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코뮌 고려대학교 교양총서 4
가쓰라 아키오 지음, 정명희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1848년 2월혁명의 결과 제2공화정부가 태어나고 보통선거가 선언되었을 때, 부르주아 공화파 임시정부는 노동자 세력을 철저히 진압하고 홀로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농민들의 지지를 얻은 루이 나폴레옹이 압승하자 권력의 항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1851년 12월 21일의 국민투표는 약 740만 표 대 60만 표라는 압도적인 표 차로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추인했고, 이듬해 1월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하여 그 권한을 대폭 확장시킨 신헌법이 발표되었다." 꾸준히 제정 부활을 도모한 끝에 1852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고 제2제국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1852년의 헌법을 약간 수정·보완한 '제국헌법'에 의하면 행정·군사·외교의 전권은 황제에게 집중되고, 도지사prefet, 지방장mairie을 포함하여 모든 관직은 임명제로 바뀌며, 장관은 황제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책임내각제는 완전히 부정되었다."(28-9)


"카를 마르크스는 제2제정의 지배체제를 보나파르티즘이라고 부르고, 그 국가를 보나파르트 국가라고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보나파르티즘이란, 부르주아지가 자체적으로 국가를 통치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노동자계급이 아직 그 능력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시기에, 계급들 사이의 조정자를 표방하여 보수적인 소토지 소유 농민=분할지 농민을 정치권력의 기반으로 삼아 성립된 반동적 독재체제이며, 자본에 의한 노동의 노예화를 실현한 국가권력의 가장 불순한 형태로 규정된다." "많은 노동자는 황제사회주의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으며, 산업자본주의는 제정권력에 질서 유지와 산업의 보호·장려를 기대했다. 부르봉 정통 왕조주의에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가톨릭 세력도, 정부가 교회의 활동에 편의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제정을 지지했고, 또한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농민의 사대주의적 경향은 보나파르트 가家의 카리스마적 권위가 뿌리 내리기에 훌륭한 토양이었다."(29-30)


"나폴레옹 3세는 권력의 자리에 앉자, 혁명의 재발을 방지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대大부르주아지와 제휴하여 적극적인 경제팽창 정책을 내세웠다." "이 시기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는 것은, 생시몽주의자 유대인 프레르 형제가 설립한 '크레디 모빌리에'(동산은행動産銀行)로 대표되는 거대한 투자은행의 출현과 수도 파리를 시작으로 대도시에서 실시된 대규모 도시계획사업이다."(32-3) 1860년 나폴레옹 3세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영불통상조약을 맺어 자유무역 체제로 돌아서자 "대부분의 산업자본가는 일제히 반대의 불길을 당겨, 황제의 이탈리아 정책에 반감을 갖는 가톨릭 세력과 손잡고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36-7) 황제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기대했지만, 영국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접하면서 "정치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던 노동자는, 이제 황제의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me'의 포로가 되는 것을 감수하지 않게 되었다."(41)


"1867년 공황을 계기로 하여 사회정세에 나타난 가장 현저한 변화는, 도시의 공장노동자가 노동운동의 제1선에 등장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해고, 임금삭감, 노동강화라는 자본 공세에 직면하여 계급의식에 눈떴다. 이들 대다수의 공장노동자들은 산업혁명의 진전과 함께 농촌에서 도시로 급격히 흡수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농민적 성격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며, 어떻든 대자본이나 황제의 가부장적 온정주의적 지배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불황이 심각해지자 도시 직인층이 갖는 혁명의식을 흡수하여, 자본에 대한 임금노동의 해방을 짊어지는 체제개혁 세력으로서의 자신들의 존재와 힘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노동운동은 여기에서 프루동적인 동업조합의 상호주의의 껍질을 벗고, 동업조합 내부에 설치된 저항조합을 모체로 하여 혁명적 노동조합syndicat을 조직하는 방향성을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49-50)


# 제정 말기 혁명운동의 지도층

1. 자코뱅파 및 프티부르주아적 급진공화파 : 민주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모인 학자, 저널리스트, 변호사, 예술가 집단

2. 블랑키파 : 무장봉기를 일으켜 혁명독재를 실현하고자 분투했던 블랑키를 중심으로 단결된 집단

3. 제1인터내셔널 지도층 : 순수 프루동주의자에서 혁명적 집산주의자collectivistes로 이행한 집단(생산수단을 공유하는 평등사회를 구상했지만 혁명독재는 반대)


"1870년 7월,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가 발단이 되어 돌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국내에서는 혁명운동에 뒤흔들리고 국제 정세에서는 고립되어, 국내외 양쪽으로 궁지에 몰린 나폴레옹 3세가 제정 연명의 최후 수단으로 시도한 군사적 모험이었다."(65-6) 그러나 1870년 9월 2일, "메스 구원에 실패하고 거꾸로 스당에 몰린 마크-마옹 지휘하의 프랑스군은 황제와 함께 프로이센의 군문軍門에서 투항했다.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이틀 후 9월 4일 일요일, 스당 항복의 보고에 전격적인 충격을 받은 파리 시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봉기하여 약 50만 명의 시민이, 블랑키파를 선두로 하여 임시로 소집된 입법원 회의장인 부르봉 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스당의 항복은 제정 최후의 보루였던 군사권력의 붕괴를 의미했다. 여기에서 지배의 기초가 완전히 파헤쳐져 무너져 버린 제2제국은 파리 민중의 돌풍을 정면으로 받아 썩은 나무가 쓰러지듯이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다."(68-9)


부르주아 공화파 의원들로 구성된 국방 임시정부는 표면상으로는 "한 치의 토지도, 우리 성채의 돌멩이 하나도 양도하지 않는다"(외무장관 파브르)고 공언하면서 "내심으로는 목전에 닥친 프로이센군보다는 무장한 민중, 즉 국민군 쪽이 훨씬 두려웠다."(82) "당연히 '총출격'을 요구하는 혁명 세력·국민군 병사와 구실을 내세워 결전을 회피하려고 하는 국방정부와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간다. 블랑키파는 이제 확실하게 '국민배신 정부'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정부와 혁명 세력의 협력관계는 열흘 가량 지나자 냉각되고 적대관계로 바뀌었다. 민중의 자주적 관리조직으로서의 '코뮌' 선거를 요망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였다. 이 시점에서 민중이 마음속에 그린 코뮌이란, 무엇보다 대혁명 때의 '혁명적 코뮌'의 이미지였다. 여기에 더해 중세도시에서 쟁취했던 코뮌 자치권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되었다."(85)


1871년 1월 25일부터 26일까지 베르사유에서 교섭이 진행되어, "21일 동안의 휴전, 휴전 기간 중 강화講和의 가부를 묻는 '국민의회' 선거 시행, 쌍방의 점령 지점에서의 전투행위 정지, 파리 성벽의 무장해제, 파리를 지키는 요새의 프로이센군에 의한 점령, 정규군 1개 사단과 국민군을 제외한 파리군의 항복, 프로이센군에 대한 2억 프랑의 전시과세 지불 등의 굴욕적 조항을 짜넣은 휴전조약이 조인되었다."(120) 2월 8일, 파리에서 열린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급진공화파가 대거 승리를 거두었지만, 보르도 국민의회는 티에르를 행정장관으로 지명하여, 노동계급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태 수습을 추진하였다. "3월 17일부터 18일 밤까지 외무부에서는 파리의 국민군에 대한 기습작전을 협의하기 위한 각료회의가 열렸다. 작전의 개략은, 파리의 전 정규군을 동원하여 도시 전체를 점령, 국민군을 일격에 무장해제시키고, 중앙위 전 멤버와 주요 혁명가를 체포한다는 것이었다."(143)


3월 18일 새벽에 감행된 정부군의 기습은 자연발생적으로 봉기한 민중·국민군 병사들의 저항과 정부군 병사들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티에르는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자, 즉각 파리를 포기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는 1848년 2월혁명 때 당시 국왕 루이 필리프에게 전술적으로 일단 수도를 철퇴한 다음, 지방의 병력을 재결집시켜 파리를 탈환한다는 작전을 건의했던 일을 떠올렸다."(153) "리옹, 마르세유, 나르본 등 많은 지방도시에서 파리를 모방하여 코뮌 운동이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아울러 떠올리면, 신속한 결단과 행동만이 승리를 가능케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중앙위는 티에르 정부의 도주로 생긴 파리의 정치적 공백을 틈타 거저 들어온 정치권력을 즉각 행사하려고 하지 않고,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대신해야 할 자신들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주저했다. 그들은 결국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렸다."(158-9)


3월 28일, 정식으로 성립된 파리코뮌의 정책을 살펴보면 "의회식 기관이 아니라, 동시에 입법하고 행정하는 직접 민주주의적 '행동 기관'(마르크스)이 되어 '돈이 덜 드는 정부'라는 구상하에서, 사법관을 포함한 모든 관리는 철저한 리콜제─언제라도 해임이 가능하고, 민중에 대해서 직접 책임을 지는 대표제─에 따르고, 관리의 정치적·직업적 선서 의무는 폐지되며, 그들의 봉급은 노동자의 최고임금 수준을 넘지 않을 것 등이 정해졌다(4월 2일). 또 관리의 겸직에 의한 이중 수당 취득이 금지되었다(5월 4일). 상비군-정규군은 폐지되고 코뮌의 국민군이 시의 치안과 방위를 맡으며, 표현·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과 시민의 자유는 반혁명 세력 단속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충분히 보장되었다. 또한 노동자의 생활개선을 위한 사회정책이나 노동자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이 차례로 나오고, 세속화된 무료 의무교육을 통하여 대중의 교육 수준 향상이 도모되었다."(199)


"노동위나 교육위의 업적과 반대로 코뮌의 약점을 분명하게 노출시킨 것은 보안위원회와 재정위원회다. 국가의 종교예산이 폐지되고 수도회의 자산이 몰수된 것은 코뮌 정신에서 볼 때 당연한 조치였으나, 대혁명 때의 생-쥐스트를 자처하는 블랑키주의자 리고를 '대표'로 하는 보안위는 성직자·반코뮌파에 대하여 종종 필요 이상의 공포정치를 행했다. 특히 교회시설을 제멋대로 접수하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사를 체포한 것 등은 중소 부르주아지들에게 쓸데없이 불안을 조장해, 베르사유 쪽에 '박해'라는 그럴싸한 선전 재료를 제공했다." 또한 재정위원회가 프랑스은행 장악에 소홀한 틈을 타서, 프랑스은행은 "베르사유가 파리와 싸우기 위해 은행 앞으로 발행한 2억 5천 7백 63만 7천 프랑의 어음을 인수"하여 코뮌 반대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엥겔스와 많은 역사가들은 프랑스은행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을 코뮌 패배의 중대한 요인 중 하나로 꼽는다."(207-8)


"티에르는 지방의 소란을 진압하면서, 비스마르크와 교섭하여 휴전조항을 완화시키고, 3월 말까지 약 6만 5천의 정규군 병력을 베르사유로 집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4월 1일, 국민의회에서 '멋진 육군'을 극구 칭찬한 티에르는 파리 공격 결정을 내렸다." "이날 오후 공격 소식을 들은 파리에서는 비상소집의 북소리가 울리고, 베르사유군의 만행에 격앙된 군중은 즉시 베르사유로 총공격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 시점에서 파리는 현역 국민군 8만 명, 주둔 국민군 11만 4천 명, 여기에 벨기에인 700명, 폴란드인 400명 등 외국인 의용병을 보태면 20만 가까운 병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실시된 총사령관제의 폐지와 징병제의 철폐가 전반적인 군기와 지휘 능력에 악영향을 끼쳐, 실제 전투요원은 약 4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227-8) 더구나 군사권력을 대표하는 국민군 중앙위와 문민권력을 대표하는 코뮌정부 사이의 알력은, 코민 측의 열세를 더욱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코뮌의 이중 삼중의 내분이 베르사유 쪽에 더욱더 허점을 이용할 여지를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티에르는 보르도에 예정되어 있던 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전국 도시회의 개최를 금지하고 지도자를 체포하여 파리와 지방도시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프로토를 개입시켜 수차례에 걸쳐 이뤄진, 인질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블랑키를 석방시키려는 교섭도 티에르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었다. 다르부아 대주교의 친서를 가지고 파리에서 파견된 인질 중의 한 사람인 라가르드 신부는 굳은 서약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블랑키 한 사람과 인질 전원을 교환하자는 최후의 제안마저 티에르에게 냉정히 거절당하는 것으로 5월 13일의 교섭은 최종 결렬되었다. 티에르는 파리에게 피의 값을 치르게 한다는 구실을 얻어내기 위해, 오히려 대주교의 처형을 바라고 있었다."(250-1)


5월 21일 일요일, "적이 성벽에 바짝 다가와 성문을 살피고 있을 때도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규군이 침입해 와도 3월 18일처럼 민중과 손을 맞잡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공기가 넘치고 있었다. 대부분이 농민 출신인 정규군 병사들은 패전 콤플렉스가 있는 데다가 파리의 반란 때문에 귀향이 늦춰졌다는 원망이 겹쳐, 파리 시민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해 피에 굶주린 흉포한 야수가 되어 있었다." "21일 밤이 되자 두애, 비누아 장군이 인솔하는 베르사유군 본대가 도착하여, 포앵 뒤 주르 지구에서 속속 파리로 들이닥쳤다. 트로카데로, 개선문은 밤 사이에 점령당해 포로의 총살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피의 주간'이라고 불리는 처참한 시가전의 막이 올랐다."(254-5) "23일, 베르사유군은 몽마르트르 고지를 탈취하고 바티뇰, 제1구, 중앙지구도 점령했다. 3월 18일의 한을 풀어줄 때가 이윽고 왔다는 듯이, 사령관은 로제 가街를 시작으로 점령지구에서 연맹병과 일반시민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개시했다."(257)


코뮌의 씨를 말리려는 백색 테러는 5월 28일 베르사유군 사령관 마크-마옹의 파리 정복 선언을 무색케 할만큼 끊임없이 자행되고 나서야 끝났다. "코뮌의 붕괴는 프랑스의 노동운동·혁명운동에 괴멸적 타격을 주고, 그 발전을 10년 이상이나 늦추었다. 인터내셔널을 금압하는 '뒤포르 법'이 제정되어 시민 자유는 대폭 제한되었다. 또한 인터내셔널의 국제조직도 각국 정부의 억압과 영국의 노동조합 운동가의 이탈, 스위스에 망명하여 코뮌 무정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바쿠닌의 분파행동 등 때문에 쇠퇴에서 해체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국제 사회주의의 혁명운동에 준 영향을 별도로 생각해도, 왕당파나 제정파의 군주제 부활 음모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제3공화제 확립에 무시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민주주의적인 공화주의 세력의 끈질긴 운동으로, 1880년 코뮈나르의 전면적 대사면령이 결정되었을 때, 프랑스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은 새로운 부활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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