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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2 - 역사평설 ㅣ 병자호란 2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평점 :
"1635년 8월, 홍타이지가 보내온 국서의 내용은 이전의 그것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인조에게 '권세가 강한 신료들을 조심하라'며 훈수까지 했다. 그러면서 '형의 나라'로서 '아우의 나라' 조선을 걱정하여 충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2월에도 홍타이지는 마부대를 통해 국서를 보내왔다. 국서에 담긴 내용의 핵심은 대략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이 후금을 대하는 정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음을 힐책하는 것, 다른 하나는 명에 이미 망조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명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특히 '후금이 명과 싸워 계속 이기는 것은 명의 국운이 다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영 떨떠름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 1635년 후반 무렵 홍타이지는 몹시 고무되어 있었다. 그것은 홍타이지가 차하르 몽골을 멸망시킴으로써 사실상 몽골족들을 휘하에 복속시켰던 것에서 비롯되었다."(29-30)
"1636년 3월 1일, 인조는 팔도의 백성들에게 유시문을 내렸다. '정묘호란 때는 부득이하여 임시로 화친을 허락했다. 하지만 오랑캐의 욕구는 날로 커져 이제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협박하고 있다. 이에 강약과 존망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니 모든 사서士庶들이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 나가자'는 호소가 담겨 있었다. 대의명분을 위해 국가의 존망까지도 걸 수 있다는 의지는 결연했다. 하지만 3월 7일,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빚어졌다. '참월僭越한 오랑캐와 단교할 것'이라는 사실과 오랑캐가 침략해 올지도 모르니 방어 태세를 확고히 하라는 인조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평안감영으로 가던 금군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용골대는 전령을 붙잡아 그가 소지했던 인조의 유시문을 압수했다. 후금으로서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조선의 '속마음'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45-6)
"6월 17일 (인조는) 홍타이지의 국서에 답하는 글을 의주로 보냈다. 격문 형식이었다. 정묘년에 맺은 맹약이 깨지게 된 것은 조선 탓이 아니라 청나라 탓임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귀국은 군사강국이지만 우리는 궁벽진 곳에 위치한 농업국가일 뿐이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귀국을 능멸하고 스스로 맹약을 깨겠는가?'라는 반문으로 시작되는 국서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먼저 조선이 명을 섬겨 배신하지 않기로 한 것은 정묘 당시 합의된 약속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조선이 한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문제 삼는 청의 태도는 수긍할 수 없다고 했다. 뒤이어 변방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청 영내로 몰래 들어가 산삼을 캔 것에 대해서는 사과했다. 마지막으로 차하르 몽골의 버일러들은 이미 망한 나라의 포로들이니 청 사신과 똑같이 예우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명나라의 동번東藩'으로서 강약强弱과 성패成敗 때문에 신하의 절개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62-3)
"조선은 청군의 철기와 야전에 정면으로 맞설 경우,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대신 청군이 돌격해오는 대로에 위치한 진을 버리고 군민들을 주변의 산성으로 집결시킨 뒤 화포와 조총 등으로 저항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말하자면 청야견벽淸野堅壁 전략이었다." "구상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청군은 조선의 의표를 찔렀다. 그들은 조선군이 수비하고 있는 산성들을 공격하여 시간을 허비하려 들지 않았다. 곧바로 서울로 돌격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시도했다." "12월 6일부터 봉화가 올랐으나 당시 황주의 정방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청군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 "9일 적군이 이미 순안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고 있던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서울로 장계를 올렸다. 무사안일과 무책임의 극치였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는커녕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조차 제대로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부터 음울했다."(85-6)
# 1636년 12월 9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을 공략하려는 청군 지휘부의 계책은 치밀했다. 그들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이미 1631년 홍타이지가 명의 대릉하성을 공략할 때 사용했던 전술이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그야말로 고사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홍이포를 발사하여 돈대와 성첩城堞을 파괴하면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게 된다. 군량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보충할 방도도 없고, 학수고대하는 외부 구원병은 오는 족족 청군 복병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명장 조대수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던 그 전술이 남한산성에서 재연될 판이었다." "(12월 16일 청군 진영을 다녀온) 윤휘는 다른 신료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화이론의 입장에서 청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청군은) 대오도 정제되어 있고, 조선 피란민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요컨대 당시 조선 신료들은 청군의 전력이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못했다."(105-7)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꿈도 꾸지 말라는 청군 지휘부의 요구가 있은 직후 성안의 분위기는 복잡했다. 여전히 화친을 시도해야 한다는 부류와 화친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부류로 나뉘었다. 결단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조선 편이 아니었다. 포위가 길어지면서 남한산성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고단해졌다. 성을 에워싼 청군의 압박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여러 가지 물자들이 고갈되고 있던 점이었다. 화친이든, 결전이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갈팡질팡할 경우 얼어 죽거나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113-4)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조선군은 성 밖으로 나가 기습작전을 벌이는 등 소소한 전투를 계속 치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12월 19일 오후, 청군의 좌익 주력군 2만 4천 명이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성안의 조선 조정은 이 같은 바깥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118-9)
"김자점은 토산에서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약 5천 명의 병력을 잃은)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모두 합치면 1만 7천 명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 모여 있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보겠다는 의지가 없거나 미약한 점이었다." "김자점, 심기원, 조정호 등 남한산성을 구원해야 할 조선의 최고위 지휘관들은 병자호란이 끝나는 날까지 그저 '헤매는 들판'(미원)에 머물면서 상황을 관망했을 따름이었다."(128-30)
"청과의 화친 교섭은 점차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신속臣屬을 요구했다. '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는 '현실'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신속'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를 배척한 척화파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를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청군 진영에서는 홍타이지의 '노여움'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칭찬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의 척화파들로부터는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자', '대의명분을 저버린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171-2)
"1월 20일, (하루종일 큰 눈이 내린) 남한산성 주변의 날씨는 음산했다. 칭신을 다짐하는 국서를 들고 청군 진영에 갔던 사신들은 날씨만큼이나 음산한 내용의 답서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인조가 성에서 나와야만 항복을 받아줄 수 있다는 것, 나오기 전에 청과의 관계를 파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척화신 두세명을 먼저 묶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목을 베어 '대국에 반항한 죄'를 다스리겠다고 공언했다. 이쯤 되면 '무조건 항복'이 아니었다."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을 비롯한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178-80)
"인조가 출성을 끝까지 회피하려 했던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또 하나는 지존至尊으로서의 위신을 잃어 이후 왕 노릇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그것이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신하들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은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181)
1월 22일, 강화도 함락 소식에 남한산성은 충격에 빠졌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홍서봉, 김류, 이홍주, 최명길 등은 모두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 '신하된 자로서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머뭇거리면 더욱 기고만장해진 저들에게 화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인조는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왕실의 가족들까지 모두 인질로 잡혀버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무기력함의 표현이었다. 이 무렵 구원군이 끊어진 것은 물론, 들려오는 것은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었다. (충청도 일원까지 남하한 청군은) 공주의 공산성을 비롯하여 목천, 청주 등지까지 출몰하여 겁략을 자행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사방이 온통 캄캄할 뿐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은 절망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최명길 등은 국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남한산성도 무너지고 있었다."(214)
1월 27일 최명길 등이 '굴복 선언'을 담은 국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국서는 인조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달라는 요청에 초점이 맞춰졌다. 인조가 출성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을 매고, 이조참판 정온은 칼로 배를 찔렀다. 두 사람 모두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산성에는 처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1월 28일 용골대가 가지고 온 홍타이지의 조유문은 '그대는 짐이 식언할까 의심하지 말라. 지난날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특기할 것은 포로들과 관련된 조건이었다. 홍타이지는 '아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너 청 영토로 들어온 뒤, 조선으로 도망쳐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청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포로를 '우리 군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얻은 성과'라고 규정한 뒤 포로들을 데려오고 싶으면 정당한 가격을 치르라고 강요했다."(216-8)
# 청에 끌려간 척화신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 오달제, 윤집
이윽고 1월 30일이 밝았다. "홍타이지는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진영에서 나와 군기를 앞세우고 주악을 울리며 삼전도를 향해 한강을 건넜다. 삼전도에는 아홉 단으로 높다랗게 쌓은 수항단과 크고 작은 황색 장막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조가 50여 명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산성 밖 5리쯤까지 왔을 때 용골대 등이 영접을 나왔다. 용골대 일행이 앞장서고 인조는 삼정승과 판서, 승지와 사관만을 거느리고 삼전도를 향해 걸어서 나아갔다. 군사를 도열시켜 놓고 장막에서 기다리던 홍타이지는 인조 일행이 도착하자, 그와 함께 배천拜天 의식을 행했다. 청의 입장에서 '조선이 한 집안이 되었다'고 하늘에 고하는 의식이었다. 배천 의식을 마치고 홍타이지가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222-3)
"책봉을 통해 권력을 유지시켜 주었지만, 인조에 대한 청의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청은 인조를 길들이려고 시도했다. 청은 먼저 자신들이 큰 은혜를 베풀었다고 강조했다. 항복을 받아준 것 자체가 '이미 죽은 임금[旣亡之君]'인 인조를 다시 살려준 '재조지은'이라고 자찬했다. 그러면서 '재조지은'을 계속 환기시켰다. 1637년 7월, '조선이 가도에서 패한 명 장수들을 받아들이고 명과 통교한다'는 풍문이 돌자 용골대 등은 '기망지군'을 다시 세워주었음에도 '명과 교통하지 않겠다'는 맹약을 어겼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청은 또한 입조론入朝論을 중요한 '카드'로 활용했다. 입조란 인조를 심양으로 불러들여 청 황제를 직접 알현토록 하는 것이다. 청은 조선이 자신들의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때마다 입조론을 흘리며 인조를 압박했다." "1639년 6월 입국한 마부대는 (도망쳐온 피로인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서) '인조가 심양에 가서 직접 황제를 뵙고 사죄해야 한다'고 압박했다."(258-9)
"인조는 청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세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1639년 김응조 등이 "대의大義를 밝히라"며 상소하자 아예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또 월왕 구천이 자강을 위해 20년이나 오吳를 섬겼던 고사를 들이대며 "나라가 망할 처지에 있는데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상소문에다 청의 연호를 쓰지 않는 신료들은 파직시켰다. 1640년(인조 18) 1월, 청이 원손元孫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을 때에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라일이 형편없는 지경이니 청인들의 요구에 순응하여 의심과 노여움을 풀어주는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인조는 친청적인 행보를 보이며 주화파 신료들을 중용했다. 그중에서도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조정의 대소사를 주도했던 인물은 단연 최명길이었다. 환도 직후 우의정으로 승진한 그는 시종일과 주화론을 견지했던 데다, 전란 초 적진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담판을 벌여 인조에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공로가 있었다."(268)
"1645년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는 것이 입관식에 참여했던 종실의 증언 내용이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라 훈신들의 입김에 밀려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실제로 1629년 7월, 인조는 "조정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며 자조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확 달라졌다. 친청파로 '변신'한 이후에도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 지위의 박탈, 강빈의 사사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충성 경쟁'을 부추겼던 청의 획책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역설적이지만, 인조가 '추대된 임금'이라는 정치적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27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