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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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용어로서의 선비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로 무장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최고 엘리트 집단, 곧 사대부를 칭하는 의미로 좁혀야 논의의 의미가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선비란 곧 성리학적 명분의 소산이자 바로 그 가치를 실현한 구현체具現體이므로, 조선 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한 성리학의 가치 체계와 별도로 선비의 조건이나 가치만 따로 분리해 내어 논할 수는 없다."(47-8) "선비의 삶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정치 행위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었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글을 익혀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백성의 스승이 되고 백성을 교화敎化하는 것을 뜻했다. 관직에 있는 자는 곧 정치를 통한 백성의 교화자였다. 비록 벼슬을 하지 않더라도, 선비라면 깊은 의미의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관직의 유무와 상관없이 청의淸議라 하여 명분과 원칙을 지키며 정치에 개입해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그것을 선비의 의무로 여기기까지 했다."(51-2)


"흔히 가난한 선비가 선비의 진정한 기질을 잘 간직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실재했던 선비는 대개 부유한 지주거나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재산가들이었다. 특히 특정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경제 활동에서 필수불가별한 두 핵심인 토지(생산수단)와 노비(노동력)를 소유함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재화를 쌓는 자들이었다."(66)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 선비라 할 수 있는 이황도 소유 노비가 367명이었으며, 예안·봉화·영천·의령·풍산 등지에 걸쳐 논은 1,166마지기, 밭은 1,787마지기라는 엄청난 규모의 전답을 보유했다. 마지기는 면적 자체보다는 수확량에 따른 기준이라 그 넓이를 일률적으로 가름할 수는 없으나, 논 한 마지기가 대략 150~300평, 밭 한 마지기는 대략 100~400평 정도다. 그렇다면 최소의 면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이황은 논과 밭 각각 17만 평 이상, 도합 34만 평 이상을 보유한 셈이다."(68)


"여러 차례 왕명을 받고도 응하지 않을 뿐더러 설사 응했다가도 매우 사소한 핑계를 대고 마음대로 떠나버리는 선비들의 행동에 대해 (명종대 영의정) 이준경이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이이는 이준경이 원칙만 고집하여 유자儒者를 대우하지 않고 교만하게 굴었다면서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비난했다. 이준경이 죽음에 임박해 붕당朋黨의 조짐을 우려하며 올린 유차遺箚 내용에 대해서도 이이는 이준경을 비난했다." "조선의 선비(사대부)들은 각기 왕을 정점으로 한 국가 조직에 기초해 권력 구조를 형성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붕당의 리더 또는 자신의 정치적·학문적 후원자에게 더 충성을 바쳤다." "왕에 대한 충성이 관념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왕을 정점으로 한 관료 조직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뜻하며, 이는 곧 조선의 정치가 국가(왕조)의 보편적인 이익보다는 붕당 구성원들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음을 뜻한다."(76-7)


"이상적인 선비의 모습과 현실에 나타난 선비의 모습이 도저히 일치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선비의 덕목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왠만한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지고의 상태를 덕목으로 설정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결과일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선비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며 평생을 공부한 내용, 곧 유교 이론에 혹시라도 어떤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다. 이론은 좋으나 그것이 현실에서는 거의 들어맞지 않는 공론空論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88) 대표적인 예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이론은 그것이 실제로 들어맞은 사례를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오히려 수신·제가 과정 없이 치국·평천하 한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중국 대륙을 침입해 왕조를 건설한 수많은 북방계 정복자들은 유교적 수신·제가 덕목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91)


"유교 정치의 꽃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덕치德治에 따른 왕도 정치다. 군왕의 수신을 바탕으로 한 덕치 이론은 결국 교화를 그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 덕치와 교화 이론 또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수신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삶이라는 것이 개인윤리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이미 고도의 국가 체제를 갖춘 사회의 윤리로는 부적절한 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의 모범적인 행동을 통해 사회를 교화한다는 목표는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현실성이 거의 없다." "서주의 명맥을 이은 동주 사회의 정치적 혼란과 그 몰락 과정을 문명사 차원에서 보면,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한 왕국이 철기 문명의 급속한 보급에 따른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해체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가에서 말한 각자의 본분은 바로 서주 사회의 위계질서에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유가에서 제시한 해결책은 주나라의 통치질서를 되돌리려 한 시대착오적인 관념철학에 지나지 않았다."(96-7)


"조선의 왕권은 신하들보다 대체로 약했는데도, 정작 실제 정치 현장에서는 누릴 수 있는 실제 권력보다 더 큰 의무를 요구받았다. 모든 면에서 수신의 모범이 되어야 했고,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그 책임도 고스란히 국왕에게 돌아왔다. 평상시에는 권리보다 더 무거운 의무를 감당해야 했고, 비상시에는 모든 책임을 혼자 져야 했던 것이 바로 조선 국왕의 위상이었다."(115) "조선시대에 왕의 자격 요건과 행동에 대해 열변을 토한 선비들의 논설과 간쟁은 수없이 많아도,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신하들의 도리, 곧 신도臣道에 대해서 비슷한 비중으로 열변을 토한 논설은 별로 없다." "조선의 선비들이 국왕을 '우습게' 여긴 이면에는 그들의 사대적事大的·모화적慕華的 문명관도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의 왕은 중국에 있는 천자라는 대리인을 통해 그 정통성과 정당성을 인정받았기에 조선의 사대부들이 충성을 바칠 최종 대상은 자기 나라 왕이 아니라 중국(명)의 천자였다."(117-8)


"조선은 인간관계의 위계질서가 엄정한 나라였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그런 사회였다. 유교가 그런 수직적 위계를 정당화시켜 주었으며, 조선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중국을 훨씬 능가했다."(133) "조선 가족 관련 규정의 근간은 주희와 그 제자들이 편집한 『가례家禮』였다." "『가례』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가족 관련 의례와 가족 내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는 데 국가가 인정한 최고의 '메뉴얼'로 자리 잡았다. 『가례』에 비록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런 원칙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처가 아닌 첩은 아예 가족 구성원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으므로, 굳이 명시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면서도, 처와 첩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기도 한 사실은 조선이 비록 법률적으로는 일부일처제 사회였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일부다처제 사회이기도 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법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은 현실은 필연적으로 서얼에 대한 차별을 불렀다."(136)


"조선을 건국한 주체 세력은 무신정권과 몽골 간섭하에서 기형적으로 늘어난 노비인구를 본래 상태로 줄이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분제를 통해 더욱 공고히 하는 정책을 취했다." "종모를 근간으로 하는 종모종부 원칙(부모 중 한 명이라도 노비이면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된다)은 주자학에서 강조한 부계 혈통 계승 원칙에 위배되는 제도였다. 그렇지만 종부법을 따를 경우에는 노비의 수가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노비 소유주들은 종부법에 크게 반발했다. 또한 여자 노비의 성관계가 일정하지 않은 탓에, 아이를 출산해도 그 아비가 누구인지 정확히 가리기 어렵다는 핑계를 내세워 종모법을 선호했다. 그런데 남자 노비가 상민 여자와 결혼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종부법을 적용해 그 자식을 노비로 삼는 이율배반적 원칙을 법으로 규정함으로써, 재산 증식 차원에서 노비 수를 무한정 늘릴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143-4)


"양반층은 선비를 우대하는 국가정책에 편승해, 건국 초기부터 최대한 군역에서 빠지고 있었다. 유학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다는 뜻의 업유業儒를 자칭하거나, 향교의 교생校生이 되어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방법 등을 통해 얼마든지 군역을 피할 수 있었다." "이른바 사림이 권력을 잡았다는 16세기 후반에도 군역제도와 관련해 아무런 개혁조치가 없었던 이유 또한 이런 풍조 때문이었다."(175) 조선 후기, 오랑캐의 보호를 받는 소중화라는 모순된 "이중 구조 안에서 200년이 넘도록 안주한 결과, 선비들은 '청질서'라는 '동아시아 수족관'의 운영 시스템이 작동을 멈출 경우에 스스로 생존하기조차 벅찬 국제 현실을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은둔의 나라' 속으로 끝없이 침잠해 들어갔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발생한 청일전쟁(1894~95년)에서 청이 패하고 물러갔을 때, 적자생존의 논리가 국제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던 당시 국제 무대에서 조선이 스스로 살아남을 길은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179-80)


"조선 선비들의 당쟁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조선의 역사가 유교에서 추구한 이상적인 정치를 향해 나아갔다는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호 견제와 공존을 원칙으로 하는 복수군자당 운운하는 붕당론이 이이가 제시한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 등을 통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런 붕당론은 조선의 정치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191) 오히려 "유교의 제일 덕목인 충성의 대상이 점차 국왕에서 붕당의 보스로 바뀌고, 군신유의 덕목이 추상적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편만했다."(193) 16세기 이후 심화되는 토지 집중화와 국방력 약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쟁은 갈수록 심해져, 결국에는 한 줌의 벌열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19세기 세도 정치에 이르러서야 중앙 조정의 당쟁이 표면적으로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는 당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소멸됐기 때문이 아니라, 80퍼센트 이상의 사대부 집안이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탓에 중앙에서 자웅을 겨룰 붕당들조차 없었기 때문이다."(184-5)


조선의 국가 경제가 자급자족 형태로 굳어진 이유는 "상행위를 통한 부의 창출을 원천적으로 비하한 유교 이념을 무조건 신봉한 위정자들의 인식도 큰 요인이었다."(196) "연행사와 통신사를 통해 청나라와 일본의 엄청난 부에 대한 소식이 조선에 꾸준히 전해졌지만 조정은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조정만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재야 지식인들, 곧 선비들도 이런 문제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늘이 내려준 제한된 물자를 분배하는 데에만 관심을 둔 유교적 경제관 때문이자, 청나라와 일본을 오랑캐로 취급한 철저한 화이華夷사상,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강화된 지나친 쇄국정책, 또한 그 결과로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무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조선만이 중화 문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자기기만적 이데올로기의 득세 현상, 상공업 발달과 해외무역을 추진하기에는 너무 준비가 안 된 국내의 척박한 산업 인프라 실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었다."(201)


"자본주의 맹아론을 지지한 연구들이 제시한 대표적인 증거로는 조선 후기(18세기)에 이르러 상업이 활발해진 점, 금난전권禁難廛權 폐지(1791년)와 같이 국가의 상업 통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점, 광산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임금노동자들이 등장한 점, 농촌에서도 고공雇工이라 하여 임금노동자들이 등장한 점, 상평통보와 같은 새로운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점, 광작廣作이 성행하면서 경영형 부농처럼 판매를 염두에 둔 농업형태가 등장한 점, 봉건적 토지소유제가 쇠퇴한 점, 전국에 걸쳐 장시가 활발해지면서 송상松商과 같은 대상인을 비롯해 자본의 축적에 따라 객주客主나 여각旅閣 등 새로운 상업 구조가 등장한 점 등을 꼽는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이유들로 조선 후기 사회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볼 수 있다면, 중국의 경우에는 송나라 때 이미 자본주의 단계에 사실상 진입했다고 봐야 하며, 일본도 이미 17세기에는 자본주의 체제로 깊숙이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202)


"조선은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전체 파이를 키울 생각을 못하고 주어진 농산물에만 주로 의지하다 보니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교에서 강조한 민생의 안정을 위해 세금을 올리지도 못하니, 국가재정은 만성 적자에 허덕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통 방법은 양입위출量入爲出, 곧 수입을 미리 헤아려 거기에 맞게 지출하는 것이었다. 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수도 있으나, 역시 파이를 키우려는 의지가 없이 분배에만 몰입한 방법일 뿐이었다. 그래도 양입위출에 기초한 대동법의 성립으로 백성들은 세금을 이전의 약 20퍼센트 정도만 내게 되어 좋았으나, 그 전체 과정은 거의 200년이 걸렸으며 이미 관행적으로 시행되던 것을 법적으로 보완해 추인한, 매우 느린 개혁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불에 타 무너진 채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기까지) 무려 275년이나 한양 도성 한복판에 남은 경복궁 터는 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궁핍상을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204-5)


"상장례와 제사제도는 가족의 범주와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와 직결되었는데, 가족 관련 유교화가 급속히 진행된 시기가 바로 17세기였다." "흥미롭게도, (가족 구성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 죽은 자들은 사후에도 죽음을 초월해 가족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죽은 자들은 제사라는 제도를 통해 항상 산자들과 교통했으며, 산 자들을 하나의 가족공동체로 묶어주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따라서 유교 사회 조선,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는 망자라 해도 여전히 현세의 가족 구성에서 지대한 위치를 점하고 큰 역할을 수행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가족관계는 주희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조상과 후손들은 같은 기氣로 구성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기는 소실되어 흩어지지만, 그 본체는 후손에게 보존된다. 만약 후손들이 조상에게 최고의 성의와 존경심을 표시하면, 제사를 지내는 동안 조상의 기를 불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망자와 피로 맺어진 혈육들만 제사를 지낼 수 있다."(222-3)


"조선 사회에서 지배 구조의 이론적 근거는 사회 전체를 수직적 관계로 조직한 충과 효였다. 더 나아가, 명나라가 조선의 군부君父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이런 지배 이념이 국내를 넘어 명나라와의 국제관계에까지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조선에게 명나라는 충의 대상(君)인 동시에 효의 대상(父)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군부(명나라)를 공격하는 원수(청나라) 앞에 나아가 항복한 것은 조선의 지배층인 왕과 신료들 스스로 충과 효라는 양대 가치를 동시에 범한 셈이었다."(212) "위정척사 선비들은 결코 조선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으려 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조선 그 자체로서의 조선이 아니라 중화(중국) 문명을 간직한 조선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는 중국으로부터 전수 받은 보편적 유교 전통의 수호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위정척사 선비들이 목숨을 던져 지키고자 한 '정正'은 중화문물을 계승한 조선이었다."(218)


"국권 상실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난 위정척사 선비들의 항일투쟁은 개화파들 중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나선 자가 거의 없는 사실과 아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 결과, 국권 상실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할 유학자 선비들이 졸지에 애국자로 변신했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타락한 유교 문화와 부패한 양반 통치 문화를 청산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구한말 역사의 또 다른 비극은 동학농민봉기(1894년) 때까지만 해도 잠재적 적대관계였던 농민과 양반이 이제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 전선을 구축한 점이다. 양반 통치에 저항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부패한 양반 지배 체제를 척결하고 새 시대의 지평을 여는가 싶더니,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 활동을 통해 곧바로 양반과 농민이 합작을 해버린 것이야말로 역사 청산을 하지 못하게 된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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