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20세기가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위협에 지배되었다는 가정은 옳지만,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20세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자유주의가 조만간 승리하리라는 것은 그 시대의 사태 전개를 봐서는 정말로 예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 p.490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은 계급대립에 대한 실증적 연구나 프롤레타리아의 근본성격에 대한 정치투사로서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관찰을 하거나 정치투사적 경험을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 즉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그 계급적 존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구성하는 역사적 사명을 발견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이 사실에 대해 자주 강조했다. 프롤레테르들을 실증적으로 관찰한다 하더라도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사명을 알 수 없다. 반대로 프롤레테르들의 계급적 사명을 이해할 때 그들의 진실한 존재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프롤레테르들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의식을 갖고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른 식으로 말해, 프롤레타리아 존재는 프롤레테르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선험적이다. 프롤레타리아 존재로 인해 프롤레테르들은 올바른 계급노선을 선험적으로 보장받는다."(15)
# 프롤레테르 :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개개인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은 기독교와 헤겔철학, 과학주의가 통합된 사상이며, 그 중에서도 중심축은 헤겔철학이다. 헤겔철학에서 "역사는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 신의 통치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신은 자신들의 선험적 작업의 의미를 여전히 이해 못하는 역사적 인간들을 매개로 자신의 도래를 완성해간다. 그런데 이 역사적 인간들에 대해 신의 작업은 선험적인 변증법을 통해 완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인간들의 의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 변증법의 모태를 알아본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직한다. 개인들의 의식에서 독립해 존재하는 역사의 의미, 그리고 개인들이 역사로부터 무엇을 얻건 그들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역사의 의미,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그 의미는 헤겔처럼 "허황된 모습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팔과 다리로 실현될 것이다."(18-9)
"마르크스가 (필연성과 실존성의 연결 고리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었던 까닭은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원 개인이 모든 존재가 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명제와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명제가 동일한 층위의 명제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철학적 층위에 속한다. 마르크스가 헤겔철학을 차용해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의 이상理想으로부터 도출되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세계와 역사의 원천으로서 자신을 의식하는 '노동'을 실천할 보편적 가능성의 존재다. 반대로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명제는 프롤레타리아화化의 역사적 과정에 대하 분석으로부터 도출되었다(혹은 그러한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명제이기를 바란다). 사실상, 이 분석으로는 앞의 철학적 전제를 정립할 수 없다."(31-2) "마르크스는 전문기술을 지닌 다양한 노동자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이상을 지닌 프롤레테르의 모습을 보았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35)
"계급적 존재로서 프롤레테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는 노동력을 지닌 다른 인간과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로서 착취를 당하지만, 또한 바로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그 자신과 완전히 동일하게 전적으로 소외된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타자'이기 때문에─다른 모든 프롤레테르들과 힘을 합해 착취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은 '자본'의 권력과 정대칭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자본에 대해 소외되어 있고 자본의 공무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프롤레테르도 그 동일한 '자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게" 될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소외될 것이다."(47-9) "따라서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한 노동자는 사회를 위해서만 노동한다. 그는 추상적 보편노동의 순수한 제공자이고, 결과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순수한 소비자다."(50)
"이제는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는 노동과 관계 맺지 않는다. 노동은 완전하게 규격화되었고, 무기체적 과정이 되었다. 노동자는 스스로 진행되는 작업을 보조하고 이것에 자신을 맞춘다. 그는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는다. 노동이 노동자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노동에 대해 무관심하다. 월말에 임금이 나오는데, 중요한 일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이런 원한어린 태도가 '자신의' 일을 하는 프롤레테르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다. 그들은 수동적인 프롤레테르를 원했을까? 그렇다면 프롤레테르는 수동적으로 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한 수동성으로부터, 이 수동성을 강요한 사람들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프롤레테르에게서 수동적인 능동성을 원했다. 그런데 그는 능동적인 수동성을 가질 것이다."(52-3)
"프롤레테르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헐벗음을 내면화하며 부르주아 세계의 폐허 위에서 보편적 프롤레타리아 사회를 이루어내는 대신, 자신들의 완전한 의존성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기 위해 헐벗음을 내면화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적 요구가 이런 식으로 대중적 요구로 바뀌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계급적 요구는 (원자화되고 서로간의 연결성이 없는 프롤레테르들로 구성된) 대중의 소비에 대한 요구로 바뀌고, 이 경우 프롤레테르들은 사회로부터, 다시 말하면 권력으로부터, 현실적으로 다시 말하면 국가기관으로부터 그들이 갖거나 창조하기 불가능한 것을 받고자 한다. 이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권력의 지위에 자신들의 대표자를 앉히기 위한 대중적 행위로 축소된다."(54-5)
"따라서 자신들이 국가에 의지하는 만큼, 역으로 국가도 노동자들에 대해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가 노동계급에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그 계급에 대해 모든 의무를 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도 노동계급이 절대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렇게 실제로는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책임지고 있다. 노동계급과 국가권력 사이에 놓인 모든 장벽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고, 계속 이렇게 된다면 상황은 다루기 쉬울 것이다. 곧 지금까지 존재해온 정치적 중개, 그람시가 말한 의미의 시민사회 고유의 제도, 자율적인 사회적 관계와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은 독점자본주의에 의해 이미 모든 현실성을 상실했다."(57-8)
"노동자들의 권력에 대한 생각, 혁명적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포스트-테일러리즘 시대에 그 생각들이 부여받던 의미와는 매우 다른 실제적인 의미를 갖는다. 권력의 지위에 오르는 일을 목표로 삼았던 그 노동계급은 비참하고, 탄압받고, 무지하고, 일정하고 안정된 거처나 직업이 없던 민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소유한 전통·엘리트층·문화·조직 때문에 노동민중 한가운데서나 일반적 의미의 사회 내에서 헤게모니를 쥘 잠재성이 있던 계층이었다. 이 계층에게는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빼앗은 다음 국가를 경영할 지위에 앉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노동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기생계급인 부르주아지, 그 탄압적 기구의 존재로 인해 부르주아지가 민중의 궐기를 우습게 보는 국가를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66-7)
"생산조직의 자율성을 파괴시킨 그 기술적 전문화·경제적 집중화 과정이 노동자들의 자율성의 원천인 예능적 기술을 파괴시켰다. 테일러리즘으로 인해,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위계와 질서의 자리에 공장의 지휘부에서 고안하고 강제한 경영자 중심의 위계와 질서가 들어앉았다. 치열한 투쟁의 과정들을 거친 다음 예능적 기술의 노동자들은 제거되고, '생산의 하사관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비록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지만 고용주 측에 속하게 됐다. 즉 그들은 지도부에서 교육 받고 선별된 다음, 다른 노동자들을 지도하고 감시할 권력을 부여받았다. 생산작업은 자율성이나 기술적 권력이 없는 원자화된 노동자들로 구성된 대중에 의해서만 수행됐다. 이런 대중에게 생산에 대한 "권력을 쟁취한다"는 사상은 의미가 없다. 적어도 오늘날의 공장에서는 의미가 없다."(69-70)
"권력의 정당성을 이루는 토대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자본주의 사회의 해결되지 않는 커다란 문제 중 하나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따른다면, 항상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지배적 위치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의 존재를 전제하고, 이 능력주의는 권력 관계들이 매우 유연하고 쉽게 변화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따라서 사회는 물적으로나 제도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더라도, 사회 내의 이런 유동성을 막아서는 안 된다. 어제의 승자가 오늘, 그보다 더 능력있는 사람이 있다면, 대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하지 않는 권력, 자신의 권력을 특정인에게 위임하려 하지 않는 권력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상, 권력은 지배적 지위를 독점한다는 것이고, 지배적 지위는 필연적으로 특권화되고 희소성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지위들 중의 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이 그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84-5)
대다수가 지배적 지위를 추구하지만, "사람들이 갖게 될 모든 지위는 이 지위에 필요한 자질과 함께,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지배적 제도의 경화증은 권력의 관료화와 더불어서 발생한다.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위해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 그는 단지 매우 작은 권력이 부여되어 있는 지위들 중의 한 지위에 오르기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더 이상 권력을 소유하지 않고, 권력의 지위들이 인간들을 소유한다. 더 이상 '자아'의 개성을 확장할 능력을 갖고 있는 개인들이 자신들에 맞추어 그 지위들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지위들이 지위를 점하는 인간들을 맞추어 가공해낸다." "이 변화는 개인 자본가가 익명적 집단, 기업가가 '은행', 고용주가 '자본'과 그 공무원들(곧 경영자들)에 의해 대체된 시기부터 현실에 뿌리내렸다. 모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휘·경영 기관이 이윤창출과 자본유통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조화되었다."(86-7)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적으로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비록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자본'에 의해 설치되어 있던 지배기구를 장악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자본의 지배와 유사한 것을 재생산할 것이고, 이어서 그들 스스로가 기능적 부르주아지가 될 것이다. 지배기구 내에서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이 점하던 자리를 차지하며 그 계급을 축출할 수 없다. 그러한 시도를 하는 계급은 권력을 이양받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지위를 이어받을 따름이다."(99-100) 사회적 생산의 토대가 되는 업무를 담당하는 "기능적 권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배관계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곧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떠맡는 것과 같다. 지배관계를 제거할 유일한 가능성은 곧 권력과 지배를 분리시키고 시민사회·정치권·국가 각각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능적 권력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전에 정해진 한정된 자리를 그 기능적 권력에 부여하는 데 있다."(101)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의 고유한 행위가 아니다." "노동자는 더 이상 "자신의" 노동에, 생산과정 내 자신의 역할에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모든 일이 그를 제외한 채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 자체는 노동자와 마주해 그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어떤 일정량의 물화物化된 행위다." 따라서 노동자가 "노동 가운데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노동의 주인이 되고, 노동을 위해 권력을 정복하는 일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노동의 본성·내용·필요성·방식들을 부정하며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만이 문제다. 그런데 노동을 거부한다는 것은 또한 노동운동의 전통적 전략과 그 조직적 형식들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곧 노동자로서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더 이상 없는 대신, 노동자로서 기능하지 않을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권력이 문제가 된다. 계급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107-8)
"노동계급과 달리, 이 비非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지도 않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낙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계급은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해, 그리고 새로운 생산기술들의 영향력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들의 해체로 생겨났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따를 때 노동계급이 지니고 있어야 하는 부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부정성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 근본화됐다." "실제로 이 비계급은 노동의 소멸과정에 따라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지적 노동의 산업화(즉 자동화와 정보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일자리를 얻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실제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지속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임시직의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노동, 곧 노동의 존엄·가치화·사회적 효용·욕망에 토대를 두었던 구舊사회가 해체되며 나타난 산물이다."(108-9)
"그들에게서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노동계급이나 다른 어떤 계급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명칭에서도, 아니면 이와 대칭선상에 있는 '실업자'라는 명칭에서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이 신新프롤레테르는 은행·관공서·청소서비스업체·공장 등 어디에서 일하건, 무차별한 직무에 일시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비노동자다. 그는 "아무 일이든" 하고, 또한 "아무나" 그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생산관계를 매개로 사회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사회의 전반에 자리한 생산기구가 '노동'을 만들어내고, 우연적이고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인들에게 우연적인 형식으로 그 노동을 강요한다." "젊은 마르크스가 모든 특수한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보편적 가능성을 그 안에서 보았던 프롤레테르는 오늘날에는 기구들의 보편화된 능력에 대항하는 특수한 개인성일 뿐이다."(113-4)
"타율성 영역은 개인들의 생활과 사회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프로그램화하고 계획화해 가장 효율적으로, 곧 가장 적은 노력과 자원을 들여 생산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자율성 영역에서는 개인들이 경제영역 바깥에서 혼자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든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데, 이 상품과 서비스는 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욕망과 취향과 상상력에 따라 만드는 것이다."(156) "사회공간을 (사회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비인격적인 일을 하는) 타율성의 영역과 (모든 것이 진행될 수 있는) 자율성의 영역으로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조직하더라도 두 영역이 어떤 경우든 서로에 대해 닫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평범화된 노동들로 구성된 사회화된 섹터의 존재를 통해 각자가 공동체의 협소한 공간을 벗어날 수 있고, 공동체가 자급자족적 경향 때문에 폐쇄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165-6)
"사회적으로 결정된 노동을 없앤다 하더라도, 혹은 각자가 객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일의 완수규칙을 내면화하도록 설정했던 외부적 의무들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해방은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해방은 필연성의 영역이 타율적인 일들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타율적인 일들의 기술적 요구사항들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확한 규칙을 정해 그 일들을 특정 사회공간 내로 한정시키는 데 있다.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후자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168) "필연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물적으로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량만을 축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일은 또한 직접적인 생산이 필요로 하는 외부의 비경제 시스템과 국가의 활동들을 축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축소는 생산기구 자체와 이 생산기구가 결정하는 노동의 분할이 조정될 때만 가능하다."(170)
"후기산업사회의 사회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국가의 철폐가 아니라 지배의 철폐다. '법'과 지배, 국가기구와 지배기구는 지금껏 항상 혼동되어 왔지만, 분리되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국가기구들은 모든 지배의 원천도 그 최종동기도 아니다. 그 기구들 자체는 지배의 사회관계 때문에(한 계급의 전 사회에 대한 지배 때문에) 존재하고,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지배양식에 자신들의 고유한 지배양식을 추가하며 그 사회관계를 연장하고 강화한다. 국가기구들에 의한 사회의 지배는 자본이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집중화를 통해 지배함으로써 생겨난 결과이자, 그 지배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지배기구를 걷어내면 나타나는 "국가는 협업과 중앙적 규제 수단들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끝으로 국가는 자율성 영역의 확장을 위해 스스로의 권력과 고유 영역을 축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186-7)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역사의 종말로서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세계 공산주의, 전 지구적 민주주의, 천년왕국 등 종류만 다를 뿐이다.
...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안내자로서보다는 신념과 정치적 행동의 견인차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과거의 도그마가 더는 우리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처음부터 거대한 속임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재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의 종언을 "환상의 종언"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 분석은 추도사가 아니다. 1945년 직후에 사람들은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했다. 악마에 사로잡힌 광기 어린 한 독재자가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었던 정치적 병리 현상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 대륙이 받은 상처를 그저 몇몇 정신 나간 인간들의 소행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으며, 그 상처가 남긴 정신적 외상이 히틀러나 스탈린의 정신세계 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좋건 싫건 간에 파시즘과 나치즘 모두 대중 정치·산업화·사회 질서라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다.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나쁜 과거를 내던지고 시간의 망각 속에 묻어버리면서 과거에 좋았던 것만을 우리의 유산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여러 가치 체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다른 것들도 존재한다. 유럽의 20세기는 이들 가치 체계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대한 이야기다.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pp.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