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5 - 평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5
외르크 피쉬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안삼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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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평화Friede'는 언어적으로 유사한 낱말들인 '자유로운frei', '구혼하다freien', '친구Freund'처럼 인도게르만어의 어근 'pri-' (사랑하다, 보호하다)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원래는 사랑과 보호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감정적 속박과 애착의 관점보다는 상호 적극적인 도움과 후원의 관점이 훨씬 더 강조되었다. '평화'는 처음부터 사회적인 개념이다." "결정적인 것은 평화의 상태를 '사랑하다'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보호하다'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가 차이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에 상응해서 '평화'는 어떤 때에는 (특히 친족 간에 지배적인 것처럼)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의 상호 결속의 상태로, 또 어떤 때에는 단순히 비폭력 상태로 파악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세에 널리 퍼진 화해와 평화의 대립이 그 사실을 대변하는데, 여기서 '평화'는 바로 (대개는 시간적으로 기한이 정해진) 폭력의 중지를 의미할 뿐이다."(12-3)


2. Friede 1


"〈평화의 휴전induciae pacis〉과 〈항구 평화pax perpetua〉라는 '평화'의 두 가지 의미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특히 안전securitas 개념으로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평화 개념도 있었다. 이것은 내용적으로 '안전securitas'과 '정의iustitia'보다는 오히려 '사랑caritas'과 '은총gratia'을 지향하고 있으며, 법ius, 즉 엄격하고 공식적인 법률에 대한 반대말로 사용되었다." "중세 교회의 법률적 사고에서 '사랑caritas(minne)'과 '정의iustitia'는 바로 평화의 관점에서 대립했다. 즉 기독교인은 (그리고 교황도) 평화의 이해와 관계되는 〈사랑을 위해서propter caritatem〉 권리를 포기하도록 요구받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물론 '정의iustitia'의 관철이 짜증스러운 일(불쾌감)을 유발할 것 같은 경우에만 그랬다. 그러므로 'caritas', 즉 'minne'의 의미에서 '평화'는 '평화로운'(즉 법적인) 소송을 포함해 '다툼' 자체에 대한 반대 개념이었다."(20-1)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평화와 정의는 세계 질서의 기본 범주들이었다. 그는 평화를 〈질서의 고요함tranquillitas ordinis〉으로, 질서를 〈동등한 것들과 동등하지 않은 것들을 각각 자기 자리에 앉히는 배치〉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위계적으로 구성된 세계 질서 내에서 모든 사물에다 그에 걸맞은 〈올바른〉 자리를 배정하는 능력과 의지를 'iustitia', 곧 정의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완전한 〈세계(만물)의 질서ordo omnium rerum〉 및 그에 소속된 평화와 정의는 그 창시자이자 최종 목표인 신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본래의 완전한 의미에서의 평화와 정의는 피안의 완전함의 상태에서만 가능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지상의 평화와 정의는 불완전한 모사, 또는─극단적인 경우─영원한 평화pax aeterna, 영원한 정의의 파편상破片像 이상일 수는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기에, 이생에서는 기껏해야 일시적 평화pax temporalis가 주어진 것일 뿐이었다"(23)


"중세의 평화는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1) 깨지지 않은 또는 회복된 법질서의 상태로서의 평화, 즉 〈평화와 정의〉로서 나타나고, 2) 소송과 논쟁의 중지로서의 평화 그리고 정의와 법의 집행이 중지된 평화, 즉 〈평화의 평온함〉이 개념의 실질적 내용을 형성하는 평화로서 나타나며, 3) 아주 특별한 법률적·물적·인적 영역들의 〈충족〉으로서의 평화, 즉 〈평화의 안전securitas pacis〉이 중요시되는 평화로서 나타난다. 공포된 평화든, 명령받은 평화든, 합의된 평화든 간에 중세의 모든 평화는 공간적·물적·인적 견지에서 평화롭지 못한 영역들이 있음을 전제로 한 〈특수한 평화paces speciales〉였다. 이것을 넘어서는 최초의 걸음은, 〈보편적 평화pax generalis〉라는 특이한 개념으로 불린 적도 있었던 [중세 때 국왕 등이 내린] 분쟁 중지령Landfrieden이었다." "즉 보장된 비폭력 상태로서의 평화를, 비록 제약된 공간 내에서이긴 했지만, 〈보편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34-5)


# 중세의 정치·사회적 평화 개념

1. 사랑caritas, 평온tranquillitas, 안전securitas, 그리고 정의iustitia 같은 개념들로 경계가 표시되는 의미 영역 내에 평화를 분류해 넣는다.

2. 참된 평화와 거짓 평화를 구별하되, 그 기준은 정의에 대한 평화의 관계다.

3.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평화는 자기 영역권 밖의 '평화롭지 못한' 영역들, 즉 이교도 세계를 배제한 '닫힌' 평화였다.

4. 도덕적·신화적인 '영적 평화' 개념과 달리, '정치적 평화' 개념은 개방성을 띠고 있다.

5. 모든 정치 공동체 형성의 의미와 목적으로 평화('현세적 평화'pax temporalis)의 가치가 인정되었다. '현세적 평화'는 '시민 평화pax civilis'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3. Freide 2


"종교 개혁에 의해 야기된 기독교 세계의 종파 분열은 지금까지 통용되어온 '평화'의 의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요구하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초래했다. 기독교의 '영적 평화pax spiritualis'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평화의 기초fundamentum pacis'로서의 '정의iustitia'에 대해 더 이상 의견 일치를 볼수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들 내의 그리고 공동체들 사이의 '현세적 평화pax temporalis'도 의문시되었다." "종파들로 분열된 기독교는 법과 평화를 더 이상 연관시킬 수 없었다. 기독교의 평화는 '외견상의 평화pax apparens'가, 즉 전통적 교리의 의미에서의 사이비 평화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해하던 대로의 '정의롭고 참된 평화'는 결국 전쟁을 통해서만 복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들의 결과는 전래적 의미에서의 저 '정의로운 평화'가 아니라 다른 새로운 평화, 즉 '시민의 평화', 다시 말해 국가의 평화였다."(43)


"국가 내부의 이 같은 평화 상태는 그 후 250년 동안 평화 그 자체로 이해되었다." "이 '시민 평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근세 초기의 사회 및 국가 이론서들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이 토론의 골자는, 통일된 신학적 세계 이해가 붕괴된 이후 다시 한 번 종파들을 포괄하는 공동의 '세계관'을 가능하게 한 철학적, 합리적 자연법(즉 탈신학화한 기독교적 자연법)의 체계 속으로 새로운 평화 개념을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 자연법 속에는 이미 15세기와 16세기의 위대한 발견들을 통해서 소개된 기독교 밖의 세계에 대한 경험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종파의 분열과 더불어 자연법 사상의 형성을 촉진시킨 경험이었다. 이 자연법의 관점에서는 '인류'가 '기독교'보다 더 가치 있고 우선한다. 또한 그것은 평화와 기독교 사이의 긴밀한 중세적 결합을 해체시키고, 그 대신 '평화'와 '인간성humanitas'을 현대적 개념으로 결합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했다."(44)


"장 보댕은 평화를 〈국가의 평화〉로 이해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기초 작업을 했다. 그러나 정신사적인 면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토마스 홉스다. 그는 〈시민의 상태status civilis〉와 〈평화의 상태status pacis〉가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 미래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생각을 아주 확고하게 표명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평화와 국가는 서로 의존한다. 즉 국가만이 자신의 시민들에게 평화를 보장해줄 수 있으며, 반대로 평화를 실제로 보장해주는 그런 공동체만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홉스에게는 중세적 국가 사상가들의 (시류가 지나버린) 〈참된 평화pax vera〉보다 〈효과적인 평화pax effectiva〉가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정성과 진리의 문제는 제쳐둔 채 당국에 의해 강제되고 보증된 〈시민 평화〉일 뿐이었고, 그 내용은 '안전'과 '평온'이었다. 중세에 평화와 정의가 병존하는 가치들이었다면, 이제 정의는 엄격하게 평화에 종속되었다."(44-6)


"그에 비해 전통적이고 스콜라 철학적인 사회 이론에 관심을 둔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자연법의 합리주의에 관심을 둔 이론가들도 자연적인 정의에 기반하는 〈자연적인 평화pax naturalis〉 개념을 고집했다. 이 사상가들은 평화란 '사회적 결합에 의해 비로소 창출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러므로 칸트의 표현을 쓰자면 평화란 '문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이들에게 평화는 오히려 사회를 이루어 살기 이전에 인간들이 함께 살던 〈자연스러운〉 상태로 간주되었고, 이러한 것으로서 평화는 인간들 상호관계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정의, 즉 이성이 직접 통찰할 수 있는 정의가 지배하는 한, 효력을 지니며 또 무효화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은 홉스가 그랬던 것처럼, 평화를 전쟁으로부터 생각해서, 평화가 〈전쟁의 부재absentia belli〉라고 파악할 수는 없었다. 반대로 이들은 전쟁을 평화로부터 생각해서, 〈평화의 깨짐ruptura pacis〉으로 정의했다."(48-50)


"스콜라 철학에 따르면 국내 평화는 정의에 기반을 두며, 동시에 분란이 생길 경우에 무엇이 옳고 합법적인지를 확인하고, 또 자기들 판결이 실행되도록 힘쓰는 사법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었다. 국가들 간의 진정한 평화도 정의에 기반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재판권이 없었다. 분란이 생길 경우에는 우월한 적수가 자신이 개입되어 있는 사건의 공정성을 판단하고 판결 또한 직접 집행해야만 했다. 즉 전쟁을 통해서 말이다." "〈국가 간 평화inter civitas〉는 〈시민 평화〉인 국내 평화에 비교해서 좀 더 열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시민 평화〉를 옹호하던 바로 그 중요한 대변인들이 지속적인 국내 평화와 지속적인 국제 평화의 병존이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고, 좀 더 높은 가치인 국내 평화를 위해 국제 평화를 희생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보댕과 리슐리외 같은 사람들은 국가 조직의 공고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국가 간 전쟁의 〈정화 작용〉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다."(56-7)


"18세기에 들어와 (도덕적) 이성법의 이념이 점차 정치적 중요성을 띠게 되면서 평화 개념 또한 중요해졌으며, 결코 완전히 잊힌 적이 없는 참된 평화와 거짓 평화 간의 오래된 구분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1797년에 피히테는 〈법은 평화다〉라고 쓴 바 있다." "이 진술은, 참된 평화란 폭력이 아닌, 부당한 폭력은 더더욱 아닌, 올바른 법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피히테는 자국 내에서 〈시민 평화〉가 〈정의로운 평화〉가 되면 국가 간 평화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는 불가분 서로 연결되어 있고, 먼저 이 국내 평화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계몽주의 평화 이념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국제 영구 평화(1795)에 관해 구상한 칸트의 결정적인 첫 논문이 〈모든 국가의 시민헌법은 공화주의적이어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칸트에게는 내부의 '올바른' 질서 없이는 외부의 어떤 평화도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66-7)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보기에 영구 평화의 상태가 확산되는 걸 방해하는 것은 계몽되지 않은 종교 사상이 아니라 계몽되지 않은 '경제적' 사고였다. 중상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통상 제한 정책이 국가들 간의 영구 평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난 것이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국가 간의 무역과 교통의 자유에서 그리고 국가 내부에 전파되고 있는 '무역 정신'에서 '지속적인 평화'의 가장 훌륭하고 확실한 보증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그 다음에는 도덕적으로도 이해된) 인간과 민족들 간의 이해의 조화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18세기 전반기의 경제 이론과 평화 사상의 결합이 계몽주의적·시민적 평화 개념의 실제 지평을 형성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18세기에 〈평화의 정신〉과 〈무역의 천재〉의 결합으로서 시작된 것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경제 사상과 평화 사상의 동일시로까지 확대되었다."(72-3)


"프랑스혁명의 대변자들이 생각했던 평화는 공공의 안녕과 안전을 보장하는 현대 국가의 〈시민 평화〉가 아니었다. 시민 평화는 이성, 자유, 도덕을 억압하고 조롱한 전제 정치의 강제력에 기인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혁명가들이 추구한 평화는, 국가 내의 강제 평화든 교묘하게 측정된 균형 체계에 기초하는 국가 간의 평화든 간에 국가의 평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평화는 보편적 인류의 평화로서, 무력이나 정치적 계산에 의해 비로소 형성된 게 아니라 비이성과 착각에 의해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모든 인간과 민족의 자연스러운 〈박애〉로부터 이에 반대하는 방해물들이 먼저 제거되기만 하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는 평화였다. 방해물들이란 절대주의 국가 체제와 그 대변자들이다." "영구평화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은 시민전으로서만, 즉 세계시민의 전쟁으로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 평화, 보편적 박애의 제국은 자의적 국경선을 통해 제한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76-8)


"'평화'의 종교적 의미를 정치·사회적 평화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이 계몽주의 사상의 신세를 지고 있는 모든 사회적 구상들의 특징이다." "전쟁과 적대관계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했던 것은 바로 세속화된 종교적 평화 개념이었다. 세계에 평화의 제국이 도래하리라고 확신하고, 스스로를 예언자로서뿐만 아니라 이 도래하는 제국의 대표자로서 이해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안목에서 볼 때, 이러한 평화의 제국을 믿지 않거나 또는 이 제국의 도래를 저지시키려고까지 했던 모든 사람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적으로 간주되었다. 더욱이 자기들이 주장하는 평화를 저지하거나 공격하는 자는 누구나 평화의 적 그 자체로 간주했고, 미래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박멸되어야만 할 평화의 절대적 적(중세의 이단자가 그랬듯이)으로 간주되었다. 이 절대적 적(평화의 적과 인류의 적)의 개념은 나중에 그 어느 이론에서보다도 특히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큰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95)


4. 전망


"국력 신장을 위해 또는 민족적 이익 및 권리 주장을 위해 전쟁이 필요 불가결하고도 허용된 수단이라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도덕 능력의 회복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철천욕(鐵泉浴, 혹독한 시련)'이라며 전쟁을 높이 평가하는 그런 확신들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19세기 후반에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확신들은 파시즘 사상의 구성 요소로서 20세기에도 아직 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파시즘의 붕괴 이후까지 살아남지는 못했다." "〈주전론자들〉은 전쟁을 찬미하면서 오직 국가들 간의 전쟁만을 생각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공공의 안녕과 안전이라는 국내 평화의 가치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20세기 초에야 그런 사람이 나타났는데, 〈폭력에 관한 성찰〉에서의 조르주 소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폭력〉이 국가 내부의 싸움에서도 필요한 형태로 인정되기를 바라면서, 무조건적 평화 연맹으로서의 근대 국가의 의미를 지양했다."(102-3)


"'냉전'이 개시된 이후 평화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정받은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하고, 조화, 자유, 정의, 행복의 세상을 불러올 수 있다고 희망하는 일종의 주문이 되었다. '평화'는 세계 구원을 기대하는 짧은 상투어가 되었다. 물론 이때 주목해야만 할 점은 평화가 더 이상 인간적인 공동생활의 이상적 상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세계 평화pax universalis'로서 인류 전체의 존립을 위한 조건이 되어버린 한, 이 〈구원〉은 핵무기 기술에 직면해 완전히 냉철한 의미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 그리고 정복은 인간성에 반하는 것 ······〉이라는 홀바흐의 말은, 극단적인 형태의 전쟁(세계 전쟁)은 인간성humanitas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humanum genus〉 전체를 향해 조준되었다는 격화된 표현 속에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모든 역사적 경험을 초월하는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평화를 얻으려는 학문적 노력과 각성이 강화되었다."(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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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 전쟁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빌헬름 얀센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권선형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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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Krieg 1


"14세기부터 '무력에 의한 권리중재kriec'에서 '전쟁Krieg'으로 개념 내용의 이동이 목격되는 사실은 영방領邦의 힘이 강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법 제도의 새로운 정립 및 전래된 소송 절차의 개혁,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는 공적 무력의 확립을 통해 영방들은 당시에 전쟁이라는 개념이 발전하기 위한 객관적인 전제 조건들을 이루어냈다. 이런 영방들은─서유럽의 왕국들과 마찬가지로─그 구조상 내부적으로 분쟁에 적대적이었고, 분쟁을 억제하는 데에도 확실히 중세 절정기에 교회가 명하는 신의 평화령Gottesfrieden이나 왕이 명하는 지방의 평화령Landfrieden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합법적인 무력 사용을 독점하거나 독자적인 무력에 의한 법률 수행을 일반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무기 사용권이 있는 사람들은 기사의 페데Fehde라는 형태로 계속 전쟁과 같은 방식의 대결을 할 수 있었다."(18)


# 영방領邦 : 중세 독일의 지방 국가로 제후들이 독립된 주권 영역을 형성한 형태

# 페데Fehde : 중세의 합법적인 결투, 싸움


"중세의 전쟁들은 커다란 페데들로, 질적인 면에서는 이런 페데들과 구분되지 않고 단지 양적인 면에서만 구분되었다. 그리고 페데들에 결부되어 있는 결과와 관련하여 정치적 계산이라는 측면에서 좀 더 주의 깊게 다루어졌다. 그래서 예를 들어 1344년에 쾰른의 주교좌主敎座 성당 참사회는 대주교 발람에게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정말 대규모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커다란 전쟁groyss urluge〉도 시작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전쟁은, 무력 사용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한 기존 법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구체적인 권리 분쟁이 무력에 의해 해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무력과 법은 상호간에 조화를 잘 이루는 것이었지 결코 대립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페데권을 가진 집단을 제한하고 평화적인 분쟁 해결(중재재판)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그리고 군주에게 권력이 축적됨으로써 전반적으로 무력을 덜 사용하는 추세이긴 했다."(19)


"중세에는 전혀 무력이 사용되지 않은 채 판결이나 화해에 의해 종결될 수 있었던 커다란 전쟁과 페데들이 존재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세의 전쟁은 권리 분쟁으로서의 그 개념에 걸맞게 최소한의 무력 행위에 의해 수행되었다. 전쟁의 목표는 적을 괴멸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법률적 관점을 적이 제 자신에게도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이런 인정을 종국에는 평화 협정, 속죄를 통해 고착화하도록 강요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강요는 〈해를 끼치기〉를 통해 실행되었다. 즉 당시의 문헌들이 말하듯이 〈약탈과 방화〉를 통해 또는 오늘날 말하곤 하는 것처럼 재화에 대한 폭력을 통해 실행되었다. 사람에 대한 폭력은 일반적으로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로잡기 위해 행사되었다. 시체가 아니라 보상금을 원했기 때문이다." "분쟁이 빈번했지만 15세기에 경제 부흥이 이루어진 이유는 이런 전제 조건하에서만 이해된다."(20-1)


"게르만적 뿌리에서 발전한 중세의 헌법 구조가 전쟁의 정당성 이론에 대한 욕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중세 세계의 또 다른 중심 세력이었던 기독교는 그런 정당성 이론을 매우 강력하게 요구했다." "즉 전쟁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합치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인 전쟁 금지를 목표로 하는 엄격한 전통들과 경향들은, 전쟁 그 자체는 허락하지 않지만 특정 조건하에서의 전쟁은 허용하는 것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는 성찰에 의해 비교적 쉽게 밀려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토아 학파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정당한 전쟁gerechte Krieg〉의 이론, 허가된 전쟁의 이론으로 이런 성찰들을 종합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정당성을 위한 결정적인 기준─불의에 대해 복수하는 전쟁─을 전쟁의 원인에서 찾아냈다."(22)


3. Krieg 2


"종파 분열은 비교적 고요했던 중세 말기를 종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새로운 전쟁 유형을 낳았다. 즉 서양 역사를 150년 동안 규정지은 종파에 의한 내전을 낳았다. 당시까지의 전쟁이 적대자들 사이에서 인정된 법질서 내에서의 무력에 의한 권리 분쟁이었다면, 이제는 이런 근본적인 공통점과 그것으로부터 연유하는 무력 사용의 한계들이 무너졌다. 중세에는 단지 이교도 전쟁이라는 이례적이고 극단적인 형식으로만 알려져 있던 것이 종파 전쟁에서는 전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즉 무력의 무분별한 표출, 적을 〈무법자outlaw〉로 경멸하기, 적을 괴멸시키려는 경향이 그것들이다. 공화제respublicae를 안정시킬 채비를 했었던 내부와 외부 사이의 희미한 경계들은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미 가시적이고 작동 가능했기 때문에 (중세의 사상가들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내전은 특별히 강렬하게 체험된 공포가 되었다."(35)


"중세 도덕신학Moraltheologie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된 자연법 학설은 이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사는 적합한 자연적 상태가 평화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은 언제나 보통의 상태로 회귀하려고 하는 예외적인 상태로 여겨졌다.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한다.〉(아우구스티누스) 하지만 홉스의 경우에는 인간의 본능적인 사회성socialitas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적 상태status naturalis〉와 관련하여 평화와 전쟁의 관계를 뒤집었다. 그에게는 평화pax가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in omnes이 자연 상태를 특징짓는다." "홉스의 국가론은 말하자면 부정적으로 반영됨으로써, 즉 국가 상호간의 관계에 관한 학설이 됨으로써 전쟁 개념의 발전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국가들 사이에서inter civitates〉는 계속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자연 상태가 존재했고, 〈자연법laws of nature〉은 무제한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6-7)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전쟁과 협정을 번갈아서 행하여 균형과 안정을 이루었던 유럽적 국가 시스템을 비판함으로써 영구 평화ewige Friede에 대한 소망을 표현했다." "(절대주의) 국가는 계몽주의의 비판적인 관점에 따르면 전쟁을 관리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능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절대주의 국가는 전쟁의 원인 제공자다. 〈평화는 자유로부터, 또한 필연적으로 억압에 대한 전쟁으로부터 생겨난다.〉 100년이 지체된 후인 1866년 제네바 〈국제평화협정〉은 이해하기 쉬운 간결한 어구 속에 이런 확신을 집약했다. 계몽주의의 국가 간 전쟁에 대한 유죄 판결은 그러니까 전쟁보다는 국가를 겨냥하고 있었다." "전쟁이 국가의 산물로 해석된 것처럼 반대로 국가가 전쟁의 산물로 해석되기도 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향에 의해 작은 사회들이 형성되고, 필요에 의해 시민 사회들이 형성되며, 전쟁에 의해 국가들이 형성된다.〉"(48-50)


"내전의 청산인이자 내적 평화의 보증인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정당화는, 내적 평화가 사회에 대한 전제정치 식의 억압으로 가치가 떨어진 이래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다. 인간의 도덕적·경제적 이익의 조화라는 계몽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무력을 독점한 제도적 평화 보증인의 필요성은 더 이상 인정될 수 없었다. 파스칼이 자기 시대의 경험에 의해 모든 불행 중에 가장 좋지 않은 것으로 염려한 내전은 이제 마블리에게는 심지어 〈선행bien〉으로 여겨졌다. 내전의 도움을 통해서만 억압과 정복을 지향하는 구체제의 지배 질서를 제거할 수 있었고, 그로써 영구 평화 상태를 마련할 조건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유럽적 국가 시스템의 틀 안에서 혁명적인 내전은 전쟁에 대한 전쟁이라는 특성과 신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런 식의 내전에 대한 성찰들은 프랑스 혁명과 그에 이은 혁명 전쟁에서 점차 전쟁 이데올로기로 집약되었다."(52)


"국가 간 전쟁은 이제 16~17세기의 정치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더 이상 내전의 방지를 위한 필요악으로 정당화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단지 유럽의 전래된 정치 질서에 의해 강요된 내전의 수행 방식의 하나로 합법화되었다." "구舊체제의 국가 간 전쟁에서는 왕의 전투를 모든 점에서 시민과 멀리 떼어 놓는 원칙이 적용된 반면에, (전쟁이 '수동적으로 민주화'되면서) 이제는 반대로 온 국민이 실제적인 측면이나 선동적인 측면에서 전쟁에 관여했다. 옛 국가의 군인들에게는 그때그때의 〈전쟁의 원인causa belli〉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면─아무 상관이 없었음에 틀림없다!─이제 전사들은 목숨 걸고 싸우거나 또는 그렇게 싸운다고 믿는 그 일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무관심한 순종과 형식적인 용감성 이상이 요구되었다. 전사가 일부러 의식적으로 싸우면서 변호한 그 원칙들은 열정, 희생정신 및 헌신을 요구했다."(54-6)


"독일에서는 구체제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이제 헤겔 철학을 통해 이념적으로 기초를 다진 국가와 사회의 대립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전쟁은 〈법률처럼 국가의 기본 기구〉(라손, 1868)로서 국가를 통해 대변되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남겨졌다. 사실로 주어지고 철학적으로 합법화된 이러한 지평 내에서 전쟁을 〈적을 강요하여 우리의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무력행위로, 다른 수단들이 개입된 정치적 교류의 연장으로〉 이해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전개될 수 있었다." "19세기의 정치적 실천은 전반적으로 이런 모델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쟁의 목적은 국가가 추구하는 정치에 상응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쟁취하는 것이다.〉(비스마르크), 〈전쟁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합리적 조약을 맺기 위한 교섭 수단이다.〉(라손, 1871) 할러는 전쟁이 〈좀 더 나은 평화, 즉 좀 더 유리한 조약으로 이끄는 ····· 수단〉으로 통용되도록 했다."(66-7)


"18세기와는 달리 19세기의 정치가들은 내부적으로도 선동을 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고 또 전쟁에 동참하며, 전쟁에 따라붙는 〈위대하고 정당한 민족적 이해〉를 여론에 분명하게 전달하거나 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여론을 형성하는 한 국가의 교양계층이 이미 전쟁을 〈문명화된 국민〉의 〈구원〉이나 〈회춘〉으로서(라손, 1868) 광적으로 확신하고 있을수록 더 쉽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상호간에 내적인 간격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해함에 있어서 비스마르크와 같은 보수적인 정치가의 생각과 점점 더 큰 목소리를 내게 된 19세기의 전쟁주의가 만난 지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 전쟁을 이처럼 보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결국 얼마나 반동적이고 시대착오적이었는지가 분명해졌다." "민족 전쟁으로 행해진 19세기의 국가 간 전쟁에서는 개인적 (적대감) 또는 집단적 당혹감이라는 요소가 더 이상 제거될 수 없었다."(69)


"여기서 힘주어 강조해야 할 것은, 이 전쟁주의는 오로지 국가들 사이의 전쟁만 고려했다는 점과, 그래서 공적인 평안과 안전을 통해 나타나는 국가의 내적 평화는 이론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로지 이런 외적인 전쟁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것은 어떤 혐의를 불러일으킨다. 즉 국가 간 전쟁을 찬양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발설되지는 않은 어떤 동기가 있는데, 그것은 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내전에 대한 공포, 즉 혁명에 대한 고백되지 않은 공포였다는 혐의 말이다. 이미 헤겔은 〈행복한 전쟁은 내적인 불안을 막아주고 국가의 내적 힘을 확고하게 했다〉고 확증했다. 이것은 보댕 이래로 통용되는 생각이다. 전쟁은 단지 일반적인 것을 지향하는 도덕적인 고양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혁명적인 요소를 파괴함으로써 혁명적인 상황과 분위기를 분해한다는 것을 하인리히 레오는 암시했었다." "19세기 내내 귀족과 시민계급 엘리트 대부분은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74-5)


"영구 평화에 관한 계몽주의적 이념에서 처음으로, 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본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착된 정치·사회적 제도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했다. 이미 몽테스키외와 루소는 전쟁을 사회화의 산물로 인식했었다." "이제는 전제주의자와 귀족들이 아니라 시민사회 자체와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사유재산 원칙이 전쟁의 원인으로 지탄받았다. 정치적 억압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착취가 지금까지 추구되어온 조화로운 평화 상태로 가는 도상에서 진정 방해가 되는 요소로 증명되었다. 〈그래서 소유라는 개념이 인간을 동물 이하로 끌어내리는 가장 끔찍한 괴물인 전쟁을 세상에 불러들였다.〉"(79-81) "최후의 혁명적 내전을 통해 시민사회를 파괴함으로써 전쟁을 초래하는 시민사회의 대립 요소를 제거하려고 한, 바이틀링이 말하는─종교적 색채를 띤─사회 혁명적 동력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에 사로잡혔고, 포괄적인 역사 이론의 틀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83)


"마르크스의 전쟁 개념의 근간에 놓여 있는 특징은 전쟁에 관한 보통의 이해와 결부되어 있는 생각과 가치 평가를 독특하게 뒤집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 전쟁의 일반적인 유형이다. 국가 간 전쟁은 19세기 중반 이래로 단지 진정한 대립을 은폐하고 국제적인 내전의─〈가난한 자들의 부자들에 대한 전쟁〉의─발발을 연기시키는 그런 기능만 지녔다." "마르크스의 혁명 개념이 혁명적 내전의 전통에 의해 매우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혁명은 (시민)전쟁이다.〉 레닌의 이 문장도 마르크스의 입장을 적절하게 특징짓는다. 내전이 없는 비폭력적인 혁명에 대한 구상은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의회에서 거둔 성과가 자아낸 인상에 의해 비로소 발전되었고, 현대의 무기 기술로 볼 때 성공적인 봉기가 가능할지에 대한 늙은 엥겔스의 의심을 통해 힘을 받았다."(84-5)


4. 전망


"내전의 전통은 다시 20세기에야 비로소,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중요해졌다. 그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상상할 수 없는 효력을 지닌 핵폭탄이라는 파괴적인 무기의 발전으로 국가 간 전쟁에 정치 수단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또는 전쟁을 주전론적으로 신격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주권 국가들의 전래된 시스템이 거대 권력들의 존재로 인해 변형되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존재하고 심지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반면, 군사적으로 무능한 국가들 사이의 간헐적인 국지전을 도외시한다면 이런 시스템에 구조적 특징으로 내재해 있는 국가 간의 열린 전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이 무의미하게 된 이후, 혁명 전쟁은 이를 넘어서서 거대 국가들이 다양한 방식의 공개적·비공개적 중재들을 통해, 말하자면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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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3 - 제국주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3
외르크 피쉬 외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황승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 서론


2. '제국주의' 형성기까지의 '임페리움'


"'임페리움imperium'은 동사 'imperare'(명령하다)에서 파생되었다. 원래의 비전문적인 의미로는 〈명령〉 또는 〈지시〉인데, 국법에 관해 사용될 때는 최고위 공무원의 공권력을 의미한다. 원래 군軍통수권에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포괄적인,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무제한적인 공권력을 일컫는 총괄 개념이 되었다." "'임페리움'은 적어도 공화정 말기 이후로는 '로마 인민의 지배imperium populi Romani'라는 뜻으로서 타민족에 대한 로마 민족의 힘을 의미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법적으로 엄밀하게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처음에는 사람에 대한 명령권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명령권을, 그리고 마침내 지배하는 지역 자체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즉 명령이 통용되는 영역이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이 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 이후로 이 용어는 로마 밖의 통치자나 제국과도 여러모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물론 그 경우 로마는 최고의 제국이었다."(14-5)


"서로마 제국 몰락 후 서방에서 '임페리움'은 카를 대제의 대관식(800)과 오토 대제의 대관식(962)을 계기로 다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때때로 이런 저런 다른 명칭이 덧붙기도 했지만, 제국의 명칭은 1806년 해체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임페리움과 더불어 왕의 영토, 즉 '레그나regna'가 생겨났다. '임페리움'과 '레그나'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황제 측에서는 세계 지배의 요구(물론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옹호자들에 의해서만)에서부터 의전儀典에서의 단순한 우위에 이르기까지 우월한 측면을 강조했다. 이와 상응하게 '레그나' 편에서는 임페리움에 대항하여 다소 강한 유보 조건들을 제시했다. 통치권에 대한 요구들은 항상 거부당했지만, 통상적으로 황제에게 더 높은 위엄과 더 큰 특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임페리움은 국법상 황제에게 귀속되지 않는 영역에서는 결코 현실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16-7)


3. 근대 이전의 제국주의 개념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제국주의 개념이 확산된 것은 19세기의 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1834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유럽문화 특유의 진보적 특성에서 유럽문화가 전 세계로 확산될 수 밖에 없음을 보증하는 ······ 세 가지 주된 작용이 생겨났다. 즉 1)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작업방식의 고안, 그리고 새로운 발견으로 인한 생필품 생산의 지속적인 증대, 2) 자본의 증대, 3)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가 그것이다. 이로써 리스트는 세기말 이후 일반적으로 근대 개념인 '제국주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역사적 정황을 최초로 표현한 인물이 되었다. 여기에서 제국주의 개념은 민족국가 안에서 국가권력의 증대나 독립과 연결되었다." "또한 민족국가들의 경쟁과 이들의 경제적·문화적 확장을 위한 열망은 곧 절대적으로 긍정적이며 유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대중과 대중의 영향은 (이데올로기적인 영향을 행사하려는) 모든 정부에 매우 중요해졌다."(30-1)


"'제국주의' 개념은 긍정적인 측면 또는 부정적인 측면을 막론하고, 유럽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현상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비평가들과 사회주의적 비평가들에게 와서야 비로소 그 개념은 역사적 분석을 위한 개념적인 도구로 발전하였다." "서구에서 '제국주의' 개념의 내용과 용법이 비판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은 1870년대의 영국뿐 아니라 독일어권에도 해당된다. 영국에서는 긍정적인 내용이 '엠파이어empire' 개념과,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임페리움' 개념과도 연결되었으며, 독일어권에서는 긍정적인 내용이 힘의 균형을 노리는 개념인 '세계 정책'과 확고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는 그 개념을 호전적이고 군국주의적으로 발전해 가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첨예화하는 데 사용했으며,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은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공산주의의 분열과 시사적인 논쟁에 이르기까지 토대와 척도가 되었다."(35-7)


4. 민족적 제국주의들


"영국이 의식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에 노력을 경주하던 시기에 전통적인 개념으로서의 '제국주의' (동시에 '카이사르주의' 또는 '나폴레옹주의')는 퇴색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자리에 '엠파이어'와 '임페리움'이 등장했다." "(1872년 4월 3일과 6월 24일에 행한 두 연설에서) 디즈레일리는 개인적으로 해외 지역보다는 민족적 명예와 위대성에 중점을 두었다. 확실한 본능으로 그는 선행된 논의들에서 영국 연방에 소속된 개별 국가들이 독립하는 방향이 아니라 엠파이어가 더 강하게 결속하는 방향이 시대의 특징─그리고 그에게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요소는 유권자들의 여론이었다─이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맞서 통합을 공고히 하고 강화하는 것, 즉 〈제국의 관세, 제국의 신탁통치, 제국의 방어, 그리고 대의제적 토대에서의 공동제국 협의회 형식〉을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네 개의 〈본질적인 기둥〉이라고 못 박았다."(43-4)


"다른 한편 미국에서는 동일한 정치적 우월감에서 기인한 〈문명적 사명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미 1853년에 독일 출신의 이주자들은 〈새로운 로마 또는 세계의 미국〉이라는 강령적인 글에서 세계 공화국의 건설, 보통선거권, 국민 개병제의 도입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전제정치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국이 유럽에 간섭해야 할 필요성 등을 선전했다. 비록 그러한 정치적 전제들이 실현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논거는 새로운 상황에서 관심 있게 다루어질 수 있었으며, 원래의 의도가 전도되어 필리핀 식민지화와 쿠바 점령에 이용되었다." "함장 앨프러드 머핸은 제국주의 정책의 범주에서 해군력을 높이 평가하고 그 위상을 정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존 실리의 논거를 받아들여 역사적으로 위대한 모든 결정은 궁극적으로 해군력의 강·약에 좌우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경쟁이 점점 더 격화되는 가운데 전 세계에서 결속을 유지하고 통제하는 것이 제국주의 정책의 핵심이 되었다."(53-4)


"미국의 팽창보다 훨씬 더 강력했던 러시아의 팽창에서는 군사적 요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동요하고 있던 시베리아의 남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다. 차르 제국은 지리적으로 해외 식민지 확장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세력 정치Machtpolitik 경쟁에서 범슬라브주의라는 독특한 형태의 민족주의에 호소했다. 범슬라브주의Panslawismus는 분명 제국주의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제국주의 유럽에 유럽의 세력 정책과 팽창 정책에 과잉 경향이 있음을 매우 첨예하게 드러내준 계기가 된 것은 바로 범슬라브주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역으로 유럽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를 단순히 확장하는 것만으로는 식민지의 지배권을 요구하는 데 대한 정당성을 끌어낼 수 없었기에, 자국민의 우월성을 점점 더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월한 민족이 다른 민족 위에 선다는) 예정설은 특히 종교적 토대에서 번성했으며 비합리적인 충동을 촉진시켰다."(54-5)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동화〉 정책에서 〈연합〉 정책으로 변화했다. 유럽에서 건너간 이주자들뿐만 아니라 본토박이들의 식민지에서 일으키는 소요는 〈동화〉 정책으로는 억제될 수 없다는 식민지의 자연스러운 특수성을 신속히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나폴레옹 3세 이후, 궁극적으로는 세기말 무렵 이후 프랑스 문명을 전파하겠다는 이념과 식민지를 통합하겠다는 이념은 점점 더 뒷전으로 밀려났다. 비록 철저한 식민지 정책을 운용했고, 중앙 집중식 행정을 발전시켰으며, 식민지를 위해 상당한 자금을 퍼부었을지라도, 프랑스는 영국에 비견될 만한 제국주의적 성과나 그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계급투쟁을 최초로 천명한 1848년 6월 봉기와) 1871년의 패배 그리고 파리코뮌 이후 정치적 에너지는 주로 민족 자체의 분열과 모순에 얽매여 있었다." "퇴적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외교적으로 분명한 적성국을 접하면서 비로소 분출되었다."(55-6)


5. 독일의 '제국주의'


"피히테의 강연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최초의 정점이었다. 강연의 직접적인 정치적 의도가 독일 민족국가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그 논거는 본래의 의도를 넘어섰으며, 독일 민족은 〈악의 심연에서 인류 전체를 구원해줄 희망〉으로 간주되었다. 식민지 문제에서는 영국식의 고전적인 정당화 도식이 다시 등장했다. 문명은 제국주의적 확장 근거를 스스로 제공하고 있다. 〈민족 경제〉가 문화에 종속됨으로써 경제와 정치의 연관성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해임되면서 독일 민족주의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강박관념에 빠져들게 되었다." "국가의 위대함은 더 이상 프로이센-독일에 국한된 힘이나 황제권의 방어적 규정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동맹체제 등과 상응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독일 민족주의는 젊고 저돌적인 독일 제국주의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독일 제국주의는 〈세계 정책〉이라고 지칭되었다."(61-2)


"'세계 정책'은 경제적·정치적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특히 확고한 지위를 가진 '영국 연방'의 요구에 반대하는 신생 독일 제국주의의 투쟁 개념이 되었다. 그 때문에 동시대의 논쟁은 독일의 요구 또는 〈사명〉이 유럽의 균형체제를 세계 전체로 전이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인기를 끈 가이벨의 말처럼 〈독일적 본질로 세계를 치유하는〉 데 있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1914년에 가까워질수록 논쟁은 대상을 상실했고, 두 개의 관점은 유사한 정치적 실천으로 귀결되었다."(66) "'세계 정책'의 정당성이 천박해지는 만큼, 세뇌와 세뇌에 따르는 사회심리적 메커니즘이 강화되었다. 이에 대한 사례로서, 한편으로는 민족적 충성심을 부인하고 국가 권위를 공격한 자로 평가된 사회민주주의적 희생양과 반유대주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 정책적인 적성국 이미지(시기심 많은 영국,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프랑스, 세련되지 못한 러시아)를 들 수 있다."(63)


"한편으로 독일 제국주의로 인해 생겨난 대량 징집과 다른 한편으로 현상 유지를 하려는 태도의 이율배반은 장기간에 걸쳐 파시즘이 등장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1890년 이후 급속도로 번진 전前파시즘적 태도와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전개에 대한 초기의 징표들이다. 제국주의 정책은 점점 더 국민들의 태도에 좌우되었고, 파당들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고조되었다. 물론 전반적으로 책임감 없는 의회는 통합 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프로이센-독일은 곧장 지속적인 민주화와 의회 제도화의 길로 간 것이 아니었다. 1903년과 1912년의 선거 충격이 있은 후 억압이 커졌고, 제국주의적 조치가 실행되면서 계급 간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그러자 계급 대립의 배후에서 이를 무마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대중 교화 조치가 취해졌다. 궁극적으로 '세계 정책'의 지배적인 역할은 국내정치적 위기 상황의 결과였으며, 그에 따라 독일 제국주의 특유의 민족적 색채가 두드러졌다."(85)


6. 제국주의의 정치경제학


"하인리히 쿠노는 1900년 5월 말 제국주의의 정복 성향의 원인이 〈화폐자본의 이용 욕망과 팽창 욕망〉에 있다고 보았다. 식민지 정복의 초기 단계에는 판매 시장이 핵심이었다면, 이제 영국의 지위는 식민지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반대로 식민지와 연관된 〈세계 무역 독점과 산업 독점〉으로 설명된다. 식민지와의 상품 교환에는 시장 법칙이 유효한 반면에, 〈이익을 낳는 투자처를 찾아다니면서 실제로 제국주의적 팽창 열망의 현실적인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화폐자본은〉 성격이 다르다. 〈솟아 넘치는 활동 욕구로 국내 투자보다 해외의 사업에서 더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에게 어떤 지역이 누구에게 속하는지는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럴 것이 정치적 지배력은 투자의 가능성과 안전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식민지는 대규모 산업의 판매 시장 역할을 하다가 부를 축적한 산업국가들의 잉여자본 투자 시장으로 발전했다.〉"(103)


"스페인-미국 전쟁, 의화단의 난Boxeraufstand 그리고 무엇보다 보어 전쟁 등으로 촉발된 해외 정책에 관해 커다란 논쟁들이 벌어지자 비로소 포괄적으로 이해된 제국주의적 발전에 대해 이론적인 비판이 다듬어져 표현되기 시작했다." "1902년 《제국주의》를 저술한 홉슨은 주요 유럽 열강들의 무역과 팽창에 관해 연구했고, 제국주의적 확장은 경제 전반과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가 팽창하는 이유를 〈국가 전체의 상업적 이해관계는 국가 자원의 통제권을 빼앗아, 그것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특정한 국지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 새로운 제국주의는 ······ 그 나라의 특정 계급과 특정한 무역을 위해 번창해왔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차관, 교통수단 등의 형태로 투자가 증가한 점에 근거하여 입증했다. 제국주의는 납세자에게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 한편, 투자자와 투기꾼들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원천이었다."(104-6)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적 붕괴를 다룬) 마르크스의 숙고를 그 성향과 이론적 최종 성과에 관련해서만 수용했다. 사실 그녀도 모든 국가와 생산의 모든 부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독점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오직 이론적인 구성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이론적인 가설을 제국주의적 발전의 근저에 놓인 실제적 모순이라고 가정했다. 〈마르크스의 확장된 재생산 도식이 현실과 상응하는 순간, 그것은 결말, 즉 축적운동의 역사적 한계를 예고하며, 나아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종말도 예상케 한다. 축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며, 또한 자본주의의 몰락이 객관적·역사적으로 필연적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부터 자본의 역사적 진행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서 제국주의라는 최후 단계의, 모순에 가득 찬 운동이 생겨난다.〉"(112-3)


7. 전망


"레닌이 내린 '제국주의'의 가장 간략한 정의─기존 자료들을 정치적-실용적 의도에서 조합하여 하나의 추상적인 이상형으로 재가공한─는 〈자본주의의 독점 단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 자신도 그러한 정의를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산업의 독점화와 경쟁에 기반을 두는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변화하는 것을 간략하게 공식화하려는 레닌의 노력은, 물론 종종 경제와 사회 현상들이 국가나 지역에 따라 차별화된 형태로 드러나는 특수성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경험적으로 확실히 뒷받침된 이론보다는 제국주의를 〈지배 관계〉로서 해독解讀하는 일과 〈역사 속에서 제국주의의 자리〉를 찾기 위한 역사철학적인 방향성을 띤 탐구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국주의는 레닌이 보기에 〈금융 자본과 독점의 시대〉 또는 〈붕괴에 직면한, 사회주의에 자리를 내어 줄 정도로 무르익거나 너무 무르익은 자본주의〉의 시대였다."(119)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에 대한 연구는 거의 같은 시기에 레닌의 이론보다 더욱 경험에 강한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무역 및 생산 통계들을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이 경제학자는 1914년 이전 세계 경제 체제의 구조적 연관성을 해명하려고 했다. 여기서 그는 〈경제 활동의 국제화 과정〉, 즉 전 세계적으로 생산과 상품 교역이 서로 얽혀 있는 것과 상호 대립적인 경향들, 즉 민족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이해관계들〉을 구분했다. 부하린은 그러한 이해관계들을 적대적이고, 원칙적으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부하린의 구상에 따르면 국제화와 〈민족주의화〉의 대립적인 과정 속에서 제국주의에게 주도적인 기능이 넘어간다. 그는 제국주의 개념을 힐퍼딩의 논지에 따라 (독점 세력과 금융자본 그리고 국가권력의 새로운 형태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나타나는) 〈금융자본주의의 정책〉이라고 정의했다."(122)


"마오쩌둥의 이론은 (1930년대 중국의 고유한 경제적·정치적 정황들에 대한 상황 분석에 기반하여) 〈중국의 특수성과는 동떨어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잡담들은 단지 추상적이고 공허한 마르크스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시작된다. 마오쩌둥에게 그러한 정황들의 결정 요소들은 외부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봉건체제〉였는데, 그로부터 마오쩌둥은 아주 일반적으로 자기 나라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낙후성을 이해했다. 이러한 상황 서술로부터 마오쩌둥은 중국의 독립은 오로지 인민해방 전쟁을 위한 인민의 동원을 통해 다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제국주의의 경제적·사회적 전제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보다는 군사적인 투쟁 조건들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마오쩌둥의 언어에서 '제국주의'는 '침략자', 다시 말하면 군사적으로 굴복시켜야 할 '적'과 동의어가 된다."(123-4)


"1920년대에 벌써 마르크스-레닌주의 정통 이론의 방법과 태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나타났다. 논란의 여지없이 인플레이션에 이어 자본주의 경제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자본주의가 기생적이고 부패하며 몰락해간다는 진단에는 들어맞지 않는 현상이었다." "제국주의 이론은 완전히 경직되었고, 제국주의 개념은 정치 투쟁을 위한 저속한 표어가 되었다." "제국주의 개념이 거의 완전히 내용이 없어지고 역사적 성격을 잃어버림으로써, 그것은 수많은 사회적 현상과 사건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 때문에 제국주의 개념은 아마도─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가끔 정치적인 선전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제국주의는 〈진보와 평화의 가장 가증스러운 적〉이고, 제국주의의 신봉자는 〈국가를 빼앗는 강도이며 식민지 정복자이고 전쟁광〉이다."(125-7)


"(정치 어휘를 '공간화'한 카를 슈미트의 '광역권(실행공간)' 개념으로 대표되는) 독일 민족 우파와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공간 이데올로기는 종국에는 극단적 팽창주의에 대한 암호가 된다. 그들은 그러한 팽창주의에 제국주의 개념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 이론가들에게 이 개념은 이중으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개념을 자신들의 이론과 특히 정치 일상에서 표어로 사용했다. 더욱이 독일 우파들에게 서구 열강의 정책은 대개 〈제국주의〉로 여겨졌다. 공간 이데올로기는 그들에게서 두 가지 기능을 충족시켰다. 먼저 그것의 불명료성이나 불확실성은 팽창의 실제적인 목표들에 대한 구체적인 결론을 보여주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특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식민지 열광자들의 변변치 못한 선전을 상기하지 않게 해주었다. 정치 분야에서 그러한 언어 조작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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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황선애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 / 푸른역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 서문


"시간 그 자체는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역사적 표현들은 은유적으로 역사와 그 〈움직임〉에까지 확대되는 자연적이고 공간적인 배후 의미에 의지하게 된다. '진보' 개념 역시 그런 표현들 가운데 하나다. '걸어가다Schreiten'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물리적·공간적 구성 요소를 지니며, 걷는 행위가 이루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간적 구성 요소가 첨가된다. 왜냐하면 마우트너가 강조한 것처럼 걸어간다는 것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기, 즉 진보하기Fortschreiten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Fortschritt'는 공간적으로 여기와 저기, 시간적으로 지금과 나중 및 이전을 서로 연관시키는,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길'이라는 공간에는 시간적 흐름이 상응하기 마련이다. 일반적 관계 범주로서 '진보' 개념은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역사적 움직임을 호명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고 중립적이다."(12-3)


# 근대에 형성된 '진보' 개념의 함의

1. 역사철학의 보편적 개념으로 쓰인다.

2. 개별 영역이나 구체적 행위와 관련된다. 옛것은 언제나 뒤처짐을 의미한다.

3. 역사적 운동이 스스로를 진보의 주체로 생각할 때 진보 개념이 이념화된다.

4. 보통 개선을 향한 움직임을 의미하며, 거의 종교적 색채를 띤 희망의 개념이다.

5. 고대와 달리 비순환적인, 직선적인 진행을 가리키며, 후퇴는 항상 진보보다 짧게 지속된다.

6. '진보'의 목표는 유한한 범위 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과 그 목표를 무한하게 연기하는 것 사이에서 동요한다.

7. '진보'는 종종 가속화를 가리키며 역사적 동력에 의해 촉발되거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2.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진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넓은 의미에서 '진보Fortschitt' 혹은 '나아가기Fortschreiten'를 나타내는 많은 단어들은 특정한 관점에서 어떤 것이 증가하고 개선되거나 혹은 악화되는 상황도 나타냈다. 특히 개개인의 교양이나 덕성이 완벽해지는 것을 종종 의미했다. 하지만 도시나 제국의 권력과 부가 증가하는 것을 나타내거나 학문의 발전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때 진보의 주체나 영역은 대체로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시간적으로도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진보 개념이 아직 형성된 건 아니다. 적어도 이교도적인 고대 사람들은 사회적·도덕적 조건들이 순차적으로 개선된다는, 다시 말해 역사가 전반적으로 변화 과정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물들이 변화해도 변화 자체는 감지하지 못했고 시간의 흐름이 개선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따라서 진보에 대한 어떤 생각을 몰락에 대한 또 다른 생각과 나란히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모순된다는 의식을 하지 못했다."(18-9)


"현재와 이어지는 다리인 동시에 (동양 문화권은 완전히 배제한 상황에서) 그리스인들의 진보성을 서술하는 유일한 자료는 투키디데스의 고고학이다. 거기에서는 문명의 기본 요소들이 생성되는 것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중요한 것은 기술, 경제 및 권력의 진보였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필요한 유일무이한 잠재력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때 그리스인들은 야만인들에 비해 진보적으로 묘사되었다." "이 외에도 기원전 5세기에는 인간이 이제까지의 모든 발전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정치적 계획을 수립하고 관철함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능력을 획득했다고 생각했다." "예술가와 철학자, 심지어 소피스트의 경우 현대적인 것에 대한 의식이 거의 지배적이었다. 오래된 것들은 이제 우습게 생각되었고, 새로운 것은 더욱 새로워지기를 원했다. 자신들의 상황을 크로노스가 실각한 후 〈젊은 제우스〉가 지배한 상황과 유사하게 생각했다."(20-1)


"이러한 인식은 시종일관 계속되거나 지속적이진 않더라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성공 사례들로 인해 더욱 힘을 얻었다. 그것이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인식은 기껏해야 그리스인에게만 퍼져 있었고, 순진한 자기중심적 태도였으며, 단지 막연하게 원시시대와 고대 선사시대에 견주는 것이었다 진보에 대한 확신은 새로운 행위의 가능성에 대한 의식에서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의 그 유명한 합창에서 인간의 영민함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 새로운 발명의 증가에 대해 말하고 있진 않다. 섬뜩할 정도로 놀라운 인간의 능력에 대해 말하지만 인간의 진보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상응해서 아마도 정치를 개선한다는 생각은 대규모의 제도적 변화를 감행하는 능력과 관련 있을 뿐이지, 가령 사회와 도덕성이 개선되는 과정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23)


"스토아 학파는 개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진보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시민국가가 역사적 흐름의 목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달랐다. 루크레티우스는 발명의 역사가 현재를 넘어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고는 그에 대한 종합적인 그림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과학과 기술에서 예기치 못한 것들을 기대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개별적 진보들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별다른 결과 없이 그 자체로 끝나고 말았다. 학문은 학문으로만 머물렀고 학문 바깥으로부터의 흥미나 지원을 거의 얻지 못했다. 연구자가 받는 보상은 지식 그 자체였고, 실제적 응용은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학문적 정신 활동이 좀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전쟁 기술뿐이었다. 경제적 변화 과정이 그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다. 생산을 강화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확산되어 새로운 것을 생산하도록 자극하지도, 습관의 벽을 깨뜨리지도 못했다."(28-9)


"인류가 전반적으로 진보한다는 인식은 마침내 로마제국의 성립과 로마제국 내에서의 기독교 옹호론과 관련해서 형성되었다."(30) "사람들은 일찍이 예수의 탄생과 아우구스투스가 지배하는 제국의 공고화 사이에 신이 의도한 관계가 있다고 봤었다. 로마제국에 와서야 선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교통체계가 만들어졌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과거에 제국들이 있어온 것을 신이 원한 진보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무엇보다 정치와 관습 그리고 종교에 있어서 그러했다. 동시에 제국의 평화와 복지는 기독교 신의 영향이라 보고 싶어했고, 이 영향으로 인해 그것이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제 미래로 생각을 돌려 제국을 옹호하는 논거를 선교를 위한 논거로 확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오리기네스에 따르면 제국의 권력과 안전 유지는 예수를 인정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로마 시대에 처음으로 미래의 보편적 진보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생겨났다."(32-3)


3. 중세 시대의 '진보Profectus'와 근대 종교 영역에서 사용된 '진보Fortschritt'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시로 바뀌는 정치적 권력 상황이 교회나 신앙과 동일시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고 따라서 기독교화된 로마제국을 신의 계획에 따른 진보적 요소의 하나로 해석하려는 에우세비오스의 섣부른 낙관에 일침을 놓았다.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는 두 제국, 즉 '신의 도시civitas Dei'와 '지상의 도시civitas terrena'가 진행하는 방향은 '앞으로 나아가기procursus, procurrere' 혹은 '돌아가기excursus, excurrere'로 묘사되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건 진행에 대한 시간적 규정이 이중적 의미를 띠는 것이었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돌아가기'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더 적절하다고 보았다. 접두사 'pro'에 내재된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 '인류의 전진과 번영'에서조차도 비하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그는 두 제국이 혼용되어 오해가 확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7)


"하지만 신앙적 경험의 '나아감proficere'에 대해 얘기할 때는 신앙적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이 지상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선택된 부류의 인간이 나아가는 길은 부차적으로 역사적 진행이지 일차적으로는 신을 향한 도정이다. 〈한 개인을 교육할 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믿는 자들에 의해 대표되는 인류의 교육은 시대를 지나면서 진보되었고 따라서 인류는 점차적으로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으로, 그리고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상승할 것이다.〉 교육도 시간적 단계를 거치면서 '역사'를 목표로 하는 대신 선택된 자들이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에 이르도록 도와야 한다. 따라서 '진보profectus'는 역사적 개념이 아니었다. 진보의 목표는─나중에 파울리누스의 명언에 요악된 것처럼─시간 바깥에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완성은 시간 속에 있지 않고 영혼 속에 있다.〉"(37-8)


"(진정한 진보는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는) 초역사적 진보 개념은 당연히 현세적 삶의 태도에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역사 자체에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신의 완벽성을 향한 긴장은 역동성을 불러왔고 이는 기독교인들이 〈진보적〉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인식하도록 압박했다." "이러한 태도가 미친 영향은 인간의 행위와 이후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초역사적 진보는 처음에는 신앙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현세의 여러 영역에까지 침투하게 된다. 따라서 늦어도 스콜라 철학 이후에는 종교적, 정신적 인식 행위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장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점차적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은 근원이 변함없이 동일하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물론 예수를 따른 사도들의 견해를 결코 넘어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순차적 시간의 흐름은 인식이 확장되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41-2)


"근대 초기의 과학 혁명으로 인해 비로소 종교적 기대 지평을 줄이고 밀어내는 주도 영역들이 생겨났다."(44) "종말론적 역사 해석도 이제 보편적인 역사 원리로 이해되는 진보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계획이 점차적으로 이행될 것이라는 전통적 믿음이 기독교적 진보뿐만 아니라 일반적 진보 개념에 맞춘 논리로 무장한 신학에 의해 지탱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신의 계획이 종교를 윤리로 만드는 것에서 발전되었든 또는 그것이 계시라는 역사적 근거에서 도출되었든 상관없었다. 처음에 초역사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기독교의 '진보' 개념은 미래가 개선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었고, 세속적으로 해석된 후에 다시 거꾸로 신교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전혀 단절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지속성 속에서 진보가 증명되었다. 1897년에 트뢸취가 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진보 개념을 이 일회적이고 불변하는 원래 의미와 다시 연결했기 때문이다."(48)


4. 근대적 진보 개념의 형성


"근대의 진보 개념과 이전의 종교적 진보 개념의 차이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대가 이제 열린 미래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용어상으로는 종교적인 '진보profectus'가 세속적인 '진보progressus'에 의해 밀려났다고 혹은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근대 초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르네상스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의식이 생기게 했지만,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진보 의식은 아직 가져다주지 못했다. 특히 중세가 어두운 중간 시기로 인식되고 이를 뛰어넘어 저 멀리 고대가 여전히 모범적 전형이 되는 동안은 그러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의 증가로 인해 고대의 권위가 독립적인 이성에 의해 물러나고서야 비로소 역사적 시간이 진보한다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자연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지만, 방법론적 발전을 통해 그것을 새롭게 발견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삶의 개선이라는 현세적 목표가 생겨났고, 이는 종말에 대한 이론을 열린 미래를 향한 도전으로 대체하는 것을 허용했다."(50)


"(근대적) 진보 개념을 관철시키는 척도는 이성과 현세적 시간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의 지양이었다. 이성의 사용이나 이성을 통한 발견과 새로운 고안들은 시간과 함께 증가되었다. 결국은 이성 자체가 시간성을 띠게 되었다." "베이컨은 현재가 경험이나 판단에서 고대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숙한 어른과 젊은이를 비교할 때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고대〉는 이제 그가 살고 있는 시대 이전에 있었던 역사로 저평가되었다. 베이컨의 비유가 이전의 자연 비유와 다른 새로운 점은 그가 소멸의 과정인 자연적 노화를 배제했다는 점이다. 대신 그는 첫째, 〈고대는 세상의 젊은 시절이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와 현재를 역으로 보는 시간적 관점을 취했다. 둘째, 그는 시간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영원한 진리와 더 이상 분리하지 않았다. 모든 권위는 고대가 아니라 시간에 근거를 두며,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고 그는 말한다."(51-2)


"파스칼은 1647년 《진공에 대한 연구》의 서문에서 이 같은 비유를 더욱 확장한다. 그는 이성의 무한한 진보를 위해 성장 메타포를 퇴출시킨다. 그는 고대인들의 역사적 권위를 손상하지 않고─사실 이들이야말로 젊은이들이다─이성이 무한하게 새로운 것을 고안함으로써 자신만의 규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제한된 완전성을 보이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파스칼의 확신은 이제 인간이 초역사적으로 신의 영원성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세계가 노화함에 따라 인간이 지속적으로 진보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은 〈영원을 위해 만들어졌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단계에서 시작하지만, 〈진보 속에서 끊임없이 배운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선인들의 그것과 함께 축적하여 학문을 발전시킨다고 보았다." "무한한 진보는 이제 자연의 노화 메타포에서 벗어난 미래를 개척하게 되었다."(52-3)


"(신적 완벽성에 비해 상대적인) 완벽성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대의는 18세기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전환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즉 하강이 따를 거라는 순환론적인 생각 역시 널리 퍼져 있었다. 볼테르, 디드로, 루소와 같은 위대한 계몽주의자들도 이런 하강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개선될 거라는 순수한 진보 개념은 해당 세기를 규정할 때 아직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진보는 자연의 항구적인 법칙에 의해 한계를 갖게 되는데, 학문은 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야 하고, 도덕은 이를 성취해야 하며, 예술은 이를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반면 콩도르세는 인류의 개선은 무한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진보 자체가 갖는 한계 외에 다른 한계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콩도르세는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진보성Fortschrittlichkeit의 원칙을 표현했다."(58-60)


"칸트는 개선을 향한 진보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도, 신이 의도한 계획도 아니며, 인간에게 영원히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은 도덕의 뒷받침이 없으면 불안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칸트는 미래를 도덕적인 방향으로 끌어갈 실천적 윤리계명을 내세워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독립적인 이성을 통해 중재한다. 칸트는 실천이성을 통해 좀 더 결정적인 답을 제공한다." "인간은 시간의 변화에 예속되지 않는 도덕적 존재로서 스스로 진보의 목표를 세울 수 있다. 일단 한 번 그렇게 하고 나면 언제나 역사가 진보를 가져온다고 보게 된다. 또한 〈실천이성의 힘을 통해〉 그렇게 되도록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진보'는 선험적 논증 맥락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도덕적 진보가 필연적이라는 인식 조건이 동시에 그것의 실현 조건이 된 것이다. 또한 진보는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67-9)


"'진보'는 완벽이라는 이상에 시간성을 부여함으로써 역사적 개념이 되었고, 또한 기대 지평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까지 초월적 목표로 설정되었던 것이 이제 역사적 실천 안으로 편입된 것이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이러한 기대 지평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의 왕국을 실현하고자 하는 혁명적인 욕구야말로 진보적 발전의 탄력적 요소이며 현대 역사의 시작이다.〉 역사적 흐름 안으로 편입된 기대 지평이 역사를 역동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역사의 〈근대〉 시기와 역사의 진보는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었다. '진보'로 개념화된 것은 달라진 미래와 개선의 미래만이 아니었다. '진보'는 또한 새롭게 바뀐 경험 세계를 표시했다. 일단 일회적이지만 추월이 가능해진 현실 경험이 이 개념에 각인되었다. 1800년 무렵에야 비로소 단수형 집합 개념 '진보'는 이미 뒤로 물러난 '나아가기Fortschreiten'의 여러 가지 방식을 자체 내에 내포하게 되었다."(82-3)


"역사적 경험으로서 서서히 형성되는 진보 경험의 특징들은 슐레겔이 콩도르세를 비판하면서 언급했듯이 하나의 공통된 분모를 갖고 있다. 〈역사의 근본적 문제점은 인간이 성취한 다양한 분야에서 진보가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지적인 발전과 도덕적 발전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슐레겔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Gleichzeitigkeit des Ungleichzeitigen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이 어긋남의 긴장이 '진보'를 경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크고 작은 〈역행〉과 〈정체〉, 특히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도달한 모든 교양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역행〉을 언급할 수 있다. 슐레겔은 콩도르세가 역사를 직선으로 구상하면서 이러한 역행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고 말한다." "(역사의 흐름에 불규칙성이 있다는) 슐레겔의 언급은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다양한 흐름과 그 속도의 차이가 '진보' 현상을 가져옴을 설명해준다."(83-4)


"시간적 관점은 언제나 지리적으로 규정되었고, 그런 다음 종교적, 민족적, 인종적 관점에서 보완되었다.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제한하는 이러한 논지는 '식민주의'에서 시작해 '제국주의'를 거쳐 '공존'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되풀이되었다." "진보의 단계적 차이와 괴리에 근거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명제는 그것이 임의로 해석되는 것과 상관없이 정치적 지도층에게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앞서가고 뒤좇아 가도록 만드는 괴리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진보의 주체이거나 수혜자이며 따라서 인간 종족은 그렇게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반쪽의 인류가 진보를 추구할 때 이러한 논지는 이데올로기적인 요구의 성격을 띠고, 요구의 이행이 미래로 연기됨으로써 진보는 무한하게 재생산된다. 이 경우 역시 진보 개념의 이 같은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처음으로 꿰뚫어 본 사람은 다름 아닌 헤겔이었다."(96-7)


"헤겔은 이제까지 나란히 사용된 진보의 의미들, 즉 진행, 행위 범주, 역사 흐름의 특징 그리고 인식 개념으로서의 의미를 모두 종합해서 사고했다. 헤겔은 《철학의 역사》, 《세계사의 철학》 같은 저서에서 동일한 사건의 내면과 외면을 보여주었다.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구체적인 역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정신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정신의 삶은 행위 그 자체다.〉 이렇게 해서 헤겔은 이제까지 초역사적으로 규정된 목적을 온전히 역사적 실현의 장으로 옮겨놓았다. 〈목적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그것을 성취하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차이로 인해 균열된 구조들은 구체적 상황의 변증법 속에 묶이고, 이 변증법이 시간 속에서 실현되면서 현실과 법을 이끄는 기능을 갖게 된다. 진보와 역사는 이후 진행의 범주 안에서 서로 수렴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헤겔은 이제까지 진보 개념을 가능하게 한 세 가지 입장들이 개념의 시간성을 온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106)


"우선 헤겔은 기독교의 완성 이론을 비판한다. 이는 내세적 성취만을 이야기할 뿐이며, 따라서 모든 현세적 행위는 준비이자 수단으로 격하된다고 본다. 오히려 스스로를 창조하는 절대 정신은 역사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 즉 절대 정신이 〈실제로 세계 역사를 다스려왔고 다스리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사항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두 번째로 헤겔은 완성 가능성에 대한 모든 해석을 문제 삼는다. 〈완성 가능성이란 사실 가변성처럼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도 목표도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이것이 헤겔의 세 번째 비판이다─헤겔은 괴리에 대한 온갖 형태의 해석 역시 거부한다. 〈개인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누구나 자기 시대의 자식이다. 마찬가지로 철학도 그 사상 속에 당대를 반영한다. 개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철학적 사상이 당대를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106-7)


5. 19세기의 중심 개념 '진보'


"'진보'가 특정한 주체나 객체와 뚜렷하게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용되자 곧 표어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830년대 이후로 이러한 표어 사용이 확산된다. 이것은 산업화 시대의 사회 문제를 헌법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다. 시대에 발맞추어 앞으로 나아가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거나 요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이것은 이미 프로이센의 개혁파 관리들의 입에 박힌 어법이었으며, 나중에 이들의 비판자들─예를 들어 한제만─역시 같은 어법을 사용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843년에 역사적 흐름을 조종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보 그 자체가 헌법이다.〉" "'진보 자체'가 삶의 모든 영역을─마인홀트는 이를 종교적, 도덕적, 학문적, 예술적, 사회적, 정치적 진보로 구분한다─ 포괄함으로써 '진보'라는 말의 의미는 희석되었고 상투어가 되었다. 이제 동시대인 누구도 세상이 진보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116-7)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진보주의적 경험 체계와 해석의 패턴을 더욱 세분화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생각한 역사적 진보가 남다른 것은 경제를 이론의 기초로 삼고 연속적인 계급투쟁을 진보의 역동적 형태로 본 점이었다. 〈반대가 없으면 진보도 없다. 그것이 문명이 오늘까지 밟아온 법칙이다.〉 마르크스의 이 일반적 명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역사에서 진보는 현재 상태의 부정으로서 나타난다는 헤겔의 아류가 사용하는 문구도 새롭지 않다. 혁명이 진보를 향해 간다는 원칙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게 아니다. 독일에서 새롭게 영향을 끼친 것은 정치의 중심이 된 역사철학적 명제였다. 즉 헤겔이 세계정신에서 상정한 변증법적 운동이 계급투쟁에서 단계적으로 실행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회적 진보에 대한 명제로부터 자유주의 진보 개념에서보다 더 직접적인 행동강령을 유도해낼 수 있었다. 이때 모토는 항상 다른 이들보다 〈더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135-6)


6. 전망


"승리를 확신하던 진보에 대한 믿음은 19세기 후반부에 다윈의 진화론Entwicklungslehre이 대중화되면서 또 한 번 추가로 지원병을 얻게 된다. 자연이 역사성을 띤 이후에는 자연도 진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고, 따라서 문명의 진보를 자연사를 통해 확인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내재된 비판을 넘어서 진보에 대한 신념을 원칙적으로 비판하는 소리가 점점 확산되었다. 시대정신에 맞서 외톨이로 소리친 자는 키르케고르와 보들레르였다." "독일에서는 쇼펜하우어에 이어 니체가 진보에 대한 믿음을 데카당스 현상으로 폭로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비판적 공격과 달리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 개념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데, 이때 진보는 권력에의 의지, 과감한 삶을 향한 의지를 달리 표현한 경우다. 〈진정한 진보는 더 큰 권력을 향한 의지와 방법 그 자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니체의 언설은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140-2)


"모두는 아니지만 시민 계층의 많은 이들이 진보 개념을 혐오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진보를 강조하면서 이 개념을 독차지하려는 것이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니체의 영향이 컸고, 특히 생철학 진영에서 이런 경향이 강했다." "두 번이나 치른 세계대전의 결과로 혹은 두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좌파 지식인들도 주도적 개념인 진보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 이렇게 대응한다. 〈진보 개념은 파국의 개념에서 근거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계속' 가면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호르크하이머는 1947년 절망적인 심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기술적 수단의 진보가 비인간화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 진보는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 즉 인간 이념을 파괴할 위험에 처해 있다.〉" "이처럼 어떤 관점이든 관계없이 진보 개념에는 예측의 잠재력이 내재하고 이것은 언제나 정치적 입장을 띌 수밖에 없다."(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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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 문명과 문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외르크 피쉬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안삼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 서론


2. 그리스 : 문화 개념이 없는 문화


"고대 그리스에서 문화 개념과 가장 근접한 말은 '교육(Paideia, Erziehung)'과 '교양(Paideusis, Bildung)'이다. 이 두 표현은 '아이Pais, Kind'의 파생어인데, 물론 그렇다고 아동 교육에만 한정되어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이 두 표현은 아주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교양을 위해 사용되고, 따라서 그 결과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말은 이미 데모크리토스에 의해서 자질 또는 교양인의 자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교양Paideia은 행복한 자들의 장신구이며, 불행한 자들의 피난처다.〉 여기서 'Paideia'라는 말은 항상 교양의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고전적 교양 이상의 신봉자들은 19세기 및 20세기에 충분한 전거도 없이 'Paideia'를 문화 그 자체로 양식화했다. 특히 베르너 예거가 그런 부류다. 그는 '교양'과 '문화'를 동일시했고, 이런 의미에서 문화 의식, 즉 문화에 대한 의식적 관념을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최고의 핵심적 가치로 보았으며, 이런 문화 의식을 그리스인들한테서 발견했다."(21)


3. 로마 : 문화 개념의 기초들


"출발점으로서 'cultus'와 'cultura'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밭의 경작cultura agri'이나 '밭을 일구는 일cultus agrorum'과 같은 농업적 의미, 즉 '돌봄'과 '밭의 경작'이다. 여기에는 '가축을 돌보는 것'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자연으로부터 얻어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세 영역으로의 의미 변전이 이루어진다. 우선 '돌봄'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데, 교육이나 존경의 의미 또는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의미로 쓰이게 된다. 즉 의복이나 장신구로부터 개인적 능력이나 성격의 훈련까지도 의미하게 되었다." "'마음의 닦음cultura animi'이 지칭하는 두 번째 의미 변전 영역은 추상적 영역으로 능력, 학문, 예술 등을 장려하는 영역이다." "세 번째의 의미 전이 영역들은 초자연적인 일, 종교 그리고 신과 우상, 하느님과 악령들 등에 대한 경배다. 'cultura'는 특히 고대 말기에 이런 의미로 나타나곤 했다."(28-30)


"원래의 농업적 의미에서 볼 때 'cultus/cultura'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인간은 이것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것이 삶에 필요불가결하지 않은 영역들을 포괄해감에 따라, 즉 따라 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유리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게 됨에 따라 가치 판단상의 명백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문화 비판이 생겨났다. 문화가 난숙한 문화로 변화하고, 사람들은 이 난숙한 문화로부터 벗어나 참된 문화를 보여주는 좀 더 원초적인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가령 수사학 무용론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수사학이란 (처음부터 자연에 의해서 주어진 것, 혹은 예전의 것만이 자연적인 것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생존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큰 위험성을 무릅쓰지 않고도 이 수사학을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33-4)


"문명 개념의 경우 사정이 문화 개념에서와는 전혀 다르다. 고대 라틴어에는 'cultus'와 'cultura'처럼 후대의 의미들이 한데 묶일 수 있는 단어도 없고, 어떤 상응어도 없다. 출발점은 시민이란 의미의 'civis'이며, 여기서부터 형용사 'civilis'가 파생된다. 발음상의 기저基底로 볼 때 이것과 그나마 가장 가까이 비교될 수 있는 명사는 'civilitas'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 어원의 영역, 즉 도시와 시민계급의 주변 영역에 국한된다." "그러나 'civilis'와 'civilitas'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얻는데, 특히 고대 말기에서 문명화된 삶과 문명화된 습속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대체적으로, 문화가 아주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는 영역에서는 'civilis'와 'civilitas'의 중요성과 사용 빈도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간과 관련되는 활동 영역으로부터 자연을 향한 행위 영역으로 전이되는 것이 그 반대 방향의 전이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이 새로이 드러나고 있다."(37-8)


4. 중세


"'cultura'는 아퀴나스에게서는 농경적 의미와 제의적 의미로 쓰이는 빈도수가 대략 같은 데 반해, 여타 저자들한테서는 제의적 의미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훨씬 더 자주 쓰이는 'cultus'는 모든 저자들의 제의적 의미로 쓰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가장 흔한 상투적 어구는 '신에 대한 경배cultus divinus'와 '하느님에 대한 경배cultus Dei'다." "좀 더 중요한 것은 제의적 의미가 인간, 특히 양친, 조국 그리고 산발적으로는 돌보고 닦아야 하는 덕성이나 학문에까지도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 'cultus'는 '존경'으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상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리하여 인간의 존경으로부터 신의 섬김에 이르기까지 경배에 관한 일종의 품계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층 강력하게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연관되었던 이 개념의 원래적 요소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문화가 어느 정도는 경배로 신앙화된 것이다."(47-8)


"'civilis'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시민적 상황〉은 자연을 벗어나게 만든다." "이런 양상들은 'civilitas'라는 명사에서 다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단지 드물게만 사용되는 명사이긴 하다. 이 단어는 보통 '도시', '시민', '시민권'을 가리키지만, 특히 한 도시의 '헌법', 즉 'Politia'를 의미한다." "'civilitas'는 이따금 도시나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의 올바른 삶 자체, 즉 '문명화된 삶zivilisiertes Leben'을 지칭하는 데까지 어의가 확장되기도 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가 들어서기 이전이라 할 수 있는 삶과 정치적 삶(즉 인간에게 적합한 유일한 삶으로 간주되는 공동체 안에서의 삶) 사이의 구별이다. 이렇게 해서 개념 안에서의 쳠예한 구분이 생겨난다. 야수적 또는 야만적인 인간들은 언제나 이미 공공성civilitas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만인들이 축출되는 것은 '문화cultura'로부터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civilitas'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52-4)


5. 16세기와 17세기에 볼 수 있는 현대적 문화 개념의 토대들


"중세 후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이 수용되면서 '공공성civitas'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나 16~17세기에 상황이 다시 역전된다. 고대의 뿌리를 재수용하면서 'cultus'와 특히 'cultura'는, 아직까지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자명한 개념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광범위하게 현대적 의미의 외연을 획득하게 된다. 이에 반해 'civilitas'는 점점 더 예절의 좁은 영역으로 축소된다. 'civilitas'의 정치적, 공동체적 요소들은─적어도 부분적으로는─'cultura'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문주의의 경우 처음에는 'civilitas'가 더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예절〉, 〈훌륭한 태도〉 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이 경우에도 물론 '도시국가civitas'가 배경을 이루고 있다. 즉 정말로 교양 있고 완성된 삶은 도시에서만, 도시적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은 주제가 되지 않고 그냥 전제가 된다. 이에 반해 야만적 삶과 대비되는 문명화된 삶이라는 의미는 계속 보존된다."(60-1)


"최초로 'cultura animi'를 핵심적인 개념으로 만든 사람은 베이컨Francis Bacon이었다. 1623년에 그는 이 개념을 윤리학의 두 주요 부분 중 하나로 설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윤리학을 근본적으로 두 부분의 가르침으로 나눈다. 하나는 선善의 예시 혹은 모범을 다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교육cultura animi 혹은 정신의 훈련에 대한 것인데, 우리가 종종 정신의 농사라고 부르곤 하는 분야다.〉" "'cultura animi'는 인성계발을 위한 포괄적인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를 모방한 관용구 '정신의 농사Georgica Animi'라는 말을 원용하여, 'cultura'의 농업적인 기본 의미를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즉 베이컨은─〈섬세한 교육culture〉이라고 표현한 몽테뉴와 비슷하게 그러나 몽테뉴보다 더 의식적으로─에라스무스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교육Erziehung'이라는 의미에서의 'civilitas' 대신에 'cultura' 혹은 'culture'를 사용한다."(68-9)


6. 18세기와 19세기 초 : 현대적 문화 및 문명 개념의 생성


"1760년대 이래로 '문화Kultur'라는 개념이 독일에서 폭넓게 확장되는 동시에 대중화되었고,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는 '문명civilisation'이라는 신조어가 동일한 기능들을 떠맡게 된다." "문화 개념은 가장 먼저 프랑스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농업적 의미는 자명하다. 그리고 18세기의 경과 중에 'culture'는─다른 언어들에서도─널리 퍼진 전문용어로 정착된다. 비유적인 영역에서는 '마음의 가꿈cultura animi'이라는 전통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와 연결되어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이미 나타난 바 있던 '교육', '교양'의 의미가 중심이 된다. 그것은 개인의 교양으로, 처음에는 집단과의 관련성은 대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빈번하게 사용되다 보니 가끔 목적어 없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루소는 〈교육은 가꿈culture에 비례하여 ······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를 만든다〉고 쓰고 있다. 다음 단계에 이루어진 중요한 진전은 개인적인 개념을 특정 집단, 제 민족들, 심지어는 인류에까지로 확장해 나간 것이다."(80-1)


독일에서 역사철학적 체계 진술의 한 기능으로 사용된 '문화' 개념은 "단순히 인간의 문화 업적들을 포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문화 업적들을 시간적 시각Perspektive 안에 세워 놓는다. 그리고 이 시간적 시각 안에서 이 개념의 대상은 비로소 그 고유한 의미를 얻게 된다. 이러한 기능들을 충족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개념이 새로운 강조점을 부여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초이자 가장 중요하게 이루어져야 할 확장은 개인에서 집단으로, 제 민족으로 그리고 인류로의 확장이다. 그 다음에는 농업, 교육, 학문들과 같은 개별적인 능력이나 영역들로부터 인간의 모든 생산물들로의 이행이 필요하다. 가장 많이 주춤하면서 이루어진 세 번째 단계는 인간 혹은 그 환경의 교양화라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그 결과물에 이르는 이행이었다. 여기서 결과물은 우선 교양화된 인간을 그리고 결국에는 문화 생산물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84-5)


"헤르더가 생각하기에, (정신문화와 교양이라는 의미를 넘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문화는 일차적으로 한 민족의 문화다. 이를 통해 역사화가 가능해진다. 한 민족의 역사는 동시에 그 민족의 문화의 역사이기도 하다."(87) "헤르더는 양가적인 유산을 남겼다. 한 민족의 문화, 즉 국민문화는 헤르더로 인해 핵심적인 가치가 되었다. 그는 이러한 국민문화를 자신의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우월한 가치를 가진다는 식의 민족주의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다. 헤르더는 그의 관심이 세계사 속에서의 다양한 문화들의 운동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세계시민Kosmopolit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개별 민족들의 문화로 인해 이 개념을 민족주의적으로 징발하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마련되었다. 다만 '국민문화'와 '문화민족주의'를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화민족주의는 국민문화가 배타적이 될 경우에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93)


"피히테의 경우 의문의 여지없이 긍정적인 개념을 좀 더 상세하게 규정하는 것만이 문제였다면 실러에게서는 루소와 칸트에 연이어 '문화'가 부정적인 측면들도 얻게 된다. 문화는 인간을 자연상태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데, 이 자연상태란 긍정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인간이 그 상태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문화의 압박과 문화의 해악〉이 운위되기에 이른다. 대립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정치적 영역이다. 〈자유와 문화는 최고로 충만한 상태에서 서로 뗄 수 없게 하나가 되고 또 이 합일을 통해서만 최고의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성 과정에서는 그 둘이 서로 결합되기 어렵다. ······ 계몽되고 도덕화되었으며 동시에 예속화되지 않은 나라들은 오직 유럽에만 존재한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곳에서는 자유로운 경우에는 야만적이고, 문화가 있는 경우에는 예속된 채 살고 있다.〉" "이로써 문화는 역사의 구체적인 과정 속에서 양가적인 성격을 얻게 된다."(100-1)


"중요한 것은 민족들 혹은 인류에 대한 '문명'과의 관련성이다. 물론 문명의 과정은 개인을 포함하지만, 그 상관계수는 '문화'의 경우와는 달리 거의 언제나 집단이다. 한 개인의 문명화라는 주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결정적인 것은 진보와 도덕의 이원론이다. '문명'은 운동, 변화, 분화를 의미한다." "1760년대에는 비교적 소수의 저자들만이 새로운 개념을 사용했다. 반면 1770년대 초반에는 '백과전서파' 안에 이 새로운 개념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외적인 문명의 진보와, 도덕과 미덕 영역에서 있을 수 있는 후퇴를 구분한 미라보에게서는 문명이 역사철학적으로도 야만과 퇴폐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점차 진보의 낙관주의에다 길을 비켜주게 되었다. 여기서는 문명의 진보와 무제한적인 인류의 진보가 일치하고, 도덕은 별도로 주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문명은 점점 더 일종의 역사 발전의 지표가 된다."(105-7)


7. 일반사전과 언어사전에서의 '문화'와 '문명'


8. 19세기 : 한 시대의 자의식의 표현으로서의 두 개념


"등급을 매기고 분류를 하는 것은 진보 모델과, 모든 민족의 문명의 단계를 한 가지 척도로 잴 수 있다는 비교 가능 원칙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이런 논의들의 결과는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모든 민족에게 문명으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몇몇 민족들은 특히 인종적 특수성 때문에 문명을 이룰 수 없다는 견해가 계속해서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주변적인 현상에 머물렀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 모델을 통해서 비로소, 다른 종류의 문화 내지 문명을 가진 민족들이 문화와 문명에 있어서 미달된 민족들로 되어버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도 자명한 토대로 보이던 그런 종류의 진보의 단계 속에서 이 두 개념이 유럽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측면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문화와 문명은 세계 속에서 유럽의 지도적 위치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다. 이는 대개 그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었고, 따라서 지리적 위치를 통해 이미 논증된 것으로 보였다."(156-8)


"독일어에서 '문명'이 '문화'에 대한 동의어로 쓰였던 것에 비해, 프랑스어의 '문화'는 '문명'에 대한 동의어로 쓰이는 정도가 독일어보다 훨씬 약했다. 프랑스어에서 문화의 무게중심은 정신적·학문적 영역에 놓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문화는 언제나 '문명'보다 협소한 의미를 지녔다. 처음에 문화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개인적 교양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때부터 18세기 독일어에서와 비슷하게 점점 역사의 과정 속으로 삽입된 집단적이고 과정적인 함의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독일어 어법과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프랑스어에서 민족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더 일찍 그리고 더 뚜렷하게 관철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프랑수아 기조가 〈프랑스는 유럽 문명의 중심, 발상지였다〉라고 기준을 제시했다. 프랑스 문명은 〈가장 완전하고 가장 진정하고 가장 문명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문명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배타적이지 않고, 유럽 공동의 요소들과 연결되어 있었다."(174-6)


"19세기 초엽에 '문명'은 영국과 미국에서도 일상적인 개념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보편적인 인기를 누렸다. '문화'는 문명과 더불어 프랑스어에서보다 더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독일어와 반대로 개인적인 교양과 관련된 측면이 중심을 차지했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프랑스처럼 '문명'이 그 세기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성장했다. 독일어와 비슷하게 영국에서는 부분적으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문명'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다." "1869년에 매튜 아놀드는 〈문화란 우리의 총체적인 완성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현재의 난국에서 벗어나는 데 크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문화를 추천〉하고자 한다. 〈완성을 정신과 영혼의 내면적인 상태로 간주하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문명과 다르다.〉 여기서도 구별은 일반적인 어법까지 퍼지지 않았지만, 그러한 구별이 근대 경제와 기술의 결과에 대해 가해진, 전 유럽에 퍼진 비판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것이다."(177-8)


9. 양차 세계대전의 시기 : 서구의 몰락


"양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내전이라는 것과 유럽 몰락의 시작을 알리고 그 사실을 확정지었다는 점은 '문화'와 '문명'의 개념사에도 반영된다." "'문화'와 '문명' 개념이 19세기에 담지해 왔던 유럽적 자의식은 늦어도 1918년 이래로는 깨어졌다. 진보의 위기는 문화와 문명의 위기로 이어졌다. 물질적 발전과 경제 그리고 기술의 긍정적 결과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 두 개념들은 이제 자의식보다는 한 시대의 자기회의를 구현하게 되었다. 독일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문화'와 '문명'의 대립을 형성해냄으로써 이 위기의 언어적 극복을 위해 가장 큰 준비 작업을 수행했다. 이러한 준비 작업은 두 개념 중 하나에서 부정적인 요소들을 거의 없애는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다른 언어들도 매우 더디기는 했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때 '문화'가─세계전쟁의 선전에도 불구하고─부담이 적은 개념으로 드러났는데, 왜냐하면 문화는 언제나 정신적인 영역에 더 많이 관계되었기 때문이다."(184-5)


"1918년에 나온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문화'-'문명'의 대립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이 저작만큼 세계대전 선전의 에피소드적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슈펭글러는 진보와 작별을 고하고, 문화 내지 문명의 유럽적 사명과도 작별을 고한다. 문화는 '일개의' 민족과는 결코 결부되어 있지 않다. 이 원칙은 특히 서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서구 문화에 해당된다. '독일 문화'라는 개념은 슈펭글러에게는 비개념어Unbegriff일 것이다. 문명은 문화의 필연적이고 미룰 수 없는 최종 단계다. 〈목표에 도달하여, 내적 가능성들, 즉 이념이 모두 풍족하게 피어나서 완성된 다음, 외부를 향해 실현되면, 문화는 갑자기 굳어버리고 죽어가며, 문화의 피가 응고되고 그 기력이 쇠하게 된다. 즉 문화는 문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와 '문명'의 대립은 계속해서 주제화되고, '삶'-'죽음', '외적인'-'내적인', '영혼이 담긴'-'영혼이 없는', '유기적인'-'기계적인' 등 무수한 개념쌍들 속에서 달리 설명된다."(188-9)


10. 전망 : 1945년 이래의 문화의 호황


"제2차 세계대전의 물질적 결과는 유럽이 제2급 세력으로 하강한 것이었다. 진보하는 것으로 믿어지던 인류 발전의 최첨단에 서 있다는 확신 그리고 자신의 문화 내지 문명을 전 세계에 전파시킬 수 있다는 희망은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다. 회의와 비판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모든 언어에서의 온갖 부정적인 측면들이 점점 더 문명 개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반면, 문화 개념은 정신적인 것과의 밀접한 연관 덕분에 근본적으로 '하나의 이상'이라는 특징을 유지하거나 이제야 비로소 획득했다. 또 언급해야 할 요소가 하나 있는데, 단지 겉보기에만 위와 같은 사실과 유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영어의 영향을 받아 '문화'가 인간 활동의 모든 형식들과 그 활동의 결과물들을 지칭하는 학술 개념으로 점점 더 강하게 관철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문명'은 점점 더, 고도로 발달된 특수한 한 문화에 대해서만, 자주 현대 서양 문화에 대해서만 사용된다."(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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