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2 - 역사평설 병자호란 2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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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 8월, 홍타이지가 보내온 국서의 내용은 이전의 그것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인조에게 '권세가 강한 신료들을 조심하라'며 훈수까지 했다. 그러면서 '형의 나라'로서 '아우의 나라' 조선을 걱정하여 충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2월에도 홍타이지는 마부대를 통해 국서를 보내왔다. 국서에 담긴 내용의 핵심은 대략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이 후금을 대하는 정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음을 힐책하는 것, 다른 하나는 명에 이미 망조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명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특히 '후금이 명과 싸워 계속 이기는 것은 명의 국운이 다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영 떨떠름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 1635년 후반 무렵 홍타이지는 몹시 고무되어 있었다. 그것은 홍타이지가 차하르 몽골을 멸망시킴으로써 사실상 몽골족들을 휘하에 복속시켰던 것에서 비롯되었다."(29-30)


"1636년 3월 1일, 인조는 팔도의 백성들에게 유시문을 내렸다. '정묘호란 때는 부득이하여 임시로 화친을 허락했다. 하지만 오랑캐의 욕구는 날로 커져 이제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협박하고 있다. 이에 강약과 존망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니 모든 사서士庶들이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 나가자'는 호소가 담겨 있었다. 대의명분을 위해 국가의 존망까지도 걸 수 있다는 의지는 결연했다. 하지만 3월 7일,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빚어졌다. '참월僭越한 오랑캐와 단교할 것'이라는 사실과 오랑캐가 침략해 올지도 모르니 방어 태세를 확고히 하라는 인조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평안감영으로 가던 금군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용골대는 전령을 붙잡아 그가 소지했던 인조의 유시문을 압수했다. 후금으로서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조선의 '속마음'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45-6)


"6월 17일 (인조는) 홍타이지의 국서에 답하는 글을 의주로 보냈다. 격문 형식이었다. 정묘년에 맺은 맹약이 깨지게 된 것은 조선 탓이 아니라 청나라 탓임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귀국은 군사강국이지만 우리는 궁벽진 곳에 위치한 농업국가일 뿐이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귀국을 능멸하고 스스로 맹약을 깨겠는가?'라는 반문으로 시작되는 국서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먼저 조선이 명을 섬겨 배신하지 않기로 한 것은 정묘 당시 합의된 약속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조선이 한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문제 삼는 청의 태도는 수긍할 수 없다고 했다. 뒤이어 변방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청 영내로 몰래 들어가 산삼을 캔 것에 대해서는 사과했다. 마지막으로 차하르 몽골의 버일러들은 이미 망한 나라의 포로들이니 청 사신과 똑같이 예우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명나라의 동번東藩'으로서 강약强弱과 성패成敗 때문에 신하의 절개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62-3)


"조선은 청군의 철기와 야전에 정면으로 맞설 경우,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대신 청군이 돌격해오는 대로에 위치한 진을 버리고 군민들을 주변의 산성으로 집결시킨 뒤 화포와 조총 등으로 저항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말하자면 청야견벽淸野堅壁 전략이었다." "구상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청군은 조선의 의표를 찔렀다. 그들은 조선군이 수비하고 있는 산성들을 공격하여 시간을 허비하려 들지 않았다. 곧바로 서울로 돌격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시도했다." "12월 6일부터 봉화가 올랐으나 당시 황주의 정방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청군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 "9일 적군이 이미 순안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고 있던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서울로 장계를 올렸다. 무사안일과 무책임의 극치였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는커녕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조차 제대로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부터 음울했다."(85-6)


# 1636년 12월 9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을 공략하려는 청군 지휘부의 계책은 치밀했다. 그들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이미 1631년 홍타이지가 명의 대릉하성을 공략할 때 사용했던 전술이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그야말로 고사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홍이포를 발사하여 돈대와 성첩城堞을 파괴하면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게 된다. 군량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보충할 방도도 없고, 학수고대하는 외부 구원병은 오는 족족 청군 복병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명장 조대수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던 그 전술이 남한산성에서 재연될 판이었다." "(12월 16일 청군 진영을 다녀온) 윤휘는 다른 신료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화이론의 입장에서 청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청군은) 대오도 정제되어 있고, 조선 피란민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요컨대 당시 조선 신료들은 청군의 전력이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못했다."(105-7)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꿈도 꾸지 말라는 청군 지휘부의 요구가 있은 직후 성안의 분위기는 복잡했다. 여전히 화친을 시도해야 한다는 부류와 화친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부류로 나뉘었다. 결단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조선 편이 아니었다. 포위가 길어지면서 남한산성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고단해졌다. 성을 에워싼 청군의 압박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여러 가지 물자들이 고갈되고 있던 점이었다. 화친이든, 결전이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갈팡질팡할 경우 얼어 죽거나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113-4)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조선군은 성 밖으로 나가 기습작전을 벌이는 등 소소한 전투를 계속 치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12월 19일 오후, 청군의 좌익 주력군 2만 4천 명이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성안의 조선 조정은 이 같은 바깥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118-9)


"김자점은 토산에서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약 5천 명의 병력을 잃은)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모두 합치면 1만 7천 명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 모여 있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보겠다는 의지가 없거나 미약한 점이었다." "김자점, 심기원, 조정호 등 남한산성을 구원해야 할 조선의 최고위 지휘관들은 병자호란이 끝나는 날까지 그저 '헤매는 들판'(미원)에 머물면서 상황을 관망했을 따름이었다."(128-30)


"청과의 화친 교섭은 점차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신속臣屬을 요구했다. '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는 '현실'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신속'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를 배척한 척화파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를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청군 진영에서는 홍타이지의 '노여움'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칭찬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의 척화파들로부터는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자', '대의명분을 저버린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171-2)


"1월 20일, (하루종일 큰 눈이 내린) 남한산성 주변의 날씨는 음산했다. 칭신을 다짐하는 국서를 들고 청군 진영에 갔던 사신들은 날씨만큼이나 음산한 내용의 답서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인조가 성에서 나와야만 항복을 받아줄 수 있다는 것, 나오기 전에 청과의 관계를 파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척화신 두세명을 먼저 묶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목을 베어 '대국에 반항한 죄'를 다스리겠다고 공언했다. 이쯤 되면 '무조건 항복'이 아니었다."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을 비롯한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178-80)


"인조가 출성을 끝까지 회피하려 했던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또 하나는 지존至尊으로서의 위신을 잃어 이후 왕 노릇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그것이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신하들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은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181)


1월 22일, 강화도 함락 소식에 남한산성은 충격에 빠졌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홍서봉, 김류, 이홍주, 최명길 등은 모두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 '신하된 자로서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머뭇거리면 더욱 기고만장해진 저들에게 화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인조는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왕실의 가족들까지 모두 인질로 잡혀버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무기력함의 표현이었다. 이 무렵 구원군이 끊어진 것은 물론, 들려오는 것은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었다. (충청도 일원까지 남하한 청군은) 공주의 공산성을 비롯하여 목천, 청주 등지까지 출몰하여 겁략을 자행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사방이 온통 캄캄할 뿐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은 절망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최명길 등은 국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남한산성도 무너지고 있었다."(214)


1월 27일 최명길 등이 '굴복 선언'을 담은 국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국서는 인조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달라는 요청에 초점이 맞춰졌다. 인조가 출성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을 매고, 이조참판 정온은 칼로 배를 찔렀다. 두 사람 모두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산성에는 처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1월 28일 용골대가 가지고 온 홍타이지의 조유문은 '그대는 짐이 식언할까 의심하지 말라. 지난날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특기할 것은 포로들과 관련된 조건이었다. 홍타이지는 '아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너 청 영토로 들어온 뒤, 조선으로 도망쳐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청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포로를 '우리 군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얻은 성과'라고 규정한 뒤 포로들을 데려오고 싶으면 정당한 가격을 치르라고 강요했다."(216-8)


# 청에 끌려간 척화신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 오달제, 윤집


이윽고 1월 30일이 밝았다. "홍타이지는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진영에서 나와 군기를 앞세우고 주악을 울리며 삼전도를 향해 한강을 건넜다. 삼전도에는 아홉 단으로 높다랗게 쌓은 수항단과 크고 작은 황색 장막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조가 50여 명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산성 밖 5리쯤까지 왔을 때 용골대 등이 영접을 나왔다. 용골대 일행이 앞장서고 인조는 삼정승과 판서, 승지와 사관만을 거느리고 삼전도를 향해 걸어서 나아갔다. 군사를 도열시켜 놓고 장막에서 기다리던 홍타이지는 인조 일행이 도착하자, 그와 함께 배천拜天 의식을 행했다. 청의 입장에서 '조선이 한 집안이 되었다'고 하늘에 고하는 의식이었다. 배천 의식을 마치고 홍타이지가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222-3)


"책봉을 통해 권력을 유지시켜 주었지만, 인조에 대한 청의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청은 인조를 길들이려고 시도했다. 청은 먼저 자신들이 큰 은혜를 베풀었다고 강조했다. 항복을 받아준 것 자체가 '이미 죽은 임금[旣亡之君]'인 인조를 다시 살려준 '재조지은'이라고 자찬했다. 그러면서 '재조지은'을 계속 환기시켰다. 1637년 7월, '조선이 가도에서 패한 명 장수들을 받아들이고 명과 통교한다'는 풍문이 돌자 용골대 등은 '기망지군'을 다시 세워주었음에도 '명과 교통하지 않겠다'는 맹약을 어겼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청은 또한 입조론入朝論을 중요한 '카드'로 활용했다. 입조란 인조를 심양으로 불러들여 청 황제를 직접 알현토록 하는 것이다. 청은 조선이 자신들의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때마다 입조론을 흘리며 인조를 압박했다." "1639년 6월 입국한 마부대는 (도망쳐온 피로인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서) '인조가 심양에 가서 직접 황제를 뵙고 사죄해야 한다'고 압박했다."(258-9)


"인조는 청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세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1639년 김응조 등이 "대의大義를 밝히라"며 상소하자 아예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또 월왕 구천이 자강을 위해 20년이나 오吳를 섬겼던 고사를 들이대며 "나라가 망할 처지에 있는데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상소문에다 청의 연호를 쓰지 않는 신료들은 파직시켰다. 1640년(인조 18) 1월, 청이 원손元孫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을 때에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라일이 형편없는 지경이니 청인들의 요구에 순응하여 의심과 노여움을 풀어주는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인조는 친청적인 행보를 보이며 주화파 신료들을 중용했다. 그중에서도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조정의 대소사를 주도했던 인물은 단연 최명길이었다. 환도 직후 우의정으로 승진한 그는 시종일과 주화론을 견지했던 데다, 전란 초 적진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담판을 벌여 인조에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공로가 있었다."(268)


"1645년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는 것이 입관식에 참여했던 종실의 증언 내용이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라 훈신들의 입김에 밀려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실제로 1629년 7월, 인조는 "조정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며 자조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확 달라졌다. 친청파로 '변신'한 이후에도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 지위의 박탈, 강빈의 사사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충성 경쟁'을 부추겼던 청의 획책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역설적이지만, 인조가 '추대된 임금'이라는 정치적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27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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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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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명 조정은 '인조반정'의 발생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정보의 원천은 모문룡이었다. 보고를 받은 명 조정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가장 중요한 번국藩國에서 정권이 바뀐 이유, 새 정권의 향후 향배 등은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는 후금으로부터 도전받고 있었던 터라 조선의 협조가 절실한 때였다." "인조반정의 처리 방향을 놓고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했던 명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은 호부시랑 필자엄이었다. 그는 <조선정형소朝鮮情形疏>라는 글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인조 등이 광해군을 쫓아낸 것은 '난신적자의 행위'이므로 치죄해야 하지만,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의 지원이 절실한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자엄은 결론적으로 '인조를 바로 책봉하지 말고, 정변의 정당성 여부를 충분히 따져보고 조선이 후금을 토벌한 공적이 드러난 뒤에 책봉하자'고 주장했다."(46-7)


# 재조지은에 봉전지은(封典之恩, 제후국의 임금으로 책봉해준 은혜) 추가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인조 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의 난맥상 때문에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한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이괄의 반란으로 인조 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은 흐트러지고 말았다. 당장 반란을 진압하느라 군사적 역량이 크게 소모되었다. 반정 성공 직후 내세웠던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던 호기는 거품이 되었다. 인조가 서울을 떠난 직후 난민들이 궁궐과 관청에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공사의 기물들을 약탈했다. 각종 서류와 문서, 양곡 등이 약탈되거나 불에 타버렸다. 각 관청에 보관된 무기류도 대거 약탈되었다. 이원익의 증언에 따르면 "변란을 겪은 이후 군기가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백성들이 훔쳐 간 조총의 수량이 워낙 많아 그것들을 쌀을 주고 도로 사들여야 할 형편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후금 정벌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땅에 떨어진 인조와 조정의 권위를 회복하고 질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77-8)


# 이괄의 난(1624) : 반정 성공 후 벌어진 논공행상에서 반정 거사 당일 미적대던 대장 김류는 1등공신에 임명됐는데 이괄은 2등공신으로 밀려나고 변방으로 발령까지 났다. 여기에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금부도사가 자신을 체포하려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괄은 마침내 반란의 불길을 올린다.


"대동법, 군적 정리, 호패법 등이 모두 별다른 성과 없이 중간에 무위로 끝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조 정권의 재정 확보와 국방 강화를 위한 방책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이 같은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기 위해 백성들을 밀어붙이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반정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을 겪은 것이 자충수였다. 실제로 대동청, 재성청 등에 보관된 문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을 겪으면서 민심은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의 어마어마한 은 징색, 가도 모문룡 진영의 항상적인 양곡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토적'을 위한 군사력 증강 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97)


"가도와 청북 지역을 횡행했던 모병들이 보였던 행태는 1637년, 병자호란으로 가도가 청군에게 함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오랑캐 지역 정탐' 등을 명분으로 수시로 조선에 들어왔고 때로는 압록강을 건너 후금의 점령 지역까지 출몰했다. 더욱이 청북의 곳곳에는 모병과 요민들이 설치한 둔전들이 널려 있었다. 살 길을 찾아 후금을 탈출하는 요민들이 청북 지역으로 계속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은 가도에 사신을 보내 불필요한 요민들을 명 내지로 송환하라고 요청했지만 모문룡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자신의 휘하에 주민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어야 명 조정으로부터 군량을 많이 받아낼 수 있었기에 모문룡은 조선의 요청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모문룡 때문에 본래 요동에 머물던 요민들이 동요하자 후금은 격앙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은 후금의 보복과 침략을 우려했지만 '은인' 모문룡을 뜯어말릴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다."(108-9)


"1626년 즉위 이후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향한 서진西進을 잠시 멈추고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다. 동시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조선은 일찍이 1621년(광해군 13) 무렵부터 누르하치 이후 후금의 후계 구도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정충신 등의 사절을 허투알라로 들여보내 후금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충신은 광해군에게 "귀영가貴盈哥(조선이 다이샨을 부르던 별칭)는 보잘것없는 용부庸夫지만 홍타이지는 똑똑하고 용감하고 시기심이 많은데다 부왕의 편애를 믿고 형을 죽이려 한다"는 상당히 구체적인 내부 정보까지 보고했다. 조선은 정탐을 통해 누르하치의 아들들 가운데 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해 강경파이고 다이샨이 온건파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반면 인조 정권은 집권 이후 이괄의 난 등이 남긴 여파를 수습하고 모문룡을 접제接濟하는 데 골몰하느라 후금의 내부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150-1)


#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이유

1. 명목상 칸에 올랐지만 형들과 권력을 분점하고 연정을 펴야 하는 상황을 타개하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2. 만주 지역에 심각한 기근이 닥쳤는데 명나라와 교역선이 끊긴 상황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구할 곳은 조선뿐이었다.

3. 가도에 웅크리고 앉아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였던 모문룡을 제거하여 뒤를 돌아봐야 하는 여지를 없애고자 했다.


"후금군의 침략 소식이 서울의 조정으로 날아든 것은 1627년 1월 17일이었다. 인조는 급히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인조는 신료들을 보자마자 "이들이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 '모문룡 문제'를 빼놓으면 후금과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집권 이후 '친명배금'을 표방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배금' 행위를 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인조는 갑작스런 후금의 침략 소식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신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인조의 마음은 이미 강화도로 들어가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 방어를 위해 삼남 지방에서 1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수사水使들을 시켜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여타 지역에 대한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162-4)


"초반의 전황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형국이었지만 후금군은 의외로 신중했다. 그들은 의주성을 함락시킨 직후 총사령관 아민의 명의로 평안감사 윤훤에게 서신을 보내 강화 협상을 제의했다. 윤훤은 조정에 보고한 뒤 회답을 주겠다고 했고, 1월 18일 조정은 윤훤의 장계를 통해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후금군은 왜 갑자기 화의를 제의했을까? 우선 당시 후금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 수 있다. 후금은 약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민은 그 숫자로는 서울까지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또 영원성에 있던 원숭환의 위협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후금군이 조선 내륙으로 남하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점은 명군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발생 소식을 접한 명의 병부는, 후금군이 조선으로 깊숙이 들어간 틈을 이용하여 후금 지역을 공격하자고 건의한 바 있다."(166-7)


"2월 2일, 호차(胡差, 오랑캐 사신)가 갑곶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그가 소지한 국서에는 '명과의 관계를 끊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식으로 화약을 맺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이 재확인되었다. 인조는 그러면서 형제의 명칭은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은 후금 측이 조선과 명 사이의 기존 관계를 용인해준다면 화친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척화파斥和派들이 들고 일어났다." "척화파들은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169) "오랑캐는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만도 못한 존재라고 여기는 화이론華夷論을 지니고 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후금과 화약을 맺은 현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176)


# 3월 8일, 형제 관계를 맹약하고 화약 성립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키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것은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문룡은 후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가도에서 다른 섬으로 도피하여 용케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이후 전쟁 기간 동안 평안도 연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관망했다. 조선 조정은 그가 배후에서 후금군을 공격하거나 견제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모문룡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조선의) 주문사 일행에게 명 조정으로 가져가는 보고서의 내용을 뜯어 고치라고 강요했다. '조선이 후금군의 침략을 받아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모문룡의 활약 덕분에 적을 크게 물리쳐 쫓아냈다'는 내용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면 북경으로 가는 해로를 열어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주문사 일행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 결국 그의 요구대로 따랐다." "1627년 5월 천계제는 모문룡의 '군공'을 치하하고 그에게 미곡 5만 석과 양곡 구입 자금으로 은 10만 냥을 주도록 재가했다."(185-7)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인조 정권은 어디서부터 국정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반란을 겨우 진압했던 직후인 1624~1626년 무렵에는 백성들을 다독거려 정권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같은 처지에서 후금을 정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정벌은커녕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무엇보다 궁핍한 재정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아침부터 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안에 빚쟁이가 가득하다!' 호조판서 김신국이 묘사한 조정의 재정 형편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당장 후금에 보내기로 한 세폐歲幣 비용까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백성들의 부담이 더 커지면서 민원民怨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역모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던 것은 그와 관련이 있었다. 민생을 안정시켜 민심을 수습하고 후금의 재침에 대비하는 것이 절박했지만 국정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다."(199-201)


"재정 문제가 심각해지자 1626년 이후 신료들은 궁가, 내수사 등이 육지와 바다의 이권을 독점하는 것을 혁파하라고 촉구했다. 또 내수사 노비들에게 면역, 면세의 혜택을 주는 것도 철회하라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마이동풍이었다. 말로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민폐를 제거하라'고 강조했지만 궁가 이야기만 나오면 귀를 닫았다. 1628년에는, 반정 직후 국가로 반환되었던 이현궁과 수진궁 소속의 어전들을 다시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인조는 "선 왕조의 관례였다"는 명분을 들이댔다. 역주행이었다. 공신들도 마찬가지였다. 1629년 1월, 최명길은 '공신들이 적몰籍沒을 사칭하며 남의 전답과 집을 빼앗는 폐단을 금지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시행되지 못했다. 당시 역모 사건이 빈발하면서, 고변 등을 통해 공신이 되는 자들의 수가 대폭 늘어나고 있었다." "반정을 통해 집권한 데다 이어지는 역모와 고변 때문에 인조 정권은 공신들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었다."(206-7)


명에서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한 한족 출신 신료들을 이신貳臣이라 칭하는데 원숭환을 제거한 반간계를 기획한 범문정范文程 역시 이신 출신이다. "1629년 홍타이지의 황성 기습전에 수행했던 범문정은 원숭환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반간계를 구상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문정은 순치順治 연간에도 시정의 계책과 방향을 제시하여 청이 중원을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을 '제어하는'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다. 포로로 잡힌 환관들의 옆방에 머물며 반간계의 미끼를 던졌던 고홍중과 포승선도 이신 출신이었다." 이신들이 명을 버리고 청으로 귀순한 이유는 다양했지만 이들은 "모두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신들의 후금으로의 귀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명의 목줄을 겨누게 된다."(253)


"조선 조정이 위기감 속에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골몰하고 있던 1631년 7월, 후금은 다시 명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이번 원정의 공격 목표는 대릉하성大凌河城과 금주 등지였다. 모두 영원성과 산해관을 공략하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명군의 전초 기지였다. 홍타이지는 원정 시작에 앞서 소규모 정예 병력을 수시로 대릉하 주변으로 보냈다. 명의 장졸들이나 민간인들을 붙잡아 납치하려는 목적이었다. 《청실록》에서는 이것을 착생捉生이라고 적었다. 단순히 '포로 사냥'이 아니라 명군 관련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정찰의 일환이었다." "대릉하 원정에 앞서 조선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고 배를 빌려달라고 한 것은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를 통해 조선의 반응과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정西征하는 동안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해 올 우려가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군대를 움직였다. 1631년(인조 9) 8월 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303-4)


"대릉하성의 명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 후금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의 위력이었다. 1626년 영원성을 공격했다가 명군의 홍이포 공격 때문에 누르하치가 끝내 패퇴했던 '아픔'을 겪었던 후금은 이후 명군의 화기를 획득하기 위해 부심했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노획한 명군의 화기를 활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후금은 마침내 1631년 1월과 3월, 대장군포와 홍이포를 각각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한다. 대장군포는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에 전해준 불랑기포 가운데 제원이 큰 것을 가리킨다. 홍이포는 17세기 초반 역시 마카오를 통해 명에 전해진 최신 화포였다. 포신이 길어 사정거리가 길 뿐 아니라 탄환이 날아가는 속도와 파괴력이 당시 그 어느 화포보다도 발군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후금에서 홍이포를 제작하고 그것을 전장에서 활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역이 대개 명과 관련이 있거나 명에서 귀순한 한족들이었다는 점이다."(309)


"사령관 조대수의 투항은 조대수 개인의 비극일 뿐 아니라 명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조대수는 일찍이 자신의 상관이자 누구보다도 열렬한 애국자였던 원숭환이 숭정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원숭환이 처형된 직후 북경의 분위기에 실망한 그는 산해관을 떠나 금주성에 틀어박혔었다. 조대수도 인간인 이상 간신과 소인배들의 참소 앞에서 대국을 볼 줄 모르는 숭정제와 조정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조대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릉하성을 수축하자고 건의했다." "(갑론을박 끝에) 대릉하성을 쌓으라는 재가는 떨어졌지만 공사 기간은 충분치 않았다. 치첩이 완공되기 전에 후금군은 들이닥쳤고 조대수는 고립된 성에서 3개월 이상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미 망조亡兆가 완연한 명의 분위기에서 조대수의 분투는 그나마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던 홍타이지는 대릉하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인 1632년 4월, 대군을 이끌고 차하르 몽골 정벌 길에 올랐다."(316-7)


"점증하는 후금의 협박과 '가도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정치적 갈등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 핵심은 인조의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追崇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높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명분과 종통宗統의 의리를 강조하던 신료들은 인조의 그 같은 시도에 격렬히 반발했다."(324)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시도는 무리한 것이었다. 반정으로 집권했던 직후, 과거 광해군이 생모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하고 무덤을 성릉成陵이라 했던 것을 비판하고 성릉의 석물 가운데 참월한 것을 없애라고 지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정원군의 추숭에 반대하는 신료들을 '시정잡배'로, 성균관 유생들을 '괴물'이라고 매도하면서까지 추숭을 강행하려 했다."(328)


# 1632년(인조 10) 2월, 추숭도감追崇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관철


1633년, 185척의 선박과 수만의 병력을 대동하고 후금에게 귀순한 공경 일행을 먹일 식량을 요구받은 조선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조선은, 공경을 추격해온 주문욱 일행으로부터 급량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후금까지 식량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조선은 주문욱 일행에게는 이미 3천 석의 양곡을 공급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임경업 등을 보내, 공경 일행과 합세한 후금군과 전투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조선이 이미 확실하게 명 측으로 기우는 태도를 보인 터라 후금의 식량 요구까지 거부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용골대 일행의 급량 요구를 거절하여 내심 찜찜해하고 있던 5월 6일, 명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어머니 구씨를 왕비로 각각 추봉追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인조는 고무되었고, '명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후금에 대한 찜찜한 마음은 여지없이 사라졌다."(353-4)


"공유덕과 경중명 등의 귀순은 다른 측면에서도 조선에 악영향을 남겼다. 우선 조선이, 공경을 추격하던 명군에게 군량과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병력을 압록강 부근으로 파견하면서 떠안아야 했던 사회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공경 일당과 그를 저지하려는 조·명연합군, 그리고 후금군이 맞닥뜨렸던 지역에서 가까운 의주, 용천, 철산 등지의 피해는 극심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전란의 와중에 농작을 전폐하다시피 했고, '상황'이 종료된 뒤에는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는 더 심각했다. 후금이 전함을 확보하게 된 것도 문제였지만, 조선군이 공경 요격에 가담하여 후금군과 교전을 벌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명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조선의 '본심'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후금 내부에서는 당연히 '조선을 손봐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양국 관계의 파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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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장 광해군 평가의 극과 극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반정'이라는 단어 속에 원초적으로 담겨 있다. '반정(反正)'은 중국의 고전인 『춘추』나 『사기』 등에 보이는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이란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반정은 문자 그대로 '올바른 상태로의 복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정 이전의 광해군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일 수밖에 없다. 인조반정이 성공했던 직후, 쿠데타를 주도한 서인이나 그에 동조했던 남인들은 반정이 성공한 것을 가리켜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再造之慶)'라고 극찬했다. 나아가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윤리가 다시 맑아졌다"고 평가했다. 결국 '반정'이니 '재조지경'이니 하는 용어들이 사용되는 분위기 아래에서는─설사 광해군에게 평가받을 만한 치적과 장점이 있었고, 그의 시대에 무엇인가 배울 만한 요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광해군이나 그의 시대를 다시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었던 셈이다."(19)


"(반대로 만선사관학자 이나바가) 거의 망해가고 있었으며 부패가 극에 이르렀던 명이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행위를 불가피한 것이라고 칭찬한 것은 광해군의 대외정책의 '탁월성'을 한국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와 한 묶음인 만주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나바가 광해군을 '띄웠던' 것은 한국사의 자주성을 부인하는 만선사관의 틀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극단적이다. 부정적인 평가의 경우, 인조반정을 성공시켜 광해군을 쫓아냈던 서인들의 집권이 이어진 상황에서 광해군에 대한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죽이기'를 계속함으로써 그의 본 모습을 가리는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재평가는 식민사관이 노린 정치적 노림수에 말려들 위험성이 적지 않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양쪽 입장 모두 지극히 정치적이다."(31)


# 만선사관滿鮮史觀 : 조선의 역사는 만주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관.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독자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일본의 만주침략을 정당화한다.


2장 어린 시절


임진왜란 초기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피난 보따리를 싸고 있던 어수선한 상황에서 우부승지 신잡은 선조에게 종묘사직의 장래와 민심 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하라고 건의했다." "대신들의 입장에서는 열세 명이나 되는 왕자들 가운데서 다음의 주군이 될 인물을 함부로 천거하는 것은 엄청난 도박일 수밖에 없었다. 선조가 누구를 의중에 두고 있는지도 모를 뿐더러 당시 선조는 한창 장년의 나이인 마흔할 살에 불과했다." 침묵 속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선조는 광해군을 칭찬했고 신하들은 얼떨결에 선조의 말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선조 자신이 오랫동안 광해군을 의중에 두어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신잡의 건의를 즉석에서 받아들여 그를 왕세자로 결정한 것은 그야말로 '전격적'인 것이었다. 불과 1년 전, (후계자 논의를 거론한) 정철을 쫓아낼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의 상황이 선조에게는 그만큼 절박하게 인식되었다는 것의 반증이었다."(46-7)


3장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광해군이 분조分朝를 이끌고 처음 출발했던 것은 1592년 6월 14일이었다. 그는 이후 12월 말까지 영변, 운산, 희천, 덕천, 맹산, 곡산, 이천(伊川), 성천, 은산, 숙천, 안주, 용강, 강서 등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의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면서 흩어진 민십을 수습하는 한편 의병의 모집과 전투의 독려, 군량과 말먹이의 수집 운반 등 전란 수행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광해군의 활동은 왜란 초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유린되었던 조선 조정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항전을 독려하고 전쟁 수행에 나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백성들은 조정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분조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분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을 수행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분조를 이끄는 동안 광해군이 겪었던 고초는 대단히 컸다. 특히 산악지역에서의 노숙은 후유증이 커서 1593년의 봄과 여름 동안 광해군은 해주에 머물면서 계속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52-3)


"1593년 10월, 선조와 광해군은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강화논의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남해안 일대로 물러나 장기주둔 태세에 돌입했다." "명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 명나라 조정은 '광해군 카드'를 빼어 들었다. 광해군을 전라도,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보내 선조를 대신하여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토록 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선조 대신 광해군을 삼남지방으로 내려보내 명군을 지원토록 할 요량이었다. 1593년 윤달 11월 19일, 광해군은 다시 서울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분조가 아니라 '무군사(撫軍司)'라는 것을 이끌었는데 사실상 두 번째의 분조 활동이었다." "분조와 무군사 활동을 통해 왕세자 광해군은 조선 팔도의 남과 북을 거의 주유한 셈이 되었다." "그는 그 경험을 통해 전쟁이 백성들에게 남긴 상처를 직접 보았고, 왜란 중의 밑바닥 민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67-9)


"왜란이 끝날 무렵부터는 명 조정이 광해군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왜란 시기부터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해달라고 명 조정에 계속 요청했지만 명은 번번이 거부했다. 이유는 광해군이 맏아들이 아닌 둘째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결정한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책봉 주청서를 북경에 보냈지만 명은 그때마다 거절했다." 명이 조선의 요청을 집요하게 거부한 이유는 "명의 신종이 당시까지 황태자를 결정하지 않았던 것과 관계가 있다. 명 조정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아직 황태자를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번국의 황태자 책봉을 먼저 승인할 수는 없었다. 둘째이자 '첩의 자식'을 세운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되었다."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하고, 책봉하는 과정에서 명이 보였던 미온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는 광해군이 '반명감정'을 품는 데 충분한 소지를 제공했다고 여겨진다."(71-4)


4장 정인홍, 이이첨과의 인연


"선조의 죽음은 광해군에게 역설적으로 '복음'이었지만 귀양길에 올랐던 정인홍과 이이첨에게도 화려한 부활의 서곡이었다. 이제 그들은 선조에게 불충했던 '죄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광해군의 즉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공신'으로서 복귀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광해군에게 둘도 없는 협력자이자 은인이었지만 궁극에는 광해군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기도 하다. 왕세자로서 광해군의 위치가 흔들릴 때 정인홍은 목숨을 걸고 그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 즉위 이후 이이첨이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폐모논의를 제기하는 등 정치적 무리수를 둠으로써 반대파였던 남인과 서인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에는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특히 이이첨이 '왕권 강화'를 빙자하여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것은 자신뿐 아니라 정인홍과 광해군도 파멸의 길로 몰아갔다. 인목대비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광해군과 맺은 '악연'의 끈도 참으로 질겼다."(83-4)


"광해군이 벼슬을 내려도 받아들이지 않고 향리에 머물려고 했던 정인홍의 행태는 독특한 것이었다. 한말의 지사 황현(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정인홍의 그 같은 행태를 언급하면서 그를 조선시대 산림의 원조로서 지목했다." "그는 먼저 임진왜란 당시 일선에서 싸웠던 의병장 출신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정인홍은 고향인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와 곽재우의 의병활동 덕분에 경상우도는 보전될 수 있었다."(87-8) "정인홍이 보기에 남인 유성룡이나 서인 성혼 등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유성룡은 적과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혼은 피난길에 오른 임금이 지척에서 지나가고 있음에도 나와 보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정인홍은 성혼을 일러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자'라고 매도했다. 정인홍의 이 같은 태도는 유성룡과 성혼 등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제자들과 두고두고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90)


"조식의 학문과 훈도 방식은 이황의 그것과는 사뭇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황은 조식에 비해 제자들을 키우는 데 열심이었고, 전수했던 학문 역시 이론적인 측면을 중시했다. 그에 비해 조식의 그것은 확연히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칼이 상징하는 이미지처럼 결단을 강조했다. 정인홍은 조식에게 훈도를 받으면서 입신을 도모하는 학자보다는 활달한 실천가가 될 기질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실천가로서의 기질은 선조 초반 조정에 초빙되어 나아갔을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인홍은 1573년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것을 인정받아 처음으로 조정에 초빙되었다. 1577년에는 정5품 직인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곧이어 정4품 직인 장령으로 뛰어올랐다. 척신정치가 남긴 잔재가 채 가시지 않았고, 동인과 서인이 분열되어 있던 당시 정치판에서 정인홍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백관을 규찰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직무였던 사헌부 장령의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던 것이다."(93)


"이이첨 또한 광해군대 정치판에서 나름대로 '큰소리'를 칠 수 있을 정도의 역량과 정치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정인홍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중에 피난하지 않고 의병활동을 벌임으로써 의롭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었다. 또한 이이첨은 일본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임진왜란 초 광릉참봉(光陵參奉)이란 미관말직에 있으면서,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릴 위기에 처했던 세조의 영정을 보전하는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을 맞아 거의 모든 역대 국왕들의 영정이 불에 타거나 없어졌다. 겨우 보전된 것이 태조와 세조의 영정이었다. 그런데 태조의 영정은 조정 차원에서 보전에 힘을 기울였고 여러 고을에서 그것을 옮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세조의 영정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이첨의 활약 덕분이었다. 어쨌든 태조와 세조의 영정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국왕으로서 체면을 구겼던 선조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경사였기 때문이었다."(95-7)


5장 전란의 상처를 다독이다


"'당파를 불문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나가자.' 즉위 직후 광해군이 내놓았던 인사 정책의 화두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실천된다. 광해군은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남인 이원익을 임명했다. '오리 정승'으로 불렸던 그는 정치적 색채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지만 선조대 이래 원로 대신으로서 쌓은 명망과 경륜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높았다. 광해군은 그가 원만하게 붕당 사이의 대립을 추스려 조정을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광해군은 이항복과 이덕형도 중용하여 즉위 초반에는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정승직을 주고 받았다. 특히 이항복과 이덕형은 각각 국방과 외교와 관련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항복은 선조대 이래 여러 차례 병조판서를 지내 군사업무에 밝았다. 이덕형은 왜란 초 대동강에서 일본군 장소 겐소(玄蘇)와 담판을 벌인 적도 있는 당대 최고의 '일본 전문가'였다."(105)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기 위해 고심하던 광해군은 "즉위 직후인 1608년 5월, 경기도 지역에서 대동법을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공물을 현물로 걷는 대신 봄과 가을로 쌀 16말만을 내도록 하고 여타의 비용은 완전히 없앴다. 경기도 백성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것은 한마디로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반발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방납으로 먹고살던 모리배들, 지방의 향리들, 각 관청의 하인들, 땅이 많은 양반들은 아우성을 쳤다. 대동법을 아예 원수처럼 여겼다. 그들은 틈만 나면 대동법을 비방했다. 그들은 대동법을 관할하는 선혜청의 관리들에게 정치적으로 압력을 넣기도 하고 "대동법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고 운운하며 퇴진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대동법은 하층민들에 대한 정권 차원의 '양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백성들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당시 민생의 피폐가 심각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111-2)


6장 왕권강화의 의지와 집착


"정인홍은 스승 조식의 권위를 높이고 그를 대북파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그를 모시는 서원을 건립하는 한편 이황처럼 문묘에 모시기 위해 상소 운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이이첨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훈구파의 후예인데다 변변한 학연조차 없는 자신을 어떻게든 조식과 연결시키고 싶어서였다. 한마디로 이이첨은 '조식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이황과 이이의 문하생이라는 학연으로 뭉친 남인과 서인계의 재야사림들이 보여준 '단체행동'의 위력을 절감한 탓이기도 했다." "비록 정권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이첨 등은 사림들의 여론을 움직이고 그들의 심복을 얻어내는 것이 권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결국 광해군과 더욱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왕권을 등에 업고 '왕권강화'를 외치면서 그를 빌미로 자신들이 권력을 확대해 가는 방식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비극은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124-5)


# 회퇴변척晦退辨斥 : 오현 문묘 종사에 분노한 정인홍이 척신정치기인 명종대에 벼슬을 한 사실을 들어 이언적과 이황을 '변변치 못한 인물들'이라면서 비난한 상소 사건


"1613년 5월 23일, 대북파 이위경은 "인목대비는 저주사건을 일으키고 역모에 연결되었으니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끊어졌다. 전하는 비록 대비와 모자 관계이지만 인목대비에게 현저한 죄악이 있으니 종사(宗社)를 생각할 때 신하의 입장에서는 국모로서 대우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서인, 남인들 대부분이 '역모' 가담자로 몰려 제거됨으로써 조정 내에서의 폐모논의에 대한 반대는 비교적 잠잠했지만 문제는 재야 사림들의 반발이었다. 팔도의 유생들은 서로 통문을 돌려 폐모논의를 '금수(禽獸)의 행동'이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대북파를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것은 충이 먼저냐, 아니면 효가 먼저냐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주자성리학이 체제를 유지하는 정학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당시 사림사회의 분위기에서 우선 덕목은 역시 효였다. '효' 중심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에 대해 '폐모' 운운하는 대북파의 주장은 용인될 수 없었다."(132-3)


# 계축옥사(1613) : 문경 새재에서 은상銀商 살해사건을 벌인 양반 명문가의 서얼들(칠서七庶)이 역모 혐의에 휘말린 사건. 이들은 국문 중에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실토했고, 이 진술은 이후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폐비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은상살해사건'이 역모로 비화되고 다시 영창군 살해와 폐모논의가 불거지면서 정치적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정치적 긴장상태의 지속은 '토역 담당자'로서 대북파, 그 중에서도 이이첨의 정치적 기반을 굳혀주었다." "폐모논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이이첨 등이 몰아갔던 상황은 일종의 '공안정국'이었다. '광해군 왕권의 보위'라는 절대적 명제를 앞세워 모든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호역(護逆)'이라는 낙인을 찍어 정치적으로 제거해버렸다. 이이첨 등에게 강상윤리로는 '충'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효' 등 다른 덕목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는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려 했다." "거듭되는 역모사건을 거치며 신경이 더욱 예민해지고 불안했던 광해군이 그를 방임하게 되면서 '토역담당자'로서 이이첨의 권력은 비대해져갔다. 나중에는 광해군의 왕권까지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요컨대 이이첨은 사림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권간이 되었던 것이다."(136-8)


7장 '절대군주'를 꿈꾸다


"왜란 당시 경복궁과 창덕궁 등 주요 궁궐들이 불에 타버려 국왕들이 거처할 마땅한 궁궐이 없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광해군이 궁궐 건설에 열심이었다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창덕궁을 중건하여 거처할 궁궐을 확보한 이후에도 경덕궁, 인경궁 등 새로운 궁궐들을 대규모로 건설하는 공사를 벌였던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석연치 않은 것은 또 있었다. 광해군은 새 궁궐을 지으려 했으면서도 왜란 당시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당대인들에게 왜란이라는 대전쟁이 남긴 충격은 대단했다. 전쟁을 통해 죽고, 다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굶어죽고, 돌림병에 걸려 죽고,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고, 강간당하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인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느꼈던 사람들은 자연히 운수에 병적으로 집착하는가 하면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것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140-1)


"왜란 이후 선조는 신하들과의 경연 자리에서 다른 경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죽을 때까지 오로지 『주역』만을 강독했다. 그만큼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는 이야기다. 운수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광해군 역시 술사들을 몹시 가까이했다. 1612년(광해군 4) 9월 불거져 나왔던 "교하(交河)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이 같은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산군과 연산군이 쫓겨났던 장소인 창덕궁을 꺼림칙하게 여기던 광해군은 (술사) 이의신의 (천도) 주장에 계속 흔들렸고, 그것이 신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실현되기 어려워지자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1615년(광해군 7) 5월 23일, 머물고 있던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을 떠나 창경궁이나 정릉동 행궁을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두 궁궐을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시쳇말로 '대조전은 어둡고 칙칙해서 기분 나쁘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창경궁 등을 수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 궁궐을 짓는 수순으로 연결되었다."(142-4)


궁궐 건설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모든 토지에 공사비용으로 포목을 부과하면서 백성들이 아우성이 들려왔다. 왜란의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의 부가세는 엄청난 고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는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해왔다. 원병을 보내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파병 문제의 본질 역시 따지고 보면 돈 문제, 재정 문제였다."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금이나 은을 바치는 하층민들에게 공명첩을 나눠주고 실직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하는가 하면 죄수들에게도 속죄은(贖罪銀)의 명목으로 은을 거둬들였다." "은을 바치고 당상에 올라 이른바 납은당상(納銀堂上)이 된 백성들 가운데는 폐모논의가 벌어질 때 인목대비를 처벌하라는 정치적 의사표시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나 광해군과 대북파를 가뜩이나 '흘겨보고' 있던 남인계나 서인계 사대부들이 보기에 그것은 분명 '말세'였다."(150-1)


8장 대륙에서 부는 바람


조선에 주둔하던 명군은 턱없이 부족한 상점 수와 면포와 쌀을 이용한 상거래 관행으로 곤란을 겪었다. "명군 지휘부가 생각해낸 대책은 명나라 상인들을 조선으로 불러들여 장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과 거리가 가까운 요동의 상인들이 주목되었다. 명군 지휘부는 상인들에게 노인(路引)을 발급했다. 일종의 통행증명서였다. 그것을 소지한 상인들에게 조선으로 들어와 상행위를 하도록 권장했다." "일단 그들이 노린 것은 명군의 봉급으로 뿌려지는 은이었다. 명군 지휘관들은 상인들을 아예 각 부대별로 배속시켰다. 병력이 이동하면 상인들도 따라서 이동했다." "수천리 길을 마다않고 조선까지 들어온 상인들이 명군과의 거래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들이 조선에 널려 있는 은광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뒤를 봐주는 명군 지휘관들을 통해 조선 조정에게 은광을 개발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159-60)


"명군에 보기에 은을 이용하여 거래할 줄도 모르고, 그것을 채굴하는 데도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조선 신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161) "본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서울에 올 경우, 그들에게 모시나 부채, 화문석과 같은 토산물을 예물로 주었다. 하지만 왜란을 거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왜란 중의 경험을 통해 조선에서도 은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데다, 은이 부족해지고 은가가 치솟고 있던 명 내부의 사정이 맞물리면서 명사들은 은만을 요구했다. 명나라 사신들의 은 징색은 광해군대에 들어와 절정에 이르렀다. 그 액수는 거의 10만 냥에 육박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임해군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사실을 조사하고 광해군의 국왕 자격을 심사하겠다고 왔던 엄일괴와 만애민이 수만 냥의 은을 챙겨갔다고 이야기했거니와 이후 조선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봉'이 되었다. 명나라 환관들 사이에서는 "조선에 가서 한밑천 잡자"는 풍조가 생겨났다."(167-8)


9장 외교 전문가! 광해군


광해군 외교전술의 기본 방침인 '기미책'은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오랑캐를 다독거려 '온다고 하면 막지 않고, 간다고 하면 잡지 않는' 소극적인 현상유지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개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의리와 명분을 얘기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이므로 잘 구슬려 평화를 유지하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침략 근성을 버리지 않는데 언제까지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한편으론 기미책을 써서 다독거리면서 다른 한편에선 힘을 길러 침략에 대비하려고 했다. '자강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제 광해군은 누르하치가 쳐들어올 경우를 상정하고 방어대책을 마련하는 데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방어대책을 세우려면 적을 알아야 했다. 광해군이 명청교체기에 취한 외교적 대응책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정보 수집 노력이었다."(187-8)


"방어대책을 마련하는 데 노심초사했던 광해군의 혜안은 일본에 대한 정책과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후금을 막는 데 필요한 무기 확보에 열성이었던 그는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다. 왜란 중의 경험을 통해 일본산 장검과 조총의 우수성을 인식한 터라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그를 구입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비밀리에 타진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여 년밖에 안되어 일본을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원수'로 여기는 풍조가 퍼져 있던 상황에서 그 같은 탄력적인 태도는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1609년(광해군 2)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던 것도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켜 점증하고 있던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는 데 전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서북방의 후금과 동북방의 일본,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로부터 협공당하는 시대적, 지정학적 현실을 인식했던 그가 조정 내외의 비판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택한 것은 고민 끝에 선택한 고육책이었다."(194)


10장 명청교체의 길목에서


"광해군이 이미 쫓겨난 뒤인 1627년 (심하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던) 강홍립은 후금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온다. 정묘호란 당시 그는 향도로서 차출되었던 것이다. 그는 강화도로 피난했던 인조를 알현했다. 강화협상을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인조 주변의 신료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인조는 의외로 그를 감싸주었다." 강화가 성립한 후 조선군 지휘관 정충신은 철군하는 강홍립에게 편지를 보내 후금군을 단속하여 살육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정이 강화로 피난 간 와중에 한강 이북의 조선 백성들은 '도마 위의 고기'였다. 강홍립은 정충신의 부탁대로 후금군의 살육을 막기 위해 노력했거니와 강화협상을 주선하여 후금군을 철수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뒷날 강홍립은 '매국노'로 매도되는가 하면 철저히 잊혀졌다. 요컨대 '심하 전투'는 강홍립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211-2)


11장 광해군, 명을 주무르다


"절강 출신인 모문룡은 1621년 7월, 요동 전체가 후금에게 점령되었던 직후 압록강변의 진강으로 잠입하여 그곳을 점령했다." "1621년 요동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이후 후금의 목표는 고정되었다. 이제는 북경을 향하여, 그 북경으로 건너가는 관문인 산해관을 향하여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오로지 서진(西進), 또 서진만을 염두에 두었던 후금에게 갑자기 나타난 모문룡은 한마디로 '목에 걸린 가시'였다. 하지만 모문룡이 진강에 어렵사리 마련한 거점은 오래갈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우선 그가 거느린 병력이 너무 미약했던데다 그의 진영이 명 본토로부터 고립되어 증원군을 끌어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금의 대병력이 압박해오자) 모문룡은 1621년 7월,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곶에 상륙했다. 평안감사가 올린 긴급 장계를 통해 그가 미곶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바짝 긴장했다."(224-5)


# 요민遼民 : 요동에 살던 명나라 주민들이 후금군을 피해 조선으로 대거 몰려들면서 발생한 난민들


조선은 세 가지의 난제에 직면했다. "우선 '천조(天朝)의 장수'인 그를 접대하는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모문룡뿐 아니라 당시 조선에 들어왔던 명군 장수들 가운데는 처자식을 동반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에게 식량과 거처의 제공을 요청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게 되면서 조선은 후금과의 접촉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1621년 정탐을 위해 정충신을 후금 진영에 파견하면서도 모문룡이 알까 봐 그것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실제 당시 명의 신료들 가운데는 모문룡에게 조선을 견제하여 후금측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감시자' 역할을 주문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조선은 무엇보다 모문룡 때문에 후금을 자극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모문룡이 "조선과 연결하여 후금의 배후를 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 영토에서 장기간 주둔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데다 그가 들어온 뒤로는 조선으로 드나드는 명 장졸들과 요민들의 수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다."(226-7)


"모문룡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던 광해군의 선견지명은 1629년에 입증되었다. 그해 모문룡이 영원순무(寧遠巡撫) 원숭환(袁崇煥)에 의해 처형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은 열렬한 중화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모문룡이 해마다 수십만 석의 군량을 챙기면서도 후금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결국 그는 요동을 수복하려면 모문룡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모문룡의 행태를 관찰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원숭환은 그를 쌍도(雙島)라는 섬으로 유인하여 처형하면서 12가지의 '죄악'을 들이댔다." "배부른 모문룡은 요동 수복을 꾀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다만 가끔씩 조선으로 가는 사신이 섬에 들를 때 후금을 치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지천으로 널린 재물을 밑천 삼아 뇌물로써 환관 위충현을 비롯한 부패한 조정 요인들을 구워 삶았다. 자신에 대한 감시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627년경부터는 아예 후금과 내통하고 있었다."(230-1)


"광해군은 '심하 전투' 이후 그야말로 '뻔질나게' 명 조정으로 사신을 보냈다. 명 조정에 감돌고 있던 조선에 대한 불온한 분위기를 탐지하고, 명의 재징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포석이었다. 1619년 11월, 광해군은 측근 윤휘를 보내 요동경략(遼東經略)에게 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만주의 진강과 관전에 명군을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 올 경우 명군이 달려와 구원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깜냥이었다. 이제 명과 후금의 대립 구도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명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궁극에는 명이 조선에 대해 더 이상 재징병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고도의 전술이었다. 한마디로 명에 대한 '외교적 역공'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심하 전투' 이후 광해군의 대외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때 신료들의 주장은 거의 무시해버렸다. 신료들과 격렬한 찬반 논의를 벌인 끝에 보냈던 원병이 대패했기 때문이었다."(240-1)


# 광해군이 명의 징병 요구를 거부한 이유

1. 임진왜란 당시 겪은 전쟁의 참혹함과 후금의 강성한 위세

2. 왕권 강화 사업(특히, 토목공사)과 병행 불가

3. 즉위 이후 수시로 자신을 괴롭힌 명에 대한 ‘반명감정’


# 심하 전투가 국내에 미친 영향

1. 전투병 1만 명 징집, 군량 마련, 방한복 준비 등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다.

2. 그 와중에 전라도와 충청도에 심각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배가되다. 화적떼가 늘어나다.

3. 병사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억류되어 노동력 및 군사력이 훼손되고, 유족들의 슬픔이 끊이지 않다.


"병력을 징발하고 세금을 더 거두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던 전라도와 충청도, 도성 주변에서는 화적까지 날뛰었다. 후금에 대한 두려움에 방어대책 마련 과정에서 부과되었던 경제적 부담에 대한 반감이 더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대부들은 강홍립의 항복과 그 이후 광해군이 취했던 대외정책을 '강상 윤리를 무너뜨린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강홍립이 후금군에게 항복했던 것이 화이론자인 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이미 영창군이 죽고 폐모논의가 제기된 이후 조정에서 마음이 떠난 그들이었다.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하려 들더니 이제는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도와달라는 명의 요청마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려 했다. 그들이 보기에 조정에서 하는 일이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사대부들은 사대부들대로, 하층민들은 또 그들대로 조정에 대한 반감과 불만이 커져가면서 사회 전반이 동요하고 있었다."(249-51)


12장 반정인가 찬탈인가


"반정의 핵심 주체인 김류, 이귀, 김자점, 구굉 등은 대개 서인계열의 사대부들이거나 인조와 연결된 외척들이었다. 특히 사대부들 가운데는 이이, 성혼, 김장생의 문하들이 많았다. 이처럼 반정 주체들은 대북파에 비해 사제 관계로 연결된 학연적 기반이 확실하고, 성리학을 배운 '학인(學人)'으로서 자의식이 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첨 등 대북파의 견제에 밀리거나 계축옥사 등을 계기로 대북파의 '토역 대상'이 되어 조정에서 쫓겨남으로써 광해군과 대북파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과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광해군 정권이 계속될 경우 주변부를 빙빙 돌다가 일생을 마쳐야 했을 것이고, 아니면 또 무슨 명목의 역모죄에 걸려 비명횡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광해군대 반정 주체들은 몇 사람을 빼고는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설사 벼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광해군 정권 하에서 입신할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 '주변인'들이 대부분이었다."(263-6)


# 반정공신들의 밀약 :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처럼) 왕과 국혼國婚관계를 맺고, (정인홍처럼) 위세 있는 산림을 중용한다.


"'난신적자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명 조정의 강경한 분위기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군신(君臣)' 사이의 명분이나 종주국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려면 조선의 반정 주체들을 토벌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명의 현실은 조선과의 관계에서 명분만 따지기에는 너무 급박했다. 어떻게 해서든 조선을 후금과의 대립 구도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이제이'를 하려면 조선을 다독거려야 했다. 신료들 가운데는 인조를 잠정적으로 승인하되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명을 도와 후금을 치는가를 살펴본 뒤에 최종 결정을 내리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명이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이었다." "1625년(인조 3) 1월 희종황제는 모문룡에게 칙서를 내려 마침내 인조를 조선국왕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 그 사실을 조선에 전달할 것과 조선과 힘을 합쳐 후금을 정벌하라고 지시했다."(275-6)


13장 권력 16년, 춘몽 16년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괄이 평안병사로 부임한 직후 문회, 이우 두 사람이 이괄을 밀고했다. 이괄과 한명련, 기자헌 등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624년 1월 17일 인조가 이괄을 잡아오라고 보낸 금부도사가 이괄의 병영으로 들이닥쳤다. 이괄은 그들을 베어 죽이고 남하했다. 이윽고 정부군의 주력인 장만 휘하의 병력을 깨뜨리자 임진강을 지키던 이귀는 도망쳐서 인조에게 파천하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결국 파천했고 이괄은 서울을 점령했다. 이괄은 서울 점령 직후 흥안군(興安君)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선조의 열번째 아들로 인조에게는 숙부뻘이었다. 한번 배반한 인물은 계속 배반한다고 했던가? 인조가 경기 방어사로 임명한 이홍립은 이괄에게 투항했다. 인조반정이 있었던 당일 훈련대장으로서 반정군에게 투항했던 바로 그 이홍립이었다."(282)


"이괄에게 혼쭐이 난 반정공신들이 반란 진압 이후 내놓은 대책은 표피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기찰(譏察)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공작정치'의 냄새가 짙었다. '반(反)혁명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전방위적으로 사찰을 강화했다." "기찰로 불리는 공작정치가 강화되면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불신 풍조를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감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들의 훈련이었다. 기찰이 강화되면서 지방의 무관들은 습진(習陣, 병사들을 모아 진을 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을 기피했다. 혹시라도 역모를 꾀하기 위한 병력 동원훈련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훈련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후유증은 후금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대로 나타났다." "반정공신들은 직무 유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사욕(私慾)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83-4)


"(강화도로 유배된) 광해군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들과 연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태안으로 옮겨졌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뒤부터 인조나 반정공신들이 보기에 광해군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쉽사리 그를 '처리'해버릴 수는 없었다. 광해군이 영창군을 죽였다는 것을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그들로서는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광해군은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 이듬해인 1637년에는 다시 제주도로 옮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바로 그해였다. 후금과 사단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던 광해군인만큼 인조나 서인들의 입장에서는 그가 자신들과 가까이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폐위된 이후에도 19년을 더 살았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세월보다 더 길었던 셈이다. 그는 1641년(인조 19) 7월 1일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눈을 감았다."(2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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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김범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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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대에 정립된 삼사는 외척들이 부당하게 얻어낸 각종 특권과 포상에 반대하는 의견을 수시로 제출했다.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삼사의 이런 언론은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삼사가 비판한 대상이 자신과 사적인 친밀도가 높은 외척들이었기 때문에 국왕의 불쾌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삼사의 언론활동에는 중요한 특징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짧게는 두 달부터 길게는 1년까지 끈질기게 지속되었으며, 국왕이 일정한 타협한을 제시하거나 부분적으로 요구를 수용해도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완전하게 관철시키려고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달리 보면 이것은 당시의 삼사가 그만큼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왕권의 자유로운 행사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를 지니고 있던 국왕에게는 더욱 심각한 폐해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일부 대신들도 국왕의 그런 판단에 공감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능상陵上'으로 규정했다."(101)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와 관련된 비극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즉위한 지 넉 달 만의 일이었다. 윤씨가 세상을 떠난 지(성종 13년 8월) 14년 만이었다." "그날 수라水刺를 들지 않았다는 짧은 기록은 18세였던 국왕의 충격과 비통을 깊게 비춰준다." "폐비의 추숭과 그 친족의 우대라는 두 가지 사안은 연산군이 가장 집중적으로 노력한 문제였다. 삼사는 즉각 반대했다. 그들의 주요한 논거는 성종이 전하를 생각해 묘소를 가려서 장사했고 지키는 군사를 두었으며 현지의 관원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했으니 고장藁葬이 아니고, 폐비한 조치는 성종의 독단이 아니라 대비들이 충분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며, (폐비의 추숭을 건의한 창원부사) 조지서 같은 미관이 국가의 막중한 일을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폐모의 추숭 작업은 일단 중지되었지만, 곧 재개되었다.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묘소를 옮기고 사당·석물 같은 시설을 다시 정비하는 것이었다."(105-6)


"가장 중요한 권력의 하나인 인사권을 계속 문제 삼는 삼사의 언론에 국왕은 강경하게 맞섰다. 그는 "대간의 말 때문에 육경六卿을 모두 바꾼다면 권세가 대간에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대들을 삼공에 제수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너희는 자질구레한 문서 업무나 처리하는 관리[刀筆之吏]"라고 질타했다." "삼사는 정승의 임명을 반대해 관철시켰고, 의정부·육조에 재직하던 거의 모든 현직 대신들의 능력과 품성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이수공과 최부의 상소에서 나타났듯이 거기에 동원된 수사는 대단히 과격하고 직설적이었다. 탄핵받은 대신들은 즉시 사직했으며, 인사권을 국왕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정도의 소극적인 방어로 대응할 뿐이었다. "대신을 탄핵하는 것은 국왕을 탄핵하는 것이며 대간의 말 때문에 대신을 교체하면 권력이 대간에 있는 것"이라는 국왕의 심각한 문제의식은 이 시기 대신과 삼사의 역학관계를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116-8)


"삼사에게 성종은 이상에 가까운 국왕이었고, 그의 시정施政은 후대의 임금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중요한 모범이었다. 삼사는 연산군에게 모든 일에서 성종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누차 간언했다. 그 핵심적 덕목은, 예상할 수 있듯이, 너그러운 납간이었다. 우선 성종 자신부터 그런 태도를 적극적으로 밝혔다. 삼사의 회고에 따르면 성종은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이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는 『상서』의 구절을 읽고 커다란 깨달음과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임금의 도리 중에서 이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 내가 즉위한 이래 간언을 이유로 죄준 신하는 한 명도 없었으니, 그대들은 내 뜻에 거슬릴 것을 염려하지 말고 잘못되는 일이 있거든 모두 말해야 한다." 삼사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은 이처럼 간언을 처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였으며 삼사를 우대한 성종의 시책 덕분에 나라가 융성했다고 평가했다."(133)


그러나 연산군은 "능상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후세의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다." "삼사도 무수히 사직했지만, 연산군도 삼사를 체직하거나 국문하라는 지시를 거리끼지 않고 빈번히 하달했다. 예컨대 재위 1년 6월 윤탕로의 처벌과 관련된 논란에서 그를 용서한다는 단자를 네 차례나 내렸지만 삼사가 받아들이지 않자 연산군은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라면서 모두 체직하고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재위 2년에도 동료를 하옥해 국문하라는 왕명에 반발해 삼사가 모두 함께 투옥되겠다고 하자 국왕은 기꺼이 승낙했으며, 폐비의 신주와 사당 건립에 반대하는 삼사를 모두 의금부에 내려 당일 안에 국문을 마치고 모두 교체하라고 명령했다. 이듬해에는 부제학 이승건이 제수祭需의 과다와 경연의 불참을 지적하자 국왕은 가소롭다면서 술과 고기를 내리니 실컷 먹고 돌아가라는 조롱에 가까운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138-9)


"무오사화는 그 처벌 대상과 지속 기간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매우 제한된 규모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규모의 전면적인 숙청이 아니었으며, 그런 파국을 감행하기에 앞서 일단 소수의 핵심 인물들을 처벌함으로써 그 배후의 전체에게 경고하려는 상징적이며 심층적인 의도를 지닌 정치적인 사건으로 생각된다."(144) "사화는 크게 세 단계로 전개되었다. 그 사건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와 관련된 불충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혐의로 시작되어, 그와 교유한 젊은 관원·선비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문제로 확대되었다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되면서 사제관계를 매개로 붕당을 결성해 역사와 현실에 역심逆心을 품은 사건으로 규정되는 과정을 거쳤다." "실제로 김일손의 사초는 단종·사육신·소릉 같은 중대한 정치적 사안부터 홀로 된 며느리를 취하려는 패륜에 가까운 세조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대단히 민감한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었다."(146-7)


"이 사건을 계기로 사화의 주요한 처벌 대상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부류로 좁혀졌다.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서로 붕당을 맺어 그릇된 발언과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 계기를 이용해 그동안 불만스러웠던 대간의 행태를 일소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나아가 국왕은 국무에 관련된 발언과 기록 전체를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그동안 그가 가장 불만스러워했고, 따라서 가장 이루고 싶어한 목표는 아마도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김일손과 김종직의 불온한 문서에서 촉발된 사화에는 삼사도 적지 않게 연루되었다. 전자의 죄목은 사제관계를 매개로 현실과 역사에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고, 후자는 그런 그들과 붕당을 맺어 비호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붕당과 능상이었다. 국왕은 이 사화를 계기로 삼사의 행동을 교정하고 새로운 선발 지침을 하교함으로써 그동안 가장 불만스러웠던 집단을 자신의 의도와 부합되게 바꾸려고 시도했다."(159-160)


"사화 이후 일단 삼사가 상당히 순치順致됨으로써 그동안 그들의 반대로 행동을 제약받아온 국왕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구상을 한결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유례없는 파국인 갑자사화였다는 점에서 그런 실천의 과정과 방법은 순조롭지도 정당하지도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국왕의 일탈이었다. 재위 중반 강력해진 왕권을 갖게 된 국왕이 그런 권력을 가장 집중적으로 행사한 분야는 정치나 제도의 개혁 같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치·사냥·연회·음행 같은 비정치적이며 비본질적인 사안들이었다." "따라서 그동안 국왕에게 동조해온 대신들도 왕권의 자의적 행사를 비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치 세력의 협력관계는 대신과 삼사가 가까워지고 국왕이 고립되는 형태로 변모해갔다. 갑자사화가 대신과 삼사를 아우른 신하 대부분에 대한 국왕의 무차별적인 숙청으로 귀결된 까닭은 이런 정치적 지형의 재편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177-8)


# 왕권 일탈의 증거들

1. 늘어난 사치 : 왕실 씀씀이를 충당하는 공안貢案 확대

2. 사냥 탐닉 : 사냥 준비에 실수한 관원들을 혹독하게 처벌

3. 응방의 확대 : 각종 사냥용 짐승들을 궁궐에서 사육

4. 연회와 음행 : 재위 8~9년 이후 본격화(갑자사화 이후 흥청興淸 등과 관련해 폭발적으로 증가)

5. 정보 차단 : 궁궐에 인접한 도로의 통행금지와 민가 철거

6. 언로 통제 : 국왕/궁궐과 관련된 발언을 극단적으로 통제


# 갑자사화의 특징

1. 대신과 삼사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신하들이 연루되었다.

2. 능상 척결과 폐모 사건 보복이라는 원인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집요한 소급 처벌이 행해졌다.

3.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유례없이 ‘장기적인 숙청’으로 이어졌다.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발단은 이세좌 사건과 홍귀달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전자는 잔치에서 어의에 술을 엎지른 실수였고, 후자는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즉시 이행하지 않은 사안이었다. 연산군은 두 사건을 능상의 표본으로 판단했고, 그 결과 집요하고 거대한 피의 숙청을 벌였다." "이세좌가 폐비에게 사약을 전달한 좌승지였다는 공교로운 우연이 겹쳐지면서 그 사안은 능상의 처벌과 폐모 사건의 복수라는 갑자사화의 도화선을 형성했다."(227-8) "이세좌가 방면되었을 때 거기에 반대하지 않은 삼사와 그를 문안한 신하들을 낱낱이 적발해 석 달에 걸쳐 가혹하게 처벌했다. 요컨대 연산군의 의지는 "지금 사건을 계기로 불경하는 풍습을 통렬히 고치려는 것"이었다. 핵심적인 폐해인 능상에 저촉되었다고 국왕이 판단한 죄목은 수없이 많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모후의 폐비와 사사였다. 사건은 곧 그리로 번져갔고, 숙청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234-5)


"재위 8년 2월 연산군은 "국왕이 첩의 침소를 살피지 않고 왕후를 폐위시킬 때 조정의 신하들은 목숨을 잊고 간언하는 것이 옳은가, 죽음을 두려워해 순종하는 것이 옳은가" 하고 물었다.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폐모 사건을 지칭한 발언이라는 것은 또렷했다. 여기에는 국왕의 오판을 유도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런 오판을 막지 못한 신하들에게 그 사건의 핵심적인 원인이 있다는 판단도 명백히 담겨 있었다. 아울러 그 비극은 지존의 국왕인 자신을 참척慘慽의 고통으로 빠뜨렸다는 점에서 바로 가장 중대한 능상이었다. 이런 판단은 2년 뒤 갑자사화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236-7) "300명에 가까운 대규모의 인원을 참혹한 방법으로 처벌하는 거대한 폭력으로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연산군은 자신의 욕망을 전혀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현실화할 수 있었다." "갑자사화 이후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꼭 2년 반 동안 연산군이 보여준 행태는 황음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250)


처절한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완전히 제압된 신하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제도는 재위 11년 후반부터 시작된 허한패許閑牌의 사용으로 생각된다. "한가롭게 쉬는 것을 허락한다"는 그 패의 의미대로 국왕의 소집이나 업무로 예궐한 신하들은 그 패가 내려진 뒤에야 퇴궐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국왕이 사냥이나 유흥으로 금표에 늦게 행차해 늦게 환궁하는 날이면 재상들은 한밤이 되어도 귀가하지 못하고 대기해야 했다. 신하들은 이런 억압에 시달렸지만, 도리어 더욱 신실한 충성을 강요받았다. 모든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판자에 새겨 벽에 걸어놓고 보아야 했다. 관원들의 사모 앞뒤에 각각 '충忠·성誠'이라는 글자를 새기게 한 조처는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연산군은 사헌부와 사간원이 서로를 국문하고 재상과 대간이 서로를 탄핵하게 했으며 조하·조참 때는 대간과 감찰이 신하들을 규찰케 함으로써 신하들끼리 감시하고 대결하는 구도를 만들었다."(254-5)


"연산군은 주요 제도를 크게 변개하거나 완전히 혁파하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폐기한 대상은 그동안 가장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웠던 경연과 삼사였다. 연산군은 경연관을 진독관으로 고쳤다가 아예 폐지했으며 홍문관과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그리고 대간의 서경도 없앴다. 궁궐과 너무 가까워 금표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여러 관서들의 위치도 옮겨졌다. 유교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상징성을 지닌 두 기관인 성균관과 문묘는 각각 원각사와 도성 남쪽으로 쫓겨갔으며, 성균관 관원과 유생은 태평관으로 옮겨졌다." "이런 행동의 주요 동기는 불만스러운 제도를 완전히 종식시키려는 정치적 목적과 거대한 사치에서 비롯된 재정의 고갈을 해소하려는 경제적 필요였다. 전자는 흡족스럽게 달성되었지만, 후자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긴요하지 않은 모든 비용을 줄여 계평 등에게 지급하는 데 사용하라는 왕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시도였다."(262-3)


"여색의 탐닉과 관련된 사항은 지금까지 보아온 연산군의 자의적인 왕권 행사에서 극점을 형성했다고 할 만하다. 엽색행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은 갑자년 후반부터 폐위될 때까지 만연했다." "그는 순 임금이 요 임금의 두 딸을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자주 거론했으며 예부터 호걸스러운 제왕들은 풍류와 여색에 많이 빠졌지만 국가의 흥망은 거기에 좌우된 것이 아니라 신하의 충성과 간사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갑자년 이후 당唐 현종玄宗은 여색(양귀비) 때문이 아니라 이임보·양국충 같은 간신들 때문에 나라가 멸망한 사례로만 자주 거론되었으며, 그가 삼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사실도 추가되면서 국왕의 황음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선례로 기능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한漢 성제成帝와 송宋 휘종徽宗도 조비연과 이사사라는 애첩을 거느리고 후원에서 유희를 즐겼다면서 자신의 역사적 논거를 보강하기도 했다."(281-3)


"연산군 12년 9월 1일 저녁, 동대문 부근의 훈련원訓練院에 집결한 반정군은 먼저 진성대군晉成大君에게 반정의 경위와 추대 의사를 아뢴 뒤 3경(밤 11~1시)에 창덕궁을 포위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연산군은 턱이 떨려 말을 잇지 못했다. 겁에 질린 국왕의 모습대로, 상황은 금방 판가름났다. 동틀 무렵까지 창덕궁은 숙위宿衛하던 군사와 시종·환관·나인들이 모두 도망가 텅 비었고 결국 정문인 돈화문이 열렸다. 박원종 등은 환관을 보내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고 동궁으로 옮기라는 의사를 전달했으며, 연산군은 순순히 따랐다. 가장 중요한 장소인 창덕궁의 상황을 종결한 반정군은 경복궁으로 가서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생모로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정현왕후에게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켰다는 사실과 진성대군을 옹립하겠다는 계획을 아뢰었다. 그날 신시(오후 3~5시)에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 최초의 반정은 만 하루도 안 되어 성공했다."(311-2)


"세자 시절부터 삼사의 언론활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온 연산군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언론을 용인하거나 지원했던 성종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능상의 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런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폐모 사건이라는 개인적인 원한과 맞물리면서 증오의 수준으로 비화했다. 삼사가 연산군을 비판하는 논거로 거의 언제나 성종의 선정善政을 거론한 것도 부왕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치세의 종결을 몇 달밖에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지금은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라는 성종의 자평대로 성종 후반, 그리고 연산군대 초반의 삼사는 분명히 일정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의 중요한 오류는 "본질적 문제와 비본질적 사안을 혼동하거나 우선순위를 뒤바꿈으로써 본래의 목표에서 이탈해간 것이었다. 그런 과정의 최종적 결과는 거대한 폭정과 강제적인 폐위였다."(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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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객체를 본뜬 형태만으로는 그림문자일 수는 있어도 문자가 될 수는 없다. 형태가 객체를 상기시킬 뿐, 말은 개재介在되지 않기 때문이다. 객체를 본뜬 형태는 객체를 일컫는 언어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비로소 문자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한자의 가장 원초적인 메커니즘인 <상형>에서는, <형形>이 <음音>을 불러일으키고, 그 <음>은 <주체 안에서 상기되는 객체>인 <의意>를 불러일으킨다. <형>도 <상기되는 객체인 의>를 떠올리게 하고, 그 <의>는 그 뜻을 일컫는 <음>을 불러일으킨다. 한자의 이러한 <형음의> 트라이앵글이야말로 언어음이 문자가 되는, 즉 <말해진 언어>가 <쓰여진 언어>로 태어나는 결정적인 메커니즘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한국에서도 천여 년에 걸쳐 소중히 간직해 왔던, <상형>을 핵심으로 한 이 <육서의 원리>와 <형음의> 통일체라는 시스템에 결별을 고하였다."(88-9)


# 음소(音素, phoneme) : 단어의 의미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언어음의 최소 단위. 가령, '말/달/날/살'에서는 'ㅁ/ㄷ/ㄴ/ㅅ'이 음소이고, '말/물'에서는 'ㅏ/ㅜ'이 음소이다.


"<음소>를 탐구하는 언어학의 분야는 <음운론>(phonology)이라 불리며, 언어음 자체의 발음법이나 물리적 성질 등을 연구하는 <음성학>(phonetics)으로부터 독립했다." "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언어의 모든 음소를 확정하고, 각각의 음소에 하나씩 자모字母로서의 형태를 할당해 주면 된다. 문자의 평면에서 서로 다른 자모는 음의 평면에서도 다른 소리가 되며, 그것이 각각의 의미를 구별해 주는 것이다. 놀랍게도 15세기의 <훈민정음>은 언어학이 20세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조우한 <음소>라는 개념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한편, 발음하는 단위로 언어음을 나누면 <음절音節>이라는 단위를 추출할 수 있다. 한국어로 예를 들면 '어머니'라는 단어는 한국어 모어화자라면 모두 '어·머·니'라는 3개 단위로 분절하여 발음한다. 아무도 '엄·언·이'처럼은 발음하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어·머·니'라는 3개의 단위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이 <음절>이다."(144)


"<정음>은 언어음을 내는 사람의 음성기관의 모양을 <상형>했다. 왜? 다름 아닌 그 <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요컨대 <정음>은 <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 발생론적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형태>를 찾고, 보이는 형태로 <상형>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형태로 <상형>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창제자들은 <정음>의 근원, <음>이 <형태>를 얻는 근원을 그렇게 규정하고 그렇게 선언하고 있다."(158) "소쉬르는 언어의 근본원리로서 <선조성線條性>을 제2원리로, <자의성恣意性>을 제1원리로 보고 있다. 언어음이 나타내는 의미와 소리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으며, 이는 순전히 자의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오노마토페이다. 개 짖는 소리는 '왕왕', '멍멍', '바우와우', '바우바우' 등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언어의 음과 의미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오노마토페를 제외하면. 그리고 문자와 음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훈민정음>을 제외하면."(160-1)


# 오노마토페 : 의성의태어


"『훈민정음』은 종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終聲(종성)은 復用初聲(부용초성)하니라.' 종성은 다시 초성을 사용한다." "먼저 음절의 첫 자음 또는 제로 자음, 즉 초성을 분리한다. 이것은 중국 음운학이 이미 한 일이다. 성모聲母(initial)가 그것이다. 단 중국 음운학은 여기에 게슈탈트(형태)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런 다음 남은 부분 중에서 모음마저 떼어내지 않으면 종성은 단위로서 추출할 수 없다. 모음과 종성을 추출하는 음성학적 차원의 관찰과, 그것을 음소로 다루는 음운론적 차원의 사고가 없다면, 종성은 추출할 수 없고, 하물며 그 종성에 게슈탈트를 부여할 수도 없다." "종성자모로 초성자모를 사용한다는 이러한 생각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정음>의 창제자들은 이론 무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성이 종성이 되고 종성이 초성이 되는 것은, 음이 양이 되고 양이 다시 음이 되는 이치에 근거한다는 식으로 말이다."(167-8)


# <게슈탈트> = <형태> = 개개의 요소로 환원해서는 얻을 수 없는, 지각상知覺上의 총체로서 통합된 모양


라틴문자나 키릴문자와 달리 "<정음>에서 자모는 아직 하나의 <글자>가 아니다. 자모는 설명을 위해 자모 자체를 표기할 때 이외에는 그것만으로 쓰여지는 일은 없다. 자모는 어디까지나 글자를 구성하기 위한 유닛일 뿐이다. <자모≠글자>, 요컨대 자모는 원자原子요, 글자는 분자分子이다. 이들 자모의 유닛을 조합해서 하나의 글자 유닛을 완성한 후 사용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음이 하나의 자모인 <단음문자單音文字>라는 성격과, 하나의 음절이 하나의 글자라는 <음절문자音節文字>의 성격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문자체계가 완성된다. <단음=음절문자> 시스템의 성립이다." "<훈민정음>은 음의 평면을 다시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이라는 두 개의 층으로 계층화하여 바라보고 있다. 음의 평면을 두 개의 층으로 계층화한다. 그 계층화는 문자의 평면에서도 게슈탈트상으로 두 가지 층위를 구별하는 동시에 통합하는 표기 시스템이다."(179-80)


"음의 최소 차원에 있는 음소에 하나의 자모를 부여하고, 음소가 합쳐진, 음의 더 고차원적 레벨인 음절에, 자모의 결합체로서 하나의 글자를 부여한다. <음소=자모>를 조합해서 <음절=글자>를 만든다. 이런 방식으로 <단음=음소>의 배열을 나타냄과 동시에 음절이라는 단위의 <외부 경계>뿐 아니라 음절의 <내부 구조>도 나타낸다. 'ㅂ'p, 'ㅏ'a, 'ㅁ'm과 같은 단음문자 유닛(음소의 평면)과, '밤'pam과 같은 음절문자 유닛(음절의 평면)이 음소와 음절 각각의 층에서 <형태>로서 위치를 차지한다. 동시에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 두 가지 층의 표현 방법 면에서도, 그 두 층을 꿰뚫는 단음문자 유닛만으로 두 층의 <형태>가 성립하는 경제적인 구조이다. 게슈탈트로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ㄱ', 'ㄴ', 'ㅏ', 'ㅗ' 등 단음문자 유닛뿐이며, 음절 유닛을 나타낼 별도의 게슈탈트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181)


"<음>을 해석하고 여기에 <문자>라는 형태를 부여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국 음운학에서는 음의 높낮이인 <성조>까지 '운모'韻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모음이니 자음이니 하지만 실제로 <음>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음에는 <높낮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음의 높낮이>는, 언어에 따라서는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 버리는 기능을 한다. 현대 베이징어에서는 음절 내부에 있는 음의 고저가 단어의 의미를 구별한다. 그것이 성조이다."(191) 15세기 한국어에서 "고저 악센트는 중국어의 성조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용어를 써서 '평성'平聲, '거성'去聲, '상성'上聲으로 구별된다." "<정음>은 이런 악센트의 구별을 문자의 좌측에 점을 찍음으로써 형상화하였다. 해례본에 이르기를, '무릇 글자는 반드시 합쳐서 소리를 낸다. 왼쪽에 점을 하나 찍으면 거성이요, 점을 두 개 찍으면 상성, 점이 없으면 평성이다'라고 하였다. 이 점은 오늘날 <방점傍點>이라고 불린다."(196)


# 첫 자음 : 성모聲母 / 나머지 요소 : 운모韻母


# 평성 : 가장 낮은 음 / 거성 : 가장 높은 음 / 상성 : 처음은 낮고 나중은 높은 음


"언어학에서는 의미를 가지는(실현할 수 있는) 언어음의 최소 단위를 <형태소形態素>(morpheme)라고 한다." "영어의 'playing'과 'dancing'에서 {play}와 {dance}는 어휘적인 형태소이고, {-ing}은 문법적인 기능을 하는 형태소이다."(203) "<정음>은 <초성+중성+종성>을 하나의 <형태>상의 단위로 묶는 입체적인 구조로,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 그리고 형태음운론의 평면이라는 세 가지 층을 통합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선택이 가능하다."(211) "문자체계가 형태음운론적인 표기를 채용한다는 것은, 문자가 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문자의 <형태>가 의미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즉 '밥'이라는 <정음>의 한 글자가 나타내는 단위가 음절인 동시에 형태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명 음을 표현하던 글자가 언제부터인지 형태소를 나타내는 글자가 되고, 사실상 단어를 나타내는 글자라는 성격까지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221)


# <정음>의 3층 구조

1 [음운론의 평면] ㅂ ㅏ ㅁ ㅣ(pami)

2 [음절구조론의 평면] 바 미

3 [형태음운론의 평면] 밤 이


# 형태음운론적 표기 : 음의 평면에서 음절 구조의 변용(종성의 초성화)이 일어나더라도 형태소를 만드는 음의 <형태>를 문자의 평면에서도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표기법


최만리가 상소문에 쓴 "<용음합자用音合字>는 <음을 사용하여 글자로 합친다> 혹은 <음을 이용하여 글자를 만든다>, <음에 의거하여 글자를 합친다> 정도로 풀이하면 좋을 것이다. 요컨대 음으로써 글자를 만드는, 즉 음을 나타내는 자모字母를 조립해 문자를 만든다는 그런 방법은 모두 옛 사적事績을 어기는 것이며 옛부터 지금까지 어디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용음합자>라는 것은 예부터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었다. <정음>처럼 완성된 형태로서의 형태음운론적인 알파벳 시스템은 중국 대륙에도 없었고 지중해에도 없었다." "<정음>의 사상을 <용음합자>라는 간결한 구절로 파악하고 있는 최만리의 안목은 정확하다. 최만리와 사대부들은 단순히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정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용음합자>라는 사고방식 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의 형태뿐만 아니라 문자를 만들어 내는 시스템 자체를 향한 이의이다."(240-1)


# 用音合字 盡反於古 (음에 의거하여 글자를 합치는 것은 모두 옛것을 거스르는 일이옵니다.)


"<정음>은 세포여야 하는 하는 문자를 분자分子 단위로 해체해 버린다. 나아가 분자는 원자原子로 해체된다. 당연히, 분자는 음절이고 원자는 음소이다. 의미가 되는 세포를 분해해 나간다. 분자로, 원자로. 『훈민정음』은 "글자는 반드시 합쳐져서 음을 이룬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글자는 반드시 합쳐져서 음을 이룬다"니? <문자=한자>란 유기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음을 이룬다. 문자란 합치거나 떼어내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음>은 살아 있는 유기체인 문자가 무기적인 요소(element)로 해체되어 있질 않은가. 그런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최만리를 비롯한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했을 것이다. 쓰여진 역사가 존재한 이래, 우리는 그러한 세포를 단위로 살아왔다. <사고思考>란 그러한 세포를 단위로 생각하는 것이고, <쓰는 것>이란 그러한 세포를 살아 움직이는 몸으로 키우는 것이다." "성리학의 에크리튀르야말로 그 궁극적인 형태인 것이다."(244)


# 에크리튀르 = <쓰는 것> <쓰여진 것> <쓰여진 지知>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의 이러한 한자한문 원리주의에 대응해,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파의 이데올로그인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후서後序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有天地自然之聲이면 則必有天地自然之文이니라" (천지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다.) 이 땅에 <글>이 있음은 이 땅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 황제를 초월한 <천지 자연>이며 이 땅에 이 땅의 에크리튀르가 있는 것은 천지 자연의 이치이다."(247) "그리고는 괄목할 만한 다음의 언설에 이른다. "雖風聲鶴戾와 鷄鳴狗吠도 皆可得而書矣니라"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의 울음소리, 개가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써서 나타낼 수 있다.) 온갖 살아 있는 것의 <소리>를 쓰기, 한자한문이 쓸 수 없었던 조선어의 오노마토페를 <정음>이 쓰기. 그것은 <정음>의 창제자들에게는 한자한문을 뛰어넘기 위한 결정적인 목표였을 것이다."(251-2)


"<말해진 언어>와 <쓰여진 언어>가 있다. <말해진 언어>는 <쓰여진 언어>보다 앞서 실현되는 것이다. <말해진 언어>가 <쓰여진 언어>가 될 때, <음>의 모든 리얼리티는 사라진다. <쓰여진 언어>에는 말하는 속도도, 강약도, 높낮이도, 인토네이션도 없다." "<말해진 언어>는 언어 그 자체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상호 작용 안에서 만들어진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두 가지 선율로써 생기는 듯한 대위법對位法적 구조를 보여 준다. <말해진 언어>는 결코 한 사람의 발화의 연속으로서만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쓰여진 언어>는 그러한 대위법적인 구조를 상실하는 반면, 시각적인, 그리고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때로는 촉각적이기도 한 <텍스트라는 쓰여진 총체>가 하나하나의 말을 규정하고 제약하고 하나하나의 말이 <텍스트라는 쓰여진 총체>를 만드는 양상을 보인다. <말해진 언어>와 <쓰여진 언어>의 차이를 묻는 것은 언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258-9)


『용비어천가』 2장에 이르러 우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전면적 <정음> 에크리튀르의 탄생을 본다. "한자漢字를 한 글자도 포함하지 않은 텍스트, 한자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왕조의 송가頌歌를 소리 높여 부르는 서사시의 한 장, 단어의 리스트가 아니라, 내적인 연결과 동적인 전개를 가지는 문장(sentence)이자 글(text)인 <쓰여진 언어>. 그곳에서 <나·랏:말싸·미> 약동한다. "소리에 따랐기에 음은 칠조七調에 맞는다." 방점傍點으로 나타나는 선율과 함께 조선어로 연주되는, <바람에 흔들림 없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이라는 음양의 암유暗喩는 우리 누구나가 지금 처음으로 체험하는, 한국어의 청초하고도 힘이 넘치는 선율이다. 천년의 시간을 겪으며 한자한문에 가려졌던 이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지금 샘물과 같이 넘쳐 솟아나는 이 땅의 말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일찍이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한국어의 <쓰여진 언어>였다."(264)


# 『용비어천가』 2장 : 한자를 한 글자도 포함하지 않은 텍스트를 형성한 <정음> 에크리튀르의 탄생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후서後序에서 "모양의 본떴으되 자字는 고전古篆을 따랐다" (象形而字倣古篆)라고 했다. <정음>은, 발음되는 모양을 본뜨고 글자는 고전(옛 전서)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만리는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 전문篆文을 본떴을지라도 음音으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어긋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전문篆文이란 중국 전국시대의 전서인 대전大篆과 그것을 간략화한 진秦나라의 소전小篆을 총칭한 것으로, 사실상 소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린 <정음>의 자획字劃이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과 비교할 때 전서와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字倣古篆' 즉 '글자는 고전을 본떴다'라는 언급에 관해서는, 문자의 게슈탈트를 전서에서 가져왔다기보다는 한 획 한 획의 자획에 대해 전서를 본떴다는 편이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혹은, 널리 한자의 고체古體를 총괄하여 대표적으로 '고전'을 들었을지도 모른다."(321-2)


"서양 인쇄술에서는 로마자 'I'의 처음과 끝 부분에 들어가는 장식을 <세리프serif>라고 한다. 로마자 극한의 서체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비문에서는 이 세리프가 형태상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세리프가 없는 서체를 상세리프sans serif라고 부른다. '세리프 없음'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 '고싯쿠'Gothic체라는 것은, 이렇게 장식 없이 직선으로 이루어진 상세리프 계통의 서체를 말한다. 이 명칭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고딕체'라고 불린다. 정음의 자획은, 전서와 비슷하다고는 하나 붓으로 생기는 돌기가 없는, 거의 완전한 상세리프체 즉 고딕체이다. 기필起筆도 종필終筆도 없어─기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직선이기에─붓으로 쓸 수 있는 모양이 아니다. 전서는 붓으로 쓰는 서체인 데 비해 정음의 자획은 완전히 붓 쓰기를 거부한 형태이다. 갈고리나 삐침도 부정하고, 두 글자 이상을 이어서 쓰는 <연면連綿>도 부정한다."(326-7)


"붓에 의한 선은 정신성과 지知, 끊임없는 수련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형태> 역시 정신성이나 끊임없는 수련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한반도의 문자사를 관통하는 원리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한자는 마치 살아 있는 세포와 같은 존재였다. 한자의 <형태> 역시 살아 있는 정신성을 묻는 것이었으며, 인간의 눈과 손에 의한 수련을 묻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묻는 <형태>이다. 이에 비해 정음은 그 세포를 음절이라는 분자로, 그리고 음소라는 원자로 해체하였다. 정음의 구조 자체가 그런 로지컬한 지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적인 지에 걸맞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요구된다. 정음의 <지>는 원자인 자모를 조합하여 완성되는 분자 구조로서, 나아가 텍스트 속에서 움직이는 동적인 분자구조로서 출현하였다. 그것은 한자의 정신성과 결별하고 정음 <형태> 자체에 새로운 <지>를 당당히 각인한 일이었다."(331-2)


# 궁체 : 신체성을 얻은 정음의 아름다움


"문자란,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의 결과물이다. 로제타스톤이든 광개토대왕비든, 파피루스든, 갑골이든, 서적이든, 그것이 단편斷片이든 전체든, 문자란 항상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란 항상 과거에 이야기된 역사, 히스토리에Historie이다. 문자란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자에게, 이야기된 무엇인가를 과거에 이야기된 것으로 읽게끔 한다. 이에 비해 『훈민정음』이라는 책은, 그것을 펼쳐 읽는 이에게 문자의 탄생이라는 원초原初 그 자체를 만나게 하는 장치이다. 문자를 읽는 이에게 <읽기>라는 언어장言語場에서 그 문자 자신의 원초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이다. 물론 『훈민정음』 역시 과거의 책이며, 과거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 책을 <읽는> 순간 그곳에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이야기된 역사는 아니다. <음이 문자가 된다>는, <말이 문자가 된다>는 원초가 항상 읽는 이 자신에게 <지금 이곳에서> 사건으로서 생겨나는(geschehen) 역사, 즉 게쉬히테Geschichte이다."(356-7)


# 한글 발전의 시대구분(이윤재, 1933)

1. 정음시대(창제기) : 세종 28년(1446)~성종 대까지 50년간

2. 언문시대(침체기) : 연산군 대~고종 30년(1893)까지 400여 년간

3. 국문시대(부흥기) : 갑오개혁~경술년(1910)까지 17년간

4. 한글시대(정리기) : 주시경의 한글운동~현재까지 20여 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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