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시대 -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계승범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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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조선 중종 대라는 시공간


"필자는 병인정변(중종반정, 1506)부터 계해정변(인조반정, 1623)까지 118년에 걸친 시기를 조선 중기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조선왕조를 가장 조선답게 만든 결정적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적 가치들이 정치 무대에서 실질적인 힘을 얻고 본격적으로 작동함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추동한 전환기의 특징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의 충효 사상을 정치 이념으로 천명했음에도 권좌를 노린 정변이 꼬리를 물고 발생했다. 『주자가례』 보급에 힘을 쏟았지만 전통적 가족제도와 의례 제도는 여전히 건재했다. 사대 정책을 표방했음에도 명을 유일한 상국上國으로서가 아닌, 이웃에 있는 한 대국大國 정도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천명했지만 불교는 여전히 성행했다. 이 같은 현상은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가 사회혁명에 준하는 급격한 변화를 단기간에 가져온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23-4)


2장 찬탈과 반정의 시대 : 조선 초기 왕위 계승 문제


"(중종 이전) 열 명의 군왕 가운데 태조(r. 1392~1398), 정종(r. 1398~1400), 단종(r. 1452~1455), 연산군(r. 1494~1506) 등 무려 네 명이 타의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일찍 죽는 바람에 일반적인 경우의 수로 보기 어려운 문종과 예종(r. 1468~1469)을 제외하고 본다면, 여덟 명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네 명이 타의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난 셈이다. 게다가 타의로 왕위에서 물러난 이 네 명 가운데 노산군(단종)과 연산군 두 명(50%)은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유배를 당한 뒤 그곳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뿐 아니라 중종 당대의 시점에서 볼 때 열 명의 선왕 가운데 묘호廟號를 받지 못한, 즉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이 공정왕恭靖王(영안군, 정종)·노산군(단종)·연산군 등 무려 세 명(30%)이었다. 이런 수치는 세종대왕이라는 걸출한 인물 뒤에 가려져 그동안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15세기 조선 국왕의 자리가 얼마나 불안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40-1)


# 중종 이전 왕들의 왕위 계승의 특징

1. 왕위 계승이 힘의 역학 관계에 좌우되는 경우가 잦았다.

2. 총 10명 중 종법에 부합한 계승자가 4명(문종·단종·예종·연산군), 타의로 권좌에서 물러난 왕이 4명(태조·정종·단종·연산군)이다.

3. 그 중 3명(공정왕(정종)·노산군(단종)·연산군)은 중종대까지도 사후에 묘호를 받지 못하고 종묘에 들어가지 못했다.

4. 장자 승습이 가장 이상적인 왕위 계승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이 왕권의 안정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5.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경우에도 실제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충분한 정지 작업을 거쳤다.


"조선시대가 이전과 다른 점은 어떤 권신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고려 무신정권 때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왕을 마음대로 폐위하고 새로운 인물을 추대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일은 이미 조선 사회에서는 발생할 수 없었다. 조선의 권력 구조가 유림이라는 지식인 사회에 폭넓게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치 참여 가능 인구가 이전에 비해 대폭 증가했으며, 또한 상당한 수준의 문치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조선시대는 왕의 권위가 한편으로 무력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교하게 확립된 어떤 원칙이나 이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발생한 같은 정변임에도 태종의 즉위와 달리 세조의 즉위만 찬탈로 규정되어 이후 정치 무대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된 것은 그 사건이 바로 이런 장기사적長期史的 변화가 시작된 일종의 전환기에 발생했기 때문이다."(55-6)


"조선왕조의 정치 구조와 관련해 병인정변(중종반정)의 특징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조선의 정치는 현재 권좌에 앉아 있는 인물의 개인 성향에 따라 쉽게 좌우된다기보다는 국왕의 권위보다 더 상위에 위치한 어떤 가치, 이를테면 성리학에서 추구한 도道가 지식인 사회 전반에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고 실제로 수용되고 있었다. 둘째, 반정이 성공적이었다고는 해도, 그것이 조선 최초의 사례라는 데서 필연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반정 이후 5년 동안 도성에서 발생한 역모 사건이 무려 다섯 차례에 이를 정도로, 정변 주도 세력이 반정의 명분에 부합하는 새 정치를 추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상태가 그런 예이다. 중종의 즉위가 그나마 반정으로 인정받고 새 정권이 왕조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연산군의 폭정이 워낙 심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62)


"이렇듯 파란만장한 정치 현실을 정正으로 되돌린다는 명분을 내걸고 마침내 중종은 즉위했다. 그 방법도 정변이라는 비상수단이었다. 따라서 일단 급선무는 왕실과 왕권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정변(반란)을 반정으로 미화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벌여야 했다. 이는 중종 정권이 반역과 찬탈을 반정으로 뒤바꾼 패러독스를 어떻게 풀 것인가의 문제를 태생적으로 안고 출범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뿐 아니라, 세조의 찬탈과 연산군의 폭정으로 점철된 과거 정치사의 청산 문제도 중종 대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 같은 시대적 과제는 과거 청산이 유교적 가치를 현실 정치에 좀 더 충실하게 적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공감대가 조야에 널리 확산되었던 분위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따라서 중종과 사림은 본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반정 직후부터 매우 긴밀한 협력 관계임과 동시에 길항 관계에 놓여 있었다."(64-5)


3장 사대의 시대 : 중종의 사대 정책과 조명 관계


재위 8년째인 1513년, 친정을 선언한 다음날 내린 첫 인사가 "모두 정변(반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 뿐 아니라 등용 이후 반정공신들의 전횡에 대해 비교적 비판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첫 친정 인사에 임한 중종의 의도는 잘 드러난다. 이후 조광조(1482~1519)의 발탁을 신호로 반정공신에 비판적인 이른바 사림을 대거 등요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교 도덕을 앞세워 반정공신들의 권력 독점과 전횡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그들을 통해 왕의 권위를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일거에 사림세력을 숙청한 "기묘사화 이후 정국은 다시 공신들이 장악했다. 중종은 그런 반전을 정당화해줌으로써, 자신이 견제하고자 했던 반정공신들의 품 안에서 왕위를 유지하는 자기모순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무력을 보유한 공신들의 압력에 굴복한 중종의 위상은 이제 즉위 초기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 셈이었다." 여기서 "중종이 새롭게 찾은 돌파구는 바로 명 황제였다."(98-9)


"세조 대 이후 조선의 왕들은 자신의 왕권을 국내에서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천자의 권위를 빌리는 데 급급해 하지 않았다. 이미 북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천자의 질서 안에 확실하게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건국 초기의 불안하고 어수선한 정국에서 조선의 국왕(태종, 세종)은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명 황제와 돈독한 군신 관계를 통해 조선이라는 신생 왕조의 국제적 위상과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반해 새 왕조의 정당성과 왕실의 정통성이 온 백성에게 이미 확실하게 각인된 15세기 중엽 세조 대를 기점으로 해서 대명 사행은 의례적으로 흐르고, 왕실의 권위를 국내에서 스스로 높이는 흐름이 이어졌다."(79) "근 40년에 달하는 중종 대(1506~1544)의 진하사 파견 사례에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중종 자신이 특별 진하사 파견에 매우 예민했다는 점이다."(81)


"가정제는 (구묘九廟 건립을) 공식적으로 알리지도 않았는데 조선이 스스로 달려와 진하한 일에 대해 중종을 크게 치하하고 특별히 푸짐한 하사품을 내려 중종의 위세를 높여주었다. 이에 고무된 중종은 이후로 사행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으며, 진하나 진위를 하기 위해 명 내부 사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알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달려와 진하한 일을 가정제가 각별히 치하했기 때문에, 이후 조선 조정에서 거의 모든 논의는 공문과 상관없이 가급적 빨리 진하하려는 중종이 주도권을 쥐고 전개되었다." "이후 사행에 대한 중종의 관심은 거의 집착 수준으로 높아져, 정기 사행과 당연 사행 외에도 갖가지 명목의 특별 사행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진위나 진하를 한 번 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가정제가 답으로 칙서를 내린다거나 조선 사신에게 좀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는 보고를 들으면 곧바로 사은사를 파견하는 식의 사행이 줄을 이었다."(89-90)


# 중종대 대명 진하와 국내 진하 비율

1. 기묘사화 이전 : 17% - 83%

2. 기묘사화 이후 : 76% - 24%


"조선 왕조의 양대 국시는 유교와 사대였다. 명 황제와 조선 국왕의 관계는 유교적 군신 관계에 기초한 유교적 이념으로 개념화됨으로써 유교와 사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그런데 16세기 중종 대에 이르러 명·조선 관계에 부자 관계가 더해짐으로써 변화가 발생했다. 이런 변화는 매우 중요한데, 우선 부자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뀔 수 없는 불변의 절대 가치라는 점에서 그렇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군주의 사명보다 더 강조한 맹자의 교시는 유교적 부자 관계라는 도덕률이 안고 있는 특성을 잘 보여준다." "중종이 왕위에 '앉혀진' 것은 조선의 대명 태도에 이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따라서 공신·권신들의 전횡과 도학정치론자들의 배타성 모두에 위협을 느낀 중종이 기묘사화를 계기로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고, 상위의 권위인 명 황제, 다른 말로 자기를 조선 국왕으로 책봉해 준 천자에게 의존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105-6)


4장 소중화의 시대 : 명나라에 대한 인식의 변화


# 명의 파병 요구와 조선의 대처 양상

1. 1449년(세종 31) : 야선也先이 이끄는 몽골을 공격하는 대규모 원정에 파병 요청 - 조선 출병시 왜나 여진이 그 틈을 노린다는 구실을 내세워 완곡하게 거절

2. 1467년(세조 13) : 요동 변경을 침탈하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을 공격하는 원정에 파병 요청 - 독자적으로 변경 지역의 안정화 계획을 짜고 있던 조선은 기꺼이 출병

3. 1479년(성종 10) : 건주여진 공격 원정에 재차 파병 요청 - 명에 대한 사대 정책도 조선에 이익이 있을 경우에만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해 파병 결정 철회

4. 1543년(중종 38) : 건주여진 정벌 시도 재등장 - 북방 사민 정책까지 보류하면서 징병을 시행했으나, 몽골 위협이 높아지면서 여진 정벌 계획이 보류되어 파병 중단


"명을 대하는 조선의 태도와 관련해 중종 대에 발생한 주목할 만한 변화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사림) 사이에서 강하게 확산된 소중화 의식 및 그에 따라 화이華夷 구분을 중시하는 풍조의 유행과도 관련 있다." "명 사신이 조선을 소중화로 인정했다는 기록이 성종 대에 처음 등장한 점은 이전의 명 사신들이 조선을 천자의 교화를 받은 동번東藩 또는 예의지국禮義之國으로 특별히 생각하면서도 대체로 이夷로 인식했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135-6) "동아시아 사회에서 음양론이 갖는 거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감안할 때, 중화와 이적의 관계를 음양의 논리로 설명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중종 대라는 점, 특히 성리학적 도학 정치를 추구한 사림이 득세하던 때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황은 천자에 대한 사대를 불사이군不事二君과 같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가치로 자리매김했다. (이이 역시) 보편적 중화국인 명에 갖추는 사대의 예란 상황을 초월해 지켜야 할 절대 의리라고 규정하였다."(140-1)


중종 대에는 대명 관계에서 기존의 군신 관계에 더해 부자 관계가 추가되었다. "중종 이전의 사례들은 모두 외교문서에서 명 황제 개인을 칭송하기 위한 상투적인 표현으로 부모라는 말이 사용되었지만,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명 자체를 실제로 부모의 나라로 인식하는 표현이 조정의 일반적인 논의 중에도 등장했다. 이는 명과 조선의 관계가 이전의 군신 관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부자 관계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유교화와 대명 사대를 새 왕조의 양대 근간으로 천명하고 출범한 조선 왕조에서 그 둘이 군신(忠) 및 부자(孝)라는 유교적 가치에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결합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군신 관계와 부자 관계는 같은 유교 이념에 바탕을 두었을지라도 그 가치의 절대성과 지속성에서 확연히 다르다." "효를 강조한 『소학』이 바로 이 시기에, 특히 중종 대 지식인 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점도 이런 시대 분위기의 산물이었다."(145-6)


5장 사림의 시대 : 정치쇄신운동과 사림


훈구/사림 이론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첫째, 사회경제적 기반이나 특정 정치 현안에 대한 태도 등을 기준으로 훈구와 사림을 구분하는 설명 틀은 사실과 어긋나는 사례가 너무 많다. 둘째, 사림은 새로운 사회경제적 계급이나 계층이 아니라 기존 지배 엘리트층의 일원이었다. 셋째, 대체로 서울에 기반을 둔 명문거족 출신들이 사림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넷째, 그들은 유교적 가치의 현실 적용 과정에서 당시 훈척勳戚이라 불린 고위 관료들의 행태를 신랄히 비판했다. 다섯째, 그럼에도 그들은 그런 명문거족 집안들과 긴밀한 혈연관계를 유지했다." 태조부터 중종 대까지 쓰인 '사림'이라는 단어는 "모두 '유교적 선비 그룹' 정도의 뜻으로, 이를테면 유림이나 유교적 식자층의 뜻으로 쓰였다. 또한 "조정에 (들어와) 있는 여러 사림"이라는 구체적인 용례가 있는 점으로 보아, 사림은 관료만도 아니고 유생만도 아닌, 성리학적 가치를 존중하고 추구하는 모든 지식인을 망라하는 개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176-7)


"시기와 공간을 초월해 유교 문명권에서 두루 쓰이던 사림이라는 용어가 유독 조선 전기의 성종-중종 연간에 정치 무대의 한복판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182) "조선왕조가 건국이념으로 성리학을 내세우고 유교를 천명한 이상, 유교적 가치를 정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에는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다. 특히 세조의 패륜적 찬탈 행위, 연산군의 반유교적 폭정, 그리고 아무리 연산군의 잘못이 컸을지라도 간쟁이 아닌 쿠데타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 병인정변(중종반정)의 태생적 약점, 더 나아가 반정공신들의 부도덕성 등등, 당시의 혼탁한 정치 현실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 쇄신이 절박하다는 공감대를 조야에 폭넓게 형성시켰다. 이에 따라 유교 이념을 현실 정치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자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지식인들의 수가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림의 외연도 더욱 확대되어갔다."(185)


"결국 성종-중종 대에 걸쳐 발생한 숱한 정치적 충돌은 서로 다른 세력 기반을 지닌 이질적 계층(계급) 간의 충돌이 아니라, 유교 이념과 현실이 동떨어진 모순적인 조선 사회에서 일종의 정치쇄신운동과 정풍운동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했던 것이다. 선조 즉위 초기에 "마침내 사림의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 것은 사림운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전체 양반 사회로 계속 확산된 결과이지, 물질적 기반을 달리하는 이질적인 사회계층 사이에서 발생한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즉 유교적 가치와 정치 현실 사이의 모순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던 세조 때부터 명종 때까지 약 100년을 거치면서 조선의 유학 성향은 힘과 칼의 논리로 유지되는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유교적 가치의 현실 적용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계속 진화해갔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더 이상 힘으로 막아내기 어렵게 되자, 기성 정치권의 대신들 일부는 사림운동을 인정하는 쪽으로 서서히 선회하기 시작했다."(188-9)


"한편 이런 사림의 성격과 관련해서 조선 전기 정치사를 중앙(center)과 지방(periphery)이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사림의 대두는 특정 사회계층이 성장해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결과도 아니고, 길재(1353~1419)처럼 지방에 은둔했던 절의파의 학문이 심화된 결과도 아니며, 지방에서 발생한 어떤 힘이 중앙(정부)에 영향을 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림 및 사림운동의 대두는 학문·사상적으로는 조선 건국 이후 국가(중앙)가 일면 강제성을 띠면서까지 보급하고 장려했던, 그래서 한양에서부터 시작된 유교화 정책의 산물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세조 이후 파행적으로 진행된 정치 현실에 대해 유생과 유학자들이 반발한 결과였다. 따라서 사림은 사실상 중앙에서 발생한 현상이자 운동이었다. 더 크게 보면 중앙에서 발생한 사림운동이 사화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는 했지만 향약이나 서원과 같은 제도를 통해 지방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195)


6장 실천의 시대 : 유교적 가치의 실천 문제


"고려 후기 성리학의 수용과 보급 과정에서 그 핵심 공간으로 기능한 곳은 바로 중앙이었고, 주요 인물들 또한 대개 중앙에서 공부하고 급제하여 관계에 들어선 자들이었다. 성리학은 불교의 세속화와 몽골 지배의 후유증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의 와중에서 주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이들은 성리학적 가치 규범을 현실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철학 논쟁보다는 사회윤리나 정치 이념 중심의 현실적 사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테면 불교 비판이나 토지제도 개혁과 같은 현실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기론理氣論 자체보다는 오륜에 바탕을 둔 충忠·효孝·제悌 및 의리와 명분 등 윤리적인 가치와 그 실천을 매우 중시했다. 이런 까닭에 고려의 성리학은 그 출발부터 철학적인 면보다는 사회윤리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성향을 띠었다."(205)


"역설적이게도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성리학은 16세기에 만들어진 조선 유학의 정통 계보에서 제외된 인물들에 의해 발전했다. 그들은 대개 조선의 건국 과정이나 새 문물 정비 과정에 적극 참여한 유신儒臣들이었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정도전(1342~1398)과 권근(1352~1409)을 꼽을 수 있다. 새 왕조의 건국 세력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새 국가 이념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불교보다 유교가 우월하다는 점을 이론적 철학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국책 담당자로서 유교 이념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도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성리학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그 가치의 현실 적용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쪽은 바로 이들, 곧 이른바 관학파 유학자들이었다. 조선 초기(15세기) 성리학의 특성이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 규정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조선의 건국 주체 세력이 새 왕조에 맞는 새로운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209-10)


건국 후 어느 정도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자 역성혁명 논리를 대체하는 절의의 가치와 성리학적 왕도정치 사상이 체제 이념으로 부상했다. "'사림운동' 과정에서 몇 차례 정치적 충돌이 일어났을지언정 정치 무대에서 성리학 이념을 최대한 타협 없이 추구한다는 대명제에 관한 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국가에서 주도한 이런 시대 분위기는 성리학 입문서 가운데 하나인 『소학』의 보급과 확산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학』은 성리학의 핵심인 수기치인과 인륜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입문서이자 효제충신孝悌忠信 등의 가치를 먼저 자신에게 적용해 실천하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둔 책으로, 치인治人의 조건을 강조한 『대학연의』와 짝을 이루는 성리학 기본서이다." "조광조 등이 득세한 뒤인 1518년(중종 13)에는 국가에서 『소학』 1300부를 간행해 신료들과 종친에게 나눠주고 아동을 훈육하도록 조치했다."(216-8)


"『소학』과 함께 성리학적 유교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주자가례』의 보급 과정에서도 그 주체는 언제나 중앙의 조정이었으며, 이른바 사림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국가 차원에서 꾸준하고 강력하게 추진했다." "조선 건국 이후 16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 동안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린 성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두드러진 특성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서적의 보급과 장려를 통한 유교화는 향촌에 기반을 둔 특정 사회경제적 계층의 출현 때문이 아니라, 유교를 표방하고 건국된 이래 중앙에서 꾸준히 추진한 유교 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성리학 관련 서적의 출판과 보급을 비롯해 건국 이후 유교화 과정에서 핵심 독립변수로 기능한 것은 중앙, 곧 국가였다는 점이다. 16세기 전반의 중종 대는 이런 장기적인 유교화 흐름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변곡점을 찍은 시대였다."(224-5)


공리功利에 대한 인식은 15세기만 해도 상황에 따라 조정 가능한 상대적 가치로 간주했지만 16세기, 특히 중종 대에 들어서면 공리의 행태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특히 조광조 등 '사림운동'의 주동자들은 공리를 추구하는 무리라는 이유로 공신들을 공격했으며, 자신들끼리는 서로 공리를 배격한다며 칭찬하는 모습을 보였다." "군자의 품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소인의 품성을 비난하는 추세로 정쟁이 진행된 사실은 성리학자들이 권력의 핵심에 자리할 때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분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덕德과 인仁, 그리고 도道를 강조함으로써 군자상의 실현을 서로 독려하고 교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공명과 사리를 좇는 소인으로 몰고 가 제거하는 식의 논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는 이른바 사림이 정치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조정에서 벌어진 실상이자, 이후에 붕당들 사이에서 처절하게 벌어질 장기적 정쟁(당쟁)의 속성까지도 암시한다."(230-1)


"문묘종사 논의는 세종 대까지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문묘 제도의 강화가 필연적으로 문신 우대 분위기로 귀결될 것을 우려한 무신 계열 공신들의 반대도 있거니와, 군왕과 별도로 성현의 계보를 만드는 일을 왕권에 대한 견제로 인식한 태종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뿐 아니라 고려를 섬기던 권근이 절의를 버리고 새 왕조를 섬긴 일이 문제가 되어, 번번이 왕의 재가를 받는 데도 실패했다." "새 왕조가 일단 건설되고 나니, 상황에 따라 절의를 보류할 수 있다는 혁명론보다는 왕조에 끝까지 충성해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절의론이 더 강조되는 분위기가 우세했고, 이에 힘입어 정몽주의 복권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생사를 초월해 신하의 의리를 몸소 실천해 보인 정몽주를 추앙해야 한다는 논의를 제기한 이는 권근이었다." "더 나아가 중종 때 기묘사림은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여론을 크게 일으켰고, 논란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1517년(중종 12) 정몽주는 문묘에 종사되었다."(239-40)


# 문묘 : 공자를 비롯하여 유학 발전에 기여한 선유先儒를 기리고 제사하기 위해 설치한 묘당


"기묘사화 이후에 사림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학 계보를 만들었다." "이런 도통은 겉으로는 도학의 계보를 나타냈으나, 그 기준은 도학에 대한 학문적 성취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문적 심화보다는 절의의 실천 여부가 계보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학문적 수준을 보여줄 만한 성리학적 우주론이나 심성론 관련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242) "그런데 문묘종사 논의는 단순히 5현에 대한 종사 문제로 끝나지 않고, 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세우는 문제와도 직결되었다. 이들이 문묘에 종사되고 국가가 이 도통을 공인한다면, 정통·비정통의 대립적 구분을 매우 중시하는 성리학의 특성을 감안할 때, 이 도통에서 제외되거나 도통 정립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른 성리학자들(학문)은 경우에 따라 이단으로 취급될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244)


"조식(1501~1572)이 남명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성리학의 한 학파를 이루었음에도 그의 학문에 노자와 장자의 풍이 가미되었다는 이유로 이황에게 배척당한 일이나, 뜻과 행실은 뛰어나지만 학문에 주견이 없으니 도학군자라고 칭할 수 없다고 이이에게 무시당한 것은 이런 시대 분위기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 조선의 여러 학파들 중에서 가장 개방적이었던 서경덕의 학문이 수론數論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5현의 문묘종사는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기묘사화(1519)·을사사화(1545)로 이어지는 4대 사화가 잘못이었음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라는 요구였으며, "더 나아가 무오사화가 확대된 발단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었음을 감안할 때, 5현 문묘종사운동은 곧 세조의 즉위와 그 정치를 '비非'로, 그 정치에 희생된 이들을 '시是'로 공인함으로써 시비를 분명히 하라는 사림의 외침이었다."(246-7)


# 1610년(광해군 2) 5현의 문묘종사 성사


7장 중종 대의 의미 : 사대와 유교의 만남


조선왕조가 추구한 유교적 가치의 실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의義, 곧 의리義理라 할 수 있다. "의리는 명분名分에 기초한 인간관계의 기본이자 규범으로, 한 인간이 태어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타인과 맺는 다양한 관계를 규정하는 이치를 말한다. 의리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유교적 행동 규범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충과 효도 따지고 보면 의리의 실천 규범에 해당된다."(252) "조선의 건국 주체는 명과는 다른 조선 고유의 것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어디까지나 중화 문명의 보편적 질서 안에서 향유하고자 했다. 달리 말하면 조선왕조의 존재 이유는 명에 사대함으로써 중화 질서를 따르고 보편적 중화 문명인 유교의 가치를 적극 수용하고 따르는 데 있었다." "의가 이런 보편성을 지닌 개념임을 감안하면, 조선 건국과 동시에 조정에서 스스로 환구단의 천제天祭를 폐지하고 그 후에도 조선의 천제는 참람한 일이라며 1897년까지 사실상 재개하지 않은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254)


# 명분名分 : 각 사람의 칭호(名)에 따라 그 신분이 나누어진다는(分) 것으로,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분수(分數)와 직결되는 개념


조선 왕조의 유교화·중국화 정책은 당대에 가장 적절한 세계화 시도였다. "다만 문제는, 제국을 형성한 중원에서는 다양한 유교 학파들이 여러 의견과 해석을 내놓고 논쟁하면서 비교적 평화적으로 공존한 데 비해, 제국의 주변에 위치한 조선에서 유교는 어느 한 가지에만 몰입해 그것만을 정통으로 보고 다른 의견이나 해석을 죄다 이단으로 몰아버리는 배타적 폭력적 성격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세계사에서 보면 보편적인 현상이다. 대체로 제국이 보편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 비해, 제국을 추종하는 주변부 문명에서는 대개 제국으로부터 들어온 어떤 체제나 이념이 원형 그대로 남는 경향이 강하고, 특히 교조적으로 변형되어 권위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교화의 방향이 조선의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확실히 가닥을 잡고, 더 나아가 그것이 정치 분야를 넘어 사회의 각 분야로 확산되기 시작한 이른바 변곡점이 바로 16세기 전반 중종 대였다."(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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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화 과정 -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너머의 역사담론 4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 너머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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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한국 사회의 특징 : 고도로 구조화된 부계 출계집단(patrilineal decent group)을 기초로 한 친족제도


1장 신유학 수용 전의 과거, 고려 사회의 재구성


"고려에서 사람들이 성장하는 데 가장 있을 법한 사회 환경은 모친이 원래 출생한 집단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부친은 혼인하면서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 신부집으로 이주할지 선택하였다. 처가 거주제도[婦處制]는 고려에서 흔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남자형제들은 출생 서열에 따라 각기 다른 혈연 용어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아마도 아이의 인생 초기에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외가 생활은 부친이 자기 출생 집단으로 가족을 데리고 오면서 끝났을 것이다. 그 동기는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동기는 부친이 부모 유산 가운데 자기 몫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부친의 정치 관직을 계승하는 것도 그 동기였다. 중년이 되면 남자는 본족, 외족, 처족(이 중 후자 둘은 일치할 수 있었다) 세 친족 집단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 것 같다. 부친은 이 세 집단의 잠재적 성원이었다. 궁극적으로 이들 집단 가운데 어느 하나에 충원되는지 결정한 것은 정치적·경제적 이해였다."(116-7)


"고려의 맥락에서 볼 때, '족族'은 후손뿐 아니라 선조들까지 묶는 출계집단을 지칭한다. 혈통은 남성과 여성의 연결 고리 모두로 추적할 수 있다. 특별히 왕조 초기의 다양한 출계 계통은 근친혼으로 얽히거나 후손이 여전히 유명한 줄기를 구성하는 그들 선조의 특권을 누리면서 그 선조에 관하여 기억하는 데 불과했다. 유명한 출계집단은 공계(共系, cognatic) 친족체계라는 큰 저수조에 새로운 구성원을 충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와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였을 것이다. 계승의 융통성 역시 많은 경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출계집단이 부계친이 없어 거의 끊어지게 될 때 사위나 그들의 자식을 통하여 새로운 활기를 얻었을 것이다." "출계집단은 중국식 성姓으로 집단의 정체성을 인식하였는데, 성은 6세기 무렵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신라의 왕실이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기 원하면서 처음 소개되었다. 신라의 왕족인 김씨족과 박씨족은 성을 사용한 첫 번째 가문이다."(122-3)


점차 성이 '본관'과 동일시되면서, "어느 개인의 본관을 지칭하는 것이 더는 출생지나 거주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것은 고위 신분을 입증하는 것으로 지속되었다."(124) "확산되는 중국의 영향으로 부계 중심 철학이 공계적인 한국의 원래 친족 체제에 미묘하게 덧붙어갔다. 그 결과는 전통으로부터의 거대한 전환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 한국 체제가 개인과 집단에 부여하는 선택의 폭을 점차 좁혔다. 고려 사회조직 고유의 융통성과 전략은 부계를 기초로 한 규칙에 점차 제한되면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게 되었다. 위로부터 추진된 이러한 발전이 정부에 몸담고 있는 엘리트 계층의 공적 영역에 영향을 준 것이다. 반면 귀족의 사적 생활로는 거의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의 하위 계층에도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왕조 말기에 신유학이 도래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때맞춰 한국 사회가 부계적 변환을 완결한 것은 바로 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의 추진력 덕분이다."(126)


2장 신유학, 조선 초기 개혁 입법의 이데올로기적 기초


"고려 왕조를 '불교시대'로 규정한 신유학자들은 신유학을 기초로 한 사회 질서 확립을 새 시대 출발을 보여주는 역사의 구분선으로 그으려 했다." "신유학 수용 초기에 주자를 추종한 한국의 신유학자들은 고대 중국의 고전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사회 모델로서 적합한 이상적인 사회 질서를 찾아냈다." "고대의 제도와 의례를 만든 이들은 이 제도와 의례가 인간의 본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사회제도를 인간의 요구에 맞춤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위협하지 않고도 순순히 따라오도록 한 뒤 확립되었으므로 모델로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고대 제도를 기술한 텍스트의 권위를 신봉한 신유학자들은 "고전 문헌에서 적절한 증거를 찾지 못할 때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으며 때로는 결정을 몇 년간 미루기도 했다. 고대의 모델은 편리하지만 이단의 정책으로 손상받지 않을지 경계하면서 유학자들은 그 어떤 것도 중국 성현들의 전통적 지혜에 가감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51-3)


"통치는 백성의 거친 본성을 국가 통제에 종속시키고 우주와 조화되도록 만드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교육적이면서 규제를 수반하는 절차였다. 그것은 풍속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구조적 원리인) '강기(綱紀)'를 활성화함으로써 백성을 새롭게 하는 신민新民의 문제였다." "풍속의 기본 정수는 인간 사회에 근본적이고 변함없는 구조, 다시 말해 군신, 부자, 부부 관계를 제공하는 삼강三綱에 들어 있다. 삼강은 군신 사이의 의[義], 부자 사이의 친[親], 부부 사이의 구분[別], 형제 사이의 출생 서열을 인정하는 서[序], 친구 사이의 신[信]같은 오륜으로 다시 강화된다. 이들 관계는 적절한 의례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예의 관념으로 유지되는데 이것은 백성이 질서를 잘 지키도록 교화하는 핵심이 된다. 예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이다." "법은 단순히 백성을 통제하는[治] 수단만은 아니다. 법은 백성의 타고난 도덕적 잠재력을 발전시킴으로써 통치를 도와주는 보조 요소이다."(155-7)


"신유학자들은 중국 고대 성왕들이 고안한 모델을 기초로 이상적인 인간 질서를 개념화한 뒤 이데올로기적 외형을 내용으로 채워야 했다. 이데올로기에 구현된 원칙은 일상에서 사회 행위의 지표가 될 실행할 수 있는 계율로 축소되어야 했다." "이데올로기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이를 정의하고 해석한 가장 대표적인 저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였다." "1403년에는 처음 입사入仕한 관리들과 이미 입사한 관리들 중 7품 이하는 모두 『주자가례』를 시험 보도록 하였다. 한국인은 주자가 고대와 당대의 시간 격차를 메우고, 의례와 법 사이의 균형을 잡으며, 그 안에서 천지의 원리를 구현하여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주자가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주자는 백성이 불교 전통에서 해방되어 도덕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이상적 의례 편람을 제공하였다고 했다. 특히 상례와 제사에 대한 입법은 불교의 오용을 막는 유익한 해독제로 평가되었다."(159)


"주자의 『근사록近思錄』과 『소학』도 사서와 함께 일관된 몸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유학의 정수를 담은 『근사록』은 특히 15세기 후반 사회적 입법화에서 중요한 책이었다. 이 책은 철학적 개념을 일상생활의 관심사와 명확하게 연결하면서 도덕적 의무의 실천을 바탕에 두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출계집단을 분명히 밝혀 조상 숭배를 제도화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 이 문헌은 수신에서부터 국가를 굳건한 도덕적 기반 위에 올려놓는 것까지 몇 단계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텍스트이자 유용한 길잡이로 간주되었다. 한편 어린이의 초급 독본이라 할 『소학』은 교육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1407년 권근은 이 책을 모든 학생의 필수 입문 텍스트로 만들자고 추천하였다. 말하자면 과거에 응시하는 모든 이도 이 책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는 합격할 수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162-3)


"신유학의 행동 강령은 조선 왕조가 전개되면서 제기된 다양한 사회, 정치, 경제적 이슈에 착수함으로써 스스로 추진력을 얻게 된 웅장한 구성체였다. 우선 현존하는 사회적 무질서에 대처할 실용적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고전들 속의 교훈을 사회 정책으로 치환하였다. 그 다음에는 유학자로서 사명감이 점차 차별화되었다. 끝으로 유학자들은 고유 전통이 지속되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였다. 이 과정은 중국의 사회제도를 모방하는 데 집중된 초기 사업부터 유교를 한국의 사회 상황에 융합하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 것까지를 포함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관습'[國俗]이라는 표현에 포함된 문화적 정체성의 명확한 개념을 정비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조선 사회에는 재구성된 문인계급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혈통과 세습을 기초로 하는 신유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송나라의 신유학자들이라면 꿈에도 가능하지 않았을 정도로까지 사회정치적 환경을 다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176-7)


3장 종법과 계승 문제, 그리고 제사


"한국에서 유교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종법(宗法, agnatic principle)을 사회 기반으로 이식하여, 출계집단 안에 부계친 의식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제사보다 더 적절한 방법은 없었다." "제사는 친족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종교적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한 유교 구도 속에서 제사는 종법을 의례적으로 실천하여, 산사람과 죽은 사람을 하나의 부계 출계집단의 성원으로 동등하게 이어준다. 무엇보다도 제사는 집안과 공적 영역 모두에 의미 있는 체계를 규정한다. 예를 들어 부계친에서 의례를 수행하는 서열의 위치는 출계집단 안에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결정하며, 정치의 장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보장한다."(180) "계승 문제에 장자상속을 도입한 것은 한국 사회가 고려 전통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첫걸음이었으며, 1471년의 법전 편찬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꼭 필요한 것을 법적 장치로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198)


"서자(또는 첩자) 문제는 1413년(태종 13)에 적실(처)과 첩 사이의 엄격한 차별을 법제화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기에 서자(특히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가 먼 친척, 심지어 같은 형제의 아들보다 후사로서 선호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부친의 선대를 봉사하는 서자는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경제적 혜택도 조금 누렸다. 더 나아가 봉사자가 아니라면 맡을 수 없는 관직에도 나아가는 등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다. 그렇지만 남녀가 정식으로 결합하지 않은 사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었으므로 존엄한 가문에서는 서자에게 제사의 우선권을 맡기는 것을 여전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구나 차자가 형이 죽은 뒤 후사로 세운 형의 서자에게서 봉사 권리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종족 내분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서자를 승중자承重者로 지명하는 것은 도덕적·법적·경제적·사회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일이었다."(207-8)


"서자 봉사는 실제로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이 출계 계통을 분명하게 세우는 것과는 반대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서자 계승은 본가가 단절되면서 결과적으로 조상에 대한 본가의 특권이 지가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더구나 서자에게 봉사 우선권을 주는 것은 귀천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폐기하여 사회 이동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서자의 지위가 갖는 넓은 사회적 함의의 관점에서 볼 때, 『경국대전』이 서자를 가능한 한 입후자 또는 봉사자로 언급하려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 초기 입법가들은 첩의 아들을 조금은 인정함으로써 첩의 운명을 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인간의 감정과 법적 합리성이 타협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왕조 후반 이후까지 존속하지는 못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법 관념에도 불구하고) 서자를 봉사에서 강제로 배제하려는 경향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두드러졌다. 1746년에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서자에 대하여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211)


"공신들은 특별히 친손 개념을 의식하였지만 그럼에도 외손은 계속해서 봉사 자격을 가진 후보였다." "외손봉사는 금지되지 않았다. 『경국대전』 편찬자들은 이것을 무시하였으나 이 같은 관행은 16세기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관리들이 종법을 계속 내세우면서 외손봉사 관행이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크게 드러냈다. 이황(1501~1570)은 하늘이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의 뿌리만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당에 서로 다른 두 출계집단이 제사지내는 것은 자연 법칙에도 어긋나며, 그같이 부정확한 제물은 조상의 영도 좋아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황도 후계자가 없는 어머니 쪽 조상들에 대한 딜레마를 인식하였다. 그는 임시방편으로 특별히 방을 따로 마련하여 외조의 위패를 봉안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뒤 예학자들은 이황의 이러한 관점을 되풀이하였는데, 이 같은 관점은 주자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뿌리 깊은 관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221-2)


4장 상장례의 변화


"상례는 죽은 이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동시에 죽음으로 붕괴된 사회적 연결 고리를 다시 구성한다. 죽음을 기념하는 이 과정은 친족 사이에 그 어떤 사회적 의례보다도 특별한 감정과 행동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통과 의례이다." "부계 친족을 확실하게 분류하는 오복제는 '사회적 혈족의 멀고 가까운[親疎] 관계'를 기초로 5등급으로 나누어 상복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상복을 입는 기간은 (부모의 경우에 해당하는) 3년부터 3개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상복 재료도 거친 베부터 고운 베까지 다양하다. 상복을 입는 친척은 위아래로 4대까지이며, 방계는 육촌까지로 한정하였다. 오복제는 부계친을 특히 강조하며 비부계친과 모계친 그리고 아내의 친족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구조화된 도해인 「오복도」는 사람의 애정과 감정의 정도를 표현한 것만은 아니다. 공자가 주장한 것처럼 이것은 애도를 넘어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규범적인 친족 행동의 패러다임이었다."(244-5)


"조선 전기의 입법가들은 부모상의 경우, 3년상을 치르는 것이 기본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3년상은 중국 고대 성현들이 사람의 감정을 기초로 고안한 것이므로 사대부들이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완벽한 제도'라고 믿었다. 이 같은 성현들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3년상을 지지하는 기본적인 논의는 『논어』에 포함된 공자의 가르침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아이는 3살이 되어야 부모의 품을 떠나므로 3년 동안 애도하는 것은 하늘 아래 어디에서나 같아야 한다." 그렇지만 『의례』에 따르면 모친에 대한 3년상은 부친이 먼저 사망한 뒤에만 적용되었다. 『의례』에는 모친이 부친보다 일찍 사망하면 모친이 하위에 있다는 표시로 재최장기를 갖추고 1년상만 치르도록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자는 "가장인 부친이 살아 있는 동안 아들은 모친에게 개인적으로 느끼는 존경을 감히 완전하게 나타낼 수 없다"라고 설명하였다."(251)


"상복을 입는 규정은 상주가 평소 생활에서 벗어나야 하는 특별한 행동을 수반했다. 죽음은 오염을 의미했으며, 상喪은 길한 일과는 분리되어야 하는 흉한 일에 속했다. 길과 흉이라는 삶의 서로 다른 두 영역의 거리는 상을 지내는 동안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 전해졌다. 상주는 조악하고 색깔 없는 복을 입었는데, 이것을 지은 천이 조악하다는 것은 애도의 정도를 의미했다. 상주는 고기와 술, 양념을 삼가야 했으며 여자들의 거처에 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 대신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켜야 했다. 시끄럽고 즐거운 오락거리와 말 타기, 성행위는 죽은 이를 모욕하는 것으로 비난받았다. 상중에는 혼례식을 치를 수 없었고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 상중에 겪어야 하는 고초와 옹색한 일상생활을 피하려고 부모의 죽음을 숨기는 것은 큰 범죄가 되었다." "가장 흔한 위반은 부모 상중에 혼인하여 의도적으로 신부집에 거처를 정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자식의 도리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261)


"사후세계에 대한 불교와 유교의 관념은 기본적으로 상호대립적이었다." "불교에서는 주검이 흩어져서 '물고기와 새들이 먹이'가 되는 반면, 유교에서는 주검을 매장하여 삶과 죽음 사이를 순환한다고 여겨지는 기를 보존하도록 하였다. 만일 조상이 땅에서 평안을 찾는다면 자손은 세상에서 평안을 찾는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상호의존은 나무에 비유되었다. 즉 나무뿌리가 불탄다면 그 나무의 가지와 잎은 말라죽으므로 번성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성현들은 시체가 너무 빨리 부식할 것을 우려하여, 안팎이 견고한 관을 짜고 시체에 두꺼운 수의를 입혔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관 속에 침입한 해충이 주검 대신 먹을 수 있는 곡류를 넣었다." "유교의 관점에서 볼 때 묘는 이승[冥]과 저승[幽] 사이를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므로, 묏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장례식에서 가장 중요하였다."(267-8)


5장 상속, 균분에서 장자 우대로


"아들과 딸에게 고르게 상속하는 고려의 관행은 조선 초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 관행은 매우 뿌리 깊은 것으로 당시에는 아들과 딸 사이의 차별이 아니라 아버지의 여러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사이의 차별이 오히려 더 큰 문제였다." "서자 상속에 관한 규정은 모든 부계 후손에게 상속 특권을 주기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어머니의 사회적 출신이 여전히 개인 몫을 결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적실이 낳은 아들이 있을 경우, 양첩자는 7분의 1을, 천첩자는 10분의 1을 받았다. 양첩자가 없을 때는 천첩자의 몫이 7분의 1로 늘어났다. 천첩자가 유일한 남자 자손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코 완전한 후사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양첩자는 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도 양첩자는 아버지와 가까운 방계친인 아버지 형제들과 공동으로 상속받아야 했다. 1405년 법규는 서자의 입지를 후사로 승격했지만 동시에 고려의 수평적 상속 전통을 마찬가지로 재확인하였다."(283-5)


"법에는 딸도 남자형제와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가질 권리가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조선 왕조 전반기에 딸의 상속권은 상당히 변하였다. 사실 16세기 초반까지도 아들이 없으면 외손이라도 조상 제사는 지내야 한다는 특별한 바람과 더불어 딸이 아버지 쪽 재산의 주요한 수여자로 지명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와 같이 각별한 목적으로 딸에게 재산을 주는 사례(유교적 시각에서는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었다)가 있었는데도 딸이 점차 재산 상속 자격을 잃는 경향이 뚜렷하였으며 이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느슨하게나마 친정에 있던 여성의 상속 재산은 결국 양도할 수 없는 남편의 혼인 자산에 크게 보태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 같은 재산이 혼인할 때 지참금 형태로 가져온 것이라면 이는 신부가 첫 부인이 되기 위한 부가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사망하여 상속받았으면 남편 재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303-4)


양대 전란 이후 노비들이 대거 흩어지면서 토지 소유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졌다.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대응책이 절박해졌으며 이에 따라 제례를 시급히 혁신해야만 했다.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은 현존하는 상속 관행을 개정하여 토지 분산을 과감하게 줄이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략은 의례편람에서 주장하듯이 장자를 세습 재산의 주요 상속자로 인정하면서 조상을 봉사하기 위해 세습 재산의 상당 몫을 따로 떼어놓는 것이었다." "세습 재산은 조상들이 자손 모두에게 물려주는 일종의 경제적 보험이라는 성격 대신 부계 자손들이 조상들에게 적절한 제례 행위를 하도록 지원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렇듯 달라진 관점은 대를 잇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 자신의 권리에서 후사로서 여성의 입지를 손상시켰다. 여성이 남편 집안에 통합되면서 이전에 받은 상속이나 지참금 형태로 가져온 재산은 그녀가 출생한 가족과 영원히 분리되었다."(306-7)


6장 신유학의 입법화와 여성에게 일어난 결과


"유교는 남성 중심 철학이지만 남녀의 결합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이것을 모든 인간관계의 뿌리, 즉 인간 도덕성의 토대로 간주한다. 그뿐만 아니라 부자관계에서 군신관계로 확대되는 사회화 과정의 원천으로도 본다. 우주론적 용어에서 볼 때 하늘[陽]은 땅[陰] 위에 군림하며, 남성은 여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명확한 위계질서는 우주론적으로 공인되어 인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이 질서는 인간의 욕망을 억제해야만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 유학자들은 여성의 내부·가사 영역과 남성의 외부·공식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그들은 성적 타락이나 이기심이 사회 불안이나 부부간의 역할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보았으므로 남녀 구분이 그러한 현상을 억제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여성은 사회 변화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사회 변화는 종종 남성보다 여성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316-7)


"1413년에 처첩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조처는 인간관계와 사회 지위를 분명하게 하는 결정적 수단으로 환영받았다. 이것은 유교 법제화의 이정표로 왕조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많은 것을 함축하였다. 한 명의 배우자를 처와 합법적 후사의 어머니로 격상한 것은 종법 원리에 명확한 개요를 마련하였으며, 여성을 남편의 출계집단에 굳게 결속해놓았다. 아울러 이 조처는 결과적으로 출신 계급과 연관되어 있는 여성의 세계에 구조적 불평등을 가져왔다. 대체로 처는 양반 엘리트에서 고른 반면 첩은 더 낮은 계급에서 고르기 때문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부인들을 서열화하는 것은, 사회를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으로 이분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양반을 다른 계급과 분리하고 신분 내혼적 지위 집단으로 만드는 '사회적 방어막'은 한국을 세운 기자가 가져온 금법에서 유래한다고 믿어, 한국 사회의 고유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322-3)


"신유학을 신봉한 입법가들은 '여성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가사 영역에 가두기 위해 여성이 절에 자주 출입하는 것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1404년 여성이 부모를 추모하는 목적 이외에 절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여성은 법으로 절에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풍속을 해치는 온상이 된다고 하여 1431년에는 무당집 출입도 금지되었다." "여성의 사찰 출입을 제한하려는 사간원의 노력은 1447년 열매를 맺었는데, 여성이 이런 위반을 하게 되면 최고 연장자와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이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국왕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중반 새로운 복장과 장식 형태는 보이지 않지만 여성은 옷을 어떠한 불온한 눈길도 닿을 수 없도록 입어야 했다. 특히 적처가 바깥에 나갈 때는 얼굴을 완전히 덮고 위로 올려서는 안 되는 쓰개치마를 사용하라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눈으로 쉽게 사회 계층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의복 재료와 색깔 선택에 제한을 두었다."(353-4)


"조선 왕조의 유학자들은 아내를 내칠 수 있거나 그럴 수 없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법적 가치보다는 도덕적 압력으로 인식하였다. 혼인으로만 인정받고 사회 지위를 얻는 여성에게 남편 가족으로부터 쫓겨나는 것과 재혼할 경우 따라오는 사회적 오명이 가져다주는 위협은 여성을 복종적이고 순종적으로 만드는 효율적 수단이었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궁극적 책임을 천성적으로 열등한 아내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편에게 돌리기 때문에 사간원은 큰 이유 없이 아내를 내쫓는 남편을 엄하게 다루었다." "남편이 아내와 이혼하기를 요구하는 이유를 질투·중병·수다라고 해서 올린 사건은 대개 기각당했는데, 그런 것들은 단지 여성의 천성의 일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배우자끼리 협의할 수 있는 것[完聚, 復合]으로 간주되었다." "남편이 호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효인데, 최고 불효는 계승자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369-70)


"혼인은 출계집단 전체의 일이므로 남편이 죽은 뒤에도 혼인관계는 지속되었다. 배우자가 죽으면 아내의 지향점은 다음 세대로 향한다. 어머니로서 그녀는 집안의 어른이 된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가장 큰 미덕으로 남편과 출계집단에 대한 아내의 헌신을 강조하였다. 혼인관계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여성이 재혼할 정당성을 제거하였다." "유교 입법가들은 '정절을 지킨' 과부들을 특별한 경제적 수단으로 지원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적처로 인정받은 과부는 남편의 과전科田 일부를 받았는데, 아들이 있는 경우는 3분의 2를, 없는 경우는 3분의 1을 받았다. 이 토지는 '절의를 지키기 위한 토지'[守身田]라고 불렸으며 과부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것이었으나 오래 지속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1466년 과전이 공전公田으로 전환됨에 따라 수신전은 폐지되었다. 수신전을 복원하자는 요구가 자주 있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374-5)


결론 종족사회의 출현


여말선초에 "가장 눈길을 끄는 분명한 변화는 출계 범위를 엄격하게 좁히는 것이다. 남성은 물론 여성으로 이어지는 모든 후손을 망라한 고려의 출계집단은 이제 엄격하게 부계 체계가 되어야 했다." 출계집단의 구성원을 충원하는 기반은 "모든 후손을 망라하는 출계 원칙에서 배타적 원칙으로 교체되었다. 이것은 모변의 친족 대부분에게 작용했다. 모변의 친족이 고려의 친족 구조에서 차지하던 압도적 위치를 점차 잃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남계친 가운데 유명한 조상이 있는 후손은 대체로 자신의 남계 출계집단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출발점을 확보하려고 그 조상을 기억하였다. 결국 고려시대 출계집단이 이렇듯 부계로 출계 범위가 축소된 것은 장자상속이 제도화되어 우애에 입각한 계승과 균분 상속을 종식하면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2세기 이상 제도화와 교화를 거친 후 수평적 사고방식에서 수직적으로 힘겨우면서도 복잡한 이동이 마무리되었다."(382-3)


출계 범위를 현저히 좁히는 변동을 가져온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조상 숭배였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자접합親子接合, patrifiliation을 인간의 가장 기본 고리로 찬미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구조적 중요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더 큰 계보적 출계의 맥락에 깊숙이 뿌리내려야 했다. 출계집단 내에서 각 남계 구성원의 위치를 바꿀 수 없는 세대[世] 체계와 방계 구도에 따라 규정하면서 제사는 남계의 친족관계agnation를 이데올로기에서 살아 있는 실재로 바꾸었다. 제사는 종(출계 계통)을 분명히 하고 친족의 경계를 그었다. 이와 함께 조상의 사당 앞에 모인 남계친 사이에 같은 후손이라는 의식과 더불어 결속력을 촉진하였다. 그리하여 조상 의례는 정치경제적 상황과 분리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단체를 창안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부계 출계집단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384)


16-17세기의 신유학 이론가들은 중국 고전 및 신유학 이론과 배치되는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국속國俗이라는 개념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 개념은 한국적 가치의 지속적인 힘, 특히 그중에서도 출계 및 사회 지위와 관련된 것을 서슴없이 인정하고 있다." 국속의 주요 요소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엘리트의 지위를 결정하고 재생산하는 출계에서 모계가 지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각각의 부계를 대표하면서 그들의 출생을 완전하게 만드는 중요한 세습적 정수精粹를 전하며, 그들에게 이러한 정수가 부족하다면 그들 남편의 출계집단은 반쪽 구성원이 된다. 엘리트에게 지위의 재생산은 앙변적兩邊的이다. 여성의 혈통에 대하여 여성 자신의 자녀를 합법화하는 지속적인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신유학 수용 이전 과거 사회의 중요한 유풍이었다. 유교에서 부계친을 강조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지만 이것은 사실상 한국인의 부계 출계집단의 배타성을 강화하는 구실을 했다."(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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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의 황금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 전후 경제 호황의 종말과 보통 경제의 귀환
마크 레빈슨 지음, 조미현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1948년 1월에 미국 관료들은 점령지 일본의 경기 부진을 우려해 배상금을 받아내기보다 경제 재건에 역점을 두는, 머지않아 '역전 정책(reverse course)'이라고 명명할 새로운 정책을 공표했다." "4월에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마셜 플랜이라는 경제 원조 계획─소련과 그 의존국들은 즉각 거부한 원조─을 인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6월에 미국, 영국 및 프랑스의 군 당국은 새로운 화폐인 도이치마르크가 독일에서 소비에트연방이 점령하지 않은 지역의 법정 통화임을 선포했다." "역설적이게도 전후 세계를 동과 서, 독재 정권과 민주주의로 양분하며 유럽의 심장부에 드리웠던 '철의 장막'의 쇳소리는 부활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소련과 거기에 갇힌 동맹국 블록은 말 그대로 스스로 장벽을 친 셈이었다. 투자자와 기업 경영자들은 프랑스나 일본이 결국 소련의 편에 설지에 관한 걱정에서 말끔하게 벗어났다." "1948년 하반기에는 공업 생산이 연 137퍼센트라는 믿기지 않는 비율로 증가했다."(34-5)


"경제적 중도주의는 정치적 중도주의와 손을 잡았다. 사회 복지 제도를 해체하려는 보수 정당은 한 곳도 없었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종교적 의무감의 발로이건, 재개된 계급 투쟁에 대한 공포 때문이건, 혹은 공공 지출이 더 건강한 경제를 만들 것이라는 투철한 신념에서건 많은 국가에서 그들은 열광적으로 사회 복지 제도를 지지했다." "처음에는 기적으로 보였던 경제 성과가 이내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해를 거듭해도 그런 상황은 지속됐다." "언제나 경제생활을 특정짓던 변동성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보내진 듯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적 성공은 자본주의의 야성적 충동이 아닌, 신중한 경제 계획 덕분이었다."(40-1) 존 케네디와 린든 존슨 대통령의 수석경제고문 헬러는 "향상된 통계와 컴퓨터 예측 기법을 통해서 물가를 상승시키지 않으면서도 실업을 정복하기 위해 지출과 세수를 조정하는 방법을 정부가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역설했다. 헬러는 이러한 사고를 '신경제학'이라고 불렀다."(43)


장기 호황을 유지하는 정부의 역량에 대한 보편적인 신앙과도 같았던 이 신흥 경제학의 열렬한 신도인 서독 정치인 카를 실러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는 '합리적 완전체(rational whole)'였다. 정부가 할 일은 경제를 운용하는 게 아니라, 최적의 성과를 목표로 그것을 미세하게 조정하기 위해 세계와 지출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부가 고속도로에 쏟아부은 수백만 마르크의 지출이 어떻게 서서히 경제로 흘러들지를 보여주는 투입 산출 분석, 그리고 어떤 세금을 인하해야 일자리를 최대로 창출할 것인지를 밝혀내는 선형계획법 같은 기술로 달성될 터였다. 아울러 통계 분석의 새로운 방법론에 정통한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이 데이터를 평가하고 중대한 판단을 내릴 터였다. 1956년 실러는 정부가 물가를 계속 안정시키면서도 완전 고용과 꾸준한 경제 성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법안으로 제출했다. 그는 이 경이로운 조합을 '마법의 삼각형(magic triangle)'이라고 불렀다."(48-9)


당시 '개발도상국'이라 부르던 나라들도 정부가 지휘하는 현대화를 향한 강행군에 착수했다. 프레비시에 따르면, "풍부한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공장의 제조품을 수입하는 것은 이들 주변부 국가들을 잘 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그들의 수출품 가격이 해외로부터 사들인 상품의 가격에 비해 장기간 하락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레비시는 무역에서 주변부 국가들이 갖는 열등한 지위가 그 나라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더 높일 수 있는 투자 재원 조달에 필요한 이윤 축적을 가로막는다고 피력했다. 따라서 불공정 무역은 라틴아메리카가 가난해진 근본 원인이었다."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에 관한 그의 생각은 어떤 면에서 카를 실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실러는 자본을 조합하고 어떤 산업이 투자 가치가 있는지 선택하는 것은 민간 부문이 할 일이라 여긴 반면, 프레비시는 정부의 계획이 갖는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염두에 두었다."(59-60)


# 프레비시의 '종속 이론'


"프레비시는 유익한 정책을 집행하고 수입에 대해 보호책을 쓰면서도 나라 안에서는 경쟁을 장려하는 지혜로운 기술 관료들로 이뤄진 정부 부처를 마음속에 그렸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현실은 딴판이었다. 계획 부서는 나라가 무엇을 수입하고 수출할지, 새 공장의 부지는 어느 곳으로 하고 거기서 무엇을 생산할지, 그리고 위태롭게도 어떤 개인이 모두가 탐내는 허가를 받을지 결정하면서 민간 부문의 생사를 좌우하는 권력을 떠안았다. 끝없는 허가 요구는 지도자들의 가족 친지와 핵심 후원자가 수익성 좋은 독점 기업 운영권을 따냄에 따라 경쟁의 목줄을 죄었다. 가난한 소비자들이 부담할 비용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프레비시는 수입 대체를 개발도상국에 산업이 뿌리내리기 시작하면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할 단기 정책으로 간주했지만 투자자와 산업 노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수입 장벽을 그대로 유지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익과 부를 보호해달라고 요구했다."(67-8)


"1960년대 중반 닉슨의 전임 대통령 린든 존슨은 세금 인상이나 사회 보장 프로그램 축소 없이 베트남의 군사력을 증강하는 '군비·민생 양립(guns and butter)' 정책을 펼쳐온 터였다. 연준은 정부가 전쟁 자금을 싸게 융통할 수 있도록 확실한 단기 저금리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존슨의 정책을 충실히 뒷받침했다. 단기적으로 이러한 양립 정책은 거의 모든 국민의 일자리와 임금의 급격한 상승을 보장했다."(71) 그러나 베트남 철수와 더불어 실업률 증가와 인플레이션 상승이라는 불행한 조합이 발생하자 "1970년 초 번스의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폈다. 몇 달 뒤에는 방향을 뒤집어 실업률을 낮출 거라는 희망 속에서 공격적일 정도로 완화 정책을 실시했다. 1970년 5월에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통화 정책만을 사용할 경우 '매우 심각한 경기 불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닉슨에게 임금 및 물가 상승을 검토는 하되 규제하지 않는 위원회의 창설을 촉구했다."(74)


"(미국의 저금리 정책이 초래한 불을 끄기 위해, 즉 물가를 잡기 위해) 각국 정부는 너무나도 감쪽같이 반反인플레이션 정책으로 전환했다." "1971년 8월 15일 닉슨은 번스의 축복을 받으며 국영 텔레비전에 출연해 90일 간의 임금 및 물가 동결을 발표했다. 대통령은 또한 다른 나라 정부가 더 이상 그들의 달러와 금을 맞바꿀 수 없다고 돌연 선언─이른바 닉슨 쇼크(Nixon Shock)로 알려진 선언─했다."(77) "아서 번스의 금융 완화 정책은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고, 경제는 터보 엔진을 단 듯 급성장했다. 몇몇 나라에서는 단기 금리가 너무 떨어지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기업이 대출 비용보다 적은 융자금을 상환할 수 있었다─대출을 해서라도 건물을 올리고, 설비를 구매하고,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강력한 인센티브가 있었다." "그러나 청구서는 곧 만기가 도래할 터였다." "닉슨이 재선에 성공할 무렵, 세계 모든 주요 경제국의 물가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79-80)


"되살아난 인플레이션과 환율의 혼란이 금융 시장을 뒤흔드는 동안, 여론층은 다른 주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세계가 곧 경제적 심연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문제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지금은 지나치게 경기가 좋은 때라는 현실이 걱정이었다. 그들은 상상도 못했던 수준의 부를 창출한 성공적인 추진력이 경제적·환경적 붕괴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새로운 환경주의는 1970년대 초 경제 성장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 인구보다 확실히 더 풍족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집단인 그 지지자들에게 소득 인상과 물질적 풍요 확대란 찬양할 성취가 아니라 맞서야 할 문제였다."(81) "환경에 대한 1970년대 초의 위기의식 증대는 또 하나의 떠오르는 관심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 바로 인구 과잉이다." "환경 운동과 인구의 제로 성장을 위한 관련 운동은 놀라우리만치 정치적 국경을 초월했다." "어느 날 아주 갑자기 녹색은 좋은 것이 됐다."(85-6)


"새로운 환경 운동은 군림하던 경제학적 통설을 향한 직접적 도전이었다. 많은 논평가들이 관찰했듯 1인당 소득이나 국민총생산의 증대 같은 전통적인 경제 지표는 환경적 고려 사항을 왜곡된 방식으로 설명했다. 제련소와 정유소에서 나오는 산출량 증대는 그 결과로 유발된 오염 물질 증가의 악영향을 전혀 차감하지 않은 채 순 플러스(+)로 기록됐다. 그러나 터무니없게도 만일 기업이나 정부가 사후에 오염수 정화에 돈을 투입할 경우 그것 역시 경제 성장으로 집계됐다. 더 많이 오염시킬수록 경제가 더 빨리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환경주의자들의 불만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로부터 완전히 잘못된 결론이 도출됐다. 경제 성장은 단지 허구일 뿐이라는─혹은 더 나쁘게도 번영은 적이라는─것이었다." "이 새로운 관념에서 경제 성장이란 참을 수 없는 공해이자 헤아릴 수 없는 환경적 해악이며 천연자원의 무모한 고갈을 의미했다."(88)


"산유국들은 언제나 미국달러로 자국의 생산물 가격을 매겨왔는데, (브레턴우즈 체제의 폐기가 초래한) 달러 붕괴는 수백만 배럴의 석유로 더 적은 독일 트럭과 일본의 I빔(I-beam) 철재를 구입하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94) "1973년 10월 6일은 욤키푸르, 즉 속죄일로 유대인 달력에서 가장 신성한 날이었다. 전후의 장기적 경제 성장이 단 하나의 날짜에 정점을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욤키푸르보다 더 나은 후보는 없었다." "(골란 고원을 둘러싼 전투가 벌어진 지) 48시간 만에 중동 6개국은 유가를 2배 올리는 데 동의함으로써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석유 수출국들은 석유 회사 임원위원회와의 협상이 지연되자 독자적인 행보에 나섰다. 10월 16일 그들은 새로운 기준 유가를 공표했다. 배럴당 5.12달러였다. 훗날 야마니는 "OPEC이 권력을 잡은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고 술회했다. 1973년 초부터 9개월 만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의 가격이 거의 2배로 올랐다."(102)


"1970년대에 중앙은행 총재들은 대략 한 달에 한 번 바젤에 모였는데, 여기서 일 이야기라 함은 보통 경기 여건에 관한 논의를 뜻했다. 1974년 3월과 4월의 화제는 석유 수출국들의 팽창하는 부를 어떻게 다룰까 하는 것이었다. 부자 나라의 은행들로 밀려드는 달러에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다른 통화로 전환해 그 돈을 빌려줘야 했다. 이는 설령 채무자들이 대출금을 제때 갚는다 해도 갖가지 위험 요인을 창출했다. 만일 환율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대출 상환금이 은행의 예금주에 대한 달러 채무 가치보다 적어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한 석유왕국이 갑자기 자국의 달러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기라도 하면, 그것을 영국의 파운드(pound)나 네덜란드의 휠던(gulden)으로 전환해 5년짜리 대출을 해주는 데 써버린 은행은 현찰이 절박한 상황에 봉착할 것이다. 이는 섬뜩한 전망이었다. 은행들은 글로벌 금융과 변동 환율이라는 신세계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18-9)


# 잉글랜드 은행 총재 리처드슨이 영국 금융가에 도입한 조치

1. 국내용 : 은행들이 은행감독부에 정기적으로 융자금, 예치금, 차입금 운용 상태를 상세히 기록한 자료를 제출하도록 했다.

2. 국제용 : 전 세계로 대출된 해외 달러의 유입이 금융 시스템 전체를 와해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바젤 논의를 제안했다.


(석유 가격의 상승으로 넘쳐나던 오일 달러가) "금융 시스템을 타고 빠르게 흘러들었으므로 전 세계 은행은 프랑크푸르트와 뉴욕에서, 베이루트와 애틀랜타에서 문을 활짝 열고는 앞다퉈 예탁금을 유치하고 예전에는 접촉하지 않던 대출자에게 융자를 제공했다. 수익 사업으로 몰려들던 은행 다수는 국제적인 대출에는 초보자였고, 자신들의 신규 고객에 대해 잘 몰랐다. 이는 시한폭탄이었고, 감독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한 은행이 대출을 더 많이 해줄수록 채무 불이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을 챙겨둬야 한다. 그러나 은행장들은 자본 보유분의 증대가 주주들에게는 더 낮은 수익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골치 아프지만 잘 알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많은 은행에 자본이 거의 없었다."(130-1) "오일 달러가 계속 밀려들고 국제적인 대출이 호황을 맞으면서 은행들의 인상적인 성장은 나날이 취약해져가는 그들의 토대를 가려줬다."(132)


"20세기 초 이래로 미국에서 주의 경계를 넘어가는 석유 파이프라인 하나당 부과하는 요금은 연방의 규제 아래 있었고, 1932년 연방 의회는 국내 생산업체의 기름 판매를 확실히 하기 위해 수입한 석유, 가솔린 및 윤활유에 세금을 부과했다." "미국 석유는 수입 석유보다 18퍼센트 더 팔렸지만 모든 정유사는 가솔린과 디젤 연료의 출처와 무관하게 똑같은 값을 받았고, 이는 국내 석유에 더 의존하는 정유사가 이윤 감소에 부딪치리라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정유사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능한 한 많은 배럴을 수입할 절박한 동기가 있었다." "값비싼 국산 석유 구매를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이들 대형 정유사는 정치적 이유로 특별 수입 쿼터를 할당받은 군소 정유사와의 거래에서 이 문제의 해법을 찾았다. 군소 정유사는 자신들보다 큰 정유사의 '첩(妾)'이 되기로 계약서에 서명했고, 원유를 직접 정제하느라 힘들일 필요 없이 높은 가격에 자신들의 수입 쿼터를 되팔았다."(140-2)


"(석유 수입 쿼터제는) 닉슨의 반反인플레이션 프로그램이 물가 상승을 제압하려던 순간에 더 높은 가격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했다. 게다가 국산 석유 사용 의무 조항은 미국의 석유 비축분을 고갈시키고, 타국의 비축분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프로그램이 의도한 목적과 정확히 반대였다." "시카고 대학에 재직 중이던 조지 스티글러와 로널드 코스 같은 경제학자들은 특정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을 정부 기관의 지시보다 경쟁에 의해 결정할 때 경제가 호전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1950년대부터 규제 완화의 학문적 틀을 제시해왔다." 정치인들은 미국에서 석유와 가스 생산이 늘어나길 바랐지만, 탐사용 시추공(wildcat wells, 상업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은 최초의 유정) 개발자들이 더 많은 유정을 뚫도록 부추길 여지가 있는 유가 인상은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에너지 정책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우왕좌왕했고,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헛된 노력 속에서 불행히도 규제 위에 또 규제를 쌓아 올렸다."(142-4)


높은 가격과 비효율성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규제 완화의 첫 번째 타겟이 된 "운송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의회는 1980년 은행이 예금주에게 지불할 이자율의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예상을 뒤엎고 그 법률은 금융 산업의 대규모 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경제의 어떤 부문이 가장 신용을 받을 만한지 결정하는 권한을 정부 관료에게서 빼앗아갔다. 전자통신, 전력 및 기타 산업에서 경쟁을 제한하던 미국의 규제는 곧이어 면밀한 조사 대상이 됐고, 석유와 천연가스의 규제 완화도 다시 정치적 의제로 등장했다. 이런 움직임은 신속하게 해외로 확산됐고, 비평가들은 상점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상점이 팔 수 있는 품목을 제한하고, 가격을 담합하는 카르텔 결성을 허용하고 높은 국제 항공 운임을 보호하는 법안을 표적으로 삼았다. 1978년에는 루이 14세 시대 이래 국가가 경제를 통제해온 프랑스에서 185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가 빵 값에 대한 규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151)


"득실을 따져보면 규제 완화의 결과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옛날 직종과 옛날 회사가 사라진 반면 새로운 일자리와 새로운 기업이 등장했고, 규제로 보류됐던 새로운 상품─변동 금리 예금 계좌, 휴대전화, 골퍼와 미식가의 구미에 맞춘 민영 텔레비전 채널─이 소비자에게 혜택을 가져다줬다. 예전에는 규제 기관에 의해 좌우됐던 가격과 서비스를 협상할 수 있게 된 회사들이 자신의 사업을 더욱 생산적으로 운영할 방법을 모색함에 따라 경제 성장은 힘을 받았다. 그러나 황금기의 본질적 양상이던 안정과 안전은 그걸 감싸주는 규제라는 틀이 없어지면서 심각하게 훼손됐다. 정부들이 생산성 증가를 회복하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려 노력하면서, 안정은 감당할 수 없는 사치가 되고 말았다."(152-3) 규제 강화와 규제 완화라는 구호에는 이념과 이익 모두가 걸려 있었다. 정부 정책은 그 균형의 담장 위에 올라선 심판이었고, 심판은 경기 중에 거의 예외 없이 양쪽으로부터 비난받기 일쑤였다.


굴뚝 산업을 바탕으로 고도 성장을 구가하던 일본은 유가 인상에 직격탄을 맞았지만 석유 청구액을 지불할 만한 충분한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여전히 수출에 박차를 가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본 부흥의 원동력이었던 굴뚝 산업은 에너지 부족과 초과 작업에 짓눌려 시들기 시작했다." "정부는 구舊경제의 쇠퇴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대량 실업 방지 계획을 들고 개입했다. 하향 산업 부문의 노동자를 성장세에 있는 산업으로 이동시키는 고용주에게 리베이트를 줬다. 인건비 보조금, 직업 훈련 보조금 및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직장을 구하는 노동자를 돕는 장려금이 있었다. 근로 시간이 줄어든 노동자의 임금을 벌충해주는 보조금도 있었다." "구舊경제는 신新경제에 자리를 내줬다. 신경제에서는 공학과 디자인이 값싼 에너지와 값싼 노동보다 더 중요했다. 일본은 톤 단위로 팔리는 소비재가 아닌 자동차, 고급 전자 제품 및 정밀 기계를 만들어 잘 살게 될 터였다."(162-4)


"두꺼운 책자를 채울 만큼 많은 규제가 수입을 제한하는 한편, 새로 구조 조정을 마친 수출 기구가 기어를 고속으로 바꾸면서 일본은 전례 없는 규모의 무역 흑자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흑자가 죽은 경제를 부활시켰다. 1975년이 되자 일본은 1973년 이전보다 훨씬 느리긴 해도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이 나라는 다른 모든 산업화한 경제 대국을 앞질렀다. 그러한 이익이 일본 스스로 소정의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가서야 밝혀졌다. 정부는 지식 집약적인 제조업 구축에 세밀한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이 나라의 놀라우리만치 비효율적인 서비스업 부문을 거의 간과했다. 1980년 일본의 서비스업 부문 생산성은 1970년보다도 낮았다. 대형 점포 개설의 장벽, 트럭 운송의 경쟁 억제, 그리고 은행의 주말 현금인출기 운용 금지를 비롯한 많은 유사한 규제는 향후 몇 년간 경제 성장의 걸림돌로 여겨졌다."(166)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어떤 정부도 산업 전체의 종말과 거기에 따라오는 일자리 손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167) "노동자 계층을 돕는다는 대의명분으로 곤경에 빠진 산업을 구제하는 것은 1973년 이후 10년간 산업화한 세계 전역에서 주요 프로젝트가 됐다. '구조 조정'이라는 지시문 아래 수익을 못 내던 제조업체는 정부의 직접적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를 챙겼고, 정부의 수입 제한 및 카르텔 합법화 같은 경쟁 완화 정책으로 가격을 높일 수 있게 되면서 수백억 달러를 추가로 거둬들였다. 그러나 실제 들어간 비용은 인상된 상품 가격과 특혜받은 회사가 빼먹은 보조금을 훨씬 넘어섰다. 전 세계가 생산성 증가의 둔화로 고전하던 시기에 대부분 국가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산업보다는 성장 가능성이 희박한 부진한 산업을 조직적으로 지원했다. 그 최종 결과는 생산성의 슬럼프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심화하는 쪽이었다."(173-4)


"노동 임금 상승의 급격한 둔화와 소득 격차 증대의 이유로 가장 흔히 거론되는 것은 정치적 결정─어떤 나라에서는 최저 임금 인상 실패, 다른 나라에서는 고용을 가로막는 규제 강화, 부국의 노동자를 저임금 국가와의 경쟁에서 더욱 취약하도록 만든 국제 무역 협약, 그리고 직원의 급료나 자신의 직무 성과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이 기업체 사장들이 스스료 급료를 책정할 수 있게 만든 법률─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순전히 국가 내부적인 설명만으로 미진하다. 사회적·정치적 영향은 나라마다 각기 달랐던 반면 임금 상승 둔화 및 격차 확대는 전 지구적 현상이었고 고소득 국가 전체와 중간 소득 국가 대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글로벌한 추세의 중요 원인은 역시 글로벌할 필요가 있다." 국민 소득 중에서 배당금이나 자본 수익, 정부 세금 등을 제외하고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노동 분배율(labor share)은 1970년대 하반기에 한 나라만이 아닌 세계 각지에서 하락하기 시작했다."(186-7)


"사회 복지 제도는 놀라운 성취였다. 수백만 명의 연금 수령자는 노령에도 더 이상 극심한 빈곤에 처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찾았다. 상해보험은 노동자의 가족이 작업 중 상해를 당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줬고, 의료보험은 최하층 아이들까지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했다. 실업보험은 실직자뿐 아니라 그들이 애용하던 상점과 그들이 제품을 구매하던 제조업체의 불황이 할퀸 고통을 다독여줬다. 경제학자들은 사회보험 프로그램을 '자동 안전장치'라고 표현했는데, 힘든 시기가 왔을 때 그것이 소비자의 손에 돈을 쥐어줬으므로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도움을 베푸는 정부란 공짜로 생기는 게 아니었다."(195) "1970년대에 경제 환경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환율 및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가능하고 미래가 매우 불확실해 보이면서, 사회 복지 재원 조달을 위해 어느 때보다 세수를 많이 늘리려던 정부의 시도는 더욱 심한 저항에 부딪히기 시작했다."(200)


"통치 불능(ungovernability)은 1970년대 중반에 이 용어를 받아들인 대로 사회 불안보다는 정치 마비와 더 관련이 있었다. 이는 두 가지 근본적 사회 변화의 결과로 알려졌다. 하나는 교육과 풍요가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줬다는 것이다. 시민은 더 이상 맹목적으로 그들이 속한 교회, 노조, 혹은 기업 조직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무엇이 자기들에게 최대 이익이 되는지를 스스로 결정했다. 또 다른 변화는 정부가 많은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서비스와 보조금을 제공하면서 실질적으로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시민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정부의 행동을 주시했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일어난 이 두 가지 변화는 정치인이 어떤 공공의 선이라는 명분 아래 결정을 내리면 순종적인 유권자는 그걸 따를 거라고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 복지 제도가 안긴 선물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되었다."(208)


# 의제 대표 기능에서 특화된 소수 이익 집단이 다수가 공감하는 대규모 집단을 앞지르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


"철의 장막 뒤에서 비선출 공산당 정권에 지배당하던 소련 의존국들은 서유럽, 북미, 일본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던 나라들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 통치 불능의 위기에 돌입했다. 소비에트 블록 국가들은 흔히 경제가 마비된 나라들로 기억되지만, 이는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한 것이다." "공산 경제 계획자들은 규모의 경제에 관한 한 광신자였다. 그들은 카를 마르크스를 통해 산업화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산 경제 국가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는 제법 강했지만, 소비자들이 실제 원하는 물건을 생산하는 데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무기류와 중공업 제품이 우선이었으므로 일반 가정을 위한 아파트와 자동차는 자원을 차지할 순위에서 뒤로 밀렸다. 산출된 결과물은 천편일률적으로 조잡하고 구닥다리였다. 왜냐하면 품질이나 혁신에 대한 보상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만족은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는 데 요긴할 때에만 우선순위에 들었다."(212-4)


새롭게 등장한 이념적이기보다는 능력 있는 비즈니스형 지도자들은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침식하고 시민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드는 것을 지켜봤다. 그들은 사회 복지 제도의 한계를 인식했고, 대중의 세금 인상 반대가 심각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기업에 매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수익성만이 회사로 하여금 투자를 증대하고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즉각 인정했다. 그들은 높은 유가가 국내 제조업의 많은 부분을 쓸모없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대중에게 말했던 것과 달리 폐쇄된 공장 대부분이 결코 다시 문을 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생산성 증가를 회복하는 것이 번영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에서 최대의 도전 과제가 되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과 서로 간의 잦은 회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경기의 미미한 반등을 끌어냈을 뿐이다."(216)


#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일본의 미키 다케오, 미국의 지미 카터


"사민당은 1932년 이래 줄곧 스웨덴을 통치해온 정당이었다. 대부분의 스웨덴 국민은 다른 정당이 나라의 조타기를 조종하는 걸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을 만큼 기나긴 기간이었다. 그러나 경제가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침체기로 접어들던 1976년 9월 19일 유권자들은 정권에서 사민당을 쓸어버렸다. 충격의 여파는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런던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스웨덴식 모델이 개조에 들어간다"고 흥분해서 보도했다."(220) "독일, 네덜란드 및 스칸디나비아의 노조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이 노조원의 급료를 올리고 나머지 경제 부문에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거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전투적 역사를 간직하고 고용주들이 제안한 변화라면 무엇이건 완강하게 반대하던) 영국의 노조 위원장들 사이에서 그런 말은 거의 이단이었다. 전국광산노조는 국영인 전국석탄청(National Coal Board)이 심지어 200년간 파내 제 역할을 다한 광산을 폐쇄하려는 것마저 반대했다."(223)


1978년 노동당 정부가 임금 인상 5퍼센트 안을 제시하자 "자동차 제조공, 화물차 기사, 철도 근무자, 간호사, 심지어 무덤을 파는 사람(gravedigger)까지 일터를 박차고 나갔다. 병원은 환자를 돌려보냈고, 닭은 사료 부족으로 죽어갔다. 1978~1979년의 어둡고 눈 많던 겨울은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 청소차들이 실어가길 거부한 탓에 런던 시민의 쓰레기가 레스터 광장에 수북이 쌓였던 겨울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거의 3000만 노동 일수(workday)가 파업으로 사라져버림에 따라 생산은 붕괴했다. 갈등이 마침내 타결됐을 때, 파업 노동자들은 정부의 기준선 5퍼센트보다 훨씬 높은 임금 인상을 쟁취했다. 그리고 1979년 3월, 단 한 표 차이로 의회는 캘러헌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선언했다." "노동당을 사양길로 밀어낸 것은 비단 경쟁적인 사상이 등장해서만은 아니었다. 노동당의 몰락은 무엇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번영을 가져온 경제 모델이 파탄난 결과였다."(225-7)


# 마거릿 대처 정부의 등장


"레이건이 보수 정당의 기수가 된 1976년 전통적 온건파이던 공화당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어떻게든 그를 당의 대통령 후보로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당시 경제는 1973~1975년의 불황에서 회복 중이었고 물가 상승률은 하락세였으며 아직은 미국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1979년 하반기에 채권 시장이 예측한 불황이 예정대로 닥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11퍼센트를 상회하는 담보 대출 이자율이 언젠가는 집을 장만할 수 있으리라는 젊은 세대의 희망을 꺾고 건설 현장의 철골 조립공과 자동차 공장의 공구 제작공에게 강제 해고 통지가 나붙자, 비로소 보수 정당이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왔다. 언어 구사와 그가 내뿜는 자신감에서, 레이건은 통치 불능의 세상이 됐다는 통념에 정면으로 배치됐다. 그는 강인한 이미지를 투사했고, 미국 정부가 적절히 관리하기만 하면 대외적으로 적들에 맞서고 대내적으로 번영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어떤 확신을 보여줬다."(230)


"대처주의는 신화를 창조한 이들의 주장처럼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경제가 산소에 굶주려 있던 대처의 임기 초반 2년간 영국은 1930년대 초 이래로 가장 혹독한 모순을 참아냈다. 성장을 부활시킨 것은 멀리 북해 연안의 새로운 유전에서 뽑아 올린 세수를 제외하면 통화 정책에 대한 새롭고 한층 절충적인 접근법이었다. 정부는 M3에 대한 숭배(통화 공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인플레이션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견해)가 실수였음을 시인하지 않았지만 점진적으로 통화주의를 완전히 포기했다. 1982년 하우는 잉글랜드 은행이 향후 M3, M1, 환율 및 기타 요인의 조합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의회에서 말했다." "대처는 이 나라의 경화증이 시대에 뒤떨어진 기관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두 가지가 그녀의 분노를 자극했다. 바로 노조와 국영 기업이었다. 자신의 통화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을 때 대처는 시야를 양쪽으로 돌렸다. 그들이 대체로 노동당 지지의 온상이라는 사실은 보너스였다."(245-6)


# M1 : 현금 + 당좌예금 예치금 / M2 : M1 + 보통예금 / M3 : M2 + 예금 증서 + 은행 외부의 통화 시장 계좌에 있는 일부 단기 자금


"대처의 승리는 노조원, 보통 때는 노동당을 뽑았지만 집을 사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는 열망을 가진 국민 덕분이었다. 이 계층 상승 가구들은 노동당의 무능함에 질려 전통과 단절하고 1979년 보수당을 찍긴 했지만, 그럼에도 노조의 가치를 믿고 있었다. 보수당이 권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이들 유권자의 계층에 대한 충성심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대처는 기나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동당 유권자를 적대시하지 않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출발점은 노조를 공격하거나 영국철강을 매각하는 것이 아닌, 국민이 자신의 집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1979년 정부는 '공영 주택(council housing)'으로 알려진, 지역 당국이 소유한 주택의 세입자에게 시장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개별 주택을 구입할 권리를 승인하는 법안을 도입했다. 10가구당 1가구가 공공 주택에 살았으므로 이는 대중을 위한 민영화였다." "'매입권(Right to buy)'으로 알려진 이것은 노동당의 핵심 선거 구민을 겨냥했다."(250-1)


"1979~1981년까지 초기의 통화주의 실험은 어느모로 보나 재난이었다. 1981년의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 이후 서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경제가 커지면서 상황이 호전됐지만, 아직 활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플레이션은 국제 표준으로는 여전히 높았다. 1979~1989년 소비자 물가는 연간 7.5퍼센트 비율로 상승했는데, 이는 이탈리아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주요 경제국보다 높은 수치였다. 영국의 공장들이 대처가 처음 다우닝가 10번지로 이사했을 때만큼 많은 생산량을 기록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9년이 지난 1988년 겨울이 되어서였다. 대처가 재임 말기에 영국 경제의 성장을 부활시켰다고 설명하는 것도 역시 맞지 않다. 노동 생산성은 11년 재임 기간 동안 과거 10년 동안보다도 더디게 증가했다. 수년간의 형편없는 경제 성과에 이어 1980년대 하반기에는 몇 년간 강력한 성장이 있긴 했지만, 보수당의 정책 전환이 영국 경제를 아주 건강하게 되돌려놨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옳지 않다."(257-8)


"공산당 지지자로부터 표를 끌어오는 동시에 중도파 유권자를 지스카르 연합에서 분리시키는 데 맞춰진 프랑스 사회당의 1981년 선거 운동 공약은 상당히 정통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따랐다. 이를테면 중공업의 국영화, 부유세 신설, 15만 개의 정부 일자리 창출, 대규모 공공사업 프로그램, 최저 임금 인상, 전 국민을 위한 유급 휴가 5주, 그리고 유자녀 가구의 보조금 인상이 그것이다." "미테랑 표의 4분의 1 가량을 차지하고 그의 각료 중 4개 장관직을 확보한 공산당은 사회당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부가 연금, 가족 수당 및 주택 수당을 늘리고 건설 프로젝트의 자금을 대기 위해 돈을 빌림에 따라 공공 지출은 1982년 27퍼센트나 부쩍 뛰었다. 그런 자극이 경제의 급성장을 불러오기는 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1인당 소득은 1.7퍼센트 증가했다. 그러나 환호성을 지르는 신문 헤드라인 아래 1982년의 경제 지표는 대부분 마이너스였다."(268-9)


"아낌없는 적자 지출이 유발한 경제의 급성장은 1982년 하반기 들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고용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나쁜 소식만 접한 사회당은 수사법을 한풀 누그러뜨려 기업가를 노동자의 착취자 대신 일자리 창출자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장관들은 인상된 세금과 사회 보장 부담금이 수익을 압박하고 투자를 감소시키고 있음을 지적한 주요 기업 임원들과의 소통을 조용히 재개했다."(273) "신성하게 여기던 사회주의 사상이 더 이상 자유 시장 사상을 대체할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국영 기업이 아닌 민간 부문에서 경제 회복을 꾀하는 새로운 버전의 사회주의를 창조해야 할 터였다. 경쟁을 장려하고, 규제 해제를 단행하고, 기업이 수익을 내도록 지원하고, 경제생활에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 모두가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는 새로운 사회주의 공식의 일부였다."(278-9)


"(레이건 정부에서 영향력 있는 경제 고문 집단이자) 종교적 열정과 자유의지론적 광신이 조합된 공급 중시 학자들은 1973년 이래로 미국을 괴롭히는 경제적 슬럼프가 정부 대책의 결과라고 믿었다. 정부가 국민이 더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소득을 증대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풍요롭다고 느끼게끔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경제 정책은 소비자 수요를 늘리려 애쓸 게 아니라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는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발명가, 사업가 및 투자자─다른 말로 하면, 경제의 공급 측면을 제공하는 사람들─를 장려해야 한다는 게 공급중시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공급만이 수요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역설했다. 공급을 확대해야만 경제의 산출량이 늘어나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급 중시 사상은 경제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하나는 정부가 특히 사회 복지 프로그램에 돈을 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293)


"공급 중시 경제학은 교수가 아닌 논객들의 창조물이었다." "경제학자 아서 래퍼가 워싱턴의 한 레스토랑 냅킨에 처음 그렸다고 전해지는 일명 '래퍼 곡선(Laffer Curve)'에 대해서도 실증적 뒷받침은 없었다. 래퍼 곡선은 세율을 얼마나 낮춰야 경제 활동을 많이 자극해 정부의 세수를 증대할 정도가 될 수 있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래퍼의 이론은 추상적 명제였으므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세율이 너무 높아지면 사람들이 더 이상 많은 소득을 벌려는 수고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며, 바로 그 시점에서 세금 수령액은 하락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했다. 그러나 래퍼의 스케치는 그 시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고, 공급 중시 진영의 어느 누구도 기꺼이 이를 추측해보려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증거가 있건 없건 세금 인하가 경제를 활성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295-6)


"미국에 투자한 외국인에게는 특히나 즐거운 시절이었다. 1983~1986년까지 미국 정부는 경제 규모 대비 국민소득의 평균 5퍼센트 연간 적자를 발표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즉각적 여파 이래 단연 최고치였다. 정부의 막대한 대출 수요는 인플레이션 폭락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잣대로 봤을 때 높은 금리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그 높은 금리가 해외로부터 전례 없는 액수의 돈을 끌어들였다." "투자자들은 달러의 상승세가 다른 통화로 환산했을 때 그들의 재산을 불려준 바로 그 시기에 미국의 주식과 채권 시장까지 호황을 누리면서 두 가지 방식으로 번창했다. 그러나 미국의 제조업체는 훨씬 더 힘든 상황에 봉착했다." "수입품을 더욱 저렴하게 만든 달러의 강세 덕분에 미국에서 수입하는 제품의 가치는 1981~1986년 40퍼센트 상승한 반면, 미국의 수출품 가치는 하락했다. 공업 도시는 일자리가 없어지고 소득이 떨어지면서 황폐해갔다."(302-3)


"1992년 연준의 경제학자들은 레이건 시대가 소수에게는 많이, 그러나 다수에게는 거의 아무런 혜택도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논평했다." "레이건의 경제학자들은 투자자가 소득을 더 늘리도록 허용하면 경제를 현대화하고 생산성을 자극할 새로운 투자를 유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공급 중시 경제학은 실패작으로 판명났다." "이렇게 실망스러운 상황이 된 하나의 원인은 그레타 크리프너가 '금융화(financialization)'라고 지칭한 것이었다. 금융 규제 완화와 고금리의 조합은 급속히 팽창하는 신용 시장에서 기업들이 돈 놓고 돈 먹기에 주력하는 것을 온당하게 만들었다. 그런 전환은 "비금융 기업들이 공장의 장기적인 설비 투자로부터 자본을 빼내 금융 투자로 자원을 돌리는 형태를 취했다." 이런 추세는 일찍이 레이건이 지명한 산업경쟁력위원회가 금융 자산에 대한 투자 수익이 제조업 자산에 대한 수익보다 높다는 것을 관찰한 1983년 익히 알려졌고, 그 10년 동안 더욱 확연해졌다."(306-7)


"1970년대 제3세계의 폭발적 성장은 고든 리처드슨과 아서 번스 같은 중앙은행 총재들에게 그토록 심려를 끼치던 오일 달러가 부채질한 결과였다." "제3세계의 대출 수요는 어마어마했다. 은행장들은 베풀 수 있어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그 돈이 개발도상국에서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 공산주의 사상 확산에 대한 방어벽을 구축하길 바란 정부는 은행장들을 재촉했다."(312) "차용국 중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국고를 돼지 저금통처럼 다루면서 조사는 고사하고 의회나 언론의 비판조차 절대 용납하지 않는 독재자들이 다스렸다. 인상적인 경제 통계─1973~1980년 개발도상국의 생산량은 연간 4.6퍼센트의 높은 비율로 성장했다─로 인해 외환 대출 대부분이 노동자의 생산성을 늘리거나 소작농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는 거의, 아니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겉보기에만 번드르르한 프로젝트에 투입됐다는 사실은 가려졌다."(315)


"파티는 1980년대 초 갑자기 잔인하게 끝났다. 1970년대 말 내내 인플레이션이 치솟으면서 런던과 뉴욕의 은행은 고정 금리 대출을 중단하고 변동 금리 대출로 전환해 이자율이 금융 시장 상황에 따라 변했다. 연준의 새로운 통화 원칙이 금리를 밀어 올린─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1년짜리 채권에 대한 총수익은 1978년 8퍼센트에서 1981년 17퍼센트까지 치솟았다─1979년 10월 이후 차용국들의 이자 지급액 역시 올라갔다."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투자가 목적이던 이 도피 자금은 대부분 신용을 연장해준 바로 그 부자 나라 은행으로 다시 들어갔고, 차용국 정부들은 자국에 아무런 경제적 혜택도 가져다주지 않은 대출의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1981년 달러 가치가 다른 통화에 대비해 상승하기 시작하자, 그 압박은 훨씬 더 강해졌다. 차용국들은 단지 예전과 똑같은 액수의 달러를 벌기 위해 더 많은 커피, 밀, 야자유를 수출해야 했기 때문이다."(316)


# 멕시코 모라토리엄 선언과 금융 위기의 전염


"채무 위기는 단편적 해결책으로는 불가능했다. 은행이건 차용국이건 도망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은행이건 차용국이건 파산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노릇이고, 그것이 잠재적으로는 서유럽과 북미 그리고 일본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320) "IMF의 대출에는 조건이 붙었다. IMF는 차관을 요망하는 나라에 1센트라도 넘겨주기 전에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개발할 전문가팀을 파견했다. IMF의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정부는 돈을 받지 못했다. 그런 다음에도 대출금을 일정 비율로 나누어 지급하는─분할 발행이라고 알려진─방식으로 넘겼으므로, 만일 차용국이 약속한 개혁을 시행하지 않으면 어느 시점에서든 현금의 흐름이 끊길 수 있었다. 스스로를 정치에는 관심 없는 기술 관료로 여기는 경제학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긴 했지만 IMF는 매우 정치적인 조직이었고, 차관을 희망하는 나라에 그들이 부과한 조건은 미국 및 유럽 관료의 시각을 반영했다. 관례상 총재는 유럽인이었다."(322-3)


"(레이건 행정부의) 시각에서 봤을 때 채무 위기의 기저에 있는 원인은 은행의 현명하지 못한 대출이나 소비재 하락 혹은 1979년 이후 급등한 금리가 아니라 채무국 자체의 행동이었다. 이제 워싱턴은 이런 나라들의 정부가 지나치게 크고 지나치게 간섭하는 통에 민간의 자율성을 짓누르고 번영을 망친다고 천명했다." "IMF와 세계은행은 자유 시장 정책이 마침내 채무국을 성장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새로운 통념을 널리 퍼뜨렸고, 과거 상향하달식 계획과 정부 지시에 의한 투자를 선호하던 자신들의 입장을 단숨에 뒤집었다. 채무국의 국민 다수도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고, 프레비시가 오래도록 주창해온─수입 장벽으로 뒷받침된─정부 주도 산업화가 지속 가능한 번영을 가져오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이 새로운 시장 지향적 사고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알려졌으며, 전문가들은 이를 개발도상국이 자신들의 부채를 딛고 일어나도록 도와줄 원칙이 담긴 반半공식적 개요서라고 말했다."(328-9)


정치적으로 조율된 경기 부양책이 "수명을 다하고 나면, 한 경제의 장기적 성장 잠재력은 전적으로 생산성 증가에 의존한다. 1970년대 초 이후 모든 경제 부국의 생산성 증가는 경제 정책과는 무관한 이유로 인해 예전보다 현저하게 느려졌다. 전후 시대에 더욱 생산적인 노동으로 옮아갔던 거대한 저활용 노동 인력을 다시 이용할 수는 없었다. 소농과 소작인은 오래전에 도시로 이주했고, 예전에는 무직이던 여성 노동 인력의 유입도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건설과 항구의 현대화처럼 거의 즉각적으로 생산성 증대를 끌어낼 수 있는 유형의 공공 부문 지출도 시행됐다. 노동력에 유입되는 청년 인구는 부모 세대보다 학력이 높긴 했지만 읽고 쓰는 능력이 경제 부국에서 거의 보편화한 이상 평준화 교육으로 생산성이 급증하던 시대는 이제 과거가 되었다. 미래의 복리 증진은 얼마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338-9)


"전자통신과 화물 운송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정보를 여기저기로 전달할 수 있는 컴퓨터가 발전함에 따라 대규모 조직을 적은 부분으로 쪼개 각각을 노동 수급, 공항, 철도 노선, 정부 보조금 또는 그 밖의 매력적인 것을 활용하도록 배치하거나, 아니면 이제 원거리 관리가 한층 수월해진 회사에 특정 과제를 맡기는 것이 가능해졌다." "전출된 노동자는 자신이 수년간 쌓은 경험과 훈련이 다른 산업에서는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급료가 더 적은 일자리 아니면 실직이었다. 주요 사업체가 사라진 지역 사회는 소득과 세수의 출혈이 심했고, 공공 서비스와 생활 편의 시설 비용을 댈 재원이 없어졌으며, 많은 경우 장기적인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기업은 새로운 과학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사업의 구조 조정은 결코 고통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1980년대에 이러한 변화는 국경을 초월했고, 이것이 장차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의 출발점이었다."(341-2)


"서민 가구에는 소득 증가의 둔화가 생활 수준 향상의 둔화를 의미했다. 가족 규모가 작아져 확실히 소득은 과거보다 약간 더 늘어났고, 거의 모든 사람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물질적 발전의 혜택을 입었다. 스마트폰과 가정용 컴퓨터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물건이 됐다." "그러나 성장 약화가 사회 복지 제도의 재정적 실행 가능성을 낮추면서, 실업 수당은 줄고 연금은 동결 또는 한꺼번에 삭감되고 수업료는 올랐다. 분노를 달랠 한 가지 수단은 신용 거래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생에서 더 이상 현찰로 사치품을 구입할 여유가 없던 사람들이 그걸 향유하기 위해 더욱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다. 2008년 미국과 유럽에서 그러한 실험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무엇보다 정체된 생활 수준은 정치적 주류의 변방에서 싹튼 반체제 운동의 부상으로 전개됐고, 이것이 불만을 품은 다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냈다."(344-6)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조치는 노동을 위해 자본의 힘에 제한을 둔 것으로 종종 설명되어왔다. 그것은 실상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었다. 전후의 협상은 노동자만큼이나 그들의 고용주에게도 굴러 들어온 복이었다. 당대의 가장 과격한 반자본주의자들조차 고용주가 안정적 일자리와 임금 인상을 제공할 경우에만 관대한 사회 수당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쟁은 수익을 부진하게 만들고 회사를 폐업으로 몰아감으로써 고용주가 그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전후의 사회 계약을 생성하는 데는 경제 전반에 걸쳐 경쟁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일부 산업 국가에서 국가 독점 기업을 강제하고, 회사의 운영 시간과 사업장 위치 그리고 허가와 다른 회사의 가격을 철저히 규제하고, 정부에 여신 통제와 수입 제한 및 투자 장벽을 통한 시장 지배권을 주는 것 등이 그 방법이었다." "이런 조치는 많은 사람을 더 잘 살게 만들었다─잠시 동안 말이다."(346-7)


경제 기적은 정말로 일어난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경제 성장을 누린 국가들 "역시 결국에는 궤도에서 이탈했고, 그들의 정치 지도자는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 "1970년대 위기의 후유증은 수십 년간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일본의 가계 재정을 파탄나게 만든 거품 경제. 1980~1994년에 미국에서 있었던 수천 건의 은행 도산. 그리고 2008년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부적격 대출자를 대상으로 한 과도한 대출로 더욱 불거지면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높은 실업을 초래하고 유럽연합 자체의 생존을 위협했던 심각한 경기 침체. 이 모든 것의 기원은 경제를 생산성 증진이 허용하는 것 이상으로 더 빠르게 성장시키려던 정치적 노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다 헛수고였다. 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이를 잘 표현했다. "20세기의 3분기는 경제 발전의 황금기였다. 그 시대는 모든 합리적 기대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우리가 머지않아 그와 같은 시기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다."(3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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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의 탄생 돌베개 한국학총서 11
강명관 지음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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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열녀는 고려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 존재했던 것은 '절부'였다. 절부는 유일한 성적 대상자인 남편의 부재(주로 사망)시에 다시 결혼하지 않는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아내의 부재(주로 사망)시에 결혼하지 않는 남성인 '의부'義夫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 '수절'은 여성에게만 강요된 윤리가 아니었다. 아울러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고, 여성의 재가, 삼가가 얼마든지 허락되는 상황에서의 절부는 여성 자신의 선택이었지, 도덕적·법적 강제 사항이 아니었다. 여말선초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이후 한동안 효자·순손·절부·의부를 한 묶음으로 하는 표창을 계속하다가 <경국대전>에 와서 '의부'를 삭제함으로써 배우자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오로지 여성의 윤리로 강제하였다. 가부장제는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여성이 자신의 신체 일부 혹은 전체를 스스로 희생하게 하면서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을 실천한 여성이 곧 열녀였다."(46-7)


열녀담론의 주입은 고려가 망하기 불과 2년 전인 1390년 사대부 정권에 의해 주도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산기散騎 이상의 고급 관원의 처는 재가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판사 이하 6품 관원의 처는 남편이 죽은 지 3년 내에 재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산기 이상의 처가 개가했을 경우, 그것을 '절개를 잃은 것'(失節)과 동일하게 본다는 것이다. 즉 개가를 죽은 남편 이외의 남성과의 성적 교섭으로 보고 논죄한다는 것은,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요구하는 남성의 욕망을 국가권력과 제도를 통해 관철한 것이다." "여기서, 산기 이상 관리의 첩과 6품 이하의 처첩에게 수절은 권장 사항일 뿐이었다. 이를 약간 보완한 것이 정려법旌閭法인데, 정려는 해당인이 사는 마을 앞에 정문旌門을 세우는 것으로 명예 차원에서의 권장책이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순식간에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지만, 처벌과 장려라는 조선의 대여성對女性 정책의 골간을 이루는 것이었다."(49-50)


태종 6년 대사헌 허응은 "개가 금지령을 강력하게 실현하기 위해 세 번 결혼한 여자를 '자녀안'恣女案에 올리자고 제안했다. '자녀'는 고전의 내력을 갖는 말은 아니다. '자'恣는 곧 방종하다는 뜻을 가진 말로, 자녀는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을 말한다."(51-2) 자녀안이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사헌부는 자녀안의 작성을 사헌부의 전담 사항으로 하고, 또 삼가녀三嫁女의 자손에게 관료로서의 진출을 제한하자고 요청한다. 사헌부의 제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절하지 않은 여성의 자손에게 관료로서의 진출로를 제한한다는 발상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은 사헌부의 요청을 의정부에 회부하여 심의한 결과, 삼가녀의 자손은 사헌부·사간원과 같은 언관직言官職, 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병조의 벼슬을 할 수 없도록 결정하였다. 이 관직들은 관료로 출세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였던 바, 이 제안은 대단히 가혹한 처벌에 해당하였다."(54-5)


# 재가 여성이 낳은 자손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는 법은 성종 8년에 제정되었다.


"개가를 금지하는 법은 건국 이후 성종 을사년의 <경국대전>까지 약 1백년을 거치면서 서서히 완성되어 갔다. 하지만 그 법만으로 여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가 금지법과 함께 다른 법적 장치도 필요했다. 그것은 곧 여성의 활동 공간을 제한하여 특정한 인물 이외의 인물로부터 격리하며, 여성을 가정 내부로 유폐시키는 것이었다." "(태조 1년 대사헌) 남재의 요구는, 여성은 부모, 남자·여자 형제, 아버지의 형제, 어머니의 남자·여자 형제를 제외한 사람은 접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여성은 남편 이외의 일반 남성은커녕, 자신의 친형제, 부모의 친형제 외에는 6촌도 8촌도 친구도 만날 수 없다." "남재의 황당한 제안은 <경제육전>經濟六典 예전禮典에 정식 법령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집 바깥으로의 여성의 출입을 봉쇄하는 것이었던 바, 논의의 핵심은 여성의 사찰 출입을 막고, 비구승과의 접촉을 금지하는 것이었다."(65-6)


"금제禁制와 아울러 검토해야 할 것은 장려책이다. 앞에서 수절하는 여성을 위해 설치한 수신전守信田이 대표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세조 때 폐지되고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장려책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국가-남성은 개가 금지, 여성의 유폐와 아울러, 수절을 실천한 여성을 표창, 장려하여 여성의 성적 종속성의 실천을 적극 유도했다." "열행에 대한 장려책은 열녀에 대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가 윤리의 실천에 대한 장려책의 하나였다. 유가 윤리의 실천이란 다름 아닌 충·효·열이 중심이 되는 바, 충신·효자·열녀가 역시 중심이고, 여기에 순손, 효부 그리고 형제 간의 우애 등도 포함되었다. 여말선초 사대부들의 유가 윤리의 실천에 대한 장려책은 정려旌閭만이 아니라, 관직을 주는 상직賞職, 요역을 면제해 주는 복호復戶, 음식물을 내려주는 식물食物 하사를 포함하여 모두 네 종류가 있었으며, 이 중에서 정려가 가장 높은 단계의 표창이었다."(76) 


# 정려 : 충신·효자·열녀가 사는 마을에 붉은 홍살문인 정문을 세워 그 인물의 존재를 알리고 명예를 높이는 방법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고금열녀전>과 <후한서>, <진서>를 비롯한 중국 단대사의 열녀전을 인용 자료로 삼았다." "편집자들은 선택과 배제, 생략이라는 방법을 통해 여성-어머니, 여성-딸(자식)의 관계와 여성과 지성, 학문 등과의 관계, 여성의 활동성, 적극성을 모두 제거했다. 인용된 텍스트들은 새로 편집되어 배치됨으로써 의미가 집중·강화되고,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오로지 남편에 대한 여성의 관계만이 성립했던 바, 그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이라는 단일한 성격으로 집중되었다. 편집자들은, 남편에 대한 여성의 관계와 성적 종속성을, 고대 하夏·은殷·주周로부터 수천 년을 넘어 당대까지, 즉 명明과 조선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초시간적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151-2) "<삼강행실도>의 편자는 (남편 이외의 성적 관계는 모두) '오염'이라는 관념을 주입하여 여성의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강렬한 수치심을 여성의 의식 속에 심고자 했다."(161)


"<삼강행실도> 열녀편의 주제는 명백하다. 남성은 원래 자신의 성적 대상자, 곧 아내를 제외한 여성에 대해서는 재취再娶 또는 축첩蓄妾의 주체, 또 강간의 주체(심리적인 것까지 포함해서)이지만, 자신의 공인된 성적 대상자(주로 아내)에 대해서는 그 여성이 자신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지킬 것을 강력하게 희망한다."(161) "(열녀편의) 거의 모든 이야기는 "전쟁, 군도 등 비상 상황의 발생 → 강간 시도 → 저항 → 죽음"이라는 동일한 서사적 전개를 갖는다. 이 중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서술되는 부분은 부녀자의 강렬한 저항 부분이다. 전쟁 등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여성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열행이 될 수는 없다. 즉 강간을 당한 뒤 살아남는 것은 물론이고 강간 당한 뒤 살해될 경우 그것은 열행이 될 수 없다. 강간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의 격렬한 저항, 즉 강간에 대한 강렬한 거부의 의지와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열행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그 의지와 행동이 바로 열행의 핵심이다."(169)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성을 여성에게 자발적으로 내면화시키고자 했던 조선 초 사대부의 인식을 규정한 것은 다름 아닌 <소학>이었다. 남성의 생애가 나이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는 것과 달리, <소학>에 나오는 여성의 일생은 "7세에 남성과 분리된 뒤, 10세에 규방에 유폐되고, 16세에 성인식(계례), 20세(또는 23세)에 혼례를 치른다. 남성은 20세 이후 학문 연마와 벼슬 등의 지적·사회적 활동이 있으나, 여성의 일생은 결혼으로 끝이다. 남성의 일생이 다채로운 반면, 여성의 일생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이 단순성은, 여성이 가정 내에 유폐되어 있으며, 여성의 일이 가사노동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직물의 직조織造, 음식의 조리(특히 제사 음식)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소학>의 여성 노동에 대한 규정은 조선 시대 여성의 성 역할을 규정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직조와 조리가 여성의 일이라는 담론은, 여성의 의식을 완벽하게 규정했던 것이니, 이 관념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102)


# <소학>이 규정하는 부부지별夫婦之別

1. 삼종지도三從之道 : 집에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 감히 스스로 하는 일이 없다.

2. 성적 종속성 : 한 번 혼례를 올리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편이 죽어도 시집가지 않는다(一與之齊, 終身不改, 故夫死不嫁).

3. 칠거지악七去之惡 :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자식이 없거나, 음란하거나, 질투하거나, 나쁜 질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하면 내쫓긴다.


"<소학>은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인간의 신체를 규율하는 텍스트다. 신체의 통제를 요구하는 텍스트가 쉽게 수용될 리 만무했다. 따라서 이 책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 (성종대에)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과거 응시 과정에 집어넣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200) 도학을 실천으로 옮기고자 하는 운동에 앞장섰던 사림의 주요 인물인 "김굉필은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학> 외의 다른 책을 읽었다고 할 정도로 <소학>에 몰입하였다." "<소학>은 이제 단순히 보기 위해 암송하는 책이 아니라, 성종 연간 '소학계'의 출현에서 보듯 남성-양반에게 내면화되어 실천되기 시작했다. <소학>의 실천은 상민과 구별되고, 여성과 구별되는 남성-양반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203-4) "조광조는 <소학>의 실천에 골몰했던 '소학동자' 김굉필의 제자였다. 그는 김굉필보다 더 철저한 <소학>의 실천주의자였다. 조광조의 신체는 이성과 율법, 곧 <소학>으로 완벽하게 제어된 것이었다."(205)


"<소학>은 사대부의 신체언어 곧 양반다움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남성-양반들은 여성과 구분되고, 비사대부층과 결정적으로 구분되었다. <소학>의 내면화는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어 신체언어 속에 녹아 들어갔으며, <소학>의 정당성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성은 대기大氣처럼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남성은 <소학>에 의해 먼저 의식화되었다. 자기 의식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남성은 <소학>의 외화를 생각하고 그 외화에 의해 내부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뒤, 자기 이익 즉 남성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그 모순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여성의 의식화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남성/여성의 구별이 아닌 차별이 세계의 본모습이라는 것, 그것이 진리라는 것, 동시에 그것이 차별이 아닌 단지 분별일 뿐이라는 사고에 스스로 의식화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스스로 중세의 족쇄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213)


"선조는 1592년(선조 25) 4월 30일 서울을 떠나 이듬해 10월 1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입성 하루 전 비변사가 왕이 도성에 들어가는 것을 사방에 알리기를 청하면서, 충신·효자·열녀의 포상을 건의한 일은, 전쟁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한다는 차원 이상의 행위였다. 선조는 서울에서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을 포상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면서, 예조에서 오부에 알려 충신·효자·열녀의 사례를 찾아내 보고하고, 정표하게 하라고 조급하다 싶을 정도로 급히 명령을 내린다. "난리를 겪은 후 죽은 서울 백성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남은 백성의 절반이 소복을 입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도성에 들어오는 날 서울 백성이 길을 가득 메웠건만 상복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필시 난리 후에 윤리가 무너져 그런 것이다. 오부에서 규찰하게 하라." 이것은 윤리의 회복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성-양반의 지배 체제의 공고화, 곧 가부장적 질서를 세우기 위한 필수적인 과업이었다."(293-4)


1615년(광해 7) <동국신속삼강행실도>라는 거질의 윤리서가 국가적 에너지를 동원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임진왜란은 정절, 곧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수호하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잔혹성을 스스로 실천한 강렬한 여성의 이미지, '열'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창출했던 것이다. 이제 열녀는 '列女'가 아니라 '烈女'가 되었다." "이 책은 잔혹한 죽음의 선택에 대한 찬미의 책이다. 여기에 실린 여성들에게는 예외 없이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전쟁 후 나라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정문이 생겼고, 그 정문은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실천하기 위해 신체 전체를 바친 여성들의 이야기를 유포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간단한 구조의 동일한 이야기였으며, 정문의 존재를 인지하다는 것은 곧 그 이야기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해서 열녀 이데올로기는 전쟁을 계기로 하여 사회 전체로 퍼졌고, 궁극적으로 여성들의 대뇌에 설치되었다."(330) 


병자호란 이후 청으로 잡혀간 "대규모의 피로자被虜者는 희한한 문제를 제기했다. 즉 부녀자가 속환되었을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였다." "최명길은 상식적인 결론을 내린다. "예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때에 따라 마땅함을 달리 하는 것으로서 한 가지 예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최명길의 또 다른 이유는 이렇다. 이혼해도 된다는 명을 내리게 되면, 피로된 아내의 속환을 원하는 사람은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허다한 여성을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해서 결국 그 원망이 화기를 해치게 될 것이다. 최명길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최명길의 견해가 현실적으로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이혼시켜 달라는) 장유의 요청은 사대부들이 내심 찜찜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부분을 일깨웠다. 오염되었을지도 모를 아내와 며느리를 그대로 두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339-40)


"인조의 결정으로 모든 사태가 진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효종 즉위년 11월 21일, 사헌부는 "풍속을 손상시킨 것으로 이보다 심한 것은 없다"면서 최명길을 비난하고, 다시 "절개를 잃은 자를 자기 짝으로 삼는 것도 절개를 잃는 것"이라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조정의 결정은 정자의 가르침과 괴리되고 예를 심히 그르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헌부는 사대부의 가풍家風이 날로 무너져 규문閨門에 부끄러운 일이 많으며, 가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일도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법, 인조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법 때문에 야기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헌부는 속환된 아내와 결혼을 유지하라는 법을 시행하지 말고 남편의 재혼을 허락할 것을 요청했다. 효종은 아버지 인조의 결정을 뒤집어 사헌부의 요청을 따랐다." "효종의 번복으로 인해 실제 이혼 사례가 급증했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속환된 여성의 자식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343-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상속제에도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조선 전기에 토지보다 더 중요한 상속 대상이었던 노비가 전쟁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도망하여 그 수가 줄어들자, 사족의 노비 소유 체제가 근본적으로 동요되고, 노비 수의 절대 감소는 곧 재산의 영세화를 초래했다. 여기에 두 차례의 대규모 전란 이후 국가 전체의 생산력 수준이 하락하여 사족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가문과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경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재산을 균분할 경우 재산이 영세화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신분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노비보다 중요하게 된 토지의 분산을 막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은 딸을 상속에서 배제하고 토지를 장자에게 집중시켜 상속하는 장자우대 상속제로 귀결되었는데, 그 변화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것이 제사였다. 즉 봉사용奉祀用 재산을 안정적으로 마련한다는 것이 장자우대 상속제의 이유였다."(348-9)


조선 시대 열녀의 열행을 관통하는 성적 종속성은 국가-남성의 이익을 위해 고안되었고, "이것은 여성의 행위가 여성 주체가 아닌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타자의 사유에 의해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은 가부장제 속에서 드디어 남성이 되었다. 스스로 가부장제를 실천했던 바, 그 명확한 실례가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다. 시어머니는 가부장화한 여성이다. 여성이 완벽하게 가부장화하였을 때 더 이상의 가부장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흔히 중세 사회에서의 주체적 여성이라고 해석되는 경우, 그것은 남성과 대립하는 여성이 아니며, 가부장제의 모순을 꿰뚫어본 여성 주체도 아니다. 그저 가부장제화한 여성, 곧 그 의식의 주체가 여성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적인 여성을 말한다. 그 주체는 타자에 의해 왜곡된 주체, 곧 타자에 의해 오염된 주체였다." "이 오염은 조선의 가부장제가 가장 완벽하게 작동할 수 있는 원리였다."(5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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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역사 용어로서의 선비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로 무장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최고 엘리트 집단, 곧 사대부를 칭하는 의미로 좁혀야 논의의 의미가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선비란 곧 성리학적 명분의 소산이자 바로 그 가치를 실현한 구현체具現體이므로, 조선 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한 성리학의 가치 체계와 별도로 선비의 조건이나 가치만 따로 분리해 내어 논할 수는 없다."(47-8) "선비의 삶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정치 행위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었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글을 익혀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백성의 스승이 되고 백성을 교화敎化하는 것을 뜻했다. 관직에 있는 자는 곧 정치를 통한 백성의 교화자였다. 비록 벼슬을 하지 않더라도, 선비라면 깊은 의미의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관직의 유무와 상관없이 청의淸議라 하여 명분과 원칙을 지키며 정치에 개입해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그것을 선비의 의무로 여기기까지 했다."(51-2)


"흔히 가난한 선비가 선비의 진정한 기질을 잘 간직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실재했던 선비는 대개 부유한 지주거나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재산가들이었다. 특히 특정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경제 활동에서 필수불가별한 두 핵심인 토지(생산수단)와 노비(노동력)를 소유함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재화를 쌓는 자들이었다."(66)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 선비라 할 수 있는 이황도 소유 노비가 367명이었으며, 예안·봉화·영천·의령·풍산 등지에 걸쳐 논은 1,166마지기, 밭은 1,787마지기라는 엄청난 규모의 전답을 보유했다. 마지기는 면적 자체보다는 수확량에 따른 기준이라 그 넓이를 일률적으로 가름할 수는 없으나, 논 한 마지기가 대략 150~300평, 밭 한 마지기는 대략 100~400평 정도다. 그렇다면 최소의 면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이황은 논과 밭 각각 17만 평 이상, 도합 34만 평 이상을 보유한 셈이다."(68)


"여러 차례 왕명을 받고도 응하지 않을 뿐더러 설사 응했다가도 매우 사소한 핑계를 대고 마음대로 떠나버리는 선비들의 행동에 대해 (명종대 영의정) 이준경이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이이는 이준경이 원칙만 고집하여 유자儒者를 대우하지 않고 교만하게 굴었다면서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비난했다. 이준경이 죽음에 임박해 붕당朋黨의 조짐을 우려하며 올린 유차遺箚 내용에 대해서도 이이는 이준경을 비난했다." "조선의 선비(사대부)들은 각기 왕을 정점으로 한 국가 조직에 기초해 권력 구조를 형성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붕당의 리더 또는 자신의 정치적·학문적 후원자에게 더 충성을 바쳤다." "왕에 대한 충성이 관념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왕을 정점으로 한 관료 조직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뜻하며, 이는 곧 조선의 정치가 국가(왕조)의 보편적인 이익보다는 붕당 구성원들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음을 뜻한다."(76-7)


"이상적인 선비의 모습과 현실에 나타난 선비의 모습이 도저히 일치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선비의 덕목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왠만한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지고의 상태를 덕목으로 설정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결과일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선비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며 평생을 공부한 내용, 곧 유교 이론에 혹시라도 어떤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다. 이론은 좋으나 그것이 현실에서는 거의 들어맞지 않는 공론空論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88) 대표적인 예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이론은 그것이 실제로 들어맞은 사례를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오히려 수신·제가 과정 없이 치국·평천하 한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중국 대륙을 침입해 왕조를 건설한 수많은 북방계 정복자들은 유교적 수신·제가 덕목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91)


"유교 정치의 꽃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덕치德治에 따른 왕도 정치다. 군왕의 수신을 바탕으로 한 덕치 이론은 결국 교화를 그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 덕치와 교화 이론 또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수신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삶이라는 것이 개인윤리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이미 고도의 국가 체제를 갖춘 사회의 윤리로는 부적절한 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의 모범적인 행동을 통해 사회를 교화한다는 목표는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현실성이 거의 없다." "서주의 명맥을 이은 동주 사회의 정치적 혼란과 그 몰락 과정을 문명사 차원에서 보면,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한 왕국이 철기 문명의 급속한 보급에 따른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해체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가에서 말한 각자의 본분은 바로 서주 사회의 위계질서에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유가에서 제시한 해결책은 주나라의 통치질서를 되돌리려 한 시대착오적인 관념철학에 지나지 않았다."(96-7)


"조선의 왕권은 신하들보다 대체로 약했는데도, 정작 실제 정치 현장에서는 누릴 수 있는 실제 권력보다 더 큰 의무를 요구받았다. 모든 면에서 수신의 모범이 되어야 했고,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그 책임도 고스란히 국왕에게 돌아왔다. 평상시에는 권리보다 더 무거운 의무를 감당해야 했고, 비상시에는 모든 책임을 혼자 져야 했던 것이 바로 조선 국왕의 위상이었다."(115) "조선시대에 왕의 자격 요건과 행동에 대해 열변을 토한 선비들의 논설과 간쟁은 수없이 많아도,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신하들의 도리, 곧 신도臣道에 대해서 비슷한 비중으로 열변을 토한 논설은 별로 없다." "조선의 선비들이 국왕을 '우습게' 여긴 이면에는 그들의 사대적事大的·모화적慕華的 문명관도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의 왕은 중국에 있는 천자라는 대리인을 통해 그 정통성과 정당성을 인정받았기에 조선의 사대부들이 충성을 바칠 최종 대상은 자기 나라 왕이 아니라 중국(명)의 천자였다."(117-8)


"조선은 인간관계의 위계질서가 엄정한 나라였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그런 사회였다. 유교가 그런 수직적 위계를 정당화시켜 주었으며, 조선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중국을 훨씬 능가했다."(133) "조선 가족 관련 규정의 근간은 주희와 그 제자들이 편집한 『가례家禮』였다." "『가례』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가족 관련 의례와 가족 내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는 데 국가가 인정한 최고의 '메뉴얼'로 자리 잡았다. 『가례』에 비록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런 원칙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처가 아닌 첩은 아예 가족 구성원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으므로, 굳이 명시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면서도, 처와 첩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기도 한 사실은 조선이 비록 법률적으로는 일부일처제 사회였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일부다처제 사회이기도 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법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은 현실은 필연적으로 서얼에 대한 차별을 불렀다."(136)


"조선을 건국한 주체 세력은 무신정권과 몽골 간섭하에서 기형적으로 늘어난 노비인구를 본래 상태로 줄이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분제를 통해 더욱 공고히 하는 정책을 취했다." "종모를 근간으로 하는 종모종부 원칙(부모 중 한 명이라도 노비이면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된다)은 주자학에서 강조한 부계 혈통 계승 원칙에 위배되는 제도였다. 그렇지만 종부법을 따를 경우에는 노비의 수가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노비 소유주들은 종부법에 크게 반발했다. 또한 여자 노비의 성관계가 일정하지 않은 탓에, 아이를 출산해도 그 아비가 누구인지 정확히 가리기 어렵다는 핑계를 내세워 종모법을 선호했다. 그런데 남자 노비가 상민 여자와 결혼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종부법을 적용해 그 자식을 노비로 삼는 이율배반적 원칙을 법으로 규정함으로써, 재산 증식 차원에서 노비 수를 무한정 늘릴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143-4)


"양반층은 선비를 우대하는 국가정책에 편승해, 건국 초기부터 최대한 군역에서 빠지고 있었다. 유학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다는 뜻의 업유業儒를 자칭하거나, 향교의 교생校生이 되어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방법 등을 통해 얼마든지 군역을 피할 수 있었다." "이른바 사림이 권력을 잡았다는 16세기 후반에도 군역제도와 관련해 아무런 개혁조치가 없었던 이유 또한 이런 풍조 때문이었다."(175) 조선 후기, 오랑캐의 보호를 받는 소중화라는 모순된 "이중 구조 안에서 200년이 넘도록 안주한 결과, 선비들은 '청질서'라는 '동아시아 수족관'의 운영 시스템이 작동을 멈출 경우에 스스로 생존하기조차 벅찬 국제 현실을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은둔의 나라' 속으로 끝없이 침잠해 들어갔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발생한 청일전쟁(1894~95년)에서 청이 패하고 물러갔을 때, 적자생존의 논리가 국제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던 당시 국제 무대에서 조선이 스스로 살아남을 길은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179-80)


"조선 선비들의 당쟁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조선의 역사가 유교에서 추구한 이상적인 정치를 향해 나아갔다는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호 견제와 공존을 원칙으로 하는 복수군자당 운운하는 붕당론이 이이가 제시한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 등을 통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런 붕당론은 조선의 정치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191) 오히려 "유교의 제일 덕목인 충성의 대상이 점차 국왕에서 붕당의 보스로 바뀌고, 군신유의 덕목이 추상적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편만했다."(193) 16세기 이후 심화되는 토지 집중화와 국방력 약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쟁은 갈수록 심해져, 결국에는 한 줌의 벌열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19세기 세도 정치에 이르러서야 중앙 조정의 당쟁이 표면적으로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는 당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소멸됐기 때문이 아니라, 80퍼센트 이상의 사대부 집안이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탓에 중앙에서 자웅을 겨룰 붕당들조차 없었기 때문이다."(184-5)


조선의 국가 경제가 자급자족 형태로 굳어진 이유는 "상행위를 통한 부의 창출을 원천적으로 비하한 유교 이념을 무조건 신봉한 위정자들의 인식도 큰 요인이었다."(196) "연행사와 통신사를 통해 청나라와 일본의 엄청난 부에 대한 소식이 조선에 꾸준히 전해졌지만 조정은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조정만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재야 지식인들, 곧 선비들도 이런 문제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늘이 내려준 제한된 물자를 분배하는 데에만 관심을 둔 유교적 경제관 때문이자, 청나라와 일본을 오랑캐로 취급한 철저한 화이華夷사상,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강화된 지나친 쇄국정책, 또한 그 결과로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무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조선만이 중화 문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자기기만적 이데올로기의 득세 현상, 상공업 발달과 해외무역을 추진하기에는 너무 준비가 안 된 국내의 척박한 산업 인프라 실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었다."(201)


"자본주의 맹아론을 지지한 연구들이 제시한 대표적인 증거로는 조선 후기(18세기)에 이르러 상업이 활발해진 점, 금난전권禁難廛權 폐지(1791년)와 같이 국가의 상업 통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점, 광산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임금노동자들이 등장한 점, 농촌에서도 고공雇工이라 하여 임금노동자들이 등장한 점, 상평통보와 같은 새로운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점, 광작廣作이 성행하면서 경영형 부농처럼 판매를 염두에 둔 농업형태가 등장한 점, 봉건적 토지소유제가 쇠퇴한 점, 전국에 걸쳐 장시가 활발해지면서 송상松商과 같은 대상인을 비롯해 자본의 축적에 따라 객주客主나 여각旅閣 등 새로운 상업 구조가 등장한 점 등을 꼽는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이유들로 조선 후기 사회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볼 수 있다면, 중국의 경우에는 송나라 때 이미 자본주의 단계에 사실상 진입했다고 봐야 하며, 일본도 이미 17세기에는 자본주의 체제로 깊숙이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202)


"조선은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전체 파이를 키울 생각을 못하고 주어진 농산물에만 주로 의지하다 보니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교에서 강조한 민생의 안정을 위해 세금을 올리지도 못하니, 국가재정은 만성 적자에 허덕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통 방법은 양입위출量入爲出, 곧 수입을 미리 헤아려 거기에 맞게 지출하는 것이었다. 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수도 있으나, 역시 파이를 키우려는 의지가 없이 분배에만 몰입한 방법일 뿐이었다. 그래도 양입위출에 기초한 대동법의 성립으로 백성들은 세금을 이전의 약 20퍼센트 정도만 내게 되어 좋았으나, 그 전체 과정은 거의 200년이 걸렸으며 이미 관행적으로 시행되던 것을 법적으로 보완해 추인한, 매우 느린 개혁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불에 타 무너진 채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기까지) 무려 275년이나 한양 도성 한복판에 남은 경복궁 터는 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궁핍상을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204-5)


"상장례와 제사제도는 가족의 범주와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와 직결되었는데, 가족 관련 유교화가 급속히 진행된 시기가 바로 17세기였다." "흥미롭게도, (가족 구성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 죽은 자들은 사후에도 죽음을 초월해 가족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죽은 자들은 제사라는 제도를 통해 항상 산자들과 교통했으며, 산 자들을 하나의 가족공동체로 묶어주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따라서 유교 사회 조선,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는 망자라 해도 여전히 현세의 가족 구성에서 지대한 위치를 점하고 큰 역할을 수행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가족관계는 주희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조상과 후손들은 같은 기氣로 구성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기는 소실되어 흩어지지만, 그 본체는 후손에게 보존된다. 만약 후손들이 조상에게 최고의 성의와 존경심을 표시하면, 제사를 지내는 동안 조상의 기를 불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망자와 피로 맺어진 혈육들만 제사를 지낼 수 있다."(222-3)


"조선 사회에서 지배 구조의 이론적 근거는 사회 전체를 수직적 관계로 조직한 충과 효였다. 더 나아가, 명나라가 조선의 군부君父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이런 지배 이념이 국내를 넘어 명나라와의 국제관계에까지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조선에게 명나라는 충의 대상(君)인 동시에 효의 대상(父)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군부(명나라)를 공격하는 원수(청나라) 앞에 나아가 항복한 것은 조선의 지배층인 왕과 신료들 스스로 충과 효라는 양대 가치를 동시에 범한 셈이었다."(212) "위정척사 선비들은 결코 조선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으려 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조선 그 자체로서의 조선이 아니라 중화(중국) 문명을 간직한 조선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는 중국으로부터 전수 받은 보편적 유교 전통의 수호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위정척사 선비들이 목숨을 던져 지키고자 한 '정正'은 중화문물을 계승한 조선이었다."(218)


"국권 상실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난 위정척사 선비들의 항일투쟁은 개화파들 중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나선 자가 거의 없는 사실과 아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 결과, 국권 상실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할 유학자 선비들이 졸지에 애국자로 변신했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타락한 유교 문화와 부패한 양반 통치 문화를 청산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구한말 역사의 또 다른 비극은 동학농민봉기(1894년) 때까지만 해도 잠재적 적대관계였던 농민과 양반이 이제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 전선을 구축한 점이다. 양반 통치에 저항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부패한 양반 지배 체제를 척결하고 새 시대의 지평을 여는가 싶더니,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 활동을 통해 곧바로 양반과 농민이 합작을 해버린 것이야말로 역사 청산을 하지 못하게 된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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