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 문명과 문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외르크 피쉬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안삼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 서론


2. 그리스 : 문화 개념이 없는 문화


"고대 그리스에서 문화 개념과 가장 근접한 말은 '교육(Paideia, Erziehung)'과 '교양(Paideusis, Bildung)'이다. 이 두 표현은 '아이Pais, Kind'의 파생어인데, 물론 그렇다고 아동 교육에만 한정되어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이 두 표현은 아주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교양을 위해 사용되고, 따라서 그 결과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말은 이미 데모크리토스에 의해서 자질 또는 교양인의 자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교양Paideia은 행복한 자들의 장신구이며, 불행한 자들의 피난처다.〉 여기서 'Paideia'라는 말은 항상 교양의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고전적 교양 이상의 신봉자들은 19세기 및 20세기에 충분한 전거도 없이 'Paideia'를 문화 그 자체로 양식화했다. 특히 베르너 예거가 그런 부류다. 그는 '교양'과 '문화'를 동일시했고, 이런 의미에서 문화 의식, 즉 문화에 대한 의식적 관념을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최고의 핵심적 가치로 보았으며, 이런 문화 의식을 그리스인들한테서 발견했다."(21)


3. 로마 : 문화 개념의 기초들


"출발점으로서 'cultus'와 'cultura'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밭의 경작cultura agri'이나 '밭을 일구는 일cultus agrorum'과 같은 농업적 의미, 즉 '돌봄'과 '밭의 경작'이다. 여기에는 '가축을 돌보는 것'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자연으로부터 얻어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세 영역으로의 의미 변전이 이루어진다. 우선 '돌봄'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데, 교육이나 존경의 의미 또는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의미로 쓰이게 된다. 즉 의복이나 장신구로부터 개인적 능력이나 성격의 훈련까지도 의미하게 되었다." "'마음의 닦음cultura animi'이 지칭하는 두 번째 의미 변전 영역은 추상적 영역으로 능력, 학문, 예술 등을 장려하는 영역이다." "세 번째의 의미 전이 영역들은 초자연적인 일, 종교 그리고 신과 우상, 하느님과 악령들 등에 대한 경배다. 'cultura'는 특히 고대 말기에 이런 의미로 나타나곤 했다."(28-30)


"원래의 농업적 의미에서 볼 때 'cultus/cultura'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인간은 이것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것이 삶에 필요불가결하지 않은 영역들을 포괄해감에 따라, 즉 따라 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유리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게 됨에 따라 가치 판단상의 명백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문화 비판이 생겨났다. 문화가 난숙한 문화로 변화하고, 사람들은 이 난숙한 문화로부터 벗어나 참된 문화를 보여주는 좀 더 원초적인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가령 수사학 무용론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수사학이란 (처음부터 자연에 의해서 주어진 것, 혹은 예전의 것만이 자연적인 것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생존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큰 위험성을 무릅쓰지 않고도 이 수사학을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33-4)


"문명 개념의 경우 사정이 문화 개념에서와는 전혀 다르다. 고대 라틴어에는 'cultus'와 'cultura'처럼 후대의 의미들이 한데 묶일 수 있는 단어도 없고, 어떤 상응어도 없다. 출발점은 시민이란 의미의 'civis'이며, 여기서부터 형용사 'civilis'가 파생된다. 발음상의 기저基底로 볼 때 이것과 그나마 가장 가까이 비교될 수 있는 명사는 'civilitas'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 어원의 영역, 즉 도시와 시민계급의 주변 영역에 국한된다." "그러나 'civilis'와 'civilitas'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얻는데, 특히 고대 말기에서 문명화된 삶과 문명화된 습속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대체적으로, 문화가 아주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는 영역에서는 'civilis'와 'civilitas'의 중요성과 사용 빈도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간과 관련되는 활동 영역으로부터 자연을 향한 행위 영역으로 전이되는 것이 그 반대 방향의 전이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이 새로이 드러나고 있다."(37-8)


4. 중세


"'cultura'는 아퀴나스에게서는 농경적 의미와 제의적 의미로 쓰이는 빈도수가 대략 같은 데 반해, 여타 저자들한테서는 제의적 의미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훨씬 더 자주 쓰이는 'cultus'는 모든 저자들의 제의적 의미로 쓰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가장 흔한 상투적 어구는 '신에 대한 경배cultus divinus'와 '하느님에 대한 경배cultus Dei'다." "좀 더 중요한 것은 제의적 의미가 인간, 특히 양친, 조국 그리고 산발적으로는 돌보고 닦아야 하는 덕성이나 학문에까지도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 'cultus'는 '존경'으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상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리하여 인간의 존경으로부터 신의 섬김에 이르기까지 경배에 관한 일종의 품계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층 강력하게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연관되었던 이 개념의 원래적 요소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문화가 어느 정도는 경배로 신앙화된 것이다."(47-8)


"'civilis'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시민적 상황〉은 자연을 벗어나게 만든다." "이런 양상들은 'civilitas'라는 명사에서 다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단지 드물게만 사용되는 명사이긴 하다. 이 단어는 보통 '도시', '시민', '시민권'을 가리키지만, 특히 한 도시의 '헌법', 즉 'Politia'를 의미한다." "'civilitas'는 이따금 도시나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의 올바른 삶 자체, 즉 '문명화된 삶zivilisiertes Leben'을 지칭하는 데까지 어의가 확장되기도 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가 들어서기 이전이라 할 수 있는 삶과 정치적 삶(즉 인간에게 적합한 유일한 삶으로 간주되는 공동체 안에서의 삶) 사이의 구별이다. 이렇게 해서 개념 안에서의 쳠예한 구분이 생겨난다. 야수적 또는 야만적인 인간들은 언제나 이미 공공성civilitas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만인들이 축출되는 것은 '문화cultura'로부터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civilitas'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52-4)


5. 16세기와 17세기에 볼 수 있는 현대적 문화 개념의 토대들


"중세 후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이 수용되면서 '공공성civitas'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나 16~17세기에 상황이 다시 역전된다. 고대의 뿌리를 재수용하면서 'cultus'와 특히 'cultura'는, 아직까지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자명한 개념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광범위하게 현대적 의미의 외연을 획득하게 된다. 이에 반해 'civilitas'는 점점 더 예절의 좁은 영역으로 축소된다. 'civilitas'의 정치적, 공동체적 요소들은─적어도 부분적으로는─'cultura'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문주의의 경우 처음에는 'civilitas'가 더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예절〉, 〈훌륭한 태도〉 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이 경우에도 물론 '도시국가civitas'가 배경을 이루고 있다. 즉 정말로 교양 있고 완성된 삶은 도시에서만, 도시적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은 주제가 되지 않고 그냥 전제가 된다. 이에 반해 야만적 삶과 대비되는 문명화된 삶이라는 의미는 계속 보존된다."(60-1)


"최초로 'cultura animi'를 핵심적인 개념으로 만든 사람은 베이컨Francis Bacon이었다. 1623년에 그는 이 개념을 윤리학의 두 주요 부분 중 하나로 설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윤리학을 근본적으로 두 부분의 가르침으로 나눈다. 하나는 선善의 예시 혹은 모범을 다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교육cultura animi 혹은 정신의 훈련에 대한 것인데, 우리가 종종 정신의 농사라고 부르곤 하는 분야다.〉" "'cultura animi'는 인성계발을 위한 포괄적인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를 모방한 관용구 '정신의 농사Georgica Animi'라는 말을 원용하여, 'cultura'의 농업적인 기본 의미를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즉 베이컨은─〈섬세한 교육culture〉이라고 표현한 몽테뉴와 비슷하게 그러나 몽테뉴보다 더 의식적으로─에라스무스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교육Erziehung'이라는 의미에서의 'civilitas' 대신에 'cultura' 혹은 'culture'를 사용한다."(68-9)


6. 18세기와 19세기 초 : 현대적 문화 및 문명 개념의 생성


"1760년대 이래로 '문화Kultur'라는 개념이 독일에서 폭넓게 확장되는 동시에 대중화되었고,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는 '문명civilisation'이라는 신조어가 동일한 기능들을 떠맡게 된다." "문화 개념은 가장 먼저 프랑스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농업적 의미는 자명하다. 그리고 18세기의 경과 중에 'culture'는─다른 언어들에서도─널리 퍼진 전문용어로 정착된다. 비유적인 영역에서는 '마음의 가꿈cultura animi'이라는 전통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와 연결되어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이미 나타난 바 있던 '교육', '교양'의 의미가 중심이 된다. 그것은 개인의 교양으로, 처음에는 집단과의 관련성은 대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빈번하게 사용되다 보니 가끔 목적어 없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루소는 〈교육은 가꿈culture에 비례하여 ······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를 만든다〉고 쓰고 있다. 다음 단계에 이루어진 중요한 진전은 개인적인 개념을 특정 집단, 제 민족들, 심지어는 인류에까지로 확장해 나간 것이다."(80-1)


독일에서 역사철학적 체계 진술의 한 기능으로 사용된 '문화' 개념은 "단순히 인간의 문화 업적들을 포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문화 업적들을 시간적 시각Perspektive 안에 세워 놓는다. 그리고 이 시간적 시각 안에서 이 개념의 대상은 비로소 그 고유한 의미를 얻게 된다. 이러한 기능들을 충족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개념이 새로운 강조점을 부여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초이자 가장 중요하게 이루어져야 할 확장은 개인에서 집단으로, 제 민족으로 그리고 인류로의 확장이다. 그 다음에는 농업, 교육, 학문들과 같은 개별적인 능력이나 영역들로부터 인간의 모든 생산물들로의 이행이 필요하다. 가장 많이 주춤하면서 이루어진 세 번째 단계는 인간 혹은 그 환경의 교양화라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그 결과물에 이르는 이행이었다. 여기서 결과물은 우선 교양화된 인간을 그리고 결국에는 문화 생산물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84-5)


"헤르더가 생각하기에, (정신문화와 교양이라는 의미를 넘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문화는 일차적으로 한 민족의 문화다. 이를 통해 역사화가 가능해진다. 한 민족의 역사는 동시에 그 민족의 문화의 역사이기도 하다."(87) "헤르더는 양가적인 유산을 남겼다. 한 민족의 문화, 즉 국민문화는 헤르더로 인해 핵심적인 가치가 되었다. 그는 이러한 국민문화를 자신의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우월한 가치를 가진다는 식의 민족주의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다. 헤르더는 그의 관심이 세계사 속에서의 다양한 문화들의 운동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세계시민Kosmopolit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개별 민족들의 문화로 인해 이 개념을 민족주의적으로 징발하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마련되었다. 다만 '국민문화'와 '문화민족주의'를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화민족주의는 국민문화가 배타적이 될 경우에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93)


"피히테의 경우 의문의 여지없이 긍정적인 개념을 좀 더 상세하게 규정하는 것만이 문제였다면 실러에게서는 루소와 칸트에 연이어 '문화'가 부정적인 측면들도 얻게 된다. 문화는 인간을 자연상태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데, 이 자연상태란 긍정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인간이 그 상태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문화의 압박과 문화의 해악〉이 운위되기에 이른다. 대립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정치적 영역이다. 〈자유와 문화는 최고로 충만한 상태에서 서로 뗄 수 없게 하나가 되고 또 이 합일을 통해서만 최고의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성 과정에서는 그 둘이 서로 결합되기 어렵다. ······ 계몽되고 도덕화되었으며 동시에 예속화되지 않은 나라들은 오직 유럽에만 존재한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곳에서는 자유로운 경우에는 야만적이고, 문화가 있는 경우에는 예속된 채 살고 있다.〉" "이로써 문화는 역사의 구체적인 과정 속에서 양가적인 성격을 얻게 된다."(100-1)


"중요한 것은 민족들 혹은 인류에 대한 '문명'과의 관련성이다. 물론 문명의 과정은 개인을 포함하지만, 그 상관계수는 '문화'의 경우와는 달리 거의 언제나 집단이다. 한 개인의 문명화라는 주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결정적인 것은 진보와 도덕의 이원론이다. '문명'은 운동, 변화, 분화를 의미한다." "1760년대에는 비교적 소수의 저자들만이 새로운 개념을 사용했다. 반면 1770년대 초반에는 '백과전서파' 안에 이 새로운 개념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외적인 문명의 진보와, 도덕과 미덕 영역에서 있을 수 있는 후퇴를 구분한 미라보에게서는 문명이 역사철학적으로도 야만과 퇴폐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점차 진보의 낙관주의에다 길을 비켜주게 되었다. 여기서는 문명의 진보와 무제한적인 인류의 진보가 일치하고, 도덕은 별도로 주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문명은 점점 더 일종의 역사 발전의 지표가 된다."(105-7)


7. 일반사전과 언어사전에서의 '문화'와 '문명'


8. 19세기 : 한 시대의 자의식의 표현으로서의 두 개념


"등급을 매기고 분류를 하는 것은 진보 모델과, 모든 민족의 문명의 단계를 한 가지 척도로 잴 수 있다는 비교 가능 원칙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이런 논의들의 결과는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모든 민족에게 문명으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몇몇 민족들은 특히 인종적 특수성 때문에 문명을 이룰 수 없다는 견해가 계속해서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주변적인 현상에 머물렀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 모델을 통해서 비로소, 다른 종류의 문화 내지 문명을 가진 민족들이 문화와 문명에 있어서 미달된 민족들로 되어버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도 자명한 토대로 보이던 그런 종류의 진보의 단계 속에서 이 두 개념이 유럽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측면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문화와 문명은 세계 속에서 유럽의 지도적 위치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다. 이는 대개 그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었고, 따라서 지리적 위치를 통해 이미 논증된 것으로 보였다."(156-8)


"독일어에서 '문명'이 '문화'에 대한 동의어로 쓰였던 것에 비해, 프랑스어의 '문화'는 '문명'에 대한 동의어로 쓰이는 정도가 독일어보다 훨씬 약했다. 프랑스어에서 문화의 무게중심은 정신적·학문적 영역에 놓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문화는 언제나 '문명'보다 협소한 의미를 지녔다. 처음에 문화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개인적 교양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때부터 18세기 독일어에서와 비슷하게 점점 역사의 과정 속으로 삽입된 집단적이고 과정적인 함의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독일어 어법과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프랑스어에서 민족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더 일찍 그리고 더 뚜렷하게 관철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프랑수아 기조가 〈프랑스는 유럽 문명의 중심, 발상지였다〉라고 기준을 제시했다. 프랑스 문명은 〈가장 완전하고 가장 진정하고 가장 문명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문명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배타적이지 않고, 유럽 공동의 요소들과 연결되어 있었다."(174-6)


"19세기 초엽에 '문명'은 영국과 미국에서도 일상적인 개념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보편적인 인기를 누렸다. '문화'는 문명과 더불어 프랑스어에서보다 더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독일어와 반대로 개인적인 교양과 관련된 측면이 중심을 차지했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프랑스처럼 '문명'이 그 세기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성장했다. 독일어와 비슷하게 영국에서는 부분적으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문명'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다." "1869년에 매튜 아놀드는 〈문화란 우리의 총체적인 완성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현재의 난국에서 벗어나는 데 크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문화를 추천〉하고자 한다. 〈완성을 정신과 영혼의 내면적인 상태로 간주하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문명과 다르다.〉 여기서도 구별은 일반적인 어법까지 퍼지지 않았지만, 그러한 구별이 근대 경제와 기술의 결과에 대해 가해진, 전 유럽에 퍼진 비판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것이다."(177-8)


9. 양차 세계대전의 시기 : 서구의 몰락


"양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내전이라는 것과 유럽 몰락의 시작을 알리고 그 사실을 확정지었다는 점은 '문화'와 '문명'의 개념사에도 반영된다." "'문화'와 '문명' 개념이 19세기에 담지해 왔던 유럽적 자의식은 늦어도 1918년 이래로는 깨어졌다. 진보의 위기는 문화와 문명의 위기로 이어졌다. 물질적 발전과 경제 그리고 기술의 긍정적 결과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 두 개념들은 이제 자의식보다는 한 시대의 자기회의를 구현하게 되었다. 독일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문화'와 '문명'의 대립을 형성해냄으로써 이 위기의 언어적 극복을 위해 가장 큰 준비 작업을 수행했다. 이러한 준비 작업은 두 개념 중 하나에서 부정적인 요소들을 거의 없애는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다른 언어들도 매우 더디기는 했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때 '문화'가─세계전쟁의 선전에도 불구하고─부담이 적은 개념으로 드러났는데, 왜냐하면 문화는 언제나 정신적인 영역에 더 많이 관계되었기 때문이다."(184-5)


"1918년에 나온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문화'-'문명'의 대립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이 저작만큼 세계대전 선전의 에피소드적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슈펭글러는 진보와 작별을 고하고, 문화 내지 문명의 유럽적 사명과도 작별을 고한다. 문화는 '일개의' 민족과는 결코 결부되어 있지 않다. 이 원칙은 특히 서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서구 문화에 해당된다. '독일 문화'라는 개념은 슈펭글러에게는 비개념어Unbegriff일 것이다. 문명은 문화의 필연적이고 미룰 수 없는 최종 단계다. 〈목표에 도달하여, 내적 가능성들, 즉 이념이 모두 풍족하게 피어나서 완성된 다음, 외부를 향해 실현되면, 문화는 갑자기 굳어버리고 죽어가며, 문화의 피가 응고되고 그 기력이 쇠하게 된다. 즉 문화는 문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와 '문명'의 대립은 계속해서 주제화되고, '삶'-'죽음', '외적인'-'내적인', '영혼이 담긴'-'영혼이 없는', '유기적인'-'기계적인' 등 무수한 개념쌍들 속에서 달리 설명된다."(188-9)


10. 전망 : 1945년 이래의 문화의 호황


"제2차 세계대전의 물질적 결과는 유럽이 제2급 세력으로 하강한 것이었다. 진보하는 것으로 믿어지던 인류 발전의 최첨단에 서 있다는 확신 그리고 자신의 문화 내지 문명을 전 세계에 전파시킬 수 있다는 희망은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다. 회의와 비판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모든 언어에서의 온갖 부정적인 측면들이 점점 더 문명 개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반면, 문화 개념은 정신적인 것과의 밀접한 연관 덕분에 근본적으로 '하나의 이상'이라는 특징을 유지하거나 이제야 비로소 획득했다. 또 언급해야 할 요소가 하나 있는데, 단지 겉보기에만 위와 같은 사실과 유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영어의 영향을 받아 '문화'가 인간 활동의 모든 형식들과 그 활동의 결과물들을 지칭하는 학술 개념으로 점점 더 강하게 관철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문명'은 점점 더, 고도로 발달된 특수한 한 문화에 대해서만, 자주 현대 서양 문화에 대해서만 사용된다."(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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