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르주아지의 상승세와 귀족계급의 하강세가 어느 시점에서 일정한 균형을 이루어 어느 쪽도 상대방을 누를 수 없는 상태에 들어섰을 때 국왕은 어느 쪽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양자의 대립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왕권을 절대군주권이라고 하며, 절대군주 체제하에서 봉건귀족은 후퇴와 하강을 거듭하면서도 낡은 봉건권을 방어하려고 최후의 몸부림을 친다. 이 같은 상황에 놓인 18세기 프랑스 사회를 앙시앵레짐이라고 한다. 앙시앵레짐하에서 부르주아는 기회 있을 때마다 몰락하는 귀족의 토지를 사들였다.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가 봉건영주의 봉토를 살 경우 국왕에게 프랑-피에프franc-fief라는 세금을 납부하기만 하면 토지에 대한 영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1758년 말에 중농학파 케네의 저서인 <경제표>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출판된 지 약 10년 만이었다. 새로운 경제 이론과 계몽사상은 곧 절대주의에 대한 위험 신호였다. 21-2)


# 18세기 프랑스의 신분구성

1. 제1신분 가톨릭 성직자 : 주교 특권층과 하급 사제와 조제들

2. 제2신분 세속 귀족 : 전통 세습 귀족인 대검 귀족과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 귀족

3. 제3신분 그 외 나머지 : 다수의 농민과 소수의 도시 상공업자


18세기 프랑스의 농민과 부르주아는 "봉건제도하에서는 봉건적 부과를 영주에게만 바치면 되었으나 이제 절대주의 체제에서는 새로 국왕이 부과하는 각종 세금까지 바쳐야 했다. 농민이 부담하는 이 이중 조세 체계야말로 앙시앵레짐의 이중적 성격을 말하는 동시에 그 모순을 잘 보여준다.(32)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재상과 네 명의 대신, 재무 총감은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국가 최고 기간의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통일적인 국가 예산 편성도, 정책의 통일성과 일관성도 없었다." 행정구역과 별개로 "왕국의 통일을 저해하는 문화적 장벽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지방'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역사적·봉건적인 프로방스province이다." 고유의 풍속과 민법, 상법, 도량형 및 방언을 가지고 독자적인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이 지방 공동체들은 대체로 봉건사회의 대제후령大諸候領에 일치하는 것으로서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의 팽창에 저항하는 봉건적 분권주의의 아성이었다."(36-7)


"파리 고등법원은 1239년에 설치되었으며 1614년 이래 삼부회Etats-Generaux의 소집이 중단되면서 정치적인 힘이 유력해졌다. 그들은 본래 왕의 어전 재판에 함께 참석했는데, 삼부회가 소집되지 않는 마당에서는 자신들이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왕권에 대항하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고등법원 제도에 특이한 것이 있었는데, 재판관직의 매매제와 세습제이다. 16세기경부터 왕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관직 매매 관례가 생겼는데 고등법원의 재판관직도 매매되었다. 더구나 17세기 초부터는 매매한 관직을 세습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고등법원 재판관은 왕이라 할지라도 파면할 수 없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들이 주도한 "반왕反王운동은 결코 앙시앵레짐에 대한 반대나 비판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왕권을 약화시킴으로써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더욱 확대하여 국왕과 궁정 귀족의 권력과 재산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39-40)


1775년 이래 불황기에 "프랑스 정부는 최소한 두 가지 중대한 정책적 과오를 저질렀다. 하나는 1778년 미국 독립 전쟁의 참전이고 또 하나는 1786년 영-불 통상조약의 체결이다. 미국 독립 전쟁을 돕기 위해 프랑스가 쓴 돈은 무려 20억 리브르였다. 이 돈은 프랑스가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일으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1786년의 영-불 통상조약은 영국 공업 제품을 수입함으로써 프랑스 공업에 타격을 주고, 프랑스 곡물을 수출함에 따라 곡가의 폭등을 가져왔다."(56-7)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재무 총감 브리엔은 "특권 신분에 대한 지세 부과안과 인지세를 철회하고, 그 대신 20분의 1세를 모든 신분의 국민에게서 공평하게 징수하는 것으로 타협하는 한편, 삼부회를 1792년에 소집한다는 약속하에 4억 2,000만 리브르의 차입을 승인받았다." 그런데 "1787년 11월 19일 루이의 사촌 오를레앙 공이 4억 2,000만 리브르의 차입금 등록을 명한 왕명을 불법이라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61)


1788년 4월 왕이 고등법원을 무력화하려고 국왕전권 재판소Cour pleniere를 신설하자, "파리 고등법원을 선두로 전국의 고등법원이 이 새 재판제도에 맹렬히 항거하였다. 그들은 새 재판소의 설치를 반대하고, 모든 법원에 파업을 선동하고, 삼부회와 지방 삼부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 일로 지방에서 무질서와 폭동이 일어났다."(62) 네케르가 혼란 수습책으로 제시한 국왕전권 재판소 폐지와 삼부회 소집 요구를 왕이 받아들인 것은 왕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혁명을 시작한 귀족들은 "열기를 뿜으면서 개막되는 개혁을 잃어버린 봉건권의 회복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파트리오트patriote(혁명파)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개혁가들은 그 개혁을 일체의 과거를 태워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삼부회의 선거 방법과 구성 문제에서 벌써부터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대립과 충돌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63-4)


우여곡절 끝에 열린 삼부회가 특권 신분과 제3신분 간의 대립으로 이어지자 "6월 12일, 제3신분은 단독으로 대의원 위임장 심사에 들어갔다." "6월 17일 19명의 제1신분 대의원을 포함한 제3신분 회의는 자기들이야말로 프랑스 전체 국민의 대표자임을 선언하여 490 대 90으로 국민의회의 성립을 결의하였다. 이 중대한 역사적 선언과 함께 국민의회는 자신의 결의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해산하지 않는다는 것과,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건 강제로 해산되는 경우에는 전체 국민이 납세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국민의회가 가결한 결의에 대해서는 왕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이제 제3신분 의회는 제3신분이라는 특정 계층의 대표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이라는 일반의지의 대표 기관이 되어 국민의회라는 명칭을 쓰게 된다." "20일 국민의회는 회의장을 구기관球技館으로 옮겨, 성문 헌법이 제정되고 그 헌법이 확고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결코 흩어지지 않을 것"을 엄숙히 선서하였다.(71-2)


# 테니스코트의 서약


국민의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왕이 군대를 비밀리에 이동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과격한 선동가들의 구호가 남발되자 "7월 14일 무장한 폭동시민이 학정과 봉건제도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였다. 형무소 소장과 파리 시장이 시청 옆 광장에서 폭도에게 처형되었다. 그 후 3일간 폭동은 거리를 휩쓸었다."(76) "사흘 후 이 폭동은 성스런 혁명으로 승화되고 폭도는 영광스런 애국자, 즉 파트리오트patriote가 되었다." "왕은 파리의 폭도가 임명한 새 시장 바이이와 국민 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 후작을 그대로 승인하고 시장 바이이가 건네주는 삼색 휘장을 받아 모자에 꽂았다. 왕의 파리 방문과 일체의 행동은 혁명의 승인이며 재가였다. 왕은 스스로 왕권의 실추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제 혁명은 제1막을 내렸다. 혁명에 굴복한 왕은 자신의 왕위를 보전할 수는 있었으나, 그의 머리 위에는 프랑스 국민─그 대표기관인 국민의회─이라는 새 주권자가 있다는 것을 승인하였다."(77)


"국가의 공권력은 마비되고 폭력과 공포가 전국적인 규모로 번졌다. 이른바 '대공포La grande peur'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 대공포는 귀족 계급에 대한 농민의 증오와 단절을 부추기고 반봉건적 농민 폭동을 격화시키는 동시에 혁명을 지키기 위한 국민의 무장을 촉진시켰다. 농민반란은 그저 불만을 터뜨리는 폭동에 그치지 않고 광범한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였다."(79) 혁명 정부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수한 교회 재산을 담보로 아시냐Assignat라는 일종의 정부 보증 지폐를 발행하였다. 1789년 12월 19일에 처음 발행한 액수는 4억 리브르였다. 아시냐는 통화의 기능은 하지만, 원칙적으로 국유화한 교회 재산의 구입에 쓰는 정부 발행 어음이었다. 그러므로 정부는 아시냐를 국유재산 매입 대금과 납세금으로 회수하면 전부 태워버려야 했다. 그러나 일부만 소각하고 대부분 그대로 둔 채 계속 발행함으로써 가치의 하락을 초래하였다."(92)


프랑스 교회는 일찍부터 로마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 왕권이 성직의 임면과 교회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등 독립성이 강했다. 그런데 국민의회는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1790년 7월 12일 성직자 민사 기본법을 가결하여, 헌장 준수 서약을 하지 않는 선서 거부자에게 공공 의식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령으로 선서 거부 성직자가 많은 지방에서는 주민의 세례, 결혼, 장례가 일체 거행될 수 없었다. 이것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혼란을 의미하였다." 예상 밖의 큰 혼란에 놀란 국민의회가 1791년 4월부터 선서 거부 성직자에 대한 관용 조처를 취하자, 도리어 "거부 성직자는 종교적 박해에서 승리한 격이 되고 선서 성직자는 마치 종교적 불순이라도 범한 꼴이 되었다." "여기서 선서 성직자들은 당시의 당시의 국민의회를 지배한 라파예트와 그 일파에서 이탈하여 더 과격한 자코뱅파Jacobins로 몰려갔다."(95-6)


1791년 1월 말에 자코뱅 클럽과 혁명파의 코르들리에Cordeliers 클럽에서 왕의 도망 계획이 폭로되었다. 왕의 도망 사건 처리를 두고 "혁명파의 자코뱅 클럽이 둘로 나뉘었다. 의회에서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에 반대하는) 바르나브와 행동을 같이한 라메트 일파는 16일 자코뱅 클럽에서 분리하여 라파예트 일파와 함께 이른바 푀양Feuillants 클럽을 따로 만들었다. 이제 자코뱅은 로베스피에르와 페티옹 같은 과격파만의 클럽이 되었다." 푀양 클럽은 17일 샹 드 마르스에서 열린 공화정 요구 집회를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의회를 좌우하는 힘은 이른바 삼두파─라메트, 바르나브, 뒤포르─의 손아귀에 들어갔다."(106) 삼두파는 9월 3일 프랑스 국민을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으로 양분하는 헌법을 제정, 반포했는데, "이것은 푀양파의 보수적 혁명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자코뱅 클럽을 중심으로 한 민주 세력에게 거센 반격의 근거를 제공했다."(107)


# 1791년 헌법의 선거법

1. 수동시민 : 최소 3일간의 노동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내지 못하는 시민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

2. 제2차 선거위원 : 10일간의 노동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한 사람에 한정

3. 제3차 선거위원 : 국회의원, 재판관, 도 평의원, 주교 등을 선출하기 위한 300-800명의 지역 명사들

4. 국회의원 : 1마르크의 은화(약 50프랑)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한 자에 한정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필니츠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프랑스 공화정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8월 3일 드디어 왕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일이 일어났다. <모르퇴르>라는 신문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 사령관 브룬스비크의 성명을 보도했는데, 이것이 왕과 적군의 내통을 백일하에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자코뱅과 프랑스의 모든 애국자를 협박하였다." 무장한 연맹병과 국민 방위대, 수동 시민이 봉기한 "8월 10일 사건은 파리 시의회 즉 파리 코뮌을 프랑스의 실권자로 만들었다.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요구대로 왕권의 일시 정지를 선언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 국회인 국민공회의 소집을 가결했다. 왕권은 우선 잠정적으로 정지되었지만 결국 영원히 폐지될 터였다. 왕은 탕플Temple에 유폐되었다." 이제 봉기를 주도한 노동자, 빈민, 영세 상인으로 구성된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125-7)


"자코뱅당은 브리소의 지롱드파와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Montagnards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 분열은 왕권의 소멸과 함께 우익의 푀양이 실각함으로써 집권파 내부에서 일어난 권력 싸움이라는 정치적 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념과 목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사회적·계급적 분열이었다. 지롱드파의 혁명 이념이 부르주아의 경제적 자유와 사유권의 절대를 비롯한 시민적 자유에 있었다면, 산악파의 혁명 이념은, 그런 사유권을 자유로이 행사하려고 하여도 소유한 것이 없는 민중에게도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소유를 보장하려는 것이었다."(132) 11월 20일 튈르리 궁에서 지롱드파를 포함한 세력들이 왕과 반反혁명을 공모한 비밀문서가 발견되자, 12월 3일 의회는 "누구든지 프랑스에서 왕정의 재건을 제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결의하여 왕정복고의 길을 막고, 의회의 모든 투표를 지명점호제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143)


# 지명점호제 : 모든 의원은 이름이 호명되면 가부可否 의사를 밝히고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 처형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의 반불 동맹이 3월 이후 착실히 형성되어 갔다. 전쟁은 이제 전제군주들과 가톨릭 성직자 및 귀족들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국민 대 국민의 전쟁으로 변질하였다. 따라서 전쟁은 프랑스의 혁명만이 아니라 프랑스의 독립과 국가적 운명을 건 사생결단의 전쟁이 되었다."(147) "의회 안에서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싸움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을 때 사태를 결정한 것은 결국 상퀼로트의 봉기였다." "종래에는 반反혁명 혐의자는 왕당파뿐이었는데, 이제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한 지롱드파도 혁명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누가 진짜 애국자이며 누가 가짜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153-4) 로베스피에르파는 민중 봉기를 선동하는 극좌 에베르파와 과감한 사회정책에 반대하는 우익 당통파를 모두 숙청하고 행정부를 장악했지만, 그 역시 테르미도르 쿠데타에 휩쓸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산악파는 에베르와 당통에 이어 로베스피에르마저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나 그 과정에서 혁명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힘이 극도로 약해졌다.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는 데 협력한 평원파가 어김없이 간파한 사실도 바로 그것이었다. 평원파는 이제 자체의 힘만으로도 국민공회의 다수당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181) 로베스피에르가 쌓아올린 제도를 공격하는 데 앞장선 "평원파는 부르주아 출신들로서 혁명과 공화국을 왕당파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려는 의사는 강했으나, 방토즈법이 보여준 바와 같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왕정의 회복 못지 않게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서민 계급을 자기들에게 종속시키려고는 했으나 서민 계급과의 연합에 의해 혁명과 공화국을 지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평원파의 이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 '뮈스카댕muscadin'이라는 부잣집 청년 건달패의 반反자코뱅 테러이다."(182-3)


# 방토즈Ventose 법 :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분배하는 법. 무분별한 평등주의가 아니라 재산의 극단적인 불균형을 시정하여 소토지 생산자층을 국가 기반으로 삼으려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1795년 8월, 공회에서 채택된 공화 3년 헌법은) 1789년의 인권선언에 기록된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는 기본 조항을 버리고, "평등은 법이 만인에게 동일하다는 데에 존재한다"고 하여, 평등을 사법적인 것으로 후퇴시켰다. 그리고 인민의 사회적 권리를 거부한 이 헌법은 보통선거제를 폐지하고 재산에 기초한 제한선거제로 뒷걸음질했다."(187) "당시 파리 시민의 생활고와 불만을 충분히 이용한 왕당파는 (테르미도르파가 왕당파의 복귀를 막기 위해 제안한) '3분의 2법'의 불법성을 들어 대대적인 반란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국민공회 의사당인 튈르리 궁을 포위한 폭도는 약 2만 내지 2만 5,000명이었는데 진압에 나선 군인은 4,000명에 불과하였다. 중과부적으로 공회 측이 불리했으나 이를 역전시켜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자가 있었다. 바로 후일의 대영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188-9)


# 3분의 2법 : 새 입법부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의석은 반드시 현재의 국민공회 의원들로 채워야 한다고 규정한 법


새롭게 출범한 총재 정부가 재정 파산과 대외 전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자, "자코뱅 잔당이 팡테옹 클럽이라는 과격파 조직을 만들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팡테옹 클럽에는 공화 3년 헌법을 비난하고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을 후회하고 1793년 헌법의 부활을 주장하는 좌익의 모든 세력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끌고 또 총재정부가 가장 무서워한 그룹은 그라쿠스 바뵈프를 중심으로 하는 과격한 평등주의자들이었다."(192)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은 자신의 추방을 결의한 500인회의 자코뱅과 원로원의 공화파를 총검으로 위협하여, "보나파르트, 시에예스, 뒤코스의 3인으로 구성되는 임시 통령정부Consulat의 조직을 공포하였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0년 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207)


"바라스의 생각은 쿠데타가 끝나면 보나파르트를 다시 전장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고, 시에예스의 생각은 보나파르트를 실권 없는 최고권자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오산이었다."(208) 12월 15일 공표된 "헌법에는 (시에예스가 구상한 실권 없는 국가원수로서의) 대선거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최고 행정권자인 제1통령에게 독재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세 사람의 통령이 있었으나 나머지 둘은 자문역에 불과한 들러리였다. 두 명의 제2통령에는 캉바세레스와 르브룅이 임명되고 시에예스와 뒤코스는 임시정부에서 밀려나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다."(211) "나폴레옹은 장관들의 연합을 막으려고 각 부에 협의회를 만들고 의장에는 참의원 의원을 앉혔다. 통령정부의 모든 기구와 관직은 제1통령의 독재권을 집행하는 손발이었다." "그는 삼부를 통어하는 독재자였다. 그의 행동은 입법부에도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212-3)


# 종신 통령을 향해가는 나폴레옹의 세 가지 과제

1. 더 많은 군사적 승리 : 이탈리아 재탈환, 영국과 강화협상(아미앵 조약, 1802년 3월 25일)을 맺어 대륙의 패자로 군림

2. 로마 교황과의 화해 : 교황과 종교 협약을 체결(1802년 4월 18일)하여 (왕당파가 다수인) 가톨릭 세력의 지지 획득

3. 입법부의 공화파 잔존 세력 제거 : 1802년 선거에서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반정부 공화파 의원들 축출


1802년 8월 4일, "보나파르트가 직접 기초한 새 헌법이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공화 10년 테르미도르 16일 헌법에 관한 원로원령'으로 공포되었다. 이제 보나파르티슴이라는 특이한 새 정치제도가 국민의 동의 위에 수립되었다."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고 제1통령의 전제를 강화한 "공화 10년 헌법이 수립한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공화제이나 사실상으로는 군주제였다. 그러므로 2년 뒤 제정이 선포되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226-7) "10년 임기 제1통령도, 종신 제1통령도, 이제 또 세습 황제도 국민 동의의 형식을 빌리는 것에 보나파르티슴의 특색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국민의 동의가 아니라 실은 기정사실에 대한 국민의 체념의 표현이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혁명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낳은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229)


"나폴레옹은 마렝고의 승리에서 귀국한 지 두 달 뒤인 1800년 8월 12일 저명한 법학자들로 민법전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 장씩 초안이 될 때마다 토론과 심의를 거쳐서 입법부의 의결로써 확정 공포하였다. 36장을 모두 합쳐서 '민법전Code civil'이라는 하나의 법률로 선포한 것이 1804년 3월 21일이었다. 민법전은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를 유지했으나 혁명적 입법의 철학적 원리를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혁명의 집약인 동시에 혁명의 수정이었으며, 시민혁명의 진보성과 보수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민법을 종교적 영향에서 해방시키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혁명의 원리를 방어하고, 신분의 세습을 금지하고 상속과 소유에 관한 혁명적 입버의 일반적 원리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민법전은 가족 관계에서 가장의 우월적 지위와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규정하여 보나파르티슴의 권위주의적 색채를 반영하였다."(235)


"나폴레옹의 군국주의는 많은 농민을 군대로 징발하였다. 따라서 농민은 나폴레옹을 싫어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혁명을 통하여 새로 얻은 농토를 나폴레옹의 군사력이 안전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강력한 군사력이 등장하기 이전에 농민은 항상 자신의 새 토지에 대하여 불안해했는데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토지 문제에 관한 한 혁명의 결과를 철저히 보호하는 데 세심하였다. 그만큼 농민은 나폴레옹에게 고마워했고, 또 그만큼 보수화하였다. 농민의 보수화야말로 보나파르티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나폴레옹은 전쟁에 의하여 흥기하고 전쟁을 통하여 강해지고 전쟁 때문에 몰락하였다. 그의 생애는 전쟁과 함께 있었다. 전쟁이 계속되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도 무의미했다. 따라서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 점점 강력해진 그의 권력도 지속적인 전쟁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237-8)


# 아미앵 조약 : 지중해 재해권과 이집트를 영국에 빼앗기고 내정을 정비할 필요가 있던 나폴레옹과 유럽 국가들과 무역 재개를 바라던 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진행된 평화조약.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왕자가 되었다. 1802년 3월 25일 정식 조인


# 아미앵 조약 파기 이후의 전쟁 추이

1.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격파 (프레스부르크 평화조약)

2.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 점령, 홀란드 왕국으로 개조

3. 남부 독일에 라인 연방 창설

4. 1805년 8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 퇴임으로 신성로마제국 소멸

5. 1806년 10월 아우어슈테트와 예나에서 프로이센군 격파

6.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 1806년 11월 21일) 실시와 폴란드 왕국의 농노제 폐지

7. 1807년 5월 단치히 점령, 러시아군 격파(쾨니히스베르크, 틸지트 점령)하고 틸지트 조약 조인


"당시 유럽의 정치사회적 구조에 비추어볼 때 원래 나폴레옹 전쟁에는 두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대륙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키는 면이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군의 진격은 나폴레옹 법전의 진군을 의미하고 나폴레옹은 전제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는 자로 환영 받았다."(246) 그러나 일찍이 시민혁명을 실현하고 산업혁명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 영국은 사정이 달랐다. 영국을 타겟으로 삼은 "대륙봉쇄를 뒷받침한 두 번째 명분은, 영국 상품을 배척하고 프랑스 산업을 보호하는 보호무역주의의 경제사상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상품을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밀어내고 다음에는 점령 지역에서 몰아내더니, 드디어는 대륙 전체에서 쓸어내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산업의 발달이 대륙의 상품시장을 그만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륙봉쇄를 가능케 한 전제 조건은 무엇보다도 유럽의 군사적 지배의 완성이었다."(248-9)


# 대륙봉쇄의 허점

1. 영국 상품의 배제는 종속국가들의 공업을 희생시킨 프랑스 공업의 독점을 의미

2. 공업가들에게는 유리했으나 무역상들은 큰 타격

3. 국가들마다 영국과의 경제 관계가 상이함(수출길이 막힌 농산물 가격 폭락, 수입길이 막힌 공업제품 가격 폭등 등 부작용 속출)


대륙봉쇄 와중에 행해진 "교황령의 점령과 병합은 나폴레옹의 큰 실책이었다. 각국의 가톨릭교도들이 상상 외의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가톨릭교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 스페인 국민이 받은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스페인 국민은 나폴레옹이 안겨준 새 헌법보다 가톨릭 신앙과 자기 나라 왕실을 더 사랑하였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시민과 농민이 스페인 군인과 함께 프랑스군에게 무서운 피의 반란을 일으켰다.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는 스페인만이 아니라 나폴레옹 지배하에 있던 여러 민족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는 발화점이 되었다."(253) 대륙봉쇄로 가장 큰 손해를 입은 것은 밀, 목재, 대마, 수지의 가장 큰 시장을 상실한 러시아 지주계급이었다. "(마침내)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12월 31일 칙령을 반포하여, 중립국 선박의 러시아 항구 입항을 환영하는 동시에 견직물과 포도주 및 브랜디의 수입관세를 높여서 프랑스의 주요한 수출입품을 배척하였다."(260)


# 이후의 전쟁 추이

1. 1812년,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군 대패(추위, 배고픔, 게릴라전)

2. 1813년 3월 1일, 러시아와 프로이센 칼리슈 동맹 체결

3. 영국의 웰링턴 장군,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에 대승

4.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수상, 러시아 및 프로이센과 라이헨바흐 비밀조약 체결

5. 1813년 10월 16일, 라이프치히 해방전쟁에서 반불 동맹군 승리

6. 1814년 3월 9일, 쇼몽 조약 체결(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나폴레옹과 평화조약을 맺지 않고, 평화조약 이후라도 20년간 상호방위한다는 내용)

7. 3월 30일, 동맹군 파리 입성


나폴레옹이 유폐된 후, "연합국 사이에 최소한의 의견 일치를 볼 수 있고 또 프랑스 국민의 최소한의 합의를 얻을 수 있는 해결책은 사실 부르봉 왕가의 복구 이외에 달리 신통한 길이 없었다." 루이 18세가 반포한 헌장은 "국민대표가 제정한 헌법이 아니라 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흠정헌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나, 왕정의 복구가 혁명 전의 앙시앙레짐의 복구를 의미하지 않음을 보장하였다."(279-80) 그러나 1815년 3월 1일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유럽과 프랑스에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첫째, 부르봉 왕가가 진정한 통치자의 자격이 있느냐의 문제였고, 둘째는 프랑스 국민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사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연합국의 입장에서는 프랑스를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이전과 같은 관계에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1814년의 평화조약은 나폴레옹을 징계하기는 했으나 프랑스 국민을 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과연 옳았느냐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290)


# 제2차 파리조약(1815년 11월 20일)

1. 프로이센군이 라인 강 좌안 지방 점령

2. 스위스 접경 위링그 지방의 군사시설 파괴

3. 7억 프랑 배상금 지불

4. 4대 연합국 대사들로 구성된 관리 위원단의 감시와 지시


다시 복원한 루이 18세가 직면한 문제는 혁명과 나폴레옹이 성취한 터 위에 안정된 입헌군주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지만,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극우 왕당파는 입장이 달랐다. "왕당파는 귀족과 성직자와 지방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였고 또 그 지지를 받았다. 이 당에는 샤토브리앙 같은 저명한 작가나 빌레르 같은 식견 있는 정치가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프랑스 혁명을 광적으로 증오하고 실질적인 반혁명을 노린 극우였다. 왕이 그들을 자기보다 더 왕에게 충성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을 만큼 그들은 왕의 온건한 정책을 괴롭혔다. 특히 왕을 한결 더 괴롭힌 것은 그들의 사실상의 두목이 왕의 아우 아르투아 백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루이 18세가 1824년에 서거하면 샤를 10세로 즉위하게 될 사람인데, 그런 왕위 상속자가 헌장을 무시하는 백색테러의 선두에 서 있었으니 프랑스가 이제 실현해야 할 입헌군주정치의 희망에 먹구름이 드리웠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295)


# 왕당파 이외의 정치세력

1. 독립파 : 망명 귀족의 횡포를 미워하는 도시 부르주아지, 혁명정부에서 매입한 재산의 몰수를 두려워하는 지주, 나폴레옹을 사모하는 군인들의 집합체(콩스탕, 쿠리에 등)

2. 입헌파 : 혁명과 반혁명 모두를 멀리하고 헌장의 기반 위에서 복고 왕정의 안정을 바라는 명사 집단(조르당, 기조 등)


1824년 9월 샤를 10세가 즉위하자, 왕당파들이 추진한 계획은 "교육과 호적 및 혼인 사무를 교회에 위임하는 일, 혁명 기간에 국가가 몰수한 망명 귀족의 재산을 배상해 주는 일, 민법을 개정하여 세습적인 귀족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는 일 등이었다."(306) 앙시앵레짐 부활 음모에 맞서 "1830년 7월 27일부터 파리 시민은 시내 요소요소에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국민방위대는 1827년에 해산되었으나 대원들은 아직도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나섰다. 낭만적인 혁명의 물결이 순식간에 전 시가를 휩쓸었다." "샤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군대의 힘으로 의회를 항복시키는 것이었는데, 많은 병력을 아프리카 알제 원정에 투입한 그에게는 그럴 만한 군대가 없었다. 그는 센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왕의 목숨을 노리는 폭도들을 피하여 생애 세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부르봉 복고 왕정은 워털루 이후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311)


의회가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추대한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 대혁명 초기 왕족으로 루이 16세에 반대한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조세프의 아들이었다. 조세프는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한 시해파로서 '평등공 필리프'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나 1793년에 자코뱅파에게 처형되었다."(312) "7월혁명은 부르주아가 내세운 민권 사상의 승리였으며, 대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을 통하여 이미 수립된 바 있었던 부르주아의 정치적·사회적 우월권이 재확립된 사건이었다. 이 혁명으로 이제는 앞으로 망명 귀족이 부르주아의 토지 소유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영원히 사라졌다."(315) "7월왕정 시대의 프랑스에서는 정치적·이념적으로 최소한 네 줄기가 뚜렷한 형태로 각축하기 시작하였다. 극우의 정통주의, 극좌의 공화주의, 그 중간에 입헌군주주의로서의 오를레앙주의, 그리고 현대 프랑스에 특이한 보나파르티슴으로."(319-20)


1831년, 최저임금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리옹의 폭동을 정부가 무력 진압하자 노동자들은 "7월왕정을 극도로 불신하게 하였다. 거기서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스스로 만든 강력한 노동조직에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어떤 정치조직도 불신하는 프랑스 특유의 생디칼리슴이라는 노동운동의 씨앗이 이때 배태하기 시작하였다."(322) 1840년 이후 중정 정책을 편 기조 내각이 성립하면서 7월왕정은 나름의 안정과 번영을 누렸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정부 불안이 숨어 있었다. 노동자의 자유는 허위였다. 노동문제는 정부가 조속히 정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심각한 사태를 낳을 만큼 나날이 그 심각성을 더해 가고 있었다." "더구나 1833년 실시된 초등교육법은 글을 읽을 줄 아는 국민의 수효를 늘렸고, 또 인쇄술과 제지법의 발달은 책과 신문 등을 훨씬 염가로 제작할 수 있게 하여 더 많은 국민에게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갖게 하였다."(329-30)


# 기조의 중정 정책politique du juste milieu : 회복된 자유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주력하는 정책


7월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1847년 7월부터 시작된 개혁 연회 방식의 선거법 개정 운동에서 촉발되고 마침내 무장 봉기로 이어진 1848년 2월혁명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1815년 이래 한번은 보수적인 또 한번은 자유주의적인 입헌군주정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하고 말았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 자체를 부정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자는 프랑스 혁명은 인정하였으나 상층 및 중층 부르주아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실패하였다. 오를레앙 왕가는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국민주권의 원리를 시인하면서도 신흥 부르주아에 의한 권력 독점을 위해 지나친 제한선거를 고집하다가 무너졌다. 복고 왕정은 정통파를 만들어내고, 7월왕정은 오를레앙파를 만들어내어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정치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프랑스의 정치 무대를 차지하는 일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341)


# 2월혁명의 상황 전개 

1. 파리 제12구의 개혁 연회banquet et reforme를 정부가 금지

2. 개혁파는 1848년 2월 22일로 연회 개최를 연기

3. 22일 군중 시위가 제압당하자 과격파들이 무장 봉기 조직

4. 기조 내각 해산과 국민 방위대의 혁명파 가담

5. 정규군 지휘권 마비와 무장해제

6. 루이 필리프 퇴임


2월혁명으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시민 평등의 원리에 따라 3월 5일 보통선거제를 결정하였다.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반혁명세력은 유권자가 24만에서 갑자기 960만으로 늘게 되는 사실에서 승산의 요인을 발견하고 있었다. 1833년의 초등교육법이 실시되어 문맹률이 많이 낮아지고 대중용 출판물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유권자는 아직 대부분 문맹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농민이었는데 그들의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 의식을 좌우하는 것은 교구 신부들이었다."(346) 농민들에게 공화국이란 소란 그 자체였는데, "혁명정부가 새 농지법을 재정하여 개인의 토지를 재분배하거나 국유화할 것이라는 소문에 기절초풍하였다." 결국 총선거의 결과는 "정통파 등 우익 왕정파가 차지한 약 150석과 좌익의 사회주의자가 얻은 약 100석을 제외한 나머지 600석 이상이 중도파에게 돌아갔다. 파리에서조차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은 인기가 없었다."(347-8)


팔루 일파는 국립 작업장을 폐쇄하여 노동자 폭동을 유도하였고, 그들의 생각대로 6월 21-23일에 걸쳐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정부군이 투입되어 처참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폭동은 진압된다. "폭동의 와중에서 탄생한 카베냐크의 새 정부는 내각의 형태를 취했는데, 새 정부는 이제 위험한 요인을 일체 단호히 제거하였다. 국립 작업장 폐지, 온갖 종류의 클럽 폐쇄, 폭동 진압에 응하지 않는 공화적인 국민방위대의 무장해제 또는 해산, 신문지법의 부활에 의한 언론 탄압, 하루 열두 시간으로의 노동시간 연장, 온갖 빛깔의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과 감시 등 공화국은 이제 이름뿐이고 반동이 완전히 지배하였다."(352) 이후 12월 10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카베냐크, 라마르틴, 르드뤼 롤랭이 각각 공화주의의 강온파를 대표하여 서로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모두 어이없이 낙선하였다. 당선자는 난데없는 제4의 후보자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었다."(354)


#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당선 요인

1. 영웅 나폴레옹의 전설과 후광

2. 공화주의자를 배격한 농민표 획득

3. 6월 폭동 이후 노동자들마저 공화주의자들을 불신

4. 정통파와 오를레앙파가 공화주의보다 보나파르티슴을 선택


장기 집권을 꿈꾸던 나폴레옹 3세는 1851년 12월 1일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는 국민주권을 믿지도 않았고 공화국을 수호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나폴레옹 3세의 권력은 두 차례의 쿠데타에 힘입은 것이었으므로 국민의 자유 박탈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보상은 경제적 번영과 외교의 성공이었다. 쿠데타에 의한 권력이란 합헌성과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언제 전복될지 알 수 없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 존립을 위해서는 항상 뭔가 잘 하고 있다는 갈채를 국민으로부터 계속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런 갈채가 그치는 날이면 권력은 불안해진다. 그리고 국민은 그 권력을 지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경제적 번영과 외교의 성공에서 그런 갈채를 받고 있었다. 특히 외교적 성공이란 군사적 승리와 함께 일반 국민의 눈에 잘 띄는 현란한 것이다. 여기서 나폴레옹 3세는 크림 전쟁 후에도 계속 외교적 성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365-6)


# 나폴레옹 3세의 주요 행보

1. 크림전쟁 : 영국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흑해 진출 저지

2. 이탈리아 통일 :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통일 운동을 부추겼지만 교황과 국내 가톨릭 세력의 지지 상실

3. 자유무역 정책 : 영국(1860),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1861), 프로이센(1862)과 자유무역협정 체결

4. 공화파와 타협 시도 : 의회 권한 확대, 노동자 결사법 제정

5.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 휴전 중재 : 비스마르크의 외교 수완에 농락당하면서 독일 통일을 목전에 두게 됨

6. 멕시코 원정 실패 : 미국의 먼로주의와 멕시코 공화파의 저항에 밀려 철수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배경

1. 오스트리아에게 승전하면서 북부 독일연방의 맹주가 된 프로이센이 중부 유럽의 최강국으로 등장. 아울러 프랑스 영향권에 있는 남부 독일까지 정복하여 독일 통일을 완성하려는 야망을 간직

2.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의 레오폴트 공이 스페인 왕에 즉위한다는 소문이 파리에 퍼짐(1870년 7월) : 좌우협공 위기에 빠진 프랑스

3.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레오폴트 사의 표명

4. 프랑스 외상 그라몽이 향후에도 호엔촐레른 왕가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는 확약을 요구하자 레오폴트 왕이 격분

5. 비스마르크가 이를 전쟁의 구실로 삼아 양국 국민을 선동

6. 프랑스 의회 전시 채무 가결, 선전 포고(7월 19일)


"9월 2일 (세당에서) 마크마옹 원수 휘하의 전 부대는 황제 나폴레옹 3세와 함께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의 긴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굴욕적 참패였다. 파리 시민은 이런 참패를 가져온 제정을 더 존속시킬 수 없다고 다짐하였다. 9월 4일 드디어 혁명이 일어났다."(382) 그러나 혁명으로 구성된 임시 국방정부는 "1792년의 공화국처럼 과격하지도 않았고 1848년의 공화국처럼 분열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새 정부는 출발부터 대체로 온건한 공화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385) 파리가 프로이센군에게 포위 당하자 "국민방위대와 일반 시민은 대부분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고 진심으로 독일군의 박멸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이에는 "블랑키보다는 차라리 비스마르크"라는 구호가 점점 퍼져 나갔다. 이 구호는 보수적인 정부의 생각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과격파의 혁명보다 독일로의 항복을 택하려고 하였다. 이런 태도가 과격파의 눈에 반역으로 보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393)


"(1871년) 3월 18일 파리에서 파노라마처럼 일어난 이 극적인 사건들은 모두 즉흥적인 것이었다. 티에르의 작전 계획 이외에는 미리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작전 계획도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짜여진 것이 아니라 다분히 즉흥적인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계획은 오류투성이였다. 새벽의 기습은 파리 시민에게는 청천벽력처럼 너무나 의외의 사건이었다. 거기에 대응한 모든 행동도 순간순간의 상황에 따라 취해진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르콩트와 토마의 처형도, 브뤼넬의 병영 습격도, 비누아의 철군도, 티에르의 정부 철수 결정도 모두 순간순간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의 돌발 앞에서 취해진 일들이었다. 3월 18일 사건은 본래 의미의 봉기가 아니었다. 파리 주민과 방위대의 폭동은 정부에 대한 피동적인 자연발생적 행동이었다. 어쨌든 현대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세계사에서 가장 끔찍하고 가장 논란이 많은 파리 코뮌이라는 미완성 혁명의 불길이 이제 가눌 수 없이 드높이 솟았다."(408)


# 1871년 5월 28일 파리 코뮌 붕괴


"톰슨은 1871년의 파리 코뮌과 그해 봄 거의 동시에 지방 대도시에서 일어난 코뮌들은 1789년 이래로 이어져 온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이 양산한 착잡한 분규들을 뒤돌아볼 때 이들을 매듭짓는 과정 중 최대의 것으로서, 그 후부터 프랑스는 혁명적 전통을 돌아볼 때면 코뮌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폭력에 대한 호소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톰슨은 파리 코뮌을 19세기 프랑스의 역사를 특정지었던 공화적·혁명적 전통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파리 코뮌의 처절한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폭력에 의한 혁명 기도를 포기하게 하여 평화적 타결과 화해의 길을 열게 했다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제3공화국의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한 세력은 혁명적인 공화주의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적 전통에 반대해 온 보수 세력이었는데, 그러한 의외의 현상을 일어나게 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파리 코뮌이었다는 것이다."(432-3) 


# 뷔리의 파리 코뮌 평가

1. 자본과 노동, 수도와 지방 사이의 오해가 빚은 비극으로서, 1789년 이후 줄곧 유지해 온 파리의 정치 주도권 상실

2. 좌익 과격파를 거세하여 폭력과 불안정, 사회적 위기를 동일시하던 관념 불식

3.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 지연

4. 국민방위대를 해체하여 민중 데모크라시의 원천 세력 제거

5. 제3공화국 탄생의 초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