대신, 재무 총감은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국가 최고 기간의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통일적인 국가 예산 편성도, 정책의 통일성과 일관성도 없었다." 행정구역과 별개로 "왕국의 통일을 저해하는 문화적 장벽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지방'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역사적·봉건적인 프로방스province이다." 고유의 풍속과 민법, 상법, 도량형 및 방언을 가지고 독자적인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이 지방 공동체들은 대체로 봉건사회의 대제후령大諸候領에 일치하는 것으로서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의 팽창에 저항하는 봉건적 분권주의의 아성이었다."(36-7)


"파리 고등법원은 1239년에 설치되었으며 1614년 이래 삼부회Etats-Generaux의 소집이 중단되면서 정치적인 힘이 유력해졌다. 그들은 본래 왕의 어전 재판에 함께 참석했는데, 삼부회가 소집되지 않는 마당에서는 자신들이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왕권에 대항하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고등법원 제도에 특이한 것이 있었는데, 재판관직의 매매제와 세습제이다. 16세기경부터 왕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관직 매매 관례가 생겼는데 고등법원의 재판관직도 매매되었다. 더구나 17세기 초부터는 매매한 관직을 세습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고등법원 재판관은 왕이라 할지라도 파면할 수 없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들이 주도한 "반왕反王운동은 결코 앙시앵레짐에 대한 반대나 비판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왕권을 약화시킴으로써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더욱 확대하여 국왕과 궁정 귀족의 권력과 재산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39-40)


1775년 이래 불황기에 "프랑스 정부는 최소한 두 가지 중대한 정책적 과오를 저질렀다. 하나는 1778년 미국 독립 전쟁의 참전이고 또 하나는 1786년 영-불 통상조약의 체결이다. 미국 독립 전쟁을 돕기 위해 프랑스가 쓴 돈은 무려 20억 리브르였다. 이 돈은 프랑스가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일으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1786년의 영-불 통상조약은 영국 공업 제품을 수입함으로써 프랑스 공업에 타격을 주고, 프랑스 곡물을 수출함에 따라 곡가의 폭등을 가져왔다."(56-7)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재무 총감 브리엔은 "특권 신분에 대한 지세 부과안과 인지세를 철회하고, 그 대신 20분의 1세를 모든 신분의 국민에게서 공평하게 징수하는 것으로 타협하는 한편, 삼부회를 1792년에 소집한다는 약속하에 4억 2,000만 리브르의 차입을 승인받았다." 그런데 "1787년 11월 19일 루이의 사촌 오를레앙 공이 4억 2,000만 리브르의 차입금 등록을 명한 왕명을 불법이라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61)


1788년 4월 왕이 고등법원을 무력화하려고 국왕전권 재판소Cour pleniere를 신설하자, "파리 고등법원을 선두로 전국의 고등법원이 이 새 재판제도에 맹렬히 항거하였다. 그들은 새 재판소의 설치를 반대하고, 모든 법원에 파업을 선동하고, 삼부회와 지방 삼부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 일로 지방에서 무질서와 폭동이 일어났다."(62) 네케르가 혼란 수습책으로 제시한 국왕전권 재판소 폐지와 삼부회 소집 요구를 왕이 받아들인 것은 왕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혁명을 시작한 귀족들은 "열기를 뿜으면서 개막되는 개혁을 잃어버린 봉건권의 회복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파트리오트patriote(혁명파)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개혁가들은 그 개혁을 일체의 과거를 태워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삼부회의 선거 방법과 구성 문제에서 벌써부터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대립과 충돌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63-4)


우여곡절 끝에 열린 삼부회가 특권 신분과 제3신분 간의 대립으로 이어지자 "6월 12일, 제3신분은 단독으로 대의원 위임장 심사에 들어갔다." "6월 17일 19명의 제1신분 대의원을 포함한 제3신분 회의는 자기들이야말로 프랑스 전체 국민의 대표자임을 선언하여 490 대 90으로 국민의회의 성립을 결의하였다. 이 중대한 역사적 선언과 함께 국민의회는 자신의 결의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해산하지 않는다는 것과,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건 강제로 해산되는 경우에는 전체 국민이 납세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국민의회가 가결한 결의에 대해서는 왕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이제 제3신분 의회는 제3신분이라는 특정 계층의 대표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이라는 일반의지의 대표 기관이 되어 국민의회라는 명칭을 쓰게 된다." "20일 국민의회는 회의장을 구기관球技館으로 옮겨, 성문 헌법이 제정되고 그 헌법이 확고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결코 흩어지지 않을 것"을 엄숙히 선서하였다.(71-2)


# 테니스코트의 서약


국민의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왕이 군대를 비밀리에 이동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과격한 선동가들의 구호가 남발되자 "7월 14일 무장한 폭동시민이 학정과 봉건제도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였다. 형무소 소장과 파리 시장이 시청 옆 광장에서 폭도에게 처형되었다. 그 후 3일간 폭동은 거리를 휩쓸었다."(76) "사흘 후 이 폭동은 성스런 혁명으로 승화되고 폭도는 영광스런 애국자, 즉 파트리오트patriote가 되었다." "왕은 파리의 폭도가 임명한 새 시장 바이이와 국민 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 후작을 그대로 승인하고 시장 바이이가 건네주는 삼색 휘장을 받아 모자에 꽂았다. 왕의 파리 방문과 일체의 행동은 혁명의 승인이며 재가였다. 왕은 스스로 왕권의 실추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제 혁명은 제1막을 내렸다. 혁명에 굴복한 왕은 자신의 왕위를 보전할 수는 있었으나, 그의 머리 위에는 프랑스 국민─그 대표기관인 국민의회─이라는 새 주권자가 있다는 것을 승인하였다."(77)


"국가의 공권력은 마비되고 폭력과 공포가 전국적인 규모로 번졌다. 이른바 '대공포La grande peur'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 대공포는 귀족 계급에 대한 농민의 증오와 단절을 부추기고 반봉건적 농민 폭동을 격화시키는 동시에 혁명을 지키기 위한 국민의 무장을 촉진시켰다. 농민반란은 그저 불만을 터뜨리는 폭동에 그치지 않고 광범한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였다."(79) 혁명 정부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수한 교회 재산을 담보로 아시냐Assignat라는 일종의 정부 보증 지폐를 발행하였다. 1789년 12월 19일에 처음 발행한 액수는 4억 리브르였다. 아시냐는 통화의 기능은 하지만, 원칙적으로 국유화한 교회 재산의 구입에 쓰는 정부 발행 어음이었다. 그러므로 정부는 아시냐를 국유재산 매입 대금과 납세금으로 회수하면 전부 태워버려야 했다. 그러나 일부만 소각하고 대부분 그대로 둔 채 계속 발행함으로써 가치의 하락을 초래하였다."(92)


프랑스 교회는 일찍부터 로마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 왕권이 성직의 임면과 교회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등 독립성이 강했다. 그런데 국민의회는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1790년 7월 12일 성직자 민사 기본법을 가결하여, 헌장 준수 서약을 하지 않는 선서 거부자에게 공공 의식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령으로 선서 거부 성직자가 많은 지방에서는 주민의 세례, 결혼, 장례가 일체 거행될 수 없었다. 이것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혼란을 의미하였다." 예상 밖의 큰 혼란에 놀란 국민의회가 1791년 4월부터 선서 거부 성직자에 대한 관용 조처를 취하자, 도리어 "거부 성직자는 종교적 박해에서 승리한 격이 되고 선서 성직자는 마치 종교적 불순이라도 범한 꼴이 되었다." "여기서 선서 성직자들은 당시의 당시의 국민의회를 지배한 라파예트와 그 일파에서 이탈하여 더 과격한 자코뱅파Jacobins로 몰려갔다."(95-6)


1791년 1월 말에 자코뱅 클럽과 혁명파의 코르들리에Cordeliers 클럽에서 왕의 도망 계획이 폭로되었다. 왕의 도망 사건 처리를 두고 "혁명파의 자코뱅 클럽이 둘로 나뉘었다. 의회에서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에 반대하는) 바르나브와 행동을 같이한 라메트 일파는 16일 자코뱅 클럽에서 분리하여 라파예트 일파와 함께 이른바 푀양Feuillants 클럽을 따로 만들었다. 이제 자코뱅은 로베스피에르와 페티옹 같은 과격파만의 클럽이 되었다." 푀양 클럽은 17일 샹 드 마르스에서 열린 공화정 요구 집회를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의회를 좌우하는 힘은 이른바 삼두파─라메트, 바르나브, 뒤포르─의 손아귀에 들어갔다."(106) 삼두파는 9월 3일 프랑스 국민을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으로 양분하는 헌법을 제정, 반포했는데, "이것은 푀양파의 보수적 혁명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자코뱅 클럽을 중심으로 한 민주 세력에게 거센 반격의 근거를 제공했다."(107)


# 1791년 헌법의 선거법

1. 수동시민 : 최소 3일간의 노동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내지 못하는 시민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

2. 제2차 선거위원 : 10일간의 노동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한 사람에 한정

3. 제3차 선거위원 : 국회의원, 재판관, 도 평의원, 주교 등을 선출하기 위한 300-800명의 지역 명사들

4. 국회의원 : 1마르크의 은화(약 50프랑)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한 자에 한정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필니츠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프랑스 공화정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8월 3일 드디어 왕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일이 일어났다. <모르퇴르>라는 신문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 사령관 브룬스비크의 성명을 보도했는데, 이것이 왕과 적군의 내통을 백일하에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자코뱅과 프랑스의 모든 애국자를 협박하였다." 무장한 연맹병과 국민 방위대, 수동 시민이 봉기한 "8월 10일 사건은 파리 시의회 즉 파리 코뮌을 프랑스의 실권자로 만들었다.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요구대로 왕권의 일시 정지를 선언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 국회인 국민공회의 소집을 가결했다. 왕권은 우선 잠정적으로 정지되었지만 결국 영원히 폐지될 터였다. 왕은 탕플Temple에 유폐되었다." 이제 봉기를 주도한 노동자, 빈민, 영세 상인으로 구성된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125-7)


"자코뱅당은 브리소의 지롱드파와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Montagnards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 분열은 왕권의 소멸과 함께 우익의 푀양이 실각함으로써 집권파 내부에서 일어난 권력 싸움이라는 정치적 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념과 목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사회적·계급적 분열이었다. 지롱드파의 혁명 이념이 부르주아의 경제적 자유와 사유권의 절대를 비롯한 시민적 자유에 있었다면, 산악파의 혁명 이념은, 그런 사유권을 자유로이 행사하려고 하여도 소유한 것이 없는 민중에게도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소유를 보장하려는 것이었다."(132) 11월 20일 튈르리 궁에서 지롱드파를 포함한 세력들이 왕과 반反혁명을 공모한 비밀문서가 발견되자, 12월 3일 의회는 "누구든지 프랑스에서 왕정의 재건을 제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결의하여 왕정복고의 길을 막고, 의회의 모든 투표를 지명점호제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143)


# 지명점호제 : 모든 의원은 이름이 호명되면 가부可否 의사를 밝히고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 처형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의 반불 동맹이 3월 이후 착실히 형성되어 갔다. 전쟁은 이제 전제군주들과 가톨릭 성직자 및 귀족들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국민 대 국민의 전쟁으로 변질하였다. 따라서 전쟁은 프랑스의 혁명만이 아니라 프랑스의 독립과 국가적 운명을 건 사생결단의 전쟁이 되었다."(147) "의회 안에서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싸움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을 때 사태를 결정한 것은 결국 상퀼로트의 봉기였다." "종래에는 반反혁명 혐의자는 왕당파뿐이었는데, 이제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한 지롱드파도 혁명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누가 진짜 애국자이며 누가 가짜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153-4) 로베스피에르파는 민중 봉기를 선동하는 극좌 에베르파와 과감한 사회정책에 반대하는 우익 당통파를 모두 숙청하고 행정부를 장악했지만, 그 역시 테르미도르 쿠데타에 휩쓸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산악파는 에베르와 당통에 이어 로베스피에르마저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나 그 과정에서 혁명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힘이 극도로 약해졌다.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는 데 협력한 평원파가 어김없이 간파한 사실도 바로 그것이었다. 평원파는 이제 자체의 힘만으로도 국민공회의 다수당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181) 로베스피에르가 쌓아올린 제도를 공격하는 데 앞장선 "평원파는 부르주아 출신들로서 혁명과 공화국을 왕당파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려는 의사는 강했으나, 방토즈법이 보여준 바와 같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왕정의 회복 못지 않게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서민 계급을 자기들에게 종속시키려고는 했으나 서민 계급과의 연합에 의해 혁명과 공화국을 지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평원파의 이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 '뮈스카댕muscadin'이라는 부잣집 청년 건달패의 반反자코뱅 테러이다."(182-3)


# 방토즈Ventose 법 :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분배하는 법. 무분별한 평등주의가 아니라 재산의 극단적인 불균형을 시정하여 소토지 생산자층을 국가 기반으로 삼으려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1795년 8월, 공회에서 채택된 공화 3년 헌법은) 1789년의 인권선언에 기록된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는 기본 조항을 버리고, "평등은 법이 만인에게 동일하다는 데에 존재한다"고 하여, 평등을 사법적인 것으로 후퇴시켰다. 그리고 인민의 사회적 권리를 거부한 이 헌법은 보통선거제를 폐지하고 재산에 기초한 제한선거제로 뒷걸음질했다."(187) "당시 파리 시민의 생활고와 불만을 충분히 이용한 왕당파는 (테르미도르파가 왕당파의 복귀를 막기 위해 제안한) '3분의 2법'의 불법성을 들어 대대적인 반란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국민공회 의사당인 튈르리 궁을 포위한 폭도는 약 2만 내지 2만 5,000명이었는데 진압에 나선 군인은 4,000명에 불과하였다. 중과부적으로 공회 측이 불리했으나 이를 역전시켜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자가 있었다. 바로 후일의 대영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188-9)


# 3분의 2법 : 새 입법부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의석은 반드시 현재의 국민공회 의원들로 채워야 한다고 규정한 법


새롭게 출범한 총재 정부가 재정 파산과 대외 전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자, "자코뱅 잔당이 팡테옹 클럽이라는 과격파 조직을 만들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팡테옹 클럽에는 공화 3년 헌법을 비난하고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을 후회하고 1793년 헌법의 부활을 주장하는 좌익의 모든 세력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끌고 또 총재정부가 가장 무서워한 그룹은 그라쿠스 바뵈프를 중심으로 하는 과격한 평등주의자들이었다."(192)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은 자신의 추방을 결의한 500인회의 자코뱅과 원로원의 공화파를 총검으로 위협하여, "보나파르트, 시에예스, 뒤코스의 3인으로 구성되는 임시 통령정부Consulat의 조직을 공포하였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0년 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207)


"바라스의 생각은 쿠데타가 끝나면 보나파르트를 다시 전장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고, 시에예스의 생각은 보나파르트를 실권 없는 최고권자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오산이었다."(208) 12월 15일 공표된 "헌법에는 (시에예스가 구상한 실권 없는 국가원수로서의) 대선거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최고 행정권자인 제1통령에게 독재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세 사람의 통령이 있었으나 나머지 둘은 자문역에 불과한 들러리였다. 두 명의 제2통령에는 캉바세레스와 르브룅이 임명되고 시에예스와 뒤코스는 임시정부에서 밀려나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다."(211) "나폴레옹은 장관들의 연합을 막으려고 각 부에 협의회를 만들고 의장에는 참의원 의원을 앉혔다. 통령정부의 모든 기구와 관직은 제1통령의 독재권을 집행하는 손발이었다." "그는 삼부를 통어하는 독재자였다. 그의 행동은 입법부에도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212-3)


# 종신 통령을 향해가는 나폴레옹의 세 가지 과제

1. 더 많은 군사적 승리 : 이탈리아 재탈환, 영국과 강화협상(아미앵 조약, 1802년 3월 25일)을 맺어 대륙의 패자로 군림

2. 로마 교황과의 화해 : 교황과 종교 협약을 체결(1802년 4월 18일)하여 (왕당파가 다수인) 가톨릭 세력의 지지 획득

3. 입법부의 공화파 잔존 세력 제거 : 1802년 선거에서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반정부 공화파 의원들 축출


1802년 8월 4일, "보나파르트가 직접 기초한 새 헌법이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공화 10년 테르미도르 16일 헌법에 관한 원로원령'으로 공포되었다. 이제 보나파르티슴이라는 특이한 새 정치제도가 국민의 동의 위에 수립되었다."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고 제1통령의 전제를 강화한 "공화 10년 헌법이 수립한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공화제이나 사실상으로는 군주제였다. 그러므로 2년 뒤 제정이 선포되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226-7) "10년 임기 제1통령도, 종신 제1통령도, 이제 또 세습 황제도 국민 동의의 형식을 빌리는 것에 보나파르티슴의 특색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국민의 동의가 아니라 실은 기정사실에 대한 국민의 체념의 표현이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혁명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낳은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229)


"나폴레옹은 마렝고의 승리에서 귀국한 지 두 달 뒤인 1800년 8월 12일 저명한 법학자들로 민법전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 장씩 초안이 될 때마다 토론과 심의를 거쳐서 입법부의 의결로써 확정 공포하였다. 36장을 모두 합쳐서 '민법전Code civil'이라는 하나의 법률로 선포한 것이 1804년 3월 21일이었다. 민법전은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를 유지했으나 혁명적 입법의 철학적 원리를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혁명의 집약인 동시에 혁명의 수정이었으며, 시민혁명의 진보성과 보수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민법을 종교적 영향에서 해방시키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혁명의 원리를 방어하고, 신분의 세습을 금지하고 상속과 소유에 관한 혁명적 입버의 일반적 원리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민법전은 가족 관계에서 가장의 우월적 지위와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규정하여 보나파르티슴의 권위주의적 색채를 반영하였다."(235)


"나폴레옹의 군국주의는 많은 농민을 군대로 징발하였다. 따라서 농민은 나폴레옹을 싫어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혁명을 통하여 새로 얻은 농토를 나폴레옹의 군사력이 안전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강력한 군사력이 등장하기 이전에 농민은 항상 자신의 새 토지에 대하여 불안해했는데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토지 문제에 관한 한 혁명의 결과를 철저히 보호하는 데 세심하였다. 그만큼 농민은 나폴레옹에게 고마워했고, 또 그만큼 보수화하였다. 농민의 보수화야말로 보나파르티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나폴레옹은 전쟁에 의하여 흥기하고 전쟁을 통하여 강해지고 전쟁 때문에 몰락하였다. 그의 생애는 전쟁과 함께 있었다. 전쟁이 계속되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도 무의미했다. 따라서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 점점 강력해진 그의 권력도 지속적인 전쟁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237-8)


# 아미앵 조약 : 지중해 재해권과 이집트를 영국에 빼앗기고 내정을 정비할 필요가 있던 나폴레옹과 유럽 국가들과 무역 재개를 바라던 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진행된 평화조약.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왕자가 되었다. 1802년 3월 25일 정식 조인


# 아미앵 조약 파기 이후의 전쟁 추이

1.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격파 (프레스부르크 평화조약)

2.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 점령, 홀란드 왕국으로 개조

3. 남부 독일에 라인 연방 창설

4. 1805년 8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 퇴임으로 신성로마제국 소멸

5. 1806년 10월 아우어슈테트와 예나에서 프로이센군 격파

6.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 1806년 11월 21일) 실시와 폴란드 왕국의 농노제 폐지

7. 1807년 5월 단치히 점령, 러시아군 격파(쾨니히스베르크, 틸지트 점령)하고 틸지트 조약 조인


"당시 유럽의 정치사회적 구조에 비추어볼 때 원래 나폴레옹 전쟁에는 두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대륙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키는 면이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군의 진격은 나폴레옹 법전의 진군을 의미하고 나폴레옹은 전제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는 자로 환영 받았다."(246) 그러나 일찍이 시민혁명을 실현하고 산업혁명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 영국은 사정이 달랐다. 영국을 타겟으로 삼은 "대륙봉쇄를 뒷받침한 두 번째 명분은, 영국 상품을 배척하고 프랑스 산업을 보호하는 보호무역주의의 경제사상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상품을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밀어내고 다음에는 점령 지역에서 몰아내더니, 드디어는 대륙 전체에서 쓸어내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산업의 발달이 대륙의 상품시장을 그만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륙봉쇄를 가능케 한 전제 조건은 무엇보다도 유럽의 군사적 지배의 완성이었다."(248-9)


# 대륙봉쇄의 허점

1. 영국 상품의 배제는 종속국가들의 공업을 희생시킨 프랑스 공업의 독점을 의미

2. 공업가들에게는 유리했으나 무역상들은 큰 타격

3. 국가들마다 영국과의 경제 관계가 상이함(수출길이 막힌 농산물 가격 폭락, 수입길이 막힌 공업제품 가격 폭등 등 부작용 속출)


대륙봉쇄 와중에 행해진 "교황령의 점령과 병합은 나폴레옹의 큰 실책이었다. 각국의 가톨릭교도들이 상상 외의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가톨릭교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 스페인 국민이 받은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스페인 국민은 나폴레옹이 안겨준 새 헌법보다 가톨릭 신앙과 자기 나라 왕실을 더 사랑하였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시민과 농민이 스페인 군인과 함께 프랑스군에게 무서운 피의 반란을 일으켰다.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는 스페인만이 아니라 나폴레옹 지배하에 있던 여러 민족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는 발화점이 되었다."(253) 대륙봉쇄로 가장 큰 손해를 입은 것은 밀, 목재, 대마, 수지의 가장 큰 시장을 상실한 러시아 지주계급이었다. "(마침내)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12월 31일 칙령을 반포하여, 중립국 선박의 러시아 항구 입항을 환영하는 동시에 견직물과 포도주 및 브랜디의 수입관세를 높여서 프랑스의 주요한 수출입품을 배척하였다."(260)


# 이후의 전쟁 추이

1. 1812년,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군 대패(추위, 배고픔, 게릴라전)

2. 1813년 3월 1일, 러시아와 프로이센 칼리슈 동맹 체결

3. 영국의 웰링턴 장군,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에 대승

4.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수상, 러시아 및 프로이센과 라이헨바흐 비밀조약 체결

5. 1813년 10월 16일, 라이프치히 해방전쟁에서 반불 동맹군 승리

6. 1814년 3월 9일, 쇼몽 조약 체결(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나폴레옹과 평화조약을 맺지 않고, 평화조약 이후라도 20년간 상호방위한다는 내용)

7. 3월 30일, 동맹군 파리 입성


나폴레옹이 유폐된 후, "연합국 사이에 최소한의 의견 일치를 볼 수 있고 또 프랑스 국민의 최소한의 합의를 얻을 수 있는 해결책은 사실 부르봉 왕가의 복구 이외에 달리 신통한 길이 없었다." 루이 18세가 반포한 헌장은 "국민대표가 제정한 헌법이 아니라 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흠정헌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나, 왕정의 복구가 혁명 전의 앙시앙레짐의 복구를 의미하지 않음을 보장하였다."(279-80) 그러나 1815년 3월 1일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유럽과 프랑스에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첫째, 부르봉 왕가가 진정한 통치자의 자격이 있느냐의 문제였고, 둘째는 프랑스 국민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사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연합국의 입장에서는 프랑스를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이전과 같은 관계에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1814년의 평화조약은 나폴레옹을 징계하기는 했으나 프랑스 국민을 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과연 옳았느냐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290)


# 제2차 파리조약(1815년 11월 20일)

1. 프로이센군이 라인 강 좌안 지방 점령

2. 스위스 접경 위링그 지방의 군사시설 파괴

3. 7억 프랑 배상금 지불

4. 4대 연합국 대사들로 구성된 관리 위원단의 감시와 지시


다시 복원한 루이 18세가 직면한 문제는 혁명과 나폴레옹이 성취한 터 위에 안정된 입헌군주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지만,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극우 왕당파는 입장이 달랐다. "왕당파는 귀족과 성직자와 지방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였고 또 그 지지를 받았다. 이 당에는 샤토브리앙 같은 저명한 작가나 빌레르 같은 식견 있는 정치가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프랑스 혁명을 광적으로 증오하고 실질적인 반혁명을 노린 극우였다. 왕이 그들을 자기보다 더 왕에게 충성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을 만큼 그들은 왕의 온건한 정책을 괴롭혔다. 특히 왕을 한결 더 괴롭힌 것은 그들의 사실상의 두목이 왕의 아우 아르투아 백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루이 18세가 1824년에 서거하면 샤를 10세로 즉위하게 될 사람인데, 그런 왕위 상속자가 헌장을 무시하는 백색테러의 선두에 서 있었으니 프랑스가 이제 실현해야 할 입헌군주정치의 희망에 먹구름이 드리웠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295)


# 왕당파 이외의 정치세력

1. 독립파 : 망명 귀족의 횡포를 미워하는 도시 부르주아지, 혁명정부에서 매입한 재산의 몰수를 두려워하는 지주, 나폴레옹을 사모하는 군인들의 집합체(콩스탕, 쿠리에 등)

2. 입헌파 : 혁명과 반혁명 모두를 멀리하고 헌장의 기반 위에서 복고 왕정의 안정을 바라는 명사 집단(조르당, 기조 등)


1824년 9월 샤를 10세가 즉위하자, 왕당파들이 추진한 계획은 "교육과 호적 및 혼인 사무를 교회에 위임하는 일, 혁명 기간에 국가가 몰수한 망명 귀족의 재산을 배상해 주는 일, 민법을 개정하여 세습적인 귀족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는 일 등이었다."(306) 앙시앵레짐 부활 음모에 맞서 "1830년 7월 27일부터 파리 시민은 시내 요소요소에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국민방위대는 1827년에 해산되었으나 대원들은 아직도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나섰다. 낭만적인 혁명의 물결이 순식간에 전 시가를 휩쓸었다." "샤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군대의 힘으로 의회를 항복시키는 것이었는데, 많은 병력을 아프리카 알제 원정에 투입한 그에게는 그럴 만한 군대가 없었다. 그는 센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왕의 목숨을 노리는 폭도들을 피하여 생애 세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부르봉 복고 왕정은 워털루 이후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311)


의회가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추대한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 대혁명 초기 왕족으로 루이 16세에 반대한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조세프의 아들이었다. 조세프는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한 시해파로서 '평등공 필리프'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나 1793년에 자코뱅파에게 처형되었다."(312) "7월혁명은 부르주아가 내세운 민권 사상의 승리였으며, 대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을 통하여 이미 수립된 바 있었던 부르주아의 정치적·사회적 우월권이 재확립된 사건이었다. 이 혁명으로 이제는 앞으로 망명 귀족이 부르주아의 토지 소유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영원히 사라졌다."(315) "7월왕정 시대의 프랑스에서는 정치적·이념적으로 최소한 네 줄기가 뚜렷한 형태로 각축하기 시작하였다. 극우의 정통주의, 극좌의 공화주의, 그 중간에 입헌군주주의로서의 오를레앙주의, 그리고 현대 프랑스에 특이한 보나파르티슴으로."(319-20)


1831년, 최저임금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리옹의 폭동을 정부가 무력 진압하자 노동자들은 "7월왕정을 극도로 불신하게 하였다. 거기서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스스로 만든 강력한 노동조직에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어떤 정치조직도 불신하는 프랑스 특유의 생디칼리슴이라는 노동운동의 씨앗이 이때 배태하기 시작하였다."(322) 1840년 이후 중정 정책을 편 기조 내각이 성립하면서 7월왕정은 나름의 안정과 번영을 누렸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정부 불안이 숨어 있었다. 노동자의 자유는 허위였다. 노동문제는 정부가 조속히 정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심각한 사태를 낳을 만큼 나날이 그 심각성을 더해 가고 있었다." "더구나 1833년 실시된 초등교육법은 글을 읽을 줄 아는 국민의 수효를 늘렸고, 또 인쇄술과 제지법의 발달은 책과 신문 등을 훨씬 염가로 제작할 수 있게 하여 더 많은 국민에게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갖게 하였다."(329-30)


# 기조의 중정 정책politique du juste milieu : 회복된 자유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주력하는 정책


7월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1847년 7월부터 시작된 개혁 연회 방식의 선거법 개정 운동에서 촉발되고 마침내 무장 봉기로 이어진 1848년 2월혁명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1815년 이래 한번은 보수적인 또 한번은 자유주의적인 입헌군주정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하고 말았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 자체를 부정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자는 프랑스 혁명은 인정하였으나 상층 및 중층 부르주아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실패하였다. 오를레앙 왕가는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국민주권의 원리를 시인하면서도 신흥 부르주아에 의한 권력 독점을 위해 지나친 제한선거를 고집하다가 무너졌다. 복고 왕정은 정통파를 만들어내고, 7월왕정은 오를레앙파를 만들어내어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정치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프랑스의 정치 무대를 차지하는 일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341)


# 2월혁명의 상황 전개 

1. 파리 제12구의 개혁 연회banquet et reforme를 정부가 금지

2. 개혁파는 1848년 2월 22일로 연회 개최를 연기

3. 22일 군중 시위가 제압당하자 과격파들이 무장 봉기 조직

4. 기조 내각 해산과 국민 방위대의 혁명파 가담

5. 정규군 지휘권 마비와 무장해제

6. 루이 필리프 퇴임


2월혁명으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시민 평등의 원리에 따라 3월 5일 보통선거제를 결정하였다.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반혁명세력은 유권자가 24만에서 갑자기 960만으로 늘게 되는 사실에서 승산의 요인을 발견하고 있었다. 1833년의 초등교육법이 실시되어 문맹률이 많이 낮아지고 대중용 출판물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유권자는 아직 대부분 문맹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농민이었는데 그들의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 의식을 좌우하는 것은 교구 신부들이었다."(346) 농민들에게 공화국이란 소란 그 자체였는데, "혁명정부가 새 농지법을 재정하여 개인의 토지를 재분배하거나 국유화할 것이라는 소문에 기절초풍하였다." 결국 총선거의 결과는 "정통파 등 우익 왕정파가 차지한 약 150석과 좌익의 사회주의자가 얻은 약 100석을 제외한 나머지 600석 이상이 중도파에게 돌아갔다. 파리에서조차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은 인기가 없었다."(347-8)


팔루 일파는 국립 작업장을 폐쇄하여 노동자 폭동을 유도하였고, 그들의 생각대로 6월 21-23일에 걸쳐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정부군이 투입되어 처참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폭동은 진압된다. "폭동의 와중에서 탄생한 카베냐크의 새 정부는 내각의 형태를 취했는데, 새 정부는 이제 위험한 요인을 일체 단호히 제거하였다. 국립 작업장 폐지, 온갖 종류의 클럽 폐쇄, 폭동 진압에 응하지 않는 공화적인 국민방위대의 무장해제 또는 해산, 신문지법의 부활에 의한 언론 탄압, 하루 열두 시간으로의 노동시간 연장, 온갖 빛깔의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과 감시 등 공화국은 이제 이름뿐이고 반동이 완전히 지배하였다."(352) 이후 12월 10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카베냐크, 라마르틴, 르드뤼 롤랭이 각각 공화주의의 강온파를 대표하여 서로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모두 어이없이 낙선하였다. 당선자는 난데없는 제4의 후보자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었다."(354)


#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당선 요인

1. 영웅 나폴레옹의 전설과 후광

2. 공화주의자를 배격한 농민표 획득

3. 6월 폭동 이후 노동자들마저 공화주의자들을 불신

4. 정통파와 오를레앙파가 공화주의보다 보나파르티슴을 선택


장기 집권을 꿈꾸던 나폴레옹 3세는 1851년 12월 1일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는 국민주권을 믿지도 않았고 공화국을 수호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나폴레옹 3세의 권력은 두 차례의 쿠데타에 힘입은 것이었으므로 국민의 자유 박탈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보상은 경제적 번영과 외교의 성공이었다. 쿠데타에 의한 권력이란 합헌성과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언제 전복될지 알 수 없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 존립을 위해서는 항상 뭔가 잘 하고 있다는 갈채를 국민으로부터 계속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런 갈채가 그치는 날이면 권력은 불안해진다. 그리고 국민은 그 권력을 지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경제적 번영과 외교의 성공에서 그런 갈채를 받고 있었다. 특히 외교적 성공이란 군사적 승리와 함께 일반 국민의 눈에 잘 띄는 현란한 것이다. 여기서 나폴레옹 3세는 크림 전쟁 후에도 계속 외교적 성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365-6)


# 나폴레옹 3세의 주요 행보

1. 크림전쟁 : 영국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흑해 진출 저지

2. 이탈리아 통일 :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통일 운동을 부추겼지만 교황과 국내 가톨릭 세력의 지지 상실

3. 자유무역 정책 : 영국(1860),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1861), 프로이센(1862)과 자유무역협정 체결

4. 공화파와 타협 시도 : 의회 권한 확대, 노동자 결사법 제정

5.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 휴전 중재 : 비스마르크의 외교 수완에 농락당하면서 독일 통일을 목전에 두게 됨

6. 멕시코 원정 실패 : 미국의 먼로주의와 멕시코 공화파의 저항에 밀려 철수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배경

1. 오스트리아에게 승전하면서 북부 독일연방의 맹주가 된 프로이센이 중부 유럽의 최강국으로 등장. 아울러 프랑스 영향권에 있는 남부 독일까지 정복하여 독일 통일을 완성하려는 야망을 간직

2.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의 레오폴트 공이 스페인 왕에 즉위한다는 소문이 파리에 퍼짐(1870년 7월) : 좌우협공 위기에 빠진 프랑스

3.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레오폴트 사의 표명

4. 프랑스 외상 그라몽이 향후에도 호엔촐레른 왕가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는 확약을 요구하자 레오폴트 왕이 격분

5. 비스마르크가 이를 전쟁의 구실로 삼아 양국 국민을 선동

6. 프랑스 의회 전시 채무 가결, 선전 포고(7월 19일)


"9월 2일 (세당에서) 마크마옹 원수 휘하의 전 부대는 황제 나폴레옹 3세와 함께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의 긴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굴욕적 참패였다. 파리 시민은 이런 참패를 가져온 제정을 더 존속시킬 수 없다고 다짐하였다. 9월 4일 드디어 혁명이 일어났다."(382) 그러나 혁명으로 구성된 임시 국방정부는 "1792년의 공화국처럼 과격하지도 않았고 1848년의 공화국처럼 분열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새 정부는 출발부터 대체로 온건한 공화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385) 파리가 프로이센군에게 포위 당하자 "국민방위대와 일반 시민은 대부분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고 진심으로 독일군의 박멸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이에는 "블랑키보다는 차라리 비스마르크"라는 구호가 점점 퍼져 나갔다. 이 구호는 보수적인 정부의 생각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과격파의 혁명보다 독일로의 항복을 택하려고 하였다. 이런 태도가 과격파의 눈에 반역으로 보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393)


"(1871년) 3월 18일 파리에서 파노라마처럼 일어난 이 극적인 사건들은 모두 즉흥적인 것이었다. 티에르의 작전 계획 이외에는 미리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작전 계획도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짜여진 것이 아니라 다분히 즉흥적인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계획은 오류투성이였다. 새벽의 기습은 파리 시민에게는 청천벽력처럼 너무나 의외의 사건이었다. 거기에 대응한 모든 행동도 순간순간의 상황에 따라 취해진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르콩트와 토마의 처형도, 브뤼넬의 병영 습격도, 비누아의 철군도, 티에르의 정부 철수 결정도 모두 순간순간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의 돌발 앞에서 취해진 일들이었다. 3월 18일 사건은 본래 의미의 봉기가 아니었다. 파리 주민과 방위대의 폭동은 정부에 대한 피동적인 자연발생적 행동이었다. 어쨌든 현대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세계사에서 가장 끔찍하고 가장 논란이 많은 파리 코뮌이라는 미완성 혁명의 불길이 이제 가눌 수 없이 드높이 솟았다."(408)


# 1871년 5월 28일 파리 코뮌 붕괴


"톰슨은 1871년의 파리 코뮌과 그해 봄 거의 동시에 지방 대도시에서 일어난 코뮌들은 1789년 이래로 이어져 온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이 양산한 착잡한 분규들을 뒤돌아볼 때 이들을 매듭짓는 과정 중 최대의 것으로서, 그 후부터 프랑스는 혁명적 전통을 돌아볼 때면 코뮌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폭력에 대한 호소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톰슨은 파리 코뮌을 19세기 프랑스의 역사를 특정지었던 공화적·혁명적 전통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파리 코뮌의 처절한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폭력에 의한 혁명 기도를 포기하게 하여 평화적 타결과 화해의 길을 열게 했다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제3공화국의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한 세력은 혁명적인 공화주의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적 전통에 반대해 온 보수 세력이었는데, 그러한 의외의 현상을 일어나게 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파리 코뮌이었다는 것이다."(432-3) 


# 뷔리의 파리 코뮌 평가

1. 자본과 노동, 수도와 지방 사이의 오해가 빚은 비극으로서, 1789년 이후 줄곧 유지해 온 파리의 정치 주도권 상실

2. 좌익 과격파를 거세하여 폭력과 불안정, 사회적 위기를 동일시하던 관념 불식

3.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 지연

4. 국민방위대를 해체하여 민중 데모크라시의 원천 세력 제거

5. 제3공화국 탄생의 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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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코뮌 고려대학교 교양총서 4
가쓰라 아키오 지음, 정명희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1848년 2월혁명의 결과 제2공화정부가 태어나고 보통선거가 선언되었을 때, 부르주아 공화파 임시정부는 노동자 세력을 철저히 진압하고 홀로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농민들의 지지를 얻은 루이 나폴레옹이 압승하자 권력의 항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1851년 12월 21일의 국민투표는 약 740만 표 대 60만 표라는 압도적인 표 차로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추인했고, 이듬해 1월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하여 그 권한을 대폭 확장시킨 신헌법이 발표되었다." 꾸준히 제정 부활을 도모한 끝에 1852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고 제2제국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1852년의 헌법을 약간 수정·보완한 '제국헌법'에 의하면 행정·군사·외교의 전권은 황제에게 집중되고, 도지사prefet, 지방장mairie을 포함하여 모든 관직은 임명제로 바뀌며, 장관은 황제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책임내각제는 완전히 부정되었다."(28-9)


"카를 마르크스는 제2제정의 지배체제를 보나파르티즘이라고 부르고, 그 국가를 보나파르트 국가라고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보나파르티즘이란, 부르주아지가 자체적으로 국가를 통치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노동자계급이 아직 그 능력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시기에, 계급들 사이의 조정자를 표방하여 보수적인 소토지 소유 농민=분할지 농민을 정치권력의 기반으로 삼아 성립된 반동적 독재체제이며, 자본에 의한 노동의 노예화를 실현한 국가권력의 가장 불순한 형태로 규정된다." "많은 노동자는 황제사회주의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으며, 산업자본주의는 제정권력에 질서 유지와 산업의 보호·장려를 기대했다. 부르봉 정통 왕조주의에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가톨릭 세력도, 정부가 교회의 활동에 편의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제정을 지지했고, 또한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농민의 사대주의적 경향은 보나파르트 가家의 카리스마적 권위가 뿌리 내리기에 훌륭한 토양이었다."(29-30)


"나폴레옹 3세는 권력의 자리에 앉자, 혁명의 재발을 방지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대大부르주아지와 제휴하여 적극적인 경제팽창 정책을 내세웠다." "이 시기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는 것은, 생시몽주의자 유대인 프레르 형제가 설립한 '크레디 모빌리에'(동산은행動産銀行)로 대표되는 거대한 투자은행의 출현과 수도 파리를 시작으로 대도시에서 실시된 대규모 도시계획사업이다."(32-3) 1860년 나폴레옹 3세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영불통상조약을 맺어 자유무역 체제로 돌아서자 "대부분의 산업자본가는 일제히 반대의 불길을 당겨, 황제의 이탈리아 정책에 반감을 갖는 가톨릭 세력과 손잡고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36-7) 황제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기대했지만, 영국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접하면서 "정치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던 노동자는, 이제 황제의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me'의 포로가 되는 것을 감수하지 않게 되었다."(41)


"1867년 공황을 계기로 하여 사회정세에 나타난 가장 현저한 변화는, 도시의 공장노동자가 노동운동의 제1선에 등장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해고, 임금삭감, 노동강화라는 자본 공세에 직면하여 계급의식에 눈떴다. 이들 대다수의 공장노동자들은 산업혁명의 진전과 함께 농촌에서 도시로 급격히 흡수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농민적 성격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며, 어떻든 대자본이나 황제의 가부장적 온정주의적 지배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불황이 심각해지자 도시 직인층이 갖는 혁명의식을 흡수하여, 자본에 대한 임금노동의 해방을 짊어지는 체제개혁 세력으로서의 자신들의 존재와 힘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노동운동은 여기에서 프루동적인 동업조합의 상호주의의 껍질을 벗고, 동업조합 내부에 설치된 저항조합을 모체로 하여 혁명적 노동조합syndicat을 조직하는 방향성을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49-50)


# 제정 말기 혁명운동의 지도층

1. 자코뱅파 및 프티부르주아적 급진공화파 : 민주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모인 학자, 저널리스트, 변호사, 예술가 집단

2. 블랑키파 : 무장봉기를 일으켜 혁명독재를 실현하고자 분투했던 블랑키를 중심으로 단결된 집단

3. 제1인터내셔널 지도층 : 순수 프루동주의자에서 혁명적 집산주의자collectivistes로 이행한 집단(생산수단을 공유하는 평등사회를 구상했지만 혁명독재는 반대)


"1870년 7월,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가 발단이 되어 돌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국내에서는 혁명운동에 뒤흔들리고 국제 정세에서는 고립되어, 국내외 양쪽으로 궁지에 몰린 나폴레옹 3세가 제정 연명의 최후 수단으로 시도한 군사적 모험이었다."(65-6) 그러나 1870년 9월 2일, "메스 구원에 실패하고 거꾸로 스당에 몰린 마크-마옹 지휘하의 프랑스군은 황제와 함께 프로이센의 군문軍門에서 투항했다.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이틀 후 9월 4일 일요일, 스당 항복의 보고에 전격적인 충격을 받은 파리 시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봉기하여 약 50만 명의 시민이, 블랑키파를 선두로 하여 임시로 소집된 입법원 회의장인 부르봉 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스당의 항복은 제정 최후의 보루였던 군사권력의 붕괴를 의미했다. 여기에서 지배의 기초가 완전히 파헤쳐져 무너져 버린 제2제국은 파리 민중의 돌풍을 정면으로 받아 썩은 나무가 쓰러지듯이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다."(68-9)


부르주아 공화파 의원들로 구성된 국방 임시정부는 표면상으로는 "한 치의 토지도, 우리 성채의 돌멩이 하나도 양도하지 않는다"(외무장관 파브르)고 공언하면서 "내심으로는 목전에 닥친 프로이센군보다는 무장한 민중, 즉 국민군 쪽이 훨씬 두려웠다."(82) "당연히 '총출격'을 요구하는 혁명 세력·국민군 병사와 구실을 내세워 결전을 회피하려고 하는 국방정부와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간다. 블랑키파는 이제 확실하게 '국민배신 정부'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정부와 혁명 세력의 협력관계는 열흘 가량 지나자 냉각되고 적대관계로 바뀌었다. 민중의 자주적 관리조직으로서의 '코뮌' 선거를 요망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였다. 이 시점에서 민중이 마음속에 그린 코뮌이란, 무엇보다 대혁명 때의 '혁명적 코뮌'의 이미지였다. 여기에 더해 중세도시에서 쟁취했던 코뮌 자치권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되었다."(85)


1871년 1월 25일부터 26일까지 베르사유에서 교섭이 진행되어, "21일 동안의 휴전, 휴전 기간 중 강화講和의 가부를 묻는 '국민의회' 선거 시행, 쌍방의 점령 지점에서의 전투행위 정지, 파리 성벽의 무장해제, 파리를 지키는 요새의 프로이센군에 의한 점령, 정규군 1개 사단과 국민군을 제외한 파리군의 항복, 프로이센군에 대한 2억 프랑의 전시과세 지불 등의 굴욕적 조항을 짜넣은 휴전조약이 조인되었다."(120) 2월 8일, 파리에서 열린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급진공화파가 대거 승리를 거두었지만, 보르도 국민의회는 티에르를 행정장관으로 지명하여, 노동계급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태 수습을 추진하였다. "3월 17일부터 18일 밤까지 외무부에서는 파리의 국민군에 대한 기습작전을 협의하기 위한 각료회의가 열렸다. 작전의 개략은, 파리의 전 정규군을 동원하여 도시 전체를 점령, 국민군을 일격에 무장해제시키고, 중앙위 전 멤버와 주요 혁명가를 체포한다는 것이었다."(143)


3월 18일 새벽에 감행된 정부군의 기습은 자연발생적으로 봉기한 민중·국민군 병사들의 저항과 정부군 병사들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티에르는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자, 즉각 파리를 포기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는 1848년 2월혁명 때 당시 국왕 루이 필리프에게 전술적으로 일단 수도를 철퇴한 다음, 지방의 병력을 재결집시켜 파리를 탈환한다는 작전을 건의했던 일을 떠올렸다."(153) "리옹, 마르세유, 나르본 등 많은 지방도시에서 파리를 모방하여 코뮌 운동이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아울러 떠올리면, 신속한 결단과 행동만이 승리를 가능케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중앙위는 티에르 정부의 도주로 생긴 파리의 정치적 공백을 틈타 거저 들어온 정치권력을 즉각 행사하려고 하지 않고,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대신해야 할 자신들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주저했다. 그들은 결국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렸다."(158-9)


3월 28일, 정식으로 성립된 파리코뮌의 정책을 살펴보면 "의회식 기관이 아니라, 동시에 입법하고 행정하는 직접 민주주의적 '행동 기관'(마르크스)이 되어 '돈이 덜 드는 정부'라는 구상하에서, 사법관을 포함한 모든 관리는 철저한 리콜제─언제라도 해임이 가능하고, 민중에 대해서 직접 책임을 지는 대표제─에 따르고, 관리의 정치적·직업적 선서 의무는 폐지되며, 그들의 봉급은 노동자의 최고임금 수준을 넘지 않을 것 등이 정해졌다(4월 2일). 또 관리의 겸직에 의한 이중 수당 취득이 금지되었다(5월 4일). 상비군-정규군은 폐지되고 코뮌의 국민군이 시의 치안과 방위를 맡으며, 표현·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과 시민의 자유는 반혁명 세력 단속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충분히 보장되었다. 또한 노동자의 생활개선을 위한 사회정책이나 노동자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이 차례로 나오고, 세속화된 무료 의무교육을 통하여 대중의 교육 수준 향상이 도모되었다."(199)


"노동위나 교육위의 업적과 반대로 코뮌의 약점을 분명하게 노출시킨 것은 보안위원회와 재정위원회다. 국가의 종교예산이 폐지되고 수도회의 자산이 몰수된 것은 코뮌 정신에서 볼 때 당연한 조치였으나, 대혁명 때의 생-쥐스트를 자처하는 블랑키주의자 리고를 '대표'로 하는 보안위는 성직자·반코뮌파에 대하여 종종 필요 이상의 공포정치를 행했다. 특히 교회시설을 제멋대로 접수하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사를 체포한 것 등은 중소 부르주아지들에게 쓸데없이 불안을 조장해, 베르사유 쪽에 '박해'라는 그럴싸한 선전 재료를 제공했다." 또한 재정위원회가 프랑스은행 장악에 소홀한 틈을 타서, 프랑스은행은 "베르사유가 파리와 싸우기 위해 은행 앞으로 발행한 2억 5천 7백 63만 7천 프랑의 어음을 인수"하여 코뮌 반대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엥겔스와 많은 역사가들은 프랑스은행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을 코뮌 패배의 중대한 요인 중 하나로 꼽는다."(207-8)


"티에르는 지방의 소란을 진압하면서, 비스마르크와 교섭하여 휴전조항을 완화시키고, 3월 말까지 약 6만 5천의 정규군 병력을 베르사유로 집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4월 1일, 국민의회에서 '멋진 육군'을 극구 칭찬한 티에르는 파리 공격 결정을 내렸다." "이날 오후 공격 소식을 들은 파리에서는 비상소집의 북소리가 울리고, 베르사유군의 만행에 격앙된 군중은 즉시 베르사유로 총공격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 시점에서 파리는 현역 국민군 8만 명, 주둔 국민군 11만 4천 명, 여기에 벨기에인 700명, 폴란드인 400명 등 외국인 의용병을 보태면 20만 가까운 병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실시된 총사령관제의 폐지와 징병제의 철폐가 전반적인 군기와 지휘 능력에 악영향을 끼쳐, 실제 전투요원은 약 4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227-8) 더구나 군사권력을 대표하는 국민군 중앙위와 문민권력을 대표하는 코뮌정부 사이의 알력은, 코민 측의 열세를 더욱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코뮌의 이중 삼중의 내분이 베르사유 쪽에 더욱더 허점을 이용할 여지를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티에르는 보르도에 예정되어 있던 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전국 도시회의 개최를 금지하고 지도자를 체포하여 파리와 지방도시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프로토를 개입시켜 수차례에 걸쳐 이뤄진, 인질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블랑키를 석방시키려는 교섭도 티에르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었다. 다르부아 대주교의 친서를 가지고 파리에서 파견된 인질 중의 한 사람인 라가르드 신부는 굳은 서약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블랑키 한 사람과 인질 전원을 교환하자는 최후의 제안마저 티에르에게 냉정히 거절당하는 것으로 5월 13일의 교섭은 최종 결렬되었다. 티에르는 파리에게 피의 값을 치르게 한다는 구실을 얻어내기 위해, 오히려 대주교의 처형을 바라고 있었다."(250-1)


5월 21일 일요일, "적이 성벽에 바짝 다가와 성문을 살피고 있을 때도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규군이 침입해 와도 3월 18일처럼 민중과 손을 맞잡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공기가 넘치고 있었다. 대부분이 농민 출신인 정규군 병사들은 패전 콤플렉스가 있는 데다가 파리의 반란 때문에 귀향이 늦춰졌다는 원망이 겹쳐, 파리 시민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해 피에 굶주린 흉포한 야수가 되어 있었다." "21일 밤이 되자 두애, 비누아 장군이 인솔하는 베르사유군 본대가 도착하여, 포앵 뒤 주르 지구에서 속속 파리로 들이닥쳤다. 트로카데로, 개선문은 밤 사이에 점령당해 포로의 총살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피의 주간'이라고 불리는 처참한 시가전의 막이 올랐다."(254-5) "23일, 베르사유군은 몽마르트르 고지를 탈취하고 바티뇰, 제1구, 중앙지구도 점령했다. 3월 18일의 한을 풀어줄 때가 이윽고 왔다는 듯이, 사령관은 로제 가街를 시작으로 점령지구에서 연맹병과 일반시민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개시했다."(257)


코뮌의 씨를 말리려는 백색 테러는 5월 28일 베르사유군 사령관 마크-마옹의 파리 정복 선언을 무색케 할만큼 끊임없이 자행되고 나서야 끝났다. "코뮌의 붕괴는 프랑스의 노동운동·혁명운동에 괴멸적 타격을 주고, 그 발전을 10년 이상이나 늦추었다. 인터내셔널을 금압하는 '뒤포르 법'이 제정되어 시민 자유는 대폭 제한되었다. 또한 인터내셔널의 국제조직도 각국 정부의 억압과 영국의 노동조합 운동가의 이탈, 스위스에 망명하여 코뮌 무정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바쿠닌의 분파행동 등 때문에 쇠퇴에서 해체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국제 사회주의의 혁명운동에 준 영향을 별도로 생각해도, 왕당파나 제정파의 군주제 부활 음모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제3공화제 확립에 무시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민주주의적인 공화주의 세력의 끈질긴 운동으로, 1880년 코뮈나르의 전면적 대사면령이 결정되었을 때, 프랑스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은 새로운 부활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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