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분열하는 제국 - 11개의 미국, 그 라이벌들의 각축전
콜린 우다드 지음, 정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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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륙의 "유럽 문화는 동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제국 군인과 선교사들에 의해 남쪽에서부터 전파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 하위문화는 대서양의 코드 곶 해안이나 체서피크 남쪽 지역이 아니라 뉴멕시코 북부의 건조한 고원과 콜로라도 남부에서 시작됐다. 1595년 엘 노르테에 정착한 이래 지금까지 줄곧 자신들만의 문화를 간직한 채 사는 스페인계 미국인은 19~20세기가 되어서야 뒤늦게 이 지역에 진출한 멕시코계 미국인을 자신들과 한 덩어리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매우 큰 불쾌감을 느낀다."(38-9) 교황에게 남반구 세계를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도덕적 명령'을 받은 "스페인 국왕은 아즈텍과 마야 제국을 손쉽게 정복한 후 은이 잔뜩 매장된 산맥과 금광을 발견하자 신이 단순히 자기편인 것을 넘어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심판의 날'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제국Universal monarchy'을 건설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말라는 계시를 내린 것이라 믿었다."(43)


"엘 노르테는 자체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고 선거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지역 군사령관이 총독 역할을 대행했고, 지역 협의회나 의회 같은 민주적인 제도는 전무했다. 샌타페이, 샌안토니오, 투손, 몬테레이 같은 몇 안 되는 도시에서조차 의회는 부유층 올리가키들oligarchy의 전유물이었다. 1700년대 말에는 그마저도 기능이 거의 마비됐고, 시정 운영은 지역 군 장교들의 손에 넘어갔다. 일반 주민들은 그들의 생계를 돌봐줄 지역 후원자patron나 기득권층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충성을 바쳐야 했다. 후원자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과부, 고아, 병약자들을 돌봤다. 또 종교 행사나 교회활동에 자금을 지원했다. 농장 일꾼들은 이에 복종하고 따랐다. 마치 중세 시대의 농노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시스템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엘 노르테 지역의 정치,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47-8)


# 엘 노르테El Norte의 출발

1. 개신교를 적대한 스페인의 영향으로 양키덤, 애팔래치아,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와 적대 감정

2. 스페인이 에너지와 자원을 종교 전쟁에 탕진하면서 평균 이하의 빈곤 지역으로 전락

3. 열렬한 개종 과정에서 인디언과 스페인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급증하여 인종 차별 의식 약화


뉴프랑스 지역에 정착한 "당시 사람들은 숲에서 사는 사람을 나무꾼(혹은 모피상)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원주민 문화와 가치관에 부분적으로 동화된 1세대 이주민들이었다. 그들의 자식은 프랑스인이면서 동시에 미크맥, 몽타니에, 휴런 족의 후손이기도 했다. 이들은 메티스metis(캐나다 프랑스인과 북미 원주민 사이의 혼혈)라는 새로운 인종을 형성했다. 메티스는 스페인의 메스티소와는 달리, 유럽 정착민 문화만큼이나 원주민 문화에도 편안함을 느꼈다. 모피상들은 유목민이나 수렵인들처럼 자유와 독립을 누릴 수 있는 자신들의 삶을 자랑스러워했다." "뉴프랑스에서 평등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구대륙의 봉건제를 압도하면서 점점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인디언을 동화시키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메티스 사회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 사회는 프랑스적인 요소만큼이나 북미 원주민들의 가치관과 문화가 많이 반영된 사회였다."(63-4)


# 뉴프랑스New France : 행정구역으로 독립하려는 퀘벡 주가 포함된 지역으로 앙시앵 레짐 시절의 프랑스 북부 소작농 민속 문화와 북미 동북부의 토착 원주민 문화가 결합하여 형성했다.


"타이드워터는 애초부터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없는 자들로 구성된 사회였다. 피라미드의 맨 위에 군림한 부유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타이드워터의 경제, 정치를 빠르게 장악해갔다."(71-2) "타이드워터에서 권력은 세습됐다. 주요 가문들은 영국과 미국, 양쪽 모두에서 혼맥으로 얽혔다. 그중에서도 특히 버지니아 일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서로 모두 친인척 관계였다. 식민지의 상원, 대법원, 행정 내각 역할을 한 것은 물론 토지의 분배까지 관장했던 버지니아 왕실 의회Royal Council는 1724년 의회의 모든 멤버가 혈연이나 결혼으로 얽힌 상태였다."(79) "타이드워터의 젠트리가 받아들였던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공화정을 모델로 한 '전통적인' 공화주의였다." "고대 라틴사회의 계몽 정치철학인 리베르타스Libertas에서 파생된 자유 개념은 양키덤과 미들랜드의 정치철학에 영향을 미친 게르만 사회의 프라이하이트(Freiheit, 자유)에서 파생된 프리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80-1)


#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자유 vs 천부인권으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유


# 타이드워터Tidewater : 영국 남부 젠트리의 후손들이 세운 사회로 권위와 전통을 중시하고 대중의 정치 참여에 우호적이지 않다. 헌법에 귀족적인 요소들(가령, 대선 선거인단 제도)을 첨가했다. 토머스 제퍼슨이나 조지 워싱턴, 제임스 매디슨이 타이드워터 출신이다.


"청교도들은 미 대륙에 영국 시골 마을의 삶을 옮겨심고 싶어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세우고 싶어했던 사회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장 칼뱅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개신교 신정사회, 즉 종교적 유토피아였다. 그들은 뉴잉글랜드의 황무지에 새로운 시온을 건설하고자 했다."(84) "양키덤 초기 정착민의 절반 가량은 영국 제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이스트 앵글리아(영국 동남부) 출신이었다. 이스트 앵글리아에 속하는 7개 카운티는 영국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심지였고 교육 수준도 높아서 중산층이 빠르게 증가하는 곳이었다. 또 전제정치에 굴하지 않은 오랜 저항의 역사를 자랑했다." "이들은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향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황무지의 불확실성을 선택했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이 70퍼센트를 차지했기 때문에 성별, 연령 비율이 다른 국민이 세운 사회보다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86-7)


1624년 네덜란드인들이 정착한 뉴네덜란드는 비록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북미의 어떤 지역과도 달랐다. 모피 교역소로 출발한 이 도시는 사회를 어떻게 단결시킬 것인지, 혹은 어떤 사회적 모델을 지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모두 거세된, 그저 상업적인 목적에만 충실한 곳이었다. 도시의 행정은 글로벌 기업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의 관할 아래 놓였고, 실제로 처음 몇십 년 동안은 서인도 회사가 공식적으로 뉴네덜란드를 통치했다. 양키덤과 타이드워터 사이에 위치한 이 도시는 양쪽 모두가 이용하는 화물 집산지가 됐다."(96) 관용을 중시하는 네덜란드인들은 "다양성을 축복이라 여겼던 것이 아니라 그저 '참고 견딘' 것이었다. 샹플랭의 고향인 생통주 마을 사람들처럼, 네덜란드인들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유럽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대안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103)


디프사우스를 형성한 사람들은 "역사가 좀더 오래된 식민지인 서인도 제도 바베이도스를 세운 자들의 아들과 손자들이었다. 바베이도스는 영국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하면서도 가장 잔인한 사회였다. 그들은 찰스턴에서 영국 지방 영주와 같은 삶을 누리고자 한 것도 아니고, 종교적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 시대에도 악명이 높았을 만큼 비인간적이었던 서인도 노예국가 제도를 이곳에 확장시키려 했다." "디프사우스는 애초부터 부와 권력이 철저히 불공평하게 나뉜 사회였다. 소수 지배층이 공권력을 등에 업고 테러적 수단을 동원해 모든 이의 복종을 강요하는 곳이었다."(119-20) "디프사우스는 군사화된 사회인 데다 카스트 구조로 이뤄져 권력에 대한 복종 문화가 강했다. 그뿐 아니라 매우 공격적인 팽창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이기도 했다. 농장주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저지대에서 비슷한 지형을 가진 해안가 위아래로 영토를 넓혀나갔다."(130)


"1680년대에 형성된 미들랜드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뒤섞인 관용적인 사회였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평범한 서민층 가족들이 사회의 주를 이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내버려두는 것뿐이었다. 그 후 300여 년 동안 미들랜드의 문화는 계속 서쪽으로 뻗어나가 필라델피아 주변과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미국 중부를 휩쓸었다. 미들랜드인들은 매우 중요한 특징을 가진 국민이다. 북미 대륙에서 가장 일반적이면서 표준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종종 킹메이커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들이다." 미들랜드의 주요 구성원들인 "퀘이커교는 폭력과 전쟁을 강하게 거부하고 평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퀘이커는 이 같은 교리를 너무나 경직되게 엄격히 적용한 나머지 반세기 후인 1690년대에 미들랜드에서는 영원히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133-5)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마지막 국민인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인들은 등장하자마자 가장 골칫덩이 같은 존재가 됐다. 영국의 국경 분쟁 지대에서 이주해온 그들은 미들랜드 산간에 씨족을 기반으로 한 전사 문화Warrior culture를 퍼뜨렸다. 미들랜드,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의 변방에 정착한 이들은 행정, 군사, 인디언 정책에 대한 기존 지배 세력의 독점적 통제력을 산산이 깨버린 주체이기도 하다." "상시적인 격변과 불안정한 일상에 시달린 국경지대인들은 (씨족끼리 뭉쳐 서로를 의지하면서) 칼뱅주의에 입각한 장로회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됐다. 보혈의 피로 정화되어 성경이 약속한 주의 나라 백성이 되었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진노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았다. 모든 외부 세력을 불신하는 국경지대인들은 개인의 자유와 명예를 중요시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기를 들었다."(146-7)


"1775-1782년에 벌어진 독립 투쟁은 표현, 종교,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미국인'들이 힘을 합쳐 싸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각 식민지의 문화적 특성, 권력을 지배하는 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느슨한 군사적 동맹을 맺어 함께 싸운, 매우 보수적인 행동의 발로였다. 반란에 동참한 식민지들은 결코 하나의 공화국을 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영제국이 미 대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식민지를 섣불리 일원화시키려 하자, 공동의 위협에 대항해 일시적인 연합을 형성했을 뿐이다."(162) "그러나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식민지들이 합의한 영국으로의 수출 금지 조치가 발효될 무렵, 양키의 공동묘지에는 이미 영국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시신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 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177-8)


# 각 공동체들의 반응

1. 양키덤 : 종교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대표들을 소집하고, 혁명군을 조직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대영 투쟁

2. 타이드워터 :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조지 메이슨, 조지 워싱턴 등 피드먼트에 사는 젠틀맨들이 애팔래치아 너머의 잠재력을 보고 대영 투쟁에 합류

3.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 자유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적대한다는 신념에서 독립파에 합류

4. 미들랜드 : 평화적 해결 추구. 독립이 호전적인 팽창주의 세력의 힘을 키울 것으로 보고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지 않음

5. 뉴네덜란드 : 뉴욕이 완전히 양키들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한 왕당파의 근거지 역할

6. 디프사우스 : 농장주들의 특권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항의하는 영국상품 보이콧 운동에 만족. 노예반란 우려


"양키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앞으로도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치권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투표로 선출된 대표들이 운영하는 지역 정부(주가 아니라 마을 단위로 세워진 정부), 사회 중심에 있는 청교도 교회, 앵글로색슨으로서 폭압에서 벗어나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로울 권리, '신의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180-1) "양키덤이 자유를 위한 혁명의 근거지였다면, 뉴네덜란드는 독립을 반대하는 왕당파와 영국군을 위한 근거지로서 정확히 정반대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여느 주변 식민지와 달리 주권을 수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뉴네덜란드는 한 번도 주권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뉴네덜란드인들은 뉴욕이 영국에서 독립하고, 양키의 수중에 넘어가면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종교적 관용과 문화적 다양성이 훼손될 가능성을 우려했다.(182-3)


"양키덤을 제외한 상당수 영국 식민지들이 독립에 대해 양면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면, 그들은 대체 어떻게 독립을 하게 된 것일까? 첫째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독립을 간절히 바랐던 타이드워터 젠트리의 적극적인 동참, 그리고 둘째는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는 누구와도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던 펜실베이니아, 캐롤라이나, 조지아 지역의 애팔래치아인들이었다. 외떨어진 산간지역에 위치한 데다, 가난하고, 하나의 정부로 통합되지도 않았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는 독립 전쟁에서 가장 복잡한 변수였다. 외부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던 국경지대인들은 '혁명'을 핑계 삼아 판을 뒤엎고자 했다."(192) "소수의 '왕당파' 국경지대인들은 영국군이 그들의 적인 디프사우스 농장주의 적이기 때문에 영국 편에 섰다. 반면 다른 산간지대 마을에서는 영국을 더 큰 압제자로 여겼다. 결국 국경지대인들은 농장주와의 싸움에 더해 같은 국경지대인끼리도 내전을 겪게 됐다."(194)


"전쟁이 시작될 무렵, 식민지 사이에 구축된 협의체는 외교 기구인 '대륙 의회'뿐이었다. 대륙 의회는 기본적으로 참여국 과반수의 찬성을 통해서만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국제 조약 기구였다. 결의안을 이행하지 않는 회원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회원을 군사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는 한,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대륙 의회는 군사적 제재는 물론 영국의 위협에 더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지금의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비슷한 성격의 연합군을 창설했다. 그것이 바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이다. 그들은 수많은 입씨름을 거친 끝에 대륙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군사적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이 커지고, 더 중요하게는 회원국 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조약기구에 훨씬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 최초의 헌법인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은 이러한 두려움 속에서 탄생했다."(198-200)


"식민지 지도자들은 전쟁에 사람을 동원하기 위해 영국과의 전쟁을 독재 및 압제와의 싸움으로 포장했다. 그들은 평민들에게 민병대에 합류하고 대규모 회합에 참석해 지도자들이 설명하는 결의안을 열렬히 지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행동대를 구성해 결의안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곤봉이나 노로 구타하거나 뜨거운 타르를 끼얹은 후 온몸에 깃털을 붙이는 공개 처벌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과정은 오히려 평민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민주주의에 관한 글을 쓰거나 읽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토머스 페인이 쓴 <상식>과 1776년 미국의 독립 선언은 이러한 열망에 불을 댕겼다." "하층민들이 통제 불능이 되어간다는 우려가 높아지자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훨씬 더 강한 연대를 맺어 각 지역의 독립하려는 움직임과 민의를 수시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게 됐다."(204-5)


"미국 헌법은 결국 서로 경쟁관계인 국민 사이에서 벌어진 골치 아픈 타협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타이드워터의 젠트리와 디프사우스로부터 평범한 시민의 직접 투표가 아니라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물려받았다. 뉴네덜란드는 양심과 표현,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 장전을 물려주었다. 오늘날 미국이 영국식 의회 모델을 따라 강력한 단일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것은 남부의 폭정과 양키의 간섭에 대항할 수 있도록 각 주의 주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한 미들랜드 때문이다. 양키는 인구 비례대로 의석을 배정하기 원했던 타이드워터와 디프사우스를 상대로 싸워 이겨서 작은 주들도 상원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양키는 또한 의석을 배분하기 위해 인구를 셀 때 노예는 5분의 3만 포함하도록 절충안을 내고 이를 밀어붙였다. 투표권이 없는 노예들은 대표될 수 없으므로, 의원 수를 배정할 때 이 점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양키의 논리였다."(208-9)


"타이드워터와 디프사우스를 제외한 다른 식민지 사람들의 상당수는 (1789년) 헌법이 반혁명적이며 교모하게 민주주의를 억압한다고 여겼다. 또 소수의 지역 엘리트와 신흥 은행가, 금융 투기꾼, 그리고 같은 인종과 문화를 가진 국민에게 아무런 충성심도 없는 지주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켜줄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존경받는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 같은 목적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거를 치르지 않는 의원인 상원을 높이 평가했다. "건방진 민주주의를 억제하고"(알렉산더 헤밀턴), "민주주의의 어리석음과 불안정함을 막아줄 수 있는"(에드먼드 랜돌프) 제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불편함을 막기 위해 연방 선거구는 클수록 좋다"(제임스 매디슨)고 생각했다. 메디슨은 직접 민주주의에 유리한 소규모 집단은 파벌이 생겨나기 쉬우므로, 어리석은 이들이 쉽게 다수를 정하지 못하도록 선거구가 클수록 바람직하다고 여겼다."(220)


"뉴잉글랜드가 서부 진출에 박차를 가한 이유는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는 당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 좋은 토지는 이미 임자가 있었고, 개척할 땅이 빙식氷蝕 지형인 동부 메인 변두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식 세대 앞에 놓인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다. 이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도 뉴욕 국경을 넘어 펜실베이니아 북부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다."(241) "양키는 자신들의 이주 여정을 1600년대 초 뉴잉글랜드 선조들이 종교 사역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바라봤다. 1787년 매사추세츠 입스위치에서 머스킹엄 밸리로 향한 첫 이주민들은 네덜란드를 떠나던 필그림 파더스처럼 예배당 앞에서 퍼레이드를 벌인 후 성직자들의 고별사를 받으며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하이오 강 하류에서 탈 작은 배를 만든 후 '서부의 메이플라워호'라는 이름을 붙였다."(244)


뉴잉글랜드인이 '서북부 영토'의 북쪽을 거쳐 서부로 진출하는 동안, 미들랜드인들은 중앙 중서부로 쏟아져 나갔다. "양키처럼 미들랜드도 유럽이나 동부 연안에서 이곳으로 올 때 가족 단위로 이웃사촌들과 함께 이주해왔다. 그러나 양키들과 달리 그들은 주 전체는커녕 이웃 마을 공동체를 동화시키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델라웨어 밸리처럼 각 마을은 민족별로 형성되곤 했지만, 카운티 전체로 놓고 보면 다문화적인 성향을 띠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독일인들은 전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기술을 보유한 장인이었으며 농업 지식이 풍부했다." "미국에 개척의 광풍이 불어닥칠 때도 독일인들은 가족과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땅을 경작하면서, 안정되고 영구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렇게 한곳에 뿌리를 내린 생활 덕분에 독일인들은 미들랜드, 더 나아가 미국의 중서부 문화에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259-60)


"국경지대인들은 최초로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까지 진출한 사람들이었고, 미국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인디언의 영토까지 파고들어갔다. 그들은 대륙 의회가 서북부 영토를 편입시키고 그곳에 살던 인디언을 정복하기 오래전부터 트랜실베이니아나 프랭클린 국가 같은 자신들만의 정부를 세웠다."(262) "이들은 숲과 빈터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뒤늦게야 도시를 형성했고, 공공 투자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어디에서나 지방세는 매우 낮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도시 정부는 거의 없거나 극히 드물었다."(264) "중서부 애팔래치아인의 개인주의적 자유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간섭하기 좋아하는 양키들이었다. 그 결과, 국경지대인들이 장악한 지역은 19세기부터 민권운동 시대에 이르는 동안 내내 디프사우스가 이끄는 민주당의 견고한 지지층이 됐다."(268)


"1820년 전까지 대륙의 동남부를 지배한 세력은 타이드워터였다. 식민지 시대와 초기 공화국 시절,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버지니아였다. 타이드워터 젠트리는 애팔래치아가 가져가야 할 의석수를 박탈한 덕에 그 지역은 물론 나라 전체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미국의 초기 대통령 5명 중 4명을 배출했고, 독립선언문과 1789년 헌법 제정에 지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웃한 디프사우스보다 넓고, 훨씬 더 부자이며, 더욱더 발달한 타이드워터는 '남부'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영국 전원 지역의 개화된 젠트리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던 타이드워터의 엘리트들은 노예의 존재를 유감스러워했고, 그것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타이드워터는 1820~1830년대에 빠르게 팽창하는 디프사우스에게 힘과 영향력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세력 역전은 타이드워터를 부양하던 담배 플랜테이션이 쇠퇴하고, 디프사우스의 목화 플랜테이션이 성황을 이루면서 발생한 일이었다.(277-8)


엘 노르테인들은 1821년에 독립한 멕시코가 극심한 경제 파탄으로 중앙 정부 역할을 방기하자, 숭숭 뚫린 국경을 넘어 텍사스로 대규모 불법 이민을 감행했다. "멕시코 법은 앵글로-아메리칸의 이주를 까다롭게 규제했지만, 새로운 정착민을 간절히 필요로 했던 텍사스 관료들은 이를 못 본 척했다."(291) "이주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텍사스 동부 내커도치스의 마을을 향해 북쪽으로 여행하던 한 멕시코 장군은 어느 순간 자신이 완전히 낯선 외국 문화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샌안토니오에서 내커도치스로 가다보면 거리에 비례해 멕시코의 영향력이 점점 감소하다가, 종국에는 멕시코 문화가 아예 소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상관에게 보고했다." "멕시코 중앙 정부는 디프사우스 이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텍사스가 미국에 병합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앞장서서 반란을 이끈 사람들은 멕시코 북부인인 노르테뇨, 자신들이었다."(292-3)


"1850년, 자유 주州에 정착한 외국인 이주민의 숫자는 노예 주州보다 8배가 더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키덤, 미들랜드, 뉴네덜란드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들이 하원에서 차지하는 의석수도 계속 증가했다. 양키가 장악한 레프트코스트는 디프사우스를 더욱 사면초가로 몰아넣었다. 연방정부는 디프사우스의 바람과 달리 카리브해 지역 점령을 거부한 반면,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워싱턴이 미연방에 자유 주州로 합류하는 것을 승인했다. 1860년,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의 지도자들은 연방정부를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자신들이 밀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850년대에 미국인들 중에 "양키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노예제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 앞에서 눈을 감으려고만 했다. 결국 세상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노예제가 일으키는 도덕적 문제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양키들이 노예 해방운동의 중심이 됐다."(313-4)


# 레프트 코스트The Left Coast : 뉴잉글랜드의 상인, 선교사, 벌목꾼 무리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출신의 농부, 채굴업자, 가죽 무역상 등이 정착한 지역. 개인의 성취를 중요시하고, 정부를 신뢰하며 사회 개혁을 추구한다.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시애틀, 밴쿠버 등)


186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양키덤의 지지를 받은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가장 먼저 연방에서 탈퇴했다. 취임식이 열리기도 전에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 디프사우스가 장악한 주州들이 줄줄이 탈퇴에 합류했다." "만약 디프사우스 연합이 (연방정부의) 요새나 구호 선박을 먼저 공격할 경우 디프사우스 편에 서기로 한 애팔래치아, 미들랜드, 뉴네덜란드의 지지자들은 등을 돌릴 공산이 컸다." "남부연합의 국무장관인 리처드 래더스는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북부를 몰아간다면 분리주의자들은 협상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남부연합의)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전쟁이 시작되면 애팔래치아, 미들랜드, 뉴네덜란드가 남부 편에 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래더스의 충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는 북미 역사상 최악의 오판 중 하나가 된다."(320-1)


디프사우스는 백인 우월주의에 찬성하는 애팔래치아가 남부연합 편에 설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양키보다 농장주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더 위협한다고 여겼다. 결국 남부연합은 1865년에 패배했다. 그러나 패전 후에도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 남부연합 애팔래치아인은 "양키의 개혁에 단호히 저항했고, '재건' 지역의 백인들은 1876년 북부군이 철수하자 모든 개혁 조치를 무효로 만들었다. 양키 공립학교들은 폐지됐고, 양키가 강제로 도입한 헌법은 다시 쓰였다. 백인 우월주의가 되살아나면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내고 '문맹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 등 흑인의 투표권을 빼앗기 위한 각종 장치가 부활했다. KKK 단원들은 공직에 출마하거나 예전의 카스트 제도에서 벗어난 일을 한 '건방진' 흑인들을 살해했다. 전쟁과 점령 기간을 거친 후에도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그들의 문화적 근본을 고스란히 유지했고, 앞으로 다가올 세기에 또 다른 문화적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331-2)


"파웨스트는 민족적 지역 문화가 아니라 외부 수요에 따라 정체성이 형성된 독특한 지역이다. 환경적 요인이 정착민의 문화적 특징을 압도한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유로-아메리카는 암석 채굴, 철도, 텔레그래프, 개틀링 기관총, 가시철조망, 수력발전 댐 등 자본집약적인 기술을 이용해 이 지역의 환경적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기술을 도입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가진 세력은 일찌감치 동부에 식민지를 형성한 국민과 연방정부뿐이었고, 결국 파웨스트는 이들의 내부 식민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파웨스트인들은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에 지금도 깊이 분노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지금 상황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정책을 지지한다."(336) "다른 지역은 보통 정착촌이 형성된 후 철로가 놓이고 수요에 따라 노선이 확장됐지만, 파웨스트 대부분 지역에서는 철로가 먼저 놓이고 그다음에 정착촌이 형성됐다. 기업들은 정착민을 끌어오려고 엄청난 돈을 홍보에 쏟아부었다."(340)


# 파 웨스트The Far West : 미국에서 유일하게 기후와 지정학적 요인이 민족성을 압도하는 광활한 황야 지대. 끊임없이 연방정부에 손을 벌리면서도 자신들을 내부 식민지 취급하는 정부를 향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애리조나 북부, 노스웨스트, 다코다, 네브레스카, 캔자스 서부, 아이다호, 몬태나, 콜로라도, 유타, 네바다 등)


"남북전쟁 당시 북부 편에서 남부연합에 맞서 싸웠던 애팔래치아까지 결과적으로 딕시연합에 합류한 것은 전쟁이 끝난 후 양키가 주도한 재건 사업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그들의 제도와 인종 카스트가 위협 받게 되자, 당시 유일하게 자신들의 수중에 남아 있던 시민 조직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그 조직은 바로 교회였다. 남부 지역의 여러 교파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복음주의 교회는 전쟁 전의 사회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남부 침례교 등 복음주의 교회들은 양키덤의 교파와 달리,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내면적 개신교'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는 북부 지역의 '공공적 개신교'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북부의 점령에 강력히 반발한 강경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구원자Redeemers'라고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1877년 북부군의 철군은 (이들 지역에서) '구원Redemption'이라 불렸다."(362-3)


# 상실된 대의Lost Cause : 남부 독립을 위해 벌인 전쟁은 정의를 지키고자 고난과 맞서 싸운 것이라는 주장


"양키덤과 뉴네덜란드, 미들랜드의 공공적 개신교도들은 미신과 다를 바 없는 비이성적 신앙과 미국의 가치에 어긋나는 독재적인 성향을 지닌 남부인은 지옥에 떨어져도 시원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리주의자들은 1930~1940년대에 성경 모임과 기독교 대학, 복음 라디오 방송국을 확대해나가면서 조직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0년대가 되자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원리주의자의 숫자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반면 사람들의 신앙을 약화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종교와 주 정부를 분리하려 했을 뿐인 주류 개신교는 성도의 숫자가 감소하면서 탄력을 잃어갔다. 그 결과, 세속주의 노력 또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후 시대에 번영을 거듭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던 미국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전면적인 문화 전쟁의 조짐이 조용히 들끓고 있었고, 이는 1960년대에 마침내 폭발하게 된다."(373)


"이 기간에 북부와 남부는 각자 자신만의 또 다른 내전을 치러야 했다. 딕시연합에서는 분리 정책과 카스트 제도에 반발한 흑인들이 투쟁에 나섰고, 북부동맹의 4개 국민은 새로운 세대가 이끄는 문화적 저항에 직면했다. 두 사건 모두 각 지역의 기존 체제에 반발한 자들이 일으킨 내부적 현상이었지만, 양측은 곧 상대방의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먼저, 남부에서 일어난 흑인 민권운동에 북부의 개입은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북부는 타이드워터, 애팔래치아, 특히 디프사우스의 인종 카스트 제도를 강제로 폐지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권한과 군사력을 동원했다. 반면 딕시연합은 레프트코스트, 뉴네덜란드, 양키덤에서 일어난 신세대의 '반란'인 60년대 문화 혁명에 반대하며 이에 개입하고자 했다." "이 두 개의 닮은꼴 반란에서 비롯된 서로를 향한 분노는 북미 국민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합의점과 상호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찾으려던 21세기 초의 노력을 무위로 만들었다."(374-5)


"민권운동과 60년대 문화운동 후 딕시연합은 낮은 세금과 느슨한 규제, 노조 약화 등을 장점으로 부각시켜 국외와 국내 기업을 남부로 끌어들였다. 양키와 미들랜드의 제조업은 남부 지역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북미의 양키 자동차 산업은 1990~2000년대에 거의 붕괴했지만 디프사우스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에 있는 외국 자동차 공장은 예전 남부의 섬유·목재 산업처럼 승승장구했다. 일각에서는 '신新남부연합'이 미국을 서유럽과 동북아시아의 고학력 사회에 종속된 "저임금 수출 공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혁신적 연구는 교육과 이성주의를 강조했던 북부의 지식 클러스터에 집중돼 있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은 모두 레프트코스트 도시에 몰려 있다. 그전에 보스턴에는 양키 고속도로로 알려진 루트 128을 중심으로 최초의 '실리콘밸리'가 있다."(388)


"북부동맹과 딕시연합이 서로 꿈쩍도 안 한 채 양극단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면, 역학 구도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해답은 미들랜드, 엘 노르테, 파웨스트, 이 세 개의 '부동층' 국민에게서 찾아야 한다. 두 개의 슈퍼파워 연합 중 누구도 최소 2개 이상의 부동층 국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미국 정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1877~1933년 북부동맹은 파웨스트와 미들랜드의 지원 덕에 연방을 장악했다. 1980~2008년 딕시의 영향력과 지배력이 증가한 것은 파웨스트와 미들랜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데다 베리 골드워터,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같은 엘 노르테 출신의 보수적인 앵글로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덕분이다. 어느 한쪽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을 때 다수당이라도 되고 싶다면 이들과의 연합은 필수적이었다."(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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