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의 탄생 돌베개 한국학총서 11
강명관 지음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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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열녀는 고려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 존재했던 것은 '절부'였다. 절부는 유일한 성적 대상자인 남편의 부재(주로 사망)시에 다시 결혼하지 않는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아내의 부재(주로 사망)시에 결혼하지 않는 남성인 '의부'義夫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 '수절'은 여성에게만 강요된 윤리가 아니었다. 아울러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고, 여성의 재가, 삼가가 얼마든지 허락되는 상황에서의 절부는 여성 자신의 선택이었지, 도덕적·법적 강제 사항이 아니었다. 여말선초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이후 한동안 효자·순손·절부·의부를 한 묶음으로 하는 표창을 계속하다가 <경국대전>에 와서 '의부'를 삭제함으로써 배우자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오로지 여성의 윤리로 강제하였다. 가부장제는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여성이 자신의 신체 일부 혹은 전체를 스스로 희생하게 하면서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을 실천한 여성이 곧 열녀였다."(46-7)


열녀담론의 주입은 고려가 망하기 불과 2년 전인 1390년 사대부 정권에 의해 주도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산기散騎 이상의 고급 관원의 처는 재가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판사 이하 6품 관원의 처는 남편이 죽은 지 3년 내에 재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산기 이상의 처가 개가했을 경우, 그것을 '절개를 잃은 것'(失節)과 동일하게 본다는 것이다. 즉 개가를 죽은 남편 이외의 남성과의 성적 교섭으로 보고 논죄한다는 것은,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요구하는 남성의 욕망을 국가권력과 제도를 통해 관철한 것이다." "여기서, 산기 이상 관리의 첩과 6품 이하의 처첩에게 수절은 권장 사항일 뿐이었다. 이를 약간 보완한 것이 정려법旌閭法인데, 정려는 해당인이 사는 마을 앞에 정문旌門을 세우는 것으로 명예 차원에서의 권장책이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순식간에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지만, 처벌과 장려라는 조선의 대여성對女性 정책의 골간을 이루는 것이었다."(49-50)


태종 6년 대사헌 허응은 "개가 금지령을 강력하게 실현하기 위해 세 번 결혼한 여자를 '자녀안'恣女案에 올리자고 제안했다. '자녀'는 고전의 내력을 갖는 말은 아니다. '자'恣는 곧 방종하다는 뜻을 가진 말로, 자녀는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을 말한다."(51-2) 자녀안이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사헌부는 자녀안의 작성을 사헌부의 전담 사항으로 하고, 또 삼가녀三嫁女의 자손에게 관료로서의 진출을 제한하자고 요청한다. 사헌부의 제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절하지 않은 여성의 자손에게 관료로서의 진출로를 제한한다는 발상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은 사헌부의 요청을 의정부에 회부하여 심의한 결과, 삼가녀의 자손은 사헌부·사간원과 같은 언관직言官職, 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병조의 벼슬을 할 수 없도록 결정하였다. 이 관직들은 관료로 출세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였던 바, 이 제안은 대단히 가혹한 처벌에 해당하였다."(54-5)


# 재가 여성이 낳은 자손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는 법은 성종 8년에 제정되었다.


"개가를 금지하는 법은 건국 이후 성종 을사년의 <경국대전>까지 약 1백년을 거치면서 서서히 완성되어 갔다. 하지만 그 법만으로 여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가 금지법과 함께 다른 법적 장치도 필요했다. 그것은 곧 여성의 활동 공간을 제한하여 특정한 인물 이외의 인물로부터 격리하며, 여성을 가정 내부로 유폐시키는 것이었다." "(태조 1년 대사헌) 남재의 요구는, 여성은 부모, 남자·여자 형제, 아버지의 형제, 어머니의 남자·여자 형제를 제외한 사람은 접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여성은 남편 이외의 일반 남성은커녕, 자신의 친형제, 부모의 친형제 외에는 6촌도 8촌도 친구도 만날 수 없다." "남재의 황당한 제안은 <경제육전>經濟六典 예전禮典에 정식 법령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집 바깥으로의 여성의 출입을 봉쇄하는 것이었던 바, 논의의 핵심은 여성의 사찰 출입을 막고, 비구승과의 접촉을 금지하는 것이었다."(65-6)


"금제禁制와 아울러 검토해야 할 것은 장려책이다. 앞에서 수절하는 여성을 위해 설치한 수신전守信田이 대표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세조 때 폐지되고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장려책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국가-남성은 개가 금지, 여성의 유폐와 아울러, 수절을 실천한 여성을 표창, 장려하여 여성의 성적 종속성의 실천을 적극 유도했다." "열행에 대한 장려책은 열녀에 대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가 윤리의 실천에 대한 장려책의 하나였다. 유가 윤리의 실천이란 다름 아닌 충·효·열이 중심이 되는 바, 충신·효자·열녀가 역시 중심이고, 여기에 순손, 효부 그리고 형제 간의 우애 등도 포함되었다. 여말선초 사대부들의 유가 윤리의 실천에 대한 장려책은 정려旌閭만이 아니라, 관직을 주는 상직賞職, 요역을 면제해 주는 복호復戶, 음식물을 내려주는 식물食物 하사를 포함하여 모두 네 종류가 있었으며, 이 중에서 정려가 가장 높은 단계의 표창이었다."(76) 


# 정려 : 충신·효자·열녀가 사는 마을에 붉은 홍살문인 정문을 세워 그 인물의 존재를 알리고 명예를 높이는 방법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고금열녀전>과 <후한서>, <진서>를 비롯한 중국 단대사의 열녀전을 인용 자료로 삼았다." "편집자들은 선택과 배제, 생략이라는 방법을 통해 여성-어머니, 여성-딸(자식)의 관계와 여성과 지성, 학문 등과의 관계, 여성의 활동성, 적극성을 모두 제거했다. 인용된 텍스트들은 새로 편집되어 배치됨으로써 의미가 집중·강화되고,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오로지 남편에 대한 여성의 관계만이 성립했던 바, 그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이라는 단일한 성격으로 집중되었다. 편집자들은, 남편에 대한 여성의 관계와 성적 종속성을, 고대 하夏·은殷·주周로부터 수천 년을 넘어 당대까지, 즉 명明과 조선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초시간적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151-2) "<삼강행실도>의 편자는 (남편 이외의 성적 관계는 모두) '오염'이라는 관념을 주입하여 여성의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강렬한 수치심을 여성의 의식 속에 심고자 했다."(161)


"<삼강행실도> 열녀편의 주제는 명백하다. 남성은 원래 자신의 성적 대상자, 곧 아내를 제외한 여성에 대해서는 재취再娶 또는 축첩蓄妾의 주체, 또 강간의 주체(심리적인 것까지 포함해서)이지만, 자신의 공인된 성적 대상자(주로 아내)에 대해서는 그 여성이 자신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지킬 것을 강력하게 희망한다."(161) "(열녀편의) 거의 모든 이야기는 "전쟁, 군도 등 비상 상황의 발생 → 강간 시도 → 저항 → 죽음"이라는 동일한 서사적 전개를 갖는다. 이 중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서술되는 부분은 부녀자의 강렬한 저항 부분이다. 전쟁 등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여성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열행이 될 수는 없다. 즉 강간을 당한 뒤 살아남는 것은 물론이고 강간 당한 뒤 살해될 경우 그것은 열행이 될 수 없다. 강간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의 격렬한 저항, 즉 강간에 대한 강렬한 거부의 의지와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열행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그 의지와 행동이 바로 열행의 핵심이다."(169)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성을 여성에게 자발적으로 내면화시키고자 했던 조선 초 사대부의 인식을 규정한 것은 다름 아닌 <소학>이었다. 남성의 생애가 나이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는 것과 달리, <소학>에 나오는 여성의 일생은 "7세에 남성과 분리된 뒤, 10세에 규방에 유폐되고, 16세에 성인식(계례), 20세(또는 23세)에 혼례를 치른다. 남성은 20세 이후 학문 연마와 벼슬 등의 지적·사회적 활동이 있으나, 여성의 일생은 결혼으로 끝이다. 남성의 일생이 다채로운 반면, 여성의 일생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이 단순성은, 여성이 가정 내에 유폐되어 있으며, 여성의 일이 가사노동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직물의 직조織造, 음식의 조리(특히 제사 음식)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소학>의 여성 노동에 대한 규정은 조선 시대 여성의 성 역할을 규정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직조와 조리가 여성의 일이라는 담론은, 여성의 의식을 완벽하게 규정했던 것이니, 이 관념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102)


# <소학>이 규정하는 부부지별夫婦之別

1. 삼종지도三從之道 : 집에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 감히 스스로 하는 일이 없다.

2. 성적 종속성 : 한 번 혼례를 올리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편이 죽어도 시집가지 않는다(一與之齊, 終身不改, 故夫死不嫁).

3. 칠거지악七去之惡 :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자식이 없거나, 음란하거나, 질투하거나, 나쁜 질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하면 내쫓긴다.


"<소학>은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인간의 신체를 규율하는 텍스트다. 신체의 통제를 요구하는 텍스트가 쉽게 수용될 리 만무했다. 따라서 이 책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 (성종대에)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과거 응시 과정에 집어넣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200) 도학을 실천으로 옮기고자 하는 운동에 앞장섰던 사림의 주요 인물인 "김굉필은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학> 외의 다른 책을 읽었다고 할 정도로 <소학>에 몰입하였다." "<소학>은 이제 단순히 보기 위해 암송하는 책이 아니라, 성종 연간 '소학계'의 출현에서 보듯 남성-양반에게 내면화되어 실천되기 시작했다. <소학>의 실천은 상민과 구별되고, 여성과 구별되는 남성-양반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203-4) "조광조는 <소학>의 실천에 골몰했던 '소학동자' 김굉필의 제자였다. 그는 김굉필보다 더 철저한 <소학>의 실천주의자였다. 조광조의 신체는 이성과 율법, 곧 <소학>으로 완벽하게 제어된 것이었다."(205)


"<소학>은 사대부의 신체언어 곧 양반다움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남성-양반들은 여성과 구분되고, 비사대부층과 결정적으로 구분되었다. <소학>의 내면화는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어 신체언어 속에 녹아 들어갔으며, <소학>의 정당성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성은 대기大氣처럼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남성은 <소학>에 의해 먼저 의식화되었다. 자기 의식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남성은 <소학>의 외화를 생각하고 그 외화에 의해 내부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뒤, 자기 이익 즉 남성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그 모순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여성의 의식화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남성/여성의 구별이 아닌 차별이 세계의 본모습이라는 것, 그것이 진리라는 것, 동시에 그것이 차별이 아닌 단지 분별일 뿐이라는 사고에 스스로 의식화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스스로 중세의 족쇄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213)


"선조는 1592년(선조 25) 4월 30일 서울을 떠나 이듬해 10월 1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입성 하루 전 비변사가 왕이 도성에 들어가는 것을 사방에 알리기를 청하면서, 충신·효자·열녀의 포상을 건의한 일은, 전쟁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한다는 차원 이상의 행위였다. 선조는 서울에서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을 포상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면서, 예조에서 오부에 알려 충신·효자·열녀의 사례를 찾아내 보고하고, 정표하게 하라고 조급하다 싶을 정도로 급히 명령을 내린다. "난리를 겪은 후 죽은 서울 백성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남은 백성의 절반이 소복을 입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도성에 들어오는 날 서울 백성이 길을 가득 메웠건만 상복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필시 난리 후에 윤리가 무너져 그런 것이다. 오부에서 규찰하게 하라." 이것은 윤리의 회복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성-양반의 지배 체제의 공고화, 곧 가부장적 질서를 세우기 위한 필수적인 과업이었다."(293-4)


1615년(광해 7) <동국신속삼강행실도>라는 거질의 윤리서가 국가적 에너지를 동원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임진왜란은 정절, 곧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수호하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잔혹성을 스스로 실천한 강렬한 여성의 이미지, '열'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창출했던 것이다. 이제 열녀는 '列女'가 아니라 '烈女'가 되었다." "이 책은 잔혹한 죽음의 선택에 대한 찬미의 책이다. 여기에 실린 여성들에게는 예외 없이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전쟁 후 나라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정문이 생겼고, 그 정문은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실천하기 위해 신체 전체를 바친 여성들의 이야기를 유포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간단한 구조의 동일한 이야기였으며, 정문의 존재를 인지하다는 것은 곧 그 이야기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해서 열녀 이데올로기는 전쟁을 계기로 하여 사회 전체로 퍼졌고, 궁극적으로 여성들의 대뇌에 설치되었다."(330) 


병자호란 이후 청으로 잡혀간 "대규모의 피로자被虜者는 희한한 문제를 제기했다. 즉 부녀자가 속환되었을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였다." "최명길은 상식적인 결론을 내린다. "예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때에 따라 마땅함을 달리 하는 것으로서 한 가지 예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최명길의 또 다른 이유는 이렇다. 이혼해도 된다는 명을 내리게 되면, 피로된 아내의 속환을 원하는 사람은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허다한 여성을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해서 결국 그 원망이 화기를 해치게 될 것이다. 최명길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최명길의 견해가 현실적으로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이혼시켜 달라는) 장유의 요청은 사대부들이 내심 찜찜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부분을 일깨웠다. 오염되었을지도 모를 아내와 며느리를 그대로 두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339-40)


"인조의 결정으로 모든 사태가 진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효종 즉위년 11월 21일, 사헌부는 "풍속을 손상시킨 것으로 이보다 심한 것은 없다"면서 최명길을 비난하고, 다시 "절개를 잃은 자를 자기 짝으로 삼는 것도 절개를 잃는 것"이라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조정의 결정은 정자의 가르침과 괴리되고 예를 심히 그르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헌부는 사대부의 가풍家風이 날로 무너져 규문閨門에 부끄러운 일이 많으며, 가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일도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법, 인조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법 때문에 야기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헌부는 속환된 아내와 결혼을 유지하라는 법을 시행하지 말고 남편의 재혼을 허락할 것을 요청했다. 효종은 아버지 인조의 결정을 뒤집어 사헌부의 요청을 따랐다." "효종의 번복으로 인해 실제 이혼 사례가 급증했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속환된 여성의 자식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343-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상속제에도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조선 전기에 토지보다 더 중요한 상속 대상이었던 노비가 전쟁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도망하여 그 수가 줄어들자, 사족의 노비 소유 체제가 근본적으로 동요되고, 노비 수의 절대 감소는 곧 재산의 영세화를 초래했다. 여기에 두 차례의 대규모 전란 이후 국가 전체의 생산력 수준이 하락하여 사족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가문과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경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재산을 균분할 경우 재산이 영세화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신분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노비보다 중요하게 된 토지의 분산을 막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은 딸을 상속에서 배제하고 토지를 장자에게 집중시켜 상속하는 장자우대 상속제로 귀결되었는데, 그 변화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것이 제사였다. 즉 봉사용奉祀用 재산을 안정적으로 마련한다는 것이 장자우대 상속제의 이유였다."(348-9)


조선 시대 열녀의 열행을 관통하는 성적 종속성은 국가-남성의 이익을 위해 고안되었고, "이것은 여성의 행위가 여성 주체가 아닌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타자의 사유에 의해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은 가부장제 속에서 드디어 남성이 되었다. 스스로 가부장제를 실천했던 바, 그 명확한 실례가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다. 시어머니는 가부장화한 여성이다. 여성이 완벽하게 가부장화하였을 때 더 이상의 가부장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흔히 중세 사회에서의 주체적 여성이라고 해석되는 경우, 그것은 남성과 대립하는 여성이 아니며, 가부장제의 모순을 꿰뚫어본 여성 주체도 아니다. 그저 가부장제화한 여성, 곧 그 의식의 주체가 여성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적인 여성을 말한다. 그 주체는 타자에 의해 왜곡된 주체, 곧 타자에 의해 오염된 주체였다." "이 오염은 조선의 가부장제가 가장 완벽하게 작동할 수 있는 원리였다."(5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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