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2 - 혁명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2
라인하르트 코젤렉.오토 브루너.베르너 콘체 엮음,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한운석 옮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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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서론


"혁명 개념은 근대적인 것이다. 중세 말 이후 이 말은 처음에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이어 서유럽에서 정치적인 언어로 유통된다. 오늘날 이해되고 사용되는 개념은 엄격히 말해서 프랑스혁명 이후 일상화되었다." "분석적으로 볼 때 근대적인 혁명 개념은 필연적으로 공동 줄기에 속하는 것은 아닌, 적어도 두 개의 경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 개념은 내전으로 상승할 수 있고, 헌법의 변경을 초래하는 봉기에서 표출되는 폭력적 소요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개념은 과거로부터 미래에까지 이르는 장기적인 구조 변동을 함축한다. 그럴 경우 이 개념은 '영구혁명'에서와 같이 '과정'과 '발전'에 접근한다." "두 개의 의미 영역은 개별적으로 이용될 수 있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두 영역이 동일한 혁명 개념 속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보통이다. 역사적 양상은 정치적 목적을 설명하고 거꾸로 정치적 목적 설정을 통해 역사적 차원이 설명된다. 개념은 인식을 이끄는 동시에 행동을 안내한다."(12-3)


2. 고대에서의 '혁명'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혁명〉 이전에 보통 모든 생활관계들이 뿌리째 흔들린 장기간의 시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흔히 잔인한 분노들의 표출로 나타났다. 그것은 그러나 광범위한 계층의 경제적 공고화 이후에야 가능했다. 그것은 그 후 적어도 아테네에서 그리고 아마도 많은 다른 장소들에서도 비교적 〈비혁명적〉 방식으로 완수되었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민집회를 갖고 있었거나 옛 전범에 따라 혹은 이웃 도시들의 예를 따라 그것을 쉽게 재건할 수 있었다." "이 전통적인 〈명목적normistisch〉 지평에서는 헌법 변경을 위한 많은 인민들의 결정들은 지금까지 지배계층에게는 금시초문이고 모든 전통에 모순되고 거의 혁명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당하다. 이 과정과의 연관 속에서 소요와 폭력은, 아무튼 아테네에서는, 과거의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민주주의로의 운동은 점차 변형되는 기존 법률의 지평 속에서 장기간에 걸쳐 수행되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23)


"특히 작고 불안정한 폴리스에서는 통상적인 것과 예외적인 것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존재했다. 거기에는 〈중간층〉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소수〉의 〈재산가들〉이 하층민들에게서 시민권을 빼앗거나 크게 제한함으로써 그들의 공통 이익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민주주의는 모든 자유로운 공동체 구성원들의 제약받지 않는 시민권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능동적 시민권 문제가 그렇게 중심적이 됨으로써만 과두정과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대립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양 헌법은 여러 가지로 당파적이었다. 이에 따라 시민이든 과두정이든 그 공통의 중요한 이해관계는 헌법 전복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헌법과 당파의 역량은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현대에는 헌법 내에서 가능한 것이 당시에는 헌법 교체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이 전환이 매우 빈번했다. 그것은 불분명한 경계를 형성했지만 경계는 정치적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25)


"고대에는 잠재적인 혁명적 에너지의 정체停滯도, 그것의 폭발도 없었다. 고대에는 커다란 영토의 정치적 단위와 정치권력과 정당성의 집중이라는 의미를 가진 국가도 없었고, 그것이 약한 시기에도 군주국으로 하여금 사회에 대해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만드는 내외적 규율화도 없었다. 이에 따라 자신의 사상, 곧 구체제에 대한 포괄적인 대안을 사상 속에 구축하기 위한 단초와 보장을 자체 내에 충분히 갖고 있는, 정치로부터 압박을 받는 사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목할 만한 국가의 〈낙차〉, 곧 개별적인 입장들 사이의 폭넓은 차이들은 형성될 수 없었다." "그들의 정치사회적 현실은 훨씬 더 긴밀하고 더 닫혀 있었으며 그들의 개념들은 덜 추상적이었고, 그들은 그들 공동체 전체를 대표성이라는 추상적 형식에서가 아니라 시민적 혹은 귀족적 정체성에서 찾았다. 이렇게 그들의 정치에는 사회변동을 계획하는 계기가 빠져있었다. 그들은 자신과의 거리두기가 부족해서 자기변혁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26-7)


"그리스인들에게 없었던 것은 로마인들에겐 더욱 없었다. 귀족들과 평민들 사이의 신분 투쟁은 그리스인들처럼 동시적인 위기와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 〈원로원과 민중들의 투쟁들〉은 불규칙적인 일이었으며, 정확히 다른 방식으로는 원로원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강력한 적들을 무너뜨리고 죽음으로 몰아간 유혈적 폭력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전복이 아니었다. 원로원 반대파의 목적도 결코 혁명적이 아니었다." "여기서 어떤 새로운 계층도 전면으로 부상하지 않았으며, 한 질서가 해체되었고, 구질서가 오랜 내란에서 탈진했을 때 군주정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 "로마는 시민성이 강하게 각인되어 있지 않았으며 아테네처럼 강한 시민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 권리의 모든 실질적 분화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은 대표성이 아니라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리스에서보다 혁명적 잠재력이 덜 축적될 수 있었다."(29-31)


3. 중세


"중세에는 근대의 혁명 개념에 상응하는 개념이 이 명칭하에서건 다른 명칭하에서건 없었다." "여기서 '혁명'이라는 말의 역사와 후에 그로써 파악된 사안의 역사가 구분되어야 한다. 사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중심적이다. 1) 적어도 권력 관계의 부분적인 전복을 목표로 하는, 법적으로는 동등한 자격을 갖지 않은 당파들 사이의 불법적인 혹은 일반적으로 합법적이라고 이해되지 않는 폭력 사용 : 봉기, 반란, 모반 등. 2) 단 한 번의 행위에서건 보다 장기적인 과정에서건 전체 정치사회적인 구조의 포괄적인 변혁. 첫 번째 형태는 중세에 빈번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표현들에 의해 포착되는 반면, 두 번째 형태의 개념사적 포착은 상응하는 사상이나 요구들이 개념적으로 전혀 명료화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초래한다. 여기서 '개혁reformatio'과 '혁신renovatio'이라는 용어가 가장 중요하다. 포괄적인 변혁은 근대적인 혁명 개념의 특수성 중 하나이다."(42-3)


"(모반, 봉기, 반란 같은) 모든 종류의 폭력적 봉기들이 중세에 널리 퍼져있었다." "이것들과 전쟁과의 구분 기준은 폭력 사용의 합법성이나 불법성에 있지 않고, 당파들 사이의 법적 관계에 있다. 전쟁은 법적으로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반면에 봉기 등은 법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맞서 수행된다." "범죄와의 구분도 유동적이다. 반란자들을 일상적인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흔히 법률에서 처벌 위협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적으로 우월한 쪽의 완전한 승리로 나타난다." "법적으로 종속된 사람만이 그의 상급자에 맞서 봉기하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지배세력으로부터 대립의 원인이 출발한다면 다른 용어가 사용된다. 군주의 '부당한 폭력', '폭정', '독재' 등. 명칭은 항상 가치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반란은 합법적인 군주에 맞서는 것이고 따라서 불법적이다." "편향성은 단지 나중에 첨어를 통해 상대화시키거나 전도될 수 있다."(46-7)


4. 근세 초부터 프랑스혁명까지


"루터는 〈정신적 봉기〉를 찬미했다. 그는 오직 선포만을 지지했다. 인간은 〈신의 성스러운 말씀에 감사해야 하며 이 영적인 봉기를 곧 말로써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실의 빛〉을 열어주며 어떤 당파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당파적인 이름을 지우고 기독교인이라 일컫자 ····· 교황파들은 기꺼이 하나의 당파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악마의 명부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이 정신적 폭동설은 평화적 선포를 목표로 하며 루터에 의해─그의 두 나라 이론에 따라─세속적인 정부에 대한 물리적 폭동으로부터 엄격히 분리된다. 세속적인 지상에서의 모반은 개선시키기보다는 점점 더 많은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폭동은 아무런 합리적 사고도 갖고 있지 않고, 죄 지은 사람보다 죄 없는 사람에게 더 큰 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것이 항상 올바른 측면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폭동도 정당하지 않으며 항상 개선보다는 손해가 더 많이 발생한다.〉"(86-7)


"보댕은 권력의 필연적 독점론을 관철하였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는다면, 결코 국가는 폭도들과 싸움을 좋아하는 시민들에 의해서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국가들은 결코 소요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왕들은 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전bellum civile'이라는 표현은 보댕에서 홉스까지 종교적 경계를 넘어서 순수하게 정치적인 해결책을 추구했던 정치이론가들이 선호했는데, 이는 의미론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두 사람은 내전이 국가를 통해 극복되어야 할 가장 큰 해악이라고 보았다." "국가라는 대안을 고려하여 전체 사회가 숙명적으로 몰락하는 경우가 아니면 내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역사적 목표 설정이 거부된다. 평화가 내전보다 더 낫다는 키케로로부터 재삼재사 인용된 문구인 〈내게는 시민들 사이의 어떤 평화든지 내전보다 낫다〉는 그로티우스의 말은 내전에는 뒷날 혁명에 부여되었던 어떤 역사적 목표도 설정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92-4)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순환에 대한 6권의 서적》에서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것과 항성으로 격상된 지구의 순환운동을 표시하고, 지구가 그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7세기에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들에 관계된 보다 좁은 혁명 개념이 관철되었다. 그것은 지배권의 교체, 정치적 암살 혹은 다른 현저한 사건들, 봉기나 내란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이 큰 행위들을 가리킬 수 있다. 이 연관 속에서 그 개념은 항성의 순환과 그 필연성에 대한 유추적 서사로부터 벗어나 정치적·역사학적 언어의 경험적 개념으로 되며 흔히 제목에 등장하고 대부분 복수로 사용된다. 새로운 용법에서 결정적인 것은 혁명들이 연대기적 순서 속에서 생각되어지고, 그 회귀가 필연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은 이제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고 그곳으로 안내하는 전환점을 표시한다."(121-2)


"'명예혁명'으로 일컬어진 1688년의 헌법 변동과 더불어 우선 영국사를 위한 일회성, 곧 합법칙성 그리고─〈비자연적인 내전〉과는 반대로─사건의 비폭력성과 동시에 혁명이 일어난 필연성을 강조한 개념의 특이화Singularisierung가 시작되었다." "특히 단수 개념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 1688년의 혁명은 결코 내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상을 선취했다." "1688년의 혁명은 18세기 중엽부터 확산되어간 역사철학적인 개념 발전에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것은 계몽사상의 명제들을 실현하기 시작했으며,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실현하게 될 정신과 여론의 자유로운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달랑베르의 말을 따르면 〈빠름으로 인하여 더 많은 것을 약속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변화〉였다." "계몽사상가들이 경제와 헌법 영역에서 구체제 말기의 수많은 개혁 시도들에 부여한 낙관적 의미가 이 언어 사용에 연결된다. 개혁들은 거의 항상 '혁명'으로 분류되었다."(123-4)


"1770년 이후에는 필요한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 비상시에는 내전도 불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메르시에는 1770년에 〈많은 국가들에게 그것은 불가피한 시대이며, 가공할 시대이며 유혈적이지만 자유의 징표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전이다〉라고 말했다. 이 시기는 모든 혁명들 중 가장 행복한 시기이고, 지금까지 감추어진 계몽적 인물들은 이제 지도적인 역할을 행하리라는 것이다. 이 개념에 경험적인 뒷받침을 제공한 것은 미국의 독립전쟁이었다. 그것은 곧바로 자연적 인권의 이름으로 이제는 독재의 폭력적 전복도 정당화한 '혁명'으로 환영받았다. 디드로와 레이날의 말을 빌리면 〈탄압이 반란을 불러일으킬 구원의 운동〉인 것이며, 〈하루 아침에 새로운 세기에 들어온〉것이다. 진보적 미래 개념으로서 '혁명'은 내전을 자유로 가는 길목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로 간주하도록 했다. 이 역사적으로 입증된 기대 개념을 가지고 다가오는 프랑스혁명을 위한 성향이 표현되었다."(124-5)


"'혁명'이 얼마나 특별히 미래 개념으로 되었는지는 다가오는 변혁을 필연적이고 도덕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예견한 수많은 진단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의 비판이 정치체제를 넘어 전 역사로 향하였던 루소는 1762년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들은 지금의 질서를 신뢰한다. 그들은 이 질서가 불가피한 혁명의 주제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아이들이 부딪힐 것을 예견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루소에게서 혁명 개념은 '위기'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선동적이고 인류학적이고 도덕적으로 뒷받침된 종말론적 차원을 획득하였다. 그의 적보다 더 차분하였던 디드로는 다가오는 혁명을 노예제와 무정부 상태, 공포와 자유의 변증법적 산물로 예견했다. 그는 고대의 순환 및 독재론을 빌려서 자유에 도취한 인민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굴복할 위대한 인간의 독재를 결과적으로 예언한다. 그러나 디드로가 도출하는 문제는 현대적이며 그것은 열려있는 미래를 가리킨다."(126-7)


5. 프랑스혁명과 당시 독일의 수용


"프랑스혁명이 급진화되고 당의 분열, 의심과 추적, 테러와 독재, 계몽되지 못한 대중의 전제주의, 전체적으로 유혈 내전의 형태와 결합되면서 (독일에서) 다수의 동의는 사라져버렸다." "새로운 혁명 개념은 곧 내전의 전통적인 교훈을 받아들였다. 가브는 〈모든 경험에 의하면 내전이 국가 간 전쟁보다 잔혹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혁명 과정에서 단순히 당쟁의 결과로 생기는 열정 역시 모든 선한 것을 ·····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격앙된 성격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단 전쟁이 국가 내부에서 발생하면, 그 진행과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정의가 아니라 성공이 결정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무질서의 해악을 통해서 잘못된 질서의 해악과 맞서싸우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고도 했다. 그렇게 혁명의 경과가 내전과 수렴되었는데, 이에 힘입어서 빌란트는 고전 역사에 근거해 쿠데타 일 년 전 보나파르트의 독재를 예견할 수 있었다."(138-9)


"에드먼드 버크가 수립한 프랑스혁명 비판의 핵심은 인민지배로 추정되는 것을 향해 있다. 버크는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모든 정치적 괴물 중에서 가장 파렴치한 것〉을 감지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개개인의 모든 책임을 익명의 보편성에 떠넘기고 그럼으로써 파국을 잉태한 안일함이 번식토록 오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혁명'은 모든 낯선 경험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당파 선택을 강요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 개념은 계몽시대의 일반적인 지지를 상실했다. 이론적인 전제들과 그에 상응하여 여과된 경험에 따라 진영들은, 이념형으로 말하자면, 일관된 민주주의자, 헌법주의자, 그리고 경향적으로 보수주의에 더 가까운 정치적 실용주의자로 나뉘었다. 이들 모두에게 '혁명'은 다양한 의미가 내장된 당파 개념이 되었지만, 이것은 프랑스혁명의 핵심이 더 이상 '폭동'이나 '반역' 같은 전통적인 범주들로 파악될 수 없는 비상한 사건이라는 공통된 인식에 기초해 있었다."(144-5)


"행동주의적 혁명가들에게 혁명 개념은 구원의 기대와 이를 행동으로 실현하려는 전체적 요구의 결합이었다. 〈혁명은 범죄의 지배가 정의의 지배로 넘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명 의식의 주문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세계 혁명의 절반은 이미 수행되었다. 나머지 절반을 완수해야 한다〉라고 로베스피에르는 외쳤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와 같다는 자연의 비유─한 반구는 여전히 암흑 속에 잠겨 있지만, 다른 쪽 반구는 이미 빛 속에 있다─를 덧붙였다. 어쨌든 혁명 개념은 미래에도 확장되어서 그의 실현에 대한 기대감을 일깨웠다. 반쪽짜리 혁명에 만족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생쥐스트는 말했다. 수많은 재앙과 점점 더 빠르게 다가오는 세계의 종말과 결합되어 있었던 이전의 기독교 구원의 기대가 이제는 진보적으로 변형되어 재등장했다." "일단 혁명의 역사적 유일성이 의식화되면, 그로부터 공정한 행동으로의 정당화가 뒤따랐다."(152-4)


6. 역사철학적 관점 속 '혁명'과 그 반대 개념들


"헤겔은 〈세계사가 영원한 이성의 산물이고 이성이 그의 대혁명들을 규정했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혁명을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프랑스혁명을 로마 가톨릭 세계의 특별한 산물로 상대화했다. 바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자유주의 추상화야말로 그곳에서 지배하는 〈종교적 예속〉에 대한 반동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패한 도덕성, 국가 헌법과 입법 체제를 종교의 변화 없이 바꾸는 것, 즉 종교개혁 없이 혁명을 하는 것은 근대의 우행으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적 양심의 해방 없이, 곧 종교의 변화 없이는 어떤 정치적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독일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혁명은 앞서 있었던 종교개혁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불필요해졌고, 부분적으로는 보상을 받았다. 어쨌든 소위 게르만적 자유 원칙이 이후 독일을 실제 혁명들과 예상 혁명들의 (통시적) 서열에 끼워넣는 데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171-2)


"프랑스혁명을 지지자들이 기꺼이 세계사의 최종 결정으로 간주한 것은 프랑스혁명을 일회적이고 유일무이한 혁명으로서 경험한 일에 속했다. 토마스 페인도 그렇게 간주했고, 개념에 들어있는 귀환, 즉 천부 인권과 시민권의 복구는 반半종말론적 해석과 반半순환적 해석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러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혁명'은 그 후 '대위기'라는 개념에 가까워졌고, 구간에 따라 그와 교환 가능했다. 그러나 '혁명'은 동시에 이 개념의 다의성을 공유했다. '혁명'은 열려있는 미지의 미래로 이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기는 했지만 옛 어법을 따라서 반복될 수도 있었다. 즉 그것은 '사회적', '산업적', 혹은 '영구혁명'까지 되었다. 이로써 그것은 시간 경험을 정지시키는 변화와 변화 압력을 개념화시키기 위한 지속 범주로 승격되었다. '혁명'은 근대의 역사적 근본 운명으로서의 끊임없는 위기와 일치될 수 있을 만큼, 위기들의 합을 자신 안에 묶어내는 하나의 과정 개념이 되었다."(177-8)


"1789년 이래 계몽된 혁명에 대한 희망이 폭력적으로 침식됨으로써, 변화의 필연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평화 혁명과 혁명에 대한 이성적인 계획 가능성을 구하려는 반대 개념이 신속히 분리되어 나왔는데, 그것은 '진화'였다. 1792년에 헤르더가 썼듯이 〈내 좌우명은 사물의 지속적·자연적·이성적 진화이지 혁명이 아니다. 전자가 저지당하지 않고 계속되면, 이를 통해 후자를 가장 확실하게 예방하게 된다.〉 '진화'는 우선 계획 가능한 개혁이라는 의미에서 타동사적으로 사용되었고, 에어하르트 역시 1795년에 그렇게 사용했다. 모든 인민은 성숙해가면서 혁명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헌법들이 다양한 성숙도에 순응함으로써 본래의 혁명을 예방할 수도 있다····· 그런 국가에서는 다른 국가에서 혁명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지혜에 의해 촉발된 진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칸트는 〈국가가 때에 따라 스스로 개혁하고 혁명 대신에 진화를 시도하면서 좀 더 나은 것을 위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진보라고 보았다."(179)


"개혁을 통해 폭력적인 혁명을 예방하기 위해서 역사적 발전을 증거로 대는 것은 그 이후 역사철학적으로 조성된 위상학Topologie의 영역에 속했다. 바더는 모든 역사가 〈진화주의〉에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출발 전제로 삼았다. 이것이 개혁을 통해서 가속화되는 대신, 반동에 의해서 저지되고서야 비로소 그 부정적인 상응물, 즉 〈혁명주의〉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바더는 하르덴베르크처럼 〈혁명운동의 발생〉은 진화의 〈정지 혹은 저지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역사적 원리를 내세웠다. 그는 양극단, 즉 〈반혁명〉과 〈혁명주의〉에 반대했다. 〈진화주의〉는 역사적인 선제 명령이고, 〈혁명주의〉는 인간의 잘못에서 생긴다. 여기서 바더는 〈무산자〉보다 유산자에게 더 큰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지배자들이 단지 〈혁명적 반동의 자극물로〉 작용하는 반면,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반란이라는 성스러운 권리〉가 무산자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181-2)


"독일의 대다수 시민들이 그들의 개혁 요구가 아무리 급진적이었다고 해도 '진화'를 지지하고 '혁명'에 반대하도록 만든 것은 당연히 프랑스혁명의 역사를 통해 알려진 폭력적이고 테러적인 단계와 그에 뒤이은 보나파르트 독재였다. '진화'는 역사적 개념으로 한층 높은 기대 수준을 갖고 있었고, 포괄적인 연관관계 속에 장기적 혹은 단기적 변화를 보장했다. 혁명은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한 것으로 남았다. 마르크스 이론의 특징은 그가 '진화'와 '혁명'을 서로 반대되는 함의를 갖는 개념들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 단계상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전복 과정의 정점은 그들이 마지막 혁명이라고 예견했던 정치혁명이었다." "여기서 '진화'와 '혁명'은 반대 개념이 되기를 그만두었다. 오히려 경제적 발전이 필연적으로 혁명을 향해 움직여가면서, 이제까지 비상 상태로 여겨졌던 내전은 일상적인 계급투쟁의 정상 상태로 그 해석이 바뀌게 되었다."(184-5)


"서로 중첩되는 집단들을 지지했던 세 명의 대변자들이 거론될 수 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경제 발전의 법칙이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파국으로 절대 이끌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로 댔다. 〈자유주의 제도들은····· 파괴될 필요가 없고, 계속 발전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조직과 의욕적인 행동이 필요하지만 혁명적 독재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카우츠키도 똑같이 경제적 발전을 증거로 댔지만, 이러한 발전의 종말은 의사-종말론적으로 자본 권력과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대결정 투쟁〉과 다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카우츠키는 〈사회혁명〉과 현재 사회를 토대로 하는 〈사회개혁〉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개혁파와 가장 급진적이고 조롱조로 논쟁을 벌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순응을 통해서 〈혁명의 망치질, 즉 프롤레타리아를 통한 정치 권력의 장악〉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회개혁은 자기자신을 위해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86-8)


"무어하르트에 따르면, '반동'은 모든 새로운 것의 절멸을 목표로 하고 '근대' 자체에 대항한다. '반동주의'는 역사를 자신의 특권과 이해를 보장하기 위한 구실로만 사용하고 사회적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역행적인 혁명〉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의미론적 구조에서 보자면 혁명에게 보다 큰 정당화의 잠재력을 할당하는 지속적인 강제적 대안이 '반동'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진화와 개혁과 다르게 반동에는 일시적 가치서열 상에서 오직 몰락에만 바쳐질 수 있는 반발전적인, 반진보적인, 반민주적이고 반사회적인 힘이 지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되돌리려는〉 헛된 시도이고, 한 짧은 혁명 구호처럼 반동에 대항한 가차 없는 투쟁은 〈진보의 친구들의 의무〉가 된다. 혹은 프뢰벨이 1847년에 공개적으로 호소했듯이 〈혁명은 옳고 반동은 옳지 않다. 혁명은 합법적이고 반동은 불법이다. 혁명은 법적 의식과 법의 유효성에 있어서 법적 평등의 진보이기 때문이다.〉"(195-6)


"7월혁명 직후 '영구성 속의 혁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푈리츠는 〈혁명으로 인해 극도로 자극되고 증가된 모든 힘들의 계속적인 운동을 통해서 내적인 국가 생활 전체의 완전한 '부활'이 초래되도록 그것[혁명]을 말하자면 영구성 속에서 설명할 것이다〉라고 썼다." "하이네는 '혁명'이 끝나지 않은 한, 〈국가병〉과 〈고열〉이 지배한다고 함으로써, 의학적 위기의 비유로 표현을 바꾸었다. 중요한 것은 아직 열려져 있는, 장기적으로 작용하는 위기였다." "빌헬름 슐츠는 50년 전부터 시작된 변혁을 〈지금 벌써 완전히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가련할 정도로 피상적인 역사관〉이라고 말한다. 종교개혁은 유럽의 불화를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진정시키는 데 130년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사회운동이 〈더 넓은 공간〉에 걸쳐 있고 더 많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더 일찍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로써 구조적 유추가 새로이 '회귀'의 의미에서 등장했다."(198-9)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는 〈많든 적든 재산이 있는 모든 계급들을 지배층으로부터 몰아낼 때까지,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연대가 한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지배국가들에서·····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력이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집중될 정도로 진척될 때까지 혁명을 영구화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고 우리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장기적인 혁명 개념과 그 당시의 정치적 혁명 개념을 합쳤다. 〈정치혁명의 전투 구호는 영구혁명이어야 한다.〉 중심이 되었던 것은 정치혁명적 희망의 좌절을 앞으로 다가올 실현의 증거물로 해석할 것을 가르친 역사철학적 보상 개념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그의 분석에다 〈혁명의 실패!〉라는 표제를 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 굴복한 것은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 이전의 전통적인 추종자들이었다.〉 환상은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01)


"1848년 혁명이 좌절되고 난 후 1906년에 가서야 트로츠키가 '영구혁명'에 새로운 내용을 채웠다. 그는 첫째로 러시아와 같이 자본주의적으로 저발전된 나라에서는 마르크스가 이미 인정했듯이 헌법적이고 민주적인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혁명으로의 단절 없는 이행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함께 영구혁명의 시민적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집권하면, 프롤레타리아는 따라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테두리에 제한되어서는 안 되고 영구혁명의 전술을 전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1917년 4월에 집어든 테제이다. 트로츠기가 산업후진국에서 도출한 자신의 모델들로부터 발전시킨 두 번째 테제는 우리 지구상의 식민적 종속 국가들에 대한 사회주의의 차용 가능성에 있었다. 사회주의는 언제나, 그러나 오직 지구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만 도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영구혁명은 세계혁명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205)


7. 전망


"전체적으로 혁명 개념은 모두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일종의 존재론적 지속 범주로 굳어진 특징을 보인다. 프랑스혁명 이래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던 모든 표현법들이 그렇듯이, 혁명을 〈보장할〉, 〈확정할〉, 〈추진할〉 필요가 있다거나, 그것을 〈위반〉, 〈희생〉,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을 서로 엄격히 구분했던 기준들은 혁명 진행의 단계설, 혁명 가속화의 계획 가능한 속도, 사회주의를 내전의 경로를 통해서라도 들여오려는 정치적 결단에 있었다."(235-6) "확실한 것은 '폭동', '전쟁', '내전', '혁명'의 개념 영역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내포하고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전쟁'과 '내전', 그리고 '내전'과 '혁명' 간 구분이 모호해진 이래로, 우리 지구상의 투쟁 형태들은 새로이 급진화되었다. 테러와 게릴라 투쟁은 부분적으로는 견제되고 부분적으로는 보호 아래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원자적인 위협으로부터 정치의 거의 정규적인 요소들로 탈바꿈했다."(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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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라인하르트 코젤렉.오토 브루너.베르너 콘체 엮음,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원석영 옮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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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고대 그리스어에서의 사용


"그리스어에서 '위기' 개념은 중요한 정치적 개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분열〉과 〈불화〉를 의미했다." "한편 '위기'라는 말은 확정판결과 유죄판결이라는 뜻의 〈결정〉도 의미했는데, 이 의미는 오늘날 '비판Kritik'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어에서는 동일한 개념이 나중에 분리된 〈주관적인〉 비판과 〈객관적인〉 위기라는 두 의미 영역을 담당한 셈이다." "법률상의 청구권으로서, 그리고 권리설정으로서의 '위기'는 시민공동체의 질서를 규정했다. 이 개념은 무엇보다도 권리를 창출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무게감을 획득한다. 이 개념은 선거를 통한 결정, 정부의 결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결정, 사형제도와 형벌의 결정, 해명에 대한 검토, 단적으로 말해서, 정부 정책에 대한 결정을 목표로 한다. 이 때문에 공동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모든 것에 대해 유익한 동시에 올바른 '위기'이다. 따라서 '위기'는 상황에 따라 내려지는 올바른 결정들을 거쳐 올바름과 통치질서를 조율하는 중요한 개념이었다."(16-7)


"기독교인들은 최후의 심판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시간과 장소와 날짜는 일려져 있지 않았지만, 최후의 심판에 대한 확신만은 분명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경건한 자들이건, 믿음이 없는 자들이건, 살아있는 자들이건 죽은 자들이건 말이다. 그 심판은 재판으로 이어진다. 요한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신의 말씀에 따른다면 이미 구원된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최후의 심판에 대한 확신 이상으로 나아갔다. 다가오는 위기Krisis가 우주적인 사건으로 남아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삶으로의 해방을 보장하는 은혜의 확신 속에서 선취된다. 신의 심판이 예수의 고지告知를 통해 이미 저기에 있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긴장 속에서 기대지평이, 즉 다가올 역사적인 순간을 신학적으로 특징짓는 기대지평이 그려진다. 묵시록은 믿음을 통해 선취되어 현재적인 것으로 겅혐된다. 위기가 우주적인 사건으로 아직은 미결인 상태로 남아있지만, 양심 속에서는 이미 실행된다."(18)


"법률 개념으로서의 위기 개념의 영향사史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신학적인 가르침을 통해서만 진행된 반면, 그리스어에서의 보다 광범위한 사용은 근대 위기 개념의 의미 지평을 적잖이 밝혀준다. 《히포크라테스 의학전서》에서 유래하고 갈렌에 의해 대략 1,500년 동안 고착된 의학적인 위기 이론이 그러하다. 병이 위기Krisis일 때는 관찰 가능한 증세뿐만 아니라 그 진행에 대한 판단, 즉 환자의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시기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 이때 병의 진행에서 규칙성을 진단하려면, 발병일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 위기Krise가 완치로 귀결되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사람들은 완전한 위기와 재발을 배제할 수 없는 불완전한 위기를 구분했다." "라틴어에 수용된 이 개념은 사회 정치 영역에서 은유적인 의미의 확장을 용인했다. 그것은 법률적 재판과 마찬가지로 결정으로 인도하는 과정의 개념이다. 그것은 결정이 예정되어 있지만 아직 내려지지 않은 기간을 의미했다."(18-9)


3. 각국어로 수용


4. 사전 분야


5. 정치학적 개념에서 역사철학적 개념으로 : 18세기와 프랑스혁명


"'위기Krise' 개념의 외교 군사적 사용에 대한 초기 증거들은 프리드리히 대제에게서 발견된다. 유럽 국가들이 1740년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전혀 대비하진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이를 결정하고 마음을 굳혔을 때, 왕은 〈그의 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위기〉를 슐레지엔으로 진입하는 계기로 삼았다." "'위기' 개념은 구체적인 내전 상태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내전 상태는 시민들의 충성심을 찢어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기' 개념이 사용되는 정치적 영역이 넓어졌다. 이 개념은 결정적인 시기로 몰아가는 외교 혹은 군사적 상황들을 특징지었으며 근본적인 체제 변화를 가리켰다. 이 경우 정치적 집단 행위와 헌법 시스템의 유지나 몰락이 대안을 이루지만, 단순한 정권 교체도 그렇게 표현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개념은 정치 혹은 군사적 행위를 진단하는 기준으로도, 또한 기술記述 범주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34-6)


"역사적인 시간과 관련된 위기 개념에 대한 의미론은 전형화된 4가지 가능성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1) 의학-정치-군사적 사용에 의거해서, '위기'는 결정적인 시점으로 향해가는 다양한 행위자들에 의한 사건의 연속을 의미할 수 있다. 2) 다가올 〈최후의 날〉이라는 약속에 의거하여, '위기'는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최종적인 역사적 결정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는 반복될 수 없다. 3) 신조어들은 이미 의학 혹은 신학적인 의미와는 많이 분리되었다. 지속 혹은 상태 범주로서의 '위기', 이는 과정, 즉 부단히 재생산되는 위험한 상황들이나 결정이 충만한 상황을 의미한다. 4) '위기'는 역사에 내재하는 과도기적인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이때 과도기가 더 나은 상태에 이르게 될지 아니면 더 나쁜 상태에 이르게 될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지속되게 될지는 진단에 달려 있다. 어떤 경우에든, 시대를 특징짓는 표현을 얻고자하는 시행착오적인 시도가 문제다. '위기'는 새로운 시대의 구조적인 징표이다."(39-40)


"루소는 '위기' 개념을 1762년에 처음 근대적인 의미로, 즉 역사철학적인 동시에 예측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는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뿐만 아니라 동적인 순환이론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방향성에 힘입어, '위기'는 새로운 개념이 된 듯하다. 《에밀》에서 주인과 종의 위상을 자연적 욕구를 지닌 인간임을 근거로 동일한 것으로 환원시킨 후, 루소는 시사적으로 이렇게 외친다. 〈사람들은 현재 존재하는 계급사회가 존속할 것이라고 덧없이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견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불가피한 혁명에 노출되어 있다. 유럽의 거대한 왕정들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다.〉 루소는 자신이 받아들인 지배 형태의 계승을 다루는 순환 모델에서 자신의 예측을 이끌어냈다. 왕들이 몰락한 후에, 사회 전반에 미치는 극단적인 변혁에 대한 비전이 나타난다. 〈우리는 위기 상황과 혁명의 시기에 다가가고 있다.〉" "반은 예언으로, 반은 예측으로 미래의 역사가 선취되었다."(40-1)


"미국의 독립운동과 함께 위기 개념은 시대의 경제 개념 차원을 획득한 동시에 세계사적인 최후의 결정을 고지했다. 이 때문에 토마스 페인은 '위기The Crisis'라는 표현을 자신의 잡지의 제목으로 선택했다. 그는 이 잡지에서 1776부터 1783년에 일어난 사건들에 도덕을 강제하는 도전을, 즉 덕과 부덕, 자연법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부패한 전제정치 사이에 필요한 도전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평했다. 〈이것들은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는 추세들이다.〉 그는, 젊은 루소로서, 자신의 비전이 구세계의 몰락과 새로운 세계의 등장과 함께 실현되었다는 것을 믿었다. 식민지의 붕괴는 그에게 단순히 정치·군사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사적인 심판이 실현된 것이었다. 독재의 몰락이자 생지옥에 대한 승리인 것이다." "이것이 개념사적으로 가능한 이유는 정치학적 위기 개념에 최후의 심판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많이 더해져서 역사철학적 시대 개념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43-4)


"버크 역시 같은 표현을 사용했지만, 페인이 주문呪文한 동일한 현상들을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데 사용했다. 그렇지만 위기 개념이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상황을 개념화하는 기능을 잃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나에게는 마치 내가 거대한 위기 속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 혹은 유럽을 넘어서는 거대한 위기 속에 놓여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모든 상황들을 고려해볼 때, 프랑스혁명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이다.〉" "'위기' 개념의 사용에 있어서, 진단과 예측적 기능은 페인과 버크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진단 내용과 기대와 관련해서 그 둘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버크는 의학적 기원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로, 페인은 신학적 기원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로, 세계사적인 대안들을 해석 내지 제시할 수 있는 '위기'의 새로운 의미론적 특성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그 개념은 공통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그러나 서로 대립적으로 적용된 투쟁 개념Kampfbegriff이 된다."(44-6)


6. '위기'와 위기들 : 19세기


"로렌츠 폰 슈타인은 1850년에 독일 관념론의 전제들을 가지고 역사를 체제 내재적으로 해석하면서, 유럽 역사가 〈두 개의 커다란 시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고대에는 소유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부자유가 동시에 지배적이었다. 게르만 왕국의 시대는 〈자유로운 직업과 자유로운 소유 사이의 반복된 투쟁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이러한 투쟁의 마지막 단계에 불과하다. 유럽에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고 유지될 수 없다는 느낌이 퍼지고 있다. 강력하고 두려운 운동들이 눈앞에 놓여있다. 그 누구도 이것들이 어디에 이를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미래의 한 개인에 불과한 그 누구도 실제로 그 구호를 제시할 권리가 없다.〉" "위기 개념은 생시몽에서처럼 전全 역사에서 도출되었고, 장기적으로 이 세기 모든 혁명들의 기초에 놓여있는 산업사회로의 과도기를 특징짓는다. 그럼에도 슈타인은 단지 두 가지 가능성만을 예측한다. 파멸 혹은 공정한 사회조직이 바로 그것이다."(60-1)


"유럽 정신의 위기를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격 속에 개념화하고자 하는 철학의 고삐들이 니체의 진단과 도발적인 대답 속에 모두 묶여 있다. 〈언젠가 나의 이름에 괴물의 기억이 붙여지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믿어온, 요구된, 신성시된 모든 것에 대항하여 불러내어진 지구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기와 가장 강렬한 양심의 알력과 결정에 대한 기억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이다. ····· 그러나 나의 진리는 두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사람들은 거짓을 진리라고 했다.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이 인류의 최고의 자각 행위에 대한 나의 공식인데, 그 행위는 나의 살과 천재성이 되었다.〉 도덕 혹은 형이상학 혹은 기독교로 포장되어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삶의 거짓이 드러나게 되면, 정치는 정신들의 전쟁이 될 것이다. 이 전쟁은 〈옛 사회의 모든 권력구조를 허공에 날려버릴 것이며, 지구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65)


"1840년대 이후 경제학적으로 채색된 위기 개념은 모든 사회 비판적인 글들에 스며든다. 당시에 모든 정치사회 진영들로부터 나온 그런 글들이 시장에 넘쳤다. 위기 개념은 헌법이나 계급에 의해 야기된 난관들과 산업과 기술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야기된 난관들을 총체적으로, 병이나 균형 장애의 증상으로,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데 적절했다." "무역 정치망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조건의 국제화는 새로운 종류의 위기에 속했다." "그러나 그동안 축적된 경험에 따르면, 모든 위기들은─그 모든 고난과 낙담에도 불구하고─역사철학적으로 과도기에 불과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위기Krise가 자유주의 낙관론자들에게는 진보라는 사다리의 디딤돌이 되었다." "사회주의 해석가들 역시 이 점에 동의한다. 위기에 대한 일상 경험의 비참함이 기대지평을 보다 더 많은 종말론적인 요소들로 채우더라도 말이다. 혁명의 기대와 경제학적인 분석 사이를 오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위기 개념이 이를 증언한다."(69-71)


7. 전망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기원전 1세기와 르네상스를 비교하면서 자기 소외와 냉소주의와 거짓 영웅주의와 흔들리는 확신, 수박 겉핥기식의 교육과 야만화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세기의 위기를 해석하고자 했다. 근대 인간의 종말은 대중의 봉기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에 반해 후이징가는 결정되지 않은 미래로의 길을 강조했다. 그는 〈그것이 어떤 상태이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위기Krisis가 진보적인,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의 한 단계라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이전에 우리의 위기 의식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다.〉 후설은 '위기'라는 주제를 역사철학적으로 확장했고, 〈유럽 학문의 위기〉를 점점 더 드러나는 〈유럽 인간성의 위기〉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했다. 이성의 계시를 따르는 그리스어 '목적Telos'은 데카르트 이후 주체-대상 간의 분리에 의해 점점 더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사실을 추구하는 학문과 일상 세계 간의 틈을 다시 메우려는 것이 현상학의 과제이다."(79)


"물론 이러한 종류의 시도는 이미 위기 개념이 지난 세기에 확장시킨 역사철학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위기'는 과도기로 해석되는 우리 시대의 새로움을 계속 입증해준다." "'위기'는 연관을 필요로 하듯이 연관을 지을 능력이 있으며, 의미를 추구하듯이 의미를 규정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그 말의 모든 사용을 특징짓는다. '위기'라는 말은 그 의미가 상대적으로 애매해서 격앙된 분위기나 문제 상황들을 에둘러 표현할 수 있듯이 '소요', '갈등', '혁명' 등과 교체 사용이 가능하다. 〈불명확하다는 것은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만약의 대안적 해석을 위해 내용의 진술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 개념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추월될 수 없고, 강력하고, 교체 불가능한 대안들을 제시하는 힘은 임의의 대안들의 불확실성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처럼 그 말의 사용 자체가 정확한 규정을 회피하는 역사적인 '위기'의 증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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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평전 - 고난의 길, 신념의 길
고명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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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가 김대중과 함께한 세월의 태반은 핍박과 죽음의 불길이 어른거리는 환난의 시간이었다. 그 시절 내내 신념과 의지를 지키고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준 것이 신앙이었다. (···) 이희호의 신앙 안에서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하나로 만났다. 사회의 고통을 외면하고 개인의 기복에만 매달리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었다. 이희호에게 신앙은 자유, 정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싸움의 보이지 않는, 최후의 무기였다. 이희호가 남편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하늘에 간구했던 것은 남편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하느님의 사업에 일꾼으로 동참하는 것이 남편이 할 일이었다. 그 신앙이 용기의 원천이었다. 김대중은 "용기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희호가 낸 용기야말로 '진리에 대한 헌신', 곧 이희호 자신이 믿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희호의 용기는 용서로도 나타났다. 자신의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이희호는 원수조차 용서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1977년 남편에게 쓴 편지에서 이희호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악은 악으로 이길 수 없고 선으로만 이긴다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이 알아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가르친 이런 사랑을 생각하고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것은 남편이 유신정권의 폭압에 저항하다 5년형을 받고 서울에서 가장 먼 진주교도소 독방에 갇혀 있을 때였다. 수난의 한가운데서 용서를 이야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희호는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남편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을 받은 직후에도 똑같이 기도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시옵소서." 

  이희호가 보여준 이 용서의 정신은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는 자리에서 했던 유언과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때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머지않아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공유한 용서는 신앙적 차원의 결단이고 신념이었다. pp.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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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2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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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은 20세기를 지나 새 천 년으로 이어졌지만 돌아보면 한줄기 섬광 같은 것이었다. 내가 꿈꾸었던 것들, 사랑한 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이름을 연호하던 군중들은 어디에 있고 나를 협박하고 욕하던 무리들은 또 어디에 있는 것인가. 거짓과 증오가 닳아 없어진 세상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고 싶다.


  나는 많이 흘러왔으니 곧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한반도 남쪽 바다 조그만 섬에서 태어나 지구촌을 떠돌았다. 온갖 무늬의 시간들이 주어졌지만, 위대한 신은 내게 용기와 지혜를 내려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일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을 내려 주셨다. 


  나는 민주주의, 정의, 평화, 민족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다. 중용의 철학 속에 일관된 인생을 살자고 늘 자신에게 다짐했다. 나는 내게 닥친 다섯 번 죽음의 고비, 6년 동안의 옥중 생활, 수십 년간의 감시와 연금, 망명 생활을 극복했다. 나는 모든 고난의 순간마다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음의 확인이었다. 그래도 어찌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내 고난에 동참하여 나를 일으켜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진정 고맙다.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목숨을 잃는 칼날 위에 섰고, 때로는 부귀영화의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매번 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돌아 보면 아득하지만 들춰 보면 격정의 순간들이었다.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역사의 심판이다. 우리들은 한때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수 있지만 역사를 속일 수는 없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pp.60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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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1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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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세상을 떠나신 지 1년이 가까워 옵니다. 우리 집은 당신이 살아 계시던 그때 그대로입니다. 올해에도 마당에 우리가 좋아하던 사피니아, 백일홍, 천일홍, 팬지꽃을 심었습니다. 당신이 저 아름다움을 보신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당신의 웃는 모습이 떠오르기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저려 옵니다.

  우리는 자주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정원을 바라보았지요. 우리 집을 찾아온 참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즐거움이었죠. 요새는 더 많은 참새들이 와서 모이를 먹고 있습니다.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면 당신 생각에 눈시울을 적십니다.


  당신이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실 때 "모든 것을 진실하게 기록하여 역사와 후손에게 바치겠다"고 하신 말이 떠오릅니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우리가 함께해 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뒤돌아보면 우리 앞에 그토록 험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진정 몰랐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로마서」에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할 바 아니다"라 했습니다. 이 성구같이 당신의 생애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극적이었습니다. 당신은 죽음의 고비를 몇 차례 넘기셨고 망명, 연금, 감옥 생활 등의 괴로움에도 신념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탄압하는 세력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용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당신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일했습니다.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나라를 정보화 강국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평생소원인 통일을 위해 남북 화해에 나서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으로 남북 공동 선언도 발표했습니다.

  이 나라를 민주, 자유, 평화의 꽃이 피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당신의 꿈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당신이 바라던 것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남과 북의 벽을 허물고 서로 하나가 되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힘쓸 것으로 믿습니다. 머지않아 당신이 바라는, 아니 우리 모두 바라는 통일의 그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행하며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 평화를 이룩해 나가도록 힘쓰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후손들이 반드시 이루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생은 고난이 가득했고 그 고난을 극복한 당신의 생애를 담은 자서전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이 수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존경하고 친구처럼 가까웠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폰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위해 좋은 글을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이 세상을 떠난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보낸 슬픔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 당신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어 주실 것이라 생각하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온 47년의 생애를 매일같이 떠올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내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헤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느님 품에 편안히 쉬시옵소서.

2010년 여름, 당신의 아내 이 희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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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05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