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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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명 조정은 '인조반정'의 발생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정보의 원천은 모문룡이었다. 보고를 받은 명 조정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가장 중요한 번국藩國에서 정권이 바뀐 이유, 새 정권의 향후 향배 등은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는 후금으로부터 도전받고 있었던 터라 조선의 협조가 절실한 때였다." "인조반정의 처리 방향을 놓고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했던 명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은 호부시랑 필자엄이었다. 그는 <조선정형소朝鮮情形疏>라는 글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인조 등이 광해군을 쫓아낸 것은 '난신적자의 행위'이므로 치죄해야 하지만,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의 지원이 절실한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자엄은 결론적으로 '인조를 바로 책봉하지 말고, 정변의 정당성 여부를 충분히 따져보고 조선이 후금을 토벌한 공적이 드러난 뒤에 책봉하자'고 주장했다."(46-7)


# 재조지은에 봉전지은(封典之恩, 제후국의 임금으로 책봉해준 은혜) 추가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인조 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의 난맥상 때문에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한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이괄의 반란으로 인조 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은 흐트러지고 말았다. 당장 반란을 진압하느라 군사적 역량이 크게 소모되었다. 반정 성공 직후 내세웠던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던 호기는 거품이 되었다. 인조가 서울을 떠난 직후 난민들이 궁궐과 관청에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공사의 기물들을 약탈했다. 각종 서류와 문서, 양곡 등이 약탈되거나 불에 타버렸다. 각 관청에 보관된 무기류도 대거 약탈되었다. 이원익의 증언에 따르면 "변란을 겪은 이후 군기가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백성들이 훔쳐 간 조총의 수량이 워낙 많아 그것들을 쌀을 주고 도로 사들여야 할 형편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후금 정벌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땅에 떨어진 인조와 조정의 권위를 회복하고 질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77-8)


# 이괄의 난(1624) : 반정 성공 후 벌어진 논공행상에서 반정 거사 당일 미적대던 대장 김류는 1등공신에 임명됐는데 이괄은 2등공신으로 밀려나고 변방으로 발령까지 났다. 여기에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금부도사가 자신을 체포하려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괄은 마침내 반란의 불길을 올린다.


"대동법, 군적 정리, 호패법 등이 모두 별다른 성과 없이 중간에 무위로 끝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조 정권의 재정 확보와 국방 강화를 위한 방책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이 같은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기 위해 백성들을 밀어붙이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반정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을 겪은 것이 자충수였다. 실제로 대동청, 재성청 등에 보관된 문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을 겪으면서 민심은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의 어마어마한 은 징색, 가도 모문룡 진영의 항상적인 양곡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토적'을 위한 군사력 증강 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97)


"가도와 청북 지역을 횡행했던 모병들이 보였던 행태는 1637년, 병자호란으로 가도가 청군에게 함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오랑캐 지역 정탐' 등을 명분으로 수시로 조선에 들어왔고 때로는 압록강을 건너 후금의 점령 지역까지 출몰했다. 더욱이 청북의 곳곳에는 모병과 요민들이 설치한 둔전들이 널려 있었다. 살 길을 찾아 후금을 탈출하는 요민들이 청북 지역으로 계속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은 가도에 사신을 보내 불필요한 요민들을 명 내지로 송환하라고 요청했지만 모문룡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자신의 휘하에 주민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어야 명 조정으로부터 군량을 많이 받아낼 수 있었기에 모문룡은 조선의 요청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모문룡 때문에 본래 요동에 머물던 요민들이 동요하자 후금은 격앙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은 후금의 보복과 침략을 우려했지만 '은인' 모문룡을 뜯어말릴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다."(108-9)


"1626년 즉위 이후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향한 서진西進을 잠시 멈추고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다. 동시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조선은 일찍이 1621년(광해군 13) 무렵부터 누르하치 이후 후금의 후계 구도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정충신 등의 사절을 허투알라로 들여보내 후금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충신은 광해군에게 "귀영가貴盈哥(조선이 다이샨을 부르던 별칭)는 보잘것없는 용부庸夫지만 홍타이지는 똑똑하고 용감하고 시기심이 많은데다 부왕의 편애를 믿고 형을 죽이려 한다"는 상당히 구체적인 내부 정보까지 보고했다. 조선은 정탐을 통해 누르하치의 아들들 가운데 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해 강경파이고 다이샨이 온건파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반면 인조 정권은 집권 이후 이괄의 난 등이 남긴 여파를 수습하고 모문룡을 접제接濟하는 데 골몰하느라 후금의 내부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150-1)


#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이유

1. 명목상 칸에 올랐지만 형들과 권력을 분점하고 연정을 펴야 하는 상황을 타개하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2. 만주 지역에 심각한 기근이 닥쳤는데 명나라와 교역선이 끊긴 상황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구할 곳은 조선뿐이었다.

3. 가도에 웅크리고 앉아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였던 모문룡을 제거하여 뒤를 돌아봐야 하는 여지를 없애고자 했다.


"후금군의 침략 소식이 서울의 조정으로 날아든 것은 1627년 1월 17일이었다. 인조는 급히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인조는 신료들을 보자마자 "이들이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 '모문룡 문제'를 빼놓으면 후금과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집권 이후 '친명배금'을 표방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배금' 행위를 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인조는 갑작스런 후금의 침략 소식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신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인조의 마음은 이미 강화도로 들어가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 방어를 위해 삼남 지방에서 1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수사水使들을 시켜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여타 지역에 대한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162-4)


"초반의 전황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형국이었지만 후금군은 의외로 신중했다. 그들은 의주성을 함락시킨 직후 총사령관 아민의 명의로 평안감사 윤훤에게 서신을 보내 강화 협상을 제의했다. 윤훤은 조정에 보고한 뒤 회답을 주겠다고 했고, 1월 18일 조정은 윤훤의 장계를 통해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후금군은 왜 갑자기 화의를 제의했을까? 우선 당시 후금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 수 있다. 후금은 약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민은 그 숫자로는 서울까지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또 영원성에 있던 원숭환의 위협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후금군이 조선 내륙으로 남하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점은 명군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발생 소식을 접한 명의 병부는, 후금군이 조선으로 깊숙이 들어간 틈을 이용하여 후금 지역을 공격하자고 건의한 바 있다."(166-7)


"2월 2일, 호차(胡差, 오랑캐 사신)가 갑곶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그가 소지한 국서에는 '명과의 관계를 끊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식으로 화약을 맺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이 재확인되었다. 인조는 그러면서 형제의 명칭은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은 후금 측이 조선과 명 사이의 기존 관계를 용인해준다면 화친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척화파斥和派들이 들고 일어났다." "척화파들은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169) "오랑캐는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만도 못한 존재라고 여기는 화이론華夷論을 지니고 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후금과 화약을 맺은 현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176)


# 3월 8일, 형제 관계를 맹약하고 화약 성립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키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것은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문룡은 후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가도에서 다른 섬으로 도피하여 용케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이후 전쟁 기간 동안 평안도 연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관망했다. 조선 조정은 그가 배후에서 후금군을 공격하거나 견제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모문룡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조선의) 주문사 일행에게 명 조정으로 가져가는 보고서의 내용을 뜯어 고치라고 강요했다. '조선이 후금군의 침략을 받아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모문룡의 활약 덕분에 적을 크게 물리쳐 쫓아냈다'는 내용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면 북경으로 가는 해로를 열어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주문사 일행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 결국 그의 요구대로 따랐다." "1627년 5월 천계제는 모문룡의 '군공'을 치하하고 그에게 미곡 5만 석과 양곡 구입 자금으로 은 10만 냥을 주도록 재가했다."(185-7)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인조 정권은 어디서부터 국정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반란을 겨우 진압했던 직후인 1624~1626년 무렵에는 백성들을 다독거려 정권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같은 처지에서 후금을 정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정벌은커녕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무엇보다 궁핍한 재정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아침부터 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안에 빚쟁이가 가득하다!' 호조판서 김신국이 묘사한 조정의 재정 형편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당장 후금에 보내기로 한 세폐歲幣 비용까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백성들의 부담이 더 커지면서 민원民怨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역모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던 것은 그와 관련이 있었다. 민생을 안정시켜 민심을 수습하고 후금의 재침에 대비하는 것이 절박했지만 국정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다."(199-201)


"재정 문제가 심각해지자 1626년 이후 신료들은 궁가, 내수사 등이 육지와 바다의 이권을 독점하는 것을 혁파하라고 촉구했다. 또 내수사 노비들에게 면역, 면세의 혜택을 주는 것도 철회하라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마이동풍이었다. 말로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민폐를 제거하라'고 강조했지만 궁가 이야기만 나오면 귀를 닫았다. 1628년에는, 반정 직후 국가로 반환되었던 이현궁과 수진궁 소속의 어전들을 다시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인조는 "선 왕조의 관례였다"는 명분을 들이댔다. 역주행이었다. 공신들도 마찬가지였다. 1629년 1월, 최명길은 '공신들이 적몰籍沒을 사칭하며 남의 전답과 집을 빼앗는 폐단을 금지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시행되지 못했다. 당시 역모 사건이 빈발하면서, 고변 등을 통해 공신이 되는 자들의 수가 대폭 늘어나고 있었다." "반정을 통해 집권한 데다 이어지는 역모와 고변 때문에 인조 정권은 공신들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었다."(206-7)


명에서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한 한족 출신 신료들을 이신貳臣이라 칭하는데 원숭환을 제거한 반간계를 기획한 범문정范文程 역시 이신 출신이다. "1629년 홍타이지의 황성 기습전에 수행했던 범문정은 원숭환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반간계를 구상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문정은 순치順治 연간에도 시정의 계책과 방향을 제시하여 청이 중원을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을 '제어하는'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다. 포로로 잡힌 환관들의 옆방에 머물며 반간계의 미끼를 던졌던 고홍중과 포승선도 이신 출신이었다." 이신들이 명을 버리고 청으로 귀순한 이유는 다양했지만 이들은 "모두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신들의 후금으로의 귀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명의 목줄을 겨누게 된다."(253)


"조선 조정이 위기감 속에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골몰하고 있던 1631년 7월, 후금은 다시 명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이번 원정의 공격 목표는 대릉하성大凌河城과 금주 등지였다. 모두 영원성과 산해관을 공략하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명군의 전초 기지였다. 홍타이지는 원정 시작에 앞서 소규모 정예 병력을 수시로 대릉하 주변으로 보냈다. 명의 장졸들이나 민간인들을 붙잡아 납치하려는 목적이었다. 《청실록》에서는 이것을 착생捉生이라고 적었다. 단순히 '포로 사냥'이 아니라 명군 관련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정찰의 일환이었다." "대릉하 원정에 앞서 조선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고 배를 빌려달라고 한 것은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를 통해 조선의 반응과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정西征하는 동안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해 올 우려가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군대를 움직였다. 1631년(인조 9) 8월 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303-4)


"대릉하성의 명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 후금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의 위력이었다. 1626년 영원성을 공격했다가 명군의 홍이포 공격 때문에 누르하치가 끝내 패퇴했던 '아픔'을 겪었던 후금은 이후 명군의 화기를 획득하기 위해 부심했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노획한 명군의 화기를 활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후금은 마침내 1631년 1월과 3월, 대장군포와 홍이포를 각각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한다. 대장군포는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에 전해준 불랑기포 가운데 제원이 큰 것을 가리킨다. 홍이포는 17세기 초반 역시 마카오를 통해 명에 전해진 최신 화포였다. 포신이 길어 사정거리가 길 뿐 아니라 탄환이 날아가는 속도와 파괴력이 당시 그 어느 화포보다도 발군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후금에서 홍이포를 제작하고 그것을 전장에서 활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역이 대개 명과 관련이 있거나 명에서 귀순한 한족들이었다는 점이다."(309)


"사령관 조대수의 투항은 조대수 개인의 비극일 뿐 아니라 명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조대수는 일찍이 자신의 상관이자 누구보다도 열렬한 애국자였던 원숭환이 숭정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원숭환이 처형된 직후 북경의 분위기에 실망한 그는 산해관을 떠나 금주성에 틀어박혔었다. 조대수도 인간인 이상 간신과 소인배들의 참소 앞에서 대국을 볼 줄 모르는 숭정제와 조정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조대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릉하성을 수축하자고 건의했다." "(갑론을박 끝에) 대릉하성을 쌓으라는 재가는 떨어졌지만 공사 기간은 충분치 않았다. 치첩이 완공되기 전에 후금군은 들이닥쳤고 조대수는 고립된 성에서 3개월 이상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미 망조亡兆가 완연한 명의 분위기에서 조대수의 분투는 그나마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던 홍타이지는 대릉하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인 1632년 4월, 대군을 이끌고 차하르 몽골 정벌 길에 올랐다."(316-7)


"점증하는 후금의 협박과 '가도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정치적 갈등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 핵심은 인조의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追崇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높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명분과 종통宗統의 의리를 강조하던 신료들은 인조의 그 같은 시도에 격렬히 반발했다."(324)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시도는 무리한 것이었다. 반정으로 집권했던 직후, 과거 광해군이 생모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하고 무덤을 성릉成陵이라 했던 것을 비판하고 성릉의 석물 가운데 참월한 것을 없애라고 지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정원군의 추숭에 반대하는 신료들을 '시정잡배'로, 성균관 유생들을 '괴물'이라고 매도하면서까지 추숭을 강행하려 했다."(328)


# 1632년(인조 10) 2월, 추숭도감追崇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관철


1633년, 185척의 선박과 수만의 병력을 대동하고 후금에게 귀순한 공경 일행을 먹일 식량을 요구받은 조선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조선은, 공경을 추격해온 주문욱 일행으로부터 급량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후금까지 식량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조선은 주문욱 일행에게는 이미 3천 석의 양곡을 공급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임경업 등을 보내, 공경 일행과 합세한 후금군과 전투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조선이 이미 확실하게 명 측으로 기우는 태도를 보인 터라 후금의 식량 요구까지 거부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용골대 일행의 급량 요구를 거절하여 내심 찜찜해하고 있던 5월 6일, 명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어머니 구씨를 왕비로 각각 추봉追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인조는 고무되었고, '명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후금에 대한 찜찜한 마음은 여지없이 사라졌다."(353-4)


"공유덕과 경중명 등의 귀순은 다른 측면에서도 조선에 악영향을 남겼다. 우선 조선이, 공경을 추격하던 명군에게 군량과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병력을 압록강 부근으로 파견하면서 떠안아야 했던 사회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공경 일당과 그를 저지하려는 조·명연합군, 그리고 후금군이 맞닥뜨렸던 지역에서 가까운 의주, 용천, 철산 등지의 피해는 극심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전란의 와중에 농작을 전폐하다시피 했고, '상황'이 종료된 뒤에는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는 더 심각했다. 후금이 전함을 확보하게 된 것도 문제였지만, 조선군이 공경 요격에 가담하여 후금군과 교전을 벌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명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조선의 '본심'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후금 내부에서는 당연히 '조선을 손봐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양국 관계의 파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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